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 상권

통융 2018. 8. 27. 15:02

K0623V17P0702b20L; 大乘起信論卷上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상권



마명(馬鳴) 지음

실차난타(實叉難陀) 한역

김월운 번역






다함이 없는 시방 세계에서

끝없이 큰 불사를 지으시되

한없고 자재하신 지혜로써


K0623V17P0702c01L; 救護世閒尊 及彼體相海 無我句義法



세간을 구호하시는 님과


그리고 그 본체이며 형상이신 *

무아의 말씀과 

이치인 법과

끝없는 덕을 갖추신 승보로서

부지런히 정각을 구하시는 님께 귀의하옵고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의식을 끊고 삿된 집착 버리며

믿음을 일으켜 

부처님의 종자를 잇게 하고자

제가 지금 이 논을 지으려 하옵니다. 



대승의 맑은 믿음을 일으켜 

모든 중생의 어두운 의혹과 

삿된 집착을 끊고 

불종성(佛種性)을 이어서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논을 짓는다. 




어떤 법이 

대승의 믿음[신근信根]을 내는데 

이러한 까닭을 설명해야 한다. 


설명에는 

다섯 구분이 있으니, 



[6 / 36]



첫째는 작인분(作因分)이요, 

둘째는 입의분(立義分)이요, 

셋째는 해석분(解釋分)이요, 

넷째는 수신분(修信分)이요, 

다섯째는 이익분(利益分)이다. 



이 가운데의 작인에 8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상(總相)이니 

중생들로 하여금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함이요, 

이양(利養) 등을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여래의 근본적인 진실한 이치를 드러내어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견해를 내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셋째는 

선근(善根)이 성숙한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에서 물러나지 않고 

대승법을 감당해내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넷째는 

선근이 미약한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을 일으켜 

물러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다섯째는 

중생들로 하여금 

업장을 소멸하고 

자기의 마음을 조복하여 

삼독(三毒)을 여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여섯째는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지관(止觀)을 닦아 

범부나 소승들의 허물을 물리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일곱째는 

대승법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생각하여 

부처님 앞에 태어나서 

끝내 대승의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여덟째는 

대승을 믿고 좋아하는 이익을 드러내 보여 

모든 중생[함식含識]에게 권하여 

그들로 하여금 향해 돌아오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이 모든 말씀과 이치[의義]는 

대승경전에 이미 갖추어 있다. 


그러나 

교화를 받을 이의 근기와 욕구가 같지 않고 

깨달음을 얻는 반연도 같지 않다. 


그러므로 이 논을 짓는다. 







이는 다시 무슨 뜻인가?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엔 

교화를 받을 이의 근기가 뛰어나고 


부처님의 모습과 마음도 수승하여 

한 음성[1음一音]으로 끝없는 이치를 열어 연설하기 때문에 

논이 필요치 않았지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엔 

어떤 이는 자신의 힘으로 

경을 조금만 보고도 많은 이치를 이해하고, 



K0623V17P0703a02L; 自力廣見諸經乃生正解或有自無



또 어떤 이는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경을 널리 보고서야 바르게 이해하고, 


어떤 이는 

자신에게 지혜의 힘이 없어 

광대한 논설을 두려워하고 

간략한 논이 광대한 이치를 품고 있는 것을 좋아하여 

바른 수행을 하는 이도 있는데, 



[7 / 36]



나는 이제 마지막 부류의 사람을 위한 까닭에 

여래의 가장 수승하고 

심히 깊고 끝없는 이치를 묶어서 

이 논을 짓는다. 







어떤 것이 입의분인가?




마하연(摩訶衍)에 

2 가지가 있으니, 

유법(有法)1)과 법이다. 


유법이란 일체 중생의 마음이니, 

이 마음은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포섭한다. 


이 마음에 의하여 

마하연의 이치를 드러내나니, 


이 심진여(心眞如)의 상(相) 그대로가 

대승의 체(體)를 보이기 때문이요, 


이 심생멸(心生滅)의 인연(因緣)과 상(相)이 

능히 대승의 체(體)․상(相)과 용(用)을 

드러내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법이란 간략히 3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체대(體大)니, 

일체법의 진여가 염(染)에 있건 정(淨)에 있건 

그 성품은 항상 평등하여 증감(增減)도 없고* 

달라짐[별이別異]도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상대(相大)니, 

여래장(如來藏)은 

본래부터 무량․무변한 본성의 공덕을 갖추었기 때문이요, 


셋째는 용대(用大)니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선한 인과를 내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께서 

본래 타셨던 것[승乘]이며 

모든 보살이 모두가 이를 타고 

부처님의 경지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해석분(解釋分)인가?

여기에 세 종류가 있다. 


말하자면 

진실한 이치를 드러내어 보임[현시실의顯示實義]과 

삿된 집착을 물리침[대치사집對治邪執]과 

바른 도를 수행하는 모습을 분석한 것[분별수행정도分別修行正道]이다. 



이 가운데 

현시실의(顯示實義)란 

한마음[1심一心]에 의하여 

2 가지 문[2문二門]이 있으니 


마음 그대로가 진여인 심진여문(心眞如門)과 

마음 그대로가 생멸인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이 두 문은

제각기 일체 법을 껴안고 있으니 


이들은 서로서로가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K0623V17P0703b01L; 故心眞如者卽是一法界大摠相法



심진여문(心眞如門)이란 

온 법계를 하나로 묶는 큰 법문의 틀인 

대총상법문체(大總相法門體)니 

이 마음의 본성품은 

생멸하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주]------


1)유법(有法)1) 


전진유법(前陳有法)의 준말이니 

어떤 사물의 정의를 제시할 때 

사물의 부분을 이르는 말이다. 

예컨대 물이 시원하다 할 때 

물은 유법에 해당한다. 





[8 / 36]



일체 모든 법은 

모두가 망념에 의하여 

차별이 있는 것이나 


만일 망념을 여의면 

경계의 차별된 모습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본래부터 언어(言語)의 길이 끊겼고 


일체 문자로 드러내어 설명하지도 못하며, 

마음으로 반연할 길이 끊겨서 

아무런 모습도 없다. 


끝내 평등하여 

영원히 변함이 없고 

파괴할 수도 없어서 

오직 일심이기 때문에 진여라 한다.  


진여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말로 할 수가 없고 

분별할 수도 없다. 



모든 언어는 거짓일 뿐 진실하지 않나니 

다만 망념을 따를 뿐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여라고 말은 하였으나 

이 또한 상이 없나니 

다만 모든 언어 가운데의 극치일 뿐이다. 


이 말로써 

저 말을 물리쳤을 뿐이요


그 본체나 본성에는 

물리칠 것도 없고 

세울 것도 없다. 







●  


그렇다면 

중생이 어떻게 수순(隨順)하여 

깨달아 들어가겠는가?





○ 


만일 일체 법을 말하되 


말하는 이도 없고 

말한 것도 없으며, 

일체 법을 기억하되 

기억하는 이도 없고 

기억한 것도 없음을 안다면 

그럴 때를 수순이라 하고, 


망념이 다하면 

이를 깨달아 들었다 한다. 





또 진여란 것은 

언어에 의해 건립되었으나 

2 가지는 차별이 있다. 


첫째는 진실공(眞實空)이니 

진실하지 못한 상을 끝까지 멀리 여의고 

진실의 본체를 드러내기 때문이요, 


둘째는 진실불공(眞實不空)이니, 

본 성품이 끝없는 공덕을 갖추어 

자기 본체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진실공이란 

본래부터 모든 염법(染法)이 어우르지 못하기 때문이며, 

일체법의 차별된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허망한 분별심이 없기 때문이니 

이로써 알라. 






진여는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며[비유상非有相],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니며[비무상非無相], 

유상과 무상이 공존하는 것도 아니며[비유무상非有無相], 

유상과 무상을 모두 배제하는 것도 아니며[비비유무상非非有無相],



K0623V17P0703c01L; 無相非一相非異相非一異相非非



단일한 형상도 아니며[비일상非一相], 

차별된 형상도 아니며[비이상非異相], 

단일상과 차별상이 공존하는 것도 아니며[비일이상非一異相], 

단일상과 차별상을 모두 배제한 것도 아니다[비비일이상非非一異相]. 



간략히 말하건대 

일체 중생의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접할 수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였으나 


사실에 의해 말한다면 

망념이란 것도 있지 않고 


공의 성품이란 것 또한 공하니, 

막아야 할 것이 없으면 

막는 이도 따라서 없기 때문이다. 



[9 / 36]





진실불공(眞實不空)이란 

망념이 공하여 없음으로써 

진심은 항상하여 변치 않고 

맑은 법이 원만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공하지 않다는 뜻에서 불공(不空)이라 한다. 


그러나 불공의 모습 또한 없는 것이니, 

망념의 마음으로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며, 

망념을 여읜 지혜로 증득할 경지이기 때문이다. 









심생멸문(心生滅門)이란 것은 


여래장(如來藏)에 의하여 

생멸심(生滅心)이 움직이나니 


생멸하지 않는 것이 생멸과 화합해서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한다. 




이 식에 

2 가지 이치가 있으니, 


이른바 

일제 법을 껴안고, 

일체 법을 내는 것이다. 



다시 2 가지 이치가 있으니, 

첫째는 각의 이치[각의覺義]요, 

둘째는 불각의 이치[불각의不覺義]다. 




각의 이치[각의覺義]란 

마음의 으뜸가는 성품[제1의성第一義性]으로서 

일체 망념을 여윈 모습이다. 


일체 망념을 여윈 모습이기 때문에 

허공계와 동등해서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는 법계 그대로의 모습이니 

이것이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여래평등법신如來平等法身]이다. 



이 법신(法身)에 의하여 

일체 여래를 본각(本覺)이라 하니 

시각(始覺)을 상대하여 

본각이라는 명칭을 세운다. 


그러나 시각이 될 때가 곧 본각인지라 

따로 다른 각(覺)을 세운 것은 아니다. 



시각(始覺)이란 것은 

본각에 의하여 불각이 있고 

불각에 의하여 시각이 있다고 말한다. 


또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으므로 

구경각(究竟覺)이라 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님[비구경각非究竟覺]이라 한다. 


예컨대 범부가 

앞 생각엔 불각이어서 번뇌를 일으키다가 

뒷 생각에서 제어하고 항복시켜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면 

이를 각이라 할 수는 있으나 역시 불각이요, 



K0623V17P0704a01L; 初業菩薩覺有念無念體相別異以



이승의 무리[2승인二乘人]나 

처음으로 발심한 보살들이 

생각 있음[유념有念]과 생각 없음[무념無念]의 

본체[체體]와 형상[상相]이 다른 것을 깨닫고 

거친 분별[추분별麤分別]을 버리면 

비슷한 깨달음[상사각相似覺]이라 하고, 


법신보살(法身菩薩)이 

생각 있음과 생각 없음이 

모두 상(相)이 없는 것을 깨달은 뒤에 

중품의 분별[중품분별中品分別]을 버리면 

상당한 수준의 깨달음인 수분각(隨分覺)이라 하고, 




[10 / 36]


만일 보살의 경지를 초과하여 

끝맺는 도[구경도究竟道]가 만족해져서 

잠깐 사이[1념一念]에 상응하여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달으면 

비로소 각이라 할 수 있는 시각(始覺)이요, 



깨달았다는 상도 멀리 여의어 

미세한 분별[미세분별微細分別]마저 끝까지 다하여 

마음의 근본인 성품이 항상 머무르면서 눈앞에 나타나면 

이것을 여래의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어떤 중생이 일체 망념이 모습 없는 줄로 관찰하면 

이것이 곧 여래의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다”라고말씀하셨다. 



또 마음이 처음 일어난다는 것은 

다만 세속을 따라 말했을 뿐이나 

그 첫 모습을 구하면 끝내 얻을 수 없다. 


마음도 오히려 있지 않거늘 

하물며 처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일체 중생은 각이라 하지 못하나니, 

끝없는 옛적부터 

항상 무명과 망념이 있어 이어지면서 

잠시도 여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망념이 쉬면 

즉시에 마음의 모습인 

생(生)․주(住)․이(異)․멸(滅)이 

모두가 모습이 없는 것임을 알리니, 


한마음의 앞과 뒤가 동시일 뿐 

모두가 서로 응하지 못하고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알고 나면 

시각이란 것도 얻을 수 없음을 아나니 

본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본각이 염의 분별[염분별染分別]을 따라 

2 가지 차별된 모습이 생기나니, 


첫째는 지혜의 바탕이 청정한 상[정지상淨智相]이요, 

둘째는 부사의하게 중생을 교화하는 작용을 일으키는 상[불사의용상不思議用相]이다. 




정지상(淨智相)이란 

법력의 훈습에 의하여 

여실히 수행해서 공행(功行)이 만족해지면 

화합식(和合識)을 깨뜨리고 


전식(轉識)의 모습을 멸하면 

법신의 청정한 지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체 심과 식의 모습[심식상心識相]은 

그대로가 무명의 모습이거니와 


본각과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아서 

무너지는 것도 아니요, 

무너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마치 바닷물과 파도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나니 


파도가 바람을 인해 움직이지만 

물의 성질은 움직이지 않고 



K0623V17P0704b01L; 動若風止時波動卽滅非水性滅衆


바람이 멈출 때엔 파도는 사라지나 

물의 성품은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서 

본래부터 청정한 마음이 

무명이라는 바람이 흔드는 까닭에 

식(識)의 물결이 일어나나니 


이와 같은 3 가지 일은 

모두가 형상이 없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11 / 36]


그러나 

본성의 청정한 마음은 

요동하는 식의 근본이니 


무명이 멸할 때에 

요동하는 식은 따라서 멸하나 

지혜의 성품은 무너지지 않는다. 



부사의용상(不思議用相)이란 

맑은 지혜에 의하여 

일체 수승하고도 묘한 경계를 일으키되 

항상 끊어짐이 없는 것이니, 


이른바 

여래의 몸에 

한량없고 가장 수승한 공덕을 갖추고서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무량한 이익을 성취하는 모습을 시현하는 것이다. 




또 각의 모습에는 

4 가지 큰 이치가 있어 


청정함이 허공 같고 

밖은 거울 같으니, 


첫째는 

진실로 공한 큰 이치[진실공대의眞實空大義]가 

허공 같고 밝은 거울 같음이니, 

이른바 일체 마음과 경계의 모습과 

그리고 깨달음의 모습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진실로 공하지 않은 큰 이치[진실불공대의眞實不空大義]가 

허공 같고 밝은 거울 같음이니, 

이른바 일체 법이 원만히 성취되어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성품이며, 


일체 세간의 경계의 모습이 

모두 그 안에서 나타나되 

들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며 

멸하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는 

항상 머무는 한마음이며, 

일체 물든 법이 물들이지 못하는 바이며, 

지혜의 바탕에 끝없는 무루의 공덕을 구족한 것으로 

인(因)을 삼아 일체 중생의 마음에 훈습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진실로 공하지 않아 장애를 여의는 큰 이치[진실불공이장대의眞實不空離障大義]가 

허공 같고 밝은 거울 같음이니, 

이른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2 가지를 영원히 끊고 

화합식(和合識)이 멸하며 

본 성품이 청정한 경지에서 항상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이다. 



넷째는 

진실로 공하지 않아 시현하는 큰 이치[진실불공시현대의眞實不空示現大義]가 

허공 같고 밝은 거울 같음이니, 

이른바 장애를 여읜 법에 의하여 

응화(應化)해야 할 계제에 따라 

여래 등의 갖가지 빛과 소리를 시현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든 선근을 닦게 하기 때문이다. 








불각의 이치[불각의不覺義]란 

끝없는 옛적부터 진여의 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는 까닭에 


K0623V17P0704c01L; 法一故不覺心起而有妄念然彼妄


깨닫지 못하는 마음[불각심不覺心]이 일어나서 

망념(妄念)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망념이라는 것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어서 

본각을 여의지 않는다. 


마치 미혹한 사람이 

바른 방위에 의한 까닭에 미혹했으나 

미혹이란 것이 자체가 없어서 

본래의 방위를 여의지 않는 것과 같다. *



중생도 그러하여서 

각에 의한 까닭에 

불각과 망념이 있어 미혹이 생긴다. 




[12 / 36]


그러나 

그 불각은 원래 실체가 없어 

본각을 여의지 않는다. 


또 불각을 상대하여 진각(眞覺)을 말하거니와 

불각이 이미 없으므로 진각 또한 없다. 







또 각에 의한 까닭에 불각이 있어 

3 가지 모습을 내어 서로 여의지 않는다. 



첫째는 무명업상(無明業相)이니 

불각에 의하여 마음이 움직이면 

업이 된다. 


깨달으면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면 괴로움이 있으니 

과(果)가 인(因)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보는 주체인 능견상(能見相)이니, 

마음의 움직임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경계를 보는 것이니, 


움직이지 않으면 

보는 주체도 없다. 



셋째는 

보이는 대상인 경계상(境界相)이니, 

보는 견에 의하여 허망한 경계가 나타나고 

견을 여의면 경계도 없어진다. 








허망한 경계인 연(緣)이 있기 때문에 

다시 6 가지 모습을 낸다. 


첫째는 지상(智相)이니, 

이른바 경계를 반연하여 

사랑스럽다거나 

사랑스럽지 않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요,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니, 

이른바 

지혜에 의하여 

괴롭다거나 즐겁다는 느낌을 내어 

상응함이 끊이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집착상(執着相)이니, 

괴로움과 즐거움의 느낌이 이어짐에 의하여 

집착이 생기는 것이요, 



넷째는 집명등상(執名等相)이니, 

이른바 집착에 의하여 

명칭 등 모든 나열된 현상을 분별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기업상(起業相)이니, 

이른바 명칭 등에 집착함에 의하여 

갖가지 온갖 차별된 업을 일으키는 것이요, 



여섯째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니, 

이른바 업에 의하여 

고통을 받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알라. 



일체 염법(染法)은 

모두가 제 모습이 없는 것이니, 

모두가 무명에 의해 생기기 때문이다. 


또 각과 불각에는 2 가지 모습이 있으니, 

첫째는 같은 모습[동상同相]이요, 

둘째는 다른 모습[이상異相]이다. 




동상(同相)이란 것은 

마치 갖가지 토기(土器)가 

모두 같은 흙의 모습이듯이 


K0623V17P0705a01L; 相如是無漏無明種種幻用皆同眞


무루(無漏)와 무명(無明)의 갖가지 요술 같은 작용은 

모두가 같은 진여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은 

끝없는 옛적부터 

항상 열반에 들었고, 


보리는 닦을 수 있는 모습도 아니며 

생겨나는 모습도 아니어서 

끝내 얻을 수도 없고, 

어떤 색상으로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색상을 보는 것은 

마땅히 알라. 


모두가 염(染)을 따르는 

요술 같은 작용일 뿐이요, 


지혜가 색(色:물질)처럼 

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지혜의 모습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더 많은 것을 

경전들에서 말씀하셨다. 



[13 / 36]





이상(異相)이란 


마치 갖가지 토기가 

제각기 같지 않은 것같이 

이 일도 그러하여서 

무루와 무명의 요술 같은 작용의 모습이 

차별된 것뿐이다. 


또 생멸하는 동기인 

생멸인연(生滅因緣)이란 


이른바 

모든 중생이 

마음[심心]과 뜻[의意]과 식(識)에 의하여 움직인다. 



이 이치가 어떠한가?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의하여 

무명과 불각(不覺)이 일어나서 

보고[능견能見] 

나타내고[능현能現] 

경계를 취하고[능취경계能取境界] 

분별하여 상속하는 것[분별상속分別相續]을 

의(意)라 한다. 








이 의(意)에 

다시 5 가지 다른 이름이 있다. 



첫째는 업식(業識)이니 

이른바 무명의 힘으로 

불각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요, 


둘째는 전식(轉識)이니 

움직인 마음에 의하여 경계의 모습을 보는 것이요, 


셋째는 현식(現識)이니 

이른바 일체 경계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니 

마치 밝은 거울이 뭇 색상(色傷)을 나타내는 것 같이 

현식도 그러하여 

5 가지 경계가 이르기만 하면 곧 나타나되 

전후도 없고 다른 공력을 말미암지도 않는다. 



넷째는 지식(智識)이니

이른바 염과 정의 

온갖 차별된 법을 분별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상속식(相續識)이니 

이른바 항상 뜻을 지어 

상응하기를 끊이지 않아 

과거의 선악 등의 업을 잘 간직하여 

잃거나 무너짐이 없게 하고, 

현재와 미래의 고락 등의 과보를 성숙시키되 

어기거나 뛰어넘음이 없게 하고, 

이미 지난 일을 홀연히 기억하게 하고, 

아직 지나지 않은 일들을 공연히 분별하게 한다. 




그러므로 

3계의 일체 법은 

모두가 마음으로 제 성품을 삼나니 

마음을 여의면 6진(六塵)의 경계가 없다. 


무슨 까닭인가? 



K0623V17P0705b01L; 切諸法以心爲主從妄念起凡所分


일체 모든 법은 

마음을 주체로 삼아 

망념을 좇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모든 분별은 

모두가 자기의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니, 

마음으로는 마음을 볼 수 없고 

상[相]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일체 세간의 경계의 모습은 

모두가 중생의 

무명과 망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마치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아서 실체를 얻을 수 없건만 

오직 허망한 분별심을 따라 일어난 것뿐이니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멸하기 때문이다. 



[14 / 36]





의식(意識)이란 

이른바 일체 범부가 상속식(相續識)에 의하여 

아(我)와 아소(我所)를 집착하여 

갖가지로 6 가지 경계를 취하는 것이니, 


각기 다르므로 분리식(分離識)이라고도 하고, 

사물을 분별해 알기 때문에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고도 하니, 

견(見)과 애(愛) 등의 훈습에 의해 자라난 것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옛적부터의 무명의 훈습으로 일어난 식(識)은 

범부나 2승(二乘)들의 지혜로는 알 바가 아니요, 

해행지보살(解行地菩薩)이라야 비로소 배우기 시작하고 

법신보살(法身菩薩)이라야 조금 알고 

구경지(究竟地)에 이르러도 다 알지 못하고 

오직 여래만이 끝까지 분명히 아신다. 




이 이치가 어떠한가? 

그 마음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였으나 

무명의 힘 때문에 물든 마음의 모습이 나타났고, 

비록 물든 마음이 있으나 

항상 밝고 맑아서 변함이 없다. 


또 본성이 분별이 없는 까닭에 

비록 일체 경계를 두루 내지만 

변하고 바뀜이 없다. 



하나인 법계를 깨닫지 못한 까닭에 

서로 어울리지 못하여 

무명의 분별이 일어나서 

온갖 물든 마음을 낼 뿐이다. 



이러한 이치는 매우 깊어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부처님만이 능히 아실뿐 

다른 이의 경계는 아니다. 









이렇게 생겨난 물든 마음[염심染心]에는 

6 가지 다름이 있으니, 


첫째는 집착[집執]이며, 

상응하는 염심[상응염相應染]이니, 


성문과 연각과 그리고 

신(信)과 상응하는 지위[신상응지信相應地]로서 

보살이 능히 멀리 여읜다. 



둘째는 끊이지 않고 상응하는 염심이니, 

신의 지위에 있는 보살이 

부지런히 수행하는 힘 때문에 

조금 여의고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면 

영원히 다해 남음이 없다. *


K0623V17P0705c01L; 餘三分別智相應染從具戒地乃至




셋째는 분별지(分別智)로서 상응하는 염심이니, 

구계지(具戒地)로부터 구혜지(具慧地)에 이르는 사이에 

능히 조금 여의고, 

무상행지(無相行地)에 이르러야 비로소 멀리 여읜다. 


넷째는 현색(現色)이며, 

상응하지 않는 염심[불상응염不相應染]이니, 

이는 색자재지(色自在地)에서 끊어 없앤다. 


다섯째는 견심(見心)이며 

상응하지 않는 염심이니, 

이는 심자재지(心自在地)에서 끊는다. 


여섯째는 근본업(根本業)이 상응하지 않는 염심이니, 

이는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와 여래지(如來地)에서 끊는다. 




하나인 법계를 깨닫지 못한다[불각1법계不覺一法界]는 것은 

처음에 신지(信地)로부터 관찰하고 

수행을 일으켜서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러서 조금 여의고, 


여래지(如來地)에 이르러서야 

바야흐로 영원히 여읜다. 



[15 / 36]




상응(相應)의 뜻은 

마음의 구분이 차별되고 다르며, 


염과 정이 구분도 차별되고 달라서 

지각하는 주체인 지상(知相)과 

경계의 모습인 연상(緣相)이 같은 것이요, 



불상응(不相應)의 뜻은 

마음[심心]과 불각(不覺)이 

항상 차별도 차이도 없어서 

지상과 연상이 같지 않은 것이다. 




염심(染心)이란 

번뇌장(煩惱障)이니 

진여를 아는 근본지(根本智)를 장애하기 때문이요, 


무명(無明)이라는 것은 

소지장(所知障)이니 

세간을 건지는 업의 자재한 지혜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이 이치가 어떠한가? 


염심에 의하여 

한량없는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와

허망한 성품을 어기는 것이다. 



일체 법의 성품은 

평등하고 적멸하여 

생기는 모습이 없지만 


무명과 불각이 

허망되게 각(覺)과 어긴다. 



그러므로 

일체 세간의 갖가지 경계와 

차별된 업용(業用)에 대하여 

모두를 여실히 알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 생멸의 모습[생멸상生滅相]을 분별하건대 

2 가지의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거친 것[추상麤相]이니 

이른바 상응의 마음이요, 


둘째는 미세한 것[세상細相]이니 

이른바 불상응의 마음이다. 


추중의 추[추중지추麤中之麤]는 

범부의 지혜의 경계요, 


추 중의 세[추중지세麤中之細]와 

세 중의 추[세중지추細中之麤]는 

보살의 지혜 경계이다. 



이 2 가지 모습은 

모두가 무명이 훈습하는 힘을 말미암아 일어난다. 



K0623V17P0706a01L; 習力起然依因依緣因是不覺緣是





그러나 

인(因)에 의하고 연(緣)에 의하나니, 


인은 불각이요, 

연은 망령된 경계[망경妄境]다. 



인이 멸하면 연이 멸하고 

연이 멸하는 까닭에 상응의 마음이 멸하고 

인이 멸하는 까닭에 불상응의 마음이 멸한다. 



만일 마음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하며, 


만일 상속한다면 

어찌 멸했다 하겠는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멸한다는 것은 

다만 마음의 모습이 멸했을 뿐 


마음의 본체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물이 바람을 인하여 움직이는 모습이 있다가 

바람이 멸하면 움직이는 모습은 멸하나 

물의 본체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물이 멸한다면 

움직이는 모습도 끊어지리니 

의지하는 주체[능의能依]와 

의지하는 바[소의所依]가 없기 때문이거니와 

물의 본체는 멸하지 않으므로 

움직이는 모습은 상속한다.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의 힘 때문에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하거니와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모습은 곧 멸하나 

마음의 본체는 멸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마음이 멸한다면 중생이 끊어지나니 

능의도 소의도 없기 때문이거니와 


마음의 본체는 멸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움직임은 상속된다. 



[16 / 36]


또 4 가지 법이 

훈습(熏習)의 이치 때문에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일어나서 

끊이지 않나니, 


첫째는 정법이니 이른바 진여(眞如)요, 

둘째는 염인(染因)이니 이른바 무명(無明)이요, 

셋째는 망심(妄心)이니, 이른바 업식(業識)이요, 

넷째는 망령된 경계[망경妄境]니 이른바 6진(六塵)이다. 




훈습의 이치란 

마치 세상의 의복이 

본래는 구린내도 아니요 향내도 아니지만 

어떤 물건으로 훈습하느냐에 따라 

그 향기를 띄는 것같이, 


진여인 정법의 성품은 물듦이 아니지만 

무명이 훈습하기 때문에 물든 모습이 있고, 

무명인 염법은 실로 맑은 업이 없지만 

진여가 훈습하기 때문에 맑은 기능인 정용(淨用)이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훈습하여 염법이 끊이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에 의하는 까닭에 

무명을 일으켜 모든 염법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이 무명은 

바로 진여를 훈습하나니, 

이미 훈습한 뒤에는 망념(妄念)이 생긴다. 


이 망념이 다시 무명을 훈습하나니, 

훈습하기 때문에 진여의 법을 깨닫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망령된 경계의 모습이 나타난다. 



K0623V17P0706b01L; 相現以妄念心熏習力故生於種種



망념으로 훈습하는 힘 때문에 

갖가지 차별된 집착을 내어 갖가지 업을 짓고 

몸과 마음은 갖가지 과보를 받는다. 



망경훈습(妄境熏習)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을 늘어나게 하는 훈습[증장분별훈增長分別熏]이요, 

둘째는 집착을 늘어나게 하는 훈습[증장집취훈增長執取熏]이다. 



망심훈습(妄心熏習)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근본업식을 증장시키는 훈습[증장근본업훈增長根本業熏]이니, 

아라한이나 벽지불(辟支佛)이나 일체 보살들로 하여금 

생멸의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분별사식을 증장시키는 훈습[증장분별사식훈增長分別事識熏]이니 

범부들로 하여금 업계고(業繫苦)를 받게 하는 것이다. 





무명훈습(無明熏習)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근본훈(根本熏)이니 업식(業識)을 성취시킨다는 뜻이요, 

둘째는 견애훈(見愛熏)이니 분별사식(分別事識)을 성취시킨다는 뜻이다. 



어떻게 훈습하여 정법(淨法)이 끊이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眞如)로 무명에 훈습하는 것이니, 


훈습하는 인연의 힘 때문에 

망념심(妄念心)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게 한다. 




[17 / 36]




이렇듯 망심으로 싫어하거나 

구하는 인연으로 다시 진여를 훈습하나니 


훈습하기 때문에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어 

그 본 성품이 청정함을 스스로 믿고 


일체 경계는 오직 마음이 허망하게 움직였을 뿐이어서 

끝내 실체가 없는 줄로 안다. 



이와 같이 여실하게 알기 때문에 

멀리 여의는 법을 닦고 

갖가지로 모든 수순하는 행을 일으키되 



분별하는 바도 없고 

집착하는 바도 없이 

무량아승기겁을 지나면 

관습의 힘 때문에 무명이 사라지고, 

무명이 사라지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경계의 모습이 멸한다. 



이와 같이 일체 염인(染因)과 염연(染緣)과 

그리고 염과(染果)의 마음 자취[心相]가 모두 사라지면 

비로소 열반을 얻어 

갖가지 자재한 업용(業用)을 성취했다고 말한다. 








망심훈습(妄心熏習)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사식훈(分別事識熏)이니 

일체 범부와 이승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자기의 능력에 따라 무상도로 향해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요, 



K0623V17P0706c01L; 道二意熏令諸菩薩發心勇猛速疾



둘째는 의훈(意熏)이니 

모든 보살로 하여금 발심이 용맹하여서 

머무름 없는 열반[무주열반無住涅槃]에 빨리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진여훈습(眞如熏習)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체훈(體熏)이요, 

둘째는 용훈(用熏)이다. 



체훈(體熏)이란 

이른바 진여가 

끝없는 옛적부터 

일체 무량한 무루법을 갖추고 있고, 

또 헤아릴 수 없는 경계에 대응하는 작용을 갖추고 있으면서 

항상 끊임없이 중생들의 마음을 훈습하는 것이다. *



이러한 힘 때문에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되 

자기의 몸에 진실한 법이 있음을 스스로 믿고 

발심하여 수행하게 한다. 





● 


일체 중생이 똑같이 진여를 가지고 있으니 

모두가 균등하게 훈습하거늘 

어찌하여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가 있는가? 


처음 발심함으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앞뒤가 같지 않고 

한량없이 차별되니 

이러한 일체가 모두 균등해야 할 것이다. 




○  

일체 중생이 비록 균등한 진여를 가지고 있으나 

끝없는 옛적부터 무명의 두텁고 엷음이 끝없어 

차별됨이 항하의 모래 수효보다 많고, 

아견(我見)과 아애(我愛) 등 

얽힌 번뇌도 이와 같아서 

여래의 지혜라야 알 수 있다. 




[18 / 36]


그러므로 

믿음 등이 앞뒤로 차별된다. 



또 부처님들의 법에는 

인도 있고 연도 있나니, 

인과 연이 구족하여야 

그 일을 끝낼 수 있다. 



마치 나무속의 불의 성품 같나니, 

이것이 불의 진짜 인[정인正因]이거니와 


만일 아무도 알지 못하거나 

설사 안다 해도 아무런 공을 베풀지 않고도 

불이 나와 나무를 태우고자 한다면 

이는 옳지 않듯이 


중생도 그러하여서 

비록 진여가 체훈(體熏)하는 정인(正因)의 힘이 있으나 


부처님들이나 보살들이나 선지식들의 연(緣)을 만나지 못했거나 

설사 만났더라도  수승한 행을 닦지 않거나 

지혜를 내지 않거나 

번뇌를 끊지 않고도 

열반을 얻고자 하면 

옳지 못하다. *




또 비록 선지식의 연이 있더라도 

안에서 진여가 훈습해 주는 정인의 힘이 없다면 

역시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지 못할 것이요, 


K0623V17P0707a01L; 因緣具足乃能如是云何具足謂自


반드시 구족하여야 비로소 옳다. 




어떤 것이 구족함인가? 


이른바 스스로가 상속하는 가운데 

훈습하는 힘과 

불․보살님이 자비로 거두어 주심이 있으면 

능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이 있음을 믿고 

모든 선근(善根)을 심어 성숙하게 하고, 


여기에 다시 불․보살께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이롭게 해 주시고 

기쁘게 해 주심을 만나면 

수승한 행을 닦아 


마침내 성불하여 

열반에 든다. 


[....이하 줄임...]



출처: http://buddhism007.tistory.com/4049#gsc.tab=0 [불교진리와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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