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글

천둥같은 침묵

통융 2018. 4. 22. 10:01

[門열면 밝은 世上]   천둥 같은 침묵

                                                            

통융 스님

  • 대경일보
  • 승인 2018.03.11 21:01

 
“진리로 들어가는 문은 하나 밖에 없다는데
어떻게 해야 그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겠습니까?” 라고 유마거사가 문수사리에게 질문을 했다.
“진리는 말로 설명 할 수 없고 보여 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모든 언어와 시시비비를 떠난 것이 곧 진리입니다." 라고 문수가 답을 한다.
이어서 문수가 유마에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한 말씀 해 보라고 했다.
유마는 한 참을 침묵을 하고 있었다.
이에 침묵을 지켜보던 문수가 "유마거사의 침묵은 천둥소리가 들어 있습니다."라고 찬탄을 했다.
거사의 깨달음을 엮은 유마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침묵이면 침묵이지 천둥 같은 침묵은 뭔가?
의사 전달의 수단인 말보다 더 확실한 방편이 침묵언어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진리나 지식을 말이나 글로써 모두 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된 진리는 절대 말로써 전달해 주거나 전달 받을 수가 없다.
문자로 진리를 세울 수 없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도 침묵의 언어를 상징하는 뜻이다.

한 외도가 부처님께 질문을 하길
'말 있음으로도 묻지 않고 말 없음으로도 묻지 않을 때가 어떠합니까?'했다.
이에 부처님이 양구(良口=침묵)하셨다. 
수행자가 찬탄하며 "세존께서 대자대비 하여 저의 미혹함을 일깨워주시고
깨달음에 들게 하셨습니다." 하고 물러났다.

이 광경을 보던 제자 아난다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수행자가 무엇을 증득하였기에 '깨달음에 들었다'고 합니까? 
부처님이 "세상에 좋은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봐도 달리는 것과 같으니라."
그 수행자는 부처님의 천둥과 같은 침묵에서
말 있음과 말 없음에 양자를 어우르는 무언의 답을 간파한 것이다.
말 있음과 말 없음의 양변에 취우치지 않는 것이 중도(中道)이고,
우주의 본성이며 우리가 찾고자 하는 내면의 참 진성(眞性)이다.
참 진리는 말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 이전에 한 소식을 침묵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침묵의 성자<슈리 라마나 마하리쉬>도 “침묵은 끝없는 언어이며 생각마저 넘어서 있다.
그것은 요컨대 초월언어(para vak), 즉 말하지 않는 말(unspoken words)이라 한다.
침묵은 항상 말을 하고 있으며 언어의 영원한 흐름이다.
대화를 통해서는 몇 년이 가도 알지 못하는 것을, 침묵 속에서나
혹은 침묵 앞에서는 순간에 알 수 있다."고 말이다.

오늘 날같이 온갖 말, 말로 세상이 시끄러운 말법시대에
침묵언어를 음미 해 볼 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특히 현대사회에 정보 통신수단의 발달로 다양한 대중 매체에서
쏟아내는 무분별한 기사나 주장들, 특히 SNS를 통해 무책임하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언어폭력과 테러, 가언(假言)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 하는 말이 문제인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만 톤이 쏟아져 나오는 언어폐기물들이 언어공해(言語公害)를 넘어
인간 정서오염(情緖汚染)까지 염려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어는 소통의 수단이기 전에 언자(言者)의 본성이다.
그래서 ‘말씨’라 했다.
말의 씨인 본성이 자신의 마음자리 즉 성품인 인격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 한다.’고 <괴테의 일기>에 등장하는 말처럼
스스로가 깨어있는 천둥 같은 침묵이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通 대경일보   webmaster@d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