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한국 선시의 역사 -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정치이념은 유교로 바뀌는데 이 무렵 함허득통(涵虛得通, 1376~1433)이 출현, 불후의 명작 <금강경선시 金剛經線詩>를 남겼다. 함허는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인 무학(無學)의 제자였고, 무학은 고려말 임제풍 선시의 거장 나옹의 제자였다. 그러나 나옹의 임제풍 선시는 무학을 거쳐 함허에게 와서 애석하게도 그만 끊겨버리고 만다. 그래서인지 함허의 선시에서부터 체념적인 정서가 한국 선시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배불(排佛)정책은 제3대 태종(太宗) 때(1400~1418)부터 시작되어 세종(世宗)으로 이어지는데 이때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이 출현, 비애감 어린 선시를 남겼다. 그는 원래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으나 후에 선승이 되어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정처 없이 떠돌면서 두보(杜甫)를 능가하는 비애풍 선시를 많이 남겼다. 그러나 그는 시를 써서는 곧잘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내곤 했기 때문에 지금 그의 문집에 남아 있는 작품보다 물에 흘러간 작품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제 13대 명종(明宗) 때(1545~1567) 활약한 선승으로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 1515~1565)가 있는데 그는 패기 넘치는 선시와 화엄시를 남겼다. 보우의 뒤를 이어 청허 휴정(淸虛休精=西山大師, 1520~1604)이 출현, 한국 선시는 그 전성기를 맞게 된다.
청허는 우리에게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도승(道僧) 또는 승군 총사령관(僧軍總司令官) 정도로 알려졌다. 그러나 청허는 정말 도가 높은 선승이었고 이백(李白)의 영향을 받긴 했으나 이백을 능가하는 선시의 거장이었다.
청허 이전의 선시는(매월당 김시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국 임제풍 선시의 영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허에 와서 한국 선시는 비로소 임제풍에서 완전히 벗어나 한국 특유의 은둔적이며 체념적인 서정풍으로 변모해 버렸다. 《청허당집 淸虛堂集》 속에는 몇백 편을 웃도는 제 1급 선시가 실려 있다. 그러므로 청허는 한국 선시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청허휴정에 의해서 분출된 한국 선시의 광맥은 그의 제자들에게 의해서 찬란하게 꽃피었으니 그 주역들은 다음과 같다.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
사명유정(四溟惟政, 1544~1610)
청매인오(靑梅印悟, 1548~1623) - 그는 '공안선시 公案禪詩'의 거장이기도 하다.
기암법견(寄巖法堅, 1522~1634)
소요태능(逍遙太能, 1562~1649)
중관해안(中觀海眼, 1567~ ?)
편양언기(鞭羊彦機, 1581~1644)
또한 서산과 동문수학한 부휴선사가 있는데 그는 우수어린 이별풍의 선시를 잘 썼다. 그의 제자 취미수초(翠微守初, 1590~1668) 역시 전원풍의 선시를 남기고 있다.
다음 두보의 영향을 받은 사명유정 계통에서 허백명조(虛白明照, 1593~1661)가 나왔다.
월봉책헌(月峯策憲, 1624~?)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
설암추붕(雪巖秋鵬, 1651~1706)
무용수연(無用秀演, 1651~1719)
환성지안(喚惺志安, 1664~1729)
이상 모두 뛰어난 선시를 남긴 선승이다.
서산 이후 또 한 사람의 뛰어난 선시 거장을 우리는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그가 바로 정관일선 계통에서 나온 무경자수(無竟子秀, 1664~1737)이다. 그의 천변만화풍(千變萬化風) 선시는 예지로 가득 차 있으며 시상(詩想)이 단 한 군데도 막힘이 없이 동서남북, 상하좌우로 과거·현재·미래로 마구 굽이치고 있다. 다분히 체념적인 시풍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조선조 중기 이후의 한국선시에 무경자수는 강한 충격을 주고 있다. 무경자수 이후에는 허정법종(虛靜法宗, 1670~1733), 천경해원(天鏡海源, 1691~1770) 등이 돋보인다.
초의의순(艸衣意恂, 1786~1866)은 시승으로보다는 다승(茶僧)으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문장력이 뛰어나 추사 김정희를 비롯하여 당시의 문사(文士)들과 주고받는 화답시를 많이 남겼지만 빼어난 선시가 별로 없는 게 흠이다.(이는 또한 조선조 후기 대부분의 시승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포의심여(浦衣心如, 1828~1875)는 짧은 생애를 통해서 섬세하고 투명하기 이를 데 없는 <감성선시 感性禪詩>를 남겼다.
조선조 말기, 한 사람의 득도인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보월거사 정관(普月居士, 正觀, ~1862~)이다. 어디서 무엇을 했던 사람인지 그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지만, 그러나 그는 당송의 선승을 능가하는 선시를 남기고 있다.
그는 어느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채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거침없이 읊어내고 있따. 보월거사라는 이름으로 봐서 그는 분명 선승이 아니라 평범한 재가수행자(在家修行者)이다. 말하자면 당대의 백낙천이나 송대의 소동파 같은 인물이다. 보월거사 정관의 느닷없는 출현은 한국 선시에 하나의 불가사의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그리고 이 무렵 경허성우(鏡虛惺, 1849~1912)가 있었는데 그 역시 느닷없이 튀어나온 선승이다. 왜냐면 그는 이렇다 할 스승이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깨달음을 체험한 선승이기 때문이다. 그의 선시는 한국 선시 가운데 가장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서산대사 청허휴정에게서 비롯된 한국 선시는 마침내 경허성우에 와서 선시가 아닌 인간의 시(人間詩)로 탈바꿈 해 버린 것이다. 경허의 제자인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과 한암중원(漢岩重遠, 1876~1951) 역시 멋진 선시를 남겼지만 경허의 선시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 무렵 시문(詩文)에 능했던 불경의 거장 석전정호(石顚鼎鎬, 1870~1948)가 있었지만 그의 시문 역시 선미(禪味)가 적은 게 흠이다. 《님의 침묵》이라는 현대 시집을 낸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도 적지 않은 선시를 남겼지만 크게 주목할 만한 작품은 없다.
근래의 선승으로는 원광경봉(圓光鏡峰, 1892~1982)이 있는데 그는 조주풍(趙州風)의 선시를 잘 썼다. 그는 서도(書道)에도 능하여 적지 않은 서예 작품을 남겼다. 뛰어난 전법게(傳法偈)를 남긴 운봉성수(雲峰性粹, 1889~1947)의 제자 가운데 향곡혜림(香谷蕙林, 1912~1978)이 있는데 그는 나옹 혜근의 선시풍에 이어지는 임제풍 선시를 남기고 있다.
출처 - 석지현 스님 엮음, 《선시감상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