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어당이 말하는 허무주의에 대한 견해
린위탕(林語堂: 임어당, 1895년 10월 10일 ~ 1976년 3월 26일)은 중국의 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인 그는
불교를 허무를 가르치는 종교로 이야기 한다. 그의 저서인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라는 책에서
'무시무시한 허공위에서 흩어지는 불교의 안개를 였보았다.'라고 쓴다.
불교는 허무주의가 아닌 생생한 실제 연기작용주의며 늘 지금을 알차리며 살아가는 적극적 행동주이다.
불교의 진리를 얼마나 알지 못하면 글자 속의 空과 無의참 의미를 이해 못하고 글자적 해석으로 이해 하고 허무주의로 알고 있을까.
그러다면 불법의 진리를 깨달은 석가의 진리는 무엇이고 수 많은 선지식들이 허무적인 삶을 살려고 일생을 바쳐서 수행하고 공부했다는 말인가,그대는 석가보다 용수보살보다 뛰어나단 말인가,
물론 무지에서 오는 개인의 생각 일 수도 있겠지만 타 종교와 비교해서 자신의 신앙적 소견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대문호답지 않다고 생각된다.
결국 그가 쓴 모든 글 속에서 나타내는 허무와 공,무의 계념은 결국 자신의 식견인 알음알이 겠지만, 그의 명성이나 흠모자들과 같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못 된 지식을 전달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글과 말은 쉽게 내 뱉을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백과사전에 나타난 허무주의에 의미를 보면 '사니힐리즘이란 삶의 가치의식을 상실한 채, 이전의 낡은 가치는 붕괴하고 새로운 가치는 아직 정립되지 않은 전환기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라고 하는데 즉 기독교적 차원에서 사상이나 철학에 이단시되는 사상을 말한다고 보겠다. 이러한 허무주의가 불교라고 말한 임어당의 불교 수준을 알 수있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무와 공이 허무주의라고 하는데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공과 무의 차이는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불교의 진리의 핵심은 연기성으로 인연된 작용성에 있다. 모든 우주의 생성과 창조의 원리는 상호 관계성인 연기성으로 나타난 현상으로 한 찰나도 정지된 시간이 없는 諸行無常이며 모든 개체는 독립된 것이 없는 諸法無我라 했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무명의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一切開苦이다.
석가는 이러한 이치를 中道로 표현하고 이 이치를 바르게 개달았다고 해서 正等覺 했다고 했다.
즉 중도의 이치가 불교의 핵심이다. 모든 것은 서로 상호 의존하여 존재 하기 때문에 부증 불감하고 유와무가 상호 소통하여 시작과 끝이 없는 진리이다. 이것이 무와 공의 계념이다.
공이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비움과 채움을 동시에 같는 것, 혹은 두 양변을 동시에 여의는 것을 말한다.
없다는 無가 아닌 늘 가능성을 내포한 빈 상태 공함을 말한다.
그래서 중도라는 단어를 쓴다. 없는 것이 아니라 있되 없는것처럼 비어있는 것 행하되 행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
無라는 것은 있다는 有에서 가정하에 반대의 개념인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없는 것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다. 영원히 없는 것으로 본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공은일어나는 순간의 작용이 공이다. 없는 것이 아니라 빈 것 같지만 조건만 있으면 언제든지 나타난다.
현대 양자물리학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모든 물질을 세분하여 쪼개고 쪼개면 결국에는 있다고 할 수 없이 분자가 없어진다고 한다.
그 상태를 빈 허공의 상태로 비었다.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우주 전체가 빈 공이다. 하지만 지금도 찰나 생멸을 동시에 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존건과 상태가 공한 상태이지만 인식하고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허깨비 같고 꿈 같고 물거품 같다고 금강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있다 없다는 이원론이 아닌 공심론으로 일원론이다.
생사가 둘이 아닌 변화일 뿐이다. 이 세상에 나타난 모든 존재는 각각의 꼴이 다르지만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상태이다.
그래서 독립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모두가 서로서로 잇대어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내가 무아임을 깨닫게 되면 삶에 집착하여 탐욕과 화를 내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또 다른 '나'이기에 모두를 차별없이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게 되며 삶을 더 적극적으로 살게 된다.
불교는 태란습화 로 태어난 모든 존재를 존중하는 동체대비의 사상으로 평화와 지비의 삶이 불교의 핵심이다.
하지만 창조론을 주장하는 유신론에서는 절대적 존재로 유와 무로 구분하여 있다, 없다는 이분법을 쓴다. 유일신은 영원하며 그 신이 모든 피조물을 만들고 주관한다는 생각을 한다. 영혼은 영원불변한 신의 소유물이며 태어남과 죽음이 따로 구분하여 이원론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진리에 부흥하지 않으면 모든 진리 철학 모두를 이교라 하여 이단시 한다.
즉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데 불량품을 만들면 버리는 것과 같다.
불교는 그 불량품도 조건이 맞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원래는 같은 재료에서 만들어졌기때문에 다시 재생하여 만들면 정상품이 된다는 논리다.
그들이 말하는 내 이웃은 그들만의 형제자매이지 절대신을 믿지 않는 모든 존재는 신에 반하는 존재로 악마 혹은 지옥으로 간다고 한다.
그들은 신을 내세워 인간 중심의 기득권사상으로 인간 외에 존재는 모두가 인간을 위한 수단이나 방편으로 생각하고 막행막식을 한다.
전쟁과 테러 자연 파괴가 대표적인 일들이다.
하지만 불교사상은 그들과 대치되는 극점이 이 세상에 모든 존재는 나와 같다는 동채대비사상에서 극명하게 다르다.
그들이 보낸 지옥의 중생 모두를 구원할 때 까지 지옥문에 서서 자비를 배푸는 것이 지장보살의 보살상이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불교와 기독교의 진리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차이가 있다고 했다.
힌두교도인 간디는 영국에서 기독교사상을 공부하고 고국에 돌아와서 뒤늦게 불교 공부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기독교공부를 하면서 인간애를 배웠고 불교를 공부하면서 우주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고.....'
나는 하나님, 신성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손뼉을 치고나서
신성은 모든 연기작용성이 신성이라고 설명하겠다.
신이 하늘나라에 저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 속에 존재 모두가 하나님의 성품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다.
이것을 진리로 말한다면 법계연기, 제법실상, 공성(空性)이다.
이 공성이 작용하는 순간이 모든 창조이며 불성의 나타남이고, 그 나타남은 영원하지 않고 늘 변하여 머물지 않는 존재 허상이다.
그 이치를 바르게 알아차리고 쓰는 것이 기독교의 참사랑인 아가페이고 불교의 중도인 자비이다.
부처님이나 하나님이나 똑바로 눈 뜨고 알아차리면 같다. 바른 믿음과 정견은 같다.
그런데 왜 이렇게 두 종교간에 극간이 벌어져 다를까?
진리를 바르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양의 이원론적 사고가 동양의 일원론적 사고의 진리에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만약 성경의 모든 구절은 일원론적 안목으로 직관한다면 모두가 성성한 불성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물론 불성이 아닌 것이 어디에 있겠냐 마는 바른 깨달음으로 구원하는 성직자 수행자가 참말로 많이 그리울 때다.
그런 그들의 관념적 시각으로 불교의 공과 무을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직접 깨달아 봐야 아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직접 체험하고 깨달지 못한 임어당 같은 사람들이 자기 식데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가 말하는 허무란 무엇인가?
먼저 허무란 마음이 분별해 내는 생각이거나 느낌이다. 결국 자신의 심의식으로 배우고 느낀 생각을 나타내는 종합적 견해 인데
이러한 견해는 각자의 지식이나 깨달음의 차이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각 개인들이 허무를 이야기 할 때는 허무를 느끼는 마음에 머물 때 까지이며 즉 자신의 의식으로 인식된 생각(마음)을 나타내는 단계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심의식(心意識)이 나타내는 단계를 8단계까지 나누고 있는데 7단계인 말라식 까지 우리가 인식하고 표현하는 단계이다.
프로이드는 무의식의로 뭉뚱그려 놓았는데 불교에서는 말이나 글로 표현되지 않는 단계인 아뢰야식 혹은 함장식이라고 하는 8번째 단계가 있다.
결국 허무를 느끼는 그 허무의 마음 너머에 있는 것이니 당연히 그 너머를 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설사 그 너머에 단계를 갔다고 쳐도 그 단계는 말이나 글로 표현 될 수 없는 단계이다.
다만 방편으로 설명하여 나타내기는 하겠지만 깨달은 자와 그렇지 않는자의 글은 차원이 다를 수 있다.
즉 허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허무와 허무를 비교 했을 때 나타나는 의식인데 불교에서는 그 둘을 각각 알아차림으로 인식하는 것,
다시말해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 정견인 알아차림이다. 모든 대상이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하는 것이다.
식견의 관념적인 아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알아차림, 즉 정견이라고 하면 지관으로 견성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불입문자 언어도단이라고 한다.
글이나 말에 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입으로 불을 아무리 말해도 입은 뜨겁지 않듯,
어린아이에게 불가까이 가면 뜨겁다고, 위함하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무엇이 뜨거운지 모른다. 직접 뜨거운 경험을 하면 그 이후부터는 절대 불 가까이 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다.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깨달은 후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즉 인식체계가 다른 수준으로 진리를 접근해서는 절대 그 참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와 공의 계념도 이와 같은 차원이다.
2차원의 생각으로는 차원이 다른 5차원의 세상을 절대 이해 할 수가 없듯. 초등학생이 대학생들의 공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는거와 같은 이치다.
불교의 모든 경전은 방편으로 된 글이다. 석가도 당신의 말과 글에 진리가 있다고 진리를 찾는다면 이는 외도를 행하는 자이며 45년을 설법하고 다녔지만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불교의 참 진리는 그냥 행할 뿐이고 할 뿐이다. 물론 그러한 이치를 전달하기 위해서 언어나 말이 필요하다.
결국 공이라는 것도 직접 채험을 통해서 깨달지 않고서는 절대의 진리를 알지 못한다.
대표적인 반야심경이 그렇다.
불교의 핵심 진리인 반야의 핵심 사상으로 연기작용의 공성을 설명하고 있는 경전이다.
단일 주제의 책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부수가 많다는 600부 반야부경전을 핵심만 추려 놓은 360자의 글이다.
불교신자라면 누구나가 외우는 내용이지만 실제 공에 대한 이해를 확실히 깨닫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론적으로 색이공이고 공이 색이라고 뭐라고 하는데, 진짜 참 뜻을 알아차리고 외우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불교가 어렵다고하는 대목이다.
불교 모든 경전이 한문으로 되어 있다 보니 선입견에 어렵게 느껴 질 수도 있다.
하지만 불교 핵심 진리인 연기법은 너무나 쉽다.
늘상 어른스님들이 말한다. 세수하다 코만지는 것 만큼 쉽다고 한다.
맞다. 우리 삶 그 자체가 연기작용성인 불성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꾸 뭔가를 찾으려는 인식의 전환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할 진데 직접 깨달지도 못한 사람이 남들보다 좀 더 많은 식견을 이해하고 습득했다고 혹은 글을 표현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해서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결론 내린다면 얼마나 스스로가 무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자칫 임어당 같이 글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은 불교를 허무주의니 공상주의니 하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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