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봉 김기추거사

절대성과 상대성-백봉

통융 2017. 4. 11. 21:25

人生을 걷어잡고 人生을 다루니 나는 하늘땅의 임자이면서 因緣에 따른 色相身을 나투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는 法性身임을 이제야 알겠구나.

알겠는가! 우리는 잃었던 十方을 되찾고 잊었던 三界를 되찾아서 於中間에 참 나를 굴리자. 내가 있는데 山河大地가 있으니 이 아니 좋은 것이며, 내가 있는데 三界가 있으니 이 또한 아니 좋으며, 내가 있는데 十方이 있으니 이 또한 좋은 風光이 아니랴.

그림자요 메아리요 거품이나 마찬가지인 이 色相身을 스스럼없이 굴리기도 하지마는, 때에 따라서는 도리어 이 색상신에게 굴리이기도 하는 그 놈은 도대체가 그 누구이며 그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나다. 나는 나일지라도 내가 없는 나다. 나는 빛깔도 냄새도 소리도 없으면서 되돌아 빛깔을 나투어서 그 빛깔에 사무치고, 소리를 나투어서 그 소리에 사무치고, 냄새를 나투어서 그 냄새 에 사무치는 나다. 나는 있음(有)도 아니요 없음(無)도 아니기에 없음으로 좇아서 있음으로 향하고, 있음으로 좇아서 없음으로 향하며 생사를 굴린다. 나는 큼(大)도아니고 작음(小)도 아니기에 一塵에 處하여서 十方에 두루하고 十方에 펴서 一塵에 잠긴다. (대소, 명암, 선악, 迷悟, 노소 푸른 것 누른 것도 아니기에 .....를 나툰다.)

나는 이 무엇인가. 허공으로서인 無邊法性身이요 절대성으로서인 淸淨法性身이요 微妙性으로서인 無相法性身이요 知性으로서인 법성신이다. 이 法性身이 바탕됨으로 하여금 色相身을 나투는 것이니 이 법성신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으면서 되돌아 색상신을 통하여서 철(智)과 슬기(慧)를 주무르는 나일 뿐아니라 당당한 누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性品이 없는 눈인 줄은 모르고 눈자체가 境界를 본다 이르며 성품이 없는 입인줄은 모르고 그 입자체가 이야기를 지껄인다 이르며, 성품이 없는 손인 줄은 모르고 그 손자체가 물건을 걷어잡는다 이르며, 성품이 없는 발인 줄은 모르고 그 발자체가 거리를 거닌다 이르면서 뒤바뀐 여김만을 고집한다.

실로 허공은 있는(有)데 속한 것도 아니면서 없는(無)데 속한 것도 아니고, 비롯(始)도 없으면서 마침(終)도 없고 큰(大) 것도 아니면서 작은(小) 것도 아니며, 굽지(曲)도 않으면서 곧지(直)도 않고, 모나지(方)도 않으면서 둥글지(圓)도 않고, 위(上)도 없으면서 아래(下)도 없고, 왼쪽(左)도 없으면서 오른쪽(右)도 없고, 가운데(中)도 없으면서 가장자리(邊)도 없고, 밝음(明)도 아니면서 어두움(暗)도 아니고, 응달(陰)도 아니면서 양달(陽)도 아니니 생각의 길이 끊어진 因果 밖의 소식이다.

허공과 性品은 모습을 여의었음으로 말미암아 끌어잡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에만 얽히어 둘로만 본다면 이것은 물과 거품을 둘로 봄이나 매한가지이다.

이럴진댄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허공과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성품을 어떻게 무엇으로 나누어서 둘로 들어내겠는가. 때문에 허공을 다루려면 먼저 훤히 빈 성품을 휘어잡고 성품을 다루려면 훤히 빈 허공을 걷어 잡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全性體로서인 허공과 法性身으로서인 성품은 본래로 微妙를 極한 하나의 기미(幾)로서 누리의 모든 법을 지어내고 거두어 들이는 것이라 일러서 의심할 것이 없다면, 이렇듯이 엄연한 그 사실을 뉘의 일이라 하겠는가. 때문에 「허공이 하나니 지도리도 하나요 지도리가 하나니 목숨도 하나다.」라는 소식처로서 이는 세존께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갈파하신 소식과 바로 통하는 風光 이 아니겠는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법성신이 모습을 두는 생사고락의 푸대 (색상신의 세포) 와 모습이 없는 생사고락의 푸대 (心魂에서 오는 妄心)를 두 개씩이나 끼고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우습기도 하다.

세존은 이르시되 全性體인 허공에서 三大界를 단위로 하는 숱한 세계가 벌어지면서 萬象은 因緣果業에 따라 이루고 이루어지지마는 그 實象인 眞如性의 기미는 사람마다 갖추어서 일찍 여읨없이 날로 쓴다는 뜻을 밝혔으니 범부들의 요량으로 어찌 감당할 바의 소식이랴.

그렇다. 누리는 허공을 뜻함이요 지도리는 성품을 뜻함이요 생명은 슬기를 뜻함이라면, 애오라지 하나인 허공은 하나인 성품이요 하나인 성품은 하나의 슬기임을 뜻하는 것이다.

실로 나의 성품은 허공으로 더불어서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해말쑥한 존재다. 해말쑥한 존재이기에 철은 스스럼없이 나투 면서 슬기를 일으키고 이에 은근한 知見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한 가닥의 차가운 기미는 因을 짓고 緣을 끼어서 果를 향하여 굴리어지며 가는 것이다.

무슨 방편으로써 누리의 기미를 나투는 妙用의 도리를 제 스스로가 접하겠는가. 별 도리가 없다. 오로지 心身을 여의고 分別을 놓아야 한다. 심신은 煩惱의 씨요 분별은 妄想의 뿌리다.

寥寥寂寂함이로다 누리의 기미여! 알면서 모르는 그 玄機를 어찌 능히 혀로 말아내며 浩浩蕩蕩함이로다 누리의 기미여! 모르면 서 아는 그 妙句를 어찌 능히 붓으로 그려내랴.

靑山에 구름이 걸렸으니 이 바로가 현기로서인 묘구요 綠水에 달이 잠겼으니 이 바로가 묘구로서인 현기로다. 둥글둥글한 시냇 가의 조약돌은 만리산하의 서슬(勢)이요 서늘서늘한 마음속 기미는 十方沙界의 소식이니 어즈버야 定法위에서 無定法이 굴리어 지는 소식이요 無定法속에는 定法이 서리어진 전갈이로다.

理적으로 성품(性)인 마음(心)은 바탕이니 본래의 총명을 갖추었음으로 말미암아 이른바 이 곧 묵묵히 통하는 大空法門이라면, 事적으로 여김(念)인 새김(想)은 씀이니 본래로 영특한 기미(幾)를 굴림으로 하여금 이 곧 역력히 나투는 大幻法門이라 하겠다.

허공은 한 모습이 아닌 一相이요 모래알은 많은 모습도 아닌 多相임을 인식하자. 허공은 하나(一)이나 모래알은 많음(多)이다. 하나인 허공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여읜 까닭에 많다 적다 크다 작다는 말귀가 끊어졌음으로 하여금 거짓 이름인 허공이요, 많음인 모래알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여의지 않은 까닭에 많다 적다 크다 작다는 말귀가 달렸음으로 말미암아 참 이름인 모래알 이다. 하나인 허공은 곧 많음이 잠기인 허공성이기에 많은 모래알을 낳아 놓고, 많음인 모래알은 곧 하나가 우뚝한 허공성이기에 하나인 허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一)는 곧 많음(多)일진댄 한 모습(一相)은 얻어내지 못하는 것임으로 말미암아 一塵에 앉은 몸은 十方에 두루함이 되는 것이요, 많음(多)은 곧 하나(一) 일진데 많은 모습(多相)은 걷어잡지 못하는 것임으로 하여금 十方에 펴인 몸은 一塵에 잠김이 되는 것이다.

안 변하는 絶對와 변하는 相對는 이 같음이냐 이 다름이냐, 多相을 나투어서 一相을 세우는 소식이로구나. 같음이면 어떠하며 다름이면 어떠하랴. 같음이 없는 다름은 들내지 못하고 다름이 없는 같음은 세우지 못하는 것이어늘 무슨 일로 말마디를 좇아서 소말뚝과 말말뚝을 꼽는가.

한 톨의 모래알은 오로지가 누리의 本體를 토하여 낸 소식處요 萬有의 原理를 밝혀낸 소식처로서 허공이 꼬리를 사리고 앉은 時節이요 개미가 수미를 끌고가는 風光이로다. 실로 하나의 진리는 文句 밖의 소식이니 문구로서 알려 하지 말고 言辭밖의 소식이니 언사로서 알려하지 말고 知見밖의 소식이니 지견으로서 알려하지 말아야 한다.

山河大地는 有形의 모습이요 思量分別은 無形의 모습이다. 모습은 반드시 이뤄진 것이니 또한 반드시 사그라지는 것이다. 이뤄지고 사그라지는 것은 뿌리로 좇아 이뤄지고 뿌리를 향하여 사그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山河大地의 뿌리는 바로 허공이요 思量分別의 뿌리는 바로 성품인 것이 분명하다. 다시말하여 허공은 理요 땅덩이는 事다. 性品은 理요 몸뚱이는 事다. 理가 있으므로 말미암아 事는 굴려지고 事가 굴려짐으로 하여금 理는 세워지는 것이다.

절대 平等性面에서 이뤄지는 온갖 모습은 부처와 중생으로 더불어 삼라만상에 이르기까지 다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면 벌써 그 모습 자체가 일분일초도 쉼이 없이 변하여 가는데 어찌 아까와 이제와 나중이 같겠는가. 안 같기 때문에 윤회인 것이다. 공간에 시간을 두면 그 시간은 遲速을 갖는다. 이 윤회다. 마음에 起滅을 두면 그 기멸은 憎愛를 갖는다. 이 윤회다. 몸에 細胞를 두면 그 細胞는 生死를 갖는다. 이 윤회다. 바람이 부는 것도 윤회요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것도 윤회지마는 달이 뜨고 해가 지는 것도 윤회다.

山河大地를 비롯하여 聖人凡夫와 生老病死와 喜怒哀樂 따위의 모든 법은 다 절대성의 굴림새로서인 상대성놀이일 뿐만 아니라, 이에 동안(時)과 군데(空)의 흐름에 따라 세워지는 삼세를 엮으며 나간다는 새김(想)도 한갖 나름대로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妄念이 本寂하고 塵境이 本空하다

현재는 과거의 마침이 아니라 과거는 현재의 시작이요, 미래는 현재의 마침이 아니라 현재는 미래의 시작이다. 까닭에 現在안에 아까와 나중이 있으니 현재는 현재이나 아닌 현재요, 過去안에 이제와 나중이 있으니 과거는 과거이나 아닌 과거요, 未來안에 이제와 아까가 있으니 미래는 미래이나 아닌 미래라 하겠거늘 실다운 三世는 어디에서 찾겠는가.

온갖 모습뿐 아니라 이름자가 붙은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모두가 다 변하여 가며 변하여 오는 非常事로서 상대성에 속하는 꼭두(幻)요 그림자(影)라 하겠으니 어찌 이 몸뚱이를 실다운 존재라 하겠으며 어찌 三世라는 여김인들 실다운 소견이겠는가.

果는 因을 의지하여서 세워지고 因은 用을 의지하여서 세워지고 用은 體를 의지하여서 세워지는 만큼 돌이켜서 體는 곧 用이요 用은 곧 因이요 因은 곧 果라 일컬으나 되돌아 살핀다면 體, 用, 因, 果는 이 바로가 다 누리의 기미를 들내는 데의 手段句요 方便語라 하겠다.

時空과 有無의 앞소식인 나의 全性體를 바탕으로 온갖 법이 생기고 사그라지거늘, 어찌 三界라 하여서 이 테두리를 벗어나며, 중생들이라 하여서 이 테두리를 벗어나랴. 이러므로서 누리의 주인공은 번듯한 나이니, 무슨 까닭으로써이냐. 누리는 나를 여의지 않고 나는 또한 누리를 여의지 않았으니 누리와 나를 어떻게 둘로 보랴

사람이란 본래로 가없는 허공으로 더불어서 가득한 法性身인 내가 아니라, 본래로 가없는 허공 그 자체가 바로 모든 불보살과 중생으로 더불어 한가지 법성신으로서인 참 나일 뿐이다. 까닭에 허공으로서인 無邊法性身이요 기미로서인 淸淨法性身이요 슬기로서인 無相法性身이다. 때문에 목숨으로서인 不死身이요 솜씨로서인 不壞身이다.

實로 나 自身이 누리의 주인공임을 깨쳐 알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 문제는 어디까지라도 관념적이 아니고 이론적이며, 추리적이 아니고 사실적이기 때문에 마침내 다섯눈(五眼)이 맑혀짐으로 하여금 법눈(法眼)을 통하여서 그 자체를 훤히 들여다 보는 데서 알려지고 믿어지는 것이다.

이렇듯이 하나인 당장의 눈을 걷어 잡기는 하되 걷어잡은 그 눈동자로써 눈을 삼지 말고 그 눈동자를 통하여 보는 그 놈으로써 눈을 삼을 줄을 안다면 이 눈은 허공으로 더불어 가득한 하나의 눈을 이룰 것이니 어찌 따로 부처눈 짓기를 힘쓸까 보냐.

애오라지 나는 어떠한 존재이며 어디로 좇아왔으며 또한 어디로 간다고 믿어야 하겠는가. 이렇다. 自作도 아니니 緣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요, 他作도 아니니 因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요 共作도 아니니 因緣의 自性이 없기 때문이니..

믿음은 앎을 바탕으로 하고 앎은 깨침을 바탕으로 하여야 한다.

正法인 平等線上에서 無定法인 차별현상이 굴리어진다는 그 사실 앞에 참다운 철학과 참된 문학과 참된 예술과 참된 종교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방편이 될 수 있다면, 이 千變萬化는 삶을 엮으며 가는데 功德의 要因으로서인 천변만화이니 어찌 멋진 공덕이 아니며 복된 자리가 아니랴.

生死와 涅槃은 하나도 아니니 곧 非一이요, 다름도 아니니 곧 非異면서도 항상 생사에 머무는 것으로 열반을 삼는 까닭에 생사를 잘 굴림은 바로 열반을 잘 굴리는 소식임에 틀림없다.

生은 生으로 보지 말고 死는 死로 보지 말고 生死를 一如로 보아야만 한다. 비유로 거품이 생겼다 하여서 거품은 물을 여읜 것이 아니니 生은 生이 아니요, 거품이 사그라졌다하여서 물이 없어진 것이 아니니 死는 死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누리에 벌어지는 온갖 법은 본래로부터의 全性體인 기미(幾)의 평등線上에서 自性이 없는 因緣을 지으며 따르고 自性이 없는 業力을 지으며 좇아서 제각기대로인 有無情의 世界를 마련하여 가건마는..

법이 굴리어지는 천당과 지옥은 無差別중의 差別이요 差別中의 無差別인 소식이라 하겠다

모습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변할 것이 없으니 이것은 絶對性인 참이지만 모습이 있으므로 하여금 변할 것이 있으니 이것은 相對性인 거짓이다. 그러나 참이 있음으로써만이 거짓은 세워지는 것이니 이것은 '참인 거짓'이요, 거짓이 있음으로써만이 참을 드 러내니 이것은 '거짓인 참'이다. 때문에 누리에서 스스럼없이 굴려지는 온갖 법은 참도 아니며 거짓도 아니지마는 또한 참 아님도 아니며 거짓 아님도 아니라 이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소식을 걷어잡으려면 우선 生死와 苦樂을 거듭하는 生死苦樂의 푸대를 몰록 놓아버리고 다음에는 해말쑥한 法身分上에 앉아서 참(眞)이다 거짓(假)이다 있음(有)이다 없음(無)이다 이르는 그 자체의 성품없는 성품(無自性性)을 놓아야 한다. 성품없는 성품(無自性性)을 놓는다면 참은 참이나 이름뿐인 참이요 거짓은 거짓이나 이름뿐인 거짓이니 이 어디에서 참을 걷어잡으며 거짓 을 걷어잡으랴. 있음 또한 이와 같아야 있음은 있음이나 이름뿐인 있음이요 없음은 없음이나 이름뿐인 없음이니 여기에서 참과 거짓이 서로 사모치고, 있음과 없음이 서로 사모치는 데서 「허공이 하나니 지도리도 하나요 지도리가 하나니 목숨도 하나다」라 는 소식을 얻어듣게 될 것이다.

실로 목숨을 걸고 삶을 엮어가는 데는 오직 한 도리가 있으니 이 한 도리는 하늘과 땅을 앞하여서 비롯이 없고 동안(時)과 군데 (空)를 뒤하여서 마침이 없는 영특스런 存在로 그 體性은 空寂하면서 無限한 靈知를 갖추고, 그 理量은 圓明하면서도 無窮한 造化를 이룬다. 一塵에 處하여 六合을 에워싸고 一時에 임하여 三際를 꿰뚫었으니 이 있음이냐, 있음인 듯 없음도 아니나 또한 없음아님도 아니다. 이 없음이냐. 없음인 듯 있음도 아니나 또한 있음아님도 아니면서 안으로는 훌륭한 기미를 머금었고 밖으로는 숱한 기틀에 응했으니 오직 이름하여 한마음이다. 이 한마음은 萬法의 뿌리며 衆妙의 바탕으로 영특스리 맑아서 흐리지 않고 휘영청히 비어서 고요하니, 가옴의 흔적이 없으므로 좋이 구하지 못하고 견줌의 양이 없으므로 좋이 헤아리지 못한다. 앎이 없이 알고 씀이 없이 씀이니, 낳아도 낳음이 아니요 죽어도 죽음이 아닌 영원한 삶의 소식이다. 이 소식이 장경의 理念이며, 이 소식 이 경서의 義趣라고도 일컬어 두기로 하자.

나의 家風을 세울지언정 어리석게도 남의 혓바닥에서 뛰쳐나온 뜻풀이나 말귀를 본떠가며 제 것처럼 얼버무림은 바로 他事에 굴리임이지 自事를 굴림은 아니니 大事를 이루려면 우선 大心을 발동하여야 한다.

實로 불보살이나 聖神이 크게 원하는 바는 「하나인 허공이니 하나인 지도리요, 하나인 지도리니 하나의 목숨」이라는 엄연한 그 사실을 깊이 인식하면서 상대性인 生滅은 인생살이를 버젓이 들냄이로다 라는 뜻을 굳힘으로서 家風을 삼되 이 家風은 절대性 인 不生不滅의 獨尊자리에서 세워진다는 그 사실을 사실대로 가르치는 데 있는 것이다.

상대性은 절대性의 굴림새라는 도리를 느끼지 못하면 도저히 眞假一如라는 소식을 모를 뿐아니라 혹은 文句는 알아도 그 문구 밖의 소식에 實感이 일어나지 않는다. 때문에 이 문제가 풀리기 앞까지에는 假에 의지함이 아니고 眞에 의지하는 것이니 이에 따라 法에 의지하고 說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道에 의지하고 學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心에 의지하고 身에 의지하지 않는 것 이다.

참으로 大道는 글자에 있지 않고 그 마음에 있는 것이니 이는 싱그러운 기미(幾)를 여의지 아니함이요, 大法은 말마디에 있지 않고 그 行에 있는 것이니 의젓스런 거동(儀)을 여의지 아니함이다.

밝은 곳을 향하여 밝음을 치니 밝은 묶임이 풀리고 어두운 곳을 향하여 어둠을 치니 어두운 묶임이 풀릴 새, 구멍없는 피리소리는 버들가지에 가득함이로다. 法處를 향하여 法을 치니 법묶임이 풀리면서 정법이 살아나고 道處를 향하여 道를 치니 道묶임이 풀리면서 眞道가 살아나니, 홑다리첨지가 龍床에 오름이로다. 착함을 굴려서 악함을 삼고 악함을 굴려서 착함을 삼되, 착한 법으로 하여금 三惡衆生을 건지고 악한 법으로 하여금 十方聖賢을 가르치니, 발가숭이가 허공을 어루만짐이로다.

실로 宇宙의 大法은 오직 한줄기의 구름을 걷어잡고 허공을 자질함이니 이 바로 성품의 기미를 다룸이요, 人生의 公道는 오직 한 가닥의 새김을 껴안고 성품을 손질함이니 이 바로 허공의 소식을 거둠이로다.

居士風은 그렇지 않다. 가정을 가꾸는 시간과 공간에서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시간과 공간을 짜내어야 한다. 사업을 가꾸는 見聞과 覺知에서 말씨와 거동을 다스리는 견문과 각지를 짜 내어야 한다. 사회를 가꾸는 道義와 信念에서 목숨과 복록을 다스리는 도의와 신념을 짜 내어야 한다. 문화를 가꾸는 윤리와 감정에서 이제와 나중을 다스리는 윤리와 감정을 짜 내어야 한다.

人生의 原理와 누리의 本體를 캐어내는 방향으로 키를 바꿔 튼다는 사실은 立場과 條件에 따른 그 手段과 그 方便에서 비상한 각오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비록 凡夫는 아니나 범부法을 뭉개지 않고, 비록 成人은 아니나 성인法을 여의지 않고 능히 凡聖事를 다룰 줄도 안다.

이 고개는 僧家風으로서도 踏破하기 어렵다는 定評의 고지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니 하물며 거사풍으로서이랴. 그러나 아무리 가정과 사회의 그물에 둘러싸인 거사풍일지라도 그 때와 곳에 맞추어서 無定法인 수단과 방편을 세우고 숨을 거둘 때까지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문제는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代治法이란 이렇다. 緣에 따르는 바깥경계를 굴리고 또한 경계에 굴리는 것은 실로 나의 無相身이 그 心氣의 느낌대로 無情物 인 色相身을 걷어잡고 行動으로 나툰다는 도리를 깊이 인식하고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말귀를 세워서 나아가자는 뜻이다.

法은 본래로 쉽다는 생각이 생기기 때문에 어렵다는 생각도 생기는 것이요, 어렵다는 생각이 생기기 때문에 쉽다는 생각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하여서 法을 굴리려 할 진댄 쉬운 것은 쉬운대로 어려운 것은 어려운대로 되돌린다면 필경에는 쉽지도 않기 때문에 어렵지도 않을 것이요. 어렵지도 않기 때문에 쉽지도 않을 것이니 쉽고 어려움을 어디에서 찾으랴.

하지만 居士風으로서의 代治法은 첫째 說法을 통하여 一切 萬法인 상대性은 본래로 屹然獨尊인 절대性의 굴림새라는 그 사실을 學人에게 이론적으로 깨우치고, 둘째 學人들은 반드시 無相色身이 有相色身을 굴린다는 그 事實을 實質的으로 파악한 다음에 話頭를 지님이 규범적인 특징이라 하겠으니 ..

거사풍인 학인들이여!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一念으로 無相身임을 頓證하면 萬劫의 功德藏을 성취하리니, 그 때를 기다려 東海水를 一口로 吸盡하기 바란다.

理와 事의 앞소식에 理와 事가 따로 없으니 夜半에 兎角杖을 짚음이요, 眞과 假의 앞소식에 眞과 假가 따로 없으니 風頭에 龜毛 拂을 가짐이로다.

人生宣言文
1. 나는 인생本來의 面目을 되찾기 위하여 煩惱와 塵勞가 전부인 이러한 人生을 거부한다.

2. 나는 인생本來의 靈知를 되찾기 위하여 生老와 病死가 전부인 이러한 人生을 거부한다.

3. 나는 인생本來의 平等을 되찾기 위하여 祈福과 救命이 전부인 이러한 人生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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