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백일법문

성철스님 백일법문 하

통융 2016. 9. 13. 20:15

6장 천태종사상

 

천태종(天台宗)사상

 

천태종(天台宗)의 개조(開祖)는 혜문선사(慧文禪師)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주로 선에 대한 관법을 익혔으며, 용수보살이 지은 중론(中論)대지도론(大智度論)을 탐독하여 마침내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요결을 깨달았습니다. 2조인 혜사(慧思: 514577)선사는 15세에 출가한 이래로 법화경을 비롯한 여러 대승경전을 독송하고 사방을 유행하여 선관(禪觀)을 닦았으며, 혜문선사를 찾아가 일심삼관의 요결을 배워 익혀 법화삼매(法華三味)를 증득했습니다. 법화삼매의 본래 의미는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등 철저한 공관(空觀)을 증득하는 것이었지만, 혜사선사가 증득한 법화삼매는 근기가 뛰어난 보살이 방편을 버리고 부처님의 공덕을 닦는 궁극적인 실천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법화경안락행의(法華經安樂行義)등 여러 권의 저술이 있었고, 지의(智顗)혜명(慧命) 등 여러 제자가 있었으나 그 법요(法要)를 전한 것은 천태 지의(天台智顗: 538597)입니다.

지의스님은 양()나라 말기의 난세에 부모를 잃고 18세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후 대현산(大賢山)에 올라가 법화경(法華經), 무량의경(無量義經), 보현관경(普賢觀經)을 독송하였습니다. 23세 때 대소산(大蘇山)에 가서 혜사선사 밑에서 수행하였는데, 혜사선사는 지의스님과 자신이 옛날 영축산에서 함께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는 것을 들었던 지난날의 인연으로 이제 서로 다시 만났다고 말하며, 지의스님이 법기(法器)임을 알고 간곡히 가르쳐, 드디어 지의스님은 법화삼매를 성취하였습니다. 그 후 지의스님은 대소산을 내려와 금릉의 와관사(瓦官寺)에서 차제선문(次第禪門), 법화문구(法華文句)등을 개강하고, 38세에 천태산에 들어가 고행을 하였는데 천태대사(天台大師)라는 칭호는 지의스님이 천태산에서 10여 년간을 머무른 데에 유래합니다. ()나라가 멸망하고 수()나라가 들어서자 나중에 수 양제가 된 진왕 광(晋王廣)의 초빙에 의하여 그에게 보살계를 주고 지의스님은 지자(智者)라는 칭호를 수여받았습니다. 나중에 고향인 형주(荊州)로 돌아가 옥천사(玉泉寺)를 창건하고 거기에서 법화현의(法華玄義), 마하지관(摩訶止觀)등을 강설하였습니다. 그 후 천태산에서 지내다 진왕 광의 초청에 의하여 다시 하산하다가 도중에서 병을 얻어 입적하였으며, 입적 후에 진왕의 원조를 얻어 천태산에 국청사(國淸寺)가 창건되어 이후 천태종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천태스님이 남긴 많은 저서 가운데, 천태교학의 지침서인 법화문구, 법화현의, 마하지관을 천태3대부라 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그의 제자인 관정(灌頂)이 수치(修治)한 것입니다. 그 외에 관음현의(觀踵玄義), 관음의소(觀音義疏), 금광명현의(金光明玄義), 금광명문구(金光明文句), 관경소(觀經疏)5소부(五小部)천태소지관(天台小缺觀), 차제법문(次第法門), 사교의(四敎義)등이 있습니다.

천태스님의 제자로는 30여 명이 있었으나 그 교학을 후세에 전한 것은 장안 관정(章安灌頂: 561632)이며, 이 계통의 문하에서 천태의 교학이 전승되다가 당나라 때 흥기한 법상종화엄종선종의 세력에 압도되어 종세가 약화되고 맙니다. 그 뒤에 당 말기에 활약한 형계 담연(荊溪湛然: 711782)에 의해 천태종이 일시 중흥하였으며, ()나라 때에는 화엄종의 영향을 받아 천태종 내에서 유심론(唯心論)에 대한 논쟁이 생겨 산가파(山家派)와 산외파(山外派)로 분류되어 산가파의 사명 지례(四明知禮: 9601028)계통이 번창했습니다.

천태종은 일반적으로 화엄종과 함께 중국불교 교학의 최고수준으로 불리는데, 그 교학은 교()와 관()의 두 부문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는 교판(敎判)과 교리(敎理)로 구성되었습니다. 천태종의 교판(敎判)은 남북조시대에 도생(道生)혜관(慧觀) 등 소위 남37(南三北七)의 열 명이 세운 교판을 연구하여 자기네의 교판을 수립하였는데, 그 교판은 오시팔교(五時八敎)입니다. 오시는 불교의 모든 경전을 부처님이 설한 다섯 시기의 순서에 따라 분류한 것으로, 첫번째가 화엄경을 설한 화엄시(華嚴時)이고, 그 다음은 차례대로 원시경전인 아함경을 설한 아함시(阿含時) 또는 녹원시(鹿遺時), 그리고 유마경」․「승만경등 일반 대승경전을 설한 방등시(方等時), 다음은 여러 가지 반야경을 설한 반야시(般若時)이며, 맨 마지막이 법화경열반경을 설한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입니다. 팔교는 화의사교(化儀四敎)와 화법사교(化法四敎)를 합한 것입니다. 화의사교는 설법의 방식에 따라서 모든 불교를 돈교(頓敎)점교(漸敎)비밀교(秘密敎)부정교(不定敎)로 나눈 것입니다. 돈교는 청중의 근기를 구별하지 않고 바로 원교의 깊은 뜻을 일시에 널리 설한 법문이며, 점교(漸敎)는 근기를 감안하여 그것에 적합한 방편을 사용해서 점차 성숙시키는 법문입니다. 비밀교는 설명의 형식이 규칙적이지 않으면서도 여래가 몸마음을 비밀히 구사하여 자재하게 중생을 제도하는 법문이며, 부정교는 법화경 이전의 설법에서 여래의 법문을 듣고 청중이 근기에 따라 각각 달리 이해하는 법문입니다. 화법사교는 설법의 내용에 따라서 장교(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로 구분한 것인데, 천태학에서 특히 중시하는 것이 이 화법사교입니다. 장교는 소승교로 소승의 경논 삼장이 여기에 해당하며, 통교는 성문연각과 보살의 삼승에 공통하는 대승의 첫 단계로 주로 반야경전이 해당합니다. 별교는 오직 보살만이 상응하는 가르침으로 원교와는 달리 차례로 법을 닦으며, 원교는 모든 교설 중에서 가장 수승한 것으로 삼제원융의 실상을 설하는 법화원교의 법문을 말합니다. 이 오시팔교 가운데 화의사교와 화법사교의 팔교를 명확히 한 것은 천태스님의 제자인 관정이라고 합니다. 어찌됐든 천태종에서는 오시팔교의 교판을 세워서 천태스님 이전의 교판에서는 다소 경시되었던 법화경을 가장 수승한 법문이라고 선언하여 법화경 중심의 사상을 주장한 것입니다.

천태종의 교리(敎理)는 전반적으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설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제법실상이란 중론의 삼제게(三諦偈)에 있는 공()()()의 삼제에 의하여 표명되는 것으로, 천태종에서는 이 삼제게를 보다 원융적으로 해석합니다. 즉 인연으로 생겨난 일체법이 그대로 공이고 가()이고 중()이면서, 공 가운데에 가와 중이 있고 가 중에 중과 공이 있는 등 삼제가 즉공(卽空)즉가(卽假)즉중(卽中)이 되어 원융삼제(圓融三諦)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원융삼제는 일체의 모든 법이 본래 그러하여 자연히 갖추어진 것이므로 일경삼제(一境三諦)라고도 합니다. 이 제법실상의 도리를 분명하게 표명하는 천태교학으로 일념삼천(一念三千)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 생각 속에 삼천 가지의 법이 구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삼천이란 대지도론화엄경에서 설하는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인성문연각보살부처의 십계(十界), 법화경에서 설하는 여시상(如是相)여시성(如是性)여시체(如是體)여시력(如是力)여시작(如是作)여시인(如是因)여시연(如是緣)여시계(如是界)여시보(如是報)여시본말구경(如是本末究竟) 등의 십여시(十如是), 그리고 대지도론에서 논하는 오음세간(五陰世間)중생세간(衆生世間)국토세간(國土世間)의 삼종세간(三種世間)을 곱한 것입니다. 10(十界)의 각각이 다시 10계를 구비하여 십계호구(十界互具)100 계가 되고, 1계가 또한 각각 10여시를 구비하여 천()이 되며, 이들이 모두 삼종세간을 갖추므로 결국에는 삼천(三千)이 됩니다. 이러한 일념삼천설은 제법이 본래 즉공즉가즉중의 묘법이므로 만법이 모두 원융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태종에서는 담연(湛然: 711782)에 이르러서 화엄학의 성기설(性起說)에 영향받아, 하나의 색()이나 하나의 향()이 모두 본래 선악(善惡)의 삼천 가지 제법을 갖추었다는 성구설(性具說)을 주장하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악설(性惡說)까지도 말하게 되었습니다. 대개의 불교 종파에서는 다만 성선(性善)을 설하지만 유독 천태학에서 성악(性惡)을 설한 것입니다. 그 뜻은 설사 지옥 중생일지라도 지옥의 성품은 물론 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인성문연각보살부처의 덕성을 갖추고 있으며, 부처님이라 하여도 지옥아귀에서부터 보살부처까지의 성품을 지니어 아무리 위대한 성인이고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비록 행위로서의 악은 단절했지만 성품으로서의 악성은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성악설은 천태종 내부에서는 물론 화엄종에 의해서도 거센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태종의 성악설이 의도하는 본 뜻은, 수도하는 이로 하여금 일체의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의 원인이 각자가 구비한 덕성에 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하려는 현실주의적인 사고에 근거한 교설이라 하겠습니다. 중생의 성품은 본래 진여법성(眞如法性)과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순간마다 그 마음속에 부처의 세계가 생기기도 하고 지옥의 세계가 전개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천태종의 교리와 병행하여 거론되는 실천적인 관법(觀法)으로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이 대표적입니다. 일심삼관이란 일심(一心)의 위에서 삼제가 원융함을 관하는 것이니, 곧 일상의 한 마음 가운데 삼천 가지의 제법을 구족하여 즉공즉가즉중임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관법으로서 일심삼관을 관하는 것은, 처음부터 실상을 관하여 마음을 법계에 두고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고 진실 아님이 없음을 관하는 것이니 이러한 천태종의 관법을 원돈지관(圓頓缺觀)이라 합니다.

천태종에서는 실천적인 수행도를 지관(缺觀)이라 부르는데, 이 지관법에는 점차지관(漸次缺觀)부정지관(不定止觀)원돈지관(圓頓止觀)의 세 가지가 있으며, 이것은 혜사선사의 세 가지 지관을 전해받은 천태스님이 완성한 것입니다. 점차지관은 여러 가지 선관을 처음에는 얕고 나중에는 깊이 닦는 것으로 삼승이 함께 닦는 관법이며, 부정지관은 관법을 행함이 앞뒤가 일정하지 않고 그 행상도 불규칙하니 점교돈교의 관법을 말한 것입니다. 원돈지관은 법화원교의 관법을 말하는데 이 원돈지관의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사종삼매(四種三味)와 십승관법(十乘觀法)이 있습니다. 사종삼매는 신행(身行)의 구별에 따라 선정의 종류를 상좌삼매(常坐三昧)상행삼매(常行三昧)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의 네 가지로 나눈 것인데, 이 사종삼매는 반야경반주삼매경 등 법화경 이외의 여러 경전이 설하는 삼매의 법문을 포함합니다. 십승관법은 부사의한 일념삼천의 사상을 의미하는 부사의경(不思議境)을 관하는 관부사의경(觀不思議境)을 비롯한 기자비심(起慈悲心)교안지관(巧安缺觀) 등의 열 가지 관법입니다. 이들 가운데 최초의 관부사의경 이외에는 모두가 여러 대소승의 경론에서 설한 것이므로 결코 천태지관만의 독특한 관법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십승관법 중에서 처음의 관부사의경이 일념삼천의 도리를 관하는 가장 중요한 관법이며, 그 밖의 나머지는 이 관법을 완성하기 위한 보조관법이라고 말해집니다. 사종삼매와 십승관법의 구별을 논하자면 사종삼매는 십승관법을 닦기 위한 방편이고 보조연이며, 십승관법은 바로 법화원교의 사상을 관하는 정식 수행입니다.

 

 

1. 삼제원융(三諦圓融)

 

천태종의 교리를 조직하는 근본적인 사상적 기반은 중도실상(中道實相)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도 실상이란 곧 공()()()의 삼제가 원융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 사상의 연원은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지은 중론(中論)의 삼제게(三諦偈)에 유래합니다. 만법은 여러 인연으로 인하여 발생하므로 공()이라 하는데, 연기하여 생한 제법(諸法)은 고정적인 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연기한 제법은 비록 공하지만 한편으로는 연기하여 존재하므로 결코 무()가 아닙니다. 이 뜻을 가()로 표현합니다. 연기법은 이렇게 한편으로 공이고 한편으로 가이므로 유와 무를 떠나 중도를 이루는 중()이 됩니다.

천태종에서는 이 공중의 삼제가 개별적으로 독립된 것이 아니고 서로 원융하다고 주장합니다. 즉 공이라 하면 가와 중이 따라가고, 가라 하면 공과 중이 따라가서 언제든지 셋이 하나고 하나가 셋이어서 삼제가 늘 상응하여 독립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렇게 보아야만 연기를 바로 보고 중도를 바로 보는 것이지, 만약 그렇지 못하고 공은 공대로, 가는 가대로, 중은 중대로 되어 버리면 편견이 되어 올바른 불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삼제는 이름이 공이고 가이고 중일 뿐이지 실제로 이것을 공이라 하고 저것을 가라 하여 어느 한 가지에 집착하면 곧 어긋납니다.

이 삼제원융의 도리는 천태스님의 스승인 혜문(慧文)스님이 중론을 읽다가 그 깊은 뜻을 발견하여 주장하게 되었는데, 이 도리를 참으로 자재하게 활용한 분이 바로 천태 지자(天台智者)스님입니다.

 

한 생각 마음이 일어남에 즉 공()이고 즉 가()이고 즉 중()이라 함은 근()이나 진()이 모두 법계며 모두 필경공(畢竟空)이며 모두 여래장(如來藏)이며 모두 중도이다. 어째서 공이라 하는가. 모든 것이 인연으로 생하니 인연으로 생한즉 주체가 없고 주체가 없은즉 공이니라. 어째서 가라 하는가. 주체가 없이 생하니 곧 이것이 가이니라. 어째서 중이라 하는가. 법성을 벗어나지 아니하니 모두가 다 중이니라. 마땅히 알아라. 한 생각이 즉공, 즉가, 즉중이며 모두 필경공이며 모두 여래장이며 모두 실상이니라. 셋이 아니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셋이 아니며,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면서 합하고 흩어지며,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며, 동일하지도 다르지도 않으면서 동일하고 다르니라. 비유하면 밝은 거울과 같으니 밝음을 비유함이 즉 공이요, 거울에 나타난 상을 비유함이 즉 가요, 밝은 거울을 비유함이 즉 중이라.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면서 합하고 흩어짐이 완연하며, 하나, , 셋이 아니면서 둘, 셋이 방해롭지 않느니라. 이 한 생각 마음은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어서 불가사의하니 단지 자기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부처와 중생도 역시 또한 이와 같으니라. 화엄에 말하기를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고 하니, 마땅히 알아라. 자기의 마음에 일체 불법을 구족하고 있느니라.

一念心起卽空卽假卽中者若根若塵並是法界並是畢竟空이며 並是如來藏이며 並是中道니라. 云何卽空並從緣生緣生 卽無主無主卽空이니라. 云何卽假無主而生하니 卽是假니라. 云何卽中不出法性하니 並皆卽中이니라. 當知하라. 一念卽空卽假卽中이며 並畢竟空이며 並如來藏이며 並實相이니라. 非三而三三而不三이요 非合非散而合而散이며 非非合非非散이요 不可一異而一而異니라. 譬如明鏡이니 明喩卽空이요 像喩卽假鏡喩卽中이라. 不合不散하며 合散宛然하고 不一二三하며 二三無妨하니라. 此一念心不縱不橫하여 不可思議하니 非但己爾佛及衆生亦復如是니라. 華嚴云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하니 當知하라 己心具一切佛法矣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8 p.9 ]

 

한 생각 마음이 일어남에 즉공, 즉가, 즉중이라 함은 부사의 해탈경계에서 말하는 것이지 중생의 생멸심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수행할 필요도 없고 성불할 필요도 없고 중도도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도라는 것은 반드시 깨달아야지 깨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습니다. 육근(六根)이나 육진(六塵) 등의 모든 것이 눈감은 사람이 볼 때는 캄캄한 암흑 뿐이지만 눈을 뜨고 보면 대광명입니다. 중도를 깨달아 삼제가 원융한 도리를 체득한 사람에게는 전체가 다 법계며 필경공이며 여래장이며 중도 제일의제인 것입니다.

어찌하여 공()이라 하는가?” 일체만법이 인연으로부터 생하므로 주체가 없으며, 주체가 없으면 나[]와 나의 것[我所]이 없으므로 곧 무아(無我)로서 공이라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가()라 하는가?” 주체가 없이 생하므로 분명히 무아는 무아인데 연기하여 머무름이 있으므로 곧 가라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중()이라 하는가?” 법성을 벗어나지 아니하므로 연기라 하든지 공이라 하든지 가라 하든지 이 전체가 다 법성의 표현이며 법성 이외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삼제가 원융한 도리를 밝은 거울에 비유하면, 밝음이 즉 공이니 환하게 밝기는 밝지만 밝은 것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공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밝은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가운데 사람이나 사물이 분명히 거울에 나타나는데, 이것을 가라고 비유합니다. 그리고 거울 자체는 중이라 비유합니다. 그리하여 광명[]이라 하든지 모양[]이라 하든지 가라 하든지 중이라 하든지 이 전체가 밝은 거울 속에 있어 합할 수도 없고 흩어질 수도 없습니다. 밝은 거울 가운데 광명이 있어 모양이 나타나므로 광명이 즉 모양이고 모양이 그대로 밝은 거울입니다. 밝은 거울과 모양과 광명이 서로 분리될래야 분리될 수 없고, 하나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입니다.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에서 합하지도 않는다함은 광명과 모양과 밝은 거울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광명 이외에 모양이 따로 있고 모양 이외에 밝은 거울이 따로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 셋은 한 덩어리가 되어 그 한 덩어리 속에 셋이 있고 셋 속에 한 덩어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또 합하고 흩어짐이 완연하며, 하나, , 셋이 아니면서 둘, 셋이 방해롭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 한 생각 마음은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면서 불가사의하니 자기 마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부처와 중생이 또한그와 같습니다. 이런 도리는 오직 바로 깨친 사람만이 알 수 있으며, 그 이외는 천명의 석가, 만명의 달마가 나와 미래겁이 다하도록 설명을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굳이 설명을 한다는 것은 눈먼 맹인에게 오색단청이나 광명을 이야기하는 격입니다. 화엄경에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셋이 차별이 없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까닭은 자기 마음을 바로 깨달으면 일체 불법을 바로 아는 동시에 공중의 삼제가 원융무애한 사실을 완연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늘 중도 이야기만 하므로 듣기가 다소 지루할지 모르지만 불교의 근본이 다 중도에 서 있느니만큼 혹 표현은 다르다 해도 중도를 제외하고는 불법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도를 바로 보는 것이 불교를 바로 보는 것이고, 중도를 바로 보지 못하면 절대로 불교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법계 인연으로부터 나니 체()는 다시 유()가 아니다. 유가 아니기 때문에 공()이요, 공이 아니기 때문에 유다. 공과 유를 얻지 못하되 공과 유를 쌍조하여 삼제가 완연하여 부처의 지견을 갖추느니라.

法界從緣生하니 體復非有. 非有故空이요 非空故有. 不得空有로대 雙照空有하여 三諦宛然하여 備佛知見하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16 ]

 

공과 유를 완전히 떠나 쌍차(雙遮)하면 거기에서 도리어 공과 유가 쌍조(雙照)되어 원융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삼제가 원융하여 하나가 곧 셋이고, 셋이 곧 하나가 되어 부처의 지견을 갖추게 됩니다.

 

2. 일심삼관(一心三觀)

 

일체제법이 원융한 삼제의 도리를 구비하였다고 하여도, 이것을 바르게 관찰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면 한낱 수고로운 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천태교학에서는 이론인 교리(敎理)와 함께 수행인 관법(觀法)을 모두 중시하여 서로 병행하여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설명하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은 경계로서의 이법(理法)인 원융삼제(圓融三諦)를 관찰하는 주체적인 면에서 실천적으로 수행하는 관법을 말합니다. 일심삼관은 공()()()의 삼제에 의거하여 공관(空觀)가관(假觀)중도관(中道觀)의 삼관을 일심의 세 방면에서 세운 관법이므로 일심삼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일심삼관은 엄밀히 말하면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므로 부사의삼관(不思議三觀)이라고도 합니다.

천태종에서는 이 일심삼관을 또한 천태삼관(天台三觀)이라 하여 중도실상을 설하는 법문으로 간주합니다.

 

일체 모든 가()가 실로 모두 공하여 공이 곧 실상인 것을 체득함을 공관에 들어간다 [入空觀]고 이름하며, 이 공에 요달했을 때에 보는 것이 중도에 계합하여 능히 세간 생멸의 법상을 알아서 여실하게 봄을 가관에 들어간다 [入假觀]고 이름하며, 이러한 공의 지혜가 즉시 중도이어서, 둘이 없고 다름이 없음을 중도관 [中道觀]이라 이름하느니라.

體一切諸假實皆空하여 空卽實相名入空觀이요 達此空時觀冥中道하여 能知世間生滅法相하여 如實而見名入假觀이요 如此空慧卽是中道無二無別名中道觀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25 ]

 

중도에서는 공과 가가 다름이 없고 둘이 아닙니다. 앞에서 때때로 많은 법이 이루 말할 수 없어서 묘()라 하든지 부사의(不思議)라 하든지 하며 나아가 이것도 성립되지 않는다라는 등 여러 말을 했는데, 자칫 잘못하여 이것을 집착하여 불법인 줄 알면 공변(空邊)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중도관에 대하여 아주 부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방면으로도 설명하여 세간 생멸의 모습을 알아 여실하게 보는 것이 입가관(入假觀)이며 또한 중도관(中道觀)이라고 합니다. 부정이 즉 긍정이고 긍정이 즉 부정으로 아무리 부정하여도 거기에 긍정이 있고 아무리 긍정하여도 부정이 있습니다. 긍정과 부정이 조화를 이루어 지극히 원융한 이것이 불법이며 오직 한편으로 부정만 해서는 결코 진정한 불법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의 법()이 일체법이면 곧 인연으로 생한 법이니 이것은 거짓 이름으로 가관(假觀)이요, 만약 일체법이 곧 하나의 법이면 나는 이것을 공이라고 설하니 공관(空觀)이요, 만약 하나도 아니고 일체도 아니면 곧 중도관이니라. 하나가 공()하여 일체가 공하면 가중이면서도 공하지 않음이 없으니 다 공관이요, 하나가 가()이어서 일체가 가면 공중이면서도 가이지 않음이 없으니 다 가관이요, 하나가 중()이어서 전체가 중이면 공가이면서도 중이지 않음이 없으니 다 중관이다. 곧 중론(中論)에서 설하는 부사의한 일심삼관(一心三觀)이니 모든 일체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若一法一切法이면 卽是因緣所生法이니 是爲假名假觀也若一切法卽一法이면 我說卽是空이니 空觀也若非一非一切者卽是中道觀이니라. 一空一切空하면 無假中而不空하니 總空觀也一假一切假하면 無空中而不假하니 總假觀也一中一切中하면 無空假而不中하니 總中觀也. 卽中論所說不思議一心三觀이니 歷一切法亦如是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55 ]

 

공이 있고 가가 있고 중이 있다고 하여 마치 무슨 흙덩이같이 참으로 하나 하나 있는 줄 알면 실로 공중을 모르는 것입니다. 공이라 하면 가와 중이 거기에 포함되고, 가라 하면 공과 중이 포함되며, 중이라 하면 공과 가가 거기에 포함되어 삼제[]가 완전히 원융해집니다. 아무리 각도를 달리하여 잡아도 포착할 수 없는 실제의 참된 부사의한 도리를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실로 하나를 들면 전체가 다 따라가고 전체라 하면 그것이 곧 하나로, 전체를 제외하고 하나가 따로 없고 하나를 제외하고 전체가 따로 없습니다. 이를 부사의한 일심삼관이라 하는데 삼관만이 아니라 일체만법이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법()과 하나하나의 능()과 하나하나의 소()에서 모두 즉공(卽空)즉가(卽假)즉중(卽中)하여 제()()()를 구족하면, 이것을 통함도 없고 막힘도 없으며 통함과 막힘을 쌍으로 비추는 것이라 이름하느니라.

若於一一法一一能一一所皆卽空卽假卽中하여 具足諦緣度하면 是名無通無塞 雙照通塞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87 ]

 

주체[]이든지 객체[]든지 진진찰찰(塵塵刹刹)에서 공중하여 사제(四諦), 십이연연(十二因緣), 팔정도(八正道)를 갖추면 트임도 없고 막힘도 없으면서 서로 통하고 서로 막힙니다.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면서도 산과 산, 물과 물이 각각 완연하다[山山水水各宛然]’는 말입니다. 결국은 쌍차쌍조(雙遮雙照)를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중도제일의관(中道第一義觀)이란 먼저 가가 공함을 관하니 이는 생사를 공하고, 뒤에 공이 공함을 관하니 이는 열반을 공하여 두 변을 쌍차하니라. 이것을 두 공관(空觀)이 방편도가 되어서 중도를 아는 것이라 이름하느니라. 그러므로 마음마음이 적멸하여 살바야해에 들어간다고 하느니라. 처음의 관에서 공을 사용하고 뒤의 관에서 가를 사용하니 이것은 쌍으로 존재하는 방편으로 되어 중도에 들어갈 때 능히 이제를 쌍조하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하되 마음이 만약 정()에 있으면 능히 세간의 생멸하는 법의 모습을 안다고 하니, 앞의 두 관법을 두 종류의 방편으로 삼은 뜻이 여기에 있느니라.

中道第一義觀者前觀假空하니 空生死하고 後觀空空하니 空涅槃하여 雙遮二邊이라. 是名二空觀爲方便道하며 得會中道니라. 故言心心寂滅하여 流入薩婆若海하니라. 初觀用空하고 後觀用假하니 是爲雙存方便하여 入中道時能雙照二諦니라. 故經호대 心若在定하면 能知世間生滅法相이라하니 前之兩觀爲兩種方便意在此하니라.

 

 

 

생사와 열반은 서로 상대적인 것으로 모두 변견(邊見)입니다. 이 변견을 타파하기 위하여 열반도 공하고 생사도 공하여 생사와 열반을 쌍차하여 완전히 버려야만 합니다. 중생의 병을 고치기 위한 방편으로 필요한 약이 부처인데 병이 다 낫고 보면 부처란 약이 필요없습니다. 병이 다 나으면 부처란 약이 필요없는데도 불구하고 부처란 약을 집착하게 되면 이 병이 더 큰 병입니다. 사람이 건강하여 약이 필요없는데도 약을 자꾸 고집하면 이 사람도 미친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와같이 중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불()이니 열반이니 하는건데, 참으로 병이 나으면 약이 필요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열반이고 해탈이고 다 필요없습니다. 생사는 좋지 못한 것이고 열반은 좋은 것이라 하여 끝까지 취한다면 결국 불을 피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같습니다. 살바야해(薩婆若海)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뜻하므로 살바야해에 들어간다는 말은 곧 성불(成佛)한다는 뜻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살바야해에 흘러 들어간다고 하니 중도를 깨쳐서 다시 살바야해에 들어가는 줄로 알면 잘못입니다. 실제로 중도를 바로 깨치면 그 깨친 그대로가 살바야해인 것입니다.

무가 쌍조되고 생멸이 쌍조되면 참으로 원융무애한 무장애법계가 벌어집니다. 생멸법상을 바로 바라보면 그것은 중도로서 참으로 적적합니다. 그러나 적적하다고 해서 거기에 취해 있다면 그것은 중도를 바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들은 적멸이라 하면 적멸에 빠지고 생멸이라 하면 생멸에 빠지므로 앉아도 병이고 서도 병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 몸소 애써 유무나 공가의 방편을 활용하여 중도의 법문을 설하는 이것이 부처님의 뜻입니다.

 

3. 일념삼천(一念三千)

 

천태학(天台學)에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 그 뜻은 한 마음, 한 생각 속에 무려 삼천 가지의 법계가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천태종에서는 법계를 십법계(十法界)로 분류하는데, 그 십법계는 윤회하는 육도(六度)의 세계인 지옥계아귀계축생계아수라계인간계천상계와 성인(聖人)의 경지인 성문계연각계보살계불계입니다. 그리고 십계호구(十界互具)라 하여 십법계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한 법계 가운데 나머지 구법계가 모두 구족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백법계(百法界)가 됩니다. 예를 들면 지옥계에 지옥 외에도 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불의 구계(九界)가 갖추어져 있고, 불계에도 불계 외에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의 구계가 본래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법계의 근본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법화경의 방편품(方便品)에서 설해지는 십여시(十如是)가 있습니다. 십여시는 여시상(如是相)여시성(如是性)여시체(如是體)여시력(如是力)여시작(如是作)여시인(如是因)여시연(如是緣)여시과(如是果)여시보(如是報)여시본말구경(如是本末究境)입니다. 여시상이란 현상적으로 나타난 모든 형상을 말하고, 여시성이란 모든 법에 구비된 내적인 본성을 말합니다. 여기에 주체가 있는 것을 여시체라 하며, 제법이 역용(力用)을 지닌 것을 여시력이라 합니다. 이 역용이 작용하여 여러가지 업을 짓는 것을 여시작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근본적 원인이 있고 또 조연(助緣)이 있으며 반드시 어떠한 결과가 따릅니다. 이 근본 원인이 여시인이고, 조연이 여시연이며, 그 결과가 여시과입니다. 여시보는 인과에 따르는 과보를 말합니다. 여시본말구경은 십여시 중에서 처음의 여시상을 본(), 마지막의 여시보(如是報)를 말()이라 하여, 이들이 전체적으로 궁극적인 구경이 되어 동등한 것을 뜻합니다. 이상의 십여시가 백법계 속에 각각 다 구비되어 있으므로 마침내 천법계(千法界)가 됩니다. 그리고 이 천법계에 중생세간(衆生世間), 국토세간(國土世間), 오음세간(五陰世間)의 삼종세간(三種世間)을 곱하면 결국 삼천법계(三千法界)가 성립됩니다. 삼종세간 중에서 오음세간은 중생세간과 국토세간을 구성하는 물심(物心)적인 요소이며, 중생세간은 중생의 정보(正報), 국토세간은 의보(依報)를 말합니다.

이와같이 십법계가 서로 구족하여 백법계가 되고, 백법계가 십여시를 갖추어 천법계가 되며, 천법계가 삼종세간을 구비하여 삼천세계, 삼천법계가 성립하는데, 이 삼천세계가 일상생활에서 늘 생각하는 우리들의 한 생각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 생각 속에 삼천세계가 존재하므로 여기에서는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게 융화되고 보살과 마구니가 자리를 같이하여 아무리 다르다고 하여도 모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一切法皆是佛法]’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릇 한 마음이 십법계를 구비하고 한 법계가 또 십법계를 갖추니 백법계며, 한 세계가 삼십 가지 세간을 갖추니 백법계가 곧 삼천 가지 세간을 갖추며, 이 삼천이 한 생각 마음에 있느니라.

夫一心具十法界하고 一法界具十法界하니 百法界一界具三十種世間하니 百法界卽具三千種世間하며 此三千在一念心하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54 ]

 

십여시에 삼종세간을 곱한 것이 삼십종세간(三十種世間)입니다. 따라서 한 법계가 삼십종세간을 갖추므로 백법계는 곧 삼천종세간을 구비하게 됩니다.

 

만약 한 생각 번뇌심이 일어나면 십법계, 백법계를 구비하니 서로 방해되지 아니하며, 비록 많다 해도 있는 것이 아니며 비록 하나라도 없는 것이 아니니라. 많다고 쌓이지 아니하고 하나라고 흩어지지 아니하며, 많다고 다르지 아니하고 하나라고 같지 아니하여 많은 것이 곧 하나요, 하나가 곧 많음이니라.

若一念煩惱心起하면 具十法界百法界하니 不相妨碍하며 雖多不有하고 雖一不無. 多不積一不散하며 多不異一不同하여 多卽一이요 一卽多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104 ]

 

우리가 성불하여 대원경지의 무애지(無碍智)를 갖추어야만 부처의 성품을 구비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중생심 가운데에도 모든 여래의 지혜덕상이 완전히 구비되어 있어 한 생각 번뇌심 그 자체가 십법계, 백법계, 삼천세계를 다 구비하고 있습니다. 즉 부처의 마음[佛心]이나 중생의 마음[凡心]이나 그 자체는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심이나 범심이 서로 방해되지 아니하여 그 자체가 아무리 많아도 많은 형상을 찾아볼 수 없고, 하나라 해도 시방세계에 가득 차 있어서 적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근본 자성은 있고 없음을 떠나 있으므로 아무리 형상이 많다 해도 형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하나라 해도 찾아볼 수 없는 그것이 시방세계에 두루하여 광명이 법계를 비추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제(眞諦)인 동시에 속제(俗諦)이고 속제인 동시에 진제입니다. 차별이 즉 절대요, 절대가 즉 차별이므로 일(一多)가 원융하고 유(有無)가 무애하여 모든 것이 원융무애하게 성립됩니다.

 

마음이 일체법이고 일체법이 마음이다. 그러므로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며, 동일하지도 아니하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극히 묘하고 깊이 단절되어 식()으로 알 바가 아니고 말로써 말할 바가 아니기 때문에 부사의경계라고 말한다.

心是一切法이요 一切法是心이라 故非縱非橫이며 非一非異하며 玄妙深絶하여 非識所識이며 非言所言일새 所以稱爲不可思議境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54 ]

 

마음 밖에 일체법이 따로 없고 일체법 밖에 마음이 따로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식은 비단 사량분별 뿐만이 아니라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까지 포함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볼 때에 아뢰야식은 무기식(無記識)으로 분별(分別)이 없는 것 같지만 부처님의 대원경지(大圓鏡智)에서 볼 때는 중생의 분별심과 마찬가지로 망상입니다.

식으로 알 바가 아니다라는 뜻은 하나가 곧 일체[一卽一切]이고 일체가 곧 하나[一切卽一]라는 일심법계(一心法界)의 도리는, 그 이치가 깊고 깊어서 제8아뢰야식까지도 완전히 뿌리 뽑아야 알 수 있으며, 그 이전에는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량분별로써 알 수 없는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경지는 오직 깨쳐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말하기를 부사의경계라고 하며 묘법(妙法)이라고도 합니다.

 

세로이며 또한 가로라도 삼천법을 얻을 수 없으며,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라 해도 삼천법을 얻을 수 없으니,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소멸하므로 부사의경계라 이름하느니라. 열반경에 말하되 나고 남[生生]을 설할 수 없으며 나고 나지 않음 [生不生]을 설할 수 없으며 나지 않으면서 나는 것[不生生]을 설할 수 없으며 나지 아니하고 나지 아니함[不生不生]을 설할 수 없다고 함이 곧 이 뜻이니라. 마땅히 알아라. 제일의(第一義)가운데에서는 한 법도 얻을 수 없거니와 하물며 삼천법이리요.

亦縱亦橫이라도 求三千法不可得이며 非縱非橫이라도 求三千法不可得이니 言語道斷하고 心行處滅일새 故名不可思議境이니라. 大經云生生不可說이며 生不生不可說이며 不生生不可說이며 不生不生不可說이라하니 卽此義也當知하라. 第一義中一法不可得이어니와 况三千法이리요. [摩訶止觀;大正藏 46, p.54 ]

 

세로이며 또한 가로다함은 쌍조(雙照)를 말하고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다함은 쌍차(雙遮)를 말합니다. 쌍차쌍조가 된 자리에서는 한 법은 물론 삼천법을 얻을 수 없으며,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량분별로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 하므로 삼천법이 마치 손으로 잡을 수 있듯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완전한 오해입니다. 말로 표현하자니 삼천법이지 삼천법이란 실로 얻을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한 그 자체는 중생이 깨쳐야 비로소 알기 때문에 부사의 해탈경계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전체적으로 논하면 십법계가 모두 인연으로부터 생한 법이니라. 이 인연은 즉공즉가즉중이니 즉공은 진제요, 즉가는 속제요, 즉중은 중도제일의제이니라.

若通論하면 十法界皆是因所生法이니라. 此因緣卽空卽假卽中이니 卽空是眞諦卽假是俗諦卽中是中道第一義諦니라. [觀音玄義;大正藏 34, p.885 ]

 

이것은 공()()()의 삼제를 각각 진제(眞諦)속제(俗諦)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에 배대시켜 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연으로 생한 십법계가 공중의 삼제를 갖추고 있으므로, 이로부터 파생한 백법계천법계 내지 삼천세계 또한 삼제를 그 속성으로 삼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일념삼천의 근본원리가 바로 삼제원융(三諦圓融)에 기초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일념삼천이라 하므로 한 생각 속에 부처와 중생이 공존할 것이요, 십법계가 서로 포섭하여 백법계가 되므로 여기에도 십법계의 가장 하위인 지옥계에 불계(佛界)가 포함되고 불계에도 지옥계가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중생의 경계는 엄연히 격별한데, 이제 이 일념삼천의 법문에 의거하면 부처님과 중생이 조금도 다르지 않아 서로서로 자리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은 부처님의 경계와 중생의 경계가 서로 다른 줄 알지만, 근본자성은 중생의 경계나 부처님의 경계나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지옥중생의 경계라 해서 자성이 더 더럽혀지지 않고 부처님의 경계라 해서 그 자성이 더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근본자성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청정하고 무구해서 십법계 중생은 지옥중생이나 불계중생이나 다 같습니다. 부처가 지옥중생이고 지옥중생이 그대로 부처이며, 외도와 마구니 어떤 존재할 것 없이 모두가 서로 원융합니다. 그러므로 지옥하면 거기에 축생으로부터 불보살이 전부 다 구비되어 있고, 부처하면 거기에 지옥, 아귀, 축생 등이 다 구비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부처님 속에 지옥이 들어갈 수 있고 지옥 속에 부처님이 들어갈 수 있나 하며 의심하는 것은 변견(邊見)에 의지해서 보는 것이요, 삼제원융의 사상을 모르는 데서 하는 소리입니다. 일체만법이 다 삼제가 원융한 도리에 서 있는만큼 십법계, 백법계도 원융무애해서, 한 법계 가운데 다른 법계가 다 갖추어져 중생과 부처가 자리를 같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과 부처가 원만하게 융화되고 보살과 마구니가 자리를 함께하여, 아무리 다르다고 하여도 조금도 모순이 없습니다. 일체법이 불법 아님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를 때는 예수교와 유교, 불교가 각각 다르지만 실제로 알고 보면 전체가 다 큰 바닷물의 짠맛 하나뿐입니다. 이것이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인 것입니다. 이것을 천태종에서는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하고 화엄종에서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 합니다.

 

4. 원교(圓敎)의 중도설

 

1)원교사제(圓敎四諦)

 

원교(圓敎)는 부처님께서 평생 설법한 중에서 가장 수승한 구경의 법문을 말합니다. 천태스님 이전에는 화엄경(華嚴經)을 원교라 하였으나 천태스님에 이르러서는 법화경(法華經)을 중심한 교학을 원교라 하였습니다.

천태스님은 부처님의 일대교설을 그 설법의 내용에 따라 분류하고 화법사교(化法四敎)라 하였는데 그 사교(四敎)는 장교(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입니다. 이들 사교의 내용은 특히 고()()()()의 사제(四諦)를 설하는 방법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잘 드러납니다. 장교는 소승교(小乘敎)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이승(二乘)인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을 위하여 생멸사제(生滅四諦)를 설합니다. 세간의 인과(因果)인 고집이나 출세간의 인과인 멸도의 사제가 모두 변이하여 생멸하므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통교는 대승의 초문(初門)으로 그 가르침이 삼승(三乘)에 모두 통하여, 둔근기(鈍根機)의 보살은 이승과 같고 이근기(利根機)의 보살은 별교나 원교와 같습니다. 통교에서 설하는 사제는 무생사제(無生四諦)라 합니다. 즉 일체공(一切空)의 이치에 따라 고()의 무생(無生)이 고성제(苦聖諦), ()의 화합상(和合相) 없음이 집성제(集聖諦), 제법의 생()이 없고 멸()이 없음이 멸성제(滅聖諦), 불이상(不二相)을 관함이 도성제(道聖諦)라는 것입니다. 별교는 이승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오직 보살에게만 적용되는 가르침인데, 별교에서는 고도의 사제에 무량한 모습이 있어 제한이 없다는 무량사제(無量四諦)를 설합니다. 이상의 장교통교별교의 삼교는 방편가설이라고 하며, 부처님의 근본 뜻은 중도실상(中道實相)에 있는데, 이것을 바르게 설한 것이 곧 원교이며, 원교만이 부처님의 진정한 설법이고 일승이라고 주장합니다. 원교에서 설하는 사제는 무작사제(無作四諦)인데, 여기에서는 끊어야 할 고제와 집제도 없고 현실을 떠나서 닦아야 할 도제도 없으며, 또 나타낼 열반도 없습니다. 그래서 생사가 곧 열반이고 번뇌가 곧 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천태스님은 원교를 최상의 이근기(利根機)를 지도 교화하기 위한 법문으로 규정하고, 그 원융함을 교원(敎圓)이원(理圓)지원(智圓)단원(斷圓)행원(行圓)위원(位圓)인원(因圓)과원(果圓)으로 상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원교는 교리와 관법에서 원융함을 설하며, 특히 삼제원융을 가장 중요한 원리로 삼기 때문에 원융사상이 철저하게 적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원융 사상을 표방한 원교는 유와 무, 선과 악 등 상대법을 차단하고 이들의 원융한 도리를 설파하였기에 또한 중도이기도 합니다. 이 까닭에 원교를 중도라 설하는 것입니다.

 

원교란 바르게 중도를 나타낸 것이다. 두 변을 차단하여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며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니라. 십법계의 중생을 바라보되 거울 속의 모습이나 물 속의 달과 같아서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느니라. 필경에 실제는 아니지만 삼제의 도리가 완연히 구족되어 있느니라.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으며 한 마음 속에 있어 하나에 즉하여 셋을 논하고 셋에 즉하여 하나를 논한다. 관하는 지혜가 이미 그러하고 제()의 도리도 또한 그러하여 일제가 삼제에 즉하고 삼제가 일제에 즉하니라.

圓敎者此正顯中道遮於二邊하여 非空非假非內非外니라. 觀十法界호대 如鏡中像水中月하여 不在內不在外하고 不可謂有不可謂無畢竟非實이나 而三諦之理宛然具足하니라. 無前無後하며 在一心中하여 卽一而論三하고 卽三而論一하니 觀智旣爾諦理亦然이라 一諦卽三諦三諦卽一諦니라. [觀音玄義;大正藏 34, p.886 ]

 

원교란 중도를 바르게 나타낸 것으로 양변을 다 차단합니다. (有無)도 차단하고, (苦樂)도 차단하며, 선과 악, 생사와 열반, 마구니와 부처 등 상대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차단해 버립니다. 상대적인 어느 한 쪽을 집착하게 되면 변견으로서 불법이 아니고, 중도도 아닙니다.

이와같이 원교는 중도를 표방한 것인데, 양변을 떠난 동시에 양변에 원융하여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며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닙니다. 이러한 원교의 중도관에 따르면 십법계의 중생을 보되 거울 속의 모습과 같고 물 속의 달과 같아서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밝은 거울 속의 사람을 볼 때 그 안에 분명히 사람이 있기는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아니며, 물 속에 달이 비치어 달이 물 속에 있기는 있지만 실제로 달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중도라는 것도 이 거울 속의 모습이나 물 속의 달과 마찬가지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거울 속의 모습과 물 속의 달은 예로부터 중도를 나타내는 비유로 자주 사용되어 왔습니다. 또한 이 말은 천태스님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화엄종의 청량국사도 황태자가 질문한 심요(心要)에 대하여 대답할 때, 이 거울 속의 모습과 물 속의 달로 비유하여 불법이 중도라는 것을 표명했습니다.

이는 거울 속의 모습이나 물 속의 달이 결국 실제가 아니면서도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듯이 삼제의 이치가 완연히 드러납니다. 실제가 아니기 때문에 유가 아니면서 유고, 무가 아니면서 무이므로 묘법(妙法)이라 말합니다.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공중이 원융함을 비유로 말하는 것입니다.

관하는 지혜라는 것은 차()면에서는 공()이라 하고, ()면에서는 혜()라 하며, ()을 등지(等持)라 합니다. 즉 쌍차면은 공이라 하고 쌍조면은 혜라 하며 쌍차쌍조는 중이라고 합니다. 중도실상은 원융하여 공혜(空慧)라 하든지 등지(等持)라 하든지, 또는 차조니 공중이니 하여 서로 표현하는 것은 달라도 그 내용은 같습니다. 셋이 즉 하나고 하나가 즉 셋이며, 하나 밖에 셋이 따로 없으며 셋 밖에 하나가 따로 없습니다.

제의 도리는 일제(一諦) 내지 삼제(三諦)의 도리로서 정()과 혜()를 구족하여 등지가 되면 공중의 삼제가 원융한 도리를 알 수 있습니다. ()면에서는 공()()이라 하고, ()면에서는 가()()라 하는데, 체와 용은 본래 같은 것입니다. 불과 빛이 똑같은 것이어서 불을 제외하고 빛이 없고, 빛을 제외하고 불이 없는 것과 한가지입니다. 그래서 삼팔선을 긋듯이 분별지어 놓으면 삼제원융이라 할 수 없고 변견(邊見)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일체만법의 근본 자체가 원융하여 자성이 원래 공한 데에 일체 현상이 나타나고 일체 현상이 나타난 곳에 자성이 공해 있습니다. 연기하는 이대로가 공이고 색이지 색 밖에서 공을 따로 찾고 공 밖에서 색을 따로 찾으면 이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이것이 우주법계의 근본원리로 이 법은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이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깨치고 바로 알아서 중생에게 소개한 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불법이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원교라는 것은 중도를 근본으로 삼아 삼제가 원융하여 쌍차쌍조하며 차조동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실제로 천태 지자스님이 주장하는 법화경의 근본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심삼관(一心三觀)이나 일념삼천(一念三千) 같은 불교의 도리들은 실제로 깨쳐야 알지 깨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원교에서의 수행방법을 지관(止觀)이니 선()이니라고 부릅니다만, 결국 화두를 들어서 일심삼관을 실제로 보고 일념삼천을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입이 아프도록 밥 이야기를 해보았자 배부를 수는 없습니다.

천태스님의 모습을 보면 머리 위에 혹같이 솟은 것이 있습니다. 천태스님이 생전에 얼마나 정진을 열심히 했던지, 졸리면 머리 위에 커다란 물건을 만들어 얹어서 앉아계시곤 했는데 그 때문에 살이 부풀어 올라 육두(肉頭)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공부를 성취한 뒤에도 평생토록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머리 위에 얹는 것을 가리켜 선진(禪鎭)이라 합니다. 정상적인 육계가 아니고 선진을 올려 놓고 정진을 하다보니 살이 부풀어올라 육두같이 생긴 혹을 가지신 분이 천태스님입니다. 그런데 혜사(慧思)스님은 정말로 정상적인 육계가 솟아 있었습니다. 천태스님이 화엄종과 다른 점은 교리면에서 뿐만 아니고 실제 정진하여 깨치는데 치중한 것입니다. 천태스님은 스스로 자기는 선종이지 교종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정법이 28대를 내려오면서 천태로 계승되고 달마스님이나 육조의 선종은 실제로 선종이 아니고 천태종만이 선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주장할만큼 천태종에서는 교리보다 실천적인 선정을 익히는 것이 보다 근본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중도를 관하면 일체 원교를 종횡으로 분명히 보느니라.

觀心中道하면 見一切圓敎 橫堅分明하니라. [維摩玄疏 , p.549 ]

 

양변을 여의는 것이 중도로서 차별의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모든 것이 다 융화하여 원융하게 됩니다. 삼제가 원융한 도리를 일체만법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 원교인만큼, 중도를 깨쳐서 양변을 여의어 원융자재한 도리를 알면 이에 모든 원교의 도리를 분명히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단지 원돈교 하나만이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중도로서 바른 관법이니 오직 이것이 실제의 관세음이요 나머지는 모두 방편설이다.

故知하라 但一圓頓之敎一切種智中道正觀이니 唯此爲實觀世音이요 餘皆方便說也니라. [觀音玄義;大正藏 34, p.887 ]

 

참으로 성불해야만 불지(佛智)인 일체종지를 얻으며, 이때에 비로소 중도의 정관(正觀)을 성취하게 됩니다. 이러한 중도정관은 천태종의 교리에 의하면 오직 원교에서만 가능한데, 원교를 알려면 중도를 알아야 되고 중도를 알려면 원교를 알아야 됩니다. 원교와 중도는 둘이 아니어서, 교리적으로 표현할 때는 원교이지만 그 내용은 중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의 관세음보살입니다. 관세음이라 해서 어디 다른 곳에 관세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도를 깨칠 때 그때 관세음을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방편설에 불과합니다. 곧 중도만이 실제로 부처님의 바른 사상이며 그 이외는 전부 다 방편적 가설(假說)입니다. 따라서 원융한 중도정관 이외에는 다 방편설인만큼 그 방편설을 실제의 불교인 줄 알아서는 안됩니다.

일체제불일체조사일체보살이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들이고 또 중도를 바로 깨쳐야만 불보살(佛菩薩)을 볼 수 있습니다. 성불하여야만 중도를 안다고 했는데 왜 보살을 들먹이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관세음보살은 과거에 이미 성불하고 난 후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보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현세에 나오신 분입니다. 중도를 깨친 입장에서는 석가불과 똑같습니다. 중도를 깨달으면 보살이라 해도 되고 아라한이라 해도 되고 조사라 해도 무방합니다. 중도만 바로 깨치면 그만입니다.

 

오직 원교의 교()와 관()만이 실상법문이다. 능히 십법계와 천가지 성상(性相)에 두루하여 삼제가 일시에 원만하게 통하니 원만하게 통한 중도가 이제를 쌍조하여 홀로 넓은 문 [普門]이라 부른다.

唯圓敎敎觀實相法門이가 能遍十法界千性相하여 三諦一時圓通하니 圓通中道雙照二諦하여 獨稱爲普門也니라. [觀音玄義;大正藏 34, p.888 ]

 

일체법을 분류할 때 실상(實相)과 가상(假相)으로 나누는 데서는 실상을 알고 보면 가상이 따로 없습니다. 실상이라고 따로 내세운 까닭은 가상만을 보는 중생, 피상적인 모습만 보는 중생, 즉 만법의 근원을 보지 못하는 중생을 위하여 실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지만 실상을 바로 알면 일체가 실상 아님이 없습니다.

원교의 교와 관은 실상법문으로 제법의 실상은 십법계와 천가지 성상(性相)에 보편적으로 두루하여 삼제가 일시에 원만하게 통해 있으니 한 군데로 치우치거나 막힌 곳이 없습니다. 삼제가 원융하게 통한다는 것은 공이라면 가고, 가라면 중이며, 중이라면 공가가 다 들어가고, 가라 하면 공중이 다 들어가서 하나를 들면 나머지가 전부 다같이 통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한 가지만 집착하게 되면 실제로 중도와 실상을 모르는 것이고 삼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삼제가 원만하게 통하면 이에 따라 원만한 중도가 이제(二諦)를 쌍조(雙照)하며, 나아가 유무를 쌍조하고 선악(善惡)을 쌍조하고 시비(是非)를 쌍조하고 마불(魔佛)을 쌍조하게 됩니다.

넓은 문이라 표현한 것은 시방세계의 미진수 불찰(微盡數佛刹)에 중도가 통하지 않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원교의 중도가 곧 실상이니라.

圓敎中道卽是實相이니라. [觀音玄義;大正藏 34, p.890 ]

 

거듭 원교를 들먹이는 까닭은 중생이 변견으로써 중도를 모르고 자주 오해를 하기에 원융한 원교를 표방하여 중도를 내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전에 연기와 중도를 잘 몰랐을 때에는 불교를 실상계통과 연기계통의 두 가지로 나누어, 실상계통은 법화고 연기계통은 화엄으로서 실상과 연기를 대립적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중도라는 것을 알고 보면 실상이 곧 연기고 연기가 곧 실상입니다. 그래서 지금에는 실상과 연기를 대립적인 두 가지로 나누지 않습니다.

이 중도는 소승이나 삼승의 교리가 아니고 일승원교라는 것을 말하는데 양변을 여 중도사상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후대에 발달된 사상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초전법륜할 때에 말씀하신 중도인 것입니다.

 

2)원교사문(圓敎四門)

 

이것은 원교의 중심사상을 유()()역공역유(亦空亦有)비유비무(非有非無)의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인데, 주요 내용은 번뇌가 보리이고 무명이 법성이라는 원융한 도리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네 가지로 분별하여 설하기는 하지만 그 네 가지가 각각 격리되지 않고 서로 원만하게 융화하므로 여기에서 유()와 공() 등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中道)의 묘()가 은연히 드러납니다.

 

원교의 네 문은 묘한 이치를 단박 설하여 원융무애하니 차례대로 지내는 것과는 다르다. 어떤 것이 네 가지 문인가. 견사(見思)의 가()를 관()하니 즉 법계로 일체불법을 구족하고, 또 모든 법이 곧 법성(法性)의 인연이요, 내지 제일의도 역시 인연이다. 열반경에 말씀하시되, 무명을 멸함으로 인하여 타오르는 삼보리(三菩提)의 등()을 얻는다고 하니 이것을 유문(有門)이라 하느니라.

圓敎四門妙理頓說하여 圓融無碍하여 異於歷別하니 云何四門觀見思假하니 卽是法界具足佛法이요 又諸法卽是法性因緣이요 乃至第一義亦是因緣이라 大經, 因滅無明하여 卽得熾燃三菩提燈이라하니 是名有門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75 ]

 

차례대로 지내는 것과 다르다함은 각 부문이 서로 통하지 못하고 각각 구별되어 나누어져 있지 않고 하나하나의 부문에 나머지 세 부문이 다 구족되어 원융하다는 뜻입니다.

견사(見思)의 가()를 관하니에서 견과 사는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을 말하는데, 견혹은 불교의 진리를 알지 못하여 생기는 후천적인 번뇌이고, 사혹은 습관적으로 사물에 대하여 애착하는 선천적인 번뇌입니다. 이 견혹과 사혹은 삼계 생사윤회의 번뇌로서, 견과 사의 가()란 유문(有門)에서 총칭하는 생사의 번뇌를 말합니다. 견사의 가가 곧 법계라 하는 것은 무명 이대로가 불성이라는 말과 같으니, ()()() 이대로가 불성이고 열반으로서 일체불법을 다 구족하고 있습니다.

흔히 견가 이대로가 법계이고, 무명 이대로가 불성이며 중생 이대로가 부처라 하니, 그러면 우리가 공부할 것도 없고 성불할 것도 없으며 20, 30일 앉아서 법문 듣는 것이 쓸데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외도의 소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명 이대로가 법계이며 불법인 줄 알려면 실제로 법계와 불성을 장애하는 무명의 구름을 걷어내고 제거해야 합니다. 무명을 멸하기 전에는 무명 이대로가 법계이고 불법인 줄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열반경에 말씀하시길 무명이 완전히 멸하는 것을 인하여 삼먁삼보리의 등이 타오르는 것을 얻어정각을 이룬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유문(有門)이라 하는데 유라 해도 여기에는 무도 포함되어 있고 비유비무(非有非無)와 역유역무(亦有亦無)도 포함되어 있어 나머지 세 부문이 다 따라오는 유()입니다.

 

공문(空門)이란 환화(幻化)의 견과 사 및 일체를 관하니 인()에도 있지 아니하고 연()에도 있지 아니하여 자아 및 열반이 둘 다 공하다. 오직 공에 집착하는 공병(空病)이 있지만 공병도 또한 공하니 이것이 곧 삼제가 모두 공함이다.

空門者觀幻化見思及一切不在因不在緣하여 我及涅槃二皆空이라 唯有空病이어나 空病亦空하니 此卽三諦皆空也.

 

환화의 견과 사에서 견과 사는 앞에서 말한 삼계생사의 번뇌인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을 말합니다. 그런데 견혹과 사혹은 그 본성이 실제로 공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환화의 견사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끝내 생()과 멸(), ()과 연()이 없으므로 마침내 자아와 열반(涅槃)이 모두 공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오직 일체가 공하다는 공병(空病)만이 남는데, 이 공병이 또한 공하여 공중 삼제가 모두 공해 버립니다.

앞에서 말한 유()는 말을 바꾸어 가()라 하고 여기서 말한 공()은 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일체만법이 유()라면 유()고 공()이라 하면 공()인데 이것이 근본적으로는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니어서 언어와 생각이 다 떨어진 동시에 유라 해도 좋고 공이라 해도 좋습니다. 이것은 결국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표현을 달리하여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무엇을 공문이면서 또한 유문 [亦空亦有門]이라 하는가. 환화의 견과 사가 비록 진실은 없으나 거짓 이름을 분별하면 곧 다함이 없으니 마치 한 미진 가운데에 삼천대천의 경권(經卷)이 있는 것과 같느니라. 제일의에서 요동하지 아니하고 능히 모든 법상을 잘 분별하며, 또한 대지가 하나이나 능히 여러가지 싹들을 생기게 함과 같이 이름과 모습이 없는 가운데 거짓으로 이름과 모습을 말하며, 내지 부처도 또한 단지 이름만 있으니 이것이 있으면서 또한 없는 문 [亦有亦無門]이니라.

云何亦空亦有門幻化見思雖無眞實이나 分別假名이면 則不可盡이니 如一微塵中有大千經卷이라 於第一義而不動하고 善能分別諸法相하며 亦如大地一이나 能生種種芽하여 無名相中假名相說하며 乃至佛亦但有名字하니 是爲亦有亦無門이니라.

 

부처라 해도 부처란 형상을 얻어 볼 수 없으니 무문(無門)이고, 그러면서 부처님이란 존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유문(有門)입니다. 따라서 유가 즉 무고 무가 즉 유이니 역유역무문(亦有亦無門)이 됩니다. 앞에서 공과 유를 말했는데 이 공과 유는 언제든지 역유역무를 포함하는 공과 유지 역유역무를 떠나서 공과 유가 따로 없습니다.

 

무엇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문[非有非無門]이라 하는가. 환화의 견과 사를 관하니 곧 법성이다. 법성은 불가사의하여 세간의 것이 아니므로 있는 것이 아니요, 출세간의 것이 아니므로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색과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으니 하나가 중이면 일체가 중이어서 비로자나(毘盧遮那)가 일체처에 두루한다. 어찌 견사가 있다고 해서 진실한 법이 아니라 하리오. 이것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문 [非有非無門]이라고 한다.

云何非有非無門觀幻化見思卽是法性이라 法性不可思議하여 非世故非有非出世故非無一色一香無非中道一中一切中하여 毘盧遮那遍一切處니라. 豈有見思라가 而非實法이리오 是名非有非無門이니라.

 

결국 유를 바로 알게 되면 나머지 셋을 알게 되고, 무를 알게 되어도 나머지 셋을 알게 되어 하나가 곧 넷이고 넷이 곧 하나(一卽四四卽一)가 되어 전체가 원융무애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역유역무비유비무의 네 문이 원융해서 하나도 막힌 데가 없다 하여 네문이 따로 없는 줄 알면 이것도 잘못입니다. 네 문이 따로 있으면서 또한 원융한 곳에 우리 불법의 묘()가 있는 것입니다.

 

3)원돈지관(圓頓止觀)

 

천태학에서의 수행법을 지관(止觀)이라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지(: Śamatha)는 산란한 생각들을 그친다는 뜻이고, (: vipaśyanā)은 제법의 이치를 관조한다는 뜻입니다.

천태스님은 부처님의 일대교(一代敎)를 설법 내용에 따라 장교(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의 사교(四敎)로 교판하였듯이, 수행법인 지관도 사교에 따라 구별하여 장교통교별교의 지관을 상대지관(相對止觀)이라 하고, 원교의 지관을 절대지관(絶對止觀) 또는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원돈지관은 원교의 실상을 마음으로 관하여 실증하는 지관을 말합니다. 천태스님의 여러 저술 가운데 특히 마하지관(摩訶止觀)에서 이 원돈지관을 상술하고 있습니다. 원교의 이론이 전반적으로 원융한 사상과 더불어 중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원교의 실천 관법인 원돈지관도 역시 중도의 실상경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다[一色一香無非中道]’라는 천태종의 유명한 글귀는 결코 이론적인 공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마음으로 관하여야 할 것입니다.

 

법의 자성이 항상 적멸한 것이 곧 지()의 뜻이요, 적멸하면서도 항상 비추는 것이 곧 관()의 뜻이니라.

法性常寂卽止義寂而常照卽觀義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18 ]

 

()란 정()이고 관()이란 혜()인데, 법성 자체의 체()면으로 보아서는 지()라 하고 용()면으로 보아서는 관()이라 할 수 있으므로 결국은 지가 곧 관이고 관이 곧 지입니다.

일체만법이 이렇게 상적(常寂)하면서도 상조(常照), 쌍조(雙照)합니다. 상적을 제외하고 쌍조가 없고 쌍조를 제외하고 상적이 없으니, 불 밖에 빛이 없고 빛 외에 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정(有情)이고 무정(無情)이고 할 것 없이 일체만법이 상적쌍조한 상적광토(常寂光土)에 있으며 상적광토를 여의고는 일체만법, 우주법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방편도 아니고 실상도 아니며 이치의 성품이 항상 적멸함을 이름하여 지()라 하고, 적멸하며 항상 비추어 방편이기도 하고 실상이기도 함을 이름하여 관()이라 한다. 관이므로 지혜라 하고 반야라 하며, ()이므로 눈[]이라 하고 수능엄이라 한다. 이러한 이름들은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합하지도 아니하고 흩어지지도 아니하여 곧 불가사의한 지와 관이니라.

非權非實이며 理性常寂名之爲止寂而常照하여 亦權亦實名之爲觀이라. 觀故稱智稱般若止故稱眼稱首楞嚴이라. 如是等名不二不別하고 不合不散하여 卽不可思議之止觀也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34 ]

 

()이란 방편이고 실()이란 실상이므로 권실(權實)이란 방편과 실제의 두 상대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란 용()으로 보아 지혜라 하고 반야라 하며, ()는 체()로 보아 눈[]이라 하고 수능엄(首磅嚴)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름들은 불과 빛의 관계처럼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아니하여 보통 중생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경계이니 이것이 중도입니다.

 

지는 곧 본체의 진실함[體眞]이니 비추면서도 항상 적멸하고, 지는 곧 인연을 따름[隨緣]이니 적멸하면서도 항상 비추며, 지는 곧 지()아닌 지()이니 쌍차쌍조이다. 지는 곧 부처의 어머니이고 지는 곧 부처의 아버지이며, 또한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 지는 곧 부처의 스승이고 부처의 몸이다.

止卽體眞이니 照而常寂이요 止卽遂緣이니 寂而常照止卽不止止이니 雙遮雙照. 止卽佛母이고 止卽佛父이며 亦卽父卽母止卽佛師이고 佛身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58 ]

 

체진(體眞)은 진공(眞空)에 비유하고 수연(隨緣)은 묘유(妙有)에 비유한 것입니다. () 자체가 이대로 진실인데 진공이라 하면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단공(斷空)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항상 대광명이 우주를 비추면서도 항상 적적합니다. 이렇게 지는 진공이면서도 또한 수연(隨緣)이니 지를 전환하여 바로 작용하면 그대로가 수연이며 묘유(妙有)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적멸하다 해도 진공 이대로가 묘유이므로 적이상조(寂而常照)하고, 아무리 천만 가지로 변동하고 무한한 활동을 해도 항상 적멸하여 조이상적(照而相寂)합니다. 이와같이 지는 적멸하면서도 항상 비추고 진공이면서도 묘유이므로, 지는 지가 아니면서도 지가 되어[止卽不止止] 마침내 쌍차하고 쌍조합니다. 부처님이 경전에서 말씀하실 때는 보통 쌍차만 가지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쌍차 속에 근본적으로 쌍조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쌍조를 제외하고 쌍차가 없으며 쌍차를 제외하고 쌍조가 없습니다. 같은 이유로 여기에서 지 하나만을 거론한 이유는 지에 관()의 뜻이 내포되어 있어서 관을 따로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를 곧 부처님의 어머니요 아버지라 부른 까닭은 일체제불과 천하 선지식이 모두 이 도리를 알고 깨쳤기 때문에 이것은 실제로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의 부모인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라는 것은 쌍차가 쌍조고 쌍조가 쌍차임을 거듭 강조하기 위하여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만약 양변을 그치는[息二邊] 지는 곧 생사와 열반, 공과 유가 쌍으로 적멸하니라. 이 지에 의지하여 중도의 정을 발생하고, 부처의 눈이 활짝 열려 비추는 것이 두루하지 않음이 없어 중도삼매를 이루느니라.

若息二邊止卽生死涅槃空有雙寂하니라. 因於此止하여 發中道定하고 佛眼豁開하며 照無不遍하여 中道三昧成하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25 ]

 

천태교학에서는 지에 대하여 흔히 체진지(體眞止)수연지(隨緣止)식이변지(息二邊止)의 세 가지 지를 거론합니다. 체진지는 지에 의하여 망상을 내지 않고 혜안(慧眼)이 열려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보는 것이며, 수연지는 방편적인 거짓 마음[假心]을 발하여 법안(法眼)을 얻어 속제(俗諦)를 보는 것입니다. 식이변지는 생사와 열반을 모두 멀리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취하는 것이 목적인데 이것은 곧 생사와 열반의 양변입니다. 그러나 열반에 집착하게 되면 생사에 집착하는 병과 똑같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생사와 열반을 다 버리는 중도의 입장을 취합니다. 이와같이 생사와 열반, 공과 유의 양변을 버리고 중도에 머무는 지를 바로 식이변지(息二邊止)라 합니다. 생사와 열반, 공과 유를 다 버리면 쌍적하여 중도의 정()이 발생합니다. 그러면 부처의 눈[佛眼]이 활짝 열려 시방 법계를 다 비추고도 남음이 있는 대지혜광명이 발현됩니다. 여기에서 중도삼매를 이루어 성불하게 되는데, 이것이 부처님이 정등각한 근본 내용입니다.

 

중도제일의관은 교묘하게 네 가지 실단[四悉檀]을 사용하여 곧 일체종지의 부처눈[佛眼]을 얻느니라.

中道第一義觀巧用四悉檀하여 卽得一切種智佛眼也니라. [維摩經玄疏 1;大正藏 38, p.521 ]

 

중도제일의관이란 불교의 가장 근본되는 관법을 말합니다. 사실단(四悉檀)의 실단(悉檀)이란 siddhānta의 음역으로 종의(宗義)정설(定說)성취(成就)라는 뜻인데, 사실단이란 세계실단(世界悉檀)각각위인실단(各各爲人悉檀)대치실단(對治悉檀)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의 네 가지로써 중생을 교화하여 성숙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눈[佛眼]’이란 시방 미진수 세계를 비추고도 남음이 있는 대혜안(大慧眼)대법안(大法眼)을 말합니다. 이 불안을 성취하는 것을 정등각이라 하고 견성이라 하고 성불이라 합니다. 즉 원교에서는 이변을 쌍차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지관(止觀)이라 하기도 하고 적조(寂照)라 하기도 하며, 이것을 성취하면 중도삼매(中道三昧)고 성불입니다.

 

마음이 중도를 반연하여 실상의 지혜에 들어감을 지()에 머무는 뜻이라 하니 실상의 성품은 곧 지()도 아니고 지 아님도 아닌 뜻이다. 또 이 일념이 능히 오주(五住)를 뚫어서 실상에 도달하니 실상은 관()도 아니고 관 아님도 아니다. 이런 뜻이 다만 한 생각 마음 가운데 있어서, 진제(眞際)를 움직이지 아니하고도 여러 가지 차별이 있다. 경에 말하기를 능히 모든 법의 모습을 잘 분별하지만 제일의에서는 움직이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비록 많은 이름이 있으나 대개 반야의 한 법이니 부처님이 여러 이름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여러 이름이 모두 원융하여 모든 뜻도 또한 원융하다. 상대절대대대하는 체가 불가사의하니 불가사의하므로 장애가 있지 아니하며, 장애가 있지 아니하므로 구족하여 멸함이 없다. 이것이 원돈의 교상(敎相)으로 지관의 체를 나타낸다.

心緣中道하여 入實相慧名停止義實相之性卽非止非不止義니라. 又此一念能穿五住하여 達於實相하니 實相非觀亦非不觀이니라. 如此等義但在一念心中하여 不動眞際하고 而有種種差別하니 經言善能分別諸法相호대 於第一義而不動이라하니라. 雖多名字蓋乃般若之一法이니 佛說種種名이라. 衆名皆圓하여 諸義亦圓이라. 相對絶對待體不可思議하니 不可思議故無有障碍하며 無有障碍故具足無滅이라. 是圓頓敎顯止觀體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25 ]

 

()에 머문다함은 모든 것이 다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오주(五住)란 오주지혹(五住地惑)의 준말로서 견혹(見惑)사혹(思惑)무명(無明)의 번뇌를 다섯 가지로 가지고 분별한 것인데, 삼계에서 생사에 집착하게 하는 번뇌를 총칭하는 것으로 알면 됩니다. 그리고 일념이 능히 오주지의 번뇌를 다 끊어버리면 중도에 도달하여 바로 깨닫게 되는데, 도달된 이 실상은 지()도 아니고 지 아님도 아니며, ()도 아니고 관 아님도 아닙니다. 이와 같은 뜻이 마음 한가운데 있어서 진제(眞諦), 즉 마음의 근본 자성자리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 차별이 있으며 또한 아무리 차별되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비유하면 밝은 거울에 천차만별의 형상이 비치어도 밝은 거울이 요동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같이 중도정관(中道正觀)을 성취하여 진제에 들어가면 아무리 세간의 생멸상을 살피어도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동()하면서 공()하고 공()하면서 동()하여 동공이 완전히 상통해집니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능히 모든 법상을 잘 분별하지만 제일의에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쌍차가 쌍조고 쌍조가 쌍차된 곳입니다. 여기서 중도라 하든지 열반이라 하든지 부처라 하든지 중생이라 하든지, 이러한 온갖 표현은 다 반야 한가지의 법을 여러가지로 말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참된 도리의 법계가 이러하므로 이를 표현한 모든 이름이 원융하며 뜻도 또한 원융합니다. 이와 같은 까닭에 상대와 절대와 서로 상대하는 체가 불가사의하며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장애가 없고 장애가 없으므로 구족하여 멸함이 없으니 이것이 원돈의 교상[圓頓敎相]으로서 지관의 당체를 밝힌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이든지 가든지, 부정이든지 긍정이든지 전체가 원융하여 앉아도 좋고 서도 좋고 누워도 좋은 대자유이며 대자재인 것입니다. 전체가 장애가 없어 부처도 좋고 중생도 좋고 도둑놈도 좋지만, 한편으로는 부처도 안되고 중생도 안되고 무어라 이름붙여도 안됩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도리로 이것은 깨치기 전에는 말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즉 장님에게는 앉으나 서나 넘어지는 것 뿐이므로 자유가 하나도 없으며 오직 눈뜨고 볼 일입니다.

 

원돈(圓頓)이란 처음에 실상을 반연하여 경계에 이르러 곧 중도로서 진실 아님이 없다. 인연을 법계에 매고 생각을 법계에 하나로 하여,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으니 자기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도 또한 그러하다. ()과 입()이 모두 그러하니 고()를 가히 버릴 것 없고, 무명의 번뇌가 곧 보리(菩提)니 집()을 가히 끊을 것 없으며, ()과 사()가 모두 한가운데이니 도()를 가히 닦을 것 없고, 생사가 곧 열반이니 멸()을 가히 증득할 것 없다. 고와 집이 없으므로 세간이 없고 도와 멸이 없으므로 출세간이 없다. 순일한 실상이니 실상 밖에 다시 다른 법이 없다. 법성이 고요함을 지라 하고 고요하면서 항상 비추는 것을 관이라 한다. 비록 처음과 나중을 말하나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이것을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 한다.

圓頓者初緣實相하여 造境卽中하여 無不眞實이라 繫緣法界하고 一念法界하여 一色一香無非中道己界及佛界衆生界亦然하니라. 陰入皆如하니 無苦可捨無明塵勞卽是菩提無集可斷이요 邊邪皆中正이니 無道可修生死卽涅槃이니 無滅可證이니라. 無苦無集故無世間이며 無道無滅故無出世間이라. 純一實相이라. 實相外更無別法이라.

法性寂然名止寂而常照名觀이라. 雖言初後無二無別하니 是名圓頓止觀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1 ]

 

원돈이란 일체만법이 원융무애하기 때문에 원()이라 하고, 거기에 시간적인 간격이 없으므로 돈()이라 합니다. 하나의 도가 일체의 도로서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원융하고 자재함을 원돈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원돈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실상을 알아 일체 경계가 모두 중도 아님이 없고 진실 아님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인연을 법계에 매어, 즉 법계에 통하게 되어 일념 이대로가 법계로서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실상이란 가상(假相) 밖에 실상(實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에게 상이라 하면 가상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부득이 실상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즉 중도의 실상은 생멸을 떠나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천차만별하는 이 경계 가운데 있어 진진찰찰이 앉으나 서나 중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선과 악, 천당과 지옥 할 것 없이 천경계 만차별이 중도 아님이 없고 진실하여, 일념 이대로가 법계이고,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모두 중도이며 자기의 세계나 부처의 세계나 중생의 세계도 또한 그러합니다. 모두가 원융하며 중도이고 부사의한 해탈경계인 것입니다.

()과 입()이 모두 그렇다에서 음()은 오음(五陰)을 말하고 입()은 내육입(內六入)인 육근(六根)이나 외육입(外六入)인 육진(六塵)을 말하는데, 이것이 다 그러하다는 것은 천당과 지옥 불계와 중생계 할 것 없이 모두가 진여(眞如)의 대용(大用)으로서 전부 중도 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옥 천당 할 것 없이 모두가 부사의 해탈경계로서 중도를 이루니 고()는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습니다. 즉 무명의 번뇌 이대로가 보리이므로 집()을 가히 끊을 것이 없습니다.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은 무명 진로 그대로 전체가 보리열반이며 변견(邊見), 사견(邪見) 이대로가 다 한가운데[中正]로서 도를 가히 닦을 것이 없습니다. 불교를 믿거나 예수교를 믿거나 무슨 교를 믿어도 중도를 깨친 사람에게는 전체가 다 중도이지 중도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중도는 저 바닷물과 같이 전체가 다 짠맛 뿐으로 다른 맛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사 이대로가 열반으로서 멸을 가히 증득할 것이 없습니다. 고와 집이 없는 까닭에 세간도 없고, 도와 멸이 없기 때문에 출세간도 없으니, 전체가 다 법계이고 진여이며 순일한 실상으로 한 법도 버릴 것이 없으며 한 법도 취할 것이 없습니다. ‘실상 외에 다시 다른 법이 없어쌍차가 되고 법성이 고요하며부동함을 지()라 하니 쌍조가 되어 고요한 가운데 항상 대광명이 시방법계를 비추는 것을 관()이라 합니다. 비록 처음과 나중을 말하나 이것은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이것을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삼계가 실제로 원융해서 모든 것이 진여법계 아님이 없고 진여대용 아님이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중생이라 해도 좋고 부처라 해도 좋으며 또한 중생이라 해도 안되고 부처라 해도 안됩니다. 구슬을 굴리는 것과 같아 거기에는 어떠한 규격이나 걸리는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것을 삼계가 원융한 중도정관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 안될래야 안될 수 없습니다.

객담을 하나 하겠습니다. 전에 내가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 머물고 있을 때, 유점사(楡岾寺)에 예수교의 큰 학자가 한 사람 왔었습니다. 한 스님이 안내를 하면서 하나님이 어느 곳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하나님이 없는 곳이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그것은 어지간히 맞는 소리입니다. 그러자 안내하던 스님이 탑을 가리키면서 저 속에도 하나님이 들어앉았느냐고 반문하자, 그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곤란하단 말입니다. 불교의 탑인데 그 안에 하나님이 들어앉아 있다고 하면 하나님이 망신이 되겠거든요.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아니, 당신이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저기는 하나님이 왜 못 들어갑니까하니 그는 그만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가버렸어요.

실로 예수교는 그런 식입니다. 요즘은 이론이 다소 발달되어서 하나님이 똥덩이 속에도 있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불교는 일체법이 모두 불법으로서 실제로 정(定慧)가 사라지고 중생과 부처가 완전히 멸한 곳에, 진진찰찰 그 어느 곳이든지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고 안 모신 곳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그럼, 좋다. 우리 가사장삼 다 벗어버리고 술도 한 잔하고 소도 잡고 춤도 추어 보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경우도 그런 대장부만 나오면 그런대로 괜찮은데 만약 잘못 알고 경계에 집착하면 그 사람은 참으로 외도이며 마구니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일체가 원융하다고 말한 것은 그 관점을 근본무명이 완전히 끊어져 중도실상을 바르게 증득한 데에 두고 하는 말이지 중생의 무명경계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눈 뜬 사람은 앉아도 광명이고 서도 광명이고 누워도 광명이지만, 눈감은 사람은 앉아도 서도 누워도 캄캄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고 무명업식에 얽매인 사견을 원융무애한 것으로 집착하면 이 사람은 끝내 지옥 중에서도 아비지옥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이 원융무애함을 바로 알고 바로 수용하려면 가장 빠른 길로 화두를 들어 진여자성(眞如自性)을 바로 깨치는 것이 좋습니다. 삼제가 원융한 원돈지관은 이 무엇인가(是甚麽)’를 열심히 참구하면 마침내 알게 될 것이지만, 이와같이 하지 않고 이론과 말만 따라가면 결국에는 지옥고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옥이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 감으면 앉으나 서나 그대로 지옥이고 눈 뜨면 앉은 곳 선 곳 그대로가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4)원교의 십이인연

 

이제부터 해설하는 장교통교별교원교의 사교(四敎)에서 말하는 십이인연설은 마하지관(摩訶止觀)에서 지관(止觀)을 설명하는 가운데 일부입니다. 천태스님은 원교와 장교통교별교의 삼교는 그 법의 의미가 같지 않음을 교판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로 논의하였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앞에서 일부 언급한 사종사제(四種四諦)이며, 여기에서 해설하는 십이인연도 사교의 차이를 분별하여 설한 것입니다.

일체 불법의 근본사상이 십이연기(十二緣起)에 포함된다는 것은 원시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도록 변함없이 일관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천태스님도 불교를 사교(四敎)로 구분하고 그 사교에서 설하는 십이인연설을 통하여 각 교의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구별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교 중에서도 십이인연이 중도라고 설한 것은 바로 원교라고 단정하여 천태교의 우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원교의 실상을 해명하는 교설 중의 하나인 십이인연설에서도 중도사상은 뚜렷히 부각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량에 앉아 법륜을 굴리며 열반에 들어감이 모두 십이인연에 의한다. 대품반야경에 말하기를, 만약 능히 깊이 십이인연법을 보면 곧 이것이 도량에 앉는 것이라고 하였다. 도량에는 넷이 있다. 만약 십이인연이 생멸함을 관하여 구경으로 하면 곧 삼장(三藏)의 부처님이 도량에 앉되 수목의 풀자리 [草座]이며, 십이인연이 곧 공함을 관하여 구경으로 하면 통교의 부처님이 도량에 앉되 칠보나무의 하늘옷 자리(天衣座)이며, 십이인연이 거짓 이름 [假名]임을 관하여 구경으로 하면 별교의 사나불(舍那佛)이 도량의 칠보자리에 앉으며, 십이인연이 중()임을 관하여 구경으로 하면 원교의 비로자나불이 도량에 앉되 허공을 자리로 삼는다. 마땅히 알아라. 크고 작은 도량이 모두 십이인연관을 벗어나지 않는다.

佛坐道場轉法輪入涅槃皆約十二因緣이니라 大品云若能深觀十二因緣法이면 卽是坐道場이라하니라. 道場有四하니 若觀十二因緣生滅究竟이면 卽三藏佛坐道場木樹草坐若觀十二因緣卽空究竟이면 通敎佛坐道場七寶樹天衣座若觀十二因緣假名究竟이면 別敎舍那佛坐道場七寶座若觀十二因緣中究竟이면 是圓敎毘盧遮那佛坐道場虛空爲坐니라 當知하라 大小道場不出十二因緣觀也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128 ]

 

만약 능히 깊이 십이인연법을 보면 곧 이것이 도량에 앉는 것이니라에서 도량에 앉는다는 것은 십이인연을 깊이 관하여 바로 깨치어 보리좌에 앉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십이인연을 관하는 방법이 장교통교별교원교의 사교에 따라 각각 다르므로 그 깨달은 경지도 각각 달라 네 가지로 구분됩니다.

먼저 십이인연이 생멸함을 관함은 중생이 생멸의 견해로써 십이인연을 본다는 말입니다. 생멸의 견해란 마치 눈병난 사람이 하얀 구름을 푸르게도 보고 누렇게도 보고 검게도 보아 바로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소승교의 경논의 삼장(三藏)을 통달한 부처님이 나무 밑에 풀을 뜯어 놓고 앉아 있는 격이 되는데, 생멸하는 물건이므로 곧 생멸견해를 비유한 것입니다. 즉 소승 장교(藏敎)의 부처님은 십이인연을 관하되 생멸의 경계에 머물며 아직 생멸을 떠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두번째로 십이인연이 공함을 관함에서 통교의 부처님이란 대승 통교의 부처님을 말합니다. 이 부처님이 칠보나무 아래 하늘 옷으로 만든 자리에 앉는 것은, 그냥 나무 밑의 풀자리에 앉는 것보다 단수는 높지만 완전히 생멸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아직 십이인연이 공하다는 공병(空病)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 십이인연이 거짓이름임을 관함에서 십이인연이 거짓 이름임을 본다는 것은 대승 별교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알면 별교의 사나불(舍那佛)의 칠보좌에 앉게 됩니다. 별교의 사나불이란 천개의 연잎으로 된 대 위에 앉은 보신불을 지칭합니다. 여기서는 아직 광경이 두루 비추는 것이 되지 못하고 상주법계가 되지 못하여 전반적인 불교의 교리에는 통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십이인연이 중임을 관함에서 십이인연이 중도임을 보면 광명이 두루 비추는 원교의 비로자나불의 지위에 이르게 됩니다. 이 비로자나불이 허공을 자리로 삼는다는 것은, 무변무한한 그것을 허공이라 표현한 것이므로 새파란 저 허공에 앉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십이인연을 중도의 정견으로 보면 구경에 비로자나법신불을 보아 상주법계의 중도연기를 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이이연은 중도로 보아야 바로 보는 것이지 변견(邊見)인 생멸(生滅)이나 공() 혹은 가()로 보면 이것은 십이인연의 중도를 바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소승대승 할 것 없이 크고 작은 도량이 모두 십이인연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불법이 다 십이인연에 집약되어 있으며 십이인연을 제외하고 따로 불법이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 근기가 둔한 제자를 위하여 십이인연이 생멸하는 모습을 설할 때, 따로 근기가 예리한 보살이 앉아 있다가 비밀히 십이인연이 생멸하지 않은 모습을 듣고서 곧 바로 불성을 깨달아 무생인을 얻으니 이것이 비밀한 뜻이니라.

初爲鈍根弟子하여 說十二因緣生滅相할새 別有利根菩薩하여 在坐하여 密聞十二因緣不生滅相하고 卽悟佛性하여 得無生法忍하니 此秘密意也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128 ]

 

부처님이 성문의 제자를 위해서 비록 십이인연의 생멸하는 모습을 설하셨더라도 근기가 수승한 보살은 이에 의해 생멸하는 모습을 버리고 그 이면의 본질적 내용인 생멸하지 않는 모습을 듣고 불성을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비밀한 뜻[秘密義]이라고 합니다.

 

혹은 생멸을 듣고 곧 생멸(生滅)과 불생멸(不生滅), 비생멸(非生滅)과 비불생멸(非不生滅)을 알아 생멸과 불생멸을 쌍조한다. 하나에 즉하면서 셋이고 셋에 즉하면서 하나로, 법계에 비밀히 상락(常樂)을 구족한다. 복덕인(福德人)이 돌을 집으면 보배가 되고 독을 집으면 약이 되는 것과 같다.

或聞生滅하고 卽解生滅解不生滅하며 非生滅非不生滅하여 雙照生滅不生滅하여 卽一而三卽三而一하여 法界秘密常樂具足하니라. ……如福德人執石成寶하고 執毒成藥하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6 ]

 

돌을 집으면 보배가 되고 독을 집으면 약이 된다는 말은 저쪽에서 생멸을 이야기할 때 이쪽에서 생멸을 불생멸 내지 비불생멸로 수용한다는 뜻입니다. 즉 사제나 십이인연이 생멸한다고 설해도 그것을 불생불멸 등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즉 소가 물을 먹으면 젖이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되며, 뱀의 독은 사람을 죽이지만 소의 젖은 사람을 살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건은 한 가지라도 받는 사람에 따라 그 물건의 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부처님이 방편으로 생멸을 말씀하시더라도 우리는 일승의 중도를 증득하도록 힘써야지 방편에 떨어져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참고로 근본불교에서 설한 사념처(四念處)에 대해 한마디 하겠습니다. 사념처란 신()()()()을 말하는 것으로, 보통 사념처를 설할 때는 이 몸을 부정하다고 관하고[觀身不淨], 감수를 고통이라고 관하고[觀受是苦], 마음을 무상하다고 관하고[觀心無常], 일체법을 무아라고 관하는 것[觀法無我]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순전히 차별견해인 생멸의 변견에서 하는 말이지 일승의 중도가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 가운데 중도가 있으니 이것이 사념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 의지하여 볼 때에 사념처를 중도정견으로 해석해야지 생멸의 변견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또 사전도(四顚倒)라는 것이 있는데, 사념처에서 부정(不淨)을 정()으로, ()를 낙()으로, 무상(無常)을 상()으로, 무아(無我)를 아()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전도(四顚倒)란 실제로 변견에 집착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하는 말이며 중도 정견을 갖춘 사람이 볼 때는 사전도 이대로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사해탈(四解脫)입니다. 물은 물인데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젖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념처의 설법도 변견의 중생이 들으면 사전도요, 중도의 정견으로 들으면 사해탈이 되어버립니다. 중도정견에 의하면 상락아정(常樂我淨) 이대로가 부사의 해탈경계인 것입니다.

 

5)쌍차쌍조(雙遮雙照)

 

원융사상에 투철한 천태교학의 중도설은 삼제원융(三諦圓融), 일념삼천(一念三千) 등의 대표적인 교리에서도 드러나지만 한편으로는 쌍차쌍조(雙遮雙照)로도 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불교 여러 종파의 중도설을 말하면서 쌍차 쌍조가 중도의 근본 내용임을 누차 말하였는데, 이 쌍차 쌍조를 누구보다도 능란하게 구사하며 중도를 밝힌 이가 바로 천태 지자스님입니다.

천태스님은 이 차(遮照)를 여러 곳에서 설하였지만, 그 차조에 입각한 중도설의 연원은 다른 대승경전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대승경전인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에서 쌍조이제(雙照二諦)에 따른 중도관을 설하고 있으며, 천태스님도 차조에 의한 중도설을 논하면서 그 경증(經證)으로 이 영락경의 경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쌍차와 쌍조를 종횡으로 구사하여 원교의 중도관을 다양하게 설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미 밝고 청정하여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서 쌍으로 이제를 비추니 부사의한 부처님 경계를 구족하여 줄어듬이 없느니라.

心旣明淨雙遮二邊하고 定入中道雙照二諦하니 不思議佛之境界具足無減하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17 ]

 

중도의 내용은 쌍차쌍조로 그것은 부사의한 부처님 경계이지 보살의 경계는 아닙니다. 위에서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여 바르게 중도에 들어간다고 하니 혹시 잘못 이해하여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는 것과 따로 중도가 있는 것같이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표현은 구름이 걷히니 해가 드러난다는 식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드러나고 해가 드러나면 구름이 걷히는 만큼, 쌍차와 쌍조에는 절대로 간격이나 거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언어로써 표현하자니 쌍차쌍조이지, 실상을 알고 나면 쌍차가 곧 쌍조이고 쌍조가 곧 쌍차로서 언제든지 차조(遮照)가 동시이며 그 둘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알아라. 종일토록 말해도 종일토록 말하지 않은 것이고 종일토록 말하지 않아도 종일토록 말한 것이며 종일토록 쌍차하여도 종일토록 쌍조한 것이다. 깨뜨린 즉 세우는 것이요 세운 즉 깨뜨리는 것이다.

當知하라. 終日說終日不說하고 終日不說終日說하여 終日雙遮終日雙照하니 卽破卽立이요 卽立卽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55 ]

 

종일토록 말함은 쌍조이다. 아무리 쌍조하여도 그 자취가 적정하여 설한 것이 없기 때문에 종일토록 말하여도 아무말도 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종일토록 말하지 않음은 쌍차이다. 종일토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말한 것이 됩니다. 이와같이 쌍차가 쌍조이고 쌍조가 쌍차가 되니 대광명이 적적한 가운데 미진수의 불찰을 덮고도 남으나 그 자체는 공공적적(空空寂寂)해서 한 가지 상도 볼 수 없습니다.

깨뜨리는 것이란 곧 차며 세우는 것이란 곧 조() 입니다. 그러므로 깨뜨린 즉 세우는 것이요, 세운 즉 깨뜨린 것이다는 뜻은 아무리 쌍차를 해도 쌍조이고 쌍조를 해도 쌍차라는 말입니다. 차가 즉 조고 조가 즉 차로서 허공을 두쪽 내면 냈지 이것들은 원융하여 결코 두쪽을 낼 수 없습니다. ()과 공()이 원융하고 선()과 악()이 무애하며 시()와 비()가 원융하고 중생(衆生)과 불()이 무애해서, 끝없는 시방의 허공계를 아무리 둘러봐도 오직 일심법계(一心法界) 이외에는 아무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입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쌍차쌍조가 근본이 되며 이 쌍차쌍조인 중도를 떠나서는 절대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중도관이라 함은 중()은 둘이 아님을 뜻으로 삼고 도()는 능통함을 이름하며 하나의 참된 도리[一實諦]를 비추어 공허하게 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을 중도관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앞의 두 가지 관()은 방편도이니 두 공관으로 인하여 중도에 들어가서 이제를 쌍조하고 마음마음이 적멸하여 자연히 일체지의 바다에 들어 간다고 한다.

中道觀者中以不二爲義하고 道是能通爲名하니 照一實諦하여 虛通無滯名中道觀也經云 前二觀爲方便道因是二空觀하여 得入中道하여 雙照二諦하고 心心寂滅하여 自然流入薩婆若海라하니라. [維摩經玄疏1;大正藏 38, p.525 ]

 

()은 둘이 아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원융하다는 말이며, ‘능통하다라는 것은 일체가 막힌 데 없이 무애하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참된 도리[一實話]’는 자성법계법성진여 등을 말하는데, 무애자재한 중도의 대지혜가 걸림없이 하나의 참된 도리를 비추는 것을 중도관이라 합니다.

이제를 쌍조한다에서 쌍조는 명암을 떠난 자리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통 중생이 보는 명암(明暗)을 말하는 것이라거나, 전지로 불빛을 비추듯이 비추는 것으로 알면 참으로 중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쌍조이제가 되면 대적멸 대적정 삼매를 얻어 자연히 일체지를 구족한 부처님의 바다에 들어가 유희하기 때문입니다.

 

6)불이법문(不二法門)

 

둘이 아닌 법문[不二法門]이란, 대립하는 두 존재가 본질적으로 볼 때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설한 법문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아닌 것[不二]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곧 중도입니다.

불이법문을 설한 대표적인 경전으로는 무엇보다도 유마경(維摩經)이 손꼽힙니다. 그러므로 천태스님도 자신이 지은 여러 저서에서 불이법문을 논할 때 특히 유마경의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 나오는 문수(文殊)보살과 유마(維摩)거사의 불이법문을 자주 거론하였습니다.

 

대열반경에 말하기를 명()과 무명(無明)은 그 성품이 둘이 아니니 둘 아닌 성품이 곧 중도라 하니라. 중도는 이미 양변이 공하며 이 공도 또한 공하다. 그러므로 공공공이라 이름하며 불가득공이라 이름하니 이것이 둘 아닌 법문에 들어감이다. 곧 원교는 공문(空門)에 의하여 넓은 문 [普門]이라는 뜻을 밝힌 것이다.

大經云 明與無明其性不二하니 不二之性卽是中道라하니라. 中道旣空於二邊하며 此空亦空이라. 故名空空空이며 名不可得空이니 是爲入不二法門이라 卽是圓敎就空門하여 辯普門之意也. [觀音玄義;大正藏 34, p.888 ]

 

명과 무명의 성품이 둘이 아니다함은 무명 그대로가 실성이고 환화공신 그대로가 법신이란 말입니다. 중생이 변견 때문에 명과 무명을 둘로 보는 것이지 정견으로 보게 되면 그 성품이 둘이 아닙니다. 이것이 불이중도(不二中道)로서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며,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은 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중도는 이미 양변에 공()하나 이 공도 또한 공()하므로 비고, 비고 또 빈 것입니다. 전체가 비었다는 그 병도 다 떨어져야 중도에 들어가는데 그것은 이름도 얻을 수 없고 모양도 얻을 수 없는 불가득공입니다. 이 공은 변견의 공이 아니라 자재무애한 불가득공입니다. 이것은 일승원교가 공문(空門)에 나아가서 십법계를 두루하고도 남는 원리를 설하는 데서 불이법문을 설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도가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또한 양변이 통합니다. 즉 유()가 무()이고 무()가 유()로서 둘이 아니며, ()가 적()이고 적이조(寂而照)하여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이것이 둘아닌 법문이고 일승원교입니다. 법화경의 보문품에서 관세음보살이 삼십이응신(三十二應身)을 나투어 일체 중생을 제도할 때의 넓은 문[普門]은 실제로 이러한 중도관에 입각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유마경 가운데에 둘이 아닌 문에 들어 간다고 설하는 것은, 생사와 열반이 둘이라도 생사와 열반에 의지하지 않음을 둘이 아니라 이름하며, 또한 다시 하나도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이미 둘을 버리고 다시 하나에 머무른다면 하나는 하나 아님에 대하여 도리어 다시 둘을 이루니 어찌 둘이 아니라 이름하겠는가? 지금 둘에 머무르지 아니하므로 하나도 아니며 둘도 아니라고 말하며, 또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라고 이름한다. 있지 아니하다는 것은 가()를 파함이고, 없지 아니하다는 것은 공을 파함이며, 있지 아니하다는 것은 둘을 파하고, 없지 아니한다는 것은 하나를 파함이다. 만약 이러하다면 응당 중도에 있으나 이 중도도 또한 공이다.

如淨名中說入不二門者生死涅槃爲二어늘 不依生死不依涅槃名爲不二亦復非一이라. 何以故旣除於二하고 若復在一하면 一對不一還復成二이니 豈名不二耶今不在二故言不一不二亦名不有不無. 不有是破假不無是破空이며 不有是破二不無是破一이라 若爾者인댄 應在中道이나 中道亦空이니라. [觀音玄義 下;大正藏 34, p.888 ]

 

생사와 열반이 비록 상대적이지만 생사도 의지하지 않고 열반도 의지하지 않고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이것이 곧 중도입니다. 이 중도는 둘이 아니고 또한 하나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둘은 내버리고 하나를 다시 취하면, 즉 양변을 여의고 그 뒤에 중도라는 것을 두게 되면 하나에 대하여 다시 하나 아닌 것이 상대가 되어 둘을 이루니 차별의 변견에 떨어집니다. ‘둘이 아니다하는 것은 양변을 여의어 양변 자체도 찾아볼 수 없고 중도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밖에 다시 중도가 서게 되면 이것은 결코 진정한 둘이 아닌 것[不二]이 아닙니다. 열반을 증득했다고 열반에 머무르면 열반이 아니고 성불했다고 부처에 집착하면 부처가 아닙니다. 실제로 중도를 정등각해서 양변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하나도 아니며 둘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있지 아니하다는 것[不有]은 가()를 파하는 것이란 중생들은 색을 집착하나 색이 본래 공해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있다는 유견(有見)을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없지 아니하다는 것[不無]은 공()은 파한다는 것이란 중생들이 색의 자성이 공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니 공에 집착하므로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공에 집착하는 것을 부수는 것입니다. 있지 아니하다는 것은 둘을 파하고 없지 아니하다는 것은 하나를 파함이니, ()도 파하고 무()도 파하며 색도 파하고 공도 파하면 거기에 마땅히 중도가 있으나 그러나 그 중도도 또한 공입니다.

늘 말하지만 양변을 완전히 여의는 동시에 중도에 집착하면 그것은 중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실로 양변을 여의면 불가득공이라 중도라는 것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을 위해 억지로 할 수 없이 공이요 중도라고 이름하는 것이지 중도 자체는 실제로 공해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곧 불이법문입니다.

 

문수(文殊)는 설하되 설하지 않음으로써 불이문(不二門)으로 삼고, 정명(淨名)은 입을 막음으로써 불이문으로 삼는다. 자세히 살피건데 저 경문에는 모두 네 문의 뜻이 있다. 조법사(肇法師)가 주석해 말하기를 모든 보살은 모두 법의 모습을 말하니 곧 유문(有門)이요 문수(文殊)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니 이것은 곧 공문(空門)이다. 사익(思益)에 말하기를 일체법이 바르며 일체법이 삿되다 하니 이것도 역시 넓은 문[普門]의 뜻이다. 마음이 법계에 노님이 허공과 같으니 이것은 공하면서도 또한 유의 문의요, 정명(淨名)의 말없음은 공도 아니고 유()아닌 문이다.

文殊說無說爲不二門하고 淨名杜口爲不二門이라 細尋한대 彼文皆有四門義하니 肇師注云 諸菩薩歷言法相하니 卽有門이요 文殊言於無言하니 此卽空門이라 思益云一切法正하며 一切法邪라하니 亦是普門意遊心法界如虛空하니 是亦空亦有門이요 淨名黙言卽非空非有門이니라. [觀音玄義;大正藏 34 p.888 ]

 

설하되 설하지 않음이란 아무리 설해도 설함이 없다는 뜻이니 문수보살은 설하되 설함이 없음으로써 불이법문(不二法門)을 하였습니다. 정명(淨名)즉 유마힐(維摩詰)은 문수보살이 무엇으로 불이법문을 삼겠느냐고 문수보살이 질문하자 아무 말도 안하고 침묵을 지키자 이에 참으로 유마거사가 불이법문을 설한다고 칭찬했는데, 이 말은 유마경에 나옵니다. ‘두구(杜口)’는 입을 막는다는 것으로 곧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경문에 네 가지 문의 뜻이 있다고 했는데 알고 보면 네 가지 문이 각각 다른 것이 아닙니다. 중생이 변견으로 볼 때는 네 문이 각각 다르지만 아는 사람이 볼 때는 네문이 무애합니다. 일체법이 바르며 일체법이 삿되다는 것도 변견에 따른 정()과 사()가 아니라, 정과 사를 완전히 성취하면 정이 즉 사이고 사가 즉 정이 되어 원융무애를 성취하게 되며, 따라서 넓은 문[普門]의 뜻이 성립됩니다. ‘마음이 법계에 노님이 허공과 같다에서 허공은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고 광대불변한 것을 비유하며, ‘법계에 노닌다는 것은 활동하는 지혜자체를 말합니다. 허공을 먼데서 볼 때는 텅 비어 있는 허공이지만 이것은 또한 무한한 활동 능력이 있으므로 공하면서도 또한 있다는 문[亦空亦有門]입니다.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하자니 공문(空門)유문(有門)역공역유문(亦空亦有門)비공비유문(非空非有門)이라 구분하는 것이지, 실상 그 내용은 유가 즉 무고 무가 즉 유로서 서로 융통하여 하나를 들면 넷이고 넷을 들면 하나로 어떤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무명의 인연을 관하여 둘 아닌 법문에 들어가면 부사의 해탈에 머문다. 그러므로 이 경에서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 감을 밝히니 곧 이것이 중도이다. 이제(二諦)를 쌍조(雙照)하면 자연히 일체지의 바다에 들어간다.

若觀無明因緣하여 入不二法門하면 住不思議解脫也. 故此經明入不二法門하니 卽是中道. 雙照二諦하면 自然流入薩婆若海니라. [維摩玄疏;大正藏 38, p.534]

 

무명의 인연을 관하여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면 부사의 해탈에 머문다라는 것은 중도 정관에서 볼 때 하는 말입니다. 무명을 바로 보면 무명 이대로가 법성이고 법계이며 전체가 모두 대광명이 되어 마()()을 찾아볼 수 없고, 세간(世間)출세간(出世間)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자리가 곧 부사의 해탈경계인데 부사의 해탈경계라 하여 마치 가제가 굴에 들어앉듯이 머무를 곳이 있는 줄 알면 큰일납니다. 본래 머물 곳이 없지만 중생들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 편의상 그렇게 말한 것으로 머무름이 없는 머무름[無住而住]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마경에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는 것을 밝혔는데, 이것은 곧 중도를 말합니다. 이제를 쌍조하면 자연히 살바야해(薩婆若海) 즉 일체지(一切智)의 바다에 들어가 중도를 성취하게 됩니다

 

 

5. 중도실상경계(中道實相境界)

 

마하지관(摩訶止觀)은 오략십광(五略十廣)이라 하여 자세히 분류하면 열 항목이 되고 축약하면 다섯 단원이 되는데, 어느 경우나 발대심(發大心)에서 시작하여 귀대처(歸大處)로 종결됩니다. 여기에 인용한 것은 그 마지막 단원인 귀대처를 설명하는 일부분입니다. 귀대처의 요점은, 법계에 시종(始終)이 없음을 알면 크게 밝아 무애자재하다는 것으로, 그 자세한 내용을 지귀(旨歸)’로써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지귀에 대한 설명은 이하에서 언급할 것이지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들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 아니라 천태종에서 중도 실상을 어떻게 취급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즉 지금까지 천태종의 중요한 여러 교리와 관법을 통하여 그 중도설을 어느 정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도의 실상은 참으로 말과 생각을 떠나고 명칭을 잊어서, 달리 할 말이 없어 할 수 없이 중도니 실상이니 라고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지귀(旨歸)하는 세 덕의 적정함이 이와 같으니 어떠한 명자(名字)가 있어 가히 설해 보일 수 있으리요. 이것을 무엇이라고 이름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억지로 중도(中道)실상(實相)법신(法身)지도 아니고 관도 아님 [非止非觀]등이라 하며, 또 다시 억지로 일체종지(一切種智)평등대혜(平等大慧)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등 이라고 하며, 또 다시 억지로 수능엄정(首磅嚴定)대열반(大涅槃)불가사의해탈(不可思議解脫) ()등이라 한다. 마땅히 알아라, 여러 가지 모양, 여러 가지 설법, 여러 가지 신통한 힘이 하나하나 모두 비밀장(秘密藏)가운데 들어가니, 어떤 것들이 지귀이며, 지귀하는 곳은 어디이며, 무엇이 지귀인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가는 곳이 소멸하여 영원히 적정함이 공()과 같은 것을 지귀라 이름한다.

旨歸三德寂靜若此하니 有何名字하여 而可說示리요 不知何以名之일새 强名中道實相法身非止非觀等하며 亦復强名一切種智平等大慧般若波羅蜜觀等하며 亦復强名首磅嚴定, 大涅槃不可思議解脫止等이라하니라 當知하라 種種相 種種說 種種神力一一皆入秘密藏中하니 何等是旨歸旨歸何處誰是旨歸言語道斷하고 心行處滅하여 永寂如空是名旨歸니라. [摩訶之觀;大正藏 46, p.21 ]

 

지귀(旨歸)의 의미는 먼저 글의 뜻이 지향하는 바[文旨所趣也]’로서 지()는 자신이 반야해탈법신의 세 덕()을 향하고, ()는 타인을 그 세 덕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며, 또는 이와 역으로 자신이 세 덕에 들어감을 귀라 하고 타인을 세 덕에 들어가게 함을 지라고도 합니다. ‘세 덕의 적정함이 이와같다, 중도실상법신 등을 의미하는 반야해탈법신의 세 가지 덕이 원융하여 하나도 아니고 셋도 아니며 새롭지도 않고 낡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도, 중도하니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고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이 중도의 근본사상은 언설(言說)과 심행(心行)이 다 끊어져 절대로 언어와 문자로 표현할 수 없고 헤아림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름이나 문자로 설할 수 없으며, 일승(一乘)이니 삼제(三諦)니 중도니 삼천이니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어라 이름할 수 없어 억지로 이름을 붙인 것이 중도(中道)실상(實相)법신(法身)비지비관(非止非觀)일체종지(一切種智)평등대혜(平等大慧)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수능엄정(首楞嚴定)대열반(大涅槃)불가사의해탈(不可思議解脫)()” 등입니다. 불가사의해탈이라고 한 것은, 중도라는 것은 단순한 말이지만 그 실상은 생각해 볼 수도 없는 묘법이므로 불가사의해탈이라고 이름한 것이지 실제로는 불가득불가설로서 묘한 가운데 묘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비밀장 가운데로 들어가는데 비밀장도 어찌할 수 없어 억지로 이름 붙인 것입니다.

무엇을 지귀라 하는가에서 지귀(旨歸)한다. 즉 뜻이 돌아간다고 하니 개미가 자기 집으로 돌아 가듯이 나아갈 곳이 있는 줄 알면 그 사람은 중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을 깨치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중도로 지향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실질적으로 모든 거래와 생멸이 끊어졌기 때문에 돌아갈 곳도 지향할 곳도 없습니다. 이것을 바로 알아서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 없고 깨칠래야 깨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이것은 어느 정도 중도실상에 가깝게 다가선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바로 안 것은 아닙니다. “영원히 적정함이 공과 같다에서 공은 텅 빈 단공(斷空)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비밀장을 공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실상을 뜻하고 중도를 향하는 지귀(旨歸)라 이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누구든지 물을 마셔야 물맛을 알듯이 오직 투철하게 깨달아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7장 화엄종 사상

 

화엄종(華嚴宗)의 시조는 두순(杜順: 557690)스님이며, 2조인 지엄(智儼: 602668)스님을 거쳐서 제3조인 법장(法藏: 643712)스님에 의하여 화엄학(華嚴學)이 집대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화엄사상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는,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359429)60권 화엄경을 번역할 때 받아쓰는 역할을 맡은 법업(法業)이 최초의 화엄경 연구서인 화엄지귀(華嚴旨歸)2권을 지은 것을 비롯하여, 그 후 화엄경론(華嚴經論)을 지은 북위(北魏)의 영변(靈辨)과 현창(玄暢)지거(智炬)영유(靈裕) 등 여러 화엄의 연구가가 배출되어 이미 남북조시대에 화엄의 교학적 사상이 여러 면에서 전개되었으며, ()()대에 와서 화엄 교학이 집대성된 것입니다.

초조(初祖)인 두순스님의 저서로는 오교지관(五敎止觀), 법계관문(法界觀門)등이 있지만, 오교지관의 저자는 사실 두순이 아니라 법장이라고 합니다. 또 세 가지 관법인 진공관(眞空觀)이사무애관(理事無礙觀)주변함용관(周遍含用觀)에 의하여 화엄의 세계를 파악하고자 한 법계관문도 역시 법장의 저서와 관련이 깊으므로 두순이 찬술한 것인지 의심스럽게 여겨집니다.

지엄스님은 12세 때 두순을 따라가서 14세에 출가하였으며, 그 후 섭대승론화엄경 등을 연구하고 화엄경수현기(華嚴經搜玄記)를 지었습니다. 그 밖에 화엄공목장(華嚴孔目章)」․「화엄오십요문답(華嚴五十要問答)」․「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등의 저술이 있습니다. 그의 사상은 법계연기 사상을 비롯하여 기타 화엄교학에 관한 기초적 교리가 많으며 이 지엄스님의 화엄교학을 토대로 하여 법장의 화엄학이 대성하게 된 것입니다. 스님의 제자로는 의상(義湘)법장(法藏)혜효(慧曉) 등이 있었으며, 법장은 중국 화엄종의 대성자가 되었고, 신라의 의상스님은 귀국하여 우리나라 화엄종의 개조가 되었습니다.

법장스님의 선조는 원래 강거국(康居國) 출신으로 나중에 중국에 귀화하였습니다. 법장스님의 자()는 현수(賢首)178세 쯤 지엄스님이 운화사(雲華寺)에서 화엄경을 강설하는 것을 듣고 그 문하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현수스님은 지엄문하에서 머리 기른 제자로 지냈는데, 나중에 지엄스님이 입적할 때 내가 입멸한 후 법장을 스님으로 만들라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나이 28세에 머리를 깎고 측천무후가 세운 태원사(太原寺)에서 거주하였습니다. 그 이후 화엄사상의 선포와 화엄교학의 확립에 노력하고, 또 경전번역에도 참여하여 실차난다(實叉難陀)80권 화엄경(華嚴經)을 번역할 때 필수(筆受)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60권 화엄경의 주석서인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와 화엄교학의 강요서인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그리고 망진환원관(望盡還源觀)」․「유심법계기(遊心法界記)」․「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등이 있습니다.

법장스님의 제자 가운데 뛰어난 인물로는 여섯 명이 있었으나 그들의 사상이 다소나마 알려지는 것은 문초(文超)와 정법사(靜法寺) 혜원(慧遺: 673743)뿐입니다. 화엄학은 그 뒤에 선()천태화엄사상을 융화시키는 태도를 취한 청량징관(淸凉澄觀: 738839), 그의 제자이며 교선일치론(敎禪一致論)을 주장한 종밀(宗密: 780841)에 의하여 새로이 발전하였으며, 그 이후의 화엄학은 대체로 법장이나 징관 등의 교학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화엄종에서 확립한 교판은 오교(五敎)와 십종(十宗)입니다. 오교의 교판은 지엄스님이 세운 소승교(小乘敎)초교(初敎)종교(終敎)돈교(頓敎)원교(圓敎)의 오교판을 법장스님이 계승하여 다시 정비한 것입니다. 소승교는 소승불교를 상징하는 아미달마론서의 사상을 적용시킨 것으로 구사론(俱舍論)등이 그 대표입니다. 대승시교는 대승불교 가운데 초보적인 단계라는 의미에서 시교(始敎)라 이름한 것이며, 상시교(相始敎)와 공시교(空始敎)로 구분됩니다. 상시교는 유식학(唯識學)과 이에 관련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등을 말하고, 공시교는 공사상을 설한 반야경(般若經)등을 말합니다. 대승종교는 대승불교의 종국적인 교의를 설한 것으로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을 그 내용으로 하며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능가경(楞伽經)등의 경론이 이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대승돈교는 직접적으로 돈오성불(頓悟成佛)을 주요 내용으로 하여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설하는 유마경(維摩經)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화엄종에서는 나중에 이 돈교를 선종에 적용시키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법장스님 시대에는 선종 중에서 북종선(北宗禪)만이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번성하고 그 교단적 위세가 그다지 크지 못하였으므로 돈교를 선종이라고 간주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승원교는 대승의 최고 진리를 표방하는 것으로, 주체와 객체가 구족하고 사사물물(事事物物)이 무애한 화엄사상을 그 골자로 하며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합니다.

십종교판(十宗敎判)은 법상종의 팔종교판을 채용하고 거기에 나머지 두 종을 더하여 구성한 것입니다. 그 십종이란, 아법구유종(我法俱有宗), 법유아무종(法有我無宗), 법무거래종(法無去來宗), 현통가실종(現通假實宗), 속망진실종(俗妄眞實宗), 제법단명종(諸法但名宗), 일체개공종(一切皆空宗), 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 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 원명구덕종(圓明俱德宗)입니다. 이 교판 중에서 처음의 여섯 종은 소승교이며 나중의 넷은 대승교입니다. 그리고 이상의 오교와 십종 중에서 법장스님 자신이 의지하는 화엄교는 각각 제오교와 제십종에 해당합니다. 법장스님은 이 오교와 십종의 교판에 의하여 삼론종천태종법상종 등 종래 여러 종파에서 주장한 여러 교판설을 통합 수정하여 화엄경을 정점으로 하는 경론의 체계적 위치를 수립하여 화엄교학의 수승함을 확립한 것입니다.

화엄교학의 중심사상은 고요한 바다에 일체 제법의 모습이 여실하게 각인되는 듯한 삼매인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들어가 화엄경의 근본사상인 법계연기를 밝히는 것이며, 그것을 논의한 것이 바로 화엄일승(華嚴一乘)의 가르침입니다. 이 이론의 기본 체계를 이루는 것이 화엄종의 독자적인 삼성설(三性說)과 인문육의론(因門六義論)이며, 그러한 교리 위에서 화엄일승적인 육상원융(六相圓融)과 십현연기(十玄緣起)를 전개하였습니다. 화엄종에서 말하는 삼성설과 인문육의론은 본래 모두 법상종에서 설한 삼성설과 종자육의설(種子六義說)을 수용하여 화엄종의 입장에서 보다 융통적으로 개조하여 화엄교학의 기초이론으로 수립한 것입니다.

법계연기의 참 모습을 설하는 육상과 십현 중에서, 육상원융은 원래 십지경(十地經)에서 그 근원이 발생하여 그 후 여러 화엄가의 손을 거쳐 법장스님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제법이 원융함을 여섯 가지 모습으로 논한 것인데, 여섯 가지 모습이란 총상(總相)별상(別相)동상(同相)이상(異相)성상(成相)괴상(壞相)으로 어느 한 가지 법을 거론하면 나머지 상들을 모조리 구족한다는 것입니다.

십현연기는 두순스님의 학설을 지엄스님이 수용하고 다시 이것을 법장스님이 발전시킨 것입니다. 십현이란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인다라망법계문(因陀羅網法界門)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이니, 이들에 의해 일체 제법이 그대로 상즉상입하여 하나가 일체와 상즉하고 일체가 하나에 상즉하는 무애한 법계가 설명되는 것입니다.

화엄종에서는 법계를 여러가지로 설하는데 그 중에서 자주 거론되는 것은 사법계(事法界)이법계(理法界)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의 네 가지 법계입니다. 사법계는 만물의 현상이 천차만별로 드러난 것을 말하고, 이법계는 제법의 체성이 공적하여 일체가 차별이 없고 평등한 것을 말하며, 이사무애법계는 차별의 모습을 설하는 사법계와 평등의 체성을 설하는 이법계가 상즉상입하여 무애한 법계를 말합니다. 사사무애법계는 체성의 이치를 현상의 사상(事相)에 융화시켜 사사물물(事事物物), 진진법법(塵塵法法)의 일체 현상계가 서로 교섭하고 융통하여, 하나가 일체에 들어가고 일체가 하나에 들어가서 중중무진한 무장애법계를 이룸을 말합니다. 이 사사무애법계가 바로 법계연기의 극치로, 십현연기와 육상원융은 이 법계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관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엄학의 교리를 집대성한 이는 법장스님이었지만 법장의 화엄교학은 전체적으로 이론에 치우치고 구체적인 실천수행은 다소 경시된 듯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이에 비하여 법장스님과 동시대의 인물이며 화엄종의 정통적인 계보에는 속하지 않는 이통현(李通玄: 635730)거사가 있었는데, 그는 만년에 80화엄경(八十華嚴經)을 연구하여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40권을 완성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법장스님과는 달리 실천적인 면을 중시하였고, 고려의 지눌(知訥)스님 등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1. 진공묘유(眞空妙有)

 

여기에 인용하는 것은 현수스님이 찬술한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에서 공()과 유()를 설명한 부분입니다. 그 내용은 공과 유를 각각 네 가지로 설명하여 그 원융함을 밝힌 것인데 공과 유를 개별적으로 논의하지만, 사실은 공의 해설 중에 유가 포함되고, 유의 설명 중에 공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진공묘유(眞空妙有)를 공과 유의 면으로 구분하여 고찰한 것입니다. 이 진공묘유의 내용을 분명히 이해해야 앞으로 설명하는 사사무애(事事無碍)를 비롯한 많은 화엄종의 교리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1)진공사의(眞空四義)

 

진공에 전체적으로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자기를 버리고 남을 이룬다는 뜻이다. ()이 곧 색()이기 때문에 곧 색은 드러나고 공은 숨어버리는 것이다.

眞空通有四義하니 廢己成他義以空卽是色故卽色現顯空隱也. [心經略疏;大正藏 33, p.553 ]

 

자기는 버리고 남을 이룬다는 뜻은 공을 내버리고 색을 쫓아간다는 뜻으로 공이 즉 색이기 때문에 공을 버리고 색이 되는 것입니다. 즉 진공(眞空)의 첫째 조건은 색이 드러나고 공이 숨어버리는 것인데, 이것은 공 이대로가 전체적으로 색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둘째는 남을 숨기고 자기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색이 공이기 때문에 곧 색이 다하면 공이 드러나는 것이다.

泯他顯己義. 以色是空故卽色盡空顯也.

 

남을 숨기고 자기를 드러낸다는 뜻은 색을 버리고 공을 나타낸다는 뜻으로 색 이대로가 공이기 때문에 색이 다하면 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공의 둘째 조건으로 그 이유는 색 이대로가 전체적으로 공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자기와 남이 함께 존재한다는 뜻이다. 숨음과 드러남이 둘 아닌 것이 진공이기 때문에 색이 공과 다르지 않음을 환색(幻色)이라 하니 색이 존재하는 것이요, 공이 색과 다르지 않음을 진공(眞空)이라 하니 공이 드러난다. 서로 장애하지 않으므로 둘이 다 존재하는 것이다.

自他俱存義以隱顯無二是眞空故謂色不異空爲幻色이러니 色存也空不異色名眞空이러니 空顯也以互不相碍하여 二俱存也.

 

자기와 남이 함께 존재한다는 뜻은 색과 공을 쌍조한데서 하는 말입니다. 쌍조면에서 보면 공과 색은 서로 막히지 아니하고 통해 있으므로 공과 색이 둘이 다 존재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자기와 남이 같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를 들어 서로 즉하여 전체를 빼앗아 둘이 없어져 두 변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自他俱泯義以擧體相卽하여 全尊兩亡하여 絶二邊故.

 

자기와 남이 같이 사라진다는 뜻은 색과 공을 쌍차한데서 하는 말입니다. 그 까닭은 색이 즉 공이므로 색이라 할 수 없고 공이 즉 색이므로 공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색과 공이 사라진 면에서 쌍민(雙泯)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공에 대한 네 가지 설명을 통하여 볼 때, 진공의 근본 뜻은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색이 즉 공이고 공이 즉 색으로 서로 상즉하기 때문에 쌍조(雙照)하여 함께 있으면서[俱存] 쌍차(雙遮)하여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雙泯]. 그러므로 진공의 내용은 함께 있으면서 함께 사라지고 또 쌍차쌍조하는 것이니 그 내용만 같으면 이름은 진공이라 해도 괜찮고 묘유라 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한 쪽으로 공을 강조할 때에 진공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색이 공을 바라보는 것에도 또한 네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남을 드러내고 자기는 없어지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는 드러나고 남을 숨기는 것이요, 셋째는 같이 존재하는 것이요, 넷째는 같이 사라지는 것이니 앞에 준거하여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곧 환색(幻色)이 있고 없는 것이 거리낌이 없고 진공이 숨고 드러남이 자재하여, 합하여 한 맛이 되어 원융하게 통하여 의지함이 없으니 이것이 그 법이다.

色望於空而有四義하니 顯他自盡이요 自顯隱他俱存이요 俱泯이니 並準前思之니라. 是卽幻色存亡無閡하고 眞空隱顯自在하여 合爲一味하여 圓通無寄하니 是其法也

 

첫째의 현타자진(顯他自盡)은 색즉시공으로 공이 드러나고 색은 없어지는 것이요, 둘째의 자현은타(自顯隱他)는 공즉시색으로 색이 드러나고 공은 없어지는 것이며, 셋째의 구존(俱存)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색과 공이 분명하기 때문이요, 넷째의 구민(俱泯)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색이라 해도 안되고 공이라 해도 안됩니다. 앞에서 해설한 진공의 네 가지 뜻에 준거하여 생각해 보면 곧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있고 없는 것이 거리낌이 없다에서 있음[]은 유()이고 없음[]은 무()로서 유무가 거리낌이 없으므로 진공이 은현자재하고 합하여 한 맛이 되면서 원융하게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진공묘유의 참 묘법인 것입니다.

결국 진공에도 네 가지 뜻이 있고 묘유에도 네 가지 뜻이 있는데, 그 내용은 전체가 구존과 구민입니다. ()은 조()이고 민()은 차()이므로 천태대사가 말하는 쌍차쌍조와 내용에서는 같습니다. 진공이라 해도 쌍차쌍조가 되고 묘유라 해도 쌍차쌍조가 되어, 색은 색이고 공은 공이면서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니 여기에서 참으로 원융무애한 화엄의 근본도리가 발현하는 것입니다.

 

2)공유교철(空有交徹)

 

지금 해설하는 것은 현수스님의 저서인 화엄유심법계기(華嚴遊心法界記)에서 인용한 글로, 그 대체적인 의미는 앞에서 설명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요지와 거의 같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공유(空有)에 대해서 설명할 뿐만 아니라 어떤 방편으로서 그것에 들어갈 수 있는지 그 실증(實證)의 경계에 대해서 언급하는 점이 다릅니다. 즉 진실한 공유의 경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다고 역설하니, 교가(敎家)에서 자주 설하는 공유무애(空有無碍)는 결코 이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으로써 전체 유()를 빼앗으니 유가 공하면서 유가 없으므로 있다는 견해[有見]가 없어지고, 유로써 전체 공을 빼앗으니 공이 있으면서 공이 없으므로 공에 집착함이 모두 없어진다. 공과 유가 즉입(卽入)하여 전체가 서로 통하여 한 가지 모습으로 둘이 없으니 두 견해를 함께 떠남이요, 곧 서로 통하여 걸림이 없으면서 무너지지 않으니 두 상이 서로 존재하여 견해 아님 [非見]이 모두 사라지느니라.

以空으로 全奪有하니 有空而無有하여 有見蕩盡也以有全奪空하니 空有而無空하여 空執都亡也空有卽入하여 全体交徹하여 一相無二하니 雙見俱離卽以交徹無碍而不壞하니 兩相雙存하여 非見咸泯也. [華嚴遊心法界記;大正藏 45, p.644 ]

 

마지막에 말하는 견해 아님이란 쌍차에 집착하는 견해를 말합니다. 공과 유가 상즉상입하여 전체가 통하여 한 가지 모습으로 둘이 없어 공과 유를 찾아볼 수 없게 되어 쌍차가 된다고 하니 중생들이 잘못 알고 쌍차에 집착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이 쌍차에 집착할 어떤 견해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하여 곧 바로 뒤에서 두 상이 서로 존재하는쌍조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 방편을 얻어 법에 들어가는 자는 곧 둥근 구슬을 손바닥에 놓고 보는 것 같아, 모든 견해에 구애받지 않고 자성 바다를 마음 끝에서 증득하여 사물 밖에 한가하며, 망정을 벗어나고 생각을 여의어 멀리 헤아림을 뛰어넘어 문득 백 가지 그른 것을 막아버려 언어와 관념이 모두 끊어진다. 그러므로 이미 망녕된 마음이 영원히 끊어지고 모든 견해의 구름이 걷혀버려 오직 증득한 자만이 상응하는 것이니 어찌 말과 이론에 관계하겠는가.

得是方便而入法者是卽契圓珠於掌內하여 諸見不拘하고 證性海於心端하여 逍然物外하며 超情離念하여 迵越擬議하고 頓塞百非하여 語觀雙絶하니라 旣妄心永滅하고 諸見雲披일새 唯證相應이라 豈關言論이리요.

 

이 방편을 얻어 법에 들어간 자’, 곧 법을 바로 안 자는 둥근 구슬을 손바닥에 두고 보듯이 모든 차별된 견해와 치우친 편견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둥근 구슬이란 자성이나 법성을 뜻하는 중도를 비유한 것입니다.

자성 바다를 마음 끝에서 증득하여 사물 밖에 한가하여에서 자성 바다는 즉 중중(重重)의 무진법계를 말하는데, 이 자성 바다를 마음 속에 증득하면 세상의 온갖 사물에 걸림이 없이 한가하여 참으로 격외도리(格外道理)를 알게 됩니다.

내외(內外)가 상통하기 때문에 삼제(三諦)가 원융하고 십현(十玄)이 무애한 천태나 화엄종은 동()을 때리면 서(西)가 응하고 공()이라 하면 유()가 있고 유라 하면 으레 공이 있어 통했다 하면 막히고 막혔다 하면 통하는 것입니다.

언어와 관념이 모두 끊어진다에서 언어[]는 말과 글로 밖으로 표현한 것이고, ()이란 마음 속에서 분별하는 관념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이니 유니 쌍민이니 쌍존이니 하는 도리들은 언어문자와 관념으로 알기는 알아도 실제로 쌍민쌍존하는 무애법계는 자성을 깨치기 전에는 그 참맛을 모르는 것입니다.

무릇 불법의 근본은 진공묘유에 있으며 화엄법계연기도 그 근원을 역시 여기에 두고 있습니다. 진공묘유의 기본내용은 쌍차쌍조에 있는데, 진공도 쌍차쌍조이고 묘유도 쌍차쌍조입니다. 따라서 진공과 묘유의 내용이 둘 다 중도를 중심으로 한 쌍차쌍조인데 진공과 묘유를 나누어 놓은 이유는 체()의 면으로 공()을 강조할 때 진공이라 표현하고, ()의 면으로 색()을 강조할 때는 묘유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화엄교의 진공과 묘유의 네 가지 뜻을 잘 알아야만 진공묘유의 내용을 아는 동시에 화엄법계연기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2. 법계삼관(法界三觀)

 

법계삼관이란 진리의 세계인 법계를 관찰하는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진공절상관(眞空絶相觀)으로 모든 것이 다 공해서 일체의 상()이 전부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으로 진공절상관에서 모든 것이 공하여 일체의 상이 떨어졌으나 여기에 이르면 도리어 이치와 사물이 걸림이 없이 원융무애하기 때문에 이사무애라고 합니다. 진공절상을 앞에 놓은 것은 만법 성상(性相)의 자체가 진공절상임을 바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체만법이 공하여 상이 다 끊어지면 자연히 서로 융통하고 무애하게 되어 이사무애관이 성립됩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세번째의 주변함용관(周徧含用觀)이라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법계삼관은 본래 두순화상이 세운 것인데 여기에 대한 자세한 해석을 청량국사(淸凉國師: 738839)가 하였으며, 다시 뒤에 규봉(圭峯: 780841)스님이 해설한 것도 있습니다. 두순스님은 화엄법계관을 진공절상관, 이사무애관, 주변함용관의 삼관(三觀)으로 분류했는데, 청량국사처럼 사법계(事法界)를 따로 세우지 않은 것은 이사무애관 가운데 사법계와 같은 내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량국사는 사법계를 따로 세워서 사법계이법계이사무애법계사사무애법계의 네 가지로 분류한 것입니다.

 

1)진공관(眞空觀)

 

첫째는 진공관이니, 첫째는 회색귀공관(會色歸空觀)이요, 둘째는 명공즉색관(明空卽色觀)이요, 셋째는 색공무애관(色空無碍觀)이요, 넷째는 민절무기관(泯絶無寄觀)이다.

第一眞空觀이니 會色歸空觀이요 明空卽色觀이요 色空無碍觀이요 泯絶無寄觀이라. [華嚴法界玄鏡;大正藏 45, p.673 ]

 

첫째, 회색귀공관은 색이 공으로 돌아가는 것을 관하는 것이니 색즉시공이요, 둘째, 명공즉색관은 공이 곧 색임을 밝히는 관이니 공즉시색이요, 셋째, 색공무애관은 색과 공이 걸림이 없음을 관하는 것이니 색과 공이 쌍조하여 쌍존하는 것입니다. 넷째, 민절무기관은 민절(泯絶)하여 모든 것이 붙을 수 없는 관이니 색과 공이 쌍차하여 쌍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색과 공이 서로 상즉(相卽)하고 존민(存泯)하여 위에서 설명한 네 가지 조건을 구비해야만 참으로 진공(眞空)이라는 것이 두순스님의 견해입니다.

 

색과 공이 서로 바라볼 때 이에 많은 뜻이 있다. 처음은 색을 모아 공에 돌아감이니 속()이 곧 진()임을 밝힌 것이고, 두번째는 공이 곧 색임을 밝힌 것이니 진이 곧 속임을 나타낸 것이요, 세번째는 색과 공이 걸림이 없으니 이제(二諦)가 같이 나타남을 밝힌 것이고, 네번째는 민절하여 붙을 곳이 없으니 이제가 모두 없어짐을 밝힌 것이다. 만약 삼제(三諦)에 배대하면 처음은 진제요, 두번째는 속제요, 맨뒤의 둘은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이다. 만약 삼관(三觀)에 배대하면 처음은 공관(空觀)이요, 두번째는 가관(假觀)이요, 세번째와 네번째는 중도(中道)이다. 세번째는 쌍조로서 중도를 밝힌 것이고 네번째는 쌍차로써 중도를 밝힌 것이다. 3관의 뜻이 있지만 삼관이 융통함은 진공뿐임을 밝힌 것이다.

色空相望할새 乃有多義하니 會色歸空이니 明俗卽故眞이요 明空卽色이니 顯眞卽是俗이요 色空無碍明二諦雙現이요 泯絶無寄明二諦俱泯이니라 若約三諦하면 初卽眞諦二卽俗諦後二則中道第一義諦이니라 若約三觀하면 初卽空觀이요 二卽假觀이요 三四卽中道니라 三卽雙照明中이요 四卽雙遮明中이니 雖有三觀意이나 明三觀融通爲眞空耳이라.

이 대목은 앞의 두순스님 견해에 대한 청량국사의 해석입니다. 앞에서 진공을 네 가지로 말할 때는 구존(俱存)과 쌍민(雙泯)한 것으로써 논했지만 지금은 구존쌍민이라 하면 으레 중도제일의제인 쌍차쌍조를 뜻하므로 청량국사는 더 자세하게 진공이 중도라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진속이제(眞俗二諦)는 일체법을 진제와 속제의 둘로 구분한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진속이란 말하자면 진()은 체()가 되고 공()이 되고 이()가 되며, ()은 용()이 되고 가()가 되고 사()가 됩니다.

 

2)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

 

둘째는 이사무애관이다. 이사무애는 소관(所觀)이요, 이것을 마음에서 보는 것은 능관(能觀)이라 한다. 이 관()을 따로 설하면 사()를 관하는 것은 속제의 관이요, ()를 관하는 것은 진제의 관이며 이사가 무애한 것을 관하는 것은 중도관을 이루는 것이다. 또 사를 관하는 것은 자비를 겸하는 것이고 이를 관하는 것은 지혜이니, 이 둘이 무애하면 곧 자비와 지혜가 서로 인도하여 머무름이 없는 행을 이루며 또한 공과 가의 중도관이니라.

第二理事無碍觀이니 事理無碍方是所觀이요 觀之於心卽名能觀이라 此觀別說하면 觀事俗觀이요 觀理眞觀이요 觀事理無碍成中道觀이니라 又觀事兼悲觀理是智此二無碍하면 卽悲智相導하야 成無住行하며 亦卽空假中道觀耳.

 

이사무애(理事無碍)’는 객체인 소관(所觀)이요, ‘이것을 마음에서 보는 것은 주체인 능관(能觀)이라 해서 능관과 소관이 달리 있는 것은 아니다. 방편으로 능과 소를 말하자면 이와 사에 장애없는 것은 소관이 되고 자기 자심은 능관이 된다는 것인데, 이 말은 능소가 있는 데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사가 무애함을 관하는 것이 중도관을 이룬다는 말은 이사무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도 그 자체를 이사무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비와 지혜가 서로 인도하여 머무름이 없는 행[無住行]을 이룬다는 말에서 비()는 행동면에서 자비를 말하는 것이고, ()는 주체면에서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비와 지혜가 이와같이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 둘이 아닙니다. ‘머무름이 없는 행은 모든 상이 끊어진 데서 하는 말이지 자비라든지 지혜라든지 명상을 세울 수 있는 곳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사무애의 내용도 네 가지 뜻이 구비된 쌍차쌍조의 중도로서 진공묘유와 그 내용이 동일합니다. ()()를 나누어서 체()()으로 보면, 체는 진공(眞空)이라 하고 용은 묘유(妙有)라고 하는데, 체가 즉 용이고 용이 즉 체이기 때문에 중도를 제외하고는 묘유도 성립되지 않고 진공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화엄의 사사무애는 진공절상관과 이사무애관 위에 서 있는만큼 중도를 떠나서는 화엄의 사사무애가 절대로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리적 내용면에서 보면 천태에서는 직접적으로 공중으로서 중도를 논의하고 나오는데 화엄에서는 십현(十玄)이니 육상(六相)이니 하여 중도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알고 보면 화엄에서 말하는 사사무애 등의 법계는 천태에서 말하는 삼제원융한 중도제일의제 위에 서 있지 중도제일의제를 제외하고 화엄법계관이 따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종교(終敎)와 돈교(頓敎) 면에서 보더라도 화엄의 진공관을 돈교라 하고 무애관을 종교라고 하는데, 이것은 교상(敎相)을 구별하기 위하여 억지로 나누어 놓은 것이지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진공도 중도고 묘유도 중도로 즉 이사무애가 중도인만큼 돈교니 종교니 구별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시 이렇게 구별해 놓으면 중생들이 이해하기 쉬울까 싶어 억지로 분류한 것이지 실제의 내용면에서 돈이나 종을 찾는 것은 결코 근본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3)주변함용관(周徧含容觀)

 

셋째는 주변함용관이다. 주변함용은 곧 사사무애이니 고덕을 의지하여 십현문을 드러냄이다. 이 십현문이 다같이 연기하여 무애원융하여서 그 문 하나에 모든 것을 다 구비한다.

第三周徧含容觀이라周徧含容卽事事無碍且依古德하여 顯十玄門이라 此之十門同一緣起하여 無碍圓融하여 隨其一門卽具一切하니라. [華嚴經疏;大正藏 35, p.515 ]

 

주변함용관에서 주변(周徧)’은 두루 퍼진다는 뜻이니 천상의 달 하나가 모든 물에 다 비치는 것[一月普現一切水]’을 말합니다.

함용(含容)’이란 그 반대로 일체의 물에 비친 달이 천상의 한 달에 포섭되어 있다[一切水月一月攝]’는 뜻입니다. 따라서 주변함용은 일월보현일체수하고 일체수월일월섭으로 일즉일체(一卽一切)이고 일체즉일(一切卽一)인 사사무애를 말하는 것이며, 주변함용관은 일즉일체이고 일체즉일인 사사무애의 근본법계를 바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가 일체가 되고 일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진공묘유의 체와 용을 따라서 상즉상입이 성립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상즉상입이란 진공묘유의 근본작용인만큼 일체가 상즉상입하면 사사무애의 도리가 자연히 성립합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자의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법계(法界)의 본체가 원래 이러한 까닭입니다. 부처님도 원시경전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대법계연기(大法界緣起), 상주법계(常住法界)라는 것은 부처님이나 중생이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부처님이 바로 깨쳐서 중생들에게 소개하였을 뿐입니다.

법계관이라 하니 마음으로 무엇을 만들어 접합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오해입니다. 만법 자체를 바로 보면 그 실체에 있어 전체가 쌍차쌍조하고 원융무애해서 중도라고 표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습니다. 중도라는 것도 만법 자체의 근본을 지칭할 뿐이지 불교에서 중도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중도를 깨쳤다는 것도 만법 자체의 근본원리인 중도를 깨쳤다는 것이지 부처님이 중도를 만들어 만법의 자체에다 적용시킨 것이 아닙니다.

고덕을 의지하여 십현문을 드러내니에서 고덕(古德)’은 현수스님을 말하는데, 현수스님은 지엄스님의 십현문을 조금 수정하여 탐현기오교장에서 십현문을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지엄스님의 십현문을 계승한 현수스님의 십현문을 고십현(古十玄)’(五敎章說)이라 하고, 이를 수정한 현수스님의 십현문을 신십현(新十玄)’(探玄記說)이라 합니다. 여기서는 현수스님의 신십현문을 말합니다.

이 십현문이 다같이 연기하여 무애원융하여서 그 문 하나에 모든 것을 다 구비한다는 뜻은 십현문을 열어놓으니 각각 문이 열 개인 줄 알면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에 있어 상즉상입하므로 이 문 저 문이 서로서로 다르다고 볼 수 없으며, 일즉일체이고 일체즉일이기 때문에 한 문에 열 개의 문이 다 구비되어 있고, 열 개의 문 이대로가 다 한 문입니다. 중생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열 가지로 나누어 놓은 것이지 딴 문이 있는 줄 알면 안됩니다. 한 문에 일체문이 다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곧 사사무애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동시구족상응문이니 이것은 총론이므로 구문(九門)의 처음에 두는 것이다.

둘째는 광협자재무애문이니 따로 말할 때에 먼저 이것을 말한 것은 이 별문의 유래가 위의 이사무애 가운데 이와 사가 서로 두루 있으므로 아래의 여러 문이 생한다. 또 사()라는 것은 이()와 같이 두루 있으므로 넓은 것이요, 사상(事相)이 무너지지 않으므로 좁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사무애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셋째는 넓음[]과 좁음[]이 걸림이 없으므로 두루 있는 바가 많아서 자신이 많은 것을 바라봄으로 일다상용부동문이 있으니, 서로 용납한 즉 두 체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요, 다만 작용이 통할 뿐이다.

넷째는 이것이 저것을 용납하므로 저것이 곧 이것이며 작용이 통할 이것이 곧 저것이므로 제법상즉자재문이 있다.

다섯째는 상호간에 서로 포섭하므로 서로 숨고 나타남이 있다. 다른 것을 포섭함에 다른 것을 가히 볼 수 있으므로 상입문이 있고, 다른 것을 포섭함에 다른 것의 체가 없으므로 상즉문이 있다고 한다. 다른 것을 포섭함에 다른 것이 비록 있지만 가히 볼 수 없으므로 비밀은현구성문이 있으니 문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 문이 모두 서로 포섭하는 것이므로 상입(相入)한 즉 거울이 서로 비추는 것과 같고, 상즉(相卽)한 즉 물과 파도가 서로 거두는 것과 같고, 은현(隱顯)한즉 조각달이 서로 비추는 것과 같다.

여섯째는 이것이 저것을 포섭하는 것이므로 일체를 포섭하며 저것이 포섭함도 또한 그러하므로 미세상용안립문이 있느니라.

일곱째는 서로 포섭함이 중중무진하므로 제망무진문이 있느니라(인다라망경계문).

여덟째는 이미 제석천궁의 보배구슬 그물과 같으므로 하나를 따라 곧 일체가 무진하므로 탁사현법(생해)문이 있느니라.

아홉째는 위의 여덟 가지 문이 모두 근거가 되므로 의지하는 법이 이미 원융하여 다음의 능히 의지하는 때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이것이 십세격법이성문이다).

열째는 일체만법이 다 그러하므로 그 하나를 드는 즉 주체[] 되는 것을 따라 연대하면서 연기하니 문득 주체와 조건[]이 있느니라(이것이 주반원명구덕문이다).

同時具足相應門이니 以是總故冠於九門之初廣狹(自在無碍)이니 別中先辨此者是別門之由由上理事無碍中하여 理事相扁故生下諸門하니라 且約事如理扁故이요 不壞事相故이니 爲事事無碍之始由廣無碍하여 所扁有多하여 以己望多故有一多相容(不同門)하니 相容卽二體俱存이요 但力用交徹이라 由此容彼하여 彼便卽此由此便彼하여 此便卽彼故有(諸法)相卽(自在)이라 由互相攝則互相隱現하니 謂攝他他可見故有相入門하고 攝他他無体故有相卽門이라 攝他他離存而不可見故(秘密)隱現(俱成)하니 以爲門別故此三門皆由相攝而有相入則如鏡互照相卽則如水波相收隱現則如片月相暎이라 由此攝他하여 一切齊攝하며 彼攝亦然故有微細相容(安立)이라 由互攝重重故有帝網無盡(因陀羅網境界)이라 由旣如所網일새 隨一卽一切無盡故有託事顯法(生解)이라 由上八皆是所以所依之法旣融일새 次辨能依之時亦爾니라 (十世隔法異成門) 由法法皆然하여 隨掌其一則爲主連帶緣起하니 便有主伴(主伴圓明俱德門)이니라. [華嚴疏;大正藏 36, p.75 ]

 

첫째의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은 동시에 모든 것, 일체가 다 구족하다는 말입니다. 우주 삼라만상의 법계는 공간적으로 무변(無變)하고 시간적으로 무한하며, 이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천차만별이지만 모든 것은 시간적공간적으로 서로 의존하여 성립되어 있는 동시에 서로 상응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가 일체에 상즉하고 일체가 하나에 상즉하여 교의(敎義)이사(理事)해행(解行) 등 일체법을 열 가지로 분류한 십의(十義)가 동시에 상응하여 연기를 이루는 것입니다. 동시구족상응문은 십현문 가운데 다른 구문(九門)의 모든 것을 구족하여 자재롭게 상즉하는 총론인 까닭에 구문의 처음에 두는 것입니다.

둘째는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으로 앞에서 동시구족상응문을 먼저 설한 이유는 그것이 전체를 한 덩어리로 말하기 때문이고, 개별적으로 말할 때 이 광협자재무애문을 먼저 말하는 것은 이 별문(別門)의 근본이 이사무애 가운데 서 있기 때문입니다. ()와 사()가 서로 상즉상입하므로 열 가지 문이 다 성립되는 것인데, 사를 이면에서 볼 때는 막힘없이 시방세계에 두루하므로 광()이라 하고, 사면에서 볼 때는 흰 것은 희고 붉은 것은 붉으며 산은 산이고 물은 물로 사상(事相)이 무너지지 않으므로 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광과 협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광이 즉 협이고 협이 즉 광으로서 원융무애하게 되어 사사무애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으로 하나[]와 많음[]이 상용한다는 말은 곧 일다가 상입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광과 협이 무애(無碍)하고 색과 공이 자재해서 용()면으로 볼 때는 하나가 일체에 들어가고 일체가 하나에 들어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일과 다가 상용하지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이것은 상용하면서 부동하고 부동하면서 상용하므로 이런 까닭에 일다상용부동문이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자신이 많은 것을 바라봄으로에서 자신[]은 작은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라 보아도 좋고 개체로 보아도 좋으며, 많음[]은 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전체를 말합니다. 상용(相容)은 상입(相入)으로 거울빛에 비유하면 거울빛이 서로 비칠 때 서로 의지하는 것으로써, 거울빛은 서로 의지해 걸림이 없어 중중무진하지만 다만 빛의 작용 즉 역용(力用)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서로 용납한 즉 두 체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요 단지 작용이 통할 뿐이다한 것입니다.

넷째는 이 거울이 저 거울을 받아들이고 저 거울이 이 거울을 받아들임으로써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이 이것이 되어 일즉일체 일체즉일로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이 성립됩니다. 앞의 일다상용부동문에서는 용()면에서 거울빛을 비유하여 역용교철(力用交徹)로써 상입을 말하고, 여기서는 체()면에서 상즉을 말한 것입니다. 물과 파도의 관계로 비유하면 물과 파도가 상즉하면 호상형탈(互相脫)로써 이 물결과 저 물결이 서로서로 부수면서 합하게 됩니다. 이와같이 모든 법상도 상즉하여 무애자재한 것을 제법상즉자재문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다섯째는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現俱成門)으로 서로 받아들이면 즉 상입상즉하면 서로 은현(隱現)이 있게 됩니다. 은현이란 한 쪽이 드러나면 한 쪽이 숨어버리고 다른 한 쪽이 숨어버리면 다른 한 쪽이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것을 포섭하여 그것을 볼 수 있으므로 거울빛이 서로 의지하는 것과 같아 상입문(相入門)이 있고, 다른 것을 포섭함에 그것의 체가 없어지므로 물과 파도가 서로 상즉하는 것 같아 상즉문(相卽門)이 있게 됩니다. 즉 다른 것을 포섭함에 다른 것이 비록 존재하지만 가히 볼 수 없으므로 비밀은현구성문이라 합니다. 여기서 함께 성립한다[俱成]’란 표현은 숨는 것[]만 있고 나타나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숨는 것이 즉 나타나는 것이고 나타나는 것이 즉 숨는 것으로서 비밀히 숨고 나타나는 것[隱現]을 같이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는 문이 각각 다르기 때문인데 상입문상즉문은현문이 서로 상입한 즉 거울이 서로 비치는 것과 같고, 상즉한즉 물과 파도가 서로 거두는 것과 같고, 은현한 즉 조각달이 서로 비추는 것과 같이 조각달 이대로가 은현을 구비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조각달을 볼 때, 보이는 부분은 현()이고 보이지 않는 부분은 은()으로서 조각달 이대로가 은현 동시를 구비한 것을 은현비밀 구성문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으로 이쪽이 저쪽을 다 포섭하는 것이므로 일체를 이쪽이 모두 포섭하며 저쪽이 이쪽을 포섭함도 역시 똑같다는 의미를 말합니다. 일체(一切)가 일()이 되든지 일이 일체가 되든지 같은 것이 미세상용안립문인데, 진진찰찰이 서로 완전히 그대로 있으면서 상즉상입하여 원융자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일곱째는 제망무진문(帝網無盡門) 또는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으로, 상즉상입하고 은현자재하여 광협이 무애한 것입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제석궁에 있는 인다라망 보배그물의 구슬 하나에 일체가 비치고 일체가 하나에 비쳐서 중중무진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입니다. 제망(帝網)이란 인다라망(因陀羅網)을 뜻하는데, 인다라(Indra)란 천주(天主) 또는 천제(天帝)라고 번역합니다. 인다라망이란 보배구슬을 달아 그물을 짜서 제석궁을 둘러쳐 놓은 망을 말합니다. 이 인다라망에는 수 많은 구슬이 달려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가 서로 비추고 비치어서 일체가 상즉상입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일체만법이 상즉상입함을 인다라망에 비유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석궁에 그런 구슬이 있는가 없는가는 우리가 알 바 아니고 비유로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덟째는 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으로 앞에서 해설한 인다라망과 같이 하나를 따라서 일체가 무진한 까닭으로 하나를 따라 전체가 드러남을 말한 것입니다. 사사(事事) 즉 티끌 하나, 구슬 하나, 흙덩이 하나, 똥덩이 하나, 할 것 없이 그 하나하나에 일체의 법이 다 구비되어 나타나서 사사무애가 성립되니 일색일향(一色一香)이 무비중도(無非中道)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홉째는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입니다. 위에서 말한 여덟 가지는 모든 것이 융통무애하여 상즉상입함을 공간적인 면에서 말한 것이고, 여기서는 시간적인 면에서 말한 것입니다. 즉 십세가 따로 있지만 서로 원융무애하고, 원융무애하지만 따로 성립이 된다는 것입니다. 십세란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에 다시 각각 삼세(三世)가 있다 하여 구세(九世)가 되는데, 이 구세는 다 한 생각에 섭수해 있기 때문에 구세에 이를 더하여 십세라고 합니다. 일념이 무량원겁이고 무량원겁이 일념이다. 이것을 표현하여 십세격법이성문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열째는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俱德門)입니다. 일체만법은 홀로 일어날 수 없어서 반드시 서로 의지하여 연기하게 되는데, 이것을 상의상관법(相依相關法)이라 합니다. 이와같이 일체제법은 서로 주체[]가 되고 조건[]이 되어 존재하는데, 주와 반이 서로 찾아볼 수 없는 동시에 주와 반이 서로 원명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부처와 부처가 서로 보지 못하지만 또한 부처와 부처가 서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체만법이 서로 주()가 되고 반()이 되면서 하나에 일체가 다 따라나오는 이것을 주반원명구덕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반원명구덕문이라 하면 앞의 아홉 문이 다 포함되어 있고, 중간의 어떤 문이라 하면 전후좌우가 다 포함되어 있어 서로 원융무애하여 한 가지도 독립적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중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열 가지 문으로 나누는 것이지 실제로 내용은 한 가지입니다. 한 문 이대로가 십문이고 십문 이대로가 한 문으로서 상즉상입하여 무애자재하게 되어 중중무진한 화엄대법계연기의 사사무애가 성립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화엄십현문에 상대되는 교리로 육상원융(六相圓融)이 있는데, 화엄십현도 이 육상을 가지고 배대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육상(六相)은 총상(總相), 별상(別相), 동상(同相), 이상(異相), 성상(成相), 괴상(壞相)을 말합니다. ()이란 전체적인 것이고 별()이란 개별적인 것이며, ()이란 같다는 말이고 이()란 다르다는 말이며, ()이란 이룬다는 것이고 괴()란 부순다는 것입니다. 이 총괴가 상대가 되면서 동시에 총()이 별()이고, ()이 이(), ()이 괴()로서 원융무애하며 서로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집을 비유로 들어보면 집을 전체[]로 볼 때 기둥과 문방 등은 별개[]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집을 제외하고 기둥과 문방 등이 따로 있을 수가 없으며, 또한 반대로 기둥과 문방 등을 따로 제외하고 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총()이 즉 별()이고 별이 즉 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집 전체를 볼 때는 집 하나로서 같지만 집을 이룸에 있어 기둥문 등이 전부 다르므로 별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이라고 부를 때에는 모두 다 한 재료로서 집을 제외하고 따로 기둥 다르고 서까래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이 즉 이()고 이가 즉 동인 것입니다. 또 기둥과 문방 등이 서로 연()이 되어 집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둥과 문방 등은 각각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이 즉 괴()이고 괴가 즉 성이 됩니다.

이 총괴의 육상에 관한 내용은 벌써 화엄십현의 내용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처음의 동시구족상응문은 총()을 말하고 광협자재무애문 등은 별()을 말하는 것으로서, 육상이나 십현이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거의 같은 것입니다. 육상의 총별과 동이와 성괴가 원융무애 자재하고 또한 화엄십현의 이()와 사()가 원융무애자재해서 사사무애법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4)이사원융의(理事圓融義)

 

화엄의 법계관을 말한 것으로 이사원융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와 사()는 일체법의 본질과 현상을 나타내는 말인데 이()와 사()가 원융한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사구융문(理事俱融門)을 비롯하여 이법은현문(理法隱顯門)사법존민문(事法存泯門)사사상재문(事事相在門) 등의 열 가지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설하는 이사구융문(理事俱融門)은 그 중의 맨 처음인데 이와 사가 원융한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찾아 보면 이것 역시 쌍차하고 쌍조하는 중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뜻을 현수스님은 열 가지로 해명하고 있습니다.

 

첫째의 이()와 사()가 함께 원융한 문은 사()는 허()하고 이()는 실()하여 서로 포섭하고 전부 거두어 들여서 원융하게 열 가지 뜻을 이룬다. 첫째는 연기한 사법(事法)이 허공으로서 자성이 없으므로 전체가 모두 이()이다. 둘째는 참 성품의 이법(理法)이 진실하므로 전체가 모두 사임을 장애하지 않는다. 셋째는 앞의 두 뜻이 서로 떨어지지 않으므로 이와 사가 함께 존재한다. 넷째는 두 뜻이 서로 빼앗음에 말미암은 까닭으로 이와 사가 쌍으로 끊어진다. 다섯째는 사가 전체 이이면서 사가 무너지지 않는다. 여섯째는 이가 전체 사이면서 이가 없어지지 않는다. 일곱째는 둘이 함께 존재하면서도 함께 서지 못한다. 여덟째는 함께 없어지면서도 사라지지 않음을 갖춘다. 아홉째는 앞의 여덟 가지가 서로 수순하면서 함께 나타난다. 열째는 모두 각자가 서로 빼앗으면서도 없어지지 아니함이다.

第一理事俱融門事虛理實하여 相攝全收하여 融成十義緣起事法以虛空無性故擧體全理也眞性理法以眞實故不碍擧體全事也由前二義不相離故理事俱存이요 由二義相奪故理事雙絶也事全理而事不壞理全事而理不失也二俱存而俱不立이요 俱亡而具不泯이요 前八相順而俱現이오 皆各相奪而不泯이라. [華嚴發菩提心章;大正藏 45, p.654 ]

 

이와 사가 원융무애하니 사는 허하고 이는 실하여 서로 포섭하고 거두어들이면서 열 가지 뜻을 이루게 됩니다.

첫째, 사법(事法)이 연기함에 공하여 자성이 없는 까닭에 사 이대로가 이이니, 즉 색() 이대로가 공으로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됩니다.

둘째, 참 성품의 이법(理法)이 진실하므로 이 이대로 사임을 장애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일체가 공하다고 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일체의 모든 것이 연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즉 공 이대로가 사() 즉 색이라는 말입니다.

셋째, 앞의 두 가지 뜻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서 서로가 떠나 있지 않기 때문에 이즉사(理卽事) 사즉이(事卽理)로서 이와 사가 같이 있게 됩니다. 이것은 곧 쌍조면에서 하는 말입니다.

넷째, 앞의 두 가지 뜻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서 색이라고 말할 때는 공을 빼앗아버리고 공이라고 말할 때는 색이 서지 못하는 까닭에 이와 사가 쌍절(雙絶)이 됩니다.

다섯째, 사 이대로가 전체 이이나 사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게 됩니다. 색 이대로가 공인데 색즉시공이면서 공즉시색이므로 공이면서 색은 그대로 남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섯째, 이 이대로가 전체 사이면서 이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으니 이는 공즉시색이면서 색즉시공이므로 공이 그대로 있게 됩니다.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서로 원융무애하게 되면 이는 이대로 사는 사대로 엄연히 그대로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일곱째, 이와 사든지 색과 공이든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되면 분명히 쌍존(雙存)이 되면서도 또한 함께 서지 못합니다. 두 가지가 완전히 쌍존이 되면 쌍존이 곧 쌍차로서 쌍차는 저절로 드러나게 됩니다.

여덟째, 이와 사 즉 공과 색이 다 없어지는 동시에 다같이 그대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쌍차 이대로가 쌍조라는 것을 말합니다. 일곱째에서 말한 내용을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앞의 네 가지 뜻에서도 일체가 색즉시공 공즉시색하고 색공이 구존하고 색공이 쌍절했다라고 한 것을 여기서 다시 한번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색이 공이 되었다고 해도 색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공이 색이 되었다고 해도 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같이 있으면서도 같이 없고 같이 없으면서도 같이 있는 이것이 불교의 묘한 이치며 부사의한 경계인 것입니다.

아홉째, 앞에서 설명한 여덟 가지 설명이 서로 한꺼번에 통하여 성립된다는 뜻입니다.

열째, 모두 다 서로 부수어 쌍차를 하면서도 엄연한 이치가 있어 쌍존이 된다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색과 공이 쌍차쌍조하여 원융무애해서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며 이렇게 안해도 되고 저렇게 안해도 되며, 건립한다고 파괴되는 것이 아니며 파괴한다고 건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부정해도 긍정이 그대로 있으며 아무리 긍정해도 부정이 그대로 있어 긍정이 부정이고 부정이 긍정으로 쌍조가 쌍차이고 쌍차가 쌍조입니다. 원융무애한 원리에 입각해 사사무애 법계연기라든가 삼제원융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이 쌍차쌍조하는 중도의 원리에 두고 있는만큼 불교에서 가장 발달되었다는 화엄십현이라든가 화엄무진연기도 중도를 떠나서는 조금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화엄연기라는 것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중도 연기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법상에 오르면 중도 중도하면서 중도 법문만 한다고 불평이 있을지 모르나 불교 교리상 가장 발달되었다는 천태나 화엄의 교리도 근본적으로 쌍차쌍조하는 중도의 교리를 제외하고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불교교리를 올바로 알려면 중도교리를 알아야 되고 근본적으로 깨치려면 중도를 깨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중도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만 탈선하여 불교가 아니고 외도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증거를 제시하여 자꾸 중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3. 사문십의(四門十義)

 

화엄종에서 말하는 사사무애(事事無碍) 즉 법계연기(法界緣起)라는 것도 쌍차쌍조(雙遮雙照)를 내용으로 한 중도연기(中道緣起)이지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화엄종취가 실제로 쌍차쌍조인지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화엄종에서는 쌍차쌍조가 화엄종취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현수스님이나 청량국사에 이르러서는 화엄종이 쌍차쌍조를 중심내용으로 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드러내 놓았으니 지금부터 그것을 해설하겠습니다.

아래에서 해석하는 내용은 대부분 현수스님의 말이며, 이것을 다시 청량스님이 부연한 것입니다. , 청량스님이 현수스님의 학설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일부를 보완하여 해설한 것입니다.

 

1)사문(四門)

 

모든 경이 각자 주장이 있으니 지금 여기서는 따로 이 화엄경의 종취를 밝힌다. 뜻을 드러냄에 자세히는 네 문이 있다.

一切諸經各自有宗하니 今此別明此經(華嚴)宗趣하니라……顯義中曲有四門이라. [華嚴經疏;大正藏 35, p.521 ]

 

법화경이든지 화엄경이든지 모든 경전에는 각자 주장하는 종취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는 화엄경의 종취를 밝히는데 그것에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 네 문이 서로 융화적으로 성립되어야만 화엄종의 종취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따로 법계를 여는 것으로써 인과를 이루니 보현법계(普賢法界)를 인()이라 하고 사나법계(舍那法界)를 과()라 한다. 그러므로 인과가 이실법계(理實法界)를 벗어나지 않는다. [:처음 하나는 곧 체()에 즉()한 용()이니 곧 인과연기다.]

第一別開法界以成因果謂普賢法界爲因이요 舍那法界爲果是故因果不離理實法界.(:初一卽體之用이니卽因果緣起)

 

화엄종에서는 체()와 용()을 나누어서 말할 때 법계(法界)를 체라 하고 인과(因果)를 용이라고 표시합니다. 먼저 법계, 즉 체를 포섭해서 용을 이룬다는 것은 체 이대로가 용이고 법계 이대로가 인과라는 말입니다. 이 뜻은 결국 공즉시색이라는 표현과 같은 말입니다.

인과(因果)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보현법계가 인이 되고 사나법계가 과가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인과 과가 이실법계(理實法界)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실법계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법계, 즉 체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용의 법계인 보현법계가 인이 되고 사나법계가 과가 되는데, 이것은 법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라는 것은 이실법계인 체의 법계를 여의고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즉체지용(卽體之用)으로, 체 이대로 전체가 모두 용이므로 이것을 용면에서 볼 때 인과연기라는 말입니다.

맨 처음의 첫째는 따로하는 말은 현수스님의 탐현기에 나오는 글입니다. 청량스님이 현수스님의 학설을 인용하면서 그 구분을 표시하지 않고 자기의 견해와 합쳐서 해설한 것입니다. 그리고 끝의 괄호 속에 소()라는 것은 청량스님의 화엄경소(華嚴經疏)를 뜻합니다.

 

둘째는 인과를 모아 융화함으로써 법계와 동일함이다. [:다음 하나는 즉용의 체()이니 이실법계다]

第二會融因果以同法界.(:次一卽用之體理實法界)

 

둘째는 인과를 모아서 융화시킴으로 법계와 동일하다는 말은 앞의 내용을 거꾸로 말한 것입니다. 앞은 공즉시색인데 여기는 용 이대로가 체[卽用之體]로서 곧 색즉시공이라는 뜻입니다. ()은 체()이며 이실법계고, 색은 용이며 인과로 표현됩니다. 이 둘째는 즉용지체(卽用之體)로서 용 이대로 전체가 체이며 이실법계라고 하는데, 이것은 공을 밑바탕으로 삼고 하는 말입니다.

 

셋째는 법계와 인과를 분명히 나타내 보냄이다. [:셋째는 곧 체와 용이 쌍으로 나타남이니 곧 쌍으로 밝힘이다]

第三法界因果分明顯示.(:卽體用雙顯이니 卽雙明이요)

 

법계는 체요 인과는 용으로 여기에서 체와 용을 쌍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곧 쌍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넷째는 법계와 인과가 쌍으로 원융하여 함께 떨어지니, ()과 상()이 섞이어 원융해서 무애자재하며 또한 열 가지 뜻이 있느니라. [:넷째는 곧 체와 용이 용융하니 곧 부사의라]

第四法界因果雙融俱離性相混融하여 無碍自在하며 亦有十義니라.(:四卽體用鎔融이니 卽不思議)

 

법계와 인과가 쌍으로 원융하여 함께 떨어지니라는 말은 법계라 해도 안되고 인과라 해도 안되는 쌍차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네 문의 내용을 정리하여 보면, 처음은 즉체지용(卽體之用)으로 공즉시색(空卽是色)이고 다음은 즉용지체(卽用之體)로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며, 셋째는 법계와 인과의 체용쌍현(體用雙顯)으로서 쌍조를 드러내고, 넷째는 법계와 인과의 체용구리(體用俱離)로서 쌍차를 설합니다. 결국 이것은 천태의 삼제원융도리와 똑같은 것이니 즉 가로부터 공에 들어가고[從假入空] 공으로부터 가로 들어가는 것[從空入假]과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같은 것입니다. 종체귀용(從體歸用)하고 종용귀체(從用歸體)해서 함께 나타나고[雙現] 함께 떨어지니[雙離] 이것이 삼제원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쌍차쌍조가 되므로 끝에 가서 성(性相)이 혼융하고 무애자재해서 열 가지 뜻이 있다는 것도 위의 네 문을 포함하여 논의하는 것이지 맨 끝의 네번째 문만 가지고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서로 상즉상입하여 하나를 지적하면 전체가 다 따라오고 전체를 지적하면 하나가 포함되듯이 네 문을 분리해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열 가지 뜻이 무엇인가 이 열 가지 뜻도 원래 현수스님의 탐현기에 있는 것인데 청량스님이 자신의 소()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2)십의(十義)

 

첫째는 상()을 다 떠나므로 인과가 법계와 다르지 아니하니 곧 인과는 인과가 아니다.

由離相故因果不異法界하니 卽因果非因果也. [探玄記;大正藏 35, p.120 , 經疏, 大正藏 35, p.522 ]

 

인과(因果)는 용()이고 법계(法界)는 체()이므로 인과가 법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은 용이대로가 체라는 뜻이 됩니다.

 

둘째는 자성(自性)을 떠나므로 법계가 인과와 다르지 아니하니 곧 법계는 법계가 아니다.

由離性故法界不異因果하니 卽法界非法界也.

 

앞에서 상()을 가지고 말했지만 지금은 성()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법계는 인과를 제외하고 따로 없으므로 법계라는 것을 법계라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앞의 두 가지는 인과와 법계를 쌍차하여 다 막는 견지에서 하는 말로, 인과가 법계이기 때문에 인과를 인과라 할 수 없고 법계가 인과이기 때문에 법계를 또한 법계라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성을 떠났지만 자성이 없어지지 않는 까닭에 법계가 곧 인과니 법계가 아닌 것으로써 법계로 삼는다.

由離性不泯性故法界卽因果以非法界爲法界也.

 

체 이대로가 용이고 용 이대로가 체이기 때문에 체와 용은 표현만 다르지 내용은 똑 같습니다. 바로 앞에서는 법계가 아니라 하여 부정을 했지만 여기서는 법계 이대로가 법계라 하여 긍정을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상을 여의었지만 상을 무너뜨리지 않으므로 인과가 곧 법계이니 인과가 아닌 것으로써 인과로 삼는다.

由離相不壞相故因果卽法界以非因果爲因果也.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므로 아무리 상을 떠났지만 상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과가 곧 법계이므로 인과가 아닌 것으로써 인과를 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말한 앞의 첫째와 둘째는 차문(遮門)이고, 뒤의 셋째와 넷째는 조문(照門)이 됩니다.

 

다섯째는 상을 여의는 것이 성을 여의는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인과와 법계가 쌍으로 없어지면서 함께 원융하여 말과 생각을 멀리 초월함이다.

由離相不異離性故因果法界雙泯俱融하여 迵越言慮也.

 

성이 즉 상이고 상이 즉 성이기 때문에 성과 상이 여여(如如)하니 상을 여의었다는 말은 곧 성을 여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상과 성 즉 인과와 법계가 서로 다 없어져 체와 용이 사라지므로 원융하게 됩니다. 인과와 법계가 쌍민(雙泯)하고 구융(俱融)하는 이 자리는 모든 말과 생각이 다 끊어진 상태입니다.

앞에서 차()니 조()니 하는 것은 개별적으로 차조를 말한 것이고, 여기서는 성(性相)을 합하고 인과와 법계를 합해서 전체를 다 쌍차해 버린다는 뜻입니다.

 

여섯째는 무너지지 않음 [不壞]이 없어지지 않음 [不泯]과 다름이 없으므로 인과와 법계가 함께 존재하여 현전하니 분명해서 가히 볼 수 있다.

由不壞不異不泯故因果法界俱存하여 現前爛然可見也.

 

무너지지 않음[不壞]이 없어지지 않음[不泯]과 다름이 없으므로 불괴가 즉 불민이고 불민이 즉 불괴로서 인과와 법계가 함께 존재하여 현전하니 쌍조를 뜻합니다. 체와 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먼저는 체가 즉 용이고 용이 즉 체이기 때문에 체라 해도 안되고 용이라 해도 안되어서 쌍차해 버렸고, 이번에는 체가 즉 용이고 용이 즉 체로, 체와 용이 함께 분명히 나타나 있으므로 쌍조하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위의 있음[]과 소멸 []이 다시 다름없는 까닭에 보고 듣는 법을 초월하여도 항상 보고 듣는 것을 통달하고 생각하는 뜻을 끊어도 말과 생각에 장애되지 않는다.

由上存泯復不異故超視聽之法하여 恒通見聞하고 絶思議之義하여 不碍言念也.

 

위라고 하는 것은 다섯째와 여섯째의 쌍차쌍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은 쌍조고 민()은 쌍차로서 존과 민이 다르지 아니합니다. 이 보고 듣고 하는 언어 문자를 떠난 법이 항상 보고 듣는 것을 통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가사의해서 언어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지만 또한 아무리 생각을 하고 아무리 말을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전체를 부정하는데 있어 언어 문자를 갖고 표현할 수 없다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쌍조가 즉 쌍차고 쌍차가 즉 쌍조이기 대문에 서로 원융무애해서 말할 수 없다는 이대로가 말할 수 있는 것이 되고, 말할 수 있는 이대로가 말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나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똑같이 서로 융통자재한 것입니다.

 

여덟째는 법계의 성품이 원융하여 가히 나눌 수 없으므로 곧 법계의 과()가 법계를 통섭해서 모두 다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이 의지하는 바를 따라 또한 과()가운데 있으니 그러므로 부처님 가운데 보살이 있다.

由法界性融하여 不可分故卽法界之果統攝法界하여 無不皆盡하며 因隨所依하여 亦在果中이니 是故佛中有菩薩也.

 

법계의 성품이 원융하여 체와 용으로 나눌 수 없으니 법계의 인이니 과이니 할 것 없이 법계의 과()가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법계를 통섭합니다.

여기서는 과() 중에 인()이 있어 서로 상즉상입하게 되므로 부처 가운데 보살이 있고 부처 가운데 중생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체의 정법(正法)과 사법(邪法)이 완전히 원융무애하여 상즉상입한 소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홉째는 곧 법계의 인이 뜻을 포섭함도 또한 그러하므로 보현(보살)가운데 부처님이 있느니라.

卽法界之因攝義亦爾故普賢中有佛也.

 

여기서는 앞의 말을 뒤집어 법계의 과를 법계의 인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와 마찬가지로 인() 중에 과()가 있어 서로 상즉상입하기 때문에 보현보살 가운데 부처님이 있고 중생 가운데 부처님이 있다는 것입니다.

 

열째 인과의 두 자리가 각각 차별을 따라서 하나하나 법과 하나하나 행과 하나하나 덕과 하나하나 자리가 모두 각각 총체적으로 무진 법문 바다를 포섭함은 실로 법계의 원융함을 갖추어 포섭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니 이것이 화엄의 무진종취이다.

因果二位各隨差別하여 一一法一一行一一德一一位皆各總攝無盡諸法門海者良由無不該攝法界圓融故也是爲華嚴無盡宗趣니라.

 

여기와서는 하나의 색과 하나의 향이 중도가 아님이 없다[一色一香 無非中道]라는 말과 같은 소리인데, 진진찰찰이 흙덩이, 금덩이, 부처, 마구니 할 것 없이 전체가 모두 중도로서 쌍차쌍조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쌍차쌍조해서 차와 조가 동시이면서도 차라 해도 안되고 조라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사사무애인데 그렇다고 이사무애(理事無碍)와 사사무애(事事無碍)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뜻을 더 드러내기 위해서 표현하자니 사사무애이지 그 속 내용은 이사무애와 같은 것입니다.

앞에서 아홉 가지를 말했는데 끝까지 가면 이것이 전부 다 통하여 융통자재해서 하나하나가 전체에 다 통하고 전체가 또 하나로 통하여 진진찰찰 무진법계가 안 벌어질래야 안 벌어질 수 없습니다. 마치 인다라망의 구슬이 서로 비쳐서 서로 다함이 없듯이 제망중중의 무진법계연기가 열리는 이것을 화엄의 종취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앞의 네 부문의 내용도 쌍차쌍조고 다시 이것을 열 가지 뜻으로 분류해 놓은 것도 쌍차쌍조이지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제4(第四門)으로서 앞의 것을 원융한 즉 네 문이 한 가지 법이다. 그러므로 조에 즉하여[卽照] ()하고 차에 즉하여 조하며, 쌍조하고 쌍차해서 원만하고 밝게 한 가지로 통하면 이 종취에 계합하느니라.

旣以第四融前則四門一揆卽照而遮하고 卽遮而照하여 雙照雙遮하여 圓明一貫하면 契斯宗趣矣니라. [經疏, p.523 ]

 

4문은 법계인과 함께 융화하고 함께 떠나는 것[雙融俱離]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 제4문 속에 앞의 세 가지가 모두 다 포함되어 있으므로 십의라는 것이 네 문 전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네 문 속에 십의가 들어 있는데, 그 원리는 중도원리인 쌍차쌍조라는 것입니다.

결국 현수스님이 화엄종취를 사문십의(四門十義)로써 나누어서 말할 때에도 쌍차쌍조를 갖고 논했고, 청량스님이 그 뜻을 받아서 소()를 낼 때도 역시 쌍차쌍조의 원융도리를 갖고 화엄종취라 했습니다. 그리고 쌍차쌍조라는 중심 내용은 지금까지 해설한 대로 중도(中道)입니다. 표현하는 것은 서로간에 다르다고 해도 화엄이나 천태나 근본이 중도에 있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천태의 삼제원융이나 화엄의 법계연기나 모두 쌍차쌍조하는 것인 만큼 화엄종과 천태종이 서로 우열을 나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 보면 우스운 일입니다. 자기네들끼리는 서로 낫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하나도 서로 나은 것도 없고 또 못한 것도 없습니다. 양쪽의 교리를 설명하는 방법이 서로 다르고 표현하는 것이 다 묘하지만 우열을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4. 제법무애도리(諸法無碍道理)

 

현수스님은 탐현기(探玄記)에서 제법이 원융무애한 도리를 연기상유고(緣起相由故), 법성융통고(法性融通故), 각유심현고(各唯心現故) 등의 열 가지로 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중 첫번째인 연기상유(緣起相由)를 거론하여 해설한 것입니다. 즉 이 연기상유에도 또한 열 가지 이유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이문상입의(異門相入義), 이체상즉의(異體相卽義), 체용쌍융의(體用雙融義)의 세 가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이문상입의(異門相入義)

 

다른 문이 상입하는 뜻이란 모든 연()의 역용(力用)이 서로 의지하여 서로 모습을 빼앗으므로 각자 전력(全力)이 있음과 전력이 없음의 뜻을 갖고 있어 마침내 연기가 성립됨을 말한다. ()에 말하는 것과 같이 인()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연()에서 나기 때문이며 연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인()에서 나기 때문이다. 만약 각자 오직 유력(有力)만 있고 무력(無力)이 없으면 곧 결과[]가 많은 허물이 있으니 낱낱이 각자 생기기 때문이다. 만약 각자 오직 무력만 있고 유력이 없으면 곧 결과가 없는 허물이 있으니 연이 아닌 것과 같아서 함께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기는 반드시 서로 의지하여 유력과 무력을 갖추어야 한다. 만약 한 가지 연이라도 없으면 일체가 성립하지 못하며 나머지도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하나가 능히 여럿을 지님은 하나가 유력이므로 능히 여럿을 포섭함이요, 여럿이 하나에 의지함은 여럿이 무력이므로 하나에 숨어들어간다. 하나의 유력이 반드시 여러 유력과 함께 할 수 없으므로 이 때문에 하나이면서 여럿을 포섭하지 않음이 없다. 여러 무력이 반드시 하나의 무력과 함께 할 수 없으므로 이 때문에 여럿이면서 하나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다.

마치 하나가 지니고 여럿이 의지함이 그러한 것과 같이 여럿이 지니고 하나가 의지함도 또한 그러하니 위에 돌이켜서 생각하라. 이것은 또 여럿이 하나를 포섭하지 않음이 없고 하나가 여럿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음이다. 마치 하나가 여럿을 바라볼 때 의지[]와 지님[]이 있고 전력과 무력이 있어 항상 모든 것이 자기 가운데 있고 (자기가)숨은 뒤에 여럿 가운데 있어 동시에 무애한 것과 같다. 여럿이 하나를 바라볼 때에도 또한 그러함을 알라. 구존(俱存)쌍민(雙泯)두 구가 무애함도 이에 준하여 생각할 것이다.

異門相入義謂諸緣力用互依持하며 互形尊故各有全力無全力義하여 緣起方成이라 如論云 因不生緣生故緣不生自因生故라하니라 若各唯有力하고 無無力하면 卽有多果過하니 一一各生故若各唯無力하고 無有力하면 卽有無果過하니 以同非緣하여 俱不生故니라 是故緣起要互相依하여 具力無力이러니 如闕一緣하면 一切不成하며 餘亦如是니라 是故一能持多하니 一是有力일새 能攝多多依於一하니 多是無力일새 潛入一하니라 由一有力必不得與多有力俱是故無有一而不攝多也由多無力必不得與一無力俱是故無有多而不入一也如一持多依旣爾하며 多持一依亦然하니 反上思之하라 是卽亦無多不攝一이요 一無不入多者也니라 如一望多有依有持하며 全力無力하여 常全多在己中하고 潛已在多中하여 同時無碍하니 多望於一當知亦爾니라 俱存雙泯二句無碍思準之니라. [探玄記;大正藏 35, p.124 ]

 

다른 문이 상입하는 뜻[異門相入義]’이란 다른 문에서 서로 들어간다는 뜻인데, 예를 들면 나무와 돌이 서로 들어가는 식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모든 인연의 역용(力用)이 서로 의지하고 서로 빼앗으므로 제각기 유력과 무력의 뜻을 갖고 있어 연기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유력과 무력이 있기 때문에 유력과 무력이 서로 연기가 되고 화합이 되는 것이지 유력뿐이고 무력이 없고 무력뿐이고 유력이 없으면 연기가 성립되지 못합니다. 즉 유력만 있고 무력이 없으면 과()가 많은 허물이 생기고 무력만 있고 유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생기지 않으므로 과()가 없는 허물이 생겨버립니다. 연기는 서로 의지하여 생기는 상의성(相依性)이므로 유력과 무력이 서로 의지하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면 원융무애가 성립되지 못합니다.

하나[]와 여럿[]이 있는 경우에, 하나가 유력이고 여럿이 무력일 때 하나가 여럿을 포섭하고 여럿이 하나에 들어가지만, 만약 여럿이 또한 유력이면 서로 버티어 화합이 안됩니다. 무애자재한 연기가 성립되려면 하나가 유력일 때 여럿은 반드시 무력이 되어야 하고 여럿이 무력일 때 하나는 반드시 유력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여럿을 지니는 경우[一持多]에는 하나가 유력이고 여럿이 무력이지만 여럿이 하나를 지니는 경우[多持一]에서는 여럿이 유력이 되고 하나가 무력이 됩니다. 이것은 앞의 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문에서 논()의 구절을 인용하여 연()에서 나거나 인()에서 생겨난다고 한 것은 지금까지 설명한 유력과 무력의 작용을 적용하여 연기법의 일면을 해설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서로 의지[]와 지님[]이 있고 전력과 무력이 있어 항상 여럿을 포함하며 하나가 여럿 가운데로 들어가서 하나와 여럿이 동시에 무애하게 됩니다. 또 여럿이 하나를 바라보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서로 유력과 무력을 구비하여 여럿이 하나를 포섭하며 여럿이 하나에 들어가는 것이 무애합니다. 또한 하나와 여럿이 함께 존재하고[俱存] 함께 사라지는[雙泯] 두 구가 원융무애한 것도 앞의 설명에 의거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이체상즉의(異體相卽義)

 

다른 체()가 상즉한다는 뜻이란, 모든 연()이 서로 바라봄에 전체가 모습을 빼앗아 유체(有體)와 무체(無體)의 뜻이 있어 바야흐로 연기가 성립됨을 말한다. 만약 하나의 연이라도 빠지면 나머지는 일어남이 성립하지 않는다. 일어남이 성립하지 않으므로 연의 뜻이 곧 무너진다. 이 하나의 연을 얻어서 일체가 일어남을 성립시키니 일어나는 바가 성립하므로 비로소 연의 뜻이 선다. 그러므로 하나의 연은 일어나게 하는 것이요[能起], 여러 연과 결과는 생겨난 것이다[所起]. 이것은 곧 여럿이 하나를 위하여 성립하니 여럿은 무체(無體)요 하나가 능히 여럿을 지으니 하나는 유체(有體)이다. 하나의 유체는 반드시 여럿의 유체와 함께 할 수 없으며, 여럿의 무체는 반드시 하나의 무체와 함께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럿 아닌 하나가 없으며 하나 아닌 여럿이 없다.

하나와 여럿이 이미 이러하며 여럿과 하나가 또한 그러하니 위에 돌이켜서 생각하라. 마치 하나가 여럿을 바라볼 때에 유체와 무체가 있기 때문에, 능히 다른 것을 포섭하여 자기와 동화시키며 자기를 없애고 다른 것과 동화함이 동시에 무애하다. 여럿이 하나를 바라볼 때에도 마땅히 또한 그러함을 알지니 앞에 준하여 생각하라. 구존(俱存)쌍민(雙泯)두 구가 무애함도 또한 이것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異體相卽義謂諸緣相望할새 全體形尊하여 有有體無體義하여 緣起方成하니 以若闕一緣하면 餘不成起니라 起不成故緣義卽壞하나니 得此一緣하여 令一切成起하여 所起成故緣義方立하느니라 是故一緣是能起多緣及果俱是所起是卽多爲一成이니 多是無體一能作多하니 一是有體由一有體必不得與多有體俱하며 多無體必不得與一無體俱是故無有不多之一이요 無有不一之多니라 一多旣爾하며 多一亦然하니 反上思之하라 如一望多有有體無體故能攝他同己하며 廢己同他同時無碍하니라 多望於一當知亦爾하니 準前思之니라 俱存雙泯二句無碍亦思之可見이라.

 

다른 체가 상즉하는 뜻[異體相卽義]’은 이체(異體)면에서 상즉(相卽)을 논하는 것입니다. 상입(相入)이라는 것은 거울이 서로 비칠 때 서로 의지가 되어 이 거울이 저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저 거울이 이 거울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상즉이라는 것은, 파도가 서로 합하는 것을 가지고 비유하면, 이쪽 파도와 저쪽 파도가 합할 때 이쪽 파도도 부서지고 저쪽 파도도 부서지면서 또한 서로 합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을 상즉이라 합니다.

모든 인연이 서로 바라보고 서로 모습을 빼앗는 유체(有體)와 무체(無體)의 뜻이 있어야 연기가 성립됩니다. 유체라는 것은 유를 말한 것이고 무체라는 것은 공을 말한 것으로 곧 색과 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색과 공의 근본 뜻을 벗어나서는 상즉이 성립되지 못하며 더 나아가 상입도 성립되지 못합니다. 연기가 성립하는데 만약 한 연()이라도 빠지게 되면 연기의 뜻은 무너져 버립니다. 곧 하나의 연도 빠짐없이 다 갖추어야 일체 연기의 뜻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연[一緣]이 능히 일으키는 것[能起]이 되고 여러 연[多緣]이 일어나는 것[所起]이 됩니다. 즉 하나와 여럿이 서로 상대하여 주()가 되고 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럿이 하나로 들어갈 때, 여럿은 무체(無體)가 되어 유체(有體)인 하나에 들어갑니다. 만약 여럿도 유체고 하나도 유체가 되면 여럿이 하나에 들어가지 않고 서로 버티기 때문에 연기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가 주체가 되고 여럿이 객이 될 때는 반드시 하나는 유체가 되고 여럿은 무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여럿 아닌 하나가 없고 하나 아닌 여럿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와 여럿이 이미 그러한 것과 같이 여럿과 하나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가 유체면 여럿이 무체고 여럿이 유체면 하나가 무체가 되어야 상즉으로서 연기가 성립되지, 그렇지 않으면 연기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하나가 주인일 때 여럿은 객이 되고 여럿이 주인일 때 하나는 객이 되어야 연기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체와 무체 즉 색과 공이 상즉면에서 하나와 여럿이 함께 존재하고[俱存] 함께 사라지는 [雙泯] 두 구도 앞의 설명에 의하면 또한 무애함은 알 것입니다.

 

3)체용쌍융의(體用雙融義)

 

체와 용이 쌍으로 원융하다는 뜻이란, 모든 연기법은 반드시 역용(力用)이 교섭하고 전체가 융합하여야 비로소 연기가 성립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원융하게 통하는 것에도 또한 여섯 구[六句]가 있다.

하나는 체()로서 용() 아님이 없으므로 체를 들면 전부가 용이니, 곧 오직 상입이 있을 뿐이요 상즉의 뜻은 없다. 둘은 용으로서 체 아님이 없으므로 용을 들면 전부 체이니, 곧 오직 상즉만 있을 뿐이요 상입이 없다. 셋은 체에 돌아가는 용이 용을 장애하지 않고 모든 용의 체가 체를 잃지 않음이니 이것은 곧 함께 존재함을 장애하지 않아 즉()하면서 또한 입()하여 자재하게 함께 나타남이다. 넷은 모든 용의 체가 체를 없애고 모든 체의 용이 용을 잊어서 즉하지도 않고 입()하지도 않아 원융한 한 맛이다. 다섯은 앞의 네 구를 합하여 같은 연기라서 걸림없이 함께 존재함이다. 여섯은 앞의 다섯 구를 다 없애버려 상대가 끊어지고 말을 떠남으로 자성바다에 고요히 같아진다.

體用雙融義謂諸緣起法要力用交涉하고 全體融合하여 方成緣起是故圓通亦有六句니라 以體無不用故擧體全用이라 卽唯有相入이요 無相卽義以用無不體故擧用全體卽唯有相卽이요 卽無相入也歸體之用不碍用하고 全用之體不失體是卽無碍雙存하여 亦卽亦入하여 自在俱現이요 全用之體體泯하고 全體之用用亡하여 非卽非入하여 圓融一味合前四句하여 同一緣起無碍俱存이요 泯前五句하여 絶對離言할새 冥同性海니라.

 

지금까지 상즉은 체라 하고 상입은 용이라 하여 나누어 논의했지만 체와 용이 다르고 상즉과 상입이 다르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상즉이 상입이고 상입이 상즉으로서 체와 용이 같다는 말입니다. 모든 연기법에 있어서 용과 체는 서로 융합되어 역용(力用)에 체가 따라가고 체에 역용이 따라가 체가 즉 용이고 용이 즉 체로서 비로소 연기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체와 용을 달리 말하고 상즉과 상입을 달리 설한다고 해서 상즉 다르고 상입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체와 용이 서로 통하고 상즉과 상입이 서로 통하여 원융무애하게 되는데 여기에도 또한 여섯 구가 있습니다.

첫째는 체가 모두 용 아님이 없음이니, 체는 완전히 잠겨버리고 용만 드러나서 전체가 용 뿐입니다. 곧 공() 이대로가 전부 색()이라는 말입니다. 용만 표현이 되므로 용면에서 논하는 상입만 있지 상즉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둘째는 첫째와 반대로 용이 모두 체 아님이 없습니다. 용 이대로가 전부 체이기 때문에 체만 드러나서 체의 면에서 설하는 상즉만 있지 상입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앞은 공즉시색이지만 지금은 색즉시공입니다. 첫째와 둘째에서는 그 중심 내용은 서로 통하지만 한 쪽으로만 관찰하여 상즉과 상입으로 나누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용이 체에 돌아간다고 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체 역시 용에 돌아간다고 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체가 전부 용이 된다고 해서 체가 없어지고 용만 있는 것이 아니며 용이 전부 체가 된다고 해서 체만 있고 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체가 용이 되고 용이 체가 되더라도 서로 걸림이 없어 체가 즉 용이고 용이 즉 체가 되는 동시에 체와 용이 분명히 쌍존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즉()도 있고 입()도 있어 자유자재로 구현되는 것이니 이것은 곧 쌍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전체지용(全體之用)일 때는 용을 완전히 잊고 반대로 전용지체(全用之體)일 때는 체를 완전히 없애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즉()도 아니고 입()도 아니며 체도 아니고 용도 아니면서 원융일미(圓融一味)입니다. 이것은 곧 쌍차를 말하는 것으로 체도 없고 용도 없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종합하여 논한 것입니다. 즉 첫째는 용으로, 둘째는 체로, 셋째는 체용이 쌍존하고, 넷째는 체용이 쌍민한 것을 종합한 것이니 말하자면 이것은 다 같은 연기로서 서로 걸림이 없어 무애자재하게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다섯째를 다시 뒤집어 표현한 것으로 앞의 다섯 가지를 모두 소멸해 없애버리므로 상대를 끊고 말이 떨어져서 자연히 자성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긍정을 하고 어떤 때는 부정을 하지만 긍정이 부정이고 부정이 긍정으로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언제든지 원융무애자재하여 참으로 대법계 연기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만약 다만 한 쪽에 조금이라도 집착하게 되면 근본연기를 모르는 것입니다.

처음의 용면에서 상입을 말하고 체면에서 상즉을 말할 때, 그리고 체와 용을 합하여 원융무애한 것을 말할 때에도 쌍차쌍조 이것이 근본원리가 된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전에도 언급했지만 화엄종취의 근본 뜻이 쌍차쌍조에 있다는 것이 여기에 근본적으로 분명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5. 차정(遮情)과 표덕(表德)

 

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화엄종의 초조인 두순(杜順)스님의 화엄오교지관(華嚴五敎止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두순스님은 화엄삼매(華嚴三昧)인 대연기법계(大緣起法界)에 들어가는 것이 난해하여 그 방편설로 여러 가지를 시설하였는데, 이 차정(遮情)과 표덕(表德)은 이론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차정이라는 것은 곧 쌍차면에서 말하는 것이고, 표덕은 쌍조면에서 말하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화엄법계에 인도하는 방편설인 차정과 표덕의 이론도 알고 보면 바로 쌍차와 쌍조를 논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차정(遮情)

 

법이 말을 떠나고 지해를 끊은 것임을 드러냄에, 이 문()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차정(遮情)이요, 둘은 표덕(表德)이라.

顯法離言絶解할새 就此門中하여 亦爲二遮情이요 表德이라. [華嚴五敎止觀;大正藏 45, p.512 ]

 

지금까지 모든 법에 대하여 말로 했지마는, 실제로는 말[言語]도 여의고 앎음알이[知解]도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과 지해[言解]가 분명히 서야 합니다. 말을 떠났다[離言]고 하여 말 못하고 벙어리모양 입을 꽉 다물고 있으면 이것도 죽은 송장이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하여 말로 표현될 줄 알면 그것은 외도(外道)입니다. 결국 말을 떠난 언설(言說)이고 언설이 말을 떠난 것임을 확실히 자각해야 됩니다. 차정이라는 것은 쌍차 편에서 말하는 것이요, 표덕은 쌍조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정을 막는다[遮情]고 하는 것은, 연기는 있는 것인가 물으면 아니라고 답한다. 곧 공하기 때문이니, 연기법은 자성이 없어서 곧 공이다. 이 연기는 없는 것인가 물으면 아니라고 답한다. 곧 있기 때문이니, 연기법은 곧 무시(無始)이래로 있기 때문이다. 묻기를,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한 것인가 물으면 아니라고 답한다. 공과 유가 서로 원융하여 하나로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니 연기법은 공과 유가 같은 경우라 두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금과 장신구와 같으니 생각해 보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하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한다. 양쪽이 존재함을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니, 연기법은 공과 유가 서로 빼앗으며 동시에 성립하느니라.

言遮情者問緣起是有耶答不也卽空故緣起之法無性卽空이라 問是無耶答不也卽有故以緣起之法卽由無始得有故也問亦有亦無耶答不也空有圓融하여 一無二故緣起之法空有一際하여 無二相故也如金與莊嚴具思之하라 問非有非無耶答不也不碍兩存故以緣起之法空有互奪하여 同時成也.

 

정을 막는다[遮情]고 하는 것은 부정을 한다는 말입니다. 즉 연기가 있는 것이냐고 물을 때, 아니라고 부정으로 답하는 것입니다. 연기법은 그 자성이 공()하기 때문에 연기가 있느냐고 물으면, 자성이 없어서 모든 것이 다 공하니 아무리 연기가 있다 해도 유()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없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랜 겁 이전부터 언제든지 연기법은 존재해 왔으므로 무()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위의 두 문답은 서로 부정을 하면서 서로 성립이 되어 없다는 것은 있다는 말이 되고, 있다는 것은 없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연기가 아무리 있다 해도 자성이 공하기 때문에 없는 것이고, 없다고 하지만 연기는 분명히 있으므로 또한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시 묻기를,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하느냐고 하는데, 이 말은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느냐라는 뜻으로 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과 유()가 서로 원융해서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에 있다 없다라는 말은 거기에 붙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연기법은 공과 유가 한 가지로 동등해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기 때문에 어찌 있다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역유역무(亦有亦無)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역유역무가 아니라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묻기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非有非無] 묻자, 그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서 색공(色空)이 분명히 있어 양쪽이 모두 존재함을 장애하지 않아 서로 쌍조(雙照)가 되어 양편이 다 존재하기 때문에 비유비무도 아닌 것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색즉시공이라 할 때는 색이 없어 공만 있는 것 같고, 공즉시색이라 할 때는 공이 없이 색만 있는 것 같지만, 공과 유를 서로 빼앗아서 공과 색이 둘이 아니면서 또한 동시에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정만 하는 것을 차정(遮情)이라 하는데, 얼핏 보면 부정만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용 전체가 긍정에 통하고 있습니다.

 

2)표덕(表德)

 

덕을 드러낸다[表德]고 하는 것은, 연기는 있는 것인가 물으면 그렇다고 답한다. 환화의 유[幻有]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연기)는 없는 것인가 물으면 그렇다고 답한다. 연기는 자성이 없어 곧 공하기 때문이다.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한 것인가 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한다. 양쪽이 존재함을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한다. 서로 빼앗아 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二表德者問緣起是有耶答是也幻有不無故問是無耶答是也無性卽空故也問亦有亦無耶答是也不碍兩存故問非有非無耶答是也互奪雙泯故.

 

덕을 드러낸다[表德]고 하는 것, 연기법을 앞에서는 전부 부정으로 해명한 것에 반하여 여기서는 전부 긍정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연기가 있느냐고 물으니, 앞에서는 없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 까닭은 환화(幻化)의 유가 언제든지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또 묻기를 연기가 없느냐고 하니, 그렇다고 긍정합니다. 연기는 무성(無性)으로 자성이 공하기 때문에 없다고 대답을 하여 앞의 말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리고 연기라는 것은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하는 것이냐고 다시 물으니, 그렇다고 긍정을 합니다. 색즉시공공즉시색으로서 서로 걸림이 없이 양편이 다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묻기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냐고 하니, 또 그렇다고 대답을 합니다. 색즉시공공즉시색으로 서로 빼앗아버리기 때문에 색공(色空)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유역무도 맞고, 비유비무도 맞고, 유라 해도 맞고 무라 해도 맞고 모두 다 들어맞는다는 말이 됩니다. 앞에서는 다 아니라고 부정을 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긍정이 되므로 여기에서 모두 그렇다고 긍정한 것과 그 내용의 본질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3)차표원융(遮表圓融)

 

또한 연기하기 때문에 유(), 연기하기 때문에 무(), 연기하기 때문에 유이기도 하고 또한 무이기도 하며, 연기하기 때문에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 이와같이 가림과 드러냄이 원융무애하니 모든 것이 연기가 자재한 까닭이다.

又以緣起故是有以緣起故是無以緣起故是亦有亦無以緣起故是非有非無. 如是遮表圓融無碍하니 皆由緣起自在故也니라.

 

이것은 지금까지 해설한 차정과 표덕의 내용을 총괄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본래 연기가 원융자재하고, 이를 논의하는 차()와 표()가 또한 원융무애한 것입니다. 이것은 말의 표현이 다를 뿐이지 사실은 쌍차쌍조를 가지고 논의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망정을 반함에 이치가 저절로 드러나고, 이치가 드러남에 망정이 저절로 없어지느니라.

反情理自顯이요 顯理情自亡이라. [華嚴一乘敎義分齊章 卷四;大正藏 45, p.502 ]

 

망상을 반함은 부정을 가리키고 이치가 나타남은 긍정을 말합니다. 즉 여기서는 부정을 하니 긍정이 되고, 긍정을 하니 부정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비유하자면 구름이 다 걷히면 해가 드러나고 해가 드러나면 구름이 다 걷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시 말하면 차가 즉 표이고, 표가 즉 차로서 차정 이대로가 표덕이고 표덕 이대로가 차정인 것입니다.

 

6. 화엄십종판(華嚴十宗判)

 

화엄원교(華嚴圓敎), 즉 화엄일승(華嚴一乘)은 그 교리 내용이 현수스님이나 청량스님의 설을 보더라도 쌍차쌍조라는 중도(中道)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화엄종에서는 다른 종()의 교리를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화엄종에서 다른 종의 교리를 비판하는 데 있어 그 비판의 근본기준을 어디에 두었느냐 하면 바로 중도입니다. 말하자면 중도에 가깝고 멀고에 근거하여 다른 종의 교리의 심천(深淺)을 비판했습니다. 그리하여 현수스님은 이것을 열 가지로 나누어 십종판(十宗判)을 수립하였습니다. 이 십종판은 그 뒤로도 계승되었는데, 청량스님의 설은 현수스님의 설과 일부 명칭 등이 다소 상이하지만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그리고 화엄종이 이제(二諦) 등을 근거로 한 원융중도종임을 해명하는데 청량스님의 설이 더 적합하므로 여기서는 청량스님의 십종판을 채용하였습니다.

 

1)십종교판(十宗敎判)

 

이제 일대시교를 모두 거두어 열 가지 종으로 한다.

今總收一代時敎하여 以爲十宗하노라. [經疏;大正藏 35, p.521 ]

 

부처님이 49년간 설법한 팔만대장경의 설법을 다 모아서 그 내용을 열 가지 종으로 나눈다는 말입니다.

 

첫째는 자아[]와 법()이 다 있다는 종이요.

第一我法俱有宗이요.

 

첫째는 자아[]와 법()이 다 있다는 것으로 이것은 순수한 유견(有見)입니다. 이런 종취를 주장한 사람은 소승의 독자부(讀子部)입니다.

 

둘째는 법은 있고 자아는 없다는 종이요.

法有我無宗이요.

 

앞에서는 자아와 법이 전부 있다는 유론(有論)인데, 여기에 와서는 그와는 조금 달리 자아는 실재하지 않으나 법은 실재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살바다부(薩婆多部)에서 주장하는 견해입니다.

 

셋째는 법은 과거와 미래에는 없다는 종이요.

法無去來宗이요.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 제법은 실유하지만 과거와 미래의 법은 실체가 없다는 것으로, 아법구유종(我法俱有宗)과는 얼마간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의 견해입니다. 이 주장은 대중부(大衆部)에 속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모든 법은)현재에만 존재하고, (현재에서도)실유와 가유가 있다는 종이다.

現通假實宗이요.

 

모든 법은 현재에만 존재한다고 보는데, 그 중에서도 5(五蘊)에 소속되는 법은 실()로 삼고 12(十二處)18(十八界)에 소속되는 법은 가()로 삼아, 한 쪽은 실이지만 한 쪽은 가()라는 주장입니다. 앞의 아법구유종과 비슷한 견해로, 과거와 미래의 법은 실유하지 않지만 현재의 제법은 가실의 구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가부(說假部)의 주장이라고 합니다.

 

다섯째는 세속법은 허망한 것이고, 출세간법은 진실하다는 종이다.

俗妄眞實宗이요.

 

세속은 전부 다 허망한 것이며 출세간(出世間)만이 참으로 진실하다는 견해이니, 이것은 설출세부(說出世部)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모든 법은 단지 이름뿐이라는 종이다.

諸法但名宗이니라.

 

일체만법을 볼 때, 실체가 없고 다만 이름뿐이라고 주장하는 종이니, 일설부(一說部)의 주장입니다.

지금까지의 주장에서 넷째까지는 순수한 소승이고, 다섯째여섯째는 대승과 조금 통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아직 변견(遍見)으로서 대승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곱째는 삼성이 공하거나 유()라는 종이니, 말하자면 변계소집성은 공하고,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유이기 때문이다.

三性空有宗이니 謂遍計是空이요 依圓有故.

 

삼성(三性)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타기성(依他起性)원성실성(圓成實性)인데, 이 종에서는 변계소집성은 공이고,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유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호법(護法)논사의 사상을 계승하는 중국 법상종(法相宗)의 주장에 따르면, 변계소집성은 제67식에 의한 허망한 분별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것은 다만 공한 것이지만, 의타기성은 여환가(如幻假)로서 환()이면서 아주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 현상 모든 것이 인연으로 일어나지만 환() 그것은 그대로 있으므로 아주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라 합니다. 원성실성은 이공(二空), 즉 아()와 법()이 완전히 공한 데서 현현하는 진여실성(眞如實性)을 말하는 것이므로 원성실성이라는 것을 진여와 같이 취급합니다.

이와같이 변계소집성은 망계로서 실성(實性)이 없으므로 공()하며, 의타기성은 여환이지만, 실제로 아주 없는 것이 아니므로 가유(假有)이고 원성실성은 아와 법이 완전히 공하여 진여실성이 현현한 순전한 진여로서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의타기성과 원성실성 두 가지는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중도라고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원융무애한 중도가 못되어 화엄종의 현수스님 같은 이가 대단히 비판했습니다. 유식종은 그 후, 현수스님의 비판을 받아 그 이론이 조금 위축되고 조절되기는 했지만, 완전한 중도 즉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전하는 종파로는 취급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덟째는 참으로 공하여 모습을 끊었다는 종이니, 말하자면 마음과 경계의 양쪽이 사라짐에 바로 실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眞空絶相宗이니 謂心境兩亡直顯體故.

 

아와 법이 전부 공하면 곧 진여가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돈교(頓敎)로 취급받습니다. ‘마음과 경계 양쪽이 사라졌다함은 넓게 보면 쌍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홉째는 공과 유가 장애가 없다는 종이니, 말하자면 서로 원융하여 쌍으로 단절되었으면서 양쪽이 존재함을 장애하지 않아 진여가 인연을 따라서 항하의 모래같은 덕을 구비하기 때문이다.

空有無碍宗이니 謂互融雙絶而不碍兩存하여 眞如隨緣하여 具恒沙德故.

 

공과 유가 서로 무애하여 공이라 할 수도 없고 유라 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공과 유가 분명히 융통한 것을 말합니다. 앞의 진공절상종(眞空絶相宗)에서는 쌍차만 주장하여 일체가 모두 공인데, 여기서는 공과 유가 함께 끊어졌으면서 양쪽이 존재함을 장애하지 않으니 그것이 쌍조가 됩니다. 그리하여 진여가 인연을 따르면서도 항하, 즉 간지스 강의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덕을 다 구비하는 것입니다. 화엄종에서는 이것을 종교(終敎)라고 취급합니다.

 

열번째는 원융하여 덕을 구비한 종이니, 말하자면 사사무애하고 주체와 객체를 구족하여 한없이 자재하기 때문이다.

圓融俱德宗이니 謂事事無碍하고 主伴具足하여 無盡自在故.

 

원융이라는 것은 쌍차쌍조하여 원융무애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쌍차하고 쌍조해서 원융무애하여 상즉상입(相卽相入)하면 모든 것이 다 원만히 구비되는데, 이것을 원융하여 덕을 구비하였다라고 합니다. 또 이것을 사사무애라 하는데, 여기에는 주체[]와 객체[]가 구족되어 무진연기(無盡緣起)가 참으로 자재무애하게 되는데 이것을 화엄원교(華嚴圓敎)라 합니다. 지금까지 해설한 바에 따르면 화엄종에서 다른 종파를 비판할 때에는 쌍차쌍조인 중도에 입각하여 이 종은 어떻고 저 종은 어떻다고 비판하여 분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쌍차가 즉 쌍조이고 쌍조가 즉 쌍차로 결국 진공절상 이외에 이사무애 없고 이사무애 이외에 진공절상이 없으며, 진공이 무애이고 무애가 진공이라 하면서 여기에 와서는 어째서 진공절상종[雙遮]을 돈교(頓敎)라 하고, 이사무애[雙照]는 종교(終敎)라 했는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상 쌍차쌍조하고 원융무애한 중도를 표현하는데 있어 편의상 분류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진공절상종에서는 쌍차를 많이 주장했지만, 현수청량도 진공절상 이대로가 중도라 한 만큼 그 내용에서는 별 차이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쌍차와는 달리 쌍조를 많이 주장한 것을 공유무애종(空有無碍宗)이라 하는데, 이것은 화엄의 쌍차쌍조하고 원융일관하여 사사무애한 도리를 더 높이 평가하기 위한 방편으로 설한 것입니다.

화엄종이라 하는 것은 진공절상의 돈교와 공유무애의 종교를 완전히 융합하여 이 바탕 위에서 원융구덕이 성립된 것이므로 쌍차나 쌍조를 제외하고는 화엄종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분류해 놓은 것은 화엄종에서의 사사무애를 독특하게 표현하기 위한 방편일 뿐으로 진공절상 밖에 공유무애 없고, 공유무애 밖에 원융구덕이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진공절상종에서 자꾸 쌍차를 주장하는 것은, 변견(邊見)으로서 완전한 것이 못되고, 쌍차쌍조하고 쌍조쌍차하여 원융무진한 이것이 참다운 중도라는 주장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교판(敎判)을 세운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불교에서는 어떠한 교판을 하든지간에 중도라는 것을 근본 전제조건으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지 중도를 떠나서는 교판을 할 수 없고 교리 조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열 가지 종은 뒤의 것이 앞의 것보다 깊으니, 앞의 네 가지는 소승이요, 다섯째와 여섯째는 소승과 대승에 통하고, 뒤의 네 가지는 오로지 대승이다. 일곱째는 법상종이고, 여덟째는 무상종이며, 뒤의 둘은 법성종이다. 또 일곱째는 시교이고, 여덟째는 돈교이며, 아홉째는 종교이고, 열째는 원교니라.

이나 此十宗後後深於前前하니 前四有小五六通小大後四唯大乘이라 七卽法相宗이요 八卽無相宗이요 後二卽法性宗이라. 又七卽始敎八卽頓敎九卽終敎十卽圓敎니라.

 

앞에서 설명한 열 가지의 각각은 대승과 소승의 어디에 해당하며, 또 여러 대승종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를 구별한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말하면 현수스님이 일체교를 총판(總判)할 때에는 소승교대승시교돈교종교원교의 오교(五敎)로서 교판했는데, 현수스님의 오교 교판은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십종을 내용으로 한 것입니다.

 

또 일곱째는 또한 이제를 갖춘 종이라 이름하니, 말하자면 승의(勝義)가 진실하기 때문에 무()가 아니요, 세속의 인과를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유()이다.

又第七亦名二諦俱有宗이니 謂勝義眞實故不無世俗因果不失故是有.

 

일곱째의 법상종은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를 다 갖추고 있어 이제구유종(二諦俱有宗)이라고도 합니다. 또 법상종은 진속(眞俗) 이제에서 법상(法相)을 많아 강조하므로 상종(相宗)이라고도 합니다.

 

여덟째는 또한 이제가 쌍으로 끊어진 종이라 이름하니, 말하자면 승의는 모습을 여의기 때문에 유()가 아니요, 세속은 연기에 의해 생하여 환()과 같기 때문에 무()이다.

第八亦名二諦雙絶宗이니 謂勝義離相故非有世俗緣生如幻故是無.

 

앞의 법상종에서 진제(眞諦)는 진실해서 없지 않은 것이고, 속제(俗諦)는 인과가 그대로 있기 때문에 있다고 하여 진속 이제가 다 있다고 했으나, 여기에서는 그 반대로 승의제인 진제는 모든 상을 여의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속제는 연기에 의하여 생기는데 환()과 같기 때문에 없다고 하여 이제가 다 떨어져 진공절상(眞空絶相)으로서 법상종과 반대의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아홉째는 이제가 장애가 없는 종이니, 유마경과 법화경 등과 같다.

二諦無碍宗이니 如維摩法華等이라.

 

법상종(法相宗)이든지 무상종(無相宗)이든지 결국 이들의 주장은 편견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이제의 무애는, 유상(有相)과 무상(無相)이 서로 무애하여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로 유마경과 법화경에서 주장하는 종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열번 째인 원교의 화엄종은, 위의 화엄경소(華嚴經疏)에서 더 이상 따로 설명하지 않았으나, 법상종이나 무상종, 이제무애종 등 여러 대승종의 최후에 성립된 것이므로 가장 수승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의 무애 등을 바탕으로 하였으므로 유()나 무() 등 어느 한 면에 편중되지 않은 중도적인 종이라는 것은 확실히 드러납니다.

 

2)대승사구(大乘四句)

 

화엄종의 교판인 십종판에서는 대승과 소승을 합하여 모두 열 가지로 나누어서 그 상이함과 심천을 밝혔습니다. 십종판 외에도 현수스님은 그의 저서인 탐현기(探玄記)에서 소승교와 대승교를 각각 따로 판별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발췌하여 해설하는 것은 그 중에서 대승교에 대한 것으로, 그는 모든 대승교를 네 가지로 나누어 교판한 것입니다. 그 명칭은 오늘날 자주 사용하는 대승시교(大乘始敎)종교(終敎)돈교(頓敎)원교(圓敎)와는 다르지만, 그 기본내용은 모두가 다 대승종으로서 이 대승종의 사상이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대승종에 네 구가 있다. 처음은 가()를 포섭해서 실()을 따르는 것이요, 둘째는 가를 분별하여 실과 다르게 하는 것이요, 셋째는 가와 실을 합하여 변론하는 것이요, 넷째는 가와 실을 쌍으로 없애는 것이다.

就大乘宗하여 有四句하니 攝假從實이요 分假異實이요 假實合辯이요 假實雙泯이니라. [華嚴經探玄記;大正藏 35, p.117 p.118 ]

 

대승종에서 대승교를 분류하여 보면 네 구가 성립합니다. 처음의 ()를 포섭해서 실()을 따르는 것[攝假從實]’은 가()는 즉 색()이고 실()은 공()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색은 공을 따라가므로 일체의 색 이대로가 공이라는 말입니다. 곧 색즉시공을 말합니다. 두번째의 가를 분별하여 실과 다르게 하는 것[分假異實]’은 이와 반대로 가는 전부 다 떼어버리는 것으로 표현방법이 다소 어색하지만 색불시공(色不是空)이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의 가와 실을 합하여 변론하는 것[假實合辯]’은 가와 실을 합해서 분별하므로 쌍조를 말하는 것이고, 네번째의 가와 실을 쌍으로 없애는 것[假實雙泯]’은 가와 실이 모두 없어져 사라지는 것이므로 쌍차를 말합니다. 이 네 구가 모두 합하여 가르침의 바탕이 되어 대승교가 성립되는 것이지 이 네 구를 떠나서는 대승교가 결코 원만하게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네 구는 결국 쌍차쌍조를 말하는 것이므로 쌍차쌍조를 제외하고는 결코 대승교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위의 네 구가 (합하여) 하나의 가르침의 바탕이 된다. 그러므로 공과 유가 무애한 것을 대승법이라 이름한다. 말하자면 공이 유와 다르지 않아 유는 환유(幻有), 환유는 완연하여 환유 전체가 공이다. 유는 공과 다르지 않아 공은 진공(眞空)이요, 진공은 담연하여 진공 전체가 유이다. 그러므로 공과 유는 터럭만큼의 분별도 없다.

此上四句爲一敎体是故空有無碍名大乘法이니라 謂空不異有하여 有是幻有幻有宛然하여 擧體是空이며 有不異空하여 空是眞空이요 眞空湛然하여 擧體是有니라 是故空有無毫分別이니라.

 

쌍차쌍조인 중도에서 공과 유가 서로 원융무애하게 이루어진 것을 대승교라 하며, 이것을 떠나서는 대승이라 할 수 없습니다. ()과 유()가 다르지 않다는 말은, 즉 유는 환유(幻有)로서 완연하여 환유 이대로가 공이므로 공즉시색이라는 말과 같은 내용입니다. 또한 유와 공이 다르지 않다는 말은, 즉 공은 진공(眞空)으로서 가공(假空)단공(斷空)이 아니므로 진공이 담연하여 진공 이대로가 그대로 유이므로 색즉시공이라는 말과 같은 내용입니다. 즉 원융무애한 중도는 항상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색과 공이 쌍조하고 색공이 쌍차하는 이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이론 전개를 하든지간에 불교의 근본 입장은 이러한 이치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매번 늘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지마는 이 이치를 떠나서는 불교학이 존재할 수 없으니만큼 이것이 반드시 대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이치에 입각하여 공과 유가 삼팔선을 가르듯이 경계선을 긋지 못하고 색과 공이 무애자재하여 여기에서 대승불교의 기본교리 전체가 성립하게 됩니다.

 

7. 설청전수(說聽全收)

 

현수스님은 대소승의 모든 교법(敎法)의 차별이 모두 유심소현(唯心所現)이라 하여 심식(心識)에서 비롯하여 나타난 것이라 하면서 본영상대(本影相對)와 함께 설청전수(說聽全收)를 설한 것입니다. 본영상대는 대승교와 소승교의 도리를 본질[]과 그림자[]의 관계에서 논의한 것이고, 설청전수는 부처와 중생의 관계에서 논의한 것입니다. 현수스님은 설청전수를 네 가지로 구별해서 해설하였는데, 나중에 징관스님은 이것을 동교(同敎)와 별교(別敎)에 따라서 각각 네 가지로 분류하여 보다 상세하게 해설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현수스님의 학설을 해설한 다음에 징관스님의 학설을 계속 인용하였습니다. 이와같이 모든 법의 근원을 심식(心識)에 두고, 그 도리를 부처와 중생의 관계에서 논의하였지만 그 근본사상도 또한 중도의 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설함과 들음이 전부 거두는 것에도 또한 네 구가 있다.

說聽全收者亦有四句니라. [探玄記, 大正藏 35, p.118 ]

 

()’이라 하는 것은 설법을 한다는 말이고, ‘()’이라 하는 것은 설법을 듣는다는 말이므로 이것은 바로 설법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설은 능()이고 청은 소()이며, 능은 체()이고 소는 용()이므로 설은 바로 체이고, 청은 용입니다. 설과 청이 전체를 거둔다[說聽全收]’ 함은 설과 청, 능과 소, 체와 용이 상즉상입하여 원융무애한 것을 의미합니다.

 

첫째는 부처님의 마음을 떠난 밖에 교화할 중생이 없거니와 하물며 설하는 가르침에서리오. 그러므로 오로지 부처님 마음이 나타난 바이다.

離佛心外無所化衆生이어니와 况所說敎리요 是故唯是佛心所現이라.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서 설법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설법하는 부처님 따로 있고 교화받는 중생이 따로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님 마음 그대로이지, 부처님의 마음을 떠나서 중생이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체즉용(體卽用)으로서 체() 가운데 용()이 전부 구비돼 있다는 말입니다. 불심을 체로 잡고, 교화할 중생을 용으로 삼으면 체즉용으로서 중생 다르고 부처님 마음 다르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생 이대로가 부처님 마음이고 부처님 마음 이대로가 중생인데, 하물며 설하신 가르침은 그것을 능과 소로 나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든 것이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으니, 중생의 마음을 여의고 따로 부처님의 덕()이 없기 때문이다.

總在衆生心中하니 以離衆生心하고 無別佛德故니라.

 

앞에서는 부처님 마음 가운데 모든 것이 다 구비되어 있다는 뜻이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모든 것이 다 중생심 가운데 내재되어 있어 이 중생심을 여의고 부처님 마음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용즉체(用卽體)를 표현한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의 거룩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모두가 오로지 두 마음이니, 앞의 두 가지 설이 서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중생의 마음 안에 있는 부처님이 부처님 마음 중에 있는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니, 부처님의 마음 중에 있는 중생이 중생 마음 안에 있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이와같이 전부 거두어서 설법하는 것과 듣는 것이 걸림이 없느니라.

隨一聖敎全唯二心이니 以前二說不相離故니라 謂衆生心內佛爲佛心中衆生說法하니 佛心中衆生聽衆生心佛說法하여 如是全收하여 說聽無碍니라.

 

중생이 즉 부처이고 부처가 즉 중생으로서 부처를 떠나서 중생이 없고 중생을 떠나서 부처가 없습니다.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는 부처님이 부처님 마음 가운데 있는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하니, 부처님 마음 가운데의 중생이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는 것, ()와 용()이 쌍존(雙存)으로서 중생이 부처고 부처가 중생으로서 전체가 원융무애하게 됩니다. 즉 부처와 중생이 서로 듣고 설법을 하지마는 둘이 아닌 것입니다. 중생이 설하고 부처가 듣는다든지, 부처가 설하고 중생이 듣는다고 하든지 간에 함께 존재하는 것에 장애가 없어 쌍존(雙存)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혹은 저 거룩한 가르침이 모두 두 마음이 아니니, 양쪽이 모두 형상을 빼앗아 같이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이며 쌍으로(중생과 부처라는) 두 지위를 융화하여 없어지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처님 마음중에 있는 중생이 설법을 듣는 것이 없기 때문이며, 중생 마음안에 있는 부처님이 설법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니, 양쪽이 모두 쌍으로 없어져서 두 모습이 다하기 때문이니라.

或彼聖敎俱非二心이니 以兩俱形奪하여 不並現故雙融二位하여 無不泯故謂佛心衆生無聽者故衆生心佛無說者故兩俱雙泯하여 二相盡故니라.

 

앞에서는 부처와 중생을 모두 긍정하여 쌍존을 말했지만, 이번에는 양쪽을 다 부정하여 쌍차를 말하는 것입니다. ‘양쪽이 모두 형상을 빼앗는다는 것은 중생이 즉 부처이고 부처가 중생이므로, 중생이 부처라고 할 때는 부처가 아니고, 부처가 중생이라 할 때는 또 중생이 아니므로 서로 부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성립하지 못하여 부처도 찾아올 수 없고 중생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처님 마음 가운데의 중생이 부처님이 설하는 것을 들을 수 없고, 중생의 마음 가운데의 부처님이 설할 수 없어 체()와 용() 양쪽이 다 쌍민해버려 두 모습이 모두 끊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긍정면에서 볼 때는 완전히 쌍존이 되고 부정면에서 볼 때는 쌍탈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앞에서 중생 즉 부처이고 부처 즉 중생으로 부처와 중생을 엄연히 볼 수 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쌍조의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고, 여기에서 중생이 즉 부처이고 부처가 즉 중생이기 때문에 중생도 볼 수 없고 부처도 볼 수 없다는 것은 부정적으로 쌍차의 측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가 하나의 거룩한 가르침에서 원융무애하여 바야흐로 구경이 되느니라.

是故此四於一聖敎圓融無碍하여 方爲究竟이니라.

 

전체가 쌍차쌍조하고 쌍조쌍차해서 차조(遮照)가 동시에 되어 원융무애하여야 실제로 일승원교(一乘圓敎)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승사구(大乘四句)나 지금 설명한 설청사구(說聽四句)는 그 표현방법은 달라도 내용은 모두 같습니다. 그리고 이와같이 4구가 원융무애하여야 구경(究竟)이 되어 참다운 중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인용하는 것은 징관스님의 화엄경소(華嚴經疏)’에 있는 해석으로 여기서는 앞에서 해설한 설청 사구를 더 세밀하게 분석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엄종의 종취를 특별히 더 우대하여 일승교(一乘敎)를 일승동교(一乘同敎)와 일승별교(一乘別敎)로 나누고 화엄종의 종취인 중중무진연기는 일승별교로 취급합니다.

 

설청전수 가운데 두 가지의 4구가 성립하니 하나는 동교에 의하고 또 하나는 별교에 의하느니라.

說聽全收中成二四句하니 一約同敎……二約別敎니라. [經疏;大正藏 35, p.519 ]

 

동교와 별교를 달리 말하는 것은 상즉과 상입의 분리에 입각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상즉이 즉 상입이고 상입이 즉 상즉인데, 은밀히 보면 상즉보다도 상입 이것이 더 묘하다고 화엄종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분석을 엄격하고 미세하게 하여 그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동교에 대하여 네 구를 이루니, 첫째는 부처님의 진심 밖에 달리 중생이 없는 것이요, 둘째는 중생의 마음 밖에 다시 다른 부처님이 없는 것이요, 셋째는 부처님의 진심이 나타날 때에 중생의 진심이 나타나는 것을 장애하지 않으므로 설하는 자와 듣는 자가 쌍으로 존재하여 두 가르침이 가지런히 서는 것이요, 넷째는 부처님이 곧 중생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아니요, 중생이 곧 부처님이기 때문에 중생이 아니니 서로 빼앗아 쌍으로 없어져서 곧 설함과 듣는 것이 적적하니라.

約同敎하여 以成四句하니 謂一佛眞心外無別衆生이요 衆生心外更無別佛이요 佛眞心現時不碍衆生眞心現故說聽雙存하여 二敎齊立이요 佛卽衆生故非佛이요 衆生卽佛故非衆生이니 互奪雙亡하여 則說聽斯寂하니라.

 

동교(同敎)에 대하여 네 구를 이루는데, 첫째는 부처님의 마음 밖에 달리 중생이 없어 부처 이대로가 중생이 되고, 둘째는 중생의 마음 밖에 달리 부처가 없어 중생이 곧 부처이고, 셋째는 부처의 진심이 나타날 때 중생의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 설함과 들음이 서로 쌍존해서 두 가르침이 같이 성립함으로써 중생이 즉 부처이고 부처가 즉 중생으로서 부처와 중생이 완전히 쌍존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므로 서로 빼앗아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어 설함과 들음을 찾아볼 수 없으니 이것은 쌍차를 말합니다. 위의 동교 네 구는 이사무애한 상즉면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별교에 대하여 네 구를 밝히니 말하자면 모습을 허물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중생과 부처님이 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중생이 전부 부처님 가운데 있음이요, 둘째는 부처님이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음이요, 셋째는 앞의 중생과 부처님이 서로 존재할 때에 각각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하여 즉 인과 과가 서로 통하여 하나의 거룩한 가르침을 좇아 전부 두 마음 가운데 있음이요, 넷째는 중생이 전부 부처님 가운데 있은즉 부처님과 같아 중생이 아니요, 부처님이 전부 중생 가운데 있은즉 중생과 같아 부처님이 아니므로 두 형상이 서로 빼앗고 두 지위가 가지런히 융통해서 하나의 거룩한 가르침을 따르니 모두 두 마음이 아니다.

約別敎하여 以明四句하니 謂由不壞相하여 生佛互在故니라.

衆生全在佛中이요…… 佛在衆生心中이요…… 由前生佛互相在時各實非虛則因果交徹하여 隨一聖敎全在二心이요…… 由生全在佛則同佛非生이요 全在生則同生非佛이니 兩形相奪하고 二位齊融하여 卽隨一聖敎하여 俱非二心이니라.

 

별교(別敎)에 대하여 네 구를 이루는데, 첫째는 중생이 전부 부처 가운데 있어 중생이 사라지고, 둘째는 부처가 중생 가운데 있어 부처가 사라지며, 셋째는 중생과 부처가 모두 진실해서 각각 완연히 존재함을 장애하지 않으니 이것은 쌍존을 말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부처 가운데 중생이 있어 중생이 부처와 같아 중생을 찾아볼 수 없고, 중생 가운데 부처가 있어 부처가 중생과 같아 부처를 찾을 수 없으니 이것은 곧 부처와 중생을 모두 가리는 쌍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별교 네 구는 사사무애한 상입면에서 논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가 하나의 거룩한 가르침에서 원융무애하여 바야흐로 구경이 된다.

是故此四於一聖敎圓融無碍하여 方爲究竟이니라.

 

한마디로 말하자면 위의 네 가지 가운데 어느 한 가지에라도 집착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쌍조이든 쌍차이든 서로 동시가 되어 쌍조가 즉 쌍차이고 쌍차가 즉 쌍조가 되어 서로 원융무애하여야 구경법(究竟法)이지, 만약 쌍조를 주장하고 쌍차를 버리든가, 쌍차를 주장하고 쌍조를 버리면 이는 곧 편견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도 사실은 원융무애한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이지 실제로 알고 보면 쌍차 속에 쌍조가 들어 있고, 쌍조 속에 쌍차가 들어 있어 원융무애한 도리에는 티끌만큼의 손색도 없습니다.

 

8. 심요법문(心要法門)

 

오대산 진국대사 징관 답황태자문심요(五臺山鎭國大師澄觀答皇太子問心要)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 오대산에 머물던 화엄종 제4조인 청량 징관스님에게 당시 황태자가 마음의 요결에 대하여 질문한 것에 대답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마음의 요결에 대하여 화엄 사상을 피력한 것이지만 그 기본 내용은 중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서두를 생략하고 중간 부분부터 끝까지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글이 선어록(禪語錄)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비록 마음의 요결에 대한 화엄사상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 취지가 또한 선지(禪旨)와도 부합됨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를 말하자면 곧 지해[]와 적적함[]을 함께 잊는 것이요, ()을 논하자면 곧 적적함과 지해를 함께 비추는 것이며, 증득[]을 말하자면 곧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없는 것이요, 이치[]를 설하자면 곧 증득이 아니면 요달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은 적적함[]을 깨달으면 적적함이 없으며, 참다운 지해는 지해가 없음이다. 지해와 적적함이 둘이 아닌 한 마음으로 공()과 유()가 함께 원융한 중도에 계합하여,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포섭하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아 시비의 둘이 없고 능소가 함께 끊어져 이 끊어졌다는 것도 고요하면 곧 반야가 현전하느니라.

言止則雙亡知寂이요 論觀則雙照寂知語證則不可示人이요 說理則非證不了是悟寂無寂이요 眞知無知以知寂不二之一心으로 契空有雙融之中道하여 無住無著하며 莫攝莫收하여 是非兩亡하고 能所雙絶하여 斯絶若寂 則般若現前하느니라. [景德傳燈錄;大正藏 51, p.459 ]

 

적적함[]은 쌍차이고 지해[]는 쌍조를 의미하는데, 쌍차도 잊고 쌍조도 잊는 것을 지()라 하고, 적적함과 지해를 쌍조하는 것을 관()이라 합니다. 또한 법화경에도 나와 있듯이 제법의 적멸한 모습은 말과 소리로 표현할 수 없다하였듯이 쌍차쌍조인 중도를 실증한 것은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시경전에서 다섯 비구를 위해 설했다든지 누구를 위해 설했다는 것은 순전히 방편일 따름이지 실법(實法) 그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실법인 쌍차쌍조의 중도는 또한 실제로 실증을 하여야 그 이치를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실증을 하기 전에는 그 이치를 설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적적함[]을 깨치면 적적함을 볼 수 없고, 참다운 지해[]는 지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자리에 와서야 비로소 오()라 하든지 견()이라 하든지 적()이나 또는 지()라 할 수 있는 것이지, 지견이나 지혜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이것은 생멸의 변견(邊見)으로 참된 지()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관(止觀)이란 적()과 지()를 말하는데, 이 적과 지는 적지를 떠난 데서 하는 소리입니다. 적도 찾아볼 수 없는 적, 지도 찾아볼 수 없는 지, 이것이 참된 적이고 참된 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진적(眞寂)과 진지(眞知)에 있어서는 진적이 진지가 되고 진지가 진적이 되어 원융무애하여 둘이 아닌 하나의 마음으로서 공과 유가 서로 무애한 중도에 계합되어 여기에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포섭하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면서 옳음[]과 그름[]이 끊어지고, 주체[]와 객체[]가 끊어져 버리며 끊어졌다는 이것마저도 다 끊어져버리고 완전한 무주무착(無住無着)이 되어 참으로 중도반야가 현전한다는 말입니다. 즉 객진번뇌의 구름이 걷혀버리고 제8아뢰야(阿賴耶)의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떨쳐버리면 진여자성(眞如自性)의 반야가 저절로 현전하는 것입니다.

 

반야(般若)는 마음 밖에서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요, 지혜 성품은 본래 구족한 것이다. 그러나 본래 적적한 것은 능히 스스로 나타나지 못하며 실로 반야의 공력에 말미암는다. 반야와 지혜 성품은 번복하여 서로 이루며 본래 지혜 [本智]와 비로소 닦음 [始修]은 실로 두 가지 체가 아니다. 함께 없애서 바르게 들어간즉 묘각이 원명하고 처음과 끝이 원융한즉 인과 과가 서로 통하여 마음 마음이 부처를 이룸에 한 마음이라도 부처 마음 아님이 없으며, 곳곳에서 도를 이룸에 한 티끌도 불국토(佛國土) 아닌 곳이 없다. 그러므로 참됨과 허망, 사물과 자아는 하나를 들면 전부 거두고, 마음과 중생과 부처는 혼연히 일치한다. 미혹한 즉 사람이 법을 따르니 법법(法法)이 만 가지로 차별되어 사람이 같지 않고, 깨달은 즉 법이 사람을 따르니 사람사람(人人)이 한 지혜로서 만 가지 경계를 융화함을 알 것이다.

말이 다하고 생각이 끊어지니 무엇이 인()이고 무엇이 과()이며, 바탕이 본래 적료하니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르리오. 오직 정감을 잊으면 공허한 가운데 밝아서 소식이 온화하리라. 그것은 마치 저 물을 투과하는 달빛이 공허하면서도 가히 볼 수 있음이요, 무심한 거울의 모습이 비치면서 항상 적적함이다.

般若非心外新生이요 智性乃本來具足이라 이나 本寂不能自顯하며 實由般若之功이니 般若之與智性翻覆相成하며 本智與始修實無兩体니라 雙亡正入則妙覺圓明하고 始末該融則因果交徹하여 心心作佛無一心而非佛心이요 處處成道無一塵而非佛國이라 眞妄物我擧一全收하고 心佛衆生渾然齊致是知迷則人隨於法하여 法法萬差而人不同이요 悟則法隨於人하여 人人一智而融萬境이라 言窮慮絶하니 何因何果體本寂寥하니 孰同孰異리요 唯忘懷虛朗하여 消息冲融하리 其猶透水月華虛而可見이요 無心鑑象照而常寂矣.

 

반야가 지혜 성품이고 지혜 성품이 반야로서 본래 부처나 중생할 것 없이 누구나 똑같이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습니다. 반야의 지혜가 본래 구족해 있지만, 이것은 스스로 나타나지 못하고 반야의 공력에 의지해야 나타나는 것입니다. 반야와 지혜성품은 번복하여 서로 이루며 본래의 지혜[本智]와 비로소 닦는 것[始修]은 실로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지라 하는 것은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이고 시수라는 것은 비로소 닦아서 얻는 것인데, 본지 밖에 시수가 따로 없고, 시수 밖에 본지가 따로 없어 반야와 지혜성품은 본래 한 물건을 놓고 다르게 하는 말이지 서로 다른 물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없애서 바르게 들어간다는 것은 중도에 정입한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묘각 즉 구경각을 성취함을 말합니다.

인과 과가 서로 통한다함은 인이 즉 과이고 과가 즉 인으로 중생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으로 쌍차 이대로가 쌍조이고 쌍조 이대로가 쌍차입니다.

마음마음이 부처를 이룸에 한 마음이라도 부처의 마음이 아닌 것이 없어서라함은 중생의 마음이고 마군(魔軍)의 마음이고 부처의 마음이고 할 것 없어 전체가 다 불심입니다. , ‘곳곳에서 도를 이룸에 한 티끌도 불국토가 아닌 곳이 없으니라 함은 만약 인도의 보리수 아래에서만 성도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불교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한 티끌도 불국토 아닌 곳이 없다하는 말은 일즉일체 일체즉일로 사사무애한 것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됨[]이니 허망[]이니 사물[]이니 자아[]니 하는 것은 하나를 들면 전체가 다 따라와 버립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衆生)이 혼연이 일치하여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로 모두가 원융무애하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중도를 깨친 자리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사람이 미혹하면 사람이 법을 따라가 천차만별이 생겨나 처처에 다 막히고 걸리어서 곳곳에서 싸움하지만, 깨달으면 법이 사람을 따라가 전체가 다 한덩이가 됩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원융무애하여 어디에도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말이 다하고 생각이 끊어지고 제8아뢰야의 근본무명이 다 빠져버리면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적료(寂寥)하여 인과를 찾아볼 수 없고 같다 다르다고 하는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감을 잊는다[忘懷]’ 함은 일체의 생각과 망정을 다 잊어버린다는 뜻으로 쌍적(雙寂)을 말하는 것이고, 허랑(虛朗)은 공허한 가운데 밝다는 뜻으로 일체를 다 잃어버린 가운데 언제든지 반야의 큰 지혜가 환히 드러나므로 쌍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망정을 다 잊어버리면 적적하고 또 적적하며 참으로 적적하면 적적한 가운데서 반야의 큰 지혜가 낭연히 홀로 시방세계를 비추고도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허랑인데, 그것은 허하면서도 항상 밝아 조()를 뜻합니다. 그래서 허랑한 그 소식이 온화하면 적()과 조()가 서로 원융무애하게 되어 적이 즉 조이고 조가 즉 적이 되어 허랑할 때가 낭료(朗寥)이고 낭료할 때가 허랑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물속을 투과하여 비치는 달과 같아서, 물속에 있는 달은 허상이지만 항상 그 달을 분명히 볼 수 있어 적적한 가운데 항상 비추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비유로서 무심한 거울의 영상을 드는데, 거울이라는 것은 본시 무심하지만 거기에는 일체만상이 모두 비칩니다. 이것은 비추지만 항상 적적한 것[照而常寂]으로서 거울 가운데 나타나는 모든 것을 볼 때, 사람이면 사람, 짐승이면 짐승으로서 모든 것이 비치지만, 비치는 것들은 모두 실상이 아니므로 그 실체의 모습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어 항상 적적합니다. 결국 달빛이나 거울의 영상은 똑같은 것으로서 이들은 적이쌍조(寂而雙照)하고 조이쌍적(照而雙寂)한 중도의 근본경계를 말할 때 많이 비유합니다.

 

9. 법성게(法性偈)

 

지금까지 중도에 대한 화엄종의 여러 가지 이론들을 대략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법성게(法性偈)를 음미하는 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신라시대 의상(義湘)스님이 저술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예로부터 화엄사상의 정수를 간명하게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법성이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으니, 모든 법이 부동하여 본래 적적하도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를 끊으니, 증득한 지혜로 알 바요 다른 경계가 아니니라. 다라니의 다함 없는 보배로 법계의 실보전을 장엄하여 궁극에는 실제의 중도상(中道床)에 앉으니, 예로부터 부동하여 부처라 이름하도다.

法性圓融無二相하니 諸法不動本來寂이로다 無名無相絶一切하여 證智所知非餘境이라…… 以陀羅尼無盡寶莊嚴法界實寶殿하여 窮坐實際中道床하니 舊來不動名爲佛이로다. [大正藏 45, p.711 ]

 

법성이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음은 법성이 원융해서 시비의 상도 없고 선악의 상도 없이 양변을 완전히 여의었다는 말입니다. 즉 이것은 완전한 쌍차로서 유무(有無), 시비(是非), 선악(善惡), 중생과 부처 등 차별적 양변이 완전히 떨어진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일체만법이 다 부동하여 본래가 적적합니다. 천가지 만가지로 움직여도 두 가지 모습이 없어 그 본자리는 항상 본래부터 그대로이므로 무어라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지을 수도 없어서 일체가 다 끊어져 버립니다. 이 끊어진 자리는 오직 깨친 지혜[證智]로서만 알 바여서 깨쳐야 가능한 것이지 깨치기 이전에는 결코 모르는 것입니다. ‘다른 경계가 아니다함은 중지한 사람, 즉 구경각(究竟覺)정등각(正等覺)을 성취한 부처님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지적하는데 법성 원융한 근본자리는 십지보살(十地菩薩)과 등각(等覺)도 원만하게 모른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법성을 깨쳐 증지를 완전히 성취하면 거기에는 무진한 보배가 꽉 차 있으며, 이러한 무진보(無盡寶)로 법계의 실보전(實寶殿)을 장엄합니다. 그런데 실보전이라 하니 무슨 특이한 법당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진진찰찰 일체불찰(一切佛刹)이 실보전 아닌 것이 없어 참으로 법성의 다라니보(陀羅尼寶), 무진보로서 시방 법계의 실보전을 다 장엄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처소를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고, 형상을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 가운데 분명히 처소가 있고 형상이 있어 흙덩이쇠덩이도 모두 실보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실제(實際)의 중도상(中道床)에 앉게 되는데, 그 실제라는 것은 법계진여, 즉 법계의 근본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계의 중도상(中道床)에 턱 앉는다는 것은 중도를 정등각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중도를 정등각한 자리에 가서 보면 그 근본 자리는 예로부터 아무리 요동해도 요동한 일이 없습니다. 방편으로서 편의상 억지로 이름붙인 것이 부처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움직임이 없는 부처인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요즈음의 말로 표현하면 화엄종의 엑기스입니다. 화엄경의 근본 골자를 총망라해 가지고 만든 것이 이 법성게(法性偈)인데, 법성게의 총 결론은 중도를 성취한 사람이 부처다라는 것입니다. 결국 화엄경의 근본도 중도에 있지 중도를 제외하고서는 따로 주장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8장 선종사상

 

1. 중도법문

 

1)육조스님

 

보통 삼론종법상종천태종화엄종이라고 하면 교가(敎家) 이론을 총망라한 것인데 이 모두는 중도(中道)에 입각하여 법을 설한 것입니다. 따라서 중도를 내놓고는 각 종()은 성립되지 못할 뿐 아니라 중도의 이론이 불교교리의 최고원리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주장하는 선종(禪宗)에서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았는가. 선종도 불교에 속하는 이상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역대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육조(六祖)스님의 어록인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면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육조스님이 돌아가실 임시에 하신 법문을 살펴 봅시다.

 

조사께서 어느날 문인(門人)인 법해(法海)지성(志誠)법달(法達)신회(神會)지상(智常)지통(智通)지철(志徹)지도(志道)법진(法珍)법여(法如)등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내가 죽은 후에는 각각 한 지방의 스승이 될 것이니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설법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리니 내 근본 종지를 잃어 버리지 않게 하여라.

먼저 삼과(三科)법문과 동용(動用) 36(十六對)를 들 것이니 드나듬에 양변을 떠나 일체법을 설할 때 자성을 떠나지 마라. 홀연히 어떤 사람이 너희들에게 법을 묻거든 말함에 모두 쌍()으로 하여 모두 대법(對法)을 취하며 오고 감이 서로 원인이 되어도 마침내는 두 법을 다 없이 하여 다시 갈 곳이 없도록 하라.

삼과법문이란 음()()()을 말한다. ()이란 곧 오음(五陰)으로 색()()()()()을 말하고, ()12(十二入)으로서 외육진(外六塵)인 색()()()()()()과 내육문(內六門)인 안()()()()()()가 그것이다. ()18(十八界)로서 6(六塵)6(六門)6(六識)이다. 자성(自性)이 능히 일체만법을 포함하는 것을 함장식(含藏識)이라 하는데 만약 사량(思量)을 일으킬 것 같으면 곧 전식(轉識)이다. 육식(六識)을 일으켜 6(六門)으로 나아가서 여섯 객관[六塵]을 보니 이와 같이 18계가 모두 자성을 따라 작용을 일으킨다. 만약 자성이 삿되면 열여덟 가지 나쁜 것을 일으키고 자성이 올바르면 열여덟 가지 올바름을 일으킨다. 만약 악하게 작용하면, 곧 중생의 작용이요, 착하게 작용하면 곧 부처의 작용이다. 작용(作用)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가. 자성(自性)으로 말미암아 대법(對法)이 있다. 외경(外境)의 물질세계에 다섯 상대[五對]가 있으니 하늘과 땅이 상대요, 해와 달이 상대요, 밝음과 어두움이 상대요 음과 양이 상대요, 물과 불이 상대이다. 이것이 다섯 상대[五對]이다.

법상(法相)의 말에 열 두 상대가 있으니 말[語法]이 상대요, (有無)가 상대요, 유색무색(有色無色)이 상대요, 유상무상(有相無相)이 상대요, 유루무루(有漏無漏)가 상대요, (色空)이 상대요, (動靜)이 상대요, (淸濁)이 상대요, (凡聖)이 상대요, (僧俗)이 상대요, (老少)가 상대요, (大小)가 상대이다. 이것이 열두상대 [十二對]이다.

자성이 작용을 일으키는 데 열아홉 상대가 있다.

(長短)이 상대요, (邪正)이 상대요, (痴慧)가 상대요, (愚智)가 상대요, (亂定)이 상대요, (慈毒)이 상대요, (戒非)가 상대요, (直曲)이 상대요, 번뇌와 보리가 상대요, 무상(常無常)이 상대요, (悲害)가 상대요, (喜瞋)이 상대요, (捨取)가 상대요, (進退)가 상대요, (生滅)이 상대요, 법신(法身)과 육신(色身)이 상대요, 화신(化身)과 보신(報身)이 상대이니 이것이 열아홉 상대 [十九對]이니라.”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36대법(三六對法)을 잘 쓸 것 같으면 도()가 일체경법(一切經法)에 관통하고 출입할 때 양변을 떠나 버려 자성작용과 여러 사람의 말에 밖으로 상()은 있지만 상을 떠나고 안으로 공()은 있지만 공을 떠난다. 만약 상()에 집착할 것 같으면 곧 사견(邪見)을 기르게 되고, 만약 공()에 집착하면 즉, 무명(無明)을 기르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너희들에게 뜻을 물을 때 유()를 물으면 무()로써 대하고 무()를 물으면 유()로써 대답하며 범()을 물으면 성()으로써 대답하고 성()을 물으면 범()으로써 대답하여 이도(二道)가 서로 인()해서 중도(中道)가 성립된다. 한 번 물으면 한 번 대답하고 나머지 물음도 한결같이 이렇게만 하면 곧 이치를 잃지 않으리라.

가령 어떤 사람이 묻되 어떤 것을 어두움이라 합니까하면 밝음은 인()이 되고 어두움은 연()이 되어 밝음이 없어지면 곧 어두움이다라고 대답하여 밝음으로써 어두움을 나타내고 어두움으로써 밝음을 나타내서 오고 감이 서로 원인이 되게 하여 중도의 진리를 이루게 해야 한다. 나머지 물음도 다 이와 같이 할 것이다. 너희들이 나중에 법을 전함에 있어서도 이렇게 하여 번갈아 서로 가르쳐 줌으로써 종지(宗旨)를 잃지 말 것이니라.”

付囑第十 (法門對示等九)

師一日喚門人法海志誠法達神會智常智通志徹志道法珍法如等曰 汝等不同餘人이라 吾滅度後各爲一方師하나니 吾今敎汝說法하야 不失本宗케 하리라. 先須擧三科法門動用三十六對하리니 出沒卽離兩邊하고 說 一切法호대 莫 離自性하라. 忽有人問汝法이어든 出語盡雙하야 皆取對法하여 來去相因하야 究境二法盡除하여 更無去處하라.

三科法門者陰界入也是五陰이니 色受想行識是也是十二入이니 外六塵色聲香味觸法內六門眼耳鼻舌身意是也是十八界六塵六門六識是也니라. 自性能含万法名含藏識이니 若起思量하면 卽是轉識이라 生六識出六門 見六塵하나니 如是一十八界皆從自性起用하나니라. 自性若邪起十八邪自性若正이면 起十八正이라

若惡用이면 卽衆生用이요 善用이면 卽佛用이니라. 用由何等由自性하야 有對法하나니

外境無情五對天與地對日與月對明與暗對陰與陽對水與火對此是五對也.

法相語言十二對語與法對有與無對有色與無色對有相與無相對有漏與無漏對色與空對動與靜對淸與濁對凡與聖對僧與俗對老與少對大與小對此是對十二對也

自性起用十九對長與短對邪與正對痴與慧對愚與智對亂與定對慈與毒對戒與非對直與曲對實與虛對險與平對煩惱與菩提對常與無常對悲與害對喜與嗔對捨與慳對進與退對生與滅對法身與色身對化身與報身對此是十九對也.

師言 此三十六對法若解用하면 卽道 貫一 切經法하여 出入卽離兩邊하야 自性動用共人言語外於相離相하고 內於空離空이니 若全着相하면 卽長邪見이오. 若全執空하면 卽長無明이니라.

若有人問汝義호대 問有어든 將無對하고 問無어든 將有對하며 問凡이어든 以聖對하고 問聖이어든 以凡對하야 二道相因하야 中道義니라. 如一問一對하고 餘問一依此作하야 卽不失理也리라.

設有人호대 何名爲暗答云明是因이요 暗是緣이니 明沒卽暗이라. 以闇顯明하고 來去相因하야 成中道義니라. 餘問悉皆如此汝等於後傳法依此轉敎授하야 勿失宗旨어다. [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藏 48, p.360]

 

육조스님을 모시고 있던 스님 중에서 남악 회양(南嶽懷讓)스님이나 청원 행사(靑原行思)스님은 딴 곳에 나가서 법을 펴고 있었지만 법해(法海)스님 등은 육조스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있었습니다. 스님을 모시고 있는 스님들 가운데 수승한 10대제자를 모아 놓고 무문자설(無問自說)로 이렇게 유촉하였습니다.

본래 수법제자(受法弟子) 같으면 이러한 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또 한 번 말씀 하신 것은 비록 안다고 해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서이고, 또 그 당시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세 중생들을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육조스님이 하고 싶은 말씀이 선종에 있어서 근본원리이기 때문에 특별히 불러서 유촉한 법문입니다.

언제든지 설법을 할 때는 양변을 떠난 중도(中道)에 입각해서 설법을 하되 자성(自性)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자성이란 불성(佛性)을 말하는데 불성이란 비유비무(非有非無)이고 역유역무(亦有亦無)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누가 유()로 물으면 무()로 대답하고 무()로 물으면 유()로 대답해야 합니다. ()란 스스로가 유가 아니고 무()도 스스로 무가 아닙니다. ()가 있기 때문에 유()이고 유()가 있기 때문에 무()가 있습니다. 따라서 유를 떠나서 무가 없고 무를 떠나서 유가 없습니다. 이것을 오고감이 서로 원인이 된다[來去相因]’고 합니다. 그리고 구경에 두 법을 모두 버리라고 한 것은 다시 말하면 무를 떠나서 유가 없고 유를 떠나서 무가 없다면 이것은 생멸법(生滅法)이지 절대법(絶對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두 법을 다 버려야 됩니다. 생멸법을 버려서 다시 갈 곳을 없게 해야 합니다. 결국 양변을 여의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누가 법문을 묻든지 간에 반드시 양변을 여윈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설해야 되지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근본 불법이 아닐 뿐 아니라 육조의 아손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교의별전이라고 하는 조계 선종(曹溪禪宗)의 근본 입장도 중도에 서 있지 중도를 떠나서는 조계선종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계선종을 바로 알려면 중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천태종이나 삼론종이나 법상종이나 그 근본은 중도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첨가해서 설명할 것이 있는데 육조스님이 의발(衣鉢)을 전한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혹자는 행사스님에게 육조스님이 의발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 본 것입니다. 그 부분을 대장경에서 살펴 보겠습니다.

 

그전에는 옷과 법[衣法]을 함께 실행하여 스승과 제자가 주고 받았으니 옷을 가지고 믿음 []을 표시했다. 내가 이제 사람을 얻었는데 어찌 믿지 아니함을 걱정하겠느냐. 내가 옷을 받은 이래로 고생을 많이 했다. 하물며 후대에서랴, 반드시 경쟁이 많을 것이다. 옷은 산문(山門)에 두고 너는 마땅히 각 지역에 나누어 교화하여 이 법을 단절케 하지 마라.

從上衣法雙行하여 師資遞授거든 衣以表信이요 吾今得人인데 何患不信이리오 吾受衣以來遭此多難이요 況乎後代리오 爭競必多하나니 衣卽留鎭山門하고 汝當分化一方하야 無令斷絶케 하라. [景德傳燈錄 5;大正藏 51, p.240 ]

 

이 대목은 전등록 청원행사(靑原行思)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 6조대사 이전에는 옷과 법[衣法]을 서로서로 쌍행해서 전해 내려왔는데 이것은 옷을 가지고 신()을 표시한 것이고 법은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을 얻었는데 어찌 믿지 아니함을 겁낼 것이 있겠는가.’ 즉 네가 지금 법을 성취하였는데 그 신()을 표시함에 있어서 옷은 필요가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옷을 전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옷을 전해 받은 이래로 옷을 서로 뺏으려고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하물며 후대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즉 옷 때문에 싸움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옷은 조계산에 그대로 두고 너희는 마땅히 딴 곳으로 가서 교화를 하라며 이 법을 단절치 않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여기서 옷은 산문에 두라[留鎭山門]’ 함은 조계산에 그대로 두라는 뜻입니다.

육조단경에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법해(法海) 상좌가 재배하고 여쭈었다. “스님께서 입멸하신 후에 옷과 법은 마땅히 어떤 사람에게 맡기십니까.”

내가 대범사에서 설법한 이래 지금에 이르도록 기록하여 유통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법보단경이라 한다. 너희들이 수호하여 번갈아 전해 주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되 다만 이 단경에 의지하여 설하면 이것이 정법(正法)이다. 지금 너희들을 위해 법을 설하고 옷은 전해 주지 않는다. 너희들의 신근(信根)이 순숙(淳熟)하기 때문에 결정코 의심이 없으며 큰 일을 감당할 만하다. 그러므로 이전 조사인 달마대사께서 붙이신 게송의 뜻에 의거하여 옷은 전하지 않을 것이다하시고 그 게송을 말씀하셨다.

 

내가 본래 이 땅에 와서

법을 전하고 어리석은 중생을 구하니

한꽃에 다섯 잎 피어

열매가 저절로 이루리라.

 

法海上座再拜問曰하기를 和尙入滅之後衣法當付何人하니이고 師曰 吾於大梵寺說法해서 以至于今이라 抄錄流行하니 目曰法寶壇經이라 汝等守護하여 遞相傳授하라 度諸群生일댄 但依此說이요 是名正法이라. 今爲汝等說法하야 不付其衣蓋爲汝等 信根淳熟하야 決定無疑거든 堪任大事이나 據先祖達磨大師付授意衣不合傳 偈曰.

 

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花開五葉 結果自然成

[法寶壇經;大正藏 48, p.361 ]

 

이것뿐만 아니라 육조스님이 옷을 조계산에 두고 전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글을 지은 것이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불의명(佛衣銘)입니다.(劉禹錫撰;大正藏 48, p.364 ) 여기의 첫머리에 부처님 말씀은 행하지 않고 옷이 싸움의 근본이 된다[佛言不行佛衣乃爭].’ 그래서 옷을 전하지 아니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현종(玄宗) 초 육조 스님이 돌아가신 뒤 얼마 안되어 현종이 육조스님의 의발을 청해서 궁중에 모셔 놓았는데 그 아들인 숙종이 죽고 난 뒤에도 옷을 조계산에 돌려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숙종 아들 대종(代宗)이 꿈을 꾸었는데 육조스님이 의발을 조계산으로 도로 돌려 보내달라고 현몽을 했습니다. 그래서 영태(永泰) 원년 55일에 조칙을 내려 조계산에 돌려 보냈다는 대목이 육조스님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짐이 꿈에 혜능대사를 보았는데 전해 내려온 옷 가사를 조계로 보내달라고 청하니 내가 진국 대장군 유순경을 시켜서 받들어 모시고 보내며 이것은 나라의 국보이니 본사에게 여법하게 잘 보관하라 하였다.

夢感能禪師 請하건대 傳衣袈裟却歸曹溪今遺鎭國大將軍劉崇景해서 頂戴而送하니 朕謂之國寶卿可於本寺如法安直하라. [六祖大師緣記外記;大正藏 48, p.364 ]

 

이러한 여러 가지의 증거를 보아서 육조 스님이 옷을 전하지 안했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2)마조스님

 

마조(馬祖道一)스님은 지금부터 1200여년 전 당() 정원(貞元) 4(AD.788) 80세에 입적하였는데 육조스님 제자되는 남악 회양선사의 제자입니다. 마조스님이 법을 깨치게 되는 기연[得法機緣]은 잘 알려진 것이지만 이것을 보면 선()이란 활동하는 원동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 것과 같이 한군데 체재하여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마치 죽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낙오되기 마련이고 도태됩니다. 농사 짓는 사람은 논과 밭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시장바닥에서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합니다. 수행(修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단히 정진하는 사람은 향상의 분()이 있거니와 정진하지 않고 방일하는 사람은 결국 전에 닦았던 경계조차도 미하고 맙니다. 모든 것은 쉬지 않고 변천하기 때문에 우리도 이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쉬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은 활동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참선을 한다는 것은 좌선한다고 말하는 이가 많은데 좌선만이 참선(參禪)이 아닙니다. 참선은 곧 선을 참구하는 것인 만큼 일체시(一切時) 일체처(一切處)에 오로지 마음을 순일히 하여 자기가 의심하는 화두(話頭)에 몰두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마조스님의 득법기연인 남악선사와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선의 진의(眞意)를 알 수 있습니다.

남악스님이 숭산(嵩山)의 전법원(傳法院)에서 수도하는 도일스님의 법기(法器)를 알고 도일스님이 좌선하고 있는 바로 방문 앞으로 갔습니다.

대덕(大德)은 무엇 할려고 좌선을 하십니까.”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하루는 남악스님이 기와장을 가져와서 스님이 좌선하고 있는 방문 바로 앞에서 기와장을 숫돌에 갈고 있었다.

큰스님은 무얼 하시려고 기와장을 갈고 계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갈고 있습니다.”

기와장을 갈아서 어찌 거울을 만들려고 합니까.”

그러면 좌선을 해서 어찌 부처를 이룰려고 합니까.”

이 한마디에 도일은 큰스님이 기와장을 갈고 있는 진의(眞意)를 알았습니다. 다시 남악스님이 물었습니다.

우마차가 가지 않을 때 소를 때려야 옳은가,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

부처를 찾는 데에 있어 좌선만 고집하면 설사 만 겁을 지내도 깨치지 못한다.”

도일스님은 남악스님의 말씀을 듣고 이내 마음을 깨쳐서 뒷날 남악스님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경덕전등록 남악회양장(南嶽懷讓章)에 나오는 것입니다.

마조스님은 강서성(江西省)을 중심으로 교화를 하였기 때문에 강서마조(江西馬祖)라도 불리우며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교화를 한 석두 희천(石頭希遷)과 더불어 당시 선계(禪界)의 쌍벽이라 불리웠습니다. 마조스님 밑에 139명의 대선지식이 있고, 그 중에서 뛰어난 이가 88명인데 이 88명이 천하에 흩어져서 육조 조계선을 천하에 유포시켰습니다. 선종을 천하에 유포시켜서 알게 한 것은 마조스님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조스님 밑에서 임제종(臨濟宗) 위앙종(潙仰宗)이 나고 조동종(曹洞宗)도 이와 관련이 많습니다. 마조스님의 성품은 인자하며 얼굴이 특이하고 소걸음에 호랑이 눈길이었으며 혀를 내밀면 코를 덮고 발바닥에는 두 개의 고리 문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마조스님은 종문(宗門)의 걸출로써 천하에 선을 유포시킨 제일의 공로자라고 평하는 동시에 큰제자를 많이 두기로 마조스님 만한 이가 없다고도 평합니다. 그래서 마조스님의 법문이라고 하면 종문의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문이 많이 없고 마조어록(馬祖語錄)이라고 하는 간단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 도()를 알려고 할진대는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다. 평상심이란 조작(造作)이 없고 시비(是非)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범성(凡聖)이 없고 단상(斷常)이 없다. 경에 말씀하시길 범부행(凡夫行)이 아니며 현성행(賢聖行)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라 하니라. 단지 지금과 같이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응기접물(應機接物)할 때 전체가 다 도()이다. ()이대로가 법계(法界)이니 내지 항사사 같은 묘한 작용이 법계를 벗어나지 아니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진댄 어찌 이것을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하며 무진등(無盡燈)이라 할 것인가. 일체만법이 다 심법(心法)이요 모든 이름이 심명(心名)이니 만법이 마음을 따라서 일어난다. 마음이란 만법의 근본이다. 경에 말씀하셨다. 마음을 알아 본원(本源)에 통달하는 까닭에 사문(沙門)이라 한다.

若欲直會其道인댄 平常心是道이다 謂平常心無造作하야 無是非 無取捨하며 無斷常 無凡無聖하니라 하대 非凡夫行이며 非賢聖行是菩薩行이라 하니라 只如今 行住坐臥應機接物盡是道道卽是法界乃至 河沙妙用不出法界니라 若不然者인댄 云何言心地法門이며 云何言無盡燈이리요 一切法皆是心法이요 一切名皆是心名이니 萬法皆從心生이라 心爲萬法之根本이니 經云 識心達本源故號 沙門이라 하니라. [馬祖語錄;傳燈錄 28, 大正藏 51, p.440 ]

 

()란 평상심(平常心)을 말합니다.

평상심이 도이다[平常心是道]고 하니까 평상심이란 일상 보통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옷 입고 밥 먹고 성내고 좋아하는 마음 그대로의 활동이 도라고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마조스님이 말씀하시는 평상심(平常心)이란 조작이 없고 시비도 없고 취사도 없고 범부와 성인과 단멸과 상주가 없는 마음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곧 양변을 여윈 중도가 평상심이라는 말입니다. 생멸심을 가리켜 평상심이라고 한 것은 아닌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기틀에 대응하고 물건을 접촉함[應機接物]이 모두 다 도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업식망견(業識妄見)을 말하는 생멸심이 아니고 진여대용(眞如大用)을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마조스님이 말씀한 도란 생멸견해라고 잘못 오해하는 사람이 많이 있으나 그것은 양변을 여윈 중도(中道)를 도라고 한 마조스님의 뜻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도 이대로가 법계라 하였습니다. 법계란 연기를 말하는 것이고 연기는 중도입니다. 일체법이 마음법이라고 하는 이 마음이란 자성이라 해도 진여라 해도 뭐라 이름붙여도 괜찮은데 양변을 여윈 중도 즉 불성(佛性)입니다. 그래서 천태종에서 주장하는 한개의 색, 한개의 향이 중도아님이 없다[一色一香無非中道]는 것과 같은 말이며 진진찰찰(塵塵刹刹)이 중도 아님이 없다는 것이니, 이 마음이라는 것이 중도불성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알아 본원에 도달한 사람, 즉 중도를 정등각한 사람이 사문의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즉 출가한 사람은 누구든지 평상심, 말하자면 양변을 여윈 중도를 깨쳐야지 이것을 깨치기 전에는 사문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응기접물(應機接物)이 모두 다 도()라 한다고 생멸의 변견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자기의 망견이요 곡해지 마조스님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규봉스님이 4종복기를 비판할 때도 생멸견해에서 마조스님을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그 뒤에 홍각범(洪覺範)스님이 규봉은 절대로 마조스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다고 했고, 영원 청(靈源淸) 스님도 규봉이 생멸변견적인 해석을 한 망견이지 마조스님이 뜻은 모른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응기접물(應機接物)이 모두 다 도라 하는 것은 양변을 여윈 중도에 입각한 평상심의 진여대용이지 생멸망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능인(能仁)이니 지혜가 있고 기정(機情)을 잘 하여 능히 일체중생의 의심그물을 부수어서 유() () 등의 속박을 벗어나며 범(凡聖)의 망정이 다 없어져서 인()과 법()이 모두 공()하다. 최상 법륜을 굴리어 범위를 벗어나니 짓는 바가 걸림이 없어 사()와 이()가 함께 통달하니라.

하늘에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홀연히 있다가 도리어 없어지며 종적이 없으니 비유하면 물에 글씨를 쓰는 것과 같다. 불생불멸은 대적멸(大寂滅)이니 속박 속에 있으면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하고 모든 속박을 벗어났을 때를 대법신(大法身)이라 한다. 법신(法身)은 다함이 없어서 체()는 증감이 없고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며 능히 모가 나고 능히 원만하여 사물에 응하여 형상을 나타내니 물 속의 달과 같다. 도도히 운용하여 뿌리를 세우지 않아 유위(有爲)를 다하지 않고 무위(無爲)를 취하지 않는다. 유위(有爲)는 무위(無爲)집의 용()이고 무위는 유위집에 의지하나 의지하는 데 머물지 않는 까닭에 저 허공같이 의지하는 바가 없다고 한다.

佛是能仁이니 有智慧善機情하야 能破一切衆生疑網하야 出離有無等縛하야 凡聖情盡하며 人法俱空하니라. 轉無等輪하야 超於數量하니 所作無礙 事理雙通 如天起雲 忽有還無 不留礙迹 猶如畵水成文이니라. 不生不滅是大寂滅이니 在纏名如來藏이오 出纏名大法身이니라. 法身無窮하야 體無增減하야 能大能小하며 能方能圓하야 應物現形하야 如水中月하니라 滔滔運用하야 不立根裁하야 不盡有爲하며 不在無爲하나니 有爲是無爲家用이며 無爲是有爲家依不住於依故云 如空無所依라 하니라. [馬祖語錄;傳燈錄 28, 大正藏 51, p.440 ]

 

능인(能仁)이란 석가(繹迦)를 의역한 것이고, 기정(機情)을 잘한다고 함은 중생제도를 함에 있어서 부처님은 응기접물(應機接物)외 수단이 묘하여 능히 일체중생의 의심그물을 부수고 유무에 묶인 변견을 벗어나게 합니다. 결국 중도를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입니다. 무의 속박을 벗어나서 중도를 성취할 것 같으면 범성(凡聖)의 정()이 없어져서 법공(法空) 아공(我空)이 됩니다. 진여대용의 무애자재한 법을 쓰게되면 쌍차쌍조해서 무장무애한 법계가 현전하게 되어 범주를 완전히 떠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사()와 이()가 서로 함께 통하여 이사무애 사사무애의 무장애법계가 됩니다. 이것이 불법의 진수입니다. 중생이든지 보살이든지 아직 대법(大法)을 성취하지 못한 때를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는데 아직 유무 양변을 해탈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속박을 벗어나 해탈을 성취한 것을 대법신(大法身)이라 합니다. 법신(法身)은 무궁하여 다함이 없고 체()는 증감이 없어서 대소(大小)가 완전히 원융자재하게 됩니다. 체에 증감이 없다 함은 양변을 여윈 쌍차(雙遮)를 말하는 것이고 능소능대(能小能大)란 쌍조(雙照)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법신은 주처(住處)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위(有爲)를 다하지 않고 무위(無爲)에 주()하지 아니하며 유위를 버리지 않고 무위를 취하지 않습니다. 유위는 무위집의 작용이고 무위는 유위집에 의지합니다. 하지만 의지하는 데 머물지 않는 까닭에 저 허공같이 의지하는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중도라는 것은 원융자재해서 머무는 곳이 없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고 부처 밖에 다른 마음이 없다.

()도 취하지 아니하고 악()도 버리지 하니하여,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의 양변에 함께 의지하지 아니하여, 생각생각에 죄성이 공함을 얻어 볼려고 해도 얻어볼 수 없음을 통달한다. 자성(自性)이 없는 까닭에 삼계(三界)가 유심(唯心)이다. 삼라만상이 한 법의 인()이니라. 무릇 색을 보는 이것이 모두 마음을 보는 것이니. 마음은 스스로 마음이 아니요 색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있다.

너희가 때를 따라 말로써 설명하되 사()에 즉하고 이()에 즉하여 모두 조금도 막히는 바가 없으니 보리도과(菩提道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마음에서 나는 바를 색()이라 이름하고 색()이 공함을 아는 까닭에 생()이 즉 불생(不生)이다. (中略)게송을 들어보아라.

 

심지법문을 때에 따라 설하니

보리도 이와 마찬가지다.

()와 이()가 다 거리낌이 없어

()이 즉 불생(不生)이니라.

 

心外無別佛이요 佛外無別心이라.

不取善不捨惡하야 淨穢兩邊俱不依怙하야

達罪性空하야 念念不可得이니 無自性故三界唯心일새 森羅萬象一法之所印이니라 凡所見色皆是見心이니 心不自心이요 因色故有()이니라. 汝但隨時言說하대 卽事卽理하야 都無所碍菩提道果亦復如是하야 於心所生卽名爲色이오 知色空故生卽不生이니라……

偈曰

心地隨時說하니

菩提亦只寧이라

事理俱無碍하야

當生卽不生이니라. [傳燈錄 6 ; 大正藏 51, p.246 ]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고 부처 밖에 다른 마음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취사(取捨)를 하게 되면 변견에 떨어지기 때문에 선악을 다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의 양변에 함께 의지하지 아니하여 죄의 본성이 공함을 통달하여 생각생각에 죄성이 공함을 얻어 볼려고 해도 얻어볼 수 없습니다.

왜 죄의 본성이 공함[罪性空]을 말하느냐하면 보통 자성청정(自性淸淨)을 말하면 알기 쉬운데 죄라 하면 다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자성청정이나 죄성청정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와 불()이 같다는 의미입니다. 중생이 모르고 변견으로 볼 때는 마군은 나쁘고 부처는 좋고 선은 좋은 것이고 죄는 나쁘다고 보지만 죄성이 본래 청정하여 공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성청정이나 죄성본공(罪性本空)이라는 것을 확철히 깨칠 것 같으면 이것이 부처이고 이것이 도()입니다.

자성이 공했기 때문에 삼계가 유심입니다. 삼계유심이란 자성청정심을 말하는 것인데 일체만법이 다 공하여 쌍차쌍조하며 진공(眞空)이 묘유(妙有)한 것인데 이것을 마음이라 하고 중도라 합니다. 앞에서 선도 취하지 않고 깨끗하고 더러움의 양변을 버린 것을 마음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삼라만상이 모두 쌍차쌍조해서 차조(遮照)가 동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삼라만상이 일법지소인(一法之所印)으로 중도와 자성청정 내놓고는 하나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일법(一法)이란 마음법계연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결국 마군이라고 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모든 것이 융통자재하기 때문에 무슨 말로 표현하든 흠이 되지 않습니다. 왜 흠이 되지 않느냐하면 쌍차한 쌍조, 즉 원융자재한 곳에서 말하기 때문에 중생의 변견과는 틀리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색을 보는 이것이 모두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색 다르고 심()이 따로 없습니다. 색이 즉 심이고 심이 즉 색입니다. 색이 즉 공이고 공이 즉 색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원융무애합니다. 전부가 하나입니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입니다. 따라서 색이 즉 심이고, 심이 즉 색이며, 색이 즉 공이고, 중생이 즉 불이고, 불이 즉 중생입니다. 그래서 색을 바로 보면 마음을 보는 것이고 중생을 바로 보면 부처를 보는 것입니다. 중생을 변견으로 보게되면 영원히 중생으로 되고 말지만 중도정견으로 중생을 바로 보게 되면 이것이 부처를 보는 것입니다. 마음은 스스로 마음이 아니요, 색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있습니다. 너희가 때를 따라 연설할 때 사()에 즉하고 이()에 즉하여 조금도 막힌 바가 없으니 우리의 대법(大法)도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막힌 데가 없이 무애해서 조금도 안 통하는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나는 바를 색이라 이름하고 색은 공함을 아는 까닭에 생()은 불생(不生)입니다. 마음이 즉 색이고 색이 즉 마음입니다. 마음이 공한 동시에 색이 공했고 색이 공한 동시에 마음이 공했다는 말입니다. 색이 공했기 때문에 아무리 색이 생하고 마음이 생한다고 해도 생()을 내놓고 불생(不生)이 따로 없고 불생(不生)을 내놓고 생()이 따로 없습니다. 생과 불생이 언제든지 원융무애합니다. ()이란 쌍조(雙照), 불생(不生)이란 쌍차(雙遮)를 말하는 것인데 언제든지 서로 통한 것으로 보아야지 서로서로 막힌 것으로 보면 불법(佛法)이 아닙니다. 게송으로 말하기를 양변을 여윈 중도에서 법을 설하면 사()와 이()에 걸림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제까지 마조스님의 어록을 살펴보았는데 이 설법의 중심사상도 양변을 여윈 중도의 입장에서 설한 것이지 원융무애한 중도를 떠나서는 한번도 설법을 한 일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이라고 해도 불법 가운데 말하는 것이지 딴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설하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3)백장스님

 

백장스님은 마조(馬祖)스님의 제자입니다. 마조스님 제자 가운데 뛰어난 제자가 많았지만 그 중에서 마조정안(馬祖正眼)을 전해 받은 사람은 백장스님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 그의 제자 가운데 후세의 선가(禪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스님은 선문에 들어오기 전에 경론의 삼장에 능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학다문하였습니다. 어느날 마조스님이 남강(南康)에서 교화한다는 말을 듣고 마조스님 처소에 찾아가 마음을 기울여 의지하니 마조스님이 보자마자 공손히 맞이하여 입실케 하였다고 합니다. 스님은 현현한 관문을 깨달은 뒤에도 다시 딴 곳에 가지 않고 그 곳에서 살았으며 마조스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8년동안 마조스님의 탑을 모셨습니다.

백장스님의 성격은 겸양하고 하심(下心)을 많이 하여 다른 사람한테는 낫놓고 자도 모른다는 취급을 받았고, 마조스님의 인가를 받아 마조정안(馬祖正眼)을 전했지만 마조스님 생전에는 드러나지 않아서 마조스님이 돌아가신 후 마조스님의 비석을 세우는 데 그 당시 유명한 스님들의 이름이 비문에 모두 올라 있지만 백장스님의 이름은 그 비문에서 빠질 만큼 밀행(密行)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심하면서 숨어 살았지만 공부하는 스님들이 찾아와서 법()을 물어보면 외모와는 다르게 해박하게 지도하였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어 곳곳에서 대중들이 모여들게 되어 처소가 협소하게 되었으므로 백장산(百丈山)으로 처소를 옮겼습니다. 여기서 대가람을 이루게 되었는데 선문에서 총림(叢林)이라고 하는 것이 백장스님부터 시작이 됩니다. 선종(禪宗)이 달마대사부터 시작하였지만 마조스님 때까지도 선종을 표방하는 가람을 특별히 따로 정한 것이 아니라 대개 율종 사찰에 더부살이로 지냈으며, 혹 따로 선가(禪家)를 이루고 사는 사찰도 있었지만 선종에 특별한 규율도 없이 지냈습니다. 그래서 백장스님이 백장산에 가서 대중을 많이 거느리고 살게 되니 무질서하게 생활할 수 없었으므로 대소승의 경()()을 참작하여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선종 최초의 법규이며 그 이후 천하 총림에서 시행하게 된 거룩한 법이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백장스님께서 평생동안 행한 철저한 수행정신은 이루 형용하기 어렵거니와 그 위에 날마다 운력을 할 때 남보다 먼저 나섰습니다.

스님 밑에는 황벽(黃岫)이라든가 위산()이라든가 하는 천하의 대종사들 뿐만아니라 수백명이 넘는 우수한 제자들이 함께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찰은 깊은 산 속에 있었으므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낮에는 매일 밭일을 하고 밤에만 앉아서 정진을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백장스님은 연세가 많아도 매일 대중들과 함께 밭에 나와서 일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함께 일을 하던 제자들이 늙은 노스님의 일하는 모습이 보기가 민망스러워 일하는 도구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연장을 찾지 못한 스님은 하루 종일 방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고 공양도 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찾아가서 공양드시기를 청하니 내가 아무런 덕()도 없는데 어찌 남들만 수고롭게 하겠는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니 여기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천하에 유명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선()을 참구한다든지 도()를 구한다든지 총림(叢林)을 한다든지 할 때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정신이 근본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원칙이 기본적으로 이행되지 않으면 총림이란 설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요즈음 우리 대중들은 옆에 있는 사람이 눈만 한번 흘겨도, 아니 무슨 꾸중이라도 할려고 하면 내가 해인사 아니면 굶어죽는가, 해인사 오기 전에도 여태까지 먹고 살았는데

이런 사고방식으로 수행을 하고 있으니 만약 백장스님이 지금 살아 계신다면 우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한번 돌아보고 정진하는 데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을 다시금 다져야 하겠습니다. 백장스님은 서기 814년 당() 원화(元和) 9년 정월 세수 95세로 입적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출가하기 전부터 원대한 포부를 가졌는데 한 일화에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스님이 어릴 적에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 절을 하고 나더니 갑자기 불상을 가리키면서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저것이 무엇입니까.”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시다.”

부처님 모습이 사람과 같아서 나와 다르지 않습니다하고는 나도 반드시 부처가 되리라라는 서원을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도 다음 생에서 또다시 사람의 몸을 받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법(佛法) 또한 듣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무쇠를 씹는 것과 같은 불퇴전의 참구심으로 화두를 들어 이 생에 반드시 부처를 이루겠다는 서원을 세워서 불철주야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일체 유(有無)의 제법에 의지하고 머물지 아니하며 또 의지하고 머뭄이 없는 데도 머물지 아니하며 또 의지하고 머물지 아니한다는 생각도 하지 아니하면 이것이 대선지식(大善知識)이다. 또한 부처님 한 분만이 대선지식이니 두 사람이 없으며 나머지 사람은 모두 다 외도며 또 마군의 말이니 지금 다만 두 극단 [兩頭句]인 일체 유무의 대경법(對境法)을 말해 부수는 것이다.

但不依住一切有無諸法하야 亦不作住無依住하며 亦不作不依住知解하면 是名大善知識이요 亦云唯佛一人是大善知識이니 爲無兩人하야 餘者盡名外道亦名魔說이니 如今祗是說破兩頭句一切有無境法이니라

 

백장스님의 어록(語錄)으로 백장광록(百丈廣錄)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른 조사스님들보다 유독히 드러나게 유무의 양변을 여윈 이것이 불법(佛法)이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중도(中道)라는 말은 없지만 유무 양변을 여의는 것이 중도이므로 그 뜻은 부처님이 유무 양변을 여윈 중도를 정등각했다는 것을 바로 전하고 있으며 육조스님이 유촉했던 것, 즉 언제든지 양변을 여윈 중도로써 설법하라는 유촉을 그대로 실천한 것입니다.

처음 유법(有法)의 제법을 여의었으면 그만인데 왜 유무 양변을 여윈 여기에도 주하지 말라고 하느냐 하면 실지로 유무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주() 할래야 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생이란 항상 집착이 많기 때문에 유무 양변을 여윈다고 하면 양변을 여윈 여기에 머물러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병을 고치기 위하여 유무 양변을 여윈 곳에도 주하지 말고, 또 주하지 아니하는 데도 주하지 아니 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내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유무 양변을 여윈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유무 양변을 여윈 사람을 대선지식이라 하고 부처님 한 분만이 대선지식이어서 두 사람이 없으며 유무 양변에 머물러 있는, 즉 변견을 가진 사람은 외도이며 그 사람의 말은 마군의 말이니 양변을 여윈 중도의 법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이 백장스님의 근본입장입니다.

 

몸이 가이 없는 보살이 여래의 정수리는 보지 못한다하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유변에서 보고 무변에서 보기 때문에 여래의 정수리는 보지 못하니 지금 일체 유무등의 견해가 모두 없고 또 견해가 없다는 생각도 없으면 여래의 정수리를 본다.”

無邊身菩薩不見如來頂上()이라 하니 如何師云 爲作有邊見無邊見일새 所以不見如來 頂上이니 祗如今都無一切有無等見하야 亦無無見하면 是名(如來)頂上 ()이니라.

 

무변신(無邊身)보살, 즉 몸이 가이없는 보살이라 하면 무변신에 머물러 있음을 말하니 유견(有見)은 넘어섰지만 무견(無見)에 집착한 사람을 경계한 말입니다. 무변신보살이 여래의 머리 위를 보지 못하는 것은 무변에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변에 떨어진 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다운 여래의 이마 위를 볼려고 하면 유변과 무변을 여윈 중도를 성취해야 합니다. 중도를 성취할려면 유무 양변을 버려야 하고 또 버렸다는 생각도 없어야함을 여기에서 철저히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란 구함이 없는 사람이니 지금 일체 유무의 제법에 탐착하여 구하면 있는 바이고 짓는 바가 되어 모두 어긋나니 도리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佛是無求人이니 如今貪求一切有無諸法하면 但是所有所作이리 皆背也却是謗佛이니라.

 

실지로 불법(佛法)을 알려면 유무 양변을 여윈 중도를 바로 깨쳐야 합니다. 만약 유무 제법을 탐착하여 구하게 되면 부처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무가 일체법을 주관한다.

有無管一切法하나니라.

 

무슨 견해 무슨 견해할 것 없이 모두가 유무에 얽혀 이어지니 유무의 견해만 없으면 일체의 상대적 견해가 없어지는 것이므로 여기서 유무를 대표로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일체 유무의 제법에 탐착하여 물들지 아니하면 무생(無生)이라고 한다.

但不貪染一切有無諸法하면 是名無生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무생(無生)8(八地) 자재위 보살이나 10(十地) 등각(等覺)을 벗어난 부처님의 무생(無生)입니다. 왜냐하면 자재위보살들도 침공체적(沈空滯寂)해서 엄격히 보면 무견(無見)에 집착해 있는 사람들이니 유무 양변을 완전히 여읠 것 같으면 대원경지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무생(無生)이라고 하고 부처의 지위의 무생입니다.

 

일체 유무 등의 견해가 없으며 또한 견해가 없다는 것도 없으면 바른 견해라고 한다.

都無一切有無等見하야 亦無無見하면 名正見이니라.

 

무 등의 견해가 없고 없다는 생각도 없음을 바른 견해[正見]라 하니 바른 견해를 완전히 얻으면 이것이 무생(無生)이고 대선지식이고 부처입니다.

 

일체 유무 등의 법과 유무 등의 견해가 없어서 낱낱이 삼구(三句)밖을 벗어나면 여의보(如意寶)라고 한다.

但無一切有無等法하야 有無等見하야 一箇箇透過三句外하면 是名如如寶니라.

 

무릇 가르치는 말이 모두 삼구(三句)에 서로 관련하니 초선중선후선이다. 처음에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곧 바로 선심(善心)을 내게 하고 가운데서는 그 선심을 부수고 마지막에는 비로소 좋은 선이 된다고 이름한다. 보살은 보살이 아니므로 보살이라 한다하며 법은 법이 아니므로 법 아님이 아니라고 함과 같이 모두 이러한 것이다.

夫敎語皆三句相連이니 初中後善이니라. 初直須敎渠發善心이요 中破善心이요 後始名好善이니 菩薩卽非菩薩일새 是名菩薩이라하며 法非法 非非法일새 總與麽也니라.

 

여의(如意)란 내 마음대로 됨을 말하니 여의보란 내 뜻대로 되는 보배, 즉 마음이 무애자재함을 비유한 것입니다. 무 등의 법과 견()을 여의었으면 그만이지 다시 왜 삼구(三句)를 말했는가 하면 유무 등을 더욱 철저하게 여의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보살은은 초구(初句), ‘보살이 아니므로는 가운데 구(中句), ‘보살이다는 후구(後句)입니다. 보살은 보살이 아니라는 것은 부정하는 것이니 쌍차(雙遮)를 말함이고, 보살이 아니므로 보살이라는 것은 긍정하는 것이니 쌍조(雙照)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정과 긍정, 즉 쌍차쌍조한 이것이 내포되지 아니하면 변견에 떨어지고 말기 때문에 특별히 삼구로 나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구(三句)란 쌍차쌍조(雙遮雙照) 차조동시(遮照同時)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이란 이렇게 말하면 여기에 집착하고 저렇게 말하면 저기에 집착하는 병을 철저히 깨뜨리기 위하여 말한 것이니, 이렇게 하여 중도를 성립시킨 것입니다. 언제든지 유무 등의 법을 여의는 데 있어서는 삼구가 서로 이어져서 철두철미하게 유무 양변을 여의어야 합니다.

 

일체 유무의 제법에 막히지 않고 또 막히지 않음에 의지하고 머물지 아니하며 또 의지하고 머물지 아니 한다는 지해(知解)도 없으면 이것을 신통이라 한다.

不被一切有無諸法하며 亦不依住不하며 亦無不依住知解하면 是名神通이니라.

 

일체 유무 등의 법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사구(四句)밖을 떠나면 비고 비었다하고 불사약이라 한다.

不納一切有無等法하야 離四句外하면 名空空이며 名不死藥이라 하니라.

 

일체 유무 등의 법에 얽매이지 않으며 옛날과 지금을 주관하면 부처님이 이 사람이고 사람이 이 부처님이며 또 삼매정(三昧定)이라 한다.

不被一切有無等法하야 管自古自今하면 佛祗是人이요 人祗是佛이며 亦是三昧定이니라.

 

남악 회양스님이 마조스님을 평할 때 그대는 고금에 좋다[善古今]’고 했는데 이 말은 바로 여기서 말하는 옛날과 지금을 주관한다는 말과 같이 쌍조(雙照)를 표현한 것입니다. 양변을 부정하고 양변을 긍정하는 쌍차쌍조(雙遮雙照)하는 이것이 부처이며 삼매(三昧)입니다.

 

일체 유무의 제법과 세간출세간법을 의지하고 머물지 아니하며 또 의지하고 머물지 아니한다는 지해(知解)도 짓지 아니하며 지해가 없음에도 의지하고 머물지 아니하면 자기 마음은 부처이며 조용(照用)은 보살에 속한다.

不依住一切有無諸法世間出世間法하야 亦不作不住知解하며 亦不依住無知解하면 自心是佛이요 照用屬菩薩이니라.

 

보살이라고 하니까 부처님 보다 낮은 것 같이 생각하기 쉬운데 낮은 것을 뜻함이 아닙니다. 체용(體用)으로 볼 때 부처님은 체()이며 보살은 용()으로서 조용(照用)이라는 것은 진여대용(眞如大用)을 말한 것이니 부처가 즉 보살이며 보살이 즉 부처입니다.

 

먼저 종지를 깨친 사람은 일체 유무의 제법상에 구속되지 아니하며 때묻은 옷을 씻은 것과 같으므로 모양을 떠났다고 말하며 부처님이라 이름한다.

先悟宗人不被一切有無諸法相拘하야 如浣垢依故云離相이며 名佛이니라.

 

일체 유무의 제법에 탐착하여 물들지 아니하면 이것을 사구게를 가진다고 말한다.

不貪染一切有無諸法하면 是名受持四句偈이니라.

 

일체 유무의 제법을 구하면 중생의 무리 [衆生數], 일체 유무의 제법에 의지하여 머물지 아니하면 중생의 무리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求一切有無諸法하면 是衆生數不依住一切有無諸法하면 是名不入衆生數이니라.

 

다만 지금 일체 유무의 제법을 모두 보지도 듣지도 아니하며 이렇게 경을 가지면 비로소 수행의 자격 []이 있다.

祗如今但是一切有無諸法都不見不聞하야 與麽持經하면 始有修行分이니라.

 

다만 지금 일체 유무의 제법을 떠나고 또 떠났다는 데서도 떠나 삼구(三句)밖을 뛰쳐 나가면 자연히 부처와 더불어 차이가 없다.

祗如今但離一切有無諸法하야 亦離於離 透過三句外하면 自然與佛無差니라.

 

다만 일체 유무의 모든 경계에 구르지 아니하니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이 일체 유무 경계의 법을 능히 비추어 부수니 곧 금강(金剛)이다.

但不被一切有無諸境轉이니 是故導師 能照破一切有無境法是金剛이니라.

 

일체 유무 등의 법을 떠나며 또 떠남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또 머물지 아니한다는 지해도 없으면 이 사람은 모든 죄의 때가 쌓일 수 없다.

離一切有無等法하야 亦不住於離하며 亦無不住知解하면 此人一切罪垢 不能相累니라.

 

옳음과 그릇됨, 고움과 추함, 옳은 이치와 그릇된 이치의 모든 지견(知見)을 몽땅 버려서 얽히어 묶이지 아니하여 곳곳에서 자재하면 초발심 보살이 곧바로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고 한다.

是非好挑是理非理 諸知見總盡하야 不被繫縛하야 處處有在하면 名爲初發心菩薩便登佛地니라.

 

다만 일체 유무의 모든 경계에 혹란되지 아니하며 또 혹란되지 아니함에도 의지하고 머물지 아니하며 또 의지하여 머물지 아니한다는 지해도 없으면 이것이 널리 배움이며 부지런히 생각함이며 널리 유포하는 것이다.

但不被一切有無諸境惑亂하야 亦不依住不惑亂하며 亦無不依住知解하면 是名遍學이며 是名勤護念이며 是名廣流布니라.

 

일체 유무 경계의 법에 탐착하고 물들어 일체 유무의 경계에 혹란되면 자기의 마음은 마왕이며 조용(照用)은 마군이 백성에 속한다.

貪染一切有無境法해야 被一切有無境惑亂하면 自心是魔王이요 照用屬魔民이니라.

 

이와 같이 교외별전을 표방하는 선종에 있어서도 초군정안(超群正眼)을 가졌다는 백장스님이 항상 유무를 여의는 중도법문을 했으니 불법의 근본이 중도에 있음을 증명하는 천고만고의 산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선을 해서 부처님 마음을 증득하는 것이고 부처님 마음이라는 것은 중도를 정등각하는 것이지 불법 밖의 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뭣고하는 것을 깨쳐서 중도를 정등각해야 합니다. 말로만 중도 중도하지 말고 실지로 중도를 깨쳐야 합니다.

 

4)대주스님

 

마조스님의 84명 큰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 났다고 하는 분이 대주 혜해(大珠慧海)스님입니다. 스님의 저술로서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門)이라는 책이 전해지고 있는데 선문에서 표본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마조스님이 이 책을 보고 법을 자유자재하고 융통자재하게 구술했다고 크게 칭찬하고 대주(大珠)’, 즉 큰 구슬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이 근거가 되어 스님을 대주(大珠)’스님이라고 했습니다. 전등록에도 대주스님의 법문이 가장 많이 실려 있는데 선문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전체를 상세히 설명할 수 없으므로 우선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門)에서 몇 가지 법문을 인용하여 대주스님의 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것이 중도(中道)입니까.”

중간이 없으며 또 양변이 없는 것이 중도이니라.”

어떤 것이 양변입니까.”

저 마음이 있고 이 마음이 있음이 곧 양변이다. 밖으로 소리와 색에 묶이는 것을 저 마음이라 하고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이 마음이라고 한다. 밖으로 색()에 물들지 아니하면 저 마음이 없다고 하고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이 마음이 없다고 하는데 이것이 양변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이미 양변이 없거니 중간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얻은 것을 중도(中道)라 하며 참 여래도(如來道)라 한다. 여래도란 일체 깨친 사람의 해탈경계이니 경()에 이르되 허공이 가운데도 없고 가도 없으니 모든 부처님 몸도 또한 그렇다하였다. 그러므로 일체 색이 공()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곳에 무심함이며 모든 곳에 무심함이란, 즉 일체 색의 성품이 공함이니 두 가지 뜻이 다르지 아니하다. 색이 공했다고 하며 또 색에 법()이 없다고 한다. 만약 네가 모든 곳에 무심함을 떠나서 보리해탈열반적멸선정견성을 얻으려고 한다면 틀린 것이다.”

, 云何是中道答 無中間하며 亦無二邊卽中道也니라.

, 云何是二邊答 爲有彼心하고 爲有此心卽是二邊이니 外縛聲色名爲彼心이요 內起妄念名爲此心이라 若於外不染色卽名無彼心이요 內不生妄念是名無此心이니 此非二邊也心旣無二邊이어니 中亦何有哉但得如是者卽名中道眞如來道니라 如來道者卽一切覺人解脫也하매 虛空無中邊하니 諸佛身亦然이라 하니라. 하니 一切色空者卽一切處無心也一切處無心者卽一切色性空이니 二義無別하야 亦名色空이며 亦名色無法也汝若離一切處無心하고 得菩提解脫涅槃寂滅禪定見性者非也. [頓悟入道要門]

 

중도란 중간도 없고 또 양변이 없는 것입니다. 양변을 여의면 중간이 설 수 없습니다. 이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무엇을 양변이라 하는가. 피차심(彼此心)이 있는 것이 양변이니 예를 들면 주관과 객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밖으로 성색 경계에 속박되는 것을 저 마음[彼心]이라 하고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이 마음[此心]이라 하는데 밖으로 성색에 물들지 아니하고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 즉 인(人境)을 함께 없애면 이것이 양변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즉 심()이고, ()이 즉 경()이기 때문에 가운데 또한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이렇게 된 사람을 중도를 깨친 사람이라 하고 이를 여래도라 하고 조사도라고 합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몸이고 불도를 증등각한 심지(心地)입니다. 그러므로 일체 색()이 빈 사람은 일체 심()도 공합니다. 결국 피심과 차심이 없는 동시에 일체색이 공이 되고 일체법이 공이 되며 따라서 색공(色空)인 동시에 법공(法空)입니다. 이것이 일체처에 무심(無心)입니다. 유심무심을 다 떠났으니 진무심(眞無心)이라 합니다. 즉 중도무심입니다.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참 몸을 볼 수 있는가. 무를 보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참 몸을 보는 것입니다. 왜 유무를 보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참 몸을 보는 것인가. 유는 무를 원인으로 하여 설 수 있고 무는 유에 의해서 나타납니다. 본래 유를 세우지 아니하면 무도 또한 있을 수 없고 이미 무가 있을 수 없으면 유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유와 무가 서로 의지해서 있으니 이것은 이미 의지해서 있으므로 모두 생멸입니다. 다만 양 견해를 떠나면 곧 부처님의 참 몸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경에서 부처님이 말하기를 유무를 보지 않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 유무를 보지 않는 것인가? 자성청정심을 증득한 것을 유()라고 하고 자성청정심을 얻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유()를 보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자성청정심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무()를 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능엄경에는 이러한 견해를 세우면 무명이요, 이런 견해를 보지 않으면 열반이고 해탈이라고 합니다. 즉 유견무견을 떠난 중도를 해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오문(頓悟門)은 무념(無念)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무념이란 사념(邪念)이 없다는 것이지 정념(正念)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념(邪念)이란 유()를 생각하고 무()를 생각하는 것이고 유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정념(正念)입니다. ()()을 생각하는 것이 사념이고 선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정념이요, , , , , 증을 생각하는 것은 사념이고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정념이라고 하는데 정념이란 곧 중도입니다. 정념이란 보리만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즉 자성청정만 생각하되 보리도 가설로 세운 것입니다. 실지로는 자성청정을 깨쳐서 양변을 여읜 것이 쌍차쌍조가 될 때를 말하는데 이는 부처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이심전심(以心傳心) 할 뿐입니다. 그런데 표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가설로 보리라고 세운 것입니다.

이는 어떻게 얻을 수 없으므로 유념이 아니고 진념(眞念)입니다. 이와 같이 양변이 없고 따라서 중간도 설 수 없는 것이 중도(中道)입니다. 허공이 가운데도 없고 가도 찾아볼 수 없듯이 양변을 찾아볼 수 없는 동시에 가운데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부처님이나 조사들이 정등각한 심지(心地)입니다. 그러므로 양변을 떠날 것 같으면 부처의 참 몸을 보는 것이요, 중도를 내놓고는 부처님의 참 몸이 없는 것입니다. 표현은 이리도 하고 저리도 하지만 모두 다 중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5)교외별전

 

불교에 있어서 이론은 교()라 하고 실천은 선()이라 하는데, 특히 선을 교외별전(敎外別傳), 즉 교() 밖에 따로 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예전 조사스님들의 말씀을 살펴볼까 합니다.

 

오직 일승도만 있고 나머지 둘은 참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끝내 일심법을 나타내지 못한 까닭에 가섭을 불러 법좌를 같이하여 일심을 따로 전하였으니 말을 떠난 법이다. 이 한 갈래 법을 따로 행하게 하니 만약 일심법을 능히 깨치는 사람은 곧바로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

唯有一乘道하야 餘二則非眞이나 然終未能顯一心法故召迦葉同法座하야 別付一心하야 離言說法하야 此一枝法令別行하니 若能契悟者便至佛地矣니라 [傳心法要;大正藏 48, p.382 ]

 

원교 일승도(一乘道)는 교리로서는 가장 발달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언어문자의 이론에 그칠 뿐, 일심을 바로 깨치지는 못합니다. 일승법을 설명만 해서는 소용없는 것이니 일심을 바로 깨치지 못하면 공리공론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가섭에게 말을 떠나서 설법하여 일심(一心)을 따로 전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교()와 선()을 구분하여 말할 때 교는 이언전언(以言傳言), 즉 말로써 말을 전하는 것이고, 선은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것이니 마음과 말이 다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을 떠나 설법한다[離言說法]’는 것이 곧 이심전심인 것입니다.

일심법을 깨친 사람은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고 한 것은 누구든지 일심법을 바로 깨칠 것 같으면 구경각을 성취하여 부처님과 같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가섭에게 전하고 가섭존자가 아난에게 전한 것은 구경각을 전한 것이지 다른 무슨 중간법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동시에 삽삼조사(卅三祖師)나 그 밑으로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정통법맥을 이은 스님들도 모두 구경각을 성취한 사람들이지 무슨 중간을 성취한 스님들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일심법을 말하고 또 교외별전을 말할 때는 구경각인 부처님 지위를 말하는 것이지 무슨 중간을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니만치 이 점 특별히 유의해야 됩니다. 혹 어떤 사람이, 아무리 그렇지만 조사스님들이 어찌 부처님이 가섭에게 전한 것과 같을 수 있나 하고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이심전심해서 삽삼조사로 계계승승해서 정법이 전해 내려온 것을 근본적으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섭을 불러 법좌를 같이 했다는 말에 대해서 조금 설명하고자 합니다. 선종(禪宗)의 대표적 책인 전등록(傳燈錄)이나 선문염송(禪門拈頌)같은 것을 보면 부처님과 가섭존자가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법상에 같이 앉았다고 되어 있으며 이것이 소위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伴座)’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경에 볼 것 같으면 부처님이 가섭존자를 불러 법상에 나누어 같이 앉자고 하니 가섭존자가 사양하여 부처님과 같이 앉을 수 없습니다고 하였고, 또 부처님께서 내 대신 설법하라고 하여도 사양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가섭존자가 부처님과 같이 앉았느냐 안 앉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일심법을 전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의 모든 조사가 오직 일심법만을 전하고 다시 두법이 없어 마음이 부처임을 가리키니 등각묘각 두 지위를 단박에 뛰어넘고 결정코 제 이념에 흘러들어서는 안된다.

從上祖師唯傳一心法이요 更無二法하야 指心是佛하니 頓超等妙二覺之表하야 決定不流第二念이니라 [宛陵錄]

 

예전부터 조사스님들이 마음으로써 마음으로 전해 내려온 것은 일심법, 즉 구경법을 전했지 딴 법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구경법, 일심법에 있어서는 등각이니 묘각이니 하는 이름도 붙일 수 없는 것이며 하물며 십지(十地) 등은 말할 것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조사스님들이 전해 내려온 일심법은 부처와 부처, 조사와 조사가 스스로 각각 전할 뿐이지 그 이외의 깨치지 못한 사람은 그 경계를 모릅니다. 그런데 묘각이 즉 구경각인데 어째서 일심법이 묘각의 위에 있다 하여 묘각을 부인하느냐 하는 의심이 들지도 모르겠으나, 이것은 예전 조사스님들이 마음으로써 마음으로 전한 것이 최후 구경이라는 것을 강력히 표현하기 위해서 한 것이지 딴 뜻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가섭에게 전하고 가섭이 아난에게 전하고 그 밑에 내려와서 삽삼조사에게 전하고 또 오가칠종에 전한 근본은 모두 다 등각묘각의 지위에 있는 구경의 불지(佛地)입니다. 그리되면 결정코 제이념에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일승교에서 설명하는 바는 사사무애하여 법계원융이니 이 사사무애법계는 바야흐로 한 맛으로 돌아가니 이 한 맛의 자취까지를 털어버려야만 조사가 보이신 일심이 나타난다.

一乘敎中所說者事事無碍하야 法界圓融이니 此事事無碍法界-方歸一味拂此一味之跡하야사 方現祖師所示一心이니라 [順德]

 

일승교에서 말하는 구경법은 사사무애, 즉 한 맛[一味]인데 이 사사무애의 알음알이가 있을 것 같으면 일심(一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선종의 조사들이 이심전심한 것은 사사무애의 자취도 쓸어버리고 그 자취가 조금도 미치지 못한 구경의 일심을 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무애라든지 일미라든지 이것은 결국 이론에 그치고 말지만 일심(一心)을 깨치는 것은 구경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불단 가운데 하나의 해인삼매여

삼종세간이 모두 포함되었네

다함없는 성품바다 한 맛을 머금으니

한 맛의 모양도 없음이 나의 선이다.

十佛壇中一海印이여

三種世間總在焉이라

無盡性海含一味하니

一味相沈하야사 是我禪이로다 [眞淨]

 

이 말은 앞의 한 맛의 자취를 다 털어버려야만 조사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진법계연기 전체가 자취를 감춰서만 비로소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알 수 있고 선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승도로서는 일심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이것이 교()와 선()의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밥을 먹고 살지만 그 밥맛을 팔만대장경 이상으로 기록하고 설명해 놓는다 해도 실지 밥맛은 거기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밥 한 숟가락을 딱 떠먹으면 찰나간에 그 밥맛을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는 밥맛을 얘기하는 것이고 선()은 밥을 한 숟갈 떠먹는 것과 같습니다.

 

원교에는 무애연기의 견해가 있고 돈교엔 이름을 떠나고 모양을 끊는 견해가 있으나 선종은 더듬어 찾을 수 없고 고삐를 잡을 수 없다.

圓敎有無碍演起之解하고 頓敎有離名絶相之解하나 禪宗無摸索沒巴鼻니라 [淸虛]

 

원교나 돈교 위에 따로 선종(禪宗)이 있다.

圓頓之上別有一宗하니라 [華嚴疏淸凉]

 

한 스님이 묻기를 무엇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하니 조주스님이 뜰 앞의 잣나무니라고 대답한 이 한마디는 용궁해장에는 아직 없는 것이다.

僧問如何是祖師西來意趙州云 庭前栢樹子라 하니 此一句龍宮海藏所未有底니라 [寂踵]

 

적음(寂音)존자는 홍각범(洪覺範)을 말하는데 그는 송나라 사람으로 총명과 지혜가 뛰어나고 선()과 교()를 회통한 유명한 스님입니다. 화엄경을 저 용궁에서 가져왔다고 용궁해장(龍宮海藏)’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화엄경을 다 뒤져보아도 뜰 앞의 잣나무라는 도리는 없다는 말이니 결국 일승 원교의 도리로서도 뜰 앞의 잣나무라는 도리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교 밖에 따로 전했다는 뜻은 하늘 밖을 뛰어나니 오교(五敎)의 학자들도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한 선종의 근기가 낮은 사람도 망연히 알지 못한다.

敎外別傳之旨-逈出靑霄之外하야 非徒五敎學者難信이요 亦乃當宗下根茫然不識이니라 [看話決疑普照]

 

이처럼 교외별전이라는 것이 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여 비밀한 뜻을 전하여 주는 곳은 지금 편지나 종이로 논의할 바가 아니다.

以心傳心하야 密意傳授之處非今簡牘所論이니라 [淸凉圭峯]

 

밀의(密意), 비밀한 뜻을 전하여 준다하니 비밀히 무엇을 숨겨서 전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뜻이 하도 깊어서 전하여 주는 사람과 전하여 받는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공개해 놓고 전하여도 눈 먼 사람은 모른다는 뜻입니다.

 

마음으로써 마음으로 전한다[以心傳心] 함은 달마대사의 말씀이다. 혜가스님이 이 법은 어떤 문자와 교전으로 배우고 익힙니까?” 하고 물으니 달마대사가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며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以心傳心者是達磨大師之言也因可和尙問此法有何文字敎冶習學大師答云 我法以心傳心하야 不立文字라 하니라 [都序]

 

달마스님이 처음으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다[以心傳心]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설명할 것은 선종의 소의경전(所依經冶)으로 달마스님이 능가경(楞伽經)을 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것은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는 틀리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중국 선종 사서(史書) 가운데 오래된 것으로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라는 책이 있고, 거기에서 달마스님이 중국에 와서 자기의 법을 전하는 데 있어서 문자법사들이 자기를 믿지않기 때문에 능가경을 전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별전(別傳) 소식을 믿지 않기 때문에 능가경을 믿음으로 삼은 것이며, 방편으로 한 것이지 근본내용은 문자를 세우지 않는 데있습니다. 만약 능가경이 근본경전이 되었다면 달마스님 이후 오가칠종(五家七宗)에서 능가경을 근본으로 삼아야 되는데 혜가스님 이후에는 능가경을 별로 중요시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不立文字],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것[以心傳心]이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오조 홍인대사가 육조 혜능에게 말씀하였다.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은 하나의 큰 일인 까닭에 근기의 크고 적음을 따라서 중생들을 인도하여 마침내 십지삼현돈점 등의 뜻이 있으니 교문(敎門)이라 한다. 그러나 가장 미묘하고 비밀스럽고 원명하고 진실한 정법안장으로써 대가섭존자에게 부촉하여 거듭거듭 서로 전해주어 달마대사에 이르러 중국에 오고 혜가대사를 얻어 대를 이어서 나에게 이르렀으니 지금 너에게 부촉하노니 단절치 않게 하라.’

五祖忍告六祖能曰 諸佛出世以一大事故隨機大小而引導之하야 遂有十地三賢頓漸等旨하야 以爲敎門이라 이나 以無上微妙秘密圓明眞實正法眼藏으로 付于大迦葉하야 展轉相傳授하야 至達磨하야 屆于此土하니 得可大師하야 承襲以至于吾令付於汝하노니 無令斷絶케하라 [傳燈錄]

 

오조스님이 육조스님에게 전하는 것은 삼현(三賢)십지(十地)돈점(頓漸)대소승(大小乘)의 교문(敎門)이 아니고 분명히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 별전소식인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너에게 전하는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교리를 하는 사람은 오직 점차의 뜻을 드러내고 참선하는 사람은 오직 순식간에 깨침을 펴니 선과 교가 서로 만남은 북쪽 끝과 남쪽 끝의 간격이 있다.

講者備彰漸義하고 禪者偏播頓宗하니 禪講相逢胡越之隔이라 [都序]

 

경에서 삼아승지겁 동안을 점차로 닦아서 비로소 보리를 깨친다고 하고, 선종은 찰나간에 문득 정각을 이룬다고 한다. 경은 부처님 말씀이고 선은 스님네 말이니 부처님을 어기고 스님네를 존중하는 것은 극히 의심스럽고 옳은 것이 아니다.

云漸修祗劫하야사 方證菩提라 하고 禪稱刹那便成正覺이라 하니 經是佛語禪是僧言이니 違佛遵僧切疑未可니라 [都序]

 

이것은 규봉스님이 점문(漸門)으로 가야 하고 돈종(頓宗)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점차문만 말씀하시고 순식간에 깨치는 돈문은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문경에서 말하였다. ‘바깥 모양에서 구하면 비록 몇 겁을 지내도 끝내 이루지 못한다. 안으로 마음을 깨쳐 보면 한 생각에 보리를 증득한다.’

禪門經云 於外相求하면 雖經劫數終不能成이요 於內覺觀하면 如一念頃卽證菩提라하니라 [頓悟要門]

 

이와 같이 부처님이 오로지 점차문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돈문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흔히들 육도만행(六道萬行)을 닦아서 성불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모두 밖으로 모양을 구하는 일입니다. 연수(延困)스님은 그의 보살계 서문에서 육도만행을 닦아서 성불하려는 것은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깨치지 않고 밖에서 무엇을 구하면 성불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말이고, ()이란 시간이 극히 짧게 걸린다는 말이니, 안으로 참선하는 화두를 부지런히 하면 시간이 적게 걸리고 밖으로 모양을 구하여, 염불하든지 주력하든지 경만 보든지 하면 삼아승지겁이 벌어져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노력 같은 시간일진댄 어떻게 해서든지 빠른 길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힘센 장사가 이마의 구슬을 잃어버리고 밖으로 찾아서 시방을 두루 다녀도 마침내 찾지 못하지만, 지혜있는 사람이 그것을 가르쳐 주어 본래 구슬이 여전함을 스스로 보는 것과 같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자기의 본 마음을 잃어버려 자기가 부처임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바깥에서 찾으려 모든 노력을 다하고 차제(次第)로 증득함에 의지하여 역겁 동안 부지런히 구하여도 영원히 도를 이루지 못하니 곧 바로 무심함만 같지 못하다. 결정코 일체법이 본래 있는 것이 없으며 본래 얻을 것이 없고 의지할 것도 없고 머물 것도 없고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음을 알아 망념이 움직이지 않으면 문득 보리를 증득한다. 또 도를 성취한 때엔 다만 본 마음의 부처를 증득하는 것이요, 역겁의 노력은 모두 헛고생이니 흡사히 힘센 장사가 구슬을 얻는 것은 다만 본래 이마의 구슬을 얻은 것이요, 밖에서 구해 찾은 노력과는 관계 없는 것과 같다.

如力士迷額內珠하야 向外求覓하야 周行十方호대 終不能得이러니 智者指之하야 當時自見本珠如故니라 學道人遂自本心하야 不認爲佛하고 遂向外求覓하야 起功用行하야 依次第證하야 歷劫勤求호대 永不成道일새 不如當下無心이니라 決定知一切法亦無所有하며 本無所得하야 無依無住하며 無能無所하야 不動妄念하고 便證菩提니라 及證道時祗證本心佛이요 歷劫功用並是虛修如力士得珠時祗得本額珠不關向外求覓之力이니라 [傳心法要;大正藏, 48, p.380 ]

 

우리가 마음을 깨치면 부처인데 마음 밖에서 구해 보았자 부처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성불이 목적이고 부처란 마음 속에 있으니 내 마음 속 부처를 찾아야지, 마음 밖의 부처를 찾아서 시방세계를 돌아다닌들 헛고생만 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마에 본래 있는 구슬을 찾듯이 우리도 내 마음 속에 있는 부처를 찾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시방여래의 십이부 경의 청정하고 묘한 이치를 항하수 모래알 같이 기억하여도 다만 희론만 더할 뿐이다. 네가 비록 결정코 명료하게 인연과 자연을 설명하므로 사람들이 네가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칭찬할지라도, 여러 겁 동안 쌓아온 다문의 훈습으로는 마등가의 난을 면할 수 없었느니라. 이런 까닭에 아난아, 네가 비록 역겁 동안 여래의 비밀스럽고 미묘한 법문을 기억하더라도 하루 동안 무루업을 닦아서 세간의 미워하고 사랑하는 두 가지 고통을 멀리 벗어남만 같지 못하느니라.”

佛告阿難호대雖憶持十方如來十二部經淸淨妙理如恒河沙하나 只益戱論이니라 汝雖談說因緣自然하야 決定明了하야 人間稱汝多聞第一이나 以此積劫多聞熏習으로 不能免離摩登伽難하니라是故阿難汝雖歷劫憶持如來秘密妙嚴하야도 不如一日修無漏業하야 遠離世間憎愛二苦니라 [首磅嚴經;大正藏 19, p.121 ]

 

억천만겁토록 팔만대장경을 환히 외운다 해도 잠깐 동안 선정을 익히는 것만 못하다는 부처님의 간절한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살펴보았는데 교 밖[敎外]이라 한다고 해서 불교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에만 그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을 바로 말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봐서는 아난존자같이 그렇게 총명이 절륜하고 박학다문하며 부처님 법문을 한 자 한 구도 빼지않고 다 외우는 사람이 없지만 결국은 부처님 당시에도 마등가난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돌아가신 뒤에 경전(經冶)을 결집할 때도 가섭존자에게 쫓겨난 후 비사리성으로 가서 깨쳐 다시 와서 결집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한편으로 보면 아난존자가 대화현보살로서 일종의 연극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앞으로 누구든지 언어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참으로 바로 깨쳐야 한다는 것을 모범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아난존자가 그런 연극을 벌였다고 볼 수 있지마는 나는 연극이 아니고 사실이라고 봅니다. 아난존자 아니라 아난존자 보다 몇 백배나 나은 총명을 가진 사람이라도 실지 마음을 깨치지 못하면 불법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불법이란 오직 마음을 깨치는 데 있지, 언어문자를 익히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대중들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견성의 본질

 

1)견성성불(見性成佛)

 

불교에서는 마음을 깨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깨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을 표방하는 선종에서는 이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합니다. 곧 자성을 보아[見性] 부처를 이룬다[成佛]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견성이라는 것은 중생의 자성, 즉 불성(佛性)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견성을 한 후 성불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선종에서 말하는 견성성불이 아닙니다. 그리고 열반경에서는 중도(中道)를 불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견성한다는 것은 중도를 바로 본다는 것이 되는데 이것은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 나는 중도(中道)를 정등각했다는 그 말씀과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성불하려고 하면 자성을 바로 보아야 되는데 자성이란 곧 중도이므로 중도를 바로 깨쳐야 견성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서 자성을 보아 스스로 부처님 도를 이룬다.

識心見性하야 自成佛道이니라 [六祖壇經]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면 견성을 종취로 하여 법을 설했습니다. 그 중심사상은 마음을 알아서 성품을 본다[識心見性]는 것인데 마음을 안다는 것이 견성한다는 것이고 견성한다는 것은 마음을 안다는 것이니 마음 다르게 성품이 없고 성품 다르게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진여심(眞如心)을 말하고 성품이란 불성(佛性)을 말합니다. 또 진여심이란 유무를 여읜 중도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안다든지 성품을 본다든지 하는 것은 바로 유무를 여읜 중도를 아는 것이며 중도를 본 사람이 부처님 도를 성취한 사람입니다.

 

즉시에 확철대오하여 돌이켜 본래 마음을 얻는다.

卽時豁然하야 還得本心이니라 [六祖壇經]

 

누구나 공부를 한다거나 법문을 듣는다든가 무슨 기연을 만나 어떤 기회에 즉시로 크게 깨친다는 것은 자기의 본래 마음을 본다는 것이지 딴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다같이 가지고 있는 본래 마음, 즉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本有佛性]을 얻는 것이지 깨쳤다고 해서 딴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에게 있는 물건을 도로 찾았을 뿐입니다. 육조스님도 내가 5조 홍인화상 밑에서 한번 듣고 말끝에 크게 깨쳐서 진여본성을 찰나간에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진여본성을 찰나간에 보았다고 하였는데 찰나간[]이란 시간 간격을 두지 않는 눈 깜짝할 사이를 말합니다.

그리고 견성하여 대지혜의 진여대용이 현전되는 것을 반야삼매에 든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요,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바로 반야삼매이고 무념이다. 무념법을 깨치면 만법을 두루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 사람은 모든 부처님 경계를 보고, 무념법을 깨친 사람은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

若識本心하면 卽本解脫이요 若得解脫하면 卽是般若三昧이고 卽是無念어니라悟無念法하면 萬法盡通이요 悟無念法者見諸佛境界悟無念法者至佛地位니라 [六祖壇經]

 

여기서 말하는 무념(無念)은 제8아뢰야의 망념까지도 다 떨어진 구경의 진여무념입니다. 따라서 견성이란 해탈이라고도 하고 반야삼매라고도 하고 무념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성불(成佛)을 말하는 것입니다.

견성을 하면 부처님 경계를 볼 수 있는 것이고 부처님 지위에 이른 것이니 결국은 성불이 견성이고 견성이 성불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견성하면 이것이 바로 성불인 것입니다. 견성을 해서 그 다음에 성불을 한다는 그런 견해를 가지고 불교라고 주장한다든가 선종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불교를 팔아먹는 대도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즈음 한국 불교계에 이러한 견해가 많이 유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니 시정되어야 합니다.

 

성문은 부처님 마음을 알지 못하니 공정(空定)에 머물러 있다. 모든 보살은 공에 빠지고 고요함에 머물러서 불성을 보지 못한다. 상근기의 중생은 지위를 거치지 않고 찰나간에 본성을 깨친다.

聲聞不知聖心이니 住於空定이요 諸菩薩沈空滯寂하야 不見佛性이요 上根衆生不歷地位하고 頓悟本性이니라 [馬祖語錄]

 

견성이 성불임을 강조하는 마조스님의 말씀입니다.

성문연각이나 보살들이 공()에 빠지고 고요함에 머물러 있으니[沈空滯寂], 즉 제8아라야 무기식(無記識)에 머물러 있으니 이것은 견성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직 상근(上根)중생이 삼현십지를 뛰어 넘어 자기 본성을 보게 되니 이것이 성불입니다.

침공체적(沈空滯寂)이란 멸진정(滅盡定)인 제8아뢰야의 지위를 말합니다. 흔히 성문승의 멸진정과 자재위보살 이상의 멸진정을 분리해서 보기도 하지만 능가경같은 데에서는 8지보살 이상이 깨친 멸진정과 성문연각이 깨친 멸진정이 제8아뢰야위라고 똑같이 보고 있습니다. 결국 양편이 다 침공체적이라는 큰 병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십지보살이 구름이 일고 비가 쏟아지듯 설법을 하여도 오히려 부처님에게 꾸중을 들으니 자성을 보는 것은 비단으로 가린 것과 같다.

十地聖人說法如雲如雨하야도 猶被佛呵호대 見性如隔羅縠이니라 [雲門無業, 傳燈錄 19]

 

아무리 얇은 비단이라도 그것으로 눈을 가리고 보면 정확히 앞을 보지 못합니다. 얇은 비단으로 보면 어렴풋이 무엇이 비치지 아니 하겠느냐고 말하는데 어름하게는 비칠지 모르지만 정확히 물건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십지보살이 견성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종문정전의 통칙입니다. 구경각, 즉 여래지만이 견성을 성취한 것입니다.

 

보살이 십지에 올랐다 하여도 불성을 밝게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하물며 성문연각이리오. 있는 바 불성은 이렇게 깊고 깊어 알아 보기 어려우나 오직 부처님만은 알 수 있느니라.

菩薩 位階十地하야도 尙不明了知見佛性이어니 何况聲聞緣覺이리요…… 所有佛性如是甚深 難得知見하야 唯佛能知니라 [涅槃經 8]

 

구경각을 성취해야 불성을 볼 수 있는 것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불성을 볼 수 없습니다. 십지보살도 견성이 아닙니다.

 

보살지가 다하고 방편이 원만구족하여 일념에 상응하여 망심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쳐 마음에 처음 모양이 없으면 미세망념을 멀리 벗어난 까닭에 마음의 성품을 보아서 마음이 상주하니 구경각이라 합니다.

如菩薩地盡하야 滿足方便하야 一念相應하야 覺心初起하야 心無初相하면 以遠離微細念故得見心性하야 心卽常住하나니 名究竟覺이니라 [大乘起信論]

 

십지보살이 수도(修道)의 방편을 원만구족하여 제8아뢰야 미세망념까지 완전히 벗어난 구경각을 성취하면 이것이 견성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견성이란 구경각으로서 제8아뢰야 미세망념까지도 떠나며 또 십지등각보살도 넘어서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명업상의 동념(動念)이 망념 가운데에서 가장 미세하므로 미세념이라 한다. 이 미세망념이 모두 없어져서 영원히 남은 자취가 없으므로 멀리 떠난다고 한다. 이 미세망념을 영영 떠난 때에는 정확히 부처님 지위에 머물게 된다.

業相動念念中最微細할새 名微細念이니 此相都盡하야 永無所餘故言遠離遠離之時正在佛地니라 [元曉賢首, 起信論疏]

 

무명업상이 영원히 다하여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서 다시 일어나는 움직임이 없는 까닭으로 마음의 성품을 본다고 한다. 마음이 항상 머물러서 다시 나아갈 바가 없으므로 구경각이라 한다.

無明永盡하야 歸一心源하야 更無起動故言得見心性이니 心卽常住하야 更無所進일새 名究竟覺이니라 [元曉, 賢首, 起信論疏]

 

구경각을 성취하고 난 뒤에는 더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십지등각은 아직도 구경각이 아니기 때문에 묘각을 성취해야 되지만 견성이란 구경각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견성이 구경각이고 구경각이 성불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선이나 교나 할 것 없이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그 예를 살펴보면 열반경에서는 십지보살은 견성을 하지 못했고 오직 부처님만이 견성하였다고 했고, 기신론에서도 구경각을 견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의 현수대사나 우리나라의 원효대사 같은 대논사들도 구경각이 견성이고 견성이 성불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선교를 망라한 불교의 정통사상은 견성이 곧 성불이고 성불이 곧 견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견성을 했다는 것은 진여본성을 깨쳤다는 말인데 진여본성이란 어떤 것인가? 진여본성이란 억지로 말하려고 하니까 진여(眞如)라 하는 것이지 말로서 세울 수 없습니다. 오직 스스로 증()해서 깨쳐야만 알지 깨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진여법계심지(心地)라고 말하기는 하나 이는 중생을 위한 방편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지 이름이 있다고 무슨 물건이 있는 듯이 알면 큰 오해가 됩니다. 말로서는 진여라고 하지만 뜻은 오직 깨쳐야 알지 말로서 표현할 수 없고 형용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그런 심오한 원리입니다.

마음의 성품인 근본자성은 항상 움직이지 아니하는 까닭에 불변(不變)이라 하고, 진여에 도달하지 못하면 마음이 상응하지 못합니다. 홀연히 생각이 일어남을 무명이라 하고 미세한 망념을 떠남을 들어간다고 하니 미세한 망념을 떠난 경계는 오직 깨달음으로써 상응한다고 합니다. 미세망념인 무명업상의 처음 일어나는 모양을 알았다고 말함은 곧 무념입니다. 그러나 망념의 구름이 덮여 있으면 진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열심히 수행하여 망념이 다 끊어지고 또 끊어졌다는 생각까지도 끊어져서 제8아뢰야 미세망념까지 다 끊어지면 무명업상이 처음 일어나는 모양을 알게 되니 이것이 진여를 깨친 것이며 무념을 성취한 것입니다.

무념(無念)을 성취한 사람은 심상(心相)의 생멸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멸이란 생멸(生滅)의 생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도(中道)의 생멸인 진여의 큰 작용[眞如大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멸 이대로가 무념이어서 일체가 공한 가운데에서 항사(恒沙)의 묘용(妙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멸의 생멸을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불의 지위를 과지(果地) 또는 과상(果上)이라고 하는데 대하여 부처님 도를 수행하는 지위를 인지(因地)라고 합니다. 십지등각까지도 인지(因地)라고 하며 부처님 지위만이 과지(果地)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마음을 깨치실 때에 제8아뢰야가 생기기 전 최초의 동상(動相)이 본래 깨끗함을 아시니 이런 까닭으로 무념(無念)이라 말한다.

如來覺心之時知初動相卽本來淨故이니 是故說言卽謂無念也니라 [元曉, 賢首起信論疏]

 

결국 자성을 깨친다고 하는 근본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제8아뢰야 무기무념도 아닌 진여무념을 깨친 것이 견성이고 성불입니다. 진여무념을 깨치기 전에는 견성이라 할 수 없고 성불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생멸심기멸심망상이 그대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견성성불했다고 한다면 되겠습니까.

불법에서 공인된 견성과 성불은 제8아뢰야 무기무념까지도 뽑아버린, 근본 미세념까지도 뽑아버린 무념이라야 견성이고 성불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혜능스님이 말끝에 일체만법이 자성을 떠나지 아니함을 크게 깨치고 5조 홍인대사에게 아뢰었다.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한 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는 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구족한 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는 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일체만법을 능히 내는 줄 알겠습니까.

홍인대사는 혜능스님이 본성을 깨친 것을 아시고 혜능스님에게 말씀하셨다. “본 마음을 알지 못하면 도를 배워도 이익이 없으며 본 마음을 알고 자기의 본성을 보면 이를 조어장부천인사부처라 한다.” 삼경에 법을 받으니 사람들이 다 알지 못하였다.

惠能言下大悟一切萬法不離自性하고 遂啓祖言호대 何期自性本自淸淨이며 何期自性本不生滅이며 何期自性本自具足이며 何期自性本無動搖何期自性能生萬法이리요 祖知悟本性하고 謂惠能曰不識本心하면 學道無益이요 若識本心見自本性하면 卽名丈夫天人師佛이라 하고 三更受法하니 人盡不知니라 [六祖壇經]

 

육조스님이 홍인대사의 말끝에 일체만법이 자성 속에서 건립(建立)되어 있어 일체 만법 이대로가 자성이고 자성 이대로가 일체만법임을 확철히 깨치고 감탄하였던 것입니다. 자성을 깨치기 전에는 자성이 본래 청정(淸淨)한 것을 몰랐는데 자성을 깨치고 나니 자성이 청정하더라는 놀라움과 감탄을 표현한 것입니다. 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허공도 삼십방을 맞아야 하는 청정이라는 것입니다. 허공이란 본래 깨끗해서 무슨 때가 있을까마는 이 깨끗한 허공도 삼십방을 맞아야 한다는 것은 청정한 허공이라고 할지라도 청정이라는 상이 붙어 있을 것 같으면 진정한 청정이 아니므로 허공도 삼십방을 맞는 구경 청정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를 자성이라 하는 것이며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이 견성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객진번뇌 번뇌망상이 왔다갔다하는 이런 경지를 어떻게 자성청정이니 견성이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체 망념이 다 떨어지면 자성청정이 안될 수 없으며 자성청정은 곧 무념인 것입니다. 청정한 자성을 깨치고 보면 자성이 본래 생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멸이 없다고 하니까 아무것도 없는 텅빈 것인가 하겠지만 텅 빈 것이 아니라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해 있다는 것입니다. 자성이 청정하고 생멸이 없다고 하니까 공한 것만 말하는 것 같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공한 가운데 무진묘용항사묘용이 원만히 구족했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업견(業見)으로 볼 때는 일체만법이 동요을 하고 있으나 자성을 깨친 정견(正見)으로 보면 진여대용이어서 일체만법이 구족해 있지만 추호의 동요도 없습니다. 참으로 자성이란 청정하고 생멸이 없고 일체가 구족하고 본래 동요가 없으며 일체만법이 건립되어 있는 것이라고 아는 것이 진여자성을 바로 깨친 것이지 조금이라도 치우치게 되면 자성을 깨치지 못한 동시에 변견에 떨어진 외도입니다. 자성을 깨치면 이 사람이 곧 조어장부이며 천인사이며 부처이며 세존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견성이란 성불, 즉 구경각의 성취를 말하는 것이지 십지등각삼현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종문하(祖宗門下)에서나 교가에서나 어느 대법사, 대논사들도 구경각의 성취를 견성이라고 했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구경각 아닌 것을 견성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외도입니다.

왜 내가 이렇게 강력하게 주장하느냐 하면 선종에 있어서든지 교가에 있어서든지 불교의 근본목표는 성불에 있는데 그 성불은 어디에 성립하느냐하면 견성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대개 견성이라는 내용을 잘 모르고 공부하다가 이 생각 저 생각이 조금 달라진 것 같으면 견성했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폐단은 지금 이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견성의 내용과 성불의 내용을 잘 모르는 데서 생기는 폐단입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든지 교학을 연구하든지 견성의 내용과 성불의 내용을 분명히 알고 정진해야 한다는 뜻에서 되풀이 하여 강조한 것입니다.

 

2)무념무심(無念無心)

 

견성을 또한 무념무심이라 하니 여기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나의 이 법문은 무념으로 으뜸을 삼는다.

만약 유념이 없으면 무념도 또한 서지 못합니다.

我此法門無念으로 爲宗하니라.

若無有念하면 無念亦不立이니라 [六祖壇經]

 

이 무념이란 제8 아뢰야 무기무념이 아니고 진여본성의 무념이니, 8 아뢰야 무기무념으로써는 진여대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유념이 없다는 것은 일체 망념이 다 떨어져서 제8 아뢰야 무기무념까지도 끊어짐을 말합니다. 십지등각의 대보살이 견성을 하지 못한 것은 마조스님 말씀과 같이 침공체적해 있기 때문입니다. 침공체적이란 내용으로 봐서는 무념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제6의식의 생멸무념이 완전히 떨어졌다 해도 제8 아뢰야 무기무념이 남아 있으며, 8 아뢰야 무기무념이 완전히 떨어진 데서만 진여무념 근본무념이 성립됩니다.

진여무심은 무주심(無住心), 즉 머물 수 없는 마음이어서, 여기는 부처도 머물 수 없고 조사도 머물 수 없고 진여무념이라고 이름할 수도 없으되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보고 차고 더운 것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직 증()해야 알지 증()하기 전에는 모릅니다. 무념을 으뜸()으로 삼는다 하니 말뚝같이 무엇을 세워놓고 으뜸()을 삼는다고 오해하기 쉬워서 그래서 무념도 세울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라 함은 무엇이 없음이며 념()이라 함은 무엇을 생각함인가? 무라 함은 상대의 두 가지 상[二相]이 없으며, 모든 진로(塵勞)의 망심이 없는 것이다. 념이라 함은 진여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진여는 곧 무념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다.

無者無何事念者念何物無者無二相이며 無諸塵勞之心이요 念者念眞如本性이니 眞如卽是無念之體卽是眞如之用이니라 [六祖壇經]

 

()라는 것은 차(:가리는 것), ()이라는 것은 조(:비치는 것)를 말합니다. 두 가지 상[二相]이 없다는 것은 양변을 떠난 중도를 뜻합니다. 무란 쌍차를 말하며, 양변을 떠나며 모든 진로의 망심이 없는 것이 진여입니다. 념이란 그 진여의 작용을 말하니 쌍조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심(無心)마음이 없다’, 또 무념(無念)생각이 없다고 해석하였는데 없다고만 하면 그것은 단견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없는[] 마음이요, 없는[] 생각입니다. 일체 진로가 없고 두 가지 상이 없는 생각[]이니 이 념은 진여의 작용이 됩니다. 즉 무념이라는 것은 양변이 떨어진 진여의 념이니, 이것이 실지로 쌍차쌍조한 중도정각입니다. 그러니 무념이 즉 중도이고 중도가 즉 무념이며, 진여가 즉 무념이며 무념이 즉 진여입니다. 다시 강조하면 무란 생멸의 양변을 완전히 떠나서 쌍차가 되고 념이란 쌍조가 되어 항사묘용인 진여대용이 여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법을 깨친 자는 즉시 무념이니 기억도 없고 집착도 없다.

悟此法者卽是無念이니 無憶無著이니라 [六祖壇經]

 

선종에서 표방하는 것은 견성성불인데 그 견성성불의 근본이 어디 있느냐 하면 무념을 성취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이 무념을 으뜸[]으로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념이라고 하여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단멸공(斷滅空)이 아니고 모든 두 가지 상이 다 떨어진 동시에 진여의 항사묘용이 거기서 일어나는 무념이라는 것입니다.

 

용시비구가 중한 계를 범하였으나 무생을 깨쳐서 벌써 성불하여 지금까지 있느니라.

勇施犯重하나 悟無生하야 早時成佛하야 于今在니라 [證道歌]

 

무생(無生)이 성불이고 성불이 무생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무생(無生)과 무념(無念)이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같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것입니다.

 

자기의 본성을 깨치면 한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서 다시는 미혹하지 않는다. 해가 나올 때에 어둠과 합하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지혜의 해가 뜨면 번뇌의 어두움과는 같이 하지 아니하므로 마음과 경계를 함께 요달하여 망상이 나지 아니한다. 망상이 나지 아니하니 곧 무생법인이다. 본래 있는 것이 지금 있으니 수도와 좌선을 빌리지 않으니 닦지도 않고 좌선하지도 않는 것이 즉시 여래의 청정선이다.

悟自家本性하면 一悟永悟하야 不復更迷하나니 如日出時不合於冥이라 智慧日出하면 不與煩惱暗으로 了心及境界하야 妄想不生이니라 妄想不生卽是無生法忍이니 本有今有하야 不假修道坐禪이니 不修不坐卽是如來淸淨禪이니라 [馬祖語錄]

 

마조스님이 자성을 깨쳤다함은 한번 깨치면 영원히 깨친 것이어서 다시 미혹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것은 구경각을 성취한 것을 의미하며 참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는 것입니다. 무생법인을 성취하면 수도하고 좌선할 필요가 없이 언제든지 자유자재하게 활동할 뿐입니다.

무엇을 닦는다 하여, 닦을 것이 있는 사람이면 아직 병이 덜 나은 사람이니, 마조스님이 자성을 깨쳤다 하는 것은 병이 다 나아서 약이 필요없는 데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라 하며 부처님과 조사가 전해 내려온 조사선(祖師禪)이라 합니다. 그래서 육조스님 뿐 아니라 그 이후 고불고조(古佛古祖)가 전해 내려온 선이라 하든지 도라 하든지 법이라 하든지, 완전히 구경을 성취해서 다시 닦을 것이 없는 데서 자성을 깨쳤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 닦을 것이 있는 데서, 약을 아직 써야 하는 병이 있는 데서 자성을 깨쳤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절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무생(無生)을 깨치는 것을 묘각이라고 한다. 한 생각에 단박 초월하는 것이니 어찌 번거로운 논의가 있으리오.

悟無生名爲妙覺이니 一念頓超어니 豈在繁論이리오 [馬祖語錄]

 

무생(無生)이라는 것은 구경각을 말합니다. 한 생각 잠깐 사이에 삼현십지를 초월해서 구경각을 성취한 것이니만치 이런 저런 이론이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쓸 것이 없으면 성불한다.

無心可用하면 卽得成佛이니라 [馬祖語錄]

 

모든 집착과 머무름을 완전히 떠나 순수한 무심이 되어서 마음을 쓸 것이 없음을 성불이라 합니다.

 

무심이 부처이니라.

無心是佛이니라 [馬祖語錄]

 

마음이 즉 부처며, 무심이 즉 도이니, 마음이 일어나거나 생각에 움직임이 없어, 유무(有無)장단(長短)피아(彼我)능소(能所)등의 마음이 없으면 마음이 본래 부처요 부처가 본래 마음이니라.

卽心是佛이요 無心是道但無生心動念하야 有無長短彼我能所等心하면 心本是佛이요 佛本是心이니라 [宛陸錄]

 

, 소 등 양변을 다 여의면 순전한 무심이 되며 이것을 중도니, 부처니, 견성이니 합니다.

 

다만 바로 여기에서 무심하면 [진여자성의] 본체가 스스로 나타나서 마치 큰 해가 허공에 떠오르는 것과 같아서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다시 장애가 없느니라.

但直下無心하면 本體自現하야 如大日輪昇於虛空하야 徧照十方하야 更無障碍니라 [傳心法要]

 

무심이라는 것은 일체 마음이 없는 것이다. 여여(如如)의 체()가 안으로는 목석과 같아서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과 같아서 막힘이 없고 장애가 없으며, 능소도 없고 방소(方所)도 없으며, 모양도 없고 얻고 잃음도 없느니라.

無心者無一切心也如如之體內如木石하야 不動不搖하며 外如虛空하야 不塞不碍하야 無能所無方所하며 無相貌無得失이니라 [傳心法要]

 

무심의 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심을 얻으려면 어느 지위에서 어떻게 얻게 되는가.

 

어떤 사람은 법문을 듣고 한 생각 동안에 무심을 얻고 어떤 사람은 십신십주십행십회향에 이르러 마침내 무심을 얻습니다.한 생각 동안에 얻는 사람과 십지를 거쳐서 얻는 사람과는 공용(功用)이 같아서 다시 깊고 얕음이 없으니, 다만 겁()을 지나도록 공연히 심신만 수고롭게 할 뿐이다.

有聞法하고 一念便得無心者하며 有至十信十住十行十廻向 乃得無心者하나니一念而得與十地而得者功用恰齊하야 更無深淺이요 祗是歷劫枉受辛勤耳니라 [傳心法要]

 

누구든지 무심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바로 가는 길이 있으니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 않고 헛고생을 하지 않고 바로 깨치는 길로 가야하지 않겠느냐는 황벽스님의 말씀입니다.

 

망념이 나지 아니함이 선()이요 앉아서 본성을 보는 것이 정()이다. 본성이란 너의 무생심(無生心)이며 정이란 경계를 대함에 무심하여 팔풍(八風)에 움직이지 아니함이다. 만약 이렇게 정을 얻은 사람은 범부일지라도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

妄念不生爲禪이요 坐見本性爲定이니 本性者是汝無生心이라 定者對境無心하야 八風不能動하나니…… 若得如是定者雖是凡夫卽入佛位니라 [頓悟入道要門]

 

일체처에 무심이 즉 무념이니 무념을 얻었을 때에 자연히 해탈하느니라.

一切處無心卽是無念也得無念時自然解脫이니라 [頓悟入道要門]

 

일체처에 무심하면 즉 열반에 들어 무생법인을 깨치니 둘 아닌 법문 [不二法門]이라 하며 다툼없음이라 하며, 또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한다. 어떤 까닭이냐? 필경 청정하여 나와 남이 없는 까닭에 애증이 일어나지 아니하니 이것이 두 성품이 공함이며 무소견(無所見)이니 즉 진여의 얻음이 없는 말씀이다.

一切處無心하면 卽入涅槃하야 證無生法忍하나니 亦名不二法門이며 亦名無諍이며 亦名一行三昧니라 何以故畢竟淸淨하야 無我人故不起肯憎하야 是二性空이며 是無所見이니 卽是眞如無得之辯이니라 [頓悟入道要門]

 

무념을 얻은 사람은 자연히 모든 부처님 지견(知見)에 들어가니, 이런 법을 얻은 사람은 즉 불장(佛藏)이며, 법장(法藏)이라 한다.

得無念者自然得入諸佛知見이니 得如是者卽名佛藏이며 亦名法藏이니라 [頓悟入道要門]

 

마음이 일어난다 해도 가히 지각할 만한 최초의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최초의 모습을 안다 한 것은 무념을 말한다.

心起者無有初相可知 而言知初相者卽 謂無念이니라 [起信論]

 

부처님 지위가 무념이니라.

佛地無念이니라 [元曉疏, 賢首義記]

 

여래가 마음을 깨칠 때에 최초의 동상(動相)이 본래 깨끗함을 아니, 이런 까닭에 무념이라고 한다.

如來覺心之時知初動相本來淨이니 是故說言卽謂無念也니라 [元曉賢首疏]

 

제일의(第一義)를 세운다는 것은 오직 무여열반계(無餘涅槃界) 가운데를 말함이니 이것이 무심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이 계() 가운데에는 아뢰야식이 영원히 끊어졌기 때문이다.

第一義建立者謂唯無餘涅槃(佛地)界中이니 是無心地何以故於此界中阿賴耶識亦永滅故니라 [瑜伽論 一三]

 

제일의를 세운다는 것은 불교에 있어서 가장 구경도리(究竟道理)를 말합니다. 유식계통에 있어서는 무심을 무여열반이라 하고 정각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무생(無生)으로 생()을 삼고 머물지 아니함을 머무름으로 삼는다.

無生으로 爲生하고 無住爲住니라 [攝論 十]

 

부처님의 무심은 구경각을 성취한 구경 무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심이 도라고 말하지 말아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 관문이 사이해 있느니라.

莫道無心云是道하라 無心猶隔一重關이니라 [十玄詩]

 

이 무심이라는 것은 6식 경계와 7식 경계가 완전히 끊어진 칠지보살의 무상정(無相定)에서의 무심과 팔지보살 이상의 멸진정에서의 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멸진정의 무심도 제8아뢰야 무기식을 의지한 것이지 진여본성을 본 구경무심은 아니니, 8아뢰야 무기식을 완전히 벗어나야 참다운 무심이지 그 이전의 무심은 거짓 무심입니다.

 

3)오매일여(寤寐一如)

 

우리가 이제까지 좀 지루하지만 여러 조사스님네들의 말씀을 많이 인용해 보았습니다. 결국 견성성불이라는 데 있어서 진여무심 이것이 구경이라는 것을 다 알게 되었을 줄 믿습니다. 그러나 진여무심을 성취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으른 중생은 삼아승지겁이 걸리는 일이며 참말로 많은 노력이 실지로 필요합니다. 노력에 따라서 시간문제는 변동될 수 있지만 그래도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완전한 진여무심을 얻으려면 어떠한 난관이 하나 붙느냐 하면 자나깨나 한결같다[寤寐一如]라는 난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오매일여(寤寐一如)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소소영령한 마음의 아는 성품이 있어서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으며, 오온의 몸 속에서 주인이 된다고 말하니, 이렇게 하여 선지식이 되면 사람을 크게 속이는 것이다. 지금 내가 너에게 묻노니, 만약 소소영령함을 인정하여 너의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잠잘 때엔 또 소소영령함이 없느냐. 만약 잠잘 때에 소소영령함이 없으면 이것은 도적놈을 자기 자식으로 오인하는 것이니, 이것은 생사의 근본이며 망상의 연기이다.

有一般昭昭靈靈靈臺智性하야 能見能聞하야 向五蘊身田裏 作主宰하나니 恁麽爲善知識하면 大賺人이로다 我今向汝하노니 汝若認昭昭靈靈하야 爲汝眞實이면 爲甚麽하야 瞌睡時又不成昭昭靈靈若瞌睡時不是這箇喚作認賊爲子是生死根本이요 妄想緣起니라 [玄沙-傳燈錄]

 

이렇게 말씀한 현사(玄沙)스님은 설봉스님의 제자로서 선()에만 통달한 이가 아니라 경론 삼장에 회통한 분입니다. 선과 교를 막론하고 의심나는 것이거나 논란이 있으면 현사스님에게 와서 의견을 구하고 판정을 얻을만치 당대의 권위자였습니다. 그런 현사스님 말씀이 우리가 아무리 부처님 이상으로, 달마대사 이상으로 큰 법을 성취한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도 잠이 꽉 들어서 공부가 안되면 근본적으로 공부가 아닌 줄 아는데 표준이 있는 것이라고 전등록이나 어록의 여러 곳에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자기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지만 잠이 꽉 들어서 공부가 안될 때는 공부가 아닌 줄 알고 공부됐다는 생각을 아예 버려야 하는데 이것이 어렵습니다. 보통 공부해 가다 이상한 경계가 좀 나면, 이것이 견성이 아닌가 성불이 아닌가, 또는 내 공부가 좀 깊이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많이 일으키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공부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잠이 꽉 들어서도 공부가 되지 않거든 공부가 안된 줄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도적놈을 잘못 알아 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아서 손해만 봤지 이익은 없습니다.

 

박산스님이 평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망상연기의 사람이니 잠잘 때에 이미 주인이 되지 않는다면 생사가 닥쳐옴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한평생을 공연히 쓸데없이 보내니 다른 사람만 웃길 뿐 아니라 스스로도 웃길 뿐이다.”

評云此是弄糟魂漢이니 瞌睡時旣做不得主인댄 生死到來作麽生折合一生胡亂做去하니 豈但哄人이리요 亦自唭耳[博山-禪警語]

 

누구든지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잠이 꽉 들었을 때 공부가 안되면 이것은 생사의 근본 해결에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이 정도 공부를 가지고 아는 체 하다가는 저도 망하고 남도 망치는 것임을 알아서 일생을 공연히 쓸데없이 헛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담당 (문준)스님이 대혜에게 말하였다. “고상좌여, 네가 일시에 나의 선법을 이해하여 설법을 하라면 설법을 잘하고, 염고송고소참보설할 것 없이 네가 잘한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이 아직 있지 아니하다. 네가 성성(惺惺)히 생각할 때에는 문득 선이 있으나 겨우 잠들자마자 문득 없어지니 만약 이러할진대 어찌 생사를 대적하리오.”

대혜스님이 대답하였다. “참으로 이것이 저의 의심하는 바 입니다.”

湛堂謂大慧曰 果上座我這裏禪你一時理會得하야 敎你說也說得하며 敎你拈古 頌古小參普說你也做得하나 祗是有一件事未在하니라 你惺惺思量時便有禪호대 纔睡著하면 便無了하니 若如此인댄 如何敵得生死리요 果曰正是某疑處니이다 [宗門武庫]

 

대혜스님은 17세에 출가하여 19세에 어록을 보다가 깨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큰 스님들을 찾아뵙고 법담을 하며 물어보니 다 자기만 못한 것 같고 누구든지 그 말을 당하지 못하니 천하를 횡행하듯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정 극문(眞淨克文)선사의 제자인 담당 문준(湛堂文準)선사를 찾아 갔습니다. 그 당시 천하에 이름난 다섯 큰스님[五大師]이 계셨는데, 오조 법연선사 밑의 불안 청원(佛眼淸遠)불감 혜근(佛鑑慧懃)불과 극근(佛果克勤=圓悟)의 삼불(三佛)과 황룡 사심(黃龍死心)과 담당 문준(湛堂文準)선사입니다.

위의 글은 그 당시 선계에 있어서 비중 높은 담당선사가 대혜스님에게 타이르신 말씀입니다. 사실 보면 자기가 아무리 아는 체 하고 도도한 체 하여도 자기 양심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어서 대혜스님처럼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발심해서 철저하게 공부를 해야되지 자기가 공부아닌 줄 알면서도 남을 속이려 들면 이것은 참 곤란한 일입니다. 이것이 천하에 유명한 대혜스님의 공부과정이니 앞으로 자세히 설명할까 합니다. 그 당시 대혜스님의 생각에 천하 선지식이라는 분들이 소용없고 오직 담당선사 한 분만이 눈 밝은 사람입니다. 다른 스님들은 잠이 꽉 들면 선이 안되는 것을 지적하지 못했는데 담당스님 한 분만이 지적해서 자기의 잘못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평생을 시봉하고 여기서 공부를 성취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담당스님이 55세에 돌아가시게 되니 대혜스님이 낙담하여 여쭈되 지금 스님께서 돌아가시면 제가 누굴 의지해야 큰 일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담당스님이 서울에 원오선사라는 분이 있는데 내가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눈밝은 본분종사이니 그 스님을 찾아가면 네가 반드시 큰 일을 성취할 것이다고 유촉했습니다. 그래서 담당스님이 돌아가신 뒤 모든 뒷일을 다 처리하고, 원오스님을 찾아가면서 혼자 생각에 만약 원오스님이 딴 선지식과 마찬가지로 자기 공부의 병을 지적해 내지 못하고 나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 주는 기미만 보이면 나는 참선이란 말짱 거짓말이니 선이 없다는 논()이나 짓고 화엄경이나 한 부질 싸서 평생 경이나 읽고 말 것이다고 하면서 원오스님을 찾아 갔습니다. 그것도 얼른 가지 못하고 십년이나 넘는 세월을 지내고 찾아갔습니다. 만나보니 담당스님이 류가 아니었습니다. 이런저런 말을 붙여볼 도리가 없었으므로 원오스님의 지시를 받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대혜가 원오스님에게 물었다.

제가 잠이 들기 전에는 부처님이 칭찬한 바는 의지해서 그것을 행하고, 부처님이 꾸짖은 것은 감히 위반하여 범할 수 없습니다. 전부터 스님을 의지했던 바나 조금이나마 스스로 얻은 바를 깨어있을 때는 모두 다 수용할 수 있으나 선상에 앉아 반이나 깨어 있다가 조금 졸기 시작하면 주재를 할 수 없습니다. 꿈에 금보배를 보면 꿈 속에서 기쁨이 한이 없고 꿈에 모든 나쁜 경계를 보면 꿈 속에서 겁이 나고 벌벌 떨고 하니 스스로 얻은 생각컨대 이 몸이 아직 있어도 다만 꿈 속에서도 주인을 하지 못하니 하물며 지풍이 나누어 흩어지며 모든 괴로움이 불꽃같이 일어나면 어떻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이르러서는 바야흐로 바쁠 뿐입니다.”

원오스님이 손으로 가리키며 멈추고 멈추어라. 망상을 쉬고 망상을 쉬어라고 하시고 또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말하는 허다한 망상이 다 끊어질 때에 스스로 오매항일의 곳에 이를 것이니라.”

처음 듣고는 믿지 아니하고 매일 스스로 생각하였다. “자고 깨는 것이 분명히 두 쪽이니 어떻게 입을 크게 열어 선을 말하리오. 부처님이 말씀한 오매항일(寤寐恒一)이 거짓말이면 내가 이 병을 고칠 필요가 없거니와 부처님 말씀이 과연 사람을 속이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아직 밝지 못한 것이다.”

뒤에 훈풍이 스스로 남쪽에서 오는구나라는 법문을 듣고 홀연히 마음 가운데 막혀 있던 물건을 버려버렸으니 비로소 부처님의 말씀하신 바가 참 말씀이며 실재 말씀이며 여여한 말씀이며 거짓말이 아니며 속이는 말씀이 아니며,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대자비임을 알았으니, 몸을 가루로 내고 목숨을 바쳐도 부처님 은혜를 갚을 수 없다. 마음 가운데 걸리는 물건을 이미 없애니 바야흐로 꿈꿀 때가 문득 말할 때이고 말할 때가 문득 꿈꿀 때임을 알았으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오매항일을 바야흐로 스스로 알았다. 이런 도리는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일 수 없으며 나타내 보일 수 없는 것이니 마치 꿈속 경계 가운데서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과 같다.

大慧問圓悟曰如宗果未睡著時佛所讚者依而行之하고 佛所呵者不敢違犯하야 從所依師及自做工夫 零碎所得者惺惺時에는 都得受用이나 及乎上牀하야 半惺半覺己作主宰不得이니어다. 夢見得金寶則夢中歡喜無量하고 夢見諸惡境界 卽夢中怕怖惺恐하니 自念此身尙存하야도 只是睡著己作主宰不得이어니 况地水火風分散하야 衆苦熾然하면 如何得不被回換이리오 到這裏하야 方始著忙이니이다 但以手指曰 住住하야 休妄想休妄想하라 하고 又曰待汝說底許多妄想絶時汝自到寤寐恒一處也리다 初聞亦未之信하고 每日我自顧컨대 寤與寐 分明作兩段이어늘 如何敢大開口說禪이리요 除非佛說寤寐恒一 是妄語則我此病不須除어니와 佛語果不欺人인댄 乃是我自未了로다 後因聞熏風自南來하고 忽然去却碍膺之物하고는 方知黃面老子所說是眞語實語如語不誑語不妄語不欺人이요 眞大慈悲粉身沒命하야도 不可得報니라 碍膺之物旣除方知夢時便是寤時底寤時便是夢時底佛說寤寐恒一方始自知로다 這般道理拈出하며 呈似人不得 如夢中境界하야 取不得捨不得이니라 [大慧廣錄]

 

6식 경계의 기멸이 완전히 끊어지고 7식경계의 망상이 완전히 끊어져야만 꿈속이든지 잠잘 때든지 간에 오매일여가 되기 때문에 원오스님이 망상을 쉬고 망상을 쉬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났다 없어짐이 여전한 데서는 절대로 오매일여가 되질 않습니다. 분명히 자기가 오매일여가 안된 줄 알고 실지 공부가 아닌 줄 알면서도 이 병을 고치지 못하고 큰소리를 치고 돌아다니면서 심지어는 부처님 말씀이 옳으면 자기 병을 고치고 부처님 말씀이 거짓말이면 자기 병을 고칠 필요없다는 식으로까지 나오니만치 그처럼 지견병(知見病)은 고치기 어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원오스님 같은 큰 선지식을 만났기에 이 병을 고치고 마침내 오매일여가 되어 구경을 성취할 수 있었지 만약 그렇지 않았으면 이 병 고치기가 참 어려운 것입니다.

원오스님이 어느 날 상당하여 법문하시되, “운문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묻기를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몸이 나오신 곳입니까?’ 하니 운문스님이 동쪽 산이 물 위로 간다고 대답하셨다는 법문을 들려주고는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으니 나에게 누가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몸이 나오신 곳이냐고 물으면 다르게 대답하겠다고 하시고 훈풍이 스스로 남쪽에서 오니 전각에 서늘한 기운이 나는구나고 하시는 법문을 듣고 대혜스님이 마음 가운데 걸리는 물건이 없어지고 몽중일여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매일여에는 꿈꿀 때에도 한결같은 몽중일여(夢中一如)와 잠이 깊이 든 때의 숙면일여(熟眠一如)의 두 종류가 있는데 꿈꿀 때의 오매일여는 제6식경계의 영역으로 교가(敎家)의 칠지보살에 해당하고, 잠이 깊이 든 때의 오매일여는 제8아뢰야 무기식에 머무는 팔지 이상의 자제보살들과, 이 무기식까지 영원히 떠난 부처님 지위의 진여일여(眞如一如)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혜스님이 말한 바는 몽중일여입니다.

 

생각[想陰]이 다한 사람이란 이 사람은 평상시에 꿈이나 생각이 소멸하여 자나 깨나 항상 같아서 깨달음의 밝음[覺明]이 비고 고요하여 마치 푸른 하늘과 같아서 다시는 거칠고 무거운 육식망상의 그림자 일이 없느니라.

想陰盡者是人平常夢想銷滅하고 寤寐恒一하야 覺明虛靜하야 猶如晴空하야 無復重前塵影事하니라 [磅嚴經]

 

능엄경에 있는 말씀인데 오매일여의 경지를 선종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인용하는 것입니다.

 

보살이 제7지에 머물러서 방편의 지혜와 수승한 도를 닦고 익혀 움직임 없이 편히 머물며 한 생각도 쉬거나 버리거나 끊어짐이 없으니 행와 내지 꿈에서도 장애와 상응하지 않는다.

菩薩住此第七地하야 修習方便慧殊勝道하야 安住不動하야 無有一念休息廢捨하야 行住坐臥乃至睡夢中에도 未曾與蓋障으로 相應하나니라 [華嚴經]

 

6식 망상의 기멸이 끊어지면 육식이 무루(無漏)가 되어서 묘관찰지(妙觀察智)가 성립하는데 무상정(無相定) 또는 무상정(無想定)이라고 합니다. 그 무상정에 들어갈 것 같으면 공부에 끊어짐[間斷]이 없는데, 보통 일상에서만 간단이 없는 것이 아니고 꿈 속에서도 간단이 없게 됩니다. 꿈 속에서도 공부의 경계가 한결 같으면 7지보살이 아닐래야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화두공부가 잘된다 못된다 하는 것은 아직 6식경계에 머무르고 망상의 기멸이 여전한 공부 밖에는 되지 않는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몽중일여를 성취하면 그 사람이 남자든가 여자든가 병신이든가 뭐든가 가림없이 7지보살임에는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예전 스님들이 공부를 해가다가 몽중일여의 경계를 성취하면 그 사람은 칠지보살이라고 선언을 했습니다.

 

보살이 칠지에 머물면 행와 내지 꿈 속에서도 장애를 멀리 떠난다.

菩薩住第七地하면 行住坐臥乃至睡夢에도 遠離障盖하나니라 [十地經]

 

7지 가운데 순수한 무상관(無相觀)이 비록 항상 서로 이어질지라도 가행(加行)이 있으니, 무상관 가운데 가행이 있는 까닭에 아직 자재 [任運]하지 못하나니라.

第七地中純無相上觀雖恒相續而有加行하나니 由無相中有加行故未能任運하나니라 [唯識論]

 

7지의 보살도 퇴전하며, 8지 멸진정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영원한 불퇴전이 됩니다. 7지 무상정에 들어 몽중일여한 경계에 있다해도 오래오래 가서 공부가 달리 나갈 것 같으면 퇴전해 버리고 맙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가행, 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지로 자기가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입니다.

 

7지 가운데 비록 일체 상()에 움직이지 아니하여 일체 상이 현전하지 못할지라도 그러나 자재하고 임운하게 움직이지 못하니 가행이 있는 까닭이다. 8지 가운데엔 임운하게 움직이니 가행을 짓지 않는 까닭이다. 이것을 제7지와 제8지의 차별이라 한다.

第七地中雖一切相所不能動하야 相不現得故이나 不自在任運而轉하나니 有加行故第八地中任運而轉하나니 不作加行故是名七, 八地枕別이니라 [淸凉疏]

 

7지는 무상정의 무심이고 제8지는 멸진정의 무심이며, 무상정의 무심은 뒤로 물러남[退轉]이 있으나 멸진정의 무심은 뒤로 물러남이 없으며[不退轉], 7지는 근본적으로 말할 때 아직까지 범부의 지위에 속하나 제8지는 성인의 지위에 속하게 됩니다. 또 제7지나 제8지나 그 무심은 차별이 없는 것 같지만 실지로 수행을 해보면 제7지에서는 공용(功用)이 있는 동시에 자재하지 못하며, 8지 이상이 될 것 같으면 공용(功用)이 없는 동시에 자재하는 차이가 있으니, 7지의 보살은 꿈 속에서만 한결같고[夢中一如], 8지 보살 이상이 되어서만 잠이 꽉 들어서도 한결같은[熟眠一如] 참다운 오매일여가 성취됩니다.

 

무상천무상정멸진정수면민절, 이 오위 가운데에 일체 중생들은 네 가지는 있으나 멸진정이 없고, 성인은 뒤의 세 가지만 있고, 그 가운데에도 여래 및 자재보살은 오직 하나만 있으니 수면과 민절이 없기 때문이다.

無想天 無想定 滅盡定 睡眠 悶絶此五位中異生有四除在滅定이요 聖唯後三이요 於中如來及自在菩薩唯得一이니 無睡悶故니라 [唯識論]

 

유식론에서는 여래와 자재위보살은 수면과 민절이 없어서 어떠한 깊은 잠에 들었든지 어떠한 큰 병이 나거나 다치든지 하여 기절했다 하여도 거기서 변동이 없고 언제든지 한결같다는 것이니 그것이 실지로 오매일여입니다. 멸진정에 있어서는 수면과 민절이 없으니까 여기서는 언제든지 한결같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이 제7지의 몽중일여와 제8지의 숙면일여와의 근본 차이입니다.

이런 유식론과는 달리 능가경에서는 아라한의 지위를 증()해도 멸진정이 되어서 자재위보살과 같다고 합니다.

 

무심의 오위 가운데에 일체 중생들은 네 가지가 있다는 것은 무상천무상정수면민절은 있으나 멸진정이 없음이요, 성인은 다만 뒤의 세 가지가 있으니 멸진정수면민절이요, 부처님 및 제8지 이상 보살은 오로지 멸진정 하나만 있어서 수면과 민절이 없다. 수면과 민절 두 가지는 악법인 까닭에 나타나 보이기는 잠을 자는 것 같으나 실지는 잠이 없는 까닭이니, 즉 이승의 무학도 또한 민절은 있느니라.

無心五位中異生有四等者除滅盡定이요 聖唯後三이요 佛及八地已去菩薩唯得有一滅盡定하야 無睡眠悶絶이니 二以惡法故現似有睡實無有故卽二乘無學亦有悶絶也니라 [宗鏡錄 四七]

 

부처님과 자재위보살 이상은 누구든지 참다운 오매일여에 들어서 수면과 민절이 분명히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자재위보살의 멸진정이라는 것이 어떻게 틀리느냐 하면, 부처님은 진여위이어서 제8아뢰야 미세념까지도 끊어진 순무심의 멸진정이고 제8지 보살 이상은 제67식이 끊어진 무심의 멸진정입니다.

무심도 자재위보살 이상의 무심과 부처님의 무심이 달라서 구별되듯이, 멸진정도 부처님이 수용하는 멸진정과 자재위보살 이상이 수용하는 멸진정과는 구별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멸진정이든지 자재위보살 이상의 멸진정이든지 간에 멸진정에 들면 수면과 민절이 완전히 끊어져서 오매일여한다는 것만은 틀림없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하는 데 있어서 참다운 구경까지 성취하려면 반드시 노력노력해서 잠이 꽉 들어서도 언제든지 변동이 없는 오매일여의 경계를 돌파해야지 그런 경계를 뚫고 나아가기 전에는 공부라고 취급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떠한 문제가 해결되느냐 하면 예전 조사스님이 깨친 경계와 부처님이 깨친 경계가 똑같다는 것이 해결됩니다. 보통으로 볼 때는 아무려면 조사스님 조사스님 하지만 부처님과 같은 경계가 될 수 있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가칠종의 정맥으로 내려온 조사스님네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오매일여라는 경계를 지내 가지고 깨친 사람들이지 오매일여의 경계를 지내지 않고 깨쳤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현사스님이 지적한 그대로로서 참다운 선지식이라 하면 잠이 꽉 들어서도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경계를 성취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렇지 않으면 선지식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잠이 꽉 들어서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경계에 있다하면 벌써 제8지 보살 이상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만 가지고 본다 하여도 종문에서 조사나 종사라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제8지보살 이상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것만 가지고 조사라 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매일여가 된 여기서 깨쳐야 된다고 장 말하느니만치 실지에 있어서 제8마계(第八魔界)를 벗어나서 진여의 대원경지가 현발되지 않고서는 조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 대해서 앞으로 더 자세히 말하겠는데 특히 유의할 것은 종문 중에서 조사라는 스님치고 잠이 꽉 들어서도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경계를 지내지 않은 스님은 한 분도 없다는 것을 유의합시다.

 

4)사중득활(死中得活)

 

달마대사가 말하였다.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이 허덕이지 아니하여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한 생각도 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져서 번뇌가 순식간에 쉬고서 혼침과 산란을 끊어 없애 종일토록 어리석고 분별이 없으니 마치 진흙으로 만들거나 나무로 조각한 사람과 같은 까닭에 장벽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경계가 나타나면 집에 이르는 소식이 결정코 가서 멀지 아니하다.

達磨云하되 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하야 心如璧하야 可以入道니라 [傳燈錄]

一念不生하고 前後際斷하야 塵勞頓息하고 昏散勦除하야 終日獃惷惷地하야 恰似箇泥塑木彫底하나니 謂墻璧으로 無殊라하니라 到這境界現前하면 卽到家消息決定去地不遠이니라 [高峰妙]

 

우리가 생각이나 분별로 과거니 미래니 하는데, 한 생각도 나지 아니하는 무심지에 들어갈 것 같으면 거기서는 과거현재미래 전체가 다 끊어져 버리는데 이것을 과거와 미래가 끊어졌다[前後際斷]’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로(塵勞), 즉 밖으로의 모든 반연이 순식간에 쉬게 되는데 이것이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는 것[外息諸緣]’이며, 또 혼침과 산란을 끊어 없애게 되는데 이것이 안으로 마음이 허덕이지 않는 것[內心無喘]’입니다. ‘애준준(獃惷惷)’이란 목석과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모양을 말하는데 무심한 경계를 표현한 말입니다. 일체 인연을 다 쉬고 일체 번뇌망상이 다 끊어진 무심지의 경계를 목석과 장벽에 비유했습니다. 그러면 목석과 장벽과 같은 대무심지에 이를 것 같으면 이것이 도()냐 하면 도()가 아니라 여기에 이를 것 같으면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 즉 도()를 이루는 것이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바가 없으니 곧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쉰 것 [外息諸緣]’이요, 안에서 나는 바가 없으니 곧 안으로 마음이 허덕이지 않는 것[內心無喘]’이다. 이미 내심무천하고 외식제연한 즉 한 생각도 나지 않는 것[一念不生]이다.

外無所入則外息緣이요 內無所岑則內心無喘이니 旣內心無喘하고 外息諸緣則一念不生이니라 [密雲悟]

 

내가 이렇게 여러 큰스님들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흔히 마음이 장벽과 같다[心如牆璧]’는 말에 대해서 오해가 많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장벽과 같다고 하니 어디 가다가 담이나 벽에 탁 부딪치는 것과 같이 가도 오도 못하게 앞에 무엇이 가로 막힌 것으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장벽과 같다는 것은 흙으로 만든 사람과 같고, 나무로 조각한 사람과 같아서 목석과 다름없는 대무심지를 장벽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일념불생하고 전후제단한 무심지가 장벽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말한 오매일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면 몽중일여만 되어도 무상정이니만치 겉으로 볼 때는 일념불생전후제단과 같은 경계이며, 거기서 실지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숙면일여의 자재위보살 이상이 되어도 일념불생전후제단의 경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도냐 하면 도는 아니어서 여기에 다시 살아나 깨쳐야 합니다. 자재위보살 이상의 멸진정에서 오매일여를 성취하여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지 도를 성취한 것은 아니니 이 경계를 종문에서는 죽은 데서 다시 살아난다[死中得活]’고 합니다.

일념불생전후제단이 되었다고 해도, 대무심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거기서 살아나지 못하면 이 사람은 크게 죽은 사람[大死底人]입니다. 크게 죽은 사람은 구경각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며 도()를 이루지 못하였으며, 견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실지로 이만한 경계에 도달하려면 참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또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다[死了不得活]고 하면 이것은 도가 아니고 견성이 아니라고 고불고조가 한결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물며 객진번뇌가 그대로 있는 경계에서 견성을 했다든지 도를 이루었다든지 하면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크게 죽은 경계에서 참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쉬고 쉬어 한 생각이 만년이며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면 승묘경계라고 부르니 보봉 광도자가 이런 사람이며 세간의 진로가 그를 어둡게 하지 못한다. 비록 이러하나 도리어 승묘경계에 떨어져서 도안을 가린다. 한 생각도 나지 아니하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승묘경계에 도달하여서는 반드시 곧바로 큰스님을 찾아보아야 함을 알아라.

休去歇去하야 一念萬年하며 前後際斷하면喚作勝妙境界이라하나니 寶峰廣道者便是這般人이라 世間塵勞昧他不得하나니 雖然恁麽却被勝妙境界하야 障却道眼이니 須知到一念不生 前後際斷處하야 正要見奪宿이니라 [五祖演]

 

보봉광도자(寶峰廣道者)는 진정 문선사의 제자이며 총림에서는 광무심(廣無心)이라는 별명을 가진 스님으로서 일념불생 전후제단이 되기는 했지만 살아나지 못해서 실지 도안(道眼)은 없다고 평()을 했습니다. 외식제연 내심무천은 쌍차(雙遮)를 말하는데, 철두철미한 쌍차(雙遮)가 되면 쌍조(雙照)가 안될래야 안될 수 없지만, 쌍차(雙遮)한데서 머물면 보봉광도자같이 무심에 머물러서 실지 쌍조(雙照)가 절대로 안됩니다. 결국은 도를 성취하려면 쌍차(雙遮)가 된 데서, 즉 크게 죽은 데서 다시 살아나 쌍조(雙照)가 되어야 합니다. 죽어 가지고 살아나지 못하면 이것은 산 송장입니다.

보통 번뇌망상분별심이 그대로 있는 것을 가지고 공부가 아닌가, 도가 아닌가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죽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 사람도 도가 아닌데 아직 죽지도 못한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법문은 오조 법연선사가 사량분별이 떨어진 대무심지에 들어 크게 죽은 사람도 도가 아닌 승묘경계일 뿐이라고 한 진정 문선사(오조 법연선사의 스승)의 법문을 인용하여 한 말입니다. 사량분별이 다 끊어진 여기에서 크게 깨쳐야 실지로 바로 안 것이고 도를 이룬 사람인 만큼 누구든지 이런 바른 길로 가야지 도가 아닌 것을 도로 삼으면 자타가 다 망한다고 경계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것[大死却活]은 선문의 생명선입니다.

 

원오스님의 훈풍이 스스로 남쪽에서 오는구나라고 법문하심을 보고 홀연히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니 마치 한 뭉치 헝클어진 실을 칼로 한번 끊으니 다 끊어지는 것과 같았다. 동상(動相)이 나지 아니하나 도리어 청정한 무심경계에 앉게 되었다. 원오스님이 말씀하시되 아깝구나. 너는 죽었으나 살아나지 못하였으니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 죽은 후 다시 살아나야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원오스님 방에 들어갈 때마다 다만 유구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는 공안을 들어 물으시고 내가 겨우 입을 열려고 하면 즉시 아니다라고만 말씀하셨다. 내가 비유로써 설명하되 이 도리는 흡사 개가 뜨거운 기름솥을 보는 것과 같아서 핥으려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자니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하니, 원오스님이 너의 비유가 지극히 좋구나고 하셨다. 어느 날 원오스님이 나무가 넘어지고 등칡이 마르니 서로 따라 온다고 법문하심을 듣고 내가 즉시 이치를 알고는 제가 이치를 알았습니다고 하였다. 원오스님이 다만 네가 공안을 뚫고 지나가지 못할까 두렵다하시고는, 한 뭉치의 어려운 공안을 연거푸 들어 물었다. 내가 이리 물으면 저리 대답하고 저리 물으면 이리 대답하여 거침이 없으니 마치 태평무사한 때에 길을 만나면 문득 가듯 하여 다시 머물고 막힘이 없으니 바야흐로 내가 스스로를 속이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을 알았다.

老漢見圓悟老師擧熏風自南來하고忽然前後際斷하야 如一綟亂絲將刀一截截斷相似하니라 雖然動相不生이나 却坐在淨裸裸處하니 老師云可惜爾死了不能活이니 不疑言句是爲大病이라 絶後更甦하야사 欺君不得이니라 每入室只擧有句無句如藤倚樹話하고 纔開口하면 便道不是하니라 我說箇譬喩曰這箇道理恰如狗子看熱油鐺相似하야 要舐又不舐得하며 要捨又捨不得이니라 老師曰爾喩得極好一日因老師擧樹倒藤枯奇相隨來也하야 老漢便理會得하고 乃曰某會也니라 老師曰祗恐爾透公案未得이라하고 遂連擧一絡索訛公案하야 被我三轉兩轉截斷하니 如箇太平無事時得路便行하야 更無滯碍하야 方知道我不謾爾이니라 [大慧廣錄]

 

대혜스님이 자기가 알았다고 큰 소리친 이후 이십여 년만에 몽중일여가 되어서는 부처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고 감격해 한 일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몽중일여가 되니 공부가 다된 것 아닌가 하고 원오스님을 찾아 뵈니 너의 지금 경계도 성취하기 어렵지마는 참으로 아깝구나! 죽어서는 살아나지 못하였으니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 죽은 후 다시 살아나야 너를 속일 수 없느니라고 경책하셨습니다. 전후제단의 승묘경계(勝妙境界)를 선문에서는 죽어서 살아나지 못하였다[死了不活]’ 하여 지극히 배척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철저히 깨쳐 활연히 크게 살아나야만 정안(正眼)으로 인가하는 것입니다. 크게 죽은 후에 다시 크게 살아나기 전에는 불조 공안들의 심오한 뜻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오스님이 대혜스님에게 공안,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몽중일여가 되고 숙면일여가 되었다 하여도 공안의 뜻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객진번뇌가 여전한데도 공안을 알았다 하고 견성했다 하고 보림한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임제정맥에 있어서 원오스님과 대혜스님은 역사적으로 유명하고 큰스님입니다. 이런 큰스님들의 경험담이고 서로서로 지시하고 지도하고 의지한 그런 공부 방법이니 여기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게 된다면 결국 자기만 죽고 맙니다. 이러한 공부과정은 선종뿐아니라 전체 불교에 있어서 표준입니다. 이처럼 대혜스님이 원오스님의 지시를 따라 유구와 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라는 공안을 참구하여 마침내 서로 따라온다는 원오스님의 법문에서 다시 살아나서, 즉 깨쳐서 일체 공안을 바로 알아 인가를 받았으며 원오스님이 대혜스님에게 임제정종기(臨濟正宗記)를 지어 주었습니다.

흔히 내가 장 고불고조의 뜻을 따르자고 하니 조상의 뼈만 들춘다고 나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제방에 많은 모양인데, 그러나 고불고조(古佛古祖)를 표방해서 전통적인 큰스님네들 법문을 귀감으로 삼고 거울로 삼아야지 공연히 내 옳으니 네 그르니 하여 서로서로 비방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표준은 고불고조에 두어야 하니 원오스님이나 대혜스님 같은 큰스님네들이 실지에 있어서 몽중일여가 되고 오매일여가 되어서도 거기서도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참으로 화두를 참구하여 깨쳐서 비로소 조사가 되고 도인이 되고 했으니 이것을 모범으로 삼지 않으면 무엇을 모범으로 삼겠습니까? 내가 장 주장하는 뜻을 충분히 이해하기 바랍니다.

 

반달이 지나도록 움직이는 모양이 일어나지 않으나 여기에 앉아 머물면 합당치 못하다. 그것은 견의 자리 [見地]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니 정지견(正知見)을 가린 것이다. 매번 잠이 꽉 들어서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듣고 봄이 없을 때엔 두 동강이가 되니 경이나 어록에서 이 병을 고칠 수 없었다. 이처럼 가슴속에 걸리는 것이 십 년이 지났는데 하루는 마른 잣나무를 보니 눈에 띄자 당장에 깨쳐서 그 전에 얻었던 경계가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지니 마치 캄캄한 방 가운데서 밝은 해가 있는 데로 나온 것과 같아서 비로소 경산노인의 서 있는 곳을 보았으니 삼십방을 두드려 주었으면 좋을 것이다.

半月餘動相不生하나 不合向這裏坐住謂之見地不脫이라 碍正知見이니라 每於睡著하야 無夢想見聞地打作兩橛하니 經敎語錄無可解此病이라 如是碍在胸中者十年이라가 一日見栢栢하고 觸目省發하야 向來所得境界撲然而散하야 如闇室中出在白日하니 始得見徑山老人立地處好與三十棒이로다 [雪岩錄]

 

견의 자리[見地]를 벗어나지 못했다함은 무심지에 머물러 있음이니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 것이며, 십년이 지나 잣나무를 보고 깨쳤다 함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니, 쌍차(雙遮)된 데서 쌍조(雙照)가 된 것을 말하니 실지 중도를 정등각한 것입니다. 몽중일여가 되고 숙면일여가 된 대무심지에서 다시 살아나야 확철이 깨치는 것입니다.

 

설암스님이 고봉스님에게 물었다.

낮동안 분주할 때에도 한결같으냐?”

한결같습니다.”

꿈속에서도 한결같으냐?”

한결같습니다.”

잠이 꽉 들었을 때는 주인공이 어느 곳에 있느냐?”

여기에서는 말로써 대답할 수 없으며 이치로도 펼 수가 없었다. 오년 후에 곧바로 의심 덩어리를 두드려 부수니 이로부터 나라가 편안하고 나라가 조용하여서 한 생각도 함이 없어 천하가 태평하였다.

雪岩問曰日間浩浩時作得主麽答作得이니다 睡夢中作得麽答作主니다 又問正睡著時主在何處於此無言可對無理可伸이라 後五年驀然打破疑團하니 自此安邦定國하고 一念無爲하야 天下太平하니라 [高峰妙]

 

고금을 통해서 몽중일여가 되었다 해도 실지 공부가 아니고 잠이 꽉 들어서 공부가 안되면 아무리 석가달마 이상으로 깨쳤다고 큰소리 쳐도 그것은 아무 소용없고 참다운 공부가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잠이 꽉 들어서 공부가 되나 안되나 이것을 표준삼고 공부하여야 합니다. 이상에서 인용한 스님들은 중국스님들이니 그럼 우리나라에서는 어떠냐는 것을 나옹(懶翁)스님과 태고(太古)스님의 말씀을 인용하겠습니다.

 

공부가 이미 동정(動靜)에 간격이 없으여 오매(寤寐)에 항상 일여하여 접촉하여도 흩어지지 아니하고 넓고 아득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한다. 마치 개가 뜨거운 기름솥을 보는 것과 같아서 핥을래야 핥을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은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당한가.

工夫旣到動靜無間하며 寤寐恒一하면 觸不散蕩不失하야 如狗子見熱油欄相昭하야 要舐又舐不得하며 要捨又捨不得時作麽生合殺[懶翁集]

 

나옹(懶翁)스님이 공부해 나아가는 정도를 열 단계로 나누어 공부십절목(工夫十節目)을 작성하여 수도의 지침이 되게 하였는데 이것은 그 제6절목으로서 참선하여 도를 깨침에는 오매일여의 경계를 통과함을 필수조건으로 삼으니, 만일 이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견성이 아니며 도를 깨친 것이 아닙니다.

 

점점 공부가 오매일여에 이르른 때에는 다만 화두하는 마음을 떠나지 않는 것이 요긴하다. 화두를 참구하는 의심이 정을 잊어버리고 마음이 끊어진 곳에 이르면, 금까마귀가 밤중에 하늘을 뚫고 높이 날아오르리니, 그 때에 슬프거나 기쁜 생각을 내지말고 모름지기 본분종사를 찾아가서 영원히 의심을 결단하라.

漸到寤寐一如時只要話頭心不離疑到情忘心絶處하면 金烏夜半徹天飛리니 於時莫生悲喜心하고 須參本色永決疑어다 [太古集]

 

누구든지 오매일여가 되었다 해도 거기서 자족심을 내지말고 본분종사를 찾아가서 참으로 바로 깨쳤나 어쩌나를 점검받아야 합니다. 태고스님이나 나옹스님은 고려 말엽의 큰스님들로서 열심히 정진하였으며 나중에 중국에 가서 인가를 받은 스님들로서 오가칠종의 정맥을 바로 안 스님들입니다. 그런 큰스님들이 공부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오매일여를 많이 말씀하셨으니 오매일여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견성이란 오매일여의 대무심지에서 깨쳐 인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보면 나의 오매일여에 대한 법문은 어렵기 그지없고 보조스님의 수심결은 쉽다고 말합니다. 방장스님의 법문은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곳에서 오매일여가 되어 가지고 거기서 깨쳐야 한다고 하시니 이 공부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고 도저히 어떻게 손댈 곳이 없으나, 수심결에서는 망상이 그대로 있고 번뇌가 그대로 기멸하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을 견성이니 돈오니 하고, 객진번뇌를 점차로 없애가는 것을 보림이니 점수니 하니 공부가 쉽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잘 하는 말이지만 고려중기 이후 이조로 내려오면서 큰 공부인(功夫人)이 옳게 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수심결에 있다고 봅니다. 수심결에 보면 번뇌망상 이대로가 견성이라 하고 화두 안해도 된다 하니 공부인이 날래야 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중국까지 가서 공부를 바로 전해 받은 태고스님이나 나옹스님은 철저하게 오매일여의 관문을 말씀하고 계시느니만치 우리가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하고 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동정에 일여하고 오매에 항상 일여하여 화두가 현전함이 마치 물속에 달이 비춰 여울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물이 세차게 흘러 접촉하여도 흩어지지 아니하고 넓고 아득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한다. 마음 가운데는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고 밖으로는 흔들려도 움직이지 아니하면, 의심덩어리가 부서지고 바른 눈을 뜨는 것이 가까웠다. 홀연히 안팎으로 맞부딪쳐 자기를 깊이 밝히면 또 마땅히 대종사를 찾아 시험을 구하여 법의 그릇을 이룰 것이요 적은 것에 만족하여서는 안된다.

動靜一如하고 寤寐恒一하야 話頭現前如透水月華在灘浪中하야 活潑潑하야 觸不散蕩不失하야 中寂不搖하고 外不動하면 疑團하고 正眼開近矣忽然築著磕著하야 洞明自己어든 又宜見大宗匠하야 求煅煉成法器不可得小爲足이니라 [蒙山]

 

우리가 공부를 함에 있어서 오매일여라는 관문의 통과가 근본이 되어 있는데 오매일여가 되어서 깨쳤다 해도 구경에 못 들어가는 수가 있으니 꼭 본분종사를 찾아가서 인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만치 공부라는 것이 어려운데 공부하다가 번뇌망상이 여전한 사량분별을 가지고 아는 체하는 것은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선계(禪界)에서는 이 병이 너무 깊어 한철 두철나면 뭐좀 알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오매일여가 되었나 안되었나 스스로 생각해 보고 양심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크게 죽은 사람이 불법도리가 전혀 없어서 현묘득실과 시비장단이 여기에 이르러서는 다못 이렇게 쉬었느니라. 옛 사람은 이를 평지 위에서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모름지기 저쪽으로 뚫고 지나가야 되며, 혹 의지하거나 이해함이 있으면 아무 관련 없느니라.

大死底人都無佛法道理하야 玄妙得失是非長短到這裏하야 恁麽休去古人謂之平地上死人이니 須是透過那邊하야사 始得이요 或有依倚解會하면 沒交涉이니라 [碧岩錄]

 

이처럼 무쇠로 만들어 놓은 사람은 혹 기특한 경계를 만나거나 혹 나쁜 경계를 만나더라도 이 앞에 이르러서는 모두 꿈 속과 같아서 육근이 있음을 알지 못하며 아침 저녁을 알지 못한다. 비록 이러한 경계에 이르렀어도 찬 재와 꺼진 불을 지켜서 캄캄한 곳으로 들어가서는 못쓰니, 모름지기 몸을 돌리는 한 활로가 있어야 한다.

這般生鐵鑄就漢或遇奇特境界하며 或遇惡境界하야도 到此面前하여는 悉皆如夢相似하여 不知有六根하며 不知有倦暮하나니 直饒到這般田地하여도 切忌守寒灰死火하여 打入黑漫漫地去也須是有轉身一路하여사 始得[碧岩錄]

 

8아뢰야 무기식의 거짓 무심인 찬 재와 죽은 불에 집착하여 몸을 돌리는 활로를 못얻으면 영원히 사지(死地)에 매몰되고 맙니다.

 

조주스님이 투자스님에게 물었다.

크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때에는 어떠합니까?”

밤 길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날이 밝아서 가야한다.”

굉지스님이 소참에서 이 법문을 거론하고서 말씀하였다.

만약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난] 이 시절을 알면 곧 밝음 가운데 어두움이 있으니 어두움으로 서로 만나지 말고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 있으니 밝음으로 서로 만나지 말라함을 알 것이니라. 일체 만법이 다 없어진 때에 밝고 밝게 항상 있으며 일체 만법이 생길 때에 비고비어 항상 고요하니 문득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다고 말함을 알 것이다.”

설두스님이 이 법문에 대해서 송하였다.

 

삶 가운데 눈이 있으니 오히려 죽음과 같고

약을 거리끼니 어떻게 큰스님을 감정하리오.

옛 부처도 오히려 일찍이 이르지 못했다 말하니

티끌 모래 뿌림을 누가 이해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趙州問投子大死底人却活時如何投子云不許夜行이요 投明須到니라 宏智小參擧云 若箇時識得하면 便知道當明中有闇이니 勿以闇相遇當暗中有明이니 勿以明相覩로다 一切法盡處箇時了了常存一切法生時箇時空空常寂이니 須知道死中活活中死니라 雪偈頌云活中有眼還同死하니 藥忌何須鑑作家古佛尙言曾未到어니 不知誰解撤塵沙[宏智錄 五]

 

일념불생 전후제단이 되어서 멸진정의 깊고 깊은 무심지에 들어가 오매일여가 되었다 해도 크게 죽은 사람이니 거기서 살아나야지 살아나지 않으면 견의 지위[見地]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서 구경은 모르고 맙니다.

밝은 가운데 어두움이 있으니 어두움으로써 서로 만나지 않는다함은 조이쌍적(照而雙寂)입니다. 어두움이 있다고 하여 밝음의 상대적인 어두움으로만 취급하여서는 안되는 것이니 밝은 가운데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 있으니 밝음으로써 서로 만나지 않는다함은 적이쌍조(寂而雙照)입니다. 밝음이 있다고 하여 어둠과 대립되는 밝음으로만 취급하여서는 안되는 것이니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밝음과 어두움이 함께 있는[雙雙] 밝음과 어두움입니다. 절대로 한 편에 치우쳐서 서로 대립되는 밝음과 어두움이 아닙니다. 밝음과 어둠의 대립이 그친 동시에 밝음과 어둠이 서로 융통자재하는 중도의 밝음과 어두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법문은 석두(石頭)스님의 참동계(參同契)에서 굉지스님이 인용한 구절입니다. ‘일체 만법이 다 없어진 때란 쌍차(雙遮)를 말하고 밝고 밝게 항상 있다는 것은 쌍조(雙照)를 말하며 전체적으로는 크게 죽은 가운데 크게 살아남을 말합니다. ‘일체 만법이 날 때란 쌍조(雙照)를 말하고 비고비어 항상 고요하다는 것은 쌍차(雙遮)를 말하며 전체적으로는 크게 산 가운데 크게 죽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쌍차(雙遮)가 쌍조(雙照)며 쌍조(雙照)가 쌍차(雙遮)여서 차조(遮照) 동시이니 이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다는 것은 깨친 경계를 말하는 것이나 말로써 아무리 설명해 봐도 소용없습니다. 실지로 깨쳐봐야 아는 것이니만치 화두를 부지런히 해서 오매일여에서 확철히 깨쳐서야 그 경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티끌 모래를 뿌린다함은 장경(長慶)스님의 법문을 설두스님이 인용한 것입니다. 장경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묻되 어떤 것이 바른 법의 눈[正法眼]입니까?” 하니 바라노니 모래를 뿌리지 말라고 한 법문입니다. 여기에 와서는 견성성불이라는 것도, 임제 할과 덕산 방도, 향상일로도, 또 온갖 말과 수식어가 다 소용없고 천칠백 공안도 눈에 모래를 뿌리는 것인 줄 알아야만 어느 정도 삶 가운데 죽음이 있고 죽음 가운데 삶이 있다는 뜻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삶 가운데 죽음이 있고 죽음 가운데 삶이 있다 한다고 무슨 별다른 깊은 법이 있는가 집착하여 매달리게 되면 영원토록 불법을 모르고 깨치지 못하고 마는 것이며 그렇다고 실지 이런 경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크게 죽어서 크게 살아나면 제8아뢰야 무기식까지 다 없어진 참으로 크게 죽은 경계가 나타납니다. 여기에서는 항상 죽은 가운데 항상 살아 있고 항상 산 가운데 항상 죽어서 밝음과 어두움이 서로 고요하고 서로 비치니, 곧 부처님과 조사의 바른 눈입니다. 이것을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는[雙雙] 시절이라고 합니다.

 

숨이 끊어진 때와 종적이 끊어진 곳에서 참으로 바른 눈을 갖추어야 한다. 그 때에는 역력하여 가라앉지 아니하고 신령하고 신령하여 상대가 끊어지니 문득 사방으로 활보하며 주위에 널리 응할 것이다.

絶氣息時斷跡處須具眼하여사 始得那時歷歷不沈하고 靈靈絶對하여 便能闊步大方하여 周旋普應이니라 [宏智錄]

 

대무심지에서 크게 살아나야 함을 말하는 것이니, 크게 살아나면 쟁반 위를 구슬이 구르듯이 자유자재한 큰 활용[大用]이 널리 펼쳐 규범이 있지 않은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크게 죽은 데서 크게 살아나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경계가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번뇌망상이 그대로 있는 데서 대용(大用)이 나타난다고 한다면 이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마음이 안온하며 꽉 차있고 살 방도가 차고 서늘한 때에 문득 겁()이 공함을 보아서 털끝만큼도 인연의 번뇌를 짓지 아니하고 실끝만큼도 장애를 지음이 없다. 공허함이 지극하여 광명이 있고 청정함이 원융하여 빛나니 만고에 뻗쳐 혼매하지 않는 한 사실이 있다.

田地穩密密處活計冷湫湫時便見劫空하여 無毫髮許作緣累하며 無絲糝許作障翳하여 虛極而光하고 淨圓而耀하여 歷歷有亘萬古不昏昧底一段事로다 [宏智錄]

 

공허함이 지극하여 광명이 있다함은 일체가 공한 크게 죽은 경계인 쌍차(雙遮)를 말하고, ‘청정함이 원융하여 빛난다함은 크게 살아난 경계인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적적한 가운데 광명이 있고 광명 가운데 적적하여서 억천만겁이 지나도록 언제든지 어둡지 아니하는 이런 경계는 진여본성을 깨치고 진여대용이 현전한 사람의 경계입니다. 8아뢰야 무기식까지 영원히 없앤 참으로 크게 죽은 경계의 대공적(大空寂) 가운데서 크게 살아나서 발하는 대광명은 억천 겁이 지나도 옛되지 않고 만세에 뻗쳐 늘 지금이니 이것이 부처님과 조사들이 바로 깨친 경계이며 이것을 대적광(大寂光)이라고 합니다.

임제종에 있어서는 대기대용(大機大用)으로 밀고 나가지만 마음자리[心地] 문제에 있어서는 조동종이 아주 섬세하여서 미세조동(微細曹洞)’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만큼, 이러한 자세한 법문이 많이 있지만 여기서는 천동 굉지스님의 법문을 인용했습니다.

 

만약에 식음(識陰)이 다 없어지면 둥글고 밝은 청정한 묘심이 그 가운데서 피어나니 깨끗한 유리병 속에 보배 달을 넣은 것과 같다. 이에 십지와 등각을 뛰어넘어 여래의 묘장엄 바다에 들어가서 보리를 원만히 성취하여 무소득으로 돌아간다.

識陰若盡則圓明淨心於中發化하여 如淨瑠璃內含寶月하여 如是乃超十地等覺하여 入於如來妙莊嚴海하여 圓滿菩提하여 歸無所得이니라 [磅嚴經]

 

식음(識陰)이란 제8아뢰야를 말합니다. 오매일여의 크게 죽은 데서 다시 크게 살아나는 것을 깨끗한 유리병 속에 보배 달을 넣은 것과 같다고 하며 안과 밖이 철저하게 밝게 되는 것이니 진여본성을 깨친 성불의 경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소득이 있느냐 하면 무소득으로서 한 법도 얻을래야 얻을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식음(識陰)이 없어지면 바야흐로 지위를 뛰어넘어 무소득을 요달하여 구경을 원만히 성취하니 깨끗한 유리병 속에 보배달을 넣어 놓은 것과 같다.

若得識陰盡하면 方超地位하여 了無所得하여 究竟圓成하여 如淨瑠璃內含寶月이니라 [宗鏡錄]

 

선가에서도 구경각을 깨끗한 유리 병 속에 달을 넣어 놓은 것과 같다고 표현하는데, 크게 죽은 데서 크게 살아나는 것을, 고요하면서 서로 비친다[寂而雙照]느니, 비치면서 서로 고요하다[照而雙寂]고 말합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부지런히 부지런히 해서 크게 죽어서 크게 살아나야지 아직 죽지도 못하여 망상분별이 기멸하는 경계에서 견성했다고 착각을 일으키든지 혹은 그런 망견을 가지고 남을 지도하게 된다면 저 망하고 남 망치는 것입니다. 한번 죽어서 크게 살아나야 하는 것이니 죽은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산 송장이지 산 사람은 아니니 오매일여가 되었다 해도 크게 살아나야 안과 밖이 철저하게 밝아서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5)대원경지(大圓鏡智)

 

크게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서 구경각을 성취하면 이것을 견성이라고 하는데 그 견성은 대원경지를 내용으로 합니다. 대원경지란 제8아뢰야 무기식이 다 끊어지고 진여본성이 발현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경각을 성취한 자리, 즉 자성을 깨친 그 자리는 교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선가에서도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표현하는데 교리적 이론이나 실지 체험한 선()에서나 구경이 대원경지에 있다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대원경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위산이 앙산에게 말하였다.

나는 대원경지를 종요로 삼아서 세 종류 생을 벗어나니 소위 상생(想生)과 상생(相生)과 유주생(流注生)이다. 상생(想生)은 생각하는 마음이 어지러움이요, 상생(相生)은 생각하는 바의 경계가 뚜렷하게 나타남이요, 미세한 유주생(流注生)은 함께 티끌 때가 되느니라.

潙山謂仰山曰吾以鏡智爲宗要하여 出三種生이니 所謂想生相生流注生이니라 想生卽能思之心雜亂이요 相生卽所思之境歷然이요 微細流注具爲塵垢니라 [人天眼目]

 

주관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상생(想生)이고 객관적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 상생(相生)입니다. 주관과 객관이 완전히 떨어지면 제8아뢰야에 들어가는데 이것을 미세유주(微細流注)라 합니다. 실지에 있어서 생각하는 마음생각하는 바의 육진 경계를 완전히 벗어나서 대무심지에 들어가면, 그 작용[行相]이 미세해서 보통 중생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재위 이상의 대보살들도 잘 모르니 그것을 미세유주라 합니다. 미세유주를 벗어나야만 대원경지가 드러나는 것이니, 설사 대무심지에 머물렀다 해도 미세유주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 것이니 산 송장이며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공부를 하려면 무분별심인 미세유주까지도 뿌리를 뽑아버려야만 공부를 성취한 사람이고 대원경지를 성취한 사람이며 법을 바로 깨친 사람입니다. 견성하면, 마음을 깨치면 그만이라 하지 않고 대원경지를 으뜸으로 삼는다함은 대원경지는 과상(果相)이니 불과(佛果)를 증득해야 대원경지가 성립되는 것임을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이니 이것으로도 견성이 과상(果上)의 불지(佛地)임이 분명합니다.

 

그 마음의 근원에 도달하지 못하면 제8아뢰야의 미세유주인 마의 경계에 떨어진다.

未達其源하면 落在第八魔界니라 [洞山初]

 

8아뢰야 미세유주까지도 뛰어넘어야 깨친 것인데 제8아뢰야 미세유주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제8마구니 경계라고 합니다. 실지로 정각을 이루고 구경각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는 제8아뢰야 미세유주가 큰 장애가 되어서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마구니 가운데 큰 마구니입니다.

 

갓난아기가 비록 육식을 두루 갖추고 있어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으나 아직 육진을 분별하지 못하여 좋고 나쁨과 장단과 시비득실을 모두 알지 못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도 이 갓난아기와 같아져서 영욕과 공명과 거슬리는 감정과 좋은 경계가 그를 동요시키지 못하며, 눈으로 색을 보되 맹인과 같고 귀로 소리를 듣되 귀머거리와 같으며 어리석고 어리석은 것 같아서 그 마음이 동요하지 아니함이 수미산과 같아야 한다. 지음과 인연의 생각이 없으며 푸른 하늘이 넓게 덮음과 같고 두터운 땅이 넓게 떠받치는 것과 같으니 무심인 까닭으로 만물을 잘 길러 이와 같이 공용이 없는 가운데 공용을 베푼다. 비록 이러하나 또 다시 굴 속에서 뛰어 나와야 옳다.

어찌 교가에서 말함을 보지 못하였는가? ‘8 부동지 보살이 무공용의 지혜로 자재하게 일체지의 바다에 들어간다고 하였으나 납승은 여기에 도달하여도 집착하여서는 안된다. 능가경에서 말씀하되 상생(相生)은 집애(執碍)요 상생(想生)은 망상이요 유주생(流注生)은 즉 헛된 인연을 뒤쫓아서 끊임없이 움직인다고 하였다. 만약 무공용지에 도달하여도 오히려 유주생 가운데 있으니 제3의 유주생의 상()을 벗어나야 비로소 쾌활하고 자재하다. 능엄경에 말씀하되 빠르게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고요하고 조용하다하였다. 갓난아기의 육식이 비록 공용이 없으나 생각생각에 흐름을 그치지 못함이 빨리 흐르는 물과 같다.

初生孩兒雖具六識하야 眼能見하며 耳能聞하나 然未曾分別六塵하야 好惡長短是非得失總不知學道之人要復如嬰孩하야 榮辱功名逆情順境都他不得하야 眼見色하되 與盲等하며 耳聞聲하되 與聾等하야 如癡似兀하야 其心不動如須邇山이니라…… 無造作無緣慮하야 如天普蓋하며 似地普擎하나니 爲無心故所以長養萬物하야 如是於無功用中施功用하나니라 雖然恁麽更須跳出窠窟하야사 始得豈不見敎中하되 第八不動地菩薩以無功用智任運流入薩婆若海라하나니 衲僧家到這裏하야 亦不可執着이니라…… 楞伽經云 相生執碍想生妄想이요 流注生則逐妄流轉이라하니 若到無功用地하야도 猶在流注生中이니 須是出得第三流注生相하야사 方始快活自在니라楞嚴經云 如急流水望爲恬靜이라하니 孩子六識雖然無功用이나 爭奈念念不停如密水流[碧岩錄 八]

 

갓난아기는 대무심지에 든 사람을 비유한 것입니다. 무심인 까닭에 공용을 베푼다 해도 그것은 아직 대무심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어서 죽었으나 살아나지 못한 것입니다. 8지 부동지보살이 오매일여가 되어 대무심지에 들어 무공용지가 현전하였다 해도 아직 제8아뢰야 미세유주에 있으니 모름지기 이것을 벗어나야 쾌활하고 자재하니 곧 죽어서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살아나지 못하면 조사의 공안도 모르는 것입니다. 원오스님이 대혜스님에게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라 하고 아무리 무공용지에 들어가서 참말로 자기가 자재한 것 같지마는 여기서 살아나지 않을 것 같으면 불법(佛法)은 꿈에도 모르는 것입니다. 오직 고인(古人)의 화두를 참구하여 깨쳐서 참으로 크게 살아나야 합니다.

 

맑고 공적하며 둥글고 밝아 움직이지 아니함이 대원경지이니라.

湛然空寂하여 圓明不動卽大圓鏡智니라 [頓悟要門]

 

맑고 고요하여 공적한 여기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둥글고 밝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적이쌍조(寂而雙照)하고 조이쌍차(照而雙遮)해서 죽은 가운데 살고 산 가운데 죽은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되어서만은 이것을 대원경지라 합니다.

 

8 이숙식이 금강도 위에서 공하면 인과를 초월하여 바야흐로 대원경지로 바뀐다. 무구가 동시에 나타난다 함은 불과위(佛果位)가운데서는 대원경지를 무구라 하니 이것을 청정한 진여인 까닭이다. 만약 대원경지로 상응하면 법신이 명백하게 나타나서 둥글고 밝게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이()와 지()가 하나로 같아서 바야흐로 구경인 일심의 본체를 증득한다. 이것이 유식의 지극한 법칙이며 여래의 극과이다.

밝게 살펴보건대, 이 제8식이 깊이 잠겨서 깨뜨리기 어려우니 이 이숙식을 실끝이라도 투과하지 못하면 끝까지 생사의 언덕에 머문다. 덕이 높은 옛 큰스님과 모든 조사들이 이 제8식을 타파하지 않고서는 부처를 뛰어넘고 조사를 뛰어넘는 심오한 이치를 말하지 않았으나, 오늘의 사람들은 생멸심도 잊어버리지 않고 마음에 여러 가지로 물든 번뇌의 종자를 털끝만큼도 정결케 하지 못하고서 문득 도를 깨쳤다고 사칭한다. 어찌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 하고 증하지 못하고서 증했다고 함이 아니리오. 참으로 두렵고 두렵지 않은가.

異熟若空則超因果하야 方才轉成大圓鏡智言無垢同時發者以佛果位中名無垢乃淸淨眞如니라 謂鏡智相應하면 法身顯現하야 圓明普照十方塵刹하야 以理智一如하야 方證究竟一心之體此唯識之極則이며 乃如來之極果也諦觀하니 此識深潛難破하니 此識絲毫未透하면 終在生死岸頭事니라 古德諸祖未有不破此識而有超佛越祖之談이어늘 今人生滅未忘하야 心地雜染種子未淨纖毫하고 便稱悟道하니 豈非未得謂得하며 未證謂證이리오 可不懼哉可不懼哉[憨山 八識規矩通說]

 

이 법문은 감산 덕청스님이 지은 8식규거통설(八識規通說)의 끝에서 간결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감산 덕청(憨山德淸: 15461623)선사는 선교에 모두 정통한 명()나라 말엽의 거장입니다. 8아뢰야 미세유주를 영영 떠나서 등각의 최후심인 금강도(金剛道) 이후에 이숙식이 공하여 여래의 극과인 대원경지를 증득하여야 오도(悟道)이며 견성임을 분명하고 널리 말하니 조계 정정을 서로 계승한 보기드문 선지식입니다. 그리고 생멸의 망심도 아직 끊지 못하고 도를 깨쳤다고 사칭하는 것을 통탄함은 예나 지금이나 수도인의 공통된 병을 지적하여 부순 쾌론입니다. 그러니 거칠고 무거운 것과 미세한 일체 번뇌망상을 모두 없앤 구경 무심인 대원경지를 실지로 증득하여 크게 쉬고 쉰 옛 사람의 마음자리에 도달하여야 합니다. 8아뢰야 미세념을 다 끊은 대원경지는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난 무심무념무생무주이며 따라서 찰나간에 증하고 원만히 증한 구경정각인 돈오와 견성입니다.

생사의 언덕에 머무는 일이라 함은 분단생사(分段生死)를 벗어났지만 변역생사(變易生死)에 머물러 있어서 분단생사와 변역생사를 완전히 벗어난 여래의 생사 자재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6)상적상조(常寂常照)

 

영락경에서 말씀하되 등각은 조적이요 묘각은 적조니라하였다. 지금 제8지 자재위보살 이상의 무생도 또한 조적(照寂)이다. 그러므로 만약 적조를 증득하면 부처님 지위와 같다.

瓔珞云等覺照寂이요 妙覺寂照니라 今八地無生亦照寂이니 若得寂照하면 卽同佛地故니라 [淸涼疏]

 

8지 자재위보살 이상도 멸진정의 오매일여가 되어 무분별지를 체득하는데 어째서 이것을 조적(照寂)이라 하느냐 하면 이 무분별지에는 아직까지 조체(照體)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부처님 지위는 이 조체(照體)까지도 찾아볼 수 없는 무소득인데 적적하게 비치는 조체가 남아 있어서 적조라 하지 않고 조적이라고 합니다. 백장스님도 여기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속 2(二諦)를 쌍조하는 번뇌중에 있는 것이 8지 자재위보살 이상의 경지인데, 이 경지를 타파하고 일체가 다 적적하여 무소득인 적조의 경지와 아직 무분별지가 남아 있어 무소득이 아니며 조체가 남아 있는 조적의 경지와는 구별해서 말합니다.

 

위없는 대열반이여 둥글고 밝아 항상 적조하니라.

無上大涅槃이여 圓明常寂照로다 [壇經]

 

사마타인 까닭에 비록 고요하나 항상 비추고, 비바사나인 까닭에 비록 비추나 항상 고요하며, 우필차인 까닭에 비침도 아니요 고요함도 아니니라. 비치나 항상 고요한 까닭에 속()을 말하나 곧 진()이요, 고요하나 항상 비치는 까닭에 진()을 말하나 곧 속()이며, 고요함도 아니요 비침도 아닌 까닭에 유마거사가 비야리에서 입을 다물었느니라.

以奢摩他()雖寂而常照以毘娑舍那(觀慧)雖照而常寂이요 以優鉢又(平等)非照而非寂이니라 照而常寂故說俗而卽眞이요 寂而常照故說眞而卽俗이요 非寂非照故杜口於毘耶니라 [永圈集]

 

사마타는 죽은 가운데서 산 것이요 비바사나는 산 가운데서 죽은 것이니 실지로 구경각을 성취하고 적이쌍조(寂而雙照)하고 조이쌍적(照而雙寂)하여 차조(遮照)가 동시이며 명과 암이 쌍쌍(雙雙)한 중도의 구경경계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반야가 비추니 해탈의 깊고 깊은 법이로다. 법신의 적멸체에 셋과 하나의 이치가 원융하다. 공행이 같은 곳을 알고자 하면 이를 상광이라 하느니라.

摩訶般若照하니 解脫甚深法이로다 法身寂滅體三一理圓常이니 欲識功齊處인댄 是名常寂光이니라 [長沙岑]

 

남전스님이 제자되는 장사 경잠(長沙景柝)선사가 과상열반(果上涅槃)에 대한 문답 끝에 답하신 게송입니다. 대개 상()은 법신이요, ()은 해탈이요, ()은 반야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상광이라 하면 법신과 해탈과 반야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원융무애한 것을 말합니다. ()이라 하면 분별망상은 말할 것도 없고 제8아뢰야 미세념까지도 완전히 끊어져 없어진 곳을 말하느니만치 이것이 대원경지이니 상적광(常寂光)이 여기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라쌍수 사이에서 대적멸정에 들어 본원(本源)으로 돌아가서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과 더불어 법계에 상주하여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느니라.

我於雙樹間入大寂滅定하야 反本還源하여 與十方三世一切諸佛常住法界하여 常寂常照하느니라 [都序 下]

 

부처님 경계라는 것은 살았거나 열반하였거나를 막론하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상적상조(常寂常照)한 이 경계 가운데에서 백억화신을 나투어서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근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성취하는 데 있어서는 상적상조하는 법을 성취하지 않고서는 공부가 아니니까 상적이라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분별망상이 조금이라도 그대로 기멸하면 상적이 될 수 없고, 일체 분별망상이 다 떨어진 대무심지에 들어간다 해도 무분별지라는 조체(照體)가 남아 있으면 상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상적은 구경각을 성취하여 대원경지가 나타나는 데서 성립되는 것이니 이 경계를 우리가 실지로 성취해야 됩니다. 그 방법은 화두를 부지런히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체 중생 내지 무구지까지도 모두 정토가 아니며 과보에 머무는 까닭이요, 오직 부처님만이 중도 제일인 법성의 땅에 사느니라.

一切衆生乃至無垢地 盡非淨土住果報故唯佛居中道第一法性之土니라 [瓔珞經 ; 大正藏 24]

 

너희들 이치를 통한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방망이와 할은 때를 따라 쓸지니라. 만약에 근본 뜻을 밝게 알면 밤중에 태양이 빛나리라.

報汝通玄士하오니 棒喝要臨時若明端的旨하면 半夜太陽輝로다 [慈明三玄三要總頌 ; 大正藏 48]

 

이것은 자명스님이 삼현삼요(三玄三要)의 총송(摠頌)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삼현삼요를 바로 알려면 상적상조한 구경법, 중도 제일 법성을 바로 깨쳐야 알 수 있지 그 전에는 절대로 삼현삼요를 모릅니다.

 

이상으로 견성성불이라든지 무심무념이라든지 오매일여라든지 하는 등의 문제에 대해서 대강 얘기한 것 같습니다.

이를 한번 더 요약하면 교외별전에서는 견성성불을 표방하는데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견성해서 성불한다는 식으로 두 단계로 나누어 보는 경향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말씀하신 견성은 구경각을 말하며 무생법인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8아뢰야 무기식까지 벗어난 무심지에 들어감에 있어서 한번 뛰어 넘어 바로 여래지에 들어가면 그만이지만, 중생이라는 것은 근기가 여러 가지가 있어 바로 들어가기 어려운 동시에 또 오매일여라는 관문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철저한 무심지에 들어가려면 오매일여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되는데, 설사 오매일여의 관문을 통과해서 숙면일여의 무심지에 들어갔다 하여도 보통 중생이 생각하는 무심은 크게 죽었을 뿐이지 죽은 데서 크게 살아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제8아뢰야 무기식, 미세유주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매일여가 되었다 해도 거기에 머물지 말고 살아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원오스님이 몽중일여에 들어간 대혜스님에게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라 하여 유구와 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는 화두를 자꾸 참구시켜 결국은 바로 깨쳐서 구경각을 성취케 한 것처럼 우리도 무심지에 들었다 해도 부지런히 화두를 의심하여야 합니다. 대혜스님 뿐만 아니라 설암스님이라든지 고봉스님이라든지 큰스님네들이 모두 다 같은 경로를 밟아서 오매일여한 데서 확철히 깨쳐서 공부를 성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보면 공부를 해나가다가 어떤 생각이 좀 나면 사량분별이나 객진번뇌가 그대로 있는 여기서 뭐 알았다 하고 견성했다 하고 보림한다고 하여 화두고 뭐고 다 내버리고 앉았는데 이것은 고불고조가 말씀하신 방법과는 십만팔천 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크게 죽은 데서, 대무심에서 깨쳐서 크게 살아나면 이것이 상적광이며 쌍차쌍조(雙遮雙照)한 것이며 중도 제일 법성의 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불고조가 밟아간 것, 경험한 것을 우리가 바로 성취해야지 이것을 바로 성취하지 않고서 어떤 다른 것을 법이라 도라 견성이라 하면 이것은 고불고조가 바로 전한 법이 아니고 일종의 외도적인 마구니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그런가 하면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나지 않을 것 같으면 생사를 절대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라는 것은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근본인데 생사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으면 불법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자세한 행상을 알아서 공부하는 데 귀감을 삼아야 합니다.

 

 

7)아난의 득도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선이든지 교든지 할 것 없이 불교의 근본 이론은 중도(中道)에 서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였을 줄 믿습니다. 오늘부터는 부처님이 중도를 정등각했다고 말씀하신 그 깨친다는 것, 즉 깨달음의 실천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론에 있어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수집한 것을 팔만대장경이라 해서 경전이 전해 내려왔지만 깨치는 실천에 있어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으로써 마음으로 전해서 내려왔는데 제일 처음은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마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섭존자부터 살펴 보고자 합니다.

부처님이 대중 가운데서 자기와 똑같이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가섭이라고 여러번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 때에 세존은 말할 수 없이 많은 대중 가운데서 마하가섭이 자기와 똑같은 광대한 승묘공덕이 있음을 칭찬해 마치시니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환희하여 받들어 행하니라.

爾時世尊於無量大衆中稱歎摩迦葉同己廣大勝妙功德己하시니 諸比丘聞佛所說하고 歡喜奉行하니라 [雜阿含經, 大正藏 2, p.302 ]

 

앞에서 더 자세한 말을 인용하지 않는다 해도 부처님과 똑같은 능력을 가섭존자가 갖추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깨친 자리에 있어서는 확철히 깨쳤으면 다 같겠지만 부처님께서 자기와 똑같다고 칭찬한 사람은 가섭존자 뿐이며 그래서 가섭존자에게 법을 전해 준 것입니다.

다음은 열반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려 하니 모든 대중들이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 살 것인가 하면서 울고불고 야단이었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절대로 슬퍼하지 말아라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무상정법은 모두 마하가섭에게 전하였다. 가섭은 마땅히 너희들을 위해 큰 의지됨이니 마치 여래가 모든 중생들을 위해 의지처가 되듯이 마하가섭도 또한 이와 같다.

佛告諸比丘하사대 我今所有無上正法悉以付囑摩訶迦葉하니라 是迦葉者當爲汝等大依止함이 猶如如來爲諸衆生作依止處하야 摩訶迦葉亦復如是니라 [大般涅槃經;大正藏 12, p.377 ]

 

부처님의 법맥은 가섭존자에게서 아난존자로 이어지는데 이제부터는 아난존자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 경()을 결집하기 위하여 가섭존자가 중심이 되어 많은 제자들이 모였는데, 여기에 아난존자도 참석하려고 했지만 가섭존자가 끝까지 반대하여 결집 장소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아난존자가 우여곡절을 거쳐 부처님 법을 깨쳐서 결집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을 얘기하겠습니다.

 

가섭이 대중 가운데서 아난을 불렀다. “너는 마땅히 나가라. 지금 훌륭한 대중이 너와 함께 결집할 수 없느니라하였다.

아난이 그 말을 들으니 화살로 심장을 쏘는 것과 같아서 몸을 떨면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멸도한 뒤에 너는 걱정하여 슬퍼하고 소리내어 울지 말아라. 내가 지금 너를 대가섭에게 부탁한다.’ 부디 기쁘게 생각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받드소서.”

迦攝波卽於衆中喚阿難陀汝宜出去하라 今此勝衆不應共爾하야 同爲結集이니라 阿難陀聞是語已하고 如箭射心하야 擧身戰懼하야 白言호대佛世奪臨涅槃時作如是語하사대 阿難陀我滅道後汝勿憂惱悲啼號哭하라 我今以汝付大迦攝波이라하시니 幸施歡喜하야 奉大師敎하소서 [根本毘輓耶雜事;大正藏 24, p.404]

 

한 비구가 말하되 아난은 부처님의 시자로서 가까이서 법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하니, 대가섭이 말하였다. “이런 학인이 배울 것이 없고 덕력이 자재한 대중 가운데에 들어오는 것은 마치 옴 오르고 병든 여우가 사자 무리 가운데 들어오는 것과 같다.”

比丘言호대 阿難是佛侍者親受法敎이니라 大迦葉言 如此學人入無學德力自在衆中猶如疥瘙野干入師子群中이니라 [摩僧祗律;大正藏 22, p.491 ]

 

학인(學人)’이란 공부를 다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대중들은 아난이 부처님 시자로서 30년 이상 부처님을 모셨으니 누구보다도 부처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있으므로 결집에 참여시키자고 주장하였으나, 가섭존자는 여기는 지금 공부를 성취하여 실지로 깨친 사자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어찌 병든 여우같고 배움을 성취하지 못한 아난을 참여시킬 수 있느냐고 강력히 주장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욕설같지만 아난에게는 그렇게 충격을 주지 않으면 참으로 분심을 내서 용맹정진하여 대법을 얼른 깨칠 수 없으므로 자비로서 쫓아내버린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난보다 더 많이 부처님 법문을 기억하고 있다 하여도 스스로 대법을 깨치지 못하면 옴 오르고 병든 여우가 되고 설사 일자무식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실지로 중도를 깨치고 자성을 깨친 사람은 사자입니다.

 

대가섭이 대중 가운데서 아난을 손수 끌어내며 말하되 지금 청정한 대중 가운데서 장경을 결집하려 하는데 너의 업결이 아직 다하지 못하였으니 여기 머물러서는 아니된다. 너의 번뇌를 다 끊은 후에 들어올 것이요, 업결이 남아 있으면 들어오지 말라하고는 손수 문을 닫아 버렸다.

大迦葉衆中手索阿難出하고 호대 今淸淨衆中結集經藏하노니 汝結未盡하니 不應住此斷汝漏盡然後來入이요 殘結未盡이어든 汝勿來也如是語竟 便自閉門하니라 [大智度論;大正藏 25, p.68 ]

 

이렇게 쫓겨난 아난이 비야리성에 있으면서 항상 대중을 위해 밤낮으로 설법함에 많은 사람들이 내왕하는 것이 부처님 계실 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때 발기(跋耆)비구라는 이가 있어 누각 위에서 좌선을 하고 있다가 이곳이 시끄러워서 모든 해탈삼매에 들 수가 없어서 아난있는 곳에 가서 게송을 지어서 말하였다.

 

고요한 나무밑에 앉아

마음은 열반에 두고

너는 참선하며 방일하지 말라

많은 말 무슨 소용 있는가.

 

阿難在毘舍離하야 恒爲四衆 晝夜說法하니 衆人來往殆若佛在니라 有跋耆比丘하야 於彼閣上坐禪할세 以此鬧亂하야 不得遊諸解脫三昧便往阿難所하야 爲說偈言호대

靜處坐樹下하야 心趣於泥洹하야

汝禪莫放逸하라 多說何所爲[五分律;大正藏 22, p.190 ]

 

대부분의 경전을 보면 아난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가섭존자에게 쫓겨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떤 경전에서는 아난이 비야리성에 있으면서 결집하는 대중 가운데 절대로 참여할 수 없다는 가섭존자의 통고만 받은 것으로 기록된 것도 있습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볼 때는 아난이 대중 가운데서 쫓겨난 것이 지배적입니다. 어쨌든 결집할 처음에는 참여하지 못한 것만이 분명합니다.

 

아난이 혼자 있으면서 정진하며 방일하지 않으니 고요하여 시끄러운 것이 없었다. 이것은 아난에게 지금까지 한번도 있어 본 일이 없는 법이었다. 그 때에 아난이 집밖에 있으면서 새끼로 만든 좌상에 앉아 참선하고 밤에는 많이 걸어 다녔다. 밤이 지나고 날이 새려고 하는 새벽에 몸이 극히 피곤하여, ‘내가 지금 지극히 피로하니 좀 앉아야겠다고 생각한 후 앉았다. 앉으니 이제는 눕고 싶어져서 누우려고 하여 머리가 미처 베개에 닿기도 전에 마음이 무루 해탈함을 얻었다.

阿難卽便獨處하야 精進不放逸하야 寂然無亂하니 是阿難未曾有法이니라 阿難在露地敷繩床하고 夜多經行이러니 夜過明相欲出時身疲極이라 念言호대 我今疲極하니 寧可小坐라 하고 念已卽坐하야 坐己方欲臥하야 頭未至枕頃於其中間 心得無漏解脫하니라 [四分律;大正藏 22, p.967 ]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난존자가 깨치지 못해서 처음 결집에 참여하지 못하고 쫓겨난 후 용맹정진으로 공부하여 깨친 뒤에야 결집에 참여해서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되는 경들을 결집하였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런 사실을 보더라 해도 우리 불법은 깨치는 데 있는 것이지 언어문자의 기억이나 총명함에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난존자가 부처님 제자 가운데서 많이 듣기로는 제일이지만 법을 전하는 데 있어서는 가섭존자의 법제자가 됩니다. 아난존자가 30년 동안 부처님을 모시고 다니며 모든 법문을 다 기억하고 있었는데 왜 가섭존자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불법이란 근본이 깨치는 데 있지 언어문자의 기억이나 총명함에 있지 아니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생명입니다.

그 이후로 누구든지 불교역사를 쓸 때는 아난존자를 가섭존자의 법제자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아난존자같이 용맹정진하여 깨쳐서 중도를 정등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어디를 가도 쫓겨날 것입니다.

 

아난이 열반한 후에 모든 비구들이 각각 좌선만 익히고 다시는 경전 읽는 것을 익히지 아니하고 말하되 부처님에게 3가지 일이 있으니 좌선이 제일이다하고 마침내 각각 경전을 소리내어 읽는 것을 폐지하였다.

阿難便般涅槃時諸比丘各習坐禪하고 不復誦習云 佛有三事하니 坐禪第一이라하고 遂各廢諷誦하니라 [分別公德論 2;大正藏 25, p.34 ]

 

아난이 깨친 뒤에야 총명지혜가 소용없음을 체험하고 제자들에게 좌선을 많이 가르쳤습니다. 아난존자가 열반한 뒤에도 제자들이 좌선에만 힘쓰고 경을 익히고 문자를 익히는 것은 폐지했다고 하듯이 인도에 있어서도 불법을 전함에 좌선하여 깨치는 것이 근본이 되어 있음을 인용했습니다.

 

3. 돈오점수사상 비판

 

1)돈오돈수(頓悟頓修)

 

오직 돈교문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가서 삿된 종()을 부수게 하니 미()할 때에는 누겁을 지나고 깨친 즉 찰나간이로다.

唯傳頓敎門하야 出世破邪宗하노니 迷來經累劫이오 悟則刹那間이로다 [六祖壇經]

 

육조 혜능(六祖慧能)대사의 말씀입니다.

선종(禪宗)이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直指人心]’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마에 박힌 구슬 얘기를 했는데 선종이란 그 이마에 있는 구슬을 바로 가리켜 주듯이 자성(自性)을 바로 깨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선이란 곧바로 깨쳐서 성불하는 것이 근본이지 절대로 점차(漸次)를 둔다든지 단계를 둔다든지 하여 시간을 끌며 삥삥 둘러서 가는 공부가 아닙니다.

선종에서 말하는 돈()과는 정반대로 교가(敎家)에서는 점()을 주장합니다. 즉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서 마음을 닦아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나누어 시간적인 점차(漸次)를 둡니다. 선종에서는 단박 찰나[]간에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見性成佛] 법을 주장합니다. 반면에 교문(敎門)에서는 일 찰나간에 성불한다는 것은 모든 중생들에게 다 해당되기는 어려운 일이므로 점차로 한 계단 한 계단 층층계 올라가듯이 시간적으로 거리를 두어 점차(漸次)를 가지고 공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방법도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설하신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생의 근기가 열악(劣惡)하기 때문에 방편(方便)으로 말씀하신 것이지 실법(實法)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선종에서 주장하는 것은 오직 돈()으로서만 성불하는 길을 가르치지 절대로 점차적인 공부를 가르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돈교문만을 전해 세상에 나가 삿된 견해를 부순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교문(頓敎門), 즉 견성법(見性法) 이외에 점차적으로 공부를 가르치고 단계적으로 공부길을 인도하는 것은 모두 다 방편인 동시에 삿된 종()이라는 것입니다.

또 삿된 종[邪宗]이라 하지만 이것도 혹 중생의 근기 따라서 필요치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 어쩔 수 없어 말씀하신 방편의 길을 따라가서 삼아승지겁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기나긴 세월 동안을 보내면서 헛고생 할 필요가 무엇 있습니까? 그러므로 선종에서는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直指人心]’ 돈교문(頓敎門)만을 주장하고 교가의 점차문(漸次門)은 삿된 종()으로 취급해 버리는 것입니다.

선종의 근본이 단박에 깨치는 데[頓悟]있는 만큼 점차문은 육조 혜능(六祖慧能) 대사의 조계정맥(曹溪正脈)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고 그 점에 대해서 앞으로 육조스님의 법문인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중심으로 설명할 것입니다.

 

자기 성품을 스스로 깨쳐서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으니 또한 점차가 없느니라.

自性自悟하야 頓悟頓修하야 亦無漸次니라

 

깨친다[]’고 하는 것은 한번 깨칠 때 근본 무명을 완전히 끊고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또 단박에 깨친다[頓悟]’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단박에 닦는다[頓修]’라고 합니다.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습니다. 전체가 다 마쳐졌다는 뜻이니 등각(等覺)까지 넘어서 묘각(妙覺), 즉 구경각을 성취해 버렸는데 그 뒤에 어떤 점차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육조스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문(頓悟門)에서는 한번 깨침에 있어 구경각을 성취하여 제8아뢰야 근본 무명까지 완전히 끊어버려서 그 뒤에 더 닦을 것이 없는 것을 견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대사께서도 견성한 것을 돈오(頓悟)라고 말씀하시는만치 견성(見性)해 가지고 점수(漸修)하여 성불(成佛)한다는 말은 절대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종의 근본 종취가 돈오돈수(頓悟頓修)이어서 점차를 세우는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점차를 세운다면 그것은 선종이 아니며 육조정종(六祖正宗)이 아닙니다.

 

법에는 돈과 점이 없고 사람에게 영리함과 둔함이 있으니 어리석은 사람은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사람은 단박에 닦느니라.

法無頓漸이오 人有利鈍이니 迷則漸契悟人頓修니라

 

그러면 돈()과 점()이 왜 생겼느냐, 본래 법에 돈()과 점()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육조스님의 말씀은 본래 법() 자체에 있어서는 돈()이니 점()이니 하는 것이 없고 오직 사람에게 있어서 근기가 수승하여 예리한 사람과 어리석어 둔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돈()과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길을 가도 기운이 있는 사람은 씩씩하게 빨리빨리 가는데 기운이 없는 사람은 비실비실 꾸무적거리며 빨리 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근기가 수승하고 예리한 사람은 돈문(頓門)으로 들어가서 지름길로 빨리 도를 성취하고, 근기가 하열하여 둔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방편가설(方便假說)인 점문(漸門)으로 떨어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문(漸門)을 방편인 줄 모르고 실법(實法)인 줄 알아서 그것을 참다운 선()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삿된 종[邪宗]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지로 깨친 사람은 구경각을 증득하기 때문에 더 닦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돈수(頓修)라 하고, 더 닦을 것이 있는 사람은 미()한 사람으로서 깨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육조스님께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금생에 만약 돈교문을 깨치면 깨친 즉 눈 앞에 세존을 보는도다.

今生若悟頓敎門하면 悟則眼前見世尊이로다

 

돈교문을 깨치면 찰나에 눈 앞에 부처를 본다는 것이니 깨치면 곧 성불(成佛)한다는 말입니다. 견성(見性) 이대로가 성불(成佛)이고 돈오(頓悟) 이대로가 성불(成佛)이라는 것을 육조스님이 강조하신 것입니다. 육조스님은 돈오돈수(頓悟頓修)하여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한 것을 견성(見性)이라 하였지 점차(漸次)를 밟아서 닦으라고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돈오돈수(頓悟頓修)하는 돈교문(頓敎門)을 벗어나서 점차(漸次)를 세운다면 육조스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사종(邪宗)이라는 것입니다.

 

()이란 단박에 망념을 없앰이요, ()란 무소득을 깨치는 것이니라.

頓者頓除妄念이요 悟者悟無所得이니라

 

망념(妄念)이란 제8아뢰야 근본 망념을 말하니 제8아뢰야가 남아 있으면 그것은 유소득(有所得)입니다. 깨치기는 깨쳤지만 소득이 있는 것이니 그것은 진짜로 깨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돈오(頓悟)란 일체의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뿌리를 뽑아버린 것이며 근본 미세망념인 제8아뢰야까지도 완전히 끊어져서만 무소득(無所得)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돈()이라 하는 것은 제8아뢰야의 무기식(無記識)도 완전히 벗어나서 무소득(無所得)인 진여(眞如) 본성(本性)을 깨친 것, 불지(佛地)에 이른 것, 성불한 것, 묘각을 성취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앞에서 육조스님이 말씀한 사종(邪宗)을 부순다는 것이 돈오(頓悟)를 드러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돈오문은 무념을 종취로 삼고, 망념이 일어나지 않음을 참뜻으로 삼으며, 청정으로 본체를 삼고, 지혜로써 활용을 삼느니라.

此頓悟門無念으로 爲宗이요 妄念不起爲旨以淸淨爲體以智爲用이니라

 

무념(無念)이란 제8아뢰야의 무기무념(無記無念)이 아니라 진여본성을 바로 깨친 구경각을 성취한 묘각의 무념이요 불지(佛地)의 무념을 말합니다.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망념은 제6식의 분별 망념만이 아니고 근본 미세망념까지 일어나지 않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이니 망념이 있는 이대로는 돈오(頓悟)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 미세망념까지 다 끊어져서 완전한 무념(無念)을 성취하게 되면 무구식(無垢識) 즉 대원경지(大圓鏡智)가 현발하는 동시에 진여자성을 깨치게 되니 이것이 청정(淸淨)으로 본체를 삼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렇게 청정하게 되면 거기에서 일체지(一切智)가 성취되는데 그것을 활용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돈오(頓悟)란 제8아뢰야 무기무념(無記無念)까지도 완전히 끊어지고 참으로 청정무구한 대원경지를 성취하여 일체지가 완전히 현발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서는 점차(漸次)가 있을 수 없고 다시 후수(後修)가 없습니다. 다 공부를 해 마쳐버린 뒤에 어떻게 닦을래야 닦을 것이 있겠습니까? 닦을 것이 있다 하는 것은 아직 병이 덜 나은 데서 하는 말입니다. 이 돈오(頓悟)란 완전히 병이 다 나아서 약을 지을 필요가 없는 경지를 말하고 그것을 견성(見性)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직까지 자기 업식(業識)이라든가 망념(妄念)이라든가가 남아서 약을 더 쓸 필요가 있다면 육조스님이 말하는 조계정통의 선()은 아닙니다. 요사이 선종(禪宗)을 보면 보조스님의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방편이 있어 선계(禪界)를 지배하는데 그 내용이 어찌 되는지 자세히 검토를 하여 비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돈오점수(頓悟漸修)

 

⑴ 「수심결(修心訣)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보조스님의 사상변화는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수심결(修心訣)과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으로 대표되는 초년 시대인데 이때에는 선과 돈오점수가 혼돈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은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 펴낸 절요(節要)시기인데 여기에서는 선과 교를 나누긴 하였지만 여전히 모순과 혼란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돌아가신 뒤의 유고(遺稿)에서 나왔다는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과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의 시기인데 결의론에서는 선과 교를 명백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먼저 수심결(修心訣)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예로부터 모든 성인이 먼저 깨치고 뒤에 닦지 않음이 없으니 닦음을 인연하여 깨친다.

從上諸聖莫不先悟後修하야 因修乃證이니라 [修心訣]

 

옛부터 모든 성인들이 누구나 먼저 깨쳐 신해하고 뒤에 닦아 결국 구경각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깨침의 모양을 밝히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해오(解悟)니 성품과 모양을 밝게 밝히는 것이요, 둘째는 증오(證悟)니 마음이 현묘한 극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若明悟相하면 不出二種이니 一者解悟謂明了性相이오 二者證悟謂心造玄極이니라 [節要]

 

해오(解悟)에서의 ()’라 함은 지해(知解), 즉 알음알이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불법(佛法)의 성품 모양[性相]을 알긴 알았는데 그리하여 분별심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분별심으로 아는 그것을 해오(解悟)라고 합니다. 이 해오(解悟)에 있어서는 번뇌망상과 사량분별이 그대로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증오(證悟)라 하는 것은 실지로 자성을 바로 깨쳐서 구경각을 성취해서 참으로 체득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현묘한 극치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구별이 전자는 구경각을 깨침을 말하고 후자는 사량분별로써 아는 것입니다. 심해(心解), 지해(知解)라 하기도 합니다. 해오에서는 구경각에 망상이 없다는 것을 이해했을 뿐이지 실지는 자기 마음에 체험이 되지 못한 것이고, 증오(證悟)란 완전히 마음으로 체험해 구경각을 성취한 것을 말합니다. 앞으로 법문해나가면서 이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관계가 번번이 나오는데 철저히 이해해야 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육조선(六祖禪)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는 증오(證悟), 즉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오(解悟)인 지해(知解)는 절대로 배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해(知解)라는 것, 해오(解悟)라는 것은 삿된 종[邪宗]인 것입니다.

 

다만 번뇌의 마음 속에 본래 깨달음의 성품이 있으니 마치 거울에 밝은 본성이 있는 것과 같음을 신해하여 결정코 의심이 없음을 해오라고 한다.

但信解煩惱心中本有覺性如鏡有明性하야 決定無疑名爲解悟니라 [節要]

 

중생이 번뇌망상 그대로 있긴 있지만 번뇌망상 그 자체가 공()해서 모든 부처님의 불성(佛性)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이것을 믿고 알아 여기에 조금도 의심이 없는 것을 해오(解悟)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실지로 깨쳐서 체득한 것이 아니고 분별심으로 믿고 안다[信解]는 것입니다.

 

규봉이 먼저 해오를 하고 뒤에 닦는다는 말의 뜻을 깊이 밝혀 말하였다. 얼음 못이 전부 물임을 아나 따뜻한 기운을 빌려 녹이고, 범부가 부처임을 해오하나 법력을 북돋우어 닦음을 도운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흘러 윤택하여 바야흐로 씻는 공을 나타내고, 망상이 다하면 신령하게 통하여 빛에 통하는 작용이 나타난다.

圭峰深明先悟後修之義 曰識氷池而全水하야 借陽氣以鎔消하고 悟凡夫而卽佛하야 資法力以熏修氷消則水流潤하야 方呈之功하고 妄盡則靈通하야 應現通光之用이니라

 

이 글은 수심결에 나오는 것인데, 돈오점수(頓悟漸修), 즉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다는[先悟後修]하는 근본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못 전체에 얼음이 꽝꽝 얼어 붙어 있는데, 얼음이 본래는 물이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이것을 신해(信解)니 해오(解悟)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범부인 중생 이대로가 본래 부처라는 것, 범부의 본래 성품이 천진해서 부처님의 성품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 해오(解悟)라는 것입니다. 알긴 알지만, 실지에 있어서 부처를 이룬 것은 아니고 범부 그대로 있습니다. 얼음 그대로가 물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았지만은 얼음은 그대로 있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알았지만 중생의 번뇌망상 그대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력(法力)에 의지해서 자주 닦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돈오점수는 곧 선오후수(先悟後收)입니다. 여기서 돈오(頓悟)라 하는 것은 얼음이 본래 물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았지만 얼음이 그대로 있고,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확실히 알았지만 중생 그대로임을 깨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돈오(頓悟)를 해오(解悟)라고 합니다. 그러니만치 얼음이 그대로 있듯이 망상은 그대로 있으니까, 얼음을 녹이기 위해서는 따뜻한 기운을 빌려야 하고, 망상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꾸 자꾸 닦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점수(漸修)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앞에서 말한 육조스님의 선종 정맥에서 말하는 돈오하고는 정반대입니다. 선종정맥에서는 돈오(頓悟)라 하면 일체 망상이 다 끊어진 것을 말했습니다. 돈오한 동시에 돈수(頓修)여서 후수(後修)가 필요없습니다. 선종정맥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는 얼음이 본래 물임을 안 것만으로는 되지 않고, 얼음이 녹아서 물로 완전히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 자체도 볼 수 없는 무소득(無所得)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유소득(有所得)이니 제8아뢰야 무심(無心)을 물에다 비유한 것입니다.

한편 돈오점수에서 주장하는 깨달음[]이란 얼음이 본래 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아직 얼음이 그대로 있고,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알았지만 망상이 그대로 있으니, 따뜻한 기운을 빌려 얼음을 녹이듯이 공부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해서 망상을 다 끊어야 하니 거기에 점수가 필요하고 그래야 성불한다는 것입니다. 육조의 선종정맥에서 주장하는 돈오돈수는 그런 것이 아니고 깨달음[]이라 하면 일체 망념이 다 끊어지고 망념이 끊어진 자체, 무심의 경계 이것도 벗어남을 말합니다. 얼음이 다 녹아 물이 되어 물이라고 하는 자체도 볼 수 없는 이 구경지(究竟地)를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돈오(頓悟)라는 말만으로 겉으로 볼 때는 다 같지만, 깨달음의 내용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그래서 닦아야 될 수 있는, 점수라야 될 수 있는 이것을 사종(邪宗)이라 하고 지해종(知解宗)이라고 했지 육조스님의 정전이라고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 돈오점수를 처음 주장한 사람은 하택 신회(邊澤神會)이며, 그 주장을 따르는 이가 규봉(唯峰)으로 규봉이 돈오점수를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규봉이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다는 뜻을 총괄하여 결정하였다. 자성이 원래 번뇌가 없고 무루지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단박에 깨달아[頓悟] 이것에 의지하여 닦는 것을 최상승선이라 하며 또한 여래청정선이라 한다. 만약 능히 생각생각에 닦아 익히면 자연히 점점 백천삼매를 얻는다. 달마문하에 구르고 펼쳐 서로 전한 것이 이 선이다. 곧 돈오점수의 뜻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가 없어도 옳지 않다.

圭峰摠判先悟後修之義 云頓悟此性元無煩惱하며 無漏智性本自具足하야 與佛無殊하나니 依此而修者是名最上乘禪이며 亦名如來淸淨禪也若能念念修習하면 自然漸得百千三昧하나니 達磨門下轉展相傳者是此禪也라 하니 則頓悟漸修之義如車二輪하야 闕一不可니라 [修心訣]

 

방금 앞에서도 말했지만 돈오점수를 교가(敎家)에서만 말한 것이라 하면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조스님은 달마문하에 굴리고 펼쳐 서로 전한 것이 돈오점수의 선()이라고 선언하여 버렸으니, 이것이 큰 문제이며 육조스님이 말씀하신 선과는 정면 충돌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육조스님은 돈오돈수를 말하고 점차(漸次)가 없는 것을 말했는데, 여기서는 돈오를 해서 점수를 한다 하였으니 육조정전(六祖正傳)의 선()과는 근본적으로 반대입니다. 또 돈오점수를 달마의 선종이라고 말함으로써 일대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자기의 본성을 보니 이 자성자리에 원래 번뇌가 없으며 무루지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구족하여 모든 부처와 더불어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돈오(頓悟)라고 한다. 비록 본성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쳤다 할지라도 시작없는 습기를 갑자기 단박 없애버리기가 어려운 까닭으로 깨침을 의지해 닦아서 점점 훈습하며 노력하여 오래 성태(聖胎)를 길러 마침내 성인을 이루는 까닭에 점수(漸修)라고 말한다.

一念廻光하야 見本自性하야 而此性地元無煩惱하며 無漏智性本自具足하야 卽與諸佛分毫不殊일새 云頓悟也雖悟本性與佛無殊無始習氣難來頓除故依悟而修하야 漸熏功成하야 長養聖胎하야 久久成聖일새 故云漸修也니라

 

여기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이 얼음이 본래 물인 것을 알았지만 얼음은 그대로 있고,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은 알았지만 망상이 그대로 있는 것을 돈오니 견성(見性)이니 하고 있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입이 아프도록 말했듯이 부처님 말씀하신 것이나 마명보살이 기신론에서 말씀하신 것이나, 그 뒤에 원효나 현수같은 대법사들이 말씀하신 것이나 선종의 육조 혜능대사가 말씀하신 것은 모두 십지보살도 견성하지 못하였다’,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견성이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 오매(寤寐)가 일여(一如)하여 대무심지에 있다 하여도 이것은 견성이 아니라고 했는데 보조스님의 수심결(修心訣)에서는 번뇌망상이 그대로 있는 것을 견성이라 해버렸으니 여기에도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돈오점수를 말할 때에 달마선이 돈오점수라 한 것도 선종정맥사상과 정반대가 되어 있고, 이것을 또 견성이라 한 것도 정반대가 되어 있습니다.

 

이 돈오와 점수 두 가지 문은 일천 성인의 가는 길이다.

此頓漸兩門千聖軌轍也니라

 

일천 성인 일만 성인이 다 이 돈오점수 두 가지 문에 의지해서 공부를 성취했다는 말입니다.

 

자성이 본래 공적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돈오하였으나 이 옛날 습기를 갑자기 없애기 어려운 까닭에 역순 경계를 만나면 성내고 기뻐하거나 옳고 그름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여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다. 만약 반야로 노력하고 힘쓰지 않으면 어찌 무명을 다스려서 크게 쉰 곳에 이를 수 있겠는가?

頓悟自性本來空寂하야 與佛無殊而此舊習來難頓斷故逢順逆境하면 瞋喜是非熾然起滅하며 客塵煩惱與前無殊하나니 若不以般若中功中着力하면 焉能對治無明하야 得到大休歇之地리오

 

돈오점수 사상에서 말하는 돈오(頓悟)의 내용입니다. 즉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없다 하였으니 중생 그대로입니다.

중생이 부처인 것은 알았지만 일체 망상이 다 끊어져서 실지로 본성을 바로 깨치기 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뒤에 닦아서[後修] 무명을 다스려서 구경에 이른다는 것이 점수(漸修)입니다. 돈오한 뒤에는 어떻게 점수(漸修)해야 되는가?

 

깨친 뒤에는 오랫동안 모름지기 비추어 살펴서 망념이 홀연히 일어나거든 결코 따라가지 말고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구경이니 천하 선지식의 깨친 뒤 목우행(牧牛行)이 이것이다.

悟後長須照察하야 妄念忽起어든 都不隨之하고 損之又損하야 以至無爲하야사 方始究竟이니 天下善知識悟後牧牛行是也니라

 

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 알았지만 망상은 그대로 있으니까 지해심으로써 자꾸 덜고 덜어서 망상이 다 끊어져야만 무위(無爲)에 들어가서 구경이 되며, 천하 선지식들도 망상이 있는 거기에서 자꾸자꾸 목우행을 하여 비로소 구경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목우행(牧牛行)을 보림(保任)이라고도 하는데 점수설(漸修說)에서 말하는 것은 예전 큰 스님들의 목우행과는 천지차이입니다. 자명(慈明)스님이 지은 목동가(牧童歌)가 있는데 거기 보면 참으로 구경을 성취해서 호호탕탕히 자재하고 무애한 행을 목우행이라 하였지 망상이 전과 다름없는 것을 목우행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먼저 돈오하였으나 번뇌가 두텁고 익힌 업이 여물고 무거워 경계를 대함에 생각생각에 정을 낳고 인연을 만남에 마음마음에 상대하여 혼침산란에 시달려 항상한 적지(寂知)를 잃어버리는 자는 상()을 따르는 문인 정혜를 빌어서 다스림을 잊지 않고 혼침과 산란을 균등히 조복하여 무위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雖先頓悟煩惱濃厚하고 習業堅重하야 對境而念念生情하고 遇緣而心心作對하야 被他昏亂使殺하야 昧却寂知常然者卽借隨相門定慧하야 不忘對治하고 均調昏亂하야 以入無爲卽其宜矣

 

비록 깨치긴 깨쳤으나 번뇌가 많고 익힌 업이 무거워서 경계를 대하거나 인연을 만나거나 하면 혼침과 산란이 그대로 있습니다. 망상이 그대로 있느니만치 망상이 일어났을 때는 산란이 되고 또 망상이 없을 때에는 혼침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이 혼침 아니면 산란이고 산란 아니면 혼침이니 그렇기 때문에 객진의 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는것입니다. 그러니 이 혼침산란을 정혜(定慧)를 빌어서 다스리고 균등히 조절하여 구경을 성취한다고 합니다.

 

먼저 반드시 돈오하여 바야흐로 점수한다 함은 이는 해오이다. 장애를 없앰으로 말하면 해가 단박 떠오름에 서리와 이슬이 점점 사라지고, 덕을 이룸으로 말하면 어린 아이를 낳음에 기운이 점점 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화엄경에 말씀하되, 처음 발심할 때 정각을 이루고 연후에 삼현십성을 차례로 닦아 깨친다고 하였다.

先須頓悟하야 方可漸修者此約解悟也約斷障說하면 如日頓出霜露漸消約成德說하면 如孩子頓生志氣漸立이니라 華嚴호대 初發心時卽成正覺然後三賢十聖次第修證이라하니라 [節要]

 

처음 발심할 때 정각을 이룬다함은 우리의 본성이 본래 부처인 것을 알았다는 것이지 깨쳤다는 뜻은 아닙니다. 삼현(三賢)의 끝이 40()이며 십지(十地)의 끝이 50위인데 자꾸 계단을 밟아 올라가듯이 삼현십성을 차례로 닦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오돈수라 함은 이는 상상지(上上智)를 말함이니 근기의 성품과 욕락이 모두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고 대총지를 증득한다.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다. 이 사람의 세 가지 업은 오직 스스로 분명히 밝아서 다른 사람이 미칠 바 아니다. 장애를 끊음은 마치 한 타래 실을 끊음에 만 가닥이 단박 끊어짐과 같고, 덕을 닦음에는 마치 한 타래 실을 물들임에 만 가닥이 물드는 것과 같다. 하택이 말하였다. ‘한 생각에 본래 성품과 상응하여 팔만 바라밀행을 일시에 함께 쓴다.’ 또한 사적상에서 말하면 우두 융대사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말한다.

頓悟頓修者此說上上智根性樂欲俱勝하야 一聞千悟하고 得大±하야 一念不生하야 前後際斷이니 此人三業唯獨自明了하야 餘人所不及이니라 斷障如斬一綟絲萬條頓斷이오 修德如染一綟絲萬條頓色이니라 荷澤云一念與本性相應하야 八萬波羅蜜行一時齊用也라하니 且就事迹而言之컨댄 如牛頭融大師之類也니라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전자는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알았지만 번뇌망상이 그대로 있으니까 차제로 삼현십성을 닦아서 올라가는 것을 말하고, 후자는 한칼에 한 뭉치 실을 다 베어버리듯이, 또한 뭉치실을 다 물들여 버리듯이 하나 끊을 때 전체가 다 끊어지고 하나 물들일 때 전체가 다 물들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다[一念不生 前後際斷]고 하였는데 만약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이것도 육조스님이 말하는 돈오돈수는 아닙니다. 여기에 머물러만 있어서는 제8아뢰야식에 주저앉게 되어 실지 돈오돈수가 아닙니다.

 

만약 신해가 있으면 옛날 성인과 손을 잡고 같이 간다.

若有信解處하면 與古聖으로 把手共行이니라

 

만약 믿음이 이룩되면 의정이 단박에 쉬어 올바른 견해가 나서 스스로 긍정하는 곳에 이르니 이것이 해오이다. 믿음의 원인 속에서 모든 부처님 과덕에 계합하여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아야 바야흐로 믿음을 이룬다.

若信得及하면 疑情頓息하야 發眞正見解하야 自到自肯之地 則是解悟處也

亦云於信因中契諸佛果德分毫不殊하야사 方成信也라 하니라 [節要]

 

믿음을 이룸이란 얼음이 본래 물이고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확실히 믿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믿어서 망분별의 의심이 없는데 이르는 것을 해오(解悟)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중생이 부처님 자성과 똑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것을 확신해서 의심하지 않는 데에서 실질적인 믿음, 신해(信解)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해오(解悟)와 신해(信解)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하였습니다.

 

먼저 모름지기 자신의 성품이 청정하고 묘한 마음임을 신해(信解)하여 성품을 의지해 선()을 닦는다. 이것이 옛부터 스스로 부처의 마음을 닦고 스스로 부처님 도를 이루는 긴요한 기술이다.

先須信解自身性淨妙心하야사 方能依性修禪이니 是乃從上己來自修佛心하야 自成佛道之要術也니라 [結社文]

 

보조스님이 결사문에서 돈오점수를 주장한 말씀입니다. 신해(信解)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만 내용은 해오(解悟)와 똑 같습니다.

 

먼저 모름지기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함을 신해하고 신해에 의지하여 차차로 닦음이 무방하다.

先須信解心性本淨하고 煩惱本空하야 而不妨依解熏修者也니라

 

신해, 즉 해오에 의지해서 차차로 닦는다는 것, 즉 점수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논하듯이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하다는 이치는 최상승선에 해당된다.

今之所論心性本淨하고 煩惱本空之義是當最上乘禪이니라 [結社文]

 

규봉의 도서(都序)에 있는 말을 보조스님이 인용하였는데 앞에서 달마문하에서 굴리어 펴서 서로 전한 것은 이 선이다고 말한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결사문(結社文)에서도 신해(信解)가 곧 달마 최상승선이라고 해버렸습니다.

 

만약 큰 마음의 중생이 이 최상승 법문에 의지하여 자기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요 자기의 성품이 법의 성품임을 결정코 신해하여 이 신해에 의지해서 닦는 이는 상근기이다.

若是大心衆生依此最上乘法門하야 決定信解自心是佛心이요 自性是法性하야 依解而修者爲上根也니라 [修心訣]

 

신해(信解)에 의지하여 점수를 하는 것을 상근기라 하고 결국 최상승법문이라 하고, 달마가 바로 전한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돈오했다는 것, 신해하고 해오했다는 그 깨친 정도가 어떠냐 하는 것입니다.

 

처음은 아직 말을 하지 못하나(처음 깨친 사람은 설법이나 다른 사람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모두 적확하지 않다.) 점점 말을 하게 됨에 이르고(법을 해설한다), 점점 행동하여(십지의 십바라밀이다) 바로 평소같이 (성불)된다.

初未能言이나(初悟之人說法答他問難悉未的也니라) 乃至漸語하여(解說法也) 漸漸行季하야 (十地十婆羅蜜也 ) 直至平復 (成佛)하나니라 [節要]

 

보조스님이 말하는 돈오한 사람, 해오한 사람의 경지가 어찌 되느냐 하면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은 알았지만은, 망상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법문도 옳게 못하고 문답도 못하지만 점점 닦아가서 부처를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선종정맥에서는 깨쳐서 법담을 잘 한다 하여도 그것을 잘 인정하지 아니하고 원오스님 같은 이는 수좌를 저 폭포수에 집어넣고 아주 어려운 질문을 물어서 척척 대답하니까 그때서야 옳게 알았다고 인정해 주는 것과는 전연 다릅니다. 그런데 규봉이나 보조스님은 아직까지 법문도 못하고 문답도 못하는 것을 돈오하고, 해오라고 하여 깨쳤다고 하니 이것을 어찌 선종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해오(解悟)한 사람의 자리[]는 어떻게 되느냐?

 

해오 후에 십신 처음 자리에 드느니라.

悟後入十信初位니라 [節要]

 

십신(十信)이라는 것은 삼현(三賢)의 앞입니다. 삼현의 앞인 십신위(十信位)를 오해(悟解)라 하고, 해오(解悟)라 하고, 신해(信解)라 하고, 돈오(頓悟)라 하고, 견성(見性)이라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나 고불고조(古佛古祖)는 모두 다 십지등각도 견성을 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십신위(十信位)를 견성위(見性位)라 했으니 문제가 달라져도 너무 많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변명하기를 원교십신(圓敎十信)이라고 말합니다. 원교십신이란 원융무애하여 십신(十信)이 십지(十地)고 십지(十地)가 십신(十信)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변명하지만 그 실지의 경계는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없어 번뇌망상은 그대로 있느니만치 십신(十信)은 어디까지나 십신(十信)이지 이것이 십지(十地)는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성이 청정하고 자성이 해탈임을 돈오하여 점점 닦아서 때를 여읜 청정과 때를 여읜 해탈을 얻게 된다.

必須頓悟自性淸淨自性解脫하야 漸修令得離垢淸淨離垢解脫이니라 [圭峰]

 

때를 여읜 청정’, ‘때를 여읜 해탈이란 말은 섭대승론에 나온 말입니다. 규봉이 돈오점수를 설명할 적에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안 것이 자성 청정과 자성 해탈을 깨친 것이라 하고, 그리고 점점 닦아서 망상을 제거하여 실지 때를 다 없애버리면 때를 여읜 청정[離垢淸淨], 때를 여읜 해탈[離垢解脫]을 얻게 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돈오점수에서 주장하는 것은 자성이 청정함과 자성이 해탈임을 먼저 깨달아서 다음에 점수해서 때를 여읜 청정과 때를 여읜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 근본인 것입니다.

그런데 선종정맥에서는 자성청정(自性淸淨)이나 이구청정(離垢淸淨)이나 할 것 없이 실지로 구경각을 성취해야 이것을 견성(見性)이라 하고 돈오(頓悟)라 하였지 그 이외는 돈오라고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육조스님이 말씀한 바에 따르면 이런 것이 전부 사종(邪宗)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이 세상에 나와 사종(邪宗)을 부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홍주는 돈오문엔 비록 가까우나 적중하지 못하고, 점수문엔 전연 어긋난다.

洪州於頓悟門雖近而未的이오 於漸修門而全乖니라 [圭峰一節要]

 

홍주(洪州)’는 홍주에 계신 마조(馬祖)스님을 말합니다. 마조는 돈오문에 가깝긴 가까운데 확실히 바로 깨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조스님이 말씀하는 돈오는 설사 십지등각이라 해도 침공체적(沈空滯寂)해서 견성한 것이 아니고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견성이니, 8아뢰야 무심경계까지도 완전히 벗어난 참다운 무념의 상태를 성취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규봉스님은 번뇌망상이 있는 그대로를 견성이라 하였으니, 규봉이 볼 때는 마조스님이 말하는 견성이 돈오문에 가깝긴 가까운데 틀렸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조(馬祖)는 점수문에 있어서는 도무지 맞는 것이 없어 잘못되어서 전부 어긋난다고 규봉도 주장합니다. 마조에게는 점수문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조스님은 구경각을 성취한 데서 견성이라 하고 돈오라 하여 절대로 후수(後修)가 없습니다. 규봉 자기가 보는 것은 마조스님에게 점수문이 없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마조스님은 병이 다 나아서 약을 더 쓸 필요가 없는 입장이고 규봉스님은 아직 병이 그대로 있어 약을 더 써야 할 입장입니다. 규봉스님 말대로 하자면 병 다 나은 사람도 생다리를 부러뜨리고, 생배를 째서 억지로 병원으로 가서 약을 써야 하는 격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편을 가야 하겠습니까? 결국은 병신을 따라가야 될건가 아니면 성한 사람을 따라가야 될건가, 그것은 스스로 생각해 보면 자연히 알 걸로 생각됩니다. 도를 닦는 근본은 병이 다 나아서 약을 쓸 필요없이 참으로 자유자재한 근본 해탈이 목적이지, 실제로 병 그대로 가지고 약을 먹고 붕대를 첩첩이 감고 다니면서 내가 돈오했다, 견성했다는 길을 어찌 따라갈 수 있겠습니다.

규봉스님의 입장과 마조스님의 입장이 이렇게 틀려 있습니다.

선종에 있어서 누구든지간에 마조가 정맥이냐 규봉이 정맥이냐 하면, 천하의 선종에서 규봉을 지해종(知解宗)이라 배격을 했지 마조를 틀렸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조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오직 규봉 혼자만이고 그 규봉을 지지한 사람이 보조스님입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망정의 습기가 다하지 않았으면 곧 깨친 마음이 원만하지 않기에 그러하다. 혹 마음을 깨침이 원만하지 못하면 모름지기 아직 원만하지 못한 자취를 쓸어버려야 하니 다시 생애를 세워서 크게 깨침을 기약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혹 깨친 마음이 다하지 못함을 실천으로써 다하고자 하면 마치 섶을 지고 불을 끄려는 것과 같아서 더욱 불타오를 뿐이다.

若有纖毫라도 情習未盡하면 卽是悟心不圓而然也或心悟不圓하면 須是掃其未圓之跡이니 別立生涯하야 以期大徹可也其或謂悟心未盡以履踐으로 盡之라하면 如抱薪救焚하야 益其熾矣니라 [中峰 山房夜話]

 

마음을 깨침이 원만치 못하다 함은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는 경계는 말할 것도 없고 아주 미세한 제8아뢰야 근본무명이 남아 있는 경계를 말한다. 실지로 바로 깨치지 못한 것임을 확실히 알 때는 다시 발심하여 크게 철저하게 깨쳐야 하는데, 깨치지 못한 상태에서 이천(履踐) 즉 보림(保任)한다, 점수(漸修)한다 하여 공부를 성취하려는 사람은 섶을 지고 불을 끄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불은 끄지 못하고 불꽃만 더욱 사납게 타오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⑵ 「절요(節要)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돈오점수(頓悟漸修)사상은 교가(敎家)에서는 혹 방편적으로 용납이 되지만 조계 선종정맥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라는 것을 대중들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해동(海東)으로 와서 보조스님은 그런 사상을 이어받게 되었든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돈오점수사상은 보조스님 저술에 있어서 수심결(修心訣)결사문(結社文)의 두 저술에서 근본이 되고 있습니다. 결사문은 보조스님 서른세살에 팔공산 거조암(居祖菴)에 계실 때 지은 글입니다. 수심결은 지은 연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사상적으로 봐서 결사문이후에 된 저술은 사상의 전환이 많은데 그 전환점을 기준하여 보면 수심결결사문지을 때와 같은 보조스님 초기의 저술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보조스님이 서른세살에 거조암(居祖庵)에 계시면서 결사문을 짓고 약 십년 후인 마흔 한 살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대혜어록을 보고 얻은 바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전에는 돈오해서 점수한다는 그 사상의 범위 안에 있었는데 상무주암으로 가서 얻은 바가 있고부터는 정해(情解) 즉 지해분별을 원수와 같이 여기고 번뇌망상을 벗어나서 바로 안락하여 지해가 조금 높아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무주암에 몇 해 계시다가 송광사로 가서 한 십년 계시다 오십세살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반년 전 오십두살 되시던 겨울에 완성한 책이 절요(節要)인데, 여기에서는 수심결이나 결사문과는 달리 사상적 전환이 있습니다. 절요(節要)에 있어서는 돈오점수(頓悟漸修)는 교종(敎宗)에 해당하는 것이지 선종(禪宗)은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하택 신회는 지해종사(知解宗師). 비록 조계의 정통은 아니나 오해(悟解)가 높고 밝아서 결택이 밝으니 종밀스님이 그 종의 뜻을 이은 까닭으로 이 책에서 그것을 펴서 활연히 볼 수 있게 한다. 지금 교를 인해서 마음을 깨친 이를 위하여 번거로운 말을 제거하고 요점을 드러내서 관행(觀行)의 귀감으로 삼는다.

邊澤神會是知解宗師雖未爲曹溪嫡子이나 悟解高明하야 決澤了然하니 密師宗承其旨故於此錄中伸而明之하야 豁然可見이라 今爲因敎悟心之者하야 除去繁事하고 鈔出網要하야 以爲觀行龜鑑하노라 [節要]

 

수심결이나 결사문의 시절에는 돈오점수를 달마선이라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20년 후에 지은 절요에 와서는 돈오점수는 지해종사(知解宗師)인 하택의 사상인데 그것을 규봉이 이었다고 선언하고 이것은 교가(敎家)를 위해서 한다는 조건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를 보다가 마음을 깨쳤다 함은 해오(解悟)이고 신해(信解)를 말합니다. 해오를 성취하여 깨쳤다고 하지만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없는 사람들, 즉 교가를 위해서 돈오점수를 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규봉(唯峰)스님은 어떤 분인가? 규봉스님은 처음에는 하택의 법을 이어 받아 선종이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청량국사의 화엄소초(華嚴疏鈔)를 보고 완전히 화엄종으로 가버린 스님, 즉 선을 버리고 교에 들어간[捨禪入敎] 스님입니다.

 

밥 먹는 것도 잊고 잠도 자지 않고 밤새도록 살펴서 소()로써 경()을 통하고 초()로써 소를 해석하니 일생의 남은 의심이 모두 다 없어져 버리고, 바깥 경계와 안의 마음이 활연히 간격이 없어졌나이다. 서원컨대 세세생생토록 목숨이 다하도록 널리 펴게하여 주소서.

忘飧輟寢하고 夙夜披尋하야 以疏通經하고 以鈔繹疏하니 一生餘疑蕩如瑕하야 外境內心豁然無隔하니 誓願生生盡命弘闡하야지이다 [圭峰 上淸涼書]

 

이것은 규봉스님이 청량국사에게 한 편지입니다.

규봉이 참선을 닦았지만 의심도 많고 경계에 통하지 못하였는데 청량국사의 화엄소초를 보고 침식을 잊고 연구하여 의심을 완전히 풀고 자기 경계도 완전히 통하게 되었으니 이 화경소초를 목숨이 다하도록 받들고 펴겠다고 서원하고 청량국사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의 화장세계에 능히 나를 따라 노니는 사람은 바로 너로구나!

毘盧華藏能隨我以遊者其汝乎인저 [淸涼 印可圭峰)

 

규봉의 편지에 대한 청량국사가 답한 부분입니다.

비로자나불의 화장세계, 즉 화엄경 4법계(四法界)에서 능히 나를 따라서 같이 놀 사람은 바로 너라고 청량국사가 규봉스님을 아주 원만하게 인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규봉스님은 실질적으로 청량국사의 제자가 되어 화엄오조(華嚴五祖)가 되었습니다. 규봉스님은 교가의 입장에서 선()을 취급하다 보니 선()과 교()를 혼동하여 돈오점수가 달마선이라고 끝끝내 평생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보조스님은 초년에는 자기가 잘 몰라서 돈오점수가 선종이라고 주장했지만 말년에 와서는 완전히 달라졌으니 이것이 또 규봉스님과 보조스님과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규봉스님은 어째서 평생을 돈오점수를 주장했는가?

 

좋아하는 생각은 막기 어렵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마침내 대중을 떠나 산에 들어가서 정()과 혜()를 고르게 닦아 생각 쉬기를 모두 10년을 하였다. 그랬더니 창틈에 햇빛이 비치면 티끌먼지가 요란하듯, 맑은 물 속에 그림자가 두렷이 비치듯, 미세한 습정이 기멸하면 고요한 지혜에 비춰지고 차별된 법의(法義)가 늘어서면 빈 마음에 드러났다.

自慮愛見難防하야 遂捨衆入山하야 習定均慧하야 前後息慮相計十年하니 微細習情起滅하야 彰於靜慧하고 差別法義羅列하야 見於空心하야 虛隙日光纖塵擾擾하고 淸潭水底影像照照하니라 [都序]

 

규봉스님이 평생토록 돈오점수를 버리지 못한 것은 여기서 고백하고 있는 경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임이 확실합니다. 한 십년 동안 정()과 혜()를 닦으니 고요한 지혜가 조금 있기는 있으나 그 가운데 망상이 먼지 일어나듯 하니 마치 아침에 해가 뜰 때 창문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면 거기에 먼지가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듯하고 맑은 못에 그림자 모양이 환하게 밝으나 모든 차별법과 망상이 생멸을 거듭하고 있다는 경계입니다. 규봉스님이 만약 이 경계를 벗어났다면 완전히 병이 다 나은 얘기를 할텐데 그렇지 못하니 언제든지 병신의 말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병이 다 낫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이런 입장에서 불교를 보게 되니까 달마선이 돈오점수라고 주장하게 되고 돈오점수사상이 규봉의 근본사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보조스님은 초년에 잘 모르고 수심결이나 결사문을 지을 때는 돈오점수를 달마선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절요에서는 분명히 바로 잡았습니다.

 

그 본체를 몸소 증득한 후에 그를 인가하여 남은 의심을 다 끊게 한 까닭에 묵묵히 심인을 전했다고 한다. 여섯 대까지 서로 전한 것이 모두 이와 같다.

是親證其體 然後印之하야 令絶餘疑故云黙傳心印이라하나六代相傳皆如此也니라 [節要]

 

이것은 절요의 말씀인데 6, 즉 달마스님으로부터 육조 혜능스님까지 전해 내려오는 법이 모두 다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수심결에 있어서는 달마스님이 전한 법이 모두 해오(解悟)라 하였는데 그후 한 십년 지난 뒤인 절요(節要)에 와서는 선()은 해오가 아니고 증오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히고 있으니 마침내 보조스님이 사상을 전환한 것이 됩니다.

 

먼저 모름지기 돈오하고 바야흐로 점수한다 함은 해오(解悟)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니라. 지금 또 원돈신해자가 말함이요, 교외별전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有云先須頓悟하고 方可漸修者此約解悟也今且約圓頓信解者信之爾若敎外別傳不在此限이니라 [節要]

 

앞 구절은 규봉스님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절요(節要)목판본에는 此約解言也라 되어 있는데 중국판이나 일본판에서 보면 此約解悟也라고 분명히 나와 있느니만치 한국판이 잘못되었습니다. 처음 규봉스님 말씀을 인용하여 많은 말씀을 해놓고 끝머리에 가서 결론으로 이것은 원돈신해자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 하고서 교외별전은 돈오점수가 아니므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보조스님이 말년에 가서는 돈오점수가 선종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말년 뿐 아니라 초년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조사문하에서 이심전심으로 비밀한 뜻을 지적해 전해주는 경우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화상이 조상의 도를 깨쳐서 반야를 펼쳐낼 이가 말세에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권수정혜결사문에서 대승 경론의 이치를 들어 명확한 논거를 삼고, 현전문(現傳門)에서 신해(信解)가 틔워지는 실마리(동기이치)를 간단히 판별하였다.

若是祖宗門下以心傳心하야 密意指授之處不在此限이니라 琪和尙云能悟祖道하야 發揮般若者末季未之有也此勸修文中皆依大乘經論之義하야 爲明證하고 略辨現傳門信解發明之由致하노라 [結社文]

 

이것을 보면 초년에 있어서도 돈오점수가 조종문하의 근본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실지로 철두철미하게 교외별전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사상이 들어 있었다면 달마문하에서 구르고 펴 서로 전한 이 돈오점수의 선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습니까? 그것은 초년에는 확실한 견해가 없고 분명히 몰랐기 때문에, 즉 선과 교를 혼동해서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라고 봅니다.

어쨌든 절요에서 보조스님 자신이 돈오점수는 원돈신해의 교가(敎家)를 위해서 하는 말이지 교외별전은 절대로 아니다라고 말한만치 돈오점수가 선종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법문은 또한 말을 의지해서 해오를 일으켜 들어가는 사람을 위해서 법에는 수연과 불변의 두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는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있음을 자세히 분별하였다. 그러나 만약 오직 말에 의지하여 지해만 내고 몸을 바꾸는 길을 알지 못하면 비록 종일 관찰하나 도리어 지해에 얽매이는 바 되어 쉴 때가 없다. 그러므로 다시 지금 납승 문하에서 말을 떠나 들어가서 단박에 지해를 잊는 사람을 위함이니 비록 규봉스님이 좋아하는 바는 아니나 조사 선지식이 경절의 방편으로 배우는 이를 제접하는 언구를 간략히 이끌어서 이 뒤에 부쳐놓아 참선하는 뛰어난 사람들로 하여금 몸 살아나는 한 가닥 활로를 알게 한다.

上來所擧法門並是爲依言生解悟入者하야 委辨法有隨緣不變二義하고 人有頓悟漸修兩門이라이나 若若一向依言生解하야 不知轉身之路하면 雖終日觀察이나 轉爲知解所縛하야 未有休歇時일새 更爲今時僧門下離言得入하야 頓亡知解之者하노니 雖非密師所尙이나 略引祖師善知識以徑截閒方便으로 提接學者所有言句하야 係於此後하야 今參禪峻流知有出身-條活路耳로다 [節要]

 

이것은 절요(節要)의 결론 부분입니다. 돈오점수는 말을 의지해 알음알이를 내는[知解] 자들을 위해서 설명하기는 하지만 영원토록 그 지해(知解)에 얽매여서는 참으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니, 납승문하 곧 선종을 의지해 일체 언구를 떠나야만 깨친다는 것입니다. ‘단박에 지해를 잊어버리는선종은 규봉스님이 좋아하지 않고 반대하는 것이지만 그렇지만 규봉이 반대한다고 선을 아주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 보조스님의 입장입니다.

보조스님이 초년에는 선()과 교()를 혼동해서 돈오점수를 선종이라고 주장했지만 돌아가시기 반년 전 이 절요(節要)를 낼 때에는 사상이 전환된 것이 확실합니다. 보조스님 자신이 돈오점수는 교가(敎家)의 지해종(知解宗)을 위한 것이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위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했으니만큼 참선을 한다는 사람이면 지해종(知解宗)을 따라가야 하겠습니까, 선종정맥(禪宗正脈)을 따라가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요사이 우리나라의 선방을 볼 것 같으면 내가 젊은 날 행각할 때나 늙은 지금이나, 참선한다는 사람들이 보조스님의 초년에 잘못된 수심결만 보고 자꾸 돈오점수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꽉 찼습니다. 돈오점수를 순전히 선사상(禪思想)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보조스님을 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팔백년 후인 지금에 돈오점수가 선종사상(禪宗思想)이라고 주장한다면 보조스님이 살아계셔도 웃을 일입니다. 거듭하는 말입니다만 규봉스님은 평생동안 교()와 선()을 완전히 구별하지 못하고 돈오점수를 끝끝내 달마선종이라고 고집해서 중대한 큰 과오를 범하고 말았지만, 보조스님은 말년에 가서 돈오점수가 선()이 아님을 밝혔으니 허물이 적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절요(節要)에 있어서도 자가당착의 모순점이 많이 있습니다.

 

마음이 만법을 꿰뚫으니 뜻의 맛이 가이없다. 모든 교()는 벌려 놓음이요, 선종은 간략함이다. 간략함이란 법에는 불변과 수연의 두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는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있으니, 두 가지 뜻이 나타나면 모든 경론의 뜻을 다 알 수 있고, 두 문이 열리면 일체 현성의 가는 길을 볼 것이니 달마의 깊은 뜻은 여기 [돈오점수]에 있다.

心貫萬法이라 義味無邊하니 諸敎開張이오 禪宗撮略이니라 撮略者就法하야 有不變隨緣二義하고 就人하야 有頓悟漸修兩門하니 二義現하면 卽知一藏經論之指皎兩門하면 卽見一切賢聖之軌轍이니 達磨深旨意在斯焉이니라 [節要]

 

분명히 보조스님 자신이 달마스님의 깊은 뜻이 돈오점수에 있다고 해놓고, 다시 그 뒤에서 교외별전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敎外別傳者 不在此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달마스님이 전한 것 외의 교외별전이 따로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달마가 두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돈오점수를 전한 달마가 있고, 교외별전을 전한 달마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상으로 볼 때 달마가 두 사람 있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면 으레히 달마선종을 말하는 것이고, 달마(達磨)란 한 사람뿐이지 두 사람이 없으니 그러면 이 문제는 분명히 자기 모순입니다. 이런 모순이 절요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수심결결사문에도 있어서 달마선종을 혼동시켜 놓는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수심결에서 먼저 깨치고 뒤에 닦으니이것이 최상승선이며달마문하에서 구르고 펴 서로 전한 것이다하고, 정혜결사문에서는 지금 논한 바는최상승선이니 조종문하에 있어서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홍주종은 돈오문에 비록 가깝기는 하나 적중하지 않음이요, 점수문에 있어서는 모두가 어긋난다. 무릇 마음 닦는 사람은 오직 하택스님을 믿고 따를 뿐이요 다른 종은 믿고 가지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彼宗(洪州)於頓悟門雖近而未的이오 於漸修門而全乖라하니凡修心人唯取信於荷澤이오 不取信於餘宗必矣

 

이 부분은 앞에서도 인용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조스님은 앞의 말을 끌어놓고서 오직 돈오점수의 하택스님을 따라갈 것이지 마조스님이나 우두스님같은 분을 따라가서는 안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참 곤란한 말입니다. 마조스님은 조계정전(曹溪正傳)으로써 천하가 다 공인하는 사실인데 자기 입으로 하택은 지해종사라 하고 조계적자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우리가 누구를 따라가야 되겠느냐 하면 지해종[荷澤神會 是知解宗師爲因敎悟心之者]인 하택과 규봉을 따라가야 된다 하니 이것도 모순이 안될래야 안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냉정히 비판적 입장에 서서 진실을 보아야 합니다.

 

(3)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보조스님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보조스님이 돌아가신 6년 후에 수제자되는 진각(眞覺)스님이 간행한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이라는 두 가지 책입니다. 보조스님이 돌아가신 뒤 유고 속에서 발견되어서 출판했는데 거기에 와서는 완전히 방향이 달라져 있습니다. 간화결의론에서는 선이란 화두를 해서 깨친 증오(證悟)라고 철두철미하게 주장하여, 해오(解悟)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것은 돌아가시기 반년 전에 절요에 그런 모순과 혼란이 있었는데 반년 뒤에 과연 명백하게 증오(證悟)만이 선이고 해오(解悟)는 선이 아니다고 하여 평생에 주장해온 사상의 대전환을 과연 할 수 있겠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그리하여 이것들은 보조스님이 직접 쓴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뒤에 수제자인 진각스님이 지었다고 혹 추측해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책이 생전에 나오지 않았으며, 돌아가신 뒤에 곧 출판한 것도 아니고 6년 뒤에나 나왔으니 6년이란 세월을 왜 그냥 흘러 보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든가 저렇든가 간화결의론절요보다 그 사상이 한 걸음 나아간 것만은 사실이며, 또 그것이 보조스님의 친저이든지 아니든지간에 보조스님 돌아가신 뒤에 조계산 송광사 문하에서 돈오점수는 교종이며 선종은 아니다고 분명히 표시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진각스님이 스스로 발문도 짓고 여러 가지 설명을 붙여서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팔백여 년 후 오늘날 선방에서는 어째서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사상이 판을 치고 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곤란합니다. 보조스님을 몰라도 너무들 모르고 있습니다.

보조스님은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 원돈신해(圓頓信解), 즉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사구(死句)라 하고, 경절문(徑截門) 즉 선종의 화두를 깨치는 증오문(證悟門)을 활구(活句)라 하고서 사구(死句)를 근본으로 하는 원돈신해돈오점수의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활구(活句)를 근본으로 하는 증오문으로 들어가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원돈신해문은 말 길과 뜻 길이 있으며 듣고 알며 생각하는 것이어서 초심학자들도 믿고 받들어 가질 수 있다. 경절문은 비밀히 계합함을 스스로 증득하는 것이어서 말 길과 뜻 길이 없으며 듣고 알며 생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상근기의 큰 지혜가 아니면 어찌 밝게 얻을 수 있으며 어찌 뚫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보통의 배우는 무리가 의심하고 비방함은 이치가 자연히 그렇다.

圓頓信解門有語路義路하며 聞解思想故初心學者亦可信受奉持徑截門則當於親證密契하야 無有語路義路하며 未容聞解思想故若非上根大智焉能明得이며 焉能透得耶以故汎學輩飜成疑謗理固然矣이라

 

돈오점수를 근본으로 삼는 원돈신해, 즉 해오라는 것은 말 길도 있고 뜻 길도 있고 듣고 알며 생각함도 있어서 누구든지 이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경절문의 선종은 최후의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이니, 거기에는 말 길도 없고 뜻 길도 없고 듣고 알며 생각함도 없어서 참으로 근기가 뛰어난 사람이 아닐 것 같으면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지 못하고 자꾸 의심을 하고 비방을 하니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원돈의 이치가 비록 가장 원묘하나 모두 식정(識情)이 듣고 알며 생각하는 헤아림이므로 선문에서 화두를 자세히 참구하여 경절의 깨쳐 들어가는 문에서는 하나하나 모두가 불법에서 지해 병을 구별한다.

(圓頓)義理雖最圓妙總是識情聞解思想邊量故於禪門話頭參詳徑截悟入로는 一一全揀佛法知解之病也니라

 

원돈신해의 이치가 원묘해서 들어보면 그럴 듯 하지만 전체가 분별망상 속에서 하는 말이지 실지의 공부가 아니며 불법에 있어서 지해(知解)의 병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원돈사상은 불법에 있어 지해의 병이며 참된 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돈신해의 여실한 말과 가르침을 사구(死句)라 하니 사람들로 하여금 지해의 장애만 낳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초심학자로서는 경절문의 활구(活句)에 자세히 참구하기 어려우므로 법계 원융사상을 말하여 그것을 신해하게 하여 물러가지 않게 한다. 만약 상근기의 사람이 비밀히 전한 것을 감당하여 과굴을 벗어난 사람인댄 잠깐 경절문의 맛 없는 말을 듣자마자 지해의 병에 막히지 아니하고 곧 떨어지는 곳을 안다. 이는 한 번 들으면 천 가지를 깨쳐서 대총지를 얻은 사람이라고 한다.

圓頓信解如實言敎謂之死句以令人生解碍故並是爲初心學者 於徑閒門活句未能參詳故示以稱性圓談하야 令其信解하야 不退轉故若是上根之土 堪任密傳하야 脫略窠臼者인댄 纔聞徑截門無味之談하면 不帶知解之病하고 便知落處하나니 是謂一聞千悟하야 得大摠持者也니라

 

원돈신해, 돈오점수는 죽은 말[死句]이다. 왜냐하면 지해만 늘어가서 근본적으로 해탈할 길이 없으니 이 길을 가지 마십시오. 초심학자들은 경절문의 산 말[活句]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화엄의 법계원융사상을 신해하여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혹 죽은 말을 하기는 하지만 만약 여기에 집착하면 결국은 영원히 살아나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마는 것이니, 실지로 살아남는 길, 활구, 경절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상근의 사람이 교외별전을 감당하여 지해사상을 다 벗어버리면 한번 깨칠 때 전체를 깨치고 한번 끊을 때 전체를 끊어서 돈오돈수의 구경각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공부하는 사람이 경절문의 화두를 자꾸 참구할 것 같으면 즉 누구든지 활구(活句)를 의지해서 공부할 것 같으면 확철히 깨치고 대총지를 얻어서 구경을 완전히 성취하게 되는 것이니 이 길로 가야한다는 말입니다.

 

무릇 참구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활구를 참구하고 사구를 참구하지 말아라. 활구 끝에서 깨치면 영원토록 잊지 않고, 사구 끝에 깨치면 스스로도 구제하지 못하느니라.

夫參學者須參活句하고 莫參死句活句下薦得하면 永劫不忘死句下薦得하면 自救不了니라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교가적(敎家的)인 원돈신해(圓頓信解),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사구(死句)로는 들어가지 말고 경절문(徑閒門)인 교외별전(敎外別傳)의 화두(話頭)를 참구해야 합니다.

활구를 의지하여 공부를 하면 마침내 영원토록 잊지 아니하여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되지만, 사구를 의지하여 공부를 하면 마침내 자기의 번뇌망상도 없애지 못하여 자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맙니다. 이렇게 분명히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는 보조스님이 활구와 사구로 나누어서 말씀했습니다.

 

홀연히 재미도 없고 찾을 수도 없는 화두 위에서 확철히 깨치면 일심의 법계가 통연히 명백해진다. 그러므로 심성이 갖춘 백천삼매와 무량묘의의 문을 구하지 않아도 원만히 얻는다. 종전 치우친 의리와 문해로써 얻은 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종 경절문의 화두를 자세히 참구하여 증입하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忽然 於沒滋味無摸索底話頭上噴地一發則一心法界洞然明白故心性所具百千三昧無量義門不求而圓得也以無從前一偏義理聞解所得故是謂禪宗徑截門 話頭參詳證入之秘訣也니라

 

화두 참선하여 깨친 경계는 해오(解悟)신해(信解)와는 전연 다른 것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간화결의론에 있어서는 언제든지 증오(證悟)로써 근본을 삼아 말하였지 해오(解悟)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보조스님이 임종에 가서는 선()과 교()를 분명히 알아서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것은 교가의 방편설이지 교외별전의 선종정맥사상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두의 의심을 타파하여 확철히 깨친 사람은 무장애법계를 몸소 증득한다.

話頭疑破하야 噴地一發者乃能親證無障碍法界矣

 

선종의 경절문을 확철히 깨친 이는 법계 일심을 몸소 증득한다.

禪宗徑截門 噴地一發者親證法界一心이라

 

여기에서 증득한다[]’함은 최후 구경각을 깨친 것을 말하며,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나 법계일심(法界一心)은 같은 내용으로써 불지(佛地)를 말합니다.

 

홀연 확철히 깨치면 법계가 통연히 명백하여 자연히 원융하여 일체 덕을 갖춘다. 육조조사가 말씀하듯 자성이 삼신을 갖추고 사지를 밝혀서 성취하니 보고 듣는 인연을 떠나지 않고서 초연히 불지에 오른다는 것이 이것이다.

忽然噴地一發則 法界洞明하야 自然圓融具德하나니 如曹溪祖師所謂自性具三身하야 發明成四智不離見聞緣하고 超然登佛地是也니라

 

화두를 깨쳐서 자성을 밝힌 사람, 곧 견성(見性)한 사람은 삼신(三身)사지(四智)가 원만히 구족한 부처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이니 이것이 증()한다는 말의 참 뜻입니다.

 

이로써 선문에서 생각을 떠나 서로 전한 것은 법계를 돈증하는 곳임을 알라.

是知禪門離念相傳是頓證法界處也[圓頓成佛論]

 

이 말씀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에 있습니다. 원돈성불론도 보조스님이 돌아가신 뒤발견된다는 책으로서, 그 내용은 교가(敎家)를 위해서 해오(解悟)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중심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외별전인 선종은 해오(解悟)가 아니고 증오(證悟)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으니, 선과 교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뜻을 얻고 말을 잊어버리면 도를 친하기 쉽다고 하니 이것은 법계처를 돈증하는 곳을 말한다.

云得意忘言道易親이라하니 是謂頓證法界處也

 

여기에서 인용한 것은 분양(汾陽)스님의 말씀입니다. ‘법계를 돈증한다함은 삼신사지가 원만구족한 구경각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선종(禪宗)에서 깨친다 함은 해오(解悟)가 아니고 구경각(究竟覺)이라는 것, 또 견성이란 초발심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고 구경법이라는 것이 완전히 표시되어 있습니다.

보조스님이 선종(禪宗)을 위해서 지은 간화결의론에서 뿐만 아니라 교가(敎家)를 위해서 지은 원돈성불론에 있어서도 선종(禪宗)이란 해오(解悟)가 아니고 증오(證悟)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간화결의론에서는 선()과 교()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

 

선문의 경절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처음부터 법의 이치와 들어 이해하는 생각이 없이 바로 재미없는 화두로 드러내고 깨달을 뿐이다. 그러므로 말 길도 없고 뜻 길도 없고 심식으로 생각할 곳이 없고 또한 보고 듣고 알고 행하는 등 시간의 앞뒤가 없다가 홀연히 화두를 확철히 깨치면 일심법계가 통연히 두루 밝다. 그러므로 원교의 관행하는 이와 선문의 깨친 사람과 비교하면, 교내교외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고 시간의 느리고 빠름이 또한 같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교외별전이 교승보다 훨씬 뛰어나니 천박한 식견의 사람이 감당할 바 아니다.

禪門徑截得入者初無法義聞解當情하고 直以無滋味話頭但提撕擧覺而巳故無語路義路心識思惟之處하며 亦無見聞解行生等時分前後라가 忽然話頭墳地一發則一心法界洞然圓明故與圓敎觀行者比於釋門一發者컨대 敎內敎外逈然不同故時分遲速亦不同居然可知矣故云敎外別傳逈出敎乘이라 非淺識者能所堪任이라하니라

 

선문의 경절문으로 들어가면 법의 이치나 들어 알고 생각하는 것이 없으며, 말 길과 뜻 길이 끊어집니다. 원돈신해문으로 들어갈 것 같으면 말 길과 뜻 길이 있어서 사구(死句)에 떨어져 돈오점수가 되고 맙니다. ‘재미가 없는 화두란 듣고 생각하는 것이 붙을래야 붙을 수 없고 사량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니 오직 그 화두만 참구할 뿐입니다. 거기에서는 견문이나 해행 등을 생각할 수 없고 시간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일체 말이 다 끊어져 버립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화두를 깨치면 교가와 전혀 틀립니다. 시간적으로 볼 때 교()로 나아가면 삼아승지겁이라는 많은 시간이 걸려서 성불하지만, 선문의 경절문 활구로 들어가면 바로 깨쳐버립니다. 교의 원돈신해문으로 나갈 것 같으면 돈오해서 점수하니까 말 길이 있고 뜻 길이 있어 듣고 이해하는 것, 즉 지해(知解)가 근본이 되어서 삼아승지겁이라는 시간이 걸려 성불은 늦어지는 것입니다.

()과 교()의 내용을 모를 때는 선교일치를 부르짖었지만 알고보니 선교가 틀리므로 돌아가실 때에는 간화결의론에서 바른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선문 경절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돈교와 같지 않고 또 원교에 들어가는 것과는 교를 의지하고 떠남에 느리고 빠름이 전혀 다름을 알게 하겠다.

知有禪門徑截門得入不同頓敎하며 亦與圓敎得入者依敎離敎遲速逈異也

 

선종 경절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돈교(頓敎)와 다르고 또 일승원교와도 근본으로 틀립니다.

 

선종의 교외별전인 경절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격식과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교()를 배우는 이는 믿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선종의 낮은 근기가 천박하게 아는 자도 망연하여 알지 못한다.

禪宗敎外別傳徑截得入之門超越格量故非但敎學者難信難入이오 亦乃當宗下根淺識罔然不知矣. [節要]

 

이것은 선()과 교()가 다른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선종의 참선하는 사람도 근기가 하열하고 머리가 밝지 못한 사람은 도로 비방하고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출세간 하려는 사람은 선문의 활구를 자세히 참구하여 속히 보리를 증득하면 다행하고 다행하다.

伏望觀行出世之人參詳禪門活句하야 速證菩提하면 幸甚幸甚이로다. [看話決疑論]

 

바로 깨치는 최상승의 길인 경절문의 활구(活句)로 들어가서 깨쳐야지 원돈신해인 사구(死句)로 들어가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화결의(看話決疑)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곤란한 것은 말세에는 사람들의 근기가 하열하므로 조사도리를 깨쳐서 공부를 성취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하는 말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보조스님의 수심결에 그 당시에도 말세에는 조사도리를 깨친 사람이 없다고 했지만 본시 말세니 하는 것은 중생에게 방편으로 하는 말이지 법()에서는 해당이 안됩니다. 800 년 전 보조스님이 당시 기화상(琪和尙)의 말을 인용해서 그렇게 말했는데 그것은 정법을 모르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중국과 비교해 보면 대혜스님 돌아가시기 5년 전인 1158 년에 보조스님이 태어났는데 대혜스님을 전후한 100200년 동안은 임제종 양기파의 전성시대로 많은 도인이 났습니다. 또 임제 정맥으로 봐서 화선사중봉고불 등 보조스님 후 200년 뒤에도 확철대오한 대 도인이 무수히 났으며, 명 그리고 청나라 초까지 연계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보조스님 당시 기화상이 말세에는 확철히 깨쳐 종사노릇할 사람이 없다고 한 말은 빨간 거짓말입니다. 대혜스님 이후에도 송나라에는 일등 조사가 많았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800년 전 보조스님 당시 대 조사가 없다고 하면서 지금의 말세에 경이나 보고 염불이나 하지 참선하지 말자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소리입니다. 자성은 본시 고금도 없고 말세도 없어서 노력하면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하여 오직 바로 깨치면 그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노력해야 달마경전을 깨치는가?

 

경산 대혜화상이 경의 게송을 인용하여 말했다. ‘보살이 이 부사의 경계에 머무니 이 가운데에서는 생각은 끝이 없느니라.’ 이 부사의한 곳에 들어가면 생각과 생각 아님이 모두 적멸하다고 하느니라. 그러나 적멸한 곳에 머물러서도 되지 않는다. 만약 적멸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곧 법계의 헤아림에 포섭되니, 교중에서 법진번뇌(法塵煩惱)라 하느니라. 법계의 헤아림을 없애버리고 각가지 수승한 것을 일시에 모두 없애버려야만 비로소 뜰 앞의 잣나무나 마삼근, 마른 똥막대기, 개에게 불성이 없음, 한 입에 서강의 물을 모두 들이킴, 동산이 물 위로 간다는 등의 것을 볼 수 있느니라. 홀연히 한마디 끝에서 뚫어 지나야만 비로소 그것을 법계에 한없이 회향한다고 하느니라. 여실하게 보고 여실하게 행하고 여실하게 사용하여 한 터럭 끝에서 보배왕 세계를 드러낼 수 있고 미진 가운데 앉아서 대 법륜을 돌려 갖가지 법을 성취하고 갖가지 법을 파괴함은 모두 나로 말미암음이다. 마치 장사가 팔을 펼침에 남의 힘을 빌리지 않으며 사자가 나 다님에 동행을 찾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하였다. 이것으로 추측하건대 선문에서 화두를 자세히 참구하는 자는 법계의 헤아림을 없애버리고 갖가지 수승함도 모두 없애버리고 그 후에 뜰 앞의 잣나무 등 화두를 살펴봄이 좋으리라. 홀연히 한마디에 뚫어야만 비로소 그것을 법계에 한없이 회향한다고 말하느니라. 화두의 의심을 타파하여 한 소리를 내는 자는 장애없는 법계를 직접 증득함이니라.

徑山大慧和尙引經偈云菩薩住是不思議하니 於中思議不可盡이라 入此不可思議處하야는 思與非思 皆寂滅이라하니 이나 亦不得住在寂滅處니라 若住在寂滅處하면 卽被法界量之所管攝이니 敎中謂之法塵煩惱滅却法界量하고 種種殊勝一時蕩盡了코사 方始好看庭前栢樹子麻三斤乾屎橛狗子無佛性一口吸盡西江水東山水上行之類하야 忽然一句下透得하야사 方始謂之法界無量廻向이라 如實而見하며 如實而行하며 如實而用하야 便能於一毛端現寶王刹하며 坐微塵裏하야 轉大法輪하야 成就種種法하며 破壞種種法一切由我홈이 如壯君展臂不借他力하며 師子遊行不求伴侶라 하니라 以此而推컨댄 禪門話頭參詳者滅却法界量하고 種種殊勝亦蕩盡了然後方始好看庭前栢樹子等話頭하야 忽然一句下透得하야사 方始謂之法界無量廻向이니話頭疑破하야 噴地一發者乃親證無障碍法界矣로다. [看話決疑]

 

보살의 부사의한 도리는 다함이 없어서 일념불생 전후제단(一念不生 前後際斷)해서 대무심지(大無心地)에 들어가면 이것이 대적멸지입니다. 이것을 부사의라고 대혜스님이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렇지만 적멸처에 머물러 있으면 죽어서 깨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선 오매가 일여하여 모든 것이 멸진되어서 대적멸지에 처해 있습니다. 여기서 언구를 의심치 않으면 깨어나지 못합니다.

만약 적멸처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실지 견성이 아니고 구경각이 아닙니다. 여기서 더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 삼아승지겁이 벌어지니 다시 화두를 참구해야 합니다. 원오스님도 대혜스님에게 대적멸처에 있어도 거기서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적멸처인 오매일여에서도 크게 화두를 참구해서 살아나야만 비로소 바로 깨친 사람입니다. 선문에서 화두참구하는 사람은 법계의 헤아림을 없애버리고 일체를 모두 없애야 합니다. 오매일여한 대무심지라 해서 화두참구 안하면 외도입니다. 하물며 적멸처도 아닌 사량분별이 남아 있는 곳에서 보림한다, 목우자한다고 화두를 버리면 자기가 망하고 천하사람이 다 망합니다. 대적멸지, 오매일여에서도 화두참구해서 확철히 깨친 사람은 증()한 것이지 해오(解悟)가 아닙니다. 이것이 실지 공부하는 사람의 생명선입니다.

지금까지 약 100일 동안에 말한 것을 요약합시다.

중도(中道)는 선과 교를 통한 근본입장입니다. 선은 중도의 실제 체험 법문이고 교는 중도의 이론입니다. 이론은 실천을 하기 위한 것이지 실천을 떠난 이론은 안됩니다. 그래서 이론에 밝은 아난도 가섭에 쫓겨난 후 깨쳐서 결집에 참여하였습니다. 이것이 선이라는 별전(別傳)의 시발점입니다.

별전이 인도에서는 달마까지 28대로 하고 다시 중국으로 내려왔는데, 거기서 표방하는 것은 실천법문에서는 견성성불입니다.

이 견성성불을 견성하여 성불한다는 식으로 나누면 잘못입니다.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견성은 자성을 깨쳤다.’ ‘불성을 깨쳤다’ ‘진여본성을 깨쳤다라는 말인데 불성이니 진여니 하는 것은 중도를 말하며 쌍차쌍조(雙遮雙照)인 진여를 말하는데, 즉 중도를 깨친 것이 견성이라는 것입니다. 중도를 바로 깨치면 우리 심리 상태가 대무심지이며 무념무생한 이것이 제8아뢰야의 무기식을 확철히 깨어난 대원경지의 무심입니다. 대무심지에 들어가는데 오매일여라는 관문이 있습니다. 몽중에도 완전 일여하면 7지 보살이고 잠이 꽉 들어서 일여하면 오매일여, 멸진정 이상의 제 8아뢰야 경지입니다.

조사스님 모두가 실지 오매일여 되어서 참으로 대무심지인 여기서 깨쳐 조사노릇을 하였지 누구든 오매일여, 몽중일여도 못된 데서 깨쳤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매일여 된 데서 죽어서 살아나지 못하면 제8아뢰야 마계(魔界)입니다. 언구를 의심해서 제8아뢰야 오매일여에서 확철히 깨쳐야 깨끗한 유리그릇 속 보배를 비추는 것과 같이 참 광명이 시방세계를 비춥니다. 무심경계가 되어도 깨친 경계가 아닙니다. 대무심지에서도, 오매일여한 경지에서 다시 깨쳐야 됩니다. 그래야만 견성이다 선이다 할 수 있습니다.

선종 정맥사상은 육조 스님 때 하택(荷澤)이 지해로 나가니까 지해종사라 수기했습니다. 그 뒤 규봉이 공부하여 화엄 5조가 되었습니다. 규봉이 돈오점수 사상을 만들어서 번뇌망상 있는 그대로를 견성이라 하고 돈오라 하고 달마선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 규봉의 돈오점수 사상이 죽어서 햇빛을 못보았는데 보조스님을 만나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보조스님이 초년에는 잘 몰라서 규봉의 돈오점수 사상을 달마선인 줄 알고 이에 의거해서 수심결을 짓고 결사문을 지었습니다. 그 후 사상이 크게 전환하여 간화결의에서는 대무심지가 되어도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해서 크게 살아나야 하며, 이것이 선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규봉이 말하는 해오는 선종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습니다. 사구인 죽은 길로 들어가면 삼아승지겁이 벌어지고 막대한 노력과 시간 손해가 납니다. 우리는 경절문인 활구로 들어가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해야 합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철스님 백일법문 상  (0) 2016.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