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법어집
영원한 자유
가야산 법석을(法席)을 펴며
이처럼 무더운 삼복 더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이 먼 곳을 찾아
와서 이러한 수련법회를 가지는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불
교를 올바로 이해하고 또 바르게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데에 있을 것
입니다.
내가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불법(佛法)은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
력'을 가진 우리들 자성(自性)을 깨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말과
문자의 이해와 터득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학생들을
모아놓고 말과 문자로써 불교를 설명하는 까닭은, 비록 말과 문자를 아
는 것만으로 바른 불법을 얻을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하여도, 불법을 알
리려면 먼저 그 말과 문자를 가지고 설명하는 단계가 필요하기 때문입
니다. 다시 말해, 불법 그 자체는 결코 말과 문자에 매이지 아니한 것
이나, 다만 말과 문자를 빌어 어떠한 방법으로 어떻게 하여야 자성을
깨칠 수 있는지를 설명할 뿐인 것으로서, 지금 설법하고 있는 이 말과
문자가 실지의 불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하늘에 있는 달을 보라고 할 때에 그냥 말로만
"달을 보라" 하면 사람들은 잘 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 말
을 듣고 곧바로 달을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달을 보라"고 말함과 동
시에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주면 많은 사람들이 좀더 쉽게 고개를 들
어 달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개의 사람들이 그럴 때
에 손가락만 쳐다보고 달은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볼 뿐 영원토록 달은 보지 못하고 만다는
것이다.
불법(佛法), 곧, 부처님의 가르침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팔만사천 법문(法門)도 따지고 보면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말과 문자를 좇느라고 그에 얽매이는 일이 없이 궁극의 목표
인 저 달, 곧, 불법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문자로도 나타낼 수
없는 불법(佛法)을 바로 알 수 있겠읍니까? 그것은 '영원한 생명과 무
한한 능력'을 가진 우리의 자성(自性)을 바로 깨침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러면 또 그 자성은 어떻게 하여야만 바로 깨칠 수 있는가? 그것은 선
정(禪定)을 닦음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선정을 닦
아야 하는가? 선정을 닦는 데는 화두참구(話頭參究)가 가장 빠른 길입
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성취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화두참구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니 이 법문을 들을 때
에도 화두를 잘 챙겨서 화두 가운데서 법문을 들어야 합니다. 화두를
내버리고 말만 들으면 이 법회를 하는 근본 뜻과는 완전히 어긋나게 됩
니다.
지금 여기 모인 대중 가운데는 화두참구를 잘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 화두가 무엇인지도 모르거나 또 안다 하여도 마음에 간직하여 화두참
구를 부지런히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모두들 고생고생하
며 이 무더운 날 부처님 앞에서 삼천 배(拜)를 했읍니다. 그 고생이 헛
되지 않도록 화두를 가지지 아니한 사람들을 위해서 화두를 말할 터이
니 앞으로 열심히 참구해 봅시다.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삼 서근이니라.
여하시불(如何是佛)
마삼근(麻三斤)
운문종(雲門宗)의 동산(洞山) 수초(守初)선사는 크게 깨친 대 선지식
이었읍니다. 그에게 어떤 스님이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하
니 수초 큰스님은 "삼 서근"이라고 대답하였읍니다. 이 대답이 퍽이나
엉뚱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하였는가?"
이것이 화두(話頭)입니다.
우리 대중은 이 법문을 들으면서 항상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물었는
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하였는가?'하며, 의심하고 의심해야 합니다. 이
렇게 의심하는 것이 바로 화두참구하는 법입니다.
이 화두에서 큰스님이 '삼 서근' 이라고 대답한 말씀은 말 자체에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깊숙한 곳에 그 뜻이 있읍니다. 그것을 언
외현지(言外玄旨)라 하니, 곧, 말 밖에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
밖의 깊은 뜻, 곧, '삼 서근'이라고 대답한 그 근본 뜻을 바로 참구하
여야만 불법(佛法)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 서근'이라고
한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지, 그러지 않고 이것을 그냥 놓아 둔 채로
라면 아무리 팔만 대장경을 다 외운다 하여도 그것은 외도(外道)가 될
뿐입니다.
이미 화두를 가진 사람은 그 화두를 참구하고,화두를 미처 배우지
아니한 사람은 지금 일러준 이 '삼 서근'이라는 화두를 참구하도록 합
시다. 그리하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이를 테면 법문을 들을 때
나 좌선을 할 때나 밖에 나가 돌아다닐 때나 또는 다른 사람과 말할 때
나 늘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했는가?' 하고 의심하는
화두참구가 우리 생활의 생명선이 되어야 합니다. 화두참구를 마음속으
로 계속하면서 법문을 들어야만 자성을 바로 깨칠 수 있읍니다. 그저
말만 따라가서는 절대로 불법을 바로 알 수 없으며 자성을 바로 깨칠수
없습니다.
화두참구를 부지런히 하면서 이 법문을 잘 들어주길 바랍니다.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하였는가?"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하였는가?"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하였는가?"
불기 2512년(1968년) 8월
해인사 대적광전
제 1 장 종교의 목표
1. 영원한 행복
불교는 기독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삼대 종교의 하나라고 일컬어
집니다. 이들 종교는 저마다 내세우는 교조(敎祖)가 다르므로 그 내용
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읍니다. 그러나 그 교조와 내용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종교가 갖는 궁극적인 목표는 다 같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서울로 간다고 할 때에 북쪽에서 가든 남쪽에서 가든 바다에서 가든 육
지에서 가든 비록 그 방향과 수단은 제각기 다르지만 서울에 간다고 하
는 근본 목표는 다 같듯이, 종교가 지향하는 목표는 어느 종교에서나
다 같습니다.
그러면 그 공통되는 종교의 목표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상대(相對)적이고 유한(有限)한 세계에서부터 절대(絶對)적이고
무한(無限)한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
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같이, 태어남과 죽음이 있어 고
통과 번뇌가 가득찬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일
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에는 오히려 괴로움만 더해 줄 뿐입니
다. 그러나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는 이 고통의 현실을 벗어난 자유의
세계로서 영원한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이고 무한한 이
세계 곧 생멸의 피안(此岸)에서부터 절대적이고 무한한 저 세계, 곧 해
탈의 피안(彼岸)으로 건너가야만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것이 바로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근본 목표인 것입니다. 이렇듯 종교의
근본 목표인 영원한 행복은 바로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기본 욕망입니
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은 이 유한한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각 종교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
에 들어가도록 그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고, 불교에서는 그 궁극의 목
표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에 대하여 여러 경전에서도 말씀하셨지만, 특히 [기
신론(起信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괴로움을 버리고
구경의 즐거움을 얻는다.
離一切苦 (이일체고)
得究竟樂 (득구경락)
이 말씀은 모든 괴로움을 다 버리고 구경(究竟)의 즐거움, 곧 영원하
고 절대적인 즐거움을 얻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곧 상대적이고 유한한 생멸(生滅)세계를 떠나 절대적이고 무한
한 해탈(解脫)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반의 종교가
갖는 목표와 꼭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대'와 '유한'의 행멸세계를 버리고, '절대'와
'무한'의 자유세계에 가려고 노력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에
누가 서울에 간다고 한다면 왜 가는지 까닭부터 알고 가야지 무조건 서
울만 가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행동일 터이요, 그
사람은 모자라는 사람으로 취급받을 터 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절대
적이고 무한한 자유세계로 가려고 한다면 먼저 왜 가려고 하는지 그 구
체적인 이유부터 아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세상에는 천지만물이 있고, 인간은 그 모든 생물과 무생물 중에서
으뜸가는 존재라 하여 만물의 영장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만
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의 삶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인간
은 대체로 삶을 값어치있게 만들기 위하여 저마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
을 달성하려고 노력합니다. 더러 목표가 뚜렷하지 못한 사람도 있고 또
사람마다 목표하는 바가 다르기도 하지만, 인간이 궁극적으로 구하는
것은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
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뭇 사람들 사
이에서 행복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현실적 삶의 모습이 얼마나 행복과 가까운지는
한번 조용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인간이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심지어 산다는 것 조차도 짐스러울 만큼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삼계가 불타는 집이요
사생이 괴로움의 바다이다.
三界火宅 (삼계화택)
四生苦海 (사생고해)
라고 표현합니다. 삼계(三界)란 중생이 사는 이 우주 전체를 일컫는 말
인데 이것을 불타는 집이라고 하고, 사생(四生)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
을 일컫는 말인데 그 전체가 괴로움의 바다라고 하였습니다. 곧 불타는
집에서 고생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 그 자체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십
니다. 인생이란 이와 같이 태어나서 사는 동안에 고생만 하다가 끝내
죽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살다가 때에 따라서는 좋은 일도 더러 있기
는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것일 뿐, 인생을 전체로서 볼 때는 괴로움
의 연속이랄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렇게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스
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고, 그토록 괴로운 삶이니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하여 살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덜 고생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시작 된 이래로 사람들은 이 고생스러
운 삶 가운데서 좀 더 행복하게 살 길을 찾아 여러가지 방법을 모색 해
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고 유한하여서 모순의
연속입니다. 이러한 모순의 세계란 곧 투쟁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여기
에서는 일시적으로 행복을 얻었다고 하여도 곧 종말이 오고야 맙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원한 행복을 생각하게 되고, 그 영원한 행복을 달성
할 수 있는 길을 추구하는 데에서부터 인간의 종교가 성립된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세계에서
는 이룰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피안의 세계 곧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
를 구상하여 그곳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종교의
근본 취지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니듯이, 모든 사람이 저 먼 피안의
세계에서만 영원한 행복을 추구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추구하는 행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
면빌어 먹는 거지에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다면, 때가 되어 밥
한끼 잘 얻어먹는 것이 행복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거지로서는 밥 한
끼 잘 얻어 먹으면 그것으로 다른 모든 시름은 다 잊고 만족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확실히 사람들은 때와 장소와 처지에 따라 서로 다른
행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대개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
이란 것은 거지가 밥 한끼 잘 얻어먹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는 것과 크
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영원한 행복이란 공연한 이야
기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수천년의 인류 역사가 지나가는 동안에 세속적인 기준
으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는 몇 사람의 경우를 보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2. 록펠러
첫번째로 록펠러 Rocrefeller(1839~1937)의 경우를 봅시다. 미국의
록펠러 1세는 당대에 자수성가(自手成家)하여 세계적인 갑부가 되어 아
흔 아홉살까지 산 사람입니다. 그만하면 누가 보든지 참으로 행복하게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산도 많아 세계적인 재벌이라는 소리
를 들었을 뿐더러 나이 아흔 아홉이 되도록 장수하였으니 무엇 하나 부
러울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욕심이란 그렇지 않은가 봅니
다.
록펠러는 만년에 이르러 위암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암이란 지금
의 발달된 현대의학으로도 웬만해서는 고치지 못하는 병인데 지금보다
오십 년 전인 그 때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세계적인 갑부로서
온갖 부를 누렸고 아흔 아홉살의 천수를 누렸으니 그만하면 당장 죽어
도 여한이 없을 듯 싶은데도, 그는 자기가 암에 걸려 곧 죽을 운명에
놓이게 되자 도저히 그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생명을 일년 더 연장시켜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재산의 절
반을 주겠다고 온 세계에 광고를 냈습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그 광고
비만도 이백만 불이나 들었다고 합니다. 이백만 불이면 어마어마한 돈
입니다. 아마 이백만 불 아니라 이백억 불을 들인다 해도 목숨을 연장
하는 이러한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록펠러가 낸 그 광고
를 보고 의학분야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은 록펠러를 한 해라도 더 살려
놓으면 자기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욕심에서 각양각
색의 방법을 다 동원하고 제시 하였습니다만, 결국 록펠러는 더 살지
못하고 아흔 아홉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어도 좀 더 살고 싶은 것, 이것이 인간의 본능 입니
다. 이것은 인간뿐만 아닙니다. 저 꼬물거리며 기어 다니는 개미나 벌
레까지도 죽는 것은 다 싫어 합니다.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좀 더 편안
하게 살았으면 하는 욕망은 생명을 가진 생명체의 버릴래야 버릴 수 없
는 본능적인 욕망 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살고 또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산다 해도, 그것은 어느 한 순간이면 끝나고 맙니다. 이 유한한
생멸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사람의 욕구는 결코 채워질 수가 없는 것입
니다.
3. 맹상군
호화코 부귀코야 맹상군만 하련마는
백년이 못다하여 무덤 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야 일러 무삼하리요.
맹상군은 중국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사람인데, 왕자(王者)로서
정승을 지낸 이로, 천하의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지녔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역사에서 가장 호화롭게 산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누구나 이구
동성으로 맹상군이라고 말할 만큼 참으로 세상의 행복을 누리며 산 사
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맹상군도 백 년을 못 살고 일
흔이 가까와서 죽고 말았습니다. 살았을 적의 그의 공명에 따라 장례를
후히 지내고 그 무덤도 산과 같이 거창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오랜 세
월이 흐른 뒤에는 그것이 덧없는 일에 지나지 않으니, 이제는 무덤 옆
에 밭을 갈던 농부가 제 땅을 넓히려고 맹상군 무덤 위에다가 밭을 간
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고 허무한 것인지 실감하고도 남
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온갖 영화를 다 누리며 호화롭게 살던 맹상군도
그러한데 하물며 특별히 두드러진 것 없이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
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그 유명한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의 경우는 또 어떠한지 봅
시다. 그는 춘추전국 시대의 맹상군보다 후대의 사람으로 6국(六國)을
정벌하고 중국 천하를 통일하여 진(秦)나라 대 제국을 건설한 만고의
영웅 가운데 영웅입니다. 그가 천하를 통일하고 보니 모든 것이 자기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좋은 물건, 좋은 음식, 좋은 옷, 미
인들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자기가 거처하는 궁궐을 지
어 아방궁(阿房宮)이라 불렀는데 집의 길이가 무려 칠백 리에 뻗쳤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한양의 궁궐 둘레가 사십 리라고 하니 진시황의 궁궐
둘레는 천 리가 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뒷날 항우(項羽)라는 장사
가 나타나서 진나라를 패망시키고 아방궁을 불태우는데 석달 동안이나
탔다고 합니다. 집이 다 타는 데에 석달이나 걸렸으니 아방궁의 크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시황이 그렇듯 천하를 자기 것으로 하여 호사스럽게 살면서도 딱
한 가지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자기 목숨이지만 이것만큼은
자신의 권세로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월
이 흐르면서 머리는 희끗희끗해지고, 얼굴에는 주름이 늘고, 기운은 자
꾸 쇠약해져서 마침내는 죽고 말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이 일어났던 것
입니다. 그래서 천하에 영(令)을 내려 죽지 않는 불사약(不死藥)을 구
해 오는 사람에게는 수만 금의 상금을 주고 벼슬도 주겠다고 하였습니
다.
그러자 얼마 뒤에 서시라는 사람이 나타나 진시황에게 이렇게 아뢰
었습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아가면 바다 가운데 삼신산
(三神山)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불사초라고하는 약초를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시황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그 약
초를 캐오는 데에 비용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습니다. 서 씨가 대답하
기를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삼천 명과 그들을 싣고 갈 배만 준비해
주시면 가서 불사초를 구해 오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진시황은
곧 영을 내려, 서 씨의 요구대로 동남동녀 각 삼천 명과 그들이 먹을
식량과 의복 따위를 수십 척의 배에 실어 보내어 삼신산의 불사초를
캐오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서씨의 생각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그는 진시황이 호사가
넘치다 보니 사람의 힘으로써는 어찌할 수 없는 공연한 짓을 하는 것
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堯)나라의 팽조(彭祖)가 팔백 년을 살았지만
끝내 죽고 말았는데 자기가 살면 얼마나 살 것인가 하고 속으로 생각한
그는,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욕망에 집착한 진시황의 약점을 이용하여,
처녀 총각 육천 명을 데리고 저 바다 가운데 좋은 섬에 가서 자기의 왕
국을 하나 만들어 잘살아 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확
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리하여 만든 나라가 일본이라는 말도 있습니
다. 우리나라 남쪽, 남해 금산 밑에 가면 바위에 '서씨각(徐氏刻)'이라
는 것이 있는데, 서씨가 중국을 출발해서 남해 앞을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기록이 현재 남아 있습니다.
어찌하였든 서 씨는 그렇게 처녀 총각 육천 명을 배에 싣고 제 갈길
로 가 버렸고, 이를 알 리가 없는 진시황은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불사
초를 구해오기만 기다렸습니다. 결국 진시왕은 자기가 서 씨에게 속은
것을 알고 원통해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버렸습니다. 제 아무리 진시
황이라도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
시황은 죽어도 그냥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서, 죽고 난 뒤에 자기
의 무덤을 생전의 아방궁처럼 꾸미도록 엄명 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
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여산(驪山)에 터널을 뚫고 산 밑의 흙을 다 파
내고 지하 궁궐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죽은 뒤에도 음식을 차려
놓고, 궁녀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게 생긴 궁녀 삼천명을 뽑아 언제든지
자기 옆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자기의 무덤이 있는 방을 지킬 것을 명령
하였습니다. 진시황이 죽고 난 뒤에 신하들은 그의 명령대로 궁녀 삼천
명을 뽑아 묘를 지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
도록 문을 봉해 버렸습니다.
얼마 뒤에 유방과 항우가 들고 일어나 진나라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항우가 먼저 함양에 들어가 아방궁을 불 태우고, 여산의 묘를 파헤쳐서
그 속에 갇혀 있던 삼천 명의 궁녀들을 살려 주어 제 갈 길로 가게 하
였습니다. 그러나 항우도 그 삼천 명의 궁녀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궁녀는 남 주기가 싫어서 자기가 차지했으니, 그 미인이 천하
에 유명한 우미인(虞美人)입니다. 나중에 항우가 유방과 싸우다가 해하
(咳下)에서 대패하고 오강(烏江)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부른 노래
가 있습니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천하를 덮어도
때가 이롭지 못하니 천리마도 앞을 달리지 않는구나.
천리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할거나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나는 장차 어찌할거나.
항우가 당장 망해서 죽게 되었는데 천리마는 버려도 우미인은 버리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다가 마침내 자결하
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욕심이란 이같이 허무할 뿐만 아니라 그 욕심으로 인해 자기
와 남에게도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진시황의 아방궁을 짓고 거대한 무
덤을 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했겠습니까! 이처
럼 많은 사람들의 눈물 위에서 진시황은 일시적인 행복은 누렸는지 모
르지만, 아무리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삼천 궁녀를 그 속에 가둬 춤추
게 하는 등 별별 짓을 다했어도, 결국 영원한 행복은 성취하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어떠한 한계도 없는 영원한 행복을 구하고자 했으면서도 그 행복의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이런 일들이 앞에서 본 록펠러나 맹상군이나 진
시황에게만 국한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빈부귀천
에 관계없이 그런 처지에 놓이면 그와 같은 욕망이 일어나기 마련입니
다. 곧 죽게 된 사람도 죽음을 피하고 좀더 오래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
은 당연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서 아무리
강한 권력이나 명예나 금력을 가졌다고 해도 실지로 성취될 수가 없습
니다. 여기에 해답을 주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본능
적인 욕구인 영원한 행복을 해결해 나가는 데에 중대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종교가 인간이 원하는 영원한 행복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제 2 장 천당과 극락
1. 천당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에서 위인(偉人), 걸사(傑士)로 꼽히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 현실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바라는
영원한 행복을 성취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이 현실
을 떠난 다른 세계에서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밖에 없다 하여 다른 세
계를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의 천당설(天
堂設)입니다.
현실 세계는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어서 시간적으로
도 공간적으로도 무한하지 못하고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상
대적이고 유한한 세계에서는 제 아무리 뛰고 구르며 재주를 넘어보았자
영원한 행복은 절대로 성취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현실 세계에서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다른 바깥 세계에 가
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곳에
가야만 우리가 찾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하고 모색하던 끝에
천당 곧 하늘나라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저 푸른 허공을 자꾸자꾸 올라가면 천당이 있다. 그 천당에는 하나
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은 일체를 초월한 절대자다. 그는 전지전능(全知
全能)하여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고,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분이다.
그 하늘나라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일체 받지 않으므로 하늘나라
에 한 번 들어가면 누구든지 영원토록 생명을 누려 영생(永生)한다. 그
곳에서는 괴로움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즐거움만이 있다. 그러므로 하
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에서는 누구든지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
리며 살 수 있다."
이렇게 기독교에서는 천당, 곧,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절대의
세계가 저 하늘에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괴로움 많은 인간들에게는 많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 괴로
운 현실을 떠나 저 높고 높은 하늘 위에 있는 천당이라는 좋은 세계를
발견하여 그 곳에 가면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린다고 선언하니,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는 것과 같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
을 번쩍 뜨게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 참으로 영원하고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누구든지 자기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을 다
내버리고 서라도 그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2. 절대적인 믿음
그런데 과연 그것으로 사람들이 바라는 영원한 행복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사람들의 삶이 단조롭고 지혜가 크게 발달
되기 전에는 훌륭한 사람이 나와서 천당설을 이야기하면 아무런 의심없
이 믿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차츰 차츰 인간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사람들은 지혜가 늘고 또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면서, 그
러한 일방적인 가르침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
다. 하늘나라에 대해서 믿음을 잃게 되니 사람들은 자연히 방황할 수밖
에 없게 되었습니다.
"천당이 어디에 있어. 무슨 하나님이 있다는 거야. 인간들이 현실에
서 고통을 받고 있으니 위안하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지."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들의 말을 인정해 버리면 종교의 기반은 사라지
고 맙니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절대 세계의 영원한 행복을 증명해 보
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서양의 신학자들은 합리(合理), 불합리(不合
理)를 논하지 말고 이것은 예수의 말씀이니 무조건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신학자가 성(聖) 어거스틴 St. Augustine입니다.
그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바로 절대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와 같은 절대적인 믿음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국민학생에게는 고등수학이 믿기 힘든 의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
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말씀한 천당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예수
님은 말할 것도 없고 신학자들의 그 뛰어난 영혼과 깊은 지혜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이 다만 소견이 좁아서 그 존재를 의심할 뿐이라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소견으로 합리, 불합리를 따질 것이 아니
라 무조건 믿으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절대적인 믿음을 기반으
로 하여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사상을 지배하며 그 생명을 이어 왔습
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사회적 상황이 예전과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지(人智)가 자꾸 발달되자 절대 세계에 대해서, 또 신(神)의 존재 여
부를 비롯한 신의 문제에 대해서 자꾸 회의적인 생각이 일어나게 된 것
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이리저리 펼쳐보아도 하나님이나 천당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런 회의적인 생각이 점점 크게
일자 그것이 마침내는 종교의 근본을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과학의 발달로 그 전에는 신비롭게만 여기던 자
연 현상이나 우주의 모습이 신의 신비로운 조화가 아닌, 자연의 법칙에
의한 것임이 밝혀짐에 따라 인간이 갖게 된 당연한 변화입니다. 우주의
모습까지 밝혀낸 현대에 와서 맹목적으로 하나님이나 천당을 믿으라고
하는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쉽사리 통하지 않는, 설득력 없는 강요에 지
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냥 믿으라고만 강요하기에 앞서 무엇
인가 객관적으로 사실을 증명해야만 비로소 믿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종교가 그 생명을 유지하려면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는 뚜렷한 이론
체계를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객관성이 없는 이론은 그야말로 아무
근거도 없는 공론(空論)이라 하여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과학자 대회
최근의 동향을 보면, 과학계에서 내세우는 것이 모두 다 옳고 정확하
다고는 할 수 없지만, 차츰차츰 생명의 정체를 비롯하여 자연의 법칙이
며 우주의 모습에 대해서 과학자들이 일찌기 세워놓은 가설들이 사실이
거나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에 관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몇 해 전에 런던에서 '세계 과학자 대회'가 열렸습니다. 19세기에 다
아윈이 진화론(進化論)을 발표하자, 세상은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그
때에 진화론을 앞장서서 소개하였던 사람이 헉슬리 T.H. Huxley였습니
다. 바로 그 사람의 손자 되는 사람이 또한 영국의 과학계를 주도하는
유명한 과학자가 되어 이 회의를 주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회의 명칭
은 '세계과학자 대회'이지만 다른 모든 학문 분야에 대해서도 토의를
해보자는 의도가 있어서 종교 문제까지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종교 문제를 토의하는 데에는 그 방면의 전문가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신부, 목사, 신학자들도 그 대회에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은 이 과학자 대회에서 토의된 종교 문제에 대한 의견을 종합하여 성명
서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과 같은 우주과학 시대에는 신(神)을 전제로 하는 종교는 더 이
상 존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허위이기 때
문이다. 그러면 어떠한 종교가 앞으로 존속할수 있는가? 불교와 같이
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종교만이 존속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성직자와 신학자들을 앞에 두고 세계 과학자 대회는 이렇게
신(神)을 전제로 하지 않는 종교만이 존속될 수 있다는 중대 선언을 했
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랍고도 획기적인 선언이 었습니다. 서양에서의
기독교 신의 존재는 다만 종교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으니, 이천여 년
을 내려오며 그들을 지배해 온 전통이요, 사상이며, 생활입니다. 그런
데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일대 혁명이랄 수 있는 이 선언
은 결국 믿음이라는 근본 문제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주장과 같은 것
입니다. 그 때에 가톨릭이나 기독교의 대 신학자들이 많이 참석하였지
만 이런 주장에 대해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신
을 전체로 하지 않은 불교와 같은 종교만이 존속할 것이라는 데에 대해
서도 아무런 이의를 내놓지 못하였습니다.
정작 불교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과학자들이 이런 결
론을 내렸다는 것은 반가운 일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비록 불
교가 신을전제로 한 종교와는 달리 이 우주과학 시대에 존속할 수 있다
고는 하였지만, 그것은 불교의 이론 체계 역시 객관성을 가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그치고 만다면 불교도
존속하기 위해서는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분명합니다.
믿음에 대한 문제, 종교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 현대의 과학자들이 그
러한 태도를 보인 것은 그들이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라
하여 그런 말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다고 일축해 버릴 수도 있습
니다. 아직 과학이 규명하지 못한 신비의 세계가 많이 남아 있듯이 과
학에도 한계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가장 차원 높은 세계를
추구하는 종교에 대하여 과학자들이 성명서를 냈다고 해서 그들의 말을
따라 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종교의 존엄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나 기독교의 종교인 및 신학자들은 과연 이 문제에
대하여, 오늘날, 어떻게 생각하며 대처하고 있는지 한번 알아보겠습니
다.
4. 천주교의 교리문답.
천주교는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교리문답(敎理問答)]이라는 책을 최
근에 재편집하였습니다. [교리문답]은 천주교의 모든 교리의 기초가
되는 입문서로서, 처음에 천주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반드시 배우고 익
혀야 하는 책입니다. 곧 이 한 권의 책을 완전히 익혀야만 신자의 자격
이 주어집니다. 이렇듯 중요한 책이 재편집되어 나왔는데, 그 첫머리
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오래고도 긴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천지 만물(天地萬物)이 생겼
고, 인류가 탄생하여 겨레와 나라를 이루었다."
이 말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너무도 당연하여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주교인들에게는 청천
벽력과도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의 근거가 되는 구약 성
경에 적힌 바와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의 첫머리에서는 다음
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전지전능(全知全能)한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이 하늘이 있
으라 하니 하늘이 있고 땅이 있으라 하니 땅이 있고... 사람을 만드셨
다."
이와 같이 천지 만물은 다 하나님이 만든 것으로 저절로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주장이 구약 성경의 출발점이요 근본을 이루는 사상 입
니다. 그리고 그러한 구약 성경을 기반으로 하여 예수교는 형성되었고,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동안 기반이 되어
온 그 근본 사상을 어느 날 갑자기 저들 스스로 허물어뜨리고, 그 대신
진화론의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로서는 실로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까닭에서 갑자기 그들이 절대시하고 가장 신성
시 해온 성경과 상충되는 내용의 말로써 [교리문답]의 첫머리를 삼게
되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거의 같은
까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곧,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지혜가 향상됨
에 따라 논리적으로 허술한 점이 많은 하나님의 우주 창조설이나 인간
창조설이 현대인에게는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화(神話)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事實)일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아닌 허구를 갖고서, 더구나 우주 과학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
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 믿음이 될 턱이 없습니다. 그것은 다
만 강요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천주교인들은 이 신화를 완전히 포기하고 논리적인 사실에
입각한, 일대 전환을 선언한 것입니다. 원죄설(原罪設)이라든지 창조설
(創造設)과 같은 중요한 교리를 논리적인 근거 아래 재해석하여 [교리
문답]을 재편성하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1967년 3월 2일자 조선 일보는
'현대의 옷을 입는 천주교'라는 제목으로 이를 보도하였습니다. 이 문
제는 한국의 천주교회에서만이 아니라 로마의 바티칸 교황청에서도 3년
에 걸쳐 논쟁을 거듭하여 내린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서의 창
조론에서부터 태도를 전환해야 현대인에게 믿음과 신뢰를 줄 수 있으며
, 더불어 천주교도 영원한 종교적 값어치를 지닐 수 있다고 판단한 것
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만이 변화한 것은 아닙니다. 현대에 와서는 오히
려 천주교보다 보수적이라는 기독교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5. 기독교 무신론.
다음의 경우를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기독교의 신관(神觀)의 변화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연세대학교의 신학대학이 주최가 되어 신교, 구교를 막론하고 신부,
목사, 신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기독교의 신관(神觀) 연구'라는 제
목으로 토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 토의된 내용이 1966년 11월
1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되었는데,그 기사 첫머리가 "오늘날 신은 새로
운 도전과 시련 속에서 재창조 내지 재발견을 강요당하고 있다"로 시작
하는, 당시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장인 서 남동(徐南同)교수의 글이 실렸
습니다. 이 글은 '신은 죽지 않고 변모한다 - 거듭나지 않으면 매몰운
명(埋沒運命)-'이라는 표제가 붙여져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
과 같습니다.
"20세기 기독교는 갱신(更新)이냐, 혁명이냐의 기로(岐路)에 섰다...
기독교 무신론(無神論)의 급진적 신학자들에 의하면 '신은 죽었다.'는
것이다. 이천 년 동안의 기독교 초월신은 사라졌다. 신화적인 사고방식
이나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을 떠나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실재
(實在)라고 하는 현대의 존재론(存在論)이 발전함에 따라 하나님의 존
재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기독교 무신론의 신학자들은 성
부(聖父)가 죽고 성자(聖子)로 나타났고, 다시 성자(聖子)는 죽고 성령
(聖靈)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제는 신이 새로운 양태(樣態)로서 나
타났다. 역사적 예수가 또 형태 변화를 해서 만인의 얼굴과 손으로 분
신화신(分身化身)하는 성령이 되었다. 따라서 지금은 성령의 시대다.
성령의 시대는 새로운 휴머니즘의 시대가 된다... 현대는 우주시대다.
기독교는 과학 및 기계문명이 급속도로 발견해 온 현대에 적응하기 위
해 형태 변화를 해야 한다. 이 새 환경에서 기독교가 거듭나지 아니하
면 그것은 역사적 기록보관소의 종교목록대장에 매몰되고 말 것이다...
오늘의 급진적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신약성경 약속이 카톨릭, 프로테스
탄트에 다음가는 제3의 기독교로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 한번
의 출애굽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기독교의 성경에 따르면 그들의 하나님 곧 신은 절대자이며 전지전능
한 분입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은 인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주관된다고 믿어 왔습니다. 이 믿음이 지금까지 기독교를 지탱해
온 기반입니다. 그러나 우주과학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성경에
서 묘사하고 있는 신화적 신은 더 이상 절대자나 전지전능자로 용납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이론
체계가 뒷받침되지 않은 신은 결코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일에 기독교가 옛날처럼 계속해서 신화적인
신만을 고집 한다면 기독교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한갓 기록으로나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신화적 신이 아닌 새로운 신
을 재발견하거나 재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성령론(聖靈論)입니다. 성령론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
나님은 죽어서 없고 예수도 죽어서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죽고 없지만 그냥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가 형태 변화를 해서 성령으
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분신화신(分身化身)하고 있다고 합니다.
각 사람마다 다 성령이 있으니 이 성령 속에서 하나님을 찾자고 부르짖
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에 대해서는 기독교 내에서도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여기서는 절대적인 하나님 곧 초월신이 아닌, 인간
에 내재한 내재신(內在神)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하나님이고 인간 속에 하나님의 절대성이 들어 있음을 말 합
니다. 불교에서 모든 사람에게 다 불성(佛性)이 있다 하는 것과 통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러한 기독교 무신론을 주장하는 진보적, 급진적 신학자들에 대해
보수 교단의 목사들은 심한 반발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극
도로 발달된 오늘날에도 초월적인 신의 존재만을 계속 주장한다면 기독
교는 언젠가는 이 현실 사회에서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에 현대
인이 납득할 수 있는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는 또 한번의 출애굽을 해야 한다고 서 남동 교수는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압박 받던 유대 민족이 모세의 지도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으로 탈출하였듯이, 오늘의 기독교도 새롭게 해석된 신
을 재발견하고 기독교를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 원룡(姜元龍)목사라고 하면 종교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권위 있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분이 어느 잡지에 '과학 앞에 사라진 신
(神)'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그 글에서 그는 "저 푸른 허공을
아무리 쳐다보고 쳐다보아도 거기에는 천당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고
말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노인'이라고 표현하면서 성격에서 말씀
한 하나님을 보려고 망원경을 설치해 놓고 눈을 닦고 보아도 보이지 않
더라는 것입니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여러 가지 면에서 검토해 본 결
과 신이 저 허공에는 없다는 것 만은 분명하니 거기에 대해서는 주장하
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또 죽은 송장에게 매달리듯 사라진 신에 연연해
하지 말고 예수교의 나아갈 길을 달리 모색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면서, 예를 들어 말하기를, 미국에서 신부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조
사해 보니 90퍼센트 이상이 신에 대해 회의를 느껴 많은 이가 성직을
바꾸고 싶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신부들은 그 전에는 하나님이 천
당에 계시는 줄 알고 자신 있게 '하나님이 천당에 계시니 믿으라'고 했
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허구일 뿐, 존재하지 않
음을 알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신자들에게 믿음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강 원룡 목사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디서 하나님을 찾을 것인가에 대
한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한평생 남을 위해 살았듯이 남
을 위하여 사는 정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을 위
하여 노력하고 살면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그것이
바로 천당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변화는
비단 우리 나라에서만 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국과 유럽에
서는 더욱 심각하여 현대가 해결해야 할 커다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비슷한 문제로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킨 일이 또 있습니다. 타임Time
지가 '신은 죽었는가'하는 표제로 실은 기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글
은 '신은 없다'하여 무신론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타임 지는 이 글을
발표하기 위하여 3년 동안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곧 그 동안 세계의 유
명한 신학자들을 방문하여 많은 의견을 듣고 종합한 결과 신은 죽었다
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 기사는 이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
의 글도 함께 실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신이 있고 없음은 인간의 차
원을 떠난 문제인 만큼, 과학이니 철학이니 하면서 공연히 무신론(無神
論)을 주장하지 말라. 우리들 인간은 무조건 신을 믿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합니다.
어찌되었든 그 때에 타임지가 낸 그 특집기사의 지배적인 주장은 "하
나님은 없다"는 내용이어서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나
라 각 신문에도 그 내용이 소개되었고, 기독교 내에서도 '기독교 무신
론'이라는 부제를 붙여서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실을 떠난 절대 세계나 현실을 떠난 초월신은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떠난 절대 세계라든지 현실을 떠난 초월신
을 주장하던 종교 사상은 점차로 그러한 논리를 버리고 교리를 다른 방
향에서 새롭게 재 창조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 철학자인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하여 파문을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그 때만 해도 기독교 사회에서는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신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던 터라, 신이 완전
히 죽어서 없어졌다는 그의 선언은 퍽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
해 보면, 본디부터 없던 신을 있는 것으로 잘못 믿어 오다가 뒤늦게 없
다는 사실을 알아 낸 것뿐인데, 마치 신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듯한 그
런 말은 사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그 전에는 살아
있었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뒤늦게나마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았다면 그 전까지의 잘못된 믿음을 버리기만 하면 될 터인데 말 입니
다.
과학이 발달하고 사람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신이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하였으며 신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새삼
"신은 죽었다"는 선언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가 그러한
사실을 꿰뚫어볼 만큼 발달하기 전에는,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가상
(假想)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해온 것입니
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신을 그릴
때 사람 모양을 그린다고 합니다. 만약 개나 소에게 신을 그리라고 하
면 개나 소 모양으로 그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깁니다. 결국 신은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쓸데없는 환상을 일으켜
서 관념 속에서 신을 만들어 놓고 이런 저런 식으로 해석해서 혼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제 처음부터 없는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
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거짓인 줄 알면서 거짓을 고집 한다면 그것
은 실지로 파멸과 자살로 이끄는 행동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
교든지 신을 전제로 하는 종교는 그 사상을 포기하고 다시 전환하여 새
로운 활로를 개척해야 할 것입니다.
6. 극락설.
그렇다면 불교도 역시 종교인데, 영원한 행복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
기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행복
을 얻는 방법에는 불합리한 점이 없는지, 그래서 요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납득이 안되는 믿음을 강요하는 점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
입니다. 그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리 우주과학 시대라고 하더
라도, 또 앞으로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가더라도 불교 자체는 현실적
으로 아무런 구애받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다른 종교는 그릇되었다 말하면서 자신의 종교인 불교만 옳다 한다고
반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불교가 펼쳐 온 사상이 허위에 차고 거짓투성이라면, 기독
교가 절대신을 부정하였듯이, 불교도 마땅히 팔만대장경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터를 닦아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라고 예외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불교의 경전에도 거짓은 있긴 하지
만, 그것은 방편이라 하여 무지한 중생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런 방편으로 '극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자꾸
가면 그곳에 극락세계가 있는데 그곳을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 부른다
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 하늘 위에 있다는 천당은 거짓말이고 서쪽으
로 가면 있다는 극락세계는 진짜인가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극락세계가 어떤 곳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망원
경을 이용하여 찾아보든지 어떻게 하든지 먼저 살펴보고 나서옳지 않
으면 믿지 않아야 할 터이고, 만일에 옳다면 누구든지 그곳으로 가서
영원한 행복을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극락세계를 자세하게 설명한 불교 경전으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중에 무량수경(無量壽經)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 있으며 또 무량
수의궤경(無量壽儀軌經)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량수경'에서는 저 서
방세계를 지나 끝없이 가면 극락세계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이 삼계화택(三界火宅), 사생고해
(四生苦海)의 사바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부지런히 염불을 하면 극락세
계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극락세계의 장
엄은 참으로 대단하여 천당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런 극락세계에 누
구든지 "나무아미타불"만 지극하게 부르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
여기에 한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5역죄(五逆罪)를 지은 사람, 곧, 부
모를 죽이거나 대 성인을 죽인 사람 또는 교단 화합을 파괴하거나 바른
불법을 비방한 사람 등은 아무리 아미타불을 불러도 극락세계에 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에서는, 그와 달리, 극락세계를 아
홉 등급(九品)으로 나누고서 5역죄를 지은 사람이나 정법을 비방한 사
람이라도 극락세계에 갈 수는 있는데 그런 사람은 가장 낮은 등급인 하
품하생(下品下生)에 간다고 말합니다. 또 '무량수의궤경'에서는 5역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한 죄를 지었다 해도 아미타불을 열심히 부
르면 상품상생(上品上生)의 가장 좋은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고 합니
다.
이것을 보면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 하는 극락세계에 가는 자격에
대해서 제각기 말이 조금씩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량수경'에서
는 5역죄를 지은 사람은 극락세계에 못 간다고 해 놓았는데, '관무량수
경'에서는 하품하생에는 갈 수 있다고 한다. '무량수의궤경'에서는 상
품상생에까지도 갈 수 있다고 해 놓았으니, 어느 것이 진실인지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의 끝 부분을 보면 "서쪽으로 가면 극락세계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부처님은 법계장신(法界藏身)이다"라고 되어 있습
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계(法界)란 시방(十方)의 법계이니, 곧 부처님
몸이 시방 법계에 가득 차서 그 어느 곳이나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
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극락세계가 서방(西方)에만 있는 것이 아니
고, 동방(東方)에도 있고, 북방(北方)에도 있고, 남방(南方)에도 있고
땅 밑이나 하늘 위나 없는 곳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온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고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마음이 부처가 되는 것(是
心是佛, 是心作佛)'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것이 아미타불이
아니라, 일체 중생이 모두 다 가지고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아미타불
이라는 것입니다. 또 마음이 부처님인 것이지 마음을 내놓고 달리 부처
를 구하려는 것은 마치 불 속에서 얼음을 구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처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 부
처인 것입니다. 이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육단심(肉團心)
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방에 가득차 있어 유정(有情), 무정(無情)이
똑같이 갖고 있는 그 마음을 말합니다. 곧 유정도 부처님 마음을 갖고
있고 무정도 부처님 마음을 갖고 있으니 그것이 곧 법계장신(法界藏身)
이며 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부처님은 시방세계에 가득 차 있어서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다고 밝히지 않고, 왜 서방(西方)에 있
다고 하면서 그곳에 갈 수 있느니 없느니 하고 빙빙 돌려서 말씀했는가
?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하나의 방편설(方便說)입니다. 사람들
의 지혜가 발달되기 전에는 그 지혜의 정도에 맞추어서, 그 사람이 이
해하기 쉽게 또 그 사람의 지혜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부득이 사실과
꼭 같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서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
게 선의의 거짓말을 해 가면서 지혜를 자꾸자꾸 향상시켜 가면 마침내
참말을 이해할 만큼 성장하게 됩니다. 그 때에는 지금까지 한 말은 참
말을 알게 하기 위한 거짓말임을 일깨워 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방
편설(方便說) 또는 방편가설(方便假說)이라고 합니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이대로가 극락
이라고 하면, 그는 미친 소리라고 비웃거나 아니면 화를 낼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고 있는데 여기가 극락이라니 마치 사람을
놀리는 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현실 이대로가 바로
극락세계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그것은 거짓된 말이라고 부정할 것입니
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을 바로 가르치기 위해 "저 서방에 극락세계가
있으니 부지런히 아마타불을 외고 수행하면 그곳에 갈 수 있다"고 방편
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서 열심히 아미타불
을 부르며 수행에 열중하게 될 터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염불을 부지런
히 외면서 수행에 힘쓰다보면, 그러는 사이에 지식이 늘고 지혜가 향상
되면서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는 힘이 차츰차츰 커지게 됩니다. 그리하
여 얼마 뒤에 부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때에 이르면, 앞
에서 일러 준 말은 방편일 따름이요, 사실은 시방세계 이대로가 극락이
며 모든 중생이 바로 부처이니 유정과 부정이 모두 부처님 아닌 것이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면 그들은 비로소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이
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7. 일승법.
그 방편에 대해 가장 유명한 것이 법화경입니다. 법화경은 부처님이
49년 동안 설법한 말씀의 총 결산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가장 골
자가 되는 것이 바로 '방편품(方便品)'입니다. 거기에 보면 "시방세계
국토 중에 오직 일승법만이 있다[十方國土中唯有一乘法]."고 하고 있습
니다.
일승법이란 이 세상에 부처님 아닌 것이 없고, 극락세계 아닌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을 교화하고 구원하기 위해 2승(二乘), 3
승(三乘)의 방편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방편설은 비록 사실 그대로의
참말은 아니지만 수단으로서 인정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결국 일승을
말씀하시기 위해 2승과 3승을 설하신 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육조(六祖)스님도 극락세계에 대해 "부처님이 극락세
계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분명히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
면, 그것이 만일에 사실이라면, 동방 사람은 염불을 하면 서방의 극락
세계로 갈 수가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서방 사람은 염불을 하면 어
디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부처님은 아직 지혜가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을 상대하였기 때문에 방
편설을 쓰셨지만, 나는 지혜가 발달된 사람들만 상대하기 때문에 방편
을 쓰지 않는다."고도 하였습니다. 결국 육조스님의 뜻은 서방 극락세
계는 실재하지 않고, 오직 내 마음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 그대로가 극락세계이며, 자성(自性) 그대로가 아미타불이라는 것
입니다. 극락세계도 내 마음 속에 있고 아미타불도 내 마음 속에 있으
니, 서방이든 동방이든 보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지 마음속에 있는 극락
세계를, 마음속에 있는 아미타불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종교를 믿는 것은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행복을 달성할 수가 없기 때문에 종
교는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는 방편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가면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방편을 쓸 필요
가 없게 되었습니다. 위로 올라가는 천당은 거짓말이고 옆으로 가는 극
락은 참말이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요즈음에
는 아이들도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면 믿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
교는 교리를 바꾼다느니 새 시대에 맞게 그 뜻을 재해석한다 하지만,
불교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 동안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써 왔던 방편가설을 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방편가설을 버리면 남는 것
은 앞에서 이야기한 일승(一乘)인데 그곳으로 바로 들어가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고 극락세계이고 천당이며, 중생 모
두가 하나님 아님이 없고 부처님 아닌 사람이 없음을 바로 이해하기만
하면 됩니다.
곧, 불교의 기본 태도는 일승법인데, 현실 이대로가 절대라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면 우리는 불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바로 부
처님 법 위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앞으로 여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제 2 편 중도의 세계
제 1 장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세계
1. 불생불멸(不生不滅)과 등가원리.
일체 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 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일 이와 같이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리라.
一切法不生 (일체법불생)
一切法不滅 (일체법불멸)
若能如是解 (야능여시해)
諸佛常現前 (제불상현전)
이것은 [화엄경]에 있는 말씀으로 불교의 골수를 드러내 보이는 말입
니다. 결국 팔만대장경 안에 부처님 말씀이 그렇듯 많고 많지만, 그것
을 한 마디로 줄이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불생불멸을 깨치셨으니, 불생불멸은 불교의 근본
원리인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하면 팔만대장
경이 다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의 만물은 모두가 생자필멸(生者
必滅)의 원리를 따릅니다. 곧, 난 자는 반드시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이렇듯 세상에 한번 태어난 것은 결국 없어질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불
생불멸이라 하여 모든 것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
입니까?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 아닙니까? 거짓이 아니라면, 세상에
생자필멸 아닌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났다고 하면 다 죽는
판입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은 모든 것이 다 불생불멸이라고 하신 것인
지, 그 까닭을 분명히 제시해야 되지 않느냐 말입니다. 그것도 당연한
생각입니다.
이것을 참으로 바로 알려면 도를 완전히 깨쳐야만 합니다. 일체가 나
지도 않고 일체가 멸하지도 않는 이 도리를 바로 알면 그때는 아무 관
계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누구든지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습니다.
일체 만법, 곧, 모든 것이 불생불멸이라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되겠습
니까? 그것은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의 이 우주를
불교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고 하는데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
계라는 말입니다.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무나니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니라.
是法住法位 (시법주법위)
世間相常住 (세간상상주)
여기에서 말하는 '이 법'은 불생불멸의 법을 말합니다. 곧, 천삼라
(天森羅), 지만상(地萬象)이 모두가 불생불멸의 자리에 있어서 세간의
모습 이대로가 늘 머물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간의 모습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나고 없어지지만, 그것은 다만 겉보기일 뿐이고,
실제의 내용에서는 우주 전체가 불멸이니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의 참모
습입니다.
이것을 또 화엄경에서는 부진연기(無盡緣起)라고 합니다. 곧, 한없이
한없이 연기할 뿐 그 본디의 모습은 모두가 불생불멸이며 동시에 이 전
체가 다 융화하여 온 우주를 구성하고 아무리 천만번 변화를 거듭하더
라도 상주불멸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 알면 불교를 바로 아는 것이며 아울러 불교의 모
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불교에 대
해서 영영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산중에 들어와 눈감고 앉아서 참선을 하거나 도를 닦아야 하는데, 그것
이 또한 문제가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도를 깨치기 전에는 불
생불멸하는 이 도리를 확연히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요즘은 과학만능시
대이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불생불멸의 도리를 과학적으로 근사하게 풀
이해 보일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이 과학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고로 여러 가지 철학도 많고 종교도 많지만, 불생불멸에 대해서 불
교와 같이 이토록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습니다. 그래
서 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불교의 전용이요, 특권으로 되어 있었습니
다. 그런데 과학이 자꾸 발달하여서 요새는 불교의 불생불멸에 대한 특
권을 과학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빼앗기게 되었는가?
과학 중에서도 가장 첨단과학인 원자물리학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데 성공해 버린 것입
니다. 말이 좀 어렵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 이론을 처음으로 제
시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인쉬타인 Einstein 입니다. 아인쉬타인이
상대성이론에서 등가원리(等價原理)라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자연계는 에너지와 질량, 이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전 물리
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각각 분리해 놓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인
쉬타인의 등가원리에서는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
입니다. 서로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에는 에너지에서는 에너지
보존법칙, 질량에서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자연현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였는데, 이즈음은 에너지와 질량을 분리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법
칙 하나만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사실 그 하나밖에 없습니다. 곧 질량
이란 것은 유형의 물질로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素粒子)이고,
에너지는 무형인 운동하는 힘입니다. 유형인 질량과 무형인 에너지가
어떻게 서로 전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상상도 못하던 일입니다.
50여년 전 아인쉬타인이 등가원리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가 별개
의 것이 아니고 같은 것이라는 이론(E = mc2)을 제시하였을 때, 세계
의 학자들은 모두 다 그를 몽상가니 미친 사람이니 하였습니다. 에너지
와 질량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이 수
십년 동안 연구하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질량을 에너지
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성공의 첫 응용단계가 우리가 다 아는 원자탄, 수소탄입니다. 질
량을 전환시키는 것을 핵분열이라고 하는데 핵을 분열 시켜보면 거기에
는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때 발생되는 에너지, 그것이
원자탄인 것입니다. 이것은 핵이 분열하는 경우이고, 거꾸로 핵이 융합
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수소를 융합시키면 헬륨이 되면서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이 수소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그 전에는 에너지와 질량을 완전히 분리하여 별개의
것으로 보았지만, 과학적으로 실험한 결과, 질량이 에너지로 완전히 전
환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원자탄이 나오고 수소탄이 나
온 것입니다. 그런 실험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물리
학자 앤더슨 Carl D.Ander-son 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에너지를 질량으
로 또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실험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실
험은 광범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에 세그레 Emilio Segre 라는, 뭇솔리니에 쫓겨서 미국에 간 유
명한 이탈리아의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 방법으로 실험한
결과 여러 형태의 각종 에너지가 전체적으로 질량으로 전환되고 또 각
종 질량이 전체적으로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이것은 물과 얼음에 비유하면 아주 알기 쉽습니다. 물은 에너지에 비
유하고 얼음은 질량에 비유합니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면 물은 없어
진 것입니까? 물이 얼어서 얼음으로 나타났을 뿐 물은 없어지지 않았습
니다. 결국 물이 얼음으로 나타났다 얼음이 물로 나타났다 할뿐이고,
그 내용을 보면 얼음이 곧 물이고 물이 곧 얼음인 것입니다. 에너지와
질량 관계도 이와 꼭 같습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나타나고 질량이 에
너지로 나타날 뿐, 질량과 에너지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처
음에는 상대성이론에서 제창되었지만 양자론(量子論)에도 여전히 적용
됩니다.
에너지가 완전히 질량으로 전환하고 질랑이 완전히 에너지로 전환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쌍생쌍멸(雙生雙滅)이라고 합니다. 모든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할 때 언제든지 쌍(雙)으로 변하는 현상을 쌍생성이라고 합
니다. 엔더슨의 실험에서도 광(光)에너지를 물질로 전환시킬 때 양전자
와 음전자가 쌍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양전자와 음전자를 합하니까 완
전히 쌍으로 없어져 버렸습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할 때는 쌍생
(雙生)이고,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할 때는 쌍멸(雙滅)이 됩니다. 이것
은 중도의 공식, 곧, 쌍으로 없어지고 쌍으로 생기는 쌍차쌍조(雙遮雙
照)로 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형인 에너지가 유형인 질량으로 전환할 때 음전자와 양전자가 쌍으
로 나타나니까 쌍생(雙生)이 되고, 이것은 곧 쌍조(雙照)에 해당합니
다. 또 유형인 질량 곧 양전자와 음전자가 쌍으로 없어지면서 무형인
에너지로 전환하니까 쌍멸(雙滅)이 되고, 이것은 곧 쌍차(雙遮)에 해당
합니다. 이처럼 쌍으로 없어지면서 한 쪽이 생기고, 또 쌍으로 생기면
서 한 쪽이 없어집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쌍차쌍조의 공식이 에너지와
질량이 전환하는 이론으로 완전히 증명이 됩니다.
동양사상을 잘 아는 일본의 무리학자들은 에너지와 질량의 관계가 불
생불멸이요, 부증불감 그대로라고 아주 공공연히 말합니다. 질량 전체
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 전체가 서로 전환되어서 조금도 증감이
없습니다. 곧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불생불멸이니 마땅히 부증불
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탓
에, 이런 표현을 그대로 말하지는 못해도, 그 내용은 꼭 같은 말로서
에너지와 질량 관계가 보존된다고 합니다. 보존된다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의 세계, 곧, 법계라고
합니다. 항상 머물러 있어서 없어지지 않는 세계, 상주법계라는 말입니
다. 이처럼 에너지와 질량의 등가원리에서 보면 우주는 영원토록 이대
로 상주불멸이며 상주법계입니다. 그래서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불생불멸이며 부증불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
게되면 자연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연계 곧 우주법계라는 것은 근
본적으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여서 아무리 전환을 하여도 증감이 없이 불
생불멸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주는 이대로가 불교에서 말하는
상주불멸이 아닐래야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인쉬타인의 등가원리가 나오지 않았으면 불생불멸은 거짓말
로 남아야 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3,000년 전에 진리
를 깨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혜안(慧眼)으로 우주 자체를 환히 들여다
본 그런 어른입니다. 그래서 일체 만법 전체가 그대로 불생불멸임을 선
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그런 정신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3,000여년 동안을 이리 연구하고 저리 연구하고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결과, 이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둘이 아니고 질량이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질량인 동시에 서로 전환하면
서 증감이 없음을 마침내 알아냄으로써,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생불멸이
라는 그 원리가 과학적으로도 입증되기에 이르른 것일 따름입니다.
지금 설명한 바와 같이, 불교의 근본 원리인 불생불멸이 상대성이론
에서 출발하여 현대 원자물리학에서 과학적으로 완전히 증명된 것입니
다. 이것만을 보아도 이 불교 원리가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은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과학이 불교 이론을 모두 증명해 준다
고 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불교 원리를 설명하
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또 현대물리학이 불교에 자꾸 접근해 오
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2. 색공의 세계
1) 색즉공(色卽空)
반야심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니라.
色不異空 空不異色 (색불이공 공불이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色)이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이란 것은 무형(無形)을 말합
니다. 유형이 곧 무형이고 무형이 곧 유형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유
형이 무형으로 서로 통하겠습니까?
어떻게 허공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허공이 된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
공이고, 허공이 바위입니다.
어떤 물체, 보기를 들어,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자꾸 나누어
가다 보면 분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분자는 또 원
자들이 모여 생긴 것이고, 원자는 또 소립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
다. 바위가 커다랗게 나타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분자→원자→입자→소
립자로 결국 소립자 뭉치입니다. 그럼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으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
是色)'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충돌해서 문득 입자가 없어졌다가
문득 나타났다가 합니다. 인공으로도 충돌 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입
자의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자꾸 자가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입자가 나
타날 때는 색(色)이고,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空)입니다. 그리하여 입
자가 유형에서 무형으로의 움직임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
연히 말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다. 실제로 부처님 말씀 저
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
입니다.
2) 4차원의 세계
또 요즘 흔히 4차원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아인쉬타인
의 '상대성이론'에 4차원(四次元)의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의 공간 세계는 3차원의 세계인데 여기에 시간의 차원을 더하면 4
차원이 됩니다. 3차원의 세계에서 볼 때는 시간과 공간이 따로이 존재
하지만, 4차원의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4차원의 세계에서는, 보기를 들어 금고 속의 돈을 금고 문을
열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꺼낼 수 있으며, 또한 문을 닫아 둔 채로 문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생각만 하면 해인사에 앉아서 천리만리 밖에
까지도 갈 수 있는 자유자재한 그런 세계인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4
차원의 세계를 신통자재한 홍길동의 이름을 따서 '홍길동의 세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4차원의 세계가 처음 제창된 것은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이지만
이것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완전한 체계를 세워 공식화한 사람은 소련
의 민코프스키 H.Hinkowski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4차원 공식을
완성해 놓고 첫강연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났다.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
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시대가 온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보기를 들어 "오
늘, 해인사에서..."라고 할 때에 '오늘'이라는 시간과 '해인사'라는 공
간 속에서 이렇게 법문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3차원의 공간과 시간
은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인데, 그런 분리와 대립이
소멸하고 서로 융합하는 세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완
전히 융합하는 세계, 그것을 4차원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화엄경>>에 보면 '무애법계(無碍法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애법
계라는 것은 양 변을 떠나서 양 변이 서로서로 거리낌없이 통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곧 시간과 공간이 서로 통해 버리는 세계입니다. 이것
은 앞에서 말한 4차원의 세계, 곧,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로서
민코프스키의 수학공식이 어느정도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3) 초심리학
시간과 공간이 서로 융합하는 세계가 이른바 4차원의 세계인데, 이것
은 결코 가공의 상상 속의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을 자꾸 개발
하여 가면 실제로 그런 세계에 들어갈 수 있고 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이 방면에 대해 많은 연구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테
면 심리학에서는 초심리학 Parapsychology이라는 분야에서 이것을 연구
하고 있고 또 그에 대한 많은 실증적 연구 보고도 나오고 있습니다. 얼
마전에는 타임지에서 이에 관한 특집기사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과학
이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에서는 100여 개 대학에서 초심리학에 대한 정
식 강좌를 열어 연구하고 있습니다. 또 소련은 유물론의 나라임에도 불
구하고 160억원이나 되는 막대한 예산을 편성하여 4차원의 과학을 연
구, 개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보기를 들어 군사 방면에서 잠수함이 바
다 깊은 곳에 잠수했을 때 정신력으로 그 잠수함에 어떤 지시를 해보면
70퍼센트는 성공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정신력으로
무슨 지시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하겠지만, 70퍼센트의 성공율
이라면 대단한 것입니다. 한편, 소련 땅의 서쪽 끄트머리인 모스크바와
동쪽 끄트머리인 블라디보스톡 사이에서 정신력에 의한 통신을 시도하
였더니 서로 통하였다는 실험 결과도 나왔습니다. 더우기 이 정신력에
의한 통신이 오히려 무선(無線) 통신보다 훨씬 더 힘이 강하고 전달이
빠르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실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만이 있
는 것이 아니고 무한한 능력이 있어서 이를 자꾸 개발하면 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실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무한한 정신력
무한한 정신력을 이용한 초능력의 보기는 그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영국의 캐논 경 Sir Alexander Cannon 의 캐논보고서에서 그
런 보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본디 정신과 의사인데 영국 국가에서
주는 최고의 명예인 나이트 Knight 작위까지 받은 대학자로서 영국, 프
랑스, 이탈리아, 서독, 미국의 다섯 나라 학술원의 지도교수이기도 합
니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 가운데 [잠재력 The Power
Within]이란 제목의 캐논보고서에서 소개한 몇 가지 실험에 대하여 여
기에서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이런 실험을, 런던과 같은 대도시에
서, 때로는 커다란 홀에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거나 때로는 많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즉석에서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은 눈을 감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또 눈알이 빠져버린 사람은
더더구나 볼 수가 없습니다. 눈 없는 사람이 어떻게 볼 수 있으며, 눈
감고 무엇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이 지닌 본디의 능력, 본디
의 시력은 눈을 뜨거나 감는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눈을 떠야만 볼 수
있고 감으면 볼 수 없다는 것은 의식 세계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잠재
의식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면 눈을 뜨거나 감거나, 눈이 있거
나 없거나에 관계가 없습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두 눈이 빠져버린
사람도 무엇이든 다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본래의 시력
이라고 캐는 경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험을 해 보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서 두 눈에 철판을 대고 수건으로 겹
겹이 둘러 싸맵니다. 그런데도 무엇이든 다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
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모두 알아 보는 것입니다. 철판을 눈에 대고 보
는데 멀고 가까움이 무슨 상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천안통(天眼通)이라고 합니다. 불교 경전에서
보면 천안이 가장 뛰어난 아나율(阿那律 ; Aniruddha) 존자라는 스님이
계시는데 그는 수행할 때에 너무 졸음이 많이 와서 그것을 없애려고 전
혀 잠을 안 자고 공부를 계속하다가 결국 두 눈이 멀고 말았다고 합니
다. 그리하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눈 곧 육안(肉眼)은 없어졌지만, 그
대신에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이 열려 삼천대천세계, 백억세계를 손바
닥의 구슬처럼 환히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아나율 존자의 천안에
견주면 요즈음의 200인치 망원경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리하여 부처님의 십대 제자 가운데서 아나율 존자는 비록 육신의 눈
은 없지만 천안이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캐논 경은 눈이 없거나 시신경이 완전히 파괴되어 절대로 회복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비관하지 말고 오직 무의식의 세계를
개척하라고 하였습니다. 무의식의 세계를 개척하면 눈이 있고 없는 것
에 관계없이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힘을 사용하
면 남의 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타심통(他心通)이라
고 합니다.
캐논 경은 이것에 대해서도 실험을 해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
여 있는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은 말
이나 글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머리 속에서 생각으로만 하는 것입
니다. 그러면 캐논 경이 말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질문자가 머리속에서
자기의 직업이 무엇인지 물으면 캐논 경은 그 사람의 직업을 말하고 또
나아가서 현재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일까지도 내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어김없이 다 맞는다
고 합니다.
결국 이로 미루어 볼 때 남의 마음뿐만 아니라 미래도 알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능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
한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달을 향하여 쏜 로케트나 우주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고 개척한 결과 우주선을 개발하여 이전에는 엄두도 못 내던 달
나라에까지 간 것이지, 미국사람만 타고 오라고, 소련 사람만 타고 오
라고 하나님이 보내준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
는 얼마든지 있으니, 앞으로 또 얼마나 더 큰 능력을 개발하게 될지 우
리 인간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캐논 경은 또 다른 실험으로 육체적으로는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알
아보았습니다.
시체를 넣는 곽(棺)처럼 생긴 나무상자를 준비하고 상자의 앞, 옆,
위, 아래의 사방으로 구멍을 뜷어 놓고 이상자 속에 피실험자가 누우
면 뚜껑을 덮고 뚫어 놓은 구멍 속으로 칼을 찌릅니다. 그 상자는 보통
사람의 크기보다 약간 작게 만들어져 있으므로 그 속에 들어가 있는
한, 결코 칼날을 피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오장육부
가 모두 칼날에 구멍이 생길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심지어 심장에 꽂힌
칼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 칼이 오르락내리락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칼을 빼고 상자를 열어 보면 그 안의 사람에게는 아무 상처도
없는 것입니다. 칼을 찌를 때도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칼 상자보다 더 놀랍고 사람의 초능력의 깊이를 깨우쳐주는 실험
으로 생매장(生埋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실험에서는 피실험자가
죽은 듯이 삼매에 들어갑니다. 의사가 검진하여 맥박도 끊어지고 호흡
도 끊어지고 뇌파 검사에서 뇌활동도 완전히 정지되었음을 확인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을 단단히 밀
납 포장하여 땅을 파서 묻어 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알아둘 것은
설사 죽지 않았다고 하여도 사람은 서너 시간만 땅에 묻어 두면 누구나
죽기 마련입니다. 한 시간이 아니라 불과 수 분이 지나도 다시는 깨어
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실험에서는 시체를 묻어 놓고는 며칠,
몇 달 또는 일년 동안이나 계속 놓아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년이
지난 뒤에 미리 정해놓은 시간에 파 보면 일년 전에 의학적으로 죽었다
고 판정받은 그 사람이 옷을 훌훌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캐논 경은 이 생매장 실험을 사람이 많이 모인 홀에서 실시 하였습니
다. 무대 위에 모래를 수십 짐을 져다놓고, 그 속에 사람을 묻었습니
다. 그리고 얼마 동안 기다렸습니다. 과연 미리 지정한 대로 15분이 지
나자 모래더미에 묻어둔 사람이 툴툴 털고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처럼 우리 인간은 귀신도 탄복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실험들을 통하여 볼 때 인간의 근본 정신은 육체를 떠나 활동하
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호흡이 끊어지고 맥박도 뇌활동도 완전히 정지
되었는데 어떻게 시간을 알고 깨어나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의 근
본적인 정신 작용은 뇌신경 세포의 활동에 관계없이 독립해 있음을 말
해 줍니다. 또한 언제나 깨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본디 무의식
상태라는 것은 언제나 죽지 않습니다. 설사 몸뚱이가 죽어 화장을 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없어져도 영혼은 독
립해 있어서 윤회를 하고 환생을 하는 것입니다.
5) 정신감응
인간의 정신 능력은 한 개인에게만 작용하는 것이 나니라 타인에게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아브로체프스키라는
소련의 유명한 심리학자가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정신과 정신 간에
서로 통할 수도 있다는 데에 착상하여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였습니다.
피실험자가 있는 곳에서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어떤 사람이
피실험자가 자기 집으로 오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만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브로체프스키의 실험에서 피실험자는 여자였는데, 그 여자
는 제 집안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가 뭔가 이상한 듯이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피아노 치던 것을 멈추고 밖으로 몇 번 들락
날락하더니 대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감시하던 사람들이 따라가 보니
과연 그 여자는 자기를 오도록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로 가는 것이
었습니다. 간절히 했던지 그만 정신을 잃고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맑은 날에 우산을 들고 나오라고 상대방에게 정신 반응을
보내면 그것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어 우산을 갖고 나오는 실험까지도 하
였습니다. 결국 이 실험으로 한쪽에서 어떤 생각을 강하고 간절하게 하
면 그 정신의 반응이 상대편에게까지 도달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이것을 텔레파시 Telepathy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정신감응(精神感應)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신감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은 일본에서 의사들이 한 실험입니다.
흰쥐 스무 마리에게 장질부사균을 치사량으로 주사해 놓고, 그 가운
데 열 마리는 약으로 치료하고 나머지 열 마리는 정신 치료를 하였습니
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에 보니 약으로 치료한 흰쥐는 모두 죽었는
데 정신요법으로 치료한 열 마리 중에는 세 마리가 죽고 일곱 마리가
살았다고 합니다. 또 죽은 세마리도 해부를 해보니 회복기에 들어서 있
었다고 합니다. 이 실험은 사람의 정신 작용이 동물에게도 반응을 일으
킨다는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실험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
게 볼 수 있는데 동물에게 최면술을 거는 것입니다. 만일에 인간의 정
신 작용이 동물에게는 작용하지 않는다면 최면술이 통할 리가 없습니
다. 악어나 사자, 호랑이 따위의 동물에게 최면술을 걸 수 있다는 사실
은 써커스나 묘기시범에서 쉽사리 알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이 정
신적으로 동물에게 반응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면 옛날 우리나라의 도
인들이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는 것이 전혀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정신반응은 광물에도 작용을 합니다. 이것은 내가 어릴때 많이 해
보던 실험이기도 합니다. 실 끝에 돌이나 쇳덩어리를 매달고서 그것에
정신을 한참 동안 집중시키고 나서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동쪽으로 움직이라 하면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앞으로, 뒤로, 원형으로 모두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이것
을 관념운동이라고 합니다. 또 유리겔라라고 하는 사람이 정신반응으로
숟가락을 휘게 하고 시계를 정지시키는 실험을 하는 것이 보도된적도
있습니다. 어쨌든 정신감응은 광물에도 작용을 한다는 것이 입증된 것
입니다.
6) 분신
이 밖에도 가장 신기하게 여겨지는 것으로 분신(分身)이라는 것이 있
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백, 수천의 장소에 몸을 나타내어 중생을 제도
합니다. 지구에 계시면서 저 세계에도 가고 이 세계에도 옵니다. 또 신
라시대의 원효스님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6처열반(六處涅槃)을 하였
습니다. 곧 여섯 곳에서 똑같이 한꺼번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것
을 불교에서는 '분신'이라고 합니다. 보기를 들어, 해인사에 있는 사람
이 분신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이 진주에도 한 사람, 부산에도 한 사람
, 서울에도 한 사람씩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몸이 한 날, 한 시
에 열 명도 되었다가 백 명도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실험에 의해 그런
분신에 성공한 예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요기하는 요기 Yogi들이 분신
을 해보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육체적으로
나 정신적으로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7) 육근호용(六根互用)
불교에 육근호용(六根互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
鼻舌身意)의 육근을 서로 바꾸어가며 쓴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귀는
듣는 것인데 귀로 보고 또 눈은 보는 것인데 눈으로 듣는다는 것입니
다. 이런 것을 육근호용이라고 합니다.
어제 어떤 신문에는 중국 사천에 사는 열한살 된 어린이가 모든 것을
귀로써 본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눈을 아무리 가려놓아도 무엇이든지
다 보며, 또 아무리 캄캄하고 어두운 곳에서도 물체를 본다는 것입니
다. 결국 이 아이는 귀로써 모든 것을 보는데, 이것은 밝고 어두운 것
도 사실은 없음을 말해 줍니다. 눈으로 보든 귀로 보든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눈으로 본다고 해도 되고, 귀로 본다고 해도 됩니다. 오장육
부가 다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병이 들었을 때에는 그 아픈 데가 어디
고 빛깔이 어떤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주위의 한두 사람만이 본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학자들
이 조사해 본 결과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의 신문마다 보도된 것입니다.
귀로써 보고 눈으로 듣는다(耳見眼聞;이견안문)는 이 말은 본래 불교
에 있는 말입니다. 오조 법연 선사도 이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의 상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법문이지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하고 의심을 품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중생이 번
뇌 망상으로 육근이 서로 막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경계에 도달할수 없
을 뿐이지, 실제로 부사의(不思義)한 해탈경계를 성취하면 무애자재(無
碍自在)한 그런 경계가 나타나 육근이 서로서로 통하게 됩니다. 이것이
육근호용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근호용이 되어 모든 것에 무애
자재한 경계를 얻을 수 있습니다.
3. 삼천대천세계
이제는 이 불생불멸의 공간적 범위는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봅시다.
몇 해 전에 어느 대학의 총장으로 있는 분이 와서 묻기를, "불교를 여
러 해 동안 믿어왔는데 부처님이 이 우주를 어느 정도 크게 보셨는지
좀 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라고 흔히들 말하는
데 그것도 모르느냐"고 웃으면서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삼천대천세계'라고 말은 많이 하지만 그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는 일월(日月)
이 비치는 우주를 한 세계라고 합니다. 흔히 한 일월이 비치는 우주가
하나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우주가 천
(千)이 모여서 소천세계(小千世界)가 되고, 그 소천세계가 또 천이 모
여서 중천세계(中千世界)가 되고, 중천세계가 다시 천이 모여서 대천세
계(大千世界)가 되며, 대천세계를 세번 곱한 것이 삼천대천세계라고 말
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일종의 표현방식일 뿐이고
실지 내용은 백억세계 혹은 백억일월인 것입니다. 또 이 백억세계, 백
억일월을 한 불찰(佛刹)이라고 하고 이런 불찰이 미진수(微盡數)로 많
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크기입니
다. 이런 크기는 혜안(蕙眼)이 열리지 않고는 누구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요즘 천문학에서 이 사실이 실증되고 있습니다. 1955년에 미
국에서 파르마 산(山)에 200인치나 되는 굉장히 큰 망원경을 처음으로
완성하여 설치하였습니다. 200인치라고 하면 직경이 5미터나 됩니다.
그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찰하면 10억 광년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망
원경을 통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우주라는 것 밖에도 무한
한 우주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단순히 별 하나뿐인
단일체가 아니라 수천, 수만 개의 별이 모인 집단 우주가 무한히 많은
숫자로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사실은 사진에도 나타나고
신문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무한한 우주 집단이 대
략 40억개 내지 50억개쯤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부처님이 말씀하신 백억세계라는 것이 결코 과장된 표
현이 아님을 과학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직 과학 기술이 부족해서 10
억 광년밖에 볼 수 없지만 더 발달하면 100억 광년도 볼 수 있을 것입
니다. 그렇게 되면 더 무한한 우주 집단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부처님께서 가장 작게 보신 것으로는 '일적수구억충(一
適水九億蟲)'이라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물방울 한 개
에 9억개나 되는 많은 벌레가 있다는 것입니다. 최신의 현미경으로도
아직 물방울 한개에서 벌레를 9억개까지는 볼 수 없지만, 그토록 조그
만 세계에 그렇게 많은 생명이 살고 있다는 것도 이즈음에 와서 점차
증명되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혜안을 가지고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우주 공
간을 보셨습니다. 흔히 말하는 상주법계, 진여법계라고 하는 것도 중생
들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불생불멸을 내용으로 하는
그 법계라는 세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한에서 무한으로 이어
지는, 참으로 무한한 세계입니다.
4. 물심불이(物心不二)의 세계
그러면 너르디 너르고 변함이 없는 광대무변한 우주가 있으며 그 내
용은 또한 불생불멸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물질로된 것인지 정신으로
된 것인지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흔히 불교에서 '일체유
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여 불교가 유심론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불교
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라고하는 것은 정신과 물질을 떠난, 곧 양변
-물질과 정신-을 떠나서 양변이 융합한 중도적인 유심을 말합니다. 한
쪽으로 치우친 유물론이나 유심론이 결코 아닙니다. '일체유심조'라고
하지만, 그것은 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유심론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것은 변견(邊見)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교는 변견으로서는 설 수가 없습니다. 완전한 중도적 입장에서라야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보면 유심(唯心)도 아니고 유물(唯物)도
아닙니다. 유심도 아니어서 유심과 유물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동시에
유심과 유물이통하는 세계입니다. 곧 물심불이(物心不二)인 것입니다.
유심도 아니고 유물도 아니면, 결국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것입니
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가서는 서로서로 융
합해서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심적으로도 증명이 되
어야 하고, 유물적으로도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 두가지로 증명이
안 되면 모순이 생기게 됩니다.
생물학에서는 인간의 육체나 또는 동물, 식물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
왔습니다. 이들은 아주 미세한 세포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학계에서 이
들 세포를 연구한 결과, 동물의 세포나 식물의 세포가 똑같음이 증명되
었습니다.
또 근래에 와서 어느 세포나 각 세포 가운데에는 핵산이라는 것이 들
어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영문 약자로 흔히 '디엔에이 DNA'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핵산은 순전히 정신적인 역할을 맡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동적으로 모든 것을 기억해서 서로서로 연락하고 명령을 전달
하고 신경을 지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핵산은 결코 신경계통의
기관은 아닙니다. 각 세포 가운데에는 세포핵이 있는데, 핵산은 그 세
포핵 가운데에존재하여 기억력과 활동력을 가진 정신체라는 것이 판명
되었습니다. 조금 더 연구를 깊이 한 생물학자들은 식물과 동물의 세포
는 모두 정신 작용을 하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 활동을
떠난 물체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물학 연구도
물질과 정신이 실지로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나마 생명도 없는 것으로 알려
진 광물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광물이 동
물, 식물처럼 성장하지도않으니 아예 죽어 있는 무생물로 취급한다든
지 운동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대인의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물질의 근본 질량
으로 소립자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늘 스핀 Spin 운동을 하고 있습니
다. 스핀 운동이란 모든 소립자가 일정하게 타원형을 그리며 활동하고
있는 성질을 말합니다. 어떤 소립자든지 늘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다만 인간의 눈으로는 그것을 볼 수 없으므로 운동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지, 이 세상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실
제에 있어서 어떤 광물이든지 또는 무생물이든지 그것들은 모두 활동을
하고 있으며 살아 있습니다. 어떤 물체든지 죽어 있거나 활동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물리학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 입니다.
어떤 입자든지 스핀운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물질에서 그치는 것이
지 정신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즘 이론
물리학에서는 "소립자도 자유의사를 갖고 있다"고들 많이 주장합니다.
자유의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결국 정신활동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
다. 동, 식물을 이루고 있는 각 세포마다 그 속의 세포핵에 핵산이 있
어서 정신활동을 하고 있듯이, 광물이나 무생물도 그것을 이루고 있는
각 입자 안에서는 스핀운동을 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자유의사를 가지
고 있다고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불생불멸을 말하면서 이렇게 현대물리학을 도입하여 우리가
일상에서 인식하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가 아니라 시간을 백억분의
일 초로 나누고 공간을 다시 백억분의 일 밀리미터로 나누어서 극 미세
한 상황까지 설정하여 이야기를 펼친것은, 결국 동물이든 식물이든 광
물이든 그 모든 것은 물질이라고도 할 수 없고 정신이라고도 할 수 없
으며, 그와 동시에 그것은 또 물질이라고도 할 수 있고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바로 양변(兩邊)을
떠나고 또 양변을 포함하는 불교의 중도공식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현
대과학은 발달을 거듭하면서 자꾸 불교 쪽으로 가깝게 오고 있습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불교는 과학이 발달될수록 그 내세우는 바가 좀
더 확실히 증명이 되고 더욱 빛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높이찬탄합니다.
이렇게 해서 3,000년 전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현대과학의 이론으
로 입증됨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부처님 말씀은 누구든지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의 세계이기에 영원불변하는 것입니다. 설령 원자
탄이 천 개, 만 개의 우주를 다 부순다 하더라도 불교의 중도사상, 연
기사상의 원리는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5. 질문과 답
물음 :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믿는 자는 융성하고 그렇지 않으면 망한
다고 하여 절대자인 창조주가 화복(禍福)을 정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는 업(業)에 따라서 착한 일을 하면 행복하게 되고 악한 일을 하면 불
행하게 된다고 하는데 이해가 어렵습니다.
답 : 예수교에서 주장하는 것은 만든 이도 하나님이고 따라서 구원도
그에게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누가 만든 사람이
따로 없고 누가 따로 구원해 주지 않습니다. 순전히 자아(自我) 본위입
니다. 예수교는 철두철미 남을 의지하는 것이니 두 관점이 정반대입니
다. 요즘의 과학적 증명에 의하면 남이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거짓말입
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말했듯이 예수교에서도 자체 전환을 하고 있
습니다. 불교에서 본시 주장하는 것은 우주 이대로가 상주불멸이고 인
간 이대로가 절대자라는 것입니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며, 또 사람이
고 짐승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 아닌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사람 사람이 모두 금덩어리 아님이 없는데 자기가 착각해서 금덩
어리를 똥덩이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이라는 말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금덩이인 줄 모르는 것이니
수행을 하여 본래의 눈을 뜨고 보면, 본시 금덩이인 줄 확실히 알게 되
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모두 진금(眞金)이고 모두가 부처님 세계이고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교에서는 '구원'한다고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준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구원이 아닙니다. 자기 개발이고, 자기
복귀(復歸)입니다. 자기의 본래 모습이 부처님인 줄을 알라는 것입니
다. 선종(禪宗)의 조사 스님네들이 항상하는 말이 그렇고 또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석가도 믿지 말고, 달마도 믿지 말고, 지금 말
하는 성철이도 믿지 말라. 오직 자기를 바로보고, 자기 능력을 바로 발
휘시켜라. 이것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그럼, 어째서 부처님은 극락세계
등의 의타(依他)를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방편설(方便說)입니다. 자아
(自我) 본위를 모르는 사람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이지 참 가르침은 아
닙니다.
물음 : 업(業)의 변화에 의해서 귀하게도 되고 천하게도 되는 것입니
까?
답 : 그렇지요.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햇빛 속에 똑바
로 나서면 그림자도 바르게 되고 몸을 구부리면 그림자도 구부러지는
것입니다. 바른 업을 지으면 모든 생활이 바르게 되고 굽은 업을 지으
면 모든 생활이 굽어집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습니까? 절대로 타
살(他殺)은 없다, 전부 다 자살(自殺)이라고.
물음 : 불교의 윤리에서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은 어떻게 구별됩니
까?
답 : 남을 도우는 것, 남에게 이로운 것은 선(善)이라 하고, 남을 해
치는 것,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악(惡)이라 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이란 선과 악을 완전히 버리고 또 선과 악이 융합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중도(中道)의 세계를 말합니다. 선과 악이 대
립되어 있는 것은 진정한 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쪽에 치우친 변견
(邊見)입니다. 보살계(戒)를 받을 때에 "선도 버리고 악도 버려라. 이
렇게 하는 것이 보살이다"고 말합니다. 상대적인 변견을 버리라는 것입
니다. 그럼 선도 버리고 악도 버리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선도 버리
고 악도 버리는 여기에 참 선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음 : 도솔천과 극락세계(極樂世界)는 어떤 것입니까?
답 : 도솔천이라고 하는 것은 외계(外界)의 천상(天上)에 있습니다.
그러나 꼭 말씀 그대로 받아들일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미
도솔천이니 33천(三十三天)이니 하는 사상이 있었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쓴 것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그 성질이 다릅니다. 이것은 본시 있는 세계가 아
닙니다. 아미타불의 원력(願力)으로써 극락세계를 만들었습니다. 흡사
히 하나님이 하늘이 있으라 하니 하늘이 있다는 식(式)입니다. 아미타
불이 원력으로써 만들어 놓은 땅이니 우주창조설과 그 성격이 같은 것
입니다.
물음 : 인간의 능력이 무한하고 불교가 완전무결한 것이라면 앞으로
과학은 불교 이상으로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답 : 몇헤 전 불교로 전향한 어느 미국 사람이 서울에 와서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교뿐만 아니라 많은 종교가 과학이 발달할수록 퇴
색되고 파괴되는데 비해 불교는 더욱 더 그 논리가실증되는 동시에 빛
이 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불교는 진리를 바로 보았기 때문에 3천년 뒤
에도 그것이 참말인 것이 자꾸 증명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과학이 발
달할수록 불교의 진리가 한가지 한가지씩 계속해서 더 증명이 될 따름
이요, 불교 이상의 더 나은 진리를 발견할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손오공이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인 줄을 알아야지요.
물음 : 캐논 경이 쓴 [잠재력]에서와 같이 무의식 상태에서 실험하
는 그들도 화두 공부를 한 것입니까?
답 : 그들이 화두 공부를 한 것은 아니고또 완전히 제 8 식(識)에
도달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실험을 하는 동안에는 무의식 상태에 가
깝게 들어간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상태에 들어갈 것 같으면 그런 능
력이 나타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물음 : 윤회설과 인구증가 및 산아제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인구가 증가한다는 것 곧 이전에는 인구가 적었는데 지금에는
인구가 많다 하니 이것은 영혼이 어떻게 된 것인가? 사람이 반드시 사
람으로만 윤회한다면 이것은 문제가 큽니다. 사람만이 사람으로 윤회한
다면 인구가 증가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윤회를 하는 데에는 동물과
인간의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외계에서 오는 영혼도 있고
하여 전체적으로는 증감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지구에서 인구가 자꾸 팽창해 가니 산아제한을 해서 위기를 면해야겠
다고 인위적으로 노력을 하는데 그것 가지고 해결이 안 됩니다. 산아제
한한다고 사람이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건설적으로 나아가
야지 산아제한은 파괴적입니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많아서 먹을 것이
없다고 할 지 모르지만, 우리가 노력하고 개척하고 개발하면 아무리 인
구가 많아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물음 : 불성(佛性)이란 무엇입니까?
답 : 이것은 불교의 독특한 용어(用語)인데, 부처님의 특성을 나타내
는 것을 불성(佛性)이라 하고, 일체법계(一切法界)를 말할 때는 법성
(法性)이라 하는데 일체만법의 본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이 법성을 바
로 안 사람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것은 변동이 없으므로 진여(眞如)
라 하기도 하고, 그 내용은 중도(中道)이므로 중도라 하기도 하고, 활
동하는 자체는 연기에 따라 움직이므로 연기법(緣起法)이라도 합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희한하고
희한하구나, 모든 중생(衆生)이 두루 불성을 갖고 있구나."
제 2 장 중도의 원리
1. 초전법륜
지금까지 이야기한 '불생불멸'이라든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든지
'무애법계'라고 하는 이론들을 불교에서는 '중도법문(中道法門)'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불교의 근본 사상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이러한 불생불멸의 뜻을 전하는
화엄 및 법화사상은 대승경전의 말씀들인데, 이 경전들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고 수백 년이 지나서 편집된 것이므로 더러 잘못된 것이 없나
하는 의심이 생긴 것입니다. 설령 부처님이 살아 계시던 무렵에 편집되
었다 하더라도 더러 잘못 듣거나 잘못 기록하여 오전(誤傳)이 있을 수
가 있거늘, 하물며 부처님이 돌아가신 지 수백 년 뒤에 편집한 것은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틀림없는 부처님의 사상이라고 고
집하는 것은 좀 억지스럽지 않은가 하는 의혹이 얼마든지 일어날수 있
습니다.
학자들이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한 결과, 한때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직
설(直設)이 아니라는 말이 나돌게되었습니다. 이름하여 대승비불설(大
乘非佛說)이 대두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대신에 부처님이 돌아가시
고 나서 곧 성립된 경전인 [아함경]에서 부처님의 사상을 찾으려고 하
였습니다. 과연 [아함경]을 열심히 연구해보니 처음에는 이 경전에서
표현된 부처님의 사상은 대승불교의 사상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듯이
보였습니다. [아함경]을 부처님의 사상 그대로라고 한다면, 대승불교는
그 [아함경]에서 발달된 사상일 뿐이지 실제의 부처님 사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뭏든 뒤에 연구를 거듭해나가 보니 [아함경]에도 부처님의
친설(親設)이 아닌 것이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이름난 권위자들이 더욱 깊이 연구를 한 결과, 원
시 경전인 팔리어 경전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설한 것이라는 증
거를 가진 초기의 법문이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
치 돌 무더기 속에서 금이나 옥을 발견해낸 것과 같았습니다. [아함경]
중에서도 [잡아함경] 같은 데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은, 당시 인도의 여
러 사상을 종합해 볼때, 틀림없는 부처님의 사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었
습니다. 가장 믿을 만한 것은 부처님의 생활을 기록해 놓은 율장에서
그에 대한 좋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초전법
륜(初轉法輪)은 부처님께서 맨처음으로 법문하신 것인데, 깨달음을 성
취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동시에 교단을 조직하신 그 출발점부터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成道)하신 뒤에 혼자만 좋은 법
을 알고 있을 수는 없기에 그 법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기로 마음먹었
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좋은 법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여서 그들도
함께 깨닫고 자신과 같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수행하던 중에 고행이 결코
도(道)가 아님을 알고 방향을 전환하였을 때에 부처님을 떠나버린 다섯
비구를 맨 처음에 찾아갔습니다.
처음에 그들 다섯 비구는, 부처님이 타락하였다고 생각하여, 자기들
을 찾아오고 있는 부처님에게 인사도 하지 말자고 약속 하였습니다. 그
러나 정작 부처님이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자, 스스로 한 약속을 잊어버
리고, 대법(大法)을 성취한 만덕종사(萬德宗師)이신 부처님께 오체투지
(五體投地)로, 곧 온몸을 땅바닥에 대고 머리가 깨어지도록 절을 하였
습니다. 그리고는 부처님을 자리에 모셔놓고 "어찌하여 우리를 잊지 않
고 찾아오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을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법을 위해서 찾아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대각(大覺
)을 성취하신 것을 맨먼저 그들에게 소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
이 다시 무엇을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물으니, 부처님께서는 "중도(中
道)를 정등각(正等覺)하였다"고 그 제일성(弟一聲)을 토하셨습니다.
중도, 이것이 불교의 근본 사상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모순이 융합되
는 것을 말하며, 모순이 융합된 세계를 중도의 세계라 합니다.
세상의 이치는 모두 상대적(相對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선(善)
과 악(惡)의 상대, 시(是)와 비(非)의 상대, 유(有)와 무(無)의 상대,
고(苦)와 낙(樂)의 상대 등, 이렇듯 모든 것이 서로 상대적인 대립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현실 세계는 그 전체가 상대로 이루
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 이 현실 세계에서는 모순과 투쟁이 생기
기 마련입니다. 이 상대의 세계 곧 양 변의 세계에서는 전체가 모순 덩
어리인 동시에 투쟁인 것입니다. 그 결과 이 세계는 불행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불행에서 벗어나고 투쟁을 피하려면 근본적
으로 양 변, 상대에서 생기는 모순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이를테면 서
로 옳으니 그르니 하는 시비(是非)를 버리면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는 이른바 사바고해(娑婆苦海)인 까닭
에 그 양 변을 여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중도를 정등각하였다"고 선언하신 것은 바로 그 모든 양
변을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곧 나고 죽는 것도 버리고, 있고 없는 것도
버리고, 악하고 착한 것도 버리고, 옳고 그른것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모두 버리면 시도 아니고 비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
고,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절대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렇듯 상
대의 모순을 모두 버리고 절대의 세계를 성취하는 것이 바로 해탈이며
대자유이며 성불인 것입니다.
모든 대립 가운데에서도, 철학적으로 보면, 유(有) 무(無)가 가장 큰
대립입니다. 중도는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닙니다. 이것을
비유비무(非有非無)라고 하니, 곧 있음과 없음을 모두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유와 무가 살아 납니다(亦有亦無). 그 뜻을 새겨
보면 이러합니다. 곧 3차원의 상대적인 유와 무는 완전히 없어지고 4차
원에 가서 서로 통하는 유무가 새로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무
가 서로 합해집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무가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 이름한다[有蕪合故名爲中道]."
불생불멸의 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서로서로 생멸이 없고, 모든 것
이 서로서로 융합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모든 것이 무애자재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
이 곧 있는 것이라[有卽是無, 無卽是有)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내용을 그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니 그들은 짧
은 시일 안에 깨달음을 성취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초전법륜입니
다. 이렇듯이 초전법륜의 근본 골자는 중도에 있습니다. 괴로움과 즐거
움을 완전히 버리고, 옳음과 그름을 버리고, 있음과 없음을 버린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구름이
완전히 걷히면 밝은 해가 나오는 것과 같아서, 거기에는 광명이 있을
뿐입니다. 유와 무를 완전히 버리면 그와 동시에 유와 무가 서로 통하
는 세계, 곧, 융통한 세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눈을 감은 세계에서는 있고 없음이 분명히 상대가 되어 존재 하지만,
눈을 뜨고 보면 유와 무, 곧, 있고 없음이 완전히 없어지는 동시에 유
와 무가 완전히 융합해서 통하게 됩니다. 이렇듯 중도의 세계란 유, 무
의 상대를 버리는 동시에 그 상대가 융합하는 세계를 말합니다. 양 변
을 버리는 동시에 양 변을 융합하는 이 중도의 세계가 바로 모든 불교
의 근본 사상이며, 그리고 대승불교 사상도 여기에 입각해 있습니다.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이다.
一卽一切
一切卽一
[화엄경]에서 말하는 이 사상도 중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와 일
체라는 것은 양 변입니다. 하나와 일체를 버리면 그것이 바로 중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가 되
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엄사상이며 곧 불교 전체의 사상인 것입니다.
[법화경]이나 [화엄경]에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이나 원융무애(圓融無
碍)한 일진법계(一盡法界)를 말한 것은 모두 중도에 입각해 있는 사상
입니다.
대승경전이 시대적으로 보아서 부처님이 돌아가신 지 몇 백년 뒤에
성문화된 것이라고 하여도 그 근본은 부처님의 사상 그대로인 것입니
다. 대승경전이 부처님 사상이 아니라거나 부처님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 중도에 있는 것과 같
이, 화엄과 법화 또한 중도를 그대로 전개시킨 것이니, 그것이 곧 초전
법륜이 되는 것입니다.
2. 대승불교 운동
대승경전이 성립되기 전에 소승경전이 많이 성립되었는데 그것은 이
른바 부파(部派)불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파불교시대에는 부처님의
중도 사상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순전히 유와 무, 곧, 양 변의 유, 무사
상을 가지고 싸움을 일삼았습니다. 어떤 파는 유를 가지고 부처님의 근
본 사상이라고 하고, 어떤 파는 무를 가지고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라고
주장하니 부처님의 근본 사상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그들 각 파
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편집할 때 자기들이 본 대로, 자기들의 주장대로
부처님 경전을 편집하였습니다. 결국 이것이 소승불교의 근본이 된 것
입니다. 부처님의 중도사상이 오히려 망각되고 왜곡되어 버린 것입니
다.
대승경전보다 앞서 성립되었다는 팔리어로 쓰여진 소승경전은 유, 무
에 입각해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완전히 전하지 못
했습니다. 그 뒤에 성립된 대승경전은 전체가 중도사상에 입각해 있는
데도 불구하고, 대승불교 사상을 이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시적으
로 그것은 소승불교에서 발달된 사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부처
님의 근본사상이 아니라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 알고 보니
부처님의 근본 사상은 중도대승(中道大乘), 중도일승(中道一乘)에 있음
이 입증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 사상은 부처님 사상을 그대
로 전한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불교 운동은 부처님
의 근본불교 복구 운동이라고 합니다. 근본불교를 복구 시킨다 함은 부
처님의 사상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본디의 말씀대로 돌아감을 뜻합
니다.
대승불교가 근본불교의 복구 운동임을 밝히는 데에서 가장 앞선 선구
자가 바로 용수보살입니다. 용수보살은 많은 저술을 내었는데, 현재 전
해지는 것으로 [중론(中論)] 과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이 있습니다.
[대지도론] 100권은 그 사상을 자세하게 펼친 것이고 [중론]은 간략하
게 요약한 것인데, 그 내용은 똑같습니다. 특히 [중론]은 내용이 요약
되어 그 사상의 골수를 잘 드러내 보이는데 이름을 '중론'이라 한 까닭
은 부처님의 근본 사상이 중도에 있음을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
님의 근본 사상은 오직 중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파불교 시대에 불
교가 잘못 전해져, 유다 무다, 생이다 멸이다 하면서 싸우기를 그치지
않으니 그러한 싸움을 바로잡으려면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근본 사상인
중도를 바로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뜻에서 부처
님의 근본 사상을 조직적으로 체계화해서 저술한 책이 바로 [중론]입니
다.
용수보살은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바로 세우고 널리 펼치기 위하여 참
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의 근본
사상을 완전히 복구시킬 수가 있었으며, 그러한 사상이 지금까지 불교
를 지배해 오게 되었습니다. 이즈음에는 어떤 학자든지 대승불교가 근
본불교 -- 부처님의 근본 사상을 복구한 운동 -- 이지 결코 뒤에 변질
되거나 새롭게 발전시킨 사상이 아님을 총결론으로써 의심없이 인정하
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의심을 일으켜 의논이 분분하였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전법륜에서 중도만을 말씀하셨지 진여(眞如)라거나 연기(緣起)라거나
법계(法界)라는 것은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전법륜
에서 중도를 말씀하시고 난 뒤에 [잡아함경]과 같은 조그만 경전이 편
집되면서 중도를 여러가지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곧 그곳
에서는 중도가 바로 진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여라고 하는 것은 절
대입니다. 변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여는 양 변을 여윈 절대의 세계
입니다. 동시에 진여는 법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여법계(眞如法界)
는 일체연기법(一切緣起法)에 의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도,
진여, 법계, 연기 이 네 가지는 대승불교의 근본 골자로서, 이들을 빼
버리면 대승불교의 사상은 존재할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에서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실 때는 간단히 중도
라 하여 양 변을 버린 것이라고 말했지만, 뒤에 가서 부연하여 중도를
다양하게 설하셨습니다. 중도를 설명할 때에는 반드시 연기가 따라오
고, 법계가 따라오고, 진여가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진여, 법계, 중도,
연기 이것을 버리고 불교를 찾으려 함은 마치 얼음 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중도라는 것이 과연 부처님께서 최초로 발견한 것인지 아
니면 인도 사상에서 이미 있었던 것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인도 사상에
대하여 자세히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시대에는 대개의 학자들이 그것
은 부처님의 독창적인 깨달음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곧 부처님의 중
도사상은 시대적 연관 위에서 성립된 것이지 부처님의 독창적인 것이라
고는 볼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처님 이
전과 그 당시의 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살펴본 결과 부처님께서 선언하
신 중도를 내용으로 하는 사상은 다른 데에서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 중도사상은 부처님의 새로운 발견이며 독창적
인 새 출발이라고 학자들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도 사상을 총괄하여 보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유
심(唯心)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유물(唯物)사상입니다. 유심사상은 전
변설(轉變說)로 되어 있고, 유물사상은 적집설(積集說)로 되어 있습니
다. 전변설은 수정주의(修定主義)로 나가고 적집설은 고행주의로 나가
는데, 유심과 유물, 전변설과 적집설, 수정주의와 고행주의들이, 말하
자면, 부처님 이전에 인도 사상을 통괄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
처님께서는 유심도 유물도버리고, 전변론도 적집론도 버리고, 수정주
의도 고행주의도 버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실지로 수행하여 유심과 유
물을 버려야만 중도를 정등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도사
상은 부처님께서 최초로 깨달으신 새 발견인 동시에 불교만의 독창적인
사상인 것입니다.
3. 중용과 변증법
중국에는 [중용(中庸)]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불교의 중
도와는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유교사상에서의 중용이란 너무 지나치지
도 않고 너무 부족하지도 않음을 말합니다. 이를 테면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은 지나쳐 버리기 쉽고 모르는 사람은 너무 미치지 못하므로, 과
(過)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중(中)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중(中)'은 단순한 중간의 의미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아가서는 서구 세계에서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인들
이 일찌기 중용사상을 펼쳤는데, 그들도 중간 사상을 가지고 중용사상
이라 하였을 따름입니다. 그들의 이른바 중용사상은 양 변을 완전히 버
리고 동시에 양 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사상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양
변을 여의고 양 변을 융합한다는 것은 추호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중도사상과 중용은 결코 혼동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서양의 철학계에서도 근대에 이르러 언뜻 보기에 불교의 중도사상과
비슷해보이는 이론이 나왔습니다. 바로 헤겔의 변증법(辯證法) 사상입
니다. 정(正), 반(反), 합(合), 이 세 가지가 변증법의 기본 공식으로
정에서 반이 나오면 그것을 융합시켜서 합을 만든다는 논리입니다. 언
뜻 생각하면 이 논리는 중도와 비슷한 듯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
사의 발전 과정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보기를 들어 정(正)이라는 사상이 나와서 이것에 모순이 생
기면, 다시 반(反)이라는 사상이 나오고 시간이 지나면 정도 아니고 반
도 아닌 것이 서로서로 종합이 되어서 합(合)이라는 사상이 나온다는
이론입니다. 이와 같이 시간을 전제로 하는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말하
는 헤겔의 정, 반, 합 이론도, 정과 반을 완전히 버리고 정과 반이 완
전히 융합하는 것이 아니므로, 중도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변증법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괴테와 헤겔이
만났는데, 괴테가 헤겔에게 그 변증법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고 합니다. 그러자 헤겔은 그것은 모순의 논리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
다. 곧 정과반의 모순, 시와 비의 모순, 선과 악의 모순을 말하니, 이
것은 양 변이 서로 모순이므로 서로 통할 수가 없으니 이 이론은 그것
을 이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중도사상이니, 팔만대장경 전체가 여기에 입각해
있으며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하신 모든 말씀이 바로 중도를 설명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사상을 떠나서 불교를 설명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에 대한 반역(反逆)인 것입니다. 불교를 설명한 많은 것들
의 그 진위(眞僞)를 가리려면 중도논리(中道論理), 중도정의(中道定義)
에 위배되는지 아닌지를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에 위배되는 사상
은 결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제 3 편 영혼과 윤회
제 1 장 영혼은 있다
1. 불교의 제 8 식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상주법계(常住法界)란 모든 것이 하나도 없어
짐이 없이 있는 그대로가 불생불멸(不生不滅) 이라는 것입니다. 상주법
계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으로서 앞에서는 등가원리를 말했는데, 여기에
서는 그것과는 다른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이 살아 있을 때는 정신이라 하고 죽어서는 영혼이라 하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수천 년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논란과 시비를 거
듭해 왔지만, 아직도 확실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과학
자나 철학자들은 영혼 따위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싸움이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대승이나 소승이나
어느 경론이나 할 것 없이, 팔만대장경에서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생
사윤회를 말씀하셨습니다. 곧 사람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지은 업(業)에 따라 몸을 바꾸어 가며 윤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윤회는 불교의 핵심이 되는 원리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윤회를 하는 실체를 말할 때 그것을 영혼이라고
이름하지 않고 제8아라야식(Alaya 識)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사람
의 심리 상태를 나눌 때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은 제6의식이
라 하고, 그 안의 잠재의식은 제7말라식(末那識)이라 하고, 무의식 상
태의 마음은 제8아라야식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호흡이 끊어지고 혈맥
이 끊어지고 목숨이 끊어져 버리면 의식은 완전히 없어지고 오로지 제8
아라야식(阿梨耶識)만이 남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몰식(無沒識) 곧 죽지 않는 식, 없어지지 않는 식
이라고 합니다. 또 장식(藏識)이라고도 합니다. 과거, 현재 할 것 없이
모든 기억을 마치 곳간에 물건을 간수해 놓듯 전부 기억해 두고 있다
가, 어떤 기회만 되면, 녹음기에서 녹음이 재생되듯 기억이 전부 되살
아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말할 때는 무몰
식이라 하고,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는 뜻에서 말할 때는 장식이
라합니자. 이것이 있기 때문에 미래겁이 다하도록 윤회를 하는 동시에
무엇이든 한번 스쳐간 것은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근래의 불교학자들은 제8아라야식의 존재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 알아봅시다. 대승불교에 대해 이론을 가장 많이 발달시킨 일
본에서도 가장 권위있는 사람이 우정백수(宇井佰壽)인데, 그는 아라야
식은 도저히 증거를 잡을 수 없으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
다. 그리하여 영혼 자체를 설명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
떻게 윤회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
습니다.
"윤회는 부처님께서 교화를 위해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지 실제로 윤
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윤회가 있고 인과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두
려워서라고 마음 가짐과 몸가짐을 착하게 하려고 힘쓸 것으므로, 교육
적인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이지만, 그런 주장도 과학의 발
달 앞에서는 꺾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과학이 물질적인
데에서뿐만이 아니라 정신과학 분야에서도 크게 발전을 이룸에 따라 영
혼이 있다는 것이, 윤회가 있다는 것이, 또한 인과가 확실하다는 것이
점차로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 해탈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해탈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확실한 판
단이 서야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데에서,
또 신앙 생활을 하는 데에서나 불교를 포교하는 데에서, 또는 수행하여
성불하는 데에서 꼭 갖추어야 할 흔들림 없는 근본적인 토대가 형성되
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만 바른 행동을 할 수가 있
기 때문입니다.
2. 근사(近死)경험
이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세계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그 궁금
증과 신비가 차차 벗겨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인 것이 아니
라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지금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연
구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레이몬드 무디(Raymond Moody) 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대학에서 철학을 배울 때 의과대학의 정신과 교수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교수는 무디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나는 수년 전에 두 번이나 죽었다가 깨어난 경험이 있다. 내가 죽
은 뒤에 의사가 와서 사망을 확인하고 장사를 치를 준비를 하는 도중
에 깨어난 것인데, 깨어나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죽어 있는 동안이 깜
깜한 것이 아니었다. 내 영혼이 죽어 있는 육체를 빠져나와 그것을
바라보고, 또 여러가지 활동을 한 것을 기억한다."
그 정신과 교수는 죽었다가 깨어나는 순간까지의 자기가 경험했던 일
을 자세히 이야기했는데, 듣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너무나 허황된 꿈 이
야기나 거짓말 같아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디는 그때에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웃고 말았지만, 뒤에 자신이
철학교수가 되어 강의를 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찾아와 상담을 요청하
며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서부터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학생은
무디 교수에게,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이므로 영
생(永生)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며칠 전에 그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가 깨어났다고 하면서 그 때
할머니가 경험한 것을 들은 대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무
디 교수가 학생 시절에 앞의 정신과 교수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똑같았
습니다. 무디 교수는 이러한 경험담이 단순히 웃어넘기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해 보기로 결심했습니
다.
그리하여 그는 새롭게 의학을 공부하여 환자들을 상대로 이런 경험담
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해 뒤에 무디교수는 150명의
사례를 수집하여 그것을 1975년에 책으로 출판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
고 그 사례를 보면 사람들은 거의 모두 다음과 같은 공통되는 경험을
겪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죽었을 때는 캄캄한 어떤 터널 같은 곳을 빠져나간다. 그곳을
빠져 나오면 자신의 신체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이상하다. 내가 왜 이렇게 누워 있을까? 내가 죽었는가' 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아주 밝은 광명이 나타난다. 그 광명 속에서 자기가 지
나간 한평생에 걸쳐 겪은 모든 일들이 잠깐 동안에 나타난다. 그 뒤에
자기가 아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서로 위로도 하고 소식도
묻고 이야기도 나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혼은 이 방, 저 방으로 돌
아다니면서 의사들이 자기를 살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이라든지
가족들이 장사 지낼 의논을 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다른 방에서 일어나
는 것들을 모두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눈앞에 보이는 그 살아 있
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을 할 수가 없다."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좀처럼 믿으
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만났다는 사
실은 증명할 수가 없지만, 죽은 뒤에 그의 가족들이 한 이야기는 그 자
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들었으니 유력한 증거가 됩니다.
이미 의사에 의해 죽었다고 판정되면 그 육신은 한갖 물체에 불과합
니다. 그러니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고 눈이 있어도 볼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시신은 머리 끝까지 흰 천으로 덮어 놓았으니, 설령 거짓으로
죽었다고 하여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죽었다 되살아난 사람은
자기가 죽어 있는 동안에 가족들이 한 이야기와 그들이 어디에 있었으
며, 무슨 행동을 했는지 상세하게 이야기하는데 실지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이야기를 들으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
다.
결국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사람이 죽고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
이 아니라 몸뚱이는 죽었어도 무엇인가 활동하는 활동체가 있어서 보고
듣는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깨어났다고 해서 누구
나 이런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캄캄하여
아무 기억이 없다고도 합니다.
무디 교수는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사례를 수집하여 책으로 엮
었습니다. 그 책이 처음 출판되자 세상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래서 각 나라 말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잠깐 보고 온
사후의 세계> 또는 <죽음의 세계> 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적이 있습니
다.
레이몬드 무디 교수의 연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그동안 영혼이나
죽음의 세계에 대해 연구를 해오면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결과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여 여러 사람들이 새롭게 조사에 착수하였
습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근사경험(近死經驗)이라고 하고, 또 영어로
는 약어를 써서 엔디이 NDE (Near Death Experience)라고 하며, 이에
대한 연구를 근사연구(近死硏究)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연구 결과 근사경험에 관한 사례는 수천 건이 수집되
었는데, 그런 학자들 중에 가장 이름난 사람이 미국의 시카고대학에 있
는 퀴불러 로스 E. Kubler Ross 교수입니다. 이 여자 교수는 무디 교수
의 발표 이전에 이미 많은 자료를 수집해 놓고 있었습니다. 무디 교수
가 자신이 출판하려는 원고를 가지고 와서 그 여자에게 출판을 상의한
적도 있었습니다. 퀴 블러 로스 여사는 그 원고가 자신이 수집한 자료
와 같고 또 결론도 동일하여 무디 교수의 책에 서문만써 주고 자신의
책은 출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디 교수는 1977년 두번째 책임 <사후생(死後生)에 대한 회고 Refle
ctions on Life after Life]를 출판하여 좀더 자세하게 근사경험에 대
해 발표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죽음 뒤에도 삶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연구에 대해서 영혼이나 정신을 유물론적으로 보는 소련의 학자
들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사람의 신체 중에서 뇌세포는 맨 나중에 소
멸하므로 아직 죽지 않은 뇌세포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환상일 뿐이지
죽은 뒤에 실제로 어떤 활동체가 있어서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고 합니
다.
이러한 주장은 많은 학자들에게 공감을 주기는 했지만 여기에는 시간
의 문제가 있습니다. 소생기억이 일, 이 분 동안의 사망에 불과한 것이
라면 몰라도 적어도 하두 시간이나, 길면 이틀이나 사흘씩 죽었다가 깨
어나는 경우에는 그런 주장이 성립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체가
죽은 뒤에도 뇌세포만이 몇 시간 동안 또는 며칠 동안 살아 있다는 것
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근사경험이라고 하
는 소생기억에 대한 반대 의견들은 현재까지로서는 이렇다 할 만한 뚜
렷한 자료나 근거를 뒷받침하고 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사후에 영혼이 있다는 주장에 관한 오래되고 유명한 기록이 플라톤의
<공화국>에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느 군인이 전사하였
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 뒤에 그 시체를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를 치르
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체를 화장하려고 장작더미에 올려놓는 바로
그 순간에 그 군인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는 깨어난 뒤에 자신이 죽어
있는 동안에 활동한 여러가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런 오랜 이야기도 무디 교수의 조사 사례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
음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3. 영혼사진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들에 의해 영혼이 있다는 것은 확인되었는데 영
혼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는가?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원혼(怨魂)이
라고 하여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옵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단순히 전
설로만 이해하려 들지만, 사실, 우주과학 시대라는 요즘에도 그런 일은
더러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음의 사건은 1848년 3월 31일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미국의 뉴욕 주에 하인즈 빌이라는 촌락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마
을에 독일계 사람으로 폭스라는 이가 이사를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폭
스가 이사온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습니
다. 그 때 폭스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가족과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문 두드리는 소리에 그냥 들어오라고 소리쳤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가만히 있노라니 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
리고 나가보면 아무도 없고 해서 나중에는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문 밖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기는 사람이 아
니고 영혼이라고 말하면서, 이름은 로스이고 이 집에서 죽었는데 자기
의 시신이 지하실에 묻혀 있으니 그것을 파내서 장례를 치루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폭스의 가족들은 놀라서 경찰을 불러 지하실을
파 보니 과연 시신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생각해 보니 폭스가 이사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지하실에 시신이 묻혀 있는 곳을 정확히 아는 것을 수상히 여겨 폭스를
연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또 영혼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나를
장례까지 치러 주었는데 이렇게 고생을 시켜 미안하다고 하며 자기를
죽인 사람은 앞집에 살던 죠지백이라고 일러 주는 것이었습니다. 경찰
이 다시 그 죠지라는 사람을 잡아 조사를 해 본 결과, 과연 그가 살인
범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이야기가 전국에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영혼은 과연 존재하고 인간
이 영혼과 접촉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851년에는 영국의 캠브리지대학에서 심령학회가 조직되었으며, 그로부
터 1세기도 더 지난 1972년 12월에는 미국 로체스터에서 열린 국제회의
에서 '하인즈 빌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울 것을 결의하여 뉴욕
시 73번가에 8미터높이로 기념비를 세운 한편, 영혼의 존재에 대하여
활발한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영혼이 나타났다는 일화는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신문에도 몇 번 보도가 된 것입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재임 시에 네델란드의 유리아나 여왕이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여왕은 백악관에서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밖
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자기의 시녀인 줄 알고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문 앞에는 링컨 대통령이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터라 한눈에 그
얼굴을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여왕은 그렇지 않아도 백악관에 영혼
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실지로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되자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옆방의 시녀들이 비명소리를 듣고 뛰어나와서 여왕을 간호했는데 그
때까지 링컨 대통령의영혼은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녀들
도 영혼을 보게 되었습니다. 만일에 여왕이 혼자서 보았다면 환상이나
착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시녀까지 함께 보았으니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날 아침 트루먼 대통령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역시 링컨 대통령의 영혼을 여러번 보았다고 하는 것이었습
니다.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에도 그 부인이 링컨 대통령의 영혼을 보았
다고 증언한 적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거짓말이라고 하여 무시하기에는 너무도 증거가 뚜렷합니
다. 그래서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나니까 영혼사진을 찍어보자고 해서 사
진을 찍어 신문에 보도한 적도 있습니다. 그 사진은 나도 본 적이 있는
데 링컨 대통령이 살아 있던 때의 모습과 완전히 똑같았습니다.
이렇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이 갈수록 뚜렷하게 증명되고 있습니다.
영혼을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 특징을 다음의 다섯 가지
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영혼은 모양을 드러냅니다. 그것을 여러사람이 봅니다.
둘째로, 영혼은 말을 합니다. 이 말하는 것도 여러 사람이 듣습니다.
세째로, 영혼은 사람 눈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짐승의 눈에도 보입
니다. 한 예로 여러 사람이 함께 사냥을 나갔을 때에 영혼이 나타나면
말이나 개들도 겁이 나서 숨는다고 합니다.
네쩨로, 영혼이 물체를 이동시킵니다. 잠가 놓은 문을 연다든지 방안
의 물건을 이리저리 옮겨 놓기도 합니다.
다섯째로, 영혼사진을 찍는 것이 가능합니다. 영혼을 보았다는 수많
은 사람들의 증언이 있지만 그래도 그것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사진으로 담는 데에 성공했다면 믿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영혼사진이 최초로 성공한 것은 지금부터 일 백여년 전인 1861년 미
국 뉴욕시에 살던 멈러Mumler 씨에 의해서입니다. 멈러 씨가 하루는 교
외에 가서 풍경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현상을 해 보니
나무 밑에 어떤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사진을 찍을 때
는 나무 밑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뒤에 멈러 씨는 다시 그곳에 가서 사진을 찍으면서 주위를 두루 살피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상을 해 보면 역시 사람이 앉
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 차례 반복을 해 보았으나 늘 결과는 마
찬가지였습니다. 멈러 씨는 너무 이상해서 그 사진을 들고 인근 주민에
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진에 나타난 사람은 5년 전에 이미 죽
은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멈러 씨는 그래서 이번에는 주민들과 함
께 다시 그 자리에 가서 사진을 찍어 보았는데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로 말미암아 멈러 씨의 사진은 영혼사
진이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영혼사진사로 유명해지기 시
작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사진을 찍기도 하였습
니다.
하루는 친달 부인이라는 여자가 그에게 와서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습니다. 촬영을 마치고 현상을 해 보니 부인의
어깨에 양손을 얹고 있는 링컨 대통령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에게 물어 보았더니 자신이 링컨 대통령의 미망인이라는 것입니
다. 사진을 찍기 전에 미리 링컨 대통령의 미망인이라고 하면 링컨 대
통령의 사진을 구해다가 거짓된 영혼사진을 찍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해
서 그 부인은 신분을 숨기고 얼굴까지 가리고 사진을 찍었던 것입니다.
그 뒤로 멈러 씨는더욱 유명해지고 큰 돈도 벌게 되었다고 합니다.
멈러 씨가 이렇게 유명해지자 정부 당국에서 조사를 하기 시작했습니
다. 자기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대법원에까지 올라가게 되어 마침내는 과학자, 철학자, 심리
학자, 언론인까지 동원시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조사단은 멈러 씨와
함께 그가 처음으로 영혼 사진을 찍었던 곳에 가서 다시 사진을 찍게
한 뒤에, 모두가 엄중하게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현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영혼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서 대법원도 그의 사기혐의에 관해 결국 무죄판결을 내렸습니다. 이것
이 멈러 씨의 영혼사진 사건인데 1869년 4원 22일 자 뉴욕타임즈에 상
세히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영혼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
습니다. 그 중에서는 직접 사진을 찍는 데에 성공한 사람도 있는데, 그
가 영국의 허드슨 William Henry Hudson입니다.
그 당시에 월레스 A. Wallacc(1823~1913)라는 유명한 박물학자가 있
었는데, 그는 다아윈과 같이 진화론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월레스는 허
드슨의 영혼사진 이야기를 듣고 허드슨에게서 자기도 사진을 찍어 보았
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사진에 죽은 어머니의 모습이 함께 찍혀 나오
는 것이었습니다. 월레스는 그 사진을 보고 영혼사진이 존재함을 인정
하고 정식으로 학계에 그 사진을 첨부해서 보고서까지 제출했다고 합니
다. 월레스와 같은 대과학자가 영혼사진에 대해서 거짓으로 증언할 리
가 없으므로, 이것은 믿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대체로 영혼사진을 찍으면 거기에 나오는 영혼이 어느 때, 어느 곳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영국의 호우프 Hope(1863~1933)
라는 사람은 신분이 확인된 영혼사진을 무려 삼천 장이나 촬영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쯤 되면 그 누구도 영혼사진을 무시할 수가 없을 것입
니다.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크룩스 Sir William CrooRes(183
2~1919)도 호우프에게 가서 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진에
자신의 죽은 부인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크룩스 씨
도 영혼사진이 결코 거짓이 아닌 사실임을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영혼사진은 많은 사람이 직접 찍고 또 이름난 과학자나 저
명인사들이 그것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 스스로 증언까지 하게 됨으로
써, 상당히 신빙성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믿을 수 없다 하여
모두 거짓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일이 이 정도가 되면 영혼
이 있다는 것은 의심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영혼사진을 찍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와 관련해서 한 가지 의문이 생
깁니다. 곧, 영혼이란 정신체인데, 죽은 사람의 정신체인 영혼이 카메
라에 비친다고 하면 산 사람의 정신 작용도 카메라에 나타나야 하지 않
겠느냐는 것입니다.
미국의 세리우스 Ted Serios라는 사람이 이에 관하여 열 두해에 걸쳐
연구하여 마침내 성공하였습니다. 카메라를 준비해두고 그 앞에서 자동
차를 생각하고 있으면 자동차가 사진에 나타나고, 빌딩을 생각하면 빌
딩이 찍힙니다. 머리속에서 생각하는 대로 모두 사진이 되어 나오는 것
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생각사진(念寫)이라는 것으로, 세리우스는 이런
사진을 여든장쯤 찍었습니다. 그 때에 아이젠버드 Eisenbird 라는 교수
가 이 사람에 대해, 의혹을 가지고, 3년 동안 연구하였습니다. 속임수
가 있는가 하여, 이리 연구하고 저리 연구하고 또 이렇게 실험 해보고
저렇게 실험해 보았으나, 결국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연 생각하는 대로 사진에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이젠버
드 교수는 <세리우스의 세계>라는 책을 출판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
습니다.
이제, 생각사진까지 입증되고 보니,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사진으로 찍을 수가 있느냐는 의문은 더 이상 나올수가 없게 되었습니
다. 따라서 영혼이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4. 영혼의 물질화
우리나라에도 옛날 이야기에 보면 영혼이 있음을 시사하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옵니다. 이를테면 어떤 선비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게 되어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렇게 함께 살던 어느 날, 그 아가씨가 친정에 간다고 해서 따라가 보면
집에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다못해 들어가
서 물어보면 그 아가씨는 이미 죽은 사람인데 그 날이 바로 그 여자의
제삿날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산 사람이 영혼과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와 같은 사례가 옛날 이야기로만 전해오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 와
서도 영국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영혼을 기술적인 방법으로 산 사
람처럼 나타나게 해서 같이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영혼의 물질화'라고 하는데, 앞에서 영혼사진을 입증했던 크룩스라는
학자가 바로 이 작업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케디 킹이라는 여자의 영혼
을 물질화시켜 여섯달 동안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
하는 것 따위가 보통 사람과 똑같았습니다. 아이들에게 글도 가르쳐 주
고, 이야기도 하고, 손님이 오면 접대도 하는 등 어떤 일이든 할 수 있
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먹지 않는다는 것과, 몸무게를 달아
보아도 무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 여자의 머리카
락을 잘라서 싸 가지고 자기 집에 가서 펴 보았더니 머리카락이 온데
간데 없다고 합니다. 또 바로 옆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과학자인 크룩스가 영혼을 물질화시켜서 여섯
달 동안이나 함께 지낸다고 하자 그 소문이 영국 나라안에 모두 퍼졌습
니다. 그리하여 그때의 유명한 사람들 가운데 꽤 많은 사람이 그 케디
킹이라는 영혼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수천 장이
나 되는데 내게도 여러 장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근사(近死)경험이니 영혼사진이니 하는 것들에 대하여 소개
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흥미거리로서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일
체만법이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한 이야기들입니다.
물질적인 현상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불생불멸한다는 사실이
여실히 증명된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불생불멸이라면 역사 이래로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일이 거듭되어 왔는데 그 많은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집니
다.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지, 아니면 따로 영혼만이 사는 나라가 있
는지가 궁금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윤회(輪廻)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한때는 학
자들이 윤회설은 인간들에게 권선징악(勸善懲惡)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
일뿐이라고 주장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
이 입증되고, 불생불멸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자 이러한 주장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실지로 전생과 윤회가 있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조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과학적인 통계까지 나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6도(六道)윤회를 이야기합니다. 6도란 지옥(地獄), 아귀
(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의 여섯
세계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지은 업(業)에 의해 6도를 윤회합니
다. 인간이 되기도 하고 개나 소 같은 축생이 되기도 하니, 이 윤회는
바로 자신이 행한 바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의 앞날의 일이 전생에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決定論)이나 숙
명론(宿命論)과는 다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에게 나쁜 일이 닥치면
자기의 업이나 팔자 탓으로 돌려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자기는 아무리
잘해도 업이 두텁고 팔자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비록 현재에 받는 과보(果報)는 지난날의 업에 의
해 그렇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선업(善業)을 닦는
것은 지금의 자기 자신의 의지입니다. 물 속에 있는 무거운 돌을 입으
로만 떠오르라고 외친다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돌을 떠오르게 하려
면 스스로 힘을 쓰든지 기계의 힘을 빌든지 하는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
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업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
력하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이러한 윤회사상은 부처님께서 최초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부처님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것이 진리임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
르침으로 믿는 것입니다. 결국 이 윤회 사상에 의하면 영혼은 따로 거
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생을 거듭하면서 몸을 바꾸어 나타나는 것입니
다.
제 3 편 영혼과 윤회
제 1 장 영혼은 있다
5. 사자(死者)의 서(書)
티벳 지방에 전하는 경전 중에 바르도 토에돌 Bardo Thodol 곧 [사자
의 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죽는 사람(死者)과 죽음에 대한 안
내서로서, 죽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주는 것 만으로도 그 영혼은 해
탈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 부분(치카이 바르도 Chikhai
Bardo)은 죽음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고, 둘째 부분(초이니드 바르도
Chonyid Bardo)은 죽음 직후에 잇달아 일어나는 꿈과 같은 상태를 설명
하며, 세째 부분(시드파 바르도Sidpa Bardo)은 출생 충동과 출생 이전
의 과정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죽음에서 출생에
이르기까지는 보통 49일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에 사
자(死者)의 영혼이 나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부처님의 말씀인 대승경
전을 읽어 주거나, 또는 [사자의 서]에 나오는 글을 읽어주면 좋은 곳
으로 왕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사람이 죽으면 49재를 지내는
것은 이러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자의 서]에 나오는 죽음의 순간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근래
의 연구인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의 증언, 곧, 근사경험과 너무 비슷합
니다. [사자의 서]에 보면 숨이 끊어질 때에 밝은 광명을 경험할 것이
라 하면서 그것은 마음의 본래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자
(死者)의 영혼은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
만, 자기 자신이 그들을 부르는 소리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므로 마침내
사자는 실망하고서 사라져간다고 합니다.
이 [사자의 서]는 티벳의 승려들 사이에서 비전(秘傳)으로 내려오다
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00년대의 일이니만치, 어느 누가 이 책을 미
리 보고 마치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것처럼 꾸며서 말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예나 지금이나 죽음의 세계
에 대한 경험은 똑같다는 것이 증명되는 셈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영혼을 중음신(中陰神) 곧
바르도Bardo라고 합니다. 이 중음신은 전혀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두려워하는 수가 많다고 합니다. 이 때 선업(善業)이 강하면 곧 안정을
되찾고 바로 다음 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거나
가족 친지의 울음소리가 너무 강하게 들리면, 그만 세상에 집착하는 마
음이 생겨 올바른 길을 찾아가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좋은 곳으로 왕생하라고 염불이나 경
을 독송해 주는 것입니다. 이 중음신들은 자기의 업력(業力)에 따라 다
음 생을 받아 다시 태어나는데 7일 만에 태어나는 경우도 있고, 49일을
채우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영혼이 있다는 것과 그 영혼이 다음 생을 받아 다시 태어나
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이것이 종교적인 상상의 세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품어 왔습니다. 윤회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자기의 전생
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에 대
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제 2 장 윤회는 있다
1. 전생기억
전생을 기억하는 경우는 대개 두 서너살 되는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데, 이들은 말을 배우게 되면서 전생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곧
"나는 전생에 어느 곳에 살던 누구인데 이러이러한 생활을 했다"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을 따라서 조사를 해 보면 모두 사실과
맞곤 합니다. 이것이 전생기억 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부터 25년 전 터어키 남부의 아나다라는 마을에 이스마일이라는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집은 정육점을 하는데 이스마일이 태어난
지 일년 반쯤 되던 어느 날 저녁에 아버지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문득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집에 갈 테야. 이 집에는 그만 살겠어요."
"이스마일아, 그게 무슨 소리냐, 여기가 네 집이지 또 다른 네 집이
어디 있어?"
"아니야,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 우리 집은 저 건너 동네에서 과
수원을 하고 있어. 내 이름도 이스마일이 아니고 아비스 스루무스야.
아비스 스루무스라고 부르세요. 그러지 않으면 이제부터는 대답도 안
할테야."
이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말했습니다.
"나는 저 건너 동네 과수원집 주인인데 쉰살에 죽었어. 처음에 결혼
한 여자는 아이를 못 낳아서 이혼하고 새로 장가를 갔어. 그러고는 아
이 넷을 낳고 잘 살았지. 그러다가 과수원에서 일하는 인부들과 싸움을
벌여서 머리를 맞아 죽었어. 마굿간에서 그랬지. 그때 비명소리를 듣고
부인하고 애들 둘이 뛰어나오다가 그들도 맞아 죽었어. 한꺼번에 네 사
람이 죽었지.그 뒤에 내가 이 집에 와서 태어난 거야. 아이들 둘이 지
금도 그 집에 있을 텐테 그 애들이 보고 싶어서 안 되겠어."
그리고는 자꾸 전생의 자기 집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소
리를 못하게 하면 울고, 그러다가 또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한
번은 크고 좋은 수박을 사왔는데, 이 어린 아이가 가더니 가장 큰 조각
을 쥐고는 아무도 못 먹게 하는 것입니다.
"내 딸 구루사리에게 갖다줄 테야! 그 애는 수박을 좋아하거든."
그가 말하는 전생에 살던 집에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그
지방 사람이 더러 이 동네에 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웬 아이
스크림 장수를 보더니 그 어린 아이는 뛰어 나가서 말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알 턱이 있겠습니까.
"나를 몰라? 내가 아비스 스루무스야. 네가 전에는 우리 과수원의 과
일도 갖다 팔고 채소도 갖다 팔았는데 언제부터 아이스크림 장사를 했
지? 내가 또 네 할례(割禮)도 해주지 않았더냐?"
놀랍게도 그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과 일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소문이 자꾸 자꾸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터어키는 회교국이기 때문에
회교 교리에 따라 윤회를 부인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환생을 주
장하면 결국 그 고장에서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비스
스루무스가 전생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자꾸 아이의 입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세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확인도 해볼 겸 아이를 그가 말하는
과수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함께 가는 사람이 다른 길로
가려면 아이는 "아니야, 이쪽 길로 가야해" 하면서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앞장서서 과수원으로 조금도 서슴치 않고 찾아 들어가는 것이었습
니다. 과수원에는 마침 이혼한 전생의 마누라가 앉아 있다가 웬 어린
아이와 그 뒤를 따라오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눈이 둥그렇게 되어 쳐다
보았습니다. 어린 아이는 전생 마누라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더니 다
리를 안으며 말했습니다.
"너 고생한다."
어린 아이가 중년 부인을 보고 "너 고생한다"고 하니, 부인은 더욱
당황했습니다.
"놀라지 말아라. 나는 너의 전 남편인 아비스 스루무스이다. 저 건너
동네에서 다시 태어나 지금 이렇게 찾아왔어."
또 아이들을 보더니, "사귀, 구루사리, 참 보고 싶었다" 하면서 마치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사람들을 자기가 맞아 죽
은 마굿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전에는 좋은 갈색 말이 한 필 있었는
데 그 말이 안 보이니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서, 팔았다고 하니 무척 아
까와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일하던 여러 인부들을 보지도 않고서
누구, 누구 하며 한 사람씩 이름을 대면서 나이는 몇 살이고 어느 동네
에 산다고 말하는데 그 말들이 모두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전생의 과수원 주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결국 세계적인 화제거리가 되어 이스마일이 여섯 살이 되던 1
962년에 학자들이 전문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하기위해 조사단을 조직
하였습니다. 이 때 일본에서도 다수의 학자들이 참여했습니다. 그 조사
보고서에 보면 확실하고 의심할수 없는 전생기억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과수원 주인이 생전에 돈을 빌려 준 것이 었었는데 돈을
빌려간 사람은 아비스 스루무스가 죽어버리자 그 돈을 갚지 않았습니
다. 이스마일은 그 돈을 빌려간 사람을 불렀습니다.
"네가 어느 날 돈 얼마를 빌려가지 않았느냐. 내가 죽었어도 내 가족
들에게 갚아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왜 돈을 떼어먹고 여태 갚지 않
았어?"
돈 빌려 간 날짜도 틀림없고 액수도 틀림없었습니다. 안 갚을 수 있
겠습니까! 이리하여 전생 빚을 받아내었습니다. 이 사실은 죽은 아비
스스루무스와 돈 빌려 쓴 사람,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었습니다. 그런 것을 어린 아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 것이며 또 누가
말하여 주었겠습니까? 그리하여 조사단은 이스마일이 바로 아비스스루
무스의 환생이라는 사실에 대해 확정을 짓는 보고서를 내었습니다.
전생을 기억하는 사례 중에서 또 유명한 것으로 인도의 산티데비
San ti Deui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산타 데비는 1926년 인도의 델리에서 태어났는데 세살 때부터 자꾸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전생에 무트라 Muttra 지방
에 사는 케다르 Kedar라는 사람의 아내였는데 자기를 그곳으로 보내달
라는 것이었습니다. 산티 데비는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여러가지 전생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산티 데비의 부모는 처음에는 아이가 정신이 좀
이상한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전생 이야기를너무
나 생생하게 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무슨 곡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
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이가 말하는 무트라 지방에 가서 케다르라는
사람을 찾아 보았더니 과연 그런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아이가 말한
대로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산티 데비의 부모는 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기 집에 일곱살 되는 계집아이가 있는데 자꾸
전생 이야기를 하면서 당신의 아내 였다고 하니 그것이 정말인지 확인
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몇 시에 자기 집으로 와서
확인해 보자고 제의했습니다.
산티 데비의 부모는 이렇게 비밀리에 약속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약
속을 한 그날에 케다르 씨는 산티 데비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가
문에 들어서자 이를 본 산티 데비는 깜짝 놀라며 반색을 하고 뛰어나가
그를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을 항상 생각하며 당신에
게 가려고 해도 이 집에서 보내주지 않아서 못 갔다"고 하는 것이었습
니다. 그리고는 전생의 남편인 케다르를 따라가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
다. 산티 데비는 옆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계속하던 중에 자기
가 죽으면 재혼하지 않겠다고 해 놓고 왜 장가를 갔느냐고 다그치기도
하였습니다. 또 자기 어머니에게 케다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면서
그것을 준비해 달라고도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자신에 대해 상세히 말
을 하자 케다르 씨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비록 어린아이
지만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등을 볼 때 전생의 자기 아내임이 틀림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산티 데비의 전생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자 인도 정부에서는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조사단은 산티 데비를
데리고 무트라 마을에 가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우선 집을 찾도록 했
습니다. 산티 데비는 너무나 오랫동안 산 곳이라 눈을 감고도 척척 찾
는 것이었습니다. 얼마쯤 가면 느티나무가 있는데 거기서부터 길이 좁
아지니 거기서 차를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산티
데비는 앞장서서 옛날에 자기가 살던 집으로 들어가서 머리가 허연 노
인에게 "아버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
인은 전생의 시아버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불러서 한 사람씩
이름을 말하는데 모두 사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산티 데비는 살림을 돌아보고 나서 살림이 궁색해졌다고 하며 지하실
에 묻어 둔 금을 파서 살림에 보태 쓰자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
고 사람들을 데리고 지하실로 가서 가리킨 곳을 파 보았으나 빈 궤짝만
나오고 금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물어보니 남편이 그
금을 파 내어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이야기로 전생에 산티 데
비가 지하실에 금을 묻어둔 것은 사실임이 판명되었습니다. 그래도 조
사단은 계속해서 의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이한 사실
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델리와 무트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말이 서로 달랐습니다. 산
티 데비는 델리에서만 살았고, 아직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무
트라 지방의 말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트라 지방의 말을 하
는 것이었습니다. 평범한 어린아이라면 무트라라는 지방이 있다는 것도
잘 모를 텐테 억양도 말씨도 틀림없는 그 지방의 말을 사용하는 것이었
습니다. 이 점에서 조사단은 더 이상 의심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 외에도 여러가지를 검증해 본 결과 조사단은 산티 데비가
전생의 케다르 씨의 아내가 환생한 것임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
다. 그래서 인도 정부에 다음과 같은 공식 성명서를 냈습니다.
"산티 데비의 환생 문제는, 더러 반대하는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전국적으로 권위있는 사람들이 직접 상세히 조사해 본 결과 이
것이 조금도 거짓말이 아닌 틀림없는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전 세계에 알려져 전생기억의 대표적 사례가 되
었습니다. 그 후 산티 데비는 인도의 수도인 뉴델리에서 공무원으로 살
고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나이가 많아 생존 여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이스마일이나 산티 데비의 예와 같은 전생기억의 사
례는 학계에 보고된 것만 해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중에 한두 가지만
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몇 해 전 스리랑카에서의 일입니다. 태어난 지 3년 7개월 된 쌍동이
가 있는데 자꾸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단이 그 아
이를 전생에 살았다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근처의 주민
들을 수 백명 모으고 그 가운데에 그 아이가 말하는 전생의 부모형제
들을 섞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그 아이더러 전생의 부모와 형제를 찾
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이 사람은 아버지, 이 사람은 어
머니, 이 사람은 누나, 이 사람은 형님..." 하면서 가족 한 사람 한 사
람을 다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의 전생기억을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세살 된 어느 아이도 전생 이야기를 하는데 그는 다이빙 선수였다
고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지금도 다이빙할 수 있겠니?"
"그럼요. 할 수 있고 말고요. 전에 많이 했는데요."
이리하여 세살 되는 어린 아이를 높은다이빙대 위에 올려놓게 되었
습니다. 그러자 어린 아이는 다이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도 무서
워하지 않고, 조금도 서툴지 않게 서슴없이 다이빙을 했습니다.
전생기억이란 이런 식입니다. 또 흔히 천재니, 신동이니, 생이지지
(生而知之)니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태어난 뒤로 한번도 글을 배운
적이 없는데 글자를 다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책을 보여도 모
두 읽을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이지지라고 합니다. 곧 나면서
부터 다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생이지지는 바로 전생기억에 의한
것입니다. 전생에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금생에로 그대로 가지고
넘어온 것입니다. 또 처음 가보는 곳인데 낯이 설지 않고,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친근감이 가는 경우는 전생의 기억이 희미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생기억에 대해 누구보다도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미국의 버지니아대학의 이안 스티븐슨 Ian Steuenson 교수입니
다. 그는 세계 각국에 연락기구를 조직하여 전생기억을 가진 아이나 어
른이 있으면 학자들을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여 확인했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수년 동안에 600여명의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그 중 대표적인 사례
를 뽑아서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바로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 가지
사례 Twenty Cases Suggestiue of Reincarnation ]라는 책으로, 뒤의
부록 1에서 소개됩니다. 전생기억에 대한 보고서로서는 가장 확신이 있
고 어떤 사람이든 반대의견을 제시하기 어려운 유명한 책입니다. 그리
고 1973년까지 약 2,000건의 전생기억을 가진 사례를 조사하여 보고했
습니다. 자료가 이만큼이나 되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사람이 죽으면 그
만이 아니고 윤회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안 스티븐슨은 정신과 교수로서 전통적인 의학에 대한 연구 경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연구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
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전통적인 이론은 인간의 성격을 유전과 환경과
의 영향이라고 하지만, 이들 복합적인 요인만으로는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는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규명해 보고자 했다."
그는 윤회를 한다고 정식으로 공포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사실임에
는 틀림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이나 경험에 의해 무의식
적인 영향을 받는 어른들보다 자신의 기억을 해석하려고 들지 않는 어
린이의 사례 조사에서 90퍼센트 이상의 정확성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안 스티븐슨교수는 전생기억에 나타난 사례들에서 몇 가지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전생기억과 연령과의 관계입니다. 대개는 태어난 지 두서너살
이 되면 전생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좀더 나이가 들어서나 아니
면 말을 시작하자마자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체로 말을 잘 할
수 없는 시기의 전생기억이 좀더 정확한 수가 많습니다. 어린 아이가
전생에 대해 말하는 첫 말은 대개 자신이 알았던 사람의 이름이나 지명
입니다. 그러다가 다섯살에서 여덟살 사이쯤 되면 어린이들은 전생기억
을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이 때가 되면 가정의 제한된 테두리를 벗어
나 이웃과 학교에서 여러가지를 경험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점점 사라지는 전생기억 위에 새로운 경험이 축적되면서 전생기억은 아
주 사라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이거나 위엄
과 지혜를 갖는 등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그 행동이 다릅니다. 이러한
행동은 가족이나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보이지만, 본인에게는 당연
한 행동이며 그것은 전생의 자기 모습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또 증언자
들이 말하는 죽은 사람의 행동과도 일치합니다.
세째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자기 육체의 생소함을 말하곤 합
니다. 그들은 대개 자신이 작은 육체에 갇혀서 답답하다고 불평을 늘어
놓곤 합니다.
네째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가장 생생하고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전생에서 죽음과 관련된 것이며, 바로 죽음의 순간에 대한 기억입
니다. 그리고 특히 죽음에 대한 전생기억 중에서 교통사고나 살인, 전
쟁과 같이 격렬하게 죽은 기억이 더욱 생생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런
죽음을 당한 사람만이 환생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그런 경우일
수록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격렬한 죽음의 경우, 전생기억을 하는 아이는 대개 죽음을 가져다 준
물건이나 환경에 대해 강한 공포심을 나타냅니다. 한 보기로서 어떤 어
린이는 전생에 다리 위에서 버스를 지나가게 하느라고 비켜 서다가 물
에 빠져 익사하였다고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다리, 버스, 물
에 대해서 상당한 두려움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목욕시키려면 네 명의 어른이 강제로 붙잡아야 할 정도로 물에 대한 공
포에 떤다고 합니다.
다섯째로, 사람과 환경의 변화를 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처음 가는
집이라면 그 집이 어떻게 변하였고, 거기 사는 사람이 어떻게 변하였는
지 보통의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생을 기억하는 경우에
는, 처음 전생 집을 찾아갈 때, 구조가 어떻게 변경되었다는둥 가족 중
에 누가 안 보인다는둥 그 집의 변화를 말한다고 합니다.
여섯째로, 환생을 예견하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아이를 출산하기 전
에 어느 가정에 태어나기 위해 온다는 것을 꿈에 예고하는 경우가 있습
니다. 이러한 꿈이 동, 서양에서 종종 화제가 되곤 합니다.
일곱째로, 임신 중의 비정상적인 식성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
반적으로 알고 있기에는 임신을 하게 되면 평소에 잘 안 먹던 음식이나
제 철이 아닌 음식에 대해 그 사람은 비상한 식욕을 느낍니다. 그것을
임신부의 변덕이라고 하여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전
생기억을 하는 어린 아이의 경우, 전생에 좋아했던 음식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그 음식이 바로 어머니가 임신 중에 먹고 싶어 했던 음식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여덟째로, 배우지 않은 기술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생기억
을 하는 어린이 중에는 배우지도 않은 기술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
다. 이것은 전생에 가졌던 기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보기를 하나 들자면 벨기에에 로버트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이 소년은 어느 날 제1차 세계대전 때인 1915년에 죽은 자기 삼촌인 알
버트의 초상화를 보더니 그것이 자기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이있은 뒤에 세살이 조금 지나서 로버트는 부모와 같이 처음으로 수
영장에 갔는데 멋진 동작으로 다이빙을 하여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의 삼촌인 알버트는 훌륭한 수영선수였다고 합니다. 일반
적인 수영은 세살 정도의 어린아이도 할 수 있지만 다이빙은 그렇지 않
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영장에 처음 온 아이가 다이빙을 멋지게 해내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 아이가 전생의 알버트였음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배우지도않은 기술이 나타나는 가장 놀라운 사례는 외국어를 말하는
경우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생리학자이며 심리학자인 동시에 노벨수
상자이기도 한 샤를르 리히Charles Richet는 그러한 현상을 지노글로시
Xenoglossy라고 붙였습니다.
이안 스티븐슨은 이 지노글로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독백과 같은 것인데, 당사자는 이상한 언어의 조각들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잠재된 기
억 속에서 언어가 무의식적으로 도출되는 경우인데 본인은 그러한 사실
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두번째는 반응적인 경우인데, 이것은 직
접 상대방과 그 외국어로써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스티븐슨은 두번째
경우인 반응적인 지노글로시의 사례는 죽음 이후의 인간의 윤회에 대해
중요한 증거가 된다고 말합니다. 곧 전생에 그 언어를 배웠거나 사용한
사람이 아니면 그처럼 유창하게 외국어를 구사한다는 것이 언어를 배우
지도 못한 어린이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 가운데 최초의 지노글로시는 19세기에 있
었던 일인데 최면에 의해서입니다. 1862년 독일의 왕자 갈리첸Galitzen
은 어떤 여인을 대상으로 최면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여인은 18세기의 훌륭한 프랑스어로 브리타니에 살았던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갈리첸 왕자는 그녀가 프랑스어를 배웠는지 조사해
보았지만 그녀는 일반 교육도 전혀 받은 적이 없는 무학(無學)이었고,
다만 자기 지방의 독일어 방언 밖에는 말할 줄 모른다는 것이 판명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여자는 전생에 프랑스에서 살다가 다시 독일에
태어난, 윤회의 실증임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아홉째로, 출생 자국을 들 수 있습니다. 아이가 출생할 때부터 흉터
가 있거나 불구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선천적 기형이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원인은 대부분 유전이나 임신 중의 약물 복용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것이 전생의 업보에 의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윤회를 입증하는 전생기억에 관한 사례는 현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삼국지(三國誌)]라는 책을 보면, 삼국시대에는 아무도 중국을 통일
하지 못했습니다. 조조도 못하고 유비도 못하고 손권도 못하였습니다.
정작 중국이 통일된 것은 세월이 흐른 뒤 진(晋)나라 때입니다. 그 때
진나라의 재상이며 군인이고 또 덕인(德人)이었던 양호(羊祜)라는 사람
이 있었습니다.
그가 서너살이 되어서, 한번은 유모를 보고 가지고 놀던 금고리를 내
놓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모는 아기에게 금고리가 없다고 했습니
다. 그러니까 양호는 유모를 데리고 이웃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집 마당의 큰 고목나무 밑으로 가서 썩은 나무 밑둥치의 구멍 속으로
손을 쑥 넣더니 금고리를 끄집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금고리를
본 그 집 주인이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집의 죽은 아이
가 가지고 놀던 것인데 그 아이가 죽은 후에는 아무도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웃 아이가 와서 그것을 찾아냈으
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두들 그 이웃집의 아이가 죽어서 양
호가 되어 환생한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증
거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이 금고리입니다.
1930년에 죽은 양계초(梁啓超)의 선생님인 강유위(康有爲)라는 대학
자는 바로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 전생이 있다고 주장 했습니다. 그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입니다. 유교에서는 윤회를 부
정합니다. 그런데도 유교학자인 강유위는 윤회를 절대적으로 주장하였
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양호의 금고리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세계적으
로 유명한 대학자가 양호의 금고리 사실 하나만으로 전생이 있고, 윤회
가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없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이
안 스티븐슨 교수가 수집한 2,000여 건의 사례는 큰 의미가 있다고 하
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잠깐 신라 통일시대의김 대성의 이야기를 알아보기로 하겠습
니다.
김 대성이 처음 태어난 집은 아주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품을 팔아 근근히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인집에서 밭을 조금 떼
어 주어서 그것으로 생활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옆집에서
시주를 하자 스님께서 '시일득만배(施一得萬倍)'라고 축원하는 것을 김
대성이 듣게 되었습니다. 김 대성은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간청하여 자
기네의 조그만 밭을 스님에게 시주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역시 '시일
득만배(施一得萬倍)'라고 축원을 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김 대성은 죽었습니다. 그날 밤, 대신(大臣)인 김
문량(金文亮)의 꿈에 '모량리(牟梁理)의 대성(大城)이가 너의 집에 태
어난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모량리에 가서 알아보니 과
연 김 대성이 죽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김 문량의 부인은 그로부
터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날 때 손을 꽉 쥐고 있다가 이레 만에 손을 폈는
데 손바닥을 보니 '대성'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 문량의 집에서는 이 아이가 모량리의 김 대성이 다시 환생한 것이
분명하다고 하여 이름을 그대로 대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생의
어머니를 모셔다가 함께 있게 하였습니다.
김 대성은 성장하면서 사냥을 좋아하였습니다. 하루는 토함산에 가서
곰 한 마리를 사냥해 오다가 산 아래 마을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의 꿈에 곰의 혼이 나타나 자기를 죽였으니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하며
달려드는 것이었습니다. 김 대성이 너무 무서워 잘못했다고 빌었더니
곰의 혼은 자기를 위해 절을 지어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 대성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잠에서 깨어보니 그것은 너무도 생생한 꿈이
었습니다.
그 뒤로 김 대성은 사냥을 끊었으며, 꿈에서 약속한 대로, 그 곰을
잡은 땅에다 장수사(長壽寺)라는 절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원(願)을 세워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佛國寺)를 짓고, 전
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지금의 석굴암을 창건했다고 합니다.
2. 차시환생(借屍還生)
또 전생기억 외에 차시환생(借屍還生)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
어서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나는 것이 아니고 제 몸뚱이는 아주 죽어버
리고 남의 송장을 의지해서, 곧, 몸을 바꾸어서 다시 살아나는 경우입
니다. 다음은 1916년 2월 26일자 중국 신주일보(神州日報)에 보도된 사
실입니다.
중국 산동성에 최천선(崔天選)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는 무식한
석공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서른두살이 되던 해에 그만 병이 들어 죽었
습니다. 장사 지낼 준비를 다 마친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관속
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사람 기척이 났습니다. 부랴부랴 관을 깨고
풀어보니 관 속의 사람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 쳐다보는 것었습니다. 죽
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우리 아버지가 살았다."
그 부모와 처자식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
니, 그는 식구들을 하나도 못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었다가 깨어나더니
정신착란이 되어서 집안 식구들도 못 알아보고 말도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가보다고 식수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또 여러 날이 지
났습니다. 그 동안 기운을 차리고 건강도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도 여전히 식구들을 못 알아보고 또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도 퍽 답답한 것 같았습니다. 마침 주위에 붓과
벼루가 있는 것을 보더니 종이 위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본래는 일자무식이던 사람이 글을 아주 잘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써
놓은 글의 내용을 보니 이 사람은 중국 사람이 아니고 안남(인도지나)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안남 지방에서도 말은 다르지만 글은 한자를
씁니다.
"나는 안남 어느 곳에 사는 유건중(劉建中)이라는 사람인데, 병이 들
어서 치료하느라고 어머니가 두터운 이불을 덮어 씌워줘 땀을 내다가
그만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여기 이렇게 와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위와 같았습니다. 곧 그 몸은 죽어 버리고 그 대신에
안남 사람의 혼이 산동으로 온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전생입니다.
전생이란 것이 반드시 몸뚱이가 죽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다시 나는
것만이 아니고 죽은 육신이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데 영혼만이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차시환생'이라고 합니다. 곧 남의 육체를 빌
려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기력을 완전히 회복한 뒤에 중국말을 조금씩 가르쳐 주었습니
다. 여러 달이 지나자 중국말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꾸 전생에 살던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널리 소문으로
퍼졌습니다. 나중에는 북경대학에서 데리고 가서 여러가지로 정신감정
을 해보고 치료도 해보았습니다만, 정신은 조금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또 그가 말하는 안남에도 사람을 보내어 조회를 해보았습니다. 과연 유
건중이란 사람이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 확실하고 또 그가 말한 전생의
일이 모두 다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최천선이라는 사람이 죽었다 깨어
났으나 안남의 유건중의 혼이 최천선의 몸을 빌어 환생하였다는 것이
완전히 증명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참 희귀한 일이라고 하여 정부에서
는 이 사람에게 내내 연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
명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3. 연령역행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모두 당사자가 전생기억을 갖고 있어서 이야
기하는 경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심리학에서도 전생을 조사하는 방
법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최면술을 이용하여 그 사람의 전생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연구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연령역행(年齡逆行)이
라고 합니다. 실험 대상자에게 최면을 걸어놓고 그 상태에서 사람의 연
령을 자꾸자꾸 거꾸로 역행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무살 되는 사
람을 최면을 걸어서 열살로 만듭니다. 그러면 열살 먹은 사람이 되어
그때의 행동이나 말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또 네살이 되도록 만듭니
다. 그러면 네살 때의 노래를 하고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한살로 만들
어 놓으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합니다. 연령역행 Age Regression은 심
리학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의학에서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이 났는데 아
무래도 그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령역행을 시켜 그 원인
을 조사해 보니 19년이나 29년쯤 전에 그 병의 원인이 되는 일이 있었
음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간첩이 잡혔을 때에도 이용합니다. 본
인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럴 때에 최면술을 이용하여 연
령역행을 시킵니다. 그러면 이전에 간첩이 되기 위해 교육받던 것을 모
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녹음해 두었다가 다시 물어보면 꼼짝
없이 자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전생 문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최면 상태에
서 연령역행을 하여 한살로 만들어 둡니다. 그러면 사십대, 오십대의
어른도 손발을 바둥거리고 빽빽 울면서 어린아이의 몸짓만 할 뿐입니
다. 그렇게 해놓고 나서 묻습니다.
"네가 태어나기 일년 전, 이년 전에는 어디 있었느냐?"
그러면 주소 성명이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보기를 들어 여기 해인
사 골짜기에 사는 사람을 연령역행을 시켜서 한살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고서는 다시 태어나기 3년 전을 묻습니다. 그러면 주소 셩명이 바
뀌어 전라도 어느 곳의 누구라든지, 일본의 어느 곳 사람이라든지 하며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는 전생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신과학에서 전생회귀(前生回歸)라고 합니
다. 전생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전생으로 돌아가서 한 생뿐만이 아
니고 이생, 삼생... 여러 수십생까지 올라가는 방법입니다.
3. 연령역행
1) <<브라이드 머피를 찾아서>>
최면 상태에서 연령역행을 시켜 전생을 알아보는 전생회귀에 대해 연
구를 한 사람 중에 미국에 모리 번스타인 Morey Born-stein이라는 사람
이 있습니다. 그는 루스 시몽 부인이라는 스물 아홉살의 여자를 연령역
행시켜 그 여자의 전생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는 19세
기에 아일랜드의 코우크시에 살았던 브라이드 머피라는 사람이었습니
다. 이 여자는 최면 상태에서 자기가 코우크 시에 살았던 시절의 여러
가지 생활 모습이나 신앙생활에 대해 자세히 말했습니다. 모리 번스타
인은 이것을 녹음하고 정리하여 그 여자가 말한 곳에 가서 실제로 조사
를 해 보았더니 과연 녹음한 내용이 사실과 맞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
을 미국의 98개 신문에서 일제히 게재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온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모리 번스타인이 이 실험을 한 것은 1952년 11월 29일이었는데 이것
은 나중에 [브라이드 머피를 찾아서 The Searching for Bride murphy]
라는 제목으로 1954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 후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
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사자(死者)와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
니다.
또 휴즈 박사라는 사람은 열두살 된 자기 딸을 연령역행시켜 보았습
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
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것은 이집트의 고어(古語)였습니다. 그 말은
현대의 이집트인들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전문학자에게 부탁하여 통역
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역사기록을 통해 알아보니 딸이 한 말이
역시 사실과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프로이노이라는 제네바대학의 심리학 교수는 열여섯살 되
는 소녀를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그 소녀도 역시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했는데 나중에 그 기록을 가지고 언어학자들에게 의
뢰한 결과 500년 전의 인도말인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열여섯살 먹은
소녀가 오늘날의 인도말도 아닌 500년 전의 인도말인 범어(梵語)를 안
다는 것은 결국 최면상태에서 완전히 500년 전의 인도 사람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전생회귀의 사례들이 속속 사실로 밝혀지자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영혼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듯이 자
꾸 윤회를 한다는 것이 증명되기 시작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이야말로
학계를 움직인 근본적인 대사건 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례가 증명되기 시작하자 가장 곤란해진 것은 서양의 종교입
니다. 기독교에서는 영혼이 있어서 기독교를 믿으면 죽어서 천당에 가
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갈 뿐이지 환생이나 윤회는 없다고 합니
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한 브라이드 머피의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자
그러한 주장이 거짓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더구나 브라이드 머피라
는 사람은 아주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천당에 가지 못하
고 시몽 부인으로 미국에서 다시 태어났으니 문제는 아주 심각해져 버
린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측에서는 브라이드 머피의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라
디오, TV, 신문 등을 통해서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생회귀의 사례
는 브라이드 머피뿐만이 아니라 그 뒤로도 진실을 밝혀 보려는 학자들
에 의해 속속 수집되기 시작했습니다.
3. 연령역행
2) 한번 이상 사는가?
전생회귀의 사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영국의 브록샴 테이프
Brozham Tapes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국의 유명한 최면 요법사인
아아널 브록샴 Arnall Broxham이라는 사람이 최면을 통한 연령역행으로
20여 년 동안 약 400명의 전생을 조사하여 테이프에 녹음을 한 것입니
다. 그 테이프는 아직도 그대로 보존이 되고 있는데 거기에는 가지가지
의 전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갖가지 사례가 알려지자 브록샴 씨의 전생회귀는 큰 화제거리
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소문이 퍼지자 세계에서 가장 권위가 있고 신뢰
도가 높다는 영국의 국영방송인 비비씨 BBC의 과학부 기자 두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조사를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막상 조사를 시작해보니 그것은 참으로 굉장한 것
이었습니다. 조사를 해나감에 따라서 그것이 점차 사실로 드러나게 되
자 더 큰 관심을 가지고조사에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약 1년
동안 테이프에서 전생 이야기를 한 사람들이 말한 지명을 찾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가 보았습니다. 또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역
사학자, 고고학자, 심리학자들을 만나 일일이 확인도 하였습니다. 그리
고 나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거짓임을 입증하기 위해 1년 동안이나 조사를 하였
다. 그 결과 브록샴 테이프의 전생 조사는 조금도 틀림이 없는 사실임
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이 조사 작업은 BBC TV에서 특집으로 방송되었고, 1976년에는
[한번 이상 사는가? More Lives Than one?]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판되
기도 했습니다. 이 책의 내용도 뒤에 <부록 2>에 간략하게 소개됩니
다. 브록샴의 테이프에 나오는 사례 중에서 자기의 다른 전생을 여섯
가지나 이야기한 가정 주부의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에 관해서 한번 들
어 보겠습니다.
그 부인의 이름은 제인 에반스라고 합니다. 맨 처음에 로마제국이 통
치하던 영국에서 통치자의 아이를 가르치는 가정 교사의 아내로 살았다
고 합니다. 두번째는 1190년 영국 요크 시에서 유태인 여성으로 살았
고, 세번째는 1451년 불란서 부르스 시에서 꿰르라는 사람의 하녀로 살
았고, 네번째는 앤 여왕의 재위 시절에 런던에서 바느질로 품팔이 하는
소녀로 살았고, 그리고 가장 가까운 전생인 여섯번째는 미국의 메릴랜
드 주에서 수녀로 살다가 1920년에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제인 에반스라는 여인의 전생은 서로 겹치지 않았으며, 죽은 뒤에 다
시 태어나는 시간의 간격이 가장 짧은 것이 20년 안팎이었습니다.
전생 조사에 대한 실제의 보기가 이렇게 속속 출현하자 이제 이 사실
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기독교계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전생을 부인하고만 있을 수 없게 되자, 이 사실을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 보고 교리와는 상관없이 연구해보고자 하여 관심을 갖는 신부
나 목사도 더러 나오게 되었습니다.
3. 연령역행
2) 전생요법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정신 상태를 세 가지 단계로 나눕니다. 우리가
모여서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의식상태입니다. 의식상태 안에
잠재의식이 있고 잠재의식 속에 무의식상태가 있습니다. 무의식상태는
의식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입니다. 프로이드 Sigmund Freud가 잠재의식
은 웬만큼 연구하여 발표하였지만, 무의식에 대해서는 뚜렷한 연구 결
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 무의식 상태에 대해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바
로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영국의 캐논 Sir Alexander Cannon 박사입니
다.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전생조사에 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영혼도 있을 수 없고, 윤회도 없다
고 철두철미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최면술을 이용한 무의식 상태에서
전생회귀를 시켜보니 사람들에게서 전생이 나타나는 경우를 자주 대하
게 되어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곧 연령역행을 통하여 열살, 한살, 출생
이전으로 역행시키면 때로는 저 로마시대로까지 역행되어 전생이 나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실험 대상자들이 한 말을 역사의 기
록과 대조하여 조사해 보면 모두 맞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1,382명에 대한 전생 자료를 수집하여 1952년에
[잠재력 The Power Within]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이것을 '캐논 보고서'라고도 하는데, 이 캐논 보고서에 의하면, 병이
들어서 아무리 치료를 해도 낫지 않는 경우에 전생회귀를 통하여 조사
를 해보면 그런 병들은 전생에서 넘어온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전생에
서의 발병 원인에 의거해서 치료함으로써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
다. 이것이 유명한 '전생요법'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사례가 있습니
다.
어떤 사람이 물만 보면 겁을 냅니다. 바다를 구경한 적도 없고 큰 강
옆에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물만 보면 겁을 내는데 아무리 치료
를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생회귀를 시켜보니 그는 전생에
지중해를 내왕하는 큰 상선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어서 쇠사
슬에 묶인 채 바닷물 속으로 던져져서 빠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때 얼
마나 고생을 했겠습니까? 그러니 금생에서도 물만 보면 겁을 내는 것입
니다. 그 사실을 밝힌 뒤에 이 원인에 의거해서 치료를 하니 그의 병이
나았습니다.
또 한 사람은 높은 계단을 무서워하며 오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보니 그는 전생에 중국의 장군이었는데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높은 곳만보면 겁을 내는 것이었습니
다.
캐논 보고서의 이런 사례들에 의거해서 학자들이 전생요법을 개발하
여 요즈음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1977년 10월 3일자 타
임Time 지에 보면 이에 관해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권
위있는 잡지에서 자신있게 보도할 때에는 부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처럼 전생이 있다는 것은 물론이고, 병을 치료하는 한 방법으로서 전
생요법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는데도 전생과 윤회에 대해 의심을
갖는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전생이 있고 윤회를 한다고 할 때 어떤 법칙에서 윤회를 하는
가 하는 의문이 일어납니다. 과연 내가 원하기만 하면 마음대로 김 씨
가 되고 남자가 되고 할 수 있는가? 캐논보고서에서 살펴 보면 그것은
순전히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법칙에 의한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인
과법칙이란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입니다. 콩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입니다. 착한 원인에는 좋은 결과가
생기고, 나쁜 원인에는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긴다 이 말입니다. 이제 전
생을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떤 사람이 전생에 착한 사람이었는지, 악
한 사람이었는지를 알아서 그 사람의 금생의 생활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를 비교해 봅니다. 전생에 악한 사람이면 반드시 금생에 불행한 사람이
고 전생에 착한 사람이면 반드시 금생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받는 그것이다.
내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하는 그것이다.
欲知前生事 (욕지전생사)
今生受者是 (금생수자지)
欲知來生事 (욕지래생사)
今生作者是 (금생작자시)
전생에 내가 착한 사람이었나 악한 사람이었나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내가 받는 것, 곧, 지금 내가 행복한 사람이냐 불행한 사람이냐를 살펴
볼 것이며 내생에 내가 행복하게 살 것인가 불행하게 살 것인가를 알고
싶으면 지금 자신의 하는 일을 보면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과학에서는 이 인과(因果)를 인도말인 카르마 Karma라고
합니다. 본디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이라는 뜻이 담긴 이 말은 이제
세계적인 학술용어가 되었습니다.
4. 전생투시(前生透視)
인과 문제에 대해 가장 큰 업적을 쌓은 사람은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
Edgar Cayce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전기(傳記)도 많이 나와 있는데 사
람들은 그를 기적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기적인'이라고 부릅
니다. 그가 행하는 기적은 이런 것입니다. 남의 병을 진찰하는데 환자
의 주소와 이름만 가르쳐 주면 수천리나 멀리 떨어져있어도 그 사람의
병을 모두 진찰할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찰하여 처방을 내고 병
을 치료 해주면 다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치료한 사람은 무려 3 만
명이 넘습니다. 그는 미국 뉴욕에 앉아서 영국 런던에 있는 귀족들을
진찰할 수 있으며 이탈리아의 로마에 있는 사람들도 진찰할 수 있습니
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친구가 영국 런던에 갔는
데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케이시에게 물어봅니다. 그의 답
을 듣고서 바로 런던에 전화를 해보았더니 케이시의 말이 모두 맞았습
니다.
이런 신기한 투시력을 가진 케이시가 병을 진찰하다 보니 병이 전생
에서 넘어오는 것이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전생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어 환자의 전생에서 병의 원인을 찾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
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교도였습니다. 예수교에는 전생이 없지 않습니
까? 그래서 자기의 종교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여 병을 치료하는 것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학자들이 종교와 학문과는 다르다
고 그를 설득하여 이것을 학문적으로 끝까지 조사해 보자고 의논이 되
었습니다. 그래서병을 치료하는 것은 그만두고, 전생 조사를 본격적으
로 시작하여 2,500명의 전생을 조사하였습니다. 그의 죽음(1947년)뒤에
도 버지니아 비치 Virginia Beach에서는 그의 원거리 진찰과 전생투시
에 대한 수많은 기록을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으며 많은 책들이 발
행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초능력의 비밀]과 [윤회의 비밀],
이 두 권은 공산국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에서 번역되었습니다.
에드가 케이시의 전생투시에 의해 전생과 금생과의 인과를 보면 이렇
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낳고 사는 부부인데도 그 사이가 무척 나빠서 그
전생을 알아보니 서로가 원한이 맺힌 사이였습니다. 거꾸로 내외간에
잘 지내는 사람을 알아보니 전생에 아버지와 딸 관계이거나 혹은 어머
니와 아들 관계였습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하겠지만 우리들이 몰라
서 그렇지 본래 인과란 그렇게 맺어지는 것입니다. 숙명통(宿命通 ; 전
생의 일을 환히 아는 능력)을 하여 전생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다만 우리들이 업장은 두텁고 눈이 어두워 이해가
가지 않으니 곤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때에 현대의과학자들이 연
구한 전생과 윤회 및 인과에 대한 좋은 자료를 소개하면 부처님 말씀을
믿고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키가 작은 난장이입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알아보니 부처님 말씀 그대
로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아만이 많아서 남을 무시하고 깔보
면 내생에는 키 작은 과보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남
을 올려다보아야하고 남은 자기를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듯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와 인과는 현대의
과학적 자료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대
소승의 천경만론(千經萬論) 가운데서 윤회를 말씀하셨으니 이것을 믿으
면 그만이지, 캐논이든 스티븐슨이든 그런 과학자가 무엇이라고 그들이
수집한 자료를 인용하여 새로이 윤회를 설명하려느냐고 물을지도 모르
겠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운허(耘虛)스님은 올해 연세가 여든아홉입니다. '운허스님'하면 전국
적으로 다 아는 큰스님 아닙니까? 한글 대장경 역경 사업을 주관하신
데에다, 학식으로나 덕행으로나 두루 존경받는 어른입니다. 그 스님께
서 몇 년 전에 백련암에 오셨는데,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내가 물었습
니다.
"스님께서는 경전에 대해 박식하시고 역경 사업에서도 큰일을 하시는
데, 그러면 전생을 믿으십니까?"
"허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안 믿을 수 있습니까?"
"안 믿을 수 있는가라고 말씀하실 것이아니라, 실제로 확실히 믿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글쎄요, 부처님 말씀에 분명히 전생이 있다고 하셨으니 믿기는 믿지
만, 명확하게 이해는 되지 않습니다."
경전에 대해 그렇게 뛰어난 학식을 지니고 있고 수행도 잘하시는 분
이 '믿기는 믿지만 명확하게 이해는 안 된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양심입니다. 그래서 스님께 [사자와의 대화]라는 책을 드리
며 한번 읽어보시라고 했습니다.
그 뒤에 대학생 수련대회 때 대학생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봉은
사(奉恩寺)의 운허 큰스님께서 법문(法門) 때에 하시는 말씀이 해인사
에 가서 [사자와의 대화]라는 책을 얻어와서 읽어보니 얼마나 좋은지
여러 차례 권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학자의 양심입니다. 운허스님은 나보다 스무살이나 더
많은 분입니다. 그런 점잖은 스님이 아니라면 내가 대중 앞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분명히 윤회와 전생을 말씀하셔서
믿기는 믿지만 이해는 가지 않았는데, 브라이드 머피 사건의 전생 기록
을 보니 이해가 되더라고 학생들을 모아놓고 공공연하게 말씀하시더라
는 것입니다. 그 뒤에 스님을 다시 만났을 때 직접 물어보았더니 과연
'그렇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시에는 잘 받아들여 지지 않
는 법입니다. 그런 보기로 근대 천체물리학에서 가장 중대하고도 큰 발
견인 지동설(地動說)이 처음 주창되었을 때를 들 수 있습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동설이 나오기 전까지는, 지구는 고정되어 가만히 있고
해가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하는 천동설(天動說)이 기독교 교리로 확립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 Copernicns가 지동설을 주장하
자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었습니다.
"땅이 움직이다니, 그러면 물이 모두 엎질러질 것 아닌가?"
"사람이 거꾸로 허공 속으로 떨어져버릴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이런저런 의심을 품고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반박 하였습
니다.무엇보다도 지동설은 그때까지의 기독교 교리에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
는데, 가장 먼저 희생당한 사람은 후스Huss라는 종교개혁가였습니다.
그 무렵에 천주교에서 가장 큰 신학자이면서 또한 과학자요 철학자였
던 브루노Bruno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도 지동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코
페르니쿠스는 처음에 지동설을 주장하다, 사형에 처한다는 바람에, 입
을 다물고 자기의 주장을 꺾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용기있는 다른 학자
들은 그래도 그것을 주장 하였으며, 브루노도 또한 지동설을 끝까지 주
장하였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교황청으로서는 큰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
닌, 천주교의 대표적인 성직자가 지동설을 주장하고 나서니 큰일이 아
닐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브루노를 불러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지동설을 버리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랬으나 브루노는 변함없이 지동설
을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분형(焚刑)이다 !"
"아무리 분형에 처해진다 하더라도 지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어떻
게 합니까?"
결국 그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나무십자가에 매달려 불에 태워 죽이
는 분형(焚刑)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도 그의 사람됨이
훌륭하여 사람들은 그를 죽이기가 아까왔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지동
설만 취소하면 살려주겠노라고 몇번이나 권유하였지만, 그는 끝끝내 자
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분형에 처하는 날, 나무 십자가
에 붙들어매어 놓고 불을 붙였습니다. 발 밑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을
때 브루노에게 십자가를 들이대며 말했습니다.
"회개하라 ! 지동설을 취소하면 살려줄 터이다."
이에 브루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도는데…"
브루노는 결국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지동설
은 타 죽지 않고 뒤에 과학적으로 증명됨으로써 영구히 살게 되었습니
다. 이렇듯이 새로운 주장이나 이론은, 아무리 옳은 것이어도, 당대에
널리 이해받지 못하여 박해도 받고 죽기도 하고 바보 취급을 당하기도
하는 둥 온갖 수모을 받기 마련인 것입니다.
불교의 윤회설도 도를 닦아 숙명통을 얻기 전에는 전생이 있음을 우
리 중생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행히도 요즈음에 정신과학이나 초심
리학 같은 분야에서 연구가 진일보함에 따라 여러 방면에서 증명되고
있으니, 보기를 들면, 첫째가 전생기억으로 스티븐슨 씨가 무려 2,000
건 이상의 사례를 발표하였고, 둘째는 전생회귀로 브록샴테이프나 캐논
보고서가 그것이며, 셋째는 전생투시로 에드가 케이시에게서 볼 수 있
는데, 이들을 통하여 우리는 윤회에 대해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
다. 전생이 판명됨으로써, 그것을 금생과 맞추어 보면, 인과가 있는지
없는지가 명확히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전생에 지은 그대로 금생에 받
고 있는 것입니다. 에드가 케이시도 2,500명의 사례를 조사해 보았더니
전생과 금생이 인과로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니 어떻게 인과(因
果)를 부정하겠습니까?
이리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전생이 있다. 윤회가 있다, 인과가
있다 하는 것이 정신과학의 발달로 객관적인 사실로서 증명된 것입니
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이 우주의 진리를 다 깨달
은 부처님께서 윤회를 말씀하셨으니 그것을 믿으면 그만입니다. 캐논이
나 케이시 같은 과학자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
의 연구결과를 보기로 이야기한 것은, 부처님께서 이미 삼천여 년 전
에 모두 말씀하신 것인데, 현대과학이 이제야 그것에 가까이 오고 있음
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이제 문제는 영혼이 있고, 인과에 의해 윤회를 한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대로 받고 말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생에 잘못했으니 금생에 받아야 할까? 그것이야 당연하지요. 그러
면 내생에는 어떻게 될까? 그것이야 뻔하지, 내생에는 불행하게 되지.
아무리 착하게 하려 해도 자꾸 남을 해치게 되고 또 그것을 받아야 할
테니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과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도둑질하
고, 살인도 하고, 거짓을 일삼고 등등으로 온갖 짓을 다 하지 않습니
까? 이것이 예사입니다. 그러나 인과가 있음을 확실히 알면 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작자수(自作自受)!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
불교의 근본 목표는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영원토록
영원토록 계속해서 윤회를 하여 영원토록 상주불멸인데, 불교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물을지고 모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필요한 것입니다.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윤회를 하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이란 악업은 많이 지어도 선업은 많
이 쌓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어 업을 짓고, 윤회를 하고, 업을
짓고, 고(苦)를 받고 하지만, 그러나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법을 따라서
수도를 하면 결국에는 자성(自性)을 깨쳐서 생사해탈을 하게 되는 것입
니다. 윤회도, 인과도 모두 벗어나 대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스님, 불교에서는 윤회가 있다고 하는데, 윤회가 없으면 좋겠습니
다."
"왜?"
"죽고 나면 끝이라고 하면 무엇이든 해서 우선 편하게 살겠는데, 내
생이 있고 인과가 있다고 하니, 겁이 나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있어야지
요?"
"글쎄, 나도 인과가 없고 내생이 없었으면 좋겠어. 아무리 잘한다고
애써도 잘못하는 것이 더 많을 터이니, 그리하여 내생에 고를 더 받을
터이니, 인과가 없으면 좋겠어. 그런데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내생이
없으면 좋겠다고 말한다고 없어질까?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해를 서
쪽에서 동쪽으로 가게 할 수가 있을까? 그럴 수가 없지."
지금까지 영혼이 있다, 윤회가 있다, 인과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으
니, 이제부터는 해탈의 길, 대자유의 길, 성불(成佛)에 대해 이야기하
겠습니다.
제 4 편 영원한 자유
제 1 장 오매일여
1. 영겁불망(永劫不忘)
우리가 도를 닦아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에는 영혼이 있어 윤회를 거
듭합니다. 그와 동시에 무한한 고(苦)가 따릅니다. 미래 겁이 다하도록
나고 죽는 것이 계속되며 무한한 고가 항상 따라 다니는 이것이 이른바
생사고(生死苦)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한한 고를 어떻게 해야
벗어나며 해결할 수가 있는가? 그러기 위하여서는 굳이 천당에 갈 필요
도 없고 극락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사람마다 누구나 갖고 있는
능력, 곧,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여 활용하면 이 현실에서 대해탈의, 대
자유의, 무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원리입니다.
불교에서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불성(佛性)'이니 '법성(法
性)'이니 또는 '여래장(如來藏)'이니 '진여(眞如)'니 등등으로 말하고
있으며, 누구든지 이것을 평등하게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
을 개발하면 곧 부처가 되므로 달리 부처를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생사해탈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일찌기 선문(禪門)에서 조
사(祖師) 스님들은 말씀하셨습니다.
산 법문 끝에서 바로 깨치면
영겁토록 잊지 않는다.
活句下 薦得 (활구하 천득)
永劫不忘 (영겁불망)
곧 불교의 근본 질리를 바로 깨치면 그 깨친 경계, 깨친 자체는 영원
토록 잊어버리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배운 기술이나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잊기도 합니다만,
도를 성취하여 깨친 이 경계는 영원토록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금생에
만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생에도, 내내생에도 영원토록 잊어
버리지 않습니다. 동시에 생활의 모든 것을 조금도 틀림없이 모두 다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영겁불망(永劫不忘)이라는
것입니다.
마조(馬祖)스님께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서
다시는 미혹하지 않는다.
一俉永俉 (일오영오)
不復更迷 (불복경미)
그러므로 깨쳤다가 매(昧)했다 또 깨쳤다 하는 것이 아니고 한번 깨
치면 금생, 내생, 여러 억천만 생을 내려가더라도 영원 토록 어둠에 빠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원오스님도 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깨치면 영원히 얻어서
천겁, 만겁을 두고 그와 똑같을 뿐 변동이 없다.
一得永得 (일득영득)
億千萬劫 亦只如如 (억천만겁 역지여여)
깨친 경계에 조금이라도 변동이 생기면 그것은 바로 깨친 것이 아니
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에 따르는 그 신비하고 자유자재한 활동
력인 신통묘력(神通妙力)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니, 참으로 불가설
불가설(不可說 不可說)입니다.
대자유에이르는 길, 곧 영겁불망(永劫不忘)인 생사 해탈의 경계를
성취함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른 것
이 참선입니다. 참선은 화두(話頭)가 근본이며,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
하여 바로 깨치면 영겁불망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영겁불
망은 죽은 뒤에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습니
다. 생전에도 얼마든지 알수 있습니다. 숙면일연(熟眠一如)하면, 곧 잠
이 아무리 깊이 들어도 절대 매(昧)하지 않고 여여불변(如如不變)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숙면일여가 여래(如來)의 숙면일여가 되면 진여일여(眞如一
如)가 되지만, 보살의 숙면일여는 8지 보살의 아라야(阿梨耶 ; Alaya)
위(位)에서입니다. 제8아라야 위에서의 숙면일여는 보통 우리가 말하는
나고 죽음에서, 곧 분단생사(分段生死)에서 자유자재합니다. 그러나 미
세한 무의식이 생멸하는 변역생사(變易生死)가 남아 있어서 여래와 같
은 진여위(眞如位)의 자재(自在)함은 못 됩니다. 그러므로 아라야 위에
서의 숙면일여는 바로 깨친 것이 아니며, 여래위, 진여위에서의 숙면일
여가 되어야만 참다운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8지 이상의 아라야 위에서의 숙면일여만 되어도 결코 죽음으
로 인하여 다시 매하지는 않습니다. 영원토록 퇴진(退進)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라야 위에서의 불망(不忘)과 진여위에서의 불망은, 차이는
있지만, 다시 매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은 같습니다. 오매일여도 여
래 위에서의 오매일여와 아라야 위에서의 오매일여가 다르면서 또한 같
은 것과 흡사합니다. 숙면일여라고 하여 잠이 깊이 들어도 여여한 것이
라고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대종사, 대조사치고 실제로 수면일
여한 데에서 깨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깨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식심분별(識心分別)이므로 앞 못 보
는 영혼에 불과합니다. 봉사 영혼이 되어서 수업수생(隨業受生)하니 곧
업따라 다시 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
다. 김 가가 되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되고, 박 가가 되고 싶어도 마음
대로 안 됩니다. 중처변추(重處便墜)로서 곧 자기가 업을 많이 지은 곳
으로 떨어집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이치입니다. 자기의 자유가 조
금도 없는 것을 수업수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유자재한 경계가 되면 수의왕생(隨意往生)하니 곧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습니다. 동으로 가든 서로 가든, 김 가가 되든
박 가가 되든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의왕생으로, 불교의
이상이며 부처님 경전이나 옛 조사스님들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의왕생이 되려면 숙면일여가 된 데에서 자유자재한 경계를 성취해
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부처님 이상
가는 것같아도 그것으로 그치고 맙니다. 몸을 바꾸면 다시 캄캄하여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송나라 철종(哲宗) 원우(元祐) 7년(1092)이었습니다. 소동파(蘇東坡)
의 동생이 고안(高安)에 있을 때 동 산문(洞山文)선사와 수성 총(壽聖
聰)선사와 같이 지냈습니다. 그 동생이 하루 밤에 두 스님과 함께 성
밖에 나가서 오조 계(五祖戒) 선사를 영접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 이튿
날에 형인 동파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동파의 나이가 마흔아홉이
었는데 계(戒) 선사가 돌아가신 지 꼭 오십 년이 되던 때였습니다. 오
십 년전 그의 어머니가 동파를 잉태하였을 때 꿈에 한쪽 눈이 멀고 몸
이 여윈 중이 찾아와서 자고 가자고 하였더라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계선사였습니다. 계 선사는 살아서 한쪽 눈이 멀고 몸이 여위었더랬습
니다. 동파 자신도 어려서 꿈을 꾸면 스님이 되어서 협우에 있는 경우
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계 선사가 바로 협우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실들로써 동파가 계 선사의 후신인 줄 천하가 다 잘 알게 되어
서 동파도 자신을 계 화산(戒和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동파는
자주 동산(洞山)에게 편지를 해서 '어떻게 하든지 전생과 같이 불법(佛
法)을 깨닫게 하여 달라' 하였으나 전생과 같이는 되지 못하고 죽었습
니다. 오조 계(五祖 戒) 선사는 운문종의 유명한 선지식이었는데, 지혜
는 많았지만 실지로 깊이 깨치지 못한 까닭에 이렇게 어두워져 버린 것
입니다.
실제로 옛날의 고불고조(古佛古祖)는 오매일여가 기본이 되고, 영겁
불망이 표준이 되어서 수도하고 법을 전했습니다. 여기에 실례를 들어
이야기하겠습니다.
2. 대혜 선사
앞에서 나온 오조 법연 선사의 제자에 원오 극근 선사가 있고, 그 제
자에 대혜 종고 선사가 있습니다. 강원에서 배우는 [서장(書狀)]이라는
책이 대혜 종고 선사의 법문으로, 그는 임제의 정맥으로서 천하의 법왕
(法王)이라고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대혜 스님이 어떻게 공부했고
어떻게 인가를 받았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대혜스님은 스무살 남짓 되었을 때, 요즘 말로 '한소식'했다고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은 진짜 소식이 아니라 가짜
소식이었습니다. 그래도 전생 원력이 크고, 또 숙세(宿世)의 선근(善
根)이 깊은 분이어서 그 지혜가 수승했습니다. 그래서 가짜 소식을 진
짜 소식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 가짜 소식을 가지고 천하를 돌아다
니는데, 이 가짜 소식에 모두 속아 넘어갔습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대
혜 스님이 성취한 것은 엽전에 불과한데 세상 사람들은 진금(眞金)처럼
여기고 '바로 깨쳤다'고 인가를 하여 대혜스님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날
뛰고 다녔습니다.
그 무렵 '천하 5대사'라는 다섯 분의 선지식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담당 무준(湛堂無準) 선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대혜스님이 이 선사를
찾아가며 '천하 사람이 나를 보고 참으로 깨쳤다고 하고 진금(眞金)이
라고 하니 이 스님인들 별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병
의 물을 쏟듯, 폭포수가 쏟아지듯 아는 체하는 말을 막 쏟아부었습니
다. 담당스님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네 좋은 것 얻었네. 그런데 그
좋은 보물 잠들어서도 있던가?" 하고 물어왔습니다. 자신만만하게 횡해
천하(橫行天下)하여 석가보다도, 달마보다도 낫다 하던 그 공부가 잠들
어서는 없는 것입니다. 법력이 천하 제일이라고 큰 소리 텅텅 쳤지만
잠이 들면 캄캄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혜스님은 담당스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님, 천하 사람들이 모두 엽전인가 봅니다. 저를 엽전인줄 모르고
금덩어리라고 하니 그 사람들이 모두 엽전 아닙니까? 스님께서 제가 엽
전인 줄 분명히 지적해 주시니 스님이야말로 진짜 금덩어리입니다. 사
실 저도 속으로 의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에 자유자재하지만 공
부하다 깜박 졸기만 하면 그만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깨달은 이것이 실제인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담당 부준 선사는 크게 꾸짖었습니다.
"입으로 일체 만법에 무애자재하여도 잠들어 캄캄하면 어떻게 생사를
해결할 수가 있느냐! 불법이란 근본적으로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야. 생사해탈을 얻는 것이 근본이야. 잠들면 캄캄한데 내생은 어떻게
하겠어."
그러면서 담당스님은 대혜스님을 내쫓았습니다. 대혜스님의 근본 병
통(病痛)을 찔렀던 것입니다.
또, 옛날에 경순(景淳)선사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자신의 법이 수승한
듯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잘못하여 넘어진 뒤로 중풍에
걸렸는데, 그러고 나니 자기가 알고 있었던 것과 법문했던 것을 모조리
잊어 버리고 그만 캄캄한 벙어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법을 아는
체했지만 실지로 바로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한번 넘어지는 바람에 모
든 것이 다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때 도솔조 선사라는 이가 행각(行脚)을 다니다가 이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는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한번 넘어져도 저렇게 되는데 하물며 내생이야."
이 생사 문제는 영겁불매가 되어 억천 만겁이 지나도록 절대 불변하
여 매(昧)하지 않아야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넘어져도 캄캄
하니 몸을 바꾸면 두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천하에 자기가 제일인 것 같았던 대혜스님도 무준 선사가 그렇듯 자
기의 병통을 콱 찌르니 항복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공
부를 시작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정진하고 있었는데 담당 무준 선사가
시름시름 병을 않더니 곧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돌아가시
면 누구를 의지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경사(京師)의 원오 극근
선사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유언을 따라 그는 원오 극근 선사를 찾
아갔습니다.
찾아가서 무슨 말을 걸어 보려고 하나 원오스님은 절벽 같고, 자기
공부는 거미줄 정도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원오 극근 선사가
자기의 공부를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기색이면 그를 땅 속에 파묻어 버
리리라는 굳은 결심으로 찾아갔는데,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아하, 내가 천하가 넓고 큰 사람 있는 줄 몰랐구나 !'라고
크게 참회하고 원오 선사에게 여쭈었습니다.
"스님, 제가 공연히 병을 가지고 공부인 줄 잘못 알고 우쭐했는데,
담당 무준 선사의 법문을 듣고 그 후로 공부를 하는데 아무리 해도 잠
들면 공부가 안 되니 어찌 해야 됩니까?"
"이놈아, 쓸데없는 망상 하지 말고 공부 부지런히 해. 그 많은 망상
전체가 다 사라지고 난 뒤에, 그 때 비로소 공부에 가까이 갈지 몰라."
이렇게 꾸중 듣고 다시 열심히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원오스님의 법문을 듣다가 확철히 깨달았습니다. 기록에 보면 '신오(神
悟)'라 하였는데, 신비롭게 깨쳤다는 말입니다. 그 때 보니 오매일여입
니다. 비로소 꿈에도 경계가 일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원오스님
에게 갔습니다. 원오스님은 말조차 들어보지 않고 쫓아냈습니다. 말을
하려고만 하면, "아니야, 아니야 [不是不是]"라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그러다가 원오스님은 대혜스님에게 '유구와 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
함과 같다 [有句無句 如藤倚樹;유구무구 여등의수]'는 화두를 물었습니
다. 그래서 대혜스님은 자기가 생각할 때는 환하게 알 것 같아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원오스님은 거듭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놈아,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야. 공부 더 부지런히
해!"
대혜스님이 그 말을 믿고 불석신명(不惜身命)하여, 곧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더욱 부지런히 공부하여 드디어 깨쳤습니다. 이렇듯 대혜스님
은 원오스님에게 와서야 잠들어도 공부가 되는데까지 성취했습니다. 이
렇게 확철히 깨쳐 마침내 원오스님에게서 인가를 받았습니다. 동시에
임제의 바른 맥(臨濟正宗)을 바로 깨쳤다고 하여 원오스님이 임제정종
기(臨濟正宗記)를 지어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대혜스님은 임제정맥의
대법왕으로서 천하의 납자(衲子)들을 지도하고 천하 대중의 대조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대혜스님 어록에 남아 있습니다.
잠이 깊이 들어서도 일여한 경계에서 원오스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애석하다. 죽기는 죽었는데 살아나지 못했구나(句惜 死了不得活)."
일체망상이 다 끊어지고 잠이 들어서도 공부가 여여한 그 때는 완전
히 죽은 때입니다. 죽기는 죽었는데 거기서 살아나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살아나느냐?
"화두를 참구 안 하는 이것이 큰 병이다(不疑言句 是爲大病)."
공부란 것이 잠이 깊이 들어서 일여한 거기에서도 모르는 것이고, 거
기에서 참으로 크게 살아나야만 그것이 바로 깨친 것이고, 화두를 바로
안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마음의 눈을 바로 뜬 것입니다.
이처럼 바로 깨치려면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항
상 이 오매일여를 주장한다고 오매일여병에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
지만 이 오매일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불법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이고, 또 선(禪)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대혜스님과 같은 대근기(根機)도 오매일여가 되기 전에는 그것을 믿
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오매일여를 말씀했으니 안 믿
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부처님 말씀이 거짓말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다가 자기가 완전히 오매일여가 되고 보니 부처님
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대혜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오매일여라 하신 말씀이 참말이요, 실제로구나(佛設寤寐
一如 是眞言是實言)."
3. 태고스님
지금까지 중국의 스님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나라 선문 가운데에 태
고(太古)스님이 계십니다. 태고스님은 공부한 지 20여년 만인, 나이 마
흔에 오매일여가 되고 그 뒤 확철히 깨쳤습니다. 깨치고 보니 당시 고
려의 큰스님네들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인가해 줄 스
님도 없고, 자기 공부를 알 스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임제정맥을 바로 이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 스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점점 오매일여한 때에 이르렀어도 다만 화두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
음이 중요하다 (漸到寤寐一如詩 只要話頭心不離)."
이 한 마디에 스님의 공부가 다 들어 있습니다.
공부를 하여 오매일여한 경계, 잠이 아무리 들어도 일여한 8지 이상
의 보살 경계, 거기에서도 화두를 알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몽중일여도 안 된 거기에서 화두를 다 알았다고 하
고 내 말 한번 들어보라 하는, 잘못된 견해를 갖는다면 이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이 병은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서 고치려 하지 않으면 고쳐지
지 않습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좋은 약을 가지고 와서, '이 약만
먹으면 산다' 하며 아무리 먹으라 해도 안 먹고 죽는다면 억지로 먹여
서 살려낼 재주 없습니다. 배가 고파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만반진수
(滿盤珍羞)를 차려와서 '이것만 잡수시면 삽니다' 해도 안 먹고 죽으니
부처님도 어찌 해볼 재주가 없습니다. 아난이 부처님을 30여년이나 모
셨지만 아난이 자기 공부 안 하는 것은 부처님도 어쩌지 못했습니다.
내가 항상 말하는 것입니다만 누구든지 아무리 크게 깨치고 아무리
도를 성취했다고 해도 그 깨친 경계가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
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하여야만 실제로 바로 깨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정일여도 안 되고, 몽중일여도 안 된 그런 깨침은 깨친 것
도 아니고 실제 생사에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참선은 실제로 참선해야 하고 깨침은 실제로 깨쳐야 합니다. 그래야
생사에 자재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생각으로만 깨쳤다
고 하는 것은 생사에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깨침이 아니라 불교의 병
이요, 외도(外道)입니다. 참선의 근본요령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
리의 공부는 실제로 오매일여가 되어 영겁불망이 되도록 목숨을 던져
놓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명을 아끼지 않고, 목숨도 돌보지 않고 부
지런히 노력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스님, 저는 화두를
배운 지 십년이 지났습니다만 공부가 안됩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공부를 해도 안 된다는 것은 결국 공부를 안했다는 말입니다. 마치 서
울에 꼭 가고 싶으면 자꾸 걸어가야 끝내는 서울에 도착하게 되듯이,
십년 이십년을 걸어가도 서울이 안 보인다는 말은 서울로 안 가고 가만
히 앉아 있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4. 불등 순 선사
불등 순(佛燈詢)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조 법연 선사의 손제자
(孫弟子)되는 분으로, 대혜 선사와는 사촌간이었습니다. 불감 근(佛鑑
懃) 선사 밑에서 약 삼년 동안 공부하였는데 불감 근 스님께서 가만히
살펴보니, 이 스님이 근기는 괜찮은데 게을러서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
었습니다.
그래서 불감 근 스님이 한번은 불등 순 스님을조용히 불러 "네가 내
밑에서 얼마나 있었느냐?"라고 물으니, "삼년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
습니다. 그래서 삼년 동안 공부한 것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불동 순 스님은 큰일이 났습니다. 삼년 동안 밥이나 얻어 먹고 낮
잠이나 자고 공부는 안 했으니 내놓을 것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불감
근 스님께서 공부에 대해 한 마디 물어 보았으나 도무지 캄캄하여 대답
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불감 근스님은 "이 도둑놈, 밥도둑놈아.
삼년 동안 내 밥만 축냈구나. 삼년을 공부했다면 어찌 이것을 대답 못
해? 밥만 축낸 밥도둑놈, 이런 놈은 하루 만 명을 때려 죽여도 인과도
없어" 하고는 마구 패는 것이었습니다.
불등 순 선사는 가만 있다가는 아주 맞아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
서 안 맞아 죽으려고 도망을 쳤습니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도망가
다가 처마 밑에 서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코도 입도 몸뚱이도
불감 근 선사와 똑같은데 왜 저 스님은 두들겨 패고, 나는 맞아야 하는
가? 어째서 저 스님은 도를 성취했는데 나는 이루지 못하는가?'
이렇게 반성하며 다시 절로 들어가서는 자신이 스님에게 한마디 대답
도 못하고 밥도둑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쫓겨났으니 바로 깨치게 될
때까지라도 자지 않고 눕지도 않고 오직 서서만 지내겠다고 대중에게
선언했습니다. 정진은 계속 되었습니다. 밤이 되었는지 낮이 되었는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잊은 채 계속 정
진하였습니다. 불감 근스님이 이를 보고는 용맹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했
습니다. 사실 불등 순스님은 화두 하나만 갖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습
니다.
하루는 불감 근스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불등 순스님은 겁은 났지만
부르는데 안 갈 수가 없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스님앞에 앉았습니
다. 그러자 불감 근스님이 무슨 법문을 해 주시는데, 그 법문을 듣는
순간 불등 순스님은 무슨 법문을 해 주시는데, 그 법문을 듣는 순간 불
등 순스님은 그만 확철히 깨쳤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인가를 받았
습니다. 정진을 시작해서 도를 성취하기까지의 기간을 헤아려 보니 사
십 구일 동안이었습니다. 사십구일 동안을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입는
것, 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오직 서서 공부만 했던 것입니다. 불등 순스
님은 실제로 용맹정진을 했고, 그리하여 깨쳐서 인가를 받은 것입니다.
불감 근스님의 사형되는 분에 원오 극근 선사가 있었는데 이 소문을
듣고는 찾아왔습니다.
"그까짓 며칠 동안 공부한 것 가지고 뭘 안다고 인가를 해줘. 사람을
죽여도 푼수가 있지. 내가 봐야겠으니 그놈 오라고 해."
이렇게 불등 순스님을 불러서는 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산모퉁이를
도니 절벽이 나오는데, 절벽 밑에는 폭포가 있고 폭포 밑에는 깊은 소
(沼)가 있었습니다. 그 옆을 지나가는데 원오스님이 그를 절벽 밑의 폭
포 속으로 확 밀어넣더니 공부한 것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물길이 깊어
발이 땅에 닿지도 않고, 입으로 코로 마구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데다가
폭포소리가 요란하여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정신을 잃
게 해 놓고는 법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불등 순스님은 마치 방
안에 앉아서 대답하듯 묻는 말에 척척 대답을 했습니다. 이것을 본 원
오스님은 "그놈 죽이기는 아깝구나. 끄집어 내줘라"라고 말했습니다.
제 2 장 자유로 가는 길
2. 큰 신심
그러면 자기 개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능력의 개발이라는 큰
과제를 두고서, 우리는 어떠한 결심을 해야 되는가? 우리가 어떤 결심
을 해야만 자기 능력을 완전히 개발하여 불보살이 되고 조사가 되고 그
리고 선지식이 되어 미래겁이 다하도록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가?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려야만(爲法忘軀) 대도를 성취할 수 있습
니다. 모든 행동의 근본이 되는 몸까지도 잊어야만 비로소 대도를 성취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보기로 부처님을 들 수 있습니다. 대도를 위해서 왕자를
버리고 천추만세에 일체중생을 위해서 얼마나 큰 공을 이루었습니까 근
대에 와서는 오직 진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 법을 위해서
몸을 버린 사람으로 청나라 태종 순치 황제를 보기로 들 수 있습니다.
만주족이 만주에서 일어나 십팔 년 동안을 싸워 중국을 통일하여 대청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그 세력 판도는 남, 북만주, 내, 외몽고, 서장,
안남에 이르러서 중국 역사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역사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런 순치 황제가 대청제국 창업주의 영광을
차 버리고 출가를 했습니다. 본디부터 불교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부귀
영화란 일시적인 것이며, 또 대청제국의 황제 노릇도 영원에서 영원으
로 계속되는 무한한 시간에 비하면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며 아이들의
장난일 뿐이라고 깊이 통찰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굳은 각오로 곤룡
포를 벗어던지고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모습을 감추고
금산사에 가서 나뭇꾼이 되어 머슴살이로 스님들 시봉을 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출가시를 썼습니다.
나는 본래 인도의 수도승인데
무슨 인연으로 타락해서 제왕이 되었는가.
我本西方一納子 (아본서방일납자)
緣何流落帝王家 (연하류락제왕가)
천자 되는 것을 타락 중에서도 가장 큰 타락이라고 보니 이것이야말
로 참되게 수도하는 근본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동네 이장만 되어도 만금 천자라도 된 것 같이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을 따른다면 부처님의각오와
결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 반대로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참으로 자기
를 잊고 무상대도를 성취해서 일체 중생을 위해 이 대도를 위하는 큰
결심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장
사꾼이나 날품팔이하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일반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목적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어느 회사의 직원이 되는 것이라는 식으
로 답하곤 하는데, 이런 장사꾼 깉은 심리 가지고는 절대로 무상대도
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혹 사람의 마음도 모르는 채 넘겨짚거나 너무
무시한다고 항의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내가 그 사람 보고 뼈가 부러지도록 절하렵니다. 그런
사람은 참으로 귀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를 믿는 데는 만승천자도, 곤룡
포도 내버리는 그런 큰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2. 큰 의심
지금까지 이야기했듯이 불교의 근본은 자기개발에 있습니다. 초월적
인 신은 부정합니다. 부처도 믿지 말고 조사도 믿지 말며, 석가도 필요
없고 조사도 필요없다는 말은 불교의 근본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 부처님이고 절대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곧
자기 자신이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
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자기개발을 완전히 할 수 있는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대장경이 있으니 그 문자만 많이 독송하면 무심삼매(無心三
昧)를 얻을 수 있는가? 아닙니다. "널리 배워서 아는 것이 많으면 마음
이 점점 어두워진다(廣學多知 神識轉暗;광학다지 신식전암)"고 부처님
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옛사람들도 말하기를 "도의 길은 날로 덜어가고
학문의 길은 날로 더해간다(爲道日損 學爲日益;위도일손 학위일익)"고
했습니다. 참으로 깨치는 길은 한 생각 덜어서 자꾸자꾸 덜어 나아가야
하고 학문을 하려면 자꾸자꾸 배워 나아가야 됩니다. 도(道)와 학(學)
은 정반대의 처지에 서 있습니다. 듣고 보고 하는 것은 무심삼매를 성
취하는 데에서는 설비상(雪砒霜)과 같은 극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
리의 근본 목표인 대도(大道)를 성취하여 성불하는 데에서 이론과 문자
는 장애물이 되지 이로움을 주지 못합니다. "모든 지식과 언설을 다 버
리고 오직 마음을 한 곳에 모으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
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으로써 성불하였지 이론과 문자를 배워서
성불하였다는 소리는 없습니다.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면 중도(中道)를 깨달았습니다. 그 깨
달음을 얻으려면 선정(禪定)을 닦아서, 곧, 참선을 해서 무심삼매를 성
취해야 됩니다. 무심삼매를 거쳐 진여삼매에 들어가야 하는데, 하물며
망상이 죽 끓듯하는 데에서 어떻게 진여삼매를 성취하여 중도를 증득한
부처님의 경계를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교(敎)라는 팔만
대장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약방문입니다. 약처방이란 말입니다. 그것
에 의지해서 그대로 약을 지어 먹어야 병이 낫습니다. 밥 이야기를 천
날이고 만날이고 해봐야 배부르지 않듯이, 약처방만을 천날 만날 외어
봐야 병은 낫지 않습니다. 약을 직접 먹는 것이 실천하는 것이므로 선
정을 닦는 좌선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께서 평생 가르친 것이 이 좌선
입니다. 지금도 저렇게 좌선하시며 앉아 있지 않습니까.
2. 큰 의심
1) 아난존자
옛날 스님네는 어떻게 공부해서 어떻게 무심삼매를 성취하여 도(道)
를 이루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들아가신 뒤 그 제자들이 부처님이 법문하신 것을 모아놓
은 것이 경(經)입니다. 그 무렵에는 녹음기도 없고 속기(速記)하는 사
람도 없었지만, 부처님을 삼십여 년 동안 모시고 다시며 시봉했던 아난
존자는 부처님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총명함은 고금을 막
론하고 견줄 데가 없으니 한번 들으면 영원토록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
서 부처님 법문을 결집(結集)하는데, 대중 모두가 아난이 주동이 되어
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웃사람인 상수제자(上首弟子)인 가섭
존자가 소집 단계에 가서 그에 반대하였습니다.
"아난은 부처님 말씀은 잘 기억하고 있지만 실제 진리는 깨치지 못했
으므로 참석할 자격이 없다."
가섭 존자는 아난 존자가 아무리 부처님 말씀을 잘 기억하지만, 다시
말하여, 팔만대장경이 모두 자기 뱃속에 있지만 아직 자기 마음을 깨치
지 못한 봉사이므로 이 결집에 참여할 자격이 없으니 아주 나가라고 하
였습니다. 이에 아난 존자가 애걸복걸하며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돌
아가시면서 '나의 대법(大法)을 가섭에게 전했으니 그를 의지해서 공부
하라'고 하셨는데 이제 가섭 사형이 나를 쫓아내면 누구를 의지해서 공
부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섭존자는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는 불법을 깨친 사자(獅子)만 사는 사자굴인데 깨치지 못한 여우가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하면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울며 쫓겨난 아난 존자는 비야리성(城)으로 갔습니다. 그
곳에 가니 국왕이며 대신 등을 비롯한 많은 신도들이 큰스님 오셨다고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고 법문을 청하므로, 이난 존자는 가섭 존자에
게서 쫓겨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잘난체하며 법문을 했습니다. 이때 그
부근에 발기라고 하는 비구가 있었는데 아난이 그곳에 온 뒤로 많은 신
도들이 모여 법석을 떠니 시끄러워 도저히 공부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
서 발기 비구가 게송을 하나 지었습니다.
좌선하고 방일하지 말아라
아무리 지껄인들 무슨 소용있는가.
坐禪莫放逸 (좌선막방일)
多設何所利 (다설하소리)
입 다물고 참선하라는 말입니다. 아난 존자가 그 게송을 듣고는 정신
이 번쩍 났습니다. 이제 참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참회하고는 다른 곳으
로 가서 불철주야로 앉아서 정진했습니다. 졸릴 듯하면 일어나 다니고
다리가 아프면 앉았다 하면서 자꾸 선정을 익혔습니다. 며칠이 되었는
지도 모르게 그렇게 여러 날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어찌나
고달픈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잠깐 누워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목
침(木枕)을 베려고 턱 드러눕다가 확철히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무심삼
매를 성취한 것입니다. 목침을 집어던지고 밤새도록 걸어서 가섭 존자
에게 갔습니다. 가섭 존자가 몇 가지 시험을 해보니 확철히 깨친 것이
확실하므로 결집하는 사자굴에 참가할 자격을 주었습니다. 경에 보면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아난의 말입니다.
결국 부처님의 십대 제자 가운데 다문제일(多聞第一)은 아난 존자이
지만, 근본 법은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전했고 가섭은 다시 아난에게 전
했습니다. 곧 부처님은 시조(始祖)이시고, 초조(初祖)는 가섭 존자, 이
조(二祖)는 아난 존자입니다. 아난 존자 밑으로 상나화수 존자로 이어
지고…, 이렇게 해서 정법(正法)은 이십팔대(代) 달마대사가 중국에 옴
으로써 동토(東土)에 전해졌습니다. 이 선종이 중국에 소개되어 육조스
님 뒤로는 천하를 풍미해서 모든 불교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육조스님
을 오조 홍인(弘忍)대사 밑의 제일 큰제자로서 일자무식이었습니다. 당
시 홍인스님의 제자로 신수(神秀)라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
등에서도 아무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대지식가가 있었지만 이 신수
스님은 도를 바로 깨치지 못했으므로, 법은 일자무식인 육조스님에게
가고 말았습니다.
2) 덕산스님
중국 선종사(禪宗史)에서 보면 임제종을 창설한 임제스님과, 운문종,
법안종의 종조(宗祖)되는 덕산(德山)스님, 이 두 분 스님을 조사들 가
운데 영웅이라고 하여 칭송하고 있습니다.
덕산스님은 처음 서촉(西蜀)에 있으면서 교리 연구가 깊었으며 특히
금강경에 능통하여 세상에서, 스님의 속성이 주(周) 씨이므로, 주금강
(周金剛)이라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스님은 그 무렵 남방에서 교학을
무시하고 오직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하는 선종의 무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여 평생에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금강경소초를 짊어지
고 떠났습니다. 가다가 점심(點心)때가 되어서 배가 고픈데 마침 길가
에 한 노파가 떡을 팔고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그 떡을 좀 주시오."
하니, 그 노파가
"내 묻는 말에 대답하시면 떡을 드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떡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고 하여 덕산스님이 "그러자"고 하였습니다. 노파가 물었습니다.
"지금 스님의 걸망 속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금강경소초가 들어 있소."
"그러면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 스님은 지
금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고 하십니까?"
'점심(點心) 먹겠다'고 하는 말을 빌어 이렇게 교묘하게 질문한것입
니다. 이 돌연한 질문에 덕산스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가 지금까지 그렇게도 금강경을 거꾸로 외고 모로 외고 모르는 것이 없
다고 생각했는데 이떡장수 노파의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다 달아나 버렸
습니다. 그래서 노파에게 물었습니다.
"이 근방에 큰 스님이 어디 계십니까?"
"이리로 가면 용담원(龍潭院)에 숭신(崇信) 선사가 계십니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곧 용담으로 숭신 선사를 찾아 갔습니다.
"오래 전부터 용담(龍潭)이라는 말을 들었더니 지금 와서 보니 용
(龍)도 없고 못(潭)도 없구만요."
"참으로 자네가 용담에 왔구만."
주금강은 또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용담스님 밑에서 공
부를 하였는데, 하루는 밤이 깊도록 용담스님 방에서 공부한 뒤에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방문을 나섰다가 밖이 너무 어두워 방안으로 다시
들어 갔습니다. 그래서 용담스님이 초에 불을 켜서 주는데 덕산스님이
받으려고 하자마자 곧 용담스님이 촛불을 확 불어 꺼 버리는 것이었습
니다. 바로 이 때 덕산스님은 활연히 깨쳤습니다. 그러고는 용담스님께
절을 올리니 용담스님이 물었습니다.
"너는 어째서 나에게 절을 하느냐?"
"이제부터는 다시 천하 노화상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그 다음날 덕산스님이 [금강경소초]를 법당 앞에서 불살라 버리며 말
하였습니다.
모든 현변(玄辯)을 다하여도
마치 터럭 하나를 허공에 둔 것 같고,
세상의 추기(樞機)를 다한다 하여도
한 방울 물을 큰 바다에 던진 것과 같다.
모든 변론과 언설이 하도 뛰어나서 온 천하의 사람이 당할수 없다고
해도, 깨달은 경지에서 볼 때는 큰 허공 가운데 있는 조그만 터럭과 같
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실제로 깨친 것은 저 허공과 같이 광대무변한
것으로, 이 대도라는 것에 비하면 세상의 모든 수단을 다하는 재주가
있다 하여도 그것은 큰 골짜기에 작은 물방울 하나 던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지식이 장한 줄 알았다가 바로 깨쳐 놓고 보니 자기
야말로 진짜 마군이의 제자가 되어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덕산스님은 이렇게 깨치고 나서, 사람을 가르치는 데 누구든 어른거
리면 무조건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부처님이 와도 때리고 조사가 와도
때리고 도둑이 와도 때리는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한 주일마다
온 절안을 뒤져서 무슨 책이든 눈에 뛰기만 하면 모두 불에 넣어 버렸
습니다. 이 덕산스님의 몽둥이 밑에서 무수한 도인이 나왔습니다. 천하
에 유명한 설봉스님, 암두스님이 나왔으며, 운문스님의 운문종과 법안
스님의 법안종이 또한 이 몽둥이 밑에서 나왔습니다. 이렇듯 자기개발
이란 오직 마음을 닦아서 삼매를 성취해야 하는 것이지 언어 문자에 있
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3) 임제스님
중국에서 선종이 천하를 풍미할 때 선종은 임제종, 조동종, 위앙종,
운문종, 그리고 법안종의 다섯 종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서도 임제종이 가장 융성했습니다.
임제종의 종주는 황벽스님의 제자인 임제스님으로, 일찌기 교학을 많
이 배운 스님입니다. 스님은 교(敎)만으로는 부족하고 꼭 선(禪)을 해
서 깨달아야겠다고 특별한 가르침을 배운 적도 없이, 나면서부터 아는
생이지지(生而之知)로서, 당시의 천자인 선종(宣宗)을 두드려 팬 일이
있는 걸출한 선승이었습니다. 이 스님 밑에서 한 삼년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 때에 황벽스님 회상에는 수자로 목주스님이 있었는데 임
제스님을 격려하기 위해 물었습니다.
"상좌(上座)는 여기 온 지가 몇 년이나 되었는가?"
"삼 년입니다."
"그러면 황벽스님께 가서 법을 물어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황벽스님에게 가서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긴요한
뜻입니까' 하고 물어보지 아니하였는가?"
그 말을 듣고 임제스님은 황벽스님에게 가서 똑같이 물었습니다. 그
런데 묻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황벽스님이 갑자기 몽둥이로 스무
대나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임제스님이 몸둥이만 맞고 내려오니 목주스
님이 물었습니다.
"여쭈러 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제가 여쭙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실 스님이 갑자기 때리시니
그 뜻을 제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다시 가서 여쭈어라."
그 말을 듣고 임제스님이 다시 가서 여쭙자 황벽스님은 또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이와 같이 세번 가서 여쭙고 세번 다 몽둥이만 맞고 말았
습니다. 임제스님이 돌아와서 목주스님께 말했습니다.
"다행히 자비를 입어서 저로 하여금 황벽스님께 가서 문답케하셨으나
세번 여쭈어서 세번 다 몽둥이만 실컷 맞았습니다. 인연이 닿지 않아
깊은 뜻을 깨칠 수 없음을 스스로 한탄하고 지금 떠날까 합니다."
"네가 만약 갈 때는 황벽스님께 꼭 인사를 드리고 떠나라."
임제스님이 절하고 물러가자 목주스님은 황벽스님을 찾아가서 여쭈었
습니다.
"스님께 법을 물으러 왔던 저 후배는 매우 법답게 수행하는 사람입니
다. 만약 하직 인사를 드린다고 오면 방편으로 그를 제법하여 이후로
열심히 공부케 하면, 한 그루 큰 나무가 되어 천하 사람들을 위해 시원
한 그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임제스님이 와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황벽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너는 고안(高安) 개울가의 대우(大愚) 스님
에게 가거라. 반드시 너를 위해 말씀해 주실 것이니라."
임제스님이 대우스님을 찾아 뵈오니 대우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디서 오는고?"
"황벽스님께 있다가 옵니다."
"황벽이 어떤 말을 가르치든가?"
"제가 세번이나 불법의 긴요한 뜻이 무엇인가 하고 여쭈었는데 세번
다 몽둥이만 맞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무슨 허물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
습니다."
"황벽이 이렇게 노파심절(老婆心切)로 너를 위해 철저하게 가르쳤는
데 여기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이냐?"
임제스님이 그 말 끝에 크게 깨치고 말했습니다.
"원래 황벽의 불법(佛法)이 별것 아니구나!"
대우스님이 임제의 멱살을 잡고 말했습니다.
"이 오줌싸개 놈아! 아까는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더니 지
금은 또 황벽의 불법이 별 것 아니라고 하니 너는 어떤 도리를 알았느
냐, 빨리 말해보라, 빨리 말해보라!"
임제스님은 대우스님의 옆구리를 세번 쥐어 박았습니다. 그러자 대우
스님이 멱살 잡은 손을 놓으면서 말했습니다.
"너의 스승은 황벽이지 내가 간여할 일이 아니니라."
임제스님이 대우스님께 하직하고 황벽스님에게 돌아오니, 황벽스님은
임제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이놈이 왔다 갔다만 하는구나. 어떤 수행의 성취가 있었느냐?"
"다만 스님의 노파심절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서 오느냐?"
"먼젓번에 일러주신 대로 대우스님께 갔다 옵니다."
"대우가 어떤 말을 하던가?"
임제스님이 그 사이의 일을 말씀드리자 황벽스님이 말씀했습니다.
"뭣이라고! 이 놈이 오면 기다렸다가 몽둥이로 때려주리라."
그러자 임제스님이 말했습니다.
"기다릴 것 무엇 있습니까, 지금 곧 맞아 보십시오."
하면서 황벽스님의 뺨을 후려치니 황벽스님이 말했습니다.
"이 미친 놈이 여기 와서 호랑이 수염을 만지는구나!"
그러자 임제스님이 갑자기 고함을 치니 황벽스님이 말했습니다.
"시자야 이 미친 놈을 끌어내라."
그 뒤 임제스님이 화북(華北) 지방으로 가서 후배들을 제법하면서 누
구든지 앞에 어른거리면 고함을 쳤습니다. 그래서 임제스님이 법 쓰는
것을 비유하여 '우뢰같이 고함친다(喝)'고 평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임
제종이 시작되었습니다.
임제스님이 소리지르는 것(喝), 덕산스님과 황벽스님이 사람 때리는
것(棒), 이 이치를 바로 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 전에는 팔만
대장경을 거꾸로 외고 모로 외워도 소용없습니다. 지식으로는 박사의
박사를 더한다 해도 소용없으니, 오로지 불법은 깨쳐야 알지 깨치기 전
에는 절대 모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능력을 다 개발하면 영원토록 대자유, 대
자재한 절대적인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가능
한가? 반드시 무심삼매를 성취해야 되고, 이 무심삼매를 성취하려면 오
직 마음을 닦아야지 지식과 언설로써는 절대로 안 됩니다.
제 4 편 영원한 자유
제 2 장 자유로 가는 길
3. 세 가지 장애
그러면 생사해탈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화두 공부를 부지
런히 해서 깨치면 그만이지만, 그 공부하는 데 가장 방해되는 것 세 가
지가 있습니다. 그 세 가지만 피하면 공부를 좀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돈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돈이 눈에 보이면 공부는 그만입
니다. 세상이 시끄럽고 종단이 수난을 겪는 것도 그 근본을 따지고 보
면 전부 돈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승려가 타락하고 돈 때문에 출가자
가 썩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돈을 독사보다 무서워하고 비상(砒霜)
보다 겁을 내야 합니다. 참으로 돈에 끄달리지 않고 돈을 멀리하고 초
탈한 그런 사람이면 실제 대도(大道)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
습니다.
그런데 돈만 보면 모두 거꾸러지고, 돈만 보면 모두 미쳐버립니다.
옛말도 있습니다. '황금흑리심(黃金黑吏心),' 곧 누런 황금이 관리의
마음을 검게 한다는 말입니다. 요즈음 내가 보기에는 '황금살승심(黃金
殺僧心),' 곧 돈이 수도자의 마음을 다 죽인다고 하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이 돈에 대해 철처하게 끄달리지 않는다면 공부할
분(分)이 좀 있다고 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돈에 안 끄달릴 사람이
별로 없지요? 어린애들도 돈만 주면 좋아합니다. 내가 꼬마 친구들을
좋아하는데, 노래 불러라 해서 노래를 안 부르다가 돈 주면 그만 노래
합니다. 어떤 아이는 아무리 노래를 부르라고 해도 안 부릅니다. "오천
원 줄께" 해도 안 합니다. 나중에는 자기 아버지가 만원짜리 한 장을
썩 내주었더니 좋아서 받더니 그만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
다.
"애미, 애비보다 돈이 최고구먼!"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도를 성취하려면 돈하고는 반대가 되어야 하
는데…' 나도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 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한 번 내게 물어 보십시오.
"스님은 돈 얼마나 모아 놓았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둘째는 여자입니다. 여자에 대해서는 여자이고, 여자에 대해서는 남
자입니다. 여자는 사실 그렇게 중시할 재료는 못 됩니다. 재료가 못 된
다 말입니다. 옛날 어디에서인가 있었던 일입니다. 여자 천 명을 모아
큰 절구통에 넣어서 쿵쿵 찧었습니다. 그러고서 남자 하나를 만들었는
데 그 남자가 눈이 하나 멀었더라고 합니다.
어쨌든 도를 성취하려면 여자를 가깝게 하지 말라고 말해 왔습니다.
언젠가 누가 무슨 이야기 끝에,
"스님, 우리 비구니를 칭찬 좀 해 주십시오."
하던데, 사실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다 칭찬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일찌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같은 장애물이 두 가지만 되어도 성불할 사람 아무도 없다."
어떤 사람은 이러허게 말합니다.
"그건 본능이야, 본능! 배고픈데 밥 안 먹고 살 수 있어?"
본능이라도 다릅니다. 밥 안 먹고는 살지 못하지만 여자는 없어도 얼
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여자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항상 여자를 경계하라고 하시
는고?"
원수가 져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도를 성취하려면 반드시 여자를
멀리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성취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명예입니다.
명예, 이름병!
이것은 단수가 높은 것입니다. 돈도 필요없다,여자도 내 앞에서 어
른거리지 못한다고 이렇게 말하지만, 그 사람의 내부 심리를 현미경이
나 엑스레이 기계로 들여다보면,
"내가 이토록 참으로 장한 사람이다, 큰스님이다, 도인이다"
하는 이름을 내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고 또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
습니다. 병 가운데서도 재물병, 곧, 돈병과 여자병 이 두 가지 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이름병이라는 것입니다.
계행이 청정하여 돈도 필요없다, 여자도 감히 어른거리지 못한다고
하면 천하 제일의 큰스님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큰스님, 큰스
님" 하면서 옆에 와서 자꾸 절을 하면 그만 정신이 없어집니다. 여자와
재물은 벗어나도 대접받는 것에서는 벗어나기 참 힘듭니다.
실제로 재물병과 여자병은 결심만 단단히 하면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병에 걸리면 주위에서 남들이 욕이라도 하지만, 이름병에 걸리면
남들이 더 칭찬해 주니, 그럴수록 이름병은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입
니다. 책을 본다든지 하여 말주변이나 늘고 또 참선이라고 좀 해서 법
문이라도 하게 되면 그만 거기에 빠져버리는데, 이것도 일종의 명예병
입니다. 이리하여 평생이 잘못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아니
고 남도 그렇게 만들어 버리고, 그래서 큰스님 소리 듣고 대접받는 데
정신없다가, 마침내는 부처님이 성취하신 것과 같은 참다운 그런 대자
유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스님들이 재물병이나 여
자병보다도 명예병이 더 무섭고 고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이러니 우리가 서로서로 반성하여 이 세 가지를 완전히 벗어 나서 참
으로 출격 대장부가 되어 크게 자유자재한 해탈도를 성취하여야 합니
다.
영원한 자유
제 4 편 영원한 자유
제 3 장 신심(信心)이 성지(聖地)다
1. 관음보살과 문수보살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금사탄 여울가의 마씨부인이로다.
如何是佛 (여하시불)
金沙灘頭馬卽婦 (금사탄두마즉부)
이것은 임제종의 3세인 풍혈스님의 법문입니다. 어떤 스님이 풍혈스
님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하니 "금사탄 개울가의 마씨
부인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떨이지는 곳(落處), 곧, 근본 뜻은 각자가 공부를 하여 확철
히 깨쳐서 참으로 자성을 밝혀야 알지 그 전에는 모르는 것이니 부지런
히 공부할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다만 '금사탄두마랑부'라는 말의
출처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중국 협서성에 '금사탄'이라는 유명한 강이 있습니다. 당나라
정원(貞元 785~804) 때,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는 천하일색의
여자가 이 강가에 살고 있었는데, 사방에서 돈 있는 사람, 벼슬 높은
사람을 비롯하여 온갖 사람들이 그여자에게 청혼하였습니다. 그 여자
는 "내 몸은 하나인데 청혼하는 이가 여러 사람이니 내 조건을 들어주
는 사람에게 시집가겠습니다"하며 [법화경 보문품]을 외라는 조건을 걸
었습니다.
그 이튿날 보니 스무 명이 [법화경 보문품]을 하룻밤 사이에 다 외어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금강경]을 외우라고 했습니다. 그 다
음날 새벽에 보니 또 십여 명이나 되어, 이번에는 [법화경]을 다 외어
오라고 했습니다. [법화경]은 좀 많은데도 사람들은 그래도 이 미인에
게 장가들 욕심으로 죽자 하고 외었습니다.
마씨 집 아들 곧 마랑(馬郞)이 사흘 만에 다 외고 달려왔습니다. "참
빨리 외셨습니다. 한번 외어보십시오" 하니 줄줄줄 다 외는 것이었습니
다. "내가 참으로 천하에 좋은 낭군을 찾아다니는 중인데 당신 같이 좋
은 낭군을 만났으니 이젠 한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시집가겠습니다."
이렇게 결정되어 혼인날을 받고 성례(成禮)를 했습니다. 결혼식이 끝
나고 신부가 방으로 들어가자, 잠시 후, 축하객들이 채 헤어지기도 전
에, 신부가 "아이구 배야, 아이구 머리야!" 하더니 갑자기 데굴데굴 구
르다가 덜컥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랑은 이 처녀에게 장가 들기 위
해 밤잠도 안 자고 [법화경]을 외고 또 외었는데 신부가 죽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금방 죽은 여인의 시체가 썩더니 진물이 줄줄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천하일색, 그 아름답던 사람의 몸이 금방 오물이 되어
흘러내리니 참으로 흉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만승천자(萬乘天子)가
좋다해도 죽어서 썩으면 그만이듯이, 아무리 미인이라도 죽어서 썩으니
그만입니다.
마랑은 부랴부랴 관을 짜서 여자의 시신을 산에 묻어버렸습니다. 그
래도 죽기 전의 그 처녀가 마랑의눈 앞에 어른거렸습니다. 자신이 박
복하다고 한탄하며 지나던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마랑을 찾았습니다.
"일전에 이곳에서 처녀 한 사람이 죽지 않았습니까, 그 묘소가 어디
있습니까?"
묘소로 안내하니 스님이 갖고 있던 석장으로 묘를 탁 치는데, 묘가
둘로 갈라지면서 그 속에 소복하게 쌓여 있는 누런 황금뼈가 보였습니
다. 불과 며칠 전에 죽은 사람인데 석장으로 추켜드니 금쇄골(金鎖骨)
입니다. 뼈 마디 마디가 고리가 되어서 머리부분을 드니 발 뒤끝까지
끌려 올라왔습니다. 그때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그 처녀가 버로 관세음보살이야. 이곳 협서성 사람들이 하도 신심이
없어서 너희들을 제도하기 위해 관세음보살님이 처녀 몸으로 나투어 온
것이야. 이 금쇄줄을 봐!"
마랑은 [법화경]을 사흘 만에 다 욀 만큼 영리한 사람이어서 곧 그
뜻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구나!'
"이렇게 관세음보살이 좋은 법문을 해주었으니 너희들은 부지런히 수
행하거라!"
이러허게 말하고 그 스님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금사탄두마랑부'이니, 금사탄 개울 가의 마씨 부인이
라는 뜻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의 고사입니다.
문제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관세음보살이 화현(化現)하다니, 도
저히 믿을 수 없다'고 의심이 가는 것을, 이해가 안된다고 하여, 그것
을 거짓말이라고 단정한다면 산채로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 세인(世人)에게 나타난 사례는 아주 흔합니다. 그중에
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보타락가 산(寶陀洛迦山)입니다. '보타'란 인도
말로 '희다'는 뜻이고 '낙가'는 '꽃'이란 말로서 보타락가는 '흰꽃'이
란 뜻입니다. 관음도량(觀音道場)은 백화도량(百華道場)이라고 합니다.
보타락가 산에 조음동(潮音洞)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나는 가보지 못하
였지만 사진으로는 여러번 보았습니다. 그곳에서는 누구든지 정성껏 기
도하면 수시로 관세음보살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중국에는 성지(聖地)
와 명소가 많지만 돈이 많이 생기는 곳은 보타락가 산입니다. 온 천하
신도들이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려고 많이 오기 때문입니다.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이 모여 향을 꽂고 정성껏 기도를 하면, 그 가운데 관세음보
살이 나타나서 때로는 법문도 하고 여러 동작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
다. 그런 것을 보면 신심이 솟아나서, 신도들이 돈을 막 쏟아 놓고 갑
니다. 그래서 해방 전까지만 해도 보타락가 산 절 한 곳에만도 대중스
님이 사천여명 살았습니다. 그리고 신도들이 자꾸 와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후에는 돈을 쏟아 놓고 갑니다.
그런데 제일 문제되는 것은 사신공양(捨身供養)입니다. 관세음보살
친견에 너무 감격하여 '이 몸을 관세음보살께 바치겠다'고 높은 절벽에
서 떨어져 몸을 공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신공양을 못하도록 관세
음보살이 자주 나타나는 주변에는 이리 저리 막아서 사람이 죽지 못하
도록 조치를 했습니다. 그래도 가끔 사신공양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것이 유명한 보타락가 산의 관세음 현신(現身)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보타락가 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금사탄에도 퍽
자주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금사탄두마랑부'라는 이 이야기는 보통 사
람이 말한 것이 아니고 선종의 가장 큰 종파인 임제종의 제3세 적손(嫡
孫)인 풍혈스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풍혈스님이 말씀하신 그 법
문의 근본 뜻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공부를 하여 확철히 깨치기 전에
는 모르는 것으로, 나는 다만 그 연유가 어찌 된 것인가를 말한 것입니
다.
이것보다 더 유명하며 기적적인 법문이 선가에 있습니다. 전삼삼 후
삼삼(前三三 後三三) 이라는 것입니다. 이 법문은 유명한 [벽암록(碧巖
錄)] 백칙(百則)에도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문수보살이 말씀하신 이야
기입니다.
무착 문희(無着文喜)선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중국의 오대산에
갔다가 금강굴 앞에서 웬 영감 한분을 만났습니다. 그 영감을 따라가니
아주 좋은 절이 있어서 그절에 들어가 영감과마주 앉아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영감이 물었습니다.
"남방 불법은 어떻게 행하는가(南方佛法 如何住持)?"
"말세 중생이 계행이나 지키고 중노릇 합니다.(末法比丘 小奉戒律)."
"절에는 몇사람이나 모였는고(多小衆)?"
"삼백 혹은 오백 명 모여 삽니다(或三百 或五百)."
무착스님도 한마디 묻고 싶었습니다.
"여기는 불법이 어떠합니까(此間如何住持)?"
"범인과 성인이 같이 살고, 용과 뱀이 섞여 살지(凡聖同居 龍蛇混
雜)."
"그럼 숫자는 얼마나 됩니까(多小衆)?"
"앞으로도 삼, 삼, 뒤로도 삼, 삼이지(前三三 後三三)."
'용과 뱀이 섞여 살고 범인과 성인이 같이 산다'는 말은 보통으로 들
으면 그저 그런 것 같지만 그 뜻이 깊은 곳에 있습니다. 겉말만 따라가
다가는 큰일납니다. 무착 선사는 그 말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노인과
작별하고 나와 돌아보니 절은 무슨 절,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것에 대해 게송을 읊었습니다.
시방세계 두루 성스러운 절
눈에 가득히 문수와 말을 나누나
당시는 무슨 뜻을 열었는지 모르고
머리를 돌리니 다만 푸른,산 바위뿐이더라.
廓周沙界聖伽監 (곽주사계성가감)
滿目文殊接話談 (만목문수접화담)
言下不知開何印 (언하불지개하인)
廻頭只見翠山巖 (회두지견취산암)
그 후에 또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법문 들은 것이 있습니다. 불교 선
문에서 흔히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누구나 잠깐동안 고요히 앉으면
강가 모래같이 많은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낫도다.
보배탑은 끝내 무너져 티끌이 되거니와
한생각 깨끗한 마음은 부처를 이루는도다.
若人靜坐一須臾 (약인정좌일수유)
勝造恒沙七寶塔 (승조항사칠보탑)
寶塔畢境碎薇塵 (보탑필경쇄미진)
一念淨心成正覺 (일념정심성정각)
이 게송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그 출처를 모
르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착 문희 선사가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문수보살이 '직접' 무착스님에게 설한 법문입니
다. 그러니 관세음보살뿐 아니고 문수보살 같은 그런 대보살들도 32응
신만이 아니라 삼백, 삼천, 또 몇천억 화신을 나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불법을 성취하여 대 해탈부사의 경계를 얻을 것 같으면 문수
보살도 될 수 있고, 관세음보살도 될 수 있고, 보현보살도 될 수 있으
며, 32응신이 아니고 백, 천 화신을 나타내어 자유자재하게 일체 중생
을 제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수보살을 보는 가장 유명한 성지가 중국의 오대산인데 그곳에 가서
실제로 친견한 기록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보면 신라
시대 자장스님이 중국에 갔을 때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법문
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뒤 스님은 귀국하여 불교를 위해 여러가지를
하시다가 나중에 태백산 정암사에서돌아가셨는데, 그 때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문수보살이 직접 스님을 찾아왔지만 그만 시자들의 실수로
친견 못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나타나는가 하면, 노인으로 또는 동
자(董子)가 되어 나타나는 수도 있고 여러가지로 몸을 나투어 배유로써
중생을 교화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신심이 있고 오대산에 가서 기도
를 많이 하는 사람이면 문수보살을 직접 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대산에 가야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낙가산에 가야만 관세음보
살을 친견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지만
내가 실제 죽는 것 아니고
항상 여기서 법을 설한다.
爲度衆生故 (위도중생고)
方便現涅槃 (방편현열반)
而實不滅道 (이실불멸도)
常住此說法 (상주차설법)
'상주차설법(常住此說法)'이라 함은 항상 여기 계시면서 설법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란 시방 세계로서 처처가 '여기'입니다. 꼭 영축
산만 여기가 아닙니다. 보타산이 어느 곳일가? 사람 사람의 신심이 보
타산입니다. 철저한 신심으로 기도를 하면 어디든지 나타납니다. 관세
음보살이 나타나는 곳이 보타산입니다. 문수보살 나타나는 곳이 오대산
입니다. 오대산이 따로 없고 보타산이 따로 없으니, 사람마다 그 신심
에 있습니다. 신심! 오직 신심으로 공부도 기도도 하면, 누구든지 살아
서 관음도 문수도 볼수 있으며 산 부처님도 볼 수 있습니다.
2. 농산행
일본 비예산(比叡山)은 천태종 본산으로 여기네 연역사(延曆寺)라는
절이 있습니다. 천태종이 전교(傳敎) 대사에 의해 그곳에서 개종한 지
는 약 1,200년이 되었는데, 1,200년을 계속 내려 오면서 12년을 단위로
농산행(籠山行)이라는 수행을 합니다. 그 당시 전국적으로 가장 영리하
고 가장 신심있는 사람을 골라서 12년 동안 비예산 정토원(淨土院)이라
는 절에 앉혀두고 공부를 시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농산행이
라고 합니다. 12년 만기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밖으로 나올 수가 없습
니다.
이런 공부 방법이 1,200년 동안 한번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왔습니
다. 12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들어가서 대를 잇고 또 12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들어가기를 100명째 계속 해온 것입니다.
들어가는 첫째 조건은 대승계를 받는 것인데 그 때의 계는 부처님에
게서 직접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부처님에게서 받느냐 하면 기
도를 간절히 하면 부처님께서 나타나 계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
하면 '서상(瑞相)을 본다'는 것입니다. 농산을 할 때는 반드시 기도를
하여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기도하느냐 하면 하루에 삼천배씩 절을 합니다. 이 때
삼천 불명경이란 것이 있어서 이것을 펴 두고 부처님 명호를 한번씩 부
르면서 절을 하는데,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아주 정성껏 해야 하며, 절
을 한번 하고는 가루 향을 한번씩 사루고 다시 절을 해야 합니다. 아주
천천히 하루종일 스물네 시간 동안 절만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백련암에서 삼천배씩 절을 시켜보면 어떤 사람은 제트기가 날
아가듯 빨리 하여서 세 시간이나 네 시간만에 끝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농산행을 할 때는 이렇게 아주 시간을 많이 들여 천천히 절을
하되 부처님께서 직접 나타나서 계를 주기 전에는 그칠 수가 없습니다.
삼천배를 마치고 나서는 또 쉬는 것이 아니라, 가사 장삼도 벗지 못하
며 앉고 눕지도 못하고, 변소 갈 때 이외에는 언제나 장좌(長坐), 곧
그대로 앉아 지내며 누워서 자지도 못합니다.
2년이든 3년이든 부처님이 나타나서 계를 줄때까지는 그치지 않고
삼천배를 하면서 온 정성을 다 바쳐 기도하며 고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
다. 사람에 따라서는 몇 달만에 부처님이 나타나는 수도 있고, 어떤 사
람은 3년 이 걸리기도 합니다. 1,2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농산에
들어가서 부처님의 서상을 못 본 채 12년 동안 농산한 사람은 한 사람
도 없었습니다. 몇 해 전에도 12년 동안 농산을 하여 성취한 사람에 대
한 기사가 신문에 났습니다. 그는 지극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드
리니 부처님이 나타나서 계를 설하더라고 했습니다.
농산행을 할 때는 그 먼저 농산행을 한 사람이 스승이 됩니다. 그것
은 실제 부처님에게서 계를 받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인데, 자신들이
직접 체험했으니 다른 사람은 그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
다. 이런 방법으로 1,200년 동안 농산행을 계속하여 이어내려왔으니,
농산행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에게서 직접 계
를 받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한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
고 일본의 모든 불교 단체와 불교도가 다 아는 일입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부처님이 돌아가셨으니 그만이라고는 할 수는 없습
니다. 자신이 못 본다고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눈 감은 봉사가, 누군가가 "해가 참 밝고 좋다"고 하는 소리를 듣
고 자신의 눈앞이 캄캄하다고 해서 그를 미친놈이라고 욕할 수 없는 것
과 같습니다. 누구나 진리의 눈을 뜨면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습니다.
천태 지자(天台智者) 선사가 혜사스님을 찾아가서 공부를 하고 바로
깨쳤습니다. 그러고 나서 영산회상이 엄연부산(儼然不散)함을 자기 눈
으로 보았습니다. 이 말은 곧 영축산에서 부처님이 상주하여 수많은 대
중을거느리고 법을 설하는 것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지 수천 년인데 지금도 영축산에서 법문을 설한다
는 말은 도저히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세상에 나느니
죽느니 하는 것은 꿈속에 사는 눈 먼 중생들이 하는 말이요, 참으로 꿈
을 깨어 눈이 뜨이게 되고 귀가 열리면 부처님이 항상 계시면서 법을
설함을 보고 들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천백억의 몸으로 나투어 시방세
계(十方世界)에 다니시며 중생을 구하십니다. 그래서 설사 꿈을 깨지
못한 사람이라도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을보려 하면 누구든지 다 볼
수 있는 것이니, 보지 못하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의 정성이 부족한 탓입
니다. 우주 전체의 중생들이 정성만 지극하면 한 날 한시에 다같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정성을 들여 병을 고친 사람, 큰 액난
을 면한 사람, 죽을 것을 살아난 사람등 그밖의 여러가지 기적이 수없
이 많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신통력 갖추고
널리 지혜 방편 닦아
시방 모든 국토에
어느 곳에든 헌신 않는 곳 없다.
具足神通力 (구족신통력)
廣修智方便 (광수지방편)
十方諸國土 (십방제국토)
無刹不現身 (무찰불현신)
달이 뜨면 천 개, 만 개 강에 달 비치듯이(千江有水 千江月), 부처님
은 시방세계 어느 곳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현신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
다. 만약 부처님이 아주 돌아가 없어졌으면 모든 기적들은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께 정성을 들
여 그 정성의 정도에 따라 가피를 입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
두 꿈속의 중생들이 대하는 부처님이어서 잠깐 동안입니다. 그러나 꿈
을 깨어 법(法)의 눈을 밝게 뜨면 부처님을 항상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는 것이니 부지런히 공부해서 속히 마음의 눈을 뜰 것입니다.
흔히 염기염멸(念起念滅)하는 것 곧 생각이 일어났다가 생각이 없어
지는 것을 생사(生死)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가 없어졌
다 하는데, 이러한 생멸하는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염기염멸하는 그 생각이 없으면 생사도 없습니다. 이것이 철저
하여, 제8아리야식의 근본무명, 무시무명(無始無明)까지 모두 끊어지면
미래겁이다하도록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교를 참으로 잘 믿으려면, 불교의 근본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믿어야 합니다. 눈 먼 망아지가 요령소리만 듣고 따라가다가는 똥구덩
이에 빠지고 흙구덩이에 처박히고 덫에도 걸리고, 심지어는 죽기까지도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 목표는 생사해탈에 있습니다. 해탈이란 일
시적인 자유가 아니라 영원한 자유입니다. 영원한 자유라 함은 생전사
후(生前死後)를 통해서 또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통해서 영원히
자유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보기에서도 보았듯이 엄연한 사
실입니다. 결코 전설이나 신화가 아닙니다. 실제로 영원한 자유가 없다
면 굳이 부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욕심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면 아무도 고생하면서 수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자유, 영원한 해탈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하고
고행의 문턱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천자(天子)보다 더 높은 이라도 죽
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도 그만이 아닌 영
원한 자유를 구하기 위해천자도 내버리고 참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 5 편 영원한 자유인
1. 선로(宣老)스님
송(宋)나라 때, 시인이며 대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곽공보(郭功甫)라
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 사람
을 잉태할 때 그의 어머니가 이태백의 꿈을 꾸었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
은 모두 그를 이태백의 후신(後身)이라고 했는데, 뛰어난 천재였다고
합니다.
곽공보의 불교스승은 귀종 선(歸宗宣) 선사인데 임제종의 스님이었습
니다. 어느 날 귀종 선 선사가 곽공보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앞으로 6
년 동안 곽공보의 집에 와서 지냈으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곽공보는
스님께서 연세가 많긴 하지만 어째서 자기의 집에서 6년을 지내려 하시
는지 알 수 없어 이상하게 생각 하였습니다. 그날 밤이었습니다. 안방
에서 잠을 자다가, 문득 부인이 큰 소리로 "아이쿠, 여기는 스님께서
들어오실 곳이 아닙니다."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깨어났습니다. 부인이
꿈에 큰스님께서 자기들이 자고 있는 방에 들어왔다고 하는 말을 듣고
곽공보는 낮에 온 편지 생각이 나서 불을 켜고 부인에게 그 편지를 보
여 주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사람을 절에 보내 알아보니 어젯밤에 스님께서 가만히
앉아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편지 내용과 꼭 맞았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곽공보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편지를 보낸 것이나 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귀종 선 선사가 곽공보의 집에 온 것이 분명했습
니다. 그래서 이름을 달리 지을 수가 없어, 귀종 선 선사의 '선(宣)'자
를 따고, 늙을 '노(老)'를 넣어 '선로(宣老)'라고 했습니다.
생후 일 년 쯤 되어 아이가 말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누구를 보든
'너'라고 하며 제자 취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법문을 하는데 스님의
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어린애 취급을 할 수
가 없어 무두다 큰스님으로 대접하고 큰절을 올렸습니다. 아이의 엄마,
아버지도 큰절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소문이 났습니다.
당시 임제종의 정맥(正脈)을 이은 유명한 백운 단(白雲端) 선사가 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세살 되는 어린애를 안고 마중을 나갔더니
이 아이가 선사를 보고 "아하, 조카 오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
생의 항렬로 치면 백운 단 선사가 귀종 선 선사의 조카 상좌가 되기 때
문입니다. 이렇게 되니 "사숙님" 하고 어린아이에게 절을 안 할 수 없
었습니다. 백운 단 선사 같은 큰스님이 넙죽 절을 하였던 것입니다. 백
운 단 선사가 "우리가 이별한 지 몇 해나 됐는가?" 하고 물으니, 아이
는 "4년 되지. 이 집에서 3년이요, 이 집에 오기 1년 전에 백련장에서
서로 만나 이야기하지 않았던가"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조금도 틀림없는 사실을 말하자 백운 단 선사는 아주 깊은 법
담(法談)을 걸어 보았습니다. 법담을 거니 병에 담긴 물이 쏟아지듯 막
힘이 없이 척척 받아 넘기는데, 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법담은 장황하여 다 이야기 못하지만 <<전등록(傳燈錄)>>같은 불교 선
종 역사책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것이 유명한 귀종 선 선사의 전생담입
니다.
그후 6년이 지나자 식구들을 모두 불러 놓고는 "본래 네 집에 6년만
있으려 하였으니 이제 난 간다" 하고는 가만히 앉아 입적 했습니다. 이
처럼 자유자재하게 몸을 바꾸는 것을 격생불망(隔生不忘)이라고 합니
다. 아무리 전생, 후생으로 생을 바꾸어도 절대로 전생의 일을 잊어버
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원관(圓觀)스님
중국의 역사책인 <<당서(唐書)>>에 나오는 것으로, '이원방원관(李源
訪圓觀)'이라 하여 이원이라는 사람이 원관이라는 스님을 찾아간 이야
기가 있습니다.
당나라 안록산의 난리(755~763) 때 당 명황(唐明皇)의 신하중에 이
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원은 그의 아들입니다. 이증은 당 명황이
안록산의 난리로 촉나라 성도로 도망갈 때 서울인 장안(長安)을지키라
는 왕명을 받고 안록산과 싸우다 순국했습니다. 뒤에 국란이 평정되고
환도한 후, 나라에서 그 아들인 이원에게 벼슬을 주려 했으나 그는 도
를 닦겠다고 하며 거절하고는 자기의 큰 집을 절로 만들고 혜림사(蕙林
寺)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원관이라는 스님이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고승전
(高僧傳)>>이나 <<신승전(神僧傳)>>에는 '원관'으로 기록되어 있고, 다
른 곳에서는 더러 '원택(圓澤)'이라고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보통 흔히
볼수 있는 스님으로 마음 씀씀이가 퍽 좋았습니다.
한번은 원관스님과 이원 두 사람이 아미산(峨眉山)의 천축사 구경을
갔습니다. 구경하는 도중에 어느 지방의 길가에서 한 여인을 보고 원관
스님이 "내가 저 여자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태어난 지 사흘 후에 찾
아오면 당신을 보고 웃을 테니 그러면 내가 확실한 줄 아시오. 그리고
열두 해가 지난 뒤 천축사(天竺寺)로 찾아오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
니다. 아미산으로 가다가 이렇게 말하고 그는 길가에 앉아 죽어버렸습
니다. 원관스님의 이야기가 너무 이상해서 이원이 스님의 말대로 수소
문해서 여인의 집을 찾아가 보니 사흘 전에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습
니다. 이원이 아이를 보자 그 아이는 이원을 보고 웃는 것이었습니다.
이원이 이로써 그 아이가 원관스님의 환생인 줄 확실히 알고 혼자 집으
로 돌아오니, 집안 사람들이 스님께서 가시면서 이번에 가면 안 온다고
말씀하시고, 어느 곳의 누구 집에 태어날 것이라고 모두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뒤 팔월 추석날 이원은 전당(錢塘) 천축 사로 찾
아갔습니다. 갈홍천(葛洪川)이라는 개울이 있는 곳에 이르자 달이 환히
밝은데 저쪽을 보니 웬 조그만 아이가 소를 타고 노래를 하며 오고 있
었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 오더니 "이 선생은 참으로 신용있는
사람이오. 그러나 가까이는 오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약
속을 어기지 않고 찾아왔으니 신용있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세속 욕
심이 꽉 차 마음이 탁하니 가까이 오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원
이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멈칫멈칫하며 서 있는데 아이는 저만큼 떨
어져 소를 타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생돌 위 옛 주인이여
달구경 풍월함은 말하지 마라.
부끄럽다 정든사람이 먼 곳에서 찾아 오니
이 몸은 비록 다르나 자성은 항상 같다.
전생 내생 일이 아득하여 알 수 없는데
인연을 말하고자 하니 창자가 끊어질 것 같다.
오나라 월나라 산천은 이미 다 보고
도리어 배를 돌려 구당으로 간다.
三生石上舊情魂 (삼생석상구정혼)
賞月吟風莫要論 (상월음풍막요론)
慙愧情人遠相訪 (참괴정인원상방)
此身雖異性長存 (차신수리성장존)
身前身後事茫茫 (신전신후사망망)
欲話因緣恐斷腸 (욕화인연공단장)
吳越山川尋已遍 (오월산천심이편)
却廻煙掉上瞿塘 (각회연도상구당)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가는 것을 보고 이원은 그제서야 그 스님이 도
를 통한 큰스님인 줄 알고, 더 가까이 하여 법문을 듣고 공부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돌아가서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뒤에 나라에서 이원에게
간이대부라는 높은 벼슬을 주었으나 이원은 이를 거절하고 팔십여 세까
지 살았습니다.
이것이 '이원방원관' 이야기의 내용으로, 이 이야기도 영겁불망에 해
당하는 것입니다. 전생의 일을 조금도 잊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기억하
고 있으며 자유자재한 것입니다.
노래 가운데 '삼생돌 위에 옛주인'이란 누구를 가리키느냐하면 천태
지의 선사의 스상인 혜사(慧思)스님을 말합니다. 혜사스님(515~577)은
만년에 대소산(大蘇山)에서 남악형산(南嶽衡山)으로 처소를 옮기고 형
산의 천주봉(天柱峰) 봉우리밑에 있는 복암사(福岩寺)라는 절에 주석
(住錫)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내가 전생에도 이 복암사에서 대중을 교육시켰는데 그 전생
일이 그리워서 이곳으로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대중을 거
느리고 나가더니 아주 경치가 뛰어난 한 곳에 이르러 "이곳이 옛날 절
터야. 지금은 오래되어 아무 자취도 없지만, 내가 전생에 토굴을 짓고
공부하던 곳이야. 근처를 파 보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그 주변을 파 보니 과연 기왓장과 각종 기물이 나왔습니다. 또 큰 바위
가 있는 곳에 이르러 "이곳은 내가 앉아서 공부하던 곳이야. 죽어 이
바위 밑으로 떨어져 시체가 그대로 땅에 묻혔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땅을 파 보니 해골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혜사스님의 삼생담입니다.
금생에는 복암사, 전생에는 토굴터, 그 전생은 바위 위이므로 삼생석인
것입니다.
혜사스님은 그 도력이나 신통이 자재한 유명한 스님으로, 그런 분이
분명히 증거를 들어 확인한 것이니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
서 삼생의 해골이 나온 그 자리에 삼생탑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남악 혜사스님의 삼생탑으로, 유명한 명소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
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앞에서 원관스님이 말한 삼생석 위의 옛주인이란 바로 혜사스님을 가
리킨 것입니다. 곧 혜사스님이 돌아가셨다가 나중에 당나라에 태어나서
원관이라는 스님으로 숨어 살았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모든 생
활이 범승(凡僧)과 같았지만 실제 생활은 자유자재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대자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3. 불도징(佛圖澄)스님
신승(神僧) 불도 징(佛圖澄)은 인도 사람입니다. 도(道)를 통한 후
중국으로 와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켰는데 그 가운데서 후조(後趙)의
황제 석호(石虎)가 제일 신봉하며 지도를 받았습니다. 불도 징스님이
349년 12월 8일에 석호에게 하직하고 입적하니 석호가 통곡하며 크게
장사지냈습니다. 그 후 얼마 있지 않아서 옹주(壅州)에서 스님들이 왔
는데 '불도 징대사를 보았다'고 하기에 탑을 헐고 보니 정말 아무 것
도 없고 큰 돌덩이 하나뿐이었습니다.
석호가 그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습니다.
"돌(石)은 나의 성인데 큰 스님이 나를 묻고 갔으니 나도 또한 오래
살지 못하리라."
그 뒤에 과연 황제 석호가 죽고 그 나라까지 망하였습니다.
4. 지자(智者)스님
수나라의 양제(瘍帝) 대업(大業) 원년(元年;605) 11월 24일, 천태산
지자 대사(智者大師) 제삿날에, 양제가 그 신하 노정방(盧正方)을 보내
어 천승재(千僧齋)를 올렸습니다. 사람 수를 엄밀히 조사하여 정돈하였
는데 나중에 보시를 돌릴 때 보니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
이 더 있는지는 모르나 확실히 한 사람이 더 있는 것을 다들 말하였습
니다.
"지자 대사가 몸을 변하여 재(齋)에 참여한 것이다."
모두들 가서 지자탑의 문을 열고 보니 과연 빈 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다시 보니 지자 대사의 육신은 여전히 탑 속에 앉아 있었습
니다.
5. 은봉(隱峰)스님
당나라의 헌종(憲宗) 원화(元和) 12년(817년) 은봉(隱峰) 선사가 채
주(蔡州)를 지나가는데, 그때 오(吳)의 원제(元濟)가 난리를 일으켜 관
군과 채주에서 크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은봉 선사가 그것을 가련하게
여겨서 육환장을 타고 몸을 공중에 날리니 양군이 보고 감복하여 싸움
을 그쳤으며, 얼마 있지 않아서 오의 원제가 항복하였습니다. 은봉 선
사는 이러한 신통을 부린것이 부끄러워 오대산으로 가서 금강굴(金剛
窟) 앞에 거꾸로 서서 죽으니 옷자락까지 전부 몸을 따라 거꾸로 드리
워져 있었습니다. 화장을 하려고 몸을 밀어도 쓰러지지 아니하여 모두
들 더욱 탄복하였습니다. 선사의 여동생으로 출가하여 공부하는 비구니
가 있었는데 그 소문을 듣고 달려와서는 스님을 보고 꾸짖어 말하였습
니다.
"몸이 생전에 돌아 다니며 기이한 행동으로 사람을 속이더니 죽어서
도 또한 사람들을 미혹하게 한다."
이렇게 소리 지르며 손으로 미니 마침내 죽은 몸이 쓰러졌습니다.
성철스님 법어집 "영원한 자유"의 다음이야기는
<<영원한 자유인. 혜숙(惠宿)스님.>>입니다.
6. 혜숙(惠宿)스님
혜숙(惠宿)은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 597~631) 때 스님으로 적
선촌(赤善村)에 이십여 년 동안 숨어 살았습니다. 그 때 국선(國仙)인
구담이 그 근처에 가서 사냥을 하니, 혜숙도 같이 놀기를 청하여 구담
과 함께 사냥을 하였는데, 많은 짐승을 잡아 삶아서 잔치를 하였습
니다.
혜숙은 고기를 잘 먹다가 구담에게 문득 물었습니다.
"더 좋은 고기가 있는데 드시렵니까?"
그 말에 구담이 좋다고 하자, 혜숙이 한 옆에 가서 자기의 허벅지 살
을 베어다 구담 앞에 놓는 것이었습니다. 구담이 깜짝놀라니 혜숙이 꾸
짖었습니다.
"내 본래 그대를 어진 사람으로 알았는데 이렇듯 살생함을 좋아하니
어찌 어진 군자의 소행이라 할 수 있겠소?"
말을 마치고 가버린 뒤에 그가 먹던 쟁반을 보니 담았던 고기가 그대
로 있었습니다.
구담은 이 일을 매우 이상히 여겨 진평왕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리하
여, 왕이 사신을 보내어 그를 청하고자 하였습니다. 사신이 가보니 혜
숙은 술집에서 술이 많이 취하여 여자를 안고 자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사신이 나쁜 놈이라고 만나지 않고 궁중으로 되돌아가는데 얼마 안
가서 또 혜숙을 만났습니다. 혜숙의 말이 "신도 집에 가서 7일재(七日
齋)를 지내고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신이 놀라 왕에게 가서 전후사
를 말하여 왕이 신도 집과 술집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니 다 사실이었습
니다.
수년 후 혜숙이 죽으니 마을 사람이 이현(耳峴) 동쪽에 장사를 지냈
습니다. 장사 지내는 바로 그 날 마침 이현 서쪽에서 오는 사람이 있었
는데 길가에서 혜숙을 만나게 되어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이곳에 오래 살았으니 딴 곳으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인사하고 헤어진 후 조금 있다가 돌아보니 혜숙이 공중에서
구름 타고 가는 것이 뚜렷이 보였습니다. 그는 크게 놀랐습니다. 그래
서 걸음을 재촉하여 급히 이현의 동쪽에 와서 보니 장사 지낸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묘를 파헤쳐보니 묘 속에는 과연 아무 것도 없고 헌신 한 짝뿐이
었습니다.
7. 혜공(惠空)스님
혜공(惠空)은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 632~646) 때 사람인
천진공(天眞公)의 집 종의 아들로서, 아명(兒名)은 우조(憂助)였습니
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이 생각만 하고 말은 하지 않아도 그것을 다
알아 맞추는 등의 신기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천진공은 그에게 예
배하며 "지극한 성인이 내 집에 계신다"고 크게 존경하였습니다.
그가 자라서스님이 되어서는 항상 술을 많이 먹고 거리에서 노래 부
르고 춤추며 미친 사람 같이 돌아다녔습니다. 또 번번이 깊은 우물 속
에 들어가서 여러 달 동안 나오지 않곤 하였습니다. 만년에는 항사
사(恒沙寺)에 있었는데, 그 때에 원효(元曉)대사가 경전의 주해(註解)
를 지으며 어렵고 의심이 나는 것은 혜공에게 물었습니다.
하루는 원효와 같이 강에 가서 고기를 잡아 먹고 똥을 누는데 산 고
기가 그대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혜공이 원효를 보고 희롱하여 말하기
를 "너는 똥을 누고 나는 고기를 눈다[汝屎吾魚]"라고 하니, 그 뒤로
절 이름을 오어사(吾魚寺)로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하루는 구담 공이 많은 사람들과 산에 놀러 갔다가 길에 혜공스님이
죽어서 그 시체가 썩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중(城中)에 돌아와 보니 혜공스님은 여전히 술에 취해서 노래 부르고
춤추며 돌아 다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 무렵 진언밀종(眞言密宗)의 고승 명랑
(明朗)이 금강사(金剛寺)를 새로 짓고 낙성을 하는데, 당대의 유명한
승려가 다 왔으나 오직 혜공스님만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명랑이
향을 꽂고 마음으로 청하자, 혜공스님이 그것을 알고 "그렇게 간절히
청하므로 할 수 없이 온다" 하며 그 곳에 왔습니다. 그 때에 비가 몹시
왔으나 옷이 조금도 젖지 않았을 뿐더러 발에 흙도 묻지 않았습니다.
혜공스님은 승조(僧肇) 법사가 지은 [조론(肇論)]을 보고 자기가 전
생에 지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자신이 전생에 승조 법사였다
는 말입니다. 승조 법사도 깨달음을 얻어 자유자재한 분이었습니다. 혜
공스님이 배운 바 없어도 이처럼 원효스님이 모르는 것을 물어볼 정도
이며 또 신통이 자재하여 분신까지 하는 것을 보면, 스님의 말을 거짓
말이라 하여 믿지 못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혜공스님은 죽을 때에 공중에 높이 떠서 죽었는데, 나중에 화장을 하
니 사리(舍利)가 수없이 많이 나왔습니다.
8. 법연(法演)스님
임제종의 중흥조라고 하는 오조 법연(五祖法演) 선사는 오조산(五祖
山)에 살았다고 해서 오조 법연 선사라고 불렸습니다. 이 스님 밑에 불
감(佛鑑), 불안(佛眼), 불과(佛果)의 세 분 스님이 있었는데, 이 분들
을 삼불(三佛)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분 스님의 자손이 천하에 널리
퍼져 그뒤로 불교는 선종 일색이 되었고, 또 선은 오조 법연 선사의 법
손 일색이 되었습니다.
그 오조 법연스님이 오조산에 처음 들어가면서 오조 홍인(弘忍)선사
의 탑인 조탑(祖塔)에 예배를 하였습니다. 오조 홍인 선사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륙백년이 지났지만 육신이 그대로 탑에 모셔져 보존되어 있
었던 것입니다. 조탑에 예배를 드리면서 오조 법연 선사가 이렇게 법문
을 하였습니다.
옛날 이렇게 온몸으로 갔다가
오늘에 다시 오니 기억하는가
무엇으로 증거 삼는고
이로써 증거 삼노라
이것은 오조 홍인 선사를 보고 하는 말입니다. 곧 그전의 오조 홍인
선사가 돌아가셨다가 다시 오조 법연 선사가 되어 돌아왔는데 알겠느냐
는 말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다시 돌아왔다고 하는 이것이 증거가 된다
는 것입니다.
오조 홍인 선사는 사조 도신(道信) 선사의 제자입니다. 도신 선사는
나이가 많도록 제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웃에 산에 소나무를 많
이 심은 사람(栽松道者)이 있었는데, 나이 많은 노인이었습니다. 하루
는 그 노인이 도신 선사에게 와서 "스님께서 연세가 많은데 법(法)제자
가 없으니 제가 스님의 제자가 되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도신 선사가 "당신도 나이가 많아 나와 같이 죽을 터인데 제자
가 되어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고 대답했더니, 그 노인은 "그럼 몸을
바꾸어 오면 어떻겠습니까?"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그 노인이 산 밑에 있는 마을의 주(周) 씨 집의 아들로 태어나 사조
도신 선사를 찾아와서 그의 제자가 되었으니, 그가 바로 오조 홍인 선
사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조 홍인 선사는 재송 도자(栽松道者)의 후신
이고, 오조 법연 선사는 오조 홍인 선사의 후신인 것입니다. 이 삼대
(三代), 곧, 재송도자에서 도조 홍인 선사로 이어지는 삼대의 전생은
모두 밝혀져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영겁불망하는 열반묘심을 성취한
증거인 것입니다.
열반묘심을 성취하면 정신적으로만 어떤 작용이 있다고 생각 하지만,
그러나 육체적으로도 뛰어난 작용이 있어 분신도 하고 또 부사의(不思
議) 한 행동을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성상 불이(性相不二)'라
하여 성과 상이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 '심신일여(心身一如)'라고
하여 몸과 마음이 하나라 합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으로 열반묘심을 성
취하면 육체적으로도 그만큼 자유자재한 활동이 자연히생기게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심신일여가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 속에 들어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면, 물질
적인 것에 자유자재한 색자재(色自在)를 얻을 수 있고, 심리적인 것에
자유자재한 심자재(心自在)를 얻을 수 있으며, 또 모든 법에 대한 자유
인 법자재(法自在)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모두에 대해 자재
를 얻게 되면 여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한 진여위에서
자유자재하게 분신(分身)도 하고 화신(化身)도 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유자재, 영겁불망의 크고 작은 마음은 누구든 열심히 수
도하여 자기 자성(自性)을 확철히 깨침으로써 성취하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성취하면 자기 해탈 곧 색자재, 심자재, 법자재는 자연히 따라
오게 마련인데, 이것이 불교의 근본 목표이며 또 부사의 해탈경계(不思
議 解脫境界)라고 하는 것입니다.
9. 달마스님
달마스님을 보기로 들어보겠습니다. 불교인이라면 거의 알고 있는 달
마스님의 이야기가운데 '척리서귀'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짝 하나를 들
고 서천(西天) 곧 인도로 가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달마스님이 혜가(慧可)스님에게 법을 전하고 앉은 채로 열반에 드시
자 웅이산(熊耳山)에다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 뒤 몇 해가 지나 송운
(宋雲)이라는 사람이 인도에 가서많은 경(經)을 수집하고 귀국하는 길
에 총령(파밀고원)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어떤 스님 한분이
신짝 하나를 메고 고개를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님, 어디로 사
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이제 너희 나라와는 인연이 다
하여 본국으로 간다. 그런데 네가 인도로 떠날 때의 임금[효명제(孝明
帝 ; 516~528)]은 죽었어. 가 보면 새 임금이 계실 테니 안부나 전하
게"라고 말씀하시고는 고개를 넘어가셨습니다.
송운이 돌아와 보니 과연 먼저 임금은 죽고 새 임금[동위(東魏)의 효
정제(孝靜帝)]이 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도에서 달마스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달마스님은 돌아가신 지가 여러
해가 지났다고 했습니다. 송운은 너무 놀라 자기 혼자만 본 것이 아니
라 수십 명이 함께 달마스님을 보았으니 절대 거짓이 아니라고 말했습
니다.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여 달마스님의 묘를 파 보기로 했습니다.
무덤을 파보니 빈 관만 남아 있고 관 속에는 신 한짝만 놓여 있었습니
다.
달마스님의 '척리서귀'라는 말은 선종에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는사후(死後)에도 이처럼 대자유가 있음을 알려
줍니다.
이에 대한 조주스님의 법문이 있습니다.
조주 남쪽 석교 북쪽
관음원 속에 미륵이 있도다.
조사가 신 한짝 남겨두었으나
지금에까지 찾지 못하도다.
'조주스님' 하면 천하만고에 다 아는 대조사로서, 달마스님과 연대가
그리 떨어지지 않은 때에 사셨습니다. 그런 조주스님이 달마스님이 신
한짝 버리고 간 것에 대해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이 게송 하나만 보아
도, 달마스님이 신 한짝만 들고 간것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알 수 있습
니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그런 것이 아니며 반드시 대자유가 따릅
니다. 보통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신비한 어떤 경계가 나타
나는 것입니다. 보기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10. 승가(僧伽)스님
서기 708년 당나라의 중종(中宗)황제가 승가(僧伽) 대사를 국사(國
師)로 모셨습니다. 대사의 속성은 하(何)씨인데, 어느 때는 몸을 크게
도 나투고 어느 때는 작게도 나투고 또는 십일면 관세음보살(十一面觀
世音菩薩)의 얼굴로도 나투고 하여 그 기이한 행동이 세상 사람들을 놀
라게 하였습니다.
스님께서 710년 3월 2일에 돌아가시자 중종이 장안 근처의절에다 그
육신을 모셔두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큰 바람이 일며 시체 썩
는 냄새가 온 도성 안을 덮어서 사람들이 코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중
종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신하들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
"대사가 본래 사주(泗州) 보광왕사(普光王寺)에 많이 계셨는데 죽은
육신도 그리로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
라고 신하들이 황제께 아뢰었습니다.
그래서 중종은 향을 피우고 마음으로 축원하기를,
"대사의 육신을 보광왕사로 모시겠습니다."
하자, 잠깐 사이에 온 장안에 향기가 진동하였습니다.
그해 오월 보광왕사에다 탑을 세우고 대사의 육신을 모시니, 뒤로 탑
위에 자주 나타나서 일반 사람들에게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 탑에 와서 소원성취를 빌게 되었고 그럴때마다 가서 탑 위에 모습을
나타내곤 하였는데, 그 얼굴이 웃음을 띠우고 자비로우면 소원성취하고
찡그리면 소원성취하지 못하는 등 신기한 일이 많아서 세상에서 부르기
를 사주대성(泗洲大聖)이라 하였습니다.
또 799년 7월에는 궁중에 나타나서 그 때에 천자로 있던 대종(代宗)
에게 법문을 하였습니다. 이 일로 대종이 크게 감격하여 그 화상(畵像)
을 그려 궁중에 모셔놓고 항상 예배하였습니다.
822년에는 큰 화재가 나서 대사의 탑이 다 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대
사의 육신은 조금도 상함이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869년, 나라 안에 큰 난리가 났을 때에, 도적들이 사주(泗洲)로 쳐들
어오다가 대사가 탑 위에 몸을 나타내자 놀라서 다 물러갔습니다. 당시
의종(懿宗)황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증성대사(證聖大師)라는 호를 올렸
습니다.
1119년 당나라의 서울에 대홍수가 났을 때였습니다. 대사가 또 궁중
에 나타나므로 천자인 휘종(徽宗)황제가 향을 꽂고 예배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사가 육환장을 흔들며 성(城) 위로 올라가니, 성 안의 온 백
성들이 다 보고 기꺼워하는 가운데 큰 물이 곧 빠져버렸습니다.
이상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을 몇 가지 보기를 든 것일뿐으로, 그
밖에도 기이한 사적(事蹟)은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이렇듯이 승가 대
사가 사후에 보광왕사의 탑 위에 그 모습을 자주 나타낸 사실은 그 근
방 사람들이 다 보게 됨으로써 천하가 잘 아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
리하여 사실이 확실하여 의심할 수 없는 것을 가리켜 '사주 사람들이
대성을 보듯 한다(泗洲人見大聖)'는 관용구까지 생겨나게 된 것을 세상
이 다 잘 아는 바입니다.
제 5 편 영원한 자유인
11. 보화(普化)스님
보화(普化)스님은 반산 보적(盤山寶積) 선사의 제자로 항상 미친 사
람같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교화하였습니다. 그당시 그런 기행
을 하는 스님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오직 임제(臨濟)스님
만이 심중을 알고 흉허물없이 잘 지냈습니다.
하루는 진주(鎭州)의 저자거리에 나와서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나에게 장삼 한 벌을 해달라."
하며 졸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화스님에게 장삼을 지어 드렸습니
다. 그러나 스님은
"이것은 내가 입을 옷이 아니다."
하며 받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더욱 이상히 여기며 미친 중
이라고 수군댔습니다. 어느 날 임제스님이 그 소문을 듣고는 장삼 대신
에 관(棺)을 하나 보내니, 보화스님이 웃으며
"임제가 내 마음을 안다."
하고는 그 관을 짊어지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일 동문 밖에서 떠나겠다."
고 하였습니다. 다음 날 동문 밖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는데
보화스님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오늘 여기서 죽지 않겠다. 내일 서문 밖에서 죽겠다."
고 하며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욕을 하고는 흩어
졌습니다. 다음 날 서문 밖에 또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나 보화스님은
"오늘 여기서 죽지 않고 내일 남문 밖에서 죽겠다."
고 하며, 또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하였습니다.
다음 날 남문 밖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는데, 보화스님은
"오늘 여기서 죽지않고 내일 북문 밖에서 죽겠다."
고 하며 또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비록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미친 중이 거짓말만 하여 사람을 속인다고 삿대질을 하며 분위기가 살
벌하였습니다. 다음 날 북문 밖에는 과연 보화스님이 관을 메고 나타났
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보화스님은 관 위에 묵묵히 앉아 있
는데 마침 한 길손이 지나가므로 그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이 관 안에 들어가 눕거든 관 뚜껑을 닫고 못질을 해달라."
고 하고는, 그 관 속에 들어가 누우며 관 뚜껑을 닫으므로 그 길손이
못질을 하고 떠나갔습니다. 길손이 성중에 들어가 그 이야기를 하니 진
주성 사람들이 놀래며 북문 밖으로 보화스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습
니다. 가서 못질한 관 뚜껑을 열고보니 그 속에 있어야 할 보화스님은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때 마침 공중에
서 은은히 요령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은 그 요령 소리가 나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수없이 절을 하며 보화스님의 법력을 알아보지 못
한데에 대해 통탄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보화스님이 보인 전신탈거(全身脫去)의 이적입니다.
이 사실은 선종 어록 가운데 가장 권위있는 임제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2. 왕가(王嘉)
왕가는 후진(後秦) 때 숨어사는 사람으로 유명한 도안(道安)스님과
친하였습니다. 도안스님이 돌아가실 때가 되어 왕가가 찾아가니 도안스
님이 말하였습니다.
"나와 같이 가지않으려는가?"
왕가가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아직 빚이 좀 있어서 빚을 갚고 가겠습니다."
그 뒤에 요장이 장안(長安)을 빼앗을 때 왕가는 일부러 성 안에 있었
는데, 요장이 물었습니다.
"내가 곧 천하를 얻겠는가?"
"조금 얻겠다."
요장이 그말을 듣고 왕가를 죽여버렸으니 왕가가 말한 빚이란 바로
이를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 요장의 아들 요흥(姚興)이 천하를 얻었는데 요흥의 자(字)가
자략이었습니다. 그러니 '조금 얻겠다'란 말은 자략이가 요장을 죽이고
천하를 얻는다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왕가가 죽던 날, 어떤 사람이 농
상(壟上)에서 왕가를 만나니, 왕가가 자기를 죽인 요장에게 편지를 보
내자 요장은 그 편지를 받아보고 크게 놀래며 탄복하였다고 합니다.
13. 동빈거사(洞賓居士)
동빈거사(洞賓居士) 여순양(呂純陽)은 당나라의 현종(玄宗) 천보(天
寶 742~755) 때 하양(河陽)에서 났습니다. 그 무렵 신선도(神仙道)를
닦아 크게 유명해진 종리권(鐘離權)이 동빈을 보고 "세상의 영화(榮華)
는 잠깐 동안이니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신선도를 배우라"고 권하였
습니다.
동빈은 그 말을 좇아 종리(鐘離)를 따라 공부 길을 떠났습니다. 한
곳을 지나다가 종리는 큰 금덩어리를 하나 주어 가지고 대단히 기뻐하
며 말하였습니다.
"자네가 도(道)를 닦으러 가니 하늘이 그것을 알고 도(道) 닦는 밑천
을 하라고 주는 것이니 이것을 팔아서 모든 비용에 쓰자."
그러면서 동빈에게 그 금덩어리를 주자, 동빈은 크게 성내며 그 금덩
어리를 집어던지며 말하였습니다.
"내 들으니 도(道)하는 사람은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데 금덩어리 하
나 보고 그렇게 좋아하는 놈이 무슨 도(道) 닦는 놈이냐? 너는 도인(道
人)이 아니라 분명코 도적놈이니 너 같은 놈은따라갈 수 없다."
그러고는 뿌리치고 돌아가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종리는 크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금덩어리를 자세히 보라."
동빈이 자세히 보니 그것은 금이 아니라 썩은 돌이었습니다. 그제서
야 종리가 자기를 시험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깊은 산골에 가서 움막을 짓고 공부를 하는데, 하루는 종리
가 어디 갔다 온다 하며 더 깊은 골짜기에 가서 무슨 약을 캐어오라 하
므로, 동빈은 지시한 곳에 가서보니 아주 잘지은 초가집이 한 채 있었
습니다. '이런 깊은 산골에 어찌 이런 집이 있는고' 하는 의아심이 나
서 그 집 마당에 가서 보니, 방안에서 세상에 보기드문 예쁜 여자가 반
기며 나오더니, "우리 남편이 먼 길을 떠난 지 오래 되어 대단히 적적
하더니 마침 잘 오셨습니다" 하며 동빈의 손을 잡아 당기려 하는 것이
었습니다.
이에 동빈이 번개같이 발로 차며 꾸짖기를, "이 요망한 년 이것이 무
슨 짓이냐?"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집과 그 여자는
간 곳 없이 사라지고 자기 스승인 종리가 "허허" 하고 손뼉치며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동빈은 또 다시 시험당한 줄 알았습니다.
종리가 하는 말이,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이 재물과 여자인데 네가
그만큼 뜻이 굳으니 이제는 너의 집에 가서 부모를 아주 하직하고 참으
로 공부 길을 떠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종리와 같이 자기 고향
에 가서 집으로 갔는데 대문이 잠겨 있고 아무리 소리쳐도 안에서 대답
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담을 넘어가 보니 이게 웬일인가, 자기의 부모,
형제, 처자가 누군가에게 맞아 죽어 사지(四肢)가 갈기갈기 찢어진 채
로 온 마당에 가득 널려 있었습니다. 종리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더
니 벌벌 떨며 동빈더러 '그 시체를 전부 주워 모으라' 하였습니다. 동
빈은 처음부터 조금도 놀라는 빛이 없었습니다. 시체를 주워 모으면서
얼굴을 조금도 찌프리지 않고 마치 나무 막대를 주워 모으듯 아주 태연
하였습니다. 종리가 그것을 보고 또 한 번 크게 웃으니 모든 시체는 간
곳 없고 집안에서 자기 가족들이 반기며 쫓아나왔습니다. 그때야 비로
소 종리에게 시험당한 줄 알고 동빈은 크게 탄복하며 수없이 절하였습
니다.
그 뒤로 동빈은 신선도를 닦아 세상에 으뜸가는 신선이 되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을비롯하여 기묘한 재주를 많이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천하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황룡
산(黃龍山)에서 회기(晦機) 선사의 도력(道力)에 항복하고 그 밑에서
크게 깨쳐 불법(佛法)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천여 년 동안 그 몸 그
대로 돌아다니며 많은 불사(佛事)를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너
무나 유명한 사실들입니다.
일례를 들면, 송나라의 휘종(徽宗) 선화(仙化) 원년(元年 1119)에 휘
종(徽宗) 황제가 임영소(林靈素)라는 사람에게 속아서 그와 모든 것을
의논하는데, 문득 동빈이 그 자리에 나타나서는 임가를 꾸짖고 황제에
게 속지 말라고 타이른 것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14. 유안(劉晏)
유안(劉晏)은 당나라의 대종(代宗 763~779) 때의 유명한 재상인데,
어릴 적부터 이인(異人) 만나기를 소원하여 많은 애를 써 왔습니다. 한
번은 서울의 어느 술집에서 웬 이상한 사람들이 서너명이 술을 마시고
놀다가 한 사람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말하자, 다른 한
사람이 "왕십팔(王十八)이 있지 않는가!"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
깊이 간직하였습니다.
그 후 자사(刺史)가 되어 남중(南中)으로 가서 형산현(衡山縣)을 지
날 때 그 현청(縣廳)에서 쉬었습니다. 때는 봄철인데 좋은 채소들을 내
어오는데, 하도 이상한 것들이 많기에 물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좋은 것들을 구하여 왔느냐?"
"여기 왕십팔(王十八)이라는 채소 가꾸는 사람이 있는데 솜씨가 참으
로 묘합니다."
그 말에 문득 이전에 이름을 들은 생각이 나서 '그 사람을 한번 가서
만나보자' 하였습니다. 관인들이 그를 불러오려는 것을 말리고 자기가
직접 가서 보았습니다.
왕십팔은 떨어진 의복에 그 모양이 대단히 흉하였는데, 유안을 보더
니 겁을 내며 벌벌 떨면서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안이 그를 데리고
가서 술을 권하니 겨우 조금만 먹었습니다. 무엇을 물어도 도무지 '모
른다'고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안이 더 기이하게 여겨 '같이 가자'
하니 처음엔 사양하다가 못 이겨 같이 갔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데, 배
안에서 유안은 자기 가족에게 왕십팔을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소개
하며 모두 예배하도록 하였습니다.
며칠을 가다가 그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 하더니 계속하여 똥을 싸서
배안의 사람들이 크게 곤란해하였습니다. 모두가 그를 원망하는데 유안
만은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 앓더니 그만 죽어버렸
습니다. 유안은 크게 슬퍼하며 정성을 다하여 장사지내 주었습니다.
뒤에 유안이 벼슬이 바뀌어 딴 곳으로 갈 때 또 형산현에 들렀더니,
군수가 나와 반겨 맞으며 그때에 데리고 갔던 왕십팔이 얼마 후 돌아와
서 '도로 가라' 하기에 '그만 돌아왔다'고 말하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
다. 유안이 크게 놀라 '지금도 있는가?' 하고 확인한 뒤에 그 처소에
가보니, 빈 집뿐이었습니다. 이웃 사람 말이 '어제 저녁에 어디론가 가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안이 울며 여러 번 절하고 나서 사람을 보내어 옛날에 그를 장사지
낸 묘를 파보니 과연 의복뿐이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말을 전해
듣고 그 때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몇 해 뒤에 유안이 큰 병이 들어 정신을 잃고 거의 죽게 되었을 때였
습니다. 왕십팔이 찾아와서 유안에게 약 세 알을 먹이자 배 속에서 큰
소리가 남과 동시에 유안이 일어나 앉는데 병이 씻은듯이 나았습니다.
가족들로부터 왕십팔이 병을 낫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유안이 일어나
울며 절하자, 왕십팔이 말하였습니다.
"옛정을 생각하여 와서 구하였는데 앞으로 삼십 년은 더 살 것이다.
삼십 년 뒤에 만나자."
그러고는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유안이 아무리 붙들어도 소용없
고 많은 보물을 주어도 "허허" 크게 웃기만하고는 받지 않고 가버렸습
니다.
그 후 유안은 재상(宰相)이 되어 천하의 정사를 잘 다스리다가 못된
사람의 중상으로 대종(代宗) 황제의 미움을 받아 충주(忠州) 땅에 귀양
을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왕십팔이 또 찾아와서는 웬 약을 주
어 받아먹으니, 삼십 년 전에 먹은 약이 그대로 다시 나오는 것이었습
니다. 왕십팔은 그것을 물에 씻어 지니고서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습
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유안이 죽자, 이 신기한 사실이 세상에 널
리 전하여졌습니다.
15. 법수(法秀)
법수(法秀)는 당나라 때 사람입니다. 그가 현종(玄宗) 개원(開元) 26
(738)년에 꿈에 이상한 스님을 만났는데 가사(袈裟) 오백벌만 지어 회
향사(廻向寺)에 보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법수가 곧 가사를
만들어 회향사를 찾아가려 하였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
니다. 하루는 길에서 꿈에서 본 그 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부탁한 가사는 어떻게 되었는가?"
스님은 대뜸 이렇게 물었습니다.
"가사는 다 되었으나 회향사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법수가 대답하자, 그 스님이
"따라오라."
하기에, 며칠 동안 따라가다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주 궁벽한 곳으로 가서 한 곳에 이르니 돌로 쌓은 단(壇)이 나왔습니
다. 그곳에서 향을 피우고 스님과 함께 오래도록 예배드리자, 어느 사
이엔가 층암절벽 위에 있는 많은 기와 집들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스
님과 같이 올라가 보니 그곳에 과연 회향사라는 현판이 보였습니다. 건
물과 경치가 모두 인간 세계에서는 보지 못하던 훌륭한 것들이었으며,
대중스님들도 많은데 다 성인들 같이 보였습니다. 그 스님은 가사를 전
부 나누어주고 나서 한 빈방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것이 당나라 임금이 불던 것이니 가져가 주라."
하였습니다. 하룻밤도 더 못자게 해서, 이튿날 산을 내려와 쳐다보니
절은 간 곳 없고 오직 바위만 보일 뿐이였습니다.
법수가 여러 차례 예배한 뒤에, 대궐로 가서 옥퉁소를 올리고 그 연
유를 말하니, 현종 황제가 받아 불어보는데 정말로 많이 불던 사람같이
소리가 잘 났습니다. 그래서 현종은 천하에 둘도 없이 뛰어난 문장가인
이태백(李太白)을 불러 글을 짓게 하고, 자신은 옥퉁소를 불며 노래하
고 양귀비를 시켜 춤추게하니 마치 인간을 떠난 신선놀음과 같았습니
다. 이 소문이 천하에 퍼지자 기이하다고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
습니다.
제 5 편 영원한 자유인
16.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고 불리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남에게 얻어
먹고 다니는 거지 스님인데 살림살이라고는 큰 포대 하나 뿐이었습니
다. 포대 하나만 들고 다니다가 사람들의 뒷꼭지를 똑똑 치면서 돈 한
닢 달라 하곤 하였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법문이었습니다. 또, 예를 들
어, 생선 장수를 보면 생선 한 마리만 달라고 하여 한 입만 베어 먹고
포대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무엇이든 눈에 뛰기만 하면 달라고 했
습니다. 그리고 장차 가뭄이 계속될 것 같으면 흐린 날에도 삿갓을 쓰
고 다니고, 장마가 계속될 것 같으면 맑은 날인데도 굽이 높은 나막신
을 신고 다녔습니다. 이런 식으로 앞일을 예견하는 데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포대화상이 돌아가신 때(916년)에는 명주(明州) 악림사(嶽林寺) 동쪽
행랑 밑에서 법문을 하면서 앉은 채로 입적했습니다. 그 때 이런 게송
을 남겼습니다.
미륵, 참 미륵이여
천만억 몸을 나투는구나.
때때로 사람에게 보이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구나.
彌勒眞彌勒 (미륵진미륵)
分身千萬億 (분신천만억)
時時示時人 (시시시시인)
時人自不識 (시시자불식)
포대화상의 죽은 시체는 전신(全身)을 그대로 절 동당(東堂)에 모셔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보니 곳곳에서 포대화상이 돌아다니는 것
이었습니다.
17. 배도(杯渡)스님
배도(杯渡)스님은 당나라 때 스님으로 성도 이름도 알 수 없고 어디
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큰 강을 만나면
지고 다니던 걸망에서 조그마한 접시를 꺼내서 강물 위에 뛰우고는 그
것을 타고 강을 건너곤 하여, 사람들이 '접시를 타고 건넌다'는 뜻의
배도(杯渡)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접시를 타고 물을 건너는 스님이 접시가 없다고 강을 못 건널
까닭이 있겠습니까? 그런 것은 모두 장난입니다.
배도스님은 그렇게 하며 여러 곳을 다니며 중생을 교화하다가 돌아가
셨는데, 죽은 뒤에도 이것 저곳에서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18. 지공(誌公)
지공(誌公) 화상은 신통력이 뛰어난 스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양(梁)
나라 무제(武帝)는, 이상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미혹케한다 하여, 스님
을 잡아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를 자유롭
게 다니는 지공 화상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옥졸이 잘못 지켜서 그런
가 하고 옥에 가보면 스님은 옥 안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보고받고서 무제는 크게 놀랐습니다. 무제는 지공화상을
궁중에 모셔놓고, 잔치를 베풀어 참회를 올리며,
"스님, 몰랐습니다. 옥에 모실 것이 아니고 대궐로 모시겠습니다. 궁
중에 머물러 계시면서 법문을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습니다.
지공 화상은 그 청을 받아들여 궁중에 머물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계시던 절에서도 예전과 똑같이 지공 화상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법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리가 없다 하며 가서 알아보니 과연 사실
이었습니다. 이에 양나라 무제는 크게 발심하여, 천자 자리에 있던 40
여년 동안 불교를 더없이 융성시켰습니다.
지공스님이 돌아가실 즈음에 무제가 물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내 탑이 무너질 그때까지…"
지공스님이 돌아가신 뒤에 무제가 몸소 종산(鐘山) 정림사(定林寺)에
가서 탑을 세우고 그 안에 전신(全身)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지
내는데, 지공 화상이 구름 위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장사 지내러 온 수천, 수만의 대중이 그것을 보고 만세를 부르며 기뻐
하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얼마나 환희심을 내었겠습니까?
그 일을 기념하여 개선사(開善寺)라는 절을 짓고 천하에서 으뜸가는
탑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무제는 급한 생각에 목조탑을 세우게 하였습
니다. 드디어 나무로 지은 그 탑이 다 만들어지자, 무제는 비로소 '아
차! 잘못했구나. 지공스님께서 돌아가실 때 당신의 탑이 무너질 때 나
라가 망한다고 하였는데, 목조탑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하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탑을 헐고 새로이 석조탑을 짓기로 결심하
고는, 사람들에게 시켜 그 목조탑을 헐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
후경이 쳐들어와서 양 무제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양 무제가 어느 때인가 지공 화상께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목의 두 곳을 가리켰습니다.
그 때에 무제는 '무슨 말씀인가, 목이 달아난다는 뜻인가?' 하고 의아
해 하였습니다.
나중에 후경이 쳐들어오자 그제서야 비로소 그 뜻을 알 수 있었습니
다. 지공스님이 목을 두 번 가리킨 것은 바로 목 후(喉) 자, 목 경 자
를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19. 사명대사
이러한 무애자재한 경계는 옛날 이야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운 보기로 사명대사의 비석을 들 수 있습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함께 승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
친 유명한 스님입니다. 스님의 출생지는 경상남도 밀양의 무안입니다.
나라에서는 그곳에 스님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비석에서 이상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라에 좋은 일
이나 궃은 일이 생기려 하거나, 아니면 어떤 중대한 일이 일어나려고
하면, 이 비석에서 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물이 나오는데, 조금 흐르다
마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양이 나온다고 합니다. 많이 나올 때는
대두(大斗) 일곱 말에서 여덟 말까지도 나왔는데, 그동안 동학혁명, 을
사보호조약, 한일합방, 3․1운동, 그리고 8․15해방, 6․25사변, 여순
반란사건, 4․19의거, 5․16혁명 때 그 돌에서 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5․16 때에는 다섯 말이나 나왔다고 합니다. 그 때각 신문에서 이 사
실을 많이 보도하였는데 특히 동아일보에서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신문을 통해서 보고, 또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믿기는 어려워 직접 가보았습니다. 비석은 무안 지서에서 얼마 멀지 않
은 곳에 있었습니다. 흙으로 대를 모아 놓고 여러 층층대를 올라가서
큰 돌로 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새까만 돌로 비석을 세워 놓았는데 마
치 방금 만든 비석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레 다시 지붕을 씌워 놓고
비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습기 같은 것은 찾아 볼래
야 찾아볼수가 없었습니다.
비각 주변에는 비각을 지키는 집이 서너 채 있고 구연이라는 노스님
이 계시는데, 표충사 주지스님을 오래 한 분이었습니다. 그 노장스님이
말씀하기를, 비석에서 물이 나오는데 샘처럼 펑펑 쏟아지는 게 아니고
글자 사이사이의 매끄러운 데에서만 마치 구슬 맺히듯 땀 나듯이 나온
다는 것입니다 . 이 물은 비석 전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비석 밑에는 물
이 고이게 되어 있어서 그 양을 알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비석의 물빛은 보통 물빛과 같고, 또 물맛도 보통 물맛과 같다고 합
니다. 내가갔을 때는 물이 나오는 날이 아니라서 그냥 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 왔습니다. 가는 길이 무안 장날이었는데, 사람들을 잡고 사
명대사 비석 이야기를 하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비석에
서 땀이 난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했습니
다. 물이 나오는 것도 신기하지만, 더욱 신기한 것은 글자에는 전혀 물
이 흐르거나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사를 끝내고 표충사를 들러서 부산으로 왔는데 당시에 동아대학교
총장으로 있던 분이 달려와서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임이
분명하다고 이야기 해 주었더니 "스님께서도 남의 말만 듣고 믿습니
까?" 하고 반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삼십년 검사 생활을
했다는데, 그렇다면 그 때에 증인들 말을 안 믿고 또 보지 않은 것은
재판 안 하고 직접 본 것만 재판합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수백 명
의 증인이 있으면 확실한 것입니다. 사면대사가 그 비석을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도 그것은 사명대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법
당의 부처님도 부처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절도 하고 기도도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사명대사는 사백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물을 흐르게 해서 나라의
중대사를 예시하는 신기한 힘을 아직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은 사명대사의 무애자재한 능력이 사후에도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보기
입니다.
이런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본래 갖고 있
는, 영원한 생명 속의 무한한 능력을 개발한다면, 귀종 선 선사도 될
수 있고 또 원효스님의 스승인 혜공스님도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
자재한 해탈을 성취할 수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심히 부
지런히 공부하여 큰 스님들처럼 자유자재한 해탈도를 성취해야 할 것입
니다.
그러면 그 근본이 되는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영겁불망이니, 곧 영
원토록 다시 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겁불망, 이것은 허공이 무너
질지라도 조금도 변함없는 대해탈의 경계입니다.
이때 대중들 가운데서 한 스님이 일어서며 말했다.
"스님의 너무도 넓고 박학다식한 법문에 저희들 무지몽매한 중생들
이 불같은 의심을 금할 수 없어서 몇 가지 여쭈어 보아야겠습니다."
"몇 가지 물어 보겠으면, 천천히, 날씨도 시원할 때, 그 때 며칠이
고 이야기해 보자. 이리 더운데, 대중이 모두 네 이야기 때문에, 그
래 네 이야기 들으며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냐, 쌍놈아."
"그러면 스님은 어떤 분인지, 이것 하나만은 꼭 여쭙고 싶습니다."
"어떤 분이냐고! 내가 성철이지. 해인사 방장 성철, 나이는 칠십이
고…(웃음)"
맺는 말
이제 지금까지의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결론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종
교의 목표는 상대, 유한의 세계에서 절대, 무한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
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체고(一切苦)에서 벗어나 구경락(究境樂)을 얻
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개의 종교는 초월신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 현실에서 찾는 것이 아
니라 이상세계에 둡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우주과학시대에 있어서
는 그러한 초월신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초월신을 전제
로 한 종교는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
지 않으면 다만 역사의 한면을 장식하는 데 그치고 맙니다.
불교는 본래부터 초월신을 부정합니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현실세
계가 그대로 곧 절대의 세계이며, 이 세계를 벗어나 따로 절대의 세계
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불교의 근본 태도입니다. 그것을
[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하고, [화엄경]에서는 '일진
법계(一塵法界)'라고 했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이
며, 중도세계(中道世界)인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과학에서나 물질과학
에서도 현실이대로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
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현실의 차별만 보고 한계만 보려고 합니다. 한계없는
절대의 세계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와 절대, 유한과 무한에 대
한 한계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우주를 감싸고 있다 해도 눈 감은 봉사는 이 광명을 보지 못하는 것
입니다. 이 우주 전체, 삼천대 천세계, 미진수법계 이대로가 불국토 아
님이 없고 부처님 아닌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번뇌 망상의 구름
에 가려서 눈뜬 봉사가 되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와 상대는 때
와 장소에 따라서 그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모두 광병입
니다. 눈을 감은 사람이 볼 때는 암흑이고, 눈을 뜬 사람이 볼 때는 광
명인 것처럼, 눈만 뜨면 이 처소(處所) 이대로가 모두 절대입니다. 또
동시에 사람 사람이 부처님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
고, 중생이 본디 부처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극락세계, 황금세계, 절대세계입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함은 중생이 진리의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눈만 뜨면 내가
바로 진금체(眞金體)이고, 내가 사는 곳 전체가 진금체이며 극락세계임
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본래 정신 자체가 영원불멸이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불멸은
그대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공부를 하든 않든 간에 정신의 불멸은 그대로이나 그 쓰는 작용
은 다르니, 공부를 않는 사람은 진흙 속에 싸인 옥(玉)과 같아서 그 옥
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항상 생전에 지은 선악(善惡)의 업력(業力)
에 따라 생사로상(生死路上)에 돌아다니며 무한한 윤회를 거듭하는 업
보를 받게 되어, 조금도 자유가 없는, 고(苦)가 연속하는 생사의 불
멸(不滅)입니다.
공부를 성취한 사람은 진흙을 다 씻어 버린 깨끗한 옥과 같아서 업력
(業力)에 끄달리지 않아 생사로상(生死路上)에서 헤매이지 아니하고 모
든 고(苦)를 벗어나 영원히 자유자재한 대활동을 하게 되는 해탈의 불
멸(不滅)입니다. 비유하면 공부를 성취하기 전에는 눈 감은 장님의 생
활과 같고 공부를 성취한 후에는 눈 뜬 사람의 생활과 같으니, 사람의
생활은 같으나 눈 뜨고 안 뜬 생활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진리의 눈을 뜰 수 있는가? 생각을 한곳에 집중
해서 삼매(三昧)를 얻으면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되
면 이 현실 또한 바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현실 자체가 틀린 것이
라면 이 현실을 떠나야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바세계라
고 하지만, 현실을 바로 보면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결국 중생을 부처
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사바세계를 극락세계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원래 사바세계 이대로가 극락세계입니다.
불교에서 '현실이 곧 절대'라고 하는 것은 그 근본을 중도(中道)에
두고 있습니다. 양변을 여의고 또 양변이 서로 합해서 원융무애한 원리
가 바로 중도입니다. 부처님은 우주 만물의 근본 원리인 중도를 바로
깨쳐서 영원토록 무애자재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일체 중
생에게 '각자가 본래 지닌 부처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
다. 하루 품팔이하고 마는 정신으로는 대법(大法)을 절대 성취할 수 없
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지속되고, 공간적으로는 무한
에서 무한으로 계속되는 무한한 큰 세계를 바로 보려는 큰 결심을 가지
고 생활 방침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자체가 절대적인 자유세계임을 바로 보아야 합
니다. 눈을 감고 밖으로 찾아 헤매다닌다면 끝내 이 세계를 바로 보지
못할 것입니다. 밖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황금 속에 들어앉아 있
으면서 돈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눈만 뜨면 영
원토록 무한으로 쓸 수 있는 보물입니다. 자기 속이 광산이요, 자기 자
신이 순금덩어리요, 자기가 앉은 자리, 선 자리가 전부 순금덩어리입니
다. 이 광산을 개발하는 도구가 바로 화두(話頭)입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하여 아무리 깊은 잠이 들어도 무심삼매(無心三
昧)를 성취해서 화두를 깨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화두를 깨칠 것 같
으면 본래의 광산을 내 눈으로 분명히 보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
재로 쓸 수 있습니다. 이 절대세계, 진금세계, 제법실상의 세계를 중생
에게 소개하려면 여러 억천만 부처님이 출세하시어 미래겁이 다하도록
말해도 터럭만큼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도 결국 금덩어리에 똥칠하는 격입니다. 그렇지
만 금덩어리를 가진 모든 사람 가운데에 눈 뜬 사람은 적고, 눈 감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래서 눈 뜬 사람이 금덩어리를 던져주면 눈 감은
사람은 흙덩어리라고 하며, 오히려 그 사람을 때리고 주먹질을 합니다.
만일 어느 집에 가서 마당에 금덩어리가 있으니 파서 쓰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믿는다면 아무리 땅이 깊어도 그것을 파서 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래 지닌 무한하고 절대적인 보배는 마당 안의 금덩어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보배입니다. 이 처럼 우리는 보배산에서 살고 있
음을 바로 알아 보배를 바로 찾아 써야 하겠습니다.
성철스님 법어집
영원한 자유
부록
1.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가지 사례
큰스님께서 동서고금의 여러가지 실례를 들면서 자세하게 윤회에 대
한 법문을 하셨습니다만, 좀 더 과학적이며 현실적인 윤회의 확증을 알
고 싶어하는 독자들을 위해, 그에 관한 두 책 -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
가지 사례] 와 [한번 이상 사는가?] - 의 내용을 짤막하게 간추린 것을
부록으로 엮어 소개합니다.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 가지 사례]는 미국의 이안 스티븐슨교수가 세
계 여러 나라에서 윤회에 대한 사례를 1973년까지 약2,000건을 수집 연
구한 것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스무 가지를 수록한 것입니다. 이 책
은 근년에 우리나라에서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아이들 上,下]라는 제목
으로 출판되어 있습니다.
[한번 이상 사는가?]는 영국 BBC방송의 프로듀서인 아이버슨 씨가 지
은 책입니다. 그는 브록샴 씨가 소장하고 있던, 400여명에 이르는 사람
들의 전생기억에 대하여 조사 연구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여섯 번의 전
생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에반스 여사의 전생을 추적 조사하여 윤회
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내용을 기술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세
번의 전생만 실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윤회하는 인생을 이해하여 이웃과 화목하며, 모든 미망
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삶을 가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1.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가지 사례
제 1 화 전생의 춤을 추는 스완라타
불교의 발생지이며 힌두교를 믿고 있는 인도에는 종교적으로 전생이
나 윤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그에 대한 조사가 조직적으로 이
루어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이안 스티
븐슨 교수가 직접 조사한 사례들이다.
첫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스완라타 미슈러는 1948년 3월 2일 마디아
프라디슈 주(州)의 샤푸울에서 태어났다.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그녀를
만난 것은 그녀의 나이 스무세살 때였다. 1971년 11월의 어느 날, 마디
아 프라디슈 주의 한 지방도시 중류 가정집 응접실에서 스완라타가 노
래를 부르며 추는 춤을 보았는데 곁에는 이 집의 주인인 스완라타의 아
버지도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춤의 율동에 따라서 벵골어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벵골 지방의 가을추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스완라타가 처음으
로 이 춤과 노래를 보여준 것은 그녀가 대 여섯살 때였다. 그런데 춤을
추지 않고 노래만 생각해 내거나 노래는 부르지 않고 춤만 추거나 하지
는 못하고, 반드시 양쪽을 함께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스물세살의
스완라타는 젊은 나이로 챠타라푸울 지방대학의 식물학 강사로 재직하
고 있지만 벵골어는 한 마디도 이해하는 것이 없었다. 인도에는 열 가
지도 넘는 언어가 있고 그녀는 힌두어(語) 지역에서 자라났기 때문이
다. 결국 스완라타는 다섯살 때부터 이 노래와 춤을 추어 왔지만, 전생
기억의 상태가 아니면 이것을 전혀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에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번째 특징으로 그녀는 두개의 전생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
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벵골 지방과 마디아 프라디슈 주의 두 곳에서
두개의 서로 다른 전생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 이 벵골의 춤은 물론 벵
골 지방에서 생활한 전생에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특징은, 대개의 경우 열살쯤되면 전생기억을 잊어버리는 것과 달리, 성
장한 후에도 전생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스완라타가 마디아 프라디슈 주에서 살았던 '비야'로서의 전생 이야
기는다음과 같다.
스완라타는 1948년 3월 2일 샤푸울에서 태어났다. 세 살 반쯤되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가는 도중에 카트니 시(市)를 지나가다가 스
완라타는 문득 "우리 집 쪽으로 가줘요"라고 말했다. 이들이 카트니 시
내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차를 마셨는데 이때에 또 그녀는 자기 집에 가
면 더 맛있는 차를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아버지 미슈러 씨는 딸아이의 말에 난처해졌지만 별로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스완라타는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
은 전생에 카트니 시의 파사크 집안의 딸인데 이름은 '비야'라고 하며
결혼해서 아들이 둘 있었다고 말하더니 그들의 이름을 대는 것이었다.
스완라타는 가끔씩 이렇게 전생 이야기를 하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행동은 퍽 평범한 아이였다. 그래서 부모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몇
년을 지냈다. 그러는 동안에 그녀가 대여섯살쯤 되었을 때 앞에서 말한
춤을 처음으로 가족들 앞에서 추어 보였다. 그리고 춤과 함께 벵골에서
의 전생에 대해서도 단편적인 기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58년, 그녀가 열살 때, 가족이 챠타라푸울 시(市)로 이사를 했는데,
이때 우연한 계기로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이 커다란 화제거리가 되었다.
스완라타는 어버지와 함께 어그니호트리 교수댁을 방문하였다. 교수
의 부인이 다과를 들고 응접실에 들어왔을 때 지금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스완라타가 갑자기 얼굴을 들더니 부인을 지긋이 바라보는데 얼굴
에는 반가운 기색을 담은 표정이 떠올랐다. 부인은 괴이하게 생각했다.
인도에서는, 특히 계집아이는 자기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는 친밀감을
보이지 않도록 엄격히 교육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완라타가 갑자기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어요. 나는 카트니 근방에 살던 파시크가(家)의
비야예요."
사람들은 놀랐다. 입을 다문 채 그녀를 응시하는 부인에게 스완라타
는 이어서 말했다.
"부인과는 티롤러 촌(村)의 결혼식에 함께 갔었지요…."
교수 부인은 비야와 함께 시골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일과 그때 화장
실을 찾느라고 애먹었던, 아주 오랜 옛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인도
의 농촌에는 화장실이 집 밖에 있는데 도시에서 자란 두 사람은 집 안
에 화장실이 있는 줄 알고 온 집 안을 찾아 헤매었던 것이다.
스완라타의 부친은 이 사건이 있은 뒤로 딸이 하는 말의 진실성을 인
정하고 그녀가 하는 말들을 문서로 기록해 두었다. 1958년 9월의 일이
다. 스완라타의 나이로 보면 세살 반에서부터 열살 사이에 그녀가 한
말들이다.
"전생에서 그녀는 카트니 시의 파사크 가의 딸 비야였다. 두명의 아
들이 있고 이름은 크리슈나 다타와 시빈 다타라고 했다. 파사크 가의
주인은 하리 라르 파사크이다. 집에는 자동차가 있었다. 목의 병으로
죽었다. 자바르푸울의 나피 가(街)에 있는 S.G. 바브랫드 의사에게서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이 본격적으로 입증되기 시작한 것은 이
사건이 있은 지 반년 후인 1959년 3월에 이 방면의 연구가인 버너어지
에 의해서이다. 그는 스완라타에게서 전생 이야기를 듣고 카트니 시의
파사크 가를 찾아나섰다. 오직 스완라타의 말만을 의지하여 찾아낸 것
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파사크 가는 백색 건물로 문은 검은색이고 쇠빗장이 걸려 있다. 앞
문에는 석판(石板)이 깔려 있다. 집 뒤에는 여학교가 있고 가까운 곳에
있는 석회 공장과 철도 선로가 집에서 보인다. 파사크 가에는 석회를
바른 방이 넷 있고, 다른 방은 별로 고급으로 꾸며놓지 않았다."
버너어지 씨가 파사크 가를 찾아갔을 때 그는 비야의 제일 큰 남동생
인 프라서드 파사크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버너어지 씨는 스
완라타가 말하던 전생의 이야기들이 그녀 자신의 전인격(前人格)이라는
비야의 생애와 꼭 부합하는 것을 확인했다. 실제로 비야는 카트니 시
북쪽에 있는 도시 마이하르에 사는 친타미니 판데이라는 사람에게 시집
갔으며 1939년에 사망한 것 등을 프라서드 씨로부터 알아냈다.
진정 이것은 믿기 어렵지만 스완라타가 세살 반 무렵부터 얘기했던
것은 모두 정확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버너어지 씨는 파사크가를 방문
해서 스완라타의 전생의 기억이 정확하고 상세한것을 보고는 그 진실성
을 확증하기 위해서 한 가지 실험을 시도 하였다. 이 해 여름 프라서드
파사크 씨는 아무런 예고없이 챠타라푸울의 미슈러 씨를 방문했다. 스
완라타는 부친 미슈러와 함께 이 낯선 방문객과 만났다.
스완라타는 "하리 라르 파사크" 하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은
비야의 부친의 이름과 프라서드의 이름을 뒤섞은 것이었다. 프라서드가
말이 없자 그녀는 정확하게 그를 기억한 듯 다시 '바브'라고 불렀다.
그것은 가족끼리 부르던 그라서드의 애칭이었다.
카트니에 돌아온 프라서드는 자기가 겪은 일들을 마이하르의 비야의
유가족에게 전했다. 그러고서 약 한달 뒤에 비야의 남편과 아들을 비롯
한 열한 명의 사람들이 챠타라푸울의 스완라타를 만나러 갔다. 스완라
타는 그곳에 찾아온 사람들을 한 사람씩 지적하면서 모르는 사람은 분
명히 모르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남편인 친타미니의 차례가 되자그
녀는 부끄러운 듯한 태도로 "당신을 카트니와 바이하르에서 알고 있다"
고 말했다. 그리고 친타미니가 40여년 전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 주자 그중에서 소년 시절의 친타미니를 가리켰다. 또 아들
을 보자 "내 아들 줄리"라고 정확히 이름을 대어 지적했다. 이전에는
기억이 혼란해서 아들의 이름을 크리슈나 다타라고 불렀지만 이 때에는
아들을 보고 정확하게 기억을 되살렸던 것이다.
이 만남에서 스완라타는 한 가지 사건을 말했다. 그것은 비야가 아니
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으로, 남편인 친타미니가 자기가 상자 속에 넣
어둔 돈 1,200루피를 훔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도난 사건은 비야
와 남편 이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런 놀라운 만남이 있었던 같은 해 여름, 스완라타는 비야의 생애와
관련이 있는 고장으로 옮겨가면서 전생 일을 확인해 보였다. 먼저 카트
니의 파사크 가에 갔을 때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형제들은
물론이고 친척, 가정부 등 모두 스무 명 남짓한 사람을 알아보았던 것
이다. 그리고 비야 생전의 사실 두 가지를 그녀 스스로 질문함으로써
과거의 사실을 알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파사크 가의 집
밖에 달려 있던 난간인데 이것은 비야가 죽은 뒤에 집을 개조하면서 없
어졌다. 또 하나는 마당에 있던 나무에 대해서 "왜 그 나무를 베었는
가?" 하고 물은 것이었다. 그 나무는 이, 삼 개월 전에 태풍으로 뿌리
채 뽑혀버려서 아무도 거기에 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파사크 가에서 '바다'라는 과자를 내놓자 그녀는 "예전
에 잘 먹던 과자다"라고 했다. 사실 비야가 좋아한 과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챠타라푸울의 미슈러가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과자였
다.
또 바이하르의 시댁에서는 마흔 명쯤 되는 사람들 중에서 아는 사람
을 지적해냈다. 또 비야의 방과 강으로 목욕가는 길을 알고 있었고, 비
야보다 먼저 사망한 시누이의 이야기도 했다. 티롤러 부락은 비야가 죽
기 직전에 있던 곳이데, 여기서도 비야가 죽은 방을 가리키는 등 비야
생전에 있었던 집안 일에 대해 질문하기도 해서 전생기억의 정확성을
보여주었다.
한편 앞에서 말한 춤과 노래는 벵골지방에서의, 스완라타의 또 하나
의 전생 시절에 배운 것이었다. 그녀가 벵골의 전생 이야기를 시작한
것도 비야로서의 전생기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과 같은 서너살쯤의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두개의 전생기억이 서로 뒤섞여 혼동되
는 듯 싶더니 차츰 성장함에 따라서 그녀는 두개의 기억을 따로따로 구
별하게 되었다. 벵골에서의 스완라타는 다음과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
다.
"앗삼 지방 지렛트에서 생활하였고 이름은 카무렛슈였다. 그것은 비
야의 다음 생애였다. 아홉살까지 살다가 미슈러 가에 환생했다."
곧, 스완라타의 전생이야기에 의하면, 그녀의 카무렛슈로서의 전생은
비야로서의 전생과 현생의 스완라타와의 중간에 끼어 있는 약 9년 동안
이 되는 셈이다. 곧, 다시 말해 비야의 죽음이 1939년, 스완라타의 탄
생이 1948년임을 생각하면 그 중간의 9년간이 카무렛슈의 생애인 셈이
다. (비야의 죽음이 1939년인 것은 버너어지 씨가 파사크 가를 방문한
1959년 3월에 비로소 확인된 것이다.)
중간적 전생이 9년 정도라는 그녀의 주장은 실제의 사실과 잘 부합된
다. 또 카무렛슈로서의 전생에 대해서 그녀가 말하는 것은 비야에 비하
면 훨씬 단편적이지만, 그래도 지렛트 지역의 지리적특성에 대한 그녀
의 말은 현실적인 지렛트의 지리적 상황과 잘 부합된다. 그러나 유감스
럽게도 카무렛슈가 지렛트의 어느 집의 누구였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
하고 있다. 앗삼 주의 지렛트 지구가 1947년 인도의 파키스탄 분할에
의해 현재는 방글라데시에 편입되어 조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
지만 분명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스완라타의 춤'은 벵골 지역의 앗삼
주에있는 지렛트에서의 그녀의 전생에 의거한 춤이라는 것이다. 스완라
타가 보통 사람들이 노래나 춤을 배우는 것과 같은 방법, 곧, 통상적인
경로를 통해서 '스완라타의 춤'을 배우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
이다.
스완라타가 자라온 마디에 프라디슈 주는 힌두어를 쓰는 곳으로서 벵
골지방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그러나 그녀가 춤을 출때에 부르는 노래
는 벵골어인데 그녀의 양친은 물론이고 친지중에도 벵골어를 아는 사람
은 없었다. 그녀의 노래가 벵골어라는 것이 판명된 것은 1963년으로 열
다섯살 때이다. 벵골 출신의 파르 교수가 그 춤을 보고 이를 기록한 후
조사해 보니 그녀가 부르는 세개의 노래 중 두개는 벵골 출신의 시성
(詩聖) 타골의 시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노래는 인도에서 1940년 이
후 영화, 라디오, 레코드에 사용된 적은 있었지만, 스완라타는 열살이
될 때까지 영화관에 간 적이 없었다. (그녀가 처음 춤을 보여 준 것은
대여섯살 때의 일이다.)
파르 교수는 그 뒤 타골 자신이 설립한 학교를 방문했을 때 스완라타
가 부르는 노래와 춤의 일부분을 보게 되었는데 그 곡조나 춤이 그녀가
하는 것과 꼭 같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학교에서는 지금까지도 매
년 봄의 축제가 열리고 있고 그 때에는 스완라타의 춤의 일부분이 소녀
들에 의해서 연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지
렛트에 살고 있을 때 벵골어의 노래와 춤을 알고 있는 친구로부터 배웠
다"고 하는 말은 그녀의 말대로 전생에 지렛트이 카무렛슈라면 납득이
가는 이야기이다.
현세의 스완라타가 살고 있는 미슈러 가(家)와 전생의 비야가 살았던
파사크 가(家)의 양 집안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진 때로부터 2년이 지난
1961년, 스완라타가 열 세살일 때,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 때 전생 일을 회상하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파사크의 가족에 대해 강한 친밀감을 보이고 그들과 헤어질 때나 만날
때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비야의 아이들에 대해서는 '어머니 비야'
로서의 태도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미 장성한 서른다섯살의 아들과
열세살의 어린 어머니, 이는 세상에서도 진기한 모자간인 것이다. 그러
나 그 자리에 미슈러 가의 사람들이 있는 경우에는 그녀는 자신의 태도
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미슈러의 가족들에게도 애정을 갖
고 있었다. 스완라타의 경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열살쯤 되면 전생기억
이 차츰 희미해지는 많은 다른 사례들과는 달리 그녀의 기억이 오래 유
지되었다는 점이다. 1971년에도 '스완라타의 춤'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1973년 5월 그녀는 결혼한다고 했다.
그녀 스스로 두개의 생애에 대한 기억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난 생애의 일에 생각히 몰입되어 있을 때에는 현재의 일은 잊어버
립니다만 그러다가 곧 현재로 되돌아옵니다. 지금은 갖고 있지 않은 뭔
가 특별한 것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에 나의 마음에는 그것과
관련이 있는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서 전생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는 것이 나를 만족시켜 줍니다. 요컨대 과거의 일을 생각하게 하는 커
다란 요소는 그 시점에서의 상황 조건인 것입니다."
부록
1.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가지 사례
제 2 화 소생한 후 딴 인격으로 바뀐 자스비아
1954년 인도 무자파르나갈 지방의 라스르푸울이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당시 마을에는 천연두가 나돌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
다. 세살 반 되는 자스비아라는 아이도 이 병으로 죽었다. 아이가 죽은
시간이 너무 늦은 밤이라 그 부모는 시신 앞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는데
시간이 흘러서 한밤중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들의 유해를 지켜보던
두 사람은 문득 이상한 기색을 느꼈다. 작은 유해가 희미하게 살짝 꿈
틀거린 것이다. 그러고서 또 유해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차츰 꿈틀거리
는 동작이 분명해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튿날 아침에는 라르의
아들 자스비아는 완전히 되살아났다.
이 사례를 조사한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혹시 죽지 않은 것을 잘못
알고 그런 것이 아닌가 하여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분명히 자스비아는
호흡이 정지되고, 입이 열려져 있었고, 항문과 신체가 싸늘하게 식어있
었다고 한다. 그러니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확실한 것이다.
'부활'한 지 몇 주일이 지나 몸이 회복되어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자
스비아는 부모를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을 하였다. "나는 바라문이다. 이
집의 음식은 먹을 수 없다. 바라문 식으로 조리한 음식이 아니면 안 먹
겠다"는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이나 옷을 가리킬 때에
도 바라문계급만이 사용하는 고상한 말로써 하였다. 무엇보다도 부모를
놀라게 한 것은 자기는 자스비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상카 소
바 라므 차기이고 베디 마을에 산다. 그리로 데리고 가라"고 말하는 것
이었다. 계급과 다른 계급과는 식사 습관에서 조리법까지가 다르게 되
어 있는데, 그는 차기 가(家)의 사람으로서 바라문계급이니 바라문 식
으로 조리를 한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들이 계속 음
식을 먹지 않자 그의 부친은 하는 수 없어 한 동네에 사는 바라문 가에
요리를 부탁하였다. 자스비아는 결국 가족들의 강압에 의해서 함께 식
사를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2년 가까이 바라문 가에서 조리한 음식을
먹었다.
자스비아는 세살 반에서 예닐곱살이 될 때까지는 자라는 동안에 라므
로서의 생애를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곧 자기는 바라문 가문으로, 베디
마을의 샹카의 아들 소바 라므이고 아내는 모르나 마을 태생이며 아들
도 있다고 하였다. 집앞에는 피이 팔나무가 있고 마을에는 암거(暗渠)
의 배수로가 있다고 하였으며,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도 열심히 이야기
하였다. 어느 결혼식에서 베디 마을로 돌아오는 도중 우차에서 떨어져
머리에 부상을 입고 그로 인해 죽었다는 것이다. 곧 결혼식장에서 독이
든 음식을 먹은 탓에 현기증이 심해져 우차에서 떨어졌는데, 자기에게
서 돈을 꾸어간 사람이 빚을 면하기 위해 자기를 죽이려 한 것이라며
그 이름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자스비아의 부모는 그의 말이 터무니없
는 소리라고 여기고 라므의 생애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자스비아가 일곱살이 되던 1957년의 일이다. 샤모스크라라
는 바라문계급의 여인이 5년 만에 친정이 있는 이곳 라스르푸울 마을에
다니러 왔는데, 그녀는 자스비아가 다섯살이 될 때까지 바라문 음식을
만들어주던 사람과 아는 사이였다. 거기에서 자스비아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다. 샤모는 자신이 베디 마을로 시집을 갔기 때문에 베디 마을의
이야기를 한다는 아이에 흥미를 가진 것이다. 샤모가 방문했을 때 자스
비아는 집에 있었다. 문으로 들어오는 샤모를 보자 자스비아는 "큰어머
니!"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샤모의 남편인 닷트 스크라는 베디 마을의
샹카 차기의 형이었다. 그러므로 자스비아는, 적어도 그의 말에 의하
면, 차기의 아들 라므였던 것이니 그의 말은 맞는 것이다. 얼마 후 베
디 마을로 돌아온 샤모는 자스비아라는 기이한 아이가 라스르푸울에 있
다는 것을 그녀의 남편인 닷트 스크라와 라므의 부친 샹카 차기에게 전
했다. 그들의 놀라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라므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바 라므
는 결혼식장에서 돌아오는 도중 우차에서 떨어져 입은 상처로 죽었다.
그것은 1954년 5월 22일이었다. 그에게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자스
비아는 라므로서의 사망 날짜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밖의 것은 정확하
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단순한 사고사(事故死)로 믿고 있었던 그 죽음
을 독살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이리하
여 샹카가 가족을 데리고 며칠 뒤에 라스르푸울에 옴으로써 베디 마을
의 차기가(家)와 라스르푸울의 라르 가(家)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처음 샹카네가 라스르푸울에 와서 자스비아의 집 가까이에 왔을 때 자
스비아는 집앞에서 놀고 있었다. 문득 길 저쪽을 바라보던 그는 표정이
싹 변하더니 서둘러 집안으로 뛰어갔다.
"뭘 그렇게 허둥지둥해?"
그의 형이 물었다.
"응, 큰일났어. 나의 아버지가 왔어, 베디 마을에서 온 거야."
자스비아는 숨을 헐떡이고 목소리가 들떠서 대답하고는 집안으로 달
려갔다. 그러고는 어머니에게 급히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오시니까 얼른 바라문의 식사를 준비해 주어요!"
이때 샹카와 함께 라스르푸울을 방문한 이는 라므의 동생과 숙부였는
데 자스비아는 이들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또 전생의 가족의 이름을 하
나하나 대더니,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바르슈와르다"고 했다. 아들이
있었다는 이미 수년 전부터 말했지만 이름을 말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
었다.
그런 뒤에 차기 가(家)에서는 여러가지로 노력하여 자스비아를 베디
마을로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다. 자스비아의 부모는 그가 차기 가의 사
람들에게 보인 친근감을 보고는 아들을 차기가에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그의 베디행을 어렵게 승락하였다. 자스비아는 여러 날 동안
차기 가에 머물면서 그 가족들을 분간해보였다. 농장으로 안내되어서는
구획이 많이 나있는 밭들 속에서 정확하게 차기 가의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아들인 바르슈와르에 대해서는 특히 강렬한 애정을 표시하면서
한 침대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바르슈와르가 학교에 가고 안보이자 아
들이 없어진 데에 대해 불평을 하였다. 1957년의 첫방문 이후로 자스비
아는 베디 마을에 가기를 퍽 좋아하였고 다시라르 가(家)에서 데리러
오면 언제나 울면서 반항하였다.
자스비아는 그가 세살 반이었을 때, 한 때 죽어 있던 동안에 어떤 일
이 일어났던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라므)는 육체를 상실하고 있는 동안에 영계(靈界)에서 한 성자
(聖者)를 만났는데, 그 성자가 나에게 라르의 아들 자스비아의 육체 속
에 숨으라고 말했다."
제 3 화 전생의 직업에 집착하는 피아모드
이야기의 주인공인 피아모드 샤르마는 1944년 10월 11일 모라다밧드
에서 남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작은 도시인 비사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라르 샤르마는 대학교수이다. 그가 두살 반쯤 되었을 때 어느
날 부엌에 들어오더니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혀로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자기 음식은 만들어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였다. 왜냐고 어머니가 물
으니까 모라다밧드에 부인이 있어서 그녀가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점차로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뒤 그가 세살에
서 다섯살 사이에 말한 것을,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피아모드는 전생에 모한 브라더즈 회사의 직원으로서 모라다밧드에
서 비스켓과 소다수를 파는 큰 상점을 갖고 있었는데, 아내와 아들 넷
그리고 딸 하나가 있었으며, 또 모한 브라더즈는 더욱 번창하고 있어서
생활도 호화롭고 좋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가정이 너무 검소한
데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피아모드는 혼자 놀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마당에서 흙을 반죽해서 과
자처럼 만들어 놓거나 벽돌을 쌓아서 집처럼 만드는 장난밖에 하지 않
았다. 그에게는 이 흙으로 만든 과자는 비스켓이고 벽돌집은 상점이었
다. 때로는 흙으로 만든 비스켓과 물을 가져와서 부모에게 "자 어서 잡
수셔요"라고 할 때도 있었다. 이 때의 물은 그냥 물이 아니고 차(茶)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부모를 곤란하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것은 목욕과 카아드(요구르트와 비슷한 것으로 이유기에 먹는 음식)를
아주 싫어한다는 것이다. 목욕뿐만 아니라 물에 들어가는 것도 질색하
며 싫어하였다. 강제로 목욕을 시키려고 하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필
사적으로 거부했다. 카아드는 더운 지방인 인도사람의 중요한 영양원이
어서 이것을 싫어하는 인도인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카아드 거부증
은 단순히 먹기 싫다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병적인 공포라고 말할 수
있었다. 또 그는 가끔씩 영어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하였다. 샤르마 교
수의 가정에서는 힌두어를 쓸 뿐 영어를 쓰는 일은 없었다. 특히 그가
자주 쓰는 말은 바스 터므[목욕조], 베이커리[제과점], 타운홀[공회당]
- 그는 '도운 홀'이라고 발음했다. - 의 세 가지 말이었다.
피아모드가 네살 반이 되던 1949년 초여름에 그의 아버지는 동료인
그라셔드 교수에게 무심코 아들의 이상한 언행을 이야기했었다. 그 얼
마 뒤에 이 교수댁에 그의 친척이 다니러 왔고, 교수는 이 친척에게 피
아모드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 사람이 피아모드가
전생에 살았다는 모라다밧드에 살고 있다는 점이 교수의 입을 가볍게
했는지도모른다. 교수의 친척은 우연히도 모한 브라더즈라고 불리는
모라다밧드의 메헤라 가(家)와도 아는 사이였다. 그는 모라다밧드로 돌
아오자 곧 메헤라 가를 찾아가서 비사우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주인인
모한 메헤라에게 들려주었다. 그 아이의 이야기는 모한의 남동생인 파
아마년드의 경우라면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는 1943년 5월 9일 복막
염으로 죽었는데, 평소에 좋아하던 카아드를 과식한 탓으로 만성 위장
병이 악화되어서, 그 치료를 위하여 입욕요법(入浴療法)을 하던 중에
죽은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피아모드가 자기는 "카아드의 과식으로
병이 되었고, 그리고 욕조 안에서 죽었다"고 하던 말과 꼭 일치하는 것
이었다. 그리하여 어린 피아모드가 자신도 결코 카아드를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게도 "몸에 해로우니 먹지 말라"고 충고한
것이라든지, 목욕을 하지 않으려고 병적인 공포를 보인것 등도 전인격
인 파아마넌드의 죽음의 상황과 견주어 보면 잘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라하여 그 해 여름 메헤라 가에서는 파아마넌드의 사촌형이 비사우
리의 샤르마 가(家)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마침 피아모드는
집에 없어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후 곧 피아모드는 그의 아버
지와 사촌형과 함께 모라다밧드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들이 모라다밧드 역에 내렸을 때 피아모드는 마중나온 그의 사촌형
을 알아보고서 인사하였다.
"아, 저카라므 챤드 형, 난 파아마넌드야!" 그는 처음으로 자기의 전
생 이름이 파아마넌드라고 하였다. 이들은 곧 마차를 타고 1Km쯤 떨어
진 모한 브라더즈의 비스켓 상점으로 갔다. 피아모드는 그 사이의 꾸불
꾸불한 길을 잘 지시하였으며, 상점 근처에 있는 커다란 공회당을 지날
때에 "도운 홀"이라고 하면서 가게에 가까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상
점 안으로 안내된 그는 두 가지 일로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根다. 하나
는 소다수를 만드는 복잡한 기계장치를 정확히 설명하였는데, 그를 시
험할 목적으로 일부러 연결호스를 모두 풀어두었던 것이다. 또 그는 상
점을 한바퀴 돌아보고는 주인이 앉도록 해 둔 '가데이'라는 자리가 없
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그의 사망후에 상점을 개조하면서 없앤 것이다.
이어서 그는 메헤라 가의 전생의 가족들을 알아보았고 각자의 이름도
말하였다. 그는 방가운데 앉아서 전생의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
이 매우 즐거운 듯이 보였다. 스무살이 넘는 아들들이 그를 "피아모드"
라고 부르면 "나를 피아모드란 이름으로 부르는 게 아니야, 아버지라고
불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가끔씩 모라다밧드에 가서 메헤라 가의 가족들과 만날 때
에는 언제나 파아마넌드에 적합하고 어울리게 행동하였다. 그가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까지도 전생의 딸이 자주 찾아오지 않으면 슬퍼하였다.
어린 시절의 피아모드는 지능이 우수한 아이로 여겨졌지만 차츰 다른
동급생보다 뒤떨어지게 되었다. 진학도 뜻대로 되지 못했고 스물다섯살
이 되던 1969년에는 주(州)의 임시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상점 경영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당신의 인도에서는 시대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 4 화 전생의 어머니에게 환생을 예언한 프라카슈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아스라로 통하는 연변에는 코시카란과 쳇다
라는 두 도시가 겨우 10km 정도의 간격으로 차례로 나타난다. 인구 구
천의 작은 도시 쳇다에서 1951년 8월 프라카슈는 태어났다. 그는 네살
반쯤 되어서부터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
나 밖으로 나가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코시카란 사람이고
이름은 니르말이라 한다." 그러면서 코시카란으로 데려다 달라고 강경
하게 부모를 졸라대는 것이었다. 한밤중에 밖으로 뛰쳐나가서 거리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것도 코시카란에 가고 싶다는 표현이었다.
그가 너무도 강경하게 졸라대니까 어머니는 시동생 다르에게 그를 코
시카란으로 데리고 가보라고 했다. 한번 데리고 가주면 다시는 그런 짓
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르는 푸라카슈를 데리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이때 잘못해서 코시카란의 반대 방향인 마스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러자 프라카슈는 삼촌의 잘못을 곧 알아채고 울면
서 길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서
코시카란으로 갔다. 그날 프라카슈가 말한, 코시카란의 아버지의 상점
은 '아버지'가 부재중이어서 닫혀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얼마 뒤에 프라카슈가 말한 그 상점의 주인인 보라나스의
귀에 자신을 찾아온 쳇다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 들어갔다.
프라카슈는 이전보다 더 강경하게 자기를 코시카란으로 데려다 달라
고 우기며 또 니르말로서의 생애에 대하여도 상세하게 이야기하게 되었
다. 그가 이 무렵에 말한 것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코시카란의 사람으로 이름은 니르말이다. 아버지 이름은 보라
나스이고 상점을 네 개 갖고 있다. 곡물가게, 옷가게, 잡화점 등이다.
그리고 누이의 이름은 타라다." 그리고 그밖에도 몇 사람의 이름을 말
하였다.
프라카슈의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자신을 니르말이라고 불러달
라고 요구했고 프라카슈라고 부르면 대답을 안 하는 때도 가끔 있었다.
또 그는 전생의 집은 좋은 벽돌집이었는데 지금 집은 흙벽집이라 옹색
하다고도 했다. 또 지금의 어머니는 자기 어머니가 아니라고도 하였다.
프라카슈는 긴 못을 하나갖고 있었는데, 코시카란에 있는 자기 금고의
열쇠라는 것이었다.
다섯살이 되면서부터 그런 전생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되어갔지만, 아버지의 억압이 심했기 때문에, 실제로 눈에
띄는 행동은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1956년부터 5년 동안은 평화로운
상태로 지나갔다.
그러다가 1961년 초여름이 되었을 때였다. 보라나스는 상업상의 볼일
로 딸 메모를 데리고 쳇타 시에 왔다가 용무를 끝내고 코시카란으로 가
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이들 쪽을 향해 오는
한 소년이 있었다. 열살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잠시 후 그들 곁에
다가와 보라나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 난 니르말이예요. 아버지는 코시카란에서 샤쓰를
팔고 있는…."
보라나스의 표정이 싹 변했다. 분명히 그의 잡화점에서는 샤쓰를 팔
고 있다. 그러나 그가 표정이 변한 것은 좀더 이상하고 기이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5년 전인 1956년에 쳇다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찾아왔
더라는 이야기를 상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10년 전
의 이상한 광경을 생각해 내고 있었다. 1950년 4월 보라나스의 아들 니
르말은 열살 때 천연두에 걸려서 죽었는데, 죽기 전에 니르말은 헛소리
를 하는 상태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당신은 나의 어머니가 아니다. 당신은 쟈트계급의 여자다. 나는 나
의 어머니에게로 간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으로 마스라와 같은 방향에 있는 쳇다 마을 쪽을
가리켰다. 니르말은 물론 쳇다라고 도시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방향
은 분명히 쳇다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서 몇 시간 뒤에 그는 죽
었다.
지금 프라카슈가 '코시카란의 아버지'라고 했을 때에 보라나스는 바
로 그 광경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는 그 광경을 마음속에 떠올리면서
곁에 있는 딸 메모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너의 오빠다." 소년은 메모
의 손을 잡았다. "비로마, 내 여동생!" 이라고 하며 프라카슈는 메모를
향헤 니르말의 누이 타라와 형 자레이슈의 일도 물었다. 그러나 지금
프라카슈의 말 중에서 메모의 이름만은 정확하지 않다. 비로마는 실은
니르말의 또 다른 여동생의 이름이었다.
보라나스는 프라카슈와의 이 우연한 만남을 집에 돌아가서 가족들에
게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여러 날 뒤에 보라나스 제인 가(家)의 사람들
이 바아슈나이 가(家)를 찾아왔다. 제인 가에서온 세 사람이 바아슈나
이가에 도착하자 입구로 달려나온 프라카슈는 "아아, 타라 누님" 하면
서 처음 보는 젊은 여성에게 달라붙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이들
이 응접실로 안내되자 프라카슈는 타라의 무릎에 올라앉아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니르말의 어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은 내 어
머니다." 그리고 열 대여섯살쯤 된 한 소년에게 말했다. "너는 내 동생
데베드라!" 사실 찾아온 세 사람은 니르말의 모친과 누이와 동생이었던
것이다. 프라카슈는 무척이나 기뻐하며 들떠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코시카란으로 데리고 가달라고 울며 졸라댔다. 결국에는 우는 프라카슈
를 달래기 위해 할 수 없이 코시카란에 가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프라카슈는 그의 아버지 브리지랄 등과 함께 코시카란으로
가게 되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보라나스의 집까지는 약 1Km의 거리로 복
잡하고 옆골목이 많은 길이지만 프라카슈는 일행의 앞에 서서 당당히
보라나스의 집까지 도착하였다. 이리하여 전생의 가족과 이웃 사람들을
만난 코시카란은 여러가지의 전생에 대한 지식을 나타내 보였다.
그 때까지 그가 말한 것은 모두 그대로 사실임이 판명됨은 물론이고
그밖에도 그의 전생 지식은 정확했다. 니르말의 생존중에는 아직 태어
나지 않았던 여동생 메모의 이름을 모르고 그 위의 여동생인 비르마와
혼동해서 이름을 부른 것이나 제인 가의 개조한 대문 앞에 머물러 서서
망설였던 것은 모두 니르말 생존 중의 지식을 그가 갖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지금은 가게를 하고 있지 않는 이웃사람들의 이름을 부르
면서 알아 보았고 그들의 가게에 자주 물건을 사러 갔다고도 말했다.
또 그는 니르말이 죽을 때 있었던 방에 와서는 그가 죽은 방이라고 했
고, 금고가 있는 방에 와서는 그 금고 속에 있는 니르말의 서랍을 지적
했다. 금고 안에는 여러 개의 서랍이 있어서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서
랍을 가지고 있었고 저마다 열쇠도 가지고 있었다. 프라카슈가 어렸을
때 말한 못은 이 금고 서랍의 열쇠였던 것이다.
그 뒤 프라카슈는 스무살이 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세일즈맨으로 일하
였다. 이 때에도 한달에 한 두번은 코시코란에 다니고 있었다. 이전에
기억했던 것을 아직까지 기억해낼 수 있다고 한다.
제 5 화 목에 칼자국 흉터를 가진 샹카
라뷔 샹카는 1951년 7월 카나우지 시(市)에서 태어났다. 그는 테어나
면서부터 목에 흉터가 길게 나 있었는데 마치 칼로 입은 큰 상처가 아
문 것 같아보였다. 이 아이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두 세살 때부터
자기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전생에 이발사 제게스
와르 프라셔드의 아들이었다고 했다. 그는부모에게 장난감을 사 달라
고 할때는 언제나 "전생에 그 장난감을 갖고 있었어. 그러니 그걸 갖고
싶다"고 하면서 사 달라고 졸랐다. 그가 전생에 가지고 있었다는 장난
감은 용수철이 달린 공, 크리슈나왕(王)의 장난감 상(像), 목제 코끼
리, 장난감 권총 등이었다.
프라셔드의 아들이었던 그는 죽을 때의 상황에 대해 살해되었다고 분
명히 말하고 있다. 전생에 그는 목이 잘려 살해된 뒤에 매장되었다. 살
해되기 전에 구우바스를 먹고 있었으며 강가로 끌려가서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살인범의이름까지 말했다. 목 주위에 있는
모반(母斑)은 전생에 목이 잘리울 때 생긴 상처 자국이라고 말했다.
샹카가 전생 이야기를 시작한지 1년이 지난 1955년 초여름, 그의 나
이 네살이 되기 조금 전에, 프라셔드가 샹카가 지금 살고 있는 구프타
가(家)를 찾아왔다. 샹카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샹카의 아버지
구프타는 샹카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여 프라셔드의
부탁을 거절하였다. 그래서 프라셔드는 얼마 후 샹카의 어머니에게 간
청하여 겨우 샹카와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1955년 7월 30일의
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아이는 오다 말고 프라셔드 씨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멈춰 서더니, 잠시 후 그에게 다가와서 무릎에 앉으며 말
했다. "아버지, 난 치팟테이의 학교에서 책을 잘 읽었지. 내 나무접시
는 찬장 속에 들어있고…." 샹카는 첫 대면인 프라셔드씨를 자기의 아
버지로 알아 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치팟테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는 것, 나무접시가 찬장 안에 있다는 것 등의 새로운 전생 지식을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프라셔드 씨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했다. 이런 여러가지 이야기들은 프라셔드의 죽은 아들
믄나의 생애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믄나의 살해사건은 1951년 1월 19일 샹카가 태어나기 6개월전의 일이
었다. 믄나의 시체는 잘려진 머리와 함께 옷만 발견되었다. 믄나는 밖
에서 놀다가 유괴되어 살해된 것으로 보여졌고, 두 사람의 용의자가 나
타났지만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들은 근방에 사는 사람
으로 한 사람은 프라셔드의 친척인 이발사이고, 또 한 사람은 세탁부였
다. 샹카가 전생기억에서 말한 살인범도 이 두 사람이었다. 그라셔드
씨가 샹카를 만나서 직접 들은 구체적 살해 상황은 프라셔드를 만족하
게 했다. 그 뒤에 그는 처음의 용의자에 대한 재 수사를 청구하는 운동
을 시작했다.
한편 샹카는 프라셔드와 만난 뒤에 어머니를 따라서 사원의 재에 갔
다가 거기에서 범인의 한 사람인 세탁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샹카는
즉시에 그를 알아보면서 공포를 나타내었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로 구
프타는 샹카에 대해 더욱 엄중해졌으며, 나중에는 샹카를 집에 두지 않
고 다른 먼 곳에 맡겨버렸다. 집에 두면 상황이 더 나빠진다고 생각했
기 때문이었다. 그의 전생기억은 살인사건을 포함하고 있으니만큼 실제
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샹카는 한때는 범인들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했지만 성장하면서 차츰 그런 감정이 엷어졌고 1969년
이후로는 범인들에 대한 감정이 모두 없어졌다고 했다.
제 6 화 전생의 남편을 섬기는 스크라
캘커타에서 약 60Km 떨어져서 캄바라는 마을이 있다. 스크라는 1954
년 3월에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
은 그녀가 겨우 한살 반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마당에
서 혼자 놀고 있다가 목침만한 나무토막을 집어서 껴안고는 "미누, 미
누" 하며 마치 아기를 달래듯 어루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녀는 베개나
나무토막을 보면 꼭 그것을 껴안고 "미누, 미누" 하였다. 그러더니 차
츰 말을 익히게 되자 전생의 일을 자세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바트파라 마을의 라사라라는 지역에서 '그 사람'과 케토우,
카르나와 함께 살았으며 미누라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영화구경을 갔다 오는 길에 맛있는 요리를 먹은 이야기도 했다.
그러더니 아버지에게 바트파라에 데리고 가 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혼자서도 갈수 있다. 길을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크라의 아버지 K. N. 센 구프라는 철도원이어서 딸아이가 이야기하
는 바트파라를 열차를 타고 자나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캘커타에 가는
도중에 있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그는 바트파라가 실제로 있는 줄은 알
고 있었다. 그는 바트파라 가까이에 사는 직장 동료인 파르에게 스크라
가 하는 말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파르는 바트파라 마을에 그의 친척이
있다고 하면서 라사라라는 지역이 있는지 또 케토우라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고 하였다. 얼마 후에 파르의 회답을 받고 구프라는 스크
라를 데리고 바트파라에 가기로결심했다. 그 회답은 이러했다.
"바트파라 마을에는 분명히 케토우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조카 중에
는 미누라는 아이가 있다. 미누의 어머니 마나는 아이가 어렸을 때 죽
었다. 1948년 1월의 일이다. 그 집 주인은 아므리타랄 차크라바트리라
고 하는 바라문계급이다."
이 회답의 내용에 따라 스크라를 미누의 어머니로 가정해 보면 꼭 들
어맞는 것이다.
이리하여 스크라가 다섯살이 되던 1959년 여름에 파르의 친척이 주선
을 하여 바트파라에 가게 되었다. 그 사실을 차크라바트리 가에도 알렸
다. 스크라의 아버지 구프타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서 스크라의 뒤를 따
라갔다. 그녀는 교차로가 많고 사잇길이 많아 복잡한 길인데도 조금도
헤매는 기색이 없이 전생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 앞에서는 마나의 시아
버지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미누의 삼촌인 케토우와 카르나도 알아보았
다. 딸 미누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축제용 수레인 라스를 넣어두는 건물이 있는 것도 지적해냈다. 라스를
두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라사라'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스크
라의 전생기억에서 특이한 점은, 결혼하여 지낸 수년 동안을 제외하고
는, 마나가 그 생애의 대부분을 함께 보낸 친정 식구들을 거의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가족은 물론이고 그 집을 방문하여서도 물건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 첫방문 이후에도 스크라는 바트파라 마을을 자주 방문하였고, 그
녀의 전생기억도 많이 나타났다. 한번은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
면서 그것을 만들어달라고 자기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리고 식사 때에
마나의 남편인 하리단과 함께 먹게 되면 언제나 그가 남긴 것을 그대로
먹곤 했다. 인도에서는 아내가 남편이 먹고 남은 음식을 먹는 것이 부
부간의 정법(定法)인 것이다. 스크라의, 딸 미누에게 대한 애정은 무척
커서 미누가 아프다는 말만 듣고서도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
며 안타까와했다. 또 스크라는 많은 옷을 넣어둔 옷상자 속에서 마나가
사용하던 세 벌의 옷을 골라내었다. 마나가 쓰던 재봉틀을 보자 반가
운듯이 만지며 눈물을 머금었다. 그 재봉틀은 마나 생전에 열심히 일하
던 것이다.
스크라의 전생기억은 세살에서 일곱살 사이에 가장 또렷하였고, 그
이후로는 차츰 희미해져갔다. 전생기억이 흐려짐에 따라서 하리단을 대
하는 그녀의 태도도 차츰 냉담해졌다. 그래서 그녀가 열두살쯤 될 때까
지는 하리단의 방문을 환영했었다. 그러다가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어린
소녀가 전생의 남편이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열다섯살
때에는 재혼한 하리단이 그의 아내와 함께 왔다 간 뒤에 "저 사람들이
자꾸 가까이 오는 것이 싫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열일곱살이 되자
전생 기억을 상실한 것 같다고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말하고 있다.
제 7 화 전생의 가정에 애착을 가진 마릭카
인도의 베로레 시(市)에 살던 '데비'라는 처녀는 1949년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녀의 언니 곧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는 남편과 함께 폰
테이세리에 살고 있었다. 모우로가시가마니 가(家)에서는 1956년 7월
집의 아랫층을 세를 놓았다. 이 일층에 세든 사람은 모우로가시가마니
의 친척으로 그 집에는 1955년 12월 4일생인 딸 마릭카가 있었다.
마릭카는 자라면서 윗층의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에게 강한 애착을
보이게 되었다. 그녀가 네살이 채 되기 전에, 처음으로 윗층의 모우로
가시가마니의 집에 놀러왔다가 거기서 의자위에 있는 수놓은 쿳션을 보
더니, 그것을 가리키며, "이건 내가 만들었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모
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는, 그것은 여동생인 데비가 만든 것이기 때문
에, "10년도 더 전에 죽은 여자가 만든 거야"라고 그녀에게 일러주었
다. 그러자 마릭카는 고개를 저으며 "그 여자가 바로 나야" 하고 말하
는 것이었다. 또 그녀는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에게 처음에는 '언니'
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동생의 죽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우가시가
마니의 아내는 "아주머니라고 불러라" 하고 마릭카에게 가르쳐 주었다.
마릭카는 이 '언니'에 대한 애착이 더욱 강해지고 기회만 있으면 '윗층
집'에 올라와 놀면서 될 수 있는한 많은 시간을 이 '언니'와 함께 있으
려고했다.
이 '언니'는 마릭카의 행동이나 태도에서 죽은 데비와의 유사점을 많
이 발견했다. 목욕하는 방법이나 당황했을 때의 몸짓같은 것도 닮았으
며, 남의 앞에서 좀 거만하게 걷는 걸음걸이도 닮았다. 또 마릭카의 카
레 요리 솜씨는 나이에 견주어 꽤 상당한 솜씨인 것 같았다.
마릭카가 자기의 전생이 데비였노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지 얼마 뒤에
'언니'는 그녀를 베로레 시에 있는, 자기의 오빠가 살고 있는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 집에서 커다란 사진 앞에 가서는 "나의 부모야"라고
했다. 그것은 분명히 데비의 부모 사진이었다. 집안 식구의 사진을 보
여주니까 그녀는 이집 주인인 오빠를 가리키며 "이건 나의 오빠야, 그
렇지만 지금은 집에 없어"라고 말했다. 실제로 데비의 오빠는 이때 직
장 관계로 먼 곳에 있었다. 얼마 후 마릭카는 데비의 오빠와 만났을 때
에도 이 사람을 바로 '오빠'라고 알아보고서 '언니'와 마찬가지로 강한
애정을 보였다.
마릭카에게 있어 데비로서의 전생기억은 한 가지뿐이었다. 어느날 마
릭카가 있는 자리에서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끼리 우연히 소에 대한
말이 나왔다. 그러자 마릭카는, "나는 '카운다비'의 일을 기억한다. 그
리고 카운다비의 젖을 송아지처럼 빨던 강아지도 기억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데비가 살았을때 그녀는 한 마리의 암소에게 '카운다비'라는
인도 왕자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그러나 이 소는 마릭카가 태어나기
훨씬전에 죽고 없었다. 또 마릭카가 말한 강아지는 카운다비가 새끼를
낳고 난 뒤에 그 젖을 빨아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우로가시가마니
의 가족은 이 소와 개의 이야기를 마릭카에게 한번도 말한 적이 없었
다.
마릭카의 모우로가시가마니 가(家)에 대한 애착은 대여섯살이 되어도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 가족에 대한 것보다도 더 강한 애착을 갖
는 것 같았다. 또한 자신의 부모에게는 전생에 대한 애기를 하지 않았
다. 언제나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들 앞에서만 말할 뿐이었다. 그리
고 데비의 형제, 자매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였다.
마릭카의 사례에서는 그녀의 집이 '언니'가 살고 있는 한 건물 안으
로 이사를 했다는 이상한 우연성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데비의 생애에
대한 그녀의 기억은 어떤 자극 요인이 있을 때에만 의식 속으로 들어오
고 있는 것이다.
제 8 화 형의 아들로 환생한 위지라트네
이 이야기는 1947년 1월 스리랑카의 무갈칼토타에 태어난 위지라트네
의 이야기이다. 그의 부모는 결혼 후 10여년이 지나서 이 아이를 낳았
다. 이미 몇 아이를 기른 후였지만 이런 모습의 아이는 처음이었다. 그
는 태어나면서 왼쪽 가슴에 둥글게 패인곳이 있고, 또 오른손의 엄지손
가락은 손바닥에서 잘 벌어지지 않으며 다른 네개의 손가락은 마치 선
인장처럼 손바닥 끝에 왼손 손가락의 첫째 관절 정도의 길이로 나와 있
을 뿐이어서, 네개의 손가락은 마치 손바닥의 연장인 것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스리랑카는 전통적인 불교국가이기 때문에 이처럼 태어날 때부
터 타고 난 선천적인 불구자는 전생에서 한 행위의 업보를 받은 것이라
고 믿고 있다.
이 아이가 두살이 좀 지났을 때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자기
의 손이 이처럼 조막손인 것은 전생에 아내를 죽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었다. 어린 아들의 이 중얼거림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남
편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그러자 남편은 그 말이 맞는 말일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20년 전에 그의 동생이 살인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그 때 동생 하미가 자기는 죽어서 형님 댁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라트란 하미는 자기 아내인 포디 메니케를 살해한 죄로 교수형에 처
해졌다. 스리랑카의 결혼 풍습은 두 단계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법
률적으로 결혼해서 부부가 되고 다음에 혼례식을 올려 완전한 부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법률적으로 부부가 되어도 몇 달 동안은 친정에서
그대로 지내다가 뒤에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남편의 집으로 가면 완전
한 부부가 되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에 라트란 하미와 포디
메니케는 법률적 부부관계였다.
1927년 10월 14일 하미는 관례대로 정식 혼례를 치루기 위해 아내를
데리러 처가집에 갔다. 하미는 기쁜 목소리로 메니케를 불렀지만 메니
케는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가 대신 인사를 하였
는데 하미는 혼례식을 앞둔 말쑥한 신랑 차림으로 서 있었다. 장모와
같이 들어온 하미는 아내인 메니케가 밥을 먹고 있는 곳으로 가서 이야
기를 건넸으나 메니케는 여전히 묵묵무답이었다. 게다가 메니케는 하미
와 같이 가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둘 사이에
큰 소리로 말다툼이 벌어지고 하미는 흥분한 채로 그 집을 뛰쳐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점심 때가 못 되어서 하미는 다시 메니케의 집으로 되
돌아왔다. 메니케의 집으로 들어온 하미는 방으로 들어가 갑자기 메니
케의 등을 칼로 찔렀다. 메니케가 지르는 비명소리에 온 집안은 수라장
이 되었고 하미는 도망치는 메니케의 뒤를 쫓아가서 다시 크리스 칼을
휘둘렀다. 그 때 누군가가 하미를 때려눕히고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으
나 이미 메니케는 숨을 거둔 뒤였다.
행복한 삶을 시작하기로 한 날에, 그와 정반대로, 두 사람은 비극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미는 이 사건으로 기소되어 교수
형에 처해졌다. 1928년 7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47년,
하미의 형 집에 위지라트네라는 소년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고는 그 스
스로가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실은 나의 전생의 형이다. 나
는 전생에서는 라트란 하미였고 옷갈칼토타 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사형당하던 그때의 상황을 위지라트네는 전생기억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수형이 행해지기 직전에 나를 위해 한 스님이 최후의 독경을 행하
였다. 검은 헝겊이 머리에 씌어졌다. 트랩이 빗겨졌다. 나는 형의 일만
생각했다. 그리고 목이 조이는 것을 느끼고 불이 타오르는 도가니 속으
로 떨어져 간다는 느낌이 되었다."
위지라트네가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후, 그가 네다섯살이 되었
을 때에, 콜롬보대학 교수가 이 사례를 처음으로 조사했다. 그 뒤에 행
한 이안 스티븐슨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많은 부분이 당시의 재판기록
과 일치했으며 어떤 부분은 재판기록에는 빠진 것도 있었다고 하였다.
하미의 결혼관계에 대해 재판 기록에는 미혼(未婚)이라고 되어 있다.
위자라트네 자신의 전생기억에 의하면 '하미'는 메니케에 앞서 아내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첫아내는 병으
로 죽었는데 이 일이 하미의 불행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메니케의 살해사건을 재판기록에서 찾아보자. '일단 메니케의 집을
사건 당일 뛰쳐나온 하미는 얼마 후 크리스를 들고 다시 되돌아가서 메
니케를 죽였다'는 것이 재판에서의 사실인정이다. 이 부분에 대한 위지
라네트의 전생기억은 다음과 같다.
"메니케는 모하티하미라는 남자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모하티하미
는 메니케가 전생의 나, 곧, 라트란 하미와의 결혼을 거부하도록 그녀
를 설득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메니케의 집에서는 그날 아침 식사준비가 되어 있어서 뭔가가 끓고
있었다."
"결혼 최종 단계가 되었기 때문에 나(라트란 하미)는 메니케의 집에
가서 함께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자 메니케는 거부했다."
"아내가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걸어서 5마일 떨어진 우리 마을로 돌
아왔다."
"집에 와서는 오렌지나무 아래의 두꺼운 판자 위에서 크리스를 갈았
다."
"메니케를 설득시키지 못하였고 또 메니케의 집에서 나의 경쟁자라고
생각하던 사나이를 보았기 때문에 메니케를 찔렀다."
이상의 전생 발언은 현실의 재판에서의 범인의 진술처럼 현장감이 있
다. 당시에 크리스를 갈던 오렌지나무 아래의 두꺼운 판자는 그 뒤 몇
십년이 지나도 그냥 그대로 있었다. 위지라트네가 현세의 가족들을 데
리고 가서 그것을 가리켜 보였다고 한다.
또 재판기록에 의하면 하미는 "나는 모하티하미에게 얻어맞고 쓰러져
체포되었다. 그래서 나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크리스를 휘둘렀다. 애
초부터 살인할 의도는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재판에서는 고의의
살인이라고 인정되어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여기에 대해 위자라트네의
전생 발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메니케가 나의 집에 오기를 거부했을 때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죽일 생각을 가지고 죽였다."
"모하티하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죽인 것을
메니케 집의 가정부에게 들켜서 그것은 허사가 되었다."
"죽이고 난 뒤에 모하마티하미에게 얻어맞고 쓰러졌다."
이 세 가지의 전생 발언은 앞서 말한 "크리스를 갈았다"고 한 발언과
마찬가지로 재판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재판 기록에만 의지해
서 그것의 사실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형이 선고되고 사형집행까지의 한달 동안을 하미는 감옥에서 어떻
게 지냈는가? 하미의 사형 집행 며칠 전, 형 티레라트네가 주선하여 부
처님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법회가 십여 명의 스님들에 의해서 하미가
수감되어 있는 감방 앞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하미는 말했다.
"형,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나는 형의 아들로 환생해서 다시
올거야."
이 '환생의 약속'은 위지라트네의 전생 발언에서도 확인되었다. 곧
"사형집행 오일 전에 형이 형무소에서 나를 위해 거행해 준 법회가 있
었다"고 하면서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했으며 법회에 참석한 스
님 들의 이름까지도 말했다.
한 스님에 의해 최후의 독경이 행해진 사실과 검은 헝겊을 머리에 씌
운 것은 사형집행의 관례로 보아서 당시에도 그러했으리라. 그러나 목
이 조여드는 느낌과 불타오르는 도가니 속으로 떨어져 가는 느낌 등은
확인할 수 없다.
위지라트네는 나중에는 전생의 일만이 아니고 죽은 뒤의 일까지도 기
억해 내고 있다. 즉 영계(靈界)의 일이라든지 위지라트네로 태어나기
전에 "새가 되어 살았다"라든지 하는 중간적 전생의 것들이다. 어느 것
도 확인해 볼 수 없는 것들이지만 불교도들이 믿고 있는, 죄인은 인간
보다 낮은 동물이 되어 환생 한다는 사고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제 9 화 불교인 가정에 태어난 영국인 조종사 란지스
란지스는 스리랑카의 콧테에서 1942년 순수한 스리랑카인 가정의 일
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두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실버는 란지스가
확실한 전생기억 같은 것을 상당히 가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 그의
행동은 스리랑카인의 아이라기보다 영국 아이에 어울리는 특징을 보이
곤 하였다. 그가 두살 무렵에구토증을 느끼고는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
으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스리랑카 사람들은 구토증이 나도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국식의 구토촉진술이다. 또 음식에 대한 취향도
마치 서양 사람 같아서 쌀밥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먹을 때에도 서
양식으로 먹었다. 빵에는 서양인처럼 두텁게 버터를 발라 먹기를 좋아
했다. 그는 사용한 적이 없는 포오크와 나이프를 호텔에서 아주 자연스
럽게 다루었고 사용하는 방법도 다른 형제와는 달리 서양식이었다.
그가 부모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놀랄 정도로 빨리 영어를 습득한다
는 것이었다. 스리랑카는 150여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영어를 들을 기회가 많고 또 실버의 가정에서도 영어와 실론
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의 놀라운 영어 습득
능력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흥미로운 것은 병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카메라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진 찍히는
것을 아주 싫어하여 카메라 앞에 서게 되면 당황하면서 도망을 쳤다.
부모를 부를 때에도 다른 애들은 '엄마, 아빠'라고 하는데 그는 '부모'
라고 불렀다. 실론의 어느 아이도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다.
그가 가족내에서 뚜렷하게 고립적인 태도를 나타내보인 것은 서너살
무렵이었다. 그는 엄마와 형제들을 보고 "모두 나의 엄마나 형제가 아
니다"고 하며, "나의 부모, 나의 가족은 영국에 있다"고 말했다. 이 일
로 인하여 아버지는 그의 전생기억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서 전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는 대강 다음과 같이 말했
다.
"나는 영국인이다. 나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고 형제 중에 톰, 짐, 마
가렛이 있다. 아버지는 큰기선을 타며 파인애플을 선물로 사 왔다. 기
선에서 점심을 먹었다. 집은 언덕 위의 외딴 집이다. 저어지나 오버코
트를 입는 일도 있었다. 마당이나 길에 얼음이 어는 추운 날 아침에는
불 옆에서 몸을 녹였다. 길의 얼음을 치우러 차가 온다. 그리고 나는
기독교인이지 불교인이 아니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갔다. 그 때에는 내
가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형제들을 태우고 갓다."
얼음을 치우러 오는 차가 모터가 달린 차인지 아니면 말이 끄는 것인
지를 묻자 그는 마차라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어떤 옷을 입었는가라는
물음에 스커트와 재킷을 입고 있었다고 했으며, 어떤 과일을 먹었는가
하고 물으니 포도와 사과를 먹었다고 한다. 이런 란지스의 이야기에 나
오는 얼음이나 마차는 실론에는 없는 것들이다.
란지스가 네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지방 방송국에 부탁해서
생일을 축하한다는 전문을 영어로 방송해 달라고 부탁했다. 누이가 미
리 그에게 "오늘 오후 5시 영국에서 엄마가 너의 생일을 축하하는 말을
방송해 온다"고 일러두었다. 시간이 가까와지자 가족들은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았고 그가 가장 가까이에 앉았다. 잠시 후 여자 아나운서가 영
어로 "란지스의 생일 입니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손을 나팔같이 만들
어서 라디오에 대해 "엄마, 나 실론 사람의 집에 있어, 그리로 데려가
줘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생일축하'의 노래가 흘러 나
왔다. 그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역시 엄마야. 엄마는 나를 '다아링'
이라 하고 가끔 '스위트 하트'라고 했어." 곁에 있던 숙부가 "어떻게
엄마 목소리인 줄 알았지?" 하고 묻자, 그는 "엄마는 이 라디오에서 나
오는 말처럼 천천히(softly) 애기하니까"라고 대답했다. 라디오에서는
분명히 말을 천천히 했다. 그러나 실론 사람이 영어로 '천천히'를 말할
때는 slowly라고 하지 woftly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방송 사건은 란지스를 우울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의 아버
지는 가족들에게 란지스가 전생 일을 빨리 잊어버릴수 있도록 하라고
엄하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몇 년 동안 란지스도 전생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란지스가 십대가 된 어느 날, 그는 아버지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자동
차 수리공장에 취직해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모는 그의 소원을 허
락했고 그는 자동차 수리공장에 일하러 나갔다. 그러자 깜짝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자동차의 구조와 운전에 숙달되었다. 이리하여 그가 열여
덟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그를 영국으로 보내주었다. 그가 자동차 엔
지니어가 되었으면 하고 막연히 기대했던 것이다. 그는 2년 동안 영국
에 머물었는데, 영국인과 친숙하게 사귀었으며 런던이나 그 근교의 거
리가 옛날부터 익숙한 장소인듯이 느끼곤 하였다. 그리고 훗날 그는 영
국에서 보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하였다.
그는 귀국하여 자동차 관계 회사에 근무하였는데, 1970년 11월 스물
다섯살 때에 이안 스티븐슨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생에 영국인 조종사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 비행기가 내가 태어난 콧테 근방에 추락해서 죽었고 거기에서 지금
의 집에 환생한 것 같아요." 2차대전 중 콧테에는 영국 공군기지가 있
었고 그 주변에서 죽은 영국인 조종사도 많았다. 그러나 그의 전생 이
야기 중에는 조종사로서의 전생을 조사할 충분한 증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구체적 자료가 불충분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많다는
점에서 란지스의 경우는 좋은 실례가 된다 하겠다.
제 10 화 전생의 애인을 그리워하는 이맷드
이멧드 에라와르는 1958년 12월 22일 라일 레바논의 코오나엘에서 모
하멧드 메라와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코오나엘은 베이루트에서 동쪽으
로 24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도루스교도들의 유일한 거주지이다. 이맷
드가 자라면서 처음 걷기를 배우고 또 말을 하게 되자 그는 곧잘 이렇
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걸을 수있게 되어서 정말 행복해."
그의 이런 말은 그의 어머니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는 한살 반에서
두살이 될 무렵 '쟈이레'와 '마하모드'라는 두 사람의 이름을 처음으로
말하였다. 전생 발언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고는 보우햄지 가(家)의 가
족과 함께 크리비이 마을에 살았다고 하며, 또 다른 많은 사람의 이름
도 말했다. 크리비이 마을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손짓까지 해가면서
"아주 먼곳에 있다"고 하였다. 실은 코오나엘 근처에 같은 이름의 마을
이 있었지만 그가 손짓까지 하는 그 '먼곳'의 마을은 아닌 듯 싶었다.
또 손가락을 두개 가지런히 해 보이면서 쌍동(雙胴)의 총을 갖고 있었
다고 했다.
이맷드가 두살이 되던 어느 날 할머니 손을 잡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한 남자쪽으로 달려가더니 그의 다리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의아해했다.
"아가야, 이 아저씨를 아니?"
"그럼요, 우리 마을 사람인 걸요."
그는 사림 아슈라고 하며 이맷드가 말하던 '먼곳', 곧, 크리비이 마
을 사람이다. 사림은 코오나엘에 있는 처가집에 왔던 것이다.
이맷드가 네살이 되던 해 가을, 이맷드의 집을 방문한 마셀쇼프 마을
의 여자가 있었다. 쇼프 마을은 크리비이에 가까운 곳인데 그녀는 이맷
드가 말한 이름의 사람들이 실제로 크리비이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
녀는 코오나엘로 시집온 딸을 찾아온 것이다. 이 여자는 이맷드와 함께
그의 부모와 대화를 하다가 말했다. "아가야, 네가 말하는 케말 조움브
랫드 씨는 벌써 죽었어." 케말은 이맷드의 전생 발언에 따르면 그의 전
생의 친구였다. 이 말을 듣고 이맷드가 하도 슬픈 표정을 짓기에 그 여
자는 이맷드에게 자기가 거짓말로 그렇게 해 보았다고 말하자 그는 성
난 얼굴을 하며 소리쳤다. "어서 나가, 이 거짓말쟁이야." 이것은 그의
부모가 처음으로 본, 전생에 대한 아주 강한 감정의 반응이었다.
이로 인하여 이맷드의 아버지는 아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
각하게 되었고, 그 동안 이맷드가 자주 말한 전생 발언을 토대로 하여
이렇게 추정하였다. "이맷드의 전생은 크리비이 마을의 마하모드 보우
햄지이고 쟈미레라는 아내를 갖고 있었다."
1963년 12월 이맷드가 다섯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어느 장례
식에 참석하기 위해 크리비이에 가게 되었다. 그곳은 코오나엘에서
24Km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보우햄지 가의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고 이
내 돌아왔다. 이맷드가 자주 말한 전생발언 중의 하나가 자동차 사고
였다. 그는 버스 사고와 트럭 사고를 생생하게 말했다. 또 아주 어릴
때부터 대형 자동차를 거의 병적이라고 할 만큼 무서워하였다. 이맷드
의 아버지가 장례식 때문에 크리비이에 갔을 때, 그 장례를 치르는 셋
드 보우햄지라는 사람과 같은 이름의 사람이 오래 전에 교통사고로 죽
었다는 것을 알았다. 또 이맷드는 '셋드라는 친구가 있다'고 말했고 이
어 다른 두 사람의 이름을 말했는데, 그들이 친척 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셋드가 사실은 이맷드 본인일 것이라고
여기게되었다.
이맷드가 다섯살 하고 삼개월이 되었을 때,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우
연하고도 다행스럽게도 그를 만날 수 있어서, 이 사건의 조사를 직접
진행할 수 있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크리비이 마을에 처음 와서는 이맷
드의 전인격은 트럭 사고로 죽은 셋트 보우햄지라고 한 아버지의 의견
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셋드는 1943년에 트럭 사고로 죽었다는 것과
작년에 죽은 셋드와는 친구 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전생의 친
구라고 한 '유셀프 하리비'를 만나서 그가 셋드와 친구였다고 하는 것
을 확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셋드의 아내는 쟈이레가 아니라는 것
과 마하모드 보우햄지는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셋드의 아들 하페츠를 만났을 때 그의 부친이 환생한 인
물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시리아의 같은 도루스 교인에게
시집 간 셋드의 여동생의 아들로서 스레이만이라는 사람이다. 셋드가
트럭 사고로 죽은 것은 1943년 6월 8일이고 스레이만은그 반년 후에
출생하여 지금은 스무살이 되었다고 한다.
이 스레이만의 출현으로 인하여 이맷드의 전인격(前人格)은 공중무산
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페츠는 말했다.
"그 아이가 말한 것 중에서 부친의 생애와 꼭 부합되는 것은 트럭 사
고뿐입니다. 그 아이는 사냥도 좋아하고 총도 가지고 있었으며 집앞의
도로는 가파른 고갯길이라고 말했는데, 그것도 전혀 틀립니다. 또 부친
은 쟈미레라는 여자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도 이미 알지 않습니까?"
사실 그랬다. 하페츠가 지금 사는 집은 셋드가 살고 있던 집 그대로
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맷드가 말하던 집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셋드
가 사고로 인해서 부상을 입고 그 후에 치료받은 것에 대한 이야기는
이맷드가 말한 그대로였기 때문에, 이것이 하페츠로 하여금 보우햄지
가(家)의 인물 중에서 이맷드의 전인격을 다시 찾아보게 만들었다. 그
러다가 마침내 그는 셋드의 사촌 이브라힘을 생각해내었다.
"이브라힘이라는 사람도 트럭 사고로 죽었습니까?"
"아니요, 그는 페병으로 죽었어요. 그렇지만 그는 다른 점에서는 모
두 합당해요." 하페츠는 즉시 우리를 창가로 안내하여 건너편 언덕 위
에 있는 한 채의 집을 가리켰다.
"저기 벚꽃나무가 보이지요?"
분명히 이맷드의 전생 발언에서는 집에 벚꽃나무가 있었고 그 근방은
가파른 경사길이었다. 또 셋드와 친구인 하리비가 이브라힘과도 친구
사이인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맷드의 전인격을 이브라힘이라고
본다면 그의 전생 발언은 맞는 셈이다.
이브라힘은, 1949년 9월 18일에, 그전에 일년 정도 요양원에서 치료
하다가 스물다섯살에 사망했고 그것은 이맷드가 출생하기 9년쯤 전의
일이다. 셋드의 아들 하페츠의 증언으로 일단 이맷드의 전인격은 이브
라힘인 것으로 단정을 지었다. 그러나 큰 의문점이 남아 있다. 이멧드
가 보여준 자동차 공포증이며 또 걸을 수 있는 일의 행복을 그토록 강
조한 것은 무슨 까닭에서 일까? 또 하나의 새로운 의문으로, 이맷드는
"트럭 사고는 운전수와의 싸움 뒤에 일어났는데 운전수는 일부러 치어
죽이려 했다"고 말했지만, 하페츠는 싸움이 있었을 리가 없다고 하였는
데, 당시의 재판 기록에서도 운전사의 단순과실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다른 점에서는 모두 정확한 이맷드의 전생 발언이 왜 여기서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것인가?
이브라힘의 임종에 대한 하페츠의 설명에 의하면 이브라힘은 일년 정
도 결핵요양원에서 지내다가 스물다섯살에 죽었다. 마지막 반년 동안은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다가 죽기 이틀 전에 자택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임종은 자택에서 하고 싶다는 희망에서였던 것 같다. 하여튼 젊고 원기
왕성하던 그가 오랫동안 병상생활을 강요당했으니 걷는다는 것뿐만 아
니라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얼마나 희망했겠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럼 자동차 사고는 어떻게 된 일인가? 트럭 사고와 버스사고에 대
한 이맷드의 발언에 대해 많은 증언을 모은 결과 그의 발언에는 틀린
점이 많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입증하기 곤란한 것은, 트럭 운
전수와 싸웠는데 그 운전수가 죽이려고 고의적으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싸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재판기록에는 충돌사고는 단순과실이라
고 되어 있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셋드의 환생인 스레이만 보우햄지에
게서 셋드가 죽을 때의 상황을 전생기억으로 확인했다. 그는 셋드로서
의 자신이 사고가 나기 전에 싸웠다는 것은 현재까지 생각해내지 못했
다고 말했다. 이 부분은 이맷드의 전생기억이 틀린 것이다.
셋드는 사고 후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몇 시간 만에 죽고 말았
다. 셋드의 자동차 사고는 이브라힘에게 큰 충격을 준 것 같다. 자기
집안에서도 버스와 트럭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버스 사고 후에는 운
전을 두려워하여 죽을 때까지 버스를 운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브라
힘의 대형 자동차 공포증은 스티븐슨 교수가 만난 다섯살 무렵에는 거
의 없어졌다. 그러나 스레이만도 모든 차에 대해서 심한 자동차 공포증
을 보였는데 그것은 열한살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루어볼 때 이브라힘은 트럭과 자동차의 두가지 차 사
고에서 강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맷드의 전생기억 중 가족과 친구 관계에 대해 살펴보면, 전생에
'후다'라고 하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가 어릴때 태어난 여동
생의 이름을 '후다'라고 하자고 부모를 졸랐다. 또 그는 '셋드'를 비롯
하여 여러 사람의 이름을 말하며 형제라고 했다. 그들은 이브라힘의 사
촌이거나 가까운 친척들이다. 케말 조우므브랫드는 쇼트 마을의 여자가
거짓으로 죽었다고 말해서 이맷드가 화를 내었던 그 사람이다. 그는 이
브라힘과 셋드와 공통의 친구로 도루스 교도 중에서는 유명한 철학자이
며 정치가였다.
이맷드의 전생이 셋드가 아니고 이브라힘이라고 추정한 후에 스티븐
슨 교수는 그를 크리비이로 데리고 왔다. 우선 처음에 셋드의 전생집
(지금은 하페츠가 사는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아무 것도 분별하
지 못했다. 사진첩을 보여주며 몇몇 사람을 지적했지만 그는 아무도 알
아보지 못했다. 하페츠조차도 알아보지 못했다.
다음에는 셋드의 집을 나와 이브라힘의 생전 집으로 갔다. 이브라힘
이 죽은 뒤에 그 집은 폐쇄되어 있었다. 이맷드의 전생 발언대로 마당
에는 벚나무가 있고 집 앞은 가파른 언덕길이 뻗어 있었다. 여동생 '후
다'는 알아보았지만 어머니는 알아보지 못했다. 지난 10여년 동안에 너
무 많이 늙어버린 것이다. 사진을 한 장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그 사진
의 인물은 바로 자기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이브라힘의 사진이었
다. 그의 전인격을 최종적으로 확정짓는 결정적인 발언이었다. 벽에 걸
린 초상화를 보고는 남동생인 '파우드'라고 하였다. 자기가 마지막 이
틀 동안 누워 있던 침대를 알아보았다. "아가가 죽을 때 무슨 말을 했
어?" 하고 후다가 물었다. "후다, 파우드를 불러줘"라고 말했다고 하였
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다락은 두개의 방으로 되어 있었다. 그 사이의 칸막이를 가리키며 거
기에 총을 감추어 두었다고 했다. 이브라힘은 사냥을 무척 좋아하여 법
으로 금지된 라이플 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이 벽 칸막이에 총을 숨
겨둔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어머니 뿐이었다. 이맷드는 이전부터 "총
을 다락방에 숨겨두었다"고 말했다. '갈색' 개를 '밧줄'로 매어 둔 것
도 말했다. 이 지방에서는 보통 쇠사슬에 매어두지 밧줄을 사용하지 않
는다.
그리고 이맷드가 집에 대해 말한 것도 거의 맞았다.
"집에는 우물이 두 개 있다."
"내가 죽을 무렵 정원을 고쳤다. 벚나무와 능금나무를 새로 심었다."
"차고가 둘 있었다."
"기름난로가 있었다."
한편 이맷드가 어릴 때부터 항상 말해오던 쟈이레라는 미인이 있는데
그의 말을 종합해 보면 대개 이런 여자이다.
"나에게는 쟈이레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미인이다. 옷입은 맵시
가 예쁘고 하이힐을 신었다. 빨간색의 옷을 잘 입었고 또 자주 사주었
다."
그러나 레바논에서 하이힐을 신는 여자는 도루스 교도 중에는 퍽 드
물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하페츠로부터 쟈이레에 관해서 어느 정도 정
보를 들었다. 그녀는 이브라힘이 결핵으로 죽기 직전까지 그의 애인이
었던 것이다. 그 후 그녀는 이웃 동네의 남자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맷
드가 크리비이에 왔을 때 스티븐슨 교수는 쟈이레가 어느 마을에 사는
지를 조용히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맷드는 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는
쟈이레가 살던 마셀 쇼프 마을 방향을 정확히 지적해보였다. 그러나 이
맷드가 코오나엘에서는 그녀의 일을 가장 많이 이야기하며 만나고 싶다
고 했지만, 정작 쇼프 마을에 좀더 가까운 크리비이에 와서는 그녀에
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전생에서의 연애사건을 가족 앞에서 드
러내지 않으려 했던 심리적 측면이 작용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후 쟈이레가 결혼하여 이웃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맷드는 열살이 되었을 때 엉뚱한 발상을 갖고 있었다. 자기는 쟈이레의
딸과 결혼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남의 아내가 된 그녀와는 결혼할 수
없으니 그의 딸과 결혼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생과 현생에서 죽
음의 단층(斷層)을 넘어서는 참으로 기구한 사랑이야기가 아닐 수 없
다.
이맷드는 열살이 지나서도 상당한 전생기억을 갖게 되었다. 그는 열
살 때에 처음으로 마하모드 씨를 만났다. 이브라힘의 삼촌으로 그의 전
생기억에서 맨 처음으로 말하던 사람이었다. 이 때 마하모드 씨는 수염
이 없었지만 수염이 있는 사진을 보여 주니 금방 알아보았다. 또 마하
모드 씨와 함께 크리비이 마을의 큰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한 군인을
만났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함께 프랑스 군대에 입대했다고 말했다.
이브라힘이 프랑스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맷드도 학교
공부 중에서 특히 프랑스어를 잘하였다.
한편 이맷드는 한때 다하르엘아하르에서 산 일이 있다고 하며 두 사
람의 이름을 말했다. 그것은 이브라힘과는 다른 생애이다. 그러나 그의
중간적 전생이 너무 단편적이어서 증멸하거나 조사할 수가 없다. 어쨌
든 그는 1973년에 열다섯살이 되어 정상적인 소년으로 성장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에서 셋드의 환생인 스레이만 보우햄지에 대해 간단히 소
개했다. 셋드 보우햄지가 트럭 사고로 죽은 것은 1943년 6월 8일이고,
그의 환생인 스레이만은 같은 해 12월 3일에 시리아의 라하에서 태어났
다. 그의 어머니는, 셋드의 여동생으로, 같은 도루스교도의 집안에 시
집온 것이다. 스레이만은 말을 하게 되면서 자신은 셋드의 환생이라고
하였다. 서너살 무렵에 처음 크리비이 마을에 왔다. 당시 열한살쯤 되
었던 하페츠의 말에 의하면 스레이만은 혼자서 셋드의 집을 정확하게
찾았다. 셋드의 사고와 죽음의 상황을 이야기했고 하페츠 등 아이들을
알아보며 이름을 말했다. 또 자기보다 나이가 더 많은 아이들에게 부친
다운 태도를 보이며, 자기의 어머니를 '여동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페츠 자신도 어린 시절 크리비이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알고 분간
했던 것, 마을의 밭이나 포도밭의 경계를 정확히 지적했던 일, 셋드의
소유인 권총과 웃옷 등을 구분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제 11 화 전생에서 환생을 약속한 마르따
1917년 10월에 스물 여덟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마리아 준아리아
데 오리베이로는 브라질의 돈 페리시아 마을 사람이었다. 그녀는 두번
이나 연애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 나머지 폐병으로 죽었다. 특히 그녀
의 두번째 애인이었던 후로징호가 주위의 반대로 결혼을 할 수 없게 되
자 자살해버렸기 때문에, 그녀의 충격은 더욱 컸던 것이다.
마리아가 죽고 열달이 지난 1918년 8월 14일, 이 지방의 학교 교사인
로렌쯔 부부 사이에 열 두번째의 아이인 마르따가 태어났다. 그녀가 두
살 반이 지나면서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 때에, 그 부모는 즉시 이
아이는 마리아 준아리아의 환생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마르따가 한
살이 되기 조금 전에 그녀의 전생의 아버지인 오리베이로가 로렌쯔 씨
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녀는 오리베이로 씨에게 안기려 하며
'아빠'라고 부르는 듯하였던 것이다.
마르따는 자기의 전생이름을 '마리아' 라고도 하고 또 '싱하'라고도
한다고 했다. 또 다른 이름 하나는 '준아리아'라고 하느냐고 그의 아버
지가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녀의 전생이야기는 사망한 싱하의 아
버지 오리베이로 씨의 농장의 상황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소와 양들이
많이 있고 오렌지가 많이 열렸다고 하며, 우물물을 먹었다고 했다. 또
어머니의 말 안장을 보면서 자기와 함께 산 것이라고 했다. 싱하와 이
다는 사이가 좋아서 사실 그랬던 것이다.
마르따는 자기가 싱하였을 때 몹쓸 병에 걸려 죽었다고 했다. 그것은
마을 축제에 구경갔다가 심한 비를 맞은 이후부터였다고 했다. 싱하는
폐병으로 죽었다. 싱하의 임종 직전에 문병을 갔었던 마르따의 어머니
이다는 그때 일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이다 곁으로 다가와서 그 귀에
속삭이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난 꼭 환생할 거야, 당신의 딸이 되어서. 그리고 지금의 나의 생애
의 여러가지를 이야기할 거예요."
그러나 그때 싱하가 겨우 한 말은 "난, 난 약속해…"하는 말이었다.
이 '마지막 약속'은 마르따가 전생 발언을 시작하기까지는 로렌쯔 부부
만이 알고 있었다. 싱하의 장례식은 폐병이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
었기 때문에 겨우 몇 사람만 참석했는데 마르따는 그때 참석자들을 기
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에 그녀는 갑자기 일어나 소리질렀다. 세리카가 "싱하, 싱
하" 하면서 자기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세리카의 환상(幻
想)을 본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세리카의 죽음이 전해졌다. 세리카가
죽은 시각은 마르따가 환상을 본 시각과 꼭 맞았다. 세리카는 싱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이다는 싱하에게 물어보았다.
"싱하는 내가 농장에 갔을 때 어떻게 나를 대해주었지?"
"커피를 준비하고 집앞의 돌 위에 축음기를 장치하고서 집밖에 나가
기다렸지요."
사실이었다. 이다의 집과 싱하의 농장과는 12마일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싱하는 이다가 오는 날을 미리 알고는 이렇게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싱하도 마르따와 같이 초능력을 갖고 있었다.
마르따는 자기 집에 온 싱하의 첫번째 애인을 알아보았다. 또 사촌도
알아보았다. 어느 날 부친의 상(喪)을 당한 마을 여인이 마르따의 집에
왔을 때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 "생명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사
람이 죽은 뒤에도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것이예요. 나를 보세요. 나도
죽었었지만 이렇게 아직 살아 있잖아요."
마르따는 열두살 때 오리베이로의 농장에 갔다. 가면서 농장으로 가
는 도중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전생의 집안에 들어가서는 벽
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시계 뒤에 금색으로 자기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고 했다. 벽에서 떼내어 보니 과연 금색으로 '마
리아, 준아리아, 데, 오리베이로'라는 싱하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
리고 흑인 노예의 이야기, 집에 있던 고양이 따위에 대한 전생기억은
모두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싱하는 일부러 병사(病死)한 여인이다. 그녀의 최후는 목과 폐를 앓
아서 거의 말도 하지 못했었다. 마르따도 어릴 때부터 기관지염을 잘
앓았다. 그리고 목소리가 잠겼다고 한다. 또 마르따는 피와 비에 대해
거의 병적인 공포를 갖고 있었다. 그 후 쉰살이 더 지나도록 싱하의 자
살한 애인 후로징호에 대한 기억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제 12 화 언니가 죽어서 남동생으로 환생한 파우로
파우로는 앞 이야기의 주인공인 마르따의 남동생이다. 그는 마흔세살
에 피해망상증으로 누이인 로오라의 집에서 자살하였다. 파우로 역시
어느 인물의 환생이었다. 곧 로렌쯔 집안에는 형제들 중에 환생한 아이
가 둘이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로렌쯔 씨에게는 파우로 위로 열두명의 형제들이 있
었는데, 맨 위의 누이가 '에미리아'라고 했다. 그녀는 열 아홉 살이던
1921년 10월 12일에 약물자살을 하였다. 로렌쯔 씨가 심령문제를 연구
하였듯이 그의 아내도 심령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때로는
영매(靈媒)의 역할을 하여 영혼과 직접 교신을 하기도 했다. 에미리아
가 자살한 얼마 후에 모친은 에미리아의 영혼에게서 통신을 받았다. 그
녀는 자살한것을 후회하며 남자아이로 환생해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
었다. 이런 예언이 있은 뒤에 에미리아가 자살한 지 약 1년 반이 지난
1923년 8월 3일에 파우로가 태어났다.
파우로는 어렸을 때부터 여자아이하고만 놀고 남자와는 놀지 않았으
며, 또 인형을 무척 좋아하였다. 그리고 옷도 바지를 입지 않고 스커트
만을 입으려고 하였다. 음식 먹는 데 있어서 그에게는 흥미로운 버릇이
있었다. 빵을 먹을 때에는 아무리 새로 만든 부드러운 빵이라고 가장자
리를 뜯어내고 먹었다. 이것은 에미리아와 같은 버릇이었다. 네살 때에
는 배운 적도 없는 재봉틀을 사용하여 바느질을 하였는데, 집에 있는
재봉틀을 보고 자기 것이라고 했다.
또 그는 자기에게 재봉하는 것을 가르쳐준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데
그것은 에미리아의 재봉 수업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에미리아가 동생들
중에서 로오라를 가장 귀여워했듯이 파우로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누이인 로오라의 집에서 함께 살고 싶어하였다.
에미리아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에 불만을 품어왔다. 20세기초의 브라
질에서는 여자에게는 여러가지 제약이 있었고, 특히 미혼여성이 혼자서
여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미리아가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고 동생들에게 자주 말했던 큰 이유중의 하나는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
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파우로도 여행을 무척 좋아하였다. 스티븐슨
교수가 그를 만난것은 그가 서른아홉살이었을 때인데 그는 그때까지도
여성적인 요소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 교수는 그에게 일종의 심리 테스
트를 해보았다. 그것은 동성애의 남자와 여자를 테스트하는 데 사용하
는 것이었는데, 파우로는 여성경향도를 보여주었다. 이때 그는 독신이
었고 결혼할 뜻도 없는 듯하였다. 그는 여행 등의 자유에 대한 희망과
여성적인 경향의 두 가지 이유로 독신으로 지내다가 마흔세살 때 자살
하였다.
제 13 화 손자가 되어 환생한 윌리엄
다음에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는 알래스카와 카나다에 살고 있는 아
메리카 인디언의 여러 부족들을 통칭하는 트란짓트인들 사이에서 일어
난 일들이다. 이들은 모두 가명을 썼는데 남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다는
관계자들의 희망을 받아들인 것이다.
월리엄 죠오지 1세는 훌륭한 어부였다. 그는 다른 트란짓트인과 마찬
가지로환생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으며, 죽음이 가까와짐에 따라 환생
하고 싶은 소망은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자기 아들 중 가장 마음에 드
는 세째 아들과 며느리에게 자기가 만일 환생한다면 그들의 아들로 환
생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기 몸에 있는 두개의 반점을 가리키면
서 그 아이는 이와 똑같은 모반(母斑)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니 이 표시
로써 자기가 환생한 것인 줄 알라는 것이었다. 그 두개의 반점을 하나
는 왼쪽 어깨에, 또 하나는 왼쪽 팔꿈치 옆에 있었다. 윌리엄 죠오지
1세는, 죽기 얼마 전에, 그의어머니로부터 받은 금시계를 아들에게 주
면서 그 시계를 잘 보관해 두라고 하였다. 훗날 환생할 것임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했다.
그러고서 몇 주일 후인 1949년 8월에 그는 자신이 일하던 어선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그 뒤에 얼마 안 가서 셋째 며느리는 임신을 하여
1950년 5월 5일 아기를 낳았다. 이 아이는 아홉번째 아이였다. 윌리엄
죠오지 1세의 실종이 있은 지 9개월이 경과한 뒤였다. 며느리는 출산시
의 진통 중에 꿈을 꾸었다. 시아버지가 나타나서 빨리 자기 아들과 만
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꿈에서 깨어난 뒤,
마치 시아버지가 있는 것 같은 환각에서 주위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그녀가 꿈속에서 본 시아버지는 죽기 전의 어른 모습 그대로였다.
태어난 아기에게는 시아버지의 경우처럼 왼쪽 어깨와 왼쪽팔에 검은
색의 모반(母斑)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아기에게는 윌리엄 죠오지 2세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는 성장하면서 그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죠오
지 1세의 환생이라는 확신을 더욱 갖도록 하였다. 1세와 얼굴이 닮은
것은 물론이고 걸음걸이와 성격까지도 비슷하였다. 그리고 고기잡이나
배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고, 어느 만(灣) 부근이 제일 좋은
어장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어선의 그물 사용법도 배우기 전부터
이미 아는 듯이 보였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보석함을 정리하고 있는데, 방에 우연히 들어
왔다가 금시계를 보더니 "이건 내것이야" 하면서 자기가 갖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후 열살 쯤 되면서부터는 전생기억들이 거의 없어졌다.
제 14 화 부족 전쟁에서 전사 후 환생한 찰스
이 사례에서는 어린 시절에 전생기억을 가지고 있던 바로 그 당사자
가 자기의 전생을 이야기하였다. 1961년 스티븐슨 교수가 조사할 당시
에 찰스 포터 씨는 쉰살이 넘은 사람으로서, 이제는 전생 일을 기억하
지 못한다고 하며 그의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로써 자기의 전생기
억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이 사례는다른 것과는 좀 다른 특징을 갖는
다.
어린 시절에, 그는, 트란짓트 인디언 부족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싸우다 창에 찔려 죽은 사람이 환생한 것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
리고 자신이 살해당한 장소와 죽인 상대바의 이름, 또 자기의 전생의
이름 등도 말했다는데, 전생에 자기를 죽였다는 사람은 그의 외숙부였
으며 당시에 한 동네에 살고 있었다.
찰스가 자기의 죽음에 관해 말할 때는 오른쪽 배를 가리키며 창에 찔
려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상처가 있는 줄을
안 것은 성장한뒤에라고 말했다. 그의 오른쪽 배의 늑골 바로 밑에 검
은색 반점이 있는 것을 스티븐슨 교수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자리를
창으로 찔린다면 간장을 상해서 즉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찰스 포터는 1907년 시트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다섯 살위인 누이
의 말에 의하면, 찰스가 부족 전쟁에서 살해되었다고 말한 시기는 1909
년에서 1915년 경의 일이다. 그리고 그를 죽인 사람이라고 한 노인이
아직 살아 있었다. 가령 이 노인이 1910년에 적어도 예순다섯살이 되었
다고 한다면, 그는 1845년에 출생한 셈이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트란짓
트인이 보족 전쟁에서 점차로 창을 사용하지 않게 된 시기는 1852년에
서 1882년 사이일 것이라고 한다. 1845년에 태어난 사람이 장성하여 창
을 쓰는 전쟁에 참가했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맞는 것이다. 부족 전쟁중
에 창으로 살해되었다는 찰스의 말은 이 점에서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
는 것이다.
이미 아흔살이 넘은 찰스의 어머니도 만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실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전인격(全人格)이 살해되었
다고 하는, 문제의 전투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이나 참가 인물 등의 일
을 이 이상 확인할 수가 없었다.
스트븐슨 교수는 그 뒤에도 62년, 63년, 65년, 72년에 각각앨러스타
의 그를 방문하였고, 때로는 편지연락도 했다. 1972년 예순다섯살인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기독교인의 교리와 환생신앙이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15 화 창검에 대한 공포를 가진 데레크
1852년(또는 1853년)에 알래스카의 시트카와 랑겔 두 지역의 트란짓
트인들 사이에는 화평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시트카 측에서는 이 기회
를 이용하여 랑겔의 대표자 사십여 명을 살해했으며 그 중 몇 명만이
겨우 랑겔로 도망쳐 돌아왔다. 이 일이 있는 뒤로 1918년에 새로이 화
평협정이 이루어지기까지 양 부족 사이에는 반목이 계속되었다.
데레크가 출생한 것은 1918년으로, 그 참극이 있은 지 60여년이나 지
나서였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배에 모반(母]斑)이 하나 있었는데, 그
자신은 어릴 때부터 이 점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자신의
조상 중 어떤 한 사람의 신상에 일어난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서른여덟살이 된 1955년이었다. 어느 날 문득 웬 할머니가 그 모
반을 보더니 랑겔의 토착민인 '쿠'라는 사람이 입은 치명상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일러준 것이다.
데레크는 그 말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쿠'라는 사람은 앞서말한 참
사가 일어났을 때, 자기 부족인들을 죽이려거든 자기를 먼저 죽이라고
하며 맨손으로 당당하게 대항하다가 가장 먼저 살해된 사람이었다. 그
러나 데레크 자신은 전생의 기억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쿠에
대한 전생기억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와 쿠와의 사이에서 깊은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는 점이 두 가지 있는데, 그 첫째가 어린 시절부
터 칼, 총, 창 등에 특별한 공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소
년 시절에도 다른 아이들처럼 칼을 가지고 놀거나 하지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는 군대에 입대했으나 총검의 훈련을 아주 싫어 했다.
또 자신의 아이들도 칼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그의 병적인 공포증은 총과 같은 다른 무기에 대해서는 나타나지 않고
칼날이 달린 무기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이었다. 둘째로 그는 랑겔 태
생인데 시트카 사람들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었
다. 스스로 시트카에 거주하면서 시트카의 트란짓트인의 조직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그 두 지역의 관계 개선을 위하
여 좌절과 실망을 거듭하면서도 계속 노력하고 있었다. 시트카의 트란
짓트인에 대한 그의 행동에서, 화평 교섭을 위해 시트카에까지 원정을
가서 생명을 잃은 쿠와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이 지나고 장년기에 이르도록 칼에 대한 공포증을 갖
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식사 때에 나이프를 쓴 적이 없다고 하였
다. 또 데레크 자신을 긴장했을 때 가끔씩 배에 통증을 느낀다고 말하
는데 이것은 전생과 질병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 16 화 조카딸의 아들로 환생한 콜리스
트란짓트인들 중에 빈센트라는 사람은 죽기 1년쯤 전에 그의 누이의
딸, 곧, 조카딸인 초트킨 부인에게 강한 친근감을 보이면서 그녀의 아
들로 환생할 것이라고 말하고 또 그는 지금의 자기처럼 말더듬이가 되
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와 꼭 같은 흉터를 갖고 있
을 터이니 그것이 자기의 환생증표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등에 있는 수
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또 코 오른쪽에 있는 점을 가리키며 그것도 증
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빈센트가 죽고 8개월이 지난 1947년 12월에 초트킹 부인은 아들을 낳
고, 그를 콜리스 초트킹 2세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태어나면서 빈센트
가 죽기 전에 말했던 것과 똑같은 점과 흉터를 코와 등에 갖고 있었다.
콜리스가 말을 배우게 되면서부터 그의 이름을 물으면 '카코디'라고 하
였다. 그것은 빈센트가 속해있던 부족 이름인데, 빈센트는 사람들 사이
에서 부족 이름인 '카코디'로 알려져 있었다. 콜리스는 그것을 완전한
트란짓트의 발음으로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의 숙모가 전에 꾼 꿈 이야기를 했다. 곧 그녀는
콜리스가 태어나기 좀 전에 빈센트가 초트킹에 와서 살게 되는 꿈을 꾸
었다는 것이다.
콜리스가 두살이 되었을 때 우연히 거리에서 빈센트의 딸과 아들 그
리고 그 부인을 만났는데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기회에 그는 빈센트와 친척 사이인 사람들을 몇 명 알아보았다.
그는 빈센트와 관련된 사건 두 가지를 말하였다. 하나는 생전의 빈센트
가 고기잡이 나갔다가 엔진 고장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다른 배의 구조
를 받은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전생의 빈센트로서 자기 부인과 함께
현재의 콜리스씨 집을 방문했을 때에 잠자던 방을 기억해낸 것이다.
콜리스의 어머니가 놀란 것은 그가 보여준, 빈센트와 흡사한 몇 가지
행동의 특징이었다. 콜리스는 머리를 빗을 때 언제나 이마쪽으로 머리
를 내려 빗었는데 그것은 빈센트와 똑같은 습관이었다. 더구나 이것은
부모가 빗어주던 머리 모습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또 빈센트는 아주
심한 말더듬이었다. 환생해서는 말더듬이었다. 유달리 신앙심이 깊은
것도 같았다. 빈센트처럼 콜리스는 배와 해상생활을 좋아해서 바다위에
서 생활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빈센트가 왼손잡이였듯이 콜리스도 어
린시절에는 그랬었다.
제 17 화 데자․뷰에 의해 전생을 기억한 노먼
노먼은 1944년에 출생하였다. 그는 서너살쯤 되던 어느 날 부모와 함
께 고향에서 50km쯤 떨어진 외딴 바닷가에 간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
노먼은 갑자기 흥분하여 자기는 이 바닷가에서 훈제소를 하고 있었고
나중에 장님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흥분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하며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노먼은 이 바닷가에서 한 말 이외에는 전
생의 말을 하지 않았다.
노먼의 이 말은 그의 할아버지인 헨리 데스피스 1세의 생애와 두가지
사실에서 일치하는 점이 있다. 할아버지는 어업에 종사하며 이 바닷가
에서 훈제소를 갖고 있었다. 1935년에 여든다섯살로 죽었는데 마지막
4년 동안은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이미 1930년에 이
훈제소를 버렸고, 노먼이 그곳에 간 1947년에는 말뚝 몇개가 남아 있을
뿐 훈제소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노먼은
이 바닷가에서 한 말 이외에는 전생의 일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아
버지는 이것으로써 노먼은 할아버지가 환생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노먼은 시력이 약해서 열네살 때부터 안경을 쓰게 되었다. 심한 근시
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나 또 그의 네 형제들은 시력에 아무 장애가
없었다.
이 사례에서처럼, 처음보는 상황이 과거 어느 때에 체험한것 같다는,
일종의 착각 현상인 데자․뷰(Deja-Vu) 경험에 의해 환생을 말하는 사
례는, 구체적인 자료는 적으나, 세계적으로 많이 발생하는 환생 사례이
다.
제 18 화 누님의 아들로 환생한 지미
지미 스벤손은 1952년 11월 22일 시트카에서 태어났다. 그가 전생 이
야기를 시작한 것은 두살이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전생에 현세의 엄마
의 동생이었으며 크러쾅 마을에 살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트카에서
약 160km쯤 떨어진 크러쾅에는 엄마의 동생인 존 시스코가 이전에 살았
었다. 지미는 화가 날 때면 곧잘 "나는 크러쾅에 가서 외할머니와 함께
살겠다"고 했다. 이렇게 이삼년 동안 전생 이야기를 하다가 그 뒤로는
말하지 않게 되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1961년에 이 사례를 조사했는데 그때 아홉살이던 지
미는 이미 전생 일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기록은 그의 부
모와 형제들의 간접증언에 의한 것이다.
지미의 외삼촌 존 시스코가 죽은 것은 1950년 여름으로 스물다섯살
때였다. 어느 날 두 사람의 여인과 함께 모터보트를 타고 바다에 뱃놀
이를 나갔는데 몇 시간 뒤에 보트만 발견되었다. 그의 사망이 단순한
사고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두 여인의 질투에 의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지미는 자기는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의
배에는, 태어날 때부터, 총탄 자국으로 보이는 네개의 모반(母斑)이 있
었다.
그밖에는 몇개의 환생기억을 이야기했다. 자기는 존이지 지미가 아니
라 하면서 크러쾅에 가고 싶다고 자주 말했다. 뒷날 크러쾅에 갔을 때
마을사람들이나 장로에게 강한 친밀감을 보였으며, 시스코의 친구였던
이를 만나서는 고기잡이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외삼촌 한스
시스코에게 "나는조카가 아니고 동생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전
생기억은 네살 때부터 흐려지기 시작했다.
제 19 화 전생의 총탄 흉터를 가진 헨리
헨리 엘킨은 1899년에 앙군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가슴
과 등에는 모반이 있었는데, 서로의 위치로 볼 때에 총탄이 앞뒤로 관
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에 대해 전생 이야기도 하지 않았
다. 다만,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앙군의 공회당에 갔을 때에,
건물 안의 한 곳을 가리키며 "저기서 예전에 외할머니를 자주 보았다"
고 말한 적이 있을 뿐이다. 1880년 이전에는 여자들이 이 공회당에 모
여 전쟁에 나간 남자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헨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었다.
헨리는 여덟살 때에 전생에 대한 일을 문득 기억해냈다. 아버지와 함
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물에 빠진 두 사람을 구해준 일이 있다
고 말했다. 그의 부모는 그런 사건은 있었지만 그것은 헨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라고 했다.
헨리의 이런 기억들을 확인할 다른 방법은 없다. 오직 그의 진술에
의거할 뿐이다. 스티븐슨 교수가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이 바다에
서의 사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말했다. 곧 부모에게서 "그 두 사람의
생명을 구해줄 무렵에는 아직 너의 누이가 살아 있었고 누이는 그때 아
버지의 배에 타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 누이란 아직 헨
리가 어렸을 때 열 두어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이야기에서 볼 때 이
누이가 죽었을 때 그는 대여섯살쯤 되었으리라고 보면, 헨리는 1899년
에 태어났으니, 누이의 죽음은 대략 1905년 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때가 열두어살 때였다고 한다면, 그녀는 1892년에 출생한 셈이다. 이
누이가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간 것은 대여섯살 이후였으
리라 생각된다. 결국 문제의 인명구조 사건은 1897년 쯤의 일이다. 헨
리가 1899년에서 불과 2년 앞선 일이다.
헨리의 전생기억이 분명하다면 이것은 전생경험에서 얻은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다면 이런 기억들을 그가 환생하기 이전의 중
간적 생애에 대한 기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사례는 트란짓트인의
사례 조사에서 중간적 생애에 대한 전생기억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라
고 할 수 있다.
제 20 화 여자로 환생한 그나나틸리카
그나나틸리카는 1956년 2월 14일 스리랑카(실론)의 헤두나훼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두살이 조금 지나면서 전생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종
합해 보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아버지는 우편배달부다. 어머니는 뚱뚱하다. 다아다사라는 형이 있
는데 개에 물린 적이 있다. 누이 한 사람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 어머
니는 자주 땔감을 샀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 마을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약 30km떨어진 탈
라와켈레에 갔다온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에서 돈을 주고 땔감을 산다
는 얘기는 전에 그나나틸리카가 말했던 것과 같았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의 애기를 듣고 그녀의 아버지는 속으로 깜짝 놀랬다. 그뿐만 아니
라 이 마을 사람의 이야기가 그나나틸리카를 강하게 자극한 듯했다. 그
때부터 더욱 상세하게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전생에 탈라와켈레에 살았다. 거기에는 야자나무가 없다. 학교
갈 때 기차를 타고 간다.누나인 수두아카도 학교에 간다."
그나나틸리카가 네살 때에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탈라와켈레에 찾아
갔다. 전생의 집이 있었다는 우체국까지는 잘 찾았는데 막상 그 집은
찾지 못했다. 그곳은 건물이 없는 빈터였다. 그녀가 전생 이야기를 한
다는 것을 전해들은 데라 스님은 전생 발언을 토대로 하여 그녀의 전인
격(前人格)을 찾아냈다. 그는 탈라와켈레에 살았던 소년으로, 틸레케라
트네라고 했고 1954년 11월 9일 열세살로 죽었다.
이런 소문을 전해듣고서 텔레케라트네가 다니던 중등부의 교사가 그
녀를 찾아왔다. 그나나틸리카는 금방 그 선생님을 알아보면서 이름도
기억해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는 한번도 꾸중을 듣지 않았다"고 말했
다. 그는 학생들을 한번도 야단친 일이 없는 특이한 교사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선생님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부처님이 고행에서 성불하기
까지의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도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는 이 선생님이 학교에서 가르친 것이었다.
또 그나나틸리카가 "기차를 타고 학교에 통학했고 긴 터널을 지나갔
다" 고 한 전생 발언도 이 선생님의 방문으로 입증되었다. 틸레케라트
네는 햇튼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학교 가는 길에 실론에서 가장 긴 터
널이 있어서 그는 학교를 다니느라 하루에 두 번 이 터널을 통과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또 아직 보지도 못한 햇튼 시(市)의 거리 모습을, 특히 학교
와 역을 중심으로, 정확히 그려보였다. 또 그녀의 오빠가 어느 큰 행사
때에 춤을 보이러 탈라와켈레에 간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 행사는 실
론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한 영국 여왕의 방문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에 여왕이 타고 있던 기차의 창너머로 엘리자베스 여왕을 본 일이 있
다고 말했다. 또 이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생전의 틸레케라트네는 인간
은 죽어서 환생하는가를 묻고 환생할 때에 남자가 여자로 태어날 수도
있는가를 물었다고 한다.
1961년 초 그나나틸리카가 다섯살일 때 그녀는 다시 틸라와 켈레에
왔다. 그녀는 부모와 스님, 그리고 선생님들이 모인 곳에서 전생 가족
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는 이들을 모두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 때 특
기할 것은 틸레케라트네가 좋아했던 누이에게는 특별히 친밀감을 보이
고,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아 불상(佛像)을 깨뜨린 형에게는 반감을 보
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틸레케라트네의 전생의 태도와 상응하는 것이
다.
그 후 열네살이 될 즈음 그녀는 극히 평범한 소녀가 되었다. 머리 모
양이나 체격 등 어디로 보나 남자의 환생이 아니라 정상적인 여자 아이
였다. 그러나 언제나 파란 하늘 빛깔을 좋아했다. 그것은 틸레케라트네
도 마찬가지였다.
2. 한번 이상 사는가
제 1 장 서문
나는 신문기자와 TV 방송기자로 여러 해 일하는 동안 이상한 이야기
를 많이 취재해 보았다. 그중 대부분은 지나간 일들에 근거를 둔 탐정
이야기들이다. 예를 들면 반역죄라는 누명을 쓰게 되어 자살을 한 중국
의 공주 이야기라든지 또는 절세미인과 결혼한 후 역사의 기록문서에서
그 이름이 삭제된 이단자 '파라오'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이다. 그중
어떤 것은 농담삼아 조작된 것이거나 또는 사기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은, 자신이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며 '무
명(無名)'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기독교 종파를 창설한 스코틀랜드 여인
의 이야기처럼, 망상에 불과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이야기는 내가 일찌기 취재했던 이야기들 가운
데서 가장 흥미있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이 책에 실린 이야기는 탐정
이야기가 갖추어야 할 모든 이상스럽고 괴이한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
문이다.
나로서는 아주 우연하게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을 취재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아이버슨 씨는 BBC TV 방송 프로그램에 넣을 수 있느냐
고 문의하여 왔다. 그것은 좀 특수한 프로그램이었다. 왜냐하면, 아이
버슨 씨가 내게 설명했던 것처럼, 그 때 카디프시에는 최면요법사인 브
록샴이라는 유명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그의 환자들이 수백명이나
최면상태에서 전생을 기억했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역사
및 고고학에 흥미가 있었으므로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침착하게, 비판
적으로 그리고 그에 대한 지식을 갖춘 다음 이 주장을 조사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전생으로 돌아가서 그 당시를 기억했다는 것이 정말일까?"
나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았다. 미국의 가정부인인 머피 여사가 최면
상태에서 19세기 영국인 소녀로서의 전생을 생생하고 세밀하게 기억해
낸 것을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알고 있었다. 그 밖에도 최면에 든 사람
이 자신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하는 것과,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
라나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역사의 어느 한 기간에 대하여 아주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 사실에 관해서도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전생을 조사하려고나는 카디프 시에 갔다. 나의 조사는 사실
은 인간의 마음 그 자체에 대한 조사였다. 요크 지방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여인이 유태인 대학살 당시 젊은 유태여인으로서 요크 지방에 살
았던 경험을, 겁에 질려서, 아주 자세하고 조금도 꾸밈없이 말하는 것
이라든지 또는 일생 동안 바다라고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사람에게서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의 소형 구축함 속에서 프랑스 연안지대를 봉
쇄하다가 한쪽 다리를 잃은 해전 경험 등을 듣는다는 것은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프리 아이버슨과 나는최선을 다해 이들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조
사해 보았다. 우리는 그들이 전생에 살았다는 곳을 가보았고, 이미 알
려진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는 모조리 검토해봤다. 우리는 역사학자,
고고학자, 기록보관인 및 심리학자들을 찾아가 이야기해 보았다. 우리
는 조사해 보고, 연구해 보고, 의문해 보고 의논해 보았다.
'브록샴 테이프'에 실린 세부적인 전생기억은 과연 틀림 없는 것인
가? 최면상태에서 피술자들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세밀한 전생기
억은 도대체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얻은 것인가? 이러한 전생이 고의적
으로 꾸민 것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을진대 그러한 사실에대한 합리
적인 설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기억력인가?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잠재의식으로부터 마음 표면으
로 흘러나온, 숨겨졌던 기억들이가?
그러면 이러한 조사 결과는 어떠한가?
이에 대한 답변은 독자 자신이 해야겠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논쟁할
여지가 없는 한 가지 결론에는 다달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한없이 복잡다단하고 신비스럽고 매혹적인
그러한 '어떤것'이라는 것이다.
제 2 장 인생을 일곱 번 이상 산 에반스
나는 브록샴 씨가 모은 전생기억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테이프에 관
해서 연구를 시작했다. 곧 여섯 번의 전생을 기억해 낸 삼십대의 직장
여성에 대해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기혼여성으로서, 금생을 더하면 무
려 일곱 번이나 태어난 셈인 이 여인은 여섯 번의 자기의 과거 신분들
을 밝힐 수 있었다.
나는 우선 이 여인의 전생담이 실린 테이프를 경청해 보았다. 내가
첫번째로 경청한 세 개의 테이프에 실린 전생담들은 우리가 잘 알지 못
하는 시대의 역사와 관계가 있었으므로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
고 테이프에 실린 이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어떤지 조사해 보았더니
많은 이야기들이 사실임이 계속 드러났다. 나는 역사책을 읽어 본 후에
야 그리고 역사학자들을 찾아가 면담을 해본 후에야, 이 여인이 녹음테
이프에 진술한 세부 사항들이 사실임을 믿을 수 있었다.
그녀의 문제의 전생들 가운데 한 번을 3세기 경에 영국의 '에보라쿰'
곧 '요크 시'에서 보냈는데, 당시 영국은 로마가 집정하고 있었다. 그
리고 서기 1190년 경의 유태인 대학살 당시 그녀는 또 다시 '요크시'에
서 살았다. 그리고 15세기 경에 불란서의 '브르스 시'에서 대부호인 꿰
르 씨의 하녀로서도 살았다.
이 여인에게는 앞의 세 번의 놀라운 전생 외에도 세 번의 전생이 더
있다. 곧 16세기 스페인의 케더린 공주의 시녀로서 스페인에서 살았던
전생과, 17세기 초 영국에서 앤 여왕 재위시에 런던에서 바느질로 생계
를 이어 가던 가난한 소녀로서의 전생과, 20세기 초 미국 메릴랜드 주
의 수녀원에서 수녀 노릇을 했던 전생 등이 있다.
그녀의 전생들은 서로 겹치지 않았다. 전생들 사이에 시간의 간격이
가장 짧은 것이 15년인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수녀였던 전생과 1939년
태어난 금생과의 간격이 15년인 것이다.
이 전생 목록이 그녀의 전생 전부를 포괄한 목록은 아니다. 다만 여
섯 번의 최면에 들어 여섯 번의 전생을 기억해 내어 경험한 뒤에 더 기
억해 보는 것이 싫증이 나고 무서워서, 더 이상 최면상태에 들기를 거
절했을 뿐이다.
내가 그녀와 만나 이야기한 것은 그녀가 최면 상태에서 전생을 기억
한 지 만 5년이 지난 뒤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최면에
들어서 전생을 기억해 볼 수 있겠느냐고 청했다. 나는 이번만은 녹음기
는 물론 촬영기도 가지고 참석하고 싶었다. 그녀는 나의 요청을 받고
며칠 동안 생각하더니 전화로 승낙을 알려왔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자기가 최면 상태에 있는 것을 촬영해도 좋으나 자기의 이름
만은 밝히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자기 처가 일곱 번의 인
생을 가진 사실에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편의 이러한 요구가 타당하다고 생각되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본명 대
신 '제인 에반스'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로 했다.
'제인 에반스'여사가 최면 상태에서 기억해낸 여섯 번의 전생들과 거
기에 딸린 날자들은 다음과 같다.
1. 로마제국 통치하의 영국에서 살았던 통치자 가정교사의 아내로서
의 전생(서기 286년 경)
2. 영국 '요크 시'에서 유태인 여성으로서 산 전생 (서기 1190년 사
망)
3. 불란서 '부르스 시'에서 꿰르 씨의 하녀로서의 전생(서기 1451년
사망)
4. 스페인 케더린 공주의 시녀로서 산 전생(케더린 공주는 1451년 부
터 1536년까지 살았음)
5. 앤 여왕 재워시에 런던에서 바느질 품팔이 소녀로 산 전생 (앤 여
왕은 서기 1665년부터 1714년까지 살았음)
6. 미국의 메릴랜드 주 수녀로서의 전생(1920년 무렵에 사망)
7. 금생의 '제인 에반스'(1939년 탄생)
제 3 장 에반스 여사의 세 가지 전생
1. 요크 시에서의 유태인의 아내
제인 에반스는 최면 상태에 들어서 레베카라는 이름의 유태여인이 되
었다. 레베카는 요크대성당의 외부를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
작했다.
서기 1189년 유태인인 레베카는 과일과 채소를 사느라고 인근 시장에
서 장을 보고 있었다. 남편의 이름은 죠셉으로 돈많은 고리대금업자이
며, 나이가 사십대인 이들 부부에게는 열여덟살 난 아들 죠셉과 열한살
난 딸 레이첼이 있었다. 레베카의 가족은 커다란 돌집에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유태인 부호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거주하는 요크 시의 북쪽이
었다고 한다. 이 무렵의 역사적인 기록으로는 그러한 것에 대한 확실한
사실을 알 수 없다. 다만 유태인 공동체에 속했다는 소수의 유태인 이
름이 전해질 뿐이다.
레베카는 할아버지가 지중해에 위치한 사이프러스 섬 출신이고 나머
지 가족들은 영국에서 출생했지만 영국인은 아니었으며 사회에서 버림
받은 계급이었다고 자기의 혈통을 설명했다.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당시 체스터, 링컨, 런던 등지에서 유태인을 반대하는 폭동
이 일어나자 불안한 나날이 시작되었다. 레베카는 플란타지니트 왕가
출신인 헨리 왕과 유태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유태인들은 법정에서 재판 받을 때 헨리 왕으로부터 보호를 받았고 왕
은 그 보답으로 돈을 지불받았다. 그러나 레베카는 왕이 서거한 해에
일어난 사건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유태인을 이단자로 몰아 위협하는
기독교인들에 관한 레베카의 진술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초래한 사건
을 사실상 설명하고 있다. 반회교 감정은 물론 반유태인 감정이 한창
고조 되고 있던 그 무렵의 불란서와 영국에서는 군중들이 이단자로 몰
린 유태인을 향해서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살인과
폭동이 뒤따르게 되었고 유태인은 '그리스도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레베카는 남편인 죠셉에게서 돈을 빌려간 메베리제와의 재판이후 몹
시 두려움을 느꼈다. 문 단속을 철저히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밤에 돈을
받으러 갈 때에는 유태인이란 표지를 위해 달게 되어 있는노란 뱃지를
떼고 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레베카가 말한 메베리제라
는 사람이다. 레베카는 당시 연대기 편자가 '유태인 학살의 주모자'라
고 기록한 메레비제라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는 것 같다. '메레비제'와
'메베리제'는 서로 거의 비슷한 이름이다. 이 사람은 후일 유태인 학살
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벌금을 물고 유형에 처해졌다고 전해진다. 메
레비제라고 불리는 요크 시의 이 미미한 귀족은 유태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으므로, 그 돈을 갚지 않으려고 그들을 살해함으로써 빚을 청
산하려 했다는 것이다. 위급한 상태가 계속 되자 레베카의 가족들은 성
을 빠져나와 성당에 피난처를 마련하여, 성당 밑바닥에 있는 지하실로
내려갔다고 한다. 레베카의 가족들이 숨은 곳은 요크성 성문 밖에 위치
한 조그만 성당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곳에서 레베카는 딸 레이첼을
빼앗겼다. 그리고 레베카 역시 성당 안의 지하실에서 살해당했다.
레베카의 말을 담은 테이프를 욕크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인 도브슨 박
사가 들었는데, 그는 '1190년의 유태인 대학살'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한 사람이다. 도브슨 교수는 레베카가 사용한 언어는 중세영어라기보다
는 12세기에 쓰던 영어라고 밝혔다. 또 레베카의 얘기는 그 사건이 일
어난 당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일치한다고 했다. 도브슨
교수는 레베카가 성에서 성당으로 도망했다는 설명을 듣고 그 성당이
어느 성당인지 찾아내고자 했다. (그 도시에는 약 40개가 넘는 성당이
있었는데 지금도 약 반수 가량이 형태가 조금씩 달라진 채로 남아 있다
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브슨 교수는 성모마리아 성당이 레베카가
최후를 맞았던 곳이라고 짐작하게 되었는데, 그 성당은 레베카가 말한
것처럼 성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다고 한다. 그런데 틀린 점
이 있다면 대성당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성당도 지하실을 가지고 있
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1975년 9월, 성모마리아 성당을 수리하던 한
일꾼이 이 성당에서 예배실처럼 보이는 지하실을 발견했다. 일꾼은 석
굴과 둥근 천정 등을 보았다고 말했다. 또 이 건물이 로마풍의 건축양
식으로 지어졌는데 그것은 서기 1190년 이전에 유행했던 양식이라고 한
다.
레베카는 말하던 도중에 군중들이 이단자라고 유태인을 몰아 세우며
위협을 하던 광경을 생생하게 떠올리듯, 두렵다는 말을 반복했다. 유태
인들은 자기의 자식이 남의 손에 살해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스스
로 죽이기도 했다고 레베카는 말했다. 이는 '자비살인'이라고 표현되고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요크대학살 당시 일어났던 일 중에서 가
장 가슴아픈 일이었다.
제 3 장 에반스 여사의 세 가지 전생
2. 로마시대 가정교사의 아내
요크 시는, 제인 에반스 여사가 전생에 유태인으로 태어나 살았던 곳
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로마인의 아내로서 살았던 장소로 바
뀐다. 브록샴 씨의 최면에 의해 12세기 경의 레베카는 리보니아가 되었
다.(곧 요크 시는 제인 에반스 여사가 유태인으로서 산 곳인 동시에 로
마인의 아내로서 산 곳이기도 하다.)
리보니아는 서기 286년 경 영국에서 일어났던 음모와 반란사건에 대
하여 자신이 본 대로 솔직하게 묘사했다. 서기 3세기경의 이 인생은 제
인 에반스가 살았다고 말하는 여섯 번의 전생들 가운데 최초의 전생이
며 녹음한 전생 기록 가운데 마지막의 것이다. 그녀는 리보니아의 전생
까지를 기억한 후 더 이상 최면에 드는 것을 거절하며 몸이 몹시 피곤
하다고 말했다.
리보니아는 타이터스의 아내로 그녀의 남편은 그녀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타이터스는 콘스탄티우스라고 불리우는 저명한 로마인의 아들
에게 라틴어와 희랍어, 그리고 시를 가르치는 가정교사였다. 콘스탄티
우스의 가족은 에보라쿰이라는 요크 시 외곽의 저택에 살고 있었다.
리보니아는 냉대받고 탄압받는 유태인 그룹에 속했던 12세기경의 레
베카와 비교해 볼 때, 훨씬 교양있는 그녀는 더 많은 이름과 사실들을
열거해가며 영국 역사의 격동기 동안에 살았던 자신의 전생을 기억했
다. 그녀가 사람들의 이름을 말할 때는 거의 정확했으나 이야기 가운데
숨길 수 없는 큰 흠이 있었다. 역사책에는 로마의 황제로 커다란 치적
을 남긴 콘스탄티우스가 언급되지만, 어디에도 그가 서기 286년에 로마
집정하의 영국에서 살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리보니아는
그가 영국의 총독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대한 역사적 사실을 그릇되게 말했다면 그녀의 전생기억은 전부
거짓말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앞서 말했던 것처럼 리보니아는
역사적으로 있었을 법한 일에 대하여 불가사의하게도 많이 알고 있었
다. 또 이상하게도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리보니아의 설명은 역사책에
기술된 것과는 꽤 달랐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그녀의 설명이 틀렸다
고 논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리보니아의 말을 엄밀하게 추적해 보았
더니 그 유명했던 여러 인물들이 행방불명이었던 기간에 일어났던 일들
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책에 공백으로 비어 있는 시기를
메꾸어 놓은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 놀라웠다.
리보니아는 콘스탄티우스의 부인이 헬레나이며, 자신의 남편타이터스
가 가르치는 소년, 곧,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이름이 콘스탄틴이라고 말
했다. 리보니아의 말처럼 콘스탄티우스의 부인은 헬레나였으며, 그 아
들은 콘스탄틴이었는데 그가 바로 나중에 콘스탄틴 대체(大帝)로 알려
지고 콘스탄티노를 시를 이루었으며 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았던
그 유명한 황제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책의 어디에도 콘스탄티우스의 가족들
이 서기286년에 영국의 총독으로서 리보니아가 말한 에보라쿰에 살았다
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 영국사의 대가인 리드대학교
의 브라이언 교수는 그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그는 리
보니아가 진술한 대로 콘스탄티우스가 영국에 총독으로 갔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기 283년, 콘스탄티우스가 달마
티아의 총독으로 알려졌을 당시부터, 서기 290년, 다시 기록에 의해 나
타날 때까지의 행방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대제의 일생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기 286년 경에
그가 어디 있었는가 하는 것과, 그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
지 않다. 콘스탄틴 대제의 자서전 작가조차도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명
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의 출생 연도는 서기 272년부터
280년 사이가 아닐까 추정되고 있는데, 오늘날 역사가들은 서기 272년
을 합당한 것이라 보고 있다. 콘스탄틴이 서기 272년에 태어났다면, 에
보라쿰의 정원에서 리보니아의 남편에게서 무기를 쓰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던 당시의 나이를 열네살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리보니아의 전생기억을, 공백으로 남겨져 있는 역
사상의 시기를 토대로 꾸며낸 단순한 허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녀는
콘스탄티우스가 역사상으로 행방불명이었던 기간에 대한 자신의 진술과
완전히 부합되는, 실증이 가능한 사실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콘스탄티우스의 저택에서 연회가 있을 때면 쓰여지곤 했던 육류
와 과일들이며 은잔에 담긴 사이프러스산 포도주 등 그 시대에 애용됐
던 연회용 준비물의 이름들을 자세하게 열거할 때, 오늘날의 사학도들
은 논박할 여지를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리보니아는 콘스탄티우스에게 로마로 돌아오라는 황제의 칙명을 가지
고 온 알렉터스라는 사람과 그 후의 정변에 대해서도 말했다. 서기 286
년에 콘스탄티우스와 그의 가족들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 역사에 기
록된 것이 없다 할지라도, 알렉터스가 이 무렵 영국에 체류하면서 권력
을 잡으려고 계획했다는 것은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알렉터스는 해
군대장 카라시우스와 함께 영국 내의 로마인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하였
다. 카라시우스는 당시 게소리아쿰에 있는 로마함대의 책임자였는데,
그들은 로마인 정권의 전복에 성공하여 몇 년 동안 정권을 잡았다. 그
런 까닭으로 그들의 얼굴이 오늘날 자주 독립을 기념하는 영국 주화의
표면에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리보니아는 서기 286년에 있었던
불명료한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카라
시우스와 알렉터스가 로마로부터 독립하여 다스린 9년 동안과 그 다음
또 다시 9년이 지나기까지, 다른 사람 아닌 콘스탄티우스가 로마로부터
돌아와 다시 영국을 정복하기까지, 리보니아와 헬레나의 가족들은 숨어
살았다.
콘스탄티우스는 알렉터스의 세력들을 몰아낸 후 10년이 지난 서기
306년에 에보라쿰에서 죽었는데 헬레나가 아닌, 정략결혼한 황제의 딸
데오도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셋과 딸 셋 등 모두 여섯 명의 자식을 두
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은 뒤에 영국에 주둔한 로마군에
의해 황제로 추앙받아 후일 로마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사람은 헬
레나의 아들인 콘스탄틴이었다.
리보니아는 남편 타이터스와 함께 숨어 사는 기간 동안 앨바너스라는
사람을 통해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또 콘스탄티우스와 헤어진 헬
레나와 아들 콘스탄틴도 앨바너스에게 소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리보니
아의 남편인 타이터스는 가장 열렬한 기독교 귀의자였다. 학살을 영국
에서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한 콘스탄티우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보
니아와 남편 타이터스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리보니아가 말하는 앨바너스는 오늘날 성자 앨반으로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현재, 리보니아가 숨어 살다가 앨바너스를 만나 기독교에 귀의
했다는 베룰람 시는 '성 앨반스 시'로 명명되어 불리고 있다. 또한 성
자 앨반이 베룰람에서 순교했다는 기록이 있다. 앨바너스가 곧 성자 앨
반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기독교가 헬레나의 가족과 하인
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분명하다. 헬레나와 아들 콘스탄틴
이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경위는 역사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들은
고금을 통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기독교인이다. 헬레나는 대단히 믿음
이 깊은 기독교인이라 후일 성자로 추앙되어 '성(聖) 헬레나'로 추존되
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에서 이교도의 신을 몰아내고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최초의 황제라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콘스탄틴은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죽은 후 최초의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그는 모든 부하들의 방패에 기독교를 상징하는 도안을 그려 넣
었으며, 그 자신도 똑같은 방패를 들고 전투에 참가했다. 도안에는 창
살을 포개어 만든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이름 가운데 첫번째 글자를 새
겨 넣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도안은 로마의 국기에 그대로 보이게 된
다. 현재의 사가들은 콘스탄틴이 종교 고문이었던 스페인 대주교 오씨
우스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풀이한다. 오씨우스는 리보니아의 이
야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리보니아의 남편이 죽는 날 방에 "그를
신부로 만들기 위해 베룰람에 온 사람이 바로 오씨우스"라고 그녀는 말
했다. 그리고 오씨우스는 영국 출신이 아니라고도 했다. 리보니아의 전
생기억을 들은 역사가들은 그녀의 말이 대체로 믿을 만하며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들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2. 한번 이상 사는가
제 3 장 에반스 여사의 세 가지 전생
3. 프랑스에서의 하녀
세번째 이야기에서 제인 에반스는 프랑스 르와르 계곡에 있는 브르스
시에서 자신이 살았다고 기억했다. 그녀는 브르스시에 한번도 가본 적
이 없었지만 그 도시에 있는 집과, 그녀가 살았다는 집의 정원과 건축
양식, 긴 복도들이 있는 벽과 실내를 장식한 그림들, 그곳에 살았던 사
람들에 대해 정확하게 진술했다. 제인 에반스는 프랑스의 대부호였던
꿰르 씨의 저택에 대해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었고, 꿰르 씨에 대한 책
이 영어로 발간된 일도 없었다.
전생기억에서 그녀는 꿰르의 하녀인 십대 소녀 아리종이 된다. 꿰르
는 당시 프랑스 왕 샤를르 7세의 재정담당 고문으로 굉장한 부자였다.
그의 인생 절정기에는 프랑스에서 왕을 제의 한다면 가장 유력한 인물
이었다. 그러나 그의 몰락은 상당히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왕의
정부(情婦)를 독살했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했던 것이다. 아리종은 여기
에 얽힌 이야기들을했다.
꿰르는 왕과 귀족들에게 많은 돈을 빌려 주었다. 그가 살인을 했다는
무고로 사실심리를 받지만, 판결문의 요지는 "왕이 그의 재산을 몰수한
다는 것과 꿰르의 채권자로서의 권리가 모두 무효화된다는 것"이었다.
꿰르의 재산 그리고 왕궁 인물들과의 관계, 왕의 정부 아녜스에 대한
꿰르의 애정 등 아리종이 말한 것이 사실이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쉽
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사한 사람들은 웨일즈 지방의 가정부인
인 에반스 여사가 중세기 불란서 역사에 관하여 전문가도 놀랄 만큼의
사실을 많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전생기
억들이 모두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녀의 말이 역사적 사실의 단순한 나
열이 아니었다. 꿰르가 체포됨으로써 그녀는 자살을 하게 되는데, 그녀
는 비교적 과묵하고 순진한 처녀였다. 아마도 꿰르가 들려주었음직한
당시의 궁중생활에 대해서도 아리종은 언급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그녀
가 진술한 대부분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아리종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다가 꿰르의 하녀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꿰르는 알렉산드리아, 베이루트, 카이로 등의 항구도시들과 통상 거래
를 했는데 그의 이름과 선박은 아랍권의 여러나라에 알려져 있었다. 그
는 교황으로부터 아랍권의 이교도들과 무역할 수 있는 특허를 얻어 막
대한 재산을 모았다. 꿰르는 주로 그의 고향인 브르스에서 살았다. 브
르스에는 그의 집이 서너 채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 쏘오세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저택도 지었다.
아리종은 꿰르가 많은 저택을 소유했으나 브르스에 살았다고 하며 장
날마다 리옹에 가서 그의 옷감들을 팔았다고도 한다. 사실 꿰르는 리옹
에서 열리는 장을 부활시킨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주인 꿰르가 왕의 정부(情婦) 아녜스에게 다이아몬드를 선물
한 사실도 말했다. 꿰르는 아녜스에게 다이아몬드를 주며 그것이 불란
서에서 최초로 가공한 다이아몬드라고 말했다고 아리종은 진술했다. 어
떤 역사가는 꿰르가 프랑스에서 다이아몬드를 일정한 모양으로 자르게
한 최초의 사람이며, 아녜스가 프랑스에서 다이아몬드를 몸에 치장한
최초의 여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녜스가 꿰르를 찾아간 것은 왕에게 필요한 돈을 빌리기위해서였다
고 아리종은 말했다. 프랑스 역사가들은 샤를르 7세가 군인들 봉급을
성을 증축하는 데 다 써버리고 그의 정부를 시켜 꿰르에게 돈을 빌어오
게 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꿰르와 아녜스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아녜스가 꿰르를 방문했다는 것은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
들이 연인관계라는 소문도 있지만 그녀는 분명히 꿰르의 절친한 친구였
으며 궁중에서 그의 편이 되어주는 동조자였다. 아녜스가 죽은 뒤에 발
견된 유언장에는 꿰르가 유언집행자로 지명되어 있다.
또 아리종은 주인인 꿰르가 금 세공인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프랑스 역사가들에게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그가 모피와
가죽제품을 취급하는 상인의 아들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금 세공
인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금세공인의 아들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꿰르는 값비싼 금속과 보석들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었으며,
젊은 나이에 브르스시의 조폐국장이 되었을 정도로 이러한 것들에 통달
했었기 때문이다.
아리종은 샤를르 7세의 다리가 길쭉하고 가늘어서 학의 다리와 같으
며 바르와 왕가의 특징인 긴 코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샤를
르 왕은 그러한 외모를 가졌다고 한다. 지금 전해지는 그의 초상을 보
면 코가 아주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왕이 몸에 달라붙는 의복
을 입었을 경우 다리가 너무 가늘어서 아주 우스워보였으며, 당시 프랑
스 사람들은 그의 다리를 학의 다리와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리종은
샤를르 7세가 어떻게 해서든 프랑스를 구하려는 열의를 보이지 않았으
며, 또, 사람들이 말하기를, 오를레앙의 처녀 쟌 다크를 영국인에게 넘
겨준 장본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샤를르 7세가 쟌 다크를 영국인에게
넘겨 주었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역사가들에게 논쟁거리로남아 있다.
1431년 쟌 다크가 화형당할 당시 왕은 그녀를 구해내려 하거나, 그녀의
몸값을 치르고 적에게서 그녀를 되찾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여
론은 그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왕에게로 돌렸다.
아리종은 아녜스가 죽자 주인 꿰르가 몹시 상심하고 있으며 그녀는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런데 꿰르의 반대파에서는 그
가 아녜스를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아리종이 몹시 상심하였다는 것
이다.
그녀의 말은 여기서도 맞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여지껏 아녜스가 독
살당한 것인지의 여부를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가 딸을 낳고 산후
병으로 죽었다고 보는 역사가들도 있다. 그러나 15세기 연대기 편자들
은, 아리종처럼, 루이 황태자가 아녜스를 독살했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종이 꿰르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
한 것은 사실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꿰르가 아녜스를 독살했다는 소문
이 궁정에 펴졌고 그가 그녀의 죽음에 관여琴다는 허위증언이 왕에게
제출되었기 때문이다. 1451년 아리종의 주인 꿰르는 샤를르 7세의 정부
인 아녜스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인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꿰르의 몰락과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아리종은 말하고 있다. 사를
르 7세는 꿰르의 재산을 모두 몰수해 그를 파산시켜버렸다. 그런 와중
에서 꿰르는 군대가 들이닥쳐 아리종이 다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
는 차라리 아리종이 도망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종은 도망
가지 않았다. 그 후 아리종은 꿰르가 준 물약을 마시고 자살을 했다.
꿰르도 물약을 마셨는가 하고 브록샴이 묻자, 아리종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꿰르는 아리종을 음독케 하고 왜 자신은 음독하지 않았을까? 꿰르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보면 그의 무정한 행동에 대해서도 합당한
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기독교적인 프랑스에서는 이단자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다. 꿰르가 보호하지 않았다면 아랍인들은 살기가
몹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후일을 기약할 수 없는 다급한 상황에
서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약물을 먹여 그나마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도
록 한것은 꿰르의 배려였을 것이다.
꿰르는, 결국, 지하 감옥에 투옥되고 그의 재산과 소유물은 몰수당했
다. 그가 아녜스를 독살했다는 고소는 중도에 취하되었고 다른 죄목들
은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공판정에 올랐다. 꿰르는 변호사도
증인도 부를 수 없는 가운데 심문을 받고 고문을 당한 끝에 유죄 판결
을 받았다. 그는 공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 목숨
을 보존했다. 그러나 모든 관공서의 출입이 금지되고 재산을 압수당했
으며 출옥을 할 수도 없었다.
체포된 지 삼년이 지나 꿰르는 감옥을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프랑스
국토를 가로질러 도주했지만, 로오느 강 가까이의 국경에서 잡혀 수녀
원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꿰르는 자기를 따르는 약간의 추종자들에
게 편지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 때 편지를 받은 그의 추종자 가운데
는 과거에 선장이었던 사람도 있었다. 드디어 이십여 명의 무장을 한
사람이 한밤중에 그를 구출해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로오느 강을 건너
서 도주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후 꿰르는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교황의 도움으로 터어키를 토벌하는 십자군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
다. 그는 이 원정에 나가 소아시아의 해안에서 싸우다가 1456년 부상을
입고 예순살의 나이로 전사했으리라고 추정된다.
아리종의 이야기는 참으로 인상깊은 전생담이다. 그녀의 폭넓은 지식
은 15세기 당시 프랑스의 많은 분야를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의 의복 형태와 복장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15세기 화가들에 대한 많
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또 브르스에 있는 꿰르의 저택 안팎을 묘사
해 줄 수 있었고, 꿰르가 소유했던 물건들과 그가 수집한 물건들에 정
통했다.
역사가인 미레 씨는 그의 저서에서 "꿰르의 집과 인생은 신비로 가득
차 있다"고 적고 있다. 아리종의 이야기 역시 그를 더 신비롭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종이 15세기 프랑스인인 꿰르에
대하여 보통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희귀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종은 초상화와 그림들이 걸려 있는 긴 복도끝의 방에 귀한 황금
사과가 있다고 말했다. 터어키의 군주가 꿰르에게 황금사과를 주었다는
것이다. 르와르 계곡에 사는 역사가나 박물관장 가운데도 이 황금사과
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꿰르의 집 현관 입구에 돌
로 조각한 밀감나무가 있었다. 이 밀감나무는 그가 중동지역과 교역 관
계를 가녔던 것을 상징하는 뜻으로 조각한 것이다.그리고 15세기 프랑
스 사람들은 밀감을 황금사과라고 불렀다. 아리종이 말한 황금사과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무런 해명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역사학
교수인 베일리 교수는 황금사과의 정체를 찾아 내었다. 그는 공문서 보
관소에서 [꿰르로부터 왕실 재무성이 압수한 물품의 목록]을 뒤져 보다
가 황금석류나무 열매라는 품목을 발견한 것이다.
석류나무 열매는 크기와 모양이 사과와 아주 비슷하다. 아마도 그 황
금열매는 그 후 누가 녹여서 썼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어쨌든 꿰르가
황금사과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은 밝혀졌다.
이 황금사과의 발견은 요크 시에서 '성모마리아 성당'의 지하실 발견
만큼 흥미로운 것이었다. 지하실이 발견됨으로써 유태인 레베카가 학살
당했다는 전생기억이 거짓이나 허구가 아니라는 구체적인 반증이 이루
어졌던 것이다.
2. 한번 이상 사는가
제 4 장 최면술과 윤회에 대한 역사적 연구
사람들은 브록샴 테이프에 담긴 이야기가 갖고 있는 분위기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테이프에 담긴 대화는 피술자가 그 당시를 사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암시해 주는 자질구레한 사항들을 쌓아 놓은 것이기도
하다. 역사가들은 역사적 사실의 목록이나 인명록을 조사할 때처럼 브
록샴 테이프에 담긴 대화의 사실 여부를 조사해 보았다.
요크 지방에 한번도 가 본 일이 없는 여인이 유태인 대학살 당시 젊
은 츄태 여인으로서 요크 지방에서 살았다는 경험을 겁에 질려서 아주
자세하고 조금도 꾸밈없이 말하는 것과 같은 일은 실로 이해하기 어려
운 일임에 분명하다. 조사에 참가한 이들은 제인 에반스의 전생기억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밝히기 위해 그녀가 살았다는 곳을 가 보았고,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모조리 검토해 보았다. 또 역사학자, 고
고학자, 기록보관인들과 심리학자들을 찾아가 의문나는 점을 물어 보기
도 했다. 그들에게 얻은 답변은 언제나 "그것은 정말이다" 또는 "그것
은 정말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역사가가 "그것은 역사적 사실
과 다르다"고 답변한 경우도 있었으나 좀 더 연구하고 조사한 뒤에 자
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정정한 경우도 여러번 있었다.
최면술과 전생에 대하여 서구의 심리학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을 미지의 땅에 비견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미지의
땅을 탐험하기 위해 배를 타고 찾아다닐 뿐 배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궁극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마
음의 문제인데, 도대체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는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 일을 행하는가 설명함
으로써 정의를 내려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영사기의
필름으로부터 투영된 한 장면을 토론하는 것과 같이 마음의 작용에 대
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브록샴 씨가 제인 에반스 여사를 통해 보여준 현상을 대부분의 최면
술 개업의들이 시도하여 보여주는 것과는 틀리다. 다시 말해서 최면술
피술자가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전생을 기억하는 방법은 드문 일인 것이
다. 일반 심리학에서는 최면에 들어 과거를 기억하다는 것을 금생의 과
거 일을 다시 경험해 보는 것으로 해석한다. 금생 이전의 과거로 돌아
가서 그 때의 일을 기억하고 경험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았
다.
설사 정신과 의사가 브록샴의 이론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하거
나 그의 이론에 상반되는 어떤 이론들을 내세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브록샴의 이론이 그르다고 확증할 수 있는 지식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백여 년 동안이나 사람들은 최면술을 오해하여 왔으며,
의학자나 전문인들도 또한 최면술에 대하여 그릇된 견해를 가져 왔다.
최면술의 선구자는 18세기 후반기의 오스트리아 사람인 메스메르 씨
이다. 그는 최면술 Mesmerism을 시도하여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빠리의 전문가협회는 메스메르의 최면술에 대한 이론과 실례를
조사해 보고나서, 최면술은 속임수이며 메스메르는 사기꾼이라고 비난
했다. 그 후 메스메르는 대중 들로부터 멀어져갔다. 의학 잡지들은 여
러 해 동안 최면술에 대한 실험 보고를 게재하기를 거부했다. 1842년
마취약 대신 최면술을 사용하여 많은 수술을 한 외과의사가 있었다. 환
자가 최면에 든 동안 아픔을 모르게 다리를 절단한 수술에 대하여 실험
보고 형식의 논문을 발표하자, 영국 의학협회는 뒷날 그들의 의사록에
서 이 실험 부분을 삭제하도록 합의했다. 그들은 "환자들이 감쪽같이
속아넘어가게 하여 환자가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가장했다"고 생
각했던 것이다.
최면술이 메스메리즘 Mesmerism이라 불리던 단계에서 벗어나, 그에
대한 연구가 진일보하게 되면서, 히프노티즘 Hypnot-ism이라고 일컬었
는데 그 뜻은 '잠을 자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자 파블로브는 "최면이
란 수면의 한 형태"라고 보기도 했으나 이 역시 올바른 견해는 아니다.
뇌파전위기록기를 사용한 임상실험 결과, 최면이 일종의 수면 상태나
아니면 반쯤 의식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 최근에 밝혀졌다. 뇌파
전위기록기란 두개골에 전극을 부착시켜 뇌의 활동을 측정하는 기계를
말한다. 뇌파 전위기록기를 최면술 피술자의 머리에 씌우고 그 뇌파를
기록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사람의 뇌파 활동은 잠든 사람의 뇌활동과
같지 않고 오히려 완전한 의식을 가진 사람의 뇌활동과 같았다. 과거에
는 최면을 수면의 한 형태라고 정의했으나 이와 같은 발견이 있은 뒤부
터는 최면 상태를 '의식의 변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정신과 의사들은 마치 꿈을 분석해 보듯이 전생기억을
논했다. 꿈이라고 하는 환상에 적용되는 동일한 원리를 최면 상태 속에
서 경험하는 환상에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꿈과 전생기억은 지나
간 인생에 근거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럴 경우, 부록샴 씨가 행하는 전
생기억에서, 최면에 들어 전생을 기억하는 시간이 꿈을 꾸는 시간보다
길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원천이 되는 것은 아마도
몇해 전에 읽은 역사책일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꿈이라든지 최면에 들어 기억한 전생의
내용으로부터 우리 마음에 내재한 생각과 숨은 욕망같은 것을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꿈에 대하여 서로 다른 해석들을 하고
있는데, 꿈에 관한 그들의 주장이 전생기억을 해석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 최면에 들어 전생을 회상하는 것이 꿈보다는 브록샴 식의
전생기억 방식에 더 가까운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다 큰 어른이 브록샴의 방법이 아닌 보통의 최면 상태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옛사건들을 회상하며 실제로 어린아이로 돌아가 지나간 시
절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최면술에 대한 문외한으로서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일 것이다. 최면에 든 사람이 시술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얼마만큼이나 환상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까 하는 것
은 의문이다. 최면에든 어느 건축업자가 그가 삼십 년 전에 지은 담을
설명하는데 담의 크기, 형태, 위치 그리고 담을 쌓는 데 소요된 정확한
벽돌의 수 등을 최면술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서술했다. 이 벽돌담을 나
중에 조사해 보았더니 마지막 벽돌 한 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가 말한
것과 꼭 같았다. 이런 경우 건축업자는 삼십년 전의 과거를 하나도 틀
리지 않고 사실대로 진술했는데 아무런 과장도 없었고 환상도 없었으며
아무 것도 더 보태지 않았다.
최면과 전기 자극은 둘 다 과거를 기억시키는 자극제와 같은 것으로,
전극을 두뇌에 접촉했을 때와 같은 과정이 최면 상태에서도 일어난다고
브록샴 씨는 말한다.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점은 최면에 들었을 때는
피술자들이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의 과거에 대해서도 회
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곧 마음의 어느 깊숙한 구석에만 비축되어 있
는 잊혀진 전생의 흔적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전극
의 자극을 통했을 때는 금생에서의 잊혀진 과거밖에는 기억하지 못한
다.
이처럼 인간에게 윤회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 브록샴의
실험 외에도 서구 사람들은 윤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고대의 희랍인은 윤회를 미템시코우시스Metempsychosis
라고 불렀다. 세계의 모든 종족과 종교가 한때는 윤회를 그들의 신조로
받아들였다. 플라톤에서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플르다크에서
헨리 포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의 저명한 사람들이 윤회를 믿었다.
버지니아대학의 스티븐슨 박사는 동, 서양의 많은 어린 아이들이 전생
에 대한 기억을 하고 있으나, 성장해감에 따라 그러한 기억들을 차차
잊게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비단 어린 아이나
동양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윤회를 굳게 믿었던 사람으로 미국
의 벤자민 프랭클린이 있다. 그는 출판업자이자 작가인 동시에 미국의
독립전쟁에 관계했던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는 열 여섯살 때 이미 그가
태어나기 전에도 살았었다는 말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또한 그는 질량
불변의 법칙을 최초로 이해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물질은
그 형태가 변하기는 하나,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
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의 어느 것도 완전히 멸해버리는 것은 없다. 그것을 관찰할
때, 이를태면 한 방울의 물조차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할
때, 나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 죽음과 더불어 소멸해 버린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만물의 창조주께서 지금 존재하고 있
는 무수한 마음들이 매일 매일 없어져 버림으로 인해 새로운 마음을 계
속해서 만들어내야 하는 교역을 치르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나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이런 모습으
로 또는 저런 모습으로 이 세상에 상주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유니테리언파의 목사였던 윌리암 엘저는 윤
회의 연구에 그의 반생을 바쳤다. 1860년에 발간된 [윤회설에 대한 역
사적 고찰]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는 "윤회 사상은 그럴듯한 망상으로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 뒤 십오 년 동안
더 연구를 거듭한 후, 두번째로 발간한 책에서 그는 마침내 윤회사상에
귀의했다고 선언하였다.
러시아의 유명한 신비주의자 블라밧스키 씨가 1975년에 창설한 신지
학(神知學)협회는 근대에 와서 서방에서 가장 열렬히 윤회사상을 보급
한 단체이다. 블라밧스키는 우리가 인생에서 겪게 되는 불운이라든지
사건은 그 어떤 것이든 모두 우리가 금생이나 전생에서 지은 업보로 인
해 받게 되는 과보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방의 신지학(또는 접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업 Karma사상과 윤
회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인과응보설에 따르면, 금생에 우리가 생각
이나 행동으로 짓는 업이 다음 생에 우리가 언제 어떻게 태어날 것인가
를 결정짓는다고 한다. 따라서 열반을 증득하여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것을 가르치는 동방 종교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독교의 발상지인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사람들은 윤회를 믿었다. 성
경의 구약과 신약에서도 윤회를 암시하는 구절이 많이 보인다. 모세는
전생에 아담의 둘째 아들 아벨이었다고 믿었고, 아벨 자신은 메시아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구약은 예언자 엘리야가 다시 태
어날 것이라는 예언으로 끝을 맺고 있다. 심지어 예수의 출현에 대해서
도 유태인들은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예레미아가 다시 왔다고 말한다.
예수가 출현한 뒤로 오백 년 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이 윤회설을 믿었는
데, 그노시스파와 마니교도들과 같은 강력한 종파들이 바로 그런 대표
적인 보기이다. 그러나 서기 553년 바티칸공회는 교황의 승인없이 윤회
설을 이단이라고 공표하였다. 오늘날의 천주교 신학자들은 제5회 바티
칸공회의 파문 15조의 합법성 여부에 대하여 자주 논란을 벌이고 있는
데, 그것은 당시 교황은 파문 15조를 결코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로 말미암아 6세기 경부터 전 유럽에서 윤회설을 믿
는 사람을 이단자로 몰아 화형에 처하는 종교적 박해가 일기 시작하였
으며, 이로 인해 기독교와 윤회사상은 결별하게 되었다.
윤회사상을 가장 오랫동안 믿고 신봉해 온 사람들은 인도의 힌두교도
들이다. 서양 사람들 사이에는 종교란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이미 지나
간 시대의 산물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경향도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성
품에 관한 과학의 정의도 더 이상 사람들을 납득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과학자들의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더 깊은 뜻이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퍽 많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브록샴 씨의 테이프는 영혼의 윤회에 대한 옛 사람의 믿
음을 증거해 주는 자료가 되기도 할 것이다. 윤회사상은 이론으로 증명
이 안 되는 유일신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내세사상에 보탬이 되는 순
수한 관념일 수도 있다.
현대 심리학은 어떻게 하면 심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영위할수 있는가
에 대해 흥미있는 이론과 의학상으로 알아 두어야 할 일들을 제공하고
있지만 , 브록샴 테이프나 윤회에 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주지 못하고
있다.
브록샴 씨의 20여년에 걸친 연구는 윤회가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실하
게 증명해 주는 사례의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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