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정로평석
서언(緖言)
영축산정(靈鷲山頂)에서 세존이 염화(拈花)함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함이요, 소림암굴(小林岩窟)에서 이조(二組)가 삼배함은 모난 나무로 둥근 구멍을 막음이니, 고금 선지식들의 현언묘구(玄言妙句)는 모두 눈 속에 모래를 뿌림이다.
열갈(熱喝)과 통봉(痛棒)도 납승의 본분이 아니거늘 어찌 다시 눈뜨고 꿈꾸는 객담(客談)이 있으리오마는, 진흑과 물 속에 들어가서 자기의 성명(性命)을 불고(不顧)함은 고인(古人)의 낙초자비(落草慈悲)이다.
정법상전(政法相傳)이 세구년심(歲久年深)하여 종종 이설이 횡행하여 조정(祖庭)을 황폐케하므로 노졸(老拙)이 감히 낙조자비를 운위(云謂)할 수 없으나, 만세정법(萬世正法)을 위하여 미모(眉毛)를 아끼지 않고 정안조사들의 수시법문(垂示法門)을 채집하여 선문(禪門)의 정로(正路)를 지키고자 한다.
선문은 견성이 근본이니 견성은 진여자성을 철견(徹見) 함이다. 자성은 그를 엄폐한 근본무명, 즉 제8아뢰야의 미세망념이 영절(永絶)하지 않으면 철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문정전(禪門正傳)의 견성은 아뢰야의 미세가 멸진(滅盡)한 구경묘각 원증불과(究竟妙覺 圓證佛果)이며 무여열반 대원경지(無餘涅槃 大圓境智)이다.
이 견성이 즉 돈오이니, 오매일여(寤寐一如)․내외명철(內外明徹)․무심무념(無心無念)․상적상조(常寂常照)를 내용으로 하여 십지등각도 선문의 견성과 돈오가 아니다. 따라서 오후보임(悟後保任)은 구경불과(究竟佛果)인 열반묘심(涅槃妙心)을 호지(護持)하는 무애자재의 부사의대해탈을 말한다.
견성 방법은 불조 공안을 참구함이 가장 첩경이다. 불조 공안은 극심난해(極深難解)하여 자재보살도 망연불지(茫然不知)하고 오직 대원경지로서만 요지(了知)하나니 공안을 명료(明了)하면 자성을 철견한다. 그러므로 원증불과인 견성을 할 때까지는 공안을 참구에만 진력하여야 하나니, 원오(圜悟)가 항상 공안을 참구하지 않음이 대병(大病)이라고 가책함은 이를 말함이다.
공안 타파하여 자성을 철견하면 삼신사지(三身四智)를 원만증득하고 전기대용(全機大用)이 일시에 현전한다. 이것이 살활자재(殺活自在)하고 종횡무진(縱橫無盡)한 정안종사이니 정안이 아니면 불조의 혜명을 계승하지 못한다. 마조(馬祖) 제자 팔십명 중에 정안은 수삼인(數三人)이라고 황벽(黃蘗)이 지적함과 같이 정안은 극난하다. 그러나 개개가 본래 비로정상인(毘盧頂上人)이라 자경자굴(自輕自屈)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면 정안을 활개(豁開)하여 출격대장부(出格大丈夫)가 되나니 참으로 묘법증 묘법이다.
무릇 이설 중의 이례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이다. 선문의 돈오점수 원조(元祖)는 하택(荷澤)이며 규봉(圭峰)이 계승하고 보조(普照)가 역설한 바이다. 그러나 돈오점수의 대종(大宗)인 보조도 돈오점수를 상술한 그의 「절요(節要)」벽두에서 하택은 시지해종사(是知解宗師)니 비조계적자(非曹溪嫡子)라고 단언하였다. 이는 보조의 독단이 아니요 육조(六祖)가 수기(授記)하고 총림이 공인한 바이다. 따라서 돈오점수사상을 신봉하는 자는 전부 지해종도이다.
원래 지해는 정법을 장애하는 최대 금기이므로 선문의 정안조사들은 이를 통렬히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선문에서 지해종도라 하면 이는 납승의 생명을 상실한 것이니 돈오점수 사상은 이렇게 가공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렇듯 이설들의 피해가 막심하여 정법을 성취하지 못하게 되나니, 참선고류(參禪高流)는 이 책에 수록된 정전(正傳)의 법언(法言)을 지침 삼아 이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용맹정진 확철대오(勇猛精進 廓徹大悟)하여 고불(古佛)도 미도(未到)하는 초군정안(超群正眼)을 원증(圓證)하여 하택․규봉과 같은 지해종도가 되지 말고 마조․백장과 같은 본분조사가 되어 조계적자로서 불조의 혜명을 계승하여 영겁 불멸의 무상정법(無上正法)을 선양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허허, 구구한 잠꼬대가 어찌 이렇게 많은고!
억!
둥근 달 밝게 비친 맑은 물결에
뱃놀이 장단 맞춰 금잉어 춤을 춘다.
辛酉 仲秋佳節 伽倻山 白蓮庵에서
退翁 性徹 識
차례/선문정로 평석
서언(緖言) 退翁 性徹 2
1. 견성이 곧 성불이다.〔見性卽佛〕 7
2. 중생의 불성〔衆生佛性〕 35
3. 두 가지 번뇌망상〔煩惱妄想〕 41
4.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無上正覺〕 47
5. 남이 없는 법을 깨침〔無生法忍〕 71
6. 무념의 바른 종지〔無念正宗〕 87
7. 무심함을 보임함〔保任無心〕 99
8. 자나깨나 한결같음〔寤寐一如〕 119
9. 죽음 가운데서 살아남〔死中得活〕 131
10.크고 둥근 거울같은 지혜〔大圓鏡智〕 147
11.안팎이 환히 밝음〔內外明徹〕 155
12.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춤〔常寂常照〕 163
13.이해적 깨달음과 점점 닦음〔解悟漸修〕 175
14.부분적 깨뜨림과 부분적 증득〔分破分證〕 199
15.많이 들음과 알음알이〔多聞知解〕 215
16.남김없이 번뇌를 다 없앰〔豁然漏盡〕 235
17.바른 안목을 가진 종사〔正眼宗師〕 247
18. 정(正)과 편(偏)의 현묘한 도리〔玄要正偏〕 255
19. 부처종자를 없앰〔銷滅佛種〕 271
후기(後記) 圓融 289
1. 견성이 곧 성불이다[見性卽佛]
纔得見性하면 當下에 無心하야 乃藥病이 俱消하고 敎觀을 咸息하느니라(宗鏡錄2 標宗章)
見性을 하면 卽時에 究竟無心境이 現前하여 약과 병이 전부 소멸되고 敎와 觀을 다 休息하느니라.
견성만 하면 즉시 구경의 무심경계가 나타나서 약과 병이 모두 없어지고 교(敎)와 관(觀)이 다 쉬게 된다.
진여 지혜의 무한한 빛은 항상 법계를 비추지만 중생은 먹구름 같은 3세6추 무명에 가리워 보지 못한다. 구름이 없어지면 푸른 하늘이 드러나 밝은 해를 보는 것과 같이 극히 미세한 3세 망념까지 다 없애면 확철히 깨쳐 진여 본성을 환히 본다. 일체망념이 전혀 없으므로 무념, 또는 무심이라 부르니 이것이 무여열반(無餘跡槃)인 묘각이다.
그러므로 「기신론」에서 ‘견성은 미세망념이 완전히 없어진 구경각’이라 하였으며, 원효와 현수도 그들의 「기신론소」에서 ‘금강(金剛) 이하의 모든 중생은 무명 망념을 떠나지 못했다’고 하였고, 또한 ‘부처지위는 무념이다’라고 하였다. 금강유정(金剛喩定) 즉 등각(等覺) 이하의 일체중생은 망념과 생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등각도 부처의 거룩한 가르침과 법약이 필요하다. 약과 병이 모두 없어지고 교(敎)와 관(觀)이 함께 쉬어버린 무념무심은 무명이 영원히 없어져서 자기 본성을 철저히 본 묘각뿐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모든 법을 말하심은 모든 마음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나는 모든 마음이 없으니 어찌 모든 법이 필요하리오”라 하였으니, 과연 그렇다. 여러 부처님의 모든 법문(法門)은 중생의 온갖 병을 치유하기 위한 처방이다. 병 없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죽은 사람을 살릴 만한 신비한 처방과 묘약도 필요없다. 그와 같이 범부심, 외도심, 현성심(賢聖心), 보살심 등 한없는 중생의 본래 병인 일체의 생각과 망념을 단연코 벗어난 구경무심지(究竟無心地)의 대해탈인에게는 아무리 깊고 묘한 불조의 말씀[言敎]이나 관행(觀行)도 소용없다.
결국 법약과 온갖 병이 동시에 없어지고, 거룩한 말씀과 묘한 관행을 동시에 쉬는 구경무심지만이 견성이다. 이것이 가장 높은 대도를 철저히 증득한, 배움이 끊겨 하릴없는 한가로운 도인의 마음경계이다.
如楞伽經偈에 云하되 諸天及梵乘과 聲聞緣覺乘과 諸佛如來乘에 我說此諸乘은 乃至有心轉이니 諸乘은 非究竟이라 若彼心滅盡하면 無乘及乘者하야 無有乘建立이니라 我說一乘이나 引導衆生故로 分別說諸乘이니라(宗鏡錄1 標宗章)
楞伽經 偈頌에 이렇게 말했다. 諸天 및 梵衆乘과 聲聞 緣覺과 諸佛如來乘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諸乘들은 有心中의 轉變이므로 諸乘은 究竟無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에 그 各種의 有心이 滅盡하면 諸乘과 그 乘을 依止할 乘者도 없어 乘이라 하는 名稱조차 建立할 수 없는 大無心地이다. 이는 諸乘을 초월한 最上唯一乘이나 衆生을 引導하기 위하여 方便으로 分別하여 諸乘을 說한다.
능가경 게송에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 천승[諸天乘]과 범중승(梵衆乘), 성문연각승, 제불여래승이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승(乘)은 유심(有心)에서 굴러 변한 것[轉變]이므로 구경무심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만약 그 여러 종류의 유심이 다 없어지면, 모든 승(乘)과 그 승을 의지할 승자(乘者)도 없어서 ‘승’이라는 이름조차도 세울 수 없는 대무심지다. 이는 모든 승을 초월한 최상유일승(最上唯一乘)이지만 중생을 인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여러 승을 나누어 설명한다.
제천승, 범중승, 성문연각승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제불여래승도 유심(有心) 가운데 굴러 변한 것이어서 구경이 아니다. 모든 제불여래승까지도 모두 없어져버린 무여열반, 즉 구경무심만이 견성이다.
이것은 방편상 일승(一乘)이라고 부르지만 이 일승은 삼승(三乘)과 상대적인 일승이 아니라 제불여래승까지도 초월하여, 탈 것[乘]도 타는 사람[乘者]도 없는 최상승을 표현한 임시 이름으로 맨 마지막 구경의 깊고 깊은 현묘한 경계 대무심지를 말한 것이다.
故로 先德이 云하되 一賢在眼하니 千華亂墜하고 一妄이 在心에 恒沙生滅이라 賢除華盡하고 妄滅證眞하니 病差藥除하고 氷融水在로다 神丹이 九轉하니 點鐵成金이요 至理一言은 轉凡成聖이라 狂心이 不歇타가 歇卽菩提요 鏡淨心明하니 本來是佛이니라(宗鏡錄1 標宗章)
그러므로 先德이 말했다. 一點障賢가 眼膜을 덮으니 千種幻華가 擾亂하게 墜落하고, 一陣妄念이 心中에 일어나니 恒河沙數의 生滅이 發動한다. 眼賢를 除去하니 幻華가 消盡하고, 妄念이 永滅하여 眞性을 證得하니 千病이 快差하여 萬藥을 除却하고, 妄念의 氷塊가 消融하여 眞性의 湛水가 流通한다. 神靈한 丹藥을 九番轉煅하니 生鐵을 點下하여 眞金으로 變成하고, 至極한 妙理는 一言片句로 凡夫를 轉換하여 聖者로 成就한다. 狂奔하는 妄心을 休歇치 못하다가 休歇하니 즉 無上菩提요, 玄鏡이 淸淨하여 本心이 明徹하니 本來로 大覺世尊이니라(以上 三段의 原文은 계속된 것임).
그러므로 옛스님이 말하였다. 한 점 티끌이 눈을 덮어 천 가지 헛꽃이 어지러이 흩날리듯, 한 가닥 망념이 마음 가운데 일어나 항하강의 모래같이 많은 생멸심이 생긴다. 눈의 티끌을 없애 헛꽃이 다 없어지듯 망념이 영영 없어져서 참 성품을 증득한다. 천 가지 병이 나아서 만 가지 약을 물리치고 망념의 얼음덩이가 다 녹아서 참 성품의 맑은 물이 흐른다. 신령한 불사약을 아홉 차례 달구면 무쇠가 녹아서 진금이 되듯, 지극히 묘한 이치는 한마디에 범부를 성인으로 바꾼다. 미쳐 날뛰는 망심을 쉬지 못하다가 쉬어버리니 가장 높은 보리요, 현묘한 거울이 깨끗하여 본심이 환히 드러나니 본래 크게 깨친 세존이니라.
삼세육추의 모든 망념이 단박에 없어지고 변함없이 항상한 진여본성을 활연히 증득하니 이것이 망념을 없애 진여를 증득한 구경무심, 즉 견성이다. 병이 나아서 약마저도 버린 아무 일도 할 것도 없는 대해탈인은 얼음이 녹아 물 맑은 진여본성의 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친다. 이런 이가 천상과 인간세상에서 비할 데 없이 존귀한 대각여래이며, 인도와 이 땅에서 법의 등불을 이어 온 정안종사이다.
이상에서 견성이란 망상을 없애 진여를 증득함이며, 약과 병이 다 없어지고 교(敎)와 관(觀)이 동시에 쉬어버림이며, 제불여래승까지 다 없어진 무여열반, 즉 구경 대무심지(大無心地)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종경록」의 저자 영명 수(永明延壽)선사는 부처와 조사를 정통으로 잇는 대법안(法眼文益)선사의 3세 적손이다. 임제(臨濟)의 정통법맥인 중봉(天目中峯)선사는 “고금을 통틀어 천하의 사표(師表)는 영명이 아니면 그 누구란 말인가”라고 찬탄하였다.
「종경록」 100권은 종문의 지침서로서 용수(龍樹) 이후 최대의 저술로 일컬어진다. 회당(晦堂祖心)선사는 임제종 황룡파의 개조 남(慧南)선사의 상수 제자로서 불조의 정통법맥이라고 천하가 추앙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도 항상 「종경록」을 아끼고 소중히 여겼다.
「인천보감」에서 말하기를 “보각(寶覺:晦堂)선사는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종경록」을 손에서 놓지 않고 ‘내가 이 책을 늦게 만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 이에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을 뽑아서 3권으로 만들고 「명추회요(冥樞會要)」라고 이름하니 세상에 널리 유통되어 왔다”고 하였다.
이처럼 「종경록」에서 논하는 내용은 고금을 통틀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종문의 확정된 견해로 되어 있다.
如菩薩地盡하면 滿足方便하야 一念相應하야 覺心初起하야 念無初相이라 以遠離微細念故로 得見心性하야 心卽常住일새 名究竟覺이니라(起信論)
菩薩의 終點인 十地가 了盡하면 修道의 方便이 圓滿具足하여 無間道인 一念에 相應한다. 妄心의 初起生相을 覺知하여 心地에 初相이 全無한지라 初起生相의 極微細妄念을 遠離하므로 自心의 本性을 徹見하여 心性이 湛然常住할새 究竟覺이라 부른다.
보살지위의 마지막인 십지까지 다하면 수도의 방편이 꽉 차서 무간도(無間道)인 한생각[一念]에 닿는다. 망심이 최초로 일어나는 생상(生相)을 깨달아서 마음자리에 최초의 상이 전혀 없다. 처음 일어나는 생상인 극히 미세한 망념을 멀리 여의므로 자기 마음의 본래 성품을 꿰뚫어 보아 심성이 담연히 항상 머무나니 구경각이라 부른다.
금강유정을 닦는 등각위에서 극히 미세한 망념인 근본무명을 다 없애면 활연히 깨달아 진여본성을 환히 보니 이것이 구경각인 성불이다. 이처럼 대승불교의 총론이라 할 수 있는 「기신론」에서도 견성이 곧 구경각이며 성불임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業相動念이 念中에 最細일새 名微細念이니라 此相이 都盡하야 永無所餘故로 言永離니 永離之時에 正在佛地니라 前來三位는 未至心源일새 生相이 未盡하야 心猶無常이라가 今至此位하야는 無明이 永盡하야 歸一心源하야 更無起動故로 言得見心性이니 心卽常住하야 更無所進일새 名究竟覺이니라(元曉 起信論疏)
無明業相이 動念하는 것이 妄念中에서 가장 微微하므로 微細妄念이라 呼稱한다. 이 微細妄念이 전부 滅盡하여 영원히 그 餘跡이 없으므로 영원히 離脫한다고 한다. 이 微細妄念을 永永 離脫한 때에는 正確히 佛地에 머물게 된다. 前來의 三位는 心源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生相이 滅盡하지 않아서 心中이 아직 生滅無常하다가, 此位에 이르러서는 永永 滅盡하여 一心의 本源에 歸還하여 다시는 起滅動搖함이 全無하므로 見性이라 稱言한다. 見性을 하면 眞心이 廓然常住하여 다시는 前進할 곳이 없으므로 최후인 究竟覺이라 呼名한다.
무명업상(無明業相)이 념(念)을 움직이는 것이 망념 가운데서도 가장 미세하므로, ‘미세망념(微細妄念)’이라고 부른다. 이 미세망념이 전부 없어져서 영원히 그 흔적이 없으므로 ‘영원히 떠났다’고 한다. 이 미세망념을 영영 여의었을 때만이 정확히 부처지위에 머물게 된다. 앞의 세 지위는 마음의 근원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생상이 다 없어지지 않아서 마음 속에 생멸이 끊임없다가 이 지위에 이르러서는 무명이 완전히 다 없어져서 일심(一心)의 본원에 돌아가 다시는 일고 꺼지는 움직임이 없으므로 ‘성품을 본다[得見心性]’고 말한다. 견성을 하면 참마음이 확연히 항상하여 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으므로 마지막 깨달음[究竟覺]이라 부른다.
業識動念이 念中에 最細일새 名微細念이니 謂生相也라 此相이 都盡하야 永無所餘故로 言遠離요 遠離相故로 眞性이 顯現하나니 故로 云 見心性也라 前三位中에는 相不盡故로 不見性也라(賢首義記 卷中末)
業識이 動念하는 것이 가장 微細하므로 微細妄念이라 呼名하나니 生相을 말함이다. 이 最初生相이 전부 滅盡하여 永永 그 殘餘가 없는 故로 遠離라 하며, 虛妄幻相을 遠離한 故로 眞如自性이 곧 顯現하나니 故로 見性이라고 한다. 前三位中에는 最初生相이 滅盡하지 않았으므로 見性이라 하지 않는다.
업식(業識)이 념(念)을 움직이는 것이 가장 미세하므로 미세망념(微細妄念)이라고 부르니 생상(生相)을 말한다. 이 맨처음 생상이 “남김없이 다 없어졌기 때문에 멀리 떠났다[遠離]”고 하며, “허망한 헛모양을 멀리 여의었으므로 진여 자성이 곧 나타나니 그런 까닭에 성품을 본다[見性]”고 한다. 앞의 세 지위에서는 맨 처음 생상이 다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견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佛地는 無念이니라(元曉疏 賢首義記)
佛地는 微細念까지 永盡한 無念이다.
부처지위는 미세망념까지 영원히 없어진 무념(無念)이다.
원효(元曉)와 현수(賢首)는 교종에서 권위있는 스님이다. 미세무명인 제8아뢰야식까지 다 없어지면 무여열반인 부처지위, 즉 구경각이다. 이것이 무념이며 무심이며 견성임은 불교의 근본원리이므로 원효나 현수도 이의가 있을 수 없으며, 「종경록」에서 논하는 것과 완전히 일치함은 당연한 귀결이다.
한편 ‘앞의 세 지위[前三位]’라 함은 불각(不覺)의 십신(十信)과 상사각(相似覺)의 삼현(三賢)과 수분각(隨分覺)의 십지(十地)를 말한다. 삼현십지가 전부 무명업식의 허깨비나 꿈 속에 있으므로 견성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기신론」은 증발심(證發心)에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으므로 ‘진여’라고 거짓이름하지만, 업식의 마음이 미세하게 일고 꺼져 무명이 다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견성이 아니다.
十地諸賢(聖人)이 說法은 如雲如雨하여도 見性은 如隔羅縠이니라(汾州-傳燈錄28 雲門-傳燈錄19)
十地의 諸賢(聖人)들이 說法하기는 如雲如雨하여도 見性은 羅縠을 障隔함과 같느니라.
십지의 모든 현인(성인)들이 구름 일듯 빗발치듯 설법은 하나 견성에 있어서는 얇은 비단을 가린 것과 같다.
분주(汾州無業)와 운문(雲門文偃)은 3학(三學)에 통달한 절세의 정안종사다. ‘십지보살도 견성을 하지 못했다’함은 분주․운문뿐만 아니라 종문정전의 공통된 원칙이다. 그것은 구경각인 여래지만이 견성이기 때문이다.
종문에서 말하는 십지(十地)는 권교(權敎)십지가 아니라 일승(一乘)십지다. 십지 이후에 아뢰야식의 미세한 망상을 영원히 끊어야만 견성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것 같으나 화두공부가 꿈 속에서도 한결같이[夢中一如] 되면 「화엄경」에서 말하는 7지[華嚴七地]이고, 나아가 깊은 잠 속에서도 한결같으면[熟眠一如] 아뢰야식의 미세망상 가운데 자재보살 보살지위다.
선문의 정안종사 중에 숙면일여를 뚫고 지나가지 않고서 견성했다고 말한 사람은 없으니 그들은 구경각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오매일여(寤寐一如) 편에서 자세히 말하겠다.
如明眼人이 隔於輕縠하고 覩色像하야 究竟地菩薩도 於一切境에 亦爾하며 如明眼人이 無所障隔하고 覩衆色像하야 如來도 於一切境에 亦爾니라 如明眼人이 於微闇中에 覩見衆色하야 究竟地菩薩도 亦爾하며 如明眼人이 離一切闇하고 覩見衆色하야 如來도 亦爾니라(瑜伽論50)
明眼人이 輕縠 을 障隔하고 모든 色像을 보는 것과 같아서 究竟地菩薩도 一切境界에 이와 같으며 明眼人이 障隔이 없이 모든 色像을 보는 것과 같아서 如來도 一切境界에 이와 같느니라. 明眼人이 微闇中에서 衆色을 보는 것과 같아서 究竟地菩薩도 이와 같으며 明眼人이 一切昏闇을 떠나서 衆色을 보는 것과 같아서 如來도 이와 같느니라.
마치 눈 뜬 사람이 얇은 비단을 가리고서 모든 물건을 보는 것과 같이 구경지보살도 일체 경계에 있어서 이와 같으며, 마치 눈 밝은 사람이 가림 없이 모든 물건을 보는 것과 같이 여래도 모든 경계에 있어서 이와 같다. 눈 밝은 사람이 어슴푸레한 데서 모든 물건을 보는 것처럼 구경지보살도 이와 같으며, 눈 밝은 사람이 모든 어둠을 떠나서 여러 물건을 보는 것처럼 여래도 이와 같느니라.
구경지 보살인 등각(等覺)보살은 아뢰야의 미세망념이 남아 있어 이것이 자성을 덮어서 모든 경계에 밝지 못하니 마치 얇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보는 듯하며 어둠 속에서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따라서 불성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명료하지 못하므로 부처와 조사는 “십지보살도 견성에 있어서는 얇은 비단을 가리고 보는 것 같고, 어둠 속에서 물건을 보는 것 같다”고 꾸짖었다.
이 미세한 망념이 모두 없어지고 마음의 눈이 크게 열리면 얇은 비단과 어둠을 영원히 떠나 일승의 불과(佛果)를 성취한다. 여기서는 모든 경계에 환하므로 「열반경」에서는 ‘여래의 견성은 대낮에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보살지가 다 끝나고 미세망념을 완전히 떠나면 심성을 보게 되니 그것을 구경각이라고 한다’는 「기신론」의 내용과 같다. 얇은 비단으로 가린 듯하거나 희미한 어둠 속에서 물건을 보는 것은 바르게 본 것[正見]이 아니므로 부처와 조사를 정통으로 잇는 분들은 견성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8마계(第八魔界)라 하여 힘을 다해 배격하였다.
이와 같이 구경지 보살도 견성하지 못했으니 그 나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불교에서 만대의 표준이 되는 「기신론」과 「유가론」의 ‘구경지 보살도 견성하지 못했다’고 한 원칙에서 본다는 일승의 부처과위 이외의 견성설은 단연코 용인할 수 없다.
以不生煩惱故로 則見佛性이요 以見佛性故로 則得安住大涅槃이니 是名不生이니라(大涅槃經18)
煩惱가 不生하는 故로 곧 佛性을 正見하며 佛性을 正見한 故로 大涅槃에 安住하나니, 이를 不生이라 하느니라.
번뇌가 생기지 않으므로[不生] 불성을 정확히 보며, 불성을 정확히 보므로 대열반에 안주하니 그래서 이것을 불생(不生)이라 한다.
생기지 않는다[不生]함은 곧 생김이 없음[無生]이니, 미세한 번뇌망상까지 모두 없어진 대무심지다. 대열반은 무심지인 무여열반, 곧 구경각이다. 그러므로 견성이란 곧 무심이며, 구경각이며 대열반인 것이다.
第一義建立者는 謂無餘依涅槃界中이 是無心位니 何以故오 於此界中에 阿賴耶識이 亦永滅故니라 所餘諸位는 轉識이 滅故로 名無心地나 阿賴耶識이 未滅盡故로 於第一義에는 非無心地니라(瑜伽論13)
第一義에서 建立한 正義는 無餘依涅槃界中이 眞正한 無心位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 境界中에는 阿賴耶識이 또한 영원히 消滅한 緣故이다. 이 無餘依涅槃 以外의 諸位는 轉識이 消滅한 故로 無心地라고 假名하나 阿賴耶識이 永滅치 못한 故로 第一義에서는 無心地가 아니다.
제일의(第一義)에서 정의하는 바로는, 무여의열반의 경계가 진정한 무심의 지위이다. 왜냐하면 이 경계에서 아뢰야식마저 영원히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 무여의열반 이외의 모든 지위는 전식(轉識)이 없어졌으므로 임시로 무심의 지위라고 이름붙이기는 하나 아뢰야식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못했으므로 제일의에서 보면 무심의 지위가 아니다.
진정한 무심은 미세무명인 제8아뢰야식이 영원히 없어진 무여열반, 즉 부처지위 뿐이다. 제6식과 제7식의 전식(轉識)이 없는 제8아뢰야식의 무기(無記)를 무심이라고 임시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제8식 무기에서는 6식과 7식의 전식인 거친 망념은 없어졌으나 제8식의 미세하게 움직이는 생각이 남아 있으므로 진정한 무심이 아니다.
가끔 아뢰야무기를 무심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으나 견성은 구경각인 부처지위이므로 무여열반인 진여무심을 말하는 것이다.
唯無餘依涅槃界中에 諸心이 皆滅하니 名無心地요 餘位는 由無轉識故로 假名無心이나 由第八識이 未滅盡故로 名有心地니라(瑜伽釋)
오직 無餘依涅槃界 中에서만 모든 妄心이 다 消滅하니 無心地라 부른다. 餘他의 諸位는 모든 轉識이 斷無한 故로 無心이라 假名하나 第八阿賴耶識이 아직 滅盡치 못하였으므로 有心地라고 이름한다.
오직 무여열반의 경계에서만 모든 망심이 다 없어지므로 무심의 지위라고 부른다. 그 나머지 모든 지위는 전식(轉識)이 전혀 없기 때문에 임시로 무심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제8아뢰야식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유심(有心)의 지위라고 이름한다.
제6식과 제7식의 전식 즉 6추가 아주 없어진 멸진정(滅盡定)도 무심아닌 유심이며, 십지(十地)와 등각도 유심이다. ‘견성만 하면 곧바로 무심이다’라고 하는 무심은 모든 부처님의 여래승(如來乘)까지도 다 없어진 무여열반의 불지무심이니 구경각만이 견성인 까닭이다.
이는 불교에서 만세의 표준이 되는 「종경록」 「기신론」 「열반경」 「유가론」등에서의 정론(正論)으로서 견성은 망념이 없어져 진여를 증득한 무심이요, 미세망념을 멀리 떠난 구경각이며, 번뇌가 생기지 않는 대열반이니, 이로써 견성이란 여래의 지위 곧 성불을 말하는 것이 확연 명백하다.
五祖謂六祖曰 若識自心하고 見自本性하면 卽名天人師佛이니라(壇經中國版 日本版)
五祖가 六祖에게 말하였다. 만약 自心을 洞識하고 自性을 明見하면 곧 天人師佛이라 이름하느니라.
오조가 육조에게 말하였다. 만약 자기 마음을 환히 알고 자기 성품을 밝게 보면 하늘과 인간의 스승, 부처라고 이름한다.
이는 오조(五祖:弘忍)가 육조(六祖:慧能)를 인가하고 법을 전할 때 한 말이다. 이처럼 궁극의 불과를 성취하지 못하면 견성이 아님은 종문의 철칙이다.
見性하면 卽成如來니라(宗鏡錄44)
見性하면 卽是에 如來가 되느니라.
견성하면 여래가 된다.
見佛性故로 卽住大涅槃이니라(宗鏡錄36)
佛性을 明見한 故로 卽刻에 大涅槃에 現住하느니라.
불성을 분명히 보기 때문에 지금 당장 대열반에 머문다.
若頓見佛性하면 一念에 成佛하느니라(宗鏡錄17)
萬若에 佛性을 頓見하면 一念에 成佛하느니라.
만약 불성을 문득 보면 한생각에 성불한다.
견성이 곧 여래이며 대열반이며 성불이니, 이는 견성이 불교의 최후 궁극적 과위임을 증언한 것이다.
若能諦觀心性하면 卽是見佛性이며 住大涅槃이니 卽同如來니라(宗鏡錄11)
만약에 心性을 諦觀하면, 卽是 佛性을 徹見한 것이며 大涅槃에 現住한 것이니 如來와 同一하니라.
만약 심성을 자세히 보면 그것이 바로 불성을 꿰뚫어 본 것이며, 현재 대열반에 머물러 있는 것이니 여래와 똑같다.
심성을 자세히 본다 함은 견성과 같은 내용이다.
見佛性하야 住大涅槃하면 卽是住不思議解脫也니라(宗鏡錄24)
佛性을 明見하여 大涅槃에 現住하면 卽是 不思議解脫에 常住하느니라.
불성을 분명히 보아 대열반에 머물면 그대로 부사의해탈경계에 상주하는 것이다.
견성을 하면 모든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므로 부사의해탈이 아닐 수 없다.
但見法性하면 住大涅槃이니라(宗鏡錄84)
다만 法性을 明見하면 大涅槃에 住하느니라.
다만 법성을 분명히 보기만 하면 대열반에 머문다.
於一切法에 見心自性하면 卽是如實究竟之覺이니 卽是頓成佛義니라(宗鏡錄36)
一切萬法에 眞心의 自性을 明見하면 卽時 如實한 究竟覺이며 卽是 頓然히 成佛함이니라.
일체만법에서 참마음의 자성을 분명히 보면 그대로가 실다운 구경각이며 그대로가 문득 성불함이다.
불성은 만법의 자성이므로 그것을 법성(法性)이라고도 하니, 법성을 보는 것이 불성을 보는 것이다.
諸佛境界는 廣大無邊하야 非情識知요 唯見性하야사 能了니라(宗鏡錄18)
諸佛의 境界는 廣大無邊하여 三細六麤의 情識으로서는 不知하고, 오직 見性하여야만 能히 了達하느니라.
모든 부처의 경계는 광대무변하여 3세6추의 알음알이[情識]로는 알지 못하고 견성을 해야만 완전히 알 수 있다.
광대무변한 모든 부처님의 경계는 십지나 등각도 아득히 모른다. 확철히 깨쳐서 본성을 환히 보아야 도달할 수 있으니 성불은 오직 견성에만 있다.
親到諸法無疑之處는 悟心方知요 頓照萬境無相之門은 見性方了니 斯乃如來行處요 大覺所知니라(宗鏡錄96)
諸法에 疑惑이 없는 深玄處에 親히 到達함은 自心을 徹悟하여야 바야흐로 明知요, 萬境에 形相이 없는 絶妙門을 頓然 鑑照함은 本性을 洞見하여야 바야흐로 了達하나니 이는 如來의 行處요 大覺의 所知니라.
모든 법에 의혹이 없는 깊고 묘한 곳에 직접 도달함은 자기 마음을 완전히 깨달아야만 비로소 분명히 알며 온갖 경계에 모양 없는 오묘한 문을 문득 비추어 봄은 본성을 밝게 보아야만 비로소 완전히 통달하니 이는 여래의 행이며 대각세존의 앎이다.
마음을 깨닫는다 함은 견성을 말하는 것으로 대각여래의 행이며 깨달음[證知]이다.
지금까지 「종경록」에서는 견성이 곧 구경각으로서, 성불이며 대열반이며 부사의해탈임을 더 한층 입증하였다.
二十八祖內에는 無一祖도 不見性成祖니라(宗鏡錄19)
西天의 二十八代 祖師 中에는 一人도 見性하지 않고 祖師됨이 없느니라.
서천의 28대 조사 가운데는 한 사람도 견성하지 않고 조사가 된 분이 없다.
여래의 열반묘심과 정법안장을 전해 받아야만 조사라고 하는데 어찌 견성을 하지 않고 조사가 될 수 있겠는가. 인도에서 28대를 이어온 조사뿐만 아니라 달마의 직계 종사들도 모두 견성하여 도통한 사람들이니 견성하지 않으면 달마를 바로 이은 본분종사의 후손이 아니다.
得旨하면 卽入祖位라 誰論頓漸之門이며 見性하면 現證圓通이라 豈標前後之位리오(宗鏡錄1 標宗章)
究竟玄旨를 悟得하면 卽是에 祖師의 寶位에 登入하는지라 그 누가 頓과 漸의 路門을 論議하며, 眞如本性을 正見하면 現前에 大覺圓通을 徹證하는지라 어찌 前과 後의 地位를 標的하리오.
구경의 깊은 뜻을 깨치면 보배로운 조사의 지위에 오르니 그 누가 ‘돈’과 ‘점’의 방편을 논하며, 진여본성을 정확히 보면 눈앞에서 대각원통을 철저히 깨치니 어찌 앞과 뒤의 지위를 내세우겠는가?
‘구경의 깊은 뜻을 깨친다[得旨]’함은 견성과 똑같은 내용이다. ‘눈앞에서 대각원통을 철저히 깨친다[現證圓通]’함은 영명 수(永明壽)선사가 밝혔듯이 “온갖 성(性)과 상(相)의 본뜻은 대각(大覺:佛地를 말함)에 있어서 원통한다[種種性相之義는 在大覺而圓通이라-「宗鏡錄」 서문]”고 한 원통(圓通)이니 이것은 대각세존께서 실제로 증득하신 바이다.
견성하면 대각원통을 당장에 깨쳐 약과 병이 동시에 없어지고 교와 관을 함께 쉬므로 돈이니 점이니 하는 각각의 방법[門]이나 삼현 십성 등의 지위구별은 전혀 필요없다. 만약 수행에 지위와 돈점이 필요하다면 이는 병이 있어 약이 필요한 것으로서 망념이 다 없어지고 진여를 증득하여 병이 나아 약도 필요없는 구경무심이 아니니 절대로 견성이라 할 수 없다.
若直下에 無心하면 量出處空之外어니 又何用更歷階梯리오(宗鏡錄23)
만약 直下에 無心하면 허공 밖에 超出하거니 또한 어찌 階梯를 修歷하리오.
당장에 무심하기만 하면 그 한량이 허공 밖을 벗어나는데 어찌 다시 지위와 점차를 닦아 밟을 필요가 있겠는가.
견성하면 곧바로 무심하므로 수행상의 모든 지위와 차례[漸次]를 뛰어넘는다.
諸聖은 分證이요 諸佛은 圓證이니라(宗鏡錄1)
諸聖은 分分證得이요 諸佛은 圓滿徹證이니라.
모든 성인은 부분적으로 깨쳤고 모든 부처님은 완전히 깨쳤다.
無明을 若除하면 一時에 頓證이니라(宗鏡錄25)
根本無明을 만약 斷除하면 一時에 頓證하느니라.
근본무명을 끊으면 한번에 문득 깨친다.
祖佛은 圓證法界니라(宗鏡錄78)
祖師와 佛陀는 眞如法界를 圓證하니라.
조사와 부처는 진여법계를 완전히 깨쳤다.
利根上智는 須圓證이니 十聖三賢을 一念超로다(圜悟錄10)
利根과 上智는 모름지기 圓證할지니, 十聖과 三賢을 一念에 超越하느니라.
근기가 날카롭고 지혜가 으뜸가는 이는 반드시 완전히 깨친다. 그들은 삼현십성을 한생각에 뛰어넘는다.
견성은 무명이 영원히 없어진 구경의 부처지위이므로 완전한 깨침[圓證]이며 문득 깨침[頓證]이지 부분적 깨침[分證]이 아니다.
그러므로 종문에서 ‘깨친다’ ‘견성한다’함은 반드시 모든 성인의 부분적 깨침이 아닌 부처지위의 완전한 깨침을 내용으로 한다.
若明悟相하면 不出二種이니 一者는 解悟니 謂明了性相이요 二者는 證悟니 謂心造玄極이니라 若言頓悟漸修하면 此約解悟니 謂豁了心性하고 後漸修學하야 令其契合이니라(行願淸凉疏 二辨修證淺深)
만약에 悟相을 설명하면 二種을 不出한다. 一은 解悟니 性理와 法相을 明白히 了知함이요 二는 證悟니 悟心深玄하여 窮極에 到達함을 말함이다. 만약 頓悟漸修를 말하면 이는 解悟이니 心性을 豁然了知하고 後에 漸漸修學하여 契合하게 함이다.
깨달음의 모양을 설명하자면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해오(解悟)로서 성품의 이치와 법의 모양을 명백하게 아는 것이다. 둘은 증오(證悟)로서 깊은 마음을 깨달아 궁극에 도달함을 말한다. 돈오점수라고 하는 것은 해오의 측면에서 말하는 것으로서 심성을 분명히 알고 난 다음에 점점 닦고 배워서 계합하게 하는 것이다.
豁然了知하니 卽爲始悟요 修行契證이 目爲終入이니라(淸凉疏20)
豁然히 性相을 了知하니 곧 解悟인 始悟가 되고, 修行하여서 玄極에 契合實證함은 證悟인 終入이다.
성품과 모양을 분명히 안다는 것은 바로 해오인 첫 깨달음[始悟]이 되고 닦아서 깊은 궁극에 계합하여 실제로 깨침이 증오인 마지막 들어감[終入]이다.
悟有解悟證悟하니 謂初因解悟하야 依悟修行하야 行圓功滿하면 卽得證悟니라(圭峰圓覺疏3 下)
悟門에 解悟와 證悟가 있다. 始初에 解悟를 얻어 그 解悟를 依持修行하여 修行이 圓成되고 功果가 滿了하면 卽時에 證悟를 얻는다.
깨달음의 부류에 해오와 증오가 있다. 처음 해오를 얻어 그것을 의지해서 수행하여 수행이 원만 성취되고 노력한 결과가 가득 차면 곧 증오를 얻는다.
심성을 꿰뚫어 보아서 그대로 무심하면 열반심과 여래심도 찾을 수 없다. 여기에 어찌 해오와 증오를 논하겠는가. 그러나 중생의 근기와 성품이 각각 달라서 가끔 잘못된 길로 들어가 도적을 자식으로 잘못 아는 실례가 많으므로 방편상 해오와 증오를 빌려서 깨달음[悟證]의 정도와 옳고 그름을 말해 보고자 한다.
간략히 말해 해오와 증오는 상반된 입장에 있으니 해오는 처음이요, 증오는 끝이다. 사량하고 분별하는 망식(妄識) 속에서 성품과 모습을 명백하게 아는 것, 즉 불법에 대한 지견을 해오라 하고 망식이 완전히 없어져 지견이 소멸되어 궁극의 극처에 도달함을 증오라고 한다. 이 증오를 교가에서는 여러 가지로 분류하지만 선문에서는 오직 원만한 깨달음[圓證]뿐이다.
교가에서는 신․해․행 증의 원칙에 따라 해오에서 시작하여 3현과 10성의 여러 지위를 차례로 닦아 올라가 맨 마지막인 증오, 즉 묘각(妙覺)에 점점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선문의 깨달음인 견성은 당장에 대각원통을 완전히 깨치는 구경각이다. 그러므로 부분적 증득과 이해적 깨달음인 분증과 해오를 부정하고 삼현십성을 초월하여 무여열반의 무심지인 증오에 곧바로 들어감을 철칙으로 하니 이것이 선문에서 높이 외치는 ‘한 번 뛰어 곧바로 여래의 지위에 들어감[一超直入如來]’이다.
따라서 여러 성인의 부분적 깨침도 미세한 지해(知解)에 속하므로 견성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터럭 만큼도 지해가 남아 있어서는 증오하지 못하며 모든 지해와 견해가 철저하게 없어져야만 견성하게 되므로 분증과 해오는 수도에 가장 큰 장애, 즉 알음알이의 장애[解碍]라 하여 절대로 배제한다. 이것이 선과 교의 상반되는 입장이며 선문의 특징인 동시에 명맥이니, 옥석을 혼동하여 후학을 의혹에 빠뜨리면 불조의 혜명을 끊어버리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된다.
불조 정통의 견성은 미세한 망상을 멀리 떠나 무명을 아주 끊어버린, 진여무심, 무여열반, 구경각, 여래지를 내용으로 하는 원증 돈증의 증오임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정맥을 이은 큰 조사스님들은 마지막 지위인 묘각에서 깨치는 원증(圓證)이 아니면 견성이나 깨달음으로 인정하지 않고 분증과 해오를 잘못된 지해, 망정의 식견이라 하여 적극 배척하는 것이다. 선문에 독이 되고 폐가 되는 분증과 해오를 견성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종종 있다. 이런 이설에 현혹되지 말고 당장에 대각원통을 증득해서 확연히 견성하여 구경무심지에서 불조의 정통종지만을 천양하여 많은 미혹중생을 인도해야 한다. 이런 이가 원만히 깨달아 견성한 정안종사다.
2. 중생의 불성[衆生佛性]
佛法僧에 無有差別이니라(大涅槃經21)
一切衆生이 眞如本性인 佛性을 다 가지고 있어서, 佛이나 法이나 僧이나 평등하여 추호도 增減差別이 없느니라.
일체중생이 진여본성인 불성을 다 가지고 있어서 불․법․승이 평등하여 추호도 증감이나 차별이 없다.
일체중생이 다 가지고 있는 진여본성은 모든 부처님의 과덕(果德)을 원만하게 갖추었으므로 이것을 불성(佛性), 법성(法性) 또는 불심(佛心), 불지(佛智) 등으로 부른다.
이 불성은 절대적으로 평등하여 가장 높은 궁극의 과위(果位)를 성취하여 광대무변한 지혜덕상을 완전하게 갖춘 부처님들이나 오역이나 십악을 범한 극악한 죄인 내지 일천제 중생까지도 빠짐없이 가지고 있으므로 여래와 중생의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선근이 없는 일천제라도 불성만 바로 보면 모두 성불한다. 이것이 불교의 생명이며 다른 모든 종교가 따를 수 없는 가장 뛰어난 특색이다.
一切衆生이 悉有佛性이언마는 常爲無量煩惱所覆故로 不能得見이니라(大涅槃經18)
一切衆生이 그 누구를 막론하고 平等하게 佛性을 具有하고 있건마는, 항상 限量이 없는 煩惱妄想이 盖覆한 故로 能히 그 佛性을 볼 수 없느니라.
일체중생이 그 누구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불성을 갖고 있지만 항상 한량없는 번뇌망상이 덮고 있는 까닭에 그 불성을 보지 못한다.
중생이 번뇌망상에 가려져서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을 보지 못하나 불성은 항상 무한한 대광명을 발하여 시방법계를 비추고 있다. 이것은 태양이 중천에 높이 떠서 우주를 비추고 있으나 먹구름이 가려버리면 사람들이 보지 못함과 같다.
四無碍智가 卽是佛性이니 佛性者는 卽是如來니라(大涅槃經30)
四無碍智가 곧 佛性이니 佛性은 곧 如來니라.
네 가지 걸림없는 지혜[四無碍智]가 바로 불성이니 불성은 여래이다.
모든 부처님이 성불한 뒤에 얻는 지혜[果智]인 사무애지가 곧 불성이므로 불성은 바로 여래이다.
佛性者는 不可思議니 乃是諸佛境界니라(大涅槃經35)
佛性은 不可思議한 것이니 이는 諸佛의 境界니라.
불성은 불가사의한 것으로서 모든 부처님의 경계이다.
한없는 오묘함을 갖춘 불가사의한 이 불성은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성취한 모든 부처님의 깊고 깊은 경계이다. 이 불가사의하고 신묘하고 신령스런 불성이 번뇌망상에 가리어 중생들이 보지 못함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見十二因緣者는 卽是見法이요 見法者는 卽是見佛이라 佛者는 卽是佛性이니 何以故오 一切諸佛이 以此爲性이니라(大涅槃經25)
十二因緣을 了見한 者는 卽是 萬法을 正見한 者요 萬法을 正見한 者는 卽是 佛陀를 徹見한 것이라, 佛陀라는 것은 卽是 佛性이니 무슨 緣故인고 하면 一切諸佛이 이것으로써 自性을 삼기 때문이니라.
12인연을 분명히 본 사람은 만법을 정확히 본 사람이요, 만법을 정확히 본 사람은 부처를 완전히 본 것이다. 여기서 부처란 불성을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께서 이것으로 자성을 삼기 때문이다.
법을 보는 것이 부처를 보는 것이다. 여기서 부처란 불성을 말한다. 법성과 불성은 바탕은 같으나 이름만 다를 뿐이니 이를 진여, 여래장, 법계, 정변지, 심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佛性者는 十力 四無所畏 大悲 四念處니라(大涅槃經 25)
佛性은 諸佛의 極果인 十力과 四無所畏와 大悲와 四念處니라.
불성이란 모든 부처님의 궁극적 과위인 십력(十力)과 사무소외(四無所畏)와 대비(大悲)와 사념처(四念處)이다.
中道者名爲佛性이니 以是義故로 佛性은 常恒하야 無有變易이니라(大涅槃經25)
中道를 佛性이라 부르나니 그러므로 佛性은 常住恒一하여 變動과 遷易이 없느니라.
중도를 불성이라 부른다. 이런 뜻에서, 불성은 상주하고 한결같아서 변동과 바뀜이 없다.
석가세존이 보리수 아래서 무상정각을 성취한 뒤에 녹야원으로 다섯 비구를 찾아가서 맨 처음 입을 열어 “나는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다”라고 선언하셨다. 이것이 석가세존께서 깨달으신 내용을 개진한 ‘중도대선언’이다. 중도는 불성이므로 중도를 깨달았다 함은 불성을 봄, 즉 견성했다는 뜻이다.
中道之法을 名爲佛性이니 是故로 佛性은 常樂我淨이니라(大涅槃經25)
中道의 大法을 佛性이라 呼稱하나니 그러므로 佛性은 常樂我淨이니라.
중도법을 불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불성은 상락아정이다.
상락아정은 대열반의 네 가지 성격[四德]이니 불성은 여래 대열반의 경지를 말한다.
佛性者는 名爲第一義空이요 第一義空은 名爲智慧니라(大涅槃經25)
佛性은 第一義空이라 이름하며 第一義空은 智慧라 이름하느니라.
불성을 제일의 공[第一義空]이라 부르며 제일의공을 지혜라 부른다.
불성은 제일의공으로서 여래의 무상정변지다.
十二因緣은 名爲佛性이니 佛性者는 卽第一義空이요 第一義空은 名爲中道며 中道者는 卽名爲佛이요 佛者는 名爲涅槃이니라(大涅槃經25)
十二因緣을 佛性이라 부르나니 佛性은 卽是 第一義空이요 第一義空은 中道라 하며 中道는 佛陀니 佛陀는 涅槃이라 하느니라.
12인연을 불성이라 하는데 여기서 불성은 제일의공을 말한다. 이 제일의공을 중도라 하는데, 중도는 곧 부처다. 부처를 열반이라 한다.
제일의공[第一義空] 중도․부처․열반 등은 모두 불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시방삼세의 모든 여래께서도 불성을 철저히 보아서 도를 증득하고 성불하신 것이다.
自性이 滿足一切功德하느니라(起信論)
自性이 無量無邊한 一切의 功德을 圓滿具備하였느니라.
자성이 무량무변한 일체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었다.
自性이 具三身하야 發明成四智하나니 不離見聞緣하고 超然登佛地니라(壇經)
自性이 法․報․化의 三身을 具備하여서 發明하여 四智가 되나니, 見聞의 攀緣을 離去하지 않고 超然히 佛地에 登入하느니라.
자성이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을 갖추어 그것이 틔워져서 사지가 되니 보고 듣는 일을 떠나지 않고 부처지위에 훌쩍 오른다.
자성 즉 불성은 불교의 궁극적 과위인 세 가지 불신과 네 가지 지혜를 갖추었고, 모든 공덕과 행이 빠짐없어 추호의 부족함도 없으니 참으로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다. 그러므로 자성을 철저히 보면 ‘한 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곧바로 들어감’은 너무도 당연하다.
석가세존이 중생에게 이바지한 최대의 공헌은 불성의 발견이다. 만일 불성의 존재와 그것을 개발하는 방법을 보여 주시지 않았다면 중생들은 영원히 중생으로서 고통바다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은 영원히 닫혀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큰 원리에 의지하여 힘써 수행하여 진리의 바다에서 걸림없이 자유로운 큰 해탈의 길을 성취해야 할 것이다.
3. 두 가지 번뇌망상(煩惱妄想)
以根本無明이 動彼眞如하야 成於三細를 名爲梨耶요 又以境界緣故로 動彼心海하야 起於六 麤를 名爲意識이니라(賢首 起信論別記)
根本無明이 眞如本性을 鼓動하여 三種의 微細한 妄想을 結成하니 阿賴耶라 한다. 그리고 各種의 境界攀緣으로 妄心業海를 起動하여 六箇의 麤重煩惱를 添起하니 이를 意識이라 한다.
근본무명이 진여 본성을 움직여 세 가지 미세한 망상[三細]을 이루니, ‘아뢰야’라 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경계를 반연하여 망심의 업 바다를 움직여 여섯 가지 거친 번뇌[六麤]를 다시 일으키니, 이를 ‘의식’이라 한다.
번뇌망상에는 분별이 없는 세 가지 미세한 것[三細]과 분별이 있는 여섯 가지 거친 것[六麤]이 있어서 8만4천의 한없는 번뇌를 파생한다. 3세는 근본무명으로서 아뢰야, 아타나 또는 제8식 등으로 부르며, 6추는 의식, 또는 제6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제7말라에 대하여 현수(賢首)는 “안을 아(我)로 여기는 것으로는 앞3세에 속하고 밖을 아소(我所)로 여기는 것으로는 뒤 6추에 속하므로 생략한다”고 하였다.
여러 조사의 논소에서 3세를 제8식인 아뢰야라 함은 일치하지만 6추에 대해서는 6식만이라 하거나 혹은 7식까지를 포함한다 하여 설명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수(賢首)는 물론이고 감산 덕청(憨山德淸)도 제7식은 거짓된 것이다[虛假]. 그러므로 「능가경」에서 ‘제7식은 유전하지 않으므로 생사의 원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제7말라를 따로 논하지 않아도 수도에는 관계가 없으므로 여기에서는 현수의 주장을 취하였다.
三細六麤가 總攝一切染法하나니 皆不了眞如而起니라 故로 云當知하라 無明이 能生一切染法也라하니라(賢首 起信論義記)
三細와 六麤가 一切의 生滅하는 染法을 總攝하나니 이는 다 眞如本性을 背馳한 因由로 生起한다. 그러므로 當然히 알지어다. 三細六麤의 根本인 無明이 能히 一切의 生滅法을 派生한다고 하였느니라.
삼세 육추는 생멸하는 모든 염법을 다 포함하는데, 그것은 모두 진여본성을 위배하기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삼세 육추의 근본인 무명이 모든 생멸법을 파생하는 줄을 알지니라.
3세는 근본무명이요, 6추는 지말무명이다. 7지 이하의 모든 중생은 6추 속에 있고 8지 이상의 자재보살은 3세 가운데 있다. 이 근본과 지말의 두 가지 무명, 즉 번뇌망상이 진여불성을 가리고 있으므로 본성을 보려면 이 두 가지를 제거해야만 한다. 만약에 6추만 제거하고 3세가 남아 있으면 자재보살의 경지다. 종문에서는 이것을 제8마계라 하여 구경각인 견성으로 치지 않는다.
견성은 제8아뢰야식인 3세를 영원히 끊은 무여열반이라야 하니 무여열반은 즉 무심이다. 그리하여 자재위 이상의 대보살들도 미세무명을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제8아뢰야식에 머물러 있으므로 견성이 못된다. 제8의 극히 미세한 망상까지 모두 없애야만, 여래의 정법안장을 전해받는다. 만약에 객진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어서 6추도 버리지 못한 해오(解悟)를 견성(見性)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정법을 파멸하는 용서할 수 없는 큰 과오이며, 부처님과 조사에 대한 반역이다.
於六趣生死에 彼彼有情이 墮彼有情中이라 於中最初에 一切種子心識이 展轉和合하야 增長廣大하나니 此識을 亦名阿陀那하며 亦名阿賴耶하며 亦名爲心이니라 阿陀那가 依持하야 建立故로 六轉識身이 轉하나니 謂眼耳鼻舌身意니라(解深密經1)
六途에서 生死輪廻할 때에 彼等의 有情衆生들이 生滅하는 有情들 中에 墮落하여 있다. 그 中 最初에 一切의 生滅하는 種子인 心識이 展轉하며 和合하여 增長하고 廣大하나니, 이 根本識을 혹은 阿陀那 혹은 阿賴耶 혹은 心이라 名稱한다. 이 阿陀那識이 依持가 되어서 建立하는 故로 六轉識身이 轉動하나니 이는 眼耳鼻舌身意이다.
6도에서 생사에 윤회할 때 저들 유정들 중생이 생멸하는 유정들 가운데 떨어져 있다. 그 중 맨 처음 일체 생멸하는 종자인 심식(心識)이 점점 합해지고 자라고 커지니 이 근본식을 아타나 또는 아뢰야 또는 마음[心]이라 부른다. 이 아타나식이 근거가 되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여섯 가지 전식[六轉識身]이 굴러 움직이니, 이것이 눈․귀․코․혀․몸․뜻이다.
「해심밀경」은 유식법상종의 근본경전이다. 최초의 종자식 즉 아타나는 3세를 말한 것이고, 여섯 가지 구르는 식의 몸[六轉識身]은 6추다. 즉 「해심밀경」에서는 근본식에서 육식신(六識身)이 변한다고 했지 제7식을 말하지 않았다.
諸識이 有二種生하니 謂流注生及相生이니라(楞伽經會譯 上之上)
煩惱妄想인 諸種識心에 二種의 生이 있으니 流注生과 相生이다.
번뇌망상인 여러 식심에 두 가지 남[生]이 있으니, 유주생(流注生)과 상생(相生)이다.
유주생(流注生)은 제8아뢰야 가운데의 3세를 말하고, 상생(相生)은 6추를 말한다.;
阿陀那識이 甚深細하야 一切種子如瀑流로다 我於凡愚에 不開演은 恐彼分別執爲我니라(解深密經)
阿陀那識이 極甚히 深細하여 一切生滅의 種子가 瀑布같이 流動한다. 내가 愚昧한 凡夫에게 이 阿陀那識을 開演하여 설명하지 않는 것은, 彼等이 分別하여 眞我라고 誤執할까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아타나식이 매우 깊고 세밀하여 모든 생멸의 종자가 폭포같이 흐른다. 내가 우매한 범부에게 이 아타나식을 설명하지 않는 것은 저들이 분별하여 참나[眞我]라고 잘못 알고 집착할까 염려해서이다.
무공용행과 무분별지를 갖춘 8지의 자재보살이 구경각을 성취하지 못함은 아타나에 머물러 집착하기 때문이니 항상 부처님의 꾸중을 면하지 못한다.
六麤中智相은 於七地에 盡此惑也요 三細中業相은 十地終心金剛喩定에서 都盡하느니라(賢首 起信義記 下本)
六麤의 終末인 智相은 七地에서 이 迷惑이 盡滅하고, 三細의 최후인 業相은 十地終心인 金剛喩定에서 永盡한다.
6추의 마지막인 지상(智相)은 7지에서 이 미혹이 다 없어지고, 3세의 마지막인 업상(業相)은 10지의 마지막인 금강유정(金剛喩定)에서 영원히 없어진다.
몽중일여(夢中一如)인 화엄7지(華嚴七地)는 아직 6추의 영역이고, 숙면일여(熟眠一如)인 자재위가 되어야 비로소 제8아뢰야인 3세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8지에는 6추가 없고 부처지위에는 3세가 없다.
선문에서 제8아뢰야의 장식(藏識)을 제8마계라 하여 적극 배척함은 미세한 장식을 타파하지 않으면 견성할 수 없으므로 오직 정법을 위한 노파심의 발로에서이다.
이제 자성을 가리고 있는 번뇌망상에 미세한 것과 굵은 것의 두 가지가 있음을 알았다. 굵은 것은 분별이 있으므로 쉽게 알 수 있지만 미세한 것은 분별이 없이 참으로 깊고 깊어 알기 어려워서 수도하는 데 큰 애로가 된다.
동정일여(動靜一如)와 몽중일여(夢中一如)가 되어도 숙면일여(熟眠一如)가 되지 않으면 이것은 6추의 영역이요, 숙면일여가 되어야만 비로소 가무심인 3세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 미세번뇌를 다 끊어 없애지 않으면 견성이 아니어서 정안종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끝까지 밝혀서 기어코 벗어나야만 불조의 혜명을 이어갈 수 있다.
굵은 망상을 영원히 떠난 아뢰야 무심[賴耶無心]도 견성이 아닌데, 객진번뇌 속에서 견성했다고 자처하게 되면 자신과 남을 그르치는 큰 비극이 연출되니 부디 정신차려야 한다.
4.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無上正覺]
卽見佛性하야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大涅槃經2) 大正藏 12-p.611 下
곧 佛性을 正見하여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證得하느니라.
불성을 정확히 보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다.
必得阿耨多羅三藐二菩提하야 得見佛性이니라(大涅槃經20) 大正藏 12-p.740 中
반드시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證得하여서 佛性을 正見함을 얻느니라.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해야 불성을 정확히 볼 수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無上正覺], 또는 위 없이 바르고 넓은 지혜[無上正遍知] 등으로 번역된다. ‘바른 깨달음’의 내용이 ‘바르고 넓은 지혜’이므로 같은 의미이다. 이 무상정각인 정변지를 얻는 것이 불교의 궁극 목표이다. 견성을 하면 정각을 얻고, 정각을 얻으면 견성을 한다 함은 견성이 정각이고 정각이 견성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이 곧 무상정각이며 성불이다.
我性者는 如來秘密之藏이니 若得成就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면 爾乃證知하느니라(大涅槃經8) 大正藏 12-p.649 下
我性 즉 佛性은 三世如來의 窮極秘密의 寶藏이니 만약에 無上正覺을 성취하면 我性을 圓證明知하느니라.
나의 본성 즉 불성은 삼세 여래의 궁극의 비밀 보배창고이니, 만약 무상정각을 성취하면 나의 본성을 원만히 깨쳐서 분명히 알게 된다.
정각을 성취하지 않고서는 즉 성불하지 않고서는 본성을 바로 볼 수 없으니 성불이 곧 견성이다. 견성이 성불이고 성불이 견성임은 부처님 말씀이며 영산회상에서 정통으로 전한 것이다. 이는 견성이 원증돈증의 깨침, 즉 구경각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증이나 해오를 견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단의 잘못된 견해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是諸衆生이 爲無量煩惱之所覆蔽하야 不識佛性하나니 若盡煩惱時엔 乃得知明了하야 如彼力士가 於明鏡中에 見其寶珠니라(大涅槃經8) 大正藏 12-p.649 中
이 모든 衆生들이 無量한 煩惱妄想의 覆蔽한 바 되어 自己心中의 佛性을 알지 못한다. 만약에 煩惱가 滅盡한 때에는 佛性을 證得하여 分明了知하되, 저 力士가 明鏡中에서 額上의 無價寶珠를 明見함과 같느니라.
이 모든 중생들이 한없는 번뇌망상에 덮여 자기 마음 속의 불성을 알지 못한다. 번뇌가 다 없어진 때에는 마치 저 힘센 장사가 거울 속에서 이마 위의 보배구슬을 밝게 보는 것과 같이 불성을 증득하여 분명히 안다.
극히 미세한 망상인 3세까지 남김없이 없어지면 자연히 구경무심에 도달하니, 이것이 견성이며 성불이다.
如來는 於諸衆生에 猶如良醫하야 知諸煩惱體相差別而爲斷除하야 開示如來秘密之藏의 淸淨佛性이 常住不變하느니라(大涅槃經8) 大正藏 12-p.651 中
諸佛如來는 一切衆生에게 良醫와 같아서 모든 煩惱의 體相差別을 悉知하여 이 煩惱를 斷滅除去하여, 如來의 비밀한 寶藏中에 있는 淸淨無垢한 佛性이 永劫토록 常住하여 절대로 不變함을 開示하느니라.
모든 여래는 일체중생에게 좋은 의사와 같아서 갖가지로 다른 번뇌의 근본과 모양을 모두 알아서 이 번뇌를 끊어 없애고, 여래의 비밀 보배창고에 있는 청정무구한 불성이 영겁토록 상주하여 절대로 변함 없음을 열어 보인다.
여래의 신비한 처방과 법약이 아니면 중생들이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참보배인 자기 마음의 부처, 즉 불성을 어찌 볼 수 있으리요. 그 자비의 큰 은혜는 분골쇄신하여도 다 갚지 못한다.
佛性은 非是作法이요 但爲煩惱客塵의 所覆이니 若能斷除하면 卽見佛性하야 成無上道하느니라(大涅槃經8) 大正藏 12-p.652 中
佛性은 衆生이 本有한 것이요 造作한 法이 아니다. 다만 煩惱인 客塵에 覆蔽되어 있을 뿐이니, 만약에 그 煩惱를 斷除하면 즉시에 佛性을 明見하여 無上大道를 성취하느니라.
불성은 중생이 본래 가진 것이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다만 번뇌인 객지에 덮여 있을 뿐이니, 그 번뇌만 끊어 없앨 수 있으면 즉시 불성을 분명히 보아 무상대도를 성취한다.
무상정각은 중생의 한없는 번뇌망상을 끊어 없애고 본래 가지고 있는 청정한 자성을 철저히 보는 데 있다. 이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만세불변의 대원칙이다.
無一衆生而不具如來智慧언마는 但爲妄想顚倒執著而不證得하나니 若離妄想하면 一切自然智와 無碍智가 卽得現前하느니라(八十華嚴經51) 大正藏 10-p.272 下
一人의 衆生도 如來의 智慧인 佛性을 具有하지 않은 者 없지마는, 妄想으로 생긴 顚倒에 집착하여 이것을 證得하지 못한다. 만약에 妄想을 離脫하면, 自性에 具有되어 있는 一切의 自然智와 無碍智가 卽時에 現前하느니라.
어느 한 중생도 여래의 지혜인 불성을 갖고 있지 않은 이가 없지만, 망상으로 전도되고 집착하여 이를 증득하지 못한다. 만약 망상만 떠난다면 자기 성품에 갖추어져 있는 일체의 자연지와 무애지가 그 자리에서 나타난다.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여래의 지혜는 곧 진여불성이다. 모든 망념이 다 끊어지면 이것이 견성이며 무상정각이다.
如來言하사되 奇哉奇哉라 此諸衆生이 云有如來智慧어늘 愚痴迷惑하야 不知不見고 我當敎以聖道하야 令其永離妄想執著하야 自於身中에 得見廣大智見하야 與佛無殊케하리라(八十華嚴51) 大正藏 10-p.272 下
如來가 言明하였다. 神奇하고도 神奇하다. 一切衆生이 모두 一切智者인 如來의 智慧를 具備하고 있거늘 愚痴하고 迷惑하여 不知하며 不見하는도다. 내가 당연히 聖道로써 敎導하여 그 障蔽物인 妄想執著을 영원히 離脫케 하여 衆生의 自身中에서 廣大無邊한 智見을 體得하여 獨尊無比한 佛陀와 차이가 없게 하리라.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신기하고 신기하다. 일체중생이 모든 것을 아는 여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으나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구나. 내가 마땅히 성인의 도로써 가르쳐서 장애물인 망상과 집착을 영원히 떠나게 하리라. 그리하여 중생이 자기 몸 가운데서 광대무변한 일체지[智見]를 체득하여 비할 수 없이 존귀한 부처님과 차이가 없게 하리라.
「열반경」과 「화엄경」의 두 경전에서 모든 중생이 불성을 본래 갖추고 있다고 밝힌 것은 인간이 본래 갖는 참다운 가치, 즉 절대성을 밝혀준 유사이래의 일대선언이다.
이로써 인간은 본래 갖추고 있는 절대성을 개발하여 위 없는 도를 성취하는 영원한 살 길을 얻게 되었다. 만일 부처님께서 걸림없는 큰 지혜로 중생에게 불성이 있음을 분명히 보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중생들은 영영 중생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팔만장경에 기록된 부처님의 거룩한 말씀은 그 목적이 불성을 개발하는 데 있으므로 단지 언어문자 익히는 것을 불교라고 여긴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다.
諸阿羅漢은 不見佛性이니 以不見故로 不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大涅槃經27) 大正藏 12-p.781 上
모든 阿羅漢은 佛性을 不見하였으니, 佛性을 不見한 故로 無上正覺 즉 阿耨菩提를 얻지 못하느니라.
모든 아라한은 불성을 보지 못하였다. 불성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무상정각, 즉 아뇩보리를 얻지 못하였다.
소승 최고의 과위, 무학지인 아라한은 유여열반으로서 불성을 본 것이 아니므로 정각을 얻지 못하였다. 아라한뿐 아니라 범부나 성인을 막론하고 불성을 보지 못하면 정각을 얻은 것이 아니고 성불한 것이 아니다.
菩薩이 位階十地하여도 尙不明了知見佛性이니 何況聲聞緣覺之人이 能見耶아(大涅槃經8) 大正藏 12-p.652 下
地位가 최후인 第十地에 도달한 大菩薩도 오히려 佛性을 明了히 知見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聲聞緣覺들이 能히 正見하리오.
보살지위의 마지막인 제10지에 도달한 보살도 오히려 불성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성문과 연각이 바로 볼 수 있겠는가.
‘10지성인은 구름 일듯 빗발치듯 설법은 하지만 견성을 하는 데는 얇은 비단을 가리고 보는 것과 같다’하였다. 이렇게 종문의 정안종사들은 10지대성도 견성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꾸짖었다. 또한 ‘3현도 선문의 종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데 10성인들이 어찌 조사 선종에 도달하겠는가’ 하였으니 견성을 근본으로 하는 선종의 깊은 종지에서는 3현은 말할 것도 없고 십지의 성인도 문외한이라고 갈파한 것이다. 이것은 10지성인도 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諸佛如來와 十住菩薩은 眼見佛性이요 乃至 九地는 聞見佛性이니라(大涅槃經26) 大正藏 12-p.772 下
諸佛如來와 十住菩薩은 兩眼으로 佛性을 보고, 九地에 이르기까지는 傳聞으로 佛性을 보느니라.
모든 부처님과 10주보살은 두 눈으로 불성을 보고, 9지까지는 전해 듣는 것으로 불성을 본다.
九地以還은 聞見佛性이요 十地는 眼見이나 未了了하고 如來佛眼이라사 窮盡하니라(淸凉 華嚴經82) 大正藏 36-p.644 下
九地 以下는 耳聞으로 佛性을 보고 十地는 兩眼으로 보나 明了하지 못하고, 如來의 佛眼이라사 了了明明히 窮盡하느니라.
9지 이하는 귀로 들음으로써 불성을 보고 10지는 두 눈으로 보지만 분명하지 못하고, 여래의 부처 눈[佛眼]이라야 끝까지 분명하게 본다.
10주(十住)는 3현의 첫 단계요, 9지(九地)는 10성의 앞단계이다. 그런데 10주는 눈으로 보고 9지는 귀로 듣는다 하니 앞뒤가 뒤바뀐 듯하지만, 여기 「열반경」에서 말하는 10주는 3현의 10주가 아니고 10지의 다른 명칭이다.
몇 가지 다른 경론에서도 10지(十地)를 10주(十住)로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천태종의 2조인 관정(灌頂)도 주(住)와 지(地)가 다르지 않다, 즉 10주와 10지가 다르지 않다(이 글에서 주(住)라고도 하고 지(地)라고도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주와 지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十地菩薩이 雖見佛性이나 而不明了니라(大涅槃經25) 大正藏 12-p.769 中
十地菩薩이 비록 佛性을 보나 明了치 못하느니라.
10지보살은 불성을 보기는 하나, 분명히 알지는 못한다.
十住菩薩이 知有佛性이나 猶如闇夜하야 所見이 不了하고 諸佛如來는 亦見亦知니라(大涅槃經 15) 大正藏 12-p.705 上
十住菩薩은 佛性이 있음을 아나 暗夜의 所見과 같고, 諸佛如來는 또한 보며 또한 아느니라.
10주보살은 불성이 있는 줄은 알지만 어두운 밤에 보는 것과 같고 모든 부처님은 보기도 하고 알기도 한다.
十住菩薩의 所見佛性은 如夜見色이요 如來所見은 如晝見色이니라(大涅槃經15) 大正藏 12-p.769 下
十住菩薩의 所見한 佛性은 黑夜에 色彩를 봄과 같고, 如來의 所見은 白晝에 色像을 봄과 같느니라.
10주보살이 불성을 보는 것은 어두운 밤에 색채를 보는 것과 같고, 여래가 보는 것은 대낮에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十住菩薩은 智慧力이 多하고 三昧力이 少故로 不得明見佛性이니라(大涅槃經28) 大正藏 12-p.792 下
十住菩薩은 智慧力이 많고 三昧力이 적으므로 佛性을 明見치 못하느니라.
10주보살은 지혜의 힘이 많고 삼매의 힘이 적으므로 불성을 분명히 보지 못한다.
十住菩薩은 不見佛性일새 名爲涅槃이요 非大涅槃이니라(大涅槃經21) 大正藏 12-p.746 中
十住菩薩은 佛性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涅槃이라 이름하고 大涅槃이 아니니라.
10주보살은 불성을 보지 못하므로 열반이라고만 부르고 대열반이라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도 십주(十住)는 십지(十地)를 말한다. 십지에서 불성을 보는 것은 어두운 밤에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했으니 캄캄한 밤중에 물건을 보는 것은 정견이 아니며 여래처럼 대낮에 물건을 보아야 정견이랄 수 있다. 그러므로 10지보살도 불성을 보았다고 할 수 없고, 여래지위라야 비로소 불성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다.
또 위에서 말한 ‘열반’이란 유여열반이요, 대열반이란 무여열반이다.
諸善男子의 所有佛性은 如是甚深하야 難得知見이니 唯佛能知니라(大涅槃經8) 大正藏 12-p.653 上
모든 善男子들의 所有한 佛性은 이렇게 지극히 深玄하여 正知明見하기 심히 어려우니, 오직 正覺한 佛陀만이 이를 能히 알 수 있느니라.
모든 선남자가 갖고 있는 불성은 이처럼 지극히 깊어서 바로 알고 분명히 보기가 무척 어려우니, 오직 바로 깨달은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
如是佛性은 唯佛能知니라(大涅槃經8) 大正藏 12-p.653 上
이렇게 佛性은 오직 佛陀만이 能히 아느니라.
이처럼 불성은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
불성은 곧 여래인 모든 부처님의 경계이니, 부처님 이외에는 모두 바로 알고 바로 보지 못함은 당연한 결론이다.
諸佛이 了了得見佛性이니라(大涅槃經25) 大正藏 12-p.768 下
諸佛如來만이 分明了了히 佛性을 볼 수 있느니라.
모든 부처님만이 분명하게 불성을 볼 수 있다.
佛眼見故로 得明了니라(大涅槃經26) 大正藏 12-p.772 中
佛眼으로 보므로 明明了了하니라.
부처의 눈[佛眼]으로 보기 때문에 분명하게 안다.
明見佛性故로 名明行足이니라(大涅槃經16) 大正藏 12-p.711 中
佛性을 分明히 보므로 明行足이라 하느니라.
불성을 분명히 보시므로 밝음과 행함이 완전한 분[明行足]이라 한다.
무명의 어두운 굴을 타파하고, 긴 밤의 혼미한 꿈에서 깨어나서 밝은 대낮같이 환히 비추어야만 참 성품을 바로 본다. 십지성인이라도 미세한 무명이 바른 안목을 가려서 어두운 밤에 물건을 보듯 꿈 속의 미망에 있으므로, 정각이 아니며 견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뇩보리, 즉 무상정각을 성취해야 불성을 바로 본다는 불조정전의 철칙에 따라, 구경무심인 불지 외에는 단연코 견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견성이 이렇게도 어려우므로, 부처님 이후로 견성하여 도를 깨친 이가 얼마나 될는지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경각인 견성은 중생의 근본무명, 즉 제8아뢰야의 미세망상을 완전히 끊기만 하면 된다.
중생의 부처성품은 불가사의하여서, 부처와 조사의 훌륭한 가르침에 따라 실답게 수행하면 5역10악의 극중죄를 지은 사람도 이 생에서 견성할 수 있다고 부처와 조사가 다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함은 이를 말함이니, 오직 당사자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옛부터 선문의 정안종사들 가운데 아뢰야의 미세망상을 완전히 끊어서 구경 무심지에 이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종문에서는 미세망상을 제8마계라 하여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 극력으로 배척하였고, 제8마계인 근본무명을 타파해야만 바른 안목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한다. 불조의 혜명이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諸佛世尊은 眼見佛性하되 如掌中에 觀阿摩勒하니라(大涅槃經26) 大正藏 12-p.772 中
諸佛世尊은 雙眼으로 佛性을 洞見하되 掌中에 阿摩勒果를 보는 것과 같느니라.
모든 부처님은 손바닥의 아마륵과를 보듯 두 눈으로 불성을 분명히 본다.
諸佛世尊은 見於佛性을 如觀掌中의 阿摩勒果하니라(大涅槃經25) 大正藏 12-p.770 上
諸佛世尊은 佛性을 了見하되 掌中의 阿摩勒果를 봄과 같느니라.
모든 부처님은 손바닥의 아마륵과를 보듯 불성을 분명히 본다.
諸佛世尊은 定慧等故로 明見佛性하야 了了無碍하야 如觀掌中의 菴摩勒果하니라(大涅槃經28) 大正藏 12-p.792 下
諸佛世尊은 定과 慧를 等持하므로 佛性을 明見하여 了了히 障碍가 없어서 菴摩勒果를 봄과 같느니라.
모든 부처님은 정(定)과 혜(慧)를 균등히 지니므로 마치 손바닥의 아마륵과를 보듯 아무 걸림 없이 불성을 분명히 본다.
정(定)과 혜(慧)가 균등한 대적광삼매(大寂光三昧)에 있는 여래의 지위가 아니면 불성을 분명히 보지 못하니, 견성이 곧 성불이며 무상정각이다.
如來가 入大涅槃이니라(大涅槃經28) 大正藏 12-p.790 下
大覺如來가 大涅槃에 들어가느니라.
크게 깨달으신 여래께서 대열반에 들어간다.
是大涅槃은 卽是諸佛의 甚深禪定이니라(大涅槃經10) 大正藏 12-p.672 下
이 大涅槃은 곧 諸佛世尊의 甚深한 禪定이니라.
이 대열반은 모든 부처님의 매우 깊은 선정이다.
若見佛性하면 能斷煩惱하나니 是卽名爲大涅槃이니라(大涅槃經23) 大正藏 12-p.758 下
만약에 佛性을 正見하면 능히 煩惱를 斷盡하나니 이를 大涅槃이라 하느니라.
불성을 바로 보면 번뇌를 완전히 끊을 수 있으니, 이것을 대열반이라 한다.
若了了見於佛性하면 得明爲大涅槃이라 是大涅槃은 唯大象王이 能盡其底니 大象王者는 謂諸佛也니라(大涅槃經21) 大正藏 12-p. 746 中
만약에 了了히 佛性을 正見하면 大涅槃이라 하는지라, 이 大涅槃은 오직 大象王이 능히 그 深底를 窮盡하나니 大象王은 諸佛을 말함이니라.
불성을 분명히 보면 그것을 대열반이라 한다. 이 대열반은 큰 코끼리왕만이 그 밑바닥에 닿을 수 있는데, 큰 코끼리왕이란 모든 부처님을 말한다.
衆生佛性은 諸佛境界니 以見佛性故로 解脫生死하야 得大涅槃이니라(大涅槃經26) 大正藏 12-p.776 上
衆生의 佛性은 諸佛의 境界니, 佛性을 正見한 故로 生死를 解脫하여 大涅槃을 얻느니라.
중생의 불성은 모든 부처님의 경계다. 그러므로 불성을 바로 보아 생사를 벗어나 대열반을 얻는다.
모든 부처님의 깊은 선정인 대열반, 즉 무여열반은 불성을 바로 보아야만 성취된다. 이것은 견성이 곧 여래이며 대열반이기 때문이다.
涅槃經에 云호대 金剛寶藏이 無所減缺이라하니 故名圓敎也니라(智者 四敎義1) 大正藏 46-p.721 中
涅槃經에서 말하기를 金剛不壞의 無盡寶藏이 增減과 欠缺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圓敎라 하느니라.
「열반경」에서 말하기를 “금강같이 단단한 한없는 보배창고는 증감이나 결함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원교(圓敎)라 한다.
지자(智者)대사는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등을 원교(圓敎)라고 판정하였다.
「열반경」은 여래가 마지막에 하신 궁극의 설법이므로 원교(圓敎)라 한 것이며, 증득하신 불과는 원교인 가장 높은 지위로서 무여열반이다.
復願諸衆生이 永破諸煩惱하야 了了見佛性하되 猶如文殊等케하여지이다(大涅槃經18) 大正藏 12-p.728 中
다시 願하노니 모든 衆生들이 一切煩惱를 영원히 破滅하여 了了히 佛性을 正見하되 文殊菩薩等과 같게 하여지이다.
다시 원하노니, 모든 중생이 문수보살 등처럼 온갖 번뇌를 영원히 부수고 불성을 분명하고 바르게 보게 하여지이다.
文殊師利와 諸菩薩等이 已無量世에 修聖道하야 了知佛性이니라(大涅槃經30) 大正藏 12-p.803 中
文殊師利와 모든 菩薩들이 이미 無量世에 聖道를 修習하여 佛性을 了了明知하느니라.
문수보살과 모든 보살은 이미 무한한 세월에 성스런 도를 닦아서 불성을 분명히 알았다.
무상정각을 이룬 여래위, 즉 부처자리[佛地]만이 분명하게 불성을 본다 함이 부처님의 혜명이다. 문수보살이 분명하게 불성을 보았다고 하는 이유는, 문수는 이미 부처가 되고서 방편상 출현한 보살이기 때문이다. 즉 문수는 모든 번뇌를 영원히 부수어 이미 정각을 이루고서, 과거에 용종상여래, 대신여래, 보상여래, 환희장마니보적여래 등으로 출현한 대력보살이므로, 분명하게 불성을 본 분이다. 문수 이외에 ‘모든 보살들’이라고 말한 것도 문수와 같은 큰 힘을 갖춘 보살을 가리킨다.
云何了了見고 如人이 自觀掌中의 阿摩勒果하야 道와 菩提와 涅槃을 唯有如來가 悉知見覺하나니 急諸菩薩도 亦復如是니라(大涅槃經15) 大正藏 12日 p.708 下
어떤 것이 了了見인고. 사람이 스스로 掌中의 阿摩勒果를 보는 것과 같아서, 無上道와 菩提와 涅槃은 오직 如來만이 완전히 了知明見正覺하나니 모든 菩薩들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무엇을 ‘분명히 본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자기 손바닥의 아마륵과를 보듯 보는 것이다. 위 없는 도와 보리와 열반은 오직 여래만이 분명히 알고 밝게 보고 바르게 깨달으며 모든 보살들도 그러하다.
손바닥의 아마륵과를 분명히 보는 것처럼 불성을 분명히 보는 것은 오직 부처님 뿐이라 함은 세존께서 누누히 말씀하신 바이다. 여기에서 ‘여러 보살들’이라고 말한 것은 문수보살과 같은 큰 힘을 갖춘 보살이다.
阿耨多羅三藐三菩提와 大般涅槃을 若知見覺하면 當名菩薩이니라(大涅槃經16) 大正藏 12日 p.708 下
阿耨菩提와 大般涅槃을 만약에 了知明見正覺하면, 마땅히 菩薩이라 이름하느니라.
아뇩보리와 대열반을 만약 분명히 알고 밝게 보고 바르게 깨달으면 그를 보살이라 해야 한다.
무상정각인 아뇩보리와 여러 부처님의 깊은 선정인 대열반을 알고 보면 부처지위인 여래다. 여기서 ‘보살’이라고 이름한 것은 큰 힘을 갖추고[大力] 방편으로 나타난[權現] 깨친 후의 보살임은 의심할 수 없다.
若有見知覺佛性하면 名位菩薩이니라(大涅槃經16) 大正藏 12日 p.708 下
만약에 佛性을 知見覺한 者라면 菩薩이라 이름하느니라.
불성을 알고 보고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그를 보살이라 부른다.
明見佛性하면 是名菩薩이니라(大涅槃經16) 大正藏 12日 p.709 中
佛性을 明見하면 이를 菩薩이라 이름하느니라.
불성을 분명히 보면 그를 보살이라 한다.
得解脫故로 得見佛性이요 見佛性하면 得大涅槃이니 是菩薩의 淸淨持戒니라(大涅槃經16) 大正藏 12-p.710 上
解脫을 얻은 故로 佛性을 보며 佛性을 봄으로 大涅槃을 얻나니, 이는 菩薩의 淸淨持戒니라.
해탈을 얻으므로 불성을 보며, 불성을 봄으로 대열반을 얻으니, 이는 보살이 청정하게 지니는 계(戒)이다.
여기서 말한 보살도 불성을 분명히 본 대열반의 보살로서 큰 힘을 가진 대력보살이다.
大般涅槃은 唯佛菩薩之所見이니 故로 名大涅槃이니라(大涅槃經21) 大正藏 12-p.746 中
大般涅槃은 오직 佛과 菩薩의 所見이니, 그러므로 大涅槃이라 하느니라.
대열반은 부처님과 보살만 봄으로 그것을 대열반이라 한다.
불과를 이룬 여래만이 대열반을 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보살’도 십지까지의 지상(地上)보살이 아니고, 불과를 이루고 큰 힘을 가진 보살임은 다시 말할 것 없다.
佛世尊을 名爲大沙門이며 大婆羅門이니라(大涅槃經16) 大正藏 12-p.710 下
佛世尊을 大沙門이라 大婆羅門이라 하느니라.
부처님인 세존을 큰 사문 또는 큰 바라문이라 부른다.
大身生者는 諸佛菩薩이니 大智慧故로 名大生이니라(大涅槃經30) 大正藏 12-p.805 中
大身衆生이라 함은 佛陀와 大力菩薩이니, 無上大智慧인 故로 大衆生이라 하느니라.
몸이 큰 중생[大身衆生]이란 모든 부처님과 대력보살이다. 위 없이 큰 지혜를 가졌기 때문에 그들을 큰 중생이라 한다.
불과를 이룬 여래, 즉 바른 깨달음을 얻은 세존과 대력보살을 큰 바라문 또는 큰 중생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내용상 정각을 말함이지 실제로 바라문이나 중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부르든지 정각을 가리킴에는 변동이 없다.
이와 같이 불성을 분명하게 본 여래 세존을 방편상 보살이라고 표현하여도, 불성을 분명히 본 여래세존임에는 조금도 상관이 없다.
眞解脫者는 卽是如來요 如來者는 卽是涅槃이요 涅槃者는 卽是無盡이요 無盡者는 卽是佛性이요 佛性者는 卽是決定이요 決定者는 卽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大涅槃經5) 大正藏 12-p.636 上
眞解脫은 곧 如來요 如來는 곧 涅槃이요 涅槃은 곧 無盡이요 無盡은 곧 佛性이요 佛性은 곧 決定이요 決定은 곧 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참된 해탈은 여래요, 여래는 열반이요, 열반은 다함 없음이요, 다함 없음은 불성이요, 불성은 결정적인 것이요, 결정적인 것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해탈․여래․열반․불성 및 아뇩보리는 체는 같으나 이름만 다를 뿐이다. 그리하여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거나 불성을 분명히 보면 무상정각을 얻은 여래다.
佛言하사되 善男子야 無因緣故로 故名爲無生이요 以無爲故로 故名無出이요 無造業故로 故名無作이요 壞結賊故로 故名安穩이요 諸結火滅故로 名滅度요 離覺觀故로 名涅槃이요 遠憒鬧故로 名爲寂靜이요 永斷生死故로 名無病이요 一切無故로 名無所有니 善男子야 菩薩이 作是觀時에 卽得明了於佛性이니라(大涅槃經29) 大正藏 12-p.794 中
佛陀가 말씀하셨다. 善男子들아, 因緣이 없으므로 無生이라 名稱하며, 無爲인 故로 無出이라 하고 造業이 없으므로 無作이라 이름한다. 妄結과 業賊을 破壞하였으므로 安穩이라 하고, 모든 妄結의 業火가 永滅한 故로 滅度라 하며, 覺觀을 捨離하였으므로 涅槃이라 呼稱한다. 憒鬧함을 遠離하였으므로 寂靜이라 하며, 生死를 永斷하였으므로 無病이라 하고, 一切가 空無하므로 無所有라 하나니, 菩薩이 이 深觀을 作得하였을 때 卽是에 佛性을 明了히 正見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인연이 없으므로 남이 없음[無生]이라 부르며, 함이 없으므로 나옴이 없음[無出]이라 하며, 업을 지음이 없으므로 지음 없음[無作]이라 하며, 번뇌와 업을 쳐부수므로 안온(安穩)이라 하며, 번뇌로 일어난 업의 불길이 영원히 꺼지므로 멸도(滅度)라 하며, 거칠고 섬세한 마음[覺觀]을 떠나므로 열반(涅槃)이라 하며, 시끄러움을 떠나므로 적정(寂靜)이라 하며, 나고 죽음을 영원히 끊으므로 병 없음[無病]이라 하며, 일체가 텅 비었으므로 있는 바 없음[無所有]이라 한다. 선남자여! 보살이 이 깊은 관(觀)을 지을 때 불성을 분명하게 본다”
무생, 무위, 열반, 무병 등은 명칭은 각각 다르나 여래께서 깨친 똑같은 내용이다. 즉 제8아뢰야의 미세망상을 영원히 끊고 구경의 대무심지에 도달한 깊고 깊은 경지를 표현하는 명칭들이다.
그리하여 고요함[寂]과 비춤[照]이 융통하며 선정[定]과 지혜[慧]가 균등하게 되는 이 구경의 삼매에서만 견성이며 성불이다. 어느 부처님이든 정안종사든 무생과 무위 등을 철저하게 깨치지 않고서는 견성하거나 도(道)를 이룬 분은 없었다.
「대열반경」에서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음’, ‘번뇌를 완전히 끊음’, ‘번뇌를 끊어 없앰’, ‘번뇌를 영원히 깨뜨림’ 등을 견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번뇌’는 거친 것과 미세한 것을 통틀어 말한 것으로 기신론 에서 “미세한 무명을 영원히 떠남을 심성을 본다고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10지보살도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으므로 견성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부처지위에서만 영원히 번뇌를 깨뜨렸으므로 모든 부처님만이 견성이라 한 것이다. 이 미세한 번뇌를 멀리 떠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부처지위에서의 견성을 무심․무념․무생대열반․구경각․여래지라고 하였다.
이처럼 고금의 불조가 이구동성으로 견성은 구경각인 무상정각이며, 무여열반인 대열반이며, 부처님임을 입이 아프도록 말씀하셨다. 이로써 견성이 원증돈증의 깨침[證悟], 즉 구경각인 대무심지임이 입증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수도하는 납자는 부처님과 조사들이 남기신 법만 따를 뿐이요, 그밖에 이단의 잘못된 주장은 정법의 기치 아래 단연코 배제해야 한다.
7. 무심함을 보임함[保任無心]
內外寂하고 湛然凝照하야 到一念不生處하야 透徹淵源하야 翛然自得하면 體若虛空하야 莫窮邊量이라 亘古亘今하야 萬像이 羅籠不住하며 凡聖이 拘碍不得하야 淨裸裸赤週週하나니 謂之本來面目이며 本地風光이니라 一得永得하야 盡未來際하나니 更有甚生死하야 可爲滯碍리오 此箇無心境界와 無念眞宗은 要猛利人이라니 方能著實이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47 下
內外가 虛寂하고 湛然히 凝照하야 一念도 不生하는 深處에 도달하여서 淵源을 철저히 透得하여 翛然히 自得하면, 그 當體가 虛空과 같아서 邊量을 窮盡하지 못한다. 上古와 現今에 뻗쳐서 萬像이 羅籠하지 못하며 凡聖이 拘碍하지 못하여 淨裸裸赤週週하나니, 이를 本來面目이라 本地風光이라 한다. 一得하면 영원히 證得하여 未來際가 다 하여도 忘失하지 않나니, 무슨 生死가 있어서 可히 滯碍하리오. 이 無心境界와 無念眞宗은 猛利한 사람이라야 能히 實證한다.
안팎이 비어 고요하고 엉기듯 맑게 비추어 한 생각도 나지 않는 깊은 곳에 도달하여 근원을 철저히 뚫어서 당장에 스스로 깨치면, 그 자체가 허공과 같아서 범위와 크기를 다 헤아리지 못한다. 고금에 뻗쳐서 온갖 모양이 가두지 못하고 범인과 성인이 얽어매지 못하여 아무 걸림이 없으니, 이를 본래면목이니 본지풍광이니 한다. 한 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서 미래가 다하도록 잃지 않으니, 여기에 무슨 걸리고 막힐 생사가 있겠는가. 이 무심한 경계와 무념의 참된 종취는 몹시 날카로운 사람이라야 실제로 깨칠 수 있다.
무심무념한 본래면목을 철저히 증득해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한다.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재하여 걸림 없는, 이 크게 쉬어버린 곳이 바로 정안종사가 안신입명할 곳이다.
直透本來妙心하면 亘古亘今하고 湛然不動하야 萬年一念이요 一念萬年이라 永無滲漏하야 一得永得하야 無有變易하나니 乃謂之直指人心見性成佛이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54 上
本來의 眞如妙心을 直透徹證하면, 古今에 長亘하고 湛然히 不動하여 萬年이 一念이요 一念이 萬年이다. 心地에 永永히 一毫의 滲漏도 없어서 一得하니 永得하여 如如不動하는 妙心은, 變異가 절대로 없나니 이것을 人心을 直指하여 見性成佛한다고 하느니라.
본래의 진여묘심을 그대로 뚫어버리면 고금에 길이 뻗치고 고요히 움직이지 않아 만년이 한 생각이고, 한 생각이 만년이다. 마음자리에 털끝만큼도 새나감[滲漏:번뇌]이 없어서 한번 깨침에 영원히 깨쳐 한결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 오묘한 마음은 변하거나 달라짐이 전혀 없으니, 이것을 두고, 사람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견성성불케 한다고 한다.
참이다 거짓이다 하는 생각[滲漏]이 영원히 끊어지고, 고요하여 움직임 없는 열반묘심은 천만 년이 다하여도 변함없다. 이 무심무념의 지위가 참으로 견성이며 성불이다.
與無心으로 相應하면 乃是究竟落著之地니 岩頭道하되 只守閑閑地라하며 雲居道하되 千人萬人中에 如無一人相似라하며 曹山이 道하되 如經蠱毒之鄕하야 水也不得沾他一滴이라하니 謂之長養聖胎며 謂之汚染不得이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54 上
眞無心으로 相應하면 이는 究竟의 落著地이다. 岩頭는 다만 無爲無事한 閑閑地만 守護한다 하였고, 雲居는 말하기를 千人萬人中의 紛雜한 곳에 있어도 一人도 없는 것과 같이 無心하다고 하였다. 曹山은 또한 蠱毒의 死鄕을 經過하는 것과 같아서 한방울의 물도 젖지 않는다 하였다. 이것을 聖胎를 長養하는 것이라 하며 汚染할 수 없는 無心의 眞境이라 했다.
참 무심에 닿으면 그것이 구경인 종착지다. 암두는 “그저 무위무사한 한가로운 경지만을 지킨다” 하였고, 운거는 “천만 사람이 법석대는 곳에 있어도 마치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무심하다”고 하였고, 조산은 독벌레가 있는 죽음의 땅을 물 한방울 적시지 않고 지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이것을 가리켜 성태를 기른다고 하며 더럽힐 수 없는 무심의 참된 경지라고 한다. 성태를 기른다는 한마디를 어떻게 말하겠는가? 털끝만큼도 닦아 배운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모양 없는 빛 속에서 항상 자유자재하도다.
온갖 생각이 다 없어진 무심한 지위를 체득하면 함이 없고 일이 없으며 한가하고 고요할 뿐이다.
이 크게 쉬어버린 곳에 몸을 두는 도 통한 사람은 천만군중이 북적대는 속에 있어도 사람 그림자마저 끊어진 심산궁곡에 있는 것과 같이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한가롭다. 한 방울의 독물에 생명을 빼앗기는 것과 같이 극히 미세한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자기 본성을 어둡게 하나, 한 번 깨치기만 하면 영원히 깨쳐 한결같이 변하지 않으므로 미세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큰 적멸도량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 정안종사들의 깨친 뒤의 생활이다.
心冥境寂然後에 有所證入하나니 及至證入하야는 證亦非證이요 入亦非入이라 수翛然通透하야 如桶底脫하야사 始豈無生無한 閑閑妙道正體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71 上
內心이 玄冥하고 外境이 空寂한 然後에 大道에 證入한 바 있나니, 證入하고 나서는 證도 또한 證이 아니요, 入도 또한 入이 아닌지라, 翛然히 深通徹透하여 桶底가 陷脫한 것과 같아야 비로소 無生無爲인 閑閑한 妙道의 正體에 契合하느니라.
안으로 마음이 그윽하고 밖으로 경계가 고요해진 다음에야 큰 도에 증득해 들어간다. 증득해 들어가고 나서는 증득도 증득이 아니고 들어감도 들어감이 아니다. 한순간에 깊이 통하고 철저하게 꿰뚫어서 통 밑바닥이 빠져버린 듯해야 비로소 무생무위의 한가한 도, 그 자체에 계합한다.
활연히 철저하게 깨치고 그 깨친 흔적도 찾을 수 없어야 무생무위하여 한가롭고 무사한 구경휴헐지의 도체에 계합한다. 암두가 ‘그저 한가한 곳만을 지킨다’고 한 것은 무생무위인 구경무심의 한가한 지위를 말한다. 이로써 성태를 기른다 함과 보임행의 참뜻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得道之士는 徹證無心이라 雖萬機頓赴나 豈撓其神하며 干其慮哉아 只守閑閑地하야 如痴似几하나 及至臨事하야는 風旋電轉하야 靡不當機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01 下
大道를 體得한 高士는 無心을 철저히 深證한지라, 비록 萬般群機가 一時에 來赴하여도 어찌 그 精神을 撓動하며 그 深慮를 干犯하리오. 다만 閑閑한 心地만 守護하여 愚痴함과 같으며 鈍兀함과 같으나, 百事에 應臨하여서는 急風과 같이 旋回하며 飛電과 같이 活轉하여 的機에 正當치 않음이 없느니라.
큰 도를 체득한 납자는 무심을 철저히 깨쳤으므로, 만 가지 일이 한꺼번에 닥쳐와도 그 정신을 어지럽히지 못하며 그 깊은 생각을 침범하지 못한다. 바보 같고 둔한 사람 같이 한가로운 마음자리만을 지키나 온갖 일에 맞부딪쳐서는 바람 돌듯 번개 말리듯 표적에 들어맞지 않음이 없다.
‘한가로운 자리’라 함은 무심을 철저히 깨쳐 크게 쉬어버린 곳을 말한다.
到極深處하야는 無深하며 極妙處하야는 無妙하야 大休歇 大安穩하야 不動纖塵하고 只守閑閑地하야 凡聖이 莫能測하며 萬德이 不將來然後에 可以分付鉢袋子也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26 下
極深處에 도달하여서는 深이 없으며, 極妙處에서는 妙가 없어서, 大休歇하며 大安穩하며 纖塵도 不動하고 다만 閑閑地만 守護하며, 凡聖이 능히 測量치 못하며 萬德이 將來하지 못한 연후에 傳法의 鉢袋子를 分付하느니라.
지극히 깊은 곳에 도달해서는 깊음도 없으며 지극히 오묘한 곳에서는 오묘함도 없다. 크게 쉬어버리고 크게 편안하여 가는 먼지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그저 한가한 자리만을 지키며, 범인과 성인이 헤아리지 못하고 만 가지 덕행으로도 이르지 못한 다음에야 법을 전하는 바리때를 맡길 수 있다.
극히 깊고 현묘하여 크게 편안하고 크게 쉬어버린 곳, 무심무념한 한가한 자리를 원만히 깨쳐야만 부처와 조사가 정통으로 전한 법을 계승한다. 만일 마음과 생각이 남아 있어서 시끄러운 상태인 해오에서 도를 얻었다고 거짓말하고 함부로 법을 전한다면, 이는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고 함’이며 ‘깨치지 못하고서 깨쳤다고 하는 것’으로서 부처 종족을 없애는 것이다.
到無心地하면 一切妄念情習이 俱盡하고 知見解碍가 都消하나니 更有甚事리오 故로 南泉이 云平常心이 是道라하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37 上
無心地에 到達하면 一切의 妄念과 情習이 俱盡하고 知見과 解碍가 都消하나니, 다시 무슨 일이 있으리오. 그러므로 南泉이 말하기를 平常心이 道라 하니라.
무심한 자리에 도달하면 모든 망념과 습성이 다 없어지고, 지견과 알음알이가 모두 놓아버리니 더이상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남전이 ‘평상심이 도’라고 하였다.
여기서 평상심이라 함은 망념과 습성, 지견과 알음알이가 모두 없어진 크게 무심한 자리다. 미혹하고 눈먼 사람은 중생이 본래 가진 번뇌망상 등의 생멸심을 평상심으로 착각하니, 참으로 남쪽을 북쪽이라 우기는 미친 견해다.
致至實平常大安穩處하면 了無纖芥可得하고 只恁麽處轉安하나니 眞無心道人也라 保任此無心하야 究竟에 佛亦不存이어니 喚甚麽作衆生이며 菩提도 亦不立이어늘 喚甚麽作煩惱리오 翛然永脫하야 應時納祐하야 遇飯喫飯하며 遇茶喫茶니라 縱處闤闠하야도 如山林하야 初無二見하야 假使致之蓮華臺上하야도 亦不生忻이요 抑之九泉之下하여도 亦不起厭이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63 上
至實한 平常의 大安穩處에 到達하면 了然히 纖芥도 可히 所得한 것이 없고, 다만 이같이 處所를 따라서 自由로이 安穩하나니 眞實로 無心道人이다. 이 無心을 保任하여 究竟에 佛도 또한 存在하지 않는데 무엇을 불러 衆生이라 하며, 菩提도 또한 成立되지 않거늘 무엇을 불러 煩惱라 하리오. 翛然히 永脫하며 때에 順應하여 自在하니 밥을 만나면 밥을 먹고 茶를 만나면 茶를 마신다. 설사 奔雜한 市井에 處하여도 寂靜한 山林과 같아서 當初에 二種의 見解가 없다. 설사 蓮華臺上에 모셔도 忻悅하지 않으며 九泉之下에 抑閉하여도 嫌厭하지 않는다.
지극히 실답고 평상적인, 편안한 곳에 다다르면 티끌이나 겨자씨만큼도 얻을 것이 없고 그저그렇게 가는 곳마다 자유롭고 편안하니, 진실로 무심한 도인이다. 이 무심함을 보임하여, 결국에는 부처도 존재하지 않는데 무엇을 중생이라 부르며, 보리도 성립되지 않는데 무엇을 번뇌라 부르겠는가. 한순간에 영원히 벗어나며 때에 따라 자유로워 밥을 보면 밥 먹고 차를 보면 차 마신다. 시끄러운 저자거리에 있더라도 고요한 숲 속과 같아서 처음부터 두 가지 생각이 없다. 설사 연화대 위에 모셔도 기뻐하지 않으며, 깊은 지옥에 가두어도 싫어하지 않는다.
무심도인의 걸림없이 자유로운 대적삼매(大寂三昧)가 보임이며 장양이다. 이는 망념을 없애고 진여를 깨쳐 구경각을 성취한 뒤의 생활이다.
脚踏實地하야 到安穩處時엔 中無處假底工夫하야 綿綿不漏絲毫하고 湛寂應然하야 佛祖莫知요 魔外無提라 是自住無所住大解脫이니 雖歷窮劫하야도 亦只如如地어니 況復諸緣耶아(圜悟心要) 卍續 120-p.703 上
自性의 實地를 踏著하여 無事安穩한 곳에 도달한 때에는 心中에 虛假한 工夫가 없다. 綿綿不絶하여 絲毫도 滲漏하지 않고, 凝然히 湛寂하여 佛祖도 知得할 수 없으며 魔外도 提携하지 못한다. 이것은 無所住의 大解脫에 自住함이니, 비록 窮劫을 經歷하여도 또한 如如不變하거늘 하물며 塵緣이 다시 있으랴.
자기 본성의 실제 자리를 직접 밟아, 일 없고 편안한 곳에 도달한 때는 마음 속에 헛된 노력이 없다. 빈틈없고 끊임없어 실낱만큼도 새지 않고, 엉기듯 고요하여 부처와 조사도 알아차리지 못하며 천마와 외도도 붙잡지 못한다. 이것이 머뭄 없는 대해탈에 스스로 머무는 것이다. 다함없는 긴 세월을 지나도 한결같아 변하지 않은 경지이거늘 하물며 다시 티끌반연이 있겠는가.
억천만겁이 지나도록 한결같이 변함없는 대해탈의 경계가 무심하고 안락한 사람의 일상생활이다.
心中에 不留一物하면 直下에 似箇無心底人하야 如痴似兀하야 不生勝解라 養來養去하야 觀生死하되 甚譬如閑하야 便與趙州南泉과 德山臨濟로 同一見也니 切自保任하야 端居此無生無爲大安樂之地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76 上
心中에 一物도 殘留하지 않으면 直下에 木石과 같은 無心人이 되어서, 愚痴鈍兀함과 같아 勝解를 내지 않는다. 養來하고 養去하여, 生死를 觀하되 甚히 無事閑暇로움과 같아 문득 趙州 南泉과 德山 臨濟와 더불어 同一한 見地에 서게 되니, 懇切히 스스로 保任하여 이 無生無爲의 大安樂한 境地에 端居하느니라.
마음 속에 한 물건도 남겨 두지 않으면 당장에 나무나 돌과 같은 무심한 사람이 되어서, 바보같고 우둔한 듯하여 훌륭하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이 무심을 계속 길러서 아무일 없는 듯 무척 한가하게 생사를 관하여 조주․남전․덕산․임제와 견처가 같아진다. 부디 스스로 보임하여 남이 없고 함이 없는 이 큰 안락의 경지에 확고히 머물러야 한다.
남이 없고 함이 없는, 크게 안락한 해탈경계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 ‘보임’이다.
到一念不生하고 前後際斷處하야 驀然透徹하야 如桶底脫하야 有歡喜處하면 極奧極深하야 踏著本地風光하며 明見本來面目하야 不疑天下老和尙의 舌頭니라 坐得斷把得住하야 以無心無事로 養之라 二六時中에 無虛過底工夫하야 心心不觸物하며 步步無處所하나니 便是箇了事衲僧也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35 上
一念도 不生하고 前後際가 斷絶한 深處에 도달하여 憂然히 透徹하여 桶底가 脫落함과 같아서, 歡喜한 處所가 있으면 極奧하고 極深하여 本地의 風光을 踏著하고 本來의 面目을 明見하여 天下老和尙의 舌頭를 疑心하지 않는다. 一切를 坐斷하며 把住하여 無心과 無事로 長養한다. 二六時中에 虛過하는 工夫가 없어서 心心에 觸物하지 않고 步步에 處所가 없나니, 이것이 참으로 萬事를 了畢한 出塵한 衲僧이다.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 깊은 경계에 도달하여 마치 통밑바닥이 쑥 빠진 듯 단박에 철저히 꿰뚫어 환희심 나는 곳이 있으면 지극히 오묘하고 깊어서 본지풍광을 밟고 본래면목을 분명히 보아 천하 노스님들의 혀끝을 의심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 눌러앉고 모든 것을 꽉 잡아 무심과 무사로 기른다. 하루내내 헛수고 없이 마음마음에 저촉되는 것이 없고 걸음걸음에 머무는 곳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만사를 해결하고 번뇌를 벗어난 납승이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심오한 경계에서 활연히 크게 깨쳐서 본래면목인 자기 본성을 철저히 보고 무심과 무사로 성태를 기른다. 이것이 부처와 조사도 엿볼 수 없는, 바른 안목을 갖춘 납자의 불가사의한 깨친 뒤의 보임(保任)이다.
直似大死底人하야 絶氣息然後에 甦醒하면 始知廓同太하야 方到脚踏實地니라 深證此事하야 等閑蕩蕩地하야 百不知百不會하나니 纔至築著하면 便轉轆轆이라 更無物制하며 亦無方所하야 要用便用하며 要行便行하나니 更有甚得失이리오 通上徹下하야 一時收攝하나니 此無心境界는 豈容易履踐湊泊이리오 要須是箇人始得다(圜悟心要) 卍續 120-p.737 下
곧 大死한 사람과 같아서 氣息이 斷絶된 然後에 甦醒하면, 비로소 廓然히 太虛와 同一함을 알아야 바야흐로 實地를 踏著하는데 到達한다. 此事를 深深徹證하여 等閑에 蕩蕩無碍하여 百不知하고 百不會하나니, 반드시 築著하게 되면 문득 轆轆히 活轉한다. 다시는 物制도 없고 또한 方所도 없어서 要用하면 便用하고 要行하면 便行하는데, 다시 무슨 是非得失이 있으리오. 上으로 通透하고 下로 徹底하여 一時에 收攝하나니, 深玄한 이 無心境界를 어찌 容易하게 履踐하며 湊泊하리오. 이것은 모름지기 過量大人이라야 한다.
흡사 아주 죽은 사람과 같이 호흡이 끊어진 다음에 살아나면 비로소 허공과 같이 툭 트임을 알아 마침내 실제지위를 발로 밟는 데 도달한다. 이 일을 깊고 깊이 철저히 깨달으면 한가하고 걸림 없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맞닿기만 하면 자재하게 굴러서 다시는 사물에 매이지 않고 정해진 장소도 없다. 쓰고자 하면 쓰고, 가고자 하면 가니, 다시 무슨 옳고 그름과 얻고 잃음이 있겠는가. 위아래로 철저히 통하여 한꺼번에 거두어들이니 이 깊은 무심경계를 어찌 쉽게 밟아 도달하겠는가. 이는 반드시 한계를 벗어난 큰 사람이어야 한다.
깨닫고 난 다음의 생활은 이 일을 깊고 깊이 철저히 깨쳐 자유자재한 대무심경계에 있으니 크게 죽었다가 크게 살아난, 배움이 끊겨 할 일이 없는 한가한 도인이라야 한다.
直截根源하야 更無依倚하고 脫却知見解碍하며 不拘淨染二邊하야 超證無上眞宗하야 履踐無爲無作이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66 上
心性의 根源을 直截하여 다시는 依倚가 없고, 知見과 解碍를 脫却하여 淨藩二邊에 拘碍되지 않아서 無上의 眞宗을 超證하여 無爲無作을 履踐한다.
심성의 근원에 단도직입하여 다시는 의지함이 없고 지견과 알음알이의 장애를 벗어버려, 깨끗함과 더러움의 양극단에 걸리지 않고 가장 높은 참 종지를 초월․증득하여 무위무작을 행한다.
무심무념의 가장 높은 참된 종지를 초월 증득하여 무위무작을 행하는 것이 부처와 조사가 정통으로 전한 ‘깨친 후의 보임’이다.
若一念圓證하야 念念修行하면 以無修而修하며 無作而作이라 於一切境에 不執不著하야 不被善惡業緣縛하야 得大解脫하나니 到百年後에는 翛然獨脫하야 前程이 明朗하야 劫劫生生에 不迷自己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50 下
만약 一念에 自性을 圓證하여 念念이 修行하면 修함이 없이 修하며 作함이 없이 作하는지라, 一切의 境界에 執念치 않으며 愛著치 않아 善惡의 業緣에 ○縛되지 않아서 大解脫을 얻는다. 死後에 이르러서는 翛然히 獨脫하여 前程이 明朗하여 劫劫生生에 自己를 迷昧하지 않느니라.
만약 한 생각에 자기 본성을 원만히 깨쳐 생각생각 닦으면, 닦음없이 닦고 지음없이 짓는다. 그리하여 모든 경계에 생각을 매어두지 않고 애착하지 않아 선업과 악업의 인연에 묶이지 않아서 대해탈을 얻는다. 죽음에 다달아서는 한순간에 호젓이 벗어나 앞길이 밝아서 세세생생 자기를 잃지 않는다.
깨친 후의 수행은 자기 본성을 원만히 증득하여 구경무심을 성취한 후에 시작되니, 이것이 자재해탈이며 자재삼매다.
南岳이 云 修證卽不無나 汚染卽不得이라하니 卽此不汚染之修는 可謂圓修니 還著得箇修 麽字아 卽此不汚染之證이 可謂圓證이니 還著得箇證字麽아 如此則終日修而無修하야 掃地焚香이 皆悉無量之佛事어늘 又安可廢리오 但不著修證이니라 九地도 尙無功用이어늘 況十地乎아 乃至 等覺이 說法을 如雲如雨하야도 猶被南泉呵斥하야 與道全乖어늘 況十地觀照가 與宗門而較其優劣이 可乎아(博山警語) 卍續 112-p.970 上
南岳이 ‘修證은 없지 않으나 汚染은 卽 얻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 不汚染의 修는 可謂圓修니 修字가 붙을 수 있는가. 이 不汚染의 證이 可謂 圓證이니 證字가 붙을 수 있는가. 이러한 즉 종일토록 修하여도 修함이 없어서 掃地焚香이 전부 無量한 佛事이어늘, 이를 또한 어찌 廢하리오. 다만 修證에 著하지 않을 뿐이다. 九地도 오히려 無功用이어늘 하물며 十地리오. 설사 等覺이 說法하기를 如雲如雨하여도 오히려 南泉의 呵斥을 當하여 大道에 全然 背乖되었거늘, 하물며 十地菩薩의 觀照로써 禪門의 優劣을 論할 수 있으리오.
남악(南嶽)이 말하기를 “닦아 깨침은 없지 않으나 ‘물듦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물듦없는 닦음’이란 이른바 원만한 닦음이니, 도리어 닦는다는 말이 붙을 수 있겠는가. 이 물듦없는 깨침이 이른바 원만한 깨침이니, 여기에 깨친다는 말이 붙을 수 있겠는가. 그런 즉 종일토록 닦아도 닦음이 없어서 마당 쓸고 향 사름이 전부 한량없는 불사이니 그렇다고 그만둘 것도 없다. 다만 닦음과 깨침에 집착하지 않을 뿐이다. 제9지도 오히려 애씀[功用]이 없는데 하물며 제10지에서랴. 나아가 설법을 구름 일듯 빗발치듯 하는 등각도 오히려 남전(南泉)에게 꾸짖음을 듣고 큰 도와는 완전히 어긋났으니, 하물며 십지보살의 관조를 가지고 선문의 우열을 논할 수 있겠는가.
육조(六祖)가 말하였다. “다만 자기 마음에 항상 바른 견해가 일어나 번뇌 망상이 물들이지 못하는 것이 곧 견성이다”
이와 같이 ‘물들지 않음’은 철저히 깨친 후의 구경무심이라야 가능하며, 십지와 등각보살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원오도 구경무심의 한가로운 경지를 ‘물들일 수 없음’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남악(南嶽)이 말한 ‘물듦없는 닦고 깨침’이란 십지와 등각보살을 초월한 구경지에서의 무위무작의 행이다.
이 물듦없는, 원만히 깨친 지위는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완전히 다 할 수 있으니, 여래의 바른 안목을 원만히 갖춘 종문의 바른 명맥이다.
於一念不生處에 明悟此心이니라 虛而靈寂而照하야 內外洞然하야 唯一眞實이니라 便能 所作爲가 皆是透頂透底하야 大解脫金剛正體也니 要須了悟此心然後에 修一切善이니라 平持此心하야 無我人無愛憎하며 無取捨無得失하야 漸漸長養하나니 所謂理須頓悟요 事要漸修니라 離諸妄緣하야 然澄然後에 奉行一切善하야 饒益有이니라( 悟心要 答胡尙書悟性勸善文) 卍續 120-p.740 下
一念도 不生하는 곳에서 此心을 明了히 悟徹하느니라. 空虛하여 靈靈하고 寂寂하여 照耀하며 內外가 넓게 밝아서 唯一한 眞實뿐이니라. 문득 능히 作爲하는 바를 따라서 다 透頂透底하여 大解脫인 金剛正體이니 尤先 此心을 了了히 明悟한 然後에 一切諸善을 修行할지니라. 此心을 平持하여 我人이 없으며 愛憎이 없고 取捨가 없으며 得失이 없어서 漸漸히 長養하나니 所謂 理는 모름지기 頓悟할 것이요 事는 漸修함을 要하느니라. 모든 妄緣을 絶離하고 翛然히 澄淨한 然後에 一切諸善을 奉行하여 有情을 饒益할지니라.
한 생각도 나지 않는 곳에서 이 마음을 분명히 깨닫는다. 텅 비어 신령스럽고 고요하여 비추니 안팎이 훤히 뚫려 오로지 하나의 진실뿐이다. 무엇을 하든지간에 모두가 철저히 대해탈인 금강정체이니 먼저 이 마음을 완전히 밝게 깨친 다음에 모든 착한 것을 닦아야 한다. 이 마음을 평등하게 지녀 나와 남이 없고 사랑과 미움이 없고, 취하고 버림이 없고 얻고 잃음이 없이 점점 기른다. 이것이 이른바 이치로는 돈오하되 사실상은 점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헛된 인연을 완전히 떠나서 한순간에 맑아진 다음에 모든 선(善)을 받들어 행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해야 한다.
위는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 확철히 깨달아 텅 비어 신령스럽고 고요하여 밝게 비추는 대해탈을 성취한 후에 모든 선을 닦아 중생을 이익되게 함이 원증이고 원수(圓修)라는 얘기다. 사실상은 점수가 필요하다. 이 법어 가운데 “이치로는 돈오하되 사실상은 점수가 필요하다”는 구절을 규봉의 도오점수와 종종 혼동한다. 그러나 규봉이 말하는 돈오는 마음 속에 아직 망념이 남아 있으므로 그 점수라는 마음 속의 망상을 없애는 것이요, 원오가 말하는 돈오는 마음 속에 망상이 없으므로 그 점수는 사실상의 선을 닦는 것이다. 이렇듯 규봉의 점수는 업을 없애는 것이요, 원오의 점수는 선을 닦는 것이니, 돈오점수라는 명칭은 같으나 내용은 완전히 반대다. 그리고 선 닦는 것을 ‘점수’라고 한 이유는 많은 선을 한꺼번에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오가 말하는 깨치고 난 다음의 닦음은 언제나 크게 해탈하여 원만히 깨친 이후에 하는 물듦없는 닦음이므로 사실은 원만한 닦음[圓修]이다. 규봉(圭峯)은 「도서(都序)」에서 돈오돈수에 대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앞뒤가 끊김”이라 규정하였으나,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그곳에 머물면 바른 깨달음이 아니며 진정한 무심이 아니다.
선문에서 정통으로 전하는 깨달은 후의 보임(保任)은 반드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 무심함을 철저히 깨침을 전제로 하였으니, 단박 닦고[頓修] 원만히 깨친[圓證] 뒤로부터 시작된다. 그리하여 보임(保任)하고 기르는[長養] 것은 망상을 없애고 진여를 깨쳐 병이 나아 약까지 버린 무념무생의 크게 쉬어버리고 크게 해탈한 구경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참선하는 납자들은 오직 부처와 조사가 정통으로 전한 것만을 표준으로 삼고 그 밖의 다른 학설은 따르지 않아야 한다.
煩惱習은 名煩惱殘氣니라 譬如久鎖脚人이 來得解脫하야 行時에 雖無有鎖나 猶有習在요 如乳母衣가 久故垢著일새 雖以淳灰로 淨洗하야 雖無有垢나 垢氣猶在니라(大智度論27) 大正藏 25-p.260 下
煩惱의 習이라 함은 煩惱의 殘氣를 말함이니라. 비유하건대, 長久히 兩脚을 拘鎖한 人間이 卒地에 解脫함을 얻어서 行步할 때에 비록 拘鎖가 없으나 오히려 習慣이 殘在하고, 乳母의 衣服이 日久한 故로 垢穢가 付著하였을새, 비록 淳灰로써 淸淨히 洗浣하여 垢藩가 完全히 없으나 垢穢의 氣分이 殘在함과 같느니라.
번뇌의 습이란 남아 있는 번뇌 기운을 말한다. 비유컨대 오래도록 두 다리에 족쇄가 채워졌던 사람이 갑자기 벗어나게 되어 걸어갈 때 족쇄는 없어졌으나 그 습관이 남아 있는 것과 같고, 유모의 옷이 오래되어 때가 찌들면 비록 고운 잿물로 깨끗이 씻어서 때가 완전히 빠져도 그 기운이 남아 있는 것과 같다.
번뇌가 다 없어져도 남아 있는 습관과 기운을 습기(習氣)라고 하며, 이 습기 없애는 것을 깨달은 다음의 보임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깨달은 다음의 보임은 원만한 깨친 뒤의 무위무사하고 무심무념하며 상적상조하는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는 대해탈의 깊은 경지다. 배움이 끊겨 일없이 한가한 도인의 걸림없이 자유로운 이 무심한 큰 선정에서는 습기란 뜨거운 화로에 한 점 눈이다.
그러므로 오직 자성을 완전히 깨쳐 무심함을 보임할 뿐이요, 습기는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 마조는 “옷 입고 밥 먹으며 성인의 태를 길러서 걸림없이 세월을 보내니 다시 무슨 일삼을 것이 있는가”라고 하였으며, 지공도 “털끝 만큼도 닦고 배운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모양 없는 빛속에서 항상 자재하다[不起纖毫修學心 無相光中常自在]”고 하였다.
法達이 言下에 大悟하야 自言하되 念念修行佛行하라이다 大師言하되 卽佛行이 是佛이니라(壇經)
法達이 言下에 大悟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已後로는 생각생각 佛行을 修行하겠습니다 하니, 大師 말씀하기를 佛行이 곧 佛이니라.
법달이 말끝에 크게 깨치고 나서 스스로 말하기를 ‘이후로는 생각생각 부처님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고 하니, 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의 행이 곧 부처이니라’고 하였다.
「육조단경(六祖壇經)」의 대승사(大乘寺) 간행본에는 “부처님의 행을 수행하기를 원한다[願修佛行]”고 했고, 흥성사(興聖寺) 간행본에는 “바야흐로 부처님의 행을 닦는다[方修佛行]”라고 하였으나, 그 뜻은 마찬가지이다. 돈오견성하면 그것이 곧 부처지위이므로, 깨닫고 난 다음의 점수는 필요없고 오직 부처님의 행을 닦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심(無心)을 원만하게 증득한 후의 일삼을 바 없는 행이다.
8. 자나 깨나 한결같음[寤寐一如]
有一般昭昭靈靈한 靈臺智性하야 能見能聞하야 向五蘊身田裏하야 作主宰하나니 恁麽爲善知識하면 大賺人이니라 我今問汝하노니 若認昭昭靈靈하야 爲汝眞實이면 爲甚麽하야 瞌睡時엔 又不成昭昭靈靈고 若 睡時에 不是면 這箇는 認賊爲子니 是生死根本이며 妄想緣起니라(玄沙備 傳燈錄18)
一般으로 昭昭靈靈한 靈臺의 智性이 있어서, 능히 보며 능히 듣고 五蘊의 身田 속에서 主宰를 짓나니 이렇게 하여 善知識이라 한다면 크게 사람을 속임이다. 만약에 昭昭靈靈을 認得하여 너의 眞實을 삼는다면, 瞌睡할 時에는 어째서 昭昭靈靈이 없어지는가. 萬若 瞌睡할 때에 없으면 이것은 盜賊을 誤認하여 子息으로 삼는 것과 같으니, 이는 生死의 근본이며 妄想의 緣起이다.
어떤 이들은 소소영영한 영대지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보고 듣고 하며 오온의 몸 속에서 주인 노릇을 하니, 이런 견해를 가지고 선지식을 자처한다면 크게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너에게 묻겠는데 만약 소소영영함을 진짜 너라고 인정한다면 깊이 잠든 때는 어째서 그 소소영영함이 없는가? 깊이 잠 들었을 때 그것이 없다면 도적을 자식으로 착각한 것과 같으니 이는 생사의 근본인 망상연기다.
아무리 크게 깨달아 지견이 높고 훌륭한 것 같아도 실지 경계에 있어서 깊은 잠에 들어서 여전히 캄캄하면, 이는 망식의 움직임이지 실제로 깨달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수도자는 반드시 자나깨나 한결같은[寤寐一如] 실지 경계를 뚫고 지나야만 바로 깨치게 된다.
湛堂準이 謂大慧杲曰 杲上座야 我鵠裏禪을 你一時理會得하야 敎你說也說得하며 敎你拈古頌古와 小參普說도 你也做得하나 袛是有一件事未在라 你惺惺思量時엔 便有禪하되 纔睡著時엔 便無了하니 若如此하면 如何敵生死리오 杲曰 正是 某의 疑處니이다(大慧 宗門武庫)
湛堂準이 大慧에게 말하였다. 杲上座여, 나의 禪法을 그대가 一時에 理解하여 說法을 하라면 說法을 잘하고 拈古 頌古나 小參普說할 것 없이 잘한다. 그러나 一件 事實이 있어서 實悟가 아니다. 그대가 惺惺히 思量할 때에는 문득 禪이 있으나 겨우 잠 들었을 때에는 문득 없어진다. 만약에 이러할진대 어찌 生死를 當敵하리오. 杲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것이 저의 疑心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담당 준(湛堂準)이 대혜 고(大慧杲)에게 말하였다.
“고상좌여, 나의 선법을 그대가 한꺼번에 이해하여, 설법을 하라면 설법을 잘하고, 염고 송고와 소참 보설 무엇이든 잘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못하는 일이 있다. 그대가 또렷하게 생각할 때는 선(禪)이 있으나 잠만 들었다 하면 어느새 없어져 버리고 마니 그래가지고서야 어찌 생사를 대적하겠느냐.”
고가 대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가 의심하는 점입니다.”
설법이나 그 밖의 모든 일을 아무리 잘한다 해도 잠들었을 때 캄캄하면 이는 전적으로 제6식 속에서의 사량분별인 알음알이며 사견이지 실지 깨달음은 아니다. 그러므로 수도하는 사람은 양심에 비추어 크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
오매일여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하고서 돈오견성을 자부한다면 이는 자신을 그르치고 남까지 그르치는 커다란 죄과를 짓는 것으로, 수도하는 과정에 있어서 무서운 병통이며 장애이다.
大慧問圜悟하되 自念하니 此身이 尙在하야도 只是睡著하면 已作主宰不得이어니 況地水火風이 分散하야 衆苦가 熾然하면 如何不被回換이릿고 悟가 但以手로 指曰 住住어다 休妄想休妄想하라 又曰待汝說底許多妄想이 絶時에 汝自到寤寐恒一 處也리라 初聞코 亦未之信하야 每日我自顧하되 寤與寐가 分明作兩段이어늘 如何敢大開口하야 說禪고 佛說寤寐恒一이 是妄語則我此病을 不須除어니와 佛語果不欺人이면 乃是自我未了로다 後聞薰風이 自南來하야 忽然去却碍膺之物하고 方知夢時便是寤寐底요 寤時便是夢時底니 佛言寤寐恒一을 方始自知라 這般道理는 拈出人不得하며 呈似人不得하되 如夢中境界하여 取不得捨不得이니라(大慧廣錄 29)
大慧가 圜悟에게 물었다. 제가 생각하니 此身이 아직 存在하여도 다못 睡眠할 때에는 캄캄하여 主宰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하니 地水火風이 分散하는 死境에서 衆苦가 熾然히 일어날 때에는 어찌 回換顚倒되지 않겠습니까. 圜悟는 다만 手指로 가리키며, 그만하고 그만하라 그리고 妄想을 쉬어라 妄想을 쉬어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대가 只今 說法하는 許多한 妄想이 斷絶될 때에 그대 스스로 寤寐恒一處에 도달하리라고 하였다. 初聞하고는 또한 信從하지 않아서 每樣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回顧하여 보건대, 寤와 寐가 分明히 兩段이어늘 어찌 감히 크게 開口하여 禪을 說하리오. 다못 寤寐恒一이라 한 佛語가 妄語라면 나의 此病을 除去할 것 없지마는, 佛語가 과연 衆生을 欺瞞하지 않으면 이는 내가 아직 未達한 것이다. 後日에 薰風이 南으로부터 吹來한다는 說法을 듣고, 忽然히 心中에 碍膺된 物件을 去却하고서 바야흐로 夢時가 곧 寤時와 같고 寤時가 곧 夢時와 같음을 알게 되니, 寤寐恒一이라 한 佛言을 알았다. 이 道理는 他人에게 拈出할 수도 없고 呈似할 수도 없어서, 夢中境界와 같이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대혜가 원오에게 물었다.
“제가 생각하니, 이 몸이 이렇게 있다가도 잠만 들면 캄캄하여 주인공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하물며 지수화풍이 흩어지는 사경에서 수많은 고통이 불길같이 일어나면 어찌해야 휘둘리지 않겠습니까?”
원오는 그저 손짓으로 그만두라는 시늉을 하면서, “망상 피우지 말게나, 망상 피우지 말어”하고는 다시 “그대가 지금 말하는 이 많은 망상이 끊어질 때 저절로 오매일여의 경계에 도달하리라”하였다.
처음 듣고는 믿겨지지 않다가 매일 스스로를 돌이켜보았다.
”잠들었을 때와 깨어 있을 때가 분명 두 갈래인데, 어찌 감히 입을 크게 벌려 선을 설렵하리오. 오매일여라 하신 부처님 말씀이 망언이라면 내 병을 없앨 필요가 없겠지만, 부처님 말씀이 과연 중생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면 내가 아직 그 경계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뒷날,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온다는 설법을 듣고 홀연히 마음 속에 막혔던 물건을 떨어냈다. 거기서 바야흐로 잠잘 때가 깨어 있을 때와 같고, 깨어 있을 때가 잠들었을 때와 같음을 알아서 오매일여라 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알게 되었다.
이 도리는 남에게 꺼내 보여줄 수도 없고, 꿈 속의 경계와도 같이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도리다.
오매일여에는 몽중위(夢中位)와 숙면위(熟眠位) 두 가지가 있다. 꿈 속에서도 일여한 몽중위는 제6의식의 영역으로서 교가의 7지에 해당하고, 꿈도 없는 깊은 잠에서도 일여한 숙면위는 제8아뢰야식의 미세한 망상에 머물러 있는 8지 이상의 자재보살들과 아뢰야식의 미세망상을 영원히 여읜 진여가 항상한 부처지위를 말한다. 지금 대혜가 말한 것은 몽중일여이다.
오매일여를 믿지 않는 것은 대혜만의 병통이 아니라 수도하는 사람에게는 고금에 공통하는 병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견으로 오매일여의 실지경지를 부정하고 감히 입을 크게 열어 선을 말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대혜가 만일에 담당과 원오 같은 눈 밝은 종사를 만나서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면 뒷날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혜가 오매일여를 실제로 체득하고는 “자나깨나 한결같다는 부처님 말씀이 진실이요 거짓말이 아니다”고 찬탄하였으며, “그 은혜는 분골쇄신해도 다 갚을 수 없다”고 감격하였다.
수도하는 사람은 각자의 사견을 고집하지 말고 옛 부처와 옛 조사의 말씀을 표준 삼아 구경무심지를 실제로 증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생사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불조의 혜명을 영원히 단절할 것이다.
妙喜는 一生을 不自肯하고 晩登川勤之室하야 直階華嚴七地하니라(大明高僧傳6)
妙喜(大慧)는 일생동안 自肯하지 않고, 晩年에 川勤(圜悟)의 祖室에 入參하여 곧 華嚴七地에 昇進하였다.
묘희는 일생 동안 스스로를 긍정하지 않다가 만년에 원오스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화엄7지에 올랐다.
화엄7지 보살의 지위는 너무나 도달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누구든지 몽중일여가 되면 7지위이다. 그러나 숙면일여인 멸진정(滅盡定)의 자재위(自在位)는 아니어서 여기에 한 겹의 큰 관문이 더 있으니 노력하여 기필코 뚫어야 한다.
想陰이 盡者는 是人이 平常에 夢想이 消滅하야 寤寐恒一하야 覺明이 虛靜하야 猶如虛空하야 無復麤重前塵影事니라(楞嚴經10)
想陰이 滅盡한 者는 是人이 平常時에 夢想이 消滅하여 寤寐에 恒一하여, 覺明이 空虛하고 寂靜하여 虛空과 같아서 다시는 麤重한 前塵妄想의 影事는 없다.
상음(想陰)이 다 없어진 자는 평소에 꿈이 없어 자나 깨나 한결같다. 깨닫겠다는 생각[覺明]이 텅비고 고요해져 더 이상 앞의 경계를 반연하는 굵은 망상의 그림자는 없다.
제6의식의 거치른 망상은 없어져도 제8의 미세망상이 남았다. 오매일여는 몽중과 숙면에 다 통하니 몽중일여는 7지, 숙면일여는 8지 이상에 해당한다.
菩薩이 住此第七地하야 修習方便慧와 殊勝道하야 安住不動하야 無有一念도 休息廢捨하나니 行住坐臥와 乃至睡夢中에도 未曾與盖障으로 相應하느니라(華嚴經 十地品)
菩薩이 此第七地에 住하면 方便慧와 殊勝道를 修習하여 安住不動하여 一念도 休息하여 廢捨하지 않나니, 行住坐臥와 乃至 睡夢中에서도 暫時라도 盖障과 相應하지 않느니라.
제7지에 머무는 보살은 방편혜(方便慧)와 수승도(殊勝道)를 닦는다. 꼼짝않고 안주하여 한 생각도 쉬거나 버리지 않으니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나아가서는 잠들었을 때까지 잠시도 관계하지 않는다.
제7지 무상정에서는 굵은 망상이 극복된다. 꿈속에서도 여여하여 어떤 장애도 받지 않는다.
菩薩이 第七地에 行住坐臥와 乃至睡夢에도 遠離障盖니라(十地經)
菩薩이 第七地에서는, 行住坐臥와 乃至睡夢中에서도 모든 障盖를 遠離한다.
제7지에 있는 보살은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나아가 꿈꿀 때에도 개장을 멀리 떠난다.
개장은 번뇌망상으로 생기는 수도상의 장애다. 보살이 제7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몽중에 일여하니 도를 닦는 사람이 몽중일여가 되면 제7지와 동등하다.
無想天과 無想定과 滅盡定과 睡眠관 悶絶의 此五位中에 異生은 有四하니 除在滅定이요 聖唯後三이라 於中에 如來及自在菩薩은 唯得一이니 無睡悶故니라(成唯識論7)
無心五位中에 異生이 有四者는 除滅定이요 聖唯後三이며 佛及八地已去菩薩은 唯得一滅定하야 無睡眠悶絶이니 二以惡法故로 現似有睡나 實無有故요 卽二乘無學도 亦有悶絶也니라(宗鏡錄55)
無想天과 無想定과 滅盡定과 睡眠과 悶絶의 此五位中에, 異生인 凡夫는 四位를 다 俱有하니 滅盡定을 除外함이요, 聖位에서는 後의 三位만 있다. 그 中에 如來와 自在菩薩들은 오직 滅盡定 一位만 있으니 睡眠과 悶絶이 없는 緣故이다.
無心의 五位中에 異生에 四位가 있다 함은 滅盡定을 除外한 것이요 聖衆은 오직 後의 三位뿐이며, 佛과 八地已後의 自在菩薩은 唯獨 滅盡定만 있어서 睡眠과 悶絶이 없나니, 이 二種은 惡法이므로 現狀으로는 睡眠하는 것 같아도 實質로는 없는 緣故요, 즉 二乘의 無學들도 또한 悶絶이 있느니라.
무상천(無想天), 무상정(無想定), 멸진정(滅盡定), 수면(睡眠), 민절(悶絶), 이 다섯 가지 지위 중에 이생(異生)인 범부는 멸진정을 제외한 네 가지를 갖추고 있으며 성위(聖位)에서는 뒤의 세 가지만 있다. 그 중에 여래와 자재보살은 멸진정 하나만 있으니 수면과 민절이 없기 때문이다.
무심 오위 중에 이생에 넷이 있다 함은 멸진정을 제외한 것이요, 성인 무리는 뒤의 셋뿐이며, 부처와 8지 이상 보살은 유독 멸진정만 있어서 수면과 민절이 없다. 이 두 가지는 악법이므로 현상적으로는 수면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없는 까닭이요, 즉 이승의 무학(無學)들도 민절이 있다.
여기서 무심이라 함은 여래를 제외하고는 전부 가무심(假無心)을 말한다. 자재보살과 여래를 멸진정이라 하였는데 자재보살의 멸진정은 제6의식, 즉 6추만 소멸된 가무심이요, 여래의 멸진정은 제8식, 즉 3세까지 없어진 진짜 무심이다.
수면과 민절이 없다 함은 오매일여를 말함이다. 자재보살은 제8의 무기무심(無記無心)에서 일여하고, 여래는 진여의 구경무심에서 일여한 바, 진정한 일여는 불지의 구경무심뿐이다.
漸到寤寐一如時에 只要話頭心不離라 疑到情忘心絶處하면 金烏夜半에 徹天飛리니 於時에 莫生悲喜心하고 須參本色永決疑어다(太古集)
漸漸하여 工夫가 寤寐가 一如한 時에 到達하거든, 다못 心中에 話頭를 離却忘失하여서는 안된다. 參究하여 情忘하고 心絶한 深處에 도달하면, 金烏가 夜半에 徹天하여 高飛하리니, 그 때에 悲喜心을 내지 말고 모름지기 本色正眼을 往參하여 永永히 의심을 결단하라.
점점 공부해서 오매일여에 도달했을 때, 마음속에 화두를 놓쳐서는 안 된다. 망정이 잊혀지고 마음이 끊긴 깊은 경계까지 참구해 도달하면 금 까마귀(해)가 한 밤중에 하늘을 뚫고 높이 날 것이다. 그때 슬프도록 기쁜 생각을 내지 말고 반드시 눈밝은 본분종사를 찾아가서 의심을 영원히 결단하라.
여기서의 오매일여는 여래의 진여일여를 제외한 것이다. 오매일여가 된 후에 확철히 깨달아 남음이 없으면 자성을 훤히 본다. 그러나 근기에 따라 확철히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반드시 눈 밝은 종사를 찾아가 인가를 받아야 참으로 의심을 놓을 수 있다.
태고스님은 이십 년 간의 피나는 참구 끝에, 37세에 오매일여가 되고 38세에 대오하였다. 중국의 석옥(石屋)선사를 찾아가 인가를 받고 임제의 정통 맥을 이어받았다.
工夫가 旣到動靜無間하며 寤寐恒一하야 觸不散蕩不失하야 如狗子見熱油鐺相似하야 要舐又舐不得하며 要捨又捨不得時에 作麽生合殺오(懶翁集)
工夫가 이미 動靜에 間斷 없으며 寤寐에 항상 一如함에 이르러 抵觸하여도 散去하지 않고 蕩蕩히 亡失되지도 않는다. 狗子가 極熱한 油鐺을 봄과 같아서 핥을래야 핥을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合當한고.
공부가 이미 동정(動靜)에 틈이 없고 오매(寤寐)에 일여한 곳에 도달하여 부딪혀도 부숴지지 않고 흩어져도 잃어지지 않으면 마치 개가 끓는 기름솥을 보듯하여 핥을래야 핥을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다. 이럴 때 어찌해야 합당하겠느냐?
이 대목은 나옹이 수도의 지침서로 지은 「공부십절목」 중 여섯 번째이다. 참선해서 도를 깨치는 데에는 오매일여를 통과함이 필수 조건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견성이 아니며 오도가 아니다.
10지 등각을 넘어선 구경각인 무심을 철저히 증득하여 진정한 오매일여에서 영겁토록 어둡지 않아야 견성이며, 이 대무심지를 보임하는 것이 깨달은 뒤의 행리임은 불조정전의 철칙이다. 그러면 구경무심을 실제로 증득한 종사가 얼마나 될는지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몽중일여가 되면 벌써 화엄 7지며, 숙면일여가 되면 8지 이상이다. 선문의 정안종사치고 이 오매일여의 깊은 관문을 뚫지 않고 견성했다고 한 이는 없으며, 8지 이상인 숙면일여 이상에서 깨달았으니 구경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객진번뇌가 전과 다름 없고 거친 망식도 벗어나지 못한 해오는 견성도 아니고 돈오도 아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9. 죽음 가운데서 살아남[死中得活]
如今人은 多是得箇身心이 寂滅하고 前後際斷하야 休去歇去하야 一念萬年去로 便爲究竟이나 殊不知却被此勝妙境界가 障蔽自己하야 自己正知見이 不能現前하며 神通光明이 不能發露니라(眞淨文 古尊宿語錄44) 卍續 118-p.745 上
如今의 修道人은 多數가 心身이 寂滅하고 前後際가 斷絶함을 體得하여 休去하고 歇去하여 一念이 萬年去로 문득 究竟을 삼는다. 그러나 도리어 이 勝妙한 境界가 自心을 障蔽함을 입어서 自己의 正知見이 現前하지 못하며 神通光明이 發露하지 못한다.
요즘 도 닦는 사람들은 대부분 몸과 마음이 고요하고 앞뒤 경계가 끊어짐을 체험하여, 쉬어서 한 생각이 만 년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도리어 이 승문 경계에 자기 마음이 가리워져서 자기의 바른 지견이 나타나지 못하며 신통한 광명이 드러나지 못하는 줄은 전혀 모른다.
몸과 마음이 고요하여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앞뒤 경계가 끊어진 뛰어나고 오묘한 경계도 바른 깨달음이 아니거늘, 하물며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여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음이 되지 못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休去歇去하여 一念萬年이며 前後際斷하니 諸方에 有幾箇가 到這般田地오 他却喚作勝妙境界하니 舊時에 寶峯廣道者가 便是這般人이라 一箇渾身을 都不理解하며 不見有世間事하고 世間塵勞가 昧他不得이라 雖然恁麽나 却被勝妙境界하야 障却道眼하니 須知一念不生前後際斷處하야 正要見尊宿이니라(五祖演-大慧17) 大正藏 47-p.882 中
休去歇去하며 一念이 萬年이며 前後際斷하니, 諸方에 幾箇나 이 深深한 田地에 到達하였는가. 眞淨이 이를 도리어 勝妙境界라고 부르니, 舊時에 寶峯의 廣道者가 참으로 이러한 사람이다. 自己의 渾身을 全然 忘却하며 世間事가 있음을 보지 못하고 따라서 世間의 塵勞가 그를 昧却하지 못한다. 비록 그러하나 도리어 이 勝妙境界에 떨어져서 道眼을 障却하니, 참으로 一念不生하고 前後際斷한 勝妙境界에 到達하여서 正히 大尊宿을 參見하여야 함을 알아라.
“쉬고 또 쉬며 한 생각이 만 년이며 앞뒤 경계가 끊어진다” 하니, 제방 총림에 몇 사람이나 이 깊고 깊은 경지에 도달하였겠는가. 진정은 이것을 승묘경계라고 불렀으니, 옛날 보봉의 광도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자기 한 몸을 전혀 잊어버려 세간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따라서 세간 번뇌가 그를 어둡게 하지 못한다. 그렇긴 하나 도리어 이 승묘경계에 떨어져서 도(道)의 안목이 가려진다. 참으로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 경계가 끊어진 승묘경계에 도달하여서는 바로 큰 스님을 찾아뵙고 물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앞뒤 경계가 끊어진 것을 규봉은 돈오돈수라고 찬탄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바른 전통의 큰스님들은 이를 승묘경계라 하여 배제하였으니, 그 심천과 우열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얻기 어려운 승묘경계도 바른 안목을 가리는 큰 병이므로, 바른 안목을 갖춘 스승을 찾아뵙고 물어야 한다. 몸과 마음이 고요한 이 죽음의 경지에서 크게 살아나지 않으면 바른 깨달음이 아니다.
達磨云하되 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하야 心如墻壁하야사 可以入道니라 一念不生하고 前後際斷하야 塵勞頓息하고 昏散을 勦除하야 終日獃憃憃地하야 恰似箇血塑木彫底하나니 故로 謂墻壁으로 無殊라하니라 到這境界現前하면 卽到家消息이 決定去地不遠이니라(高峰妙) 卍續 122-p.706 下
達磨가 말했다. 外境의 諸緣을 頓息하고, 內心이 寂然無喘하여 心境이 墻壁과 같아야만 可히 大道에 正入하느니라.
一念도 不生하고 前後際가 忽斷하여 塵勞가 頓然히 息滅하고 昏沈과 散亂을 斷除하여 종일토록 전혀 分別이 없어서 泥塑木彫와 怡似하니, 그러므로 墻壁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이 境界가 現前하면 正悟의 到家消息이 결정코 不遠하다.
달마가 말했다. “바깥으로 온갖 반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임이 없어서, 마음이 담장 같아야만 큰 도에 바로 들어갈 수 있다”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 경계가 끊어져서 번뇌가 단박 쉬고 혼침과 산란을 끊어 없애 종일토록 전혀 분별이 없어 진흙으로 만들거나 나무로 깎은 상과 흡사하니 그러므로 담장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경계가 나타나면 바른 깨달음의 고향에 도달하는 소식이 결정코 멀지 않다.
바깥 경계와 안의 마음을 고요히 쉬어 담벽이나 목석과 같은 무심한 경지가 되어야만 큰 도에 깨달아 들어간다.
若一念不生하면 則前後際斷하야 照體獨立하야 物我一如하야 直造心源하야 無知無得하고 不取不捨하며 無對無修니라(澄觀心要 傳燈錄30) 大正藏 51-p.459 中
만약에 一念不生하면 前後際斷하여 照體가 獨立하며 物我가 一如하여 곧 心源에 도달하여 無知無得하고 不取不捨하며 無對無修니라.
만약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앞뒤가 끊어져서 비추는 바탕만이 홀로 서며 대상과 내가 하나로서 바로 마음의 근원에 도달하니, 앎도 얻음도 없고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으며 대치(對治)할 것도 닦을 것도 없다.
모든 생각이 다 고요해지면 진여인 자기 본성을 철저히 증득하게 되니, 그것이 견성이며 돈오이며 성불이다.
老漢이 見圜悟老師의 擧薰風이 自南來하고 忽然前後際斷하니 如一綟亂絲를 將刀一截截斷相似하야 雖然動相이 不生이나 却坐在裸裸處라 老師云 可惜다 死了不能活이로다 不疑言句是爲大病이니 絶後更甦하야사 欺君不得이니라 每入室에 只擧有句無句如藤倚樹하고 纔開口하면 便道不是라하다 我說箇譬喩曰這箇道理는 恰似狗看熱油鐺相似하야 要舐又舐不得하며 要捨又捨不得이니다 一日에 老師가 擧樹倒藤枯相隨來也어늘 老漢이 便理會得하고 乃曰某會也니다 老師曰 秪恐你透公不得이라하고 連擧一絡索○訛公案하니 被我三轉兩轉截斷하되 如箇太平無事에 得路便行하야 更無帶碍하야 方知道我不謾你하니라(大慧錄17) 大正藏 47-p.883 上中
老漢이 圜悟老師의 薰風自南來를 擧揚함을 보고 忽然히 前後際가 斷絶하니 一綟의 亂絲를 利刀로써 一截하여 斷截함과 같아서 비록 動相이 不生하나 도리어 淨裸裸處에 坐在하니라. 老師가 말하되, “可惜하다. 死了하고 更活치 못하는도다. 言句를 疑心하지 않는 것이 大病이니 死絶後에 更甦하여야 君을 欺瞞치 못한다”고 하였다. 每日 入室함에 다만 有句無句는 藤덩굴이 樹木을 倚止함과 같다 함을 擧揚하고서, 내가 대답하려고 開口만 하면 문득 不是라 하였다. 내가 譬喩를 說하되 這箇의 道理는 怡似히 狗子가 熱油鐺을 봄과 같아서 핥으려고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려고 하나 버릴 수도 없습니다고 하였다. 一日에 老師가 樹倒藤枯한 때에 相隨來也라고 擧揚하니 老漢이 문득 廓徹하여 理會하였다. 그리하여 저가 理會하였다고 하니, 老師가 말하기를 “다만 네가 公案을 透過 못할까 두려워한다”고 하며, 드디어 一絡索의 難解한 ○訛公案을 連擧하였다. 내가 三轉兩轉하여 截斷하되 太平無事時에 大路를 얻어 문득 行進함과 같아서 다시 滯碍함이 없으니, 바야흐로 내가 그대를 欺瞞 못한다 함을 알았다.
나는 원오 노스님이 들려주신,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온다’는 말에서 갑자기 앞뒤가 끊어졌다. 마치 한 웅큼 얽힌 실을 예리한 칼로 단번에 끊은 것과 같아서, 비록 움직임[動相]은 생기지 않았으나 도리어 말숙한 적나나한 경계에 눌러 앉고 말았다.
노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애석하다. 죽어버리고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구나. 언구를 의심하지 않음이 큰 병이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만 그대를 속이지 못한다”고 하셨다.
매일 법을 물으러 가면[入室] 다만 ‘유구와 무구가 마치 덩굴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有句無句如藤倚樹]’는 것을 들려주시고는 내가 대답하려고 입을 열기만 하면 다 아니라고 하였다. 나는 비유를 들어서 “이 도리는 마치 개가 끓는 기름솥을 보는 것과 같아서 핥으려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려 하나 버릴 수도 없습니다”고 하였다.
하루는 “나무가 넘어지고 덩굴이 마를 때는 어떻습니까?”하니 노스님이 “함께 하느니라”하셨다. 나는 이 말에 환하게 이치를 깨달았다. 그리하여 “제가 이치를 알았습니다”고 말하자, 노스님께서 ‘다만 네가 공안을 뚫지 못했을까 걱정이다 하시고는 드디어 잇따라 어렵고 까다로운 공안을 계속 들어보이셨다. 나는 그때마다 두세 번 대응[轉]하여 딱딱 잘라버리니 마치 태평무사한 때에 큰 길을 가는 것 같이 다시 막히거나 걸림이 없었다. 그제서야 ‘내가 그대를 속이지 못한다’고 한 말을 알았다.
오매일여에 몽중일여와 숙면일여의 정도차가 있는 것처럼 한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 승묘경계도 7지무상정과 8지멸진정의 차별이 있다.
대혜는 몽중일여인 7지의 크게 죽은 경계[大死境]에서 구경지까지 뚫었으니, 과연 날카로운 근기다. 이것은 8지멸진정에서의 크게 죽은 경계는 아니지만, 여기에서도 깊이 깨치면 정각을 성취한다.
이와 같이 앞뒤가 끊어진 승묘경계를 선문에서는 ‘죽어버리고는 살아나지 못한 것’이라 하여 극력 배제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철저히 깨쳐 활연히 살아나야만 바른 안목이라고 인가하는 것이다. 언구를 의심하지 않음이 큰 병이라는 말이 유일한 생명선이다. 크게 죽었다가 크게 살아나기 전에는 불조 공안(公案)의 깊고 묘한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7지 대보살 지위의 대혜에게도 언구(言句)를 힘써 참구시켰으며 함께한다”는 말에서 분명히 깨쳤어도, “네가 공안을 뚫지 못했을까 걱정이다” 하였으니, 그 밖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다. 설사 8지 이상이라도 공안의 귀결처는 아득히 모르며, 구경정각을 성취해야 완전히 아는 것이다. 역시 언구를 의심하지 않음이 큰 병이니, 참학하는 납자는 만세의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半月餘에 動相이 不生하나 不合這裏하야 坐住니 謂之見地不脫이니 碍正知見이니라 每於睡著하야 無夢想見聞地엔 打作兩橛하야 經敎語錄에 無可解此病이라 碍在○中者十年이러니 一日에 見枯栢하고 觸目省發하야 向來所得境界가 撲然而散하고 如闇室中에 出在白日하야 始得徑山老人의 立地處하니 好與三十棒이로다(雪岩錄) 卍續 122-p.514 下
半月餘에 動相이 不生하나 這裏에 坐住하면 合當치 못하니, 見地不脫이라 云謂하여 正知見을 障碍한다. 每樣에 熟眠하여 夢想과 見聞이 없을 때에는 截斷되어 兩橛을 打作하여 經敎와 語錄에서 此病을 解消할 수 없었다. ○中에 滯碍하여 있은 지 十年이러니, 一日에는 枯栢을 보고 觸目하여 大省發悟하여 向前의 所得한 境界가 撲然히 散滅하였다. 그때 闇室에서 白日下에 나와 있음과 같아서, 비로소 徑山老人(無準)의 立地處를 得見하니 三十棒을 打與함이 大好하다.
반달 남짓 되어서 움직임[動相]이 생기지 않았으나, 여기에 눌러 앉으면 옳지 못하다. 이것이 견해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는 것으로 바른 지견을 장애하는 것이다. 깊이 잠들어 꿈도 없고 보고 듣는 것도 없을 때에는 언제나 끊어져서 두 동강이가 되니 경전이나 어록도 이 병을 낫게하지는 못했다.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은 지 10년이더니 하루는 마른 잣나무를 보고는 눈에 띄는 순간 크게 깨달아, 이전에 얻었던 경계가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그 때는 마치 어두운 방에서 밝은 햇빛으로 나온 것과 같아서 비로소 경산 노스님(無準)의 선 자리를 알게 되었으니 30방을 때려줄 만했다.
깊이 잠들었을 때는 깜깜하여 한결같지 못하니, 이는 전체가 병이다. 이 큰 병을 바른 깨달음으로 착각하면, 밝은 대낮같이 환한 깨침은 미래겁이 다하여도 있을 수 없다.
雪岩이 問曰 日間浩浩時에 作得主麽아 答하되 作得이니다 睡夢中에도 作得主麽아 作主니다 又問하되 正睡着하면 主在何處오 於此엔 無言可對며 無理可伸이라 後五年에 驀然打破疑團하니 自此로 安邦定國하야 一念無爲하야 天下太平하니라(高峯語錄) 卍續 122-p.722 下
雪岩이 묻기를 日間 浩浩히 奔走할 때에 一如하느냐. 답하되 一如합니다. 夢中에도 一如하느냐. 一如합니다. 또 묻되 正히 熟眠할 때에는 主人公이 何處에 있느냐. 여기에서는 言語로써도 可히 對答할 수 없으며, 이치로도 可히 伸說할 수 없었다. 五年 後에 疑團을 打破하고 大悟하니, 自此로 安邦定國하여서 一念無爲하여 天下가 太平하다.
설암(雪岩)이 물었다. “일상에 정신없이 분주할 때도 한결같은가?” 대답하였다. “한결같습니다” “꿈 속에서도 한결같은가?” “한결같습니다” 또 물었다. “잠이 깊이 든 그때는 주인공이 어디 있느냐?”
여기에서는 대답할 말이 없고 설명할 이치가 없었다. 5년이 지나서 의심 덩어리[疑團]를 타파하고 크게 깨치니, 이로부터 온 나라가 안정되고 한 생각에 무위가 되어 천하가 태평하였다.
설암 부자도 몽중일여인 거짓 죽음에서 구경지에 단박 들어가 크게 살아났다. 그리하여 임제의 바른 심인을 이어 받았으니, 참으로 천고의 본보기다.
大死底人은 都無佛法道理하니 玄妙得失과 是非長短을 到這裏하야는 只恁麽休去니라 古人이 謂之平地上死人이니 須是透過那邊하야사 始得이요 或有依倚解會하면 沒交涉이니라 喆和尙이 云見不淨潔이라하며 五祖先師謂之命根不斷이니 須是大死一番하야 却活하야사 始得다(碧岩錄5) 大正藏 48-p.179 上
大死한 사람은 佛法道理가 전연 없어서, 玄妙得失과 是非長短을 這裏에서는 다만 이렇게 休歇한다. 古人은 이를 平地上의 死人이라 하니 반드시 那邊에 透過하여야 되며, 만약에 依倚와 解會가 있으면 絶對로 不可하다. 喆和尙은 見地가 淨潔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五祖先師는 命根이 斷絶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오직 大死一番하여서 다시 大活하여야 한다.
크게 죽은 사람에게는 불법도리가 전혀 없다. 오묘함과 득실, 옳고 그름과 길고 짧음 등을 여기에 이르러서는 다만 이렇게 쉴 뿐이다. 옛 사람은 이것을 평지 위의 죽은 사람이라 하였으니, 반드시 저쪽으로 뚫고 지나가야 옳다. 만약 의지하거나 알음알이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아무 소용없다. 철화상(喆和尙)은 이것을 보는 것이 “맑지 못하다”고 하였고, 스승 오조(五祖)스님은 “목숨의 뿌리가 끊어지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반드시 한 번 크게 죽었다가 다시 크게 살아나야 한다.
굵은 망상인 제6의식이 다 없어진 제8아뢰야의 무기(無記)가 ‘크게 죽음’으로서, 깊은 잠 속에서도 한결같은 자재위 이상의 대보살지위이다. 미세망상인 제8아뢰야를 벗어나지 못하면 목숨의 뿌리가 끊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십지보살과 등각보살이 크게 죽은 깊은 구덩이에서 활연히 살아나야만 아뢰야의 무기까지 영원히 없앤 진짜 큰 죽음이니 항상 죽고 항상 살며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어서, 바야흐로 선문의 아손이 된다.
這般의 生鐵로 鑄就漢은 或遇奇特境界거나 或遇惡境界커나 到此面前하야는 悉皆如夢相似하야 不知有六根하며 不知有旦暮하니라 直饒到這般田地하야도 切忌守寒灰死灰하야 打入黑漫漫地去요 須有轉身一路하야사 始得다(碧岩錄3) 大正藏 48-p.166 下
이러한 生鐵로 鑄就한 者는 或 奇特한 境界를 만나거나 或은 惡境界를 만나도 그의 面前에 있어서는 전연 夢中과 相似하다. 自己 六根이 있는 것도 모르며 旦暮가 있는 것도 모른다. 비록 이러한 境界에 到達하였어도, 寒灰와 死灰를 固守하여 暗黑한 곳으로 들어가서는 못쓰며 오직 轉身하는 大活路가 있어야 한다.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 앞에서는 좋은 경계 나쁜 경계가 모두 꿈 속 같아서 자기의 6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모른다. 비록 이런 경지에 도달하여도 불꺼진 차가운 재를 지켜 캄캄한 데로 들어가서는 못쓴다. 반드시 몸을 뒤집는 커다란 활로가 있어야 한다.
거짓 무심인 ‘불꺼진 차가운 재’에 집착하여 몸을 뒤집는 활로를 못얻으면 영영 죽음의 땅에 묻혀버리고 만다.
投子因趙州問하되 大死底人이 却活時에 如何오 子云 不許夜行이요 投明須到니라
宏智가 小參에 擧此話云 若介時를 識得去하면 便知道하되 當明中에 有暗하니 勿以暗相遇하고 當暗中에 有明하니 勿以明相覩하라 一切法盡處에 介時에 了了常在하고 一切法生時에 介時에 空空常寂하야 便知道死中活活中死로다(宏智錄5) 大正藏 48-p.63 上
趙州가 投子에게 물었다. 大死한 사람이 却活한 때에는 어떠한고. 投子가 대답하였다. 夜行을 不許하고, 天明에 반드시 도달할지니라.
宏智가 小參에 이 法門을 擧揚하고 말하였다. 만약 이 時節을 識得하면 문득 말하기를, 明中에 暗이 있으니 暗으로 서로 만나지 말고 暗中에 明이 있으니 明으로 서로 만나지 말라 함을 알지니라. 一切 萬法이 滅盡한 이때에 了了明明하여 항상 있고, 一切 萬法이 生起한 그때에 空空豁豁하여 恒常 寂寂하니 참으로 死中活이요 活中死라 함을 알 것이다.
조주(趙州)가 투자(投子)에게 물었다. “크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때는 어떤가?” 투자가 대답하였다. “어두운 밤에는 가지 말것이니, 날이 밝으면 가야 한다.”
굉지(宏智)가 소참에 이 법문을 들려주고는 말하였다. 만약 이 경계를 안다면, ‘밝음 가운데 어둠이 있으니 어둠으로 서로 만나지 말고, 어둠 가운데 밝음이 있으니 밝음으로 만나지 말라’고 함을 알 것이다. 모든 법이 다 없어진 이때에는 분명하여 항상 있고, 모든 법이 일어난 그때에는 텅비어 항상 고요하니, 참으로 ‘죽음 가운데 살아남이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다’ 함을 알 것이다.
크게 죽었다가 크게 살아나면 아뢰야 무기까지 다 없어진 진짜 크게 죽은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서, 항상 죽고 항상 살며, 항상 살고 항상 죽으며, 밝음과 어둠이 동시에 고요하고, 밝음과 어둠이 동시에 비추니, 이것이 불조의 바른 안목이다.
絶氣息時와 斷蹤跡處에 須具眼하야사 始得다 那時에 歷歷不沈하고 靈靈絶對하야 便能豁步大方하야 旋普應하리라(宏智錄5) 大正藏 48-p.71 上
氣息이 永絶한 때와 蹤跡이 斷滅한 곳에 참으로 正眼을 具備하여야 한다. 그때에는 歷歷하여 沈寂하지 않고 靈靈하여 相對가 끊어져서 문득 能히 大方에 豁步하며 周旋普應할 것이다.
숨이 끊어진 때와 자취가 없어진 곳에서, 참으로 바른 안목을 가져야 한다. 거기서 분명하여 가라앉지 않고 신령스러워 마주할 대상이 끊어지면 그때는 천하를 활보하며 자유롭게 행하고 널리 응하리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 현묘한 기틀, 큰 활용이 눈앞에 나타나서 죽이고 살림이 자재하고 종횡으로 걸림이 없다.
田地穩密密處와 活計冷湫湫時에 便見劫空하야 無毫髮許로 作緣累하고 無絲縿許도 作障瞖하야 虛極而光하고 淨圓而耀하야 有亘萬古不昏 昧底一段事니라(宏智錄6) 大正藏 48-p.76 上
田地가 安穩하여 密密한 곳과 活計가 冷淡하여 湫湫한 때에 문득 劫이 空함을 보아서 毫髮만큼도 緣累됨이 없고 絲縿만큼도 障됨이 없다. 空虛함이 至極하여 光明이 있고 淸淨함이 圓融하여 照耀하니, 萬古에 뻗쳐 昏昧하지 않은 一段의 事實이 있다.
마음자리가 편안하여 빈틈없는 곳, 사량분별이 싸늘한 때, 문득 겁(劫)이 공함을보아서 털끝만큼도 거기에 얽혀 들어감이 실낱만큼도 가려움이 없다. 텅 빔이 지극하여 빛이 나고 청정함이 원융하여 밝게 비추니, 만고토록 어둡지 않은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만고토록 어둡지 않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한결같아 변하지 않는 크고 고요한 빛은 오직 크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에서만 오는 것이다. 아뢰야의 무기까지 영원히 없어진 참으로 크게 죽은 경지, 공적(空寂) 중에서 나오는 큰 빛은 천겁을 지나도 옛것이 아니고 만세에 뻗치도록 언제나 지금이다.
굵은 망상이 다 없어져서 한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져 크게 죽은 깊은 곳도 제8마계여서 도를 깨친 것이 아니고 견성이 아니다. 멸진정의 죽음의 경지에서 홀연히 크게 살아나 항상 죽고 항상 살며,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어서, 고요함과 비춤이 동시이면서도 고요함과 비춤이 성립됨이 없는,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는 구경무심을 완전히 깨쳐야 비로소 참구를 마친 눈 푸른 납자이다.
只這大死却活處는 古佛도 亦不會到며 天下老和尙도 亦不會到니 任是釋迦老子와 碧眼胡僧도 也須再參하야사 始得다 所以道하되 只許老胡知요 不許老胡會라하니라(圜悟 碧岩錄41則) 大正藏 48-p.179 中
이 大死却活한 深處는 古佛도 도달치 못하였으며 天下老和尙도 또한 도달치 못하였으니, 설사 釋迦와 達磨라도 반드시 再參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但只 老胡가 了知함을 許諾하고 老胡가 領會함은 不許한다고 하였다.
크게 죽었다가 살아나는 이 깊은 곳은 옛 부처님도 도달하지 못하였으며, 천하 큰스님들도 역시 도달하지 못하였으니, 설사 석가와 달마라도 반드시 다시 참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다만 달마가 알았다고는 인정하나 깨달았다고는 인정치 않는다”고 하였다.
諸人은 要會末後句麽아 只許老胡知요 不許老胡會니라(雪竇 碧岩錄 51則) 大正藏 48-p.186 下
諸人은 末後句를 알고자 하는가. 只許老胡知요 不許老胡會니라.
여러분은 마지막 한마디[末後句]를 알고자 하는가? 달마가 알았다고는 인정하나 깨달았다고는 인정치 않는다.
末後句를 爲君說하노니 明暗雙雙底時節이로다(雪竇 碧岩錄 51則) 大正藏 48-p.186 下
末後句를 그대를 위하여 說하노니 明暗이 雙雙한 時節이니라.
마지막 한마디를 그대를 위해 말하노라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는 시절이다.
招慶이 問羅山云 岩頭道하되 恁麽恁麽不恁麽不恁麽라하니 意旨가 如何오 山云 雙明亦雙暗이니라 慶云 如何是雙明亦雙暗고 山云 同生亦同死니라(雪竇 碧岩錄 51則) 大正藏 48-p.187 上
招慶이 羅山에 問하되 岩頭가 말하기를 恁麽恁麽 不恁麽不恁麽라 하니 그 意旨가 如何오. 山云 雙明하며 또한 雙暗하니라. 慶云 如何是 雙明亦雙暗고. 山云 同生하며 亦同死니라.
초경(招慶)이 나산(羅山)에게 물었다. “암두(岩頭)가 말하기를 ‘이렇고 이러하며 이렇지 않고 이렇지 않다’고 하였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나산이 말하기를 “밝기도 하며 동시에 어둡기도 하다”고 하였다. “무엇이 밝기도 하고 동시에 어둡기도 한 것인가?” 나산이 말하였다. “나기도 하고 동시에 죽기도 한다.”
雙照雙遮하며 同生同死하고 全明全暗하며 全殺全活이로다(圜悟錄7) 大正藏 47-p.744 下
雙照雙遮하며 同生同死하고 全明全暗하며 全殺全活이로다.
쌍으로 비추고 쌍으로 막으며, 함께 나고 함께 죽으며, 전체로 밝고 전체로 어두우며, 전체로 죽이고 전체로 살린다.
크게 죽었다 크게 살아남,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춤, 밝음과 어둠이 동시인 말후구는 쌍차쌍조, 동생동사, 전명전암, 전살전활 등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는 옛 부처님들도 도달하지 못했던 깊고 깊은 마지막 경계니 오직 실지로 참구하여 실지로 깨침에 있을 뿐이다.
10. 크고 둥근 거울같은 지혜[大圓鏡智]
潙山이 謂仰山曰 吾以鏡智로 爲宗要하야 出三種生이니 所謂 想生 相生 流注生이니라 想生은 能思之心이 雜亂이요 相生은 所思之境이 歷然이요 微細流注는 具爲塵埃니라(人天眼目) 大正藏 48-p.321 中
潙山이 仰山에게 말했다. 나는 大圓鏡智로 宗要를 삼아서 三種의 生을 出離하여야 하니, 所謂 想生과 相生과 流注生이다. 想生은 能思하는 妄想이 雜亂함이요, 相生은 所思의 塵境이 歷然함이요, 微細流注는 함께 塵埃가 되느니라.
위산(潙山)이 앙산(仰山)에게 말하였다. “나는 대원경지로 종요를 삼아서 세 가지 생을 벗어난다. 그 세 가지 생이란 상생(想生), 상생(相生), 유주생(流注生:‘유주’는 끊임없이 흐른다는 뜻)이다. 여기서 상생(想生)이란 생각하는 ‘마음’이 어지러움을 말하고, 상생(相生)이란 생각할 ‘경계’가 뚜렷이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미세유주(微細流注)는 두 가지 모두에 공통되는 염법이다.”
제8아뢰야식인 미세유주를 다 없애 진여자성을 환히 보면 구경무심인 대원경지가 그대로 드러나니 이것이 크게 죽었다 다시 살아난 본래면목이다. 이 대원경지는 여래의 과지(果智)로서, 선과 교에 공통되는 구경처이다. 이 대원경지를 성취해야 견성이니, 위산(潙山)뿐만 아니라 불조정전은 전부 이 경지(鏡智)를 종문의 근본으로 삼았다. 만약 제8아뢰야의 미세한 흐름을 벗어나지 않으면 원통을 깨친 정안종사는 못된다. 이것으로서도 견성은 과(果)를 성취한 부처자리임이 한층 명확하다.
未達其源하면 落在第八魔界니라(洞山初) 古尊宿語錄38 卍續 118-p.649 下
그 眞心의 本源에 到達하지 못하면, 第八微細인 魔界에 墮落한다.
참된 마음의 근원에 도달하지 못하면 제8미세인 마구니 경계에 떨어진다.
거짓 무심인 제8아뢰야의 미세유주도 마구니 경계이니, 제6의식의 굵은 망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湛然空寂하야 圓明不動이 卽 大圓鏡智니라(頓悟要門) 卍續 110-p.848 上 법어집 4권 p.143:11
湛然히 空空寂寂하여 圓明不動함이 大圓鏡智니라.
공적하여 둥글고 밝아 움직임 없음이 대원경지다.
미세유주를 벗어나서 구경무심을 증득하면 6조의 말씀과 같이 “두렷이 밝아 항상 고요하고 비치는 위없는 대열반” 즉 대원경지다.
如初生孩子가 雖具六識하야 眼能見하며 耳能聞하나 未曾分別六塵하야 好惡長短과 是非得失을 總不知라 學道之人도 要復如嬰孩하야 榮辱功名과 逆情順境이 動他不得하야 眼見色하되 如盲等하며 耳聞聲하되 如聾等하야 如癡似兀하야 其心不動이 如須彌山이니라 無造作緣慮하야 如天普蓋하며 似地普擎하나니 爲其無心故로 所以長養萬物하야 如是無功用中에 施功하나니라
雖然恁나 又更須跳出窠窟하야사 始得다 豈不見가 敎中에 道하되 第八不動地菩薩이 以無功用智로 任運流入薩婆若海라하나니 衲僧家는 到這裏하야 亦不可執着이니라 楞伽經에 云 相生은 執碍요 想生은 妄想이요 流注生則逐妄流轉이라하니 若到無功用地하야도 猶在流注生中이니 須是出得第三流注生相하야사 方始快活自在니라 經에 云 如急流望爲恬이라하니 孩子六識이 須然無功用이나 爭冷念念不停流가 如急流水오(碧岩錄8) 大正藏 48-p.206 中
갓난아기가 비록 六識을 두루 갖추고 있어 눈으로 능히 보고 귀로 능히 듣지만 일찍 六塵을 分別하지 못하여 好惡長短과 是非得失을 總不知함과 같다. 學道하는 人士도 이 嬰孩와 같아서 榮辱功名과 逆情順境이 그를 動搖하지 못하며, 눈으로 色을 보되 盲人과 같고 귀로 소리를 듣되 聾者와 같아서, 如癡하며 似兀하여 그 心中이 動搖하지 않아 須彌山과 같다. 造作과 緣慮가 없어서 蒼天이 넓게 덮음과 같으며, 厚地가 넓게 받치는 것과 같나니 無心인 所以로 萬物을 長養하여 如是히 無功用中에서 施功한다. 비록 이러하나 그 窠窟을 跳出하여야 한다. 어찌 敎中에서 말함을 보지 못하였는가. 第八不動地菩薩이 無功用智로써 任運하여 薩婆若海에 流入한다 하였으나, 衲僧은 여기에 도달하였어도 집착하여서는 不可하다. 楞伽經에 相生은 執碍요 想生은 妄想이요 流注生인즉 妄緣을 追逐하여 流轉한다 하였으니, 만약 無功用地에 到達하였어도 오히려 流注生中에 있으니 第三流注生相을 出離하여야 비로소 快活自在하다. 經에 말하기를 急流水를 바라보아도 恬靜함과 같다 하였으니, 孩子의 六識이 비록 無功用이나 念念이 流去함이 急流水와 같으니 어찌 하리오.
갓난아기가 비록 6식(六識)을 두루 갖추어서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지만 아직 6진(六塵)을 분별하지 못하여 좋고 싫음과 길고 짧음과 시비득실을 전혀 알지 못하듯이, 도를 배우는 사람도 이런 아이와 같아서 영욕과 공명, 거슬리는 마음과 순탄한 경계가 전혀 그를 움직이지 못한다. 아무 느낌없는 바보처럼 눈으로 물건을 보나 장님같고 귀로 소리를 들으나 귀머거리같아서 바보같고 우둔한 것 같아, 그 마음이 수미산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조작과 생각없어 마치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받쳐주되 무심한 까닭에 만물을 길러내듯 이처럼 애씀이 없는[無功用] 가운데 힘을 베푼다.
그렇다해도 이 굴 속에서 뛰쳐 나와야만 한다. 보지 못했는가. 경전에서 ‘제8부동지보살은 무공용의 지혜로 저절로 살바야[一切智]의 바다에 흘러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납승은 여기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 「능가경」에서 말하기를 상생(相生)은 집착하는 장애요, ‘상생(想生)은 망상이요, 유주생(流注生)이란 허망한 인연을 좇아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힘을 들이지 않는 무공용지에 도달하여도 아직은 유주생 가운데 있는 것이니 반드시 세번째 유주생상을 벗어나야만 비로소 쾌활자재하다.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급류수를 잔잔한 물 보듯 한다’고 하였으니, 아이의 6식이 비록 하는 것[功用]은 없으나 생각생각 흘러감이 급류와 같음을 어찌하리오.
제8부동지(不動地) 보살은 무공용의 무심지에 있으나, 이는 아직 미세한 흐름이 있는 제8아뢰야의 거짓 무심이다. 이 미세함을 끊고 대원경지를 실제 깨쳐야만 견성인 참 무심이며, 크게 살아난 바른 안목이다.
異熟이 若空則超因果하야 方才轉成大圓鏡智니 言無垢가 同時發者는 以佛果位中을 名無垢니 乃淸淨眞如니라 謂鏡智로 相應하면 法身이 顯現하야 圓明普照十方塵刹하야 以理智가 一如하야 方證究竟一心之體니 此唯識之極則이며 乃如來之極果也라 諦觀하니 此識이 深潛難破하니 此識을 絲毫未透하면 終在生死岸頭事니라 古德諸祖가 未有不破此識而有超佛越祖之談이어늘 今人은 生滅도 未忘하야 心地에 雜染種子도 未淨纖毫하고 便稱悟道하니 豈非未得을 謂得하며 未證을 謂證이리오 可不懼哉아(憨山 八識規矩通說) 卍續 98-p.591 上
第八인 異熟識이 만약에 空滅하면, 곧 因果를 超越하여 바야흐로 大圓鏡智를 轉成한다. 無垢가 同時에 發現한다 함은 佛果位中에서는 鏡智를 無垢라 하니 이것은 淸淨眞如인 까닭이다. 鏡智로 相應하면 法身이 顯現하여서 十方塵刹을 普照하여 理와 智가 一如하므로, 바야흐로 究竟인 一心의 本體를 證得하는 것이니 이는 唯識의 極則이며 如來의 極果이다. 밝게 觀察하니 이 第八識이 深潛하여 難破하니, 此識을 絲毫라도 透過하지 못하면 끝까지 生死岸頭에 滯在한다. 古德과 諸祖가 此第八識을 打破하지 않고서는 超佛越祖의 玄談을 하지 않았거늘, 今人들은 生滅心도 未忘하여 心地에 雜染의 煩惱種子를 纖毫도 淨潔케 하지 못하고서 문득 悟道라고 詐稱하니 어찌 未得을 得이라 하고 未證을 證이라 함이 아니리오. 참으로 두렵지 않은가.
만약 제8이숙식(異熟識)이 비어 없어지면 곧 인과를 벗어나 곧바로 대원경지로 바뀐다.
‘무구(無垢)가 동시에 나타난다’하였는데, 부처 과위 가운데 대원경지를 무구라 하니, 청정한 진여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대원경지와 상응하면 법신이 나타나서 시방의 무수한 국토를 두루 비추어 이치와 지혜가 한결같으므로, 마침내 구경인 한마음의 본체를 깨친다 하니, 이는 유식의 궁극 법칙이며 여래의 궁극적 과위이다.
자세히 관찰하니 이 제8식은 깊이 잠겨 있어서 깨뜨리기가 어려우나, 이 식을 실낱만큼이라도 뚫고 지나지 못하면 끝내 생사 언덕에 걸려 있는 것이다. 옛 큰스님과 모든 조사는 이 제8식을 타파하지 않고서는 부처와 조사를 뛰어넘는 현묘한 말씀을 하지 않았으나, 지금 사람들은 생멸심도 잊지 못하여 마음자리에 갖가지로 물든 번뇌 종자를 조금도 씻지 못하고서 도를 깨쳤다고 거짓말을 하니, 이야말로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 하고, 깨치지 못하고서 깨쳤다고 함’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두렵지 않은가.
감산(憨山)은 선과 교에 모두 통달한 명(明) 말의 거장이다. 제8 미세유주를 영원히 떠나서 여래의 극과인 대원경지를 깨쳐야만 진정한 깨침이며 견성임을 분명히 말하였으니, 참으로 조계의 정통을 잇는 극히 드문 선지식이다. 그리고 생멸하는 망심도 끊지 못하고 도를 깨쳤다고 거짓말들을 한다고 통탄하였으니, 고금에 수도인에게 공통된 병을 지적해 낸 명쾌한 주장이다. 그러니 굵고 미세한 일체의 번뇌망상을 모두 없애고 구경무심인 대원경지를 실제 깨쳐서, 크게 쉬어버린 옛사람의 마음자리에 도달해야 한다. 제8의 미세유주를 끊어버린 대원경지는 크게 죽었다 다시 살아난 무심, 무념, 무생, 무주이며 따라서 단박에 원만히 깨치는 구경정각인 돈오견성이다.
11. 안팎이 환히 밝음[內外明徹]
智慧로 觀照하야 內外明徹하야 識自本心하면 卽本解脫이니 卽是無念이니라 大正藏 48-p.351 上
智如日이요 慧如月하야 智慧常明이어늘 於外에 著境하야 被妄想浮雲이 盖覆하야 自性이 不得明朗이라 若聞眞法하고 自除迷妄하면 內外明徹하야 於自性中에 萬法이 皆現하나니 見性之人도 亦復如是니라(壇經) 大正藏 48-p.354 中
智慧로써 觀照하여 內外가 明徹하여 自己의 本心을 識得하면, 卽本解脫이니 卽是 無念이니라.
智는 白日과 같고 慧는 朗月과 같아서 智慧는 항상 明朗하지마는 外部로 塵境에 住著하여 妄想의 浮雲이 盖覆함이 되어서 明朗하지 못한다. 만약에 眞法을 得聞하고 迷妄의 暗雲을 스스로 除去하면 內外가 明徹하여 眞如自性中에 萬法이 皆現하나니 見性한 사람도 이와 같다.
지혜로 비추어 보아 안팎이 환히 밝아 자기의 본심을 알면, 그것이 곧 근본해탈인 무념이다.
지(智)는 해와 같고 혜(慧)는 달과 같다. 지와 혜가 항상 밝지만 밖으로 티끌경계에 집착하여 망상의 뜬구름에 덮여 밝지 못하니 만약 참 법을 들어 미망의 구름이 저절로 없어지면 안팎이 환희 밝아서 진여자성 가운데 만법이 모두 나타난다. 견성한 사람도 이와 같다.
대원경지로 비추어 보아 안팎이 환히 밝으면, 이것이 곧 마음을 아는 것[識心]이며 해탈이며 무념이며 견성이니, 근본무명의 검은 구름이 흩어 없어진 증거이다.
水精瓔珞은 內外明徹하야 妙覺에 常住하야 湛然明淨이라 名一切智地니 常處中道니라(瓔珞經 上) 大正藏 24-p.1013 上
唯佛이 居中道第一法性之土니라(瓔珞經 上) 大正藏 24-p.1016 上
水精의 瓔珞은 內外가 圓明通徹하여 究竟地인 妙覺에 常住하여 湛然히 玄明淸淨한지라 一切智地라고 하나니 항상 中道에 安處하느니라.
오직 佛陀만이 中道第一義諦인 法性心土에 住居하느니라.
마치 안팎이 환히 밝은 수정구슬처럼 구경지인 묘각에 항상 머물며 깊이 밝고 깨끗하므로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라고 하니, 그것은 항상 중도에 자리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중도제일의제인 법성심토에 계신다.
수정구슬처럼 안팎이 환히 밝아서 일체의 망상 티끌이 모두 없어지면 구경묘각인 부처자리며 견성이다.
十方世界와 及與身心이 如吠瑠璃하야 內外明徹을 名識陰盡이니라 大正藏 19-p.153 中
若識陰이 盡則圓明淨心이 於中에 發化하야 如瑠璃內含寶月하나니 如是乃超菩薩所行의 金剛十地하야 等覺圓明하야 圓滿菩提하야 入於如來妙莊嚴海하야 歸無所得이니라(楞嚴經10) 大正藏 19-p.154 中
十方의 世界와 및 身心이 吠瑠璃와 같아서 內外가 明徹함을 識陰이 盡하였다 한다. 만약에 識陰이 滅盡하면, 圓明한 淸淨妙心이 그 中에 發化하여 淸淨한 瑠璃內의 寶月과 같다. 그리하여 菩薩의 所行인 金剛과 十地를 초월하여 正覺과 同等하게 圓明하여 如來의 妙莊嚴海에 頓入하여 菩提를 圓滿成就하여 無所得에 歸還한다.
시방세계와 나의 몸과 마음이 마치 맑은 유리같이 안팎이 식음(識陰)이 다 없어졌다고 한다. 식음이 다 없어지고 나면 둥글고 밝고 정밀하고 오묘한 마음이 그 가운데 피어나서[發化], 마치 맑은 유리 속에 보배달을 담은 것과 같다.
그리하여 보살이 행하는 금강 10지와 등각의 원만한 밝음을 뛰어넘어 여래의 오묘한 장엄 바다에 단박 들어가며, 깨달음을 원만히 성취하여 얻을 바 없음에 돌아간다.
제8아뢰야인 식음(識陰)이 다 없어지면 안팎이 한 번 뛰어 곧바로 여래 지위에 들어간다. 「대승오온론」등에서 ‘식음은 아뢰야, 또는 아타나라 한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識陰이 盡者는 圓明淨心이 於中에 發化하나니 卽上同諸佛慈力하고 下含生悲仰하야 普同示現하야 利益衆生일새 故로 云 發化니라 身心世界와 諸佛衆生이 圓融交徹故로 如淨瑠璃內含寶月이라 便能超越地位하야 入於果海하야 歸無所得하나니 如此하야사 方名究竟極則也니라(憨山 楞嚴經通議10) 卍續 19-p.331 上
識陰이 盡한 者는 圓明淨心이 於中에 發化한다. 此는 卽 上으로는 諸佛의 慈力과 同一하고, 下로는 衆生의 悲仰을 含容하여 普徧同等하게 示現하여 衆生을 利益하므로 發化라 한다. 身心世界와 諸佛衆生이 圓融交徹하는 故로 淨瑠璃內에 寶月을 含有함과 같다. 문득 能히 地位를 초월하여 大覺果海에 頓入하여 無所得에 回歸하나니, 이와 같아야 비로소 究竟極則이라 이름한다. 이는 五陰이 다하고 圓證한 功用을 보임이니라.
‘식음이 없어진 이는 원만하고 밝고 정밀한 마음이 그 가운데 피어난다[發化]’고 하였는데, 이는 곧 위로는 모든 부처님의 자비력을 똑같이 갖고 아래로는 중생의 슬픈 우러름을 받아들여, 널리 동등하게 모습을 나타내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므로 피어난다[發化]고 말한다.
나의 심신과 세계, 모든 부처와 중생이 원융하게 섞여 통하는 까닭에 마치 맑은 유리 속에 보배달을 담은 것과 같다고 하였다. 능히 지위(地位)를 벗어나서 큰 깨달음의 바다[果海]에 단박 들어가서 얻을 바 없음에 돌아가니, 이와 같아야 비로소 구경의 가장 높은 법칙이라 이름한다.
안팎이 환히 밝은 견성은 식음(識陰)이 영원히 끊어진 큰 깨달음의 가장 높은 과위이다. 「화엄경」에서는 ‘10지보살은 방편신통으로 안팎이 환히 밝다’고 하였으나, 십지보살은 미세한 무명을 다 끊지는 못했으므로 이때에 안팎이 환히 밝다’ 함은 제8아뢰야의 밝은 그림자상이지 진짜 안팎이 환히 밝은 것은 아니다.
「능엄통의」에 이르기를 “이는 오음이 다해 원만히 증득한 공부를 보인 것이다”고 하였다.
圓明淨心이 於中에 發化하면 三類分身하야 息苦輪하나니 唯如如理와 如如智가 內外明徹하야 譬如瑠璃內含寶月하야 圓超信住地等하야 而成無上道也니라(智旭 楞嚴經文句10) 卍續 20-p.751 上
圓明한 淨心이 그 中에 發化하면, 三類로 分身하여서 衆生의 苦輪을 쉬게 한다. 오직 如如理와 如如智가 內外에 明徹하나니, 비유하건대 瑠璃 속에 寶月을 含有함과 같아서, 十信 十住와 十廻向 十地等을 圓滿히 초월하여 無上佛道를 성취한다.
둥글고 밝고 맑은 마음이 그 가운데 피어나면[發化] 세 종류로 몸이 나뉘어서 중생의 고통 수레를 멈추게 한다. 유리 속에 보배달을 담은 듯 여여한 이치와 여여한 지혜가 안팎으로 환히 밝으니 10신․10주․10회향․10지 등을 원만히 뛰어넘어 위 없는 불도를 성취한다.
안팎이 환히 밝은 공부의 결과가 이렇게 현묘하다.
塵境이 旣空則身心內外가 一時淸淨하야 而十方이 晈然하야 如吠瑠璃內含寶月하나니 豈不快哉아 斯乃頓破根本無明하야 使八識種子로 迸裂이니라(憨山 通議8) 卍續 19-p.256 上
塵境이 이미 空寂한즉 身心內外가 一時에 淸淨하여 十方이 晈然하여 吠瑠璃內에 寶月을 含有함과 같으니, 어찌 통쾌하지 않으리오. 이는 根本無明을 頓破하여 八識種子로 하여금 迸裂滅盡케 한 것이다.
티끌경계가 이미 비고 고요하여 몸과 마음이 안팎으로 동시에 청정하다. 마치 맑은 유리 속에 보배달을 담은 듯 시방세계가 훤하니 어찌 통쾌하지 않은가. 이는 근본무명을 단박에 부수어 8식의 종자를 산산히 부수어 없애는 것이다.
8식종자인 미세망상을 깨뜨려서 안팎이 환히 밝은 무생의 현묘한 길에서 한가로이 자재함은 오직 실제로 참구하여 실제로 깨치는 데 달려 있다.
若得識陰이 盡하면 方超地位하야 了無所得하고 究竟圓成하야 如淨瑠璃內含寶月이니라(宗鏡錄88) 大正藏 48-p.898 中
만약에 識陰이 滅盡하면, 바야흐로 地位를 초월하여 了然히 所得이 없고 究竟佛果를 圓滿成就하여 淨瑠璃內에 寶月을 含有함과 같다.
만약 식음(識陰)이 다 없어지면 비로소 지위를 초월하여, 얻을 바 없음을 깨닫고 구경의 부처 과위를 원만히 성취하여, 맑은 유리 속에 보배달을 담은 것과 같다.
「능엄경」의 부처님 말씀과 이곳의 조사 말씀이 다름이 없음은, 다같이 바른 안목을 완전히 갖춘 까닭이다.
覺卽了不施功이니 一切有法不同이라 住相布施는 生天福이나 猶如仰箭射空이로다 勢力盡箭還墜하야 招得來生不如意라 爭似無實相門에 一超直入如來地리오 但得本莫愁末하나 如淨瑠璃含寶月이니 旣能解此如意珠하니 自利利他終不竭이로다(證道歌) 大正藏 48-p.396 上
大覺하면 頓了하여 功用을 虛施할 것 없으니, 一切의 有爲法과는 不同하다. 名相에 住著한 布施는 天上에 往生하는 福은 되나, 箭矢로 허공을 향해 力射함과 같다. 勢力이 다하면 箭矢는 도로 落하니, 來生의 不如意함을 초래할 뿐이다. 어찌 無爲인 實相門에서 한번 초월하여 如來地에 直入함과 같으리오. 根本만 悟得할 것이요 枝末은 걱정하지 말라. 淨潔한 瑠璃 속에 寶月을 含有함과 같다. 벌써 如意珠를 解得하였으니, 自利와 利他가 끝내 竭盡하지 않는도다.
깨달으면 그만이어서 힘을 들일 것이 없나니, 모든 유위법과는 다르도다. 모양에 집착한 보시는 천상에 왕생할 복은 되나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같아서 힘이 다하면 도로 떨어지나니,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내생을 초래할 뿐이로다. 어찌 무위실상문에서 한 번 뛰어 여래 지위에 바로 드는 것과 같으랴. 근본만 깨칠 것이요 지말은 걱정하지 말라. 맑은 유리 속에 보배달을 담듯하여 벌써 여의주를 얻은 것이니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로움에 마침내 다함이 없도다.
한 번 뛰어 곧바로 여래의 지위에 들어가서 안팎이 환히 밝으면 바로 선문정통의 돈오견성이다.
거칠고 무거운 망상이 모두 없어진 자재위 이상만 되어도 오매일여한 실제 경계가 나타나지만, 미세유주인 식음까지 남김없이 없애 여래지에 바로 들지 않으면, 안팎이 투명하여 맑은 유리가 보배달을 머금은 듯한 구경의 무심은 성취하지 못한다.
12.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춤[常寂常照]
進破微細無明하고 入妙覺位하면 名大涅槃이니 居常寂光土하느니라(天台四敎義 圓敎)
微細無明을 進破하고 妙覺位에 得入하면 大涅槃이라 이름하나니 常寂光土에 居住하느니라.
미세무명을 나아가 부수고 묘각의 지위에 들면 대열반이라 이름하니, 이 지위에 든 사람은 상적광토에 거주한다.
견성이 대열반임은 「대열반경」과 「종경록」 등에서 자세히 말하고 있다.
확철히 깨쳐 자기본성을 단박에 보게 되면 안팎이 환히 밝고 항상 고요하며 항상 비추는 구경무념의 대열반을 원만성취한다. 미세한 아뢰야식을 벗어나 마지막의 견고한 관문을 깨뜨려 버리면 구경무심인 위 없는 열반이 눈앞에 나타난다. 크게 죽었다가 크게 살아나고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어서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고 선정과 지혜가 균등하니 이것이 견성이며 성불이다.
無上大涅槃이여 圓明常寂照로다(壇經)
無上한 大涅槃이여 圓融明徹하여 恒常寂照하는도다.
위 없는 대열반이여, 원융하고 환히 밝아 항상 비춘다.
여기서 ‘상적광’이라 함은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춤을 말한다. 「기신론」에서는 “미세망상을 멀리 여의면 심성을 보게 되니 그것을 구경각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견성 즉 구경각이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는 대열반이며 묘각이다.
障無不寂하고 理無不照하야 寂照雙流하면 徹見心性이니라(淸凉鈔,57)
障盖가 寂滅하지 않음이 없고 事理를 洞照하지 않음이 없어서 寂과 照가 雙流하면 心性을 徹見하느니라.
장애가 고요하지 않음이 없고 이치를 환히 비추지 않음이 없어서, 고요함과 비춤이 함께 흐르면 심성을 완전히 본다.
항상 적정하고 항상 관조하며 고요함과 비춤이 함께 흐르면 견성인 대열반이다.
禪非智면 無以窮其寂이요 智非禪이면 無以深其照니 故로 寂智雙流하면 方成佛果니라 經에 云 佛自住大乘하나니 如其所得法은 定慧力으로 莊嚴하야 以此度衆生이니라(大華嚴經略策 止觀雙運)
禪寂은 智照가 아니면 그 寂定을 窮極할 수 없으며, 智照는 禪寂이 아니면 그 慧照를 深達할 수 없으니, 禪寂과 智照가 雙流하면 佛果를 成就하느니라. 經에 말하되 佛陀는 大乘에 自住하나니 그 所得한 大法은 定慧의 功力으로 莊嚴하여 이로써 衆生을 濟度하느니라.
선적(禪寂)은 지조(智照)가 아니면 그 적정(寂定)이 완전할 수 없고 지조(智照)는 선적(禪寂)이 아니면 그 혜조(慧照)가 완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선적과 지조가 함께 흘러야 불과를 성취한다.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은 원래 대승에 머무니, 그가 얻은 큰 법이란 선정과 지혜의 힘으로 장엄하여 그것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적지(寂智)란 적조(寂照)를 말한다. 적조는 즉 선정과 지혜이며 지(止)와 관(觀)이다. 적정과 관조가 함께 흐르고, 선정과 지혜가 균등하며 지와 관이 함께 움직이면 마음을 깨쳐 견성하는 것이며 구경불과를 얻는 것이다.
生心卽妄이요 不生卽佛이라 言生心者는 非但生於餘心이요 縱生菩提涅槃과 觀心見性하야도 亦曰生心이니 並爲妄想이라 念想이 都寂하면 方曰不生하야 寂照現前이어니 豈不名佛가 故로 達磨碑에 云 心有也하면 曠劫而滯凡夫요 心無也하면 刹那而登正覺이로다(淸凉鈔9)
生心하면 즉 妄이요 生心치 않으면 즉 佛인지라, 生心이라 함은 雜心만 나는 것이 아니요 비록 菩提涅槃과 觀心見性의 妙心이 나도 또한 生心이니 전부 妄想이 되느니라. 雜念妄想이 永永寂滅하여야 바야흐로 不生이라 이름하여 寂照가 現前하나니, 어찌 佛이라고 이름하지 않으리오. 그러므로 達磨碑에서 말하였다. 心念이 있으면 永劫토록 凡夫에 滯留하고 心念이 없으면 찰나에 正覺을 성취하는도다.
마음이 나면 허망이요, 마음이 나지 않으면 부처다. 마음이 난다 함은 잡념만 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보리열반과 마음을 관찰하여 성품을 보는 현묘한 마음이 나는 것도 마음이 나는 것으로서 모두 망상이 된다. 잡념과 망상이 영영 적멸해야 비로소 나지 않음[不生]이라 이름한다. 여기서 적멸과 관조가 눈앞에 그대로 나타나니 어찌 부처라고 이름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달마비」에서 말하였다. 마음이 있으면 영겁토록 범부에 머물러 있고 마음이 없으면 찰나에 정각을 성취한다고.
마음이 있으면 중생, 마음이 없으면 부처다. 무생무념의 대적삼매(大寂三昧)에서 무한한 지혜광명이 항상 뻗어나니 이것이 적조(寂照)인 부처지위이다.
雙照空有하며 不住內外하니 似谷答聲而絶慮하고 如鏡鑑像而無心하야 妙湛圓明하야 寂而常照로다(宗鏡錄65)
空과 有를 雙照하여 內와 外에 住留하지 않으니, 空谷이 聲音을 對答함과 같아서 心慮가 永絶하고 明鏡이 色像을 觀照하는 것과 같아서 妙湛하고 圓明하여 寂寂하며 항상 照耀하는도다.
공(空)과 유(有)를 함께 비추며 안에도 밖에도 머무르지 않으니, 빈 골짜기가 소리에 응답하듯 생각이 끊어졌고 거울이 물상을 비추듯 무심하여 묘하고 맑고 원만하고 밝아서 적적하면서도 항상 비춘다.
생각이 끊어지고 마음이 없어 원명적조하니 이것이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한다’고 하는 것이다.
寂照無二가 爲菩提相이니 猶如明鏡하야 無心이 爲體요 鑑照가 爲用하야 合爲其相이라 亦卽禪宗의 卽體之用이 自知하며 卽用之體가 恒寂하야 智寂不二가 爲心相也니라(淸凉鈔,80)
寂과 照가 둘이 아님이 菩提의 實相이 되나니, 明鏡과 같아서 無心이 體가 되며 鑑照가 用이 되어 합하여 그 實相이 되는지라, 또한 禪宗에서 體에 卽한 用이 自知하며 用에 卽한 體가 恒寂하여 智와 寂이 둘이 아님이 眞如의 實相이 됨과 같느니라.
적(寂)과 조(照)가 둘이 아님, 그것이 보리의 실상이다. 그것은 마치 밝은 거울과 같아서 무심은 바탕[體:寂]이 되고 비춤은 작용[用:照]이 되어 둘이 합하여 그 실상이 된다. 그것은 본체 그대로인 작용이 스스로 알며, 작용 그대로인 본체는 항상 적멸하여, 지혜와 적멸이 둘 아님이 진여심의 실상인 것이다.
고요하고 무심한 거울의 자체와 걸림없이 비추는 거울의 빛이 어찌 둘이겠는가. 거울의 본체가 즉 거울의 빛이니, 적(寂) 그대로가 조(照)이며 조(照) 그대로가 본체인 것이니, 진여자성도 이와 같다.
卽寂之照는 爲般若요 卽照之寂은 爲解脫이며 寂照之體는 爲法身이라 如一明淨圓珠하야 明卽般若요 淨卽解脫이며 圓體法身이니 約用不同이나 體不相離故니라 此三法이 不縱不橫하며 不並不別하니 名秘密藏하야 大涅槃이니라(淸凉鈔,50)
寂에 卽한 照가 般若요 照에 卽한 寂이 解脫이며 寂照의 體가 法身인지라, 一箇의 明淨한 圓珠와 같아서 明은 즉 般若며 淨은 즉 解脫이요 圓體는 法身이니 用은 不同하나 體는 相離하지 않느니라. 이 三法이 縱도 아니요 橫도 아니며 並도 아니요 別도 아니니 秘密藏이라 이름하여 大涅槃이 되느니라.
고요하면서 비춤은 반야요, 비추면서 고요함은 해탈이며 고요함과 비춤의 본체는 법신이다. 마치 한 개의 밝고 깨끗한 둥근 구슬과 같아서 밝음은 반야요, 깨끗함은 해탈이며, 둥근 본체는 법신이니 작용은 다르지만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 세 법은 가로도 아니고 세로도 아니며 함께 하지도 따로 하지도 않으니 비밀 창고라 부르는 대열반이다.
이 대열반의 세 가지 덕[三德]인 반야와 해탈과 법신은 자성 가운데 완전히 갖추어져 있으므로 이를 실제로 깨치면 견성성불한다.
一은 見性成佛이니 自開法身하면 稱性이 應現이요 次는 無得이니 自開般若하면 佛法은 所覺이요 菩提는 能覺이라 能所相因故로 俱叵得이니 無所得者는 則得菩提며 後는 離妄成佛이니 自開解脫하면 不動無住하야 妄倒斯寂일새 名眞解脫이니라(淸凉鈔25)
一은 見性하면 成佛이니 眞如法身을 自開하면 眞性이 現前하고, 次는 無得하면 成佛이니 眞性般若를 自開하면 佛法은 所覺이며, 菩提는 能覺인지라 能과 所가 相因한 故로 能所를 俱不得이다. 所得이 絶無한 者는 無上菩提를 則得하며, 後는 離妄하면 成佛이니 本性解脫을 自開하면 如如不動하며 蕩蕩無住하여 妄想顚倒가 斷寂하므로 진정한 解脫이라 이름하느니라.
첫째는 견성하면 성불인 것이다. 진여인 ‘법신’을 스스로 열면 참 성품이 눈앞에 그대로 나타난다. 두번째는 얻을 바 없으면 성불인 것이다. 참 성품인 ‘반야’를 스스로 열면 깨쳐야 할 대상으로서의 불법과 깨치는 주체로서의 보리, 이 두 가지가 서로 맞물려있기 때문에 대상과 주체 양쪽을 다 얻을 수 없다. 얻을 바가 전혀 없는 자는 무상보리를 얻는다. 마지막은 허망함을 여의면 성불인 것이다. 본래 성품인 ‘해탈’을 스스로 열면 한결같이 움직이지도 않고 머뭄없이 자유로와서 전도망상이 단연코 적멸하므로 진정한 해탈이라고 한다.
법신과 반야와 해탈은 과위(果位)에서의 세 가지 덕[三德]이니 바탕은 같으나 작용은 다르다. 견성하면 얻음이 없고 망상을 떠나면 견성이니 세 가지가 표현은 각각 다르나 불과를 성취한다는 내용은 같다. 그러므로 견성하면 성불해서 여래의 세 가지 덕이 완전하게 갖추어진다. 전도망상을 영원히 떠나 구경무소득의 큰 깨달음의 바다에 단박 들어간다. 그리하여 적멸하되 항상 관조하고 관조하되 항상 적멸하여 상적상조하는 적광정토(寂光淨土)에 상주하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이 머뭄없이 머무는 곳이다.
以奢摩他(止 定)故로 雖寂而常照하고 以毘婆那(觀․慧)故로 雖照而常寂이요 以優畢叉(捨․平等)故로 非照而非寂이라 照而常寂故로 說俗而卽眞이요 寂而常照故로 說眞而卽俗이요 非寂非照故로 杜口於毘耶니라(永嘉集)
奢摩他인 故로 비록 寂滅하나 항상 觀照하고, 毘婆舍那인 故로 비록 觀照하나 항상 寂滅하며, 優畢叉인 故로 照도 아니요 寂도 아니니라. 照하되 항상 寂한 故로 俗을 說하나 곧 眞이요, 寂하되 항상 照하는 故로 眞을 說하나 곧 俗이며, 寂도 아니요 照도 아닌 故로 毘耶에서 杜口하였느니라.
사마타[止定]인 까닭에 적멸하면서도 관조하고 비파사나[觀慧]인 까닭에 관조하면서도 항상 적멸하고 우필차[捨平等]인 까닭에 관조도 아니고 적멸도 아니다. 관조하면서도 항상 적멸하므로 세속제를 말하면 그대로 진제가 되고, 적멸하면서도 항상 관조하므로 진제를 말하면 그대로 세속제가 되며, 적멸도 관조도 아니므로 비야리성에서 입을 다물었다.
적멸과 관조가 동시이기도 하고 적멸과 관조가 성립되지 않기도 하니 대원경지 속의 열반이다. 항상 죽고 항상 살며 또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으니 소림문하의 눈 푸른 납승이다.
寂而常照하니 寤寐一致요 生死一如로다(勅修淸規5 坐禪儀)
常寂하여 常照하니 寤寐가 一致하고 生死가 一如하도다.
항상 적멸하여 항상 관조하니 자나깨나 한결같고 죽으나 사나 한결같다.
대적광중의 오매일여는 여래지 위에서의 무심이다.
瓔珞에 云 等覺은 照寂이요 妙覺은 寂照라하니 今八地無生도 亦照寂이니라 故로 若得寂照하면 卽同佛故니라(華嚴鈔,69)
瓔珞經에서 말씀하되, 等覺菩薩은 照寂이요 妙覺世尊은 寂照라 하였다. 卽今 八地의 無生도 또한 照寂이니, 그런 故로 만약에 寂照를 證得하면 佛陀와 동일한 緣故이니라.
영락경(瓔珞經)에서 말하기를 “등각보살은 적멸을 관조하고 묘각인 세존은 적멸하면서도 관조한다”고 하였다. 여기서의 8지무생도 적멸을 관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적멸하면서도 관조함을 증득하면 불타와 똑같다.
8지는 거짓 무생이니 아뢰야의 미세한 식의 빛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은 까닭에 무분별지가 남아 있어서 ‘항상 적멸하고 항상 관조함’이 못된다. 아뢰야의 식의 빛이 소멸하고 무분별지를 없애면 참 무생인 대적광이 눈앞에 그대로 나타나서 항상 적멸하고 항상 관조하니 이것이 묘각인 견성이다.
그리고 조적(照寂)은 마음도 있고 장애도 있어서 적멸하면서도 항상 관조함[寂而常照], 관조하면서도 항상 적멸함[照而常寂]이 되지 못한다. 적조는 마음과 장애가 없어서 적멸하면서도 항상 관조하고, 관조하면서도 항상 적멸하며, 항상 적멸하고 항상 관조하며, 적멸하지도 않고 관조하지도 않아서 묘한 작용이 자재하다. 이것이 등각보살의 조적과 묘각세존의 적조다.
在等覺位하야는 名照寂慧니 未離生滅動相故요 至妙覺位하야 名寂照慧니 已歸第九識하야 究竟靜故니라 前等覺位는 猶有生滅하야 未盡心源故로 在八識이요 今到妙覺하면 永離生滅하야 窮歸本覺一心之源故로 入第九識中明淨이니라(元曉 金剛三昧經論 下)
等覺의 地位에 있어서는 照寂慧라 이름하나니, 生滅動相을 離脫하지 못한 緣故요, 妙覺의 佛地에 이르러서야 寂照慧라 이름하나니, 벌써 眞如인 第九識에 歸復하여 究竟으로 寂靜한 緣故이니라. 앞의 等覺位는 아직 生滅이 있어서 心源을 窮盡하지 못하였으므로 第八阿賴耶識에 滯在하여 있고, 이제 妙覺에 도달하면 生滅妄心을 영원히 離脫하여 窮極에 本覺인 一心의 根源에 歸復한 故로 眞如인 第九識中의 圓明淸淨境에 頓入하느니라.
등각의 지위에 있어서는 적멸을 관조하는 지혜라고 부르니 생멸의 움직이는 모양을 떠나지 못한 까닭이다. 묘각의 부처 지위에 이르러서야 적멸하면서도 관조하는 지혜라고 부르니, 이미 진여인 제9식에 돌아가서 필경 고요한 까닭이다.
앞의 등각위에는 아직 생멸이 있어서 마음의 근원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8아뢰야식에 막혀 있고, 이제 묘각에 도달하면 생멸의 망심을 영원히 떠나 결국 본각인 한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는 까닭에 진여인 제9식 가운데의 맑고 깨끗한 경계에 단박 들어간다.
적멸을 관조함[照寂]은 생멸하는 8식의 등각위요, 적멸하면서도 관조함은 한마음인 진여의 묘각위다. 원명하고 항상 적멸하면서도 관조하는 위 없는 대열반은 견성하여 도를 통한 사람이 실지로 깨친 곳이다.
진여본성은 부처와 중생이 평등하여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중생은 6식과 7식의 번뇌와 제8식의 미세한 망상이 가리고 덮어서 본성을 알지도 보지도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근본무명인 제8아뢰야를 다 없애지 않으면 본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제8식의 미세유주를 영원히 끊어버려서 무심무념의 대원경지가 드러나면 이는 구경묘각인 무여열반으로서 즉 견성이며 성불이다. 설사 6,7식의 거칠고 무거운 망상이 다 없어지고 한 생각도 나지 않는 거짓 무심, 숙면일여한 자재위에 들어갔다해도 이것은 승묘경계일 뿐, 죽기만 하고 살아나지 못했으므로 종문의 바른 안목이라 할 수 없다. 오직 앞뒤가 끊어져 아무것도 없는 제8마계(第八魔界)에서 크게 살아나 미세유주인 근본무명을 남김없이 모두 없애고, 자나깨나 한결같고 안과 밖이 환히 밝아 마음도 없고 생각도 없으며 항상 적멸하고 항상 관조하는 궁극의 깊은 곳, 대열반을 몸소 깨쳐야만 영산의 정통을 잇는 것이고 소림의 바른 법인(法印)을 받는 것이다.
크게 쉬고 크게 안온한 곳에서, 이 구경무심지에서 아무 하릴 없고 지음도 없이 자유로운 대해탈의 경계가 깨친 다음의 보임이며 생활이다. 그러므로 견성이란 원증돈증의 증오임이 청천백일과 같이 명백하다. 참학하는 납자는 부처와 조사가 정통으로 전하는 이 철칙에 위배되는 어떤 다른 주장도 단연 배제하고 정통으로 전하는 법을 표방하여 위 없는 큰 도를 원만히 성취해야 한다.
13. 이해적 깨달음과 점점 닦음[解悟漸修]
頓悟漸修者는 頓悟(日出․孩生)와 漸修(霜消․孩長)이니 爲解悟니라(圭峯 圓覺大疏 上之2)
頓悟漸修라 함은 頓悟(日出과 孩生)와 漸修(霜消와 孩長)이니 解悟니라.
돈오점수란, 해가 뜨고 아이가 태어나는 것에 비유되는 ‘돈오’와 서리가 녹고 아이가 자라남에 비유되는 ‘점수’다. 그러므로 여기서 ‘돈오’란 ‘해오(이해적 깨달음)’를 말한다.
先須頓悟하야 方可漸修者는 此約解悟니 故로 華嚴에 說하되 初發心時에 便成正覺後에 三賢十聖을 因次第修證하느니라(都序)
우선 頓悟하여 바야흐로 漸修함은 이는 解悟이다. 그런 故로 華嚴에서 說하되 始初發心할 때에 문득 正覺을 성취한연후에 三賢과 十聖을 次第로 修證한다고 하였다.
먼저 돈오한 다음에라야 점수할 수 있다 함은 ‘해오’의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맨처음 발심할 때 그대로 정각을 성취한다. 그리고나서 3현과 10성을 차례로 닦아 증득한다”고 하였다.
교가의 수행방법인 해오점수는, 당장 그 자리에서 무심해져 부처자리를 단박 깨치는 선문의 종지와는 정반대다. 금과 모래를 구분하지 못하고 옥과 돌을 혼동하면 큰 과오가 생긴다.
悟後에 初入十信位也니라(圭峯 師資承襲圖 節要)
頓悟한 후에는 始初로 十信位에 得入한다.
돈오한 뒤에야 비로소 10신 지위에 들어간다.
初悟之人은 未能說法하며 答他問難을 皆悉不得이니라(都序 節要)
처음 頓悟한 者는 說法을 못하며 他人의 問難에 대답도 전연 못한다.
처음 돈오한 이는 설법도 못하며 다른 사람이 묻고 따지면 전연 답하지도 못한다.
견성은 원통(圓通)을 깨친 구경각이므로 10신의 첫 지위를 내용으로 하는 해오인 돈오는 견성이 아니다. 옛부터 선문에서 돈오했다 함은, 아주 심오하고 어려운 문제로 시험하여 청천백일처럼 분명하게 정답을 대지 못하면 쫓겨나서 인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교가에서 돈오했다는 10신 지위는 바른 깨달음이 아니므로 설법도 못하고 까다로운 질문에 대답도 못함이 당연하다. 원증(圓證)을 내용으로 하는 선문의 돈오, 즉 견성과 해오를 가리키는 교가의 돈오와는 실로 하늘과 땅 차이다.
此頓悟漸修之義는 備於一藏大乘而起信圓覺華嚴이 是其宗也니라(承襲圖)
이 頓悟漸修의 意義는 一藏大乘에 구비하였는데, 起信論 圓覺經과 華嚴經이 그 宗이다.
이 돈오점수의 뜻은 여러 대승경전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기신론, 원각경, 화엄경이 그 주된 부류이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말하는 선문돈종의 ‘원증’을 3현10성을 차례로 닦아 증득한다는 교가점수의 ‘해오’에 갖다붙이려는 무리는 결국 그 사람의 파멸을 자초한다.
先須信解心性이 本淨하고 煩惱가 本空하야 不妨依解薰修者也니라(定慧結社文)
우선 心性이 본래 淸淨하고 煩惱가 본시 空寂함을 深信了解하여서, 그 信解를 依持하여 薰習修行함이 무방하니라.
우선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시 공적함을 깊이 믿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는 그 신해를 바탕으로 차츰 익히고 수행하는 것이 좋다.
이 믿고 이해함[信解]은 해오인 돈오를 말하는 것으로, 교가의 돈오점수 사상이다.
忽被善知識의 指示入路하야 一念回光하야 見自本性하야 而此性地에 元無煩惱하며 無漏智性이 本自具足하야 卽與諸佛로 分毫不殊일새 故로 云 頓悟也요 雖悟本性이 與佛無殊나 無始習氣를 卒難頓除故로 依悟而修하야 漸薰功成하야 長養成胎하야 久久成聖일새 故云 漸修也니라(修心訣)
홀연히 善知識의 지시로 入路하여 回光하여 자기의 本性을 得見하여 이 性地에 원래로 煩惱가 없으며 無漏한 智性이 本然으로 具足하여 곧 諸佛과 더불어 조금도 다르지 않는 故로 頓悟라 한다. 비록 本性이 諸佛과 다르지 아니함을 悟得하였으나, 無始의 習氣를 창졸히 제거하기 難하므로 悟를 依持하여 修習한다. 점점 薰習하여 그 功이 성취되어 聖胎를 長養하여 久久에 成聖할새 漸修라 하느니라.
갑자기 선지식의 지시로 길을 찾아 들어가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자기의 본성을 보아, 이 성품 자리에 원래 번뇌가 없으며 번뇌 없는 지혜성품이 본래 갖추어져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돈오’라 한다.
비록 본성이 모든 부처님과 다르지 않음을 깨치긴 하였으나 먼 옛날부터 내려온 습기를 갑자기 없애기 어려우므로 깨침을 의지하여 닦아 익힌다. 점점 익혀서 공이 성취되어 오래오래 성태를 기르다 보면 성인이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점수’라 한다.
앞장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견성이란 원통(圓通)을 깨쳐서 10지를 단박에 뛰어넘은 구경각, 즉 원증을 말한다.
그런데 10신초의 해오를 가지고 견성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와 조사의 말씀에 전연 위배된 독창적인 학설이다. 어떤 논리나 설명도 부처와 조사의 말씀에 위배되면 불교인으로서 단연코 물리치지 않을 수 없다.
頓悟自性이 本來空寂하야 與佛無殊나 而此舊習을 卒難頓除故로 逢順逆境하면 瞋喜是非가 熾然起滅하며 客塵煩惱가 與前無殊하나니 若不以般若로 加工著力하면 焉能對治無明하야 得大休歇之地리오 如云頓悟雖同佛이나 多生習氣深이라 風靜하야도 波尙湧이요 理現하야도 心猶侵이라하니 故로 悟後에 長須照察하야 妄念이 忽起어든 都不隨之하고 損之又損하야 以至於無爲하야사 方始究竟이니 天下善知識의 悟後牧牛行이 是也라(修心訣)
自性이 본래로 空寂하여 佛과 다르지 아니함을 頓悟하였으나, 이 舊習을 졸연히 頓除하기 甚難하다. 그런 故로 逆境이나 順境에 봉착하면 瞋喜와 是非가 치연히 起滅하여 客塵인 煩惱妄想이 前日과 다름없다. 만약에 般若智慧로 가공하여 著力하지 않으면, 어찌 無明을 對治하여 大休歇地를 얻으리오. 古人이 말하기를, 비록 佛陀와 동일함을 頓悟하였으나 다생의 習氣가 甚深하다. 風勢는 정지하나 파도가 오히려 ○湧하고 性理는 現前하였어도 妄心이 오히려 侵入한다. 그런 故로 悟後에 장구히 모름지기 反照審察하여서 妄念이 홀연히 生起하거든 전연히 隨去하지 말고 損減하여 寂然無爲함에 도달하여야 비로소 究竟이니 천하 善知識의 悟後 牧牛行이 이것이다.
자성이 본래 공적하여 부처님과 다르지 않음을 돈오했으나 오랜 습관은 갑자기 없애기가 매우 어렵다. 그런 까닭에 맞고 안맞는 경계를 만나면 성내고 기뻐하고 옳고 그름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꺼지고 바깥 티끌인 번뇌망상이 전과 다름이 없다. 만약 반야지혜로 힘을 들이지 않는다면 어찌 무명을 다스려서 크게 쉬어버린 경계를 얻겠는가. 옛 사람이 말하기를 ‘비록 부처와 똑같음을 돈오했으나 수많은 생에 익혀온 습기가 매우 깊다. 바람은 자도 물결은 출렁이듯 성품도리가 눈앞에 드러났어도 망심은 아직 침입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깨친 다음에 반드시 오랫동안 되비추고 살펴서 망념이 언뜻 일어나면 조금도 따라가지 말고, 덜고 덜어서 적연무위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끝나는 것이다. 천하 선지식들이 깨친 다음 수행한다는 목우행(牧牛行)이 이것이다.
해오는 거칠고 무거운 망상[麤重妄想]을 벗어나지 못한 헛된 경계이므로 객진번뇌가 여전히 맹렬하게 일어났다 없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 번뇌망상을 없애는 것이 깨친 뒤 점점 닦는 것[漸修]이다.
선문에서는 망상은 말할 것도 없고 제8아뢰야의 미세한 망상까지 영원히 끊어버린 구경무심의 크게 쉬어버린 지위가 돈오이며 견성이다. 그러므로 망상을 없애고 진여를 증득한 이 무심, 무념, 무위, 무사의 금강대정(金剛大定)을 보임하는 것이 성태를 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오와 해오의 상반된 내용을 견성이라고 혼동한 것은 일대 착오이다. 교가에서는 객진번뇌가 여전한 ‘해오’를 ‘돈오’라고 주장한 이상, 번뇌망상을 없애 크게 쉬어버린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점수문(漸修門)이 필요하다. 그러나 선문의 바른 전통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망상을 없애고 진여를 증득한, 크게 쉬어버린 지위가 돈오이며 견성이므로 견성만 하면 그대로 무심해져 약과 병이 다 없어지고 교(敎)와 관(觀)이 동시에 쉰다”고 단언한 것이다. 따라서 해오에서의 점수는 필요없다. 그러므로 서로 반대 내용인 선문의 원증인 돈오와 교가의 해오인 돈오를 혼동하여 수도의 바른 길을 파괴함은 부처와 조사의 바른 전통에 큰 죄를 짓는 것이다.
圭峯이 深明先悟後修之義曰識氷池而全水하야 借陽氣而銷鎔하고 悟凡夫而卽佛하야 資法力而薰修라 氷消則水流潤하야 方呈漑滌之功하고 妄滅則心靈通하야 應現通光之用이니라(修心訣)
圭峯이 先悟後修하는 의의를 아주 자세히 설명하였다. 結氷된 池塘이 全體로 流水임을 알아서 陽氣를 차용하여 銷融시키고, 凡夫衆生이 卽是佛陀임을 悟解하여 法力을 依資하여 薰修한다. 氷塊가 銷鎔되면 水流가 潤滑하여 바야흐로 灌漑와 洗滌의 功果를 얻고, 妄念이 滅盡하면 心靈이 圓通하여 玄通한 神光의 大用이 應現한다.
규봉은 먼저 깨치고 난 다음에 닦는다는 뜻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얼어붙은 못이 전부 물인 줄은 알았으나 햇볕을 빌려야 녹일 수 있듯 범부중생이 곧 부처임을 알았으나 법력을 의지하여 차츰 익히고 닦는다. 얼음덩이가 녹으면 물의 흐름이 원활하여 마침내 물대고 씻어내는 효과를 얻듯 망념이 다 없어지면 마음의 신령스러움이 원통(圓通)하여 현묘하게 통하는 신령스런 빛의 큰 작용이 나타난다.”
견고한 얼음덩이가 전부 녹아서 힘차게 흐르는 물로 쓰이듯이, 번뇌망상이 확연히 소멸하여 무구진여를 증득한 것이 견성이며 원증이므로, 견성하면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 망념이 없어져 진여를 증득하는 것이라고 확언하였다. 그러므로 얼음덩이가 본래 흐르는 물임을 분명히 알았으나 얼음덩이는 여전하듯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확실히 해오 하였으나 망상이 일었다 꺼졌다 함을 돈오견성이라고 하고, 얼음덩이를 녹이듯이 망상을 제거하는 점수를 선문의 바른 전통이라고 극력 주장함은 참으로 선문의 바른 전통에 어긋난 억지주장이다.
譬如寒月에 結水爲氷이라가 及至暖時에 釋氷爲水하나니 衆生이 迷時에 結性成心이라가 生이 悟時에 釋心成性이니라(南陽慧忠 傳燈錄28)
비유를 들면 혹한인 冬節에 流水가 凝結하여 堅氷이 되었다가, 따뜻한 시기에 이르면 堅氷이 消釋되어 流水로 환원함과 같다. 중생이 미혹할 때에는 本性이 凝結하여 妄心이 되었으나, 중생이 正悟할 때에는 妄心이 消釋하여 本性으로 환원한다.
비유하면 추운 겨울에 흐르는 물이 굳어서 얼음이 되었다가 따뜻한 시기가 되면 얼음이 녹아 다시 흐르는 물이 되듯이, 중생이 미혹할 때는 본성이 굳어서 망심이 되었다가 중생이 깨쳤을 때는 망심이 녹아서 다시 본성이 된다.
망심의 단단한 얼음덩이가 완전히 녹아서 자유로이 흐르는 물이 되어야만 돈오며 견성이다. 단단한 얼음덩어리 그대로가 본래 흐르는 물이며 망심 이대로가 원래 참 성품인 줄 알기만 한 것을 가지고 돈오견성이라 함과는 남북의 차이가 있다.
一切惡業과 貪瞋痴인 無明煩惱와 種種塵勞等은 俱無自性이요 皆由迷自心故로 依妄而有니라 如水因寒하야 結而爲氷이니 此心을 旣悟則諸妄이 乘其所悟而消하야 如氷이 因慧日所照하야 復化爲水어늘 今云氷復何處著고하면 此寔迷中迷人이니라(中峯 山房夜話)
일체 惡業과 貪瞋痴인 無明煩惱와 각종의 塵勞 등은 다 自性이 없고, 眞如本心을 미혹함으로 인하여 妄念에 依止하여 있다. 淨水가 寒氣로 인하여 凝結하여 堅氷이 된 것과 같다. 이 眞如本心을 正悟하면 一切妄念이 그 正悟를 따라서 소멸하니, 堅氷이 慧日의 照熱로 인하여 다시 淨水로 歸復함과 같다. 그런데 지금 氷塊의 處理를 말하는 것은 진실로 미혹한 인간 중에 한층 더 미혹한 인간이다.
모든 악업과 탐진치인 무명번뇌와 갖가지 6진 번뇌 등은 다 자성이 없다. 그것은 진여본심을 미혹했기 때문에 망념에 의지하여 있는 것이다. 마치 물이 추위때문에 굳어서 얼음이 된 것과 같다. 이 진여본심을 바로 깨치면 단단한 얼음이 밝은 햇빛의 열기로 다시 맑은 물이 되듯이 모든 망념이 그 바른 깨달음을 따라 소멸한다. 그런데 이 마당에 얼음덩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말한다면 참으로 미혹한 사람 중에 미혹한 사람이다.
이는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듯 망념을 없애 진여를 증득한 종문 정안 종사들의 일관된 통설이다.
그러므로 얼음 녹듯 망념이 다하지 않으면 아직 미혹한 꿈속이어서 깨달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 미혹 중의 미혹인 헛된 말에 속아서는 안된다.
圭峯이 摠判先悟後修之義曰頓悟此性이 元無煩惱하며 無漏智性이 本自具足하야 與佛無殊하나니 依此而修者는 是名最上乘禪이며 亦名如來淸淨禪也라 若能念念修習하면 自然漸得百千三昧하나니 達磨門下에 展轉相傳은 是此禪也라하니 頓悟漸修之義는 如車二輪하야 厥一不可니라(修心訣)
圭峯이 先悟後修의 뜻을 摠判하여 말하였다. 此性이 원래로 煩惱가 없으며 無漏한 智性이 본연히 구족하여 佛陀와 더불어 차이가 없음을 頓悟하여 이를 依止하여 修習하는 사람은 이를 最上乘禪이라 하며 如來淸淨禪이라 名稱한다. 만약에 능히 念念에 修習하면 자연히 百千三昧를 점점 획득하나니, 達磨門下에서 展轉하여 대대로 相傳하는 것이 곧 이 禪이라 하였다. 그런즉 頓悟와 漸修의 二義는 乘車의 二輪과 같아서 한 개도 없어서는 안된다.
규봉은 먼저 깨치고 나서 수행한다는 ‘선오후수’의 뜻을 결론적으로 말하였다. “이 성품이 원래 번뇌가 없으며 번뇌 없는 지혜 성품이 본래 갖추어져서 부처와 차이가 없음을 돈오하고 이에 의지하여 닦아 익히는 것을 최상승선, 또는 여래청정선이라 이름한다. 만약 생각생각에 닦아 익힐 수 있다면 자연히 점점 백천 가지 삼매를 얻으리니, 달마(達磨) 문하에서 계속하여 대대로 이어온 것은 곧 이 선이다” 그러므로 돈오와 점수, 이 두 뜻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한 개라도 없어서는 안된다.
달마를 정통으로 이은 선문의 거장들은 한결같이 무심무념인 구경각의 원증을 돈오, 견성이라 하였다. 또 10지․등각을 초월하여 미세망념이 다 없어진 부처자리에서의 무생법인을 바른 깨달음, 또는 여래청정선이라 하였다. 객진번뇌가 여전히 다름없는 해오를 가지고 달마문하에서 이어내려온 선종이라 함은 선종을 모욕하는 큰 망언이다.
此頓漸兩門은 是千聖軌轍也니 從上諸聖이 莫不先悟後修하며 因修乃證이니라(修心訣)
이 頓悟漸修의 兩門은 곧 千聖의 軌轍이니, 從上의 諸聖이 先悟하여 後修하고 修習함을 인하여 證得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이 돈오 점수 두 문은 모든 성인이 밟고 간 법칙이니 예로부터 모든 성인은 먼저 깨치고 난 다음에 닦았으며 이 닦음을 통해서만이 증득했다.
이는 해오를 근본으로 하는 교가에서는 금과옥조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해오를 부정하고 원증에 그대로 들어가는 선문에서는 비상과 짐조의 독같은 독약이다. 만약 이것을 선문이라고 주장한다면 달마의 정통은 꿈에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頓悟漸修는 深諧敎理요 頓悟頓修는 正當宗鏡이니라(宗鏡錄)
頓悟漸修는 敎理에 甚深히 諧當하고, 頓悟頓修는 宗鏡 즉 禪宗에 眞正 適當하니라.
돈오점수는 교가의 이치에 해당하며, 돈오돈수는 종경, 곧 선종에 해당한다.
明鏡이 本來淨이라 何用拂塵埃리오하니 此是六祖가 直顯本性하야 破其漸修니라(宗鏡錄 36)
明鏡이 본래 청정한지라 어찌 塵淨를 拂拭할 필요가 있으리오 하였으니, 이는 六祖가 本性을 直顯하여 그 漸修를 打破함이니라.
“밝은 거울이 본래 깨끗한데 티끌 먼지를 닦아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육조가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 점수를 쳐부순 것이다.
이는 금과 모래, 옥과 돌을 잘 가려내는 눈 밝은 이의 정론이다. 해오는 교가의 수행인 점진적인 길이요, 원증은 선문에서 도를 깨치는 지름길이니 이를 혼동하면 자기도 그르치고 남도 그르친다.
迷人은 漸契하고 悟人은 頓修하느니라
自性自悟하야 頓悟頓修하야 亦無漸니라(壇經)
미혹한 인간은 점점 契合하고 悟達한 高人은 頓然히 修斷한다.
自性으로 自悟하여 頓悟하고 頓修하여 또한 地位漸次가 없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점점 계합하고 깨친 사람은 자기 본성을 스스로 깨쳐 단박 깨치고 단박 닦아서 결국 지위와 점차가 없다.
달마를 바로 전한 6조의 바른 법은 오직 돈[頓]일 뿐 점[漸]은 없다. 점수문은 미혹한 경계에서만 있을 뿐이요, 깨친 경계는 아니므로 6조는 오직 돈오돈수의 원증(圓證)인 견성만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를 내용으로 하는 원증만이 6조의 바른 전통이니 돈수원증이 아니면 깨침[悟]이 아니다.
頓悟頓修는 此說上上智니 根性欲欲이 俱勝하야 一聞千悟하야 得大摠持하야 一念不生하야 前後際斷하느니라 斷障은 如斬一綟絲하야 萬條를 頓斷하며 修德은 如染一綟絲하야 萬條를 頓染也라 此人三業은 唯獨自明了하야 餘人所不見이니 且就事跡而言컨대 如牛頭融大師之類也니라(都序)
頓悟頓修라 함은 이는 上上智를 설함이니, 根性과 樂欲이 전부 殊勝하여 一聞하면 千悟하여 大摠持를 證得하여서 一念도 不生하여 前後際가 頓斷한다. 障惑을 斷除함은 一綟絲를 斬斷하는 것과 같아서 萬條를 일시에 頓斷하며, 聖德을 圓修함은 一綟絲를 염색, 萬條를 일시에 頓色한다. 이 사람의 三業은 유독히 明了하여 他人은 엿보지 못하나니, 또한 事跡上에서 논하면 牛頭融大師의 類이다.
돈오돈수는 가장 으뜸가는 지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근성이 뛰어난 데다가 공부를 좋아하니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아 대총지를 증득하고 한 생각도 나지 않아서 앞뒤가 딱 끊긴다. 마치 한 타래 실을 잘라 만 가닥을 한꺼번에 자르듯 장애를 끊고, 한 타래 실을 물들여 만 가닥을 한꺼번에 물들이듯 성스런 덕을 원만히 닦는다. 이 사람의 삼업(三業)은 유독 밝아서 다른 사람은 엿볼 수 없다. 역사적으로 사례를 든다면 우두 융(牛頭融)대사와 같은 이들이다.
돈오돈수는 한생각도 나지 않으며 앞뒤가 끊어진 것을 내용으로 한다. 달마문하에서 전해온 견성은 망념을 없애 진여를 증득하는 데 있으므로 달마 후손의 정안종사 중에 한생각도 나지 않는 무심삼매를 실제 증득하지 않은 이는 없다. 뿐만 아니라 비록 한생각도 나지 않게 되어도 아무 것도 없는 이 경계에 머물러 버리면, 크게 죽었으나 살아나지 못한 승묘경계라 하여 배제한다. 이 깊은 굴에서 뛰쳐나와 한생각도 나지 않는 구경무심이 정안(正眼)인 것이다. 그러므로 달마선은 한생각도 나지 않는 돈수(頓修)에 있는 것인데,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해오에서의 점수(漸修)를 달마선이라고 주장함은 천고의 대과오이다.
그리고 돈수는 우두(牛頭)같은 뛰어난 이에게만 속하고 달마의 법을 전한 이들은 모두 점수하는 이라고 하여, 달마 문하는 전부 우두보다 못하다는 결론이 되니 한층 가소로운 일이다. 달마를 정통으로 잇는 사람 중에 우두보다 못한 이는 없을 뿐 아니라, 황벽(黃檗)은 ‘우두가 향상일로의 한 도리는 꿈에도 보지 못했다’고 지탄하였다. 이로써 달마선이 점수에 있다 하는 주장이 억설임을 알 것이다.
各各反照하야 有病卽治요 無病勿藥이니라(都序)
각각 反照하여 보아서 有病하면 치료하여야 하고 無病하면 用藥할 필요가 없느니라.
각각 되비추어 보아서 병이 있으면 치료해야 하고 병이 없으면 약을 쓸 필요가 없다.
해오는 망상 병이 있으므로 점수라는 법약이 필요하다. 그러나 견성은 망상 병이 없는 원증이므로 약을 쓰지 않는다.
彼宗(馬祖)은 於頓悟門엔 雖近而未的이요 於漸修門엔 有誤而全乖니라(承襲圖)
馬祖는 頓悟門에는 비록 근사하나 적당치 못하고 漸修門에는 착오하여 전연 乖戾되었다.
마조의 종지는 돈오문에 가깝기는 하나 꼭 맞지는 않고 점수문에는 그릇되어 전연 어긋난다.
규봉이 말하는 돈오는 10신에서의 해오이며 마조가 말하는 돈오는 불지에서의 원증이다. 규봉은 병이 있으니 고쳐야 하고 마조는 병이 없으니 약이 필요없다. 규봉은 객진번뇌가 여전하므로 점수가 필요하나 마조는 망념을 단박 없애 무생법인을 철저히 깨쳤으므로 돈수마저 필요없다. 해오를 주장하는 규봉의 얕은 소견으로 마조가 말한 원증의 깊은 경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나, 환자인 규봉이 완쾌한 마조를 약먹지 않는다고 비난 공격함은 어린아이의 장님놀이로서 천하가 폭소할 일이다. 달마 정전은 병이 나으면 약을 버리듯 망념이 없어져 진여를 증득한 것이니, 환자인 규봉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
且悟證之跡도 尙不容於心이어늘 何況信解리오 純是情見이니 其於至道之體에 愈親而愈疎하고 益近而益遠하야 自不能會于道어니 安能使人會道之理哉아(中峯錄11 之下)
또한 徹悟하여 實證한 形跡도 오히려 心中에 용납하지 않거든 하물며 信解리오. 순전히 이는 識情妄見이니 그 至道의 本體에 親하려 할수록 더욱 疎하여지고, 近하려 할수록 더 遠隔하여진다. 그리하여 자신도 大道를 會通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타인으로 하여금 會通케 하리오.
철저히 깨쳐 실제 깨쳤다는 자취마저도 마음 속에 용납치 않는데 하물며 10신의 해오이겠는가. 순전히 이것은 식정(識情)의 망견으로서, 지극한 도의 본체에 가까이 하려면 할수록 더욱 멀어진다. 자신도 큰 도를 통달치 못하였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통달케 하겠는가.
선문의 정통사상은 이것이다. 중봉(中峯)국사는 임제(臨濟)를 바로 이은 정안종사로 선문의 표준이다. 구경무심지를 철저히 깨쳤어도 그 깨친 자취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정안이 아니다. 해오는 큰 도와는 완전히 배치되니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바른 안목을 가리는 가장 큰 병통이므로 앞서 깨친 분들이 극력 배격한 것이다.
悟解之者는 語益工而旨益昏하고 言愈奇而理益昧니라(中峯錄18 之上)
悟解한 者는 語言이 더욱 工巧할수록 本旨는 더 暗昏하고, 言語가 더욱 더 奇妙할수록 性理는 더 昏昧하니라.
해오로 깨달은 이는 말이 교묘할수록 본래 뜻에는 더욱 어둡고, 말이 기묘할수록 성품도리에는 더 어둡다.
신해, 오해, 해오는 같은 내용이다. 해오는 큰 도에는 이와 같이 상반되니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若根本上做工夫하야 打破八識窠臼하고 頓飜無明窟穴하면 一超直入하야 更無剩法하나니 此乃上上利根所證者이라 八識根本을 未破하면 縱有作爲하나 皆識神邊事니 若以此爲眞하면 大似認賊爲子니라 古人이 云 學道之人이 不識眞은 只爲從前認識神이라 無量劫來生死本이어늘 痴人은 喚作本來身이라하니 於此一關을 最爲要透니라(憨山 夢遊集 2)
만약 근본상으로부터 공부를 하여서 八識의 窠臼를 타파하고 無明의 窟穴을 頓飜하면, 一超하여서 佛地에 直入하여 다시는 남은 法이 없나니 이는 上上利根의 實證한 바이다. 八識의 근본을 未破하면 비록 得力한 作爲가 있어도 이는 전혀 識神의 妄邊事이니, 만약에 이로써 眞正을 삼는다면 참으로 도적을 오인하여 친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다. 古人이 말하기를 學道하는 人士가 眞을 알지 못함은 다만 종전의 識神을 誤認하기 때문이다. 이는 無量劫來의 生死根本이어늘 우치한 인간은 불러서 本來身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 一關을 透過하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
근본적으로 공부하여 제8식의 소굴을 깨뜨려버리고 무명의 굴을 단박에 뒤엎어버리면 한번 뛰어 부처 지위에 그대로 들어가 다시는 남는 법이 없다. 이는 가장 뛰어난 근기가 실제로 깨치는 것이다. 8식의 근본을 다 부수지 못하면 비록 공부해서 얻은 효과가 있다 하여도 이는 전적으로 허망한 식신(識神) 쪽의 일이다. 만약 이것을 참법이라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도적을 친자식으로 오인하는 것과 같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법을 알지 못함은 다만 이제껏 식신을 잘못 알아왔기 때문이다. 이는 한없는 세월 동안 생사의 근본이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도리어 본래 몸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이 한 관문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8식의 근본인 미세무명을 영원히 끊어서 구경을 실제로 깨치지 않으면 이는 전적으로 망식의 허깨비 경계지 참된 깨침이 아니다. 해오는 참으로 도적을 오인하여 친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은 착각이다.
正悟者는 如久暗遇明하며 大夢俄覺하야 一了一切了하야 更無纖毫憎愛取捨之習이 滯于○中이니라(中峯錄5 之上 示王居士)
正悟한 者는 장구한 암흑에서 광명을 만나며 大夢을 홀연히 覺惺함과 같아서, 一을 了達하매 一切를 了達하여 纖毫도 憎愛와 取捨하는 情習이 ○中에 체류하지 않느니라.
바르게 깨친 이는 오랜 어둠 속에서 광명을 만난 것 같고 깊은 꿈에서 갑자기 깬 것과 같다. 하나를 깨치면 일체를 깨쳐서 털끝만큼도 사랑과 미움, 취하고 버리는 망정과 습기가 가슴 속에 남아 있지 않다.
若有纖毫라도 情習이 未盡하면 卽是悟心不圓而然也라 或悟心不圓이면 須是掃其未圓之跡이니 別立生涯하야 以期大徹이 可也니라 或謂悟心이 未盡이어든 以履踐盡之라하니 如抱薪救火하야 益其熾로다(中峯錄11 之中)
만약에 조금이라도 情習이 다하지 못함이 있으면 곧 心性을 悟達함이 圓滿치 못한 緣由이다. 혹 心性을 圓滿히 悟達치 못하면 모름지기 그 圓滿치 못한 當處를 소탕할지니, 특별히 생애를 세워서 廓徹大悟하여야 한다. 혹자는 心性을 悟達하되 未盡하였거든 履踐修行하여 未盡함을 窮盡한다 하니, 이는 薪草를 안고 火災를 消滅하려 함과 같아서 더욱 더 그 불꽃만 더 하게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망정과 습기가 다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마음을 원만히 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 마음을 원만히 깨치지 못했다면 반드시 그 원만치 못한 그 곳을 쓸어 없애버려야 하니 특별히 생애를 잡아서 확철히 깨쳐야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마음을 깨쳤으되 미진하면 단계적으로 수행하여 미진함을 없앤다고 하지만 이는 섶을 안고 불을 끄려는 것과 같아서 불길만을 더할 뿐이다.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 그 적나라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죽기만 하고 살아나지 못한 것이다. 이런 경우, ‘언구를 의심하지 않음이 큰 병이다’고 하여 인가하지 않음이 종문의 정안이다. 만약 해오에서의 점수와 같이 이 미진한 것을 단계적으로 닦아[履修] 다하려 한다면 이는 섶을 안고 불을 끄려는 것과 같아서 역효과만 낸다. 해오 점수의 해독은 이렇게 극심하다.
16. 남김없이 번뇌를 다 없앰[豁然漏盡]
大迦葉이 衆中에 手牽阿難出하야 言하되 今淸淨衆中에 結集經藏하노니 汝結이 未盡하니 不應住此니라 大正藏 25-p.68 上
又語阿難言하되 斷汝漏盡然後에 來入하라 殘結이 未盡이어든 汝勿來也어다 如是語竟하고 便自閉門하니라 大正藏 25-p.68 中
是時中間에 阿難이 思惟諸法하야 求盡殘漏하야 晝夜坐禪經行하야 愍勤求道하니라 是阿難은 智慧多하고 定力少할새 是故로 不卽得道러라 後夜에 欲臥하니 過疲極偃息하야 卽臥就寢할새 頭未至枕하야 廓然得悟하니라 阿難이 如是入金剛定하야 破一切諸煩惱山하고 得三明六通과 共解脫하야 作大力阿羅漢하야 卽夜에 到僧堂言하되 我今夜에 得盡諸漏하니라(大智度論2) 大正藏 25-p.69 上
大迦葉이 大衆中에서 親히 阿難을 牽出하여 말하되, 지금 淸淨衆中에서 經藏을 結集하려 하노니 汝는 妄結이 未盡하니 此處에 住居치 못하느니라. 또 阿難에게 말하되 汝의 妄結有漏를 斷盡한 然後에 來하라, 殘餘한 妄結이 未盡하거든 汝는 來入하지 말지어다. 이렇게 말하고는 문득 손수 門을 닫아 버렸다. 이때 中間에 있어서 阿難이 諸法을 思惟하여 殘漏를 斷盡코저 하여 晝夜로 坐禪하며 經行하여 勤實히 大道를 求하였다. 그러나 阿難은 智慧는 過多하고 定力은 甚少하여 卽是에 大道를 體得하지 못하였다. 後夜에 寢臥코저 할 때 過度히 피곤하여 쉬고자 하여 就枕하니 頭部가 枕子에 未至하여 廓然히 大悟하였다. 阿難이 이와 같이 金剛大定에 深入하여 一切의 모든 煩惱山을 破滅하고 三明六通과 大解脫을 證得하여 大力阿難漢이 되었느니라. 그리하여 當夜에 僧堂에 이르러 내가 今夜에 諸漏의 滅盡함을 證得하였다고 말하니라.
대가섭이 대중 가운데서 몸소 아난을 끄집어내면서 말하였다. “지금 청정한 대중이 경장을 결집하려는데, 너는 번뇌가 다하지 못했으므로 여기 머물 수 없다”
또 아난에게 말하였다. “너는 번뇌를 다 끊은 다음에 오너라. 남은 번뇌가 다하지 않으면 들어오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고는 손수 문을 닫아버렸다.
이 동안 아난은 모든 법을 사유하면서 남은 번뇌를 끊어 없애고자 밤낮으로 좌선과 경행을 하면서 열심히 도를 구하였다. 그러나 아난은 지혜는 넘치고 선정의 힘은 모자랐기 때문에 즉시 도를 체득하지 못하였다. 밤중이 지나 매우 피곤하여 눕고 싶어서 막 누우려하는데 머리가 베개에 닿기도 전에 확연히 깨쳤다. 아난은 이처럼 금강대정(金剛大定)에 깊이 들어 모든 번뇌의 산을 쳐부수고 삼명육통(三明六通)과 대해탈을 증득하여 큰 힘을 가진 아라한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으로 승당에 가서 말하였다. 나는 오늘밤 모든 번뇌가 다함을 증득했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에 들은 것 많기로 첫째였다. 그의 기억력은 고금에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서 녹음기 이상으로 정확하였다. 30여 년간 부처님의 시자로서 모든 법회에 참석하여 부처님 설법의 대부분을 빠짐없이 전해받아 외우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에 그 설법을 결집하려 할 때 가섭존자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아난 없이는 결집이 불가능하니 쫓아내지 말라는 대중의 간곡한 만류와 아난의 비통한 애걸에도 불구하고, 가섭은 ‘옴 오른 여우새끼’라고 통렬히 꾸짖어서 기어이 쫓아냈다.
그 이유인즉 불법이란 언어문자로 기억하거나 해설하는 데 있지 않고, 오직 마음 속의 모든 번뇌망상을 다 끊고서 참다운 해탈을 얻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난은 비록 부처님의 설법을 세밀하게 기억하고는 있었으나 번뇌망상인 유루(有漏)의 결사(結使)를 다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유루의 허망한 번뇌가 다 없어지지 못한 자는 불법 중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사자 무리 속에 옴병 오른 여우이니, 결집하는 거룩한 모임에 참여할 자격이 절대로 없었다. 그러므로 결사적으로 정진하여 유루의 번뇌를 끊어버리고 오면, 그때는 거룩한 모임에 참석함을 흔쾌히 허락하겠다고 한 것이다.
아난이 평소에 자기의 총명과 기억력만 믿고 실제로 수도는 하지 않다가 결국은 ‘옴 오른 여우’라는 낙인이 찍혀 쫓겨나고 마니, 그 심정은 비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기에서 크게 반성하지 못하면 이는 목석보다 못한 인간으로 도저히 구제불능이다. 그러나 아난은 과거세의 선근이 지극히 커서, 맹렬하게 반성하고 크게 분발하여 힘써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오래지 않아 활연히 깨쳐 모든 번뇌가 영원히 없어져서, 가섭으로부터 거룩한 모임에 참석케 하는 영예를 얻었다.
이 사실은 「오분율 30」 「사분율 54」 「승지율 32」 「근본비나야잡사 39」 「남전율부 4」 「대지도론 2」 「아육왕전 4」 「부법장인연전 2」 등의 전적에 대동소이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아난이 득도한 내용에 대해서 「오분율」에는 “훤히 번뇌를 다하였다”라고 하였고, 그밖에 “마음에 번뇌없음을 얻었다”(사분율), “번뇌가 다함을 얻었다”(승지율), “모든 번뇌를 다 끊었다”(근본잡사), “모든 번뇌를 다 하였다”(지도론), 모든 번뇌를 벗어나서 심해탈을 얻었다”(남전율)라고 표현하였으니, 훤히 크게 깨쳐, 모든 번뇌를 다 끊어서 소승 아라한이 아닌 대력아라한(大力阿羅漢), 즉 불과를 성취한 것이다. 이것이 원증이며 견성이다. 여기서 ‘모든 번뇌[諸漏]’니 ‘결사(結使)’니 하는 것은 무명인 번뇌망상의 다른 이름으로서, 3세6추를 내용으로 한 것이다. 이 누(漏)와 결(結)의 번뇌를 근본적으로 다 끊으면 무여열반, 즉 부처님 지위를 증득하는 것이니, 번뇌가 다해 두려움이 없는 불과이다.
소승율부의 기록에서 아난이 아라한과를 성취했다고 하여 그를 소승 아라한이라고 단정함은 잘못이다.
“보살이 깨달음을 얻을 때는 번뇌장 소지장을 단박에 끊어서 아라한 및 여래를 이룬다”(성유식론 3)라고 한 것과 같이, 원시불교에서는 석가세존도 아라한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므로 「지도론」의 대력아라한이란 불과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열 가지 명호 가운데 하나인 ‘응공’은 아라한이며, 용수도 아난을 대력아라한이라고 하였다.
아난이 가섭에게 통렬한 꾸짖음을 듣고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으나,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가장 높은 도과를 성취하였다. 그리하여 결집에서 중추역할을 하여 부처님이 남긴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였다. 그뿐 아니라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전해받은 대가섭의 법제자가 되어 부처님의 혜명을 계승하였다. 그 법맥이 계속 이어져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면면히 끊어지지 않았으니 아난은 천추만세에 불멸의 큰 공을 세웠다고 하겠다.
아난은 부처님의 10대제자 중에 다문제일이지만, 결국 부처님이 아닌 가섭의 법제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불법이 많이 듣고 아는 데 있지 않고 실제로 마음을 깨닫는 원증견성에 있다는 징표이다. 만약 아난의 깨달은 경지가 유여열반인 소승 아라한이었다면 무상정법을 전해받은 가섭(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무상정법을 모두 대가섭에게 부촉하니, 이제부터 가섭이 그대들을 위해서 여래와 똑같은 의지처가 되리라. 대열반경 2)이 아난에게 법을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섭이 아난에게 법을 전한 것은 아난이 여래의 무상정법, 즉 무여열반인 불성을 꿰뚫어 본 대력아라한이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을 외워낸 아난도 번뇌를 다 없애 가장 높은 지위를 원만증득하기 전에는 ‘옴 오른 여우’라고 쫓겨남을 면치 못하였으니, 불교의 생명이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구든지 망상을 없애고 진여를 깨쳐 본성을 단박에 보지 못하면 불법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옴 오른 여우’라고 하는 것은 고금을 통한 불변의 원칙이다. 그러므로 다문지해는 뱀이나 전갈같이 멀리하고 실제 깨침에만 노력하여 원만증득하는 견성을 해야 할 것이다.
能은 不識字하니 請上人은 爲讀하라(壇經 悟法傳衣篇) 大正藏 48-p.348 下
慧能은 文字를 모르니 청컨대 上人은 나를 위하여 읽어 달라.
나는 글자를 모르니 스님이 나를 위해 읽어 주시오.
字卽不識이나 義卽請問하라(壇經 參請機緣篇) 大正藏 48-p.355 上
文字는 모르나 청컨대 그 뜻을 물어라.
글자는 모르나 뜻이라면 물어보시오.
吾不識字하니 汝試就經하야 誦一篇하라(壇經 參請機緣篇) 大正藏 48-p.355 中
나는 文字를 모르니 네가 經을 한편 朗誦하라.
나는 글자를 모르니 네가 경을 한 편 외워라.
이는 「단경」에 기록된 육조의 친설이니, 육조는 한 글자도 모르는 문맹임이 증명된다.
老莊의 玄旨와 書易大義와 三乘經論과 四分律儀에 說通訓狂하고 音參吳晋하야 爛乎如襲孔翠하며 玲然如振金玉이라(張說撰 神秀碑文) 大正藏 49-p.586 中
老子․莊子의 深玄한 意旨와 書經․周易의 廣大한 眞義와 三乘의 經論과 四分의 律儀에 說法은 訓狂에 통달하고 音韻은 吳晋에 參詳하여 璨爛하기 孔翠를 衣襲함과 같고 玲瓏하여 金玉을 振動함과 같다.
노자와 장자의 깊은 뜻과 서경과 주역의 광대한 참 이치, 삼승경론과 4분율의에 있어서 설법은 훈고(訓狂)에 통달하고 음운은 오(吳)와 진(晋)의 옛글자까지 연구하였다. 공작털과 비취로 옷단장을 한 듯 반짝이고 금과 옥이 떨리듯 영롱하였다.
신수의 박학다문이 그의 비문에 소상히 드러나 있다.
朕請安秀二師하야 宮中에 供養하고 萬機之暇에 每究一乘하노이다 二師가 並推讓云하되 南方에 有能禪師하야 密受忍大師衣法하였으니 可就問他하소서하니 今遣內侍薛簡하여 馳詔請迎하노니 願師는 慈念으로 速赴上京하소서(全唐文17 壇經 唐朝徵詔篇) 大正藏 48-p.359 下
朕이 慧安과 神秀 二師를 招請하여 宮中에서 供養드리고, 萬機의 餘暇에 每樣 一乘을 窮究하노이다. 二師가 並皆推讓하여 말하되 南方에 慧能禪師가 있어서 秘密히 五祖弘忍大師의 衣法을 傳受하였으니 彼師에게 請問하소서 하여, 이제 內侍 薛簡을 보내 詔書를 받들어 迎請하오니, 원컨대 大師는 慈悲한 心念으로 速速히 떠나서 京都에 上來하소서.
짐이 혜안(慧安)과 신수(神秀) 두 대사를 초청하여 궁중에서 공양 올리고 정치하는 여가에 항상 일승을 깊이 물었습니다. 두 대사는 함께 사양하면서 추천하기를 “남방에 혜능선사라는 이가 있어서 5조 홍인대사의 가사와 법을 비밀히 전해 받았으니 그 스님에게 물으소서” 하므로, 이제 내시 설간(薛簡)을 보내 조서를 전하여 모시기를 청하오니, 원컨대 대사께서는 자비하신 마음으로 어서 떠나서 상경하여 주십시오.
불법은 많이 듣고 잘 기억하는 해오에 있지 않고 마음을 깨달아 견성하는 원증에 있다. 그러므로 오조는 해오를 한 신수를 물리치고 원증을 한 육조에게 법을 전하여 이것이 만세의 표준이 되었다. 신수가 아무리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서 천하에 그와 비교될 만한 이가 없었지만, 원증견성하지 못하여 망념이 계속 끊이지 않으므로 불법에는 문외한이다. 육조는 한 글자도 모르는 문맹이었지만, 번뇌를 다 끊어서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렸으므로 본성을 단박에 깨쳐서 깊은 경지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오조는 석학인 신수를 단연코 배제하고 무식한 육조에게 기꺼이 법을 전한 것이다.
후세에 박식한 신수의 법통은 오래지 않아 끊어지고 무식한 육조의 법손은 이어져서 천하를 풍미하고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다. 아무리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도 번뇌를 다 없애고 자성을 실제 깨치지 못하면 이는 생명이 없는 죽은 법이다. 그러나 한 글자도 몰라도 심성을 철저히 보아 해탈의 도를 성취하면 생명이 약동하는 크나 큰 산 법이 되는 것이다. 썩은 종자에 어찌 생명이 계속되겠는가. 그 법손이 단절됨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불법을 하려는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언어 문자로 많이 배우고 기억하는 죽은 법, 해오에 현혹되어 영원한 파멸을 자초하지 말고, 번뇌를 다 끊은 대해탈도, 원증으로써 살 길을 개척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불조의 마음등불을 밝혀서 법계를 비추어야 할 것이다. 죽은 법이 어떻게 사람을 살리겠는가. 정법의 사활이 여기에 달렸으니, 천만번 각성해야 된다.
불교의 목표는 성불하는 데 있다. 성불은 원증하여 견성하는 데 있고 원증견성은 망념을 없애 진여를 증득하는 구경무심에 있다. 원증견성에서 가장 큰 장애는 다문과 지해, 즉 해오이다. 설사 유래없는 박식함과 남다른 지해를 갖추었어도, 원증견성하지 못하면 망망한 업식의 바다에 빠진 중생이어서, 불법에는 눈뜬 봉사요 해탈도에는 역행이 된다. 이는 아난의 쫓겨남과 신수의 실격으로 보아 분명 역력하다.
밥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끝내 배부르지 않으니 그림의 떡이 어찌 배고픔을 채워주리오. 오직 실제 참구해서 실제 깨치는 데 있을 뿐이니, 부처와 조사의 공안을 마음을 다해 참구해서 남김없이 뚫어야 한다. 불조의 공안은 대적광삼매에서 나온 크고 묘한 기틀과 작용이다. 그러므로 무심무념 상적상조 원증견성 대원경지의 금강정안이 아니면 공안의 귀결처는 아득히 알 수 없으니, 사량분별로 공안을 헤아린다면 마치 반딧불로 산을 태우려는 격이다. 그러므로 한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져 7지에 이른 대혜(大慧)에게 “애석하도다! 죽기만 하고 다시 살아나지 못하니, 언구를 의심하지 않음이 커다란 병통이다”하면서 ‘유구무구 공안’으로 아픈 일침을 가한 것은 원오고불(圜悟古佛)의 바른 안목이다. 그러므로 오매항일(寤寐恒一)의 깊고 깊은 곳에 도달하였어도 공안을 뚫지 못한 것이니, 더한층 분발하여 자기가 참구하는 공안을 끝까지 구명해야만 크게 죽었다가 크게 살아나서 크게 쉬어버린 대해탈의 구경무심을 철저히 증득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 걸릴 것 없이 자유자재한 보임무심의 실천생활이 열리게 된다. 이는 돈증원증 후에 ‘한번 깨달음이 영원한 깨달음’이 되어 광겁을 어둡지 않은 금강대정의 불가사의한 경지이다. 따라서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없고 망념과 번뇌가 남아 있는 해오를 돈오니 견성이니 하고, 점점 망념을 없애는 허깨비 꿈인 생멸경계를 보임(保任)이니, 성태를 기름[長養聖胎]이니 함은, 마치 도적을 친자식으로 오인하고 섶을 안고 불을 끄려는 것처럼 크나큰 착오이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이를 미치광이의 견해 또는 마구니의 무리라고 통렬히 꾸짖었으니, 참으로 잘못을 부수고 바름을 드러내는 큰 자비이다.
대혜(大慧)가 앞뒤경계가 끊어져 자나깨나 한결같은 외래일여의 경지에서 홀연히 밝게 깨쳤어도, 원오(圜悟)는 “네가 공안을 뚫지 못하였을까 걱정이다”라고 하면서 깊고 현묘한 공안으로 여러차례 시험해 본 뒤에 임제의 바른 종지를 부촉하였다. 그러므로 번뇌를 다 끊고 무념무심하고 상적상조하여 원증견성한 대원경지를 성취하기까지는, 공안을 참구하여 관문을 뚫는 한길밖에 없으니, 이것이 원증견성하는 지름길이요 바른 길이다. 만일 이에 어긋나면 쫓겨나고 실격 당한 아난과 신수의 비극을 면치 못한다. ‘옴 오른 여우’로 천추에 한을 남기지 말고 이마 위에 바른 눈을 갖추어서 만세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17. 바른 안목을 가진 종사[正眼宗師]
馬大師下에 有八十八人이 坐道場하되 得馬師正眼者는 止三兩人이니 廬山和尙이 是其一人이니라. 夫出家人은 須知有上來事부이니 且如四祖下牛頭融大師가 橫說堅說하야도 猶未知上關棙子니 有此眼腦하야사 方辨得邪正이니다(黃檗希運 傳燈錄9) 大正藏 51-p.266 下
馬大師의 法下에 八十八人이 出世하야 道場에서 敎化하지마는, 馬師의 正眼을 證得한 者는 三兩人뿐이니 廬山和尙이 其中에 一人이다. 大抵 出家學道人은 從上來의 本分事가 있음을 明知하여야 한다. 四祖下의 牛頭山 法融大師가 佛法을 橫說竪說하지마는 究竟處인 向上關棙子는 모르니, 이것을 明見하는 眼腦가 있어야 비로소 邪와 正을 分辨할 수 있다.
마조대사 문하에 88명이 세상에 나와서 도량에 앉아 스승노릇을 하였지만 마대사의 바른 안목을 증득한 사람은 두세 사람뿐이니 여산(廬山)화상이 그 가운데 한 분이다.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옛부터 내려온 본분사(本分事)가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4조 문하의 우두산 법융(法融) 대사가 설법은 종횡무진으로 하지만 향상일로의 문빗장은 몰랐으니 이것을 분명히 보는 안목이 있어야 비로소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있다.
옛부터 종문에서 법제자가 많기로는 마조가 제일이라 한다. 80여명의 법제자가 천하에 터전을 잡고서 불법을 선양하였으니, 참으로 드문 일이다. 그러나 정안종사는 몇 사람뿐이었으니 바른 안목을 갖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황벽선사처럼 이렇게 옳고 그름과 깊고 얕음을 분명히 가려낼 수 있는 뛰어난 정안을 갖춰야만 비로소 종문의 씨앗이 되는 것이니,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
靈源淸이 常謂學者曰 宗門正人難得이니 自離晦堂以後로 所見眞正宗師는 唯東山法兄一人而已로다(雪堂 拾遺錄) 卍續 142-p.954 下
靈源淸이 항상 學道者에게 말하였다. 宗門에 正眼人을 얻기가 甚難하니 晦堂先師를 離別한 후로부터 相見한 眞正宗師는 唯獨 東山法兄(五祖法演) 一人뿐이다.
영원 청(靈源淸)이 항상 공부하는 사람에게 말하였다. “종문에서 바른 안목가진 이를 만나기가 매우 어렵다. 스승 회당노스님을 떠난 이후로 만났던 진정한 종사는 오직 동산(東山:오조법연)사형 한 사람뿐이다”
영원(靈源)은 황룡(黃龍)스님의 적손이요, 동산(東山)은 양기(楊岐)스님의 정맥이다. 성인이라야 성인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격으로, 동산스님의 바른 안목을 가려낼 수 있는 영원스님 또한 정안종사이다.
佛眼이 謂靈源曰 比見都下一尊宿하니 語句似有緣이로다. 靈源曰 演公은 天下第一等宗師어늘 何故로 捨而事遠遊오 所謂有緣者는 蓋知解之師라 與公初心相應이니라(續傳燈錄25) 大正藏 51-p.636 下
佛眼이 靈源에게 말하였다. 都下의 一尊宿을 參見하니 그 言句가 나에게 因緣이 있는 것 같다. 靈源이 말하기를 演公(五祖法演)은 天下第一等의 宗師이어늘 何故로 捨離하고 遠遊하는고. 所謂 因緣이 있다는 者는 대개가 知解邪師로서 公의 初心에 相應함이니라.
불안 원(佛眼遠)이 영원 청(靈源淸)에게 말하였다. “장안에서 요즘 큰스님 한분을 찾아 뵈었더니 그 말씀이 나에게 인연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영원이 말하였다. “연스님(5조 법연)은 천하 제일의 종사인데, 어찌하여 떠나와서 멀리 돌아다니는가? 그대가 인연이 있는 듯하다고 한 자는 아마도 알음알이나 내는 잘못된 스승으로 그대의 초발심에나 걸맞는 사람일 것이다”
백장스님은 “대보살들은 의지하지 않는다, 머물지 않는다 하는 생각도 짓지 않는다[不作不依任知解]”고 하였다. 자재위인 제8아뢰야에서의 무분별지도 알음알이[知解]로서 정안인이 아니라 하니 그 나머지는 물어볼 것도 없다. 불안은 영원스님의 지시에 따라 오조스님에게 다시 돌아가서 바르게 깨달아 법을 이었다.
大慧杲云 老南會下尊宿을 五祖는 只肯晦堂과 歸宗二老而已요 自餘는 皆不肯他也니라.(宗門武庫 上) 大正藏 47-p.951 下
大慧宗杲가 말했다. 黃龍南會下의 尊宿들을 五祖演은 다만 晦堂과 歸宗(眞淨) 二人만 肯定할 뿐이요 그 밖에는 모두 肯定하지 않았다.
대혜 종고(大慧宗杲)가 말하였다. “황룡 남(黃龍南) 회하의 큰스님들 가운데서, 오조 연(五祖演)은 오직 회당(晦堂)과 귀종(歸宗) 두 분만 긍정하였을 뿐, 그 밖에는 아무도 긍정하지 않았다”
황룡스님 문하의 회당(晦堂)과 귀종(歸宗)은 종문의 천리마이다.
大慧杲가 謂敎充光曰 今諸方이 浩浩說禪하되 其楊岐正傳은 三四人而已니라(續傳燈錄32) 大正藏 51-p.686 上
大慧가 敎忠에게 말했다. 只今 諸方에서 浩浩히 禪法을 廣說하지마는 그 楊岐의 正傳은 三四人뿐이다.
대혜(大慧)가 교충 광(敎忠光)에게 말하였다. “지금 총림에서는 선법을 거침없이 말하지만, 양기의 정맥을 이어받은 이는 서너 사람뿐이다”
세상에 나와서 법을 설한다고 모두가 정안종사는 아니다. 금과 모래가 섞여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뿐만 아니라, 진금은 참으로 드물다. 교충이 “양기정맥(楊岐正脈)을 이은 사람은 서너 사람뿐이다” 라는 말을 듣고 분노하였으나, 결국 마음을 돌이켜 대혜에게서 도를 얻어 법을 이었다.
應菴華가 住歸宗日에 大慧在梅陽이러니 有僧이 傳師垂示語句어늘 慧見之하고 極口稱歎하야 後以偈寄曰 坐斷金輪第一峯하니 千妖百怪盡潛이라 年來에 又得眞消息하니 報道楊岐正脈通이로다하야 其貴重이 如此니라(續傳燈錄31) 大正藏 51-p.679 中
應菴華가 歸宗에 出世하였을 때에 大慧는 梅楊에 있었다. 一僧이 應菴의 垂示語句를 傳하니 大慧가 極口稱歎하였다. 後日에 偈頌을 보내되, ‘金輪의 第一峯을 坐斷하니, 千妖百怪가 全部蹤跡을 潛匿했다. 年來에 또한 眞消息을 得聞하니, 楊岐의 正脈에 通達했음을 報道하더라’고 하니 그 貴重이 如此하니라.
응암 화(應菴華)가 귀종사에 출세하여 주지하고 있을 때 대혜(大慧)는 매양에 있었다. 어떤 스님이 응암이 수시(垂示)한 법문을 전하니 대혜가 극구 칭찬하고 뒷날 게송을 보냈다.
“금륜의 제일봉을 타고 앉으니, 백천요괴가 모두 자취를 감추는구나. 수년사이 또 참 소식을 듣게 되니 양기의 정맥에 통달했음을 알리는도다”고 하였으니, 그를 귀중히 여김이 이와 같았다.
응암스님은 호구(虎丘紹隆)스님의 적자(嫡子)이며, 대혜스님의 조카상좌이다. 송․원․명․청을 통하여 임제의 직계인 양기(楊岐)의 정맥은 응암의 법손이 유지하였으니, 대혜의 칭찬이 괜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차라리 온몸을 가루내어 지옥에 떨어질지언정, 인정때문에 불법을 팔지는 않겠다”라고 말한 대혜스님의 진면목이 이러하다.
黃龍南이 初參慈明하야 聞其貶剝諸方하되 而件件數以爲邪解者가 皆泐潭密付旨訣일새 氣索而歸하니라(續傳燈錄7) 大正藏 51-p.506 上
黃龍南이 처음으로 慈明에게 往參하여 그 諸方을 貶剝함을 들으매, 件件이 邪解라고 排斥하는 것이 擧皆泐潭이 密付한 旨訣이므로 氣索하여 歸還하니라.
황룡 남(黃龍南)이 처음 자명(慈明)을 찾아뵈었을 때, 그가 제방의 선지식을 비판하면서, 하나하나 삿된 견해라고 배척하는 것을 들으니, 모두가 늑담(泐潭)이 자기에게 은밀히 전수해준 비결이었으므로 기가 막혀 돌아와버렸다.
황룡 남은 임제종 황룡파의 개조다. 자명스님을 찾아 뵙기 이전에 늑담 징(泐潭澄)의 인가를 받고 득도했다고 자부하여 설법하고 학자를 지도하니, 그 이름이 제방에 진동하였다. 그후 운봉 열(雲峰悅)이 늑담을 인정하지 않자 화가 나서 목침으로 심하게 때렸지만, 번연히 마음을 싹 고쳐먹고 활연히 바로 깨달아서 임제의 정맥을 전하였으니, 도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백세의 귀감이다.
圜悟謂大慧杲曰 能有幾箇하야 得到你田地오 舊時에 只有璟上座하야 與你一般이러니 却已死了也로다(續傳燈錄27) 大正藏 51-p.650 上
圜悟가 大慧에게 말했다. 能히 몇 사람이나 그대의 田地에 到達하였는고. 예전에 다못 璟上座가 있어서 그대와 同一하더니 벌써 死去하였다.
원오가 대혜에게 말하였다. “몇 사람이나 그대의 경지에 도달했겠는가. 그대같은 이는 예전에 경(璟)상좌 하나뿐이었는데 벌써 죽어 버렸다.”
대혜스님이 20년 동안이나 거짓 선지식에게 잘못 지도 받아 삿된 길에서 방황하다가 다행히 원오스님같은 정안종사를 만나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 곳에 곧바로 들어갔다. 그는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이 승묘경계에서 활연히 크게 깨달으니, 원오가 이와 같이 칭찬한 것이다.
앞뒤가 끊긴 경지만 해도 오조 연(五祖演)스님이 “제방에서 지금 몇 사람이나 이 경지에 이르렀는가” 하였거늘, 앞뒤가 끊어진 곳을 초월한 구경무심지는 어려운 중에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크게 죽은 곳에서 활연히 크게 살아나지 못하면 종문정안이 아니니, 노력하고 더욱 노력해서 구경정각을 성취해야만 불조의 혜명을 잇는다.
先聖이 云 寧可破戒를 如須彌山이언정 不可被邪師의 薰一邪念하야 如芥子許도 在情識中이니 如油入麵하야 永不可出이니라(大慧書 上) 大正藏 47-p.922 中 大慧錄26
先聖이 말했다. 차라리 破戒하기를 須彌山같이 할지언정, 邪師에게 邪念으로 薰習되어 芥子만큼이라도 情識中에 侵入하여서는 아니된다. 食油가 麵中에 混入됨과 같아서 영원히 出離하지 못한다.
옛 성인이 말씀하셨다. “차라리 파계를 수미산처럼 할지언정 삿된 스승의 잘못된 한 생각에 물들어 겨자씨만큼이라도 알음알이에 떨어져서는 안된다. 마치 기름이 국수에 섞여들 듯하여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나쁜 지식이나 삿된 견해의 피해가 이처럼 두렵다. 스승을 잘못 만나서 삿된 길로 인도되면 이것이 고질화된다. 이런 이는 비록 바른 스승을 만나도 삿된 견해에 가려져 바른 길을 분간치 못하여 삿된 견해를 영영 포기하지 못하고, 결국은 삿된 마구니나 외도가 되고 만다. 종문정안이 되기란 이와 같이 극히 어렵지만, 5가7종의 정통 법맥을 이은 사람중에는 매우 깊고 현묘한 구경무심을 증득하지 않고서 종사를 자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자나깨나 한결같아서 안팎이 환히 밝으며, 무심무념하고 상적상조하며 밝음과 어둠이 상통하는 크게 쉬어버린 곳, 곧 무상대열반을 실제로 증득해야만 소림의 법을 정통으로 잇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18. 정(正)과 편(偏)의 현묘한 도리[玄要正偏]
問 如何是臨濟下事오 師云 五逆이 聞雷니라 如何是雲門下事오 云 紅旗閃爍이니라 如何是曹洞下事오 云 馳書不到家니라 如何是潙仰下事오 云 斷碑橫古路니라 僧이 禮拜어늘 師云何問法眼下事오 僧이 云 留與和尙이니다 師云 巡人이 犯夜니라하고 乃云 會則事同一家요 不會則萬別千差로다(法演錄 上) 大正藏 47-p.655 下
묻기를, 어떤 것이 臨濟下의 法事오. 師가 답하되, 五逆이 雷聲을 聞하느니라.
어떤 것이 雲門下의 法事오. 답하되, 紅旗가 閃爍하도다.
어떤 것이 曹洞下의 法事오. 답하되, 馳書에 到家치 못하니라.
어떤 것이 潙仰下의 法事오. 답하되, 斷碑가 古路에 橫身하니라.
僧이 禮拜하거늘 師云 무슨 일로 法眼下事를 묻지 않는고. 僧云 殘留하여 和尙께 드립니다. 師云 巡人이 犯夜하니라 하고 이에 말하되, 會悟하면 法事가 一家와 同一하고 會悟치 못하면 萬別과 千差로다.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임제 문하의 일입니까?” 스님(법연)이 대답하였다. “오역죄인이 우레소리를 듣는다” “어떤 것이 운문 문하의 일입니까?” “붉은 깃발이 번쩍인다” “어떤 것이 조동 문하의 일입니까?” “급히 소식을 보냈으나 집에 닿지 않았다.” “어떤 것이 위앙 문하의 일입니까?” “동강난 비석이 옛길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그 스님이 절을 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법안 문하의 일은 묻지 않는가?” “스님께 남겨 드립니다” 스님께서 “야경꾼이 밤도둑이 되었다” 하고 말씀을 이으셨다. “깨치면 한 집안 법이요 못 깨치면 천차만별이다.”
若是 石頭馬師와 百丈黃檗과 臨濟雲門과 玄沙岩頭와 法眼潙仰曹洞之流는 皆是向上宗師니라(圜悟錄9) 大正藏 47-p.753 上
이와 같이 石頭․馬師와 百丈․黃檗과 臨濟․雲門과 玄沙․岩頭와 法眼․潙仰․曹洞의 等流는 全部 向上宗師니라.
이와 같이 석두․마조와 백장․황벽과 임제․운문과 현사․암두와 법안․위앙․조동같은 이들은 모두가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종사들이다.
不問雲門下 臨濟下하며 法眼下潙仰下하고 大法을 若未明하면 各宗其宗하고 各師其師니라(大慧錄15) 大正藏 47-p.876 上
雲門下와 臨濟下와 曹洞下와 法眼下와 潙仰下를 不問하고, 大法을 明徹치 못하면 各各 그 宗을 宗崇하고 各各 그 師를 師仰하느니라.
운문, 임제, 조동, 법안, 위앙 그 어느 문하를 막론하고 큰 법을 철저히 밝히지 못하면 각각 자기 종만 제일인 줄 알고 각각 자기 스승만을 받든다.
山僧이 在衆日에 潙仰曹洞과 雲門法眼下에 都去做工夫來하고 臨濟下則故是니 後來에 方知道하되 悟則事同一家요 不悟則萬別千差니라(大慧錄18) 大正藏 47-p.887 下
山僧이 大衆에 있을 때에 潙仰曹洞과 雲門法眼의 會下에서 두루 工夫하고 臨濟下에는 未參하였더니, 後來에 廓徹하여 會悟하면 法事가 一家와 同一하고 會悟치 못하면 萬別千差라 함을 明知하니라.
“내가 대중생활을 할 때 위앙 조동과 운문․법안의 회하에서 두루 공부하고 임제 문하에서만은 아직 공부해보지 않았다가 뒷날에 와서야 깨치면 한 집안 법이요, 못 깨치면 천차만별이다” 하신 말씀을 비로소 알았다.
법연․원오․대혜 3대는 임제의 중흥조로서 뛰어난 정안종사다. 임제․운문․조동․위앙․법안 등 5가의 종사가 모두 마조․백장과 같은 향상의 대조사로 다섯 가풍이 똑같은데, 만약 여기서 우열이나 심천을 따진다면 이는 큰 법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므로 큰 법을 확철히 깨달아 ‘한 집안 법’인 옛 사람의 마음자리에 도달해야만 5가의 종사와 5가의 종풍을 바로 볼 수 있다.
隨處作主하고 遇緣卽宗하야 展臨濟三玄戈甲하고 會曹洞五位君臣하야 敲唱雙行하며 殺活自在로다(應菴錄6) 卍續 120-p.848 上
處所를 따라 主宰를 짓고 因緣을 만나 宗風을 세워 臨濟의 三玄戈甲을 展開하고, 曹洞의 五位君臣을 會合하여 敲唱이 雙行하여 殺活이 自在하도다.
어딜 가나 주인이 되고 인연 만나는 대로 종풍을 세운다. 임제(臨濟)의 삼현 군대를 펼치고 조동(曹洞)의 오위군신을 모으니 박자 맞추어 노래하면서 죽이고 살림이 자재하다.
禪禪이여 曹洞五位와 臨濟三玄이로다(應菴錄6) 卍續 120-p.848 下
禪禪이여, 曹洞의 五位와 臨濟의 三玄이로다.
선, 선이여! 조동의 오위이고 임제의 삼현이로다.
以拂子로 擊一下하고 三玄三要로다 又擊一下하고 五位君臣이로다 又擊一下하고 一鏃破三關하니 分明箭後路로다 又擊一下하고 三界唯心이요 萬法唯識이로다 又擊一下하고 線去線來하야 明暗이 相投로다하니라(雪岩錄2) 卍續 122-p.522 上
拂子로써 法床을 一擊하고 말하되 臨濟의 三玄三要로다. 또 一擊하고 曹洞의 五位君臣이로다. 또 一擊하고 雲門의 一鏃으로 三關을 破碎하니 分明한 箭後路로다. 또 一擊하고 法眼의 三界唯心이요 萬法唯識이로다. 또 一擊하고 潙仰의 線去하고 線來하여 明暗이 相投로다 하니라.
불자(拂子)로 법상을 한 번 내리치고 말하였다. “임제의 삼현삼요로다” 또 한 번 치고 말하였다. “조동의 오위군신이로다” 또 한 번 치고 말하였다. “운문의 한 화살이 세 관문을 부수니 화살 날아간 길이 분명하도다” 또 한 번 치고 말하였다. “법안의 삼계유심, 만법유식이로다” 또 한 번 치고 말하였다. “위앙의 실이 면면히 이어져서 밝음과 어둠이 서로 합하는도다.”
임제의 정맥인 응암과 설암도 5종에 우열과 심천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보이었으니, 정안종사에게는 두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없다.
五家者는 乃五家其人이요 非五家其道也니라 頻迦藏經 9-p.53 後
如潙仰之謹嚴과 曹洞之細密과 臨濟之痛快와 雲門之高古와 法眼之簡明은 各出其天性而父子之間에 不失故步하여 語言機境이 似相踏習은 要皆不期然而然也라 今之禪流가 泥乎宗旨而起夾截虛空之妄見하야 互相長短하니 余知五家之師가 於大寂定中에 莫不掩鼻로다(中峯錄11 之上) 頻迦藏經 9-p.54 前
五家라 함은 其人이 五家各異함이요 其道가 五家各異함이 아니다. 潙仰의 謹嚴과 曹洞의 細密과 臨濟의 痛快와 雲門의 高古와 法眼의 簡明함은 各各 그 天性에서 나왔으니, 父子間에 故步를 不失하여 語言과 機境이 相互踏習함과 相似함은 要컨대 期必치 않은 當然이다. 只今의 禪流들이 各 宗旨에 泥蔽되어 虛空을 夾截하는 妄見을 起하여 長短을 相互 云謂하니, 五宗의 祖師들이 大寂定中에서 掩鼻치 않을 수 없음을 余는 明知하는도다.
다섯 가문이라 하지만 인맥이 다르다는 것이지 도가 다르다는 것은 아니다.
위앙의 근엄함, 조동의 세밀함, 임제의 통쾌함, 운문의 옛스럽고 고고함, 법안의 간명함은 각각 그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부자간에 옛 발자취를 잃지 않고 말과 경계가 비슷하게 이어짐은 요컨대 의도하지 않았어도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의 참선하는 사람이 각각의 종지에 뒤덮여 가위로 허공을 자르는 망견을 일으켜 기니 짧으니 하니, 5가의 조사들이 대적정 가운데서 코를 틀어막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겠구나.
5가의 우열과 장단을 함부로 논함은 예나 지금이나 큰 법을 깨치지 못한 눈먼 장님들의 공통되는 병이다. 그러므로 정안종사들은 이를 통탄하고 깊이 경계하였으니, 중봉의 법을 이은 천여도 그의 「종승요의:천여록 9」에서 5종의 우열과 심천을 함부로 논함은 착각 중의 착각이라고 상세히 반박하였다.
一句語에 須具三玄門이요 一玄門에 須具三要니라(臨濟錄) 大正藏 47-p.497 上
一句中에 必須히 三玄門을 具備하고 一玄門에 必須히 三要를 具備할지니라.
한 구절[一句] 속에 반드시 삼현문(三玄門)을 갖추고, 일현문에 반드시 삼요(三要)를 갖추어야 한다.
一句中에 有三玄三要하야 賓主歷然하면 平生事辦이요 參尋事畢이니 所以로 永嘉云 粉骨碎身未足酬니 一句了然超百億이라하니라(汾陽錄 上) 大正藏 47-p.598 下
一句中에 三玄三要가 具有하여 賓主가 歷然하면 平生事를 了辦하고 參尋事를 終畢하나니, 그러므로 永嘉가 이르되 粉骨碎身하여도 未足酬니 一句가 了然히 百億을 초월한다고 하니라.
한 구절 속에 삼현삼요가 다 있어서 손과 주인이 분명하면, 한평생의 일을 끝내고 참구하던 일을 마친다. 그러므로 영가(永嘉)가 말하였다. “뼈가 가루되고 몸이 부서져도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으니, 한 구절에 분명히 백억 법문을 뛰어넘도다”
三玄三要事難分이여 得意忘言道易親이라 一句明明該萬象하니 重陽九月에 菊花新이로다(汾陽錄 上) 大正藏 47-p.957 中
三玄三要의 事理를 分別하기 極難함이여, 意旨를 悟得하고 語言을 忘却하면 大道에 親合하기 容易하니라. 一句가 明明히 萬象을 總該하니 重陽九月에 菊花가 嶄新하도다.
삼현삼요의 사리를 분별하기 극히 어려움이여, 뜻을 깨달아 말을 잊어야 큰 도에 나아가기 쉽도다. 밝고 밝은 한 구절 만상을 다 갖추니, 9월 9일에 국화꽃이 새롭구나.
報汝通玄士하노니 棒喝을 要臨時니라 若明親的旨면 半夜에 太陽暉로다(慈明錄 三玄三要都頌)
汝等의 通玄한 高士들에게 報告하노니 棒喝을 臨時하여 要用할지니라. 만약에 親的한 深旨를 明得하면 半夜에 太陽이 暉煌하도다.
현묘한 뜻을 통달한 그대에게 알리노니, 방과 할을 상황따라 맞추어 긴요하게 사용하라. 만약 확실하고 깊은 뜻을 밝히면 한 밤중에 태양이 밝게 빛나리.
臨濟下에 有三玄三要하야 凡一句中에 須具三玄하고 一玄門에도 須具三要니라(碧岩錄 38則) 大正藏 48-p.177 上
臨濟宗下에 三玄三要가 있어서 一句中에 三玄이 必具하고 一玄中에 三要를 必具니라.
임제종 문하에 3현3요(三玄三要)가 있으니 한 구절 속에 3현이 반드시 갖추어져 있고 일현문 속에 반드시 3요를 갖추고 있다.
一句中에 具三玄門하고 一玄門에 具三要路니라(大慧錄8) 大正藏 47-p.841 下
一句中에 三玄門이 具足하고 一玄門에 三要路가 具備하니라.
한 구절 속에 3현문이 갖추어져 있고 일현문에 3요길이 갖추어져 있다.
豁開三玄三要路하니 坐斷須彌第一峯이로다(大慧錄9) 大正藏 47-p.848 下
三玄三要의 大路를 豁開하니 須彌의 第一峯을 坐斷하도다.
삼현삼요의 큰 길을 활짝 열어 젖히니, 수미산 제일봉에 눌러 앉았다.
3현3요는 임제종풍인 대기대용의 골수이므로 수시(垂示)하는 법어에 3현3요가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정안종사가 아니다. 종종 눈먼 납승들이 “일구 속에 3현이 있고 일현 속에 3요가 갖추어져 있다”는 이 전기대용(全機大用)을, 깨달아 들어가는 차례나 혹은 법문에 깊고 얕은 정도가 있다는 것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僧問五祖하되 如何是佛고 祖云露○跣足이니라 如何是法고 云 大赦不放이니라 如何是僧고 云釣漁船上謝三郞이라하니 此三轉語에 一轉이 具三玄三要와 四料簡四賓主와 洞山五位와 雲門三句니라(大慧錄8) 大正藏 47-p.842 下
僧이 五祖法演에게 묻기를 如何是佛고. 祖云 露○하고 跣足이니라. 如何是法고. 祖云 大赦하되 不放이니라. 如何是僧고. 祖云 釣漁船上의 謝三郞이니라 하니, 此三轉語가 一轉語마다 各各 三玄三要와 四料簡과 四賓主와 洞山五位와 雲門三句를 具備하니라.
한 스님이 오조 법연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오조가 대답하였다. “가슴은 드러내고 발은 벗었다” “어떤 것이 법입니까?” “대사면을 내리되 놓아주지 않는다”
“어떤 것이 스님입니까?” “낚싯배 위에 사씨네 셋째 아들이다”
이 세 마디[三轉語]에서 한 마디[一轉語]마다 각각 3현3요와 4료간과 사빈주와 동산의 5위와 운문의 3구를 갖추고 있다.
濟北之道는 出乎常情하야 語黙動靜에 脫體全彰하니 三玄三要는 松直棘曲이요 四賓四主는 鳧短鶴長이니라(雪岩錄1) 卍續 122-p.489 下
濟北의 道는 常情을 超出하여 語黙動靜에 脫體全彰하니, 三玄三要는 松直棘曲이요. 四賓四主는 鳧短鶴長이니라.
임제의 도는 범정을 초월해서 말하거나 조용하거나 움직이거나 가만 있거나 간에 그 전체가 드러난다. 3현3요여, 소나무는 곧고 가시나무는 굽었고, 4빈4주여, 오리다리는 짧고 학다리는 길도다.
當知遮一句子는 便是金剛圈이며 栗棘逢이니 一句中에 具三玄하고 一玄中에 具三要니라 卍續 122-p.536 下
狗子還有佛性也無아 只遮無字는 是三玄三要之戈甲이요 四賓四主之喉衿이니라(雪岩錄4) 卍續 122-p.561 上
當知하라, 遮一句子는 문득 이 金剛圈이며 栗棘逢이니 一句中에 三玄을 具備하고 一玄中에 三要가 具足하니라. 狗子가 佛性이 있는가 없는가. 다못 이 無字는 三玄三要의 戈甲이요 四賓四主의 喉衿이니라.
이 한 구절이 바로 금강의 올가미이며 밤숭어리인 줄을 알아야 하니 한 구절 속에 3현을 갖추고 일현 속에 3요를 갖추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에서 ‘없다함[無]’은 3현3요의 무기[戈甲]이며 4빈4주의 옷깃[喉衿:강령]이다.
어느 종파를 막론하고 정안종사가 드러내 보인 법어는 임제의 삼현뿐 아니라 동산의 오위와 운문의 삼구를 빠짐없이 갖추었으니, 진실로 한 구절이 분명히 백억법문을 뛰어 넘는 것이며, 수미산 제일봉에 눌러 앉는 것이다.
先師本意는 不爲明功進修之位와 兼涉敎句요 直是格外玄談이라 要絶妙旨니라(曹山五位顯訣) 卍續 111-p.231 下
先師의 本意는 功勳을 밝혀 進修하는 位次와 敎句를 兼涉함을 위함이 아니요, 直是 格外의 玄談이라 要絶한 妙旨니라.
우리 스님의 본 뜻은 공부에 닦아 나아가는 지위와 교가의 언구를 섭렵함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격식 밖의 현묘한 말씀이며 요긴하고 절묘한 뜻이다.
洞山下는 五位回互하야 正偏接人하니 不妨奇特이라 到這上境界하야사 方能如此로다 洞山이 道하되 何不無寒暑處去오하니 此是 偏中正이요 僧云 如何是無寒暑處오 山云 寒時엔 寒殺 梨하고 熱時엔 熱殺闍梨라하니 此是 正中偏이나 雖正却偏하고 雖正却正이니 浮山遠錄公이 以此公案으로 爲五位之格이니라(碧岩錄43) 大正藏 48-p.180 上
洞山下는 五位가 回互하여 正偏으로 接人하니 참으로 奇特하니라. 這向上境界에 도달하여야 비로소 能히 如此하도다. 洞山이 이르되 어찌 寒暑가 없는 곳을 向하여 가지 않는고 하니 이는 偏中正이요, 僧이 이르되 어떤 것이 無寒暑處오. 山이 云 寒時에는 闍梨를 寒冷케 하고 熱時에는 闍梨를 熱炎케 한다 하니, 이는 正中偏이라 雖正이나 却偏하고 雖偏이나 却正하나니 浮山遠錄公이 이 公案으로써 五位의 標格으로 삼았느니라.
동산(洞山) 문하는 5위가 서로 돌이켜서 바름[正]과 치우침[偏]으로 납자를 지도하니, 참으로 훌륭하다. 이 향상의 경계에 도달해야 비로소 이와 같을 수 있다.
동산이 한 스님에게 “어째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는가?” 하니 이는 치우침 속의 바름[偏中正]이다. 그 스님이 “어떤 것이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입니까?” 하여 동산이 추울 때는 “그대를 춥게 하고 더울 때는 그대를 덥게 한다” 하니 이는 바름 속의 치우침[正中偏]이다. 바르면서도 한편 치우치고 치우치면서도 한편 바르니, 부산 원(浮山遠)스님이 이 공안을 오위의 표준으로 삼았다.
正中偏 偏中正과 正中來와 兼中至 兼中到는 只是一位니 一位中에 藏五位니라(雪岩錄3) 卍續 122-p.554 下
正中偏 偏中正과 正中來와 兼中至 兼中到의 五位는 只是一位니 一位中에 各各 五位를 具藏하니라.
정중편․편중정․정중래․겸중지․겸중도의 다섯 지위는 다만 한 지위니, 한 지위 가운데 각각 다섯 지위를 간직하였다.
雲門은 尋常一句中에 須具三句하니 謂函盖乾坤句며 隨波逐浪句요 截斷衆流句니 放去收來야 不妨奇特이니라(碧岩錄 50則) 大正藏 48-p.154 下
雲門은 尋常 一句中에 必須히 三句를 具備하니 乾坤을 函盖하는 句요, 隨波하며 逐浪하는 句요, 衆流를 截斷하는 句니 放去하며 收來하여 實로 奇特하니라.
운문은 보통 한 구절 가운데 반드시 세 구절을 갖추었다. 하늘땅을 덮는 구절[函盖乾坤句]과 파도를 따르고 물결을 쫓는 구절[隨波逐浪截]과 뭇 흐름을 끊어버리는 구절[截斷衆流句]이니, 놓아 보내고 거두어들임이 훌륭하다 하겠다.
임제의 3현3요만 일구 가운데 다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동산의 5위도 일위 속에 다 갖추었고, 운문의 3구도 일구 속에 다 갖추어져 있다. 정안종사의 기틀과 활용은 죽이고 살림과 놓아주고 빼앗음과 밝고 어둠과 거두고 놓아줌이 걸림없이 자재하니 불조의 명맥인 이 전기대용(全機大用)을, 법문의 깊고 얕음이나 혹은 깨달아 들어가는 단계에다 배정함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三玄三要와 四料簡 四賓主와 金剛寶王과 踞地師子와 一喝不作一喝用과 ○竿影草와 一喝分賓主와 照用一時行의 許多絡索을 多少學家가 搏量註解하니 殊不知我王庫內엔 無如是刀이니라 及弄將來하면 看底只是貶眼이로다 須他上流는 契證驗認에 正按旁提하야 還本分草料어니 하梯媒리오(圜悟心要 上) 示杲書記 卍續 120-p.707 下
三玄三要와 四料簡 四賓主와 金剛王寶劒과 踞地師子와 一喝不作一喝用과 ○竿影草와 一喝分賓主와 照用一時行의 許多한 絡索을 多少學家가 搏量으로 註解하니, 我王庫中에는 如是刀가 本無함을 不知하는지라 弄將弄來하면 看觀하는 者가 只是貶眼하는도다. 저 超群上流는 契證하고 驗認할새 正按하고 旁提여야 本分草料만 쓰거니 어찌 梯媒를 假借하리오.
삼현삼요, 사료간․사빈주, 금강왕의 보배칼, 땅에 웅크린 사자, 한 할은 한 할로서의 작용을 하지 못함, 고기 탐색하는 장대와 풀그림자, 한마디 할에 손과 주인을 나눔, 비춤과 작용을 한꺼번에 행함 등의 많은 얽힌 뜻들을 많은 학인들이 얕은 헤아림으로 풀이를 하니 ‘나의 왕궁 창고에는 이런 칼이 본래 없다’함을 까胴게 모르는 것이다. 이리저리 희롱해보이면 보는 자들이 눈만 깜짝거릴 뿐이다. 저 뛰어난 부류들은 계합하여 증득하고 시험하여 인정함에, 정면으로 어루만지고 옆으로 이끌어서 본분의 수단만을 쓰거니, 어찌 차제의 사다리를 빌리겠는가.
삼현삼요 내지는 비춤과 작용을 한꺼번에 행함 등의 전기대용도 눈 속에 모래를 뿌리는 격이요, 평지에서 자빠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깊고 현묘한 법도 단박에 내던져 버리고 새장과 둥지를 벗어나야만, 부처와 조사를 죽이고 살리며, 종파를 뛰어넘는 뛰어난 정안조사이다.
19. 부처종자를 없앰[銷滅佛種]
世界衆生이 雖則身心에 無殺盜殺하야 三行이 已圓하야도 若大妄語하면 卽三摩地에 不得淸淨하야 成愛見魔하야 失如來種하나니 所謂未得謂得하며 未證言證이니라 或求世間의 尊勝第一하야 謂前人言하되 我今已得果라하야 求彼禮懺하며 貪其供養하나니라 是一餞迦는 銷滅佛種하되 如人이 以刀로 斷多羅木하야 佛記是人은 永殞善根이니 無復知見하야 沈三苦海하야 不成三昧하나니 若不斷其妄語者는 如刻糞爲栴檀形하야 欲求香氣하나 無有是處니라 我敎比丘하되 直心이 道場이니 於四儀一切行中에 尙無虛假어니 云何自稱上人法이리오 譬如窮人이 妄號帝王하야 自取誅滅이니 况復法王을 如何妄竊이리오(楞嚴經 卷6) 大正藏 19-p.132 中
世界의 衆生이 비록 身心에 殺生 偸盜 邪婬이 없어서 三行이 이미 圓滿하여도, 만약에 大妄語를 하며는 곧 三摩地에 청정하지 못하며 愛見魔를 성취하여 如來의 聖種을 忘失하나니, 所謂 得道하지 못하고 得道하였다 하며 證悟하지 못하고 證悟하였다 함이니라. 혹은 世間의 尊勝第一을 求하여 衆人에게 말하되, 내가 이미 道果를 證得하였다 하여 그들의 禮懺을 求하며 그 供養을 貪하느니라. 이 一顚迦는 佛種을 銷滅하되 사람이 利刀로써 多羅木을 斷絶함과 같아서 부처님이 이 사람은 善根을 永永히 殞亡한다고 授記하니 다시는 正見이 없어서 三途苦海에 沈淪하여 三昧를 성취 못하느니라. 만약에 그 大妄語를 斷絶하지 못하는 者는 糞塊를 彫刻하여 栴檀의 形狀을 만듬과 같아서 香氣를 求하고자 하나 끝내 얻지 못하느니라. 내가 比丘들에게 正直한 眞心이 道場임을 가르쳤나니, 行住坐臥의 四威儀인 一切行動 가운데도 오히려 虛僞와 假作이 없어야 하거늘, 어찌 上人法을 證得하였다고 自稱하리오. 비유하건대, 貧窮한 賤人이 帝王이라고 망녕되이 號稱하여 스스로 誅滅을 取함과 같으니, 하물며 大法의 聖王을 어찌 망녕되이 竊稱하리오.
세계의 중생이 몸과 마음으로 살생과 도둑질과 음행을 하지 않아서,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이 세 가지 행이 완전해졌어도 만약 큰 거짓말을 하면 삼매가 청정하지 못하며 애견(愛見)의 마구니가 되어 여래의 거룩한 종자를 잃어버린다. 거짓말이란 득도하지 못하고서 득도했다 하고 깨치지 못하고서 깨쳤다 함이다.
이런 사람중에 더러는 세상에서 제일로 존경받고 싶은 마음에서 사람들에게 “나는 이미 도과를 증득했노라”하면서 그들이 자기 앞에 와서 절하고 참회하기를 바라며 공양받기를 탐한다. 이 일천제는 날카로운 칼로 다라나무를 자르듯 부처 종자를 없애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런 사람은 선근을 영원히 죽여 없애 바른 지견이라고는 없어서 삼악도의 고통 바다에 빠져 삼매를 성취하지 못한다고 예언하셨다.
그 큰 거짓말을 그만 두지 못하는 자는 마치 똥덩이를 깎아서 전단향불상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향기를 구하려 하나 끝내 되지 않는다.
내가 비구들에게 정직한 마음이 도량이라고 가르쳤으니, 걷고 서고 앉고 눕고 무슨 행동을 하든지 간에 허위와 거짓이 없어야 하거늘, 어찌 스스로 으뜸가는 법을 깨쳤다고 자칭하겠는가. 비유컨대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함부로 제왕을 자칭하다가 목 베임을 자초하는 것과 같으니, 하물며 대법의 왕을 사칭하겠는가.
명예를 탐내고 이익을 좋아함은 도를 닦는 데 첫째 장애이다. 수도하는 사람이 꿈같고 허깨비같고 헛꽃같은 헛된 명예와 이익을 탐착하여 도를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고 하거나 깨치지 못하고서 깨쳤다고 하는 대망어죄를 범하면 자기를 파멸하고 부처종자를 끊어버림으로써 불법에 있어서 큰 악마가 되는 것이니 큰 거짓말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러므로 오매일여, 내외명철, 무념무생, 상적상조하는 구경무심을 철저히 깨치기 전에는 결코 득도했다거나 견성했다고 할 수 없다. 만약 명리를 위하여 최후의 실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서 득도와 견성을 사칭하여 세상 사람들을 현혹하면, 이는 부처와 조사의 혜명을 끊어 위 없는 정법에 영원한 반역이 되니 부디 경책하고 조심하여 이런 큰 거짓말을 하는 죄인이나 애견마의 무리가 되어 파멸을 자초해서는 안된다.
近代之人이 多所慢易하야 叢林에 雖入하나 懶慕參究하며 縱成留心하야도 不擇宗匠하야 邪師過謬하야 同失指歸라 未了根塵하고 輒有邪解하야 入他魔界하야 全失正因이로다 但知急務住持하며 濫稱知識하야 且貴虛名住世어니 寧論襲惡於身이리오 不惟聾瞽後人이요 抑亦凋弊風敎로다 登法王高廣之座론 寧臥鐵床이요 受純陀最後之羞로는 乍飮銅汁이어다 大須戰慄하야 無宜自安이니 謗大乘愆은 非小罪報니라(法眼 十規論) 卍續 110-p.878 上
近來에는 오만하고 경솔한 者가 많아서 비록 叢林에 들어오나 參究에 懶怠하며 大道에 留心하여도 正眼宗匠을 선택하지 않아서 邪師가 잘못 敎導하여 같이 指向과 歸就를 亡失하는지라, 六根六塵도 了脫치 못하고 문득 邪解를 가져서 魔界에 誤人하여 正因을 전부 破滅하는도다. 그리하여 다만 住持(方丈)에만 急急하여 猥濫되이 善知識이라 詐稱하며, 또한 世上의 虛名만 貴重히 여기거니 어찌 罪惡이 自身에 來襲함을 알리오. 이는 後人을 聾瞽할 뿐 아니라 또한 風敎를 凋弊하는도다. 法王의 高廣寶座에 오르는 것보다 차라리 熱鐵火床에 누울 것이요, 純陀의 최후 珍羞를 받는 것보다는 잠시 赤鎔銅汁을 마실지어다. 크게 恐懼戰慄하여 마땅히 自安하지 말지니 大法을 비방한 허물은 些少한 罪報가 아니니라.
근래에는 오만하고 경솔한 자가 많아서 총림에 들어오긴 했으나 참구에 태만하며 설령 큰 도에 마음을 두었어도 바른 안목 가진 종사를 선택하지 않아서 잘못된 스승의 지도를 받아 둘다 어디로 어떻게 나가야 할지를 모른다.
6근 6진도 다 벗어나지 못하고 잘못된 견해를 가져 저 마구니 경계에 잘못 들어가 바른 인연[正因]을 모두 잃어버린다. 주지(방장)자리에만 급급하여 함부로 선지식이라 사칭하고 세상의 허명만 귀중히 여기니, 어찌 죄악이 자기몸에 다가옴만을 논하겠는가. 이는 뒷사람을 눈멀고 귀먹게 할 뿐 아니라 교풍을 쇠퇴케 하는 것이다. 법왕의 높고 넓은 보좌에 오르는 것보다 차라리 벌겋게 달군 쇠 침상에 누울 것이며, 순타의 마지막 공양을 받는 것보다 잠시 뜨겁게 끓는 구리물을 마실 것이다. 반드시 크게 두려운 마음을 내어 안일하지 말지니, 대승법을 비방하는 죄의 과보가 작지 않느니라.
대법안 선사는 「종문십규론」의 첫머리인 ‘마음 자리를 밝히지 못하고서 함부로 남의 스승이 됨’에서 이렇게 통절히 꾸짖었으니 진실로 만고의 귀감이다. 부질없는 명리에 두 눈이 가리워 실지로 깨닫고 증득하지 못하고서 사악한 지견으로 후학을 파멸시키고 자신도 망하는 사람은 옛부터 수없이 많으니, 참으로 크게 탄식할 일이다. 명리를 독화살보듯 피하고 철석같은 신심으로 용맹정진하지 않으면 대도는 성취할 수 없다.
豈不見가 敎中에 道하되 未得謂得은 是增上慢이라 謗大般若니 不通懺悔니라 譬如窮人이 妄號帝王타가 自取誅滅이니 況復法王을 如何妄竊이리오(大慧錄13) 大正藏 47-p.863 下
어찌 보지 못하였는가. 敎中에서 말씀하셨다. 得道하지 못하고 得道하였다 함은 增上慢인지라 大般若를 비방함이니 懺悔로도 통하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貧窮한 賤人이 帝王이라고 妄稱하다가 誅滅을 自取함과 같나니 하물며 大法王을 어찌 妄竊하리오.
보지 못했는가. 경전에 말하기를 “득도하지 못하고서 득도하였다 함은 증상만(增上慢)이다. 이는 대반야를 비방하는 것으로서 참회해도 소용없다. 비유하건대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제왕이라고 함부로 자칭하다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같으니, 하물며 어찌 대법의 왕을 함부로 사칭하리오”
가난한 사람이 제왕을 사칭하면 자기 한 몸만 죽지만 득도했다고 속여 법왕(法王)을 사칭해서 수많은 중생을 속여 잘못된 길로 안내하면 그 죄상은 천 부처님이 출현해도 용서받지 못한다.
殺父殺母는 猶通懺悔어니와 謗大般若는 誠難懺悔니라(大法眼 從容錄4) 大正藏 48-p.267 中
父母를 殺害한 大逆重罪는 오히려 참회할 수 있으나, 大般若를 비방한 罪는 참으로 참회하기 極難하다.
부모를 살해한 대역중죄는 오히려 참회할 수 있으나 대반야를 비방한 죄는 참으로 참회하기 어렵다.
득도했다고 거짓말하여 반야를 비방한 죄는 이처럼 극히 무거우니, 지옥을 천만 번 갈지언정 득도했다고 거짓말해서는 안된다.
其實參實悟之士는 不惟鮮遇於今日이요 在往昔하야도 亦未嘗多見也니라(中峯錄18 之上) 頻迦藏經 9-p.56 前
그 如實히 參究하여 實地로 悟達한 道人은 今日에만 相逢하기 드문 것이 아니요, 往昔에 있어서도 또한 일찍이 多數를 볼 수 없느니라.
여실히 참구하여 실지로 깨달은 도인은 오늘에만 만나기 드문 것이 아니고 옛날에도 많이는 볼 수 없었다.
실지로 참구하고 실지로 깨쳐서 구경무심을 원증함은 고금을 통하여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뒷사람 중에도 얻는 이를 어찌 다 헤아리랴”고 영가스님이 「증도가」에서 말했듯이 부처님과 조사스님들 이래로 무수한 정안종사가 계속 나와서 정법을 천하에 폈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저 사람이 대장부라면 나도 대장부”라 하였으니 자신감을 갖고 용맹정진하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한 번 뛰어 바로 여래의 지위에 드는 것이다. 참으로 하지 않을 뿐,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단, 득도하지 못하고서 득도했다고 말하는 것만은 절대 금물이다.
苟無其實則不異離形而論影하며 捨栗帛而議衣食이니 言說愈多而實効愈遠이요 心機愈密而大用이 愈乖요 攀緣愈熾而正因이 愈廢矣니라 使函棄之하면 猶有可禦之方이어니와 或流而忘返則 不至泥犂면 不已也니라(中峯廣錄11 下) 頻迦藏經 9-p.61 後
萬一에 實地로 悟達함이 없으면 形體를 捨離하고 影像을 論議하며 栗帛을 棄捨하고 衣食을 論議함과 差異가 없다. 그러므로 言語說明이 數多할수록 그 實効는 더욱더 遙遠하고, 心識機能이 細密할수록 그 大用은 더욱더 乖戾하며, 攀緣이 熾盛할수록 그 正因은 더욱더 荒廢된다. 早速히 이것을 버리면 오히려 防禦하는 방법이 되지마는, 혹 流去하여 돌아옴을 忘却하면 地獄에 至到하지 않고는 그치지 않는다.
실지로 깨달은 바가 없으면 형체는 놔두고 그림자를 논하는 격이며 좁쌀과 비단을 떠나 옷과 음식을 논하는 격이다. 그러므로 설명이 많을수록 실제 효과는 더 멀어지고, 심식의 기능이 세밀할수록 큰 작용은 더욱 어긋나며, 반연이 치성할수록 바른 인연은 더욱더 황폐된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빨리 버리면 그래도 막을 방법이 있겠지만 따라 흘러가서 돌아올 줄 모르면 도달할 곳이라곤 지옥밖에 없다.
실지로 득도하지 못하면 무엇을 하든 간에 결국은 역효과만 초래하고 만다. 그러므로 허망한 명리의 노예가 되어서 생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후회하지 말고, 오직 실지로 참구하여 실지로 깨쳐야한다.
未悟者는 難與言已悟之境이니 如生而盲者語以天日之淸明하면 彼雖聞而不可辨也요 已悟者는 無復踏未悟之跡이니 如寐而覺者使其爲夢中事하나 彼雖憶而不可追也니라 參學之士는 要當以悟準이니 此悟之所以爲難也라(佛印元痛諭文 中峯雜錄 上) 卍續 122-p.724 下
悟達치 못한 者에게는 已悟한 實境을 말할 수 없으니, 비유하건대 出生부터 盲目된 者에게 晴天白日의 淸明을 말하면 그가 비록 들어도 分辨하지 못함과 같다. 悟達한 者는 未悟한 蹤跡을 다시는 踏著하지 않으니 夢寐에서 覺惺한 者에게 그 夢中事를 再演하라 하면 그가 비록 記憶은 하되 追跡할 수 없는 것과 같다. 參學하는 高士는 당연히 悟達로써 標準을 삼을 것이니 此는 悟達함이 甚難한 까닭이다.
깨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미 깨친 실제 경계를 말해주기 어렵다. 비유하면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에게 맑은 하늘에 해가 밝다고 말하면 비록 듣더라도 분별하지 못하듯이.
깨친 사람은 깨치지 못한 자취를 다시는 밟지 않는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에게 그 꿈속 일을 재연해보라고 하면 비록 기억은 하지만 그대로 할 수는 없듯이. 참구하는 납자는 깨침을 표준 삼을 것이니, 이는 깨치기가 몹시 어려운 까닭이다.
미혹한 자는 대낮에 앞 못보는 맹인과 같고 깨달은 이는 두 눈으로 푸른 하늘을 쳐다보는 것과 같아서 근본적으로 정반대 입장에 있다. 무한한 심성의 대광명이 항상 끝없는 법계를 비추고 있지만 눈먼 중생은 이를 보지 못하고 어둡다고 한탄한다. 하루 아침에 홀연히 깨달아서 본래 갖고 있는 마음의 눈을 활짝 열면, 한없는 오랜 옛적부터 본래 자신이 이 대광명을 내고 있음을 환히 볼 것이다. 일단 이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리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이 큰 광명의 창고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므로 참으로 통쾌한 중에서도 가장 통쾌한 일이다. 그러므로 위산(潙山) 스님은 “법을 추구하는 일은 깨침을 법칙으로 삼는다”고 항상 강조하였다.
以悟爲落第二頭하며 以悟爲枝葉事하나니 盖渠初發步時에 便錯了하야 亦不知是錯하고 以悟爲建立하니라 旣自無悟門일새 亦不信有悟者하나니 遮般底를 謂之謗大般若라 斷佛慧命하야 千佛이 出世하야도 不通懺悔니라(大慧書 下) 大正藏 47-p.939 上
悟로써 第二頭에 轉落하였다 하며 悟로써 枝葉事라 하나니, 大槪 그는 始初出發할 때에 문득 錯誤하여 또한 그 錯誤를 覺知하지 못하고 悟로써 建立이라고 한다. 벌써 自己가 悟達치 못하였으므로 또한 悟達者가 있음을 信憑치 않나니, 이러한 者를 大般若를 비방한다고 한다. 이는 佛陀의 慧命을 斷絶하는 것이므로 千佛이 出世하여도 참회하지 못한다.
깨침을 부수적인 데 떨어진 것으로 보며 또는 지엽적인 일이라 하니 그런 이는 아마도 처음 출발부터가 잘못되었으며 게다가 잘못된 줄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깨침이라는 것도 방편일 뿐이라고만 생각한다. 자기에게 깨친 영역이 없다보니 깨친 이가 있다해도 믿지 않았다. 이런 사람을 대반야를 비방하여 부처의 혜명을 끊어버리는 자라 하니 천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셔도 참회가 통하지 않는다.
진여본성을 깨달은 이를 불조라 하니 이 깨달음의 문[悟門]은 불교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이 깨달음의 영역을 부정하면 불교를 파멸하는 최대의 과오가 되므로 천만 부처님의 큰 자비로도 영원히 구제하지 못한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고 한 「화엄경」의 글과 “일체 중생이 모두 원각을 증득했다[一切衆生皆證圓覺]”고 한 「원각경」의 글 등을 오해하여 중생이 본래 부처이므로 다시 깨달음을 구함은 머리 위에 머리를 얹는 격이라는 사악한 지견에 빠져서 깨달음을 부정하면 부처님의 혜명을 끊는 악마이다.
「화엄경」 「원각경」 등 일승의 현묘한 경전은 금강대정의 보광삼매에서 법계를 관조한 부처님의 지혜가 나타난 것이므로 오직 대원각의 구경무심을 완전히 깨쳐야만 상응하는 것이요, 눈먼 중생이 생멸하는 분별로써 마구 억측하면 자살행위를 면치 못한다. 옛사람은 “만고의 큰 강물로도 오명은 다 씻을 수 없다”고 통탄하였다.
또한 “자기 이름을 내는 자, 자기 몸을 죽인다”고 심히 꾸짖었으니, 명리를 뱀이나 전갈같이 멀리 피하지 않으면 대도는 성취할 수 없으며 아비지옥의 찌꺼기 됨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국왕의 존귀함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떨어진 옷과 걸식으로 평생을 장엄한 석가세존의 훌륭한 자취를 따르지 않으면 발심하여 도를 닦을 수 없다. 만약 명리에 현혹되어서 깨치지 못하고서 깨쳤다고 큰 거짓말을 하면 이는 불법의 영원한 원수요 도적이니, 진정한 수도인이라면 크게 정신차려야 한다.
슬프다! 저 쌀 한 톨을 탐내다가 만 겁의 양식을 잃어버리니, 어찌 애통하지 않은가
오직 공안을 힘써 참구하여 활연히 깨쳐서, 크게 죽었다 크게 살아난, 항상 적멸하면서 항상 관조하는 대열반인 참무심을 몸소 증득하여 참으로 견성하고 도를 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圜悟出蜀하야 謁大潙喆과 黃龍心하니 僉爲法器 而晦堂은 稱他日에 臨濟一脈이 屬于子矣라하니라 最後에 見五祖演하야 盡其機用하되 祖皆不諾이어늘 出不遜語하고 忿然而去하니 祖曰 待你著一頓熱病打時에 方思量我在라하니라 師到金山하야 染傷寒困極하야 以平日見處로 試之하니 無得力者라 追繹五祖之語하고 乃自誓曰 我病이 稍間하면 卽歸五祖하리라 病痊尋歸하니 祖一見而喜하야 令卽參堂하니라(續傳燈錄25 其他) 大正藏 51-p.634 上
圜悟가 西蜀을 출발하여 大潙喆과 黃龍心을 謁見하니 다 法器라 하고, 晦堂은 후일에 臨濟의 一脈이 그대에게 달렸다고 하니라. 최후에 五祖演을 親見하여 그 機用을 다하되 五祖가 허락하지 않거늘 不遜한 말을 하고 忿然히 離去하니, 祖가 말하기를 그대가 심한 熱病을 앓게 되면 그때에야 나를 생각하리라 하니라. 金山에 이르러 과연 傷寒으로 극히 위독하여 平日에 誇示하던 工夫로써 試驗하니 아무 힘도 없는지라 五祖의 말을 추억하고, 나의 病苦가 조금 치유되면 즉시 五祖에 歸還하겠다고 맹서하니라. 그리하여 病이 쾌차하여 歸還하니 五祖가 一見大喜하여 參禪케 하니라.
원오가 서촉을 출발하여 대위 철과 황룡 심을 찾아뵈니 모두 법 그릇이라 하였고, 회당은 뒷날 “임제종의 한 맥이 그대에게 달렸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오조 연을 찾아뵙고 기용을 다하였으나 오조가 전혀 인정하지 않으니 불손한 말을 하고 성을 내며 떠나가자 오조가 말하였다.
“그대가 한번 심한 열병을 앓게 되면 그때야 나를 생각하리라.” 원오는 과연 금산에서 상한병에 걸려 극히 위독해지자 평소에 뽐내던 공부로 시험해 보았으나 힘이 되지 못했다. 오조의 말을 기억하고서 병이 조금 낫는 대로 오조에게 돌아가리라고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병이 나아 돌아가니, 오조가 보고는 몹시 기뻐하며 승당에서 참선케 하였다.
기나긴 세월의 생사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에는 조금도 거짓이 없어서 실제로 도력이 화엄7지인 몽중일여가 되어야 어떤 극심한 병고에도 끄떡없고, 나아가 숙면일여가 되면 생사에도 한결같다.
그러므로 몽중일여도 못되는 지견의 알음알이로는 아무리 부처와 조사를 넘어서는 호언장담을 병에서 물 쏟듯 하여도, 열반당(涅槃堂) 안에서 온갖 고통이 맹렬히 솟을 때에는 그것들이 전부 얼음 녹듯 기와장 부숴지듯 사라져서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이는 고금을 통하여 수도인의 근본 병통이니 설사 몽중일여하여 병 들어서도 공부가 한결같아도 숙면일여하지 못하면, 세상에 뛰어난 지식과 걸림없는 웅변도 생사의 언덕에서는 풍전등화같이 앞길이 캄캄할 뿐이다.
그 뿐만 아니라 몽중일여도 안되는 사악한 지혜로 한 때의 허망한 명리를 욕심내어 중생을 현혹하면, 이는 자신과 남을 그르치며 부처종자를 없애는 커다란 마구니이므로, 종문정전의 조사들은 이를 극력 배제하였다. 그러나 이 잘못을 확실히 자각하여 사악한 지혜를 완전히 버리고 마음을 돌이켜 정진하면 영겁토록 어둡지 않고 자재무애한 불조의 부사의한 해탈도를 성취할 수 있다. 원오와 같은 뛰어난 대근기도 오조가 그 병통을 지적하여 고쳐 주지 않았으면, 결국은 망망한 업식의 바다의 사견 중생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원오는 오조의 엄중한 지도아래 대도를 완성하여 임제를 잇는 정안종사로서 불법의 동량이 되었으니, 참으로 도 닦는 이의 표준이다.
또한 몽중일여 후 숙면에서도 공부가 한결같으면 분단생사는 벗어나서 생사에 어둡지는 않으나, 아직도 아뢰야위인 자재보살의 변역생사 가운데 있으므로, 종문에서는 이를 제8마계로서 대법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고 배척한다. 숙면일여에서 훤히 꿰뚫어 아뢰야의 근본무명을 끊어버려야만, 견성하여 도를 통한 사람이다.
透頂透底하야 明證佛性하면 長時無間하야 一得永得이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32 上
頂上에 通透하고 深底에 透徹하여 佛性을 分明히 확증하면 長久한 時日에도 間斷이 없어서 一次 透得하면 영원히 自得하느니라.
꼭대기에서 밑바닥까지 꿰뚫어서 불성을 분명히 증득하면 영원히 끊어짐이 없다. 한 번 뚫어 깨달아서 영원히 스스로 얻는 것이다.
一得永得하면 無有變異하나니 乃謂之見性成佛이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54 上
一得永得하면 變動과 異遷이 없나니 見性成佛이라 하느니라.
한 번 얻음에 영원히 얻으면 변동과 달라짐이 없으니 이를 견성 성불이라 한다.
生死幻翳永消하고 金剛正體獨露하면 一得永得하야 無有間斷이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21 上
生死의 幻翳가 영원히 소멸되고 金剛正體가 唯獨히 現露하면 一得永得하여 間斷이 없느니라.
허깨비나 눈병같은 생사가 영원히 소멸되고 금강의 바른 몸이 홀로 드러나면, 한 번 얻음에 영원히 얻어서 끊어짐이 없다.
一得永得하면 盡未來際하야 於無得而得하야 得亦無得이니 乃眞得也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50 下
一得永得하면 未來際를 窮盡하여 所得이 없이 自得하여 自得도 또한 取得하지 못하나니 이것이 眞得이니라.
한 번 얻음에 영원히 얻으면 미래가 다하도록 얻는 바 없이 스스로 얻으며 스스로 얻음도 또한 얻지 못하니 이것이 진정한 얻음이다.
見性成佛하면 一得永得하야 據自寶藏하야 運自家珍하나니 受用이 紘有窮極이리오(圜悟心要) 卍續 120-p.759 上
見性成佛하면 一得永得하여 自家의 寶藏에 依據하여 自己의 家珍을 運用하나니 그 受用이 어찌 窮極이 있으리오.
견성성불하면 한 번 얻음에 영원히 얻어서, 자기 보배창고에 의거하여 자기 집의 보배를 꺼내 쓰는 것이니 그 씀이 어찌 끝이 있으랴.
無無爲事道人의 行履는 千生萬劫토록 亦只如如니라(圜悟心要) 卍續 120-p.736 上
無爲無事한 道人의 行履는 千生萬劫토록 또한 如如할 뿐이니라.
함이 없고 일이 없는 도인의 생활은 천생만겁토록 그저 여여할 뿐이다.
숙면일여에서 확철대오하여 자기 본성을 환히 보면 그것이 성불이다. 이런 이는 해탈의 깊은 구덩이를 뛰쳐나오고 비로자나불의 이마를 밟아 버려 한 번 얻음에 영원히 얻어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무애자재하여 털끝만큼도 끊어짐과 바뀜이 없다. 여기서는 여여하다는 것도 성립할 수 없으니, 어찌 현묘하지 않은가.
진실로 오매일여, 내외명철, 무심무념, 상적상조하여 견줄 수 없이 높은 대법왕으로서 천추만세에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되니, 격식을 벗어난 대장부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구경의 깊고 현묘한 곳을 깨치지 못하고서 깨쳤다고 하거나,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고 하면 법왕을 사칭하고 부처종자를 없애는 것이니, 그 허물은 천 부처님이 나온다 해도 참회할 길이 없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알면서도 일부러 저지르면 산채로 지옥에 떨어진다” 하였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으리오.
후기(後記)
「선문정로(禪門正路)」는 이름 그대로 선문의 바른 수행로를 제시한 길잡이다. 종문정전(宗門正傳)의 바른 길은 제8아뢰야 미세망상(微細妄想)까지 탕진(蕩盡)한 내외명철(內外明徹)의 경지에서 자성(自性)을 철견(徹見)하여 구경무심(究竟無心)을 사무쳐 증득함[徹證無心]에 있다. 이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이 그 근간(根幹)을 이루고, 마조(馬祖)․백장(百丈) 등 정안종사(正眼宗師)의 수시법문(垂示法門) 가운데서 그 지취(旨趣)를 잘 볼 수 있다.
그런데 종문에는 일찍부터 교가적(敎家的)인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이론이 유입되어 선종(禪宗)의 탈을 쓴 채 선종 본래의 뜻을 흐리게 하고 있다. 선종 본연의 견성(見性)은 불지무념(佛地無念)을 증득한 것으로서 돈오돈수(頓悟頓修)로 표현되며, 한편 원돈교(圓頓敎)에 바탕을 둔 돈오점수법은 10신초위(十信初位 내지 十住初位)에서 중생의 불성이 모든 부처님과 추호도 다름없음을 깨달아 그 나머지 52위의 보살지위를 차제(次第)로 닦아 성불한다는 이론이다. 여기에서 돈오(頓悟)라는 이름은 서로 같으나 그 내용은 하늘과 땅처럼 크게 다르다. 앞의 것은 구경묘각(究竟妙覺)의 증오(證悟)인 반면, 뒤의 것은 원돈신해(圓頓信解)의 해오(解悟)이다. 종문에서는 구경무심(究竟無心)을 보임(保任)하는 것을 오후보임(悟後保任)이라 하고 성태를 기른다[聖胎長養]고 하는데, 해오점수에서는 제8아뢰야의 가무심(假無心)도 아닌 불각(不覺)의 지위인 해오(解悟)에서 선문정전(禪門正傳)의 본래용어인 오후보임과 성태장양을 그대로 옮겨 쓰고 있으므로써, 여기에 따른 혼란과 폐해는 금사(金沙)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자못 극심한 것이다.
백련암 큰스님께서는 1967년 해인총림(海印叢林) 방장(方丈)으로 취임하신 이래 여기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시고 종문의 수행로를 선문정전 본래의 것으로 회귀(回歸)시켜서 바로잡아야함을 역설해 왔으나, 고려 보조(普照)의 「수심결(修心訣)」 이래로 깊이 뿌리 박힌 해오점수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 강하여, 처음에는 오히려 스님의 주장을 이단시(異端視)하는 양상까지 있었다. 스님께서는 「대열반경(大涅槃經)」 「육조단경」 「종경록(宗鏡錄)」 「심요(心要)」 등 주요한 경․론과 정맥(正脈) 조사스님네의 법문 내용에서 긴요한 대목들을 촬약(撮約)하여 전편(全篇) 19장(章)으로 엮어서 선․교를 통한 견성의 내용이 구경묘각(究竟妙覺)에 있으며, 견성이 곧 성불이며[見性成佛] 생사해탈(生死解脫)인 종문의 본래지취(本來旨趣)를 바로 세우는 데 역점을 두셨다. 그리하여 이러한 구경불지(究竟佛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조사의 방편[祖師方便]인 경절문활구(徑截門活句)의 조사공안(祖師公案) 곧 화두(話頭)를 열심히 참구하여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에서도 계속 공안을 의심하여 무명(無明)의 칠통(漆桶)을 타파하므로써 심신 내외가 사무쳐 환히 밝은 [內外明徹] 구경의 불지무념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견성이며 해탈이며 성불임을 바로 제시하신 것이다.
「선문정로」에 대한 법문을 스님께서 행하신 것은 1970년대 후반 총림의 대중을 상대로 약 3년 간에 걸쳐서 하신 것이다. 당시 방장실 시자였던 우납(愚衲)이 그것을 빠짐없이 요약기취(要約記取)하여 두었는데, 그 분량이 두꺼운 노-트로도 2권에 가깝다. 스님께서 처음에 구결(口訣)하신 것을 백련암 시자였던 원명(圓明)이 기록하였고, 이것을 법정(法頂)스님이 정리하여 다듬고 체재(體裁)를 갖추어 조판(組版)하게 되었다. 이를 편집 교정하는 과정에서 법정스님과 당시 백련암 원주였던 원택(圓澤), 그리고 큰절 시자였던 우납이 서울에서 함께 동숙(同宿)하면서 작업한 결과로 큰스님의 법문이 한 권의 책자로서 대중에게 읽히게 된 인연이다.
그런데 「선문정로」가 세상에 나오고 난 다음 최초의 반응은 한결같이 어렵다는 말들이었다. 조사선(祖師禪)이란 이름으로 행해져 온 이 공부길은 비록 가장 수승하고 빠른 지름길[徑截]이긴 하나 종래까지는 조사환해(祖師寰海)의 제한된 영역 속에 갇혀있었고 한문(漢文)이란 문자의 테두리와 교리가 지닌 난해함 뿐만 아니라 본분도리(本分道理)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절벽을 대한 듯 아스라이 쳐다만 보고 돌아서버리는 경향이 없지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대중화되지 못하고 납자(衲子)의 전유물(專有物)로서 특수계층에만 국한된 수행로처럼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을 대중 모두에게 적용하여 보편적인 공부길로서 전향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언어가 지닌 난해한 장벽부터 해소시켜야한다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맨처음 초록(草錄)을 다듬는 과정에서 보다 더 쉽고 현대적인 용어로써 풀어야 된다는 주장이 있긴하였으나, 큰스님 당대(當代)의 한문권역(漢文圈域)에서 익힌 표현법과 독특한 기술력(記述力)을 충분히 살리기 위해서는 가능한대로 문맥(文脈)만을 다듬는 선에서 매듭짓기로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얼마 가지 않아 이것이 벌써 고전화(古典化)되어버린 나머지, 여기에 대한 번역해설서(飜譯解說書)가 따로이 나와야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스님께서도 이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한 나머지 총림 대중에게 「선문정로평석(禪門正路評釋)」을 강의하기 시작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일부에만 그치고 다 마치지 못하게 되었다.
보다 쉽게 읽힐 수 있는 평석서(評釋書)가 어떤 형태로든 나와야 된다는 필요성 때문에 더러는 교계(敎界)의 학자에게 의뢰하여 시도를 해보았으나 선문에 대한 이해없이 불교교리의 이해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실감하고, 결국 그 작업도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침내는 선원에서 정진하는 납자(衲子)의 입장에서 우납이 그 번역(飜譯)에 착수하여 1차적인 작업을 마쳤으나, 우납의 무딘 붓과 어리석음, 그리고 지금의 젊은이들과는 이미 한 세대의 차이가 나버린 표현방법 때문에 이것도 재작업을 요하였다. 그리하여 동국대 불교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던 시자 원영(圓瑛)을 중심으로 한 젊은 불자들 손으로 넘어가서 다시 다듬어져서 나오게 된 것이 바로 이 「선문정로평석(禪門正路評釋)」이 햇빛을 보게 된 인연이다.
「선문정로」의 본래 체재는 불조의 주요한 법문의 촬요(撮要)를 큰스님 당신의 세대에 맞는 한문권(漢文圈)의 무게있고 운치있는 필법으로 번역되었고, 매 절목(節目)마다 스님의 구결평석(口訣評釋)을 정리해서 실은 것이다. 이에 대한 번역은 불론 원문을 참조한 것이지만 큰스님의 글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원문에 대해서는 곧 중역(重譯)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이 불사(佛事)에 참여한 우리들의 어리석음과 무딘 붓으로는 불조의 간명직절(簡明直截)한 언구들을 번역 전달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성의(聖意)를 손상시키게 되고 큰스님의 본뜻에 많이 빗나갔기 때문에, 그 원의(原意)를 살피도록 하기 위해서 「선문정로」 원문을 함께 실었다.
대중에게 널리 쉽게 읽히게 하기 위하여 내어놓은 이 「평석(評釋)」이 그 구실을 다하기 위해서는 독자의 이해를 돕는 주해(註解)들이 함께 따라야 되는데,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함께 싣지 못하고 단순한 번역서 형태로만 우선 내놓게 된 것을 독자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리는 바이다. 제목 그대로 평석(評釋)의 수준이 되지 못하고 연의(演義)의 선에서 다듬어지게 된 것이 못내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뒷날 충분한 주해가 보완되고 보다 더 잘 다듬어진 평석서가 나와서, 만인들이 선문의 바른 수행로에 따라 자성에 눈을 뜬 공부인이 많이 배출되도록 하는 데 힘쓰겠다.
생각해 보면, 이 「선문정로」를 저술하여 우리에게 공부의 바른 길을 제시해 주신 큰스님의 은혜는 분골쇄신 미족수(粉骨碎身未足酬)라고 해야 옳다. 우리 근역(槿域)의 종문에 이례적(異例的)인 해오점수법(解悟漸修法)이 뿌리 내려 그 병이 골수까지 뻗쳐 있었는데도 8백년 동안 아무도 이처럼 이론을 정립시켜 그 치유책을 도모해보려는 분이 없던 것을, 우리 큰스님께서 오직 불법만세를 위하여 낙초자비(落草慈悲)로서 이렇게 선문의 바른 길을 제시해 주셨다. 여기 우리는 모처럼 바른 법[正法]을 만났으니, 각기 저마다 성명(性命)을 아끼지 말고 용맹정진하여 자성을 확철히 깨달아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는 것이 불조(佛祖)의 막대한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며, 큰스님의 자비원력의 본뜻을 저버리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불기 2537년(1993)년 봄
가야산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에서
시자 원융(侍者 圓融)은 머리 숙여 절하고 삼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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