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리 라마나 마하리쉬

세속(世俗)에 관해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

통융 2017. 4. 17. 16:19

세속(世俗)에 관해

 

{문}

​저는 이제 제가 하는 일을 그만두고 항상

슈리 바가반의 곁에 머무르고 싶습니다.

 

{답}

​ 바가반은 항상 그대 곁에, 그대의 안에 있으며,

그대 자신이 바가반입니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 그대의 직업을 그만두거나

집에서 도망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출가란 옷을 벗고, 가족 인연을 끊고, 집을 떠나는 외관상의

버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애정과 집착을 포기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대의 직업을 내놓을 필요는 전혀 없으며,

 

다만 그대 자신을, 저 모든 짐을 떠맡아 주는 신에게 내놓기만 하면 됩니다.

욕망을 버리는 사람은 실은 세상 속에 합일되면서

 

자신의 사랑을 우주 전체로 확산합니다.

신에게 진정으로 헌신하는 사람에게는, 포기라는 말보다는

 

사랑과 애정의 확산이라는 말이 훨씬 좋은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가까운 인연들을 포기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 애정과 사랑의 인연을,

계급과 종교와 인종의 경계를 넘은 보다 넓은 세계로 뻗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출가자가 옷을 벗고 집을 떠나는 것은 그의 가까운 인연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의 사랑이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확산의 때가 오면, 그는 집에서 도망간다고 느끼지 않으며,

마치 다 익은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그렇게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집을 떠나거나 직업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문}

재가자가 어떻게 해탈을 추구하는 공부를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탁발 수행자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답}

​그대는 왜 자신이 재가자라고 생각합니까?

그대가 비록 출가 수행자로 나선다 해도,

자기가 출가 수행자라는 생각이 그대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가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건, 그것을 버리고 숲 속으로 들어가건,

그대의 마음은 그대를 따라다닐 것입니다.

에고가 생각의 근원입니다.

 

Tip:(에고(ego)=자아(自我, ego)는 생각, 감정 등을 통해 외부와

접촉하는 행동의 주체로서의 '나 자신'을 말합니다.)

그것이 육체와 이 세계를 만들어 내고, 그대로 하여금

자신이 재가자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대가 가정을 버린다 해도, 그것은 재가자라는 생각을 출가자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가정이라는 환경을 숲 속이라는 환경으로 바꾸어 놓을 뿐입니다.

마음의 장애들은 여전히 그대에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엄청나게 커질 수도 있습니다.

환경을 바꾸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일한 장애물은 마음이며, 그대가 집에 있건 숲 속에 있건,

그대는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만약 숲 속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집에서라고 왜 못하겠습니까?

그러니 왜 환경을 바꾼단 말입니까?

환경이 어떠하든, 그대는 바로 지금 공부할 수 있습니다.

 

{문}

세간의 일에 바쁜 가운데서도 삼매를 즐길 수 있습니까?

 

{답}

​ '내가 일한다'하는 느낌이 장애물입니다.

'누가 일하는가?'하고 자문해 보십시오.

그대가 누구인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일이 그대를 속박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자동적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일을 하려고 노력하지도 말고, 그만두려고 노력하지도 마십시오.

그대의 노력이 속박입니다.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은 일어납니다. 만약 그대가 일을 하지 않도록 정해졌다면,

그대가 일을 찾아서 하려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대가 일을 하도록 정해졌다면, 그대는 그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일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더 높은 힘에 맡겨 두십시오.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것을 그만두거나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문}

​ 바가반께서는 어제, 우리가 '내면적으로' 신을 찾는 동안에도,

'외면적인' 일은 자동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슈리 짜이따니야의 생애를 보면,

그는 제자들에게 강의를 하면서도 실제로 내면에서는 끄리슈나를 추구하여,

그의 육신에 대해서도 잊어버리고 끄리슈나에 대해서만 계속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과연 일을 그냥 내버려두어도 괜찮을지 의문이 생깁니다.

신체적인 일에 대해서 주의의 일부라도 계속 기울여야 합니까?

{답}

​진아는 모든 것입니다.

그대는 진아로부터 떨어져 있습니까?

아니면 일이 진아 없이 진행됩니까?

진아는 작용하지 않는 데가 없으며, 따라서 모든 행위들은 그대가

그것에 관계하려고 노력하든 하지 않든 진행될 것입니다.

일은 스스로 진행됩니다.

그래서 끄리슈나는 아르쥬나에게 까우라바 일족을 죽이는 것을

괴로워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문}

그러나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일은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답}

진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대는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대가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포함해서, 육체와 그것이 하는 행위들은 진아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대가 일에 주의를 기울이든 않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걸어갈 때, 그대는 걷는 발걸음에 주의하지 않지만

잠시 후에는 목적지에 도착해 있는 것입니다.

그대는 걷는 일이, 그대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이처럼 진행된다는 것을 압니다.

{문}

진아를 기억하여 잊지 않고 있으면, 그의 행위들은 항상 올바르겠습니까?

{답}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행위의 옳고 그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행위들은 신의 행위이며 따라서 올바른 것입니다.

{문}

다른 사람들보다 마음을 더 많이 써야 하는 저는,

어떻게 하면 제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교장 선생의 일을 그만두고 홀로 있고 싶습니다.

{답}

아닙니다.

그대는 지금 있는 곳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그 일을 계속해도 됩니다.

마음을 살아 움직이게 하며 마음이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그 저변의 흐름은 무엇입니까?

물론, 진아이지요!

따라서 그것이 그대 행위의 진정한 근원입니다.

그저 일을 하는 중에도 진아를 자각하고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그것을 관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서두르지 마십시오!

느긋하게 하면서, 일하는 동안에도 그대의 참된 성품을 기억하여 놓치지 말며,

급하게 서두르지 마십시오.

서두르면 잊어버립니다.

침착하십시오.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그것을 받쳐주는

진아와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하도록 유도하십시오.

일을 하고 있는 자가 그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일을 하는 것은 흐름이라고 생각하고, 그대 자신을 그 흐름으로 보십시오.

만약 서두르지 않고 자신을 기억하면서 일한다면,

그대의 일은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문}

초기 단계에서는 우리가 자기 삶의 외부적 의무들을 포기하고

홀로 있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답}

포기란 항상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숲 속이나 한적한 곳으로 들어간다든지

자신의 의무를 포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마음이 밖으로 향하지 않고 안으로 향하도록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리로 가든 저리로 가든, 그리고 자신의 의무를 포기하든 않든,

그것은 정말 중요하지 않습니다.

육체가 겪어야 할 모든 행위들은 그것이 처음 태어날 때 결정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대가 가진 유일한 자유는 마음을 내면으로 돌려,

거기서 행위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문}

그러나 특히 초심자에게는, 마치 어린 나무의 둘레에 쳐주는 울타리처럼,

도움이 되는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예컨대 여러 책에서는 성지를 순례하거나 친견을 가져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답}

누가 그런 것들이 도움이 안 된다고 합니까?

다만 그런 일을 하고 않고는 그대에게 달려 있지 않으며,

그대가 마음을 내면으로 돌리는 일만이 그대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대가 말하는 성지 순례나 친견을 원하지만,

다 그것을 하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문}

왜 마음을 내면으로 돌리는 일만이 우리에게 달려 있고,

다른 외부적 일들은 그렇지 않습니까?

{답}

그대가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면,

그대는 그대가 누구인지를 탐구하고,

자유나 운명을 가진 자가 누구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문}

자기탐구를 하려면 홀로있음이 필요합니까?

{답}

홀로있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개인은 항상 홀로입니다.

홀로있음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세간의 번잡한 곳에서도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홀로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숲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홀로 있다 할 수 없습니다.

홀로있음은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문}

그렇다면 우리는 일을 하면서도 욕망에서 벗어나,

홀로있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군요.

그렇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집착을 가지고 하는 일은 속박이 되지만,

집착 없이 하는 일은 그 행위자에게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문}

우리의 일상 생활은 그러한 노력과 양립하지 않습니다.

{답}

왜 그대는 그대가 행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대가 여기 도착하는 과정을 아무렇게나 예로 들어봅시다.

그대는 차를 타고 집을 나서, 역에서 기차를 타고,

역에서 내려 다시 차를 탔다가 내리면, 이 아쉬람에 와 있습니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면, 그대가 사는 마을에서부터 줄곧

여행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대는 말합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그대는 있는 그대로 있었고 운송 수단이 줄곧 움직여 온 것 아닙니까?

그 운송 수단의 움직임이 그대 자신의 움직임으로 혼동되는 것과 꼭 같이,

그대의 다른 행위들도 그대 자신의 행위로 혼동되는 것입니다.

{문}

성격상 끊임없는 행위를 요하는 제가 업무를 하는 속에서 어떻게 행위의

그침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

현명한 사람이 하는 행위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만 행위로 보이고

그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으므로,

그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 해도 실제로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행위들은 행위의 그침과 마음의 평안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행위들이 단지 그의 면전에서 일어날 뿐,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

서양인들은 내면으로 물러나기가 더 어렵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지나치게 활동적이며,

그들의 에너지는 밖으로 향합니다.

우리는 진아를 잊음이 없이 안으로 고요하면서도,

밖으로는 행위를 계속 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무대 위에서 여자 역을 하는 사람이 자기가 남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삶이라는 이 무대 위에서 우리의 맡은 역을 해야 하지만,

우리 자신을 그러한 배역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문}

​ 다른 사람의 영적인 게으름을 어떻게 하면 없애줄 수 있습니까?

{답}

그대 자신의 게으름은 없앴습니까?

{문}

그러나 다른 사람이 문제나 고민을 안고 있을 때, 어떻게 그를 도와줄 수 있습니까?

{답}

다른 사람이라니 이 무슨 말입니까?

단 하나만이 존재합니다.

나도, 너도, 그도 없고, 그 모든 것인 단 하나의 자기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노력하십시오.

만약 그대가 다른 사람의 문제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대는 자기의 밖에 뭔가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출처] 전주평화동포모사플라잉아트요가원 요가(योग.=Yoga)/라마나 마하리쉬/세속(世俗)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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