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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열면 밝은 세상으로 <무문관> 열어보기 1

통융 2019. 12. 17. 09:49

문 열면 밝은 세상으로 <무문관> 열어보기

 

 

<무문관 제1>조주의 개(趙州狗子)

趙州和尚, 因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

조주 화상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조주가 말했다.

()”

 

 

한설에 한국 불도 성전에는 눈 푸른 납자들이 각기 화두를 들고 앉아서 백척간두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의지로 각자의 자성불(自性佛)에 여래(如來)하기 위해 오늘도 각기 동안거 입방 중이리라.

소승도 그동안 늘 공부를 점검하시는 선사님의 독참을 통해 화두의 언저리를 기웃거리며 어줍게 읽혀진 소소한 생각들을 짧은 시로 표현 해 봤다.

특히 무문관을 쓴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선사의 은산철벽을 꿰뚫는 안목과 대도는 문이 없다. 그렇지만 길은 또한 어디에나 있다(大道無門 千差有路)’는 말에 기대어 용기를 내고 소승이 경험한 <무문관 48>을 다시 한 번 열어보면서 미흡한 <덧말>의 사족(蛇足)을 다는 우를 범 하고자 한다.

 

 

 

 

<덧말>()가 무()로 그대로 살아서 번뜩이고 있는데 왜 없다고 하는가. 무는 무일뿐!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네. 오직 보면 볼 분 들으면 들을 뿐. 말과 글의 뜻에 속지 말라. 글의 뜻을 쫒아 이리저리 머리 굴려 있다, 없다, ?’라고 하는 순간 그대 본성은 천리 만 길이라. 한 스님이 만공스님께 조주선사의 ''가 무엇입니까? 하니까 "아주 쉽다. 뒷밭에 무가 많다. 그것을 가서 보아라." 했다. 그렇다. 무 밭에 가서 무를 뽑아 한 입 깨물어 봐라. 맵고 달콤한 무가 그대 입안에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한다면 선()불교로 말할 수 있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부처님의 말씀은 교()라하고 부처님의 마음을 선()이라고(禪是佛心 敎是佛語)했다. 선이란 나의 본래 성품인 불성을 깨닫는 것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꿰뚫어 안다,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혹은 알아차림(sait) 등의 표현한다.

 

선은 말이나 글로 설명하는 아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세우지 않는 앎으로 알아차림이다. 이러한 알아차림 하는 수단이 화두(話頭)라는 공안을 가지고 골똘히 참구하는 것을 간화선(看話禪)이라하고 그러한 수행불교를 선불교라 한다.

 

공안의 대표적인 조주의 무()자 화두가 있다.

()!란 말이 바로 선종의 한 관문이다라고 무문혜개선사가 말했듯, ()자 화두는 <무문관 제1>조주의 개(趙州狗子)에 나온다. 부처님은 열반경에서 일체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했는데 조주화상은 개에게 불성을 묻는 질문에 라고 했다. 조주화상도 개가 불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왜 없을 무라고 했을까? 이것이 자 공안이다.

 

무문스님의 법안을 들어보자.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의 관문을 꿰뚫고, 묘한 깨달음은 반드시 생각의 길이 끊어져야 한다. 이것을 꿰뚫을 수 있는 사람은 비단 조주(趙州)화상을 직접 뵐뿐만 아니라, 역대의 조사(祖師)들과 손을 잡고 함께 행동하며, 눈썹을 맞대고 같은 눈으로 보고 같은 귀로 들을 수 있으니, 어찌 기쁘고 유쾌하지 않겠는가?

이 관문을 꿰뚫고 싶지 않은가? 365개의 뼈마디와 84천 개의 털구멍을 가지고 온몸에 의심덩이를 일으켜 이 ()!”라는 말을 참구하라. 밤낮으로 들어보되, ‘허무하다는 알음알이도 짓지 말고 있다’, ‘없다는 분별심도 짓지 말고 의심을 하다보면 마치 뜨거운 쇠구슬을 삼킨 것 같아서 토하고 토해도 나오지 않게 된다. 이전의 잘못된 지식과 관념에서 벗어나 오래도록 참구하면 자연스레 안팎이 한 덩어리를 이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대 자유를 얻어 중생 살이[六道四生] 가운데에서도 삼매를 즐긴다.

그러면서 무문이 노래한다. <狗子佛性 全提正令 纔涉有無 喪身失命> 개의 불성, 불법을 온전히 드러냈도다. 조금이라도 있다·없다에 걸리면 목숨을 잃으리라.

 

알뜰하게 무문스님의 언설(言說)을 듣고 로 알았다고 하자.

그러면 개의불성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