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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조의 「물불천론(物不遷論)」에서 물(物)의 이해

통융 2021. 6. 29.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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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조의 물불천론(物不遷論)에서 물()의 이해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과 현상학(現象學, phenomenology)으로 -

 

 

 



. 들어가는 말


. 물불천론(物不遷論)과 형이상학(形而上學,metaphysics)에서 물()의 이해


. 물불천론(物不遷論)
현상학(現象學,phenomenology)에서 물()의 이해


. 나가는 말




<참고자료>

 

 

 

 

 

 

. 서론

 

승조의 조론(肇論)에 나오는 물불천론(物不遷論)은 물()의 불천, 불거불래(不去不來)를 설한다. 또한 물불천론에서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이 대상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분할하고 고정해 대상()을 해체하거나 융합하는 원자화의 논법을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존재()의 근본인 있는 것을 문제 삼는 현학인 형이상학의 논해(論解)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현상학은 물질을 정신에 종속시키거나 정신을 물질에 종속시킴으로써 2가지 영역에 통합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가 물질이며 정신은 객관적 상황에 의존하여 결코 무() 속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논리를 편다. 본 논고는 이러한 형이상학과 현상학, 그리고 현대 양자물리학에서 밝히고 있는 초끈이론 등이 승조의 물불천론에서 물()과 정(), ()이 어떤 유사성과 상이성이 있는지를 본 논고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 물불천론(物不遷論)과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에서 물()의 이해

 

먼저 승조는 어떤 사람인지를 간략하게 살펴본다. 승조(僧肇: 384~415)는 중국 위진남북조시대에 필사 직업을 통해 노장의 사상에 심취하였는데 유마힐경(維摩詰經)을 읽은 뒤 감동을 받고 비로소 사나이 갈 길을 알았다라고 외친 다음 불교로 귀의한다. 구마라집(343-413)의 제자로 불교의 이치를 터득했고 중관의 공()사상을 중국에 전파하는 데 공헌했다. 당시 시대상황을 보면 지식인들은 노장사상에 깊이 심취했다. 세계의 본원(本原)을 무()라고 한 노자의 본무(本無) 개념을 불교의 진여(眞如)로 해석하고 모든 것은 공()’()가 근본이다라는 사상과 같은 것으로 봤다. ‘부처는 노자의 신선으로, ‘열반무위로 번역하여 이해하던 불교사상을 격의(格義)불교라 한다. 승조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격의 주장들이 잘 못 되었음을 지적하고 바르게 깨우치고자 저술한 것이 조론(肇論)이다. 관직을 거부한 이유로 31세의 짧은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7일간의 말미를 부탁하고 쓴 것이 보장론(寶藏論)이다. 비록 짧은 생이지만 그의 업적은 선불교가 태동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승조의 대표작인 조론(肇論은 불교의 물() 존재론으로 물불천론(物不遷論)과 공() 본질론으로서 부진공론(不眞空論), 그리고 반야(般若) 인식론으로서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론과 인식의 결과론으로서 열반(涅槃無明)4개론()으로 되어 있다.

그중에 물불천론(物不遷論)사물()이 미래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과거로 이동한다는 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학파의 주장에 가깝다.’ 이를 학자들은 그가 ?주유마힐경(注維摩詰經)?에서 만일 사물이 영구적으로 유지된다면, 그것들은 미래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과거로 이동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약 사물이 삼세를 통과한다면, 그들은 오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사물이 영속적으로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오가는 일은 없다.’는 것을 예시하고 있다.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였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존재의 근본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있는 것이 있는 그대로존재하지 않고 왜 변화하는가? 라는 의문에서 형상(플라톤의 이데아)을 사물에 끌어들여 사람의 이성을 통해 판단하고 관념(觀念)으로 자리 잡게 했다.‘ 즉 사물은 질료(質料)와 형상(形相)으로 이루어지고 본질(本質)과 존재(存在)로 나타난다. 존재하는 것은 운동을 통하여 변화하며 거시와 미시로 나누고 미시세계의 입자 운동은 양자역학으로 발전한다. 또한 물()에 대한 시공간(時空間)적인 움직임과 변화를 설명한 논리실증주의를 개척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1889~1951)는 형이상학적 경험이란 언어의 영역을 초월한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스스로가 다른 것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으면서도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첫 번째 것을 신()으로 귀착시킨다. 즉 물() 그 자체는 인간의 지각을 규정하는 진실한 존재근거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에 현혹된 인간의 개념적인 착각(錯覺)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승조는 물불천론(物不遷論)에서 물()의 동()과 정()을 연기적 견해로 명쾌하게 규명하고 있다.

 

지금의 결과는 과거의 원인과 함께하지 않는다. 과거의 원인으로 인하여 지금의 결과가 있는 것이다. 원인으로 인()하여 결과()가 있으므로, 원인은 과거에서 소멸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결과는 과거의 원인과 함께하지 않으므로, 원인이 지금으로 오는 것도 아니다. 과거에서 소멸하지도 않고 지금으로 오지도 않으므로 오히려 사물()이 변천(變遷)하지 않음의 이치가 분명하다. 다시 무엇 때문에 흘러감과 머묾에 미혹 당하고, 운동과 정지의 사이에서 주저하겠는가? 그렇다면 천지가 뒤집힌다고 해도 정지()가 아니라고 일컬음이 없고, 홍수가 하늘까지 넘실댄다고 해도 동()이라고 일컬음이 없다. 만일 정신이 사물로 나아가 사물과 일치할 수 있다면, 이것을 멀지 않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과거의 사물을 과거에서 구해보았으나 과거에 일찍이 없지를 않았었고, 과거의 사물을 현재에서 찾고자 하니 현재에는 아직까지 있지 않다. 과거의 사물이 현재에 있지 아니하니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오지 않았음이 명백하고, 과거의 사물은 일찍이 과거에 없었던 적이 없으므로 사물이 가지 않음을 알겠다. 다시 이렇게 현재를 보면 현재의 사물도 가고 있지 않다. 이것은 과거의 사물은 본래부터 과거에 있으니 현재로부터 과거에 이른 것이 아니요. 현재의 사물은 현재에 있으니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른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인과(因果)법에 의해서 찰라 찰라 생하여 그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각각의 시간 속에 고립적으로 배열된 것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고방식 속에서는 인()과 과()도 고립적으로 분리된 것 같지만 사실은 인() 안에 인과(因果)와 과()속에 인과(因果)가 동시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아버지를 부를 때 가 인이라면 는 과이고 를 부를 때 는 인이고 는 과이다.

 

승조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마하연론(摩訶衍論)에서도 이른다. ‘모든 법은 운동하지 않고 머물며 떠나가는 곳과 떠나오는 곳이 없다.’ 이 말들은 모두 무리들을 여러 방향으로 인도하여 도달하게 하므로, 그 두 말은 중도에서 하나로 만난다. 어찌 문장들이 구분된다고() 해서 그 이르는 곳들이 괴리된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상주 불변하면서도 상주 불변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고, 떠나가면서도 변천하지 않음을 일컬은 것이다. 변천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흘러갈지라도 항상 정지이다.

 

또한 ()를 알되 유에 집착하지 않고 무()를 알되 무에 집착하지 않는다. 참다운 앎은 유와 무를 헤아리지 않고, 유와 무를 헤아리지 않는다면 곧 자성의 분별이 없는 앎이다 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결과는 원인과 함께 존재할 수 없으니, 원인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생기는 것이다. 원인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생기는 것이므로 원인은 과거에서 사라진 것도 아니며, 결과는 원인과 함께 존재할 수 없으니 과거의 원인이 현재로 온 것도 아니다. 없어지지도 오지도 않으니 사물이 불변하는 이치가 분명하다. 어찌 다시 가고 머무르는 것에 미혹되고, 동정의 사이에서 주저하겠는가. 즉 시간과 공간을 고립적으로 나누고 거기에 인()과 과()를 배치하면, 인과는 독립된 사건이 되어 상호 간에 어떤 연결고리도 지니지 못한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를 시간으로부터 해석하고, 후기에 이르러 존재를 궁극적으로 사건(Ereignis)으로 해석하는 것도 불교식으로 말하면 모든 것이 한없이 상호 연관되어 발현되는 중중(重重), 무진(無盡), 연기(緣起)의 생동하는 존재 자체의 실상을 형이상학적인 개념 틀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눈과 봄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듯이 그렇게 둘이면서도 하나이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하는 공속성(空俗性)의 논리이다. 현상을 떠나서 실체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이라고 했다.

 

. 물불천론(物不遷論)과 현상학(現象學,phenomenology)에서 물()의 이해

 

현상학(現象學, phenomenology)에 대해서 살펴보자. 스스로 존재하는 모습대로 나타나는 것이 그리스인들이 애초에 부여했던 현상의 의미인 것으로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Edmund Husserl, 1859~ 1938)은 의식(意識)의 지향성(Intentionalität)'을 주장한다. 대상은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대로 존재한다고 했다. 노벨평화상을 거부한 사르트르(Sartre, J. P., 1905~1980)는 의식은 아무런 내용도 가지지 않는 텅 빈 ()’. 그것은 '그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창조되지도 않고 존재 이유도 없는 그것은 무의미한 것, 다시 말해 구토를 일으키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이런 철학과는 반대로 지각의 현상학에 나오는 구절을 보면 우리는 결코 무() 속에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는 항상 충만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의식은 세계의 조직(tissu du monde)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승조는 현상적(現象的)인 존재를 바라보는 두 가지 전제를 지적한다. 하나는 그것들이 정지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존재와 현재의 존재가 같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과거의 존재와 현재의 존재는 같지 않지만, 현재의 존재는 과거의 존재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동()과 정()의 이원론을 가지고 현상을 파악하나 승조는 동()도 정()도 없기에 근본적으로 존재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본다. 즉 제법에는 현재가 과거의 시간으로 흘러가거나 과거의 시간이 현재로 흘러옴도 없으며, 시간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면서 전변함도 없다.

그래서 부동의 작용(不動之作)을 찾아보는 것이, 어찌 운동()을 버림으로써 정지()를 구하는 것이겠는가? 반드시 정지를 모든 운동에서 구해야만 한다. 반드시 정지를 모든 운동에서 구해야만 하기 때문에, 비록 운동이지만 항상 정지이다. 운동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정지를 구하기 때문에, 비록 정지이지만 이 정지는 운동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운동과 정지는 처음부터 차이나지() 않는다’.고 승조는 설명한다.

그런데 만약 승조가 말한 부동(不動)과 정()을 어떤 의미로 해석하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뜻으로 이해한다면 정()은 고요함이고 부동(不動)은 움직임이 아닌 멈춤이기 때문에 그가 말한 불천(不遷)은 부동(不動)에 더 가까운 뜻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이나 부동(不動)은 실제(實際)로 고요하고 멈추기 위한 또 다른 작용()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물()과 동정(動靜) 운동을 현대 물리학인 양자역학(量子力學,quantum mechanics, quantumphysics, quantum theory)에서는 어떻게 설명 되지를 보자. 양자역학자인 독일의 막스보른(Max Born,882~1970)은 처음 제시한 미시세계의 입자 운동을 힘과 운동의 초끈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는 양성자·중성자·전자 같은 소립자나 쿼크 등 구()의 형태가 아니라, 이보다 훨씬 작으면서도 끊임없이 진동하는 6개와 뮤온과 타우, 그리고 전자, 뮤온, 타우의 중성미자까지 12종류의 입자로 되어 있다. 그래서 그 에너지 덩어리들이 아주 가느다란 끈으로 연결되어 정신없이 운동하는 공간이다.’라고 했다. 그 끈이 다양하게 진동해서 온 우주를 만든다는 끈 이론의 주장인 것이다. 이는 화엄경의 법계연기인 10현문(玄門)에서 이미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서로가 서로를 끝없이 포용하면서 중중 무진한 인다라(因陀羅) 그물로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한다. 즉 양자역학은 인드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의 내용을 뒷받침 해주는 논리이면서 승조의 물()의 불천(不遷)과 동정(動靜)운동을 역설적으로 반증하고 있다고 하겠다.

 

 

. 결론

 

승조의 물()이 동()과 정()을 형이상학과 현대 물리학 들과 어떻게 구별되고 상이한지를 간략하게 살펴봤다. 논자의 철학적 이해가 부족하고 물리학의 지식이 충분치 못해 명쾌한 분석과 설명이 미흡했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한 학자들이 존재()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정됨 혹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은 연기적 진리로 볼 때 자칫 모순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물불천에서 비록 고요함()일지라도 항상 흘러()간다는 승조는 짤막한 글에서 현학들의 형이상학적 주장을 비유비무(非有非無)로 모두 있음도 없음도 아닌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연기적 작용성(作用性)으로 논증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작용성은 실제의 체험을 통한 알아차림 일 때 더욱 적확(的確)해질 수 있다고 본다. 나아가 물불천론의 심오한 논리가 현대과학에서 어떻게 풀어갈지 그 여정을 즐겁게 지켜볼 일이다.

 

 

<참고자료>

 

-원전-

釋僧肇選 注維摩詰經大正藏 (T)38, No.1775

僧肇 肇論大正藏 (T)45, No.1858

世親 阿毘達磨俱舍論大正藏 第 29 No. 1558

僧肇 寶藏論大正藏 第 45 No.1775

 

-단행본-

한국하이데거학회편,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2

강성률 세상을 바꾼 철학자 30인의 알려지지 않은 철학 이야기출판평단 2011

중앙교연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도서출판 범한 2004

 

 

-논문 기타-

서동은 하이데거와 선불교(禪佛敎) -형이상학 극복의 관점에서의 비교철학사상문화, 2010

유용하 슈뢰딩거 고양이의 양자역학, 반도체·레이저로 무한 진화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