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은 대승 경전 가운데 가장 널리 그리고 많이 독송되고 있는 경전이다. 600부 반야부 경전 가운데 577권 째 해당되는 경으로 교상판석(敎相判釋)을 할 때 대승시교(大乘始敎)로 분류되는 경이다. 이 경에 의해 공사상이 천명되면서 대승의 교의가 시작되었다 해서 시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 경은 역대로 많은 연구가 계속되어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에서 지금까지 주석서가 나온 것만도 무려 2000여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금강경> 주석의 백미로 알려진 책이 다섯 사람의 소를 합본해 놓은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이다. 이 오가해는 <금강경> 공부의 필독서로 여겨져 온 책으로 선가(禪家)에서 특히 많이 애독해 왔다.
왜냐하면 이 오가해가 규봉의 찬요(纂要)를 제외하고는 모두 선리적(禪理的)으로 경문을 해석해 놓았기 때문이다. 저자를 연대순으로 말하면 중국 양나라 때 부대사(傅大士) 흡(翕, 497~569)이 지은 <금강경찬(金剛經贊)>이 가장 먼저다. 부대사는 남북조 시대를 살면서 그 당시의 사상적 배경 때문인지 <금강경>에 깔려 있는 공사상을 노장학의 입장에서 해석한 경향이 있다. 그는 양 무제(武帝)로부터 <금강경> 강의를 요청 받고 궁중에 들어가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경전이 놓여 있는 경상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가 아무 말 없이 경상을 후려치고 내려왔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당나라 때 육조 혜능(慧能, 638~713)이 지은 <금강경해의>는 일명 구결(口訣)이라고도 하는데 매우 간결한 구어체로 현학적 수식이 전혀 없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진솔한 표현으로 경문을 풀이하고 있다. 혜능은 <금강경>과 인연이 매우 깊은 스님이다. 그는 ‘장엄정토분’에 나오는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구절을 듣고 발심 출가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또 오조 홍인대사로부터 법을 전해 받고 육조가 될 때에 <금강경> 설해 받고 조사위를 얻었으며 그의 법문을 수록하고 있는 <육조단경>도 바로 반야바라밀다법을 설해 놓은 것으로 <금강경>의 대의를 그대로 담고 있다.
야보(冶父)는 경문의 구절에 따라 송을 읊어 놓았기 때문에 야보송이라고 하는데 먼저 착어(着語)를 붙이고 4구송을 읊어 경문의 뜻을 격외의 선지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설하고 있다. 그의 송은 모두 품격 높은 선시라 할 수 있다.
종경(宗鏡)의 <제강(提綱)>은 경문의 대의를 파악해 중요한 요점을 이끌어 내었다 하여 제강이라 했는데 경문에 숨어 있는 이치를 매우 압축적으로 설해 놓은 특징이 있다.
규봉(圭峰, 780~841)의 <찬요(纂要)>는 오가해 중 가장 긴 설명을 하고 있다. 경문의 해석을 과목을 나누어 자세히 하고 인도의 유식학파에 속한 무착(無着, Asanga)의 18주설과 세친(世親, Vasubandhu 혹은 天親이라 함)의 27단의설을 계승하여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주석을 하였다. 규봉은 중국 화엄종의 5조로 화엄의 대가이기도 하였고, 또 <선원제전집도서>를 지어 선과 교를 회통시켜 선교일치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찬요>는 모두 유식사상에 입각해서 경문을 해석 하였다.
이 오가해는 언제 어디서 편찬되었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송대 이후에 편찬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다만 우리나라 조선조 초 함허(含虛, 1376~1433)의 ‘서설(序說)’과 ‘설의(說誼’)가 부가되어 현재의 오가해본이 만들어진 것은 조선시대 초엽이다. 그리고 조선조 성종 때에는 <금강경삼가해>가 엮어졌다. 이는 오가해 중 야보의 ‘송’과 종경의 ‘제강’ 그리고 함허의 ‘설의’를 한데 묶은 것이다. 구마라습의 역본에 ‘송’과 ‘제강’을 맞추어 쓰고 ‘설의’를 붙여 국문으로 번역을 한 것인데 오가해 안에 있는 것을 별도로 떼어낸 것이다. - 지안스님/조계종고시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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