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혈맥론
바로 가리키고 바로 통하도록 하는 단도직입의 직지법문을 하는 선원. 무심선원
무심선원은 언제나 완전한 깨달음의 실현을 추구할 뿐 어떤 세속적인 가치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무심선원 김태완 선원장. 바로 가리키고 가로 깨닫는 직지법문
달마가 말했다. 삼계가 뒤섞여서 일어나지만 함께 한 마음으로 돌아간다.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고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이름이나 개념이 아니다. 이름 붙일 수도 생각할 수도 없지만 항상 변함 없고 떠날 수 없고 늘 그리워하는 통하기를 원하는 것 이름하여 마음이다. 마음이란 이름이다. 그러나 사실 이름 붙일 수 없는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한 번 통하면 어떤 이름도 필요 없고 달마니 부처니 할 것이 없다. 언제나 이것 하나만 있을 뿐이다.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아니고 알 수도 없다. 안다 모른다 와도 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것과 한 번 통하면 온갖 망상과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벗어나거나 해방된다는 말도 생각으로 하는 말이고 실제로는 망상 번뇌 해탈 열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이것 하나만 있을 뿐이다. 이것밖에는 가리킬 것이 따로 없다. 이것 하나만 유일하게 의심할 수가 없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24시간 365일 100년 1,000년을 살든 언제나 있는 것은 이것 하나뿐이다.
생각은 생각이다. 생각은 허망한 것이다. 달마라는 인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달마는 바로 이것이다. 보리달마라 하든 잣나무라고 하든 똥막대기라 하든 부처라 하든 그 이름과는 상관없이 어떤 이름이든 실제는 바로 이것이다. 노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불법을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실제 있는 것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한국에 있든 유럽에 가든 하늘에 있든 땅밑에 있든 이게 달라질 수는 없다. 이게 한 번 확실히 서면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진여 불성 본성 마음 부처니 여러 가지 붙이지만 그것은 이름이지 붙일 수 없는 것이다. 또 알 수가 없다.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하고 확실하다. 이것에 한 번 통해야 안팎이 없어지고 나다 부처님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부처님이라고 할 것도 없다. 나다 부처님이다 그것은 생각이고 이름인 것이다.
마음이 부처다. 마음이나 부처나 그냥 이름이다. 마음이란 이름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고 부처란 이름이 여기서 나온다. 그냥 이것 하나뿐이다. 한 번 통하면 생각 견해가 필요 없어진다. 나란 생각도 없고 부처란 생각도 없기 때문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다. 나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부처다 하는 생각도 없다. 그런 것이 아니고 바로 이것이다. 이것 하나다. 생각으로 이것을 헤아리면 즉시 망상이 된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이것 자체는 분명하다. 내 마음 내 존재 모두 결국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렇게 이름 붙일 수는 없다. 이것은 그렇게 구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다 존재다 이름 붙일 수 없다. 여기에 붙는 이름은 전부 방편이다.
방편이란 이쪽으로 이끌기 위해 가짜로 만든 수단이다. 방편은 진실의 반대말이다. 이름 붙일 수 없고 생각할 수 없지만 분명한 이걸 가르쳐주기 위해 도가 뭡니까? 당신 이름이 뭐요? 묻는 것이다. ooo입니다. 그러면 그게 뭐요? 그런 데서 한 번 와 닿을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빠지면 사람이 아니다. 마음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손짓 발짓도 하는 것이다. 그런 걸 통해서 이것을 확인시켜 주려고 하는 것이다.
도가 뭡니까? 손가락 번쩍 들기도 하고 잡아당기기도 한다. 여기에 한 번 통하지 않으면 모두 분별해서 하는 일이다. 때문에 불법하고는 관계없다. 마음이다 불법이다 도다 여러 이름이 붙지만 역시 방편으로 만든 이름이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따로 없다. 왜냐하면 항상 있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은 잃어버린 적이 없다. 그러니 따로 얻을 게 없다. 이것은 말로 설득하고 이해되는 문제가 아니다. 말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생각이다. 때문에 그런 것을 가지고 깨달음이라 할 수는 없다.
반드시 불가사의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설법을 듣다 보면 문득 한 번 체험할 수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그런 마음은 사라진다. 이것은 아는 것이 아니고 와 닿는 것이고 통하는 것이고 딱 들어맞는 것이다. 부합 계합하는 것이다. 그러면 밝아진다. 이것이 확실해지면 안팎이 없고 나라고 할 것이 없고 대상이 따로 없다. 여기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
달마가 말했다. 삼계가 뒤섞여서 일어나지만 함께 한 마음으로 돌아간다.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고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결국 마음일 뿐이다. 표현을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늘 땅 사물 온갖 이름이 있지만 한 번 통하면 여기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 하늘이라 말해도 여기서 말하고 여기서 듣고 보는 것이다. 한 번 통하면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고 강은 강이고 산은 산으로 세상은 그대로 전혀 아무 일이 없다. 그냥 이 일 하나뿐이 없다. 체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세상은 밖에 있고 마음은 안에 있다고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그게 중생의 망상이다. 그러나 밖에 세상이 있지 않고 안에 마음이 있지 않다. 한 번 통하면 안팎이 따로 있지 않고 둘이 아니다. 한결 같이 하나다. 이런 말도 결국 방편의 말이다. 직접 경험해 보면 말로 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불가사의한 법문이라 말하지만 어쨌든 한 번 체험이 되어야 한다.
도가 뭔가? 여기서 한 번 통하는 것이 있다. 도가 뭐냐? 손가락 들어 올리는 문답에서 문득 와 닿는 것이다. 그런 체험이 있어야 생각할 수 없는 마음 속 변화가 일어나고 예전과 다름을 알게 된다. 그 동안 생각 감정 기분에 묶여 있었다면 한 번 통하고 나면 아무 것에도 묶이는 것이 없다. 마음 속에 어떤 것이 있다는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전혀 어디에 머물지도 묶이지도 않고 그야말로 한량이 없고 끝이 없고 무한하다. 그러면서도 항상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고 아주 뚜렷하고 분명하면서도 마음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물건이 없음을 알게 된다.
뭐가 마음이냐? 이것이 마음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뭐가 없다. 마치 태양이 늘 하늘에 떠 있는 것과 같이 이것 하나가 늘 떠 있다. 뜨고 지는 태양이 아니다. 태양은 가만이 있지만 구름이 왔다 갔다 하는 격이다. 구름은 자는 것이다. 자지만 나타난다. 꿈도 없는 잠은 알 수 없다. 한 번 통하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 여기에 통할 수 있는 조건은 딱 하나다. 생각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헤아리거나 느낌을 추구하거나 뭘 의도적으로 하면 그 순간 바로 망상에 떨어진다. 무위법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항상 있던 것인데 그 동안 모르고 살아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계가 뒤섞여서 일어나지만 모두 한 마음으로 돌아간다.
萬法歸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했다. 이런 말은 모두 방편으로 이것을 가리키려고 하는 말이다. 삼계엔 온갖 모양 색깔 소리 느낌 욕망 사물이 다 있다. 분별하면 온갖 일들이 다 일어난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도 단지 이 하나의 일이다. 하늘을 보고 하늘이라 하는 것이 하나요 땅을 보고 땅이라 하는 것이 하나다. 삼라만상이 하나로 돌아간다. 어디로? 바로 이것 하나로 돌아간다. 말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로 이해할 수는 없고 한 번 와 닿아야 한다.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저절로 분명하고 확실하고 생생하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이것을 일러 마음이라 하는 것이다.
세속의 몸 느낌 생각 욕망은 분별하지만 마음은 분별할 수 없다. 몸을 분별하는 것도 이 마음이 하는 것이고 느낌도 생각도 보고 듣는 것도 다 이 마음이 하는 것이다. 이것은 따로 어떻게 할 수 없다. 이것은 볼 수도 느낄 수도 들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있어 반드시 한 번 확인되는 때가 있다. 아는 것이 아니고 통하는 것이고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뭘 보면 모양과 색깔만 보이지 이것은 안 보인다. 이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다. 모양과 색깔을 볼 때 사실 이것이 하는 일인데 모양과 색깔을 보고 끄달려 따라간다. 소리를 들을 때는 이것이 소리를 듣는 것인데 그것은 모르고 새소리인가 바람소리인가 분별하고 따라가 버린다.
느낌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온갖 느낌도 일어나는데 이걸 모르고 부드러운 느낌인지 거친 느낌인지 따지고 따라간다. 그러니 중생이다. 중생이 자기는 놓치고 사물만 따라가는 것이다. 마음은 모든 사람에게 항상 갖춰져 있다. 때문에 깨닫는 것이 가장 쉽다. 다만 밖으로 분별만 따라가는 엉뚱한 짓을 하지 않으면 된다. 방향이 틀린 것이다. 자꾸 생각으로 알려하고 뭘 해보려고 하고 애를 써 노력한다. 그러나 이것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무위법이다. 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노력하는 것은 유위법이다. 잠도 안 자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은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작이고 가짜다. 이것은 뭘 할 것이 없다. 가만히 있을 때나 뭘 할 때나 전혀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뭘 한다고 되는 것도 안 한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열심히 하라는 것도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쉬라는 것도 다 잘못된 가르침이다. 열심히 하라는 것도 분별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쉬라는 것도 분별이기 때문이다. 뭘 어떻게 하라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도가 뭡니까? 하면 뜰 앞의 잣나무 하는 것이다. 잣나무를 어떻게 하라는 소리를 안 한다. 분별하면 모두 조작이고 망상이고 가짜이기 때문이다. 잣나무를 잡아라 고도 버리라 고도 아무런 말이 없다. 만약 말한다면 잘못된 가르침이다. 도가 뭡니까? 뜰 앞의 잣나무. 그걸 어떻게 해? 어떻게 할 수 없다. 어떻게 한다면 그것은 전부 분별이고 조작이고 가짜다. 모든 노력하는 유위법은 여몽환포영이다.
공부는 노력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항상 갖추고 있는 이것 하나 그래서 마음이다. 누구든지 나서 죽을 때까지 한 순간도 빠짐없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부처다. 확인하면 된다. 범부들은 자기 마음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마음은 두 개가 없다. 불이법이다. 둘로 나눠질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내가 내 마음은 알 수 없다. 내가 내 마음을 안다면 아는 마음이 있어 마음이 두 개가 된다. 그러니 가짜다 망상이다. 때문에 알 수 없다. 자기 마음을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중생이다. 모두 자기 마음을 아는 듯 얘기하지만 자세히 물어보면 모른다. 막연하게 내 마음이 어떻다 감정 느낌 생각을 말한다. 그러나 감정 느낌 생각은 마음이 아니다.
감정 느낌 생각은 마음 속에 일어나는 물결 같은 것이다. 현상이다. 순간순간 스쳐가는 현상이다. 마음은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생불멸이다. 마음을 불교에서 空으로 비유한다. 허공 아무 것도 없다. 이 세상의 허공은 둘이 없다. 온 우주에 허공은 하나뿐이다. 서울 하늘의 허공 부산 하늘의 허공 그것은 생각으로 분별하는 말이다. 그래서 공이란 말을 마음 대신 쓰는 것이다. 보통 경전에서는 마음이란 말보다 공이란 말을 주로 쓴다. 대신 선에서는 공 대신 마음이란 말을 많이 쓴다. 왜냐하면 허공 하면 바깥에 있고 마음 하면 자기 일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나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마음은 하나뿐이다. 일심이다. 원효스님은 일심이문으로 불교 전체를 설명하고 있다. 불교는 모양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세간과 출세간 진제와 속제 분별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은 한 개이다. 이 한 개의 마음이 모양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세간이기도 하고 출세간이기도 하고 중생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다. 불교이론은 그렇다. 그러나 말이 아니고 실제 이것이다. 말이 아니고 실제로 한 번 체험으로 통해야 그게 단순한 헛소리가 아니고 다 근거가 있는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바로 이것이다. 마음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이다. 단지 알 수는 없다. 그래서 마음은 아는 것이 아니고 깨닫는 것이다. 마음은 안다는 얘기를 안 한다. 마음은 깨달아야 하는 것이고 통해야 하는 것이고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 하나뿐이다. 이것만 통하면 된다. 불교는 교리적으로 공부하면 엄청 복잡해서 알 수 없다. 깨달으면 자기 마음을 자기가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어려울 것이 없다. 능엄경에서는 자기 머리를 자기가 찾는 일이라 했다. 자기 머리를 자기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다. 다른 사람 머리는 다 보이는데 내 머리는 왜 안 보이지 하는 것이 중생의 어리석은 모습이다.
그러나 이렇게 헤매다가 지혜로운 이를 만나면 제 머리를 자기가 보고 깨닫는 것이 아니고 문득 망상에서 벗어나서 깨닫는다. 왜냐하면 자기 머리는 항상 제자리에 붙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깨달음은 온다. 마음은 바로 이것이다. 깨달음은 아주 쉬운 일이다. 이렇게 한 번 체험해야 비로소 부처님 말씀이 진실하게 다가온다. 그전엔 그냥 형이상학이다. 알 수 없는 굉장히 이상한 소리로 들린다. 이것을 한 번 경험하고 체험해야 경전의 말씀이 비로소 이해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니 그렇게 밖엔 표현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불교공부는 자기 마음을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경전 읽어 되는 것이 아니다. 문자는 평생 봐야 소용이 없다. 남의 소리만 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 속에 헤매다 끝난다. 자기의 살아 있는 마음을 봐라. 이것을 찾아야 한다. 3살 먹은 아이도 80 먹은 노인도 다 갖추고 있다. 발심만 하면 어렵지 않다. 단 생각으로 찾으면 안 된다. 생각으로 찾는 일은 마치 자기 얼굴을 자기가 보고자 하는 일과 똑같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찾을 수 없다.
탁탁탁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분명히 보인다. 소리나 손가락을 마음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소리나 손가락이 아니다. 마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한 번 체험이 되는 때가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을 듣고 한 번 깨달으면 영원히 되돌아가지 않는다. 말을 듣고 깨달은 사람은 전쟁터에 가도 안 없어진다. 수행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설법을 듣다 문득 깨치는 것이다. 전등록에 보면 질의 응답하는 과정에서 다 깨우친다. 좌선수행 해서 깨달았다는 기록은 없다.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고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以心傳心. 문자는 다 생각이다. 개념이다. 마음 속에서 이미 그린 그림이다. 문자는 세우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 이게 이심전심이다. 마음을 바로 가리키고 통하는 것이다. 이심전심은 말로 설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마음은 하나뿐이다. 네 마음 내 마음 따로 있지 않다. 그런데 중생은 네 마음 내 마음 따로 있다 분별한다. 망상이다. 마음은 허공과 같다. 네 허공 따로 있고 내 허공 따로 있나? 허공은 하나다. 그래서 아상 인상이 없다. 나와 남이 따로 없다. 이것 하나다. 이것만 체험이 하면 이것뿐이다. 다른 일이 없다. 언제나 24시간 항상 똑같다.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작아지는 것도 아니고 커지는 것도 아니다. 늘 똑같다. 언제나 있는 이것 하나뿐이다
만약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을 마음이라고 합니까?
그대가 나에게 묻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고 내가 그대에게 답하는 것이 곧 나의 마음이다. 나에게 만약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그대에게 답할 수 있겠느냐? 그대에게 만약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나에게 물을 수 있겠느냐?
이름을 붙이지 않고 생각을 하지 않고 문자를 세우는 분별이 없다면 무엇을 마음이라고 합니까? 마음이라고 따로 이름 붙일 것은 없다.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다. 이것은 방편이다. 보는 것이 마음이다 듣는 것이 마음이다 라는 말은 별로 좋은 방편은 아니다.
도가 뭡니까?
평상심<평소 이 마음>이 도다.
평상심을 대상으로 그것을 향해 갈 수 있습니까? 평상심이 뭔데 그걸 알아야 가지 않겠습니까?
어디로 향한다면 벌써 틀렸다.
그러면 그게 도인 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는 일과는 아무 상관 없는 것이다.
평상심 따로 내 마음 따로 있다면 마음이 두 개가 된다. 이것이 내 마음이구나 하고 아는 것은 도가 아니다. 분별의 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분별할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평소 늘 있는 것이 그것이고 마음이다. 도를 깨우친다고 갑자기 슈퍼맨 되는 것이 아니다.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헤매지 않는 것이다. 깨달음의 반대는 미혹이다. 헤매는 것이 미혹이다. 혹하고 속는 것이다. 생각에 속고 분별에 속아 헤매는 것이다. 불안하고 불확실하고 안심이 안 되는 것이다. 깨닫는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열반=적멸. 온갖 망상 분별이 사라진 것이 적멸이다. 법이라 할 것도 없고 깨달음이라 할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다. 생사 즉 열반이다. 그냥 살고 있는 것이 열반이다. 늘 공부하고 관심을 가지다 보면 언제가 깨닫는 것이 있다. 공부란 자기 마음이란 땅에다 반야라는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 씨앗 심었다고 바로 싹을 틔우는 것은 아니다. 물을 줘야 한다. 법비가 내려야 한다. 설법이 법비다. 법문을 들어야 한다. 관심을 가지고 계속 듣다 보면 때가 되면 은연중 깨달음이 온다.
망상은 생겼다 사라졌다 하지만 이것은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 태양은 그대로지만 구름이 왔다 갔다 하는 격이다. 생각 감정 욕망 느낌 이것이 다 망상이다. 내 마음 네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다. 마음은 하나뿐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항상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생각으로 공부하면 안 된다. 분별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도가 뭡니까? 손가락 하나 들면 저절로 와 닿아야 한다.
나에게 묻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니 시작 없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움직이고 생각할 수 있고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모두가 본래의 그대 마음이고 모두가 그대의 본래 부처다.
마음이 부처다. 마음이 깨닫는 것이고 마음이 미혹한 것이다.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중생 노릇하고 마음이 부처 노릇하는 것이다. 부처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중생이기 때문에 일시에 잠을 깨듯 일체 제도가 가능한 것이다. 온갖 종류의 중생이란 온갖 종류의 분별 망상을 말한다. 망상은 헛된 생각이다. 꿈 속에서 복권 당첨되어 수십억 벌었다. 꿈 깨면 수십억이 없어진 것인가? 아니다. 본래부터 없었던 것이다. 금강경의 한 중생도 제도된 중생이 없다는 구절은 사구게보다 더 중요한 금강경의 핵심 구절이다.
부처님이라는 위대한 진리가 있다. 처음엔 그렇게 말한다. 그러면 한 번 만나봐야 되겠다 발심하고 들어오면 네 마음이 부처다 그러는 것이다. 그런데 네 마음은 만날 수 없다. 왜? 마음은 둘이 아니니까 그런다. 장사 속이다. 광고하고 실제 제품하고는 같을 수 없다. 그게 다 방편이다. 일단 광고로 눈길을 끈다. 그래서 부처님이라는 방편을 쓴다. 구경만 하고 물건은 안 사는 고객은 필요 없다. 마음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 항상 이것이다. 지지 않는 태양과 같이 늘 빛나고 있지만 알 수는 없다. 안다 그러면 두 개가 되기 때문이다. 불이법이다. 이게 와 닿는 것이 견성이다.
見性成佛 견성이 곧 성불이다. 견성이라니 성품이 따로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말만 보면 전부 착각하고 오해한다. 견성이 뭡니까? 불이법이다. 둘이 없는 것이다.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육조스님이 15년간 사냥꾼을 따라 다니다 세상에 나온 곳이 광조우 법성사다. 오조스님에게 무슨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선정 해탈은 말씀 안 하시고 오직 견성만 말씀하셨습니다. 선정이니 해탈이니 유루니 무루니는 모두 유위법이다. 말하자면 분별법이다. 견성만 불이법이다. 불이법은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안팎이 없고 주객이 없고 알 수 없다. 바로 이것이다.
마음은 살아 있다. 마음이 안 살아있으면 우리가 살아 있을 수 없다. 일체유심조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 왜? 마음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 나온다. 한 순간도 죽을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견성은 불이법이다.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체험하면 진짜가 나왔음을 안다. 생각은 때와 장소에 따라 자꾸 바뀐다. 그러나 이것은 맨날 똑같다. 어찌할 수 없다. 손댈 수 없다. 우리가 손 댈 수 없는 유일한 것은 이것 하나뿐이다. 느낌도 감정도 생각도 의지도 다 손대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손 댈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을 여여다. 항상 똑같다. 그래서 무위법이다. 무위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유위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망상이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누구나 갖고 있다. 24시간 있다. 깨달음이 제일 쉽다. 물론 미묘한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생각이 자꾸 장난을 치기 때문이다. 이것은 멀리 있지 않다. 모든 사람에게 갖춰져 있는 평소 그 마음이다. 다만 시절인연이란 것은 있다.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법문을 듣다 보면 언젠가 깨닫는다. 1년을 듣던 10년을 듣던 깨닫고 나면 모두 똑같아진다. 갈 길은 이것밖에 없다. 언제든 어디서든 모두가 본래의 그대 마음이고 모두가 본래 그대 부처이다.
이걸 일러 불생불멸이라 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모두 변한다. 몸 감정 느낌 모두 순간순간 변한다.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변함이 없다. 이것을 확인하는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고 그때부터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이 느낀다. 왜냐하면 항상 이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이아몬드처럼 대상이 있어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건도 아니고 모양도 없다. 그러나 분명하다.
本來無一物 본래 마음이란 한 물건도 없다. 정해진 물건은 없지만 언제든 어디서든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실제 와 닿아야 한다. 생생하고 진실하게. 관념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머리 좋은 사람이 이해한다 해도 그것은 아니다.
설법은 <지중> 대중에게 있는 그대로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항상 보여주는 것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마음을.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 시간도 없고 기억할 수도 없다. 지나간 마음이란 없다. 항상 바로 이것이다. 말은 방편이고 지중이 핵심이다. 깨닫게 되면 어? 이것 항상 있던 것인데 왜 모르고 살았을까? 느끼게 된다. 그래서 평상심시도란 말을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만약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본성을 봐야 하느니 본성이 곧 부처이다. 스스로의 본성은 진실하여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다. 만약 본성을 본다면 부처이고 본성을 보지 못하면 곧 중생이다.
바로 이것이다.
부처 견성 마음 뭐라 해도 이름은 상관 없다. 너무 확실해 의심할 수 없다. 이것이 뭐냐? 답할 수 없다. 문제가 없어지고 답도 없다. 마음이란 자기 몸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온 우주에 편재해 있다. 우주 전체가 말하자면 바로 마음이다. 이것이 한 번 통하면 온 우주와 통한다. 깨닫고 나면 왜 무아라고 하는지 알게 된다. 죽어가던 사람이 새로 확 살아나는 경험이다. 방편은 수단으로 한 소리에 불과하다. 진실함이 없다. 실제로는 본래 우리에게 있던 것이다. 번뇌는 마음의 질병이다. 마음이 느끼고 있는 불편함이다. 한 번 알면 그 불편함이 사라지고 헤맬 일도 할 말도 없다. 전혀 분별이 설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가 뭡니까? 소똥이다. 그래서 한 말이다. 도가 뭡니까? 잣나무다. 도는 생각이 아니다. 생각과 육체와는 다르다. 모두 이것 하나 가리키려고 하는 소리다.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 잣나무라 했을까? 다 망상이다. 자기 스스로 갖고 있으면서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중생이다. 부처는 깨달은 중생이고 부처가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다. 부처가 망상하면 중생이 되는 것이다. 다 똑같은 마음이다.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닫는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꿈 속에 있기 때문이다. 선지식은 잠 깨우는 사람이다. 좋은 선지식을 만나면 잠을 깨는 것이 어렵지 않다.
뭐가 꿈인가? 우리가 알고 이해하는 것은 모두 꿈이다. 생각의 꿈에서 깨어나는 그런 경험이 한 번 있어야만 안다. 그게 바로 견성이다. 생각이 뚝 끊어진다. 아무 생각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한 번 하는 것이다. 한 번 알면 생각을 해도 생각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생각에 사로잡혀 끄달리지 않는다. 이것은 항상 변함이 없다. 허공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 허공이 마음이다.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마음은 항상 분명하고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 마음은 몸도 아니고 느낌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의지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변하지만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눈을 뜨고 일상생활 하는 자체가 바로 꿈이다.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수행해서 공부해서 아는 것은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견성이라 볼 수 없다.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두 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망상하는 마음 망상하지 않는 마음이 따로 두 개 있는 것이 아니다. 망상하는 마음을 깨닫고 보면 그것이 마음이다. 그밖에 따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알 수 없다. 방법이 없고 길이 없다.
그러나 꿈을 깨려는 절박함이 있으면 깨진다. 자기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 아니다. 알음알이는 모두 가짜다. 망상이다. 내 마음이란 조그만 세계의 껍질을 깨고 보면 끝없이 무한함을 알게 된다. 머무는 데도 없고 모양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무주 무상 무언 무쟁이다. 부처님께서는 만족함을 알았다고 하셨다. 원하는 것이 없다. 늘 이것만 있으니 부족함이나 불안함이 없다. 한 번 체험하면 마음의 문이 확 열리고 장애 장벽이 사라진다. 장애가 사라지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무엇이 장애인가? 내 마음이 장애다. 망상이 장애다. 나라는 장애가 사라지면 그 다음엔 아무 것도 없다. 분별이 있는 세계와 분별이 없는 세계는 하나다. 물과 물결은 둘이 아니다. 물과 물결을 분리하겠다면 엄청난 망상이다.
道는 본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으니 닦아서 얻을 필요가 없다. 도는 소리와 색깔이 아니니 미묘하여 보기가 어렵다.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서 차갑고 따스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아서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여래만 알 수 있을 뿐 나머지 사람이나 하늘 신령 등의 부류는 전혀 깨달아 알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다.
체험해 보지 않으면 무슨 얘기하는 지 모른다. 생각으론 알 수 없다. 머리로 아는 것은 진실하지 못하다. 말과 행동이 100% 일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머리로 아는 것을 실제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자기를 속이는 짓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갖추어져 있다.
마음이 부처요. 평상심이 도다. 출발은 소를 찾는 것에서 시작한다. 수십 년 수행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돈오 깨달음이 항상 먼저다. 실생활엔 조용함과 시끄러움이 혼재해 있다. 그래서 공과 색이 둘이 아닌 불이법이다. 이것은 생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가 분명하면 지혜는 저절로 나온다. 항상 이 자리다. 지금 이 순간 여기라고 말로 표현해도 맞지 않다. 말하면 망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야 하기 때문에 뜰 앞의 잣나무 마른 똥 막대기 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이것을 가리키려고 하는 말이다.
이것은 허공과 같다. 허공을 어떻게 닦나? 신수와 혜능의 차이다. 신수의 생각은 망상이다. 이것은 수행해서 깨닫고 갈고 닦는 것이 아니다. 깨닫고 잘 확보만 하면 된다. 그런데 잘 안 된다. 망상하며 헤매던 시절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망상의 힘이 너무 강한 것이다. 정말 이것 밖에 중요한 것이 따로 없다. 하라는 것도 하지 말라는 것도 분별이고 유위법이다. 망상이다. 법은 손가락으로 가리킬 뿐이다. 그래서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다.
도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려면 바로 어긋난다. 생각은 발 붙일 데가 없다. 설법을 듣는 사람은 생각으로 들으면 안 된다. 설법은 강의가 아니다. 설법은 대중에게 법을 바로 보이는 것이다. 생각 분별이 아니다.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체험이다. 어떤 선지식이나 부처님 말도 기억하면 안 된다. 살아있는 마음을 한 번만 통하면 된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마조스님 말씀이다. 단지 오염만 안 되면 된다. 자기 생각 분별 의도가 모두 오염이다. 계속 여기 버티다 딱 와 닿아야 된다. 밤송이가 목에 걸리면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다. 쥐덫에 갇혀 꼼짝달싹 할 수가 없다. 냄새가 진동하지만 뜨거워서 혀를 댈 수가 없다. 그런 느낌이 들면 깨달음이 멀지 않은 것이다. 명백하다. 마음이란 누구에게든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선지식의 말 끝에 깨친다. 걸린 것이 쑥 내려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 다음 변화를 느낀다. 이제부터 공부 시작이다. 이것은 확실하고 분명하다. 그러나 알 수 없다. 알면 안 된다. 이것이 마음이고 도고 깨달음이고 부처다. 그 외 다른 것이 따로 없다.
- 무심선원 특별법회 달마혈맥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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