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교 국제선센터(2015년 7월4일~10일까지)
4일 토요일 오후 1시에 국제선센터에 입제를 했다.
수불스님이 직접 지도하는 간하선 집중 수행이다.
법문 중에 화두를 제시해 주셨다.
손을 들어 손가락 하나를 구부렸다 펴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무엇이 하게하는가?"
"손가락이라 해도 맞지 않고 마음이 한다 해도 맞지 않다"
"'도대체 무엇이 이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가?"
"말을 해도 틀리고 말 안해도 틀리고 오직 모를 뿐이다.''
이 화두를 참구하여 일주일간의 집중수행을 하게 했다.
한국 선종의 대표라 할 수있는 수행법인 간화선(看話禪)은 공안이라는 화두를 하나씩 들고 그 화두를 의심하여 의문에 본질을 알아차림하는 것으로 화두를 깬다. 화두를 타파한다, 혹은 한 소식한다는 표현을 쓴다.
화두를 타파 하는데는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의미를 구분하기도 하는데 돈오란 단박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어떤 지식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한 번에 깨달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선종의 대부라 하는 육조혜능선사가 일자 무식의 나무꾼이지만 금강경에 응무소주 이생기심 '행하되 행함이 없이 하라'는 글 귀 한마디에 깨달음을 갖는 것이 대표적인 돈오의 견해다.
결국 단박에 깨달음을 갖는데는 오히려 지식이나 아름아리가 장애를 만든다는 것이다.
화두를 타게 되면 오직 대신심(大信心)과 대의심(大疑心)과 대분심(大憤心)을 통해서 화두가 의정이 생기고 그 의정이 의단이 되어서 금강권(金剛圈)과 율극봉(栗棘蓬) 인 그 의단을 결국 깨트려지는 방법이다.
간화선은 당나라 오조법연 스님에서 태동 하고 원오극근의<벽암록>에서 문자선적으로 흐르는 것을 그의 제자인 대혜 종고스님의 실참실구를 주장하면서 간화선을 집대성하게 되며 <서장>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선불교가 태동한 것은 불조28대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와서 초조로 시작하여 6조 혜능에 와서 발아하여 7조 남악회향에 이어 평상심시도의 마조도일에 백장회해(백장청규), 대주 혜해(돈오입도요문),서당 지장,남전 보원의 제자와 그 뒤를 이은 황벽,임제,마조 등에와서 꽃을 피우게 된다. 조사선 묵조선 문자선 등을 거치면서 정립된 간화선은 한국에서는신라 때 서당지장의 법을 받은 도의국사, 고려의 태고보우 조선의 서산대사 경허선사를 거치면서 한암,동산,고봉,정강, 성철선사등이 오늘날 까지 한국불교에서 가장 대표할 수 있는 수행방법으로 하고 있다.
간하선를 대표하는 공안은 전등록에서 1701개의 공안을 제시하고 있으며 화두는 말과 뜻에 끄달리지 않고 그 이전에 뜻을 간하는 것이다.
즉 모든 화두의 목적은 불법의 진정한 대의가 무엇인가? 를 찾아가는 도구라 하겠다.
부모 미생전에 본래의 나는 누군가? 송장 끌고 다니는 이 놈(他屍者誰)은 누구인가? 조주의 무자화두, 판치생모, 뜰앞에 잔나무, 등 등
늘 들어보는 화두의 내용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화두라면 달은 불법인 것이다.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능엄경에서도 부처님과 사리불존자가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법담을 나누고 있다.
내가 알 고 있는 화두는 그 말의 뜻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과 생각의 이전에 뜻이며 불성은 연기법이며 법성은 작용성으로결국 불법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그냥 일뿐 이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이론으로 안다.
스님은 법문을 하시면서 화두를 타파하는 방법에 대해서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셨다.
"내 몸 주위에 벽이 쳐져 있다고 생각해라"
"그 벽은 마음에 벽이다. 오직 나는 벽 속에 갖혀 앞도 뒤도 볼 수가 없다."
마음에 벽은 결국 분별하는 상을 짓지 말라는 뜻이겠다.
나는 알음아리로 답을 찾았다.
'설사 무엇이 움직인다 해도 옳지 않습니다.'
하나는 직접 스님의 손가락을 잡아 꺾으며 "이래도 누가 했다고 하겠습니까?"
두 가지의 답을 찾아내고는 화두에 대한 기대감이 삭감되었다.
좌선을 하고 앉아서 '이뭣고'를 화두를 참구하는데
한시간 정도가 되면 발이 아파서 더 이상 앉아 있기가 힘든다.
보통 참선방에서도 1시간 정도 앉아 있다가 10분정도 쉬고 다시 앉는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나의 생각으로 하루는 보냈다.
다음 둘째 날
스님의 법문이 다시 시작됐다.
잉어가 삼단 폭포를 뛰어 오를려면 오르고 또 오르고
오직 간절함으로 실패한 기억은 잊는다.
오직 오르는 것만 생각하여 물살이 더욱 셀 때 를 기다려 뛰어 오른다.
가슴에는 금강권이 목구멍에는 율국봉이 콱 막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갑갑하다.
"머리가 없다고 생각하라,머리가 내 몸 아래로 내려와 버리고 머리없이 화두를 참구하라"
머리가 없다. 그러면 생각과 의식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즉 아름아리를 인식하는 의식을 내려 놔라는 말이다.
아하!
어제는 마음에 벽을 처서 분별상을 제거하고 오른은 아름아리의 분별식을 내려놓으면
오직 마음하나만 올 곧게 남지 않는가.
한 마음으로 오로지 화두만 관하라는 말이다.
결국 나는 몸도 없고 의식하는 마음도 없고 오직 화두만 남아서 골똘하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알음아리로 화두를 들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화두에 대한 새로운 집중력이 생기게 되었다.
~~~~~~~~~~~~~~~
나는 다시 심기일전하여 화두를 참구하기 시작 했다.
화두를 의식하지 마라,
오직 모를 뿐! 알려하면 틀린다. 모른다 해도 틀린다.
그렇다고 공에 빠져서느 않된다.
좌선을 하고 앉아서 1시간을 지나니 다리가 저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픈 것을 인식 한다는 것은 머리의 의식인데 머리를 내려놓자,내려놓자.
1시간 30분이 지나면서 통증이 한계가 된 것 같았다.온 몸의 팔다리가 빠져나가는 듯 아팠다.
아픈것이 아니라 통증 그 자체만으로 온 몸이 꽈찼다.통증안으로 의식을 집중하자.
통증도 즐거움 같은 한 의식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즐거움은 좋아하는 마음과 고통은 싫어하는 마음은 무엇이 다른가,
차별 하는 분별식이 다를 뿐 이다.
그래도 '참아내자 ,절대 죽지않는다. 내가 이 번 간화선 집중 수행에서 뭔가 얻어기자 않으면 안 된다.
참아보자'. '머리도 없고 몸도 없다.'오직 숨과 화두만 집중 또 집중.... <청정도론에서 보면 4념처인 身受心法중에 身과 受의 챙김이라 보면 된다.>
그런 의식 속에서 차츰 차츰 분별되는 의식이 몸과 이완되는 듯 집중에 심화되더니
한 순간 ! 몸의 모든 에너지가 하체로 내려가면서 상체의 근육들을 그렇게 용을 쓰며 긴장하던 힘들이 스르르 풀어지고 몸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몸이 가벼워지며 그렇게 통증과 아픔으로 고통스럽던 다리와 발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마취를 하면 마취액이 몸 속으로 스며서 퍼질 때의 느낌 이었다.
그러면서 온 몸이 통증과 긴장은 살아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몸은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이고 마음과 정신은 뚜렸하며 명료하게 느껴졌다.
온갖 번뇌과 고통으로 복잡했던 생각의 의식들이 한 곳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뭣고? 화두다.
눈은 집중하고 있는 시선의 끝으로 화두가 모이기 시작했고 화두을 들지 않아도 화두가 성성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몸은 고요하여 편해지고 의식은 맑아지고 ....<4념처의 心의 관찰이다.>
이거구나1!
화두가 들린다는 말이 ,집중하여 의심이 의정이 된다는 말이 이런거구나,
이러한 집중이 계속되면 의단이 생기고 성성적적한 화두 참구가 되는구나.
그러한 생각 또한 머리에서 의식되어진 생각이 아니라 그냥 공중에서 들리는 말 소리 같은 느낌이었다.
결국 생각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인가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혹, 몸을 움직이면 이러한 상태의 정정이 흐트러 질까봐 꼼작도 않고 숨을 죽였다.
숨은 단전에서 일정하게 쉬고 있고 몸은 없는 듯 고요했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나고 30분이 지났다.
3시간을 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좌선을 했던 것이다.
'나도 아렇게 할 수 있다'를 생각하며 잠시 사심의 마음이 일어나는가 순간
집중하던 의식이 흩어 지면서 몸의 통증이 시작되었다,
감당 할 수 없는 아픔이 덥쳐왔고 다리가 압축되어 핏줄이 터질 것 같은 고통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다리를 풀고 말았다.
아쉽지만 화두공안을 몸소 체험하면서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위안을 했다.
그러고는 다시 집중을 하려 해도 뜻되로 되질 않았다.
그런 경험을 체험하고 난
다음 셋째 날
다시 어제 느낀 그러한 경험을 시도 해 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오후가 되어 스님의 점검 시간이 왔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화두의 답
"설사 무엇이 움직인다 해도 옳지 않습니다."을 제시하니
스님은 한마디로 '아니다'고 했다.
군말이 필요 없었다.
나도 의심쩍은 내 답이지만 스님의 확신한 답에 더이상 의심 할 여지가 없었다.
나도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그것이 화두를 타파한 것이라면 '왜 꿈을 꾸면서 꿈꾸는 것을 모르고, 잠을 자면서도 잠자는 것을 앟지 못한 다는 말인가.'
몽중일여는 혜안을 열었을 때에 일어나는 현상이고, 숙면일여, 오매일여는 법안을 관통할 째 결국 깨어있는 불법의 진여라고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서 몇 번이나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꿈이나 잠 잘 때면 완전히 죽은 송장이니 말이다.
그래서 '송장끌고 다니는 이 놈이 누구인가?'라는 화두가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는 결국 머리로 풀어내는 답을 찾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스님께 질문을 했다.
내가 3시간을 걸쳐서 좌선을 하면서 일어났던 체험을 상황과 느낌을 상세하게 스님께 설명해 드리니
스님께서는 '그것은 화두가 들리는 것이며 집중하는 단계'라고 했다.
그렇게 계속하라고 했다
.
스님께 그런 확인의 답을 듣고 나니까 나의 마음 또한 분명 해졌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면서 참선을 해야 되는지를
그래서 선지식의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이구나,
그렇게 점검을 하지 않으면 혼자서 이런저런 망념으로 혼자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리라.
이제는 확실한 화두만 참구해 보자.
그렇게 의욕을 가지고 계속 참선에 몰입했다.
용맹전지을 밤을 세워하기로 하고 11시 쯤되어서 잠시 눈을 붙이고
앉았다.
세벽 2시반 정도에 깨어나서 좌선을 했다. 법당안은 조용했다. 보살 한 분과 나 밖에 없었다.
옆에 누가 있고 없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오직 자신과의 싸움이니까,
5시 까지 앉아서 애를 쓰며 했는데 별 신통한 반응이 없었다. 몸도 피곤한지 잠이 왔다.
스님께서 잠이오면 앉아서 절대 졸지마라.
잠오면 누눠서 자고 자유로워랴.
그래서 잠깐 지대방에 가서 눈을 붙였다..
참선하던 그 기운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상태에서 그런지 잠도 짧게 30분정도 잤는가 싶었다.
다시 법당으로 와서 죄복을 깔고 앉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좌선을 하고 몸을 바로 세웠는데 몸의 상태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좀 전 까지만 해도 다리가 무겁고 힘들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께도 근육이 긴장되어 웅크리는 듯이 무거웠던 것이 전혀 무계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쭉 아래로 빠져 내려갔다.
몸이 가볍다기 보다는 편안한 상태 혹은 전쟁을 하던 몸이 전쟁을 끝내고 휴식하는 듯 맥빠진 상태,
그렇게 날 뛰던 망아지가 코가 고삐에 꿔어서 온순한 소 같았다.
몸이 뭔가에 길드려진 듯 온순해 졌다.
모든 에너지가 평정되어 버린 듯, 몸의 상태가 한 싸이클이 내려가 버린듯 (여기서 싸이클이란 조도 즉 밝기를 말한 룩스의 뜻으로 ,알려고 하는 의식인 에너지의 량이 줄어드는 것 같은-예전에 채식을 하면서 느끼던 몸의 에너지와 비슷한 체험 )
온 몸이 가볍게 변한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알 수없는 어떤 큰 에너지에 의하여 몸이 조복을 받은 것 같았다.
십우도에서 견우와 목우를 연상했다.
그러면서 화두가 여여하게 잡히기 시작했다.
고요한 가운데 성성하게 나타나는 한 마음
굳이 어떤 생각이라기 보다는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오직 뚜렸한 한 생각만이 성성하게 있었다.
물론 의식적인 생각보다는 그냥 있는 것, 그냥 일 뿐,
여기서 잠깐 이전에 일어난 현상을 말해 보겠다.
어제 저녁부터 나타나는 현상인데 눈을 반눈하고 응시하는 곳이 마루바닥인데
그 조각조각난 마루판들이 하나의 스크린 처럼 온갖 영상으로 영화 필름이 지나가듯 지나 갔다.
동물로 사람으로 스님들로 나무와 식물로 이상한 형태로 혹은 귀신 등으로 온갖 형상이 지나 갔다.
스님이 법문중에 말씀하셨다.
혹 그러한 경계가 나타 날 것이라고 했다 ,몸 떨림 현상 등도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러한 현상은 전생에 업연으로 인해 나타난 현상이니 전혀 끄달림없이 오직 화두만 집중하라는 말을 기억하며 대수롭지 않게 바라만 봤다.
지난 밤 부터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고 떨리는 다리도 일정시간 지나서 잠잠해 졌고
그런 현상들이 이틀간 나타났는데
오늘 아침부터는 모든 현상이 조용해 졌다.
그런데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눈앞에 우담바라 한송이가 피어나기 시작 했다.
우담바라가 한 송이가 두송이로 피고 짐승으로 변하고 다른 나무로도 변하고 하더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그냥 일어난 데로 지켜보며 좌선을 하고 있었다.
그 때 그 우담바라가 연꽃밭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순간 주위가 보라빛 안개같은(에너지) 운무가 자욱하게 깔리면서 이상향의 세상을 보는듯 했다.
그러한 환상적이며 영롱한 현상이 눈 앞에서 펼쳐 지는 것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귀가 텅! 하는 듯한 느낌과 함께 귀를 깨끗히 청소를 하는 것 같았다.
귀로 들리는 모든 소리가 너무나 명징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동안 귀로 들을 수 있는 데시벨의 싸이클이 아닌 소리라 해야 할지 아니면 느낌이라 해야 할지.....
법당 밖이 숲속이라 많은 새소리가 들렸는데
새 소리가 맑은 물에 씻은 듯 옥구슬 굴러가듯 그러한 영롱한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 했다.
너무나 맑은 소리가 공중 그 어디에서 들리는 곳 없이 들려왔다.
황홀하다는 표현보다는 묘한 느낌에서 나라는 존재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그냥 그 소리가 내가 그것인지 그것이 나인지 모를 정도로 하나가 되어 있었다.
화두가 어디에 있을까?
화두보다는 낸 몸의 숨을 찾아 봤다.
숨은 단전에서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단지 의식하는 것 보다는 그냥 바라보는 것 처럼 모즌 존재가 그러했다.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3시간 째 일어난 현상이라서
혹 움직이면 이러한 현상이 깨어질까봐 계속해서 집중을 했다.
가끔 이런 상태가 흩어질까봐 조심스럽게 손도 움직여 보고 발가락도 움직여 봤는데 눈앞에 펼쳐진 연꽃 밭이나 새소리는 전혀 다르게 변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 내 몸이 이러한 현상에 적응했단 말인가.
아니면 내가 적정열반인 선정에 들었단 밀인가.
선정은 제1,2,3,4선정을 나눈다.
청정도론에 보면 신수심법의 수행 단계를 나누고 있다.
물론 부처님의 최초 경전인 대념처경에서도 몸의 살아짐과 의식의 사람짐 마음에 사라짐 과 법의 사라짐으로 해탈을 설명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의식이 맑고 고요하고 징명하다는 것이며 몸도 마음도 어디에 머뭄 듯한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1시간을 더 있었다.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글로만 읽어왔던 현상들을 직접 경험하면서 수행의 과정을 더욱 심고하게 되었다.
그렇게 체험을 한 후에 스님에게 점검을 받았다.
스님은 '그러한 현상은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최상승의 경지이며
깨달음의 경지로는 아라한과에 경지라'고 했다.
거기에 집착하여 즐기다 보면 더 이상의 공부가 안 된다고 하셨다.
화두는 그냥 두되 집착하지 말고 쉬어라고 하셨다.
성문 연각 아라한, 보살 부처의 순서로 나아가는 과정인데
아라한 까지는 慧眼을 증득한 것이며 반야(般若)의 공(空)의 실체를 증득한 것이다.
法眼과 佛眼을 증득해야 몽중일여,숙면일여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나타나는 현상을 몇 가지 더 문답을 했다.
4일간의 참선수행을 통해서 경험한 내용이다.
그래서 나는 다섯째날은 좀 쉬기로 했다.
남산 산길을 포행하며 몸을 가볍게 휴식을 취했다.
아직 여운이 남아 있는 몸과 마음에 체험의 느낌을 살려주려고 했다.
숲길을 걸으며 바라보는 나무와 숲들을 보는 정신은 더욱 선명 해 졌으며 온 몸의 기운도 한결 부그럽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틱낫한 스님의 걷기 명상에서 이야기 하는 것 처럼 발걸음도 바쁘지 않게 조용하고 부드럽게 움직여 졌다.
2시간정도 포행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교학적인 수행 과정을 이론 적으로 정검해 봤다.
수행 과정의 단계를 보면 성문 연각 아라한 보살의 순서로 깨달음이 진행되는데
예류과인 성문과 연각은 수다함 사다함, 일례과인 아나함, 불환과인 아라한의 과정을 거쳐야 법안을 통해 천안통을 열리며 법안통에 들어서 부처의 열반에 들어가는 법안이 열리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깨달음의 과정을 53단계로 나눴는데 10신의 과정은 5온을 깨달은 범부각이며 신해행정의 단계이며 능가경에서느 성소작지이며,
10주,10행,10회향,,초지단계는 18계 의식의 단계로 부처와 비숫한 상사각인인 성문 연각의(수다함,사다함,아나함) 묘관찰지이다. 여기까지는 심안을 깨달아 아는 단계이며 탐진치심과 교만 의심 삿된견해에서 벗어난 2선정의 단계이다.
10지의 2지에서 7지까지는 7식인 말라식으로 아라한의 단계이며 분수에 따라 깨달아 아는 수분각이며 평등각지인 몽중일여의 혜안의 단계이다.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과 아공(아만 아치 아견 아해)이 평정된다.
제8아뢰야식의 함장식인 미망과 미혹에서 벗어난 8지에서 10지까지는 구경각이며 멸진정에 드는 등각의 오매일여 숙면일여의 단계가 된다.
대원경지이며 진여이다.
제9식인 아타나야식은 묘각과 불각으로 진여일심인 소소영영한 깨달음에 들어간다는 것이 일반적인 깨달음의 과정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색(色)즉 시공(是空) 이면 수상행식(受想行識)이 역부여시(亦復如是)하여 아뇩다랴 삼략 삼보리를 증득하여 바라밀(波羅蜜)을 행하게 된다고 한다.
색은 몸인 물질(지수화풍)이 공함을 알게되면 수상행식인 18경계<육근(六根=안이비설신의) + 육경(六境=안이비설신의 각경) + 육식(六識=안이비설신의 긱의식) = 18계라 함>가 동시에 공하게 되니 무상을 바르게 정득정각하게 되면 열반적정하여 부처가 되는 행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간화선 집중 수행 마지막날
마지막 정검을 위해 대각전을 찾아 좌선을 하고 앉았다.
그런데 수불스님의 지난 7일 점검 때에 화두를 놓고 쉬어라는 말이 자꾸 생각나면서 앉아 있게 하지를 못했다.
두통도 약간 생기고 해서 그냥 일어나 숙소로 돌아왔다.
그 때부터 투통이 시작되고 누우면 좀 좋아지려나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너무 두통이 심하니까
이뭣고/ 화두가 들려졌다. 고통을 잊으려면 화두를 챙겨라 그러면 화두가 약이 된다는 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아무리 집중해도 두통에다가 오한이 겹쳐오기 시작했다.
누워서 끙끙거리며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는데 두통이 이제는 이동하기 시작했다.
몸 아래로 내려가더니 배까지 내려와서 복통을 일으 켰다.
식은 땀이 나면서 속이 미쓱 거렸다.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하력 했으나 별 구토가 없으면서도
완전히 진액이 다 빠지면서 몸은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그냥 화장실 바닦에 주져앉아서 변기통에 머리를 쳐 박고 앉아 있었다.
한참을 지나고서야 겨우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몸의 상태가 완전히 다운되어 있는데 화두는 성성하게 들리고 있었다.
오히려 고통을 잊으려는 심정이 강하게 화두를 들게 하는 것 같았다.
그려면서 불법의 대의가 스크린 처럼 머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연기성의 삼법인과 화두의 본질인 말과 생각의 그 너머에 있는 불법의 본질
찾는 '이뭣고?'는 무엇을 찾는 것이 아니라 불법의 대의를 알아내는 것 알아낸다는 말이 모순되며 그냥 불법의 대의에 하나가 되는 상태
일심과 진여와 불성과 불법과 무심과 공심과 모든 표현의 말이 하나로
'만법귀일'은 그 하나의 법은 어디로 돌아가는가?일귀하처
송장 끌고 다니는 이놈은 뭣고?
조주의 무자화두,판치생모,척수지성,권시궐,정전백수자 등
여러가지 화두가 함께 생각나면서 그 모든 화두의 일귀하처는 결국
연기성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말할 수 없고 오직 모를 때 그냥 여여할 뿐
성성적적하여 그냥 일 뿐이다.
일어나는 작용성 일 뿐이다. 그 작용성을 자각할 뿐
무엇이 없다. 설명할 수 없다.
찾는 것은 없는 것을 찾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가 없는데 어디에다가 화점을 찍을 수 있겠는가.
또한 찍는다햐여 고정된 것이 아니고 찰나생멸하는데
결국 모든 화두는 뜻으로 답이 없다는 것을 아는데 있다.
모든 화두는 모를 뿐일 때 한 소식 나타난다.
여러가지 생각과 화두의 본질이 하나로 접목되면서
몰록 空한 견해가 일어났다.
오늘 乙未년7월10일(음5월25일)丑時(2시15분)에
몰록 한 소식이 일어났네.
佛法의 大意가 이렇게 싱겁다는 것을 알았네.
온 세상이 불법이라해서 대단한 줄 알았는데
내 눈썹 하나 빠지는 것보다 못하네
불법찾는 사람들아 눈뜨고 속지마라
불법은 알면 틀리고 모르는 것이니 어찌 모른는 것을 찾을 수 있으랴ㆍ
오직 모르고 모를 뿐!
only don't kown!
수 만 겁 세월을 찾아 헤메도 공한 도리를 어찌 찾겠는가ㆍ
허공을 어찌 말로 보여 줄 수 이겠는가.
삼세제불 역대조사도 낙처가 없다고 그렇게도 애뜻하게 가르쳐 주었건만
미혹한 중생들은 믿지 않으니 어쩌겠나,
있다고 안다고 악을 쓰고 앉아서 점심을 찌으려고 허송세월 다 보내누나.
그러니 찾으려 애쓰지 말고
그냥 살아라ㆍ배 고프면 밥 먹고 잠 오면 잠 자고....
눈 밝은 선지식 덕에 중생이 눈을 떴으니 어찌 조사가 서쪽에서 온 소식을 모르리!
三千大千界 一呼吸
三世諸佛祖 共了看騙子 삼세제불조 공료간편자
三處傳心去 不昧休心處 삼처전심거 불매휴심처
如如
삼천대천 세계가 한 호흡에 꿈인 줄 알고
삼세제불과 조사들도 모두가 도적놈인줄 알면
삼처전심 어디 에다 쉬는마음에 낙처를 두겠나.
그냥 그대로 숨 잘 쉬며 살라 하겠네.
Three thousand aecheon The world knows that it is a dream to breath
If the three trillion dollars and the survey everyone thinks it's a thief
Three-point whole heart where the resting heart,
IWill just breathe and live.
三千大千世界が一呼吸に夢であることを知って
三世諸佛と祖師もすべてがドジョクノムだと知っている
サムチョ心をこめどこに加え、心のナクチョを二さらさら。
そのまま息もついサラのね。
주먹 한 번 쉬었다 펴는 것도 불법인데
꽃피면 봄이요
낙옆떨어지면 가을이다ㆍ이것이 불법 이라네ㆍ
누가 불법의 대의를 무르면
"쓸데 없는 말 지껄이지 마라!
불법이 멀미 한다."
無口無言無說 有口有言有說
"無鼠洞尋"무서동심
"도망가 버린 쥐구멍에서 쥐를 찾다ㆍ"
누가 부처를 물르면
"말하는 그 놈 멱살을 잡고 일러라!"
그래도 또 물으면
"밥이나 먹고 똥이나 싸라!"하겠네
말 할 수 없는거니 몽둥이가 날아가고 할, 방으로 알아 차리라고
오직 불법은 그냥 일어날 뿐,
마음이다 마음이다 속지 말게나, 그 또한 없는 것을 굳이 설명하려니 방편으로 빌려 쓴 것 뿐
불성이니 진여니 무심이니 공이니 하는 말은
허수아비 옷인 줄 알면 되고 허수아비가 부처임을 알면 된다네.
어렇게 한 생각들이 나타나면서 피씩 웃음이 났다.
정말 싱겁다.
그렇게 알려고 얘쓰던 불법의 대의가
늘 듣던 말 '알면 틀린다.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말이 참 말인 것을
어째서 자꾸 뭔가 다른 것이 또 있다고 찾고 찾고 했던가.
어리석은 중생이 바로 중생심이 그런 것
무엇이 있다는 분별심이 결국 장애물이 였네.
제행무상,제법무아,일체개고가 이렇듯 벗겨지네.
~~~~~~~~~~~~~~
그렇게 고통 스럽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몸이 마취에서 벗어나는 기분처럼 스르르 가벼워 지면서
벌떡 이러나게 했다.
방 한바퀴를 걸어보고 이게 사실인가?
맞는 생각인가?
너무 아파서 정신이 좀 이상 해졌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뵈도 몸은 가벼워 졌고
머리도 맑아 졌다.
그렇게 혼자서 이리저리 점검해 보면서 뜬 눈으로 밤을 세웠다.
빨리 날이 밝아서 스님께 점검을 받아 보고 싶었다.
스님께 질문 할 내용을 몇가지 정리하면서 ...
뜬눈으로 밤을 지샜는데 몸은 가벼웠다.
마지막 날이 7일 째
오늘은 모든 일정이 끝나는 날이다.
일찍부터 숙소와 바랑을 챙기고 마지막 해제 법문을 들었다.
나는 화두에 대한 답을 스님께 보이고 싶었다.
내가 스님께 화두를 재시해 주길 했으나
'스님은 몸으로 하는 화두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갑자기 멍했다. 화두를 참선하는 사람들이 자꾸 뭔가의 답이 생각나서 그렇다고 하셨다.
그런데 내가 준비한 화두의 답이 생각이 앞서서
일어서서 '도망간 쥐구멍에서 쥐를 찾는다'라고 말을 했다.
스님은 집중하는 듯 하더니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몸으로 보여 드리겠다며
벌떡 일어나 내가 앉아 있던 방석을 옆구리에 들고 성큼성큼 걸어서 법당을 나와버렸다.
스님 방으로 들어가서 점검을 받기를 기다렸다.
스님이 들어와서 다른 사람들 점검을 하시고는
나에게 '스님은 이야기는 어제 했고 ' 알겠지요,"라고 했다.
나는 '삼배'를 하고 방을 나왔다.
이것이 내가 간화선 집중 체험하면서 느낀 일들과 일어난 상황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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