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르침은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달마(達磨)가 지은 ≪이입사행론 二入四行論≫과 신라의 원효(元曉)가 논(論)을 쓴 ≪금강삼매경 金剛三昧經≫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나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입사행론≫에서는 도에 들어가는 길이 여러 가지로 많지만 요약하면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의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입이란 중생은 누구나 참된 마음바탕인 진성(眞性)을 가지고 있으나 번뇌망상에 뒤덮여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믿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와 같은 전제 아래 망념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집중하여 벽관(壁觀)을 행하면 무념무심(無念無心)이 되어 자타(自他)와 범성(凡聖)에 대한 분별이 없어지고 글이나 말에 끌려다니는 일이 없게 된다. 그리하여 이치와 일치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고요하기 그지없는 무위(無爲)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입은 선종에서 천명하는 돈오사상(頓悟思想)의 모체가 되었다.
≪금강삼매경≫에서는 이입은 중생이 진성과 다르지 않지만 오직 번뇌 때문에 하나가 가려져 있음을 깊이 믿고 과거나 미래에 집착함이 없이 각관(覺觀)에 깊이 머물러서, 불성을 관하여 유무(有無)와 자타와 범성을 초월한 금강과 같은 십지(十地)에 머무르게 되며, 적정무위(寂靜無爲)의 분별함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원효는 이것을 십지 이전의 경지라고 해석하였다.
사행에 대하여는 ≪이입사행론≫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보원행(報怨行)이다. 이 보원행은 과거에 지은 잘못을 갚는 행위로서, 수도하는 자가 갖가지 고난을 당할 때 마땅히 다음과 같이 반성할 것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오랜 옛날부터 무수한 시간에 걸쳐서 참된 나를 버리고 잘못된 여러 세계를 헤매 다니다가 많은 원한이나 증오의 마음을 일으켜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움을 샀고 해를 끼쳤다. 지금은 비록 죄를 범함이 없다고 할지라도 이 모든 고난이 과거 오랜 기간에 걸쳐 지은 악업의 결과가 무르익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기꺼이 참아 견디면서 원망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현재의 고난을 대할 때 저절로 본래의 이치에 부합하여 도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인연을 따라서 행하는 수연행(隨緣行)이다. 모든 중생은 변하지 않는 개체가 아니라 연분(緣分)의 힘으로 전개되는 존재이다. 따라서, 중생에게 따르는 고(苦)와 낙(樂)은 모두 인연을 따라서 생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에 훌륭한 과보나 명예 등이 생겼다면 그것은 지난날 쌓인 원인들이 감응한 덕택에 얻게 된 것일 뿐, 연분이 다하면 다시 무로 돌아갈 것이므로 기뻐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세속의 성공이나 실패 따위는 모두 인연에 따르는 것으로서, 내 마음 자체에는 어떠한 증감도 없으므로 기쁜 바람이 불어와도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도를 따라 순응하여가는 것을 수연행이라고 하였다.
셋째는 아무 것도 가지려 하지 않는 무소구행(無所求行)이다. 세상사람들은 오랫동안 미혹에 빠져 가는 곳마다 욕심을 내고 집착을 한다. 이것을 일컬어 구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혜 있는 사람은 진성을 깨닫고 이치가 본질적으로 세속의 것이 아님을 알아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억지로 구하려는 생각 없이 세상 돌아가는 대로 맡기고, 일체가 다 공(空)임을 알아서 쾌락을 즐기려는 욕심마저 가지지 않는 것이다. 즉, 세속적인 것에 대한 허망한 욕심을 버리고 가지고자 함이 없는 것을 무소구행이라고 한다.
넷째는 법에 맞게 사는 행위인 칭법행(稱法行)이다. 이때의 법이란 중생들의 본래 성품이 다 청정무구한 것을 밝힌 이치를 뜻한다. 이 이치에 따르면 모든 외형적이고 인위적인 상(相)은 곧 공한 것이 되고, 무엇에 의하여 얽히거나 물듦이 없으며, 그 어떤 것에 대한 애착도 가지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이치에 의거하여 육체와 생명과 재물로써 보시(布施)의 덕을 실천하되 조금도 아끼고 아쉬워하는 마음을 내지 않게 되며, 완전한 자리행(自利行)과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좋은 일을 행하면서도 그에 대한 애착과 물듦이 없이 행하는 것을 칭법행이라고 한다.
≪금강삼매경≫에서는 행입의 각 행위를 세분하지 않고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행입이란 무엇이냐?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의지하지 않으며, 객관적 사물에 대한 헛된 망상의 그림자가 일어나지만 그것에 매달려 떠내려가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사물을 대할 때 마음이 고요해져 일체 가지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며, 대상 세계가 일으키는 바람에 전혀 동요되지 않는 것이 마치 대지와 같다. 주관인 나에게도 대상이 되는 사물에도 걸리는 바 없이 중생을 구제하되, 주관과 객관에 대한 생각이 없어져서 어느 하나를 취하고 어느 하나를 버리는 일이 없는 것이다.”
원효는 이 행입이 곧 십지의 경지에서 행하는 자리행으로서, 세상의 복락에서부터 대열반에 이르기까지 원하고 바라는 것이 없으며, 주관과 객관에 대한 일체의 구별을 떠났으므로 능히 일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불교학계에서는 ≪금강삼매경≫과 ≪이입사행론≫ 중 어디에서 먼저 이와 같은 이입사행설을 주장하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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