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융의 이야기

불의노래

통융 2010. 12. 31. 19:51

석가가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며...

 

어!

자넨, 내가 뱉은 도깨비가 아니었나.

그래 수년간 어디를 그리 웃고 다녔나.

내 귀로 다시 돌아와 앉은 가섭존자를 듣고.

 

*석가가 마지막 대중 법회에서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는데 가섭존자만 빙그레 웃었다.

 

 

 

말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운이 모여서 합성변형된 것으로 마음은 알 즉 마음의 생각을 모아서(집약해서) 나타내는 알맹이인 씨로서 마음씨 즉 씨알이 되는 것이며 다석 류영모선생도 마음의 씨를 이야기 했다.

마음 + 알-마알-말로 변현되었다.

내가 뱉은 말들이 살아서 공중에 떠 다니다가 내 귀로 너 귀로 들어간다.

그리고 몸 속에서 살아서 움직인다. 화를 내게도 눈물을 흘리기도 웃게 하기도.

내 입으로 한 소리이나 내 말이 아니네. 너 말도 아니라네.

즉 귀가 둘인 것은 내 말도 내가 듣고 한 귀는 세상 이야기를 들으라고 있는 것 이라네.

 

내가 말을 하면서도 한귀로 내말을 경청하라 그러면 말의 소중함과 책임을 알 것이다.

말의 에너지가 우주를 진동하고 그 진동된 에너지가 내 몸으로 파장시키니 그 힘으로 세상은 움직이고 있으니

우주의 흔들림이 소리로 바뀌고 그 소리가 음성이 되고 그 음성이 하나일 때 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김지하는 律呂라 했고

에너지 (性)의 결합과 合 나눔(理)가 반복되면서 분별 음(音)의 성(聲)이 나타나니 두 성의 합이 될 때 觀으로 나투며 이것이 관음인 것이며 본성인 것이다.

존재함은 존재함을 마음의 말로써(생각) 말할 때 의미즉 이름이 생겨나는 것이며 그 생각이 입을 통해서 소리즉 말이 되어나오면 그 소리 씨는 우주에 탄생되는 태초의 말씀이고

그 태초의 말씀이 곧 창조되는 것이다. 즉 창조된 그 말은 우주 속에서 영원히 존재함이니 그 존재하는 힘들이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것이다.

한국의 소리문자는 인간의 오감을 통한 떨림(진동,율려) 음이며 서구의 글자들은 표현되는 나타내는 표상음이다.

말이란 소리로 나타나는 말이 있고 눈으로 보는 말이 있고 귀로 듣는 말이 있다.

생각의 말과 마음의 말이 있다. 이러한 말씨가 인간 창조의 근원이며 태초의 씨알이 되는 것이다.

마음씨가 말을 만들고 그 말이 율려를 일으켜 태초에 세상은 빛과 소리로써 창조가 시작 되리니 그 시작된 뭇 생명은 마음씨를 갖고 있다. 그 마음씨는 곧 생명의 기운인 떨림이며 그 떨림이 빛과 소리를 만들고 그 떨림이 다시 말로써 나투인다.

 

슬금슬금 목줄을 타고 기어 나오는 저놈을 보라고

입 속에서 살아나는 그 놈들은 망무가네로 세상을 흔들고 있으니

마음에 씨가 자란다.

 

 

누구나 어께에 도하나 들고 산다

 

 

우리 집 처마 밑 제비들이 살다 간 집에

참새들이 들어와 새끼를 낳았다.

감꼭지 가게노헤따

 

 

 

 

 

 

불의 노래

 

 

 

출렁 솟아나는 빛

태초에 불이 있으니

그 불은 둥근 알의 씨앗이라

모든 만물은 알의 시작이고 그 알은 생명의 시작이며 어미의 뱃속이라

 

지구가 둥근 것이요

씨의 알이 둥근 것이요.

어미의 뱃속도 둥근 알집인 태이니라.

알은 움직임인 회전이며 이는 불의 생성이며 이는 太極이고

불은 힘으로 나타나 소리가 되는 것이 곳 律呂이다. 율려는 곧 말씀의 근본이다.

불은 생명의 시초인 불알이 불씨이며 씨알이 됨이다.

모든 존재는 불의 노래이며 그 노래는 소리로 만들어진  불은 빛이다.

알의 힘(갱)이 들이 모여서 만나니 소리가 되고 그 소리는 알의 춤이고 알의 노래가 생명의 시작이다.

감히 누가 알을 태초라 할 수 없으며 태초에 알이 있었다 함은 존재와 불 존재를 함께 인지하는 것으로

이는 태초라는 의미의 모순을 나타내는 것이다.

원래가 시작과 끝이 없었으니 이는 모든 근원을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태어난다는 것은 변화의 이동일 뿐 새로운 창조는 아닌 것이며

창조라는 의미 또한 같은 맥락으로 공간적 시간적 변화의 이동일 뿐 시작이 없는 것이며

끝 또한 없는 것이다.

시작과 끝을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시간의 변화를 인식하기 위한 방편이며 수단일 뿐이다.

사간이란 것도 변화하는 공간적 이동일 뿐 내포된 공간적변화의 사이존재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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