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융의 이야기

불법은 무엇입니까?

통융 2017. 2. 7. 13:27


* 불법은 무엇입니까?


-자비의 마음이 불법이다.

그대 스스로가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불법이다.


* 불법은 분별이 없는 것이라 했는데 자비니 사랑이니 하는 것도 분별이 아닙니까?


-만약 이름에 그달려 분석한다면 분별심이다.

하지만 그 내면의 뜻을 앎이면 다른 것이다.

그대가 지금 의심만 하지 않고 분별만 하지 않으면 그 것이 불법이다.


*어떻게 생각을 하지 않고 알 수 있습니까?

  한다 안한다, 있다 없다는 생각이 분별인데요.


- 불법은 일체모든 것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 


-마음은 본래 고요하고 투명하여 없는데

 학습한 지식을 가지고 생각이라는 판단으로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망상이고 번뇌라는 것이다.


- 좋은 예를 들어보자.

  불법이 궁금한 수행자가 스님을 만나 '불법이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을 했다.

  동산 스님은 '마서근'이다.

  운문선사는 '똥 막대기'라 했다. 

  소승은 ' 절을 하는 것이네' 했다.


 그대는 불법이 어떤 멋진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의외의 답이 나온 것이다.

  마서근이 불법이라고.

  똥 막대기가 불법이라고

  절하는 것이 불법이라고

  ㅋㅋㅋ

  무슨 개가 웃을 답을 하느냐고 생각 할 수 있다.


~~ 질문과 답의 상황을 보자.

    셋 스님이 질문을 받을 때  동산 스님은 삼마를 다듬고 있었고  운문 선사는 똥을 누고 나오던 참이다. 

   소승은 사시 예불을 드리고 있는데 스님이 질문을 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환경에서 보이는 데로  있는 데로 그대로 나타내 보였을 뿐이다.

   어떤 불법이 무엇일까? 하는 지식적인 변별심인 생각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이는 데로 나타 낼 뿐이었다.

 


* 그러면 또 의문이 생긴다.

   보이는 데로 듣는데로 모두가 불법아닌 것이 없겠네요?


- 그렇다.

   온 세상 만물이 불법의 이치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불법이 존재 하지 않는 곳이 있다.

   당신이 불법이 존재한다.하지 안는다며 분별하는 그 자리는 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순간들은 당신 생각들일 뿐이다.


* 온세상이 불법 아닌 것이 없다면 내 생각까지도 불법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  물론 맞다.

    당신이 지금 그 내 생각도 불법이라는 생각만 내려 놓으면...


* 불법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아닙니까?

부처님이 법을 깨달은 것은 맞지만 그 진리는 부처님 이전에도 지금도 작용하고 있다.


* 그렇다면 불법은 불교에만 있는것이 아니겠네요.

물론이다.

불법은 교회에고 있고 성당에도 있고 저 깊은 바다에도 있고 우주 공간에 불법 아닌 곳이 없다.


* 부처님이 깨달은 불법은 무엇입니까?

부처님은 중도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 중도가 무엇입니까?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킨다.


*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요.



법(法: 존재)은 고정된 성품(性 · 自性 ·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법(法: 존재)을 "있음(有)"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법(法: 존재)은 공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법(法: 존재)을 "없음(無)"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떤 법(法: 존재)이 고정된 성품(性相 · 성상 · 自性 ·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법은 여러 인과 연에 의존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연기의 법칙에 어긋난다). 여러 인과 연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연기의 법칙에 어긋나므로 생겨날 수 없고, 따라서) 그 법(法: 존재)은 없는 것(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연기의 법칙에 의해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을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이러한 모순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다음을 대전제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하지 않은 법(즉, 연기하지 않는 존재 또는 고정된 성품을 가진 존재)이란 존재할 수 없다.

— 《중론(中論)》 4권 24장 〈관사제품(觀四諦品)〉, 대정신수대장경 [

중도는 우주의 진리이다. 변 할 수 없는 확철한 과학과 논리에 근거한 이치이다.

그러한 이치를 마음 하나로 알아차리고 쓰는 것이 중도이다.

그런데 우리가 단박에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언설을 부치고 부치다 보니 8만4천 법이 나온다.

중도의 기본 핵심이 세가지가 있다.


첫째 재행무상

둘째 재법무아

셋째 열반적정


* 그러면 불교는 필요가 없겠네요?

너는 왜 학교에 가고 공부는 왜 가느냐?


* 공부하러 학교에 가지요.

공부는 모르는 것을 알려고. 지식을 습득하여 보다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지요.

출세하고 돈도 많이 벌고 잘 살기 위해서 뭐 등등......

지혜로운 삶이란 무엇이야?

살아가는 원리나 방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살면 행복해 지기 때문이지요.


 

그렇다. 공부를 집에서도 할 수 있지만 학교에 가면 너 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아는 스승들이 있어서 배우러 가는 것이다.

불교도 더 많은 공부를 한 스님들이 있는곳이 절이기 때문이다.



* 그러면 절에서만 불교공부를 하는것입니까?

그렇지 않다.

불법은 온 우주가 불법 안니곳이 업삳고 했드싱 어디든지 진리의 이치만 알면 할 수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이라고 서나앉으나 가나 오나 잠자면서꺼지도 할 수있는것이 불법공부다.




-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며 , 바닥을 손으로 '탕! '쳤다.

    아시겠습니까?


   '손가락이고 소리입니다.'

    지금 당신은 지식의 생각이 손가락이라는 이름에, '탕'이라는 소리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이고 소리내는 것이 불법이고 당신이 답한 것은 당신 생각입니다.

    당신도 불법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이심전심의 불법을 쓰는 것입니다.

   보이는 데로 듣는데로 그대로 나타내 보십시요.



~~ 또 불법에 대한 좋은 예의 대화를  보자.

  남전南泉 선사에게 조주趙州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불법)입니까?”

  남전 선사가 대답하였다. “평상심이 도이니라.”
 조주가 다시 물었다.
 “(일상생활이 모두 도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향하여 닦아야겠습니까?”
 남전 선사가 말하였다. “향하고자 하면 곧 어긋나느니라.”
 조주가 다시 물었다. “(무언가를) 향하여 닦지 않는다면 어떻게 도를 알겠습니까?”
 남전 선사가 말하였다. “도는 아는 데에도 속하지 않고 모르는 데에도 속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망령된 깨달음이며, 

 모른다는 것은 무기無記 이다. 참으로 향함 없는 도에 이르렀다면 오직 텅비어(太虛) 걸림이 없는니라, 무엇 때문에 

 굳이 시비할 것인가!” 조주가 이 말에 크게 깨달았다.


* 생각이 먼저인가 행동이 먼저인가?

- 우리는 생각이 있어야 행동을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이 연구한 결과 행동이 생각보다 먼저 움직인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이 먼저이든 행동이 먼저이든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고 무엇이 앞서니 뒤서니 하는 것이 분별이다.

  보면 볼 뿐이고 들으면 들을 뿐이다. 그냥 할 뿐이지 이유가 없다.


* 금강경에 보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말이 있다.'행하되 행함이 없이 행하라고 한다.

 행하는데 어떻게 행하는 것이 없이 행할 수 있겠는가?


- 그렇다.

  행하는 자가 행하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 행할 수는 없다.

  다만 그 행하는 행동에 집착함이 없이 행할 수는 있다.

  내가 착한일을 한다, 나쁜일을 한다는 분별심없는 그냥 행하는 행동은 있을 수 있다.


~~ 적당한 비유는 아니지만

   어린아이가 불경책을 가지고 놀다가 찟고 똥을 닦는다고 해도 그는 어떤 죄책감이나 두려움 같은 생각없이 행할 뿐이다.

   하지만 불경 책을 아는 사람은 그러한 행동을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다.만약 그러한 행동을 했다면 죄쵝감이나 두려움을 갖는다.

   그는 생각으로 분별하고 행동하기 떄문이다.



* 그러면 생각도 하지말고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 막행막식(莫行莫食)과 무애행(無碍行)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걸림없이 살라고 혹음 평상심이 도라고 하니 

  그냥 일어나는데로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것이라거나 혹은 기인적인 행동으로 이웃을 불편하게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하나는 알지만 둘은 모르는 무지한 자들이다.

   진리의 실체는 이해하고 아는데 진리의 실상과 실용의 쓰임을 모르는데서 오는 행동이다...이러한 행동은 막행막식이다.


- 하지만 연기緣起의 진리를 바르게 깨달으면 존재와 삶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막행이나 막식을 행해라 해도 하지 않는다.

   참 법은  분별심이 만들어놓은 생각의 구속에서 탈출이다.

   즉 나라는 아상의 집착이나 존재에서의 자유로워 모든 세상이 평등함을 알게된다.

   오히려 자비와 사랑으로 어떻게 하면 자신의 안위나 존재보다 이웃을 위해 나눔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이러한 행동은 무애행이다.


- 모든 행동을 생각하고 한다고 착각하는데

  밥을 먹을 때 그대는 얼마나 먹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밥을 먹는가?

  잠을 잘 때 그대는 잠잔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을 자는가?

  그렇지 않다.

  그대는 순간순간 생각으로 사물을 분별하고 판달 할 뿐이지 그것이 연속되지는 못한다.

  그렇 듯이 생각 없는 멈춤도 연속해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우리는 시시로 생각과 멈춤을 반복하면서 살고 있는데 다만

  그 생각이나 멈춤에 끄달려 자신의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어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웃고 울고 화내고 즐거워하는 생각에 끄달린다는 것이다.



* 그러면 불법을 깨달으면 어떻게 될까?


 배 고프면 짬봉 시켜 먹고 졸리면 잠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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