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법화현의의 개현과 관심 7번공해와 5중현의

통융 2020. 3. 28. 06:39

삼종관문(三種觀門)의 체계

방편 통해 진리 드러낸 일체 교설의 묘법

교리로 끝나는 게 아니라
관심(觀心)으로 이어져
즉, 천태의 종극은 관심


2. 법화현의(法華玄義)의 개현(開顯)과 관심(觀心) ①


  


《법화현의(法華玄義)》는 천태대사 지의(智)가 나집(羅什)이 역출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가지고 교상과 관심의 두 문을 열어 천태교관을 대성시킨 천태삼대부(天台三大部) 또는 법화삼대부(法華三大部) 가운데 하나이다. 법화삼대부를 삼종관문(三種觀門)이라 하는 가운데 법화현의는 부법관(附法觀)에 속한다. 부법관이란 경전의 현의를 궁구하는 가운데 사제나 십이인연과 같은 교리를 공부하며 수행하는 관법이다.

사실 《묘법연화경》은 인도에서 진보적이고 신앙심이 강한 보살교단이 기원 전후부터 대승적 입장에서 결집한 경전으로서 대승적 입장이 매우 강하다. 특히 내용상 석존일대 교화설법의 귀결이라고 하여 중국불교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매우 주목된다. 이 경을 해석한 《법화현의》는, 지의가 천태산 화정봉에서 증득한 일실제(一實諦)를 피력한 책이라는 점에서 유독 《열반경》과의 관계가 중시된다. 일견 이 책은 《법화경》의 열반경적 해석이라고도 보이는 특이한 면모를 갖고 있기도 하다.

《법화현의》는 법화경관을 나타냄과 동시에 천태교상문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 책은 《법화경》의 제목에 중점을 두어 해석하는 것이지만 제목이 《법화경》의 전체적인 뜻을 총괄한다고 하는 견지에서 제목을 통하여 《법화경》의 내용을 해설하고 동시에 불교교리를 총괄적으로 개관하고 있다.

지의는 《법화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명(名) · 체(體) · 종(宗) · 용(用) · 교(敎)라는 독특한 표준을 세우고, 그것으로써 《법화경》의 현의(玄義)를 설명하고 있다. 이 오장(五章)을 해석하는 데에는 통석(通釋)과 별석(別釋)으로 한다. 


통석인 칠번공해(七番共解)는 오장(五章)을 총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서 1. 표장(標章), 2. 인증(引證), 3. 생기(生起), 4. 개합(開合), 5. 요간(料簡), 6. 관심(觀心), 7. 회이(會異)로 나누어진다. 


별석인 오중각석(五重各釋)은 오장을 각각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으로서, 1. 석명(釋名), 2. 현체(顯體), 3. 명종(明宗), 4. 논용(論用), 5. 판교(判敎)로 설명하고 있다. 


석명 즉 명현의는 경전의 명칭 즉 묘법연화경이란 다섯 글자를 해석하는 것이고, 

현체 즉 체현의는 묘법연화경의 체(바탕)을 밝히는 것이며, 

명종 즉 종현의는 묘법연화경의 종(골격)을 설명하는 것이고, 

논용 즉 용현의는 묘법연화경의 용(작용)을 논하는 것이고, 

판교 즉 교상현의는 묘법연화경의 교상(교설의 모습)을 판석하는 것이다.

《법화현의》에 의한 지의의 법화 해석의 기본 입장은 개현(開顯)사상에 있다. 개현이란 《법화경》과 다른 경전과의 관계에서 본연의 자세를 나타내는 말이다. 석존이 《법화경》을 설할 때 중생을 교화하고 능력을 조숙시키기 위하여 설한 여러 방편 교설을 방편설이라고 숨김없이 토로하여 방편이 그대로 방편임을 알면 그 여러 방편이 그대로 하나의 진실이고 방편 이외에 따로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방편을 진실에 모으게 하는 것이다. 

또한 성문·연각·보살의 삼승이라는 가르침은 원래 일불승 밖에 없는 것을 중생 교화와 인도를 위해 셋으로 구별한 것으로서 삼승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일불승과 다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것을 방편을 열어 진실을 나타냄[開權顯實] · 삼승을 열어 일승을 나타냄[開三顯一]이라고도 한다. 이는 개회(開會)사상을 단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사실 개추현묘(開顯妙)는 지의 증오(證悟)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제법이나 교리의 우월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원융(圓融)이라는 점에서 일체 모든 것을 융즉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개추현묘가 이루어지면 일체 경전이나 교설은 모두 그대로 묘법(妙法)이 되기에 더 이상의 추묘(妙)의 구분은 사라진다. 이것이 제법실상(諸法實相)으로서, 추법(法)을 개현(開顯)하여 묘법(妙法)으로 하는 점에 《법화경》의 본뜻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모든 추교(敎)의 가르침은 마침내 법화로 개현되어 묘법으로 되는 것으로서 바로 이러한 미묘한 이치가 제법실상의 원융삼제인 것이다. 이런 실상론에 기초하는 천태의 법화관은 다시 한 번 이 시대에 주목받아야 하고 적극적으로 되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종래에 변질되어버린 법화경관의 주범은 천태지의가 아니라 이후에 변질된 법화경관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사실 지의의 대표적인 저작인 삼대부를 통해서 보더라도 지의의 교화의도는 법화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데 있다기 보다는 난립되고 있었던 불교를 통일적으로 구성하고 그 구성을 교리와 수행이 일치하는 체계로 양립시키는 데 있다고 볼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불타의 출세본회가 펼쳐진 《법화경》의 개현을 통해 전 불교에 절대(絶待)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없다.


이러한 《법화경》에 대한 기본적 입장과 함께 또 하나의 중심은 《법화경》의 실천이다. 즉 먼저 《법화경》에 설해진 불타의 본 마음과 그 내증의 미묘한 이치를 명확히 이해한 다음, 그 지혜의 이해를 실행으로 옮겨 여래의 깨달음을 우리들의 현재 마음에서 관조하여 수행하면서 마침내 이것을 체현하는 것을 골격으로 한다. 


《법화현의》 서두에 오심(五心)을 가지고 칠번공해를 관심적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매우 이채롭다. 즉 표장(標章)은 염심(念心)을 쉽게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고, 인증(引證)은 신심(信心)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며, 생기(生起)는 정심(定心)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고, 개합(開合) · 요간(料簡) · 회의(會異)는 혜심(慧心)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며, 관심(觀心)은 정진심(精進心)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심(五心)이 세워짐으로써 오근(五根)이 이루어지고, 이 오근(五根)이 오장애(五障碍)를 물리침으로써 오력(五力)을 이루거나 내지는 삼해탈문(三解脫門)에 들어 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칠번공해를 오심(五心)으로 이해하여 불지견(佛知見)을 개시오입(開示悟入)케 한다는 발상은 너무나 독특하고 특이하다고 생각된다. 교리가 교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관심으로 이어진다는 발상이 너무도 기발하다. 이런 태도야말로 천태의 정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한다. 이런 점에서 천태의 종극은 바로 관심(觀心)에 있다고 할 것이다. 칠번공해에서 대표적인 관심론은 여섯째 오장을 마음으로 관찰함[觀心]이다. 표장(標章)에서 요간(料簡) 까지를 자기 마음으로 이끌어 묘관(妙觀)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리(敎理)를 관행(觀行)하는 것으로서 교리와 관행을 하나로 하는 천태 특유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칠번공해 가운데 열고 닫는 것[開合]을 마음으로 원융관찰하고 있다. 마음은 제법의 근본이니, 마음은 전체이고, 고심(苦心)이 법신(法身)이니, 이것이 마음의 본체[心體]요, 번뇌심(煩惱心)이 반야(般若)이니, 이것이 마음의 종요[心宗]이며, 업심(業心)이 해탈(解脫)이니, 이것이 마음의 역용[心用]이며, 십이인연을 마음이 생겨나는 것으로 분별하면 육도(六道)의 차등이 있고, 마음이 소멸하는 것으로 분별하면 사성(四聖)의 높고 낮은 차별이 있으니, 이것을 교상(敎相)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요간을 통해 관심을 설명하는 가운데 근성의 차이에 의해 관심하는 것을 분별하고 있다. 즉 《대지도론》에서, 부처님이 신행인(信行人)을 위해서는 나무로써 비유하고, 법행인(法行人)을 위해서는 몸으로써 비유하신다는 것을 가지고 문자인(文字人)을 위하여 교리에 맞추어 해석하고 좌선인(坐禪人)을 위하여 마음으로 관찰하라고 한다. 이어서 이런 다문(多聞)과 지혜(智慧)에 대하여 《대지도론》에서 평가하고 있는 네 가지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지혜가 많으나 많이 듣지 않으면 이는 실상을 알지 못하니, 비유하면 짙은 어둠속에서 눈이 있으나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둘째 많이 들었으나 지혜가 없어도 역시 실상을 알지 못하니, 비유하면 아주 밝은 가운데 등불이 있어도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 

셋째 많이 듣고 지혜가 뛰어나면 이것은 설한 것을 받는다. 

넷째 듣지도 않고 지혜가 없으면 이것은 사람의 몸을 한 소라고 한다. 


듣는 것에만 치우는 것이나 마음만 찾고 전혀 경론을 찾지 않는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듣는 데에만 치우친 과실에 대하여,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사견이 더하고 그릇됨이 늘어나서 칼을 쥐어 스스로를 해쳐 오히려 이해가 악도를 끌어당기는 것은 관찰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고, 치우치게 관찰만 하는 과실에 대해서는, 수행[行]이 도리어 악도를 이끄는 것은 듣기를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여 문자법사(文字法師)와 암증선사(闇證禪師)를 강하게 경계하고 있다. 그리하여 빈궁함과 증상만을 면하기 위해 삼관(三觀)과 육즉(六卽)을 닦아야 한다고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문자법사의 빈궁함을 벗어나기 위한 방도로는 관심법(觀心法) 즉 삼관(三觀)을 제시하고 있으며, 암증선사를 훈계하는 가르침으로서 육즉(六卽)을 설하고 있다. 육(六)은 범성격별(凡聖隔別)이고, 즉(卽)은 범성융즉(凡聖融卽)으로서, 육(六)은 수행자의 증상만(增上曼)을 막고, 즉(卽)은 수행자의 자굴(自屈)을 그치게 하는 데 있다고 한다. 마음을 닦아서 안으로 관찰하니 법재(法財)가 있고, 바르게 믿어서 밖에서 들으니 다시는 증상만(增上慢)이 없게 된다. 눈이 지혜롭고 명확하게 들어 이익이 구족하니, 어찌 관찰하여 이해하지 못하겠느냐고 한다. 이와 같이 칠번공해는 교관으로 맺어지고 있는 것으로서, 법화 개현에 따른 원융관심이야말로 지의가 제시하는 불교의 전형이라고 하겠다.

《법화현의》는 상당히 유별난 책이다. 사실 《법화현의》라는 명칭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법화경》의 현의를 밝힌 책이다. 그럼에도 《법화경》의 주석서와는 그 궤를 아주 달리 하고 있다. 물론 현의를 밝히는 책이라는 점에서 보통 의소(義疏)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지만, 《법화경》으로부터 일체 경전 및 제법 그리고 우리 마음까지도 밝히는 아주 특이한 책이다. 그러므로 《법화현의》를 《법화경》만을 해석하는 책이라고 본다면 큰 오산이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지의 수증각오(修證覺悟)의 오의서(奧義書)라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이 책은, 《법화경》으로부터 일체경으로 나아가고 그리고 현실상황을 내 마음으로 관찰하는 방법 모두가 담겨져 있기에 팔만사천의 진보(珍寶)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창규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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