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기본입문

육바라밀이란?

통융 2017. 5. 30. 10:17


<六波羅蜜>


육바라밀이란 자비행을 말한다.

불법의 실천행이다.

불법은 진리를 구족하여 스스로 그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 모든 삶은 오직 중생을 위한 보살심 밖에 없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먹고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잠자는 것이 육바라밀이다.

이 세상 사는 모든 것이 육바라밀 아닌 것이 없다.

진리는 불성 혹은 참나  진여 중도 열반 등의 표현으로 쓰지만 스스로 쓰여짐을 말한다.

내가 진리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리이기 때문에 그냥 쓰임뿐이다.

그래서 육바라밀도 내가 쓸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것이 아니다.

차를 마시면서 6가지의 맛을 구분해서 마시지 않는다. 그냥 단밖에 앎 뿐이다.




불법의 참 깨달음은 중도를 확철히 믿고 깨달은 다음에 5온에서 벗어나야 바른 깨달음을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고 5온만 벗어나 참 나를 머문다고 하는데 그러한 상태를 일부 학자들이   대승 소승을 나눈다.

초기 불교는 개인의 참나, 자각에 있기 때문에 참 나안에 안주하며 생존해탈하는 것은 소승이며 현재 우리나라 선방의 수좌들이 그러한 모습들이라고 비판을 한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핵심인 6바라밀을 바로쓰는 것이 참 불교라고 한다. 6바라밀을 행하지 않으면 참 깨달은 자들이 아니거나 육바라밀을 하지 않으면 모두가 바른 견성을 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단정을 짓는다.

 대승불교에서 억지로 12지보살로 우상화 해서 모셔놓고 부처님도 7,8지정도의 깨달음이라  법화경은 소설 수준이라고 한다.

또, 부처님 당시 제자들이 해탈은 참 자아의 께달음 수준이기 때문에 6바라밀이 없어 보살이라 할 수 없는 아라한이라 한다.

산 속에서 은둔 하고 있으면 소승수준이고, 저작거리에 나와서 분주하게 육바라밀을 행해야만 대승의 깨달음이다는 식으로 분별을 한다.

이러한 아류의 식견자들은 자신의 주관적인 편견일 수 있고 육바라밀의 참 뜻을 바로 이해 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

깊은 계곡에 핀 장미나  집 담장 밖에 핀 장미가 어찌 장미꽃이 다를 수 있겠는가.

장미는 사람들이 사는 주위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주관적인 생각인 것이다.

허공이 서울의 허공과 미국의 허공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깨닫고나서 육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이나, 의도적으로 육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참 깨달음을 경험하지 못한 단계라고 말하고 싶다.

참 자아를 바로 알아차림 자체가 육바라밀이기 때문에 깨닫게 되면 그의 모든 삶이 육바라밀인 것이다. 

그런데 왜 육바라밀을 대승의 꽃처럼 법으로 말하느냐 하면 불법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구원의 신앙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깨달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육바라밀적인 삶이 불법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에는 육바라밀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부처님의 삶이 육바라밀이었고 설법들 속에 같은 자비의 내용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보살이라는 단어가 대승불교에서 쓰고 소승불교에서는 없는 것은 소승은 자신만의 해탈의 목적이기 때문이다라고 글이나 말에 집착하여 편협된 잣대를 들이대는 것과 같다.

경전의 일부분의 글과 말에 집착하여 전체를 그렇다고  호도하는 것은 스스로 식견의 수준을 내보이는 것이다.

소승이나 대승이나 상관 없이 중도의 실상이나 연기의 이치를 바로 깨닫게 되면  그 시대에 쓰이는 방편의 말들이 다르게 쓰임을 알게 된다.


참 나를 바로 깨닫게되면 생존이니 해탈이니 육바라밀을 써야 되느니 1급 견성이니 1단,2단보살이니 하는 설명은 필요 없다.

(물론 법수의 정도를 구분하기위해 구차제정이니  화엄52계위, 능가, 기신론등에서 나누고 있지만 그 또한 깨달음에 부족한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방편임을 알아야 한다.)


바른 깨달음은 신수심과 법을 모두 깨닫고 이해하여 체득하는 것이다.

초기 여러경전에서는 5온에서 벗어난 것이 해탈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 5온은 3법인이 기본이 됨을 알아야 한다.

왜냐면 부처님이 최초로 말씀한 말이 '중도를 정등각 했다'는  것이다, 그 중도는 3법의 핵심진리다. 

무상과 고와 무아의 이치가 연기성임을 명확하게 믿어  깨닫지 못하면 5온에서 벗어난다 해도 완전한 깨달음이라 할 수 없다.


3법인을 확철하게 알면 모든 삶이 진리 그 자체인 우주, 참나이기 때문에 나와 다른 분별상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육바라밀을 행하는지 아닌지를 구분하지 않는다. 왜냐면 모든 삶이 육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또 다른 나이다. 그런데 무슨 육바라밀이니 자비니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스스로 피곤하면 쉬고 배고프면 밥을 먹으면서 자비비니 바라밀이니 말을 하지 않는거와 같다.

그냥 할 뿐이다. 그 할 뿐인 것은 모든 삶이 중생을 위한 삶 밖에 없다.

그것을 굳이 불법은 자비라는 말을 쓸 뿐이다.


일락서산월출동이라.  서산에 해지면 동산에 달이 뜬다.


아래의 육바라밀에 대한 해석을 비교 해 보자.

일반의 교학적인 설명과 깨달음의 본질에서의 설명을 비교 해 보면서 육바라밀에 대한 스스로의 식견을 확장 해 보자. 


6바라밀다(六波羅蜜多)·6도(六度)·6도피안(六到彼岸)이라고도 한다.

바라밀 또는 바라밀다는 산스크리트 '파라미타'(pāramitā)를 음역(音譯)한 것으로 완성·피안(彼岸) 등을 의미한다.

원래 바라밀의 개념은 원시불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부파불교(部派佛敎)의 논서인 〈대비바사론 大毘婆沙論〉에서는 보시·지계·정진·반야의 4가지 바라밀을 논하고 있다.

6바라밀은 원시불교에서 말하는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과 대승불교의 수행이 목표로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이념에 근거하여 팔정도(八正道)를 비롯한 모든 수행법들을 대승불교의 차원에서 체계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에서 6바라밀은 곧 대승(大乘), 즉 보살의 큰 수레로 표현될 만큼 중요시되었다. 6바라밀의 내용과 순서 및 상호관계 등에 대한 해설은 마하반야바라밀을 비롯한 여러 반야사상 계통의 경전과 〈대지도론 大智度論〉 등의 여러 대승경론에 자세히 논술되어 있다.


화엄경의 〈십지품 十地品〉에서는 반야바라밀을 다시 방편(方便)·원(願)·역(力)·지(智)의 4바라밀로 나누어 모두 10바라밀이라고도 한다.


첫째, 보시바라밀은 단나바라밀(檀那波羅蜜 dānā-pāramitā)의 번역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중생들에게 조건 없이 베풀면서도 무엇을 주었다는 생각마저 버림으로써 자신의 탐심(貪心)을 끊고 집착을 떠나며 타인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윤리적 실천이다.


금강경에서는 보시의 구성요소인 베푸는 자(施者), 받는 자(受者), 그리고 베푸는 내용이 되는 것(施物)의 3가지 모두가 공(空)한 것이라고 했다. 

보시는 일반적으로 재보시(財布施)·법보시(法布施)·무외시(無畏施) 등의 삼시(三施)로 나누어진다. 재보시란 자신이 소유한 물질적인 것을 중생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것이고, 법보시는 모든 중생들이 열반에 들도록 불법(佛法)을 설하여 선근(善根)을 증장시키는 것이며, 무외시는 스스로 계를 지키며 남을 해하지 않고 일체 중생을 두려움에서 구하여 제도(濟度)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지계바라밀은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 śῑla-pāramitā)의 번역으로, 재가(在家)와 출가(出家), 대승과 소승의 모든 계(戒)와 율(律)을 잘 지켜 악업(惡業)을 멸하고 몸과 마음의 청정을 얻는 것을 말한다.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는 스스로 십악업(十惡業)을 짓지 않고 십선도(十善道)를 행하며 또한 남들이 십선도를 행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지계바라밀이라고 한다.


셋째, 인욕바라밀은 찬제바라밀의 번역으로, 타인으로부터 받는 모든 박해와 고통을 잘 참고 나아가 그것을 받아들여 원한과 노여움을 없애고 제법(諸法)을 밝게 관찰하여 마음이 안주(安住)하는 것을 말한다.

인욕에는 보통 4가지 단계가 있다고 한다. ① 복인(伏忍):자신의 뜻에 거슬리거나 괴로움을 당하여 성내는 마음을 조복(調伏)하여 다스리는 것이다. 복인은 괴로움의 대상인 역경(逆境)만을 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순경(順境)까지도 참는 것이다. 역경을 참지 못하면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 여러 가지 악업을 짓게 되며, 순경을 참지 못하면 유혹에 빠져 몸과 마음을 버리게 된다.

② 유순인(柔順忍):복인을 통하여 마음이 다스려지면 역경이나 순경을 당했을 때 스스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③ 무생인(無生忍):보살의 지위에서 얻는 인욕바라밀로써 일체만법(一切萬法)의 불생불멸(不生不滅), 즉 모든 존재가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임을 깨닫고 마음이 안주하는 것이다. ④ 적멸인(寂滅忍):부처의 경지에 오른 인욕바라밀로써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고 적멸한 열반에 드는 것이다.


넷째, 정진바라밀은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 vῑrya-pāramitā)의 번역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선행과 바라밀을 힘써 실천하여 나태한 마음을 버리고 선법(善法)을 닦아나가는 것이다.

정(精)은 순일무잡(純一無雜)을 뜻하고 진(進)은 용맹무퇴를 의미한다. 정진은 사정진(事精進)과 이정진(理精進)으로 나뉘는데, 사정진이란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일을 자신이 세운 서원(誓願)에 따라 부지런히 정진하여 성취하는 것이고, 이정진은 악업을 멀리하고 선한 마음을 일으켜 자신과 중생을 위해 선업(善業)을 닦는 것이다.


다섯째, 선정바라밀은 선나바라밀(禪那波羅蜜 dhyāna-pāramitā)의 번역으로,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을 멈추고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진리를 바르게 사유하는 수행이다.

불교에서는 세계를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3계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세분하여 계층적으로 배열하는데, 각 단계에 따라 4선(四禪) 8정(八定) 등의 선정이 있으며, 반야사상 계통의 경전에서는 108삼매(三昧)의 수행을 설하고 있다.


여섯째, 지혜바라밀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ñā-pāramitā)의 번역으로, 일체법(一切法)의 자성(自性)이 공(空)함을 깨달아 진여실상(眞如實相)을 바로 보는 지혜의 완성을 말한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의 어머니로 표현되며, 앞의 5바라밀 수행의 바탕이 된다.


또한 모든 분별지(分別知)를 떠난 궁극적인 지혜이므로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깨닫지 못한 자의 생각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은 '얻는 바가 없다'(無所得)라고 말한다. '반야바라밀'이란 다만 방편으로서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임시로 붙여진 가명이라고 한다. 〈소품반야경 小品般若經〉에서는 "모든 법은 무변(無邊)이니 전제(前際)도 얻을 수 없고 중제(中際)도 얻을 수 없으며 후제(後際)도 얻을 수 없다.


연(緣)이 무변이기에 반야바라밀도 무변인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신라의 원효 스님은 〈대혜도경종요 大慧度經宗要〉에서 반야의 3가지 차원을 문자반야(文字般若)·관조반야(觀照般若)·실상반야(實相般若)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① 문자반야:부처님의 말씀을 문자로 표현한 경전이 곧 반야의 지혜는 아니나 반야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문자반야라고 한다. ② 관조반야:제법(諸法)의 참된 모습을 관조하는 것은 반야의 작용이므로 관조반야라고 한다.

③ 실상반야:반야의 지혜에 의해 관조된 대경(對境)으로서 일체법의 진실하고 절대적인 모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이 곧 반야 그 자체는 아니지만 반야를 일으키는 근원이 되므로 실상반야라고 한다.



<육바라밀을 회당조심의 명추회요에서는>


금강삼매경에서 '空心不動 具足六波羅蜜 마음을 비워 요동치 않으면 6바라밀을 구족한다.'고 했다.


布施--- 무가여자 명위보시 無可與者 名爲布施<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발대왕경>

           줄만한 것이 없는 것을 보시라 한다.... 마음밖에 머물 만한 법이 있겠는가.

持戒--- 계성여허공 지자위 미혹 戒性如虛空 持者爲迷倒<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발대왕경>

           허공과 같으니 지키는 것은 미혹하고 전도된 것이다.

           어찌 현상의 차별 법에 집착하여 지키고 범하는 것을 분별하겠는가.

忍辱 ---인자 어일찰나 진일체상급제소연 忍者, 於一刹那, 盡一切相及諸所緣  <대보적경>

             인욕은 한 찰나에 일체의 차별상과 모든 반연하는 대상을 없애는 것이다.

            부처님이 견심상념념멸 見心相念念滅<사익범천소문경>'마음의 모습이 매순간 소멸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精進 --- 약능심불기 정진무유 若能心不起 精進無有반<불설법구경>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면 精進은 끝이 없다.

             부처님이 구심 불가득 求心 不可得<사익범천소문경> 마음을 구하여도 구할 수 없다. ...

                      유위법으로 집착하여 허망하게 수고로운 생각을 일으키겠는가.

禪定 ---  불견심상 명위정정 不見心相 名爲正定<대열반경> '마음의 모습을 보지 않는 것을 바른 善正이라 한다.

              시끄럽고 복잡한 것을 피해 고요한 경계를 지키겠는가.

智慧 ---불구제법성상인연 시명정혜 不求諸法性相因緣 是名正慧 <대열반경>  '

           모든 법의 성품과 모습과 인연을 구하지 않는 것을 바른 지혜라 한다.'

            어찌 언어를 좇아 억지로 알음알이를 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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