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임제록 마방서- 무비스님

통융 2019. 1. 1. 21:18


임제록(臨濟錄)
‘마방서(馬防序)’ 및 ‘행록(行錄)’ 강설


무비스님
(경전연구회 편+여여선당 편)




전법도량 염화실
http://cafe.daum.net/yumhwasil

무비스님 임제록(臨濟錄)
<마방서(馬防序) 및 행록(行錄) 강설>
차례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이 책을 쓰면서” ········································  3
『임제록 강의』“임제록 간행사” ·······················································  4

무비스님 임제록 (여여선당) 제1강 서문 ··············· ···························  5
무비스님 임제록 강의(경전연구회) 2  행록(行錄) ····························   12
무비스님 임제록 강의(경전연구회) 3  서문(序文) [馬防序]  ·············  40

“지금 이 순간이 진정한 삶이며 참다운 행복”[2008.1.12. 불교신문] ····· 68




⌦ 무비스님의 <임제록 행록 및 마방서 강설>은 인터넷 카페 염화실에 있는 ‘경전연구회 편’ 강의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여여선당 편’ 강의를 로 표시하여 삽입하였다.

⌦【인용 자료】
  ★ 무비(無比)스님 (? :『임제록 강설』, 불광출판사, 2005)
  ㆍ 야나기다 세이잔 [柳田聖山] (? :『臨濟錄』, 일지(一指)스님 번역, 고려원, 1988)

⌦  각주(脚註)에 관해서는 <전법도량 염화실>(http://cafe.daum.net/yumhwasil)의 ‘일반자료실’ 내에 있는 ‘자료실’의 159번 “《임제록》 편집”의 첨부 파일을 참고할 것.  柳田聖山의『臨濟錄』의 주해를 주로 인용.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
  불광출판사, 2005

이 책을 쓰면서

우리나라의 불교는 대부분 임제 스님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그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당연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오래된 사찰에 있는 비석을 살펴보면 거의가 다 임제의 몇 대 후손이라고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축원도 반드시 이렇게 한다. “빨리 이 땅에 돌아오시어 임제 문중에서 길이 인천의 안목이 되어주소서 (臨濟門中 未作人天之眼目).” 라고 한다. 임제사상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은 이렇게 크다. 그러므로 임제록은 조계종의 제1교과서며, 제1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라고 생각한다.
임제록을 만난 후로 필자의 걸망에는 오늘날까지 항상 임제록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1971) 겨울철 봉암사에서 지낼 때 서옹 스님의 임제록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 후 강의용 책을 직접 편찬하여 강의도 몇 차례 했다. 그리고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번역과 강설을 쓰고 싶었는데 이제사 그 빛을 보게 되었다.
사실 임제록을 강설하는 일은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붙이는 것이다. 혹이다. 머리 위에 또 머리를 하나 더 얻는 것이고, 멀쩡한 살을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는 일이다 '임제 할' '덕산 방' 도 죽은 송장이 눈을 부릅뜨는 일이라고 한다. 관우도 아니고 송장이 눈을 부릅떠 봐야 무슨 영험이 있겠는가. 하물며 되지도 않은 군더더기 소리로써 덧칠을 한 이 강설이야 말해 무엇 하랴.
임제 스님은 경전과 어록을 모두 똥을 닦는 휴지라고 하였다. 이제 필자는 그 똥을 닦은 휴지조각을 들고 무슨 국물이라도 나오려는가 하여 쥐어짜고 있다. 그리고 독자들 역시 똥이 묻은 휴지를 이리 저리 헤집고 있다.  혹시 덩어리라도 건질까 해서다. 그러다가 악취만 좀 맡아도 큰 다행이다.
명안도류(明眼道流)는 미진한 것은 보충해주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주기를 바란다. 세상은 점점 말세적 현상이 짙어가고 진정한 불법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줄어드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다. 오로지 불조의 정법이 널리 퍼지고 오래 머물도록 하는 데 일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 임제록 강의가 빛을 보기까지 크고 작은 인연을 함께한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여러 임제록 강의 청중들에게도 감사한다. 청화(淸華) 상인의 노고에도 감사한다. 모두들 임제 스님의 가르침에 의하여 대해탈 대자유를 누리어 나날이 행복한 날이 되시기를 빈다.

                              2004년 동안거 금정산 범어사 서지전에서                                   금정산인 如天 無比
해인사 개산 1200주년 기념 특강 經學院 2002년
어록의 왕 『臨濟錄講義』
강의: 무비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임제록 간행사

  우리나라에 선종(禪宗)이 처음으로 성립된 것은 신라 후기 도의(道義)스님이 중국의 마조(馬祖)스님의 제자인 서당 지장(西堂智藏)스님에게서 법을 받아 귀국한 후(821년) 가지산 보림사에서 그의 종풍을 드날리면서 부터입니다. 그 후 실상산문, 사굴산문, 성주산문, 희양산문 등 전국에 걸쳐 구산선문(九山禪門)이 벌어졌으나 고려말기에 이르기까지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자세한 관계는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육조 혜능(六祖慧能)스님으로부터 황벽(黃檗), 임제(臨濟)를 거쳐 원(元)나라의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년)스님에게로 이어지는 임제선의 정맥을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1년)스님이 이어 온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그 전통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불교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불교로 인정되며 조계종이란 바로 그 전통적인 선종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선종의 교전이라 할 『임제록』의 공부가 이웃나라에 비해서 너무나도 미약한 상태입니다.
  우리나라의 선불교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하여 평소에 『임제록』을 공부하면서 『임제록』 공부의 기본이 될 교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현토도 좀 다듬고, 바르게 읽기 위하여 자음을 달고, 행간도 넓게 하여 노트까지 겸하여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까이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 인연으로 한국 선불교의 발전이 더욱 가속화되어 명실상부한 선의 종주국의 깃발이 세계에 드날리게 되는 날을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임제스님의 付法偈를 소개합니다.

 흐름따라 머물지 않는 도리를 묻는다면
 참다운 관조는 끝없는 것이라 말해주리라.
 모습과 이름을 떠난 것은 본래 성품 없으니
 예리한 칼날을 쓰고서는 얼른 갈아 두어라.

 沿流不止問如何 眞照無邊說似他
 離相離名如不稟 吹毛用了急須磨

                                        조계종 교육원장 ․ 敎材 編輯人  無比  
무비스님 임제록 (여여선당) 제1강 - 서문 
 
번호 : 1   글쓴이 : 一輪月
 조회 : 407   스크랩 : 1   날짜 : 2006.07.27 15:10


   불교라고 하는 세계는 마치 산과 같고 바다와 같다고, 이런 표현을 가끔 씁니다. 평생 불교에 몸담고 불교의 세계가 어떤지 또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 어떤 것인지, 평생을  참구하면서 살아본 결과, 그야말로 이 불교의 세계라고 할까? 또는 부처님의 세계라고 할까? 이 세계는 바다보다도 넓고 깊고, 뜻 모를 저 드넓은 하늘과 같은 그런 느낌을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이제 받게 되는 것이 불교다.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불교의 세계를 산으로 우리가 생각한다 하더라도 이 산은 그 높이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아서 그 끝 간 데를 모르고 오르는 길도 아주 다양하고 그 산행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 많은지, 도대체 다 찾아볼 수도 없고 때로는 깊은 호수도 있고, 아주 가파른 그런 벼랑도 있고 반반하게 오르기 쉬운 그런 능선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이 목이 마르면 목을 축일 수 있는 맑은 샘물도 흐르고, 더울 때는 쉬어갈수 있는 그런 아주 시원한 그늘도 얼마든지 있고, 숱한 아름다운 기화요초(琪花瑤草)도 많은 그런 산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산이 가지고 있는 온갖 아름다움과 인간에 베푸는 유익함과, 그런 것 들을  우리가 많이 받으면서도 다 알 수가 없는 참으로 깊고도 넓은 경지가 이 부처님의 세계, 불교의 세계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곧 인간의 세계가 사실은 다종다양하고,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온갖 길이 많고,  한평생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 생을 살아가는데 어찌 그리  일도 많고 사연도 많고 문제도 많은지? 갖가지 숱한 우여곡절과 많은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는 인간의 세계, 바로 그것이 불교의  세계이고, 그기에 대응하는 거기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의 세계를 바람직한 길로 우리가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  펼쳐갈 수 있겠는가? 하는 그런 대응의 길이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의 세계가 넓고 깊고 끝도 없듯이, 부처님의 세계 역시 넓고 깊고 끝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곧 사람들의 어떤 삶의 문제를 위한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삶의 문제가 그만치 복잡하고 밑도 끝도 없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 또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무한한 불교의 세계에서 우리는 부처님과 인연을 각자 계기와 어떤 여건과 인연 따라서 접하게 되고 만나게 되고 해서 그 나름대로 불교와 인연을 맺고 이제 살아가는데, 그 또한 사람에 따라서 각양각색이고, 때에 따라서나  어떤  조건에 따라서나 자기가 만난 어떤 인연에 따라서나 천차만별이고 각양각색이죠.
   이를테면 가장 아주 비근한 예로 우리가 집안에 무슨 길흉사가 있다든지 할 때 그런 일로 인해서 이제 사찰을 찾고 부처님을 만나게 되는 그런 일들도 많죠.  그런 인연으로 해서 불교에 깊이 인연을  맺는 경우가 사실 상당한 수에 해당하고 엊그저께 시험을 치렀습니다마는 자녀들의 진학문제, 또는 사업의 문제, 건강의 문제 이런 걸로 인해서 그런 일들로 부처님과의 인연이 사실은 상당한 수에 달합니다. %로 따져도 아마 70∼80%되지 않을까?  하는 통계도 있죠. 그 외 달리 정말 순수하게 인생이 무엇일까? 인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한번 해결하고자하는 그런 뜻에서 성인의 가르침을 찾고 찾다가 부처님을 만난 그런 예들도 상당히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렇든 저렇든 우리가 불교와 인연을 맺고 보면 불교는 단순하지 않죠. 아주 다양하고 복잡하고 길이 많습니다. 앞서 말씀한 대로 단순하지 않죠.  기도 한 가지만 하더라도 별별 기도가 다 있고, 부처님하면 한 분뿐인 줄 알았는데, 불교세계에 들어와 보면 무슨 천불이니 만 불이니 삼천불이니 별별 부처님 이야기도 많고, 그 안에 부처님(佛敎)안에서 소개 되고 있는 성인도 어떻게 그렇게 많은지. 수많은 성인들도 이제 만나게 되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당면한 병고의 문제 진학문제, 이런 것들을 해결한다고 하는 길들도 수없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일반 신도들은 대개 그런 문제 때문에 부처님과 인연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그 작은 인연이라고 할까?  스치고 지나가는 한 순간의 그런 인연이지만 그것으로 통해서 불교에 깊이 아주 젖어들고 진정한 부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불교의 세계가 무엇인가? 를 이해하게 되는 그런 좋은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 또한 우리가 평소에 겪고 있는 일상사문제 해결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불교 안에서 그런 다양한 세계가 있는데, 그중에 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는 문제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요즘은 불교에  대한 정보도 쉽게 조금만 노력을 하면은 널리 알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었어요. 그래서 불교에 대해서 골고루 다  접해 볼 수 있는 그런 세상입니다.
   옛날 같으면 우리 스님들이라 하더라도 어느 사찰에 막 입산을 하게 되면 거기 사는 스님이 어디 데리고 다닌다든지 소개를 특별히 안 해주면 10년∼ 20년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그 한 사찰에서 그냥 세월보내기가 일쑤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신도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죠. 어느 사찰에 이렇게 적을 두고 다니게 되면  “우리는 대대로 이절에 다녀갖고 이 절에서 하는 것 밖에 모른다.”  하는 그런 아주 단순한 신앙형태로 살아가고 있는 그런 경우가 사실 적지 않았어요.
   그러나  요즈음은 조금만 눈을 뜨면 그런데서 다 벗어나고 불교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접해서 참으로 바람직한 불교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은 만약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잘못이에요. 조금만 자기마음을 연다면 얼마든지 바른 불교를  접할 수 있는 그런 길이 한껏 열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사실 대개 불교의 세계가 어떻다는 것 두루두루 모두 잘 알고 계신다고 간주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충분히 잘 알고 계시리라 믿고 해요.
   오늘 공부하려고 하는 임제록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다종다양한 불교의 그 드넓은 세계 속에서 참으로‘우리가 진정 불법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빼놓아서는 안 될 그런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다’라고 이렇게 결론부터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계시고 우리가 알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고 그 가르침이 좋아서, 그 가르침을 따르고,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고, 가르침을 배우고 전수하고 하는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니까, 오늘날 3000년이라고 하는 이 세월 동안 전 세계에 이렇게 펼쳐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역사 속에서 부처님을 도와서 부처님의 불교를 알리려고 하는 그 어떤 마음을 도와서, 많은 이들이 또 자기 공부와 아울러 아주 부처님 못지않은 훌륭한 가르침을 남긴 그런 이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그게 불교의 역사라는 거죠. 3000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동안 면면히 불교가 이어오면서 불교가 뭐 말세가 되면 쇠퇴한다. 어쩐다 하지만 갈수록 번창하고, 물론 그 당시처럼 아주 골똘히 공부를 깊이해서 도를 이룬 그런 이들은 드물는지 몰라도 일반화된 것은 천배 만 배 더 늘어났죠, 사실은. 처음에 다섯 비구 당신이 깨닫고 나서 다섯 사람(같이 수행하던 사람), 그 다섯 비구를 앉혀놓고서 당신의 깨달음에 대한 이치를 설명해 나간 것이, 오늘날은, 물론 세월도 많이 흘렀지만 전 세계 방방곡곡 사람이 제대로 사는 형태를 갖추고 사는 그런 나라에는 어느 나라든 불교 없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 정도로 널리 퍼졌고 그러다보니, 이 시대 정말 확실한 성자로써 그의 세계가 다 공인하는 성인을 꼽는다면 두 사람인데 그 두 사람 다 불교인이예요. 달라이라마(Dalai Lama)와 틱낫한(Thich Nhat Hanh; 釋一行)이며 망명인 입니다. 틱낫한은 월남 사람(스님)인데 그 분도 사실은 운동가로 출발해서 프랑스에 가서 선(禪) 센터[⇒ 매화마을(Plum Village)]를 차려놓고 불교를 전파하는 그런 훌륭한 스님인데 저절로 아주 훌륭한 스님으로 알려져서 두 분의 성자를 이 시대에 꼽는다면 불교계의 두 사람, 그 외는 별로 쳐주는 사람이 없어요. 이제 다른 종교 계통이라든지 다른 분야 사람은 쑥 들어갔어요. 그 두 분들이 특출한 분이 세상에 계시기 때문에 그와 같이 불교가 전 세계에 널리 퍼졌고 또 숱한 훌륭한 인물도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 오랜 세월과 넓은 지역을 흐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입문하고 수행에 골똘하고 그러면서 당신의 깨달음, 불교를 부처님 못지않게 전파한 그런 많은 이들이 있는데, 유독 동양 쪽 특히 중국 한국 일본 쪽에서 크게 말하자면 추앙하는 역대 조사 중에서 오늘 공부하려고 하는 <임제록(臨濟錄)>의 저자 임제 스님! 저술은 아니에요. 법문하신 것을 제자가 기록해서 하나의 책이 되었지, 당신이 책을 남기겠다고 어쭙잖게 글을 써서 남긴 그런 책이 아니고 그냥 법문하신 것을 기록해서 남긴 것이 책이 된 것입니다. 하여튼 임제록이라고 하는 것은, 임제스님이 의해서 남겨진 임제록은 임제스님이 물론 역대 어떤 선지식보다도 뛰어난 인물이었고, 그러한 인물이다 보니 그분의 가르침이 세월이 갈수록 빛을 발하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하는 사안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서구에서도 역시 불교를 좋아하면서도 특히 선불교(禪佛敎)라고 하는 것을 더욱더 높이 보거든요.  월남쪽 불교나 티베트 불교도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고, 널리 퍼져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순수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전한 선불교하고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거기는 미치지 못합니다. 불교의 내용으로 볼 때요. 불교 안에서도 근기에 따라서 다주 다양한 가르침이 펼쳐져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고준한 가장 높은 가르침이다 할 때는 가장 선불교를 꼽습니다.
   그 중에서도 임제스님의 선불교 사상은 누구도 감히 따를 수가 없고, 그래서 역대 큰스님들 도를 통한 이들이 다 임제스님의 법맥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고, 임제스님의 사상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그기에 어느 정도 걸맞아야 자신의 깨달은 법이 틀리지 않고 바르게 깨달았다 라고 하는 것을, 남이나 자신이 인정하게 되는 그런 정도로 임제스님은 우리 불교사에 특히 선불교사에 있어서 아주 우뚝하신 아주  드높은 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상당히 오랜 세월을 거쳐서 중국에 와서 불법을 공부해서 깨달음을 이루신 그런 분임에도 불구하고 임제스님의 산이 너무 높기 때문에, 불교역사에서 보면 임제스님 전에 물론 육조스님도 계시고, 임제스님 스승도 물론 계시며 달마스님도 계시죠.  그렇지만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면 임제라고 하는 높은 산이 서 있으니까, 그 산들은 임제스님의 높이에 가려서 빛을 잃고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불교를 공부하다보면 그런 임제스님의 높은 산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후로는 무조건 임제스님 산맥에 줄을 대는 거예요. 전부 임제스님의 가르침과 그 사상에 어느 정도 서로 대합이 됐다고 해야  선사라고 불교를 공부한 사람이라고 큰소리 칠 정도가 되었으니까. 임제스님은 얼마만치 불교계, 선불교 역사 속에서 높은 산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불교를 다양하게 공부해보면 저절로 알게 돼요. 널리 보지 아니한 신도님들은 뭐 그런 것은 아직은 실감하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마는 임제스님은 우리 불교 역사에서 최소한도 그런 분입니다.
   오늘 먼저 나누어드린 유인물을 잠깐 보면 임제스님이 그러한 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정법(正法), 전등계보(傳燈系譜)라 해서 법맥(法眽)에 관한 문제인데 세존(世尊), 가섭(迦葉), 아난(阿難), 28조 달마(達磨),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 육조 혜능(慧能), 남악(南嶽), 마조(馬祖), 백장(百丈), 황벽(黃檗) 해서 임제(臨濟).  부처님으로부터 치면 가섭 38조가 되고, 동쪽 중국으로 넘어와서 달마를 1조로 치면 11대 조사가 되고 그래요.  그렇게 칠 수가 있는데, 그런 것은 참고로 기록한 것이고, 흔히 임제스님 이후로는 임제 몇 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몇 대손’ 이 말을 잘 안 쓰고, ‘임제 몇 대손’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 밑에 보면 흥화(興化) 1세. 그 다음에 남원(南院)스님, 풍혈(風穴)스님. 풍혈스님하면 예를 들어서 임제로부터 3세손, 그렇게 해서 수산(首山), 분양(汾陽), 자명(慈明), 양기(楊岐), 백운(白雲), 법연. 그 외 다른 많은 도인들이 있고 조사스님도 계시지만 종손으로 치자면 그렇습니다. 월호, 호구, 응암, 밀암(密庵), 파암(破菴), 경산(徑山), 사봉, 설암(雪岩), 급암(及庵), 석옥(石屋)스님까지 임제 18대손 중국 스님입니다.
   우리나라에 오면 고려 초에 태고 보우(太古普愚)스님하면, 임제 19세손. 이렇게 해 버린다고요. 20대∼25대 그 다음 소위 청허(淸虛) 서산(西山) 스님이죠. 서산스님, 임제 25대손(臨濟25代孫),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우리나라 선맥[法脈]을 치자면 그런 식으로 내려오는데, 이와 같이 임제스님을 기점으로 해서 친다고 할 정도로 임제스님의 도력이라는 하는 것은 얼마나 위대하고 우리 불교 역사에 높은 산인가 하는 것을 족히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임제 몇 세손’ 이래 해버려요. 그래서 그 근거로서 한국선(韓國禪)과 임제선(臨濟禪)의 문제라고 해가지고, 1번 불실임제자(不失臨濟者)는, 임제스님의 법맥을 잃어버리지 아니한 사람은, 유본유원(有本有原)이라, 근본도 있고 근원도 있다. 임제스님의 정신과 사상을 공부한 사람은 말하자면 불교에서 근본이 있는 사람이다.
   근원법회를 비로소 잡아가는 거예요. 임제스님 공부를 하고 임제스님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그 사람이 불교에서 근본이 있는 사람이다. 이 정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동방(吾東方), 우리나라 동쪽 태고보우화상이 중국에 들어가서 석옥[石屋淸珙]스님의, 청공스님, 18대 스님에게 법을 이었다.  그래서 전지 한암스님께 전하고, 소원구옥스님은 벽계 정심선사에게 전하고 했다. 이렇게 했다. 편양 언기(鞭羊 彦機)스님 문집 제2권에 이런 명문이 있는 거죠. 이렇게 해서 임제스님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비로소 불교적인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가서는 태고보우스님이 중국에 들어가서 불지를 얻어서 (부처님의 정신) 동쪽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도사팔엽! 스님이 여덟 번째 이파리에 이르렀으니, 벽암스님을 말합니다. 법주사 비석에 이렇게 적혀있는데, 임제기 정종! 임제스님의 정종이다. 아주 바른 종통을 이어 받은 사람이다. 임제스님의 정신을 이어 받지 아니하고서는 선사로서 또는 선지식으로 행세 할 수 없었던, 그런 증거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로서 세 번째 부용영관스님이 저 임제지 임제스님의 끄트머리 예를 들어서 떡을 썰다 남은 꽁지정도를 유서라 해요. 겸손해서 하는 말이죠.
   임제스님의 최소한도 옷깃이라도 좀 잡아야  임제유설! 나머지 길을 접했으니, 두류와 청허(休靜)를 구사영관(俱事靈觀)하리라. 다 영관스님을 스승으로 삼았다 했는데 역시 쉽게 표현하자면 요건 이제 알짜배기는 놔두고 남은 (버리는 것)정도 바느질하고 실끄터머리 좀 남은 것 그런 정도란 뜻이다. 최소한 임제스님의 영향을 받아야 비로소 불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할 수 있다.
   벽암스님의 또 다른 비문에 전부 임제스님의 법맥을 이어야 비로소 선지식으로서 행세할 수 있다. 진정한 선지식이다. 그 증거입니다. 네 번째 태고보우스님은  석옥스님께 사 법을 이었다. 한암, 구옥, 정심, 지엄, 영관, 서산에게 전하니 청허(休靜) 차시 임제기 정맥!  “이것은 진실로 임제스님의 정맥이다.”  오직 서산(西山) 독득기종(獨得其宗)이라!   “홀로 그 종지 종통을 얻게 되었다.
   어쨌든 임제스님께 줄을 대지 아니하면 선지식으로서 명분이 없는 것이고 행세를 못하는 것입니다. 휴정스님의 비석에 적혀있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 임제 18 전이니 석옥하니 임제가 18번째 해가지고, 석옥 청홍 18대 석옥이죠. 되었으니 태고는 석옥지전을 얻은 것이다. 태고보우스님이 석옥스님 제자니까 19대 태고 보우 아닙니까?  육전이지오사(六傳而至吾師)하오니 여섯 번째 우리 스승에게 전해졌으니, 그 원류의 먼 것이 이와 같다. (청허스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태고스님부터 6번째는 20대∼25대(淸虛休靜) 맞는가 보세요! 여섯 번째 말하자면 역시 임제스님의 법을 전해 받게 되어서 그렇게 되었다.  대흥사(大興寺) 청허스님 비석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대흥사 가거든, 이 글 한번 찾아보세요. 맞나 안 맞나.
   임제 후 24세에 유적손왈부휴(有嫡孫曰浮休)니라. 부휴(浮休). 24번째 다른 종파죠. 약간 옆으로 한 건데 부휴 비(浮休 碑)에 있는 거위임제손(去爲臨濟孫)이로다. 구곡스님의 혈통은 임제의 손이 되었다. 그것은 목은의 시에 구곡(龜谷)을 곡하는 시. 구곡은 유명한 학자죠. 고려 말 조선 초 목은(牧隱; 화상, 학자)의 시에 그렇게 되어 있다.  그 밑에 가풍이 종지의 문제, 전부 임제가풍을 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깊이 알건 아니지만, 이와 같이 모든 한국불교의 법이 임제스님의 정신을 이어받았고, 임제스님의 정신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근본 뿌리가 형성되었다. 그러한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고, 이러한 임제스님의 사상과 가르침이 이만치 불교역사에서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마음속에 인식함으로써 임제록 공부가 충실히 되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을 합니다. 글자 한 자 한 자 그만치 중요하게 생각해야 된다는 거죠.
   일본의 유명한 선지식[⇒ 니시다 기다로 西田幾多郞]이 있었는데, 그 분이 2차대전에 말하자면 전 세계가 불바다가 된다고 하고  일본이 폭탄 투하 해가지고 일본이 다 타고 그럴 때 유명한 선지식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거예요.  “임제록 한 권만 남아 있으면 일본은 불 다 타도 괜찮다.”   “임제록 한권만 남아 있으면 일본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이런 이야기, 유명한 이야기 입니다. 참 대단한 가르침의 이야기죠. 일본 전체하고 또 안 바꿀 그럴 정도의 중요한 가르침이라는 거예요.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반기를 든 사람이 없어요.
   임제록이 얼마나 중요한 가르침인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분이예요. 임제록 한 권만 남아 있으면 일본은 다 타도 다시 일어설 수가 있다.  그럴 정도로 이야기를 했다니까, 그만치 임제록은 인간의 근본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참 생명인식. 문제를 여기서 들어내고 그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그런 내용.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뜻이죠.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진실생명 [참 生命]을 알고 있으면 그 나머지 꺼야 수천 년 문화역사 문화재 같은 것 값지죠. 물론 그것은 인간의 참 생명이 있으므로 해서 그것은 있는 것이고, 그것은 지엽적인 것이다 이겁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인간의 참 생명이 무엇인가? 올바른 이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그 외 역사에서 이루어 놓은 온갖 예술, 문화, 경제, 산업 이런 것은 인간의 참 생명과 비교해볼 때 아주 지극히 지엽적인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그런데 팔려서 살고는 있지만 팔려서 살고 있는 그 사람도 사실은 그 진실생명 때문에 그렇게 팔려 산다고 하는 것을 사실은 모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일깨워주는 한마디가 그 말이에요. 참으로 중요한 말이에요. 그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선(禪)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인식되어 있는데, 뭐 선화, 선서, 선무도, 선 체조, 선식이니 해서 나도 선식(禪食)을 하고 있지만, 콩하고 뭐하고 섞어서 만든 가루인데 시장에 가면 얼마든지 파는데 나도 선식한다 하니 근사해. 그런데 음식에까지 선(禪)이 들어와 있어요. 화장품 선전에도 1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서양에서는 선 화장품 그럴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런 것 못 봤어요. 서양에서는 일찍이 선에 대해서 심취해있어요.  요즈음 우리나라도 2∼3년 전부터 유행하던데 건축하는데 있어서도 젠(zen)스타일. 선(禪)스타일이라고 하는 것을 현대건설에서 그것을 선전하더라고 보면 꼭 그렇게 써놓았어.  아파트 선전[禪 스타일], 건축에까지 선(禪)스타일이 먹혀들어요.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선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일상생활에 활용될 수 있는지 없는지 우리가 공부하면서 이해할 문제입니다마는, 선의 정신. 그것을 간소하게 처리했다고 할까. 그림 같은 것도 그래요. 선화(禪畵). 지저분한 것은 없죠. 거의 일필시집! 한번 그림으로 해서 정신이 모든 스며있는 것을 뜻하듯이 건축에도 간결하고 간소하고 단순하고 간결한 아름다움을 대개 강조해요. 그 외 간결하면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이젠 많이 갖는 것 보다 간소, 단순하게 복잡하게 해서 편리하면 좋지만 그러다보니까 어수선하고 그런 거야. 대개 선방에 가면 방석 1개 놓여 있고, 가사는 벽에 딱 걸려있고 그 외는 없고요. 시계도 방에 안두고 마루에 걸어요.
   아주 간결한 아름다움을 흔히 선(禪) 스타일이라 이렇게 표현합니다. 선의 정신, 불교의 근본정신이 음식에까지 건축, 체조, 무술 선가일여 …. 깊이 스며들어 있을 정도로 선의 정신은 그만치 일반화되었고, 요즘 사람들이 숭상하는 그것이 곧 불교에서 나온 그런 정신이고, 그런 정신을 많은 분들의 깨달음을 통해서 가르침을 펼쳤지만 그 중에서 임제스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접해보는 기회를 가졌다. 이렇게 말씀 드릴 수가 있습니다.
   어록(語錄)의 왕이다.  많은 어록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경(經)이라고 하지만 그 외 부처님의 제자들이 당신의 깨달음을 피력한 내용들을 흔히 어록이라 그래요. 그런 어록들이 부처님 경전보다 양이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역사가 깊고 사람이 더 많으니까. 그중에 부처님 못지않게 높이 깨달은 분들이 수없이 많으니까요. 그런 이들이 남겨놓은 저술, 법문이랄까 이런 것들이 더 많을 수밖에 없어요. 훨씬 많아요. 경전보다 어록이 그 중에서 왕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임제록은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진실한 의미 깊은 뜻, 이것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느냐 못하느냐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이지요.
무비스님 임제록 강의(경전연구회) 1


  4∼5년 전에 서울 불교 강당 인연으로 여러 스님들과 잠깐 공부를 했는데 그 인연이 또 이렇게 발전이 되어서 오늘 여기서 스님들과 또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6개월간 한 달에 한 번씩이지마는 스님들을 뵙게 되고 또 특별히 우리 종조 중에서 가장 우뚝한 산이라고 할 수 있는 임제스님의 어록을 가지고 여러 스님들과 함께 공부하는 그런 아주 값지고 소중한 시간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   


무비스님 임제록 강의(경전연구회) 2 ---행록(行錄)


  참 다양한 인연으로《임제록(臨濟錄)》을 우리가 앞에 놓고 글쎄요. 몇 퍼센트나 임제 스님의 정신에 근접할까? 이건 물론 저 자신도 의문이고, 우리의 과제니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우리가 가까이 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이 이 말세에 참으로 다행 중에 다행이 아닐까 하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조상으로서 위대한 임제! 또 우리 조상 중에서도 참으로 중요한 조상이구나 하는 그런 의식을 나름대로 여러분들께 내가 인식을 시켜드렸습니다.

또 임제록을 공부하는 데는 복잡하게 난자(難字) 찾고 행상 외우고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청천백일에 날벼락 치는 식이니까 그냥 되면 좋고 안 되도 그만이고. 이런 공부예요. 그러니까 편안하게 마음 턱 놓고 어쩌다가 어느 그물에 걸리면 다행이고 아니면 다음 그물 기다리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편안한 공부를 하시자구요.


行錄
행록


行錄
행록

《 세 번 묻고 세 번 맞다 》


師初在黃蘗會下하야 行業純一이어늘 首座乃歎曰
사초재황벽회하     행업순일       수좌내탄왈

雖是後生이나 與衆有異로다 遂問  上座在此多少時오
수시후생     여중유이     수문  상좌재차다소시

師云 三年이니다 首座云 曾參問也無아 師云 不曾參問이니
사운 삼년       수좌운 증참무야무   사운 불증참문

不知問箇什麽오 首座云 汝何不去問堂頭和尙호되
부지문개십마   수좌운 여하불거문당두화상

如何是佛法的的大意오
여하시불법적적대의

  임제 스님이 처음 황벽 스님의 회하에 있을 때 공부하는 자세가 매우 순일하였다.
  수좌 소임을 보는 목주(睦州)스님이 찬탄하여 말하기를,
  “비록 후배이긴 하나 다른 대중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묻기를, “스님이 여기에 있은 지 얼마나 되는가?” 
  “3년 됩니다.” 
  “공부에 대하여 물은 적이 있는가?”
  “아직 묻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방장 스님을 찾아뵙고 ‘무엇이 불법의 분명한 대의입니까?”하고 묻지 않는가?”


  임제 스님은 어떤 수행을 어떻게 했는가? 이것도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도 저는 다른 데서 끌어와서 하려고 안 합니다. 시간은 빨리 가고 공부해야 할 것은  많은데 우리 임제록에 있는 것 59쪽 행록을 보면 이게 행장이거든요. 행록이라는 것이 행장을 좀 더 자세히 쓴 내용인데 이걸 보면 뒤에 가서  순서대로 물론 하겠습니다만 임제 스님이 어떤 공부, 어떤 수행을 지어 왔는가? 그리고 또 어떻게 깨달았는가? 이것을 제대로 임제록에 근거해서 알아야 정말 잡티가 섞이지 않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대개 생애를 이야기 하는데 소설처럼 길게 써놓고 뒷사람들이 살을 붙이고 하는 것을 보면 또 왜곡 된다 구요. 그래서 가능하면 오리지날 그대로, 우리가 접할 수 있으면 그대로 접해가지고 그것을 우리가 얼마나 소화를 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인데 그건 각자의 몫이고.  그래서 행록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 묻고 세 번 맞다” 그랬어요. “삼도발문(三度發問)에 삼도피타(三度被打)” 유식한 말로 하면 그런데 이게 《임제록》공부의 전부입니다. “세 번 묻고 세 번 맞다” 세 번 물었는데 세 번 얻어맞았다 이거야!

師初在黃蘗會下하야 行業純一이어늘 首座乃歎曰
사초재황벽회하     행업순일       수좌내탄왈

 임제 스님께서 처음 황벽회하(黃蘗會下)에 계셨는데 ‘행업(行業)이 순일(純一)이다’ 

이 소리 한번 들어 봤으면 좋겠어요. 아, 그 사람 참 공부하는데 아주 순일(純一)해. 시종일관 똑 같애. 2년간 여기 경전연구회 했는데 한 번도 안 빠지고 참 아주 시간도 잘 지키고 일찍 와서 미리 방석도 깔고 정리도 하면서 참 잘해. (웃음) 그 소리! 그 정도만 해도 행업이 순일이라고 할 수가 있지.

그런데 이 스님은 본래 경학을 여러 해 공부를 했어요.
경학을 여러 해 공부하다가 황벽 스님께 와 가지고는 본래 천재성을 가지고 경학을 공부하신 분인데도 도대체 답답해. 불교가 뭔지 답답해 죽겠어. 그래서 그 답답한 마음, 불교를 알고 싶은 마음, 불교가 뭘까? 불법(佛法)이라는 말이 나와요. 지금은 우리가 ‘불교(佛敎)’ 라고 합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불법(佛法)’ 이렇게 했어요. 불교라고 하는 말은 불과 몇 년 안 됩니다. 100년 안 돼요. 그것 아셔야 됩니다.

100년 전만 해도 불법이라고 했지 불교라는 말은 안 썼어요.  이것 일본 사람들이 와 가지고 종교를 분류할 때 불교, 불교 이런 말을 썼어요. 물론 화엄경에도 불교,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말은 나옵니다마는 일반적으로 종교의 하나로서 불교라는 말을 쓰다 보니까 그만 그렇게 되었지 본래는 불법이야. 나는 그걸 요즈음 우리의 성향에 맞도록 그냥 불법이나 불교나 똑 같이 씁니다. 똑 같이 이해해야 됩니다.

그래 불교를 그렇게 공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답답해서 황벽스님이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고 무조건 황벽스님의 회하에 왔어. 3년이 지나도 끙끙거리고 그냥 답답하기만 했어요. 무슨 화두를 들거나 염불을 하거나 경을 외우거나 하나도 안 했어. 그냥 답답해.  어찌 할 바를 몰랐을 뿐이라. 제가 임제 스님 속을 들여다보지는 못했지마는 내가 파악하기엔 대개 그래요. 임제 스님은 무슨 공부를 했나? 아니면 석가모니는 실지로 무슨 공부를 했나? 뭐 12인연을 깨달았느니 어쩌느니 그런 소리도 있고 별의별 이야기 다 있죠. 중도를 깨달았느니  뭐 별의별 이야기 다 있죠. 하나도 맞는 말 아닙니다. 모르는 거예요. 무슨 공부 했는지 몰라.

12인연은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모든 존재의 순차적인 관계성을  나중에 정리하신 거지. 12인연을 관해가지고 깨달았다. 물론 아함부에 그런 설(說)도 있어요. 그런데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몰라. 임제 스님도 염불을 한 것도 아니고 화두를 든 것도 아니고 비파사나를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임제 스님을 알기에는 그냥 답답해서 끙끙댔을 뿐이야.  그동안 경전을 수 없이 봤는데도 불교가 뭔지 모르겠어. 경에 이래 이야기 해놓고 저래 이야기 해 놓고, 근기 따라서 방편 따라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해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거든. 이 사람에게 이런 소리하고, A라는 사람에게는 A에 맞는 이야기하고, B라는 사람에게는 B에 맞는 이야기 하고, C라는 사람에게는 전혀 두 사람에게 이야기 한 것 하고는 전혀 당치도 않는 소리 또 해 놨거든.

이게 불교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어. 그럼 무엇이 진짜 불교일까? 그저 그 생각 하나 가지고 3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잠도 못자고 끙끙댔어. 그런데 워낙 골똘해. 골똘하니까 “행업이 순일하다” 고 탁! 점 찍힌 거야. 대중들에게 딱! ‘아, 저 사람은 뭔지 모르지만 아주 지독한 공부 꾼이다.’ 요렇게 인식이 된 거예요.

목주스님이 그 당시 수좌였었는데 수좌 눈에 뛴 거야. 수좌는 대중들을 이렇게 살펴가지고 소임도 맡기기도 하고 또 선지식, 방장스님께 데리고 가서 지도도 받도록 안내도 하는 그런 소임 자가 수좌거든요. 그 당시 수좌 소임을 받든 이는 목주 스님입니다. 누가 되었든지 그 까짓것 사실은 알 바도 없어요. 상당히 칭찬을 하면서 혼자 스스로 찬탄을 하면서 말하기를

 스승 사(師). 왜냐하면 기록한 사람이니까, 기록한 사람이 썼으니까, 제자가!  임제스님의 제자가 기록을 했으니까, 자기 스승을 뭐라고 표현 하겠어요. 대(大) 임제라고 쓰기도 그렇고 해서 스승 사(師)자 하나로 표현합니다.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의 회하(黃檗會下)에, 황벽스님의 회상에 있었다, 처음에, 행업이순일(行嶪純一)이라, 행업(行業)이라고 하는 말은, 선원생활이 선방에서 공부하는 그런 행동거지가 아주 순수하면서 순진해! 그대로 밥만 먹으면 참선하고 밥 먹고 그저 오직 그 뿐이라!  옆도 돌아보지 않고 누구하고 잡담하는 적도 없고 그렇게 아주 올 곧게 수행을 잘했다 이거야!  괜히 기도하러 가 갖고 내∼ 잡담만 하고 시장 돌아가는 이야기나 하고 그리고는 몇 시간 있다가 쑥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기도만 하지 옆도 안 돌아보고 말 한마디 안 떼고 순수하게 하는 그런 경우를 행업이순일(行業純一)이라 그럽니다.  임제스님의 선방 생활이 그랬다는 거예요. 
  수좌내탄왈(首座乃歎曰), 수좌는 목주스님인데 그 당시에 수좌, 이것은 소임 이예요.  선방에서 제일 밑에 사람을 지도하는 사람은 수좌입니다.  조실은 황벽스님이고, 대중을 관리하고 지도하고 하는 사람이죠. 이 사람은 공부를 잘 한다 못한다, 이 사람은 저기 조실스님께 가서 점검받게 해야 되겠다, 아니면 자기가 어느 정도 이렇게 가르쳐야 되겠다 등등 그런 책임을 진이가 수좌인데 목주스님입니다.

雖是後生이나 與衆有異로다
수시후생     여중유이    

 비록 후생(後生), 아주 새까만 후배이지마는 ‘여중유이(與衆有異)로다’ 대중들 하고는 영 달라. 보니까 다르다고. 그 공부하는 모습이 영 달라.

   수좌내탄왈(首座乃歎曰)이에,  아주 찬탄해 말하기를 수시후생(雖是後生)이나,  비록 후배이지만 이제 선방에 늦게 온 사람이지만은
  여중유이(與衆有異)이다.  대중들과 더불어 다르니이다.  딴 대중하고 다르다 이거야,  공부하는 태도가 벌써 달라.  대개 어디가도 그래요.  뛰어날 사람은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벌써 공부하는 자세가 틀려요.  그래야 뭐 남다른 공부를 하지,  남하고 똑 같아 가지고야 남  달라 질수가 없는 거죠.  여중유이(與衆有異)이다, 대중들과 더불어 다르니이다.  그래서 이제 가만히 살펴보니 그렇거든
  보통 중국의 총림의 대중이라고 하는 것은 무려 500명, 700명, 1000명, 2000명, 3000명 까지 한 사찰에 그렇게 살아요. 그런데 누가 어떻게 사는지 제대로 눈에 뛸 수가 없다 구요. 그런 데 워낙 철저히 잘 하면 수좌 눈에 뛸 수가 있겠죠.  3년 만에 뛰었다는 거예요.  여기에 보면 그래서 수좌가 물었어요.

遂問  上座在此多少時오
수문  상좌재차다소시

그래서 묻기를 ‘상좌재차다소시(上座在此多少時)오’ 상좌가 여기 온지 얼마나 되었느냐?

  그래서 수좌가 물었어요. "상좌재차다소시(上座在此多少時)오". 상좌가 여기에 있은 지가 얼마나 되었느냐?   다소시(多少時)오,  얼마나 되었느냐?  그러니까

師云 三年이니다
사운 삼년      

3년 되었습니다.

 이제 임제 스님이 있다가, 사운(師云), 삼년(三年)이니다,  3년 되었습니다.  이 선방 와서 공부한지가 3년이 되었다. 중이 맞대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예요.
  임제스님은, 다른데서 경학을 오랫동안 봤어요.  많이 봤습니다 경학을,  아주 본래 유를 10년 공부하고 경을 보고 이제 선방에 간다.  이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최소한도 10년에서 15년 이상 경전을 봤다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불교에 대한 그런 교리적인 것, 이론적인 것은 환히 꽤 뚫고 있는 그런 상태에서 이제 선방에 와 가지고 3년 되었다 이거야, 수좌가 말하기를

首座云 曾參問也無아 師云 不曾參問이니
수좌운 증참무야무   사운 불증참문
 
수좌가 그러면 방장스님께 가서 한번 질문이라도 했느냐? 참문이라도 했느냐? ‘불증참문(不曾參問)’ 일찍이 참문하지 못했습니다.

 증참문야무(曾參問也無), 참문(參問)이라고 하는 말은, 가서 물었느냐?  공부에 대해서 조실스님한테 가서 물은 적이 있느냐?  이렇게 물었어요.  사운 불승참문(師云 不曾參問)이니다.  한 번도 가서 물은 적이 없습니다.  아니!  3년이나 선방에 와서 살면서,  보아하니 그리 공부도 잘하는 것 같은데 왜 가서 공부에 대해서 묻지를 않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런데 묻지를 않았는데

不知問箇什麽오 首座云 汝何不去問堂頭和尙호되
부지문개십마   수좌운 여하불거문당두화상

그런데 난 뭘 물어야 하는지도 몰라서 가서 묻지도 못했습니다. 그냥 답답할 뿐이다 이거야. 그건 내 소리고. ‘답답할 뿐이다’ 하는 것은... 그래 수좌가 말하기를 ‘여하불거문당두화상(汝何不去問堂頭和尙)’ 당두화상은 방장스님 혹은 조실스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부지문개십마(不知問箇什麻)오" "어떻게 물어야 할지를 몰라서 그랬습니다”  "어떻게 물어야 할지 내가 모르겠습니다.”  그냥 내 나름대로 끙끙대고 공부만 했다 이거야, 그러니까 아∼ 수좌운(首座云), 수좌가 말하기를
  여하불거문당두화상(汝何不去問堂頭和尙), 당두화상이라고 하는 것은 (큰스님, 방장스님,  선지식스님 말하자면 황벽스님입니다 여기서는) 당두화상!  방장스님께 가서 왜 묻지를 않았느냐? 

如何是佛法的的大意오
여하시불법적적대의

‘여하시불법적적대의(如何是佛法的的大意)' 이것이 우리의 화두이고 이것이 우리의 과제이고 이것이 우리의 숙제 아니냐 이거야. 이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숙제예요.

그때나 지금이나 부처님 당시 제자들이나 똑같은 우리 불교의 뜻있는 사람들의 숙제는 한결같이 불교가 뭐냐? 불법이 뭐냐? 하는 것이 숙제입니다. 이게 화두이고요. ‘그래 그것 질문하면 될 것 아니냐? 우리는 불법 알기 위해서 와 있으니까!’ 아주 평범한 이야기예요. 이것 ‘불법적적대의(佛法的的大意)’ 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될 것 아니냐!  ‘아, 그래요? 그러면 나도 가서 질문을 하지요.’ 이렇게 하고

 가서 이렇게 물어야 된다. 가서 물으려면, 여하시불법적적대의(如何是佛法的的大意), 어떤 것이 불법의 적적대의냐?  명확한 대의냐?  불법대의!  불법의 대의가 과연 무엇이냐?  이것이 중요한 것 아니냐?  그거 알려고 너가 여기와서 공부하는 것이고, 모든 불자는 승속을 막론하고 모든 불자는 전부 그게 숙제다 이거야, 그게 과제다.   불법대의가 뭐냐 이거야,  기도도 그것 때문에 하는 것이고 참선도, 경전공부도 그것 때문에 하는거야, 원래의 뜻은 그렇습니다. 원래의 뜻은
  불교적인 모든 그 행위는 이 문제 하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불법 대의가 뭐냐?  정말로 불법이 뭐냐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그래 가서 어떤 것이 불법의 적적대의냐?  명확한, 분명한 대의냐, 불법대의라해도 좋고 불법적적대의라해도 상관없어요.  불법의 명확한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해서 물으면 되는데 왜 그걸 안 묻느냐?  그거 아는것이 모든 수행자의 큰 화두이고 큰 과제이고 큰 문제 아니냐,  이 문제 밖에 더 있느냐 이거야, 불법의 대의가 무엇이냐?  불법대의가 무엇인지 그거 아는 것이  모든 수행자 또는 모든 불자의 화두이지 뭐 딴 것이 있느냐!  그래서 가서 그대로 물었어요.  어떤 것이 불법대의냐고 하니까


師便去問한대 聲未絶에 黃檗便打하다
사편거문     성미절   황벽편타

師下來에 首座云 們話作麽生고 師云
사하래   수좌운 문화자마생   사운

某甲問聲未絶에 和尙便打하니 某甲不會니다
모갑문성미절   화상편타     모갑불회

首座云 但更去問하라하니 師又去問이라
수좌운 단갱거문         사우거문

黃檗又打하야 如是三度發問하고 三度被打하니라
황벽우타     여시삼도발문     삼도피타

師來白首座云 幸蒙慈悲하야 令某甲問訊和尙하야
사래백수좌운 행몽자비     영모갑문신화상

三度發問에 三度被打니다
삼도발문   삼도피타    

自恨障緣으로 不領深旨하니 今且辭去하노이다
자한장연     불령심지     금차사거       

首座云 汝若去時에는 須辭和尙去하라 師禮拜退하니라
수좌운 여약거시     수사화상거     사예배퇴

  임제 스님이 바로 가서 물으니 묻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벽스님께서 대뜸 후려쳤다.
  임제 스님이 내려오자 수좌가 물었다.
  “법을 물으러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내가 묻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상이 느닷없이 때리니 저는 알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가서 묻도록 하게.”
  임제 스님이 다시 가서 물으니, 황벽스님이 또 때렸다. 이렇게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다.(三度發問 三度被打). 임제 스님이 돌아와서 수좌에게 말하였다.
  “다행히 자비하심을 입어서 제가 큰스님께 가서 불법을 물었는데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습니다.”
  “장애로 인하여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한탄하고 지금 떠나려 합니다.”
  “그대가 만약 떠나려거든 큰스님께 가서 하직 인사나 꼭 하고 가게.”
  임제 스님은 예배하고 물러났다.


師便去問한대 聲未絶에 黃檗便打하다
사편거문     성미절   황벽편타

임제 스님이 여기서 사(師)자는 임제 스님을 지칭합니다. 임제 스님이 가서 곧 묻되 ‘스님, 어떤 것이 불법적적대의(佛法的的大意)입니까?’ 여기의 적적(的的)이라는 말에 또 걸리지 마세요. 명확한  것. 불교가 하도 어지러우니까 이놈의 불교가! 그러니까 정말 명확한 불교가 뭐냐? 이 말이 예요. 적적(的的)이라는 말이 적확(的確)이라고 하는 말 간혹 보면 쓰지요? 적확! 아주 딱 정곡을 찌른 바로 그것. 정답! 그래서 그런 것 다 빼버리고 군더더기 없이 불법 대의(佛法 大意)가 뭐냐? 라고 물었어요.

‘불법의 대의가 무엇입니까?’ 라고 하는 질문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황벽스님이 곧 편타(便打)라, 곧 두들겨 팼다. 그런데 몇 대를 때렸다. 힘을 얼마나 주고 때렸다. 어디가 터졌다. 이런 소리는 안 나와 있어. 다른 기록에 의하면 황벽 스님의 평소의 습관상 20방망이를 친데요. 보통 주장자를 가지고 사정없이 20 방망이를 후려치는데 이 편타(便打)라고 하는 말 속에 20 방망이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 우직하잖아요. 도를 논하는데 무슨 머리가 터진다. 뭐 다리가 부러진다. 이런 것 생각하고 염려해서 때리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전혀 염려 안 해요. 다리가 하나 부러지든 목이 날아가든 그 사람이 그 이치를 깨달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공자의 말이기는 하지만 ‘석사라도 가라’ 아침에 도를 알면 저녁에 곧 죽어도 상관없으니까.

전번에 스님들이 공부하신 <선요> 고봉스님과 제자와의 관계도 상수제자 이름이 뭐죠? 준공스님! 준공스님 다리가 부러졌다구요. ‘내가 말이야. 사관에 올라와서 더 이상 안 내려가겠다고 하는데 네가 자꾸 꾸역꾸역 올라오느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는데 사다리를 밀어 버린 거야. 사다리를 밀어버려.  어떻게 되겠어요? 사다리를 다 올라 왔는데 밀어버렸으니까, 이 집보다도 더 높은데... 그렇게 사정없이 떨어지기도 하고. 나가려고 해서 미처 나가지도 않았는데 문을 확! 밀어버려서 다리가 부러지는 경우도 있고 도인들은 그렇습니다. 도만 눈에 보일 뿐이지 그 외의 것은 눈에 보이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황벽 스님이 임제 스님을 두들겨 팬 것도 역시 마찬가지야. 20 방망이를 때렸다. 그러면 왜 때렸느냐? 불법대의를 물었는데 이게 답이야. 이게 답이라고. 사실은 물은 것도 불법대의의 답이야. 묻는 그 자체부터 답이라고. 묻는다는 사실, 묻는 그 일, 그 행위 그것이 이미 불법대의거든요. 그러한 불법대의를 안고 와서 불법대의를 물으니까 좀더 쌘 불법대의를 보여준 거야. 이렇게 하면 네가 알까? 어느 것 하나 불법 아닌 것이 없으니까. 몸으로 참으로 구체적으로 불법을 보여준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가 되어야 됩니다.

“삼도발문(三度發問)에 삼도피타(三度被打).” 이런 식으로 세 번 묻고 세 번 얻어맞았는데 이것이 임제 스님의 불법 전체이고, 이것이 그토록 앞에서 살펴보았던 우리 선조들을 참으로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부러워하고 동경하는 임제의 가풍입니다. 바로 이것이 임제 스님이 보인 불법이 예요. 여기서 우리가 얼마만치 가슴에 와 닿느냐 하는 것. 이 과정만 남았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건 그것뿐입니다. 묻는 사실이 불법이야. 또 황벽스님이 방망이로 때렸는데 때리는 그 사실이 불법이야. 방망이로 안 때려도 불법이야.

부처님은 꽃을 들어 보였어. 구지 화상은 손가락을 들어보였어. 여기 조금 있으면 ‘할’이 여러 번 나와요. 고함을 쳤어. 그게 같은 것입니다. 하나도 다른 게 아니예요. 꽃을 들어 보인 것이나 손가락을 들어 보인 것이나 ‘할’을 한 것이나 방망이를 후려친 것이나 거기에 뭐가 있어. 그 사실! 그동안 우리는 불교 상식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아, 그것은 우리 마음이야.  삼계유심(三界唯心)이 만법유식(萬法唯識)이야’ 뭐 이런 식으로 또 풀어 나가겠지. 이렇게 풀어나가면 진짜를 만나기가 상당히 어려워져. 그런데 우리가 그런 상식이  풍부한데 그렇게 또 풀어나가지 않을 수가 없는 거야. 이게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고 곤란한 일이야.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꽃을 들어 보인 것. 손가락을 세워 보이는 것. 방망이로 후려친 것. 뭔가 거기에 있긴 있는데, 있는 것을 짐작은 하는데 그동안 우리가 배운 지식이 많아가지고 계속 수학 문제 풀듯이 풀어나가는 거야.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회전을 하고 있고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 그대로 맞고 그대로 때리면 혹 알 수 있는 확률, 눈을 뜰 수 있는 확률이 상당히 높은데 우리는 거기서 벌써 풀기 시작하고, 사량 분별하기 시작하고 계산하기 시작하고 이러는 거야. 그래서 진짜를 알기가 참으로 어려워요.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꾸 천착(穿鑿)하는 것뿐입니다. 자꾸만 종이가 뚫어지도록 눈으로 보고 입으로 외우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수 천번 할 이야기니까. 화엄대지가 뭐죠? “통만법(通萬法) 명일심(明一心)”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지요. 임제록의 대지는 뭐냐? “삼도발문(三度發問) 삼도피타(三度被打)” 그렇게 아세요. 세 번 묻고 세 번 맞은 것이 임제록의 대지다.

 그래서 가서 그대로 물었어요.  어떤 것이 불법대의냐고 하니까
  성미절(聲未絶)에, 어떤 것이 불법의 적적대의 입니까 라고 하는 소리,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말 황벽편타(黃檗便打)라!  황벽스님이 곧 방맹이로 때렸다 이거야!  방맹이로 때렸는데 이건 그래 한번 딱 때리고 만 것이 아니라 그러면 싱거워서 안돼죠.  아프면 얼마나 아프겠어요.  무려 스무 번을 내려 쳤다고 그렇게 되어있어요. 스무 번이나,  그러니까 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죠.
  선지식들이 때릴 때 인정사정 보고 어디 다칠 거다 어디 깨질 거다 이런 거 생각하고 때리는 것이 아니예요. 그냥 사정없이 후려치는 거예요.  그래서 고봉스님의 제자 준공스님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고봉스님은 사후방에 들어가 있는데 밑에는 사다리를 놓아야만 겨우 올라갈 수가 있어요. 그런데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는데 이 고봉스님이 사다리를 밀쳐버렸어요.  그래 중간에 올라가던 준공, 아주 공부 잘 하는 제자가, 법을 이은 제자죠  그 분이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어. 그래도 그거 문제도 되지 않는 거예요.
  그런 정도로 이 선에는 참 생명에 대한 문제 이해가 중요한 것이지 이놈의 몸뚱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은 문제를 삼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또 이 육신을 이렇게 말하자면  몽둥이로 때림을 통해서 비로소 참 생명의 눈을 떠 라는 거예요.
  참 생명의 눈을 떠라!  맞는다고 다 눈 떠는 것도 아니지만 공부가 되어 있으면 또 눈을 떨 수도 있는 거예요.  편타(便打)라!  곧바로 때렸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곧 바로 때렸다.  이건 뭡니까?  그 나름대로 황벽스님은 불법대의를 보여 준거예요.  불법대의를  불법적적대의를, 불법을 진짜 보여 준거예요.  불법대의를 물었는데 그기에 대한 답이니까 어쨌거나, 그기에 대한 답으로서 이렇게 스무 번을 방맹이로 때린 거예요.  여기에 우리가 마음을 열게 해서 이 문제에 마음을 써야 해요.  임제록이 어렵다면 이런 의미가,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기 이 관계 속에서 과연 무엇이 있는가?
  불법을 물어 보는데 때렸다.  불법을 아주 제대로 말하자면 받은 거죠.  제대로 받았는데 그것을 불법에 대한 눈을 떴느냐 못 떴느냐 하는 것은 맞는 사람의 당사자의 문제죠. 어쨌든 황벽스님은 자기가 가진 불법을 남김없이 보여준 것이고 뭐 달리 아이구 금강경이 뭐 어떻고 화엄경이 어떻고 이런 식으로 한 것이 아니예요.  그렇게 너절한 소리 할 겨를이 없는 거예요. 정말 살아 있는 그런 불법을 보여줬는데 여기에 눈을 떠느냐 못 떠느냐 하는 것은 이제 맞는 사람 당사자의 문제죠.

師下來에 首座云 們話作麽生고
사하래   수좌운 문화자마생  

수좌에게 말하기를 ‘문화자마생(們話作麽生)고’ 물으러 갔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후 이야기를 해 봐라. 수좌스님이.

 그래서 사하래(師下來)라! 임제스님이 다시 내려왔어요.  수좌가 말하기를.
  질문하고 이제 선방으로 내려오니까, 수좌가 기다리고 있다가 문화작마생(問話作麽生)고, 물으러 갔던 전후 이야기가 어떠냐?  문화(問話)가?  물은 그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어떠냐?  어떻게 물었고 어떻게 답 하더냐?  그걸 이제 수좌가 물었죠.

師云 某甲問聲未絶에 和尙便打하니 某甲不會니다
사운 모갑문성미절   화상편타     모갑불회

그러니까 임제 스님이 말하기를 ‘내가 묻는 말이 끊어지기도 전에 화상께서 곧 나를 때렸습니다. 모르기는 해도 이 무슨 뜻으로 때렸는지 참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그러니까

 사운, 모갑문성미절(師云, 某甲問聲未絶)에, 내가 묻는 말이 끊어지기도 전에
  화상(和尙) 편타(便打)하니 모갑불회(某甲不會)니다.  화상(황벽스님)이 곧 나를 후려 때려 쳤으니 모갑(某甲), 제 자신은 무슨 뜻 인지 모르겠습니다. 회(會)는 알 회(會)자예요. 
  알지를 못하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내가 불법대의를 물었는데 나를 그렇게 후려쳤으니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수좌가 다시 말하기를  “그럼 다시 가서 물어 보아라” 네가 모르니 다시 가서 물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뭐 할 일이 없지 않느냐?  어차피 이거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首座云 但更去問하라하니 師又去問이라
수좌운 단갱거문         사우거문

수좌스님이 있다가 ‘그러면 다시 가서 물어 봐라. 이왕에 묻던 일이니까 두 번 맞으나 세 번 맞으나 까짓것  그냥 가서 한번 물어봐라’ 그랬어요.

 수좌가 말하기를, 단경거문(但更去問)하라!  다만 다시 가서 물을 일 뿐이지 않느냐?   그러니까 사우거문 (師又去問)이라, 또 며칠 후에 바로 간 게 아닙니다.  여러 날이 걸린 거죠.  며칠 있다가 또 올라가서 또 물었습니다.

黃檗又打하야 如是三度發問하고 三度被打하니라
황벽우타     여시삼도발문     삼도피타

사(師)가 또 가서 물었는데 황벽이 또 때린 거야. 묻는 것도 그대로고 때린 것도 그대로야. 불법이 변하면 안 되지. 당연하지. 당연히 똑같은 질문을 해야 되고 똑같은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야. 안 때리고 차 한 잔을 대접했다 해도 끽다거 하라고 했다 해도 같은 대답입니다. 황벽이 때린 것이나 조주가 끽다거 하라. 한 것이나 똑 같은 거예요. 어지간히 좀 눈치 채겠죠? 네? 거기에 뭔가 살아 있는 불법이 있어, 묻고 답하는 이 사실! 이 사실은요 대단한 거예요. 이 위대함. 이 능력. 이건 삼세제불도 어쩌지 못합니다. 역대 조사도 어쩌지 못하는 그것이 여러분이나 나나 또 임제나 황벽 사이에 똑같이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진짜 불교예요. 이러한 참 불교를 임제 스님이 전했고 그래서 역대 조사 스님들이 임제! 임제! 하는 거예요.

명함에다가 전부 임제 몇 대손이라고 전부 임제 몇 대 손이라는 것을 전부 찍어가지고 다니고 그래요. 어록이나 비석이나 ‘임제’ 빼버리면 세상에 내 놓을 수도 없는 것으로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정곡을 찔러서 불교의 진수를 보여준 사람은 천하에 없어요. 석가모니는 한 번 했어요. 꽃 한번 든 것.

그래서 또 때려가지고. ‘여시삼도발문(如是三度發問) 삼도피타(三度被打) 여기에 나오네요.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다.

 황벽이 우타(黃檗又打)라!  또 황벽스님이 또 그렇게 때렸어요.
여시삼도발문(如是三度發問)하고, 이와 같이 세 번묻고 삼도피타 (三度被打)라!  세 번 얻어 맞았다. 
  한번에 스무방씩 그렇게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그렇게 얻어 맞았으니 오죽 했겠습니까?  그리고 이 임제스님이 오로지 그저 불법대의가 무언지?  진정한 뜻이 무언지를 알고 싶은 그런 마음에서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오롯한 그런 마음으로도 얻어 맞았으니 그게 뭐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말로만 남의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지만, 그 순간의 그 두 분들의 오고 간 마음과 그 느낌이 어떠했는지는 감히 우리가 상상하기도 어려운 그런 경우이지요.  세 번 묻고 세 번 맞다. 

師來白首座云 幸蒙慈悲하야 令某甲問訊和尙하야
사래백수좌운 행몽자비     영모갑문신화상

스님이 수좌에게 와서 말하기를, 다행히 스님의 자비스러운 지시를 입어서 큰스님께 가서 물었다.

 사하래 수좌 운(師下來에 首座云),  임제스님이 다시 와가지고 수좌에게 고백해서 말하기를 
  행몽자비(幸蒙慈悲)하야, 다행히 수좌스님이 가서 물으라고 하는 그런 자비로운 가르침을 내가 입어서
 영모갑문범화상하야(令某甲問訊和尙)하야, 큰스님 화상에게 묻게 되기는 했는데, 3년 동안이나 살면서 질문할 줄도 몰랐는데 그렇게 가서 질문하고

三度發問에 三度被打니다 自恨障緣으로
삼도발문   삼도피타     자한장연

세 번 묻고 세 번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한탄하여 장애의 어떤 인연이 있었던지

 그렇게 가서 질문하고 삼도발문(三度發問)에, 세 번 묻고. 삼도피타(三度被打), 세 번 얻어 맞기만 하였습니다.
  자한장연(自恨障緣)으로, 스스로 한탄하는 것은 장애의 인연으로

不領深旨하니 今且辭去하노이다 首座云
불령심지     금차사거         수좌운

그 깊고 깊은 뜻을 내가 알지를 못했으니 내가 인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황벽스님 회상에서 이제 그만 떠나려 합니다. 이렇게 했어요. 아니 20 방망이씩 60 번을 얻어맞고 더 이상 또 거기에 뭐가 있겠어요? 자기가 보여줄 것 다 보여주고, 받을 것 다 받았는데.
그러자 수좌가 말하기를

 불영심지(不領深旨)하니 금차사거(今且辭去)하노이다,  황벽스님의 깊은 뜻을 내가 알지 못하겠으니 저는 지금 떠나겠습니다.  금차사거(今且辭去), 황벽스님과도 인연이 없고 이 도량하고도 인연이 없는 가 봅니다.
  다행히 스님이 가서 물으라 해서 묻기는 했습니다만, 나한테 도에 대한 그런 어떤 장애가 너무 많은 모양입니다. 도대체 내가 이런 처지가 돼 가지고 더 이상 여기에 살 마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떠 날려고 합니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수좌가 있다가

汝若去時에는 須辭和尙去하라 師禮拜退하니라
여약거시     수사화상거     사예배퇴

‘그대가 만약 이 회상을 떠나려고 하거든 큰스님께 하직 인사나 하고 가라.’ 아무리 맞고 괘씸하지만 그래도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니까 인사라도 하고 가는 게 어떻겠느냐? 그랬어요. 그러니까 예배하고 물러났다.

  ‘여약거시 수사화상거(首座云, 汝若去時에는 須辭和尙去)하라,’  만약 갈려면 대개 이제 스님들이 갈려면 간다온다 소리 없이 가죠.  그런데 특별히 수좌가 이렇게 했어요, 그럼 간다고 화상께 하직 인사라도 하고 가라, 하직 인사라도 하고 가면 뭔가 다른 어떤 지시가 또 있을 수도 있지 않겠나?  세 번이나 그렇게 물으러 갔다가 세 번이나 정말 죽도록 얻어맞고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섭섭하고 참 죽고 싶은 그런 아주 너무나 절박한 심정이죠. 그러니까,  사례배(師禮拜)라, 예배하고 물러났죠.


《 황벽의 불법이 별것이 아니다 》

 
首座先到和尙處云 問話底後生이 甚是如法하니
수좌선도화상처운 문화저후생   심시여법

若來辭時에는 方便接他하소서 向後穿鑿하야
약래사시     방편접타       향후천착

成一株大樹하야 與天下人作廕凉去在리이다
성일주대수     여천하인작음양거재

師去辭한대 黃蘗云 不得往別處去요
사거사     황벽운 부득왕별처거

汝向高安灘頭大愚處去하라 必爲汝說하리라
여향고안탄두대우처거     필위여설

  수좌가 먼저 황벽 스님의 처소에 가서 말하였다.
  “법을 물으러 왔던 후배가 대단히 여법(如法) 합니다. 만약 와서 하직 인사를 드리거든 방편으로 그를 이끌어 주십시오. 앞으로 잘 다듬으면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되어 천하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것입니다.”
  임제 스님이 가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황벽 스님이 말씀하였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자네는 고안(高安)의 물가에 사는 대우(大愚) 스님 처소에 가도록하여라.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首座先到和尙處云 問話底後生이 甚是如法하니
수좌선도화상처운 문화저후생   심시여법

수좌가 먼저 조실스님 계신 곳에 갔어. 

그렇게 임제 스님에게 일러 놓고는 얼른 지름길로 방장 스님 방에 가가지고 그 후생(後生), 아까 스님께서 두들겨 팬 그 후배가 매우 여법합니다. 그릇이 됐습니다. 괜찮은 그릇이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라.

   그런데 그걸 알려준 수좌스님이 황벽스님께 먼저 가 가지고 그 이야기를 했어요.  전번에 세 번 묻고 세 번 맞은 그 사람이  근기가 아주 상당히 괜찮은 것 같은데, 이 도량의 스님 밑을 떠날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스님께서 좀 잘 선처해주라고 가서 이야기를 한 거예요 수좌가, 일종의 비서 같은 역할을 하는 거죠.

若來辭時에는 方便接他하소서 向後穿鑿하야
약래사시     방편접타       향후천착

만약에 와서 스님을 떠난다 하거든 방편으로 그 사람을 좀 이렇게 제접해 주십시오. 방장 스님께 미리 이렇게 했는데 어떻게 무슨 뜻으로 했고 또 황벽스님은 어떻게 나올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죠. 그래서 향후에 이것 잘 다듬으면

   황벽스님 계신 곳에 가서 물으러 왔던 그 후배가 법의 그릇이 제대로 된, 아주 여법한 사람이라 말이죠. 만약에 하직 인사하러 오면 좀 잘 봐주십시오.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때리기만 한다고 그 높은 뜻을 알아듣습니까?  그 사람을 잘 거두어 주면 앞으로 큰 그릇이 될 만한 사람인데 저런 사람 놓칠까 싶어서 안타까운 거야,

成一株大樹하야 與天下人作廕凉去在리이다
성일주대수     여천하인작음양거재

큰 재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 사람들에게  큰 그늘을 드리우는 그늘이 될 것입니다.

   안타까워서 가서 수좌는 황벽스님께 그렇게 이야기 한 거죠.  앞으로 잘 다듬고 단련하면 한 그루의 큰 나무를 만들어 가지고서 천하 사람들이 그 밑에 와서 그 그늘 밑에서 쉬어 갈 수 있게 하는 그런 정도의 아주  큰 그늘을 드리워 줄 수 있는 그런 인물이 될 것 같습니다.  자기가 보기에는 그러니까, 어떻게 잘 좀 거두어 주시라고, 그래 저런 사람 놓칠까봐 안타까운 거야,  잘 만하면 아주 크게 깨달아 가지고 큰 선지식이 될 만한 사람인데 수좌가 그렇게 본거예요. 수좌 역할이 아주 컸어요. 임제스님은 그 사실을 몰랐죠.

師去辭한대 黃蘗云 不得往別處去요
사거사     황벽운 부득왕별처거

사(師: 임제스님)가 가서 떠나려고 인사를 하니까 황벽스님이 말씀하기를 ‘가는 것은 좋다.’

 황벽스님께 가서 하직할 것을 떠날 것을 이야기 하니까, 황벽스님이 말하기를  "딴 데 가지마라,  너가 떠나는 것은 좋다.

汝向高安灘頭大愚處去하라 必爲汝說하리라
여향고안탄두대우처거     필위여설

딴 데 가지 말고 저기 고안(高安)이라고 하는 지방, 탄두(灘頭), 강가 항구에 대우라는 중이 있는데 거기 가 봐라. 혹시 인연이 될지도  모른다. 반드시 그대를 위해서 뭔가 가르침이 있을 것이다. 그랬어요. 참, 워낙 공부에만 마음이 있는 임제 스님 인지라 딴 생각 안 하고 시키는 대로 대우 스님께 갔어요.

 너가 떠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다른 데는 가지 말고 여기 내가 일러 준 데로 가라." 그래요.
  고안(지명)이라고 하는 지역의 강가 항구에 대우라고 하는 스님이  살고 있는데, 그기를 가라. 그기에 가면 소득이 있을 줄 모른다. 다른 데는 가지 말고 그 대우 선지식한테 가면 있을 거다. 그랬어요. 그 아까 두 구절의 서문에 황벽산두에 증조통방! (黃檗山頭에 曾遭痛棒)하고, 하는 것이 황벽스님께 세 번 묻고 세 번  죽도록 얻어맞은 것 지금까지, 그 다음에
 대우스님과 인연이니까, 대우늑하에 방해축권이라! (大愚肋下에 方解築拳이로다),  대우스님의 옆구리에 세 번 주먹질을 할 수 있었다.  주먹을 쥐어박을 수 있었다라는, 그 얘기가  여기서부터 이제 시작 되는 거죠.  반드시 그대를 위해서 뭔가 얘기가 있을 것이다.


師到大愚한대 大愚問 什麽處來오
사도대우     대우문 십마처래

師云 黃蘗處來니다
사운 황벽처래    

大愚云 黃蘗有何言句오
대우운 황벽유하언구

師云 某甲이 三度問佛法的的大意라가
사운 모갑   삼도문불법적적대의

三度被打하니 不知某甲이 有過無過닛가
삼도피타     부지모갑   유과무과

大愚云 黃蘗與麽老婆하야 爲汝得徹困이어늘
대우운 황벽여마노파     위여득철곤

更來這裏하야 問有過無過아
갱래자리     문유과무과

  임제 스님이 대우 스님에게 이르자 대우 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황벽스님처소에서 왔습니다.”
  “황벽스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
  “제가 세 번이나 불법의 분명한 대의를 물었다가 세 번 얻어맞기만 했습니다. 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저에게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황벽스님이 그토록 노파심이 간절하여 그대를 위해 뼈에 사무치게 하였거늘 여기까지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가?”


師到大愚한대 大愚問 什麽處來오
사도대우     대우문 십마처래

대우스님께 가니 대우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디서 왔느냐?”

 임제스님이 대우스님께 가니까, 대우스님이 묻기를  "어느 곳에서 왔느냐"? 

師云 黃蘗處來니다 大愚云 黃蘗有何言句오
사운 황벽처래     대우운 황벽유하언구

“황벽스님 회상에 있다가 왔습니다.”
대우가 말하기를 “황벽이 무슨 말을 가르치더냐?”

 황벽스님 계신 곳에서 왔습니다.
  대우스님이 말하기를 그러면 황벽스님이 "어떤 이야기를 하더냐"? 

師云 某甲이 三度問佛法的的大意라가
사운 모갑   삼도문불법적적대의

“세 번이나 불법적적대의(佛法的的大意)를 묻다가

 임제스님이 말하기를 세 번이나 불법 적적 대의를 물었다가

三度被打하니 不知某甲이 有過無過닛가
삼도피타     부지모갑   유과무과

세 번 얻어맞기만 했습니다. 무슨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랬어요. 무슨 허물이 있어서 때리는데 나는 그 상식 밖에 없습니다. 저도 무슨 잘못이 있어서 큰 스님께서 그렇게 때렸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냥 그랬어요.

 세 번이나 죽도록 얻어맞았습니다. 나는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저 자신이 무슨 허물이 있습니까?  무슨 허물이 있어서 맞았습니까?  무슨 죄가 있어서, 무슨 잘못이 있어서 맞아도 보통 맞은 것이 아니니까. 그래 그걸 대우스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대우스님의 대답이 아주 대단합니다.

大愚云 黃蘗與麽老婆하야 爲汝得徹困이어늘
대우운 황벽여마노파     위여득철곤

대우가 말하기를, 황벽 스님이 그토록 친절해서 그대를 위해 철저하게 가르쳤거늘

  대우운大愚云 황벽여마노파黃蘗與麽老婆하야 위여득철곤爲汝得徹困이어늘.   황벽스님이 그대를 위해 가지고서 정말 그렇게 노파심절! 팔십 먹은 어머니가 육십 먹은 아들을 차 조심하라고 나갈때 일러주는 그런 정도로 노파심절하게, 간절하게 너를 위해서 뼈에 사무치도록 정말 깊이깊이 사무치도록 철저하게도  잘도 가르쳤건만은, 다시 여기 나한테 까지 와서는 무슨 내가 허물이 있느냐, 무슨 죄가 있느냐 없느냐 무슨 잘못이 있어 이렇게 나를 때리느냐 하고 이렇게 묻느냐!  참으로 딱하다. 내가 너를 보니 참으로 너무 딱하다.
  그 황벽스님은 누구에게도 베풀지 않는 그런 노파심절한 자비심을 베풀어서 그렇게 철저히 잘도 가르쳤건만, 너는 여기 와서 허물이 있느냐 없느냐 뭔 잘못을 했길래 나를 이렇게 때리느냐 하고 이런 어린 아이 같은 그런 거 철딱서니 없는 그런 소리를 하니 참으로 기가 찬다.  그런 이야기를 한 거예요,  대우스님이, 그러니까 세 번 때린 것이 그게 미워서 때렸겠어요?  어쨌든 불법 적적대의를 물었으니까, 불법적적대의를 철저하게 보여준 거라.  몸으로 느끼도록 해 준거예요,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때린 사람이 있고 맞는 사람이 있어요.  아픔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에 불법이 다 있다는 거예요.  때린 사람이 있고 맞는 사람이 있고 그 맞고 아픔을 느끼는 그 사람이 있어요.  거기에 부처님이 있고 불법이 있고 불교의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이제 못 깨달았으니까,  그 대우스님의 설명이 기가 막히는 거예요. 

更來這裏하야 問有過無過아
갱래자리     문유과무과

다시 여기까지 와서 허물이 있고 없음을 묻는가? 임제 스님은 세상에 이 말보다 더 큰 말이 없습니다. 천하의 팔만대장경을 다 배웠지마는 이 대우스님의 이 말! 여기에 무슨 이치가 있습니까? 여기에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 있습니까? 무슨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이 말에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라!” 크게 깨달았어.

거기에 줄 그어야 돼요. “황벽여마노파黃蘗與麽老婆하야 위여득철곤爲汝得徹困이어늘 갱래자리更來這裏하야 문유과무과問有過無過아” 여기까지.
세상에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인데 팔만대장경을 압축하고 압축하여서 한마디로 표현한 것보다도 더 임제 스님에게는 가치 있는 말이고 더 큰 법문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무슨 말이예요? 이까짓 것 “황벽이 그토록 친절해서 그대를 위해서 철저하게 가르쳤는데 다시 여기까지 와서 허물이 있느냐? 없느냐?” 그렇게 묻느냐? 이 말이야. 황벽스님이 60방망이를 때린 것은 그대를 위해서 친절해서 그렇다는 거야. 노파심절로 하는 것이다 이거야. 그렇게 친절하게 너를 가르쳤는데... 야, ∼ 대단하죠? 친절하지 않으면 자비가 아니면 그렇게 한 방망이로 못 때리는 거예요. 그런데 60 방망이를 때렸잖아요. 노구에 그렇게 방망이를 들고 젊은 놈을 두들겨 패려면 힘이 좀 들겠습니까? 그런데 법을 위해 때린 거예요. 임제가 그릇이 되니까 때린 거예요. 그릇이 될 것 같지 않으면 그렇게 때리지도 안 해.

그게 법을 다 보인 거예요. 정말 간절하게 살아있는 불법의 진수를 보인 거예요. 그러니까 대우스님이 그걸 알고 황벽이 그토록 친절해서 그대를 위해 철저히 철곤(徹困)! 아주 철저하게 가르쳤다 이거야.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허물이 있느냐? 없느냐? 그런 소리를 하느냐? 이 소리 한번 하는데. 매일 아침 떠오르는 샛별인데 그 샛별 떠오르는 것이 그렇게 장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걸 보고 척 깨닫잖아. 때가 무르익으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좋은 법문이다, 금강경만 좋다, 반야심경이 좋다 이런 것이 세상에 없어. 샛별이 제일 좋지. 부처님이 깨달은 법문인데 그보다 좋은 법문이 어디 있어요? 병풍에 샛별만 잔뜩 그려 놔. 그러면 금강경 쓰는 것 보다 백번 나으니까.

어떤 이들은 정오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사람도 있죠? 겨울에 화장실 가다가 눈에 미끄러져서 깨달은 사람도 있고. 이 세상 만물이 그래서 법문 아닌 것이 없고 계기만 되면 깨달을 근거가 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어느 것이 법문이 깊고 얕다고 따질 수가 없습니다. 이까짓 것. 아무것도 아닌 말이잖아요. 샛별 그것, 늘 떠오르는 것. 밤이면 많고 많은 별인데. 계기만 되면 뭐든지 깨달아요.

즉심시불(卽心是佛)만 꼭 좋은 화두인가? ‘짚신이 부처다’ 해도 좋은 화두라. 짚신이 부처다 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노파가 있잖아요. 우리가 그런 틀에서 확 벗어나야 돼요. 틀과 고정관념, 우리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확 벗어 던지고 시원스럽게 마음 탁! 열고 가슴 확 열고. 승려라고 하는 것. 큰스님이라고 하는 것. 연륜이 얼마나 쌓였다 하는 것. 자존심. 거추장스러운 의식이 우리 본인에게는 이익 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혀 이익 될 것이 없고 손해만 봅니다. 불교에 대해서 이러한 것들도 우리가 그냥 이것 하나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이것을 좀더 확대해서 이해를 하기로 하면 세상이 달리보이고 다르게 다가온다니까요.

그 다음에 여기까지 와서 허물이 있다. 없다 그걸 묻느냐? 라고 하니까

 갱래자리更來這裏하야 문유과무과問有過無過아.  그렇게 노파심절하게 친절하고도 자상하게 가르쳤건만  여기 와 가지고  무슨 내가 잘못이 있느냐 없느냐 이렇게 하니 참 안타깝고 기가 찬다. 그러니까


師於言下에 大悟云 元來黃蘗佛法이 無多子니다
사어언하   대오운 원래황벽불법   무다자

大愚搊住云這尿牀鬼子야 適來道有過無過러니
대우추주운자요상귀자   적래도유과무과

如今却道黃蘗佛法이 無多子라하니
여금각도황벽불법   무다자

儞見箇什麽道理오 速道束道하라
이견개십마도리   속도속도

師於大愚脅下에 築三拳한대 大愚托開云
사어대우협하   축삼권     대우탁개운

汝師黃蘗이요 非干我事니라
여사황벽     비간아사

  임제 스님이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황벽불법이 간단하구나.”
  대우스님이 멱살을 움켜쥐며, “이 오줌싸개 같은 놈! 방금 허물이 있느니 없느니 하더니 이제 와서는 도리어 황벽스님 불법이 간단하다고 하느냐? 그래 너는 무슨 도리를 보았느냐? 빨리 말해봐라, 빨리 말해!” 하였다.
  이에 임제 스님이대우 스님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세 번이나 쥐어박았다.
  대우 스님이 임제 스님을 밀쳐버리면서 말하였다.
  “그대의 스승은 황벽이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師於言下에 大悟云 元來黃蘗佛法이 無多子니다
사어언하   대오운 원래황벽불법   무다자

그 말에 크게 깨달았어. 무슨 금강경 사구게 듣고... 아, 그래도 육조 혜능 스님은 금강경 구절 하나라도 듣고 깨달았으니까 거기는 상당히 수준이 있는 깨달음이지. 깨달음에 무슨 수준이 있고 없고, 있을 수도 없지마는 표현하자면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유명한 말입니다. “원래 황벽불법(元來黃蘗佛法)이 무다자(無多子)” “원래 황벽스님의 불법이 고작 이거야?” 무다자(無多子)는 “간단하구나!” 다자(多子), 많은 건 복잡하니까, 무다자(無多子)니까. 간단하구나! 이렇게 해석하면 제일 정확합니다. “황벽 불법이 참으로 간단하구나”

질문만 하면 몽둥이 하나 가지고 있다가 두들겨 패면 되는 것. 복잡하게 목청 높여 가면서 힘들게 이렇게 말할 이유 없어.(웃음)  몽둥이 하나 가지고 있다가 두들겨 패면 되는 거야. 얼마나 간단해. 그것보다 더 간단한 것은 손가락 하나만 가지고 평생 써먹은 구지 화상도 있지. 석가모니도 말하다가 재미없으니까 꽃 한 송이 척 들어 보이는 거야. 꽃 처음 봤다고 보여주고 구경시키려고 보인 게 아니야.

“황벽불법(元來黃蘗佛法)이 무다자(無多子)” 아주 유명한 말입니다. 황벽이 천하에 대단한 양반이라고 알고 찾아가서 3년간 끙끙거리고 또 가서는 60방망이나 얻어 터졌는데 지금 몸살이 날 정도로 아프기도 한데 알고 보니 황벽 불법이 간단한 것을, 이 얼마나 시원스럽습니까? 참으로 대단한 말입니다. 이것! “황벽불법(元來黃蘗佛法)이 무다자(無多子)”

 그 말 듣고 임제스님이 바로 크게 깨달은 거라.
  그 말에  바로 거기에 있었구나!  바로 그 것이구나!  정말 때리고 맞고 그 아픔을 느끼는 정말 정신이 나갈 정도로, 정말 뭐 기절할 정도로 얻어맞은 바로 그 순간 그기에 모든 것이 다 있다는 것을 비로소 크게 깨달은 거야. 그리고 한 말이 유명한 말입니다.
  원래 황벽불법이 무다자(無多子)라!  원래 황벽스님의 불법이 별것 아니구나!  무다자(無多子)다자가 없다,  많은 것이 없다. 고작 이거야!  황벽스님의 불법이란 게 뭐야!  기껏 이거냐고, 이렇게 아주 큰소리 친 거예요.  이 말이 아주 유명한 말입니다.  원래 황벽불법이 무다자(無多子)라!
  이것은 우리가 생각으로 뭐 이렇게 사량 분별해가지고 어떤 사전을 통해서 이해할 그런 경지가 아니예요.  우리는 기껏해야 생각으로 지금 끼어 맞추고는 있습니다만은 그게 아닙니다. 지금 여기는 그런 상황이 아닌 거예요.
  생각이 끊어진 자리입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생각이 끊어지고  한 생각의 일어나기 이전 자리고, 일어났으면 그 생각이 다 끊어진 자리!  무념무상의 경지라고나 할까?  바로 그런 자리죠. 그러니까 대우스님이 기도 안 차거든 또, 대우스님이 들으니까 아까는 뭐 징징 짜는 소리해 가면서, 나한테 잘못이 있느냐 어쩌냐 그러더니 지금 와서는 그 하늘같은 황벽스님을 같다가 황벽불법이 기껏 이것 뿐이냐고 이게 뭐냐, 시시한 것 이것 뿐 이냐고 이런 식으로 표현하니

大愚搊住云這尿牀鬼子야 適來道有過無過러니
대우추주운자요상귀자   적래도유과무과

그래서 대우가 멱살을 딱 잡았어요. ‘야! 이 오줌싸개 같은 어린놈!’ 어릴 때, 대 여섯 살 때 오줌을 싸면 소금 얻으러 가잖아요. 오줌싸개 같은 어린놈이니까. 황벽 집에 있다가 오줌을 싸가지고 대우 집에 소금 얻으러 온 격이 되어 버렸거든. 그래서 요상귀자(尿牀鬼子)라고 하는 거예요.
  금방 오줌싸개 같은 놈이 와가지고는 내가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또 내가 무슨 허물이 있어서 그 스님이 나를 때려 팼습니까? 라고 하더니

 대우스님이 멱살을 딱 잡고는 이 요상귀자야! (尿牀鬼子:잠자리 이불에다가 오줌 싸는 어린놈) 오줌싸개 같은 놈! 왜 오줌싸개냐?  황벽스님 밑에 있다가 오줌 싸고는 말하자면은,  소금 얻으러 가라고 대우스님께 보낸 택이 된거야 또 돌아가야 돼!  결국은 또 황벽스님께 돌아갈 처지야! 소금 얻었으니 돌아가야지, 그래서 이제 표현이 그거야,  야!  오줌싸개 같은 어린 자식아!  아까는 와 가지고 뭐 잘못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그렇게 말하더니

如今却道黃蘗佛法이 無多子라하니
여금각도황벽불법   무다자

지금 뭐라고? 황벽불법이 간단하다고? 무다자(無多子)라고? 이렇게 하면서

 아까는 와 가지고 뭐 잘못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그렇게 말하더니 지금은 황벽불법이 무다자라고?  황벽불법이 별것 아니라고,  그렇게 말 하냐 이거야,
  대우스님도 참!  황벽불법! 스승이고 도반이고 아주 천하에 황벽이고 천하의 대우인데, 황벽불법을 그렇게 말하니까 자기가 무시당한 것과 같죠. 

儞見箇什麽道理오 速道束道하라
이견개십마도리   속도속도

네가 도대체 무슨 도리를 알았기에,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그 따위 소리를 함부로 지껄이느냐? 빨리 일러봐! 속도속도(速道束道)! 빨리 일러보아라 머뭇거리면 그냥 안 둘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네가 그렇게 큰 소리치는데 도대체 무슨 도리를 봤느냐?   뭘 알았느냐?  네가 뭔가 알아도 안 것이 있으니까, 그런 소리 할 것 아니냐!   이런 말이죠.  무슨 도리를 보았느냐 빨리 일러 보아라 도대체 뭘 알았기에 그런 큰소리치느냐?  빨리 말해봐! 그러니까
 
師於大愚脅下에 築三拳한대 大愚托開云
사어대우협하   축삼권     대우탁개운

그러니까 임제스님의 협하(脅下)에, 대우스님의 옆구리에다가 그냥 황벽스님께 세 번에 60방망이 얻어맞은 것을 온통 주먹에다 다 싣고는 허리를 세 번 쥐어박았어요. 죽으라고 그냥 쥐어 박아버린 거야.  ‘축삼권(築三拳)이라’ 주먹을 그냥 세 번 쾅쾅! 한번 때릴 때 자기가 한번 올라가서 맞은 20방망이씩 세 번, 그렇게 세 번 쥐어박은 것입니다. 그게 답이야!
 
대우스님이 “빨리 일러봐라” 이게 뭐겠어요? 불법 일러봐라 이 말입니다. “불법 일러봐라!” 임제 스님이 불법 배운 게 뭐 있어요? 얻어맞은 것 밖에 없는 거야. 간단하지 그러니까 스승에게 배운 대로 또 그렇게 가르쳐 준거예요. 이것이 아주 천하에 아름다운 깨달음의 계기와 그 깨달음을 표현한 역사로 남습니다.

수천만, 수억만의 깨달은 분들이 계시지만 그 계기들은 다 다르죠. 눈에 미끄러져서 깨달은 사람. 낮에 닭이 우는 소리 듣고 깨달은 사람. 무슨 복숭아 꽃 핀 모습을 보고 깨달은 사람. 울력하다가 돌이 굴러가서 대나무 하나 툭 치는 것 보고 깨달은 사람. 도반이 잠자다가 몸부림쳐서 목침위에서 머리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깨달은 사람. 뭐 별별 계기가 많죠. 그런데 이 황벽 스님 밑에서 임제 스님이 맞고, 대우 스님 만나서 이렇게 눈을 뜬 이건 참∼ 그림 같잖아요. 이건 우리가 영화를 만들고 연극을 만들어도 아주 멋질 그런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천하의 명장면 이예요. 우리 불교 3000년 역사에 이런 장면은! 부처님의 깨달음은 너무 싱겁지. 척 앉아가지고 별 뜨는 것 보고 깨달았으니까. 영 싱겁지. 그런데 이 임제 스님의 깨달음은 아주 극적입니다. 그러니까 대우스님이 멱살을 잡았다가 확 밀쳐버리면서

 그때 임제스님이 대우스님의 옆구리에다 축삼권(築三拳)이라! 세 번 주먹질을 옆구리에다 죽어라고 후려 친 거예요.  세 번 주먹으로 때리니까 멱살을 잡았던 대우스님이 임제스님을 밀쳐버리면서

汝師黃蘗이요 非干我事니라
여사황벽     비간아사

“너의 스승은 황벽이다. 나하고는 관계없다.” 네 하는 꼴이 그대로 황벽이다. (웃음) 나 하고는 관계없다. 나한테서 깨달았다면 딴 모습일 텐데. 네가 그대로 황벽 빼다 박았다. “비간아사(非干我事)” 는 말에 그런 의미가 표현 되어 있죠. 그렇게 해서 참, 천하에 임제 스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다시 황벽스님께로 되돌아가서

황벽스님과의 재회 “이 자식이 어딜 왔다 갔다 하느냐?” 하니까.  “대우스님께 가니까 이러이러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에이 이 놈의 자식 대우 그놈, 오기만 와 봐라. 내가 그냥 안두겠다.” 그랬거든. 그러니까 “대우스님 올 때 까지 기다릴게 뭐 있겠습니까? 지금 한대 한 번 쳐보시지요?” 이런 식으로 나간거야. 임제 스님이 참 아주 멋져요. 임제 스님! 그러니까 황벽스님이 있다가 이 자식이 말이야 새 파란 게 호랑이 수염을 뽑는다고? 이렇게 말하는 거야.

“재날호수(再埒虎鬚)”라고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야, 시자야! 이 놈을 대중 방에 처넣어라." 이것이 정말 진짜 좋은 인가지. “대중 방에 처넣어라” 대중 방에 들어가서 대중 생활을 그때부터 하게 되는 그런 사연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시대 상황이 어떠냐?  그 당시 불교 사조가 어떠냐? 이런 것 구구하게 장황스럽게 역사적인 사실을 대 가지고 이야기 해 봤자 임제 스님의 정신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가슴에 와 닿는 데는 오히려 장애 요소라. 그래서 가능하면 그런 것 너절한 소리는 대우스님이나 황벽스님, 임제 스님. 특히 임제 스님의 정신에 가깝지 않기 때문에 내가 그런 것을 가능하면 적게 하려고 생각을 합니다.

잠깐 쉬었다가 다시 서문(序文)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의 스승은 황벽이다.”   “나 하고는 내 일하고는 관계없다.”  이렇게 이제 표현을 했습니다.
  이게 이제 깨닫기는 대우스님한테 와서 깨달았죠.  대우스님의 아∼∼그렇게 자비스럽고 노파심절하게 잘 가르쳤는데,  여기 와서 무슨 그런 잘못이 없느냐 있느냐?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는 그 말에 깨닫기는 했지만, 결국은 그래도 그 근원을 추적해 보면 결국 황벽스님이 친절하게도 스무 방맹이 씩을 무려 세 번이나 그렇게 후려쳐서 보여준 그기에 말하자면 이미 공부가 다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 하고는 관계없다.  너의 스승은 황벽이다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이게 뭐 무슨 전체 작용이다. 기용개시다 정말 인간이 말하자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 속에다 포함되어 있는 그런 내용이죠.   말하자면 참 거∼ 시원스런 대목이죠.
  특히 대우스님이  “너의 스승은 황벽이고, 나에게는 관계없다.”  정말 아주 폭우가 쏟아져서 물이 넘실대면서 흘러가는 그런 아주 시원스런 그런 대목입니다.  정말 지저분한 것이 하나 없죠.  아주 간결하고 너무나 간결 하죠,  너무도 자연스럽기도 하고 여기에 말하자면 임제스님의 공부 살림살이가 여기에 다 표현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은 없어요 사실은
  이 대목의 이것이 임제스님의 전체 살림이고,  또 불교의 전체이고 역대 조사스님들의 모든 깨달음이 바로 이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앞으로 이제 이야기 되어질 모든 임제스님의 고준한 설법이라든지, 또 사람 관계에 있어서 어떤 법 거량 이라든지, 이런 것은 전부 바로 여기서 이 깨달음에서부터 파생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정말 정신없을 정도로 때렸을 때, 또 맞은 사람과 또 때린 사람의 그 마음과,  맞은 사람의 어떤 그 느낌과, 여기에 그야말로 온 우주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고 불법 뿐만 아니라, 모든 부처님과 불법, 온 우주 삼라만상까지가 전부 그 속에 다 표현되어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우리가 받아드릴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이 간단한 깨달음에서, 수많은 그런 높고 낮은 근기에 맞는 그런 그 가르침이 또 펼쳐집니다.  이런 내용은 너무나도 이제 참∼ 어떤 의미에서 보면 깨달음의 경지이기 때문에 아주 고준하지요.  그러면서 저기 시중이라고 해서 일반 법문에는 들어가면 우리가 사량 분별로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그런 내용들도 상당히 많이 있고 그렇습니다.
  임제록 공부가 뭐 다∼ 100% 이해 되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고, 또 그렇게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공부도 아니고요.  요건 이제 스스로 느끼고 참구를 하고 또 공부를 해가면서 공부한 만치, 이것을 느끼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그런 일입니다.
  일상생활에 무슨 아주 눈에 번쩍 뛰는 그런 명구가 있어서 무슨 내 놓을 만한 그런 말보다는, 정말 이런 법이 오고 가는 여기에 정신을 잘 가다듬으면, 참으로 우리 모든 사람들의 진정한 자기 자신이 어떤 것이다 라고 하는 것, 불법은 진정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닌 것,  이것이 참으로 진정한 불법이다 라고, 하는 이런 것 들을 조금씩 이해해가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를 해 봅니다.
무비스님 임제록 강의(경전연구회)   3 ---서문(序文)

글쓴이: 一輪月 번호 : 4 조회수 : 161  2007.07.13 00:55 
 


序文
서문

臨濟錄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序
임제록 진주임제혜조선사어록

延康殿學士 金紫光祿大夫 眞定府路安撫使
연강전학사 금자광록대부 진정부로안무사

兼馬步軍都總管 兼 知成德軍府事 馬防 撰
겸마보군도총관 겸 지성덕군부사 마방 찬

진주 임제혜조선사 어록 서문

  연강전 학사이며, 금자광록의 대부며, 진정부로의 안무사요, 겸하여 마보군의 도총관이며, 겸하여 지성덕군의 부사인 마방이 쓰다.


지금 <서문(序文)> 공부 하겠습니다.

 이 서문은 4언 58구로 되어 있는 임제 스님이 강남의 황벽산에서 황벽스님 밑에서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게 된 거기에 관련된 주요 사건들을 이야기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임제 스님이 하북의 임제원에 주석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훈도할 때 여러 가지 보여준 가풍과 그 가풍을 정리한 내용들도 있고 그 다음에 노년과 입적에 관한 내용과 임제록 간행을 하게 된 사연들, 이런 것으로 요약이 되어 있습니다. 대개 서론이 그 전체 내용을 대표하거든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어느 선방에서는 방부를 받는데 선방 앞에 가서 임제록 서문을 줄줄줄줄줄 막힘없이 외우면 무조건 받아주었데요. 그런 분위기가 참 좋지요? 누구의 상좌이고, 법랍은 얼마인지가 문제가 아니고 선방에 방부 드리는 요건이 임제록 서문만 잘 외우면 그만 받아 주는 거야. 참 좋잖아요. 그런 기치, 그런 것들도 이런 기회에 한번 들어두는 게 좋습니다.

臨濟錄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序
임제록 진주임제혜조선사어록서

진주 임제혜조선사 어록서라.

연강전학사, 내가 이것 읽을 때마다 내 영∼ 마음에 좀 걸리는데 일단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임제록! 진주시 임제원(절 이름)에 계시던 혜조선사 어록의 서. 혜조는 임제스님이 돌아가신 뒤에 왕이 내린 시호이며, 임제스님은 서기 867년에 돌아가셨으니, 지금부터 1200여 년 전의 스님이시고, 우리나라의 신라에 해당되는데, 그 무렵에 말하자면 아주 불교가 제일 왕성했던 그런 때, 도인도 많이 나오고 불교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범어사 창건이 678년 의상스님께서 창건하셨는데, 그 후 200년쯤 후에 임제스님이 열반하신걸 보면 통일 신라 무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것,  사전적인 것, 불교 교리적인 것 이런 것 느긋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그런 분위기가 아니에요. 자질구레한 설명은 다 생략하고 그 속에 들어있는 임제스님의 마음을 만 분의 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그런 강의가 되어야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임제스님의 어록 서문을 쓴 사람, 상당한 벼슬을 높이 한 그런 분에게 부탁해서 쓰는데, 이 서문을 명문이라 그래요. 4언 58구라고 했는데, 옛날에 선방에 방부 들이러 가서 다짜고짜 <임제록> 서문을 외웠다 그거예요. 임제록 서문을 외우면 ‘아, 방부 들이러 왔구나’ 알고 했다는 것입니다. 임제록 서문 정도 못 외우면 선방에 방부로 안 받아줬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와요. 가능하면 서문을 외우세요.

延康殿學士 金紫光祿大夫 眞定府路安撫使
연강전학사 금자광록대부 진정부로안무사

兼馬步軍都總管 兼 知成德軍府事 馬防 撰
겸마보군도총관 겸 지성덕군부사 마방 찬

연강전학사 금자광록대부 진정부로안무사 겸마보군도총관 겸 지성덕군부사 마방 찬이라!

마방(馬防)이라는 사람의 이름인데 앞에 수식하는 그런 벼슬 이름이 이렇게 많습니다.

스님들 제발 명함에다가 어디에 무슨 뭐뭐뭐 해가지고 명함이 비좁도록 잔뜩 경력을 써서 다니지 마세요. 제일 추한 모습이 그거예요. 부산서 누구라고 이름을 안 밝히겠는데 어떤 스님 명함을 하나 받았는데 뒤에 꽉 차고 앞에는 말할 것도 없고, 앞에는 대 여섯 가지 싣고, 뒤에는 여덟 가지 인가? 내가 헤아리다가 몇 개인지 다 못 헤아릴 정도로. 요즈음 좀 활동하는 스님들 보면 소임들도 많잖아요. 절도 서너 개 가지고 있고, 어디 가서 무슨 소임보고, 어느 연합회 총무고, 어느 연합회 재무고 그런 것 잔뜩 다  써넣고 하는데

이 임제록의 제일 허물이 이거라. 마방(馬防)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훌륭한 분은 사실이야. 그래서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이 이 임제록의 무게와 가치를 좀 이렇게 띄우려고 마방(馬防)이라는 분에게 서문을 받고 할 수 없이 마방이라는 사람의 경력을 소개한 것은 이해는 가. 그러나 임제 스님의 선(禪)의 정신! 간결해야 되거든요.

“황벽불법(黃蘗佛法)이 무다자(無多子)” 간단한 거야. 그대로 간단한 황벽불법을 임제 스님이 그대로 이어 받은 거예요.

간단하고 간결한 것이 선(禪)의 정신입니다. 뭘 깨달아서 어쩌자는 게 아니예요. 아주 간단명료하고 그리고 소박하게 자연스럽게 사는 그 삶이 선의 삶이고 깨달음의 삶이지 딴 것 아닙니다. 선의 정신은 그런 몇 가지 요소가 있어요. 자연스러워야 돼. 지극히 자연스러워야 돼. 조작이 있으면 그건 불교인이 아니죠. 아직 때가 덜 떨어진 사람이지. 자연스럽고 탈속해야 돼요. 시원스럽고 탈속해. 뭔가 아∼ 죄는 게 많고, 구질구질하게 뭐 이렇게 폼 잡고, 남의 눈치보고 이렇게 하는 것 있잖아요. 때가 덜 떨어져서 그런 거라. 탈속해야 되거든요. 스님 생활하는데 뭐 겁나는 게 있고, 염려하는 게 있고, 앞뒤 잴 것 뭐 있습니까? 그저 시원스럽게 생긴 대로 그냥 살고.

아! 통하는 데는 통하고, 안 통하면 말고 그렇지. 그 안 통하는 사람에게까지 잘 보여서 통하게 하려고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이고 그렇게 신경 쓸 것 없어요. 불교 공부 제대로 하면 자꾸 단순해지고 간단해지고 수식이 자꾸 떨어져. 그것이 바람직하죠. 서문 쓰신 분이 위대한 분임은 사실인데 그런 이야기 있죠?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관우. 장비를 데리고 삼고초려해가지고 제갈량을 모시러 척 가서 대문을 두드리니까 동자 하나가 나왔다 말이야. 그래 자기 자신을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 왔다고 소개하라”고 하는데 내가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그 생각이 항상 떠오르는 거라. “누구라고 전할까요?” 제갈량의 시자인 동자가 그러니까 유비가 하는 말이 “한나라 좌장군 의성정후 예주목 황숙 유비가 왔다고 전해라.” 이렇게 한다고. 그러니까 동자한테 크게 한 방망이 얻어맞아. “그걸 다 외워야 됩니까?” 하하하∼

참! 역시 제갈량 시자다워! 그냥 유비라고 하면 됐지. 무슨 왕의 후손이고 지금 제주 목사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그런 수식어가 제갈량한테 해당되느냐 이거야. 안 그래도 다 아는데... 이런 것들도 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마는 승려니까, 우리는 프로라고! 수행자로서 프로라! 프로는 뭔가 프로다워야 된다고. 프로다운 데는 간단한 게 아니라고. 마음가짐, 몸가짐 이런 것들을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하는 이런 생각입니다.


【무비스님 강설】
  서문은 임제스님이 강남 황벽산에서 수행하던 일과 깨달음을 체험하게 된 사연들, 그리고 하북 땅 임제원에 주석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의 독특한 가풍을 보여준다. 또 노년에 이르러서 입적에 관한 일들과 임제록 간행에 대한 이야기들을 네 자의 시 형식으로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임제록 전편을 압축한 샘이다. 한 때 선찰(禪刹)에서는 선객이 방부를 들이러 가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선방 문 앞에서 임제록 서문을 큰 소리로 외우고 있으면 그 선객을 높이 보아서 얼른 받아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지금도 이와 같은 아름다운 풍속이 있었으면 한다.
  서문을 쓴 마방이라는 사람은 당시에 뛰어난 명사였던 것 같다. 어록 중에 왕이라는 임제록에 서문을 쓴 큰 영광을 얻은 것 못지않게 글이 빼어나서 불교에서 손꼽는 명문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많은 벼슬의 이름을 너들 너들 하게 붙인 것이 좀 흠이긴 하다. 그냥 <연강전 학사 마방이 쓰다>라고 했어야 했다.



黃蘗山頭에 曾遭痛棒하고 大愚肋下에 方解築拳이로다
황벽산두   증조통방     대우늑하   방해축권

  임제 스님은 황벽 스님에게 일찍이 매서운 몽둥이를 얻어맞았다.
  그리고는 대우스님의 옆구리에 비로소 주먹질을 할 수 있었다.


黃蘗山頭에 曾遭痛棒하고 大愚肋下에 方解築拳이로다
황벽산두   증조통방     대우늑하   방해축권

황벽산두에 일찍이 아픈 방망이를 얻어맞고 대우스님 갈비뼈 밑에다가 바야흐로 주먹을 쥐어박을 줄 알았다. 아까 우리가 살펴본 내용 그대로입니다.

   황벽산두(黃檗山頭) 증조통방(曾遭痛棒), 그랬어요. 황벽스님! 산이 황벽산이다 보니, 황벽스님을 지칭합니다. ‘황벽산두에서 일찍이 방맹이를 아주 세게 얻어맞았다’는 그 말입니다. 증조통방. ‘아픈 방맹이로 정말 죽을 듯이 아픈 그런 몽둥이로 얻어맞았다.’ 그리고는
  ‘대우늑하(大愚肋下)에 대우스님의 갈비뼈 밑에다 옆구리에다가, 방해축권(方解築拳)이라 말자하면 주먹을 쥐어지를 줄 알았다.’  그런 뜻이예요. 간단하게 해석하면  “황벽스님께 몽둥이를 세게 얻어맞고, 그리고는 엉뚱하게 대우스님 옆구리에다 주먹질을 할 줄 알았다.”   간단하게 번역하면 그런 뜻입니다. 뒤에 <행록(行錄)>으로 넘어가서 연유를 보겠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쉽도록 단락을 짤막짤막하게 나눴습니다. 여기에 보면 임제스님이 어떤 분인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공부는 어떻게 했는가, 이런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건  복잡하게 이야기  해야 하는데 생략해버리고 그러면 그 맛이 떨어져요.


【무비스님 강설】
  번갯불 속에서 황벽스님은 불조의 용광로를 열어두었다. 임제스님은 처음으로 그 용광로에 들어간 것이다. 또 대우스님에게는 우주적 생명 대기대용(大機大用)을 들어보였다.
  임제스님은 황벽스님의 회상에 가서 공부한지 3년 만에 수좌(首座)의 책임을 맡고 있는 목주(睦州)스님의 안내로 불교의 대의를 물었다. “불교의 분명한 대의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조실인 황벽스님의 몽둥이가 날아왔다. 무려 20대나 얻어맞고 쫓겨났다. 이런 일이 세 차례나 있었다. 무려 60대나 신나게 얻어맞은 샘이다.
  그리고는 황벽스님과는 인연이 없음을 알고 대우스님에게로 가게 되었다. 황벽스님에게 불교를 물으러 갔다가 얻어맞은 일을 대우스님께 모두 말씀드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때렸는가를 물었다. 그랬더니,
  “황벽스님이 노파심으로 그대에게 그렇게나 친절하게 하였는데 여기까지 와서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묻는가?”라고 하였다.
  임제스님은 그 말에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는
  “응, 황벽스님의 불법이 간단하구나[無多子].” 하였다. 그랬더니 대우스님은 당장에 멱살을 잡고 “이 오줌싸개 어린놈이 황벽스님에게서 쫓겨 와서는 방금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때렸는가?’라고 하더니 지금은 도리어 ‘황벽스님의 불법이 간단하다.’라고 말하는가. 너는 무슨 도리(道理)를 알았는가? 빨리 말해보아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임제스님은 대우스님의 옆구리에 주먹으로 세 번 쥐어박았다. 대우스님은 잡고 있던 멱살을 밀쳐버리고는 “너의 스승은 황벽스님이다. 나와는 관계없다.” 라고 하였다.
  천하의 대선지식인 황벽스님은 불교를 물은 것에 대하여 몽둥이로 사람을 한 번에 20대나 후려쳤다. 세 번에 걸쳐서 무려 60대를. 그렇게 불교를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들어가게 하였다. 그 일에 대하여 “그토록 노파심으로 친절하게 가르쳐 주더란 말인가.”라고 하신 대우스님의 말씀은 더욱 숨이 막힌다.



饒舌老婆는 尿牀鬼子라한대 這風顚漢이 再埒虎鬚로다
요설노파   요상귀자       자풍전한   재날호수

  말 잘하는 노파 대우 스님은 “이 오줌싸개 어린놈”이라 했고,
  황벽스님은 “이 미친놈이 또다시 여기 와서 호랑이 수염을 뽑고 있어!” 라고 했다.


饒舌老婆는 尿牀鬼子라한대 這風顚漢이 再埒虎鬚로다
요설노파   요상귀자       자풍전한   재날호수

거기에 오줌싸개라는 말 있었죠? 대우 스님이 “이 오줌싸개 같은 것이 아니 황벽스님께 쫓겨나서 말이야 여기까지 와서...”  이런 표현을 할 줄 아는 대우스님은 대단한 요설노파(饒舌老婆)야. 말솜씨가 뛰어나다 이 말이지. “요설노파(饒舌老婆)는 요상귀자(尿牀鬼子)라” 오줌싸개 같은 어린놈이라고 하는데

“자풍전한(這風顚漢) 재날호수(再埒虎鬚)로다” 이 미친놈이 재차 와서 호랑이 수염을 뽑는구나. 이것 아까 내가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았는데 “행록” 에서 다시 황벽스님을 찾아 가서 대우 스님 이야기를 하니까 황벽스님이 “이 놈의 자식 대우 오기만 해 봐라. 그냥 안 둘 것이다.”  하니까 임제 스님이 있다가 “그냥 안 둘 것이다 하고 기다릴게 뭐 있습니까? 지금 바로 한방 때리시지요.”  하면서 황벽스님을 쥐어박았다 구요. 황벽 스님을 쥐어박은 거라. 그러니까 “자풍전환(這風顚漢)”  이 미친놈이 다시 와 가지고서 호랑이 수염을 뽑는구나. 여기 어느 안중이라고 네가 함부로 까부느냐? 이렇게 이야기 한겁니다. 대단한 인가의 소리예요. 그 다음에


【무비스님 강설】
  죄인의 목에 쉬우는 칼을 쉬운 격이다.
  ‘아직 불교에 있어서는 잠자리에서 오줌이나 싸고 남의 집에 소금을 얻으려 다니는 어린아이 같다.’라는 대우스님의 말씀은 그 표현이 너무 절묘하다. 그래서 ‘말 잘하는 노파’라고 했다. 임제스님에게 ‘오줌싸개’라는 애칭을 쓰는 것은 천하의 대우스님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임제스님은 대우스님과 작별하고 다시 황벽스님에게로 돌아갔다. 황벽스님이 말하기를 “너는 이렇게 왔다 갔다만 하니 언제 공부를 마치겠는가?” “저야 다만 스님의 간절하신 노파심 때문입니다.”라고 하고나서 인사를 마치고 옆에 서 있었다.
  황벽스님이 묻기를 “어디를 갔다 왔는가?”
  “대우스님을 친견하고 왔습니다.”
  “대우스님이 무슨 말을 하던가?”
  임제스님은 앞서 있었던 대우스님과의 일을 다 말하였다. 그랬더니 황벽스님은,
  “어떻게 해야 이 놈 대우를 만나서 한 방망이 단단히 때려줄 수 있을까?”라고 했다.
  “뭘 기다릴게 있습니까? 지금 바로 한 방망이 때려주시지”하고는 곧바로 손바닥으로 황벽스님을 후려쳤다. 임제스님의 영원한 참 생명, 우주적 생명을 들어 보인 것이다. 그랬더니, 황벽스님은
  ?이 미친놈이 또다시 여기 와서 호랑이 수염을 뽑고 있어!?라고 했다.
  그러자 임제스님은 “할!” 하고 소리를 질렀다. 황벽스님의 불법을 간단하다고 말하던 자신은 그보다 더 간단하다.
  황벽스님은 “시자야, 이 미친놈을 끌고 가서 선방에 쳐 넣어라.”라고 하였다.
  임제스님이 호랑이 수염을 뽑은 솜씨를 독자들은 잘 살펴야할 것이다. 천하에 누가 또 호랑이 수염을 뽑은 사람이 있던가. “뭘 기다릴게 있습니까? 지금 바로 한 방망이 때려주시지”하고 곧바로 손바닥으로 황벽스님을 후려친 그 용기와 수단과 날랜 솜씨는 천하에 짝할 이가 없다.  더하여 “할”을 한 소식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말은 짧아도 사연은 길다. 이런 사연은 뒤편 행장(行狀)에서 잘 밝히고 있다. 임제스님의 마음과 그의 불교를 잘 이해하려면 이런 사연들을 익숙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반복해서 들으며 눈을 떠야 할 일이다.



巖谷栽松은 後人標榜이요 钁頭斸地하니 幾被活埋로다
암곡재송   후인표방     곽두촉지     기피활매

  임제 스님이 험한 골짜기에 소나무를 심은 것은 후인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것이요,
  또 괭이로 땅을 팠으니 황벽 스님은 거의 산 채로 생매장 당할 뻔했다.


巖谷栽松은 後人標榜이요
암곡재송   후인표방

암곡에 다가 소나무를 심는 것은 후인들에게 표방이요. 이것도 임제록의 저 뒤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钁頭斸地하니 幾被活埋로다
곽두촉지     기피활매

이것도 임제록 안에  나오는데 그때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죠. 괭이로서 땅을 찍으니... 땅을 찍어서 법거량을 하는 거죠. 거의 산 채로 묻힐 뻔 했다. 이런 말입니다.


【무비스님 강설】
  이 소나무는 마치 내 방 옆에 있는 소나무를 연상케 한다. 나는 그 소나무를 보고 늘 그렇게 생각하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말한다.
  이 이야기는 임제스님이 소나무를 심을 때 황벽스님이 물었다.
  “깊은 산에 이렇게 많이 심어서 무엇을 하려는가?”
  “첫째는 산의 경치를 아름답게 하자는 것이고, 둘째는 후인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함입니다.”하고는 괭이로 땅을 세 번 쳤다. 황벽스님이 말하기를, “비록 그런대로 괜찮기는 하나 자네는 이미 나에게 30방망이를 얻어맞은 꼴이다.”
  임제스님이 다시 괭이로 땅을 세 번 치면서 “허 허”라는 소리를 냈다.
  황벽스님이 “나의 종풍(宗風)이 너의 대에 가서 세상에 크게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소나무를 심은 것이 후인들의 본보기가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후인들의 본보기가 될 소나무를 심은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임제스님의 불교인 것이다. 온갖 지엽은 다 떨어지고 몸뚱이만 드러내 보인 부처님과 조사들의 그 마음, 그 불교인 것이다. 오늘날 같이 불교에 거품과 방편설이 난무하고 있는 이즈음에 지엽과 가식이 전혀 없는 졸가리뿐인 이 올곧은 불교가 만고에 후인들의 본보기가 되리라는 것이리라. 임제스님의 그 깊은 은혜에 뜨거운 가슴으로 감사를 느낀다.
  임제스님이 대중들과 함께 밭을 매는 운력(運力)을 하다가 황벽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는 괭이를 짚고 서 있었다. 황벽스님이 다가와서 말하기를, 
  “이 녀석이 피곤한가?”
  “괭이도 아직 들지 않았는데 피곤할리가요.” 그러자,
  황벽스님이 몽둥이로 곧바로 한 대를 때리니 임제스님이 그 몽둥이를 붙잡아서 던져버리고 황벽스님을 넘어뜨렸다. 황벽스님이 유나를 불러 “유나스님, 나 좀 일으켜다오.”
  유나스님이 가까이 와서 황벽스님을 일으키면서 “스님, 이 미친놈의 무례한 짓을 왜 용서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황벽스님은 막 일어나자마자 도리어 유나를 때렸다. 그 때 임제스님이 땅을 파면서 “제방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대개 화장을 하지만 나는 여기서 산채로 매장을 한다.”라고 하였다. 크게 죽은 뒤 다시 살아나는 큰 생명을 보였다.
  법을 거량(擧揚)하는 일도 이쯤 되면 누구나 혀를 내두르게 마련이다. 유나스님은 미친놈의 무례한 짓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누가 그 높은 뜻을 알랴. 황벽과 임제만이 느끼며 주고받는 진검싸움인 것이다. 불꽃을 튀기고 천둥이 치며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이다.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진동하며,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뒤엎어지는 일이다. 천(千)이면 천, 만(萬)이면 만이 산채로 매장당할 상황이다.



肯箇後生하야 驀口自摑하고 辭焚机案하야 坐斷舌頭로다
긍개후생     멱구자괵     사분괘안     좌단설두

  황벽 스님은 후생(後生) 임제 스님을 인가하다가 갑자기 입을 스스로 쥐어박았다.
  임제 스님은 황벽스님과 하직하고 떠날 때법을 전한 것을 증명하는 경상[机案]을 주어도 받지 않고 오히려 불사르라 하였다.
  그러나 황벽 스님은 가져가서 천하 사람들의 논란을 차단하게 하라고 하였다.


肯箇後生하야 驀口自摑하고
긍개후생     멱구자괵

후생을 인가하게 되죠. 후생은 임제 스님인데 황벽스님이 인가를 하다가 그만 스스로 잘못했다 하고 그만 입을 쥐어박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리고   

辭焚机案하야 坐斷舌頭로다
사분궤안     좌단설두

이건 임제 스님이 황벽스님 슬하를 떠나게 될 때 내 전법의 증거로 궤안(机案), 이 앞에 놓인 책상이예요. 스님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책상 같은 것. 그걸 하나 주는 거예요. 내가 물려준 이게 있어야 그대가 어디서든지 황벽의 법을 전해 받았다라고 증거로 제시할 수 있다하는 그런 뜻에서 스승이 준거예요. 그런데 임제 스님은 “시자야! 해가지고 시자를 불러서 이것 불태워라!”  이렇게 했어요. 세상에 그런 사람이 예요. 그야말로 청천백일에 벽력 치는 소리라.

아! 스승이.... 의발(衣鉢)과 같은 거죠. 가사(袈裟)하고 발우를 신표(信票)로서 전해준 것하고 똑같은 신표인데 그걸 갖다가 불 싸질러 치워라 이렇게  했다니까. 이거 어떻게 말리겠어요? 이런 임제를 세상에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어요. 천하에 하늘을 찌를 듯한 그러한 기개(氣槪)! 이 선기(禪氣)라고 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거예요.

“좌단설두(坐斷舌頭)” 라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이 책상을, 궤안을 가지고 있어야 뒤의 사람들이 시시비비(是是非非) 안 한다. 황벽 법을 전해 받았다는 그런 증거가 있으니까 설두(舌頭)를 끊을 것 아니냐! 앉은 체 설두를 끊는다. 시비를 끊는다. 이런 말이죠.


【무비스님 강설】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임제스님이 방 앞에 앉아 있다가 황벽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눈을 감아버렸다. 황벽스님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방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임제스님은 뒤따라가서 사과하였다. 그 때 수좌인 목주스님이 옆에 있었는데, 황벽스님이 “이 승려는 비록 후생이지만 <이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수좌스님이 “노스님께서도 아직 멀었는데 도리어 후생을 깨달았다고 인가하십니까?”라고 하니 황벽스님은 스스로 입을 쥐어박았다. 그랬더니 수좌스님이 “알면 됐어.”라고 하였다. 황벽스님이 수좌에게 점검을 당했다.
  또 한 가지 특기할만한 사실은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의 법을 받고 떠날 때,
  “어느 곳으로 가려는가?”
  “하남(河南)지방이 아니면 하북(河北)지방으로 갈까합니다.
  그러자 황벽스님은 곧 한 대 후려쳤다. 임제스님은 그 순간 황벽스님을 잡고 역시 손바닥으로 한 대 때렸다. 황벽스님은 크게 한바탕 웃고, 시자(侍者)를 불러서 스승 백장(百丈)스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선판(禪板)과 경상[机案]을 주었다. 그랬더니 임제스님은 시자에게 그것을 불태워 버리라고 하였다. 선판과 경상은 법이 아닌 가짜 물건이다. 가짜는 필요 없다는 식이다. 그 때 황벽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불태우는 일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너는 가져가서 뒷날 천하 사람들이 전법(傳法)의 문제에 대해서 시비할 때 증거를 제시하여 그런 논란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어찌 되었든 이 이야기가 황벽스님의 부촉을 받은 것을 증명한 것이 되었다.
  참으로 입제스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임제스님은 철두철미하게 적나라한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 사셨고 무위진인으로 보여주었다. 스승과 이별하는 마당에서도 그렇게 활발발(活鱍鱍)한 무위진인으로 이별하였다. 전법의 증거가 되는 신표(信標)에 대해서도 철저히 형식이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무위진인이 존재할 뿐임을 확연하게 알려서 뒷사람들에게 진정한 본보기를 남겼다.



不是河南이면 便歸河北이로다 院臨古渡에 運濟往來로다
불시하남     편귀하북       원임고도   운제왕래

  하남지방이 아니면 하북지방으로 돌아감이여,
  임제원은 옛 나루터에 임해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不是河南이면 便歸河北이로다
불시하남     편귀하북

“너는 어디로 갈래?”  이렇게 물으니까 하남(河南), 아니면 하북(河北)으로 가지요. 여기 앉아가지고 하남 아니면 하북, 두 곳 뿐이야! 북쪽 아니면 남쪽이라. 그것도 말 같지도 않는 거야. “스승이 어디로 갈래?” 하는데 서울 아니면 부산가지요. 서울이면 서울이고 부산이면 부산이지 왜? 그렇게 대답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구절구절이 그야말로 오장육부를 다 쏟아 놓는 거죠. 구절구절이, 사실은 그게 보여야 되는데 사실. 우리한테 가슴에 싹 스며들고.....

옛날에 공부를 골똘히 한 스님들은 이런 대목을 보고 그냥 미치고 환장하는 거야. 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하고 그냥.... 어떤 경전의 대목보다도 신바람이 나고 아주 감동적이고 그렇잖아요.

院臨古渡에 運濟往來로다 
원임고도   운제왕래

이건 임제원 이죠. 임제원의 옛날 항구, 지금 임제원 있는 데가 석가장(石家庄)이라는 도시인데 거기에 임제사(臨濟寺)가 있습니다. 거기가 바로 임제원이예요. 항구도시죠. 그러니까 말하는 것입니다. 항구도시에다 자리를 잡았는데,

중생들을 제도해서 실어 나르는 저 언덕으로, 피안으로 실어 나르는 그런 것 하고 연관 시켜서 이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운제왕래(運濟往來)라”  오고 가고 하면서 실어 나른다. 항구에 살면서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듯이 중생들을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오고 가면서 실어 나른다. 이런 표현으로 함축성 있게 표현을 했습니다.

불교의 명문(名文)이 뭐죠? 함허스님의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서 “설의서”  참 명문이죠. 원효 스님의 “발심장(發心章)” 같은 것은 천하의 명문이고, 야운비구의  “자경문(自警文)” 도 천하의 명문이고, 서문으로서 제일 손꼽히는 청양국사의 “왕복서(往復序)” 는 아주 천하의 명문으로 손꼽거든요. 임제 스님의 임제록 서문도 앞에 너절한 벼슬이름이 붙어서 그게 조금 흠이긴 하지만 아주 서문으로서 명문으로 칩니다. 그래서 이것을 줄줄줄∼ 잘 외우면 선방에 서 방부 받는데 무사통과라. 이것을 열심히 읽어서 입에 익숙하도록 하면 좋죠.


【무비스님 강설】
  임제스님이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풍을 드날릴 곳을 말하고 있다. 어느 곳으로 가던지 그 장소가 무슨 문제이겠는가. 황벽스님은 황벽스님대로 나는 나대로 인연을 따라 가고 인연을 따라 머무를 것이다. 어디를 가든 천지만물은 그대로가 모두 무위진인인데.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을 건지고 눈을 열어주면 되는 일인 것을. 실로 그 후 임제스님이 가서 머문 임제원은 하북의 진주 호타하라는 강포구의 도시 오늘의 석가장이란 곳이다. 임제원에는 지금도 그의 탑과 비석이 있다. 강포구에서 나그네들을 강을 건너게 하는 일과 사람들을 제도하는 일의 표현이 같기 때문에 ‘임제원은 옛 나루터에 임해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라는 표현은 너무도 절묘하다.



把定要津하니 壁立萬仞이로다 奪人奪境하야 陶鑄仙陀하고
파정요진     벽립만인        탈인탈경    도주선타

  요새(要塞)가 되는 나루터를 지키고 있으니 그 절벽의 높이는만길이나 되고,
  사람도 빼앗고 경계도 빼앗는 수단으로 선타바를 만들어 낸다.


把定要津하니 壁立萬仞이로다
파정요진     벽립만인

임제스님이 사람들을 제도하는 그런 모습을 표현하는데 ‘요진(要津)’ 아주 중요한 나룻 터란 뜻인데 군사요충지라는 그런 뜻이라. ‘파정(把定)’ 군사요충지를 딱 지키고 있으니까 양쪽으로 벽이 만 길이나 되는 벽이라. 도저히 기어오를 수가 없는데 그렇게 지키고 있다. 말하자면 임제 스님의 손아귀에 한번 걸리면 이제 빼도 박도 못한다. 거기서는 생명을 잃던지 깨닫던지 둘 중의 하나다. 이와 같은 뜻으로 임제 스님이 법을 펴고 가르치는 가풍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奪人奪境하야 陶鑄仙陀하고
탈인탈경     도주선타

사람도 빼앗아 버리고, 주관도 빼앗고 객관도 빼앗는다 이거야. 주관도 부정하고 객관도 부정해. 법문하는 자신도 부정하고 법문을 듣는 제자들도 부정해버려. 그런 부정과 부정을 그치면서 “도주선타(陶鑄仙陀)라”  선타바와 같은 훌륭한 인물을 만들어 낸다. ‘도주(陶鑄)’ 지어낸다 이거야. 거푸집에서 말하자면 모형을 떠내죠?

열반경에서 나오는 ‘선타바(先陀婆)’ 잘 아시죠? 현명한 의사로서 선타바∼ 하면 소금 가져오라고 하는지. 물을 가져오라고 하는지. 그릇을 자져오라고 하는지. 말을 대령하라고 하는지. 이런 것을 척 알아가지고 가져가는 거야. 그릇 가져가고, 물 가져가고 이런 식으로 하는 현명한 신하가 있었다하는 그런 뜻으로 그런 현명한 제자들을 만들어 낸다. “탈인탈경(奪人奪境)” 하면서 그러니까 얼러기도하고 쥐어박기도 하고, 당근도 주고 채찍도 쓰고. 제자들 가르치면서 계속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는다. 이거야. 후려칠 때는 후려치면서 달랠 때는 달래가면서 그러면서 좋은 인물을 만들어 냈다. 임제 스님이 후배들을 양성하는 그런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무비스님 강설】
  임제스님이 지키고 있는 곳은 불교 최후의 관문이며 요긴한 길목이다. 그 곳을 지나가지 않으면 불교의 세계에 들어설 수 없는 곳이다. 그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부처도 아니며 조사도 아니며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그 관문의 높이는 만 길이나 되는 높고 높은 요새다.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다 떠난 자리다.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한 경지다.
  사람들을 만나면 세상[객관]을 온통 부정해 버리는 방법과 그 자신[주관]마저 부정해 버리는 등등의 수단을 써서 건진다. 때로는 주관과 객관을 모두 부정하고, 때로는 주관과 객관을 모두 긍정하여 받아드린다. 이것을 사람들을 제접(提接)했을 때 네 가지로 구분하여 법을 쓰는 방씩으로 사구(四句) 또는 사요간(四料簡)이라 한다. 때로는 봄바람 같고 때로는 살을 에는 매서운 겨울바람 같다. 이러한 솜씨로 열반경의 선타바와 같은 총명하고 민첩하고 지혜로운 제자들을 길러낸다.



三要三玄으로 鈐鎚衲子로다 常在家舍하야 不離途中하니
삼요삼현     검추납자     상재가사     불리도중

  삼요삼현으로 수행납자들을 단련하였고,
  항상 집안에 있으면서 길거리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三要三玄으로 鈐鎚衲子로다
삼요삼현     검추납자

이것도 임제록 안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아주 어려운 법문이죠. 이런 삼요 삼현이라는 법문으로서 납자들을 단련한다. ‘검추(鈐鎚)’는 단련한다는 표현입니다. (망치. 재갈물림. 때리다) 이런 뜻이니까.

常在家舍하야 不離途中하니
상재가사     불리도중

항상 가사에 있으면서 도중을 떠나지 아니한다. 체(體)에 있던지 용(用)에 있던지, ‘가사(家舍)’는 집이고 ‘도중(途中)’은 길거리죠. 그러니까 항상 집에 있어. 그러면서도 도중사(途中事)를 환하게 안다 이거야. 이판사판 그러는데 이판에 있으면서 사판의 일을 환하게 알고 사판이지만 이판의 일을 환하게 알아. 경(經)도 밝고 선(禪)도 밝고 교(敎)에도 밝아.

행정도 밝고, 신도 단련도 잘 하고, 절 운영도 잘 해. 절 운영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선(禪)에도 밝고, 교(敎)에도 밝고, 뭐든지 경(經)만 갖다대면 무조건 다 경(經) 살림을 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다. “상재가사(常在家舍) 불리도중(不離途中)” 

여기서 조금 한마디를 붙인다면 여러분들 같이 주지 생활하시면서 일선 포교하시면서 또 한 머리 자기 단련을 위해서 자기 발전을 위해서 이런 시간을 갖는 것. 이거예요. 그러니까 여기도 저기도 어두우면 안 돼요. 스님들은 프로라 구요. 프로! 아∼이, 프로인데 불공하라면 불공하고 경(經) 살림 하라면 경 살림하고, 교리 강좌 하라면 교리강좌하고, 죽비 들고 신도들 참선 지도하라면 딱 가서 참선지도하고. 뭐 수좌만 참선지도 해야 되는가? 주지가 참선지도하면 안되란 법 어디 있어요? 다 해야 돼. 프로는 다 하는 거예요.

프로야구선수가 직구만 받아치고 커버는 못 받아치면 그게 프로로서 밥 먹을 자격이 되는가? 그거는 당장 퇴출이지. 그래야 돼. 우리 스님들이 프로 의식이 너무 없어! 수좌들 보고 불공 좀 하라하면 “아이고, 나는 못한다고”  주지가 불공 못하면 주지인가? 척 할 줄 알아야지. 아∼이 “신도법회가 있는데 오늘 내가 딴 일이 있으니까 좀 하라” 고 하면 “알았다고!”  척 올라가서 그냥 시기적절하게 척 법문도 하고 말이야 이래야 된다 구요. 무슨 비구다, 비구니다, 내가 승납이 얼마 된다, 안 된다. 신도들이 “스님! 승납 얼마입니까?”  이것 따집니까? 아니야! “행자스님!”  이런다 구요. 행자보고도 법문해 달라고 그래. 머리 깎고 먹물 옷 입으면 무조건 이건 프로로 취급해 버리니까. 그런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에 대해서 가르쳐 달라면 선이라고 못 가르치고, 무슨 교리라고 가르치고 이게 이유가 안 닿는 거예요. 스님들에게는. 선은 선(禪) 대로 가르치고 교리는 교리대로 가르치고 염불은 염불대로 하고 아∼이, 중생제도 하는데 무슨 짓인들 못해요. “상재가사(常在家舍) 불리도중(不離途中)”  이걸 꼭 염두 해 두세요. 이걸 확대해석하면요. 확대해석이 아니라 본래 그런 뜻이라. 어디에도 치우치지 말고 하라는 것. 중도(中途)! 중도! 하는데 중도 이야기도 정통 중도를 말씀드리지. 이게 중도예요. 이게 중도적인 삶이라.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무엇이든 다 수용하는 것.


【무비스님 강설】
  임제종풍(臨濟宗風)의 특징이라 할 삼구(三句)와 삼요삼현(三要三玄)과 사요간(四料簡)과 사빈주(四賓主)와 사조용(四照用)등이 있다
  임제스님이 말씀하시기를 “한 구절의 말[一句語]에는 반드시 세 가지 깊고 현묘한 문을[三玄門]을 갖추어야하고, 한 가지의 깊고 현묘한 문에는 반드시 세 가지의 긴요 한 점[三要]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방편도 있고 방편의 활용도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삼요삼현은 근기를 활용하는 세 가지의 양상을 나타낸 것이다. 결코 법문의 깊고 얕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세 가지로 활용하는 양상을 보여 수행납자들을 잘 단련하였다. 마치 무쇠를 두드려 강철을 만들고 나아가서 천하의 명검(名劍)을 만들듯이 하였다.   
  임제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한 사람은 영원히 길거리에 있으면서 집안을 떠나지 않고, 한 사람은 집안을 떠나 있으면서 길거리에도 있지 않다. 누가 인천의 공양을 받을만한가?”
  불교의 이상적 인물인 부처님을 달리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문수는 깨달음의 지혜를, 보현은 그 깨달음의 실천을 나타내는 인물이다. 깨달음과 그의 실천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다. 마치 몸과 몸짓의 관계다. 몸이 있으므로 몸짓이 있고 몸짓은 몸이 있어야 할 수 있다. 그들을 말할 때 ‘문수는 언제나 집에 있지만 길거리의 일을 떠나지 않고, 보현은 언제나 길거리에 있지만 집안의 일을 떠나지 않는다.’라고 한다. 임제스님은 그처럼 안과 밖을 겸하였고, 이(理)와 사(事)를, 선(禪)과 교(敎)를, 문(文)과 무(武)를, 지혜와 그 칠천을 완전하게 겸하여 어떤 일도 부족함이 없는 삶이였다.



無位眞人이여 面門出入이로다 兩堂齊喝 賓主歷然이요
무위진인     면문출입       양당재할 빈주역연

  무위진인이 얼굴을 통해 출입하고,
  두 집의 수좌가 동시에 ‘할’을 함에 주객이 분명하다.


無位眞人이여 面門出入이로다
무위진인     면문출입

임제 스님의 법문 중에서 아주 뛰어난 내용 중에서 하나죠.
“무위진인(無位眞人) 면문출입(面門出入)이라”  “차별 없는 참 사람” 

얼굴을 통해서 출입하면서, 들락날락 한다. 무슨 남녀 차별이 있습니까? 승속 차별이 있습니까?  비구, 비구니의 차별이 있습니까? 무슨 사미, 행자의 차별이 있습니까? 차별 없는 그게 진짜 사람이야. 그게 진짜 진인(眞人)이라고! 참 사람이라.

차별이 있는 것은 가짜 사람이야. 허울이야 그건. 임시방편이라고. 임시방편 따라가면 언제 끝납니까? 임시방편 따라 가면 끝날 날이 없어. 그러니까 “참 사람” 을 주장 하는 것입니다. 임제 스님의 법문 중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무위진인(無位眞人)”  이것을 첫 손가락에 꼽는 이들이 있어요. 첫 손가락에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이게 무슨 크게 교훈되는 말은 없으면서도 아주 의미심장하고 이 속에 다 있거든요. “면문출입(面門出入)” 한다 이거야. 여러분들의 얼굴 속으로 출입한다 이거야.

불법의 대의가 무엇입니까? 했을 때 아∼이, 묻는 그 놈이 불법대의인데 물으니 그것 당연히 맞아야지. 맞아도 싸지. 그래도 모르고는 또 대우 스님께 가서는 허물이 있느냐? 없느냐? 그렇게 했거든. 그러니 대우 스님이 보니까 기가 막히거든. 그렇게 친절하게 아∼, 세상에 그렇게 친절하게 잘 일러 줬는데도 그걸 못 알아듣고는 여기 와서 허물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니 참, 숨 넘어 간다. 내가 너 같은 놈을 보니까. 그 소리에 또 탁! 그냥 깨달아 버린 거야. 알아 버린 거지. 그것이 다 무위진인의 활발발한 전체 작용의 소실입니다.

兩堂齊喝 賓主歷然이요
양당재할 빈주역연

이것도 임제록에 나와요. 양당 수좌가 턱 이렇게 순식간에 척 마주쳤어. 일본의 스모라고 하는 씨름이 있는데 그거는 뭘 잡고 하는 게 아니라 상대하고 이렇게 하다가 눈이 착 마주칠 때, 동당 서당의 대표 수좌가 척 이렇게 하는데 똑같이 머뭇거리지도 않고 시간도 똑같이 눈에 착 부딪쳤어. 부딪치자 말자 동시에 ‘할’을 했어. 양당이. 스모 선수들이 가서 붙을 때 꼭 그렇게 합니다. 누구라도 눈을 딴 데 돌리면 그만 새로 시작하는 거야. 돌아가서는 막 소금을 뿌려가면서 별짓 다하다 다시 앉아가지고 척∼ 이렇게 고개를 드는데 상대하고 똑 같이 고개 들어서  바라보는 그 순간이 착 맞아 떨어져. 0.01초라도 어긋나면 또 다시 새로 시작해. 이게 그런 광경이었습니다.

“양당재할(兩堂齊喝)빈주역연(賓主歷然)이요”  거기도 주관, 객관이 있다 이거야. 거기에도. 똑 같은 0.0001초도 차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거기도 주인과 객이 있다. 주관과 객관이 역연이 있다 이런 말입니다.


【무비스님 강설】
  임제스님의 보고 듣고 하는 작용은 불조(佛祖)의 지위에도 속하지 않고 중생(衆生)의 지위에도 속하지 않는다.
  임제스님이 어느 날 법상에 올라 말씀하시기를, “붉은 고기 덩어리에서 한 사람의 무위진인이 있어서 항상 여러 분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그것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아라.”하였다.
  그 때 한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무엇이 무위진인입니까?”
  그러자 임제스님은 법상에서 내려와서 멱살을 잡고 말씀하시기를,
  “빨리 말해봐라.”
  그 스님이 머뭇거리고 있는데 임제스님이 잡았던 멱살을 밀쳐버리고 말씀하시기를,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 막대기인가.”
  라고 하시고는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벼렸다. 
  임제록에서 첫째가는 한 구절을 꼽으라면 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차별 없는 참 사람><참사람>이라고도 표현한다.  
  임제스님의 법석(法席)의 전장(戰場)에는 언제나 활과 칼을 서로 겨누고 있는 매우 긴장된 상황이었다.
  임제가풍을 표현하는 말로 <임제 할(喝) 덕산 방(棒)>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임제스님은 할을 잘 하고 덕산스님은 방을 잘 쓴다는 뜻이다. 그 날도 법상에서 수행납자들과 할을 주고받으며 법을 거량하였다. 그 날은 법을 거량하기 전에 벌써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의 두 선방에서 수좌가 서로 보는 순간 동시에 할을 한 적이 있었다. 어떤 스님이 그 문제를 들고 나와 임제스님께 물었다.
  “이럴 때 두 사람의 할에 나그네와 주인의 차별이 있습니까?”
  “나그네와 주인이 분명하지. 대중들이여, 임제의 나그네와 주인의 소식[賓主句]을 알고 싶으면 두 선방의 두 수좌들에게 가서 물어보라.”라고 하시고는 곧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照用同時하니 本珷前後요 菱花對像하고 虛谷傳聲이로다
조용동시     본무전후   능화대상     허곡전성

  비춤과 작용이 동시라, 본래 앞뒤가 없고,
  거울은 만상을 비추고 빈 골짜기에는 메아리를 전하네.


照用同時하니 本珷前後요
조용동시     본무전후

조(照)와 용(用)이 동시하니 본래 전후가 없다. 조(照)는 여기서 체(體)가 되고 용은 작용(作用)이 되고 하는데  이것도 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菱花對像하고 虛谷傳聲이로다
능화대상     허곡전성

능화(菱花)는 거울이예요. 거울로 상(像)을, 어떤 모습을 대하고 빈 골짜기에 메아리 소리를 전하는 것이다. 거울에 말하자면 상을 대하면 이뿐 사람이라고 더 비추어주고, 나쁜 놈이라고 안 비추는 그런 거울 없죠? 무심히 대중을 접한다 이거야. 그 사람이 승려가 되었든, 속인이 되었든 어떤 사람의 수준이 되었든 임제 스님은 항상 거울 같은 마음으로, 텅 빈 마음으로 누구든지 오면 다 비추어 준다. 그게 “허곡대상(虛谷對像)” 이야.

이것도 정말 배워야 할 일이죠. 수지하다보면 안 만났으면 하는 사람도 많고 왠지 좀 일분이라도 더 있다 가지. 저렇게 빨리 가는가? 섭섭한 사람도 많고. 이뿐 사람, 미운 사람 참 차별이 많은데 그거 극복해야 되는데 어렵죠. 상당히...

“능화대상(菱花對像) 허곡전성(虛谷傳聲)”  이게 바로 그런 차별 없는 마음을 쓰고 중생들을 제도 했다하는 그런 임제 스님의 모습입니다.


【무비스님 강설】
  방편으로 본다면 수미산을 겨자씨 안에 들려놓는 일이다. 그 진실에 있어서는 위에는 하늘이요 아래는 땅이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승려는 승려고 속인은 속인이다. 또 비춰보는 입장에서는 삼천대천세계와 온 우주를 남김없이 다 비취 본다. 그 작용을 하는 데는 할과 방이 번개 치고 태풍 불고 폭우 내리듯 난무한다.
  임제의 사조용(四照用)이란 것이 있다. 역시 법을 쓰는 경우의 한 예로써, 임제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떤 때는 먼저 사람을 비추어 관찰하고 뒤에 작용을 보이며[先照後用], 어떤 때는 먼저 작용을 하고 뒤에 관찰한다[先用後照]. 또 어떤 때는 관찰하고 작용하는 것을 동시에 하며[照用同時], 어떤 때는 관찰하고 작용하는 것을 때를 달리 한다[照用不同時].” 라고 하였다. 
  본문의 말처럼 사람을 관찰하는 것과 열어주고 보여주는 작용은 일정하지 않다. 오는 사람의 근기와 수준과 성향에 따라서 그 법을 쓰고 방편을 쓰는 것이 다르다. 본래 앞뒤가 없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시중(示衆)에서 설명이 있을 것이다.
  임제스님이 찾아오는 납자를 알아보는 데는 이쁘고 추하고 잘나고 못나고를 가려내는 것이 마치 거울과 같다. 남자가 오면 남자를 비추고 여자가 오면 여자를 비춘다. 서양 사람 동양 사람을 너무도 밝게 잘 비춘다. 머리카락하나 빠뜨리지 않고 소소영영하게 비춰내듯이 오는 사람들을 소상하게 살핀다. 근기와 수준과 그 마음 씀씀이를 알아보는 것이 이렇게 거울 같다.
  때로는 텅 빈 골짜기에 메아리 울리듯 가 닫는데도 없이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물에 비친 달그림자 같다.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올리는 종소리 같다.



妙應珷方하야 不留朕蹟이로다
묘응무방     불유짐적

신묘하게 대응하는 솜씨는 종잡을 수가 없어서 그 자취를 남기지 않았도다.


妙應珷方하야 不留朕蹟이로다
묘응무방     불유짐적

신묘하게 대응하는 거죠. 신묘하게 대응하는 것은 종잡을 수 없다. 어떤 방향이 없다 이거야. 개구리가 어디로 뛸 줄 모른다 하듯이 임제 스님은 대중 중에서 어떤 사람이 와도 한결같이 하지 않고 대응 하는 것이 아주 신묘(神妙)해. 그래 “불유짐적(不留朕蹟)” 이야. 자취가 없어.


【무비스님 강설】
  이렇게 하여 임제스님의 제자들을 훈도하는 능대능소(能大能小)하고 능살능활(能殺能活)하는 신묘불측(神妙不測)한 솜씨는 불교사에 독보적 가풍을 세운 예가 되었다. 사람들을 제접하는데 출신지역과 남녀노소를 따지랴. 근기를 따라 응하여 주는 데는 자신의 지금 상황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모두가 큰마음 큰 작용이 활달자재하고 예측 불가능한 모습이다. 여기까지는 임제스님의 법의 깃발을 세우고 사방에서 모여오는 사람들을 제접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기능과 활동작용[機用]을 말하였다.



拂衣南邁하야 戾止大名 하니 興化師承이라 東堂迎侍로다
불의남매     여지대명      흥화사승     동당영시

  옷깃을 가다듬고 남쪽으로 내려가 대명부에 머무르니,
  흥화 스님은 임제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사람이라 스님을 동당에 모시니라.


拂衣南邁하야 戾止大名 하니
불의남매     여지대명

옷을 떨치고 남쪽으로 가서 대명부라고 하는 곳에 머물게 되었으니

興化師承이라 東堂迎侍로다
흥화사승     동당영시

그때 흥화 스님이 임제 스님의 법을 이어서 모시게 되는 거죠.  “동당영시(東堂迎侍)로다”  동당에서 스님을 맞아서 모시게 되었다.


【무비스님 강설】
  임제스님 말년 어느 날 병란이 일어나서 자리를 옮겼다. 남쪽 대명부라는 곳의 흥화사였다. 그곳에는 이미 제자 흥화존장스님이 교화를 펴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흥화스님이 방장이었고, 임제스님은 동당에 모셔서 한주(閑住)로 잘 받들었다.


 
 
銅甁鐵鉢이요 掩室杜詞하니 松老雲閑하야 曠然自適이로다
동병철발     엄실두사     송노운한     광연자적

  구리로 된 물병과 쇠로 만든 발우뿐이요. 방문을 닫아걸고 말을 하지 않았다.
  소나무는 이미 늙었고 구름은 한가하여 시원스레 유유자적하도다.

銅甁鐵鉢이요 掩室杜詞하니
동병철발     엄실두사

‘동병(銅甁)’ 구리와 철로 만든 바리떼(발우), 구리병과 철 바리떼다. 이거야. 가진 것으로는 그것이었다. “엄실두사(掩室杜詞)”  집을 가리고 말을 막았다는 말은 문을 닫아걸고 말도 안하고 법문도 안 했다 이거야. 법을 흥화 존장 제자에게 다 물려주었으니까 그리고는 어떻게 살았느냐?

松老雲閑하야 曠然自適이로다
송노운한     광연자적

참, 글자 여덟 자로서 ‘노송(老松)’ 천하의 대 선지식의 말년! 법도 다 물려주고 법문도 안하고, 그러면서 마지막 남은 생애를 보내는 모습을 노송(老松), 노송나무에 구름이 한가하게 오고가는 그런 모습과 같이 임제 스님은 그렇게 살았고 “광연자적(曠然自適)”  툭 트이고 자유자적한,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그런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송노운한(松老雲閑)광연자적(曠然自適)”  아주 표현이 참으로 좋지요? 그 다음에


【무비스님 강설】
  흥화사에 온 후로 가진 것 없고 하는 일도 없어서 노년을 보내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가진 것이라곤 기껏해야 구리로 된 물병과 밥을 담는 철발우 뿐이다. 제자 흥화스님이 대중들을 훈도하니 할 일도 없다. 문을 닫고 사니 할 말도 없다. 마치 부처님이 마갈타에서 성도하시고도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를 뜻하는 문을 닫은 일[摩竭掩室]과 같다. 달마대사의 소림면벽과도 같으며, 유마대사가 비야리성에서 입을 닫은 일과도 같다. 교화의 일이 모두 끝난 것이다.
  늙으신 노년의 모습은 운치 있는 노송처럼 너무 멋있다. 푸른 하늘 저 멀리 흘러가는 흰 구름같이 그렇게 한가롭고 여유로울 수 없다. 세상사나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솜털처럼 홀가분하다. 텅 비고 시원스러워 유유자적, 자유자재할 뿐이다. 노선사로서, 수행자로서 가장 이상적인 노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생각하게 한다.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발길 멎는 대로 쉬다가
   때때로 머리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날다가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서산에 해는 지고 저녁 빛은 어두워지려 하는데,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面壁未幾에 密付將終이여 正法誰傳고 瞎驢邊滅이로다
면벽미기   밀부장종     정법수전   할려변멸

  면벽하고 앉으신 지 오래지 않아 은밀히 입멸 후의 뒷일을 부촉하였다.
  “정법을 누가 전할 것인가. 눈 먼 당나귀에게서 없어지리라.” 하셨다.


面壁未幾에 密付將終이여
면벽미기   밀부장종

열반의 모습은 면벽하고 앉아서 얼마 되지 아니해서 “밀부장종(密付將終)”  장차 입적할 것을 가만히 알리죠.

正法誰傳고 瞎驢邊滅이로다
정법수전   할려변멸

그러면 스님의 정법을 누가 전해 받겠습니까? 하니까, 눈먼 당나귀에게 가서 내 법이 없어지겠다. 이렇게 표현을 했어요. 그런 구체적인 내용이 뒤에 나옵니다. 그 다음에


【무비스님 강설】
  여기까지는 임제스님의 말년의 수용을 밝힌 것이다. 스님은 임종하실 때 앓은 일도 없었다. 당나라 함통 8년[서기 867년] 정해년 정월 10일 옷을 단정히 하고 반듯이 앉아서 제자 삼성(三聖)스님과 몇 마디의 문답을 마치고 고요히 가셨다. 행록에 나타난 열반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임제스님이 열반하실 때 자리에 앉으셔서 말씀하였다.
  “내가 가고 난 다음에 나의 정법안장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여라.”
  삼성스님이 나와서 사뢰었다.
  “어찌 감히 큰스님의 정법안장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이후에 누가 그대에게 물으면 무어라고 말해 주겠는가?”
  삼성스님이 “할!”을 하므로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 먼 나귀한테서 없어질 줄 누가 알겠는가?”
  말을 마치시고 단정하게 앉으신 채 열반을 보이셨다.
  일천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모두 임제스님의 정법안장에 목을 매고 있다. 너도 나도 임제스님의 법손이라고 자랑들이다. 망승(亡僧)에게까지 “속히 사바세계에 오셔서 임제문중에서 길이 인천의 안목이 되소서.”라고 축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 먼 나귀한테서 없어지리라[滅].”라는 이 한마디 말을 아마도 30년은 좋이 참구해야 하리라.



圓覺老演이 今爲流通이라 點檢將來하니 故無差舛이로다
원각노연   금위유통     점검장래     고무차전

원각 종연 스님에게 이제 이 임제록을 유통하려 하기에 점검해보니 아무런 잘못이 없도다.


圓覺老演이 今爲流通이라
원각노연   금위유통

이 어록을 간행해서 유통하게 된 그런 사연을 여기서 이야기 하는데 원각 종연선사가 이 어록을 들고 와서 책을 내서 유통시키려고 했어요. 원각노연(圓覺老演), 원각 종연스님이 지금 유통하기위해서 들고 왔는데 마방이라는 분에게 서문을 써 달라고 하면서 원고 뭉치를 들고 왔어.

點檢將來하니 故無差舛이로다
점검장래     고무차전

그래서 자세히 살펴봐요. 점검해 보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임제 스님에 대해서 하나도 틀린 게 없어. “고무차전(故無差舛)로다” 틀림이 하나도 없더라.


【무비스님 강설】
  원각스님은 당시의 어록을 간행하고 유통시키는데 매우 권위 있는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운문광록(雲門廣錄)도 중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제자도 1천 2백여 명이나 되며 북송(北宋)의 휘종황제의 청으로 궁중에서 설법한 일도 있는 스님이다. 그 스님이 교감하여 간행하면서 서문을 쓴 마방(馬防)에게 점검해보고 서문을 쓰게 하였던 것이다. 점검한 결과 특히 임제스님의 종지(宗旨)를 드러내는데 아무런 손색이 없으며 완전하다는 뜻이다.
  기록을 남기는 것은 때로 사실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일이다. 세존이 아무리 훌륭한 성인으로서 일세를 풍미했다하더라도 그 기록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런 분을 알았겠는가. 우리가 모른다면 그 또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임제스님도 역시 같은 경우다. 그래서 이 어록을 간행하여 유통시킨 원각스님의 공은 바닷물을 먹으로 삼아 쓰고 또 쓴다 하더라도 다할 수 없다.



唯餘一暍하야 常要商量하노라 具眼禪流는 冀無賺擧어다
유여일할     상요상양       구안선류   기무잠거

  오직 일할(一暍)을 남겨놓고 헤아려 보기를 바라노니,
  눈을 갖춘 선사들은 바라건대 잘못 거량하지 말라.


唯餘一暍하야 常要商量하노라
유여일할     상요상양

하나의 ‘할’이 남아있어. 요게 생명 있는 표현이죠. 상양하기를 요하노라. 잘 헤아려 봐라. ‘할’이 하나 아직 남아 있는 ‘할’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소화해 낼 것인가? 그것 하나만 지금 남았다 이거야.

具眼禪流는 冀無賺擧어다
구안선류   기무잠거

눈을 갖춘, 눈 밝은 선객들은 바라노니 잘못 들지 말라. 속아서 잘못알고 거량하지 말라 이거야. 임제 스님이 ‘할’을 여러 번 했거든요. 그 ‘할’한 것은 그때 하는 ‘할’이고 아직도 ‘할’이 하나 남아 있어. “유여일할(唯餘一暍)이야” 하나의 ‘할’이 남아 있다 이거야. 계속 남아 있어. 지금도 이 ‘할’은 남아 있어요. 그것 함부로 멋모르고 함부로 쓰지 말라 이거야. 우리 큰스님들 보면 임제 스님 흉내 낸다고 법문할 때 ‘할’ 잘 쓰죠? 이것 다 임제 가풍이 예요. 비록 모방이긴 하지만. 짝퉁 ‘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임제 스님 흉내 낸 거야.
하하하하하∼ 신기하잖아요. 하하하하하하∼

임제 스님 같이 진짜 명품 ‘할’을 해야 되는데 아! 이것 명품 ‘할’을 한다고 하는데 그만 짝퉁 ‘할’이 되어버려. 하하하하∼ 그런데 그것도 적절하게 좀 살펴가면서 해야 되는데 큰스님 열반하신데 와 가지고 조사(弔辭)하면서 ‘할’하는 것은 암∼만 임제 스님 ‘할’이 좋고 임제 스님 흉내 내고 싶더라도 조사하면서 ‘할’하는 것은 너무 안 맞는 게 아닌가? 이게 안 맞는 게 또 임제 가풍인지 알 수는 없으나∼ 


【무비스님 강설】
  아직도 한 “할”이 있다. 언어문자로 임제스님의 사상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로 다 드러냈으나, 언어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임제스님의 “할”의 낙처(落處)는 아직 그대로 있으니 언어문자를 떠나고 사량분별을 떠나서 잘 거량해 보라. 그렇다고 도안(道眼)을 갖춘 선사로써 임제할을 함부로 잘못 거론하지는 말라. 임제스님이 보고 있느니라. 깊이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서문을 쓴 마방의 살림살이다.


그런 예들도 있더라구요. 사실 어떻게 보면 종교인의 생활이라는 게 모양 갖추는 일이거든. 그 모양새가 잘 나와야 된다고. 모양이 잘 나와야 되는데 “할” 도 “할”  할 자리에 제대로 하면 참 “할” 이 빛을 발하지. “할”  할 자리가 아닌데 “할” 을 하면 이게 모양이 아닌 거야. 웃기는 “할” 이 되어 버리는 거야. 어찌되었든 우리는 임제 후손이고 또 임제 스님의 후손으로서 임제 가풍을 아는 만치 또 답습을 하고 또 드날리고 하는 것은 그건 좋은 모습이 아닐까하는 이런 생각도 들게 돼요.


宣和庚子中秋日에 謹序하노라
선화경자중추일에 근서하노라

  선화경자 중추일에 서문을 쓰다
 

宣和庚子中秋日에 謹序하노라
선화경자중추일에 근서하노라

  1120년 임제 스님이 열반하시고 254년이 지난 뒤에 사 이 <임제록>이 비로소 편찬이 되어 출판이 되게 됩니다. 상당히 세월이 많이 흘렀죠? 요즘 같으면 책 만들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하지만 옛날에는 쉽지가 않았고 시국도 어수선하고 그래서 상당히 세월이 흐르고 나서 이렇게 했는데 그래도 살펴보니까 그동안 곳곳에 임제 스님에 대한 기록 같은 것, 또 <임제록> 필사본이 많이 돌아다니고 하는데 그런 것을 전부 수집해서 맞춰보니까 하나도 틀린 게 없어서 내가 이렇게 나의 명예를 걸고, 거창한 명예를 걸고 서문을 책임 있게 쓴다. 이런 뜻에서 마방(馬防)이라는 분이 했습니다.

☀ 

“‘일물서(一物序)’ㆍ‘왕복서(往復序)’ㆍ‘마방서(馬防序)’. 이것은 불교의 3대 서문(序文)으로써 우리가 알아주는 글이다.”    - 무비스님  
“지금 이 순간이 진정한 삶이며 참다운 행복”

글쓴이: 문수법공양회  조회수 : 14  2008.01.09 17:54  [2008.1.12 불교신문]

[염화실 법향] 범어사 무비스님

“부처님의 깨달음은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 깨달음의 내용인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역시 인간사에서 다시없을 금과옥조(金科玉條)이며 인생의 지침입니다. 이 소중한 가르침을 같은 마음으로 읽고 되새기며 삶에 활용해서 지혜롭게 인생을 영위해 가는 도반과 법우로서 이 전법도량에서 또 한 해를 맞이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승가대학원장과 교육원장을 역임한 대강백 무비스님이 회원 1만1000여명이 드나드는 인터넷 전법도량 ‘염화실(http://cafe.daum.net/yumhwasil)’에 띄운 새해 인사말이다.

스님은 2003년 몸이 불편해 교육원장 소임을 놓은 이후에도 범어사승가대학장 소임을 맡아 사미들을 위한 강의까지 손수 챙기기도 했고 지난해에는 서울에서 일반대중을 위한 <신심명> 특강, <서장> 강좌 그리고 새해 들어서는 비구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법화경> 강의까지 마다하지 않고 열의를 보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진정한 삶이며 참다운 행복”
“어디에 있든 있는 곳에서 주인 되라
자신은 지고한 가치 지닌 존재라는 점 놓치지 말아야” 

<사진설명> 전통방식의 승가교육 뿐 아니라 인터넷과 출판 등으로 사부대중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알리기 위해 매진하고 있는 무비스님.

스님이 인사말에서 도반들에게 덧붙였듯이 ‘지금까지 그렇게 정진하셨듯이 세세연연 언제나 건강하고 쉼 없이 정진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서 새해 첫 법문을 듣기 위해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선찰대본산 부산 범어사 염화실을 찾았다.

 ‘만사형통하길 바랍니다’ ‘건강이 최우선입니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댁내에 불은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해가 바뀌면서 수없이 듣고 건네기도 하는 기분 좋은 인사말이며 덕담이다. 스님도 역시 인터넷 전법도량 염화실 도반들에게 “소중한 부처님의 진리의 가르침을 더욱 널리 전하시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과 일체 존재의 참다운 이치를 깨달아서 현명하고 지혜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다같이 정진하십시다”라는 말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행복’이라는 말은 누구나 마찬가지로 하고 싶고 듣고 싶고 어쩌면 꼭 이루어져야 할 간절한 바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위한 첩경이라도 찾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과연 행복으로 가는 첩경은 있을까?

생각과 반대로 스님은 “제일 어려운 문제”라고 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행복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모두 경제력 오직 그 경제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하고 행복할 수 있다”며 ‘경제’만을 부르짖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개인소득 4만불(달러)을 목표로 한다고 떠들고 있는 데 소득이 4만불 되는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그들의 행복지수 도덕지수는 과연 그 4만불을 희망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들 정도로 충족한가를 살펴보면 답은 뻔할 겁니다.”

“불교나 유교나 모두 행복은 다 자기의 ‘분(分)’을 알고 만족을 느끼는 데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그 ‘분’을 알고 분에 충실하고 그렇게 함으로 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봅니다. 저는 수연부작(隨緣不作)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인연에 따라서 조작 없이 억지를 쓰지 않고, 무리수를 쓰지 않고, 자기 능력 이상을 바라보기 위해 되지도 않는 것을 하지 않고 살면 현명한 삶이라고 봐요. 자기 능력에 충실하고 그 이상이 것에 대해 무리하게 바라지 않고 사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현명해야 행복합니다. 현명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아요.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입니다. 지혜로워야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직장에서 뒤처지지 시작하면 결국 경제적으로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게 되고 불화를 일으킬 수도 있는 데 그래도 ‘분’만을 생각해서 양보하고 또 양보해야만 하는 것일까? 가정, 직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이런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떻게든 이해시켜야죠. 그렇지 않으면 가족이 바라는 그 경제능력을 충족시키기 위해 어떻게 하겠어요. 무리수를 두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정말 흔한 문제이면서 한편으로는 제일 큰 과제이기도 합니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인간관계가 미묘한 것은 당사자만이 느끼는 미묘한 부분이라 설명도 안되고 같은 경우도 하나도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잘 살펴서 균형감각을 유지해야 되겠죠. 너무 양보만 해도 안되고 남을 짓밟고 앞으로만 나가도 안되고 불교의 이상적 중도적 삶,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양쪽을 다 수용하는, 겸손과 양보의 미덕도 살리면서 경쟁에서도 뒤처지지 않는 ‘중도적 삶’ 그 균형감각을 잘 유지하는 것이죠.”

스님은 이 ‘분’과 ‘중도적 삶’은 한 개인은 물론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에게도 통용되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우리 사회현상을 볼 때 특히 지도자들을 보면 정직성을 더 요구하고 싶어요. 어떻게 보면 균형감각보다 더 필요한 일이 아닐까. 정직성만 가지고 있으면 지금 벌어놓은 돈만 갖고도 잘 살 수 있는데, 정직하게 살면 잘 살 수 있고 행복하게 살수도 있는데 그렇게 안받아 들여지고 있어요. 정직성이 실종돼 버리고 나니까 우리가 돈을 갖고 있으면서도 늘 배가 고픈 거예요. 이런 상태에서는 4만불 아니라 40만불의 소득목표치를 달성해도 우리마음은 늘 허기질 수밖에 없어요. 특히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정치 경제분야, 종교 교육분야 더구나 법을 담당하는 그런 분야는 말할 것도 없이 정직이 가장 중요하겠죠. 정직성이 무너지면 세상이 너무 혼란해질 것 같아요. 그런 일 없겠지만 만약 대통령이 와서 ‘무엇이 제일 급한 문제냐’고 내게 물으면 ‘정직성 회복이 가장 급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분’, 균형감각, 정직성은 온전히 스스로의 마음에 달린 문제일 수밖에 없는 데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더 막막하게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스님은 평소 즐겨 쓰는 ‘명구’를 들려주면서 새해 덕담으로 대신해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디 있든 자기 있는 곳에서 주인이 되라. 뜻은 한없이 깊고 넓지만 가볍게 해석할 수도 있는 게 이 말”이라고 했다. “‘주인의식 갖고 내 것 같이 돌보고 관리하라’해도 좋을 것 같아요. 어떤 회사에서는 그렇게 쓴다는데 참 좋지요. 사실 그런 의미로만 써도 고마운 일이죠. 물론 그 보다 큰 의미가 있죠. 우리는 모든 현상에 자기를 빼앗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주 지고한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점을 놓치지 말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헐값에 팔아넘길 일이 참으로 많은 데 그러지 말고 자기의 그 지고한 가치를 잘 간직하라는 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잊지 말아야 할 구절임에 틀림없다. 자신은 동요하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는 것, 타인이 하는 일에 끌려 다니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자신의 본심으로 주체자가 되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다 행복하다는 것이다.

스님은 “그것이 바로 진정한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며 자신에게 불이익과 손해가 돌아오고 비방이 돌아오더라도 그것을 다 받아들이고 그것에 반응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스님은 <작은 임제록>을 펼쳐 보이며 다시 강조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거나 의지해서는 안되며, 어떤 가르침과 사상을 따르거나 그것에 지배되어서도 안된다. 부처님과 보살들이나 조사들에게까지도 의지하거나 끌려 다녀서는 안되며 오직 ‘차별 없는 참 자기’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참 자기가 있는 한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더라도 지금 그 자리 그 순간이 진정한 삶이며 참다운 행복이다.”


주석처인 범어사와 더불어
인터넷서도 1만여명 정진중

무비스님에게는 염화실(拈花室)이 세 개다. 하나는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부산 범어사 염화실이고 또 하나는 1만1000여명의 대중들이 정진하고 있는 인터넷 전법도량 염화실이다.

첫 번째가 한국불교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의 염화실이라면 두 번째 그것은 인터넷을 통해 불교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의 소통의 장인 것을 생각한다는 세계불교의 염화실이다. 도반들의 공부를 살피고 대화도 하다 보니 스님의 하루일과중 4~5시간은 여기 인터넷도량의 염화실에서 지낸다. 그곳에는 스님의 글은 물론 각종 육성법문에서 동영상법문에 이르기까지 스님을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방들이 즐비하다. 실려 있는 경전과 어록들을 한 번 둘러보면 이곳이 또한 인터넷 장경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세 번째 염화실은 스님이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건네준 <작은 임제록>에서 찾았다. 그 책을 펴낸 ‘도서출판 염화실’이다. 인터넷 염화실 도반과 스님 주변의 자원봉사인력들이 함께 가꾸어가는 곳이다 보니 실비만으로 책을 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인지 책을 펼치면 여기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을 복사하기를 환영합니다. 널리 법공양하면 공덕이 무량합니다.”

부처님 가르침, 큰스님 말씀을 전하는 책에 ‘비매품’ ‘복제엄금’이라는 말이 적혀있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일까? “아는 사람들끼리 십시일반으로 능력을 모으다보니 일반 출판사에서 책을 낼 때보다 그 비용이 3분의 1 정도 밖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법보시도 3배 이상 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요즘 스님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기쁨이다. 법보시하다보니 출간 보름만에 재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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