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뇩다라 삼먁삼보리란 '깨달을 것이 없는 것' 을 '깨달으라' 는 말입니다.
"어렵습니다" "당연하지요 깨달을 것이 있다면 가르치기도 쉬우련만 깨닳을 것이 없는
바 를 깨치라 하기 때문에 모두 눈만 멀뚱대며 남의 글이나 줒어 모으고 있는 것이라오.
수차 말했듯이 일체법(삼라만상)은 이름이 그러할뿐 모두가 (무명무상절일체)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고 그런 생각이 모두 끊어진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오. 생각(번뇌, 분별심)을 끊지
못하기에 보여줘도 못보고,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하는 것이라오.
다만 여기서 무조건 '전한 것이 없다' 고 말하면 중생심은 곧바로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전할바 없이 전하고 받는바 없이 받는다' 는 이중구조의 언어를 택하는 것이라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싹이 나는 자연현상을 확인하는 것, 證知하는 것, 깨닳는것.
씨를 심으면 당연히 심은 종자대로 싹이 나듯이 그대 역시 그와 같은 이치로 존재하는 것을
'깨쳐라' 입니다. 누차 말했듯이 '무명무상절일체'로 존재한다 했으니 그것을 깨치라 입니다.
중생은 결과에 잡혀서 괴로워하고 보살은 원인을 알기에 당연하다고 긍정합니다.
고로 緣覺이 자연을 깨치고 자연과 하나가 된다 해도 윤회를 면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수행이란 먼저 집중으로 '무명무상절일체'를 證知 해야 다음에 무엇을 하던 말던 할텐데,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자체로는 죽은 송장과 같으니 아무리 집중을 거듭한다 해도, 늘 사경이나
거듭한다면 결국 송장이 사경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방편은 뗏몫과 같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깨달을 것 없는 것을 깨달아라 또는 알아차려라" 하는 것이요. 알아 차림은 무엇인가?
즉!, 무명무상절일체를 證知 하면 무엇을 알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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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그대로 法(법 법) 性(성품 성) 偈(쉴 게) 법의 성품은 번뇌를 쉬면 들어난다
무엇이 드러 나는가? 眞性甚深極微妙 不受自性受緣成 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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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성품은 극히 미묘하여 자성은 물들지 않고 인연따라 이루어 진다" 를 알아 차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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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見性이란 지혜로 보는것이 아니요
극히 미묘한 妙色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이기에 이때를 如來出現이라 합니다. 이작용은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일체 가운데 하나가 있어 미진수가 결합하여 하나를 이루고 그
하나가 또다시 결합하여 더 큰 일체를 이루어 미계로 부터 삼천대천까지 전체가 하나로
통합니다. 다시 비유하면 시계의 작용은 같으나 초침 분침 시침의 크기는 각기 다르고 또
움직임역시 각기 다르게 보입니다. 여기서 시계바늘은 격별성이요 작용은 무위법입니다.
無分別 後得智라 하여 무분별은 앞서 말한 무명무상절일체요 후득지란 진성심심극미묘라
이것을 見性이라 하는데 짧은 지혜로 이해했기에 이렇게 확연히 설명을 못하는 것이라오.
그래서 견성을 지혜로 본다 하거나 알기만 하면 된다는 둥 삿된 언어에 끌려가는 것이오.
집중으로 죽은 禪定을 경험하라. 여기까지는 좌선이던 염불이던 노력해야 합니다.
無念자체는 죽은 송장과 같으니 無念을 自覺(체득)하라. 心空을 체득했기에 解空이라
합니다. 空이 밝아지면 (번뇌가 끊어지면) 色卽空(如來出現)을 卽見할 것이니 비로서
모양은 각기다르나 佛性은 모두 똑같구나.
"여래란 경계가 없는 것으로 경계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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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가 없다면 무엇으로 형상을 보일 것이며,
경계가 있다면 변하지 않아야 하는데 무엇을 경계라 하겠는가?. 부사의를 알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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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용에 무슨 경계가 있는가? 수없이 나와 대상의 경계가 없다 하고, '아!~~ 같고 같구나'
수없이 말해도 눈과 귀를 열지 못하면 글자 이해도 쉽지 않아서 마치 어떤 경계를 설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또 어떻게 정진하십니까? 물으면 "정진 없습니다." 쉽게 설하지요. 三界가
禪定으로 존재하는데 禪定을 따로 잡는다면 無我도 아니요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도 아닙니다.
일체법이 이러하니 얻을 것도 전할 것도 없는 것을 자각하라
色이 空과 같기 때문이니 色卽空을 照見하지 못하고 어떻게 受想行識을 비울 수 있겠는가?
若見(같은 것을 보라) 諸相非相(모양과 모양아닌 것) 여기서 諸相은 色이요 非相은 空이니
[空과 色이 같은 것을 보라 =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이 금강경의 키워드 입니다.
다른 경에는 항상 미진수 보살들을 거느린 것을 自覺하는 것, 즉 화엄세계를 보라 입니다.
금강경을 四相 없애는 것이라고 이해했다면 아직 금강경 볼 자격이 없습니다.
이미 無四相 아라한에게 여래를 보라는 경으로, 세존은 전생 인욕선인때 이미 통달했습니다.
아무리 '네것이다' 말해주고 보왕삼매를 머리에 이고 다녀도 괴로움을 떨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물들지 않는 성품 (不受汚染)을 발견하지 못하면 팔만장경을 달달외워도 소용없지요.
正見(바로보라) 이것도 불수오염을 모르면 한낮 글자일뿐..
正見도 안되는데 照見 若見이 되겠는가?
죽은 나무로 만든 삼존불을 손으로 내려칠 수 있는가?.
한 생각이 일어나면 커다란 화를 당할 것이요, 생각이 끊어지면 범천이 기뻐합니다..
여래가 전할 법이 없는 것을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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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전할 것 없는 법을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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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전한게 없다' 고 하면 달마를 능멸 하는 말이 됩니다.
하기야 조사들이 달마의 게송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수백년 지나왔으니...
달마의 전법게
내가 본래 이땅에 온것은 법을 전하여 중생을 제도 하고저 함이니
한 꽃에 다섯 잎이 피면 결과는 자연성이라 / 一花開五葉結果自然成
이 게송은 한꽃에 안이비설신 前五識(무념식)이 피어나면 결과는 자연히 이루어진다.
자연을 깨치고 자연의 인과법에서 벗어나라 는 無爲自然法을 전하는 말인줄도 모르고
초조 달마 이후 홍인까지 다섯조사가 어쩌고 저쩌고 했으니.. 참으로 한심 한 일 입니다.
무득무설분 /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 / 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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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까닭이 무엇인가 모든 현상계가 무위로서 차별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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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수자성수연성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불성으로 차별상을 나타낸다.
금강경은 뜻도 不思議요 공덕 또한 不思議라,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수행 할 것 없다' 또는 알기만 하면 된다' 하며 수행을 천착시킵니다.
---- 草觀님의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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