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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관의 의지

통융 2011. 2. 15. 12:18

 

"사람들은 어떤 대상이든, 누구나 무엇을 믿으면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의지를 믿는 것입니다. 의지는 본래 진면목(眞面目)이며 신성(信性)인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현재 내 마음의 궁핍함을 채워주는 그것이 나에게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달팽이관의 의지

 

1,

나는 팔뚝에 링거를 꽂은 채 수술대 위에 누워 있다. 하반신 마취를 하기 위해서다. 오른쪽 발목 복사뼈가 두 조각으로 골절되어, 조각난 뼈를 두 개의 나사못으로 고정하는 봉합술을 기다리고 있다.

평소에는 서서 걸으며 수평의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수술대 위에 누운 지금은 세상을 수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일렁거리는 천장, 어지럽게 얽힌 전선들, 눈부신 조명등. 천장에 뚫린 환기구와 구불구불 서로 연결된 알루미늄 관들이 낯설게 보인다. 마치 공상 영화 속 공간 미로처럼 혼란스럽다.

'저 미로 속으로 달아나 버리면 어떨까?'

그 순간, 천장이 금방이라도 우르르 무너져 나를 덮칠 것 같은 중압감이 몰려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누구나 외부의 두려운 조건에서 도피하는 것은 본능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수술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감이 뒤엉키며 복잡한 감정들이 밀려왔다.

먼저, 두려움의 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팽이관 깊숙이, 아니면 뇌 속 어딘가에서 두려움의 의지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주인님, 수술이 어떤 위험을 수반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저들이 당신의 몸 절반을 서서히 죽이려 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누워만 있을 건가요? 특히 하반신 마취는 당신의 하반신을 영원히 마비시킬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의 의지는 몸 주위를 분주히 오가며 공포의 의지들까지 동원해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주인에게 설득과 유혹을 시도했다.

"당신은 저 투명한 마취의 정체를 모릅니다. 만약 그들이 실수라도 한다면? 마취제가 척수 깊숙이 스며들어 당신의 하반신을 영원히 지배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최악의 경우, 당신은 지구별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실수는 드물다고 말하겠지만, 어떻게 장담할 수 있나요? 로또 복권이 당첨되는 것처럼, 수백만 분의 일 확률로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죠. 주인님은 젊은 시절 벼락을 맞았던 경험이 있다면서요? 그런 희박한 확률도 당신에게 일어났다면, 마취 실수가 당신에게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예외라고 생각하지만, 확률은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합니다. 주인님도 벼락을 맞았던 것처럼, 안전하다고 확신하는 마취가 실수의 확률에 당첨된다면… 너무나도 슬프고 원통한 일이겠죠."

두려움의 의지는 잠시 뜸을 들이며 다시 속삭였다.

"주인님, 만약 혼자서 두 다리로 대지를 밟고 세상을 활보할 수 없게 된다면, 푸른 숲과 산을 바라보며 걸을 수 없게 된다면 얼마나 불행할까요? 아직 주인님은 갚아야 할 빚들이 많은 걸로 아는데… 하고 싶은 일들도 많다면서요. 그리고 남자로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다시는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인님을 사랑하던 이들이 모두 떠나버릴지도 모릅니다."

두려움의 의지는 긴장된 달팽이관을 어루만지며 다정한 위로의 말로 속삭였다.

"물론 그렇다고 삶을 완전히 포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단 한 번의 실수가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걸 자각해야 합니다. 한 번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세요. 그래도 한쪽 다리는 멀쩡하잖아요. 한쪽 다리가 불편해진다고 해도, 절뚝거리며 살아갈 순 있잖아요."

두려움의 의지는 온갖 위협과 위로, 감언이설을 동원해 내 마음을 흔들며, 마취와 수술을 포기하도록 유혹했다.

 

2

두려움의 의지는 다시 주인에게 불안과 공포를 앞세워 겁을 주고 있었다.

"결국 당신은 내 경고를 무시하고, 그들의 실수에 몸을 맡기다 희생당하고 말 거예요.

당신도 들어서 알겠지만, 저 마취 액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식물인간이 되었고, 목숨을 잃은 일도 많아요. 그런데도 저들은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죠. 의료 실수라며 몇 푼의 돈으로 피해자의 눈과 귀를 막아버리고 끝이죠.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또 다른 희생자를 찾겠지요."

마른침을 삼키는 주인을 힐끗 바라본 두려움의 의지는, 그의 흔들리는 마음을 간파한 듯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는 한층 부드럽고 친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들을 보세요."

 수술을 준비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손을 놀리며 장비를 챙기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한 사람에게는 운명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인데, 저들은 얼마나 진지할까요? 어제 저녁 술값이 바가지를 썼다느니, 아침 출근길에 갑자기 뛰어든 아이 부모를 욕했다느니... 긴장감 없이 키득거리며 수술용 매스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손들이 정말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한 손들이 맞을까요? 이런 사람들에게 주인님의 몸을 맡길 수 있겠어요?"

흥분한 두려움의 의지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불길한 기운이 주인 주변을 맴돌며 서릿발처럼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의 몸은 점점 더 떨려왔다.

수술대 위에 반듯하게 누운 주인은 긴장의 의지가 메아리처럼 귓가를 맴도는 것을 느꼈다. 불안과 공포의 의지는 더욱 기세를 올려 그의 우뇌를 자극했다. 마치 주인의 마음을 완전히 정복하려는 듯한 순간——

어디선가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수술실 안이 술렁였다. 분주한 움직임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옆으로 누우세요."

"허리를 새우등처럼 굽히세요."

"척추마취를 하려면 등뼈가 잘 보여야 주사바늘이 정확히 들어갑니다."

여러 명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울렸다. 마치 바싹 마른 갈대가 겨울바람에 서걱이는 듯한 소리였다. 그러나 주인은 두려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지시에 따랐다. 마치 소가 고삐에 끌려가듯 순순히 움직였다.

두려움의 의지는 안타깝다는 듯 주인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그의 눈앞에 커다란 주사기가 들어왔다. 날카로운 바늘 끝에서는 질질 마취 액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굶주린 이리의 이빨처럼.

그리고 그 이빨이 서슴없이 주인의 몸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최후의 방어선이 작동했다. 긴장과 두려움이 번개처럼 주인의 몸을 휘감았다. 그의 척추를 따라 몸이 경직되었다. 하지만——

그 방어선은 너무도 쉽게 무너졌다.

서늘한 바늘 끝이 거침없이 척추 4번과 5번 사이를 파고들었다. 연골을 뚫고, 등뼈를 지나, 깊숙이.

그 순간, 모든 감각이 희미해졌다.

 

3

이빨에서 뿜어져 나온 마취의 비릿한 냄새와 액체가 서서히 주인의 하반신을 점령해갔다. 신경은 찌릿찌릿한 자극을 느끼며 마취액이 퍼지는 것을 저항해 보지만, 결국 무력하게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의식을 잃어가는 하반신에서 신경들은 주인의 몸을 빠져나가듯 멀어져 갔다.

그들이 주인의 다리를 만지며 물었다.

"감각이 있습니까?"

예, 아니오.

그들은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마취가 제대로 작용했는지를 확인하는 형식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인은 의식을 집중해 양다리를 들어 보려 했다. 그러나 이미 하반신은 그의 의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긴장과 의식은 하반신에서 배꼽을 지나 가슴과 심장을 거쳐 머리로 몰려들었다. 의지는 칼을 든 그들의 행동을 떠올리며 주인의 마음을 흔들었다.

상상의 날개가 적막한 공간을 가르며 퍼덕였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둔 식인종들이 웅성거리는 듯, 그들의 낮은 목소리가 한여름 소나기처럼 소름을 돋게 했다.

주인의 몸에서 빠져나온 상상은 그들 주위를 날아다니며 소리쳤다.

"날카로운 매스를 들고, 그들은 자기 살이 아니라는 듯 거침없이 주인님의 살을 가르고 있습니다. 붉은 피의 속살을 헤집으며, 하얀 뼈의 고지를 찾아 나섰어요."

그러나 그렇게 외치던 상상은 머릿속에서 펄떡거리다 결국 의식 속으로 떨어져 더 이상 날개를 펼 수 없었다.

주인은 두려움에 의지해 공포에게 물었다.

"내 뼈가 정말 두 조각으로 부서진 것인가? 그 위로 쇠못이 사정없이 박히고 있는 것인가? 내 몸을 지탱해주던 뼈들은 이런 공격에도 괜찮을까?"

주위를 분주히 맴돌던 두려움과 공포가 주인에게 속삭였다.

"주인님, 저희에게 구원을 요청해도 이젠 소용이 없어요. 어떤 도움도, 위로의 말도 해줄 수 없어요. 그들은 이미 피 묻은 칼과 핀셋으로 살을 헤집으며, 그들의 목적을 향해 쉼 없이 손을 놀리고 있어요.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어요? 우리도 그저 보고만 있을 뿐입니다."

두려움도 이젠 되돌릴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논리를 불러냈다. 논리는 비교적 냉정하고 합리적인 친구였다.

"그들에게 맡기세요. 그들도 돈과 생명을 담보로 일하는 사람들이니, 진실이든 거짓이든,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성공 뒤에는 주인님이 돈으로 대가를 지불해야겠죠. 대신 주인님은 다리를 옛날처럼 완전하게 되돌려 받을 수 있을 테고요. 이게 그들과 주인님이 맺은 계약 아니겠어요? 물론, 성공할 거라고 우리가 장담할 수는 없지만요."

논리는 담담하게 말을 마쳤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여기에 머물 이유가 없어요. 주인님이 힘들다면 희망과 위로의 친구들을 불러 보세요. 그것도 부족하다면, 또 다른 주인을 찾으세요. 안녕...."

두려움과 공포는 의지의 문을 열고 나가면서도, 주인을 설득하지 못한 아쉬움에 미련이 남았는지 뒷걸음질치며 사라져갔다.

 

4

주인도 이제 그들과 더는 함께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칼자루를 쥔 이들을 믿어야 하는 거야. 이런 수술쯤이야 여러 번 해봤을 테니 실수는 없을 거야.’

그래, 이제 생각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두려움과 공포를 대신할 또 다른 주인이 있을까? 아니면 희망과 위로의 친구들이 나와 함께해 줄까?

주인은 의지에게 그들을 불러보라고 했다. 그러나 의지는 투덜거렸다.

"주인님, 마음이 모든 생각을 선택하는 것이지만 너무 변덕이 심하세요."

잠시 뒤, 의지는 위로의 친구를 불러주었다.

주인은 위로에게 물었다.

"더러 사람들은 신의 이름으로 자신을 맡긴다는데, 그렇다면 그 신들은 나를 대신해서 살고 죽을 수 있다는 말인가?"

위로의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먼저 신의 존재 여부를 인정해야겠지요. 그리고 그 신을 바라보는 각자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그는 이어서 설명했다.

"신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신이 유일한 존재인지, 아니면 다양한 신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관점이 다를 수 있지만, 공통된 믿음이 있어요. 모든 신은 절대적인 힘으로 만물을 관장하며, 그들에게 절대 복종과 순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자신을 인정하고 믿는 자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이 구원을 요청할 때 희망과 지혜, 희생과 사랑, 순리와 예지 등의 친구들을 대동해 다가가길 원하죠."

"저도 주인님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듯이, 그들도 신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신본주의(神本主義) 자들입니다. 모든 것은 신이 결정하며,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그들의 삶이죠."

위로는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님은 어떤 신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지금 그 신에게 매달려 보세요. 혹시 모를 일 아닙니까? 모든 것이 잘 풀릴지도요."

그러면서 위로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신의 마음을 인간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신은 절대적으로 인간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를 위해 아래에 있다고 믿어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발을 보호하는 신발을 ‘신(鞋)’이라고 하잖아요. 필요할 때는 늘 우리의 발 아래에 있지만, 필요 없을 때는 따로 떨어져 있죠. 신을 찾고 신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에요. 신이 와서 우리에게 신겨주진 않거든요."

주인은 위로에게 반박했다.

"그런 억지스러운 비유가 어디 있어?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야."

그러면서도 주인은 위로의 말에서 한 가지 점에 갈등을 느꼈다. 만약 신을 믿는 자들이 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자기체면의 의지라면, 믿는 자들은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인가?

"나도 사실 신의 존재를 믿어. 하지만 맹목적인 신앙으로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나의 신성을 찾고 궁극적인 신의 성품에 닿고자 하는 거야. 나는 내 마음의 숲을 해치며 걸어가는 삶을 그리워하고 있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주인은 유혹의 의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급한 상황인데, 여러 신에게 매달리면 내 고통을 대신해 줄까? 여러 신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가 서로 시기하면 어떻게 하지? 그러다가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거야. 오직 한 신에게만 매달려야 하나? 아니야, 그것도 시간이 많을 때 하는 이야기지. 지금 나는 목마르다. 누군가에게 갈증을 대신 해결해 달라고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직접 내가 물을 마셔야 갈증이 해결되는 것 아닐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희망의 친구들이다. 그들이 나의 의식과 함께 동행하기를 바랄 뿐이야. 어떻게 하면 그들을 빨리 가까이할 수 있을까?’

주인의 복잡한 심경을 알아차린 위로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5

주인은 위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위로는 말했다.

"신을 유일한 한 님의 존재로 이야기하지만, 그 유일한 유아독존(唯我獨尊)은 각각의 유일함이 모여서 전체의 한 신을 이루는 것입니다. 신의 위대함과 유일함이란 모든 존재에게 공평하게 작용하며, 또한 평등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를 인정해 주고, 필요할 때는 늘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외부의 특정 신이 이루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스스로 신에게 다가가 신성(自神의 性)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위로는 이어서 설명했다.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의지를 믿는 것입니다. 의지는 본래 진면목(眞面目)이며, 신성(信性)입니다. 즉, 현재 내 마음의 궁핍함을 채워주는 그것이 나에게는 신이요, 행복이요, 삶의 본질입니다. 그 주체는 신성이 가득한 자기중심으로 도올한 전부일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위로의 이야기가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모든 감각과 신경이 수술을 하고 있는 그들의 손놀림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위로는 주인이 아직 뜻의 깊이를 헤매고 있다고 느꼈는지, 그의 갈등이나 질문에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위로는 주인에게 그가 좋아하는 목백일홍을 떠올려 보라고 했다.

"여름에 100일 동안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지는 나무, 배롱나무를 생각해 보세요. 나무가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은 혼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씨앗이 땅에 심기고, 땅 속의 거름, 물, 햇살, 바람, 벌과 나비들... 그 모든 조건들이 맞아 떨어질 때 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인연된 모든 존재들이 함께 모여 나무라는 존재로 인식될 뿐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보고 있는 그 나무는 단순히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우주 전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만약 그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나무는 물론 꽃도, 열매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조건에 의해 작용하면서 한 순간도 멈춤 없이 변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작용이 곧 신의 창조이며,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로는 주인이 꽃나무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주의 성령 속에서 각자의 주인공이며, 개체적인 신성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작은 주인공 하나하나가 모여 큰 하나인 우주 전체를 이루는 것이며, 인연된 모든 것이 참 자아(自我)인 나(本性)이자, 자신(自神)인 신성입니다."

"즉, 모든 존재의 어우러짐 속에 신성의 기운이 깃들어 있기에, 우리는 각자의 주체로서 신성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님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병과 치료의 능력도 본래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무엇을 버리고 의지하고 소원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이 되어야 합니다. 온전히 받아들이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로는 주인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지식과 분별의 벽을 허물기 위해 애썼지만, 주인은 여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위로는 잠시 그를 지켜보다가 다시 질문을 던지며 말을 이어갔다.

 

6

주인님은 지금 무엇이 두렵습니까?

죽음, 아니면 의사들의 실수, 현재 당신을 괴롭히는 고통, 혹은 앞으로 닥쳐올 불확실한 미래?

이 모든 것은 당신이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당신을 만듭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일부를 누구에게 맡기고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당신이 겪는 모든 것은 당신의 일부이며,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믿으며, 당신이 가야 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당신 스스로 신성한 희망을 품는 길입니다.

당신이 삶의 주체이며, 당신만이 당신의 문제를 결정하고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는 주인의 마음을 읽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혼자 사막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일신을 믿는 사람이었고, 신이 힘들 때마다 함께해 주신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험난한 사막을 걸으며 그는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신이시여, 이 험한 사막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기도를 마친 후, 그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발자국 옆에 또 다른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습니다. 그는 신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점 지쳐갔습니다. 태양은 뜨겁고, 목은 타들어갔으며, 몸은 한 걸음 내디딜 힘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그는 다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신이시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그는 또다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엔 그의 발자국 하나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순간, 그는 절망했습니다. ‘신도 결국 나를 버렸구나….’

실망과 배신감이 몰려왔습니다. 믿었던 존재가 힘든 순간 떠나버렸다는 생각에 그는 모든 희망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막에서 쓰러졌습니다.

죽음을 앞둔 그는 마지막으로 신을 원망하며 기도했습니다.

“신이시여!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그때, 그의 귀에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가 너무 힘들어 걸을 수 없을 때, 내가 너를 업고 걸었기에 발자국이 하나만 남았던 것이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끝까지 자신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위로의 목소리가 점점 주인의 가슴 속 깊이 스며드는 듯하더니, 어느새 평상심(平常心)이 다가와 조용히 충고를 건넸다. 주인은 이제 누구의 말도 담담하게 들을 만큼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7.

 “주인님, 당신은 몸을 너무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수술대에 오른 것도 벌써 몇 번째인지요.

몸도 사랑하고 보호받지 않으면, 심술을 부리듯 주인님을 겁주게 됩니다. 안거(安居)한다고 해서 몸이 온전히 주인님의 것이 될 순 없습니다. 그저 이 생에서 잠시 머물며 빌려 쓰고 있을 뿐이니까요.

그러니 몸을 소중히 여기며 건강하게 지내다가, 마침내 다시 제자리로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주인님이 해야 할 일 아닙니까?”

평상심의 충고에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몇 번이나 내 자신을 후회하지 않았던가. 성격을 탓하고, 부주의한 마음가짐을 반성하며, 어려운 순간마다 다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곤 했다.

고난과 역경은 늘 귀한 교훈이자 스승인데, 나는 그 가르침을 쉽게 놓쳐버리곤 했다.

주인은 자기 안에 함께하는 또 다른 자신들에게 조용한 감사의 마음을 보냈다.

저 멀리 석양의 노을빛이 잔잔한 파도를 이루듯, 평상심의 목소리가 주인의 넋두리를 밀어내며 귓가에 찰랑거렸다.

“수술 잘 되었습니다.” “이제 살만 집으면 됩니다.”

뚜벅뚜벅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 그리고, 맑은 눈빛 하나가 주인의 두 눈 속으로 스며들었다.

“기분이 어떠세요?”

몇 시간 동안 시험을 치르다가 마지막 어려운 문제를 풀고 나서 듣는 마침내 울리는 종소리 같았다.

주인은 내면에서 자유의지들과 싸우는 영화를 관람하다가 현실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언제 달려왔는지 모를 희망과 안도의 의지들이, 간호사의 목소리에 매달려 수술실 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