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광물화엄경 왕복서(大方廣佛華嚴經 往復序):이 서문의 첫구절이 ‘왕복(往復)이 무제(無際)나’라고 되어 있기 때문 통칭 왕복서라고 부른다. 이 글과 쌍벽을 이루는 서론으로써 함허스님의 일물서가 있다. 선의 기운, 선지가 빛나는 일물서는 그 시작이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통칭 일물서다. 함허스님은 우리나라 고려말, 조선초의 스님으로 깨달음의 안목이나 글도 뛰어나신 분이다.
일물서나 왕복서 모두 뛰어난 글이지만 왕복서를 더 명문으로 친다.
왕복서는 부처님의 안목, 불교 최고의 안목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법계의 내용이 이러한데, 화엄경은 그 깊고 오묘한 이치를 이렇게 밝혔다’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부처님의 안목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이 세상을 누가 무엇을 통해서 표현했는지, 그를 통해서 우리 중생들에게 깨우쳐 준 것은 과연 무엇인지 하는 숨어 있는 깊은 내용들이 샅샅이 다 밝혀져 있다.
그 내용이 화엄경 안에 다 담겨있지만, 화엄경은 ‘그런 것이다’ 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고 있지 못한 것을 일물서에서 정확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100번쯤 쓰면서 공부한다면 분필 한 자루만 가지고 화엄경을 다 이야기 할 수 있고, 우주 법계의 원리를 다 이야기 할 수가 있다.
100번을 쓰면 외워질지 안 외워질지는 내가 모르지만, 외우는 정도 가지고는 부족하다.
한 번 쓰면 열 번을 읽는 것보다 더 낫다.
그래서 이 왕복서는 특별히 원문을 100번씩 쓰시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왕복서 전체는 오늘 유인물 보다 다섯 배 정도 되는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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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 청량산(淸凉山) 대화엄사사문(大華嚴寺沙門) : 당나라 청량산은 소위 우리가 중국 여행에서 많이 가는 오대산이다. 나는 오대산에 가서 중앙 건물의 현판주련에 화엄경이 설해진 7처9회의 명칭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감격스러웠다.
청량스님이 주석했던 오대산은 화엄종찰로서 그 옛날 화엄의 분위기가 아직도 그대로 곳곳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사찰은 이런 특징이 있어야 되고 그 특징을 몇 천 년이 흐르더라도 살려야 된다.
우리나라의 범어사는 화엄사찰이고 해인사가 화엄사찰이고 부석사가 화엄사찰이다.
화엄사찰 중에서도 본사가 부석사이므로 부석사 같은 데는 365일 계속 화엄경이 설해져야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찰을 세운 의미를 우리가 살리는 것이 되고 그것을 통해서 수행과 불교에 대한 지식을 확보하게 된다.
스님들이 혹시 개인적인 절을 짓더라도 불교적인 어떤 경전이나 어록이나 하나의 사상에 초점을 두고 사찰을 세우면 의미가 있다. 그것을 통해서 공부하게 되고, 또 신도들에게 설명해줌으로써 우리의 공부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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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관(澄觀) 청량국사(淸涼國師) 찬(撰) : 청량국사는 징관스님이다. 징관 스님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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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문(門): 제1문, 제2문, 제3문이라고 했는데, 왕복서를 네 단락으로 나눠서 해석하는 방법과 10가지로 나눠서 해석하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10가지 과목으로 나눠서 해석하는 것인데 이 방법이 네 단락으로 나는 것보다 훨씬 세밀하고 구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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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글이기 때문에 우선 우리가 원문만 소리내어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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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에서 화엄경 공부하신 분들은 아마 이 왕복서를 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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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門 , 宗體를 들어서 표시하다(標擧宗體]
/往復이 無際나/ 動靜은 一源이라/ 含衆妙而有餘하고/ 超言思而泂出
者는/ 其唯法界歟며
/가고 돌아옴이 끝이 없으나 [1, 法界의 用大]
/움직이고 고요함은 한 근원이라.[2, 법계의 體大]
/온갖 미묘함을 함유하고도 여유가 있고[3, 법계의 相大]
/말과 생각을 초월하여 멀리 벗어난 것은 [4, 융합하고 떨어버림]
/오직 法界뿐이로다.[5, 법의 소속을 결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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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往復)이 무제(無際)나 : 이 왕복서를 세밀하게 분해하기 위한 초도 무수히 많은데 청량국사 자신도 원문의 10배 이상 되는 초를 냈다. 서문은 제1문, 2문 해서 열가지로 나누고, 제 1문에서도 다섯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사선을 그었다.
내가 우정 번역을 해서 해석을 붙인 것은 화엄경은 본문도 중요하지만 확실하게 글 해석하는 법, 새기는 법도 분명하게 아셔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을 내가 100번을 쓰시라고 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저의 의무도 다한다는 뜻에서 새기는데 착오가 없도록 해 놓았다.
갈 왕(往)자 돌아올 복(復)자를 써서 가고 돌아옴이 끝이 없다고 하였다.
즈음 제(際)자는 끝이라는 뜻이다. 무제 하였으니 한계가 없다는 뜻인데 이것은 법계(法界)의 용대(用大)라고 하였다.
기유법계(其唯法界)라는 말이 뒤에 나오지만, 이렇게 앞에 붙여서 해석하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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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가장 근본되는 종지[大宗]이다.
불교, 혹은 불법은 기술을 가르치는 가르침도 아니고 한 부분에 편협된 철학도 아니다. 부처님이 온 우주 법계를 통 털어서 그 존재 원리를 깨달았고 그 존재 원리를 깨달은 대로 설했고 그 우주법계의 존재원리를 우리가 공부함으로 해서 그 원리에 맞게 우리가 산다는 것이다. 그것이 경을 설한 취지이다.
사실 청량스님같이 설명하기로 하면은 이 서문만 가지고도 몇 달이 걸려도 다 못할 정도이다.
아무튼 불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법계의 원리를 가르치는 종교다. 화엄경은 우주법계의 원리를 논하는 경전이다. 화엄경에서 우주법계를 다 논하지 못하면 다른 어떤 경전에서도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을 꿰뚫어보신 청량스님께서는 처음부터 이 법계를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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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법계는 가고 옴이 끝이 없다. 생사, 거래, 가고 오고, 자고 일어나고 길게는 우리가 죽고 다시 태어나고, 살고 죽고 하는 것이 끝이 없다. 꽃 한 송이가 그렇고 우리의 일상이 그렇고 모든 존재가 다 그렇다.
우리가 화엄경을 공부하러 오고 가는 것, 호흡하는 들숨과 날숨 할 것 없이 일체 우주법계의 존재원리는 전부가 그 오고감이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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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動靜)은 일원(一源)이라: 움직이고 고요함은 한 근원이라. 이것은 법계(法界)의 체대 (體大)라고 하였다.
앞에 말한 것처럼 우주법계의 작용은 오고감이 끝이 없지만, 본체에 있어서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한 근원이다.
아무리 가고 오고 들이 쉬고 내 쉬고, 왼발 오른발이 늘 왕복하지만, 어디에 갔든 왔든 관계없이 항상 그 자리인 것이다. 쉽게 한마디로 표현하면 항상 나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과 정은 한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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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含) 중묘이유여(衆妙而有餘)하고: 글을 읽을 때 글자당 일초씩 걸린다면 함자는 이초내지 삼초쯤 시간을 잡아서 띄어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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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어 읽기에 관한 옛날 이야기가 있다. 어떤 선비가 아침에 나무를 하러 가는데 어느 집에선가 어린 학동이 ‘홍안지대자(鴻雁之大者) 미록지대자(麋鹿之大者)’라고 읽고 있었다. 맹자의 주에 나오는 글이다.
그런데 저녁에 나무를 한 짐 해 가지고 돌아오다 들으니 그 때까지 학동이 글을 읽는데 ‘홍은 안지대자여, 미는 녹지대자라.’이렇게 자기도 모르게 토를 붙여서 읽더라는 것이다. 두 구절을 하루종일 읽으니까 문리가 터진 것이다. 홍(鴻)과 안(雁)은 모두 기러기인데 홍은 큰 기러기 이고 미(麋)와 녹(鹿) 역시 사슴인데 미는 큰 사스님이니까 ‘홍은 안지대자여 미는 녹지대자라’하고 ‘홍은 기러기의 큰 놈이고 미는 사슴의 큰놈이다’라는 뜻에서 띄어 읽을 데를 띄어 읽을 줄 알더라는 것이다.
자꾸 읽다 보면 문리가 터져서 이 구절도 ‘함/ 중묘이유여’ 하고 저절로 띄어읽기가 나온다. 온갖 미묘함을 함유하고도 여유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법계의 상대(相大)라고 한다. 우주 법계의 상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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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제 3문에서 부유만덕(富有萬德) 할 때는 우리가 좋은 점만을 가득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좋은 점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묘라고 하는 것은 좋은 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저는 늘 ‘사람이 곧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인불사상(人佛思想)을 이야기 하는데, 법화경을 강의할 때 늘 해온 말이다. 사람의 그 미묘한 작용이라는 것은 선한 일만 한다고 해서 미묘한 작용이 아니다. 사기치고 나쁜 일하고 남 욕하고 모함하고 하는 것도 미묘한 작용이다. 여기 중묘라고 하는 것에는 그러한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사람이 아니면, 사람의 마음작용이 아니면 어찌 사기를 칠 수 있고, 남을 속일 수 있고, 모함할 수 있는가.
선행만이 능력이 아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다 대단한 능력이다. 그 미묘한 작용에 주안점을 둬야지 선이다 악이다 하는 것에 치우치면 솔직하게 답이 없다.
그래서 육조스님도 깨닫고 나서 첫 법문이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이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우리가 선악을 쫓아다니다 보면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악을 다 묘(妙)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 온갖 미묘한 것을 다 함유하고 있지만 얼마든지 남음이 있어서 여유가 있는 것이 법계의 상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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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超) 언사이형출자(言思而泂出者) : 말과 생각을 초월해서 멀리 벗어난 것, 이것을 ‘융합하고 떨어버림’이라고 하였다. 언사를 초월했기 때문에 텅 빈 하나이면서도 멀리 벗어났으므로 이것은 떨쳐버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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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법계여(其唯法界歟)며 : 그것은 오직 법계뿐이다.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다. 불교는 세계를 그냥 세계라고 하지 않는다. 전부 법계라고 한다.
우주법계라고 하면 이 드넓은 우주 공간을 다 포함해서 기어 다니는 작은 미물까지도 다 포함된다. 이 모든 존재는 전부 그 나름의 이치와 그 나름의 진리와 그 나름의 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전부 다 진리이고, 이치이고, 길이다. 그것이 바로 법이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세계를 그냥 세계라 하지 않고 법계라 하는 것이다.
그 법계 속에는 사람을 위시해서 산천초목, 수억 광년 밖의 별까지도 모두 포함하여 두두물물이 다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법의 소속을 ‘그 오직 법계 뿐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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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거꾸로 하면 법계라고 하는 것은 가고 옴이 끝이 없다. 하지만 동정이 다 한 근원이다. 그 법계는 온갖 미묘한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여유가 있다. 그리고 말과 생각을 초월하여 멀리 벗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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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門, 能詮을 찬탄하다[別歎能詮]
/ 剖裂玄微하고 昭廓心境하며/ 窮理盡性하고 徹果該因하며/ 汪洋沖融하고 廣大悉備者는/ 其唯大方廣佛華嚴經焉인저/유현하고 미세함을 쪼개어 나누며 마음과 경계를 환하게 비추어 텅 비우며[1. 能詮을 총체적으로 밝힘],
/이치를 다하고 법성을 다하여 佛果에 사무치고 因行을 갖추었으며[2, 깊고 넓음을 따로 드러냄],
/깊고 넓고 가득하여 넘치고 텅 비어 융화하고 넓고 커서 모두 다 갖춘 것은[3, 깊고 넓음을 결론으로 찬탄함]
/오직 大方廣佛華嚴經 뿐이로다.[4, 법이 속한 곳을 결론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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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문의 과목을 ‘능전을 달리 찬탄하다’라고 하였다. 능전은 능히 말하다, 표현한다는 뜻이다. 무엇을 표현하는가 하면 뒤에 뒤에 ‘오직 대방광불화엄경 뿐이다.[其唯大方廣佛華嚴經焉]’라고 나온 데서 알 수 있듯이 화엄경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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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주관, 객관이라 하지 않고, 능(能 주된 것)과 소(所 객인 것)라는 말을 쓴다. 화엄경에서 능은 화엄경이고, 소는 법계이며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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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이 법계를 설명한다.’고 하는 것이 이 경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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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청량스님은 화엄경의 서문에서 제1문에 그 설명의 대상인 ‘법계’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제2문에서는 법계를 설명하는 주체인 화엄경을 찬탄한다.
말 내용도 중요하지만 말하는 사람도 중요한 것처럼, 법계가 중요하지만 법계를 설명하는 화엄경이 또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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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열현미(剖裂玄微)하고 :유현하고 미세함을 쪼개고 나눈다. 화엄경이 얼마나 시시콜콜 세밀하게 말씀을 많이 했는가. 깊이 있고 미묘한 도리를 나누고 또 나누고 쪼개고 또 쪼개어 설명하였다. 요즘 물리학으로 치면 분자니 원자니 하고 온갖 물질을 쪼개어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다.
소확심경(昭廓心境)하며 : 마음과 경계를 환하게 밝힌다.
소확이라는 말은 환하게 비추어서 텅 비운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화엄경은 마음과 경계를 환하게 비추어서 텅 비우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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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리진성(窮理盡性)하고 : 모든 이치를 낱낱이 분석해서 끝까지 다 파내어 그 본성을 다 드러내는 것이 화엄경이다.
철과해인(徹果該因)하며 : 불과에 사무치고 인행을 갖추었다. 과(果)자는 불과(佛果)를 말하고 인(因)은 인행(因行)을 말한다. 우리가 처음 발심했을 때를 인행이라고 한다. 모든 존재는 인과로 되어 있고 연기로 되어 있다. 화엄경은 그 모든 존재원리를 설명하면서 아울러 우리 수행의 발심에서부터 성불에 이르기까지의 지위점차도 자세하게 이야기 한다. 그래서 화엄경은 그 결과에 사무치고 원인도 지니고 있다. 불과의 이야기도 아주 자상하게 되어 있고, 발심해서 어떻게 하면 성불할까 하는 인행의 이야기도 다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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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충융(汪洋沖融) : 화엄경은 깊고 넓고 가득하다[汪]. 넘친다[洋] 텅 비었다[沖]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융합한다[融]
광대실비자(廣大悉備者): 넓고 커서 다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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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은 왕양충융한 대경이다. 큰 경이고 호한(浩汗)하다. 호한하다는 말이 이 화엄경에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그것을 청량스님은 왕양충융해서 광대실비라고 했다.
물이 가득하고 깊고 넘쳐나면서도 텅 비었다. 텅 비었기 때문에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따로 따로 독립되어 있으면 통일이 안 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텅 빈 그 존재의 실상이 있어서 통일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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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대방광불화엄경언(其唯大方廣佛華嚴經焉)인저: 그 모든 조건을 갖춘 것은 오직 대방광불화엄경 뿐이다.
제목을 ‘법이 속한 곳을 결론지었다’라고 하였다. 그 법계가 모두 대방광불화엄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관계를 참으로 잘 표현했다. 청양스님은 한마디로 불교 역사 속에서 글을 제일 잘 하는 분이다. 깨닫지 못하면 명함을 못내니까 깨달음이 물론 근본되어 있으므로깨달은 사람으로서 글을 제일 잘하는 분이 아마 청량 국사가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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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門 敎主는 헤아리기 어렵다 [敎主難思]
/故我世尊이 十身初滿에 正覺始成하사/ 乘願行以彌綸하시며/ 混虛空爲體性하시니/ 富有萬德이요 蕩無纖塵이로다
/그러므로 우리 世尊께서 十身이 처음 만족함에 正覺을 이루고, [1. 佛果가 가득함]
/誓願과 修行에 의지하여 두루 감싸며,[2, 因行이 깊음]
/허공과 합하여 체성이 되시니, [3, 體性이 깊음]
/부유함에는 萬德을 가지셨고, 텅 비어 없음은 먼지 하나 없도다.[4. 德을 갖추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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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난사(敎主難思) : 제3문의 제목을 전통적으로 교주난사라고 한다. 난사는 불가사의하다, 생각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위대한 점, 불가사의한 점을 표현하고 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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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세존(故我世尊)이 그러므로 우리 세존께서
십신초만(十身初滿)에 :십신이 처음 만족함에 수행이 가득 차서
정각시성(正覺始成)하사 : 비로소 정각을 이루었다.
화엄경 서두에 시성정각 내용이 나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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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만(初滿)은 막 가득해지자마자, 수행이 꽉 차자마자 라는 뜻이다. 초(初)자가 겨우 재(纔)자와 같다. 놀랍게도 부처님의 수행이 깨달음 직전까지 꽉 찬 것을 십신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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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신(十身)은 중생신(衆生身) 국토신(國土身) 업보신(業報身) 성문신(聲聞身) 연각신(緣覺身) 보살신(菩薩身) 여래신(如來身) 지신(智身) 법신(法身) 허공신(虛空身)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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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닫기까지 화두일념이 되어서 오매일여 되었다거나, 박사학위를 100개쯤 땄다거나, 선정이나 지혜가 가득했다는 소리는 하나도 안하고 열 가지 몸이 가득했다고 표현한 것은 화엄경을 잘 아는 사람만이 이렇게 표현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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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되어서 중생의 사정을 모르면 안 되기 때문에 그 열 가지 몸 중에 가장 첫째가 중생신이다. 부처님은 중생의 몸이 당신의 몸이 되고,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이 국토가 당신의 몸이 된다. 또 중생들의 업보가 당신의 몸이 되고, 성문, 연각, 보살, 여래 네 가지도 당연히 부처님의 몸이 된다. 성문이 필요할 땐 성문의 몸으로, 연각이 필요하면 연각의 몸으로, 중생이 필요할 땐 중생의 몸으로, 보살이 필요할 땐 보살의 몸으로, 여래가 필요하면 여래의 몸으로 부처님은 다 갖춘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지혜의 몸도 갖췄고 또한 법의 몸도 갖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허공신까지 갖추었다.
부처님이 이러한 열 가지 몸이 막 만족해지자마자 비로소 정각을 이뤘다.
이 구절은 앞으로 화엄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좋은 열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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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乘) 원행이(願行以) 미륜(彌綸)하시며 : 이렇게 띄어 읽어야 한다.
부처님이 선과 수행에 의지하여 두루 감싸며 중생들을 건지는데 무슨 재산, 무슨 실력으로 건지겠는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과 실천행이 있어야 된다.
탈 승자를 썼다. 원과 실천행에 올라탄다는 표현은 거기에 의지한다는 뜻도 된다.
원과 실천행에 의지해서 천천히 두루 감싼다. 미륜은 천천히 두루두루 감싸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려면 부처님의 몸, 그 성품이 어느 정도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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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混) 허공위(虛空爲) 체성(體性)하시니 : 혼은 허공과 합해서 자기의 체성이 되었다.
이쯤 되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좁아서 언제나 옳다 그르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분별하는 것이 많다. 그런데 부처님은 허공을 합해서 허공자체로서 체성을 삼았다. 이것을 ‘체성(體性)이 깊음’이라고 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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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만덕(富有萬德)이요 탕무섬진(蕩無纖塵)이로다 : 이 구절은 내가 참 좋아하는 구절이다. 우리가 세속적으로 부유하다고 할 때는 부유(富裕)라고 넉넉할 유(裕)자를 쓴다. 그런데 내가 ‘부유함에는’이라고 썼는데, 넉넉하고 풍부한 입장으로서는 만덕을 소유하고 있고 텅 비어 없는 입장으로서는 먼지하나 없다는 말이다.
탕(蕩)은 소탕한다, 다 비운다는 말이다. 텅 비운 입장에서는 섬진도 없다. 먼지하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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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표현이 근사하다. 이 구절에 대한 주해가 아주 많다. 풍부한 입장은 그야말로 만덕이니까 좋은 입장을 말하고 섬진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 번뇌, 사량분별, 일체 악지, 악감 등의 나쁜 것을 말하는데 그것을 탕했다고 했으니 싹 쓸어서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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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교주의 난사, 석가모니 부처님의 큰 위대함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세주묘엄품의 모든 내용들이 사실은 전부가 교주의 난사이다. 이것을 서문에서 다 이야기 하려면 화엄경을 다 이야기 해야 하니까 이렇게 간략하게 멋진 글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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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생각하며 다시 원문을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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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方廣佛華嚴經 往復序 1
唐 淸凉山 大華嚴寺沙門 澄觀 (淸涼國師) 撰
/왕복(往復)이 무제(無際)나/ 동정(動靜)은 일원(一源)이라/함(含) 중묘이유여(衆妙而有餘)하고/ 초(超) 언사이(言思而) 형출자(泂出者)는/ 기유법계여(其唯法界歟)며/ 부열(剖裂) 현미(玄微)하고 소확(昭廓) 심경(心境)하며/ 궁리진성(窮理盡性)하고 철과해인(徹果該因)하며/ 왕양(汪洋) 충융(沖融)하고 광대실비자(廣大悉備者)는/ 기유(其唯) 대방광불화엄경언(大方廣佛華嚴經焉)인저/고아(故我) 세존(世尊)이 십신초만(十身初滿)에 정각시성(正覺始成)하사/ 승(乘) 원행이(願行以) 미륜(彌綸)하시며/ 혼(混) 허공위(虛空爲) 체성(體性)하시니/ 부유(富有) 만덕(萬德)이요 탕무(蕩無) 섬진(纖塵)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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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 많고 많은 불교의 글 중에서 최고봉이라고 스스럼없이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왕복서의 서두를 조금 맛보았다. 본문은 교재 63쪽 제 7행 주공신부터 하겠다.
(4) 第七行의 主空神
가, 主空神衆의 得法
復次淨光普照主空神은 得普知諸趣一切衆生心解脫門하고 普遊深廣主空神은 得普入法界解脫門하고 生吉祥風主空神은 得了達無邊境界身相解脫門하고 離障安住主空神은 得能除一切衆生業惑障解脫門하고 廣步妙髻主空神은 得普觀察思惟廣大行海解脫門하고 無碍光焰主空神은 得大悲光으로 普救護一切衆生厄難解脫門하고 無碍勝力主空神은 得普入一切호대 無所着福德力解脫門하고 離垢光明主空神은 得能令一切衆生으로 心離諸蓋淸淨解脫門하고 深遠妙音主空神은 得普見十方智光明解脫門하고 光遍十方主空神은 得不動本處하고 而普現世間解脫門하시니라
또한 정광보조주공신(淨光普照主空神)은 여러 갈래의 모든 중생들의 마음을 널리 아는 해탈문을 얻었고, 보유심광(普遊深廣)주공신은 법계에 널리 들어가는 해탈문을 얻었고,
생길상풍(生吉祥風)주공신은 끝없는 경계에서 몸매를 분명하게 아는 해탈문을 얻었고,이장안주(離障安住)주공신은 모든 중생의 업과 번뇌의 장애를 제거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광보모계(廣步妙髻)주공신은 광대한 수행의 바다를 관찰하고 사유하는 해탈문을 얻었고,무애광염(無碍光焰)주공신은 큰 자비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의 액난을 널리 구호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무애승력(無碍勝力)주공신은 모든 것에 두루 들어가되 집착이 없는 복덕의 힘인 해탈문을 얻었고,
이구광명(離垢光明)주공신은 일체 중생들의 마음에 모든 번뇌를 떠나서 청정하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심원묘음(深遠妙音)주공신은 시방의 지혜광명을 널리 보는 해탈문을 얻었고, 광변시방(光遍十方)주공신은 본래의 처소에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세간에 두루 나타나는 해탈문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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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행을 표한 주공신이 찬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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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신과 그 대중들이 얻은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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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정광보조주공신(復次淨光普照主空神)1은: 또 정광보조주공신이라고 하는 분은
득보지제취일체중생심해탈문(得普知諸趣一切衆生心解脫門)하고: 제취일체중생심을 널리 아는 해탈문을 얻었다. 제취하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도 천도 등 6취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사람 마음만 아는 것이 아니고 6취 중생의 모든 마음을 다 아는 해탈문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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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심광주공신(普遊深廣主空神)2은
득보입법계해탈문(得普入法界解脫門)하고 : 법계에 널리 들어가는 해탈문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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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길상풍주공신(生吉祥風主空神)3은: 길상풍을 생산해 내는 주공신, 그 이름도 낱낱이 해석하면 재미있다.
득요달무변경계신상해탈문(得了達無邊境界身相解脫門)하고 : 무변 경계 신상까지도 다 요달하는 해탈문을 얻었다. 앞서 십신초만의 부처님은 허공신까지 있었다. 그런 끝없는 경계신상까지도 부처님은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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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안주주공신(離障安住主空神)4은
득능제일체중생업혹장해탈문(得能除一切衆生業惑障解脫門)하고 :일체 중생의 업과 미혹과 장애를 능히 제거하는 해탈문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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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보묘계주공신(廣步妙髻主空神)5은
득보관찰사유광대행해해탈문(得普觀察思惟廣大行海解脫門)하고 : 부처님의 넓고 큰 수행의 바다를 두루두루 관찰하고 사유하는 해탈문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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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광염주공신(無碍光焰主空神)6은
득대비광(得大悲光)으로 : 대비광으로써
보구호일체중생액난해탈문(普救護一切衆生厄難解脫門)하고 : 일체 중생들의 액난을 널리 구호하는 해탈문을 얻었다.
중생의 액란을 구호하려면 대자대비가 있어야 되는데 이름이 대비광이니까 딱 아주 잘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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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승력주공신(無碍勝力主空神)7은
득보입일체(得普入一切)호대 : 모든 곳에 다 들어가되
무소착복덕력해탈문(無所着福德力解脫門)하고 : 집착하는 바가 없는 복덕력의 해탈문을 얻었다. 이것인 진짜 복덕력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간에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진짜 복덕이 되는데 중생심은 그런 것이 참으로 어렵다.
그런데 이분은 무엇을 하더라도 집착하는 바가 없다. 그것이 바로 복덕의 힘이다. 구절 하나하나가 우리 수행하는 사람에게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참 좋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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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광명주공신(離垢光明主空神)8은
득능영일체중생(得能令一切衆生)으로 :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심이제개청정해탈문(心離諸蓋淸淨解脫門)하고 : 마음으로부터 모든 번뇌를 떠나게 하는 청정 해탈문을 얻었다. 덮을 개(蓋)자는 번뇌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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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묘음주공신(深遠妙音主空神)9은
득보견시방지광명해탈문(得普見十方智光明解脫門)하고 : 시방의 지혜광명을 널리 보는 해탈문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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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변시방주공신(光遍十方主空神)10은 : 광이 시방에 두루 한다고 하는 주공신은
득부동본처(得不動本處)하고 : 본처에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이보현세간해탈문(而普現世間解脫門)하시니라 : 세간에 널리 나타나는 해탈문을 얻었다.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이 도솔천이나 도리천, 야마천, 타화자재천 등으로 올라갈 때 항상 당신이 깨달으신 보리수 밑을 떠나지 아니하고 올랐다고 표현한다.
인도부다가야에 있는 그 보리수 밑을 떠나지 아니하고 도리천에 올랐고, 보리수를 떠나지 아니한 채 도솔천에 올랐으며 타화자재천에 올랐다.
어쩌면 우리도 늘 어디엔가 떠나지 아니하고 여기 와 있을 것이다. 또 무엇을 하든지 따지고 보면 나라고 하는 것에서 떠나 있지 않다. 우린 뭘 하든지 나다.
내가 좋은 일을 하든 나쁜 일을 하든 꿈을 꾸든 정신이 빠져있든 말았든 항상 나를 떠나 있었던 적이 없다. 나를 근거 하고 있다.
그것을 화엄경에서는 보리수 아래를 떠나지 아니한 채 도리천에 올라가고 도솔천에 올라가고 타화자재천에 올라가는 모습으로 보이고 있다.
나, 偈頌讚歎
爾時에 淨光普照主空神이 承佛威力하사 普觀一切主空神衆하고 而說頌言하사대
如來廣大目이 淸淨如虛空이라
普見諸衆生하사 一切悉明了로다
佛身大光明이 遍照於十方하사
處處現前住하시니 普遊觀此道로다
佛身如虛空하사 無生無所取며
無得無自性이시니 吉祥風所見이로다
如來無量劫에 廣說諸聖道하사
普滅衆生障하시니 圓光悟此門이로다
我觀佛往昔에 所集菩提行호니
悉爲安世間이라 妙髻行斯境이로다
一切衆生界가 流轉生死海어늘
佛放滅苦光하시니 無碍神能見이로다
淸淨功德藏이여 能爲世福田이라
隨以智開覺하시니 力神於此悟로다
衆生癡所覆로 流轉於險道어늘
佛爲放光明하시니 離垢神能證이로다
智慧無邊際하야 悉現諸國土하사
光明照世間하시니 妙音斯見佛이로다
佛爲度衆生하사 修行遍十方하시니
如是大願心을 普現能觀察이로다
그때 정광보조주공신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모든 주공신 대중들을 널리 살펴보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여래의 넓고 크신 눈
청정하기 허공과 같도다
모든 중생을 널리 보사
일체를 다 밝게 아시네
부처님 몸의 큰 광명이
시방을 두루 비치사
곳곳마다 앞에 나타나 머무시니
보유주공신이 이 도를 보았네
부처님의 몸 허공과 같으사
남[生]도 없고 취할 것도 없으며
얻음도 없고 자성(自性)도 없으시니
길상풍주공신이 본 것이로다
여래의 한량없는 겁 동안
여러 가지 성스러운 도를 널리 설하사
중생들의 장애를 두루 소멸하사
원광주공신이 이 문을 깨달았네
내가 보니 부처님이 지난 옛적에
모아 놓은 보리행(菩提行)은
모두 세간을 편케 하기 위함이라
묘계주공신이 이 법을 행했도다
모든 중생의 세계가
생사의 바다에서 흘러 다니거늘
부처님이 고통을 없애는 광명을 놓으시니
무애(無碍)주공신이 잘 보았도다
청정한 공덕의 창고여
세간의 복 밭이 됨이라
그들을 따라 지혜로써 깨닫게 하시니
역신주공신이 여기에서 깨달았네
중생들이 어리석음에 덮여
험한 길을 흘러 다니거늘
부처님이 광명을 놓으시니
이구주공신이 증득했도다
지혜가 끝이 없어서
모든 국토에 다 나타나사
광명으로 세간을 비추시니
묘음주공신이 부처님을 보았네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시방에 두루 수행하시니
이러한 큰 서원의 마음을
보현주공신이 능히 관찰했도다.
*
주공신의 찬탄
*
그때에 정광보조주공신(淨光普照主空神)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일체 주공신들을 널리 살피시고 게송을 설해 말하대
*1
여래광대목(如來廣大目)이 : 여래의 넓고 큰 눈이, 여기는 다섯 자 게송으로 되어 있다.
청정여허공(淸淨如虛空)이라 : 텅 비어서 허공과 같다. 청정이라는 말은 텅 비었다는 뜻이다. 화엄경의 안목으로 보면 온 세상이 그냥 그대로 여래의 눈이다.
보견제중생(普見諸衆生)하사 :모든 중생들을 널리 살피사
일체실명료(一切悉明了)로다 :낱낱이 다 밝고 환하게 한다. 중생을 살피는데 대충 살피는 것이 아니다. 왕복서에서 부열현미(剖裂玄微)라고 했듯이, 요즘의 물리학에서 분자니 원자니 하고 쪼개는 것처럼, 깊고 미묘한 것까지도 부단히 쪼개고 쪼개서 분석한다. 이 화엄경에서는 최소한도 그렇게 보고 있다.
*2
불신대광명(佛身大光明)이 : 부처님은 그대로 대광명이다. 불교에 빛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불교는 빛이다. 사실은 세상이 빛이다.
변조어시방(遍照於十方)하사 : 시방을 두루두루 비추사
처처현전주(處處現前住)하시니 : 곳곳에서 앞에 환히 나타나서 머무시니.
이 이치대로라면 현재 우리가 처하고 있는 이것이 그대로 불신이다.
모두 불신 속에 있다. 꽃은 꽃대로 불신의 표현이고 저는 저대로 불신이 이렇게 작용하고 이런 얼굴 이런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 각자의 모습이 불신의 한 표현이다. 무슨 생각을 하든지, 무슨 동작을 하든지 그것 또한 불신의 한 표현이다.
보유관차도(普遊觀此道)로다 : 이것은 보류주공신[普遊深廣主空神]이 이 도를 살펴보았더라.
*3
불신여허공(佛身如虛空)하사 : 불신이 허공과 같으사. 불신이 위에 이어서 두 번째로 또 나왔다.
무생무소취(無生無所取)며 :생도 없고 또한 취함도 없어
무득무자성(無得無自性)이시니 :어둠도 없고 또한 자성도 없으니
길상풍소견(吉祥風所見)이로다 : 길상풍주공신[生吉祥風主空神]이 본 바더라.
나는 이 대목을 ‘불신의 중도성’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불교에서는 ‘일색일향(一色一香)이 무비중도(無比中道)’ 라고 표현하는데, 중도의 안목으로 보면 한 색깔 한 향기가 중도 아닌 것이 없다. 불신도 당연히 중도다.
그렇다고 중도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통일된 하나의 원리가 있는데, 그 원리를 부처님이 이름하여 중도라고 한 것이다. 이름을 붙이면 설명하기가 좋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불신은 허공과 같다고 하였다. 허공은 텅 비어 있지만은 않다. 비어있으면서도 허공 속에 모든 것이 다 존재한다. 진공묘유이다.
또 불신이 얼마나 얻을 것이 많고 취할 것이 많은가. 그런데 생도 없고 취할 것도 없다고 하였다. 이것을 단순하게 텅 빈 입장[空性]으로만 표현했다고 볼 수는 없다. 텅 빈 것은 항상 있음을 대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대목도 불신의 중도성을 표현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중도로써 존재한다.
*4
여래무량겁(如來無量劫)에 : 여래가 한량없는 겁에
광설제성도(廣說諸聖道)하사 :모든 성스러운 길을 널리 설하사.
우리 팔만대장경은 전부 성스러운 길이다. 다 성도(聖道)를 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하자고 성스러운 길, 성스러운 가르침을 설하는 것인가?
보멸중생장(普滅衆生障)하시니 : 중생들의 장애를 널리 소멸하기 위한 것이다. 중생들의 장애. 고(苦)와 혹(惑)과 번뇌 이 모든 것을 소멸하기 위한 것이다.
원광오차문(圓光悟此門)이로다 :원광주공신[離障安住主空神]이 이 문을 깨달았더라.
*5
아관불왕석(我觀佛往昔)에 : 내가 보니 부처님이 지난 날에
소집보리행(所集菩提行)호니 : 모은 바 보리행을 관찰하니.
보리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지혜와 자비다.
과거 부처님이 지혜의 실천과 자비의 실천을 많이 수집했는데, 그것을 왜 그렇게 모았는가?
과거 부처님이 지혜라고 하는 돈, 자비라고 하는 돈을 왜 그렇게 모았나?
실위안세간(悉爲安世間)이라 :모두가 세상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다.
모든 수행, 내가 짓는 모든 공덕은 어떻게 하더라도 세상을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함이다.
그것도 배가 고프다고 해서 한끼 밥을 사주는 정도가 아니다. 불교에서 중생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원리를 가르쳐서 영원히 배불리 살도록 하는 것이다. 불교의 자비는 이렇게 대단하다.
*
흔히 ‘고기를 한 마리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하는데 이것은 세속의 비유다. 물론 이 대목에서는 그 표현이 딱 맞긴 하지만, 불교에서는 비유마저도 생명을 죽이는 것은 비유가 안 된다. 회의를 하거나 시간이 없을 때 ‘거두절미 하고’ 이런 말도 쓰는데 그 역시 절대 안 쓰는 말임을 알아야 된다.
거두절미라는 말은 생선을 놓고 머리 자르고 꼬리를 잘라서 중간 토막만 준다는 뜻이다. 불자가 절대 써서는 안되는 표현인 것이다. 그만치 불교는 낱낱이 섬세하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화엄경에서 이런 것을 다 들었으니까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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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계행사경(妙髻行斯境)이로다 : 묘계주공신[廣步妙髻主空神]이 이러한 경계를 행했더라.
*6
일체중생계(一切衆生界)가 : 일체 중생의 세계가
유전생사해(流轉生死海)어늘 : 생사의 바다에 흘러다니거늘
불방멸고광(佛放滅苦光)하시니:부처님께서 고통을 소멸하는 광명을 놓으시니,
무애신능견(無碍神能見)이로다 :무애주공신[無碍光焰主空神]이 능히 이것을 보았더라. 참 좋은 표현이다. 중생들이 생사 속에 얼마나 많이 헤매고 다니는가. 불교라고 하는 이 가르침의 광명은 고통을 소멸하는 빛이다.
부처님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 고통을 소멸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그 고통을 소멸하는 원리를 가르쳐 준 분이다.
청정공덕장(淸淨功德藏)이여 : 청정한 공덕의 장이여
능위세복전(能爲世福田)이라 : 능히 세상의 복전이 된다.
수이지개각(隨以智開覺)하시니 :지혜를 따라서 열어서 깨닫는다. 이것도 부처님을 두고 하는 소리이다.
그 공덕장이 능히 세상의 복전이 되는데 전부 지혜로써 그것을 열어서 깨닫게 할 수 있다. 지혜 있는 사람이 복을 안다. 지혜가 있어야 복이 따른다.
력신어차오(力神於此悟)로다: 무애승력주공신(無碍勝力主空神)이 여기에서 깨달았더라.
여기서는 역신이라고 했지만, 일곱 번째 주공신이니까 무애승력주공신이다. 번역하면서는 그 이름을 구체적으로 다 넣어줘야 된다.
*8
중생치소부(衆生癡所覆)로 : 중생의 어리석음이 덮인 바로
유전어험도(流轉於險道)어늘 : 험한 길에 유전한다.
참 죄송한 말이지만, 우리가 험하게 사는 것 고통스럽게 사는 것 어렵게 사는 것은 중생이 어리석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냉정하다. 좀 섭섭하지만 원리대로 이치대로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다.
나부터도 분명히 내가 고통 받고 뭔가 잘못되고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내가 어리석기 때문이다. 중생이 어리석음이 덮인 바로 험한 길에 흘러다닌다고 하는 것이 가차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신도들을 위로할 때는 위로해주지만 냉정하게 깨우쳐 줄 때는 깨우쳐 줘야 된다. 남 깨우쳐 주기 전에 우리들부터 깨달아야 된다.
불위방광명(佛爲放光明)하시니 :부처님께서 지혜의 광명을 놓으시니
이구신능증(離垢神能證)이로다 : 이구주공신[離垢光明主空神]이 능히 증득했더라. 이 분은 때를 여읜 주공신이다.
*9
지혜무변제(智慧無邊際)하야 : 지혜가 그 끝이 없어서
실현제국토(悉現諸國土)하사 : 모든 국토에 나타나서
광명조세간(光明照世間)하시니 :광명으로써 세간을 비추시니
묘음사견불(妙音斯見佛)이로다: 묘음주공신[深遠妙音主空神]이 여기에서 부처님의 경지를 보았더라.
*10
불위도중생(佛爲度衆生)하사 :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수행변시방(修行遍十方)하시니 :온 시방에서 수행하시니. 부처님은 어느 한 곳에서만 수행한 것이 아니다. 온 시방세계에서 수행 안 한 곳이 없다.
우리도 화두 드는 사람은 늘 화두 들고 다니고, 처처 어디 간들 쉴 곳이 어디 있으며 어디 간들 공부 안 할 곳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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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선방스님들 법문을 들으면 ‘해제하고 나갈 때 방석 밑에다 화두 딱 넣어놓고 돌아오면 그때사 방석 밑에서 꺼내가지고 든다.’ 혹은 ‘해제하면 일주문에다 딱 화두 걸어놓고 나가고 들어올 때 일주문에서 벗어 가지고 들어온다’는 등의 이야기도 한다.
사실 그 정도만도 괜찮은데, 불자가 여행을 가거나 어디를 갈 때는 꼭 경전을 지니고 다녀야 된다. 스님들도 그렇고, 신도들에게도 읽지 않아도 좋으니 금강경이나 천수경, 불자지송이라도 들고 다니도록 해야 된다. 수지 독송 서사 해설 오종법사 중에 일차가 들고다니는 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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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대원심(如是大願心)을 :이와 같은 큰 원력의 마음을
보현능관찰(普現能觀察)이로다 :보현주공신[光遍十方主空神]이 능히 관찰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