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소

통융 2018. 8. 27. 14:56

*대승기신론소

보물 제1713호.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대해 주석한 교장의 일종으로, 조선시대 1457년에 금속활자(초주갑인자)로 간인한 책이다. 본래 원효의 주석서인 『기신론소』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법장의 「소」에 종밀이 주해를 가한 주석서로서 조선 세종 연간에 초주갑인자로 간행된 교학 불서이다.

서지적 사항

권상지이(卷上之二)·권하지일(卷下之一)·권하지이(卷下之二) 등 3권 1책으로 되어 있으나, 권상지일은 결본이다.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래되고 있는 책으로 권수제 다음 행에는 ‘서대원사사문 법장 술(西大原寺沙門 法藏 述)’란 저자표시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주해자인 종밀(宗密)의 이름이 있다. 권말에는 세조가 죽은 아들을 위해 1457년에 지은 어제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구성은 크게 ① 종체(宗體)를 밝힌 부분, ② 제목에 대한 해설, ③ 본문에 대한 해석으로 구분된다.

종체를 밝힌 부분에서는 『기신론』의 문장 하나하나가 어느 경전의 말씀을 의미하는가를 밝히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과, 『기신론』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 주장을 밝히고, 그 논이 불교 교리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드러내는 글을 싣고 있다.

제목에 대한 해설에서는 ‘대승기신론’이라는 표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자세히 풀이하고 있다. 대승의 ‘대(大)’는 널리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으로 진리를 두고 한 말이며, ‘승(乘)’은 싣고 나르는 것을 그 기능으로 삼기 때문에 비유로 수레라 한 것이라 하였다. ‘기신(起信)’은 이 논에 의하여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며, 믿음이란 결정적으로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즉, 이 논 가운데 참된 이치가 있고 닦으면 그렇게 되며, 닦아서 그렇게 되었을 때는 무궁무진한 훌륭한 소질이 다 갖추어진다고 믿는 것을 신(信)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승이 무엇인가를 보다 상세하게 풀이하였다. 대승은 곧 진리로서, 어떤 특수한 사람이나 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에 해당되지 않는 바가 없다고 보았다.

본문에 대한 해석은 크게 중생심(衆生心)의 유전(流轉)과 환멸(還滅)하는 갖가지 사항을 다룬 부분과 혁명적인 실천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풀이하였다.

유전과 환멸에서는 전체 내용을 구분, 일심이문(一心二門), 이언진여(離言眞如), 의언진여(依言眞如), 아알라야식(識), 각(覺), 불각(不覺), 생멸(生滅)의 인연과 심(心), 의(意), 의식(意識), 물든 생각, 생멸의 양상, 훈습(薰習), 진여의 체상용(體相用), 그릇된 집착, 세 가지 발심(發心) 등 15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서 원효의 독창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다.

특히, ‘이언진여’에서는 진여의 체(體)가 무엇이며 진여의 뜻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이에 대한 의문을 문답식으로 풀이하였다.

‘의언진여’에서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진여의 진실성을 파악하게 하는 여실공(如實空)과 긍정적인 시각을 통해서 진여의 진실성을 파악하는 여실불공(如實不空)을 설명하고 있다.

‘각’에서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뜻과 본각을 회복해 가는 시각의 4단계, 본각과 시각과의 관계, 세속 속에서의 본각과 거울과 같은 본각 등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불각’에서는 근본불각과 지말불각(枝末不覺), 각과 불각의 같고 다른 점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지말불각에서는 세 가지 미세한 전개과정인 삼세(三細)와 여섯 가지 거친 전개과정인 육추(六麤)로 나누어서 중생의 타락하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

‘물든 생각’에서는 아알라야식의 비밀스런 뜻과 물든 생각의 근본 발원지는 진여이고, 그 진여로부터 홀연히 생겨난 무명(無明)이 여러 가지 물든 생각을 전개시키며, 그 물든 생각을 크게 육염심(六染心)으로 분류하여 설명하였다.

‘훈습’에서는 훈습의 뜻과 그 종류, 염법훈습(染法薰習)과 정법훈습(淨法薰習)에 관해서 해설하였다. 특히, 정법훈습에서는 진여가 일으키는 훈습을 5단계로 나누었고, 주관적인 생각이 일으키는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薰習)과 의훈습(意薰習)으로 분류하였으며, 진여가 일으키는 훈습을 자체상훈습(自體相薰習)과 용훈습(用薰習)의 두 가지 면으로 풀이하고, 진여가 일으키는 훈습의 몇 가지 남은 문제를 밝히고 있다.

‘진여의 체상용’에서는 진여의 체를 법신(法身)과 관련시켜 설명하고, 상을 법신과 보신(保身), 용을 보신과 응신(應身)에 관련시켜서 밝혔다. 이 중 진여의 용에 대해서는 그 실천의 기본 원리로써 행(行)과 원(願)과 대방편(大方便)을 설정하고, 보신과 응신과의 관계, 법신과 색상(色相)과의 관계 등을 밝히고 있다.

‘그릇된 집착’에서는 먼저 모든 그릇된 고집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를 설명하고, 초학자(初學者)가 빠지기 쉬운 고집을 여래의 법신이 허공과 같다는 고집, 여래의 법신이 공(空)하는 고집, 여래장(如來藏) 안에 마음과 육신이 별개의 근본적인 요소를 이루고 있다는 고집, 여래장 자체에 세속적인 번뇌와 고통 등이 있다는 고집, 중생에게는 시작이 있고 열반에는 끝이 있다고 보는 고집 등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으며, 기성 수도인이 빠지기 쉬운 고집도 밝히고 있다.

‘세 가지 발심’에서는 신심을 성취시키고 결심을 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과 이해와 실천을 굳건히 하여 더욱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해행발심(解行發心), 법신을 증득하고 진심을 드러내는 증발심(證發心)으로 나누어 풀이하였다.

마지막 단락인 ‘혁명적 실천’에서는 먼저 신심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완덕(完德)을 위한 실천법으로서 베풀어 줄 것[施], 윤리를 지킬 것[戒], 참고 용서할 것[忍], 부지런히 노력할 것[進],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그 깊이를 볼 것[止觀] 등을 제시하였다.


[] ()이라고 말한 까닭은

 

본래부터 일체의 염법(染法)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는 일체법의 차별상(差別相)을 여의어서

 

허망한 심념(心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여의 자성은 유상(有相)도 아니고 무상(無相)도 아니며,

 

비유상(非有相)도 아니고 비무상(非無相)도 아니며,

 

유상과 무상이 함께 하는 것[유무구상有無俱相]도 아니며,

 

일상(一相)도 아니고 이상(異相)도 아니며,

 

비일상(非一相)도 아니고

 

비이상(非異相)도 아니며,

 

일상과 이상이 함께 하는 것[일이구상一異俱相]

 

아님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중생이 망심(妄心)이 있어서

 

순간순간마다 분별하여 모두가 (진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이라 말하지만,

 

만약 망심을 여의면

 

진실로 공이라 할 만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 [] 먼저 공()을 밝힌 부분 가운데

 

세 구절이 있으니,

 

대략 설명하는 부분[약명略明]

 

자세히 해석하는 부분[광석廣釋],

 

그리고 세 번째는 총괄적으로 결론짓는 부분[총결總結]이다.

 

 

 

처음 중에 일체의 염법이 상응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이유는

 

(진여는) ()()의 분별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법의 차별상을 여의었다라고 말한 까닭은

 

취하는 대상[소취상所取相]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허망한 심념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능취견(能取見)을 여의었기 때문이니,

 

이는 곧 여읜다는 이치를 가지고 공을 해석한 것이다.

 

 

자세히 해석하는 부분에서는

 

4()를 초월함에 대하여 밝혔다.

 

 

 

4구가 비록 많기는 하지만

 

그 요점은 2 가지가 있는데,

 

바로 유()() 등과 일()() 등이다.

 

 

2 가지의 4구를 가지고

 

모든 망녕된 집착[망집妄執]을 포괄하였기 때문에,

 

2 가지에 의하여 진공(眞空)을 나타내었다.

 

 

 

예컨대 광백론(廣百論)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다시 세간에서 집착하는 모든 법이 다 진실이 아님을 드러내고,

 

외도(外道)들이 집착한 것과도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게송을 읊어 말하노라.

 

 

 

()와 비유(非有) 그리고 비유(非有)비비유(非非有),

 

()과 비일(非一) 그리고 비일(非一)비비일(非非一)이여,

 

 

[ 52 / 203 ]

 

이들을 차례대로 배속시켜야 할 것이니

 

지혜로운 이는

 

이들이 참되지 아니함을 막힘없이 아노라.”6)

 

이 게송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일체 세간의 색() 등의 구의(句義)7)

 

언설(言說)로 나타내는 것이고

 

심혜(心慧)로 아는 것인데,

 

중생의 집착에 차이가 있어서

 

대체로 4 가지가 있으니,

 

()와 비유(非有)와 구허(俱許)와 구비(俱非)이다.

이를 차례대로 4 가지 잘못된 집착[사집邪執]에 배속시킨다면 일()과 비일(非一)과 동시긍정

 

[쌍허雙許]과 동시부정[쌍비雙非]이 여기에 해당한다.

 

 

수론외도(數論外道)에서 유() 등의 본성[]

 

모든 법과 동일하다고 집착하는 것은 바로 유구(有句)에 해당한다.

 

 

이러한 집착은 진실이 아니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청색(靑色) 등의 색이 색성(色性)과 동일한 것이라면

 

반드시 색성과 같이 그 체()가 다 동일해야 할 것이며, 5() 등의 소리가 소리의 본성[

 

聲性]과 더불어 같은 것이라면 반드시 소리의 본성과 같이 그 체가 다 동일해야 할 것이며,

 

[] 등의 모든 감각기관[]이 감각기관의 본성[根性]과 같은 것이라면

 

반드시 감각기관의 본성과 같이 그 체가 다 같아야 할 것이니,

 

하나하나의 근은 모든 경계를 취하여야 하며 하나하나의 경계는 모든 근을 상대하게 될 것이다.

 

 

 

또한 모든 법이 유성(有性)과 동일한 것이라면 마땅히 유성(有性)과 같이

 

그 체가 모두 동일해야 할 것이다.

 

 

승론외도(勝論外道)에서 유() 등의 본성[]이 모든 법과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비유구(非有句)에 해당하니, 이것도 진실한 견해는 아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청색(靑色) 등의 색이 색성(色性)과 다르다면

 

소리[] 따위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니, 소리 및 그와 유사한 경우를 기준

 

으로 해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일체법이 유의 본성[유성有性]과 다른 것이라면

 

마땅히 토끼뿔처럼 그 체가 본래 없어야 될 것이다.

 

이 밖에도 여러 측면에서 자세히 논파할 수 있다.

 

 

 

6) 이들이 참되지 아니함을 막힘없이 아노라.”6)

 

대정장(大正藏) 30, 대승광백론석론, pp.234 8235 2.

 

 

7) 일체 세간의 색() 등의 구의(句義)7)

 

원리(原理)범주(範疇)를 의미한다.

무참외도(無慙外道)에서

 

() 등의 본성이 저 모든 법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고 집착하는 것은

 

역유역비유구(亦有亦非有句)에 해당하니,

 

이것도 진실한 견해는 아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유의 본성[유성有性] 등이

 

() 같은 것들과 동일한 것이라고 하면

 

수론(數論)의 오류를 범하게 되고,

 

색 같은 것들과 다른 것이라고 하면

 

승론(勝論)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동일하다[1]’다르다[]’라는 두 종류의 성상(性相)

 

서로 모순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가 같다고 말하니,

 

이는 이치상 성립되지 않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 동일하다[1]’는 주장은

 

반드시 동일하지 않다[비일非一]’는 주장을 동시에 성립시키게 되어서

 

바로 다르다[]’는 견해가 되기 때문에

 

다르다[]’는 견해가 동시에 성립하게 된다.

 

 

그리고 다르다[]’는 주장은

 

반드시 다르지 않다[非異]’는 주장을 동시에 성립시키게 되어서

 

바로 동일하다[1]’는 견해가 되기 때문에

 

동일하다[1]’는 견해가 동시에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여러 사례를 통해서 논파할 수 있다.

 

 

사명외도(邪命外道)에서 유() 등의 본성이 저 모든 법과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집착하는 경우는

 

비유비비유구(非有非非有句)’에 해당하니, 이 또한 진실한 견해는 아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저쪽의 입장에서 주장한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비일비이非一非異]’는 견해는, 모든 경우를 동시에 부정하기 위한 주장인가,

 

아니면 모든 견해를 동시에 긍정하기 위해서인가? 만일 모든 견해를 동시에 긍정한다면

 

동시 부정은 결코 성립할 수 없을 것이고, 만일 모든 경우를 동시에 부정한다면

 

동시 긍정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 부정과 동시 긍정[유차유표有遮有表]’은 이치상 서로 모순이 되며,

 

결국은 부정도 긍정도 성립하지 않으니 그들의 주장은 희론(戱論)이 된다.

 

 

이외에도

 

여러 경우를 통해서 더 자세하게 논파할 수 있다.

 

 

또 이와 같이 세간에서는

 

4 가지 비방하는 견해를 일으켰으니,

 

()와 비유(非有)

 

쌍허(雙許: 동시긍정)와 쌍비(雙非: 동시부정)를 말하며,

 

이는 차례대로 증익(增益)에 치우친 희론 손감(損減)에 치우친 희론

 

상위(相違: 모순)를 범한 희론(戱論)에 해당한다.

 

 

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2

 

이상과 같은 이유 때문에 세간에서 집착하는 견해는 진실이 아니다.”8)

 

 

이제 이 논의 본문 가운데 유상도 아니다[비유상非有相]’는 말은

 

4구 가운데 첫 번째 구절을 부정하는 입장이고, 무상도 아니다[비무상非無相]’는 말은

 

4구 가운데 두 번째 구절을 부정하는 입장이며,

 

비유상도 아니고 비무상도 아니다[非非有相非非無相]’는 말은

 

4구 가운데 네 번째 구절에 대한 부정이고,

 

일상(一相)과 이상(異相)이 함께 하는 것도 아니다[非一異俱相]’는 주장은

 

4구 가운데 세 번째 구절에 대한 부정이다.

 

 

여기서 두 구절9)의 차례가 앞뒤로 바뀐 것은 기신론을 쓴 사람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서

 

모두 도리가 있어서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동일함[1]과 다름[]4구는 유()()구의 해석에 의거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내지乃至]’ 이하는 세 번째 총괄적으로 결론짓는 부분[총결總結]’이다.

 

이 부분은 두 구절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나아가 공()이라고 말하지만부분은 순결(順結)이고,

 

만약 망심을 여의면이하는 반결(反結)이다.

 

 

[] 불공(不空)이라고 말한 까닭은

 

법체가 공()하여 허망함이 없음을 이미 드러냈기 때문이니,

 

바로 이 진심(眞心)이 항상하여 변하지 않고 정법(淨法)이 만족하기 때문에

 

불공(不空)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또한 취할 만한 상()은 없으니,

 

망념을 여읜 경계는 오직 증득한 이라야 상응하기 때문이다.

 

 

[] ‘불공(不空)’을 해석하는 내용도 세 구절로 나누어진다.

 

 

처음은 공문(空門)’을 다시 주제로 삼은 부분으로서,

 

법체가 공()하여 허망함이 없음을 이미 드러냈기 때문이니라고

 

말한 부분에 해당한다.

 

 

다음은 불공(不空)’을 드러낸 부분으로서, 바로 이 진심이……불공이라고

 

이름한다는 부분이다.

 

 

또한 취할 만한 상()이 없으니이하 부분은 세 번째 단락으로서,

 

여기서는 공과 불공의 차이가 없음을 밝혔다.

 

[]------

 

8) 세간에서 집착하는 견해는 진실이 아니다.”8)

 

대정장(大正藏) 30, ≪대승광백론석론(大乘廣百論釋論)≫ 8, pp.284235 2.

 

9) 여기서 두 구절9)

 

세 번째와 네 번째를 가리킨다.

 

 

비록 불공(不空)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상()이 없기 때문에

 

불공은 공과 다르지 않으니, 분별하여 반연함을 여읜 경계는

 

오직 무분별지(無分別智)로 증득함으로써만이 상응하기 때문이다.

 

 

[] 이하의 내용은

 

현시정의(顯示正義) 가운데 진여문에 대한 해석에 이은 두 번째 주제로서

 

생멸문에 대하여 해석한 부분[석생멸문釋生滅門]이다.10)

 

이 부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처음 부분은 바로 자세하게 풀이한 부분[정광석正廣釋]’이며,

 

다시 4 가지 훈습이 있다[부차유4종훈습復次有四種熏習]’11) 이하의 내용은

언어에 의거하여 거듭 드러낸 부분[인언중현因言重顯]’이다.

 

 

첫 번째 부분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위의 입의분 중의 이 마음의 생멸[시심생멸是心生滅]’12)을 해석한 것이다.

 

둘째, 다시 생멸인연이란’13) 이하의 내용은 위의 생멸인연(生滅因緣)’을 해석한 부분이며,

 

셋째 다시 생멸상이란’14) 이하는 위의 생멸상(生滅相)’을 해석한 부분이다.

 

첫째 부분이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를 기준으로 하여 총괄적으로 밝힌 내용이고,

 

둘째는 이치에 의거하여 하나씩 풀이하는 부분이다.

 

 

 

[] 심생멸(心生滅)이란

 

여래장(如來藏)을 의지하기 때문에 생멸심이 있게 되니,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멸과 화합하여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을

 

아리야식(阿黎耶識)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10) ‘생멸문에 대하여 해석한 부분[석생멸문釋生滅門]이다.10) 이 부분의 분과는 권1의 대문

 

바른 이치를 나타내 보인다[현시정의顯示正義]는 것은

 

1심법(一心法)에 의거하여 2 가지 문을 두는 것이다.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요,

 

둘째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2 가지 문이 각각 모든 법을 총괄하고 있으니,

 

무슨 이치 때문인가?

 

이 두 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2의 가장 앞부분을 참조할 것.

 

 

11) ‘다시 4 가지 훈습이 있다[부차유4종훈습復次有四種熏習]’11)

 

기신론소기회본4. 15장 하 5행 참조.

 

12) 첫째는 위의 입의분 중의 이 마음의 생멸[시심생멸是心生滅]’12)

 

기신론소기회본1. 18장 하 8.

 

 

13) 둘째, 다시 생멸인연이란’13)

 

기신론소기회본3. 16장 상 9.

 

14) 셋째 다시 생멸상이란’14)

 

기신론소기회본4. 8장 하 8.

 

 

[] 처음 내용은 세 구절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체를 나타내는 부분[표체標體]이며,

 

둘째는 상()을 분별한 부분이며,

 

셋째는 이름을 세운 부분[입명立名]이다.

 

 

 

처음 부분에서

 

여래장을 의지하기 때문에 생멸심이 있게 되니……라고 말한 것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여래장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바람과 같은 무명(無明)의 동요에 의지하여 생멸을 일으키기 때문에

 

생멸이 여래장에 의지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별기別記] 그러나

 

불생멸심(不生滅心)과 생멸심(生滅心)

 

마음의 바탕[심체心體]이 둘이 아니며, 다만 2 가지 이치를 가지고 마음을 두 측면으로 나누었기에

 

이를 ‘(여래장을) 의지한다라고 말했을 따름이다.

 

 

이는 마치 고요한 물에 바람이 불어와서 움직이는 물결을 일으켜서,

 

움직임[]과 고요함[]이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물이라는 본 바탕은 하나이므로,

 

고요한 물[정수靜水]을 의지하여 움직이는 물[동수動水]이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 중의 도리도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 예컨대 4권본 능가경(楞伽經)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래장이 무시악습(無始惡習)에 의해 훈습되는 것을 식장(識臧)이라 이름한다.15)

 

……찰나(刹那)란 것은 식장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16)”

 

[별기別記] 기신론에서 생멸심이 있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식장을 의미하는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제 의지하는 대상인 여래장과 의지하는 주체인 생멸심을 같이 취합해서

 

심생멸문(心生滅門)’을 삼기 때문에, ‘심생멸(心生滅)이란 여래장(如來藏)을 의지하기 때문에

 

생멸심이 있게 되니……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여래장을 버리고

 

생멸심만을 취하여 생멸문을 삼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래 글에서 이 아리야식에 2 가지 이치17)가 있다라고 말한 것과 같으니,

 

2 가지 이치가 모두 생멸문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15) 식장(識臧)이라 이름한다.15) 대정장(大正藏) 16, 4능가경, p.510 78.

 

 

16) ……찰나(刹那)란 것은 식장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16)

 

대정장(大正藏) 16, 4능가경, p.512 12.

 

 

17) ‘이 아리야식에 2 가지 이치17) ()과 불각(不覺)을 가리킨다.

 

 

 

[] ‘이른바아래는 두 번째로 상()을 분별한 부분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위의 여래장을 가리킨다.

 

생멸하지 않는 마음[불생멸심不生滅心]이 움직여서 생멸을 일으켜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음을 와 화합한다[여화합與和合]’라고 이름하니,

 

이는 이하의 내용18)에서 마치 대해수(大海水)가 바람에 의지하여 물결이 일어날 적에

 

수상(水相)과 풍상(風相)이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아니함과 같다……라고 하면서

 

자세하게 말한 것과 같다.

 

중에서 물의 움직임은 바로 풍상(風相)이며,

 

물결이 움직일 때 일어나는 물기[]는 수상(水相)이다.

 

 

물 전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물은 풍상을 여의지 않고,

 

움직이는 물결마다 물기[]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움직이는 물결은 수상(水相)을 여의지 않는다.

 

 

마음도 이와 같아서 생멸하지 않는 마음[불생멸심不生滅心] 전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마음은 생멸상(生滅相)을 여의지 않으며, 생멸상은 신해(神解)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생멸은 심상(心相)을 여의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와 화합한다[여화합與和合]’고 말한 것이다.

 

 

[별기別記] ()의 생멸은 무명을 의지하여 이루어지고,

 

생멸심은 본각(本覺)을 쫓아서 이루어져 2 가지 체가 없으며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기 때문

 

에 화합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생멸하지 않는 마음이 생멸과 화합하는 것이지,

 

생멸이 생멸하지 않는 마음과 화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비일비이非一非異]’이란

 

생멸하지 않는 마음의 전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마음은 생멸과 다르지 않은 것이며,

 

영원히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성품을 잃지 않기 때문에

 

생멸은 그 마음과 동일한 것은 아닌 것[비일非一]이다.

 

또 동일한 것이라면 생멸식상(生滅識相)이 다 없어질 때에 심신(心神)의 체도 결국은 이를 따

 

라서 없어지게 되니, 이는 단변(斷邊: 단견斷見)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다른 것이라면 무명의 바람에 의하여 훈습되어 움직일 때에

 

정심(靜心)의 체는 결코 연()을 따르지 않게 되니, 이는 상변(常邊: 상견常見)에 떨어지게 되

 

는 것이다.

 

 

18) 이는 이하의 내용18)

 

기신론소기회본3 1장 하 1.

 

이러한 2 가지 극단을 여의었기 때문에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별기別記] 2 가지 이치가 있기는 하지만 심체(心體)는 둘이 없으니,

 

여기서는 생멸과 불생불멸이라는 2 가지 이치와 둘이 아닌 마음을 합하여

 

아리야식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 예컨대 4권본 능가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유하면

 

진흙 덩어리와 티끌이 다른 것도 아니며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닌 경우와 같으니,

 

금과 금으로 장식한 장엄구도 이와 같다.

 

 

만약 진흙 덩어리와 티끌이 다른 것이라면,

 

흙덩이는 저 티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저 티끌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다른 것이 아니다.

 

 

만약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흙덩이와 티끌은 반드시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전식(轉識)과 장식(臧識)의 진상(眞相)이 만약 다르다면

 

장식은 인()이 아닐 것이고, 만약 다르지 않다면

 

전식이 없어질 때 장식도 없어져야 할 것이지만

 

자진상(自眞相)은 진실로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진상식(自眞相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다만 업상(業相)이 없어지는 것이다.”19)

 

여기서 이 논의 저자가 바로 위의 능가경내용을 풀이하였기 때문에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비일비이非一非異]’라고 말한 것이다.

 

 

이 중에서 업식(業識)이란

 

무명의 힘에 의하여

 

깨닫지 못한 마음[불각심不覺心]’이 움직이기 때문에

 

업식이라 이름하며,

 

또 동심(動心)에 의하여 작용[]하여

 

능견(能見)을 이루기 때문에

 

전식(轉識)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2 가지는 모두 아리야식의 자리에 있다.

 

 

[별기別記]

 

아리야식 내에 생멸하는 견상(見相)을 전식이라 이름하고,

 

이 속의 체를 장식이라 이름한다.

 

 

[] 이것에 대해

 

예를 들자면 10권본 능가경에서는

 

여래장이 바로 아리야식이니

 

7()과 함께 일어나는 것을 전멸상(轉滅相)이라 한다”20)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전상(轉相)은 아리야식에 있음을 알 수 있다.

 

 

[]------

 

 

19) 다만 업상(業相)이 없어지는 것이다.”19)

 

대정장(大正藏) 16, 4능가경, p.483 263.

 

 

20) 7()과 함께 일어나는 것을 전멸상(轉滅相)이라 한다”20)

 

대정장(大正藏) 16, 입능가경, p.557 78.

 

 

 

자진상(自眞相)이란

 

10권본 능가경에서는 중진(中眞)을 자상(自相)이라 이름한다라고 했는데,

 

본각심(本覺心)이 망연(妄緣)을 의지하지 않고

 

본성이 스스로 신해(神解)함을 자진상(自眞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불일의문(不一義門)을 기준으로 말한 것이다.

 

또 무명(無明)의 바람에 따라서 생멸을 일으킬 때

 

신해(神解)한 성품이 본심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또한 자진상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니,

 

이는 불이의문(不異義門)을 기준으로 하여 설명한 것이다.

 

 

 

[별기別記] 자진(自眞)이란 이름은

 

불생멸(不生滅)에만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 그 가운데 자세한 것은

 

별기에서 말한 것과 같다.

 

 

[별기別記]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유가론(瑜伽論)등의 논서에서는

 

아리야식은 이숙식(異熟識)으로서

 

한결같이 생멸하기만 한다고 말했는데,

 

어째서 이 기신론에서는

 

아리야식이 불생불멸(不生不滅)과 생멸(生滅)이라는 2 가지 이치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고 말하는가?”

 

이 의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유가론등의 논서와 기신론에서

 

각기 다르게 주장하는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미세한 마음[아리야식]

 

크게 2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만약 업번뇌(業煩惱)에 의하여

 

감응되는 이치의 측면에서 본다면,

 

없는 것[]을 분별조작하여 있다[]’고 여기게 하므로,

 

한결같이 생멸하기만 할 것이다.

 

 

 

둘째,

 

만약 근본무명(根本無明)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는 이치를 논한다면,

 

고요함[]을 훈습하여

 

움직이게[] 하는 것이므로

 

움직임과 고요함[동정動靜]은 일체가 되는 것이다.

 

유가론등의 논서에서 논의한 것들은

 

해심밀경(解深密經)에 의거하여

 

동일하다[1]영원하다[]는 견해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업번뇌에 감응되는 이치를 드러내는 내용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래서 이 아리야식이 한결같이 생멸하기만 하여,

 

심법(心法)과 심수법(心數法)이 다르게 전변(轉變)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출처: http://buddhism007.tistory.com/5053#gsc.tab=0 [불교진리와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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