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융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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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융 2019. 7. 4. 08:11

 


"여백의 미를 갖춘 수묵화를 보듯, 절제의 미학

 

본지 편집위원이며 문 열면 밝은 세상으로법글을 연재하는 통융스님 <열면 밝은 세상> 시집출간

 

통융(대자비사 주지)스님이 개인시집<문 열면 밝은 세상>1000일기도 회향기념으로 출간했다. 스님은 지난 62일 대전 중구 문창동 오토바이 특화거리에 천일기도 발원회향으로 삼중 큰스님을 회주로 모시고 대자비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화가이며 시인인 통융(筩融, tong yung스님은 본명은 영섭(英燮)으로 아호는 率巨, 東三, 松雲. 법명은 性眞으로 인하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소나무그림과 글을 쓰기위해 <솔거가 그린 소나무를 찾아서>라는 전국기행을 하기도 했고, 신문사 초대전 등 5회의 개인전과 국내외 다수의 전시회를 가졌다. 1992년 시와 시인지로 등단하여 공동시집 <어우렁더우렁>, <차말사람들>등이 있다. 침묵의 성자인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의 영적 제자가 되면서 출가에 뜻을 두고 부해 범홍(梵弘)은사로 비구계를 받고 계룡산국제선원 무상사 등에서 참선 수행을 했으며 대전황룡 사포교원에서 불교대학과 참선 수행을 10년간 운영 지도하고 현재는 삼중스님이 회주로 계시는 대자비사 주지소임을 맞고 있다.

 

스님의 자서에 '나는 일찍부터 존재에 대한 의문을 많이 가졌다. 덕분에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학, 인도의 베다와 많은 정신적 수행자들의 가르침과 소리에 귀를 열고 기웃거렸으나 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침묵의 성자로 잘 알려진 바가반 슈리 라나마 마하리쉬(1879-1950)<나는 누구인가>책을 만나면서 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풀리기 시작 했다'고 밝히듯이 스님은 '그대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다른 것들을 이해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그대 자신을 이해했다면 달리 이해할 것이 뭐가 있으랴?' 며 세상에서 제일 수지맞는 일이 공부하다 죽는 것이다는 혜암스님의 말씀처럼 내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할 만큼 불법이 완전하고 불변한 진리라는 확신으로 늘 지금을 깨어 수행정진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대자비사 불교대학에서 참선 공부하는 법우들을 위해 만든 함께 행복한 자비행선(慈悲行禪)<Happy Together Mercy Meditation>을 나눔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나그네의 발목을 철컥!

봄비 전문

 

푸른 세월의 옷을 입고 벼랑위에 도올한 선사

늘 푸른 납자衲子 전문

 

저 달도 더운지 연못 안에서 목욕을 하네.

서 전문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이다. 스님의 시는 짧다. ()의 명료함처럼 혹은 일본의 하이쿠처럼 한두 줄의 시로써 우주를 품고 있는 확장과 긴장감 혹은 날카로움으로 깊은 묵상을 하게 한다.

 

"여백의 미를 갖춘 수묵화를 보듯, 절제의 미학이라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와 마음의 경계를 늘 아래로 하심 하는 본분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수행자로써 저자의 심성은 <문 열면 밝은 세상이 된다. 시집 속에 감추어져있다. 시를 발표하고 활동한지 30년 만에 첫 시집을 상제하게 된 통융스님은 언어가 갖는 최소한의 표현으로 먹과 화선지가 갖는 여백의 미를 갖춘 수묵화를 보듯, 절제의 미학을 전달하고 있다.

 

단순한 의사 전달의 수단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진리를 느끼게 하고 싶은 것이 시작(詩作)의도일 것이다. 화려한 장식이나 치장은 없다. 다만 순순한 언어의 뿌리를 살리려한 노력으로 묶은 통융스님의 시집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위안의 파문을 일으킨다.' 라고 스님의 시집에 대한 시평을 교보문고에서 평하고 있다.

 

시집의 내용을 크게 견,,,,,(見性行知思禪)6단락으로 나눴는데 글을 쓰는 동기나 대상 혹은 글의 길이에 따라 견()은 짧은 시로 자연 속에서 법을 보고, ()은 한 생각의 알아차림, ()은 길에서 만난 소식, ()는 한문 뜻시, ()는 일반적인 긴 시, 특히 선()은 선종의 대표적 공안집인 무문관(無門關)을 짧은 시와 덧말로 꾸미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스님이 현재 공부하고 있는 불법을 나타내 보이고 싶은 의도이면서 일구(一句)로 시집에서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선가(禪家)의 많은 선어록(禪語錄)에는 옛 조사들의 공안 1700여 가지의 화두(話頭) 중에서 핵심적인 공안 48(公案48)을 뽑아 중국 남송(南宋) 때 무문 혜개(無門慧開1183~ 1260)선사가 직접 염제(拈提), 평창(評唱)과 송()을 덧붙여 만든 책이 무문관이다. 스님이 참선 수행 중에 공안들을 참구하면서 그동안 적어왔던 생각들과 선방에서 혹은 선사들과 독참을 하고 화두점검을 받으면서 느낀 점들을 무문관 48칙에 짧은 견지(見知)로 읽혀내고 있다.

 

또한 스님은 이미 무문선사의 일구가 전체현전(全體現前)인데 뭘 또 말을 시끄럽게 하는가…….!' 하면서 무문관의 원문에서 평창은 빼고 짧고 명료한 시 구절인 송()만 실고 있다.

 

그리고 스님의 생각들을 <덧말>로 읽어 주고 있는데 '뱀에 발을 그리는 사족(四足)인 줄 알지만 납자가 공안을 참구하면서 읽혀진 생각들을 적어봤다. 아직은 미숙한 눈높이를 납자 스스로 더 잘 알지만 이러한 무모함이 공부하는데 하나의 죽비로 생각하여 용기를 낸 것'이라면서 '혹여 라도 선가(禪家)에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이것도 공부라 생각하여 용기를 내 봤다는 덧말을 붙이고 있다.

 

첨언하여 스님은 더러는 지나가버린 옛 조사들의 언구(言句)나 뒤적이며 그것에 집착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분들은 지금 깨어 있다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 못하고 단 지 언어적인 이해 즉 생각으로 지금과 과거를 나누며 분별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다. 깨닫지 못한 생각으로 깨달은 후의 마음은 절대 볼 수 없다.

 

선종의 공안은 비록 옛 조사들의 말이지만 지금 내가 그 선문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늘 현재 진행형이다. 질문하고 답하는 자체가 지금 성성하게 살아 있고 살아 있어야만 그 문처(聞處)의 핵심을 바로 꿰뚫어 확철히 깨달아 답(悉知悉見)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즉 불법(佛法)은 지극히 지금을 100%완벽하게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님은 개인의 시세계에 대해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며 시는 '나를 버리고 그러함(自然)이 되는 소식이라고 했다. 시는 언어로 된 자연이다. 가장 완벽하게 자연을 닮은 글의 씨앗들이 문장 속에 심겨서 새 생명을 잉태해 내는 것이다. 즉 자연의 질서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의 본성을 깨달지 못하고 쓴 시는 개인의 식견을 나열하는 넋두리일 뿐이다. 그래서 시는 지식(識見)의 산물(學文)이 아니라 인간 지식의 경계를 허무는 깨달음(,)의 결정체(本性)이다.

 

자연스러움이란 조작이 없이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바람소리, 문살에 기대선 햇살 같은 것이다. 그러한 소리의 언어를 법음(法音) 혹은 원음(圓音)이라고 한다. 그러한 소리는 시시각각 모든 사람, 식물, 동물들 각각의 언어로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원융(圓融)하다고 한다.

()라는 글자를 보면 말씀자에 절자로 절에서 쓰는 말이라는 뜻이다.

즉 절에서 쓰는 말이 선시(禪詩)이듯 시가 그런 언어이전의 함축적인 진면목(眞面目)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에 시는 짧고 명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스님은 수행자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와 마음의 경계를 늘 아래로 하심 하는 본분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 하지만 오랜 과거 전생부터 쌓아온 아상(我相)의 질긴 습()들이 불쑥 불쑥 말과 글을 내뱉어 놓고는 뒤늦게 후회하고 참회하는 후유증을 만들곤 한다며, 혹여 이번에 발표하는 시집 속에도 부족한 내 생각이나 어쭙잖은 주장들로 인해 보는 마음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언짢게 했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글 마음으로 인연된 귀한 스승님들과 시우들의 많은 조언과 지도 편달로 무거운 죽비를 내려 쳐 주시길 바랍니다.며 소회를 밝히고 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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