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백일법문

성철스님 백일법문 상

통융 2016. 9. 13. 20:12

백일법문 상

 

1 장 서

 

 

쉬어버리고 쉬어버리니

절름발이 자라요 눈 먼 거북이로다.

있느냐 있느냐 문수와 보현이로다.

허공이 무너져 떨어지고

대지가 묻혀 버리네

높고 높은 산봉우리에 앉으니

머리엔 재 쓰고 얼굴엔 진흙 발랐네.

시끄러운 거리에서 못을 끊고 쇠를 끊으니

날라리 리랄라여

들늙은이 취해 방초 속에서 춤추네.

방편으로 때묻은 옷을 걸어 놓고 부처라 하나

도리어 보배로 단장하면 다시 누구라 할꼬.

여기서 금강정안을 잃어버리면

팔만장경은 고름 닦은 휴지로다.

마명과 용수는 어느 곳을 향하여 입을 열리오.

<한참 묵묵한 후>

무로다.

!

홀로 높고 높아 비교할 수 없는 사자왕이

스스로 쇠사슬에 묶여 깊은 함정에 들어가네.

한번 소리치니 천지가 진동하나

도리어 저 여우가 서로 침을 뱉고 웃는구나.

애닯고 애닯고 애달프다.

황금 궁궐과 칠보의 자리 버리고

중생을 위해 아비지옥으로 들어가네.

 

休去歇去하니 跛漱盲龜

有麽有麽文殊普賢이라

虛空撲落하고 大地平沈이로다

高高峯頂灰頭土面이요

紛紛街下斬釘截鐵하니

囉囉哩哩囉囉

野老醉舞芳草裏로다

摧掛垢衣云是佛이라

却裝珍御復名誰

於此喪却金剛正眼하면

八萬藏敎是拭瘡 疣故紙

馬鳴龍樹向什麽處하야 下口리오

良久云甲乙丙丁戊로다

喝一喝

獨尊無比獅子王鐵銷自縛入深穽이라

哮吼一聲震天地하나 却彼野干相唾笑로다

口出口出口出

抛却金闕七寶座하고 欲爲衆生入阿鼻로다

 

 

1. 불교의 본질

 

1)깨달음의 종교

 

나는 여기서 본분사(本分事)로서 사람들을 대한다. 만약 나로 하여금 근기따라 사람을 대하게 하면 삼승 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있게 되느니라고 조주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근기에는 상근기도 있고 중근기도 있고 하근기도 있으니 근기를 따라서 설법한다면 자연히 삼승 십이분교가 벌어지므로 본분사로서 사람들을 대할 뿐이요, 근기를 따라서 설법을 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이 조주스님의 생명선이고 선가(禪家)의 생명선입니다. 불교의 근본을 이론과 언설을 가지고 이렇게도 설명하고 저렇게도 설명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 법문이 선문의 골수가 아닌 줄 알고 들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부터 선가의 본분을 버리고 이론과 언설로서 불교의 근본 뜻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불교란 무엇인가?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닙니다. 불교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방대한 경전이 있어서 이 경()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저 경을 보면 저렇게 말씀하는 등, 누가 어떤 것이 불교냐고 물으면 이것이 불교라고 한마디로 대답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예수교나 유교나 회교 등 다른 종교들은 근본 경전이 간단하여 예수교는 성경, 유교는 사서삼경(四書三脛), 회교는 코란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통칭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 하니 누가 들어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많으니 무슨 말씀인지 알기 힘들고, 설사 좀 안다고 하여도 간단하게 어떤 것이 불교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하나하나 얘기하려면 끝이 없으니 간단히 무엇을 불교라 해야 하겠습니까? 우선 불교라는 말 자체에서 보면 불교(佛敎)란 불() 즉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란 인도말로 붇다(Buddha)라고 하는데, ‘깨친 사람이란 뜻입니다. 불교란 붇다 즉 일체 만법의 본원(本源)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 즉 부처의 가르침이므로 결국 깨달음에 그 근본 뜻이 있습니다. 만약 불교를 논의함에 있어서 깨친다[]는 데에서 한발짝이라도 떠나서 불교를 말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의 근본인 그 깨친다는 것은 일체 만법의 본원 그 자체를 바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일체 만법을 총괄적으로 표현하여서는 법성(法性)이라 하고, 각각 개별적으로 말할 때는 자성(自性)이라고 하는데, 그 근본에서는 법성이 즉 자성이고 자성이 즉 법성이니 자성이라 하든 법성이란 하든, 이 본원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을 부처()라 합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법성이나 자성을 바로 깨치는 길 즉 깨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그 근본입니다.

2500여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새벽에 명성(明星)을 보시고 정각(正覺)을 이루셨으니 이것이 불교의 근본 출발점입니다. 유교는 공자님이 옛날의 삼경이든 육경이든 이것을 읽고 외우고 하여 문자에 의지해서 거기서 얻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세웠고, 기독교는 예수가 절대신의 계시에 의해서 성경을 의지하여 세워졌으니 곧 절대신의 계시가 기독교의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불교에서 부처님은 많은 지식을 얻음에 의하거나, 혹은 절대신의 계시를 받음에 의해서 부처가 된 것이 아닙니다. 보리수 아래에서 자기 스스로 선정(禪定)을 닦아 자기의 자성을, 일체 만법의 법성을 바로 깨쳐서 부처님이 되었다는 데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절대신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불교는 오직 일체 만법의 법성인 자기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불교 이외의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이와 같은 이론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불교가 주장하는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진리로서 천고만고에 변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입니다. 일체 만법의 법성, 즉 자기 성품을 바로 깨치는 이것이 불교의 근본 특색으로 되어 있느니만큼 만약 이 노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된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들과 역대의 모든 조사(祖師)스님들이 자기 성품, 자기 마음을 깨쳐서 부처를 이루었지 절대신이나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부처를 이룬[成佛]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생명선이며, 영원한 철칙이며 만세의 표준입니다.

불교는 성불(成佛), 즉 부처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는 성불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큰 학자라도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서 성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하려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놓았는가? 금강산이 천하에 유명하고 좋기는 하나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안내문이 필요합니다. 금강산을 잘 소개하면 ! 이렇게 경치 좋은 금강산이 있구나. 우리도 한번 금강산 구경을 가야겠구나생각하고 드디어 금강산을 실제로 찾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내문이 없으면 금강산이 그렇게 좋은 곳인 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 언어문자로 이루어진 언설과 이론인 팔만대장경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노정기(路程記)입니다.

팔만대장경에서 불교란 이런 것이다. 부처란 무엇이다 라고 설명하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부처님이 귀하고 높으며 불교가 좋은 줄 알아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언어문자로 된 안내문이 없었다면 부처님의 훌륭하고 좋은 법을 몇 사람이나 알고 있겠습니까? 이러한 언어문자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불교를 알게 되고 마침내는 부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노정기에 의지하여 실제로 길을 가서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서울을 가려고 하면서 서울 안내판이나 소개문을 아무리 들여다 보고 있어 보았자 서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걸음을 걷든지 두 걸음을 걷든지 하여 마침내 남대문으로 쑥 들어서야지 그러기 전에는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언어문자인 팔만대장경이 성불하는 노정기인 줄만 분명히 알면 그것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언어문자를 무시하고 배격하며 교가(敎家)에서는 언어문자를 숭상한다고 흔히 생각하고 있는데, 만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교는 꿈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교도 부처님의 가르침이지 딴 외도(外道)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가에서도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지, 안내문만 읽으면서 평생을 지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교가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제일 높은 것이 화엄종(華嚴宗)입니다. 특히 당()나라 현수(賢首)스님이 화엄종 교리를 집대성하여 종조(宗祖)가 된 대표적인 스님인데, 다음은 그 스님의 말씀입니다.

 

이 큰 화엄연기법은 일체 만법이 구족하니 반드시 마음 가운데서 그것을 깨칠 것이요,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말로써 해석한다면 연기법을 보지 못할 것이요, 반드시 해석을 끊고 실제로 마음을 닦아야 정견(正見)에 이르는 것이다. 만약 마음으로 해석하여 얻으려고 한다면 평생을 헛일만 하는 것이다.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들어갈 것이요, 만약 입으로는 말하나 마음에 깨침이 없는 사람은 곧 미친 사람과 같은 것이다.

 

교가의 권위자인 현수스님이 이 화엄연기법은 언어로서는 알 수 없고 오직 마음 가운데 이것을 깨쳐야 바로 안다 하고서 그렇지 못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 이유는, 불법(佛法)이란 오직 자성을 깨치는 데 있는 것이지 언어문자를 이해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엄연기법도 부처님 법이니만큼 깨친다는 원칙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누구든지 언어문자만을 따라가고 마음 속에 깨치지 못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며 평생에 헛일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화엄경 80권 가운데서는 진정한 연기법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고, 오직 내 마음 속에서 깨쳐야만 그 화엄연기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데려다 어떤 사람과 꼭 같은 모습을 그려놓고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대답을 하겠습니까? 천번만번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잘 그려 놓아도 그림 속의 사람은 대답을 할 수 없으니 실제의 사람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처럼 언어문자는 노정기나 소개문은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실제 금강산이나 서울인 줄 알아서는 영원토록 금강산도 서울도 못보고, 평생 헛일한 미친 사람이 되고 맙니다. 현수스님 뿐만 아니라 교가의 모든 큰스님들은 다 그렇게 말씀하니만큼 이제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반드시 마음 가운데서 깨쳐야지 여기서 한발짝이라도 벗어나면 불교가 아닙니다. 선이나 교가 자성을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라는 것이 명확하니 공연히 평생을 헛일한 미친 사람이야 될 수 없지 않습니까?

신라의 화엄종조로서 유명한 의상(義湘)스님은 남아있는 저술이 별로 없으나, 그 대표적인 저술 법성게(法性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으니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네

이름 없고 모양 없어 일체가 끊어지니

깨친 지혜로서 알 바요, 다른 경계에서는 알 수 없네.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불법이란 바로 깨쳐야 하는 것이니 일체 만법의 법성자성을 깨쳐야 하는데 그것은 언어문자의 이해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성자성은 일체 언설과 이론을 떠나 있으므로 언어문자로서 표현할 수 없고 말로서 형용할 수 없는데 어떻게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이 자성법성이라는 것은 이름이 없고 모양이 없어 일체가 끊어졌기 때문에 증지(證智), 즉 깨친 지혜로서만 알 수 있고 다른 것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깨친 법성은 참으로 깊고 미묘해서 일체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사량분별이 멸한 것이라, 오직 깨쳐야만 알지 언어문자로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불교란 마음을 깨치는 데 근본이 있다는 것을 선종(禪宗)에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문자로 근본을 삼는 교가(敎家)에서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 대강 이해될 줄 믿습니다.

다음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바른 깨달음, 곧 증지(證智)를 이루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남자야, 다만 모든 성문(聲聞)들의 둥근 바 경계는 몸과 말과 마음이 모두 끊어졌어도 끝내 저들의 친증(親證)하여 나투는 열반에도 이르지 못하거든 하물며 어찌 생각있는 마음으로서 능히 여래의 둥근 깨달음 경계를 헤아리겠느냐.

반딧불을 가져 수미산을 사르려 하여도 끝내 불태우지 못하듯, 윤회하는 마음으로서 지견을 내어 여래의 대적멸 바다에 들려 하여도 마침내 이르지 못할 것이니라.

善男子 但諸聲聞 所圓境界 身心語言 皆悉斷滅 彼之親證 所現涅槃 何况能以有思惟心 測度如來圓覺境界 如取螢火燒須彌山 終不能着 以輪廻心 生輪廻見 入於如來大寂滅海終 不能至 [圓覺經 金剛菩薩章]

 

이와 같이 불법이란 반드시 깨쳐야 되는 것인데 깨친다는 것은 언어문자 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까지도 다 떨어진 무심지(無心地)에 이르러서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만약 생멸(生滅)하는 심의(心意)를 가지고 불교의 깊은 뜻을 배우려고 하면 동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느니라. [洞山良介禪師]

 

심의식(心意識)이라는 것을 좀더 자세히 말하면 심()이란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이며 의()란 제7식말나식(第七識末那識)이며 식()이란 전6(前六識)을 말합니다. 분별의식인 6식이나 무분별인 제8식이거나 간에 심의식을 가지고 불법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마음으로는 동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몸은 서쪽으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니 불법은 유심경계(有心境界)로서도 알 수 없고 무심경계(無心境界)로서도 또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심의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아니니

이런 까닭에 선문(禪門)에서는 제8식까지 버리고

()이 없는 지견력(知見力)에 문득 들어가네.

損法財滅功德 莫不由斯心意識

是以禪門了却心 頓入無生知見力 [證道歌]

 

언어문자라는 것은 심의식의 표현입니다. 부처님은 언어문자를 달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하셨습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누구든지 그 손가락 끝을 따라 허공에 있는 달을 보아야 할 것인데 바보는 달은 쳐다보지 아니하고 손가락 끝만 쳐다보고 달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천년 만년 가도 달은 영원히 보지 못하고 맙니다.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을 말씀하신 것은 바로 달 가리키는 손가락을 펴 보이신 것이니 그 손가락을 물고 빨고 해보았자 결국 달은 보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니 그 손가락 저편에 있는 달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언어문자에 집착해서 손가락 끝만 보고 달은 보지 못하는 까닭에 마침내 자성을 깨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천년 만년 손가락 끝만 보아서는 달은 못보는 것이며 손가락 끝을 보고 달이라고 하든지 손가락 끝만 보고 있으면서 달 보기를 기다린다면 이런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네가 비록 억천만 겁토록 여래의 묘장엄법문을 기억하여도 하루동안 선정(禪定)을 닦느니만 못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난존자가 총명하고 지해(知解)가 뛰어나서 언어문자를 기억하는 것으로만 생명으로 삼고 실지 선정을 닦지 아니하므로 부처님께서 너무나 딱하게 여겨 아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외에도 부처님께서 언어문자만 기억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는 아난에게 타이르신 일이 많습니다.

너하고 나하고는 저 과거 무수겁 동안 같이 발심하여 성불하려고 공부하였다. 그러나 너는 다만 언어문자만 따라가서 그것만 기억하고, 나는 틈만 있으면 선정을 닦았다. 선정을 닦는 것은 밥을 먹는 것이요, 언어문자를 기억하는 것은 밥 얘기만 하는 것이니 어찌 배가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언어문자란 처방전이다. 거기에 의거해서 약을 지어 먹어야 병이 낫는 것이지 처방전만 열심히 외어 보았자 병은 낫지 않는다. 너는 처방전만 기억하고 있으니 중생병이 낫지 않은 것이고 나는 약방문에 의지해서 약을 먹었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늘 언어문자를 기억하는 것을 능사로 삼지 말고 깊히 선정을 닦으라고 간절하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나, 아난은 부처님 생전에는 그 병을 고치지 못하고, 마음 가운데 깨침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가섭존자가 중심이 되어 필발라굴[七葉窟]에서 대중들을 모아 부처님께서 생전에 하신 법문들을 수집정리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아난존자도 참석하였습니다. 아난존자의 총명지해는 물을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겨 부울 때 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붓듯이, 그렇게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던 만큼 부처님 법문을 수집하는 데 있어서도 가장 수승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가섭존자께서 생각해 보니 아난의 총명이 뛰어나 부처님 법문을 다 기억은 하고 있으나 마음 가운데 깨치지를 못하였으므로 실지의 부처님 법은 모르니, 그런 사람을 대표로 내세워 결집(結集)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비유로 이야기하자면 금강산 안내문을 잘 외워 자기가 본 것같이 설명할 수 있다 하여도 실지로 금강산을 본 사람과 못 본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틀리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을 결집하는 데 있어서 참으로 자기가 눈을 뜨고 자기가 법을 보고 자기의 마음을 깨친 후에 부처님의 법을 남에게 소개해야만 부처님 법문이 산 법문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녹음기 틀어놓듯이 말로만 전하는 것 만으로는 근본 생명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섭존자가 방편을 써서 아난이 없으면 부처님 법문을 결집하지 못한다는 대중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여기는 사자굴이니 너 같이 마른 지해로 인하여 몹쓸 병이 든 여우가 어찌 이 사자굴에 들어올 수 있겠느냐하면서 필발라굴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러자 아난이 애걸복걸하였습니다. “제가 어리석어서 언어문자에만 탐착되어 마음의 근본을 깨치지 못하였습니다. 부처님이 떠나실 때 지금 누굴 의지하여 공부해야 하겠습니까라고 여쭈니, 부처님께서 나의 대법(大法)을 가섭에게 전했으니 너는 내가 떠난 뒤 가섭을 의지해서 대법을 성취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사형(師兄)이 나를 쫓아내시면 나는 누굴 의지해서 대법(大法)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울면서 간절히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래도 가섭존자는 너는 지해 총명으로 몹쓸 병이 든 여우 새끼니 이 사자굴에는 살 수 없다. 부처님 법문을 결집하는 이 회상에 꼭 참석하려면 깨쳐서 오너라하고 기어이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렇게 쫓겨났으나 아는 것이 많으니 신도들이 와서 예배하고 큰스님이라고 받드니, 쫓겨난 것도 다 잊어버리고 마른 지해로서 다시 대중들 앞에서 법문을 했습니다. 그때, 같은 부처님 제자인 발기(跋耆)비구가 있어 조용한 처소에서 공부만 하고 있었습니다. 아난존자가 와서 법문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어 번잡함이 이루 말할 수 없어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어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타일렀습니다.

 

고요한 나무밑에 앉아

마음은 열반에 들어

참선하고 게으르지 말라

말 많아 무슨 소용 있는가.

 

그때서야 아난존자가 술깬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들어 ! 큰일났구나. 가섭존자에게 쫓겨나 여기 와 있는 신센데 이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가하고, 크게 반성하고는 그때부터 부처님이 생전에 그렇게 부탁해도 하지 않던 선정을 열심히 닦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선정을 익혔는지 그 기간은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앉으나 서나 밤낮으로 침식을 잊고 열심히 용맹정진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저녁 너무나 피곤하여 좀 누워야겠다고 생각하고 목침을 베려는 순간에 확철히 마음을 깨쳤습니다. 거기서 다시 가섭존자를 찾아가 인가(認可)를 받고 부처님 법문을 결집하는 필발라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내 이렇게 들었노라로 시작되는 경전들이 편찬케 되었던 것입니다. 불교 역사상 부처님 법문을 모은 경전은 물론 그 뒤에 성립된 것도 많이 있지만 대개는 아난존자가 구술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난존자같이 부처님 법문을 잘 기억해 아는 사람은 천추만고에 그 누구도 없지만 깨치지 못한 연고로 같은 부처님 제자이면서도 가섭존자에게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으니 이는 곧 불교의 생명이 언어와 문자를 기억하는 총명에 있지 아니하고 마음을 깨치는 데 있음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는 사실(史實)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이 근본 생명을 잊어버리지 아니해야 합니다. 생명없는 사람은 송장입니다. 그러니 송장 불교가 아닌 살아있는 불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 가운데서 부처님 진리를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말하는 것인데 팔만대장경 속에서 불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얼음 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팔만대장경에 무슨 잘못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언어문자에 집착되어 그러한 언어문자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죄가 있을 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2)절대적 인간관

 

이제까지 우리가 하루 빨리 깨쳐야 된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 어떤 능력이 잠재되어 있기에 자성(自性)을 깨치라 하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체 만법의 근본을 깨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일체만유를 다 둘러보시고 감탄하며 말씀하셨다.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와 같은 지혜덕상이 있건마는 분별 망상으로 깨닫지 못하는구나.’

菩提樹下初成正覺하시고 歎曰 奇哉奇哉一切衆生皆有如來智慧德相이언마는 以分別妄想而不能證得이로다.[華嚴經]

 

부처님의 이 말씀이 우리 불교의 근본 시작이면서 끝인데 부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이 한 말씀은 인류사상 최대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는 사람이 꼭 절대자가 될 수 있나없나 하는데 대해서 많이들 논의해 왔지만 부처님같이 명백하게 누구든지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공공연히 선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인도에서 범아일여(凡我一如)같은 사상이 있기는 하지만 불교와는 틀립니다.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부처님이 스스로 바로 깨쳐서 우주 만법의 근본을 바로 알고 보니 모든 중생이 모두 부처님과 똑같은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능력만 발휘하면 스스로가 절대자이고 부처이지 절대자가 따로 있고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속에 무한한 근본 능력이 있음을 부처님이 처음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중생들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늘 중생 노릇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별 망상에 가려서 깨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로소 우리가 성불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깨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땅 밑에 금이 많이 있다면 땅을 파면 금이 나오지만 금이 없다면 아무리 땅 밑을 파도 금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금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서 어느 누가 금을 찾겠다고 땅을 파는 헛 일을 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에게 부처님과 똑같은 그런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깨치는 공부를 해보아도 헛 일입니다. 광맥이 없는 곳을 파는 헛 일을 하듯이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에는 우리 중생에게는 무진장의 대광맥이 사람 사람 가슴속에 다 있다 했으니 이것을 개발하고 이것을 소개한 것이 불교의 생명선인 것입니다. 세계의 학자들도 부처님이 인간성에 대해 절대적인 능력을 인정한 것은 인류 역사상 대발견이라고 칭송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내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할까 합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좀 엉뚱한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너무 이상주의였다고나 할까요. 사람이 걸어다니지 말고 하늘로 훨훨 날아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거나,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들이 조그마할 때부터 머릿속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이런 책 저런 책 등을 꽤나 광범위하게 보았지만 내가 볼 때는 영원하고 자유로운 길을 제시한 책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채근담강의(菜根談講義)라는 책이 있어 그것을 펼쳐 보다가 한 군데 눈이 딱 멈추었습니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펼쳐 여니 한자 글자도 없으나 항상 큰 광명을 비친다.

我有一卷經하니 不因紙墨成이라

展開無一字호대 常放大光明이니라

 

이 글귀를 읽으니 참 호기심이 많이 났습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종이에다 먹으로 설명해 놓은 것 가지고 안될 것이다. 종이와 먹을 떠난 참 내 마음 가운데 항상 큰 광명을 비치는 경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글자 한 자 없는 경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로 대광명을 비치는 문자 없는 경이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을 찾아본다고 참선을 익히면서 중이 된 지 벌써 삼십년이 지났습니다만 그저 세월만 허송하고 말았습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 덕상을 가졌다는 이 글자 없는 경(), 말하자면 자아경(自我經),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경을 분명히 읽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어문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할까 합니다.

장자(莊子)에 있는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왕궁에서 일을 하는데 임금님이 늘 책을 보고 있어서 그 사람이 임금에게 물었습니다.

임금이시여, 무슨 책을 보십니까?”

옛날 현인들이 말씀한 좋은 책이니라.”

지금 그 현인과 철인들이 살아 있습니까?”

죽고 없지만 그 현인들이 말해놓은 것을 기록한 것이니라.”

임금이시여, 술을 마시려면 술을 먹어야지 술찌꺼기는 소용없습니다. 현인은 죽고 없는데 기록해 둔 말은 술찌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임금이 그 말을 듣고 문득 깨달은 바 있어 마음을 돌렸다고 합니다. 문자라는 것이 옛 사람의 말찌꺼기이지 진리의 묘를 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우화입니다.

기술도 그렇습니다. 장자에 많이 나오는 얘기지만 아무리 재주가 좋고 글이 좋다고 하여도 목수 기술, 용접 기술, 수레바퀴 만드는 기술 등 그 모든 기술의 묘리(妙理)는 절대로 말이나 글로서 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오래오래 하여 마음으로 터득해야지 말로서나 문자로서는 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만 문자에 대해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깊이 생각해 보는 사람은 다 언어문자의 피해를 경책하는 것입니다.

 

널리 배우고 지혜가 많으면 자성이 도리어 어두워지느니라.

廣學多智하면 神識轉暗이니라

 

달마스님의 말씀입니다.

 

도를 위해서는 날마다 덜고, 배움을 위해서는 날마다 더하느니라.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르니 무위로써 못할 것이 없느니라.

爲道日損이요 爲學日益이라 損之又損하야 以至於無爲無爲而無不爲니라.

 

이것은 노자(老子)의 말씀인데 실지로 도에 깊이 들어온 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속의 번뇌망상을 쉬는 것이 더는 것이니 도를 이룰려면 분별망상을 쉬어 버려야 하고 학문을 배우려면 문자를 하나라도 기억하여 더 보태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는 바른 믿음[正信]과 삿된 믿음[邪信]이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이 부처님 설법인데 다 바른 믿음이지 삿된 믿음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할른지 모르지만 방편인 가설(假說)과 실담(實談)이 있는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옛 조사스님들도 마음이 즉 부처[卽心卽佛]라는 말 이외에는 모두 바른 믿음이 아니고 삿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즉 부처라고 아는 이것이 바른 믿음이며 부처님의 바른 법[正法]인 줄 바로 알아 자기 마음을 깨쳐서 부처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교에 양명학파(陽明學派)가 있는데 불교와 관련이 많습니다. 이 학파를 주장하는 왕양명(王陽明)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람 사람마다 나침반이 있어 만 가지 변화의 근원이 본래 마음에 있구나, 이전의 잘못된 소견을 웃노니 가지마다 잎마다 밖으로 찾았네.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을 홀로 알 때 이것이 하늘과 땅 만유의 근본 기틀이로다. 자기집의 무진장 보화를 버리고 집집마다 밥그릇 들고 거지노릇 하는구나.

人人有箇定盤針하야 萬化根源本在心이라 却笑從前倒見하노니 枝枝葉葉外頭尋이로다無聲無臭獨知時此是乾坤萬有基據却自家無盡藏하고 沿門持鉢效貧兒로다.

 

여기서도 공연히 언어문자에 끄달려 딴 곳을 더듬고 있었음을 경책하였으니 가지마다 일마다 밖을 찾았다고 반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루바삐 마음을 돌이켜서 방편가설과 삿된 믿음에 얽매이지 말고 내 마음이 오직 부처인 줄 알아서 내 마음속의 무진장 보물 창고의 문을 열자는 것입니다. 왜 남의 집에 밥 빌어 먹으러 다니며 거지 노릇을 합니까?

 

이제까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해 왔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벗어나지만 종교란 궁극적으로 무엇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불교란 어떤 특징과 무엇을 근본으로 삼느냐 하는 문제를 잠깐 살펴봅시다. 물론 불교나 예수교나 회교나 이미 다 알다시피 세계적인 종교임에는 틀림없으나 각기 그 교조의 입장이 다르고 그 내용이 상이하므로 같은 종교라고 하더라도 사뭇 다를 수밖에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각 종교의 입장과 내용은 다르다 할지라도 구경목표는 다 같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자면 서울로 갈 때 북쪽에서 가든지 남쪽에서 가든지 서쪽에서 가든지 동쪽에서 가든지 어디서 가든지간에 서울이 목표인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목표는 공통입니다. 그 공통인 종교의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유한의 세계는 생멸(生滅)의 세계이며 절대무한의 세계는 해탈(解脫)의 세계이니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종교의 근본목표인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이란 상대유한의 세계에서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근본 욕구는 영원한 행복에 있는데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영원한 행복을 얻지 못하니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갈 것을 목표로 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 종교의 근본 목표입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는 그만두고 불교의 구경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부처님이 다른 경에서도 많이 말씀하셨지만 기신론(起信論)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고()를 버리고 구경의 낙()을 얻는다.

離一切苦하고 得究竟樂이니라

 

모든 고()를 다 버려버리고 종국적인 최후의 낙,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을 얻는다는 것이 우리 불교의 목표입니다. 그것은 곧 상대유한의 세계를 떠나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는 것과 그 내용이 꼭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대유한의 세계를 버리고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울로 가려면 서울가는 이유를 알아야지 무조건하고 서울만 간다고 하면 미친 사람이니 그 이유를 좀 설명하겠습니다. 천지만물이 많아서 동물도 있고 식물도 있고 무생물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람은 모든 면에서 수승(殊勝)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살아있는 물건인데 살아있는 동안에 무엇을 목표로 하고 활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철학자나 과학자나 종교가나 어느 학자 어느 사람이든지간에 분명한 살아가는 목표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행복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란 살아있는 동안에 그 산다는 데 있어서 고생되는 조건이 많이 있습니다. 고생의 내용을 각 방면에서 연구하고 분석해 보면 사람이란 실제로 고()의 존재이지 낙()이란 극히 일부분 뿐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삼계가 불타는 집이요, 사생이 고해다(三界火宅四生苦海)’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삼계(三界), 즉 중생이 사는 이 우주 전체가 불타는 집과 같다는 것이니 그렇게 고생이 많다는 말이며, 사생(四生), 즉 생명으로 태어나는 모든 것이 고()의 바다라는 것이니 불타는 집에서 고생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나서 살아있는 동안에 고생 고생만 하다가 결국은 죽고마는 것이니 그동안 혹 좋은 일도 더러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순간적이어서 인생 전체로 볼 때는 고()는 많고 낙()은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자살(自殺)할 수도 없고 어떻게 좀 고생을 덜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느냐 하는 생각은 고생하는 사람이 생각 안할래야 안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유사 이래로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야만 이 고생하는 가운데서 좀더 행복하게 살 수가 있겠느냐 하여 그 방법을 모색해 왔습니다. 행복에 두 가지가 있으니 일시적인 행복과 영원한 행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이것을 보면 모든 것이 다 상대유한으로 되어 있어서 모순에 모순으로서 투쟁의 세계입니다. 투쟁의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행복을 얻었다 해도 곧 끝이 있고 맙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이상 일시적인 행복에만 만족할 수는 없으니 당장 한 시간 후에 죽더라도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느냐는 것을 공상(空想)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니 이것이 영원한 행복의 추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원한 행복을 상대유한의 세계에서는 이룰 수가 없으니 절대무한의 세계를 구상하고 거기 가서 영원한 행복을 받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종교의 근본 뜻이라고 말해왔습니다. 이 현실세계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을 성취할 가능성이 없으니 현실을 떠난 다른 세계를 모색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교의 천당설(天堂說)입니다.

이 현실 세계란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내에 있어서 영원하고 무한하지 못합니다. 이 현실세계에서는 아무리 뛰고 굴리고 재주를 넘어 보았자 중생이 참으로 본능적으로 욕망하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은 절대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만치 이 현실 세계에서는 영원한 행복의 추구를 완전히 포기하고 다른 세계를 찾아 그곳만이 절대무한하며 영원한 행복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 예수교의 천당설입니다. 저 하늘을 자꾸자꾸 올라가면 새로운 땅이 있고 그곳에는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을 못할 것이 없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며 일체를 초월한 절대자 하나님이 계신다. 그 하늘 나라 천당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않고 거기 한번 들어가면 영원토록 생명을 누리고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사람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리는 곳이 있다면 현실인 이것을 다 버리고 그 곳으로 가자고 생각할 것 아니겠습니까? 아방궁이다 뭐다 해봐야 다 헛 것이니 다 버리고 그곳으로 가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각 종교의 시발점(始發点)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종교가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이후부터 인류의 사상을 지배하였는데 불교는 삼천 년, 예수교는 이천 년, 바라문교는 사천여 년의 세월이 흘러왔습니다. 사람의 지혜가 발달되기 전에는 천당설을 아무 주저없이 믿고 따랐는데 차차로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그런 가르침이 거짓말 같은 생각이 들어 방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신학자들이 나서서 합리(合理)불합리(不合理)를 논하지 말고 예수의 말씀을 무조건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유명한 신학자 성 어거스틴(St. Augustine)불합리(不合理)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고 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교에 대한 근본이 어디 서있느냐 하면 절대적인 믿음,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 절대적인 신()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는 우주과학 시대가 되어서 하늘 나라를 맹목적으로 그대로 믿으라 하는 것은 통하지 않게 되었고 또 여러 신학사상들이 주장되어 예수교의 사상 자체도 전환하고 있지만 근본 교리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당에 계시는 절대 신인 하나님을 내놓고는 예수교를 찾아볼 수 없고 하나님을 의지해서만 그 하나님의 힘, 타력(他力)으로써 절대무한의 세계인 하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는 그와는 다릅니다. 상대유한의 세계를 벗어난 절대무한의 세계를 어느 곳에서 찾느냐 하면 자기의 마음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절대무한의 세계가 다 갖추어 있는 것이지 내 마음 밖에, 이 현실 밖에 따로 있지 아니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불교의 독특한 입장입니다. 혹 어떤 때 타력적인 방편을 쓰는 것도 결국은 자력으로 자기 마음을 밝히려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불교를 믿으려면 자기에게 그러한 절대무한의 세계가 갖추어 있다는 것,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이 근본 조건입니다. 내 마음 속에 갖추어져 있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여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부처님이나 옛 조사스님들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날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의 발달로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음이 차츰차츰 실증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불교는 처음과 끝이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인간을 완성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는데 그 인간이 절대적 존재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절대적 존재이며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개발해서 참으로 완전한 인격을 완성하자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어서 앞으로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많은 기여를 할 날이 있을 줄 나는 믿습니다.

이 소식을 게송(偈頌)으로 한번 읊으면 이러합니다.

 

기이하다 내 집의 큰 보배창고여

무한한 신기로운 공력 묘하여 측량키 어렵네

의지(意地)를 몰록 벗어나

마음 근원을 사무치면

신령한 빛이 영원토록

무너지지 않는 몸을 비추도다.

奇哉自家大寶藏이여

無限神功妙難測이로다

頓超意地徹心源하면

靈光長照不壞身이로다.

 

이렇게 내 마음 속의 보배 창고를 확실히 믿고 개발하면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되는 것입니다.

 

3)참선 수행

 

이제까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계속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마음을 깨치려고 하면 여러 방법이 있는데 교()에 있어서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삼승십이분교가 벌어지고 또 선()에 있어서는 언어문자를 버리고 바로 깨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의 근본 입장에서 볼 때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기 전에 이미 알아 맞혔다해도 공연히 땅에서 넘어져 뼈를 부러뜨리는 사람입니다. 하물며 덕산스님이 비오듯이 몽둥이로 때리고 임제스님이 우뢰같은 할()을 한다 하여도 관 속에서 눈을 부릅뜨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송장이 관 속에서 아무리 눈을 떠 봐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법상에 앉아서 쓸데없이 부처가 어떻고 선이 어떻고 교리가 어떻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이 법문은 중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생들에게 독약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이 법문이 사람 죽이는 독약 비상인 줄 바로 알 것 같으면 그런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불법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처되려는 병, 조사(祖師)되려는 병, 이 모든 병을 고치는 데는 우리의 자성을 깨쳐서 모든 집착을 벗어나면 참으로 자유 자재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서는 집착을 버릴래야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이 바른 사람이라면 부처님이나 달마조사가 와서 설법을 한다 하여도 귀를 막고 달아나 버려야 합니다.

예전에 무착(無着文喜)스님이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그 절 공양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큰 가마솥에 팥죽을 끓이고 있는데 그 팥죽 끓는 솥 위에 문수보살이 현신(現身)하였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큰 종을 치고 향을 피우고 대중을 운집(雲集)시키려고 야단했을 터인데 무착스님은 팥죽을 저었던 주걱으로 문수보살의 뺨을 이리치고 저리치면서 말했습니다.

문수는 네 문수며 무착은 내 무착이로다[文殊自文殊 文喜自文喜].”

그와 같이 이 대중 가운데서 성철은 너 성철이고 나는 나다. 긴 소리 짧은 소리 무슨 잠꼬대가 그리 많으냐하고 달려드는 진정한 공부인이 있다면 내가 참으로 그 사람을 법상 위에 모셔 놓고 한없이 절을 하겠습니다. 그런 무착스님의 기재가 참으로 출격장부(出格丈夫)이며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내 밥 내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어째서 남의 집 밥을 구걸하느냐 말입니다. 부디 내 밥 내 먹고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언어문자를 익히는 것뿐만 아니라 육도만행(六途萬行)을 닦아서 정각(正覺)을 성취하는 것이 어떠냐고 흔히 수좌들이 나에게 묻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전 조사스님들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하려고 하는 것은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과 같다.

어떤 바보같은 사람이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갈 것입니까. 육도만행이 보살행으로서 아무리 좋다고 하지만 이것으로는 자기 자성을 깨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조 오백년 동안의 불교계를 볼 때 대개 서산(西山)스님을 그 대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은 좀 틀립니다. 진묵(震黙)스님이 말씀하셨듯이 명리승(名利僧)이지 참다운 도인(道人)이 아니더라 그 말입니다. 그런 서산스님이 말했습니다.

오히려 일생 동안 어리석은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승이 되길 바라지 않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산스님의 문집(文集)이 여러 권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이런 결심이 있었기 때문에 서산스님의 문집이 후세에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투철한 각오가 없었다면 일종의 문자승이나 되고 말았지 어찌 이조 오백년을 대표하는 스님이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앞으로 공부를 함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경전을 배우면서 참선을 하고, 참선을 하면서 경전을 배우고 조사어록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언어문자는 산 사람이 아닌 종이 위에 그린 사람인 줄 분명히 알아서 마음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기 대중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로 공부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염불이나 주력(呪力)을 하든지 또는 경을 보아 삼매를 성취하여 성불한다는 등등. 그러나 그 무엇보다는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것이 성불하는 지름길이라고 조사스님들은 다 말씀합니다. 그러니 이 법회 동안에는 누구든지 의무적으로 화두를 해야겠습니다. 이제 내가 화두를 일러줄 터이니 잘 들어십시오.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不是心 不是物 不是佛이니 是什麽

 

내가 일러준 이 화두의 뜻을 바로 알면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고 자성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흔히 이 화두의 뜻을 잘못 알고 마음이라 하면 어떻고 물건이라 하면 어떻고 부처라 하면 어떠냐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늘 마음 속에 이것이 무엇인고하고 의심을 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자기가 참구하는 화두가 있는 사람은 그 화두를 놓치지 말고 더욱 간절한 의심을 지어가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무착스님이 문수보살을 친견한 이야기를 했는데, 문수보살이 무착스님에게 설한 법문입니다.

 

누구나 잠깐 조용히 앉아 있으면

항하사 모래알 같이 많은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낫다

칠보탑은 필경 부서져 티끌이 되거니와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바른 깨달음을 이루느니라.

若人靜坐一須臾 勝造恒沙七寶塔

寶塔畢境碎微塵 一念淨心成正覺

 

부처님 당시에도 마음을 깨치는 방법으로 경행(經行)과 좌선(坐禪)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기회있을 때마다 선정(禪定)을 익혀라고 간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정(禪定)은 앉아 있든지 서 있든지, 말할 때나 말하지 않을 때나 마음이 오로지 한 곳으로 모이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오로지 경행과 좌선만을 가르치시고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 우리들은 오직 참선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앞에 말한 임제스님과 덕산스님에 대해서 잠시 언급할까 합니다. 두 분 스님은 예로부터 조사스님들 가운데서도 영웅이라고 칭송을 받는 분들입니다. 임제(臨濟義玄)스님은 처음 황벽(黃檗希運)스님에게 와 있으면서 수행의 태도가 순수하고 열심이었습니다. 그때 수좌(首座)로 있던 목주(睦州)스님이 감탄하여 비록 후배이기는 하나 대중과는 다른 바가 있구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임제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상좌(上座)는 여기 온 지가 몇 년이나 되었는가.”

삼년입니다.”

그러면 황벽스님께 가서 법을 물어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황벽스님에게 가서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긴요한 뜻입니까하고 물어보지 아니하느냐.”

그 말을 듣고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가서 그렇게 물었는데, 묻는 소리가 아직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황벽스님이 갑자기 몽둥이로 스무 대나 때렸습니다. 임제스님이 몽둥이만 맞고 내려오니 목주스님이 물었습니다.

여쭈러 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제가 여쭙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실스님이 갑자기 때리시니 그 뜻을 제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다시 가서 여쭈어라.”

그 말을 듣고 임제스님이 다시 가서 여쭈니 황벽스님은 또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이와 같이 세번 가서 세번 다 몽둥이만 맞고 말았습니다. 임제스님이 돌아와서 목주스님께 말했습니다.

다행히 자비를 입어서 저로 하여금 황벽스님께 가서 문답케 하셨으나 세번 여쭈어서 세번 다 몽둥이만 실컷 맞았습니다. 인연이 닿지 않아 깊은 뜻을 깨칠 수 없음을 스스로 한탄하고 지금 떠날까 합니다.”

네가 만약 갈 때는 황벽스님께 인사를 꼭 드리고 떠나라.”

임제스님이 절하고 물러가자 목주스님은 황벽스님을 찾아가서 여쭈었습니다.

스님께 법을 물으러 왔던 저 후배는 매우 법답게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하직 인사를 드린다고 오면 방편으로 그를 제접하여 이후로 열심히 공부케 하면 한 그루 큰 나무가 되어 천하 사람들을 위해 시원한 그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임제스님이 와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황벽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너는 고안(高安) 개울가의 대우(大愚)스님에게 가거라. 반드시 너를 위해 말씀해 주실 것이니라.”

임제스님이 대우스님을 찾아 뵈오니 대우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디서 오는고.”

황벽스님께 있다가 옵니다.”

황벽이 어떤 말을 가르치던가.”

제가 세번이나 불법의 긴요한 뜻을 여쭈었는데 세번 다 몽둥이만 맞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무슨 허물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황벽이 이렇게 간절한 노파심으로 너를 위해 철저하게 가르쳤는데 여기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이냐.”

임제스님이 그 말 끝에 크게 깨치고 말했습니다.

원래 황벽의 불법(佛法)이 별 것 아니구나.”

대우스님이 임제스님의 멱살을 잡고 말했습니다.

이 오줌싸개야! 아까는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더니 지금은 또 황벽의 불법이 별 것 아니라고 하니 너는 어떤 도리를 알았느냐, 빨리 말해보라! 빨리 말해보라.”

임제스님은 대우스님의 옆구리를 세번 쥐어 박았습니다. 그러자 대우스님이 멱살 잡은 것을 놓으면서 말했습니다.

너의 스승은 황벽이지 내가 간여할 일이 아니니라.”

임제스님이 대우스님께 하직하고 황벽스님에게 돌아오니, 황벽스님은 임제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이놈이 왔다 갔다만 하는구나. 어떤 수행의 성취가 있었느냐.”

다만 스님의 간절한 노파심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서 오느냐.”

먼저번에 일러주신 대로 대우스님께 갔다 옵니다.”

대우가 어떤 말을 하던가.”

임제스님이 그간의 일을 말씀드리자 황벽스님이 말씀했습니다.

무엇이라고! 이 놈이 오면 기다렸다가 몽둥이로 스무번 때려주리라.”

그러자 임제스님이 말했습니다.

기다릴 것 무엇 있습니까. 지금 곧 맞아 보십시오.”

하면서 황벽스님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황벽스님이 말했습니다.

이 미친 놈이 여기 와서 호랑이 수염을 만지는구나!”

그러자 임제스님이 갑자기 고함을 치니 황벽스님이 말했습니다.

시자야, 이 미친 놈을 끌어내라.”

그후 임제스님이 화북(華北)지방으로 가서 후배들을 제접하면서 사람이 앞에 어른거리기만 하면 고함을 쳤습니다. 그래서 임제스님이 법 쓰는 것을 비유하여 우뢰같이 고함친다[]고 평하였습니다.

한편 덕산(德山)스님은 처음 서촉(西蜀)에 있으면서 교리연구가 깊었으며 특히 금강경에 능통하여 세상에서 주금강(周金剛)’이라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스님의 속성(俗姓)이 주()씨였습니다. 당시 남방에서 교학을 무시하고 오직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하는 선종의 무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여 평생에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금강경소초(金剛經疏鈔)를 짊어지고 떠났습니다. 가다가 점심 때가 되어서 배가 고픈데 마침 길가에 한 노파가 떡을 팔고 있었습니다. 덕산스님이 그 노파에게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그 떡을 좀 주시오하니, 그 노파가 내 묻는 말에 대답하시면 떡을 드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떡을 드리지 않겠습니다고 하니 덕산스님이 그러자고 하였습니다. 노파가 물었습니다.

지금 스님의 걸망 속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금강경소초가 들어 있소.”

금강경과거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 스님은 지금 어느 마음에 점심을 하시려고 하십니까.”

점심(點心) 먹겠다고 하는 말을 빌어 이렇게 교묘하게 질문했습니다. 이 돌연한 질문에 덕산스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그렇게도 금강경을 거꾸로 외우고 모로 외우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떡장수 노파의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노파에게 물었습니다.

이 근방에 큰스님이 어디 계십니까?”

이리로 가면 용담원(龍潭院)에 숭신(崇信)선사가 계십니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곧 용담으로 숭신선사를 찾아 갔습니다.

오래 전부터 용담(龍潭)이라고 말을 들었더니 지금 와서 보니 용()도 없고 못[]도 없구만요.”

하고 용담 숭신선사에게 말하니 숭신스님이 말했습니다.

참으로 자네가 용담에 왔구만.”

그러자 또 주금강은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숭신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하루는 밤이 깊도록 숭신스님 방에서 공부하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오려고 방문을 나서니 밖이 너무 어두워 방안으로 다시 들어 갔습니다. 그러니 숭신스님이 초에 불을 켜서 주고 덕산스님이 받으려고 하자 곧 숭신스님이 촛불을 훅 불어 꺼버렸습니다. 이때 덕산스님은 활연히 깨쳤습니다. 그리고는 숭신스님께 절을 올리니 용담스님이 물었습니다.

너는 어째서 나에게 절을 하느냐.”

이제부터는 다시 천하 노화상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그 다음날 덕산스님이 금강경소초를 법당 앞에서 불살라 버리며 말했습니다.

모든 현변(玄辯)을 다하여도 마치 터럭 하나를 허공에 둔 것 같고, 세상의 추기(樞機)를 다한다 하여도 한 방울 물을 큰 바다에 던진 것 같다.’

그후 후배들을 제접할 때는 누구든지 보이기만 하면 가서 몽둥이[]로 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덕산스님이 법 쓰는 것을 비유하여 비오듯이 몽둥이로 때린다고 평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씩 대중방을 뒤져 책이란 책은 모조리 찾아내어 불살라 버리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참선에 신심을 내어 자성을 바로 깨치도록 노력합시다.

 

2. 중도 사상

 

1)교학(敎學)에서 중도 사상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그 교리 내용이 복잡다단합니다. 다른 종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은 간단하지만 불교의 소의경전은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방대한 전적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도 어떤 때는 이런 방편을, 어떤 때는 저런 방편을 말씀하셔서 얼핏 보면 서로서로 모순도 있는 것 같고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45년간 설법하신 말씀 전체를 체계화하고 가치적으로 배열하여 자기 종파(宗派)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게 되었는데 교학적으로 이것을 교판(敎判)이라고 합니다. 교상판석(敎相判繹)의 줄인 말로서 혹은 간단하게 판석(判繹)이라고도 합니다. ()은 부판(剖判), 쪼개어 판단한다는 뜻이며 석()은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복잡한 불교의 이론체계를 교학적으로 정리하여 교판(敎判)을 가장 잘 세운 이가 바로 천태종(天台宗)의 지자대사와 화엄종(華嚴宗)의 현수대사입니다.

지자대사(智者大師)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시팔교(五時八敎)로 분류하여 해석했습니다. 오시(五時)란 부처님 일생 동안의 설법을 다섯 시기로 나눈 것이니, 첫째는 화엄시(華嚴時)로서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성도(成道)하시고 불교 최고의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하는 21일간의 설법기간을 말합니다. 둘째는 녹야원시(鹿野遺時)로서 21일간 화엄경을 설하시고는 다시 교진여 등 다섯 비구들을 위해 소승교(小乘敎)를 설하셨습니다. 이후 12년간 주로 소승교만을 설하셨으며, 이 때의 설법을 결집한 것이 아함경(阿含經)이라고 하여 이 시기를 아함시(阿含時)라고도 합니다. 셋째는 방등시(方等時)로서 대소승의 법을 함께 설하여 영리한 근기(根機)나 둔한 근기나 간에 고르게 이익을 주는 시기를 말합니다. 유마경사익경능가경능엄삼매경금강명경승만경 등을 설한 연간을 말합니다. 넷째 반야시(般若時)란 방등시(方等時) 22년간 모든 반야경을 설법하신 것을 말합니다. 다섯째는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로서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한 시기를 말합니다. 법화경은 8년간의 설법이며 열반경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는 최후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에 설법하신 것입니다. 오시(五時)를 가르친 시기를 합산해 보면 50년이 되는데 지자대사는 부처님께서 29세에 성도하시고 79세에 열반하셨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팔교(八敎)란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법의 방식을 달리한 것인데 그 교화 방법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누니 화의사교(化儀四敎), 즉 돈교(頓敎)점교(漸敎)비밀교(秘密敎)부정교(不定敎)이고, 또 설법의 내용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누니 화법사교(化法四敎), 즉 장교(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를 말하는 것입니다. 장교란 경장율장논장의 삼장에 의해서 세운 교법으로서 소승자리교(小乘自利敎)를 말합니다. 즉 아함경5부율바사론구사론 등의 교학입니다. 통교란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의 삼승에 공통하고 삼승이 함께 받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별교(別敎)란 성문연각의 이승과 함께 할 수 없고 보살승의 수행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별교는 격력(隔歷)의 입장에서 설명한 교리이며 원융무애(圓融無礙)의 입장에서 설명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원교와는 틀립니다. 원교란 격력이 아닌 사()와 이()가 원융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을 설명하므로 대승 가운데 최고로 깊은 가르침을 말합니다.

화엄종의 현수대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교로 분류하여 해석했습니다. 오교(五敎)란 첫째 소승교(小乘敎), 둘째 대승시교(大乘始敎), 셋째 대승종교(大乘終敎), 넷째 돈교(頓敎), 다섯째 원교(圓敎)입니다. 소승교란 아함경바사론구사론 등의 말씀으로써 우법소승(愚法小乘)이라고도 합니다. 우법(愚法)이란 법에 어리석다는 뜻으로 대승보다 못하다는 뜻이니 인아(人我)가 공함은 알지만 법아(法我)의 공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승시교란 대승초문의 가르침이기에 시교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또 상시교(相始敎)와 공시교(空始敎)가 있습니다. 상시교는 해심밀경유가론유식론 등에서 사와 이가 격력하고 오성각별(五姓各別)로써 일체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공시교는 반야경중론백론십이문론 등에서 일체 모든 것은 공()이라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대승종교는 대승의 종극적인 말씀으로써 근기가 원숙한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열반경능가경승만경 등의 경과 기신론보성론 등이 이것입니다. 돈교는 수행의 계단을 세우지 아니하고 한생각 나지 않음이 곧 부처임을 깨닫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특별한 경론은 없으며 경론 가운데서 이와 같이 설법하는 것은 모두 돈교라고 합니다. 현수대사의 시대에는 아직 선종이 성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교에 선종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원교는 원융원만한 가르침이라는 의미로서 완전한 교리를 말하니 화엄종 자체를 가리킨 것입니다. 화엄종은 일승에는 동교일승과 별교일승이 있다고 주장하나, 원만한 가르침으로 말한다면 별교일승은 화엄종만이라고 봅니다.

앞으로 각 교단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우선은 간략하게 천태종과 화엄종의 교판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들 교판은 역사적으로 가장 잘된 교판으로 보는데 그 두 교판에서 다 같이 불교의 최고 위치를 어디에다 두었느냐 하면 원교에 두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자대사는 원교를 법화경과 화엄경이라 하고, 현수대사는 법화경을 돈교에 두고, 화엄경만을 원교라고 주장하였지만, 어찌하였든간에 천태화엄 양 종파에서 원교를 불교 최고의 원리로 삼은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원교의 근본이 무엇이며 어떤 내용으로 되어 있는가를 알게 되면 불교의 최고 원리가 어느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원교란 이 중도를 나타내니 양변을 막느니라.

圓敎者此顯中道遮於二邊

 

지자대사의 말씀입니다. 불교의 최고 원리란 중도이며 그 중도의 내용은 양변을 다 막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자대사가 좀더 자세하게 설명한 것을 인용해 봅니다.

 

마음이 이미 맑고 깨끗해지면 양변을 다 막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면 두 법을 다 비추느니라.

心旣明淨雙遮二邊하고 正入中道雙照二諦니라

 

양변을 다 막는다[雙遮二邊]는 것은 상대모순(相對矛盾)을 다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현실세계란 전체가 상대모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과 불,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있음과 없음, 괴로움과 즐거움, 너와 나 등입니다. 이들은 서로 상극이며 모순과 대립은 투쟁의 세계입니다. 투쟁의 세계는 우리가 목표하는 세계는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의 세계를 목표로 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극투쟁하는 양변의 세계에서 평화라는 것은 참으로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평화의 세계를 이루려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양변을 버려야 합니다. 모순상극의 차별세계를 버려야 합니다. 양변을 버리면 두 세계를 다 비추게[雙照二諦] 되는 것입니다. 다 비친다는 것은 서로 통한다는 뜻이니 선과 악이 통하고 옳음과 그릇됨이 통하고 모든 상극적인 것이 서로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둘 아닌 법문[不二法門]이라고 합니다. 선과 악이 둘이 아니고, 옳음과 그릇됨이 둘이 아니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면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서로 통하려면 반드시 양변을 버려야 합니다.

요사이 이것이 수학적과학적으로도 4차원의 세계라는 개념에서 증명되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가장 정확한 것이 수학인데 거기에 4차원 세계의 공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래 4차원 세계라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나온 것인데, 민코프스키(H.Minkowski)라는 수학자가 4차원 세계의 공식을 완성하여 그 이론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여 놓고 첫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앞으로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가 온다.”

3차원이란 입체 즉 공간을 말하며 시간은 1차원입니다. 그런데 차별상대의 세계인 현상계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대립되어 통하지 않으나, 4차원의 세계가 되면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가 되어 현상계의 차별모순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이 불교 중도의 진리와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 생각은 같다고 봅니다. 양변이 융합하는 세계를 불교에서는 중도라고 하며, 현대 물리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양변이 융합하는 세계를 4차원의 세계라고 합니다. 거기에서는 물이 물이 아니고 불이 불이 아니기 때문에 물과 불이 서로 통하여 물이 곧 불이며 불이 곧 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걸림이 없는 세계[無碍世界]라고 합니다.

그러면 화엄종에서는 중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의상대사의 법성게(法性偈)에서 인용해 봅시다.

 

구경에 실제인 중도의 자리에 앉으니

예로부터 움직임이 없어 부처라 한다.

窮坐實際中道床하니 舊來不動名爲佛이로다

 

곧 중도를 바로 깨친 이것이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교(圓敎)는 중도와 같은 말이며,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곧 비춰서 막고 곧 막아서 비치어 양변을 다 막고 양변을 다 비추어 둥글고 밝게 일관하면 화엄종취에 계합하느니라.

卽照而遮하고 卽遮而照하여 雙照雙遮하야 圓明一貫하면 契斯宗趣矣니라

 

청량(淸凉)스님이 현수대사의 탐현기(探玄記)에 있는 여러 이론을 종합해서 내린 화엄종취의 최후 결론 부분입니다. 양변을 버리면서 양변이 융합하고, 양변이 융합하면서 양변을 버리는 쌍차쌍조(雙遮雙照)가 바로 화엄종취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천태종이나 화엄종이나 서로 다 막고 서로 다 비추는 쌍차쌍조를 내용으로 하는 중도가 바로 불교 최고 원리라고 함에는 틀림없습니다.

다음에는 현장법사(玄獎法師)가 인도에 유학 가서 유식론을 배워 중국에 와서 법상종을 세웠는데 유식 법상종의 교판을 살펴볼까 합니다. 법상종은 부처님 일생의 가르침을 삼시(三時)로 나누어서 낮은 가르침으로부터 점차로 깊은 가르침으로 나아갔다고 봅니다.

제일시(第一時)는 유교(有敎)를 설하신 때로서 아집은 부수었으나 법집은 부수지 못한 소승 부파불교를 말합니다. 제이시(第二時)는 공교(空敎)를 설하신 때로서 대승에 나아가고자 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법은 모두 공이라는 뜻을 분명히 하신 반야부의 시기로 봅니다. 제삼시(第三時)는 중도교(中道敎)를 설하신 때로서 유()와 공()을 비판하고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닌 중도의 뜻을 분명히 하신 시기로서 해심밀경(解深密經)을 설하신 때로 봅니다. 이상으로 간단히 법상종의 교판을 살펴 보았습니다만, 현장법사의 제자되는 규기법사(窺基法師)가 말한 법상종의 근본종취를 인용해 봅니다.

 

해심밀경의 모임에서 일체를 설명하여 유무 양변을 떠나 중도에 바로 자리하니, 제삼시 중도의 가르침이니라.

解深密經會說一切하야 離有無邊하고 正處中道하니 第三時中道之敎也니라

 

여기서도 중도를 근본 종취로 한다고 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천태종이나 화엄종만큼 완벽하지는 못합니다. 어쨌든 당나라 삼대종파에서 모두 한결같이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던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2)선종에서의 중도 사상

 

그러면 선종(禪宗)은 또 어떠했던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육조스님께서 입적(入寂)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최후 유촉으로서 누가 묻지 아니하는데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니 내가 입멸하고 난 뒤에도 각각 한 곳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내가 지금 너희들에게 법문하는 방법을 가르쳐 선종의 근본 종지를 잃지 않게 하겠노라. 모름지기 삼과법문(三科法門)과 동용삼십육대(動用三十六對)를 들어서 말하리니 나고 들어감에 양변을 떠나고 일체 법을 설할 때에 자성을 여의지 말라. 혹 어떤 사람이 와서 너희에게 법을 묻거든 말하되, 모두 쌍()으로 하여 다 대법(對法)을 취하고 오고 감에 서로 원인이 되어 마침내는 두 법을 모두 없애어 다시 갈 곳이 없게 하라.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신 나오든지 들어가든지 간에 양변을 떠나라하신 그 근본 뜻은 무슨 법문을 하든지 양변을 떠나서 법문을 해야지 양변에 머물러서 법문해서는 안된다고 하신 말씀이며 한쪽에 치우치면 불법(佛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으로 하여 다 대법(對法)을 취한다고 하신 것은 누가 법을 물어오면 예컨대, 누가 있음[]을 물으면 없음[]을 들어 쌍()으로 대답하여 언제든지 대대(對對)로 말하라는 것입니다.

가고 옴에 서로 원인이 되게 하라하신 뜻은 있음[]이란 없음[]이 있기 때문에 있음[]이 있고, 없음[]이란 있음[]이 있기 때문에 없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세간의 법은 모두가 상대법이어서 독립적으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상대법이란 결국은 생멸법입니다. 생멸법은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구경에 가서는 두 법[二法]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곧 양변을 떠나버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갈 곳이 없게 하라하신 뜻은 그래서 상대법이 다시는 발도 못 붙이게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있음[]과 없음[]을 완전히 버릴 것 같으면 오고 감에 서로 원인이 되어서 중도(中道)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양변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 중도이므로 한쪽에 머문다면, 있음에 머물든지 없음에 머물든지간에 한쪽으로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것을 변견이라고 합니다. 변견이란 세간의 생멸법이지 불법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은 양변을 떠나 중도를 성취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설법을 할 때에도 중도에 의거해서 설법을 해야지 중도를 벗어난 설법을 하면 불법의 종지(宗旨)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육조단경가운데서도 돈황본(燉煌本)이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하는데 글자는 몇자 틀리는 것이 있어도 그 뜻은 위와 같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의 최후 유촉이 중도에 있다는 것은 어느 학자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후 선가에서도 역사가 흘러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나뉘어져, 조사스님네가 많이 나오고 깊은 법문이 많았지만 그 표현방법은 틀려도 육조스님의 유촉과 같이 중도라는 근본 종지를 벗어나서 설법을 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육조스님의 유촉을 충실히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백장(百丈)스님은 경론 삼학에 해통하고 지식이 넓은 선지식인데 불법을 바로 보는 견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있음[]과 없음[]에 떨어지지 아니하니 누가 감히 화답하리오.

不落有無誰敢和

 

일체의 있음[]과 없음[]등의 견해가 전혀 없고 또한 없다는 견해도 없는 것이 불법을 바로 보는 견해라고 한다.

都無一切有無等見 赤無無見 名正見

 

있음[]과 없음[]을 보지 아니하면 곧 바로 부처님의 참 모습을 보느니라.

不見有無 卽時見佛眞身

 

있다[], 없다[]고 함은 있다, 없다는 한쪽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말하는 것으로 변견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왜 하필이면 있음과 없음을 말하느냐 하면 이 있음과 없음이라는 것은 모든 견해가 이 두 가지에 귀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견을 말할 때 있음과 없음을 예로 많이 드는 것입니다. 또 일체의 있음과 없음의 두 견해 등이 없다고 하면 또 없다는 것에 집착하게 되니 없다는 그 생각이 있으면 그것도 변견이므로 없다[]는 견해도 또한 굳이 고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조스님의 제자되는 대주(大珠)스님의 말씀입니다.

 

마음에 이미 양변이 없으면 가운데[]도 또한 어찌 있을 것인가. 다만 이렇게 얻은 것을 중도(中道)라 이름하니 참으로 여래의 길이니라.

心旣無二邊 中赤何有哉 但得如是者 卽名中道 眞如來道

 

내가 법문할 때마다 중도, 중도하니 어디 말뚝 박히듯이 박혀있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자로 선을 긋듯이 분명하게 한가운데라는 것은 아닙니다. 표현하자니 가운데[]’라 하는 것입니다. 가운데서도 설 수 없는 그것을 억지로 이름붙여 가운데라 하는 것이지 가운데에 설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도 집착이며 변견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조대사백장선사대주선사 등 선종의 대표스님들의 어구를 인용했는데, 이런 큰스님들도 불법(佛法)의 근본을 말할 때는 양변을 떠난 중도(中道)를 밝히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선()과 교()를 통해서 중도(中道)가 불교의 최고 원리라고 함에는 일치하나 중도를 표현하는 방법에는 선과 교가 차이가 있습니다. 즉 천태종은 양변을 다 막고[雙遮二邊] 두 법을 다 비친다[雙照二諦]고 하고, 청량스님은 쌍차쌍조(雙遮雙照)라고 했고, 현수스님은 쌍민쌍존(雙泯雙存)이라고 표현했는데 선문(禪門)에서는 양변을 떠나는 것만 얘기하고 있으니 쌍차(雙遮)만 말하고 쌍조는 말하지 아니한 것이 아닌가? 중도를 반만 표현한 것이지 전체를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쌍차(雙遮), 즉 양변을 막는다는 것은 양변을 떠나는 것을 말하며, 쌍조(雙照), 즉 양변을 비춘다는 것은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양변이란 모두 변견인데 변견을 버리면 중도(中道)입니다. 비유하자면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 푸른 하늘에 해가 그대로 드러나고, 해가 완전히 드러나 있으면 구름이 완전히 걷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걷혔다는 것은 해가 드러났다는 말이며, 해가 드러났다는 것은 구름이 걷혔다는 말과 같습니다. 쌍차(雙遮)란 양변을 완전히 떠난 것이니 구름이 걷혔다는 말이고, 쌍조(雙照)란 양변이 서로 융합한다는 것이니 해가 드러나 비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걷혔다는 것은 즉 해가 드러난 것이며, 해가 드러났다는 것은 구름이 걷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쌍차가 즉 쌍조며 쌍조가 즉 쌍차입니다. 부처님이나 예전 조사스님들이 쌍차로서만 얘기할 때도 있고, 쌍조로서만 얘기할 때도 있어 그때그때의 입장에 따라 그 표현방법이 틀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쌍차라 하면 쌍조의 뜻이 내포되어 있고, 쌍조라 하면 또한 쌍차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3)대승비불설 비판

 

지금까지 대승경전의 입장에서 선()과 교()를 통하여 일관된 최고원리가 중도사상(中道思想)이라는 것을 설명해 왔는데 대중들도 이해했을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가 하나 붙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원시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모두 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으로 믿고 경전 그 자체에 대해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학문이 발달되고 불교연구가 깊어짐에 따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들의 성립시기가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법화경이나 화엄경의 범어본(梵語本)을 언어학적, 문법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이 경전들이 부처님 당시에 성립된 것이 아니라 부처님 돌아가신 후 56세기 뒤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육조스님께서도 부처님 돌아가신 후 천여 년 뒤의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내가 지금까지 부처님 근본사상은 중도(中道)라고 법문한 것이 부처님 뜻과는 관계없는 거짓말이 되어 버리고 말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당시에 친히 하신 말씀의 기록이 아니라 돌아가신 지 56백년 뒤에 성립된 경전을 인용하여 이것이 부처님 말씀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경전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불교계가 크게 당황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이라 합니다. 이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의 주장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경전 연구를 거듭한 결과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경전은 아니다고 하는 확증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초기경전으로 대소승에서 함께 인정하는 아함경(阿含經)은 모두 다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경전인가 하고 연구해 보니 그 아함경조차도 모두 다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니 불교를 어디 가서 찾아야 될지 모르게 되어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살아계시다면 물어나 보겠는데 그럴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학문적으로 곤란한 상황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교학자인 우정백수(宇井伯壽)라는 분이 어떻게 해야만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알 수 있겠느냐하는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부처님의 중요한 사적(史蹟)을 기초로 삼고, 둘째 부처님 당시의 인도 일반 사상을 참고하고, 셋째 원시경전 가운데서 제일 오래된 부분이라고 인정되는 것을 종합하면 이것만은 꼭 부처님이 설했으리라고 믿어지는 공통된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원칙들을 기둥삼고 부처님의 근본불교를 알려고 우리가 노력해야지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如是我聞]’고 시작한다고 해서 모두 다 부처님이 친히 설한 경전이라고 알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리하여 다시 학자들이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연구하여 보니 초기의 원시경전인 아함경도 아니고 대승경전도 아니고 율장(律藏)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율장을 보면 시대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나 문법학적으로나 부처님 당시부터의 사실을 그대로 기록해 내려온 것으로서 혹 중간에 가필한 내용이 더러 있기는 하나, 근본적으로 봐서는 가장 부처님 말씀에 정확하지 않은가 하고 학자들이 판단을 내렸습니다. 율장 가운데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학자들은 통칭하여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합니다. 이 초전법륜이 불교에 있어서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부처님 말씀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 율장의 초전법륜편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존(世尊)이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출가자는 이변(二邊)에 친근치 말지니 고()와 낙()이니라. 여래도 이 이변을 버린 중도를 정등각(正等覺)이라 한다.

 

출가(出家)라는 것은 꼭 불교의 승려가 되는 것만이 아니고 인도 당시에는 집을 나가 도를 닦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도를 전념으로 닦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변에 집착해서는 안되니 예를 들면 고()와 낙()이라는 것입니다. 이변이라 하면 시, , 무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어째서 고와 낙을 예로 들었느냐 하면 부처님 당시 실정에 비춰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수행자들은 대부분이 고행주의자였으며 다섯 비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행주의자(苦行主義者)란 세상의 향락을 버리고 자기 육신을 괴롭게 해야만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병을 따라 약을 주듯이 고행주의자들인 다섯 비구에게 고와 낙을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이 세상의 향락만 버릴 줄 알고 고행하는 이 괴로움[]도 병인 줄 모르고 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해탈하려면 고와 낙을 다 버려야 한다. 이변을 버려야만 중도를 바로 깨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변을 버리고 중도를 정등각하였다는 이 초전법륜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부처님의 근본법이라고 확증하고 있으며 이것을 부처님의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고 합니다.

이 중도대선언은 남전대장경율부(律部)경전에 있는 것을 인용하였고, 한역(漢譯) 오분율(五分律)사분율(四分律) 등에도 기록되고 있으나 남전대장경과 같이 명백하고 정확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깨치신 것이 이변을 떠난 중도라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봅니다.

세계의 어느 불교학자이든간에 율장의 초전법륜편의 중도대선언을 불교의 근본 출발점으로 삼는데, 혹 또 논란하기를 경전성립사적으로 보아서 율장보다도 더 앞선 경전의 하나인 숫타니파아타에서도 중도를 설명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숫타니파아타의 피안도품(彼岸道品)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양 극단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불교의 근본이 중도사상에 있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가 부처님 돌아가신 후 몇 백년 뒤에 성립되었든간에 어떤 경전이든 중도사상에 입각해서 설법되어져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 법이고 그렇지 않다면 부처님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앞에서 말한 천태종이나 화엄종이나 선종 등이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그대로 이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학자들이 잘 몰라서 대승불교를 의심하고 소승불교만이 부처님 불교가 아닌가 하고 연구해 보았지만 부처님의 근본불교가 중도사상에 있다는 것이 판명된 뒤에는 대승비불설은 학계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이론은 일본의 명치(明治) 말엽에서 대정(大正) 초기인 20세기 초엽에 성행했습니다.

그러면 인도에 있어서 용수(龍樹)보살이나 마명(馬鳴)보살이 주창한 대승불교운동(大乘佛敎運動)이란 무엇인가? 대승비불설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대승불교는 용수보살 자신의 불교이지 부처님 불교는 아니라고 하여 소승불교만이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불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근본불교가 중도에 있다는 것이 학문적으로 판명됨으로 해서 그런 주장은 다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용수보살이 주창한 대승불교의 근본 뜻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그때까지 있었던 부파불교에서 벗어나 바로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근본불교로의 복구운동이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세월이 지나면서 제자들이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되면서 각자의 교리를 주장하게 되는데 이 시대를 불교사적으로 부파불교시대(部派佛敎時代)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는 18개 또는 20개 부파의 불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각 파가 각기 자기의 주장을 펴서 이것이 불교다 저것이 불교다 하여 논쟁을 많이 하였지만 모두 어느 한쪽에 집착한 변견이었으니 이것이 소승불교입니다.

그 주장들을 대체로 보면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유견(有見)과 없다는 무견(無見)으로 갈라졌는데 대중부(大衆部) 계통에서는 무견(無見)을 주장하는 파가 좀 있기는 있어도 상좌부(上座部) 계통에서는 모두가 유견(有見)을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부파불교인 소승불교시대에 있어서는 변견으로 근본을 삼았고 소승경전도 그 당시 자기네들이 편집하였고 또 전해 내려오면서 많이 가필(加筆)하고 개필(改筆)하였습니다. 이것이 저간의 사정이었습니다.

용수보살이 대승불교를 선언하고 나선 것은 삿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破邪顯正]’는 것이었습니다. 즉 유견(有見)이 아니면 무견(無見)인 소승불교의 삿된 변견을 부숴버리고 부처님의 바른 견해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나선 것이 용수보살의 근본 목적이며 사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용수보살은 중론(中論)대지도론(大智道論)을 저술하여 부처님의 근본사상인 중도를 천양하였습니다. 중도! 이것만이 부처님의 정통사상이라고 주장하여 그의 제자 제바존자(提婆尊者)와 같이 부파불교의 추종자들과 논쟁을 벌여 변견을 부숴버리고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복구시키기 위해서 활약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승경전이란 시대적으로 봐서는 혹 부처님과 56백년의 차이가 있다 하여도 사상적으로 봐서는 부처님 근본사상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승불교는 정통이 아니며 대승불교가 정통인 것입니다.

하나 덧붙일 것은 시대적으로 보아서 불교를 원시불교(原始佛敎)부파불교(部派佛敎)대승불교(大乘佛敎)로 나눕니다. 원시불교를 다시 부처님 당시와 직계 자제들이 있었던 불멸 후 30년까지를 대개 근본불교(根本佛敎)라 하고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 백년까지를 협의의 원시불교라 합니다. 부파불교란 곧 소승불교로서 불멸 후 1세기부터 대승불교가 일어나기까지 45백년 사이를 말하고 또 대승불교는 서기전 1세기 무렵부터 일어난 새로운 불교를 말합니다. 근본불교인 원시불교와 부파불교인 소승불교는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부파불교시대에 있어서는 유견 아니면 무견, 무견 아니면 유견의 변견으로 각기 자기 교설을 주장한 소승불교로서 중도사상이 없는데 반하여, 근본불교는 중도사상에 입각하여 모든 교설이 설하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소승불교는 부처님 사상을 오해한 변질된 불교이며 정통의 불교는 아니라는 것은, 요즈음 와서 학자들이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 근본불교사상에 대한 연구 공적이 제일 큰 사람은 우정백수(宇井伯壽) 박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4)중도사상의 독창성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근본불교원시불교대승불교를 일관하는 중도사상이라는 것이 불교만의 독특한 진리인지 아니면 다른 종교나 철학에 있어서도 이 중도 사상이 있는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학문이나 무슨 이론이든지간에 그 시대상을 떠나서는 그 학문이나 이론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큰 학설이라 해도 평지돌출한 것은 있을 수 없고 오직 과거 학설의 영향을 받거나 그것을 조금 발전시키거나 변형시킨 것으로 생각하여 신학설이란 것도 시대적 변형과 시간적 발전이라고 봅니다.

불교연구가 깊지 못하였을 때는 세계의 불교학자들도 중도사상(中道思想)이란 것이 인도사상의 하나의 발전과정이지 부처님이 독창적으로 새로 발견한 진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불교연구가 깊어짐에 따라서 고대 인도에 있어서 부처님 앞에도 중도사상은 없었고, 당시에도 중도사상이 없었으며 오직 부처님만이 발견하고 성립시킨 새 진리가 중도사상이라는 것이 연구되었습니다. 특히 일본의 우정백수와 인도의 바루아(B.M.Barua)의 공적이 제일 크다고 보겠습니다. 그럼 인도사상에서 어떻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부처님 당시까지의 인도사상을 크게 나누면 하나는 바라문사상이며 다른 하나는 여기에 반대하여 일어난 일반사상, 이것을 불교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도 합니다. 인도의 정통사상인 바라문교에서는 전변설(轉變說)을 주장합니다. 우주의 최초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근본적인 범(), 즉 브라흐마(Brahma)를 인정하고 이것이 전변하여 순차적으로 잡다함이 생겨서 우주만물이 나왔다고 생각하며, 또 그 개개 물체 가운데 유일무이한 브라흐마가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아트만(Ātman)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내재신(內在神)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상은 말하자면 범신(梵神)사상으로 유신적(唯神的)입니다. 우리가 생사를 해탈하여 참으로 영원한 자유를 얻으려면 부정과 죄악에 물들여진 내재신으로서는 해탈할 수 없으므로 마음을 제어하는 명상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육체적인 어떤 노력보다도 정신적 수양을 하는 수련방법을 택했던 것이니 이것을 보통 수정주의(修正主義)라고 합니다.

다음 일반사상, 즉 육사외도에서는 적취설(積聚說)을 주장합니다. 이 허공 중에 독립하여 상주하는 많은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체만물은 이들 제 요소가 서로서로의 결합과 집적에 의해 성립하는 것으로서 결코 유일무이한 근본적인 무엇으로부터 만물이 생겨난다고 하는 단일한 근본체를 부인합니다. 이 설은 기계관에 빠지기 쉽고 유일신을 인정하지 않으며 종교적 정취도 결여되어 있다고 봅니다. 적취설에 있어서는 물질과 정신을 이원론(二元論)적으로 보아서 정신이 물질인 육체에 속박되어서 생사를 해탈하지 못하므로 육체의 세력을 약하게 하면 그만큼 더 정신이 자유로와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고행주의(苦行主義)를 택했습니다.

이상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전변설이란 종교적 유신적(唯神的)이며 적취설은 과학적 유물론적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사상에 대해서 부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하셨는가 하는 것인데 상세히 설명하려면 끝이 없고 간단히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처음 바라문계층의 수정주의자인 아라라 선인과 웃다카 선인에게 가서 공부하여 그들이 체험한 궁극을 증득했으나 실지의 해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전변설을 주장하는 수정주의를 버리고 다음에 적취설을 주장하는 고행주의자로 가서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육년동안 갖은 고행을 다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어서 고행을 버리고 보리수 아래에서 독자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공부하여 새벽별을 보고 정각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인도 수행방법의 양대 조류인 전변설의 수정주의나 적취설의 고행주의를 다 버리고 중도에 입각한 연기설이라는 자기의 독특한 새 입장을 개척한 것입니다. 부처님 전의 모든 인도 사람들은 참으로 우주의 근본원리를 바로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중도를 몰랐으며 부처님만이 우주의 근본원리를 바로 깨쳐 중도사상을 천양한 것인 만큼 그 이전 인도사상의 시대적 변형이라든가 시간적 발전이라고 볼 수 없고 부처님이 처음 제창하신 새 출발의 사상입니다.

중도사상이 인도에 있어서는 그렇지만 동서양을 통해서 중도와 같은 사상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도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유교의 중용(中庸)과 불교의 중도가 같은 것이 아니냐고 흔히들 말하는데 전혀 틀리는 사상입니다. 중용(中庸)이란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책인데 그 책 속에서 희락이 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희락이 나서 적당하게 사용되는 것을 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인용한 바 락이 나지 않는 것이 중()이라 한다고 하니 이것이 중도가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누누히 설명해 왔지만 중도란 양변을 여의는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므로 중용과는 틀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쌍차쌍조(雙遮雙照)를 내용으로 하는 중도를 바로 알게 되면 동서양의 모든 종교나 철학이 불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흔히 보면 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불교나 유교나 도교나 예수교나 혹은 헤겔철학이나 칸트철학과 같지 않느냐고 혼동시켜버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럼 중도사상이란 다른 어떤 종교나 무슨 이론과도 타협할 수 없는 고립된 사상인가? 예수교나 유교나 도교나 회교나 또는 어떤 철학이든지 간에 각기 자기의 독특한 입장이 있으면 그 입장을 고집하여 타협할 줄 모릅니다. 그것은 변견에 집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알고 보면 일체 만법이 불교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중도사상을 모를 때는 유교는 유교, 불교는 불교, 무슨 철학은 무슨 철학, 유신론이든지 유물론이든지 각각 다 다르지만 중도사상을 바로 알게되면 금강경에서 일체 만법이 모두 불법이다[一切法皆是佛法]’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중도란 일체만법, 일체 모든 진리를 융합한 우주의 근본원리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고보면 예수교도 우리 불교요, 유교도교도 우리 불교입니다. 결국 불교를 바로 알려면 부처나 마구니를 함께 다 버려야 합니다. 부처와 마구니가 서로 옳다고 싸우면 양변에 집착했기 때문에 불법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참으로 우리 불교를 바로 아는 사람이라면 부처와 마구니를 다 버려야 합니다.

이와 같이 중도사상은 철학적인 면에 있어서나 실천면에 있어서나 모순 상극된 상대적인 차별을 다 버리고 모든 것이 융합된 절대 원융자재한 대원리입니다. 이 사바세계의 현실은 모순 상극이어서 곳곳에 언제나 싸움이 그칠 사이 없습니다. 그 싸움 때문에 고()가 자연히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순상극인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 걸림없는 자유의 세계, 해탈열반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원통자재한 중도에 입각하여야 합니다. 양변을 떠나 가운데[]도 머물지 아니하는 중도사상만이 오직 참다운 극락세계를 이 현실에 실현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수(賢首)대사가 화엄종을 크게 일으켜 오교장(五敎章)이란 책을 지었는데 그것은 화엄종의 개종선언서(開宗宣言書)와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정념(情念)을 버리니 정리(正理)가 스스로 나타나고 정리(正理)를 따르니 정념(情念)이 스스로 없어진다.

反情理自顯이요 據顯理情自亡이니라

 

일체 차별 망견(妄見)을 버리니 중도의 근본원리인 바른 이치[正理]가 스스로 나타나고, 중도의 근본원리인 바른 이치[正理]를 따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일체 차별 망견을 버린다 함은 모든 일체 양면을 다 버리는 쌍차(雙遮)를 말하며, 정리(正理)가 나타난다 함은 모든 양변을 버려서 모든 양변이 융합하여 중도원리가 드러난다는 쌍조(雙照)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리(正理)를 따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 함은 모든 것을 융합하는 쌍조(雙照)의 중도원리에서 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쌍차(雙遮), 즉 양변을 버리고 나니 쌍조(雙照), 즉 양변이 서로 융합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며, 쌍조(雙照), 즉 양변을 완전히 융합하니 쌍차(雙遮), 즉 양변을 버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묘한 표현입니다.

앞에서 말한 정념을 버린다함을 차(), 즉 막는다 버린다이며 정리를 따른다함을 표(), 즉 드러난다 융합한다고 하여 화엄종에서는 차()와 표()를 가지고 중도를 많이 표현합니다. ()란 쌍차(雙遮), ()란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이것을 다시 쉽게 표현하자면 구름이 흩어졌다 하면 해가 드러났다는 말이며 해가 드러났다 하면 구름이 흩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망견을 다 버리고 나면 자연히 쌍조(雙照)의 바른 이치가 드러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바른 이치가 드러나면 양변의 일체 망견을 버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쌍차쌍조(雙遮雙照)란 말이 본래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영락경瓔珞經)에서 나오며 부처님께서 자세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천태종의 지자(智者)대사가 중도를 표현하는 용어로서 그대로 인용해 썼습니다. 그 뒤 화엄종의 현수(賢首)대사가 같은 중도원리를 표현함에 있어서 쌍차쌍조를 그대로 쓰려고 하니 지자대사를 추종하는 것 같아서 쌍차쌍조란 말 대신에 쌍민쌍존(雙泯雙存)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것은 또 어디서 연유되느냐 하면 쌍비쌍역(雙非雙赤)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경에서 불성을 얘기하시면서 중도를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고 한다.

佛性非有非無赤有赤無有無合故名爲中道니라

 

불성(佛性)은 비유비무(非有非無), 즉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완전히 떠나면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赤有赤無]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융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통하므로 중도(中道)라 하는 것입니다.

비유비무에서 유()와 무()란 모순 상극하는 변견의 있음과 없음으로써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 서로 고집해 있으므로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그 통하지 않고 고집하는 변견의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니 쌍차가 되어서 비유비무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쌍차가 되면 있음과 없음이 서로 합하고, 서로 통하는 역유역무의 쌍조가 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을 쌍비쌍역이라고 합니다. 양쪽을 다 버리고 양쪽이 다 살아나는 것이니 쌍비(雙非)는 부정이고 쌍역(雙赤)은 긍정입니다. 부정을 하고 부정하여 철저하게 부정하면 영(), 즉 공()에 떨어져 버리지 않느냐고 의심을 하거나 부정만 하다보면 아무것도 없는 허무로 나가는 것이 아니냐고 흔히들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을 참으로 바로 알 것 같으면 대긍정(大肯定)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온누리를 비추듯이 철저하게 부정해가면 대긍정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를 쌍비쌍역이라 하며 그것이 중도원리입니다.

이렇게 중도원리를 쌍차쌍조, 쌍비쌍역, 쌍민쌍존으로 설명하여도 이해하기 곤란하다면, 이를 좀 쉬운 말로 표현하면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진공(眞空)이란 양변을 완전히 버린 쌍차(雙遮), 쌍민(雙泯), 쌍비(雙非)입니다. 이 진공이란 유()에 상대적인 공이 아닌 공과 유를 다같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공과 유를 다같이 버린다고 하여 단멸공(斷滅空)에 떨어지면 공에 떨어진 외도[落空外道]가 되고마니 그것도 변견입니다. 그러한 단멸공이 아닌 진공이 되면 상대적인 공과 유를 떠난 묘유(妙有)가 됩니다. 묘유(妙有), 상대적인 공과 유를 버리고나니 공이 즉 유이고 유가 즉 공으로서 공과 유가 서로 통하여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묘유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쌍조(雙照), 쌍존(雙存), 쌍역(雙赤)입니다.

대부정(大否定)하여 대긍정(大肯定)이 된다 하니 그 긍정을 차별적인 긍정으로 알면 안됩니다. 이것은 묘한 있음[妙有]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통하고 공과 있음이 서로 통하고 선()과 악()이 서로 통하고 마구니와 부처가 서로 통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공이 쌍차이며 묘유가 쌍조이니, 진공 묘유를 바로 알 것 같으면 공과 있음이 서로 융통[雙融]하여 진공하면 묘유요 묘유하면 진공이며, 진공 내놓고 따로 묘유 없으며 묘유 내놓고 따로 진공 없으니 이것을 차조동시(遮照同時)라 합니다. 쌍차가 즉 쌍조요 쌍조가 즉 쌍차이며 쌍차하고 쌍조해서 차조동시가 되는 것이 중도의 근본 공식입니다. 이렇게 중도에 대한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꼭 같은 것입니다.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선종 종파 가운데서도 임제종을 제일로 하는데 그 개조(開祖)인 임제스님은 중도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스님이 임제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참다운 부처이며 참다운 법이며 참다운 도인지 대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부처란 마음이 청정함이요, 법이란 마음이 광명함이요, 도란 어디에서나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이다.

如何是眞佛眞法眞道乞垂聞示하소서. 師云 佛者心淸淨是法者心光明是道者處處無礙淨光是이다[臨濟錄]

 

임제대사가 불(佛法僧) 삼보를 설명하기를 마음 청정함이 부처요, 마음에 광명이 비침이 법이요,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이 도, 즉 승이라 하였습니다.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일체 차별 망견을 다 버리는 것을 말하니, 쌍차로써 망상의 구름이 다 걷혔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광명이 비침이란 망상의 구름이 다 걷히면 거기에 무한한 광명이 비칠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쌍조입니다.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은 청정할 때 광명이 나타나고 광명이 나타날 때 청정하여 청정과 광명이 서로 둘이 아님을 말하며 차조동시(遮照同時)입니다.

()란 승()을 말하니 승이란 본래 화합(和合)을 뜻하니 서로서로 합심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을 말하지만 근본은 청정과 광명이 걸림없음을 증득한 사람만이 승이라는 자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중도를 깨치지 못하면 승이 아니니 모든 차별변견에 집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선종에서도 표현은 다르지만 육조스님의 유촉하신 바대로 중도에 입각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겠습니다.

임제스님이 설하신 근본적인 가풍(家風)으로 사료간(四料揀)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은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으며,

어떤 때는 경계는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으며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고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

有時奪人不尊境이오 有時奪境不奪人이오 有時人境俱尊이오 有時人境俱不尊이니라[臨濟錄]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사람은 주관으로, 경계는 객관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주관을 버리고 객관은 버리지 않고, 어떤 때는 객관은 버리고 주관은 버리지 않는다. 어찌하기 위해서 그러느냐 하면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기 위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면 또 어찌 되느냐 하면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지 않는다, 즉 주관과 객관이 서로서로 완전히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다 빼앗는다는 것은 쌍차이며, 주관과 객관을 다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쌍조이니 주관과 객관이 서로서로 융합자재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임제스님의 사료간입니다. 물론 교리적으로 설명하려니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지 진실로 사료간의 법을 호호탕탕하게 쓰려면 중도사상을 알아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깨쳐 중도실상(中道實相)을 알아야만 사료간을 알 수 있고 임제정법을 알 수 있고, 거기서 봉()도 쓸 수 있고 할()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변견에 떨어져 집착하게 되면 임제스님과는 영원히 등지고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도사상은 경전의 교학에서뿐만 아니라 선종에서도 분명하게 중도원리를 천양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중도를 터득키 위해서는 마음을 깨쳐야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쌍차쌍조(雙遮雙照)하고 차조동시(遮照同時)하는 이 중도원리는 어느 종교나 어느 철학에서도 볼 수 없는 불교만의 독특한 입장이니만큼 선과 교를 통해서 또 남전(南傳)북전(北傳)할 것 없이 불교의 근본진리는 중도원리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깊이 명심하여야겠습니다. 좀 쉽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얼마나 이해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중도원리를 깨쳐야만 진실한 불교도인 만큼 열심히 정진합시다.

 

 

2장 원시불교 사상

 

1.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있음[]과 없음[], 생함[]과 멸함[]등 상대적인 어떤 두 극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를 이루고 난 뒤에 비구들에게 최초로 설법한 것이 있는데, 이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합니다.

이 초전법륜의 가르침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불교의 근본교리가 들어 있으며, 중도설도 그 중의 하나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중도설은 극단적인 두 변에 집착하지 말라는 기본적이고도 간단한 형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집착하지 말라는 그 두 변은 이론적인 사항이 아니라 수행의 면에서 지켜야 할 실천적인 사항입니다. 이와같이 최초의 중도설은 수행자의 실천에 관계하여 제시된 것입니다.

그 법문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먼저 팔리어(pāli)로 씌어진 남전장경(南傳藏經)의 번역문을 인용하고 나중에 다시 그에 해당하는 북전(北傳)의 한역(漢譯) 경문을 일부 발췌하여 보겠습니다.

 

그때에 세존(世尊)은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세상에 두 변[二邊]이 있으니 출가자는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여러 욕망을 애욕하고 탐착하는 일은 하열하고 비천하여 범부의 소행이요, 현성(賢聖)이 아니고 의()에 상응하지 않는다. (둘째는)스스로 번뇌하고 고뇌하는 일은 괴로움으로서 현성(賢聖)이 아니고 의()에 상응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여래(如來)는 이 두 변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바르게 깨달았느니라. [南傳大, 律部 3, p.18]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친 상대적인 견해를 말하는 두 변[兩邊] 가운데는 선(善惡), (有無)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여기에서는 고()와 낙()을 예로 들었습니다. 인용한 경문에 있는 두 변 중 첫번째는 욕망에 탐착하는 욕락(欲樂), 즉 낙()을 말한 것이고, 두번째는 고행에 집착하는 괴로움, 즉 고()를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고()와 낙()을 예로 든 것은 부처님 당시의 실정에 따라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그 당시 수행자들의 상당수가 고행을 위주로 하는 고행주의자(苦行主義者)였으며, 부처님을 따라서 최초로 출가한 다섯 비구도 세상의 향락을 버리고 고행을 해야만 해탈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고수하였으므로 부처님이 병에 따라 약을 주듯이 고()와 낙()을 예로 든 것입니다. 많은 출가자들이 세간의 향락을 버릴 줄만 알고 고행하는 괴로움, 이것도 병인 줄 모르고 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해탈하려면 고()와 낙()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로 깨달은 것, 정등각(正等覺)한 내용이 중도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와 낙()을 버린다는 것이 어찌 그다지 어려운 것인가라고 생각하여,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고()와 낙()을 버리라고 한 것은, 평범하게 말씀하신 것이지 철학적으로 깊은 뜻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입니다. 중생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바로 깨쳐서 해탈을 얻기 전에는 무엇을 대하든지 그것은 고()가 아니면 낙()이고 낙()이 아니면 고()라서 항상 양변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설사 열반(涅槃)을 성취하였다 하여도 열반의 낙에 머물면 그것도 병으로서 중도가 아닙니다. ()와 낙()을 떠난다는 것은 세간의 고()()이라든지 출세간의 낙()이라든지 모든 집착을 완전히 떠나는 것을 말하며, 그 고()와 낙() 등 일체의 양변을 떠난 경계를 중도라 합니다. 이렇게 양변을 버리고 중도를 정등각했다는 이 초전법륜을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부처님의 근본법륜이라는 것은 세계의 어느 학자들 간에도 이견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고하여 말씀하셨다.

세간에는 두 변이 있으니 응당 가까이 하지 말지니라. 첫째는 애욕을 탐하여 욕망은 허물이 없다고 말함이요, 둘째는 사견으로 형체를 괴롭혀 도의 자취가 없음이다. 이 두 변을 버리고 곧 중도를 얻느니라.”

佛復告曰호대 世有二邊하니 不應親近이라. 一者貪著肯欲하여 說欲無過二者邪見苦形하여 無有道迹이라 捨此二邊 便得中道니라[大正藏 22, p.104 , 五分律]

 

비구여, 출가자는 두 변을 가까이하지 말 것이니, 즐겨 애욕을 익히거나 혹은 스스로 고행하는 것이다. 현성의 법이 아니며 심신을 피로하게 하여 능히 행할 바가 아니다. 비구여, 이 두 변을 제외하고 나서 다시 중도가 있느니라.

比丘出家者不得親近二邊이니 樂習愛欲이나 或自苦行이라 非賢聖法이요 勞疲形神하여 不能有所辦이라 比丘 除此二邊已하고 更有中道니라[大正藏 22, p.788 上 四分律]

 

이 중도선언은 이와같이 한역(韓譯)의 오분율(五分律)사분율(四分律)에도 나오나 팔리어로 씌어진 남전장경의 기록과 같이 명백하고 정확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깨치신 것이 중도라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남전장경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숫타니파아타(Suttanipāta)라는 경()이 있는데, 그 가운데 피안도품(彼岸道品)에서 중도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양 극단에 집착하지도 않고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두 극단인 두 변에도 집착하지 말고, 그 가운데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격식을 벗어난 대장부의 행동입니다.

많은 불교학자들은 율장(律藏)에 있는 초전법륜의 중도대선언을 불교의 근본적인 출발점으로 삼는데, 혹 또 논란하기를 그보다 더 앞선 경전인 숫타니파아타에도 중도의 내용이 있느냐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기에 여기 피안도품을 인용한 것입니다.

 

 

2. 팔정도(八正道)

 

팔정도(八正道)는 원시불교의 중요 교리로서 출가 수행자나 세속인이 바른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지켜야 할 지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팔정도의 의미는 이 정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팔정도는 글자 그대로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이란 뜻이므로 여기서는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바른 길을 뜻하는 중도사상이 드러나 있습니다. 부처님은 확실하게 팔정도는 곧 중도라고 단언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남전(南傳)의 율장(律藏)에 있는 초전법륜의 기록을 인용해 봅니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여래(如來)가 현등각(現等覺)한 바로서, []을 생하고 지혜[]를 생하고 적정(寂靜)증지(證智)등각(等覺)열반(涅槃)에 도움이 되는 중도(中道)라 하는가? 그것은 곧 팔성도(八聖道)이다. 말하자면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이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을 여래가 현등각한 바, 눈을 생하고 지혜를 생하고 적정증지등각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라 하느니라. [南傳大藏經, 律部 3, p.1819]

 

팔정도의 원어는 팔지성도(八支聖道: ariyo atthangiko maggo)로 그 의미는 여덟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도라는 뜻입니다.

먼저 정견(正見: sammā-ditthi)은 바른 견해, 즉 올바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말하는 것이니, 요컨대 불교의 진리인 연기(緣起)와 사제(四諦)나 중도에 대한 지혜를 갖추는 것입니다. 바른 견해를 가지면 모든 법을 바로 보게 되어 바른 마음 가짐인 올바른 사유[正思惟: sāmmā-saňkappa]를 하게 되고, 마음가짐이 올바르면 그에 따라 올바른 언어[正語: sammāvācā]를 구사하게 되며, 올바른 신체적 행위[正業: sammā-kammanta]를 하게 됩니다. 정명(正命: sammā-jiva)의 명(: jiva)은 활명(活命)이라는 것, 곧 일상의 생활을 의미하므로 정명이라는 것은 올바른 생활을 가리킵니다. 분수를 넘어서는 행동이나 불규칙적인 생활 등을 시정하여 도리에 맞는 생활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정정진(正精進: sammā-vāyāma)은 악을 소멸하고 선을 증대시키는 올바른 노력을 말하며, 정념(正念: sammā-sati)은 올바른 생각을 말하는데 보통 바른 진리와 지혜를 잃지 않고 항상 염두에 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정(正定: sammā-samādhi)은 올바른 선정으로 정신집중의 상태를 지속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선정에는 사선(四禪) 등의 선정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정신을 집중하여 노력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렇게 팔정도는 정견에서 시작하여 정정으로 맺어지는데, 무엇보다도 맨 먼저 정견이 거론되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른 견해를 얻어 모든 법을 바로 보기 전에는 정사유(正思惟)정법(正法)정각(正覺) 등 팔정도의 나머지가 하나도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견은 바로 부처님이 깨치신 진리, 즉 중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부처님이 성도하여 깨달으신 것이 중도이고, 그 중도의 내용이 다름아닌 팔성도(八聖道), 곧 팔정도(八正道)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 팔정도가 방법론(方法論)이냐 또는 목적론(目的論)구경론(究竟論)이냐라는 논란이 있습니다. 팔정도는 구경 목표를 향하는 방법론이지 목적론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중도의 근본 뜻을 망각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확실히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다고 하셨지 중도를 닦아서 바르게 깨달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중도를 바로 깨친 그 사람이 부처이므로 중도의 내용인 팔정도는 목적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이와같이 목적론적, 구경론적 의미를 내포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전도되고 근본과 지말이 뒤섞인 여기에서는 올바른 삶의 방향의 지침이기도 하므로 방법론적으로 적용하는 것도 일리가 있을 것입니다.

 

 

3. 십이연기(十二緣起)

 

원시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의 유형은 앞에서도 일부 고찰한 바와같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제 무엇보다도 의미 깊고 다시금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은 연기(緣起)에 입각한 중도설입니다.

연기설은 보통 십이연기(十二緣起)가 대표적인데, 이 십이연기설은 사성제(四聖諦)중도(中道) 등과 함께 부처님이 최초기부터 말씀하신 근본불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에 속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중도를 깨달아서 정각자가 되었듯이, 부처님이 발견한 이 연기설, 또는 십이연기설 역시 중도의 궤도를 이탈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부처님의 핵심교리인 이 십이연기설이야말로 참으로 중도를 나타내는 귀중한 진리라 할 만합니다. 앞으로 이 십이연기에 근거한 중도설을 더듬어 설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십이연기에 근거한 중도설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한 경전을 원시경전 가운데서 지적한다면 우선적으로 가전연경(迦栴延經)이 뽑힐 것입니다. 그 까닭은 가전연경에서 연기설에 바탕하여 중도를 설하였는데, 그 중요성이 이미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부터 거론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이 경전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가전연경에서 말하는 중도설은, 연기의 기본적인 이해와, 십이연기의 순관(順觀)과 역관(逆觀) 등에 대한 이해가 쌓이지 않으면 제대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가전연경의 해설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자리에서 십이연기의 기본적 설명과, 십이연기의 역관 및 순관에 대한 해설을 대강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십이연기를 설한 일부의 경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세존(世尊)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연기(緣起)및 연하여 생긴 법[緣生法]을 설하리니 그대들은 듣고서 잘 생각하라.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에 연()하여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여래가 세상에 나오지 않아도 이것은 정하여져서, 법으로 정하여져서 법으로 확립되어져 있느니, 곧 서로 의지하는 성품[相依性]이니라. 여래는 이것을 증득하고 이를 아느니라. 증득하고 알아서 교시하고 선포하고 상설하고 개현하고 분별하고 명료하게 하여 너희들은 보라고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에 연()하여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에 연()하여 생()이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에 연()하여 유()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에 연()하여 취()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에 연()하여 애()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에 연()하여 수()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육처(六處)에 연()하여 촉()이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명색(名色)에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에 연()하여 명색(名色)이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에 연()하여 식()이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에 연()하여 행()이 있느니라.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여래가 세상에 나오지 않아도 이것은 정하여져서, 법으로써 정하여져서 법으로 확립되어져 있느니, 곧 서로 의지하는 성품이니라. 여래는 그것을 증득하고 아느니라. 증득하고 알아서 교시하고 선포하고 상설하고 개현하고 분별하고 명료하게 하여 너희들은 보라고 말하느니라.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에 연()하여 행()이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이렇게 여()이며 불허망성(不虛妄性)이며 불이여성(不異如性)이며 상의성(相依性)인 것, 비구들이여, 이것을 연기라고 말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연하여 생긴 법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노사(老死)는 무상(無常)유위(有爲)연생(緣生)멸진(滅盡)의 법이고, 패괴(敗壞)의 법이고, 탐욕을 떠나야 할 법이며, ()의 법이니라.

비구들이여, (), (), (), (), (), (), 육처(六處), 명색(名色), (), (), 무명(無明)은 무상(無常)유위(有爲)연생(緣生)멸진(滅盡)의 법이고, 패괴(敗壞)의 법이고, 탐욕을 떠나야 할 법이며, ()의 법이니라. 비구들이여, 이들을 연하여 생긴 법이라고 하느니라.” [南傳大藏經 13, 相應部經典 2pp.3638]

 

연기라는 이름으로 설해진 원시경전은 매우 많으며 그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열두 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진 십이연기가 가장 대표적입니다. 그 때문에 후대에는 연기설이라 하면 대개 이 십이연기설에만 한정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십이연기에 대한 해석도 원시경전에는 일정하게 설해져 있지 않으나, 그 근본 의미는 연기하는 모습을 무명(無明)과 행() 등의 열두 가지로 연결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무명(avijjā)은 지혜인 명()이 없음을 말하며, 이는 곧 불교의 진리인 연기나 무아의 도리를 알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saṅkhāra)은 제법을 지어나가는 행위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특히 무명, 무지로 인하여 행한 행위의 형성력을 뜻합니다. (viññāṇa)은 인식작용 또는 인식의 주체를 말하며, 명색(nāmarūpa)은 앞의 식()의 인식대상이 되는 물질[]과 정신[]입니다. 육처(salāyatana)는 인식대상을 감지하는 눈의지의 육근(六根)이며, (phassa)은 앞에서 말한 식()()과 명색인 경계()의 셋이 접촉함을 뜻합니다. (vedanā)는 근식의 셋이 접촉하여 생겨나는 괴로움이나 즐거움 등의 감수작용이며, (taṅhā)는 괴로움이나 즐거움 등의 감수작용에 따른 그릇된 애증을 말하며, (upādāna)는 맹목적인 애증에 따른 집착을 말합니다. (bhava)는 애증과 집착에 의해 결정된 존재를 뜻하며, (jāti)은 그 존재의 발생 또는 영위를 말하며, 노사(jarā-marana)는 생으로부터 빚어지는 늙고 죽음이나 그로 인한 괴로움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연기를 자주 말씀하셨으므로 연기는 부처님이 처음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나 연기란 결코 부처님께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시기 전에도 연기법은 있었으며 부처님이 나신 뒤에도 연기법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연기법이란 내가 만든 법이 아니라 본래 있는 법이라고 하셨습니다. 상의성(相依性)이란 서로 의지해 있다는 뜻입니다. 곧 삶[]은 죽음[]에 의지하고 죽음[]은 삶[]에 의지하고, 무명은 행()을 의지하고 행은 무명을 의지합니다. 이와같이 연기법은 무명, 행 등 여러 가지 항목에 의지하여 존립한다는 것입니다.

 

()에 연()하여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모든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를 불구하고 이 원리는 정하여진 것으로서 법의 고정성(固定性), 법의 정칙성(定則性)곧 상의성(相依性)이니라. 여래는 이것을 깨치고 이것에 도달하느니라. 깨치고 도달하여서 이것을 널리 알리고 말해 주고 자세히 설하고 분별하여 명료히 하느니라. 너희들은 보아라. ()에 연()하여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여기에서 진여성(眞如性)불허망성(不虛妄性)불이여성(不異如性)상의성(相依性)을 띠고 있으니 이것을 곧 연기(緣起)라고 말하느니라. [宇井伯壽著 印度哲學硏究 第二]

 

위 우정(宇井)박사의 인용문은 앞 상응부 경전의 것보다 번역이 자세하므로 같은 내용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시 인용한 것입니다. 이 번역에 의하면 연기는 제법이 상의함을 말한 것이며, 그것은 진여를 바탕으로 한 진여성이라는 점이 분명합니다. 다음에는 이 경전에 해당하는 한역 경전과 비교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때에 세존은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마땅히 인연법(因緣法)과 연생법(緣生法)을 말하리라. 어떤 것을 인연법이라 하는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 하느니라.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이 있으며 행()을 연()하여 식()이 있으며 내지 이렇고 이렇게 하여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純大苦聚]가 모이느니라. 어떤 것을 연생법이라 하는가. 무명이 지어짐을 말하느니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거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이 법은 항상 머물며 법은 법계에 머무느니라. 그것을 여래가 스스로 깨달아 알아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여 열어보이고 드러내 밝히니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생()을 연()하여 노사(老死)가 있다고 하느니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거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이 법은 항상 머물러 법은 법계에 머무느니라. 그것은 여래가 스스로 깨달아 등정각을 이루고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여 열어보이고 드러내 밝히니, ()을 연()하므로 노()()()와 우()()()()가 있다고 하느니라.

이들 모든 법은, 법이 머무르며[法住], 법이 공하며[法空], 법이 여여하며[法如], 법이 그러하며[法爾], 법이 여여함()을 떠나지 아니하며, 법은 여여와 다르지 아니하며, 참으로 진실하여 전도되지 아니하니, 이와같이 연기에 수순하는 것을 연생법이라고 하느니라.

爾時世尊 告諸比丘하사대 我今當說因緣法及緣生法하리니 云何爲因緣法謂此有故彼有謂緣無明行하며 緣行識乃至如是如是하여 純大苦聚集이니라 云何緣生法謂緣無明行하니라. 若佛出世커나 若未出世커나 此法常住하여 法住法界하느니라 彼如來自所覺知하고 成等正覺하여 爲人演說하며 開示顯發하니 謂緣無明有行하고 乃至緣生有老死하니라 若佛出世커나 若未出世커나 此法常住하여 法住法界하느니라 彼如來自所覺知하고 成等正覺하여 爲人演說하며 開示顯發하니 謂緣生故有老病死憂悲惱苦하니라 此等諸法法住이며 法空이며 法如法爾法不離如法不異如審諦眞實하여 不顚倒如是隨順緣起是名緣生法이니라.[雜阿含經 第12;大正藏 第2p.84]

 

이 연기법은 항상 있어서 법이 법계(法界)에 머문다는 표현 속에는 연기의 근본이 다 드러나 있습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연기법이란 법계이며, 나중에 설명하는 바와 같이 진여법계(眞如法界)의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법이 머문다[法住]’는 것은 법이 연기하여 존재함을 말하며, 연기한 모든 법은 다 공하므로 법이 공[法空]’하다는 것입니다. ‘법이 여여함[法如]’이란 일체만법이 진실하여 여여하다는 것입니다. ‘법이 그대로[法爾]’란 흔히 연기법을 자연법 그대로가 아니냐고 해석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며, 그 참된 의미는 진여법 그대로다하는 뜻입니다.

앞의 파리문 경전에서는 연기법과 연생법을 진여성(眞如性)불허망성(不虛妄性)불이여성(不異如性)상의성(相依性)이라 말한 것을, 여기 한역 경전에서는 법이 머물고[法住] 법이 공[法空]하며, 법이 여여하고[法如] 법 그대로다[法爾]’거나, ‘법이 여여와 다르지 않다[法不異如]’라고 말했는데 이 양자의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거의 같다고 하겠습니다.

십이연기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이 정도로 해두고, 다음에는 연기의 역관과 순관을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그때에 세존은 처음 현등각(現等覺)을 성취하시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한 번 결가부좌하신 채로 7일간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며 앉아계셨다. 세존은 초저녁에 연기를 순역(順逆)으로 생각하시었다.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고 생에 연하여 노사가 생하니, 이와같이 괴로움의 쌓임[苦蘊]의 모임이 일어나느니라.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내지 생이 멸하면 노사가 멸하니, 이와같이 괴로움의 쌓임[苦睛]이 멸하느니라. 세존은 밤중에 연기를 순역으로 생각하시었다. 세존은 새벽에 연기를 순역으로 생각하시었다. 세존은 7일을 경과한 후 그 삼매로부터 일어나서 보리수나무 아래로 나아가서 한 번 결가부좌하신 채로 7일간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며 앉아계셨다. [律藏 3 南傳藏經 3 p.17]

 

부처님은 도를 이루고 나서 다섯 비구에게 초전법륜을 하시기 전에 이와같이 하시기를 4주간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율장(律藏)에 기록되어 있는 것인데, 이에 의하면 부처님이 깨달으신 도리는 바로 연기이며, 곧 십이연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원시경전에 설해진 연기설이 모두 십이연기설만은 아니며, 십이연기는 여러 가지 유형의 연기설 가운데 가장 완비된 형태를 보이므로 보다 후기에 정립된 연기설이라고 합니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이때에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생각하신 도리는 연기라는 것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관하는 법(觀法)이 있습니다. 하나는 괴로움과 번뇌가 생기는 과정을 일컫는 것으로 이를 순관(順觀) 또는 유전연기(流轉緣起), 유전문(流轉門)이라고 하며, 또 하나는 그 생사 윤회의 고뇌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말한 것으로 이것을 역관(逆觀), 또는 환멸연기(還滅緣起), 환멸문(還滅門)이라고 합니다. 십이연기를 설하는 대개의 경문에는 순관의 내용은 비교적 자세히 설해져 있지만, 역관의 환멸문에 대해서는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생이 멸하므로 노사가 멸한다라는 정도로 말할 뿐, 그 자세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연기의 역관을 말할 때 마지막의 노사에서부터 시작하여 행무명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멸한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중생의 눈에 우선 보이는 것이 생사이므로 그것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인 면에서 남전대장경이나 한역대장경에서는 순관과 역관이 모두 무명에서 시작되는 형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4. ?가전연경?(迦栴延經)에서의 중도

 

십이연기가 바로 중도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매우 적합한 것으로 가전연경(迦栴延經)’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부처님이 바르게 깨달은 내용과 그것이 바로 양 극단을 여윈 중도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중도는 다름아닌 십이연기설에 연유하여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경전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에서 모두 발췌하여 설명하겠습니다.

 

1)남전 가전연경

 

그때 존자 가전연은 세존에게 예배하고 한 쪽에 앉았다. 한 쪽에 앉은 존자 가전연은 세존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대덕(大德)이시여,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이라고 하시는데 정견이란 어떤 것입니까?”

가전연아, 이 세간은 다분히 유()와 무()의 둘에 의지되어 있느니라.” [南傳大藏經 12, 相應部 經典 迦栴延經]

 

가전연(迦栴延: kacāyana)이란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아주 논의에 밝은 논의제일(論議第一)의 가전연존자를 말합니다. 세간의 모든 학문이나 종교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견해[有見]와 없다는 견해[無見]의 두 가지가 근본이 되어 있습니다. 이와같이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친 견해를 변견(邊見)이라 하는데, 변견이란 곧 편견이라는 뜻입니다. 일체의 상대적인 대상에 대한 가장 뿌리깊고 근본적인 치우친 견해가 있다[]와 없다[]는 두가지이므로 유와 무가 완전히 해결되면 모든 상대적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유와 무를 대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 초전법륜에서는 고()와 낙()을 말씀하셨는데, 그때는 다섯 비구가 너무 고행(苦行)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양 극단으로서 고와 낙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른 견해[正見]라는 근본적 문제를 심도있게 설명하기 위하여 세간의 모든 편견 가운데 대표적 견해인 유와 무를 거론한 것입니다.

 

가전연아, 바른 지혜로 여실히 세간의 집[]을 관하는 자에게는 이 세간에 없음[]이 없다. 가전연아, 바른 지혜로 여실히 세간의 멸()을 관하는 자에게는 이 세간에 있음[]이 없다. [南傳大藏經 第13, 相應部經冶 2 迦栴延經 p.24]

 

여기에 나오는 집()과 멸()은 사성제(四聖諦)의 집제(集諦)와 멸제(滅諦)를 말합니다. 사성제는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고()()()()의 네 가지 진리로 집약하여 설한 것입니다. 고제(苦諦)는 중생의 삶이 괴로움이라는 것, 집제(集諦)는 그 괴로움의 원인, 멸제(滅諦)는 그 괴로움의 소멸, 도제(道諦)는 그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 방법을 말합니다. 위에 나오는 괴로움의 원인을 말하는 집()과 괴로움의 소멸을 말하는 멸()의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 경문의 이후에 나오는 바와같이 연기법의 순관과 역관의 내용입니다.

연기는 보통 무명(無明)()()명색(名色)육입(六入)()()()()()()노사(老死)의 열 두 가지로 연관된 십이연기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이 십이연기를 관찰하는 방법에는 순관과 역관이 있습니다.

순관은 십이연기를 차례로 관찰하는 것이니,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이 있으며 내지 생을 연하여 노사가 있다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역관은 순관과 반대로 관찰하는 것이니,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며 내지 생이 멸하면 노사가 멸한다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집()은 바로 연기의 순관을 말하고, ()은 연기의 역관을 말합니다.

그런데 순관에 의하면,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이 있고 마침내 생이 있고 노사가 있게 되므로, 이 세간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게 됩니다. 또 역관에 의하면,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마침내 생이 멸하고 노사가 멸하므로 이 세간에 실체적인 그 무엇이 있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가전연아, 이 세간은 다분히 방편(方便: upāya)에 집착하여 헤아리며 사로잡히느니라. 성제자(聖弟子)는 이 마음의 의지처에 집착하여 헤아리며 나와 나의 것[我我所]이라고 사로잡히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머물지 않으며, 괴로움이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괴로움이 멸하면 멸한다고 보아 미혹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다른 것에 연하는 바 없이 여기에서 지혜가 생한다. 가전연아, 이와 같음이 정견이니라.”

 

이 세상 사람들은 어째서 무엇이 있다거나, 무엇이 없다 하는 변견에 집착하느냐 하면 이리저리 헤아리고 이것저것 구별하는 사량분별(思量分別) 때문입니다. 자아(自我)인 주관과 내 것[我所]인 객관 등에 집착하고 사로잡혀 사량하고 분별하는 이것을 여기서는 방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견이 생기는 이유는 사량분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는 사량분별에 의한 집착심을 버려서 모든 분별심, 생멸심을 떠납니다. 그리하여 괴로움이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괴로움이 멸하면 멸한다고 바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냥 괴로움이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괴로움이 멸하면 멸한다고 보는 것과는 차원이 틀립니다. 세간에서 보는 것은 분별심으로 보는 것이고, 부처님의 제자는 분별심을 떠나서 바로 보는 것입니다.

집착하거나 헤아리지 않고 사로잡히거나 머물지 않는다함은 머무름이 없는 마음[無住心]이나 분별하지 않는 마음[無分別心]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와같이 모든 분별에 사로잡히거나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으면서도 능히 괴로움의 생함과 멸함을 보는 것이 참으로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는 것입니다. 생멸적(生滅的)인 변견은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세간에서 보는 견해이고, 생멸을 떠나서 생멸을 본다는 것은 묘유(妙有)의 관점에서 보는 견해로서 절대적인 견해입니다. 또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고 했으나 여기서 말하는 생멸이라는 것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생멸, 중도제일의(中道第一義)의 생멸입니다. 생멸에서 말하는 생멸이 아니라 쌍차(雙遮)에 의지한 쌍조(雙照)의 생멸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마음의 의지처, 즉 분별심에 집착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그것은 모든 생멸을 부정한 것입니다. 또 모든 생멸을 부정하고 나서 괴로움이 생하면 생하다고 보고 멸하면 멸한다고 보아 이에 분별심이 없이 지혜가 생한다고 하였으므로 여기서 긍정이 성립됩니다. 분별심에 집착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면 마음이 청정한 것[心淸淨]이고 진공(眞空)이며, 마음이 청정한 상태로 생멸을 바로 보면 마음이 밝게 빛나는 것[心光明]이고 묘유(妙有)입니다. 그러므로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는 것은 곧 대승에서 말하는 진공묘유의 뜻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미혹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다른 것에 연하는 바 없이 여기에서 지혜가 생하는 이것이 정견이다라는 것은, 부처에도 의지하지 않고 조사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머무름이 없는 마음에서 나타나는 진실한 지혜를 정견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정견은 앞에서 누차 해설한대로 모든 집착심이나 생멸심을 다 버리고서 생멸을 바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중도라 하여 양변을 여윈다는 부정의 면은 보통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데 다시 양변을 살린다고 하여 부정한 후에 다시 그것을 긍정하는 이것을 학자들이 잘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일본에서 좀 많이 연구했다는 사람들의 글을 봐도 양변을 여윈다는 것,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에 드러나 있으므로 그것으로써 증거를 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한 후 그것을 다시 긍정하는 면에 대해서는, 즉 양변을 살리는 것에 대해서는 부처님이 비밀한 뜻[密意]으로 은밀히 말했다고만 말하고 확실한 증거를 잘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것은 어려운 대목입니다.

사실은 비밀한 뜻으로서 은밀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부정하신 후에 다시 분명하게 괴로움이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괴로움이 멸하면 멸한다고 보아 다른 것에 연하는 바 없이 이에 지혜가 생하니 이것이 정견이다라고 다시 분명히 긍정하여 말씀하셨는데, 무엇이 비밀한 뜻으로서 은밀하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가전연아, 일체는 있다[]고 한다. 이것이 첫번째의 극단이니라. 일체는 없다[]고 한다. 이것이 두번째의 극단이니라.

가전연아, 여래는 이 양 극단을 떠나서 중도에 의해서 법을 설하느니라.

 

모든 것이 있다는 견해, 즉 이 세상 모든 존재에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변견이니 이것이 첫번째의 극단이라는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이 없다는 견해, 즉 이 세상 모든 존재에는 어떠한 실체가 없어서 소멸되어버리고 만다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변견이니 이것이 두번째의 극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존재에 영원성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양 극단을 떠나서 중도에 의하여 법을 설하시는 것입니다.

앞 문장에서 마음의 의지처에 집착하여 헤아리며 나와 나의 것이라고 사로잡히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는 것은 양 극단을 여윈 뜻이니 이것은 진공이요, ‘()가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고()가 멸하면 멸한다고 본다는 것은 묘유입니다. 그러므로 전반적으로 이 경문이 뜻하는 바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非有非無] 또한 있는 것이고 또한 없는 것[赤有赤無]이 되는 것입니다. 여래가 정등각하고 법을 설하는 것은 중도인데, 중도는 모든 양 극단을 떠나며 또한 양 극단이 서로 원융하게 통하는 것입니다.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이 있으며 이러한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全苦蘊]의 모임[]이니라. 무명의 멸에 의하여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므로 식의 멸이 있느니라. 이러한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이니라.

 

처음에 십이연기의 순관을 들고 이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성제의 집제(集諦)입니다. 앞에서 집제를 바로 보는 사람은 없다는 견해[無見]가 없다고 했는데, 그 뜻은 이 세간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므로 결국은 있다는 뜻입니다. 생함을 바로 본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견해가 아니며, 없다는 견해가 없다는 것은 생함을 바로 본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십이연기의 역관을 들고 이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성제의 멸제(滅諦)입니다. 앞에서 멸제를 바로 보는 사람은 있다는 견해[有見]가 없다고 했는데, 그 의미는 이 세상에 무엇인가 실체적인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이므로 결국은 없다는 뜻입니다. 멸을 바로 본다는 것은 있다는 견해가 아니며, 있다는 견해가 없다는 것은 멸을 바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이연기를 순관과 역관으로 관찰하여 중도를 설명하는 것을 증명중도(證明中道)라고 합니다. 이상의 설명에서 보듯이 가전연경에서 말하는 의미를 결론적으로 말하면, 연기의 내용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또한 있고 또한 없는 것이니 바로 이것이 중도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흔히 부처님이 말씀하신 십이연기를 시간적으로 보아서 생사의 윤회하는 과정으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후대의 한 가지 해석이 될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부처님이 설한 연기의 참뜻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남전장경에도 북전장경에도 부처님이 중도를 말씀하신 후에는 증명중도로써 연기를 인용했습니다. 연기를 순관에서 보면 생을 바로 본다는 뜻인데, 생을 바로 본다는 것은 없다는 견해[無見]가 없다는 말이며, 역관에서 보면 멸함을 바로 본다는 뜻인데, 멸함을 바로 본다는 것은 있다는 견해[有見]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총결적으로 말하면 있는 것이 없고 없는 것이 없으면서[非有非無] 있고 또한 없다[赤有赤無]는 것이니 이것이 중도의 참된 내용입니다.

 

2)한역 가전연경

 

가전연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정견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세존께서는 정견을 베풀어 설하십니까.”

부처님께서 가전연에게 말씀하셨다.

세간에는 두 가지 의지함이 있으니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니라. 취하여 집착한 바이니 취하여 집착한 때문에 혹은 있다는 것에 의지하고 혹은 없다는 것에 의지하느니라. 만일 이 취함이 없으면 마음이 경계에 매여도 취하지 아니하고 머물지 아니하고 헤아리지 아니하여, 나의 괴로움이 생할 때는 생하고 괴로움이 멸할 때는 멸하여 거기에서 의심하지 아니하고 미혹하지 아니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아니, 이것을 정견이라 이름하며 이것을 여래가 베풀어 설한 정견이라 이름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세간의 모임[]을 여실히 바로 알고 보면 세간에 없다는 것은 있지 아니하며, 세간의 소멸[]을 여실히 바로 알고 보면 세간에 있다는 것은 있지 아니하니라. 이것을 두 극단을 떠나서 중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純大苦聚]가 모이며,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가 멸하느니라.”

부처님이 이 경을 말씀해 마치시자 존자 가전연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듣고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아니하고 마음에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迦栴延白佛言호대 世尊이시여 如世尊說正見 云何正見이며 云何世尊施設正見이니까 佛告迦栴延하사대 世間有二種依하니 若有若無爲取所觸이니 取所觸故或依有하며 或依無니라 若無此取者心境繫着使不取不住不計하여 我苦生而生하고 我苦滅而滅하여 於彼不疑不惑하고 不由於他而自知하니 是名正見이며 是名如來所施設正見이니라. 所以者何世間集如實正知見하면 若世間無者不有하며 世間滅如實正知見하면 若世間有者無有니라 是名離於二邊하여 說於中道이니라 所謂此有故彼有하며 此起故彼起하니 謂緣無明行하고 乃至純大苦聚集하며 無明滅故行滅하고 乃至純大苦聚滅하느니라. 佛說此經已尊者迦栴延聞佛所說하고 不起諸漏하며 心得解脫하여 成阿羅漢하니라.[雜阿含12; 大正藏 第2pp.8586]

 

세상에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많지만 철학적으로 깊이 파헤쳐 들어가면 마침내는 영원성이 있다거나 영원성이 없다거나 하는 두 가지 견해밖에 없습니다. 즉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없다고 보며,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있다고 보는데,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양 극단에 치우친 변견입니다.

취하여 집착한 바가 된다는 것은 모든 경계를 취해서 마음이 사량분별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있다는 견해에 의지하거나 없다는 견해에 의지하여 있다거나 없다는 변견을 내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취함이 없다는 뜻은 분별하여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분별심이 소멸되어 무심(無心)이 되어 모든 경계에서 어떤 사물을 대하든지간에 취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며 사량으로 헤아리지 않아서 변견이 나지 않습니다.

나의 괴로움이 생할 때는 생하고 괴로움이 멸할 때는 멸한다함은 집착하거나 머무름이 없이 생하고 또한 멸함을 바로 본다는 것이니, 이것은 마땅히 머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이 난다(應無所住而生其心)’는 금강경의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거기에서 의심하지 아니하고 미혹하지 아니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아니 이것을 정견[正見]이라 한다함은 그 마음의 생멸(生滅)을 바로 보면 의심하거나 미혹하지 않고 명백히 스스로 자각하여 모든 분별심을 떠나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입장에서 생멸을 바로 보는 것이 바른 견해라는 것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세간의 모임을 여실히 바로 알고 보면 세간에 없다는 것은 있지 아니하다고 하였으니 생성의 과정을 의미하는 집제(集諦)를 바로 보면 없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으며, ‘세간의 멸함을 여실히 바로 알고 보면 세간에 있다는 것은 있지 아니하다고 하므로 소멸을 의미하는 멸제(滅諦)를 바로 보면 있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제와 멸제를 바로 보면 궁극적으로 그 관조되는 세간의 실상은 또한 생함과 또한 멸함[赤生赤滅]’이면서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음[不生不滅]’이며 또한 있음과 또한 없음[赤有赤無]’이면서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음[非有非無]’입니다. 이러한 뜻은 두 가지 극단을 떠나서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쌍차쌍조(雙遮雙照)의 중도를 표명한 것 외에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함은 서로 의지하여 생멸한다는 뜻이니 부처님이 십이연기를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 이 구절을 전제로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기란 서로 의지하여 생한다는 것으로서 본래 시간적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됩니다.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가 모이며,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가 멸하느니라함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순관으로 집제를 바로 보면 생을 바로 보는 동시에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으며, 또 역관으로 멸제를 바로 보면 멸함을 바로 보는 동시에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중도라는 것입니다.

 

3)가전연경의 교학적 위치

 

가전연경의 내용은 앞에서 본대로 매우 수준 높은 중도를 설한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이와같은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부처님과 그 직제자들이 생존하던 시대에서도 이 가전연경이 제자들간에 자주 입에 오르내렸던 것은 물론, 소승불교를 거쳐 대승불교에서도 오직 이 경전이 언급될 정도였습니다. 이하에서 이 경전이 불교의 교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점검해 보고 후대의 여러 경전에서 이 경전과 관련하여 언급된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그때 천타(闡陀)는 존자 아난에게 말하였다. “이제 마땅히 나를 위하여 법을 설하여 나로 하여금 법을 알고 법을 보게 하소서.” 그때 아난이 천타에게 말하였다.

나는 직접 부처님에게서 들었는데, (부처님은)마하가전연을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거꾸로 되어 두 극단에 의지하니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여러 경계를 취하여 마음이 문득 분별하여 집착한다. 가전연아, 만일 자아에 대하여 감수하지도 아니하고 취하지도 아니하고 머물지도 아니하고 헤아리지도 아니하면 이 괴로움이 생할 때에 생하고 멸할 때에 멸한다. 가전연아, 여기에서 의심하지도 아니하고 미혹하지도 아니하여 다른 것에 말미암지 아니하고 능히 스스로 아니 이것을 바른 견해라고 이름하며, 여래가 말한 바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가전연아, 세간의 모임[]을 여실히 바로 보면 세간은 없다는 견해가 생할 수 없으며, 세간의 멸함을 여실히 바로 보면 세간은 있다는 견해가 생길 수 없느니라. 가전연아, 여래는 두 극단을 떠나서 중도를 말하느니라.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느니라. 말하자면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과 근심, 슬픔, 번민, 괴로움이 모이느니라. 이른바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멸하느니라. 말하자면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내지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과 근심, 슬픔, 번뇌, 괴로움이 멸하느니라.’”

아난존자가 이 법을 말하였을 때 천타비구는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어 법의 눈이 깨끗하게 되었다.

時闡陀語尊者阿難言今當爲我說法하여 令我知法見法하소서 爾時阿難語闡陀言호대 我親從佛聞하니 敎摩訶迦栴延言하사대 世人願倒하여 依於二邊하니 若有若無世人取諸境界하여 心便計着하니라 迦栴延若不受不取不住不計練我하면 此苦生時하고 滅時하니라 迦栴延於此不疑不惑하고 不由於他而能自知하니 是名正見이며 如來所說이라 所以者何迦栴延如實正觀世間集者 則不生世間無見이요 如實正觀世間滅 則不生世間有見이니라. 迦栴延如來離於二邊하여 說於中道하느니라. 所謂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赤生)하니 謂緣無明有行하여 乃至生老病死憂悲惱苦集하느니라 所謂此無故彼無此滅故彼滅하니 謂無明滅則行滅하며 乃至生老病死憂悲惱苦滅하느니라 尊者阿難說是法時闡陀比丘遠塵離垢하고 得法眼淨하니라[雜阿含 第十;大正藏 第2p.66]

 

이 경의 줄거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오래 되지 않은 때에 천타(闡陀)비구가 많은 비구들과 함께 녹야원(鹿野苑)에 살면서 비구들에게 법을 물었으나 누구도 시원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타비구는 아난존자가 지금 코삼비국의 고오시타동산에 계신다. 그 분은 일찍 세존을 공양하고 친히 뵈었으며 부처님이 찬탄하시는 모든 청정한 수행자들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분은 반드시 나를 위해 설법하여 나로 하여금 법을 알고 법을 보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그 밤을 지내고 코삼비로 떠나 아난존자를 찾아뵙고 법을 알고 법을 보게 해 달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에 대하여 아난이 답변한 것은, 부처님이 옛적에 가전연에게 설한 법문이었던 것입니다. 즉 있다거나 없다는 두 극단을 멀리 여의고, 생하거나 멸하는 것을 연기의 도리에 입각하여 올바로 관찰하는 것이 바른 견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차익비구를 내가 열반한 후에 청정한 법답게 다스려서, 만약 마음이 조복되어지면 마땅히 가전연경을 가르칠 것이니 (그리하면)곧 도를 얻을 것이니라.”

佛告阿難하사대 車匿比丘我涅槃後如梵法治하여 若心濡代이어든 應敎迦栴延經이러니 卽可得道니라.[大智度論 第二卷;大正藏 第35, p.66 ]

 

이 말씀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에 아난존자에게 남긴 부탁의 말씀입니다. 차익(車匿)비구는 다름아닌 부처님께서 야밤에 성을 넘어 출가하실 때에 말을 몰던 마부입니다. 그런데 그는 성질이 고약하고 길들이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 말씀을 잘 안 듣고 행동을 바로 하지 못해서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걱정이셨습니다. ‘내가 있을 때는 그를 억제하여 데리고 지냈지만 내가 가고 난 뒤에는 누가 그를 이끌어 줄 것인가, 그를 어찌해야 하는가하는 심려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난존자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그의 마음이 얼마간 잡히거든 중도를 말한 가전연경을 가르치면 마침내 그도 도를 얻을 것이라고 예견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부처님께서도 이 가전연경을 중요하게 취급하셨던 것을 우리는 잘 엿볼 수 있습니다.

 

가다연나계경에서 말씀하시되, 세간에 두 가지 견해가 있으니 첫째는 있다는 견해요 둘째는 없다는 견해이니라.

迦多衍那契經中호대 世有二見이니 一者有見이요 二者無見이니라[大毘婆沙論;大正藏 第27p.1002]

 

이 말은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 나오는 것입니다. 대비바사론은 가전연이 발지론(發智論)이란 논서를 지었는데, 그뒤 오백명의 큰 비구들이 모여서 발지론을 장황하게 해설한 것입니다. 백권이나 되는 발지론을 지은 가전연은 부처님 당시의 가전연이 아니고 이름만 같은 다른 가전연입니다. 이 논은 소승불교의 논장 가운데서도 분량이 매우 큰 논장인데 거기에 가전연경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소승불교에서도 가전연경이 적지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능히 있음과 없음을 멸하시니, 가전연을 교화하는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있음을 여의고 없음을 여의라고 하셨다.

佛能滅有無하나 如化迦栴延經中之所說離有赤離無[中論;大正藏 第3p.20 ]

 

용수보살은 중론(中論)을 지어 삿됨을 깨뜨리고 정법을 밝혀서 부파불교시대 소승의 변견을 부수어버리고 중도의 정견을 복구시킨 분입니다. 그 중론에 인용된 경전이라고는 오직 이 가전연경 한가지 뿐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용수보살이 중론을 지을 때 가전연경도 의지한 것이 확실하다고 봅니다. 그만큼 용수보살도 이 가전연경을 근본불교의 골자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전연경이 대소승을 통틀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다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4)가전연경 계통의 경전들

 

지금까지 설명하여 온 바와 같이 가전연경의 내용은 중도이며, 이 중도는 부처님시대부터 대승불교까지 누차 강조되어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부처님은 가전연경 한 곳에서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밖의 다른 경전들에서도 가전연경과 유사한 내용의 가르침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가전연경에 설해진 것과 같은 사상이 매우 중시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내용적으로 가전연경과 유사한 여러 경전들 및 후대의 인증을 일부 모아서, 십이연기설에 입각한 중도설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자 합니다.

 

생문바라문(生聞婆羅門)이 세존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구담(瞿曇)이시여, 일체(一切)는 있는 것입니까?”

바라문이여, 일체가 있다함은 첫번째 극단(極端)이니라.”

구담이시여, 일체는 없는 것입니까?”

바라문이여, 일체가 없다는 이것은 두번째의 극단이니라. 바라문이여, 이 양변을 떠나서 여래는 가운데[]에 의하여 법을 설하느니라.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고 행에 연하여 식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이니라. 무명의 남음이 없고, 탐욕을 떠나고 없어짐에 의하여 행의 없어짐이 있고, 행의 없어짐에 의하여 식의 없어짐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없어짐이니라.”

그와 같이 말씀하시자 그 생문바라문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희유(希有)하나이다. 생애(生涯)를 귀의하여 받들겠나이다.” [南傳大藏經 相應部經典 2p.112]

 

부처님이 중도를 설하실 때, 있음과 없음을 거론하며 그 양 극단을 떠날 것을 가르치셨는데, 여러 곳에서도 있음과 없음을 여의는 것이 중도라고 말씀하실 때는 가전연경의 경우처럼 반드시 연기의 순관과 역관으로 그 의미를 해명하셨습니다.

 

순세파(順世派)의 바라문은 세존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구담이시여, 일체는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일체가 있다는 이것은 첫번째 세간의 영역이니라.”

구담이시여, 또 일체는 없습니까?” “바라문이여, 일체가 없다는 이것은 두번째 세간의 영역이니라.”

구담이시여, 일체는 하나의 성품입니까?” “바라문이여, 일체는 하나의 성품이라는 이것은 세번째 세간의 영역이니라.”

구담이시여, 일체는 여럿의 성품입니까?” “바라문이여, 일체는 여럿의 성품이라는 이것은 네번째 세간의 영역이니라. 바라문이여, 이 양 극단을 떠나서 여래는 가운데[]에 의하여 법을 설하느니라.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고, 행에 연하여 식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이니라. 무명의 남음이 없고, 탐욕을 떠나고 멸함에 의하여 행의 멸함이 있고 행의 멸함에 의하여 식의 멸함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이니라.”

이와같이 말씀하시자 순세파의 바라문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구담이시여, 희유(希有)하나이다. 금일 이후로 생애를 귀의하여 받들겠나이다” [南傳大藏經 第13卷 相應部, p.114]

 

이 경전에서는 있음과 없음만 가지고 말씀한 것이 아니라 구성요소가 하나[一元]인가 여럿[多元]인가를 포함하여 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있다거나 없다는 것, 하나라거나 여럿이라는 것, 이와 같은 견해들은 모두 변견이므로 이것을 떠나야만 중도의 정견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아난(阿難), 내가 만약 자아가 있느냐는 물음에 자아는 있다고 대답하면, 아난아, 이는 상주론자(常住論者)인 저 사문 바라문 등과 함께 하는 것이리라. 또 만약 자아가 없느냐는 물음에 자아는 없다고 대답하면, 이는 단멸론자(斷滅論者)인 저 사문 바라문 등과 함께 하는 것이리라. [南傳大藏經 16 , 相應部經典 5p.133]

 

개개의 사물에 내재하는 어떠한 영속적인 실체성을 자아(: ātman)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계시던 당시에 인도의 여러 종교가와 철학가들은 삼라만상의 제법에 자아가 있다거나 없다는 두 견해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아가 있다는 것은 상견(常見)과 같고, 없다는 것은 단견(斷見)과 같은 것이라 하여 이 두 극단을 물리치고 중도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어느 때 세존은 사위성(舍衛城)에 머무르셨다.

유행자(遊行者)점모류(玷牟留)는 세존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구담이시여, 괴로움[]과 즐거움[]은 자기가 짓는 것[自作]입니까?” “점모류야, 그렇지 않다.”

구담이시여, 괴로움과 즐거움은 남이 짓는 것[他作]입니까?” “점모류야, 그렇지 않다.”

구담이시여, 괴로움과 즐거움은 자기가 짓고(自作)남이 짓는 것(他作)입니까?” “점모류야, 그렇지 않다.”

구담이시여, 괴로움과 즐거움은 자기가 짓는 것도 아니고 남이 짓는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無因生]입니까?” “점모류야, 그렇지 않다.”

구담이시여, 괴로움과 즐거움은 없습니까?” “점모류(玷牟留), 괴로움과 즐거움은 없는 것이 아니다. 점모류야, 괴로움과 즐거움은 있느니라.”

그렇다면 존경하는 구담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까?” “점모류야, 나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점모류야, 나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안다. 점모류야, 나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본다.”

존경하는 구담은 나를 위해 괴로움과 즐거움을 설해 주소서.”

받음[]과 느끼는 것[]은 같다고 하는 점모류야, 처음부터 이야기 되어진 것에 대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내가 짓는 것이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것을 나는 말하지 않는다. ‘받음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고 하는, 점모류야, 받음에 중압되어진 것에는 괴로움과 즐거움은 남이 짓는 것이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것을 나는 말하지 않는다. 점모류야, 이 두 극단을 떠나서 여래는 중도에 의하여 법을 설하느니라.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고 행에 연하여 식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이니라. 무명의 남음이 없고, 탐욕을 떠나고, 멸함에 의해서 행의 멸함이 있고, 행의 멸함에 의해서 식의 멸함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이니라.” [南傳大藏經 相應部經典 2pp.3133]

 

일체에 대한 있음과 없음[有無] 또는 구성요소의 하나[一元]와 여럿[多元] 혹은 고락의 자작(自作)과 타작(他作) 등 이 모두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두 극단이며 변견인데, 모든 상대적인 변견은 불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법문을 하든지간에 두 극단을 떠난 중도를 정등각하고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설해야 바른 불교이지 그렇지 않고서는 바른 불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변견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자성(自性)을 깨쳐야 하고, 자성을 깨쳐 중도를 성취하여야 하며, 중도의 정견을 성취하려면 참선으로 깨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5. 공사상(空思想)과 중도

 

불교를 말할 때 그 근본교리 요소로서 주로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四法印)을 말합니다. 삼법인이란 일체개고(一切皆苦)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이며, 여기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더하여 사법인이라고도 하며 또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제외하고 대신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더하여 삼법인이라고도 합니다. 이 삼법인은 불교교리의 근본적 특징이므로 이것과 합치하지 않으면 불교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괴로움[一切皆苦]’이라 하는 것은 모든 현상계가 무상[諸行無常]’하다는 것과 같습니다. 무상이 아닐 것 같으면 괴로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무상이란 변()한다라는 의미이며, 변한다는 것은 고정성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모든 것이 변천하는 까닭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막론하고 모든 존재에 변하지 않는 그 어떤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성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諸法無我]’입니다. 모든 존재에 실체가 없는 것을 알아서 그로부터 일체의 집착과 번뇌를 여의게 되면 적정한 열반의 법열이 넘치는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와같이 원시불교에서 중요시 되던 삼법인 가운데 무아(無我)라 한 것을 대승불교에서는 공(: śunya)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아는 곧 공과 다름이 없습니다. 대승불교나 근본불교의 공통된 주요 사상 가운데 하나가 이 무아사상, 공사상입니다. 대승불교의 중도일승(中道一乘)이라든가 일승원교(一乘圓敎)라든가 하는 이론들은 모두 공사상을 밑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전반적인 인도사상계에 있어서도 불교만큼 철두철미하게 공사상을 주장하는 종교나 철학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공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흔히 보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단멸공(斷滅空)이지 중도공(中道空)이 아닙니다. 아주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물질인 색()이 멸해서 아주 아무 것도 없다는 색멸공(色滅空)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란, 근본불교와 대승불교는 물론 심지어 선종에 이르기까지 색의 자성이 공하다는 색성공(色性空)을 말합니다. 색 이대로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색의 자성이 본래 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색이 본래 공하므로 모든 법은 서로 연기하여 생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색의 자성이 공하지 않다면 결코 연기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연기가 성립되는 것은 반드시 자성공(自性空)이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공을 바람과 같다고 비유로써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은 모양을 볼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이란 그 모양을 볼 수는 없지만 결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전 조사스님들은 색성공의 이치를 이렇게 읊었습니다.

 

비고 비어 고요하고 고요하여 딴 물건이 아니요

나무들은 푸르고 푸르며 철쭉꽃은 붉도다.

空空寂寂非他物이요 樹樹靑靑躑躅紅이라

 

붉고 푸른 것을 여의고 따로 공공적적(空空寂寂)을 찾는다면 이것은 외도(外道)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색의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지 색 자체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되면 있는 것이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있는 것[有卽是無無卽是有]으로 통하게 됩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원시경전 가운데는 이와같은 의미의 공에 대하여 설한 경전이 적지 않습니다. 이제 그 일부를 발췌하여 들어봅시다.

 

여래가 말한 모든 경전은 매우 깊어서 뜻이 깊고 출세간(出世間)의 공상응(空相應: sññyata patisamyuttā)의 것이나, 이들을 설할 때에 잘 듣지 아니하며 귀 기울이지 아니하며 요해(了解)의 마음에 머물지 아니하며, 받아 지니고 잘 알아서 이들 법을 사유하려고 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시()로써 지어지고 시로써 글귀가 아름다운 외도의 제자가 말한 모든 경전들이 말해질 때에 잘 듣고 귀를 기울이고 요해의 마음에 머물러서, 받아 지니고 잘 알아서 이들의 법을 사유한다. 비구들이여, 이와같다면 여래가 말한 매우 깊어서 뜻이 깊고 출세간의 공상응인 이들 모든 경전은 소멸되어질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이와같이 배워야 할 것이다.

여래가 말한 경전은 매우 깊어서 뜻이 깊고 출세간의 공상응인 것이어서 이를 널리 말할 때에 우리들이 잘 듣고 귀 기울이며 요해의 마음에 머무르며, 받아 지니고 잘 알아서 이들 모든 법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이렇게 배워야 하느니라. [南傳大藏經 13 相應部 二卷 pp.394395]

 

공상응이란 곧 공도리(空道理)입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일부의 여러 경전들은 공, 즉 공사상에 근거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공도리를 잘 받아가지고 잘 알아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경과 상응하는 한역경전을 고경(鼓經)이라고 하는데, 이 경의 앞 부분에 비유설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과거 세상에 다사라가(陀舍羅: Dasārahāna)라는 사람에게 아능가(阿能訶: ānaka)라고 하는 북이 있었다. 그 북은 좋은 소리, 아름다운 소리, 깊은 소리를 내어서 40리 밖에까지 들렸다. 그러나 그 북은 낡아서 여러 곳이 찢어졌다. 그때에 그 북장이는 소 껍질을 벗기어 북에 두루 감아 얽었지마는 그 북은 다시는 좋은 소리, 아름다운 소리, 깊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것은 그 뒤에 더욱 낡아서 가죽은 다 떨어지고 다만 북의 나무살만 남았다. 미래의 비구들도 몸을 닦지 않고 계율을 닦지 않고 마음을 닦지 않고 지혜를 닦지 않아서 여래께서 설하신 깊고 깊으며 밝게 비치는 공상(空相)의 요체와 연기법에 수순하는 것이 여기에서 소멸할 것이다. 마치 저 북이 낡아 부서지고 오직 나무통만 남은 것 같을 것이다.” [雜阿含經;大正藏 2, p.345 ]

 

그만큼 이 공도리(空道理)라는 것이 중요하고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파리어로 씌어진 남전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북전(北傳) 한역대장경에 없는 것이 있고, 북전 한역대장경에 있는 경전이 파리어 남전대장경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적지 않은데, 양쪽의 내용이 같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예를 들어 한역의 잡아함경 원본과 이에 해당하는 팔리경인 상응부 원본이 같다는 결론이 나와야 명확하게 입증됩니다. 5060년 전에 중국 신강성 고창 우정국에서 범어로 씌어진 불경, 즉 범본(梵本) 잔편으로 잡아함경의 범본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을 검토해 보니 한역대장경과 같은 동시에 파리어 원본과 똑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범본을 세계적으로 널리 유포시켰습니다. 한역 잡아함에 있는 말씀이나 파리어 상응부 경전에 있는 말씀이나 그 내용에서는 조금도 틀림이 없다는 것이 범본 원전에서 완전히 증명되어 학계에서 공인하게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하에서 인용하는 한역의 대공법경(大空法經)과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은 팔리경전에는 해당하는 것이 없으나, 범문으로는 남아 있어서 위에서 설명한 바에 따라 그다지 문제가 없을 것으로 여깁니다.

 

그때에 세존은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리라. 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좋고, 좋은 뜻과 좋은 맛으로 순일하고 청정하며 범행이 맑고 깨끗하니 이른바 대공법경(大空法經)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설명하리라.

무엇을 대공법경이라 하는가.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고 행에 연하여 식이 있으며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가 모이느니라. 이 두 변에 마음이 따르지 아니하며 바르게 중도를 향한다. 현성(賢聖)은 세상에 나와 여실히 전도하지 않고 바르게 본다. 말하자면 생에 연하여 노사가 있다고. 이와같이 생()()()()()()육입처(六入處)명색(名色)()()은 무명에 연하므로 행이 있다고. 그 무명이 멸한즉 행이 멸하고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이 무리가 멸하느니라. 이것을 대공법경이라 이름하느니라.”

爾時世尊 告諸比丘하사대 我當爲汝等說法하리니 初中後善하고 善義善味하여 純一淸淨하여 梵行淸白하니 所謂大空法經이라 諦聽善思하라 當爲汝說하리라 云何爲大空法經所謂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하니 謂緣無明行하며 緣行識하며 乃至純大苦聚集하느니라於比二邊心所不隨하고 正向中道賢聖出世하여 如實不願倒正見하니 謂緣生老死如是生有取愛受觸六入處名色識行緣無明故有行이라.彼無明滅則行滅하며 乃至純大苦聚滅하느니라 是名大空法經이니라[雜阿含卷 第十二;大正藏 二卷 p.84p.85]

 

대공(大空)이란 크게 공한 것, 즉 중도공(中道空)을 말하는 것이지 변공(徧空)이 아닙니다. 일신(一身)의 진실한 생명체를 뜻하는 명()과 육신의 관계를 설명하여, 현자와 성인은 명과 몸이 같다거나 다르다고 잘못 보지 않으며, 중도(中道)에 입각하여 바르게 봅니다. 그리고 그 중도는 바로 연기설에서 유래하니, 다시 말하면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에 의하여 비로소 해명되는 바입니다. 이와같이 연기설은 결과적으로 중도를 지향하게 하며, 그것이 또한 대공의 뜻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세존은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이라 하는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이 있으며 널리 설하여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의 모임이 일어나는 것과 같으니라. 또 다시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하니,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므로 식이 멸하며 이와같이 널리 설하여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가 멸하느니라. 비구여, 이것을 제일의공법경(第一義空法經)이라 이름하느니라.”

爾時世尊 告諸比丘云何爲第一義空經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하니 如無明緣行하며 行緣識하며 廣說乃至純大苦聚集起니라 又復此無故彼無하고 此滅故彼滅하니 無明滅故行滅하고 行滅故識滅하며 如是廣說하여 乃至純大苦聚滅하느니라 此丘是名第一義空法經이니라[雜阿含經 卷十三;大正藏 2, p.92 ]

 

공을 설할 때도 연기를 설할 때와 마찬가지로 십이연기의 순관설과 역관설 등 연기의 원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제일의(第一義)의 공의 내용이 12연기설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것은 공의 내용이 곧 연기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 이외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연기 밖에 따로 공이 없고 공 밖에 따로 연기가 없으며, 공 이외에 따로 중도가 없고 중도 이외에 따로 연기가 없습니다.

 

세존은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은 무아(無我)이니라, ()는 무아(無我)이니라, ()은 무아(無我)이니라, ()은 무아(無我)이니라, ()은 무아이니라. 비구들이여, 이런 까닭에 소유한 색의 과거미래현재[][]거침[]미세[]열등[]수승[][]가까움[]등 이것은 나의 것[我所]이 아니며 나[]가 아니며 나의 주체[我體]가 아니라고 이와같이 바른 지혜로써 여실히 보아야 할 것이니라.” [南傳大藏經 第十四 相應部經典 三, pp.104106]

 

색은 무아라고 하는 것은 색은 공()이라는 뜻입니다. 인용에서는 줄였지만 이 경문에서는 제법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인 색식의 오온(五蘊)에 대하여 무아(無我)무상(無常)()의 삼법인을 순서대로 설하고 있습니다. 대승의 반야경(般若經)에서는 오온이 공하다고 설하는데, 여기 원시 경전에서도 그와 유사하게 무아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제일 처음 어디서 공에 대하여 말씀하셨는가를 역사적으로 한번 살펴봅시다.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 나는 중도를 정등각했다고 선언하셨는데, 그 중도의 내용이 팔정도(八正道)라고 하시고, 그 다음에 사성제와 십이연기를 설하셨다는 것은 지금까지 설명한대로입니다. 그 동안에 다섯 비구가 깨쳐서 부처님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섯 비구에게 설한 내용이 공무아(空無我)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초전법륜에서 중도팔정도사성제공을 전부 다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초전법륜에서 부처님이 평생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하셨다고 평합니다. 동시에 어떤 학자는 부처님이 평생하시고 싶은 말씀을 어떻게 다섯 비구에게 전부 다 하실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부처님이 나중에 말씀한 것을 후대 사람들이 한데 묶어 놓은 것이지 일시에 말씀하신 것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부처님이 깨친 근본자리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근본적으로 깨치신 것이 중도이면서 팔정도이고 사성제이며 공()이기 때문에 한 시간 이내에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고 한 장으로도 다 설명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경전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인정되는 초전법륜에서 이렇게 사성제를 비롯하여 공무아(空無我)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공사상이 근본불교의 사상이 아니라고는 아무도 의심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6. 십이연기의 재해석

 

이제부터는 십이연기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피력하고자 합니다. 먼저 십이연기에 대한 해석의 문제인데, 여기에는 시간적 인과(因果)관계로 보는 해석과 존재의 원리로 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종래에는 십이연기에 대한 이 두 가지 해석이 서로 비등하게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아무래도 연기의 본래 의미는 존재의 원리로 보는 것이 보다 합당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 십이연기에서 연기를 소승의 유부적(有部的)인 생멸(生滅)의 견해로 볼 것이 아니라 법계(法界)의 연기, 중도(中道)의 연기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견해에 의하면, 과거 천태대사나 현수대사 같은 분들이 원시경전인 아함경을 소승에 소속시켜 생멸의 범주로 구분한 것은 부당하다고 봅니다. 원시경전인 아함경은 대승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소지를 적지않게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실례는 가전연경 등에서 일부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면 먼저 십이연기의 본래적 의미는 시간적 관계라기보다 존재의 법칙인 까닭을 말해보겠습니다.

 

그때 존자(尊者) 마하구치라(Mahakauṭṭhika)는 존자 사리불(Sāriputta)에게 이렇게 물었다. “벗 사리불이여, 노사(老死)는 자기가 지은 것[自作]입니까, 노사는 남이 지은 것[他作]입니까,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이며 남이 지은 것입니까, 또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없이 나는 것입니까?” “벗 구치라여,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자기가 지으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없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에 연()하여 노사(老死)가 있습니다.”

벗 사리불이여, ()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벗 사리불이여, ()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식은 남이 지은 것입니까, 식은 자기가 지은 것이며 남이 지은 것입니까,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없이 나는 것입니까?”

벗 구치라여,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자기가 지으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명색(名色)에 연()하여 식()이 있습니다.”

벗 사리불이여, 이 말한 바의 뜻을 어떻게 알아야 하겠습니까?” “벗이여, 비유하면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과 같이 명색에 연하여 식이 있으며, 식에 연하여 명색이 있습니다. 명색에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으며, 육처에 연하여 촉()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입니다. 벗이여, 만일 그들의 갈대 묶음 가운데서 하나를 제거해버리면 나머지 하나는 넘어져버리며, 다른 것을 제거해버리면 그 다른 것이 쓰러져버립니다. 벗이여, 그와 같이 명색의 멸함에 의해서 식의 멸함이 있으며, 식의 멸함에 의해서 명색의 멸함이 있으며, 명색의 멸함에 의해서 육처의 멸함이 있으며 육처의 멸함에 의해서 촉의 멸함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입니다.” [相應部經典 2卷 南傳大藏經 13 pp.164166)

 

사리불은 연기를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에 비유하여, 명색(明色)을 연하여 식()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 무명의 멸함에 의하여 행의 멸함이 있으며, 행의 멸함에 의하여 무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무명(無明)이 아버지가 되고 행()이 자식이 되어서 무명(無明)이 행()을 낳는다는 식이 아니라 무명(無明)과 행()은 서로 의지하는 형제지간이라는 것입니다. 갈대 묶음 가운데 하나를 빼버리면 다른 하나는 설 수 없으니, 이것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는 뜻을 비유하여 말한 것입니다. 명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는 것이지 시간적으로 고정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남전대장경과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에 다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연기는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해 있는 것과 같아 하나는 주체가 되고 다른 하나는 객체가 된다는 것보다는 평등한 입장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 연기란 인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없던 것이 새로 탄생하여 생겨난다는 생성의 기본원리라기보다는 모든 일체 만물이 존재하는 존재의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연기를 만물이 어떻게 생겼나를 설명하는 가르침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시간적 해석이 됩니다. 연기는 본래 존재의 모습을 말하는 기본원리였었는데, 후대에 오면서 생성의 원리를 말하는 시간적 관계로 보게 된 듯합니다. 그러나 연기란 우선적으로 만물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밝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연기의 근본 성품에는 앞의 남전장경에서 본 것처럼 진여(眞如)의 의미도 포함되고 있는데, 진여는 나고 죽고 하는 것이 본래 없으며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이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서로 의지해서 존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연기를 생성에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게 되면 전변설(轉變說)에 떨어지게 됩니다. 전변설은 오늘날 하나님격인 범(: Brahman)에서 일체만물이 나왔다고 하는 인도 고대종교의 사상이며, 부처님은 애초부터 이것을 부정하였습니다. 후대의 불교에서는 전변설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는데, 유식설(唯識說)은 은연중에 이러한 전변설의 색채가 있다고 해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기란 전변설처럼 무슨 본질이 따로 있고 지말(支末)이 따로 있어서 그 본체에서 지말이 생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화엄(華嚴)의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에서 성기(性起)라는 말을 하는데 그 일어난다[]는 말을, 생겨나서 일어난다는 생기(生起)의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불법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 연기란 서로 의지해 있는것[相依性]’이라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의지하고 나는 너를 의지해 있다고 하셨지 내가 있기 때문에 네가 생겼고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생겼다는 말은 아닙니다. 즉 연기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형제 사이란 말입니다. 시간적으로 연속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공간적으로 평등인 형제 사이라는 것이며, 우주가 존재하는 근본원리를 말함이지 성경의 창세기처럼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말하는 그런 이론이 아닙니다. 흔히 나에게 묻습니다. “예수교에서는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다고 합니까.”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불교에는 연기법이 있다. 이 우주라는 것, 법계(法界)진여(眞如)라는 것은 누가 만들 수도 없는 것이고 누가 부술 수도 없는 것이다. 법계 그 자체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不生不滅],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不增不減] 것이다. 거기에서는 서로가 의지하여 원융무애하게 존재할 뿐이다.” 이 우주를 누가 만들었다고 하면 외도법인 전변설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우주의 존재방식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고 부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연기란 평등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융화하여 무애자재함을 말할 뿐이지 서로 앞서고 뒤서고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학자나 스님들은 원시경전인 아함경을 소승에 소속된 것으로 분류하였는데, 지금까지의 인용 경전과 그 해설에서 그와 같은 취급이 반드시 옳지만은 않다는 점을 다소간 이해하였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그 연기에 생사윤회의 시간적인 해석을 하게 된 까닭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학문이 발달하기 전에는 불교라고 하면 그냥 불교라는 것뿐이었는데, 학문이 발달함에 따라 불교도 역사적인 전개에 따라 근본불교(根本佛敎)원시불교(原始佛敎)부파불교(部派佛敎)대승불교(大乘佛敎) 등으로 분류하여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근본불교란 부처님과 부처님의 직접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원초기의 불교를 말하고, 원시불교란 부처님 제자들 이후부터 부파의 분열 이전까지 백여 년 동안의 불교를 말합니다. 그 뒤로 십수개의 부파가 나뉘어져 서로 이론적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시대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합니다. 흔히 말하는 소승불교는 바로 그 부파불교를 가리킵니다. 부파 성립 이후의 교단은 거의 소승불교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소승불교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근본불교 정신으로 되돌아가려고 일어난 것이 바로 대승불교입니다.

대승불교운동이 처음 일어난 때는 기원전 1세기경이라고 하며, 그것을 가장 잘 체계화시킨 사람이 용수(龍樹)를 중심으로 한 중관파(中觀派)이고, 그보다 다소 후에 무착(無着)과 세친(世親)을 중심한 유식파(唯識派)가 성립됩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인도의 불교사상을 오랜 세월 동안 수용하면서 전적으로 대승적인 교학을 발전시켰는데, 그 대표적인 종파가 바로 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천태종(天台宗)선종(禪宗) 등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근본이 되는 것인 만큼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들 당시의 불교가 중심이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시대를 내려오면서 만일 그 근본취지가 변질된 것이 있다면 그 변질된 것은 마땅히 시정되어야 합니다. 이제 문제는 지금까지 내가 설명해 온 바와 같이 근본경전에서 설해진 십이연기법의 근본성품은 진여이며 법계이며 중도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해서 그런 십이연기법을 시간적인 생멸법으로 해석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원시불교시대를 지나서 부파불교시대로 오면 각 부파가 서로 자기파의 변견을 고집하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부처님의 근본교설을 없다는 견해[無見]에 치우쳐 해석하고, 다른 쪽에서는 있다는 견해[有見]에 치우쳐 해석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있다는 견해에 치우친 세력이 컸는데, 그것이 요즘 말하는 소승불교의 실세가 된 것입니다. 있다는 견해에 치우친 것이란 일체의 모든 법에는 실체(實體)가 있다[諸法實有]’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체가 있으므로 고정적으로 생사윤회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서로 의지한다는 성격[相依性] 때문에 연기란 것은 무아(無我)가 근본도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파불교에서는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즉 양변을 여윈 중도사상을 모르고 변견에 떨어져 실체는 있다는 견해를 고집했고, 따라서 십이연기를 그와 같은 실유론적인 성격이 강한 생사윤회하는 법칙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이 최초로 나온 곳이 원시경전에 나오는 가전연존자와는 이름만 같고 실제로는 다른 가전연자(迦栴延子)가 지은 발지론(發智論)인데, 거기에서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로써 설명한 것입니다. 그 뒤 오백명의 존자들이 모여서 가전연자가 지은 발지론에 대한 주석서로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100권을 지었는데 거기서도 삼세양중인과설을 채택하여 생멸법으로서의 십이연기연을 채택했습니다. 그래서 구사론(具舍論)등 유부(有部)의 소승불교 전체가 십이연기의 해석을 근본불교와는 다르게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용수보살이 나타나서 부처님의 근본불교를 생멸적인 견해로 곡해한 유부의 변견을 부수게 됩니다. 그는 중론(中論)을 지어서 중도를 다시 선양하고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도 중도사상을 가지고 근본불교를 회복시키려고 전력을 기울인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바로 이러한 근본불교에로의 복구운동이 소위 대승불교운동입니다.

간략하지만 이와 같은 설명을 통해 연기설이 어떻게 해서 유부(有部)적인 소승의 생멸적 견해로 해석되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과정이 대강 짐작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에는 어느 학자도 십이연기를 반드시 생멸적이며 시간적으로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하게 생멸적인 소승유부의 주장을 고집하게 되면, 이 사람들은 시대에 역행하는 사람들인 동시에 부처님의 근본 뜻을 등지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 십이연기와 관련하여 언급해야 할 문제가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십이연기와 사성제는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이 사성제를 해석하는 방법에는 모두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생멸사제(生滅四諦)입니다. 이것은 대개 소승의 유부(有部)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법의 자성을 있다[]’라고 보기에 이 있다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제법은 생멸한다는 피상적인 관찰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래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보지 못하고 고()()()()의 사제를 순전히 생멸적으로 해석합니다.

둘째는 무생사제(無生四諦)입니다. 이것은 생멸사제의 반대로서 사제는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해석입니다. 대승불교 가운데 반야경(般若經)이나 삼론종(三論宗)의 공사상(空思想)에 근거하여 주장한 해석입니다. 공사상에서 볼 때는 사제란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라 합니다.

셋째는 무량사제(無量四諦)입니다. 이것은 보살승(菩薩乘)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보살이란 육도만행(六途萬行)을 근본으로 삼고 행동을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견해는 육도만행을 하듯이 모든 것이 다 한이 없고 끝이 없다[無量無邊]는 견지에서 사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문연각은 이 무량사제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넷째는 무작사제(無作四諦)입니다. 이것은 주로 법화경을 받드는 일승원교(一乘圓敎)의 해석입니다. 여기서는 사제를 생멸(生滅)무생(無生)무량(無量)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생멸하는 당체(當體)가 그대로 실상(實相)이라는 것입니다. 곧 생사(生死)가 열반(涅槃)이며 번뇌(煩惱)가 보리(菩提)이므로, 끊어야 할 고()도 집()도 없고 닦고 증득해야 할 멸()도 도()도 없으므로 어떤 인위적인 지음도 요청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변견이나 사견(邪見)이나 할 것 없이 전체가 다 중도 아닌 것이 없으니 부처와 마구니가 한계선이 없어지고 화합하는 때입니다. 이것이 원융무애한 중도사제(中道四諦)입니다.

원래 사제(四諦)는 자세히 알고 보면 십이연기와 별개의 도리가 아닙니다. 사제 중에서 괴로움을 말하는 고제(苦諦)와 괴로움이 생기는 것을 뜻하는 집제(集諦)는 괴로움이 생기는 과정을 말하므로 십이연기의 순관(順觀)에 해당합니다. 또 사제에서 괴로움이 멸하는 멸제(滅諦)와 그 멸하는 길을 말하는 도제(道諦)는 괴로움이 소멸하는 과정을 말하므로 십이연기의 역관(逆觀)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십이연기와 사제는 서로 대등한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가 존재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고 법계 연기이고 보면, 사제 역시 생멸적인 사제만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태대사나 현수대사가 아함경을 소승으로 취급하여 아함의 연기를 생멸연기로 해석하고, 아함의 사제도 생멸사제로 간주한 것은 결단코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님은 중도를 정등각했다고 선언하였는데, 중도가 즉 연기이며, 연기가 즉 법성이며, 법성이 즉 법계이며, 법계가 즉 사제입니다. 이것은 전체가 다 동체이명(同體異名)입니다. 중도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도 표현하고 저렇게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법실상이라든가 법계연기라든가 그 모두가 법계연기법성 이것을 벗어나서 더 묘한 이론은 없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설명하신 근본불법은 제법실상과 법계연기를 주장하는 천태화엄과 같은 일승원교의 입장이지 절대로 소승의 생멸변견적(生滅邊見的)인 불교는 아닙니다.

일승도(一乘道)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흔히 이것은 대승불교에서만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법화경에서 시방 국토 가운데 오직 일승법이 있으니 모든 부처님의 방편설은 제외한다라고 설하시어, 부처님의 근본 뜻은 일승(一乘)에 있음을 천명하셨습니다. 때로는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이승(二乘)도 말하고, 때로는 이승에 보살(菩薩)을 더한 삼승(三乘)도 말씀하지만 그것은 방편이며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이유에서 삼승을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첫째 성문승(聲聞乘)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지만, 항상 생멸(生滅)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성제(四聖諦)를 설할 때도 생멸적인 관점에 서서 해석하며, 열반을 증득해도 유여열반(有餘涅槃)이요 무여열반(無餘涅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둘째는 연각승(緣覺乘)입니다. 스스로 인연을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연을 관해도 생멸적인 변견으로 관하는 것이지 중도 정견[中道正見]으로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역시 무여열반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셋째는 보살승(菩薩乘)입니다. 성문과 연각승은 순전히 자기의 이익[自利]에만 치우쳐 혼자 가만히 앉아서 자기의 해탈만 추구하여 모든 것이 다 소극적입니다. 이에 반()하여 보살은 자신의 이익[自利]보다 타인의 이익[利他]이 근본이 되어서 남을 위해서는 나의 해탈은 그만두고 지옥을 하루에 천번 만번 가도 좋다고 하는 대보리심을 내어서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육바라밀을 비롯한 수많은 수행[六道萬行]을 닦습니다. 일체중생을 위해서 무량한 아승지겁 동안 육도만행을 닦으며, 한없는 세월 동안 중생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위해서 남을 도우며 살면서 마침내는 무상정각을 이룹니다. 이러한 사람을 보살승이라고 하며, 이승과는 달리 유여열반이 아닌 무여열반을 증득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근본 관점은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성문승도 연각승도 보살승도 아닌 오직 일승(一乘)입니다. 보살승은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의 무한한 세월 동안 남을 위해 노력해서 정등각(正等覺)을 이룸을 말하는데, 일승(一乘), 일불승(一佛乘)이란 진여법계를 지금 바로 깨치는 것입니다. 곧 중도만 정등각하면 진여법계가 그대로 현전하므로 중도를 정등각해서 법계를 그대로 바로 보는 이것을 일승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승은 중도를 내용으로 한 진여법계를 깨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불법을 성취함에 있어서는 오직 중도를 바로 깨쳐서 진여법계를 바로 증득하면 화장세계에서 임의자재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되니 이것이 바로 곧은 길[直路]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처님 당시에 모든 제자들이 부처님의 법문 끝에 바로 깨쳐서 중도를 증득했지 무슨 다른 길을 빙빙 돌아서 공부를 성취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본래 바른 길, 즉 지름길로 가서 부처님 법문을 깨치고 불법을 성취했지 무슨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한다든지 삼아승지겁 동안을 닦아야 한다든지 하는 얘기는 근본 원시경전에는 없는 말입니다. 진여법계로 바로 들어가는 이것이 일승입니다.

그러면 왜 삼승을 설하였는가? 소승불교와 대립적인 입장에 선 대승불교에서 방편으로 한 것입니다. 부파불교인 소승불교에서는 이들은 순전히 자리에만 치중하고 이타는 행하지 않았다고 대승에서 주장합니다. 이타가 없기 때문에 소승의 자리적인 편견을 부수기 위해서 이타의 육도만행을 강력히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승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중도일승(中道一乘)에서 볼 때는 일종의 방편이지 실지의 구경법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지(止觀), (定慧)를 함께 닦아서 중도를 정등각하여 진여법계로 들어가면 그만이지 거기에서 보면 무슨 이승이니 삼승이니 하는 헛된 길[空路]은 없습니다. 원시경전에 부처님 제자들이 깨친 경로가 삼아승지겁이 걸린다고 하는 등의 수증(修證)의 점차(漸次)는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비구 교진여가 부처님의 중도법문을 듣고 바로 깨치고 나서 ()이 곧 멸()’이라고, 즉 생사가 곧 열반이라고 하니 부처님께서 인가하셨다는 말은 내가 앞에서도 여러 번 귀따가울 정도로 말했습니다. 말로서만 생사 즉 열반이 아니라 확실히 원융무애한 것을 체득한 것입니다. 그 뒤에도 부처님의 제자가 깨친 사실이 자주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 모두가 바로 깨쳐 들어갔지, ‘삼아승지겁을 닦아 성불한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둘러가는 공로(空路)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이 일승 사상은 대승불교에서 크게 주장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일승이라는 말이 반드시 대승경전에서 비로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아함경(阿含經)에 일승도(一乘道)라는 형태로 드물기는 하지만 그 용례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까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 일승도(一乘道)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여 괴로움과 걱정을 멸하며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四念處)니라. 어떤 것을 사념처라 하는가. 몸에서 몸()을 관하여 열심히 바르게 알고 바르게 상념하여 세간의 탐욕과 걱정을 조복하여 머물며, ()에서 수를 관하여 마음[]에서 마음을 관하여 법()에서 법을 관하여 머무느니라. 여러 비구들이여, 이 일승도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며 괴로움과 걱정을 멸하고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니라. [南傳大藏經 16권 상, 相應部經典 5, p.357358]

 

여기서 말하는 일승도(ekayana)란 신()()()()의 네 가지를 바로 알고 바로 생각[正知正念]한다는 것입니다.

즉 몸은 청정한 것이 아니며, 수는 즐겁지 못한 괴로움이고, 마음은 항상하지 않는 무상한 것이며, 법은 자성이 없는 무아(無我)라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근본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설한 여러 가지 수행법 가운데 사념주(四念住), 또는 사념처를 바로 일승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역(漢譯) 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다소 다르게 말합니다. 그 한역의 내용 일부를 다음에 인증해 보겠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비사리(毘舍離)의 미후연못[獼猴池] 곁에 있는 중각 강당에 계시었다. 존자 아난은 이차(離車)에게 말하였다.

여래응등정각(如來應等正覺)께서 알고 보는 바는, 타오르는 번뇌를 떠나 청정한 곳에 뛰어 나는 도를 세 가지 설하여, 일승도로써 중생을 정화하고 근심과 슬픔을 여의며 괴로움과 번뇌를 넘어 진여의 법을 얻게 한다. 무엇이 셋인가. 이와같이 성스런 제자는 청정한 계율에 머무니또 이차여, 이와같이 청정한 계율을 구족하면 탐욕선하지 않은 법을 여의며 내지 제 사선(第四禪)을 구족하여 머무른다. 또 삼매를 바르게 받아 지녀서 이 고성제(苦聖諦)에서 여실히 이를 알고, 고집성제(苦集聖諦), 고멸성제(苦滅聖諦), 고멸도적성제(苦滅道跡聖諦)에서 여실히 알고 구족한다. 이차여, 이것을 여래응등정각께서 알고 보는 바, 세번째로 타오르는 번뇌를 떠나 청정한 곳에 뛰어나는 것을 설하여, 일승도로써 중생을 정화하고 괴로움과 번뇌를 여의며 근심과 슬픔을 멸하여 여실한 법을 얻게 한다고 이름하느니라.”

一時佛住毘舍離獼猴池側重閣講堂이러라. 尊者阿難語離車言호대. 如來應等正覺所知所見說三種離熾然하고 淸淨超出道하며 以一乘道淨衆生하고 離憂悲하며 越苦惱하여 得眞如法하니라 阿等爲三인가 如是聖弟子住於淨戒하고得次離車如是淨戒具足하여 離欲惡不善法하여 乃至第四禪具足住하며復有三味正受하여 於此苦聖諦如實知此하고 苦集聖諦 苦滅聖諦 苦滅道跡聖諦如實知具足하니라 離車是名如來應等正覺所知所見으로 說第三離熾然하고 淸淨超出하여 以一乘道淨衆生하고 離苦惱하며 滅憂悲하여 得如實法이라하니라.[大正藏 2, p.147 148 , 雜阿含經 29]

 

이상의 내용은 외도의 제자인 이차(離車)에게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존자가 대답한 것입니다. 즉 청정한 계율을 지키고, 사선 등의 선정을 구족하며 고도의 사제를 숙지하면, 고난과 근심에서 벗어나 청정하게 되고 참다운 법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계율(戒律)과 선정(禪定), 사제(四諦) 등의 세 가지는 부처님이 중생들을 위하여 일승도로서 시설한 것이라고 봅니다. 한역 잡아함경에는 이 일승도라는 말 외에도 여실한 법을 의미하는 진여라는 말도 나오지만, 이 두 가지가 이에 상응하는 파리(巴利: Pāli)경전에는 없으므로 이 말들은 다소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승도라는 말은 비단 여기서 뿐만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파리어로 씌어진 경전에도 나오므로 결코 후대의 대승불교에서 비로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일승도라는 의미가 아함경과 대승경에서 똑같이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아함경에서는 일승도가 사념처라고 하는 등 삼승에 대하는 대승불교의 일승과는 거리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뜻이야 어찌되었든 일승이라는 말도, 아뢰야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대승불교가 흥륭하기 이전의 근본불교에서부터 일찍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법성은 항상 머무르니, 여래는 그것을 스스로 알아 바른 깨달음[等正覺]을 이루어서 나타내 연설하고 분별하여 열어보이느니라. 이른바 이 일이 있으므로 저 일이 있고, 이 일이 일어나므로 저 일이 일어나느니라.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생을 연하여 노고가 있으니 이것이 괴로움의 쌓임(苦陰)의 모임이니라. 무명이 멸한즉 행이 멸하고 내지 생이 멸한즉 노고가 멸하니 이것이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이니라.

如來出世커나 及不出世커나 法性常住하니 彼如來自知하여 成等正覺하고 顯現演說하여 分別開示하느니라 所謂是事有故是事有하며 是事起故是事起하니 緣無明有行하고 乃至緣生有老病死憂悲惱苦하니 如是苦陰集하느니라 無明滅則行滅하고 乃至生滅則老病死憂悲惱苦滅하니 如是苦陰滅하느니라.[那梨迦經, 相應部經典 2]

 

이 경전에서는 연기의 성품을 법성(法性)이라고 하였는데, 법성은 만법의 자성(自性)이라는 말입니다. 이 법성은 항상 법계에 존재하므로 연기, 곧 십이연기는 항상 법계에 존재하는 법성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연기법은 세존께서 만든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만든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연기법이란 내가 만든 것이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느니라.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치고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분별하여 연설하고 개발하여 나타내 보이느니라.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느니라.”

世尊이시여 謂緣起法爲世尊作爲餘人作耶佛告比丘하사대 緣起法者非我所作이며 赤非餘人作이니라 이니 彼如來出世거나 及未出世거나 法界常住하느니라 彼如來自覺此法하여 成等正覺하고 爲諸衆生하여 分別演說하고 開發顯示하느니라 所謂此有故彼有하며 此起故彼起하느니라[雜阿含經 第十二卷 大正藏 第二卷 p.85 ]

 

이 연기법경(緣起法經)은 앞의 내용과 더불어 연기법의 성품을 뚜렷이 규정짓고 있습니다. 앞의 경전에서는 연기법의 성품은 곧 법성이라고 하였으며, 이 경전에서는 그 연기법은 항상 법계에 머무른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연기법의 법성, 법계로의 해석은, 연기법이 생멸적이고 시간적인 인과관계를 내포하든 아니든 그 근본은 진실한 법성의 연기, 법계의 연기로 보아야 한다는 뜻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연기를 보는 사람을 법을 보며 법을 보는 사람은 연기를 보느니라.

緣起하는 法見하며 法見者緣起하느니라[中阿含經, p.241]

 

발가리(跋迦梨), 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며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느니라. 발가리여, 법을 보아서 나를 보며 나를 보아서 법을 보느니라. [相應部經典 三卷 p.190]

 

연기를 바로 보는 것이 법을 바로 보는 것이며, 법을 바로 보는 것이 성불(成佛)이라는 말입니다. 여래는 법계를 정등각하고 연기를 직접 깨치고 중도를 직접 증득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직접 증득하고 바르게 깨친 연기는 곧 법이며 곧 중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이 분명히 교시되어 있습니다. 한편 법계라고 하면 화엄종의 법계연기에서만 주장하였지 근본 원시경전에는 그런 이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데, 이미 앞의 예문에서 드러나듯이 원시경전에서도 연기법과 관련하여 법계설이 설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서 예문 한 가지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사리불(舍利弗)은 잘 법계에 도달하였느니라. [南傳大藏經 相應部經典 第二卷 p.81]

 

이는 부처님만이 법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인 사리불도 법계에 잘 도달하였다고 부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원시경전을 살펴본 까닭은 천태대사나 현수대사 같은 그런 큰스님들이 아함불교(阿含佛敎)를 소승이라 하여 무시하다시피 했으므로 후대에서도 아함(阿含)이라 하면 으레히 소승불교 계통의 경전으로만 인식하고 대승적인 법계연기진여연기를 원초적으로, 그리고 산발적으로 설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역의 아함경이나 이에 상당하는 팔리어의 남전대장경에 표현되어 있는 근본불교는 결코 후대에서 잘못 이해한 유부(有部)의 소승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설해 온 가전연경 등 연기설에 관련된 경전들의 사상에 의하면 부처님의 근본법은 중도연기(中道緣起)에 있는데, 이 중도연기란 곧 진여법계를 말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진여법계란 천태종(天台宗)이나 화엄종(華嚴宗) 등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일승원교(一乘圓敎)이며, 화엄경법화경의 근본 도리입니다. 그리고 이 진여법계를 바로 깨치는 것이 선종(禪宗)입니다. 원시불교 경전에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진여법계의 사상을 구성하는 중도(中道)나 법계(法界)법성(法性), 여여(如如), 진여(眞如) 등의 사항이 연기설을 주축으로 하여 부분적이고 원초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근본불교에 있는 중도사상연기사상진여법계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화엄의 법계연기사상입니다. 흔히 화엄사상을 부처님 뒤에 발전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대로 말한다면 부처님이 근본불교에서 설한 연기설을 정통적으로 계승하여 보다 정치하게 발전시킨 것이 화엄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선종(禪宗)도 똑 같습니다. 화엄의 법계연기가 부처님의 진여법계연기 이론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것이라면, 선종은 실천면에서 진여자성을 확철히 깨쳐서 진여법계를 직접 증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중도를 정등각하여 진여법계를 증득하여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해 내려온 것이 다름아닌 선종입니다. 선종도 흔히 뒤에 중국에서 발달되었다고 보는데, 그것은 모르는 사람의 말입니다. 선종이란 부처님의 중도, 즉 법계연기진여법계를 단박에 증득(頓證)한 것이며 몸소 실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여의 법계를 교리적으로 설명하든지, 혹은 증득하든지간에 이 사상은 후세에 발달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근본불교시대에 미숙한 형태로나마, 적어도 문헌의 기록적인 측면에서, 친히 잘 말씀하시고 친히 증득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후세에 이르러 보다 완벽하게 이론화되고 문자화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연기법을 한 게송을 지어 읊어봅니다.

 

가이없는 풍월은 눈[]속의 눈이요

다함없는 하늘과 땅은 등불 밖의 등불이러라

버들은 푸르고 꽃은 예쁜데 십만의 집에

문을 두드리는 곳곳마다 사람이 답하네

無邊風月眼中眼이요 不盡乾坤燈外燈이라

柳靑花明十萬戶叩門處處有人應이로다

 

삼천대천세계의 곳곳마다 버들은 푸르고 꽃은 예쁜데 여기 불러도 하고 저기 불러도 합니다. 곳곳마다 부처님 없는 곳이 없고 곳곳마다 진여 아닌 곳이 없습니다. 다함이 없고 한이 없는 연기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3장 중관사상

 

1. 중관파(中觀派)

 

중관파는 인도대승불교의 한 학파인데 이것을 일으킨 시조는 용수(龍樹: Nāgārjuna)보살입니다. 그의 생존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150250 년으로 추정합니다. 그는 남인도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인도 고대종교인 바라문교의 베다경전을 학습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그 학식이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장하여 육신의 욕망을 탐닉하다가 고난을 당하자 그것이 고통스런 불행임을 깨닫고, 어느 산 위에 있는 불교의 탑을 찾아가 계율을 받고 출가하였습니다. 출가한 뒤에 먼저 소승불교를 배우고 다시 더 깊은 뜻을 담은 경전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많은 대승경전을 얻어 심오한 대승불교의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그리하여 남은 생애 동안 대승불교사상을 전파하며 부처님의 근본뜻을 선양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용수보살이 활약할 무렵, 인도의 사상계는 밖으로 실재론적(實在論的)인 이론으로 무장된 수론(數論: Sāmkhyā)승론(勝論: Vaiśeṣika)정리파(正理派: Nyāya) 등 여러 철학이 흥기하였으며, 안으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비롯하여 독자부(犢子部) 등 소승불교의 여러 부파가 또한 실유론적(實有論的)인 이론에 치우쳤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외도(外道) 및 소승불교의 실유론적인 견해를 척파하고, 부처님이 설한 진실한 법인 중도(中道)를 선양하기 위하여 반야경(般若經)의 공사상(空思想)에 입각한 중도 사상을 주장하였습니다.

용수보살의 대표적 저술인 중론(中論)의 귀경게(歸敬偈)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去]’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이것은 열반(涅槃)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데 열반은 원래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니므로 연기하여 생한 일체의 모든 법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 것으로서 어떠한 자성(自性)이 있지 않은 공()임을 표명한 것입니다. 이 여덟 가지 부정, 즉 팔불(八不)은 중생들의 수많은 미혹된 견해를 대표하는 생()()()()()()()()의 여덟 가지 견해를 부정한 것으로서 외도들의 사견(邪見)과 불교 내의 유부(有部) 등의 유견(有見)을 척파한 것입니다. 즉 일체 존재가 저절로 생긴 것이라거나, 어떤 절대자로부터 파생한 것이라거나, 또는 미세한 물질들이 화합하여 생긴 것이라는 등, 중생들이 여러 삿된 견해에 빠져 바른 법을 보지 못하므로, 용수보살이 이러한 편견을 타파하기 위하여 팔불설(八不說)을 주로 한 중론를 지어 공사상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가 주장한 공(: śūnya, śūnyatā)은 단순히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도 아니고, 도피와 체념에 사로잡힌 회의주의도 아니며, 결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무()도 아닙니다. 그의 공사상의 근저에는 어디까지나 연기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곧 연기하여 생겨나는 일체의 법은 고유한 본성 즉 자성이 없으며, 고정적인 자성이 없으므로 공하다고 설한 것입니다. 중론에서 설하는 제일의제(第一義諦)와 세속제(世俗諦)의 내용은 이 뜻을 잘 설명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일체가 공하며 이러한 견지에서 제법을 관하는 것이 제일의제입니다. 그러나 제법이 비록 공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연기하여 상대적인 세계가 성립하기도 하니 이같은 세간의 입장이 곧 세속제입니다. 중론에서는 제일의제는 세속제에 의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또 이 이제(二諦)의 도리를 잘 파악하지 못하면 깊은 불법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설하여, 공이 결코 단순한 무()가 아님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는 이와같이 공사상에 근거하여 그 당시의 잘못된 사상계를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불교의 근본진리인 중도를 천명하였습니다. 여러 인연으로 생한 법[衆因緣生法]이 곧 공()이며 또한 가명(假名)이며 또한 중도(中道)’라고 설하여 중도의 뜻을 간명하게 정의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세 가지 진리인 공()()()의 삼제(三諦)는 후대 불교사상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이 삼제게(三諦偈)의 내용을 깊이 수용한 중국불교의 천태종(天台宗)에서는 이것을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로 파악하여 천태종 특유의 원융삼제(圓融三諦)를 주장하게 됩니다.

용수보살은 중론을 비롯하여 십이문론(十二門論)」․「회쟁론(廻諍論)」․「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보행왕정론(寶行王政論)등과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의 주석서인 대지도론(大智度論)그리고 기타 여러 저술을 남겼는데, 그 저술 대부분의 중점은 바로 공사상의 천명이었습니다. 이와같이 그는 외도와 소승불교를 타파하고 대승불교를 크게 중흥시켰으므로 불교계에서는 용수보살을 부처님 이래로 제일이며 대승불교의 선구자요 최대의 공로자로 추앙합니다.

그의 입멸 후 그의 사상은 제자인 제바(提婆)보살에 계승되고, 마침내는 인도에서만 수많은 뛰어난 학승을 배출하게 되어 중관파라는 학파를 형성하여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할 때까지 지속적인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8세기에 활약한 적호(寂護: śāntarakṣita)논사는 용수보살 이후 최대의 사상가라고도 지적되는데, 그는 당시까지 지속되어 오던 부파불교의 교리와 유식설 등의 사상을 중관사상에 서서 비판하고 흡수하여 유가행중관파(瑜伽行中觀派)라고 불리는 후기 중관파의 사상적 체계를 수립하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인도에서 계승된 것은 물론, 티벳에도 전해져서 티벳불교가 중관학에 기울어지게 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1)?중론(中論)?

 

용수논사의 대표적 저술인 중론(中論)에서 중도설에 대하여 명확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초품(初品)에 등장하는 팔불게(八不偈)가 있습니다. 이것은 생멸(生滅)단상(斷常)일이(一異)내거(來去)등의 여덟 구가 부정적으로 표시된 것으로 이 팔불(八不)에 의해 도출된 사상이 곧 팔불중도(八不中道)입니다. 이 팔불게(八不偈)는 제 24품에 나오는 삼제게(三諦偈)와 더불어 중관론의 중도사상을 표방하는 대표적 교리로서 예로부터 유명합니다. 먼저 팔불중도(八不中道)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능히 이 인연을 설해서 모든 희론을 멸하니 모든 설법자 중에서 제일이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하나이다.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去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中論;大正藏 30, p.1 ]

 

이것이 유명한 생멸(生滅)단상(斷常)일이(一異)내거(來去)로 표현된 팔불중도라는 것인데 그 대표적인 내용은 맨 처음의 생멸(生滅)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성립되지 않으면 불상부단(不常不斷)불일불이(不一不異)불래불거(不來不去)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팔불중도의 근본의미가 불생불멸에 있다는 것은 선각적인 스님들은 누구나 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것은 생과 멸()의 양변을 여의였다는 뜻입니다. 이 생()의 양변을 여읜 것이 중도이고, (斷常)의 양변을 여읜 것이 중도며, (一異)의 양변을 여읜 것이 중도고, (來去)의 양변을 여읜 것이 중도입니다. 그러므로 중도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불생불멸이라 하면 그것이 곧 중도인 것입니다.

용수보살이 중론을 지을 때 제일 첫머리에 이 게송을 갖다 놓은 것은, 모든 중생들이 생멸의 변견에 처해 있으므로 생멸의 변견을 완전히 부수고 중도 정견(正見)을 펴기 위한 것입니다. 용수보살은 평생을 중도적인 입장에서 불법을 소개하고 한편으로는 사견(邪見)을 여지없이 항마검으로 갈겨버렸습니다. 우리 부처님이 말씀하신 수많은 법문 가운데 중도법문이 제일인 것입니다.

또 중론에서 중도사상을 간단하면서도 명확하게 표현한 것으로 삼제게(三諦偈)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공()()()의 세 글자로 중도사상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이 삼제게는 용수 당시 인도불교의 중도사상을 잘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중국에서 성립된 삼론종(三論宗)은 물론 천태종(天台宗)과 화엄종(華嚴宗)의 성립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법을 나는 곧 무()라고 하고 또한 가명(假名)이라고 하며 중도의 뜻이라고 하느니라.

衆因緣生法我說卽是無亦爲是假名이요 亦是中道義니라. [中論;大正藏 30, p.33 ]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법[衆因緣生法]’이란 일체제법이 연기하여 생함을 말합니다. 이 연기법은 그 본성이 무(), 즉 공한데 아주 아무 것도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연기하고 있으므로 가()인 것입니다. 연기를 하면서 공하고 공하면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공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非空非假] 동시에 공이고 거짓[亦空亦假]이며 이것이 곧 중도입니다. 이 공()()()이라는 삼제(三諦)는 전부 원융해 있습니다. 즉 모든 연기의 내용은 공()이지만 가()와 중()이 모두 내포되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중론의 삼제게는 중국에 와서 불교교리를 조직하는 데 있어서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교의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삼제게의 내용을 해석한 것으로 후대에 유명한 삼제원융(三諦圓融)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삼제원융이란 즉공(卽空)즉가(卽假)즉중(卽中)으로 즉()은 공()과 가()와 중()이 한 곳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공과 가와 중은 서로 포용하므로 일체의 만법 자체가 그대로 공하고, 공한 그대로 연기하며, 연기한 그대로가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면서 또한 그대로 공이고 가라고 합니다. 이것이 곧 중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삼제원융이라는 삼제게의 의미인데, 중국의 수나라 때 혜문(慧文)선사가 중론을 보다가 그 가르침을 혜사(慧思)에게 전하여, 천태종의 교리를 조직하는 근본교의가 되었습니다. 여하튼 이 삼제게 사상에 입각하여 자세히 살펴보면 천태는 물론 화엄도 여기에 들어있고 대승의 일승원교(一乘圓敎)사상이 모두 다 여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2)?대지도론?(大智度論)

 

용수논사는 대품반야경을 주석한 대지도론(大智道論)에서 제법 실상인 중도는 바로 두 견해를 멀리 떠나는 것임을 재차 강조하였습니다.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가 남음없이 멸한 제법실상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며, 항상 머물러 무너지지 않으며 번뇌를 청정하게 한다. 부처님과 존중하신 법에 머리 숙여 예배하나이다.

有無二見滅無餘諸法實相佛所說이라 常住不壞하여 淨煩惱하니 稽首佛所尊重法하나이다.[大智度論;大正藏 25, p.57 ]

 

이 세상에 무엇인가 불변하는 존재가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의 양변을 여읜 제법실상(諸法實相)은 상주불괴(常住不壞)이며 상주불멸(常住不滅)이며 상주법계(常住法界)입니다. 이것은 모든 중생의 번뇌와 업식을 청정하게 정화합니다. 부처님을 존중히 하고 법을 존중히 한다는 뜻은, 일체중생이 유무의 양변에 얽매여서 중도 정견(正見)을 갖추지 못하는데 대하여 부처님은 양변을 배제하고 오직 제법실상인 중도를 실제로 잘 설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머리 조아려 부처님과 법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대지도론에서 중점적으로 중도와 관련하여 논의되는 것으로 반야바라밀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대지도론에서 인용하는 구절은 반야경에서 역설하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답한 것으로 여러 가지로 해설하고 있으나, 결국에는 반야바라밀이 중도임을 부연하고 있습니다.

 

반야바라밀이란 일체 제법이 실로 깨뜨릴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어서 부처가 있거나 없거나 항상 머물러 있는 모든 법의 모습[法相]이며 법의 자리[法位]이다. 부처나 벽지불보살성문인천이 만든 것이 아니거니와 하물며 그 밖의 미약한 중생이리오. 또 항상함도 한 변이요 단멸함도 한 변이니, 이 양변을 여의고 중도를 행함이 반야바라밀이니라.

般若波羅蜜者是一切諸法實不可破不可壞하여 若有佛커나 若無佛커나 常住諸法相法位非佛非辟支佛 非菩薩非聲聞 非天人所作이어니 何况其餘小衆生이리오 復次常是一邊이요 斷滅是邊이니 離是二邊하여 行中道是爲般若波羅蜜이니라.[大智度論:大正藏 25, p.370 ]

 

반야바라밀이란 일체만법을 통합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깨뜨릴 수도 없고 무너뜨릴 수도 없으며 부처가 있거나 없거나간에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모습[法相]이며 법의 자리[法位], 일체제법의 실상으로서 진여법계라는 것입니다. 연기경(緣起經)에서 부처님이 진여법계를 말씀하실 때, 부처님이 출현하거나 출현하시지 않거나 이 법은 항상 상주하여 변동시킬 수 없고, 만들 수 없고, 부술 수 없다고 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여기에서는 반야바라밀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알고 보면 그 내용은 중도연기를 근본으로 삼는 진여법계며 상주법계인 것입니다.

단견과 상견의 변견(邊見)을 떠나서 중도를 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지금까지 여러가지로 설명해 왔지만 일체 모든 견해가 항상한다거나 단멸한다는 단상(斷常)의 두 견해에 포함된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과 대논사와 대보살들이 늘상 말해 오는 것입니다. 있다는 생각이 상견이며 없다는 생각이 단견으로 유와 무, 단과 상의 견해만 완전히 여의면 중도 정견(正見)으로 안 들어갈래야 안 들어갈 수 없고 이것이 곧 불법입니다. 만약 유견과 무견, 상견과 단견의 변견에 집착하게 되면 이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이란 정법(正法)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반드시 단견과 상견의 변견을 여의고 중도를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일체만법을 총괄하여 우선 근본골자를 드러내 말했고, 이 다음에는 이를 세부적으로 설하였습니다.

 

또 다시 상무상, , , 무아 등도 이와같다. 색법(色法)이 한 변이며 무색법(無色法)이 한 변이다. 가견법불가견법, 유대무대, 유위무위, 유루무루, 세간출세간 등의 모든 두 법도 이와 같느니라.

又復常無常苦樂空實我無我等亦復如是하며 色法是一邊이며 無色法是一邊이며 可見法不可見法有對無對有爲無爲有漏無漏世間出世間等諸二法亦如是니라.

 

()과 무상(無常) 내지 세간과 출세간 등의 모든 상대적인 두 법은 다 변견이며, 이 양 변견을 여읜 중도가 반야바라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 양변을 말씀하실 때 괴로움[]과 즐거움[]을 거론하셨는데, 그때 고와 낙을 여읜 것이 중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학자들 가운데는 이 때에 고와 낙을 말하고, 중도를 말한 것은 평범한 이야기이지 저 심오한 뜻을 가진 것이 아니다. 보통 일상생활에서 행동을 잘 하라는 말이지 그렇게 고와 낙의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불교는 본래 대승불교나 일승교(一乘敎)에서 말하는 저 심오한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고, 보통 고락이라 하든지 선악이라 하든지 이런 행동적인 면에서 말하는 것이지 심오한 철학적 의의를 가진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고와 낙을 실제로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누구든지 고락의 문제를 끝까지 추구하면 참으로 진여를 깨치기 전에는 그리고 유무의 양변을 완전히 여의기 전까지는, 고락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말하자면 설사 어느 정도의 법을 깨달아 삼계(三界)의 분단생사(分段生死)를 완전히 해탈하여 자재한 몸을 얻었다 해도 실제로 대열반을 증득한 부처님의 경지에서 볼 때는 변역생사(變易生死)를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분단생사에서 볼 때는 그것이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열반에서 볼 때는 변역생사라는 이것도 실제로는 괴로움[]입니다. 즉 아뢰야고(阿賴耶苦)라는 것은 보통 중생이 볼 때는 무심(無心)의 경계가 되어서 자재한 것 같지만 부처님의 대열반, 대자재에서 볼 때는 참으로 큰 고()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이 고락이라는 것을 끝까지 밀고 밀어 추구해 나가 보면 결국 대열반 진여열반을 증득하기 전에는 고락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피상적으로 고락을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 뜻이 깊은 것이 아니다라고 평범하게 해석하려는 사람은 실지 고락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 유()니 무()니 하는 이런 것도 어느 정도 심오한 철학적인 색채를 띤 말이지만, 이것은 부처님이 초전법륜 때 말씀한 것과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실제로 고와 낙을 근본적으로 해결 하려면 유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또한 유위법(有爲法)을 버리고 무위법(無爲法)을 성취하는 것이 근본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위(有爲)가 병이라면 무위(無爲)를 국집하는 것도 병입니다. 그러므로 생사를 여의어서 해탈하고 그 해탈에 집착한다면 그것도 똑같이 병이라는 뜻입니다. 집착하면 무엇이나 다 병입니다. 그래서 유위와 무위, 유루와 무루, 세간법과 출세간법, 불법과 비법을 다 잊어버린 데서 참다운 반야바라밀을 알 수 있고 중도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반야바라밀이란 이름도 원래 설 수 없지만 무어라 표현할 수 없어서 부득이 이름 붙이기를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무명(無明)이 한 변이요. 무명이 다하는 것이 한 변이며, 내지 노사가 한 변이요 늙고 죽음이 다하는 것이 한 변이며, 모든 법이 있음이 한 변이요 모든 법이 없음이 한 변이니, 이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행함이 반야바라밀이니라. 보살이 한 변이요 육바라밀이 한 변이며, 부처가 한 변이요 보리가 한 변이니, 이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행함이 반야바라밀이니라.

復次無明是一邊이요 無明盡是一邊이며 乃至老死是一邊이요 老死盡是一邊이며 諸法有是一邊이요 諸法無是一邊이니 離是二邊하여 行中道是爲般若波羅蜜이니라. 菩薩是一邊이요 六波羅蜜是一邊이며 佛是一邊이요 菩提是一邊이니 離是二邊하여 行中道是爲般若波羅蜜이니라.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행함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무엇이든간에 한쪽으로 집착하면 설사 열반을 증득하였다고 하여도 열반에 집착하면 병이므로 그것은 중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무명과 내지 노사가 한 변이고, 이들이 다함도 한 변이며, 제법이 있음도 한 변이고, 없음도 한 변입니다. 보살도 한 변이고 육바라밀도 한 변이며, 부처와 보리도 각각 한 변이니 이것들에 집착하면 마침내는 모두 변견이 되고 맙니다. 무엇이고 간에 집착하면 병이 되므로 부처고 마구니고 할 것 없이 똑같이 버리는데서 실제의 불법을 알 수 있는 것이지, 마구니를 버리고 부처를 집착하면 그 병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리니 열반이니 하는 것까지도 완전히 이탈하여 집착하지 않으며, 참으로 양변을 여의고 양변을 완전히 융화하는 쌍차쌍조한 중도를 행하는 것이 실지의 반야바라밀이고 불교의 정법인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건대 안의 육정(六情)이 한 변이요 밖의 육진(六塵)이 한 변이니, 이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행함이 반야바라밀이다. 이 반야바라밀이 한 변이며 반야바라밀 아닌 것이 한 변이니, 이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행함이 반야바라밀이니라.

略說한대 內六情是一邊이요 外六塵是一邊이니 離是二邊하여 行中道是名般若波羅蜜이며 此般若波羅蜜是一邊이고 此非般若波羅蜜是一邊이니 離是二邊하야 行中道是名般若波羅蜜이니라.

 

육정(六情)이란 눈뜻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6(六根)을 말합니다. 육진(六塵)은 이 육정에 상대되는 물질소리향기감촉법의 여섯 가지 대상입니다. 이것들은 전부 다 상대가 있는 것으로 모두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무엇이든지간에 집착하는 마음은 변견으로서 똑같이 병입니다. 무엇이든간에 완전히 변견을 버려야만 참으로 원융무애한 중도 정견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두 부문을 널리 설하면 무량한 반야바라밀이니라.

如是等二門廣說하면 無量般若波羅蜜이니라.

 

이와 같은 두 부문[二門]의 차별 상대법을 널리 설할 것 같으면 무량무변해서 그런 반야바라밀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무량무변한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무량무변한 반야바라밀이 되고, 무량무변한 양변을 집착하면 무량무변한 변견이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유()를 떠나고 무()를 떠나며 유가 아님을 떠나고 무가 아님을 떠나서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고 능히 바른 도를 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니라.

復次離有離無하며 離非有離非無하여 不墮愚痴而能行善道是般若波羅蜜이니라.

 

()나 무(), 비유(非有)나 비무(非無)에 집착하면 이는 우치한 사람으로서 이 변견을 떠나면 우치를 면하게 되고, 능히 바른 도[善道]를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른 도는 착한 행동을 잘한다는 말이 아니고 양변의 변견을 완전히 버린다는 것으로 이것이 반야바라밀이고 중도입니다. 결국 참으로 반야바라밀을 성취하려면 이 반야바라밀에 대한 집착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중도란 것도 병이 아니냐고 논박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직 중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이 늘 말씀하시기를 양변에 머물면 중도에 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중도도 병이 아니냐 하면, 이는 중도에 집착하여 양변을 완전히 여의지 못하고 중도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중도란, 양변을 떠나서 그 한가운데 말뚝이 또 하나 서 있는 것 같이 알면 이것은 외도란 말입니다.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이것이 곧 중도인데, 이 중도도 설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이름하여 중도라 하는 것이지 무슨 중도가 한가운데 말뚝 서듯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즉 집착이 없다는 것에 대한 집착도 떠난 것이 중도이고 반야바라밀이며, 반야의 실상이고 일승(一乘)이며, 원교(圓敎)이고 불법(佛法)입니다.

또한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은 부처님이 정등각(正等覺)하신 후 설법한 내용의 핵심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대지도론에서도 이 십이연기(十二緣起) 또는 십이인연(十二因緣)에 대하여 논하면서 그 근본적 의미가 중도와 연관됨을 설합니다. 말하자면 원시경전에서 설해진 부처님의 중요한 법문인 십이연기는 단(斷常)의 양변을 떠난 중도에 그 실질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사람이 다만 필경공(畢竟空)만을 관하면 많이 단멸의 변에 떨어지고, 만약 유()를 관하면 많이 상변에 떨어지니 이 양변을 떠나는 까닭에 십이인연공을 설하느니라.

若人但觀畢竟空하면 多墮斷滅邊하고 若觀有하면 多墮常邊하니 離是二邊故說十二因緣空이니라.

 

필경공(畢竟空)을 관하면 많은 사람들이 단멸의 변에 떨어진다 함은 일체법은 끝내 공()하다고 관하면 곧 공에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체법은 항상 존재한다고 유()를 관하면 상변에 빠집니다. 그래서 이 단변과 상변의 양변을 떠나는 까닭에 십이인연공(十二因緣空)을 설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이인연공이란 연기(緣起)가 곧 공()이고 공이 곧 연기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부처님이 중도를 설하실 때는 언제든지 십이인연으로서 설하셨으며, 그 십이인연은 중도 입장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용수보살도 이와 마찬가지로 중도연기(中道緣起)란 단과 상의 양변을 여읜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법이 인연 화합에서 생겨난다면 이 법은 고정적인 성품이 없으며, 만약 법이 고정적인 성품이 없다면 곧 필경공이며 적멸상이니, 이 양변을 떠나므로 거짓으로 중도라 하느니라.

何以故若法從因緣和合生이면 是法無有定性이요 若法無定性이면 卽是畢竟空寂滅相이니 離二邊故假名爲中道니라.

 

만약 일체만법이 인연의 화합에서 생겨난다면 이 법에는 고정된 성품이 없으며, 만약 법에 고정적인 성질이 있다면 화합에 의한 변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법에 고정성이 없다면 필경공인 적멸상이 되는데, 이것도 일종의 공견(空見)입니다. 그래서 상()이든지 멸()이든지 이 양변을 완전히 떠나는 까닭에 중도라 합니다. 이것도 거짓으로 중도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중도라고 정의(定義)한다는 말입니다.

용수보살이 대지도론에서 아주 도도무애한 대변설로서 일체불법을 요리하여 일대 체계를 이루어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 근본이 어느 곳에 서 있느냐 하면 반야바라밀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미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근본적으로 양변을 여읜 중도이니 이것은 용수보살이 독창한 새로운 사상이 아니고 부처님이 초전법륜 때 처음으로 다섯 비구에게 선언하신 것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하신 것이 다 중도에 입각한 것이었는데 소승불교시대에 와서 그것을 망각하고 오해하여 유견(有見)이나 무견(無見)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용수보살이 부처님의 근본입장처인 양변을 여읜 중도에 서서 실제의 불교로 회복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는 부처님이 설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절대로 성립하지 못합니다. 대승불교운동은 근본불교의 복구운동이란 말을 내가 자주 하는 것은 아직도 대승불교를 비불설(非佛說)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2. 삼론종

 

인도의 중관파를 중국에서는 삼론종이라 하는데 삼론종이란 용수보살의 중론과 역시 용수보살의 저술인 십이문론(十二門論), 그리고 용수의 제자인 제바보살의 백론(百論)을 가리킵니다. 이 삼론을 한문으로 번역한 이가 바로 구마라집(鳩摩羅什) 법사이므로 삼론종의 개조는 구마라집으로 봅니다. 이 구마라집의 문하에서는 삼론의 연구가 활발하여 승예(僧叡)승조(僧肇) 등의 뛰어난 삼론학자가 다수 배출되어 여러 저술을 남겼습니다.

삼론종의 학문적 계승은 구마라집 이후 약 100년 뒤에 활약한 승랑(僧朗)부터 그 법맥이 확실합니다. 승랑은 고구려 요동(遼東) 출신으로 중국의 북쪽지방에서 구마라집의 교학을 배워 삼론과 화엄에 뛰어났으며, 강남으로 와서 여러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특히 관료이며 현학가(玄學家)인 주옹(周顒)은 승랑에게 사사하여 삼종론(三宗論)을 지어 삼론종의 기본뜻을 밝히었고, 불심천자(佛心天子)라는 양()나라의 무제(武帝)는 승랑에게 승전(僧詮) 등 열 명의 승려를 보내 수학하게 하였습니다.

삼론종에는 예로부터 고삼론(古三論)과 신삼론(新三論)의 구별이 있으며, 승랑 이후부터를 신삼론이라고 규정합니다. 삼론학의 대성자인 길장(吉藏)은 승랑을 섭령대사(攝嶺大師) 혹은 섭산대사(攝山大師)라고 부르며 매우 존중하였으며 길장의 교학 정립에 승랑대사의 학설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구려의 승랑대사에 의해 발전된 중국의 삼론학은 열 명의 제자 중 지관사(止觀寺)의 승전(僧詮)에게 상승되고, 다시 흥황사(興皇寺) 법랑(法朗)에게 계승되어 삼론교학은 길장(吉藏)에 의해 집대성되었습니다.

길장(吉藏: 549623)스님은 그의 조부(祖父)가 안식국(安息國: parthia)에서 중국 남쪽으로 이주해 온 독실한 불교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유명한 역경승(譯經僧)인 진제삼장(眞諦三藏)에게 찾아가서 길장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는 11세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뒤 그 명성이 더욱 높아지고, ()나라로 통일된 후 가상사(嘉祥寺)에서 78년간 머물며 삼론을 연구한 인연으로 그를 가상대사(嘉祥大師)라고도 합니다. 그 뒤 천태종의 지의(智顗)스님과 교류가 있었으며, 나중에 수 양제(隋 煬帝)의 칙명으로 혜일사(慧日寺)일엄사(日嚴寺)에 거주하며 삼론과 법화경 등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중국 제일의 찬술가에 속할 만큼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현존하는 것만으로도 26110 권이나 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저서로는 삼론현의(三論玄義), 중관론소(中觀論疏), 이십문론소(十二門論疏), 백론소(百論疏), 이제의(二諦義)화엄경유의(華嚴經遊意)」․「유마경유의(維摩經遊意)」․「금강경의소(金剛經義疏)」․「법화경의소(法華經義疏)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길장스님의 저서는 대부분 반야유마법화화엄 등 대승불교 초기의 중요경전과 용수 교학인 삼론에 관한 것들이며, 특히 용수 교학에 관하여 빼어난 저술을 가장 많이 지었습니다. 길장스님은 중론십이문론백론의 삼론을 근본으로 삼아 삼론종을 집대성하여 교학발전에 공헌을 많이 하였으나, 문자에만 치중하여 실제로는 마음을 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삼론종의 종지(宗旨)에 있어서 공을 설하고 중론을 근본뜻으로 삼았지만, 중론의 깊은 뜻을 바로 보았다고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이 스님은 천태(天台)스님과 동시대인으로 자기가 천태스님을 알기 전에는 자신의 의견이 옳고 용수보살의 뜻을 근본적으로 잘 계승하여 이것을 충분히 발휘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천태스님의 저술을 보고는 자기가 실제로 불법의 정점에 어느 정도 다가가다 말았을 뿐 사실은 부처님의 근본뜻을 알지 못했으며 중론을 바로 보지 못했다고 스스로 말한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저술을 힘이 미치는 데까지 스스로 불질러버리고 자신의 저술이 잘못되어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고까지 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삼론에 대한 연구는 이 스님의 견해가 참으로 깊어서 비록 삼론종이 천태종이나 화엄종에 비하여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불교학을 논하는 데 있어서는 삼론종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삼론종에서 말하는 근본원리가 어떤지 대략적인 설명만 하겠습니다.

삼론종의 학설은 다른 종파와 마찬가지로 교판(敎判)과 교리(敎理)로 구분하여 살필 수 있습니다. 삼론종의 교판으로는 이장삼륜(二藏三輪)의 교판설이 있는데, 이장(二藏)이란 전 불교의 가르침을 성문장(聲聞藏:小乘)과 보살장(菩薩藏:大乘)으로 구분한 것입니다. 길장스님이 만년에 설한 삼륜(三輪)은 세 종류의 법륜(法輪)으로, 그 중에서 근본법륜(根本法輪)은 화엄경을, 지말법륜(枝末法輪)은 화엄에서 법화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대소승경을, 섭말귀본법륜(攝末歸本法輪)은 법화경을 각각 말합니다. 그리고 삼론종에서 받드는 삼론과 반야경이 삼륜 중 지말법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삼론종의 교리는 기본적으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파사(破邪)란 외도와 소승 등 범부의 망정(妄情)을 깨뜨려 언어가 미치지 못하고 생각이 이르지 못하는 도[無名道]를 체달함이며, 현정(顯正)이란 무애한 바른 관찰인 중도실상을 득오(得悟)함입니다. 이는 바로 망정을 깨뜨려 무소득의 진공을 얻는 것이니 파사의 구경이 곧 현정입니다. 그러므로 삼론종에서는 파사 외에 따로 현정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고 파사가 그대로 현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파사현정의 기치 아래 삼론종에서 적극 주장하는 교리로는 이제론(二諦論)과 팔불중도(八不中道)가 거론됩니다. 이제는 법상종 등에서 설하는 이경(理境) 이제가 아니라 언교(言敎) 이제입니다. 이경이제(理境二諦)는 법상종만이 아니라 성실종(成實宗) 등에서도 주장한 것인데 세속제와 제일의제(第一議諦)의 이제를 진리의 형식으로 봅니다. 즉 세간의 도리를 설하는 세속제는 중생에게 진실이고, 출세간의 도리를 설하는 제일의제는 성현에게 진실이므로, 범부와 성인에 따라 진리 자체에 두 가지가 있음을 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론종의 언교이제(言敎二諦)는 그와는 달리 이제를 교화의 수단으로 봅니다. 즉 진리와 도리로서의 이제가 아니고, 범부와 성인을 교화하기 위한 설법의 형식 또는 수단으로 이제를 설합니다. 이러한 이제론에 바탕하여 보다 발전적인 구조를 지닌 것이 삼중이제(三重二諦)와 사중이제(四重二諦)입니다. 그 근본뜻은 당시에 성행하던 비담종(毘曇宗)과 성실종(成實宗), 섭론종(攝論宗) 등의 이제설을 차례로 물리치고 언어를 잊고 생각을 끊은 진실한 경계를 주장하고자 한 것입니다.

삼론종에서는 이 밖에 중론의 처음에 나오는 불생불멸(不生不滅)부단불상(不斷不常)불일불이(不一不異)불래불거(不來不去)의 팔불(八不) 역시 중도를 밝힌 것이라 하여 팔불중도(八不中道)라 말합니다. 이것은 중생들이 제법에 대하여 미혹된 견해를 일으키는 생멸(生滅)단상(斷常)일이(一異)거래(去來)의 여덟 가지 미혹을 하나하나 부정하여 중생들의 미혹을 씻어 없애므로 이 팔불에 의해 중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팔불에 기초하여 중도의 지극함을 논하는 이론으로 세 가지 중도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제와 진제 그리고 제삼제인 이제합명(二諦合明)을 건립하여, 각각 세제중도(世諦中道), 진제중도(眞諦中道), 그리고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의 세 가지를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중도설의 기본형을 제시하면 세제중도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말하고, 진제중도는 비불생비불멸(非不生非不滅)을 말하며, 이제합명중도는 비생멸비불생멸(非生滅非不生滅)을 말합니다. 중도를 이와같이 세 종류로 구성하게 된 것은 불이중도(不二中道)를 주장하고자 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의 교리들을 정리하면 이제에 기초하여 삼중사중으로 전개된 이제설(二諦說)은 파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팔불에 의해 변론된 세 가지 중도설[三重中道說]은 현정의 활약을 한 것이라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가지 삼론교학의 성립은 고구려 승랑대사의 학설에 연원한 바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임종시에는 태어나서 죽으나 본래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뜻을 말한 사불포론(死不怖論)을 남기고 75세로 결가부좌하여 천화하였습니다. 이처럼 대사의 초연한 경지에서 열반을 맞이하는 모습이 드러나므로 그가 단지 문자에 집착한 교학승(敎學僧)만은 아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 후 현장(玄奘)스님이 전한 법상종(法相宗)이 홍기하면서 삼론종은 쇠퇴하였지만, 길장스님의 삼론교학은 고구려와 일본에 전파되었습니다.

 

1)중관론의 정의

 

길장스님은 중론(中論)또는 중관론(中觀論)이라는 책 제목으로써 중도에 대해 해석을 했습니다.

이 중관론의 명제에 대한 해석이 길장스님의 저서 여러 곳에 있는데, 여기서는 중관론소(中觀論疏)와 삼론현의(三論玄義)에 있는 해석을 일부 발췌하였으며 이들의 내용은 서로 비슷합니다.

 

()은 소전(所詮)의 이치요, ()은 능전(能詮)의 가르침이니, 이것은 이치에 있어 포섭하지 않음이 없고 가르침에 있어 거두지 않음이 없느니라. ()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능히 행하는 도(), ()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능히 관하는 마음을 말한다. 모든 부처님의 관()은 마음에 분별한 바를 입으로 잘 설명하여 그것을 경()이라 칭하고, 보살의 관()은 마음에 분별한 바를 입으로 잘 설명하여 그것을 논()이라 이름 하느니라.

是所詮之理是能詮之敎斯無理不攝이요 無敎不收니라.諸佛菩薩所行之道謂諸佛菩薩能觀之心이니라. 諸佛觀辨於心宣於口하여 稱之爲經이요 菩薩觀辨於心宣於口하여 名之爲論이니라.[中論疏;大正藏 42, p.2 ]

 

()은 소전(所詮)의 이(), 즉 불교의 근본원리를 표방한 것이고, ()은 능전(能詮)의 교(), 즉 그 근본원리를 부연 설명하는 것입니다. 중론이라 하는 이 논전(論典)에는 불교교리의 무슨 이치든지 그 기본적 사상이 여기에 섭수되지 아니 한 것이 없습니다. 불교계에는 여러 종파가 많이 분립되어 있지만, 전 종파의 교리가 다 이 중론을 기본으로 하여 여기에서 파생된 것으로 중()을 제외하고는 불교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행하는 도요, 이 중에 입각한 관()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능히 관하는 마음입니다.

일체의 부처님과 보살이 이 중관(中觀)에서 마음을 깨쳤는데, 모든 부처님이 마음을 깨쳐 중관의 도리를 성취하여 설해 놓은 것을 경()이라 하고, 보살이 깨쳐 설해 놓은 것은 논()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중론이라 하는 것은 용수 보살이 지은 것이기 때문에 경이라 하지 않고 논이라 하는 것입니다. 삼론종에서는 이 중()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근본원리로서, 불교에서 말하는 이론은 무슨 이론이든지 다 이 중() 위에 서서 그 이론이 전개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은 삼세 시방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행하는 도를 말한다. 이 도로 말미암아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정관(正觀)을 발생하느니라.

謂三世十方諸佛菩薩 所行之道由此道故發生諸佛菩薩正觀하니라.[三論玄義;大正藏 45, p.13 ]

 

삼세 제불과 보살이 실천하는 도()가 호호망망해서 무궁무진하지만, 이들 모두는 그 근본이 중()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이 근본 골자인 중을 떠나서는 삼세 시방의 제불보살의 불법이 있을 수 없고, 이 중도를 의지하여야만 정관(正觀)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중도를 깨치고 중도에 입각해서 정관을 가지고 설법을 하든 무엇을 하든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곧 변견(邊見)에 떨어지고 맙니다.

 

2)이제설(二諦說)

 

이 부분은 길장스님이 중론 초품인 관인연품(觀因緣品)을 해석하면서 그 특성을 여러 가지로 논의한 것 중의 한 가지인 이제(二諦)에 대한 것인데, 이것이 곧 중론의 근본 사상이라는 것이 그 주요 논지입니다.

 

이 중론은 비록 법으로서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말로서 다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그 요점이 돌아갈 바를 총괄하면 이제를 회통함이니라.

此論雖無法不窮하며 無言不盡이나 統其要歸하면 會通二諦니라.[中論疏;大正藏 42, p.6 ]

 

중론에는 불교의 무슨 법이든지 그 근본이 전반적으로 성립되어 있으며, 부처님 말씀이고 보살님 말씀이고 간에 무슨 말씀이든지 다하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이 중론을 보면 미진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 사상의 근본이 어디에 서 있는가 하면 이제(二諦)를 회통하는 데 있습니다. 이제란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말합니다. 세제는 세간 사람들이 진리에 전도되어 세상의 모든 것을 항존하는 유()라고 집착하는 것이고, 제일의제는 부처님과 조사들이 전도를 떠나 일체법이 공()()하다고 자각한 옳바른 진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와같이 상대적인 모든 법을 중론에서는 회통하여 융화합니다. , 일반적으로 볼 때에는 유와 무가 상대적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에서 볼 때에는 유와 무가 서로 원융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중론의 골자는 유무(有無)든지 진속(眞俗)이든지 모든 이제를 회통하여 원융무애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3)3종중도(三種中道)

 

중론에서 중도를 나타내는 논리로 이제(二諦)와 더불어 자주 거론되는 것이 또한 팔불중도(八不中道)입니다. 이 팔불중도설과 관련하여 먼저 길장스님이 해석한 팔불의 대의(大意)를 해명하고, 그 다음 이에 의거하여 삼론종에서 주장하는 세제중도(世諦中道)진제중도(眞諦中道)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의 삼종중도(三種中道)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삼종중도는 삼론종에서 모든 중도설을 총괄하여 이 세 종류로 분류한 것인데, 이 삼종중도가 원래는 팔불설에 의거하여 삼론종에서 성립된 것입니다.

 

여덟 가지 부정은 모든 부처님의 중심이요, 뭇 성인들의 행하는 곳이니라.

八不者諸佛之中心이요 衆聖之行處也니라.[大乘玄論;大正藏 45, p.25 ]

 

팔불(八不)는 중론의 초품(初品)에 등장하는 게송으로, 곧 불생불멸(不生不滅)불상부단(不常不斷)불일불이(不一不異)불래불거(不來不去)를 말합니다. 이것은 생멸(生滅), 단상(斷常) 등 어느 한 쪽에 집착하지 않음을 나타내어 불교의 중도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팔불은 곧 중도이며 중도는 곧 팔불입니다.

 

중도는 비록 또한 무궁하나, 간략히 세 가지를 밝히면 곧 일체를 망라하느니라. 그러므로 이 게송에 의하여 세 가지 중도를 변론하여 총체적으로 부처님의 일체 가르침을 펴느니라.

中道踓復無窮이나 略明三種則該羅一切니라 故就此偈하여 辨於三中하여 總伸佛一切敎하니라. [中論疏;大正藏 42, p.11 ]

 

중도라는 것을 말로 표현하려면 무궁무진하여 다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간략하게 밝히자면 속제중도(俗諦中道)진제중도(眞諦中道)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의 세 가지에 일체 중도가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속제중도는 흔히 불생불멸(不生不滅)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세제(世諦)에 있어서의 중도를 말하며, 진제중도는 비불생비불멸(非不生非不滅)로 표시되는데, 이것은 진제(眞諦)에서 말하는 중도입니다. 이제합명중도는 비생멸비불생멸(非生滅非不生滅)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위의 속제중도와 진제중도를 융합하여 중도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세 가지 중도는 또한 중론의 팔불게에 기초하여 삼론종의 학승들에 의해 성립된 이론이므로 일체 불교의 가르침이 기본적으로는 이 팔불게를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론종은 팔불중도에 근거하여 일체의 중도사상을 포괄하는 삼종중도(三種中道)를 성립한 것이니, 이것은 중도의 삼론학적 해석인 것입니다.

 

여덟 가지 부정은 바로 중도이고 불성이니라.

八不卽是中道佛性也니라. [中論疏;大正藏, p.9 ]

 

팔불(八不)은 앞에서 거론한 바와같이 단순히 중도를 표방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중도불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팔불 사상은 중도를 의미하며 이것이 또한 불성(佛性)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중도 사상은 중도에만 머물지 않고 불교인의 이상적 목표이자 인류의 지극한 선()의 상징인 불성까지 갖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삼론종에서 불교를 논의할 때, ()이라는 것을 떠나서는 불교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삼론종에서는 일체 불교가 중()에서 파생됐고 중에 총섭(總攝)되어 있으므로 불교를 알려면 중을 알아야지 중()을 모르고서는 불교를 바로 알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삼론종에 국한될 뿐만 아니라 모든 불교의 각 종파가 주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중은 어느 종파를 막론하고 불교교리의 근본 골자가 안될래야 안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론종에서 중이라고 말하기는 했어도 은연중 공견(空見)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론종은 용수보살의 중론의 뜻을 제대로 다 알지는 못했다고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즉 화엄종이나 천태종과 같이 원융하고 무애한 사상이 결핍되어 있다고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4장 유식사상

 

유식사상

 

유식파(唯識派: vijñānavādin)는 중관파와 더불어 인도 대승불교의 한 학파입니다. 중관파가 공사상을 적극적으로 표명한데 비하여 유식파의 기본사상은 일체 제법이 오직 식[唯識]이라는 것입니다. 이 유식사상의 원류는 부처님에게 있으나 이 사상을 교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은 미륵(彌勒: Maitreya)이며, 그 뒤를 이어 무착(無着: Asānga)과 세친(世親: Vasubandhu)이 대성하였습니다.

미륵은 유식파의 개조이지만 오래 전부터 미래의 부처님으로서 도솔천(兜率天)에 머무는 미륵보살과 동일하게 보았습니다. 그 때문에 유식학을 배우던 무착이 선정(禪定) 중에 보았다는 미륵보살과 실제 유식파의 미륵논사(彌勒論師)를 혼동하여 같이 취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미륵논사가 지었다는 여러 저술들을 살펴보면, 미륵 이전에 유가행파(瑜伽行派)에 관한 여러 저술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며, 그 저자를 전설에 따라서 미륵보살로 간주한 것 같습니다. 유식학의 주요 논서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중변분별론송(中邊分別論頌),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頌), 현관장엄론송(現觀莊嚴論頌)등과 금강반야경론송(金剛般若經論頌)등이 그의 저작으로 인정됩니다. 그의 저작에 대하여 중국과 티벳에서는 각각 다섯 가지 논서를 거론하는데, 그 양자 가운데 일치하는 것은 대승장엄경론송중변분별론송입니다.

무착(無著)논사는 북인도의 간다라 지방에서 출생하여 처음에는 소승불교로 출가하였으나 나중에 대승불교로 전향하고 미륵보살의 가르침을 받아 그 교설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무착은 밤에는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보살로부터 유가론 등의 가르침을 받고 낮에는 대중들에게 그 교리를 강설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착이 선정에 들어가서 실제로 겪은 종교적 체험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그때까지 친숙하지 않았던 유식설을 인도에 널리 선포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설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의 저서로는 섭대승론(攝大乘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摩集論)등과 용수보살의 중론(中論)을 부분적으로 주석한 순중론(順中論)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저서는 해심밀경(解深密經)대승아비달마경(大乘阿毘達摩經)에 기초하여 유식설을 조직한 섭대승론입니다.

세친(世親)논사는 무착논사의 친동생으로 처음에는 형인 무착논사와 같이 소승 유부(有部)로 출가하였으나, 나중에 무착논사의 권유에 따라 그 동안 대승불교를 비방한 잘못을 뉘우치고 대승으로 전향하여 유식학을 크게 이루었습니다. 그가 대승으로 전향한 시기는 그의 말년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예로부터 천부(千部)논사라고 불릴 만큼 많은 저서를 지었습니다. 소승불교를 연구하여 구사론(俱舍論)을 남겼고, 대승불교를 탐구하여 십지경론(十地經論), 정토론(淨土論), 법화경론(法華經論), 불성론(佛性論)등 여러 대승경전의 주석서들을 지었는데, 이들이 모두 그가 직접 지은 것인지는 아직 불투명합니다. 확실시되는 그의 저서는 소승에서 대승으로 전향한 과도기적 저술인 대승성업론(大乘成業論), 대승오온론(大乘五蘊論)과 유식설의 요점을 논의한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입니다. 그 중에서 유식삼십송은 게송만 남기고 그 주석을 하지 않아 너무 간결하였으므로, 뒤에 많은 논사들이 이 논을 주석하여 소위 10대 논사가 배출되어 유식학이 번성하게 된 저작입니다.

이상 세 논사의 생존 연대는 정확하게 판명되지 않지만 그 동안 몇 가지 설을 거쳐서 미륵논사는 270350, 무착논사는 300380, 세친논사는 32040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친논사 이후에는 그의 유식삼십송을 주석한 덕혜(德慧)안혜(安慧)난다(難陀)호법(護法) 등의 10대 논사와 기타의 유식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후세에 영향을 끼친 점에서 보면 안혜(510570)와 호법(530561) 계통이 중시되며, 이 두 계통의 사상에 근거하여 유식학은 안혜논사를 대표로 하는 무상유식(無相唯識)과 호법논사를 대표로 하는 유상유식(有相唯識)의 두 파를 형성하게 됩니다.

중국에서의 유식파(唯識派)를 법상종이라고 합니다. 법상종(法相宗)은 삼장법사 현장(三藏法師 玄奘: 602664)이 인도에서 유식학을 수학한 후, 전수하여 성립된 종파입니다. 현장은 낙주 구씨현(洛州 丘氏縣) 출신으로 13세에 출가하여 중국의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열반(涅槃)섭론(攝論)비담(毘曇)성실(成實) 등을 힘써 배우고 특히 무착논사(無着論師)의 사상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무착논사의 저서가 그때까지 일부밖에 번역되지 않았고, 또 여러 경론의 번역이 일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에 천축(天竺)으로 법을 구하러 갈 뜻을 품고 당나라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그의 나이 28세에 몰래 서천을 향하여 장안을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서역 및 인도의 여러 나라를 유력하기 17, 서천의 학문을 배우고 특히 당시 학문의 요람지었던 나란다사(那爛陀寺)에서 5년을 지내며 호법논사(護法論師)의 제자인 계현(戒賢)에게서 유가론(瑜伽論)비바사론(毘波沙論)정리론(正理論) 등 대소승의 교의를 배웠습니다. 그 사이 스승의 명으로 여러 경론을 강설하였으며, 또한 중관과 유가의 두 종파를 융화한 회종론(會宗論)과 외도와 소승을 파척한 파악견론(破惡見論)을 지었다고 합니다. 중국으로 귀국한 뒤에는 10여 년 동안 국가의 도움을 받아 정열적인 역경사업을 이루어 수많은 대소승의 경론을 번역하였습니다.

현장에게는 3천명의 문도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신라인인 신방()을 비롯하여 가상(嘉尙)보광(普光)규기(窺基) 등 네 명의 상족(上足)이 있었고, 그의 전승은 규기에 전해졌습니다. 규기는 자은사(慈恩寺)에 살았던 까닭에 보통 자은대사(慈恩大師)로 불리우며, 그의 선조는 중앙아시아 출신입니다. 처음에 현장은 네 명의 상족인 신방가상보광규기와 함께 유식삼십론(唯識三十論)을 주석한 10대논사의 주석서를 모두 번역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규기가 이의를 제기하여, 시대가 변하여 사람들의 능력이 열등하므로 여러 주석서를 번역하면 혼란만 가중되므로 차라리 여러 주석을 취사선택하여 종합적으로 번역함이 옳을 것이라고 간언하자, 현장이 이에 동조하여 규기와 함께 호법(護法)의 주석을 위주로 하고 다른 아홉 가지 주석을 부가하여 번역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것이 성유식론(成唯識論)인데 규기는 이 성유식론(成唯識論)을 주석하여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성유식론장중추요(成唯識論掌中樞要)를 지었고, 그 외에도 변중변논술기(辨中邊論述記), 대승법원의림장(大乘法苑義林章)등을 지어 법상종 교학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법상종의 전승은 규기의 뒤를 이어 성유식론요의등(成唯識論了義燈)등을 지은 혜소(慧沼: 650714), 성유식론연비(成唯識論演秘)등을 지은 지주(智周: 668723)로 이어졌지만, 지주의 사후에 법상종은 급격히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법상교학의 궁극적 적용의 한계라든지 화엄종의 원융무애한 사상에 타격을 받은 점 등이 지적됩니다.

법상종의 정통 계보에는 속하지 않지만, 법상종의 뛰어난 학승으로 신라의 원측(圓測: 613696)스님이 있습니다. 원측스님은 신라의 왕족 출신으로 3세에 출가하고 15세에 득도하여 당나라에 유학가서, 섭론종(攝論宗)에서 수학하고 또 현장이 인도에서 귀국하자 그에게 사사하였습니다. 그의 저서로는 성유식론소(成唯識論疏),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등이 있으며, 제자에는 도증(道證)과 승장(勝莊)자선(慈善) 등이 있었습니다. 서명사(西明寺)에 머무르던 원측스님의 학설은 자은 규기의 학설과 다소 상이하였으며, 규기를 비롯한 중국 법상종의 문인들은 그의 학설을 이단이라고 공격하고 비방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원측스님의 학설이 중국에서 일찍 단절되고 말았으나, 그의 저서 중 해심밀경소10권은 서장어(西藏語)로 번역되어 티에도 영향을 끼칠 만큼 그의 학설은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법상종의 교학은 기본적으로 인도 유식파의 학설을 답습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호법논사의 사상을 주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법상종의 교학 가운데 무엇보다도 중시되는 것은 아뢰야식을 비롯한 8(八識)에 대한 교의와 사분설(四分說)과 삼류경설(三類境說)입니다.

8아뢰야식의 아뢰야(ālaya)는 저장[]이라는 뜻으로, 이 식이 일체의 종자를 거두어 저장하여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부릅니다. 그러나 이 식을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보다 적절한 이유는 범부들이 무시 이래로 이 제8식을 자신의 실아(實我)라고 애착하는데 있습니다. 이 제8식을 또한 이숙(異熟: vipāka)이라고도 하니, 이것은 발생하는 원인의 결과에 따른 제8식을 지칭합니다. 이 식은 비록 과거의 선무기의 세 가지 성질의 종자로부터 발현한 결과로서의 과보이지만, 그 자신의 성질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이므로 이숙이라고 합니다. 또 이 식을 아다나(阿陀那: ādāna)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집지(執持)라는 의미입니다. 이 식이 범부로부터 부처님의 과보에 이르기까지 일체 색()()의 종자와 오근을 집지하여 잃지 않고 상속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세 명칭을 지닌 제8식에서, 아뢰야라는 이름은 3승의 무학위(無學位)인 아라한(阿羅漢)8지 이상의 보살위(菩薩位)에서 소멸하는데, 아라한 등이 되면 제7식에 의한 아집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또 불과(佛果)에 이르면 이 식이 순수한 무루(無漏)가 되어 업보에 따른 과보로서의 무기가 아니므로 이숙이라는 이름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5근과 색심의 주체인 면에서의 아다나는 불과에 이르러도 계속 존속합니다.

7말나식의 말나(末那: manas)는 의()라는 뜻이며, 사량함을 본성으로 합니다. 이 말나식과 유사한 것에 제6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6의식은 제7식인 의()에 의지하여 파생한 것이므로 그 두 가지를 구별하기 위하여 전자를 의식(意識), 후자를 의()라 합니다. 이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의지하여 아뢰야식 중의 종자가 전변하여 생긴 것인데, 이 제7말나식이 항상 아뢰야식을 보고 자신의 주체적인 자아라고 집착합니다. 그러한 성향이 제6의식보다 강하여 아견(我見)아애(我愛)아치(我癡)아만(我慢) 등의 번뇌에 덮혀 있으며, 그 생각하고 헤아림이 간단이 없이 항상합니다. 따라서 말나식이 일으키는 자아의식은 오염된 것이어서 성도(聖道)를 얻는데 장애가 되지만, 그렇다고 불선(不善)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 무기입니다.

6식은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 전5(前五識)과 제6의식(第六意識)을 말합니다. 5식은 5(五惑)과 같이 감각적인 인식을 말하며, 6의식은 전5식과 동시에 일어나거나 혹은 의식 홀로 일어납니다. 의식은 아뢰야식과 말나식을 대상으로 하여 자아의 아집을 일으키며, 이 의식에서 생기는 심소는 육위(六位)51가지 심소 모두입니다. 그 성질도 선무기의 3성을 띠게 됩니다.

유식학에 따르면 인간 고뇌의 근원은 허망분별(虛妄分別)에 의한 것으로, 안으로는 자아[]를 집착하고 밖으로는 법()을 집착합니다. 그리고 이 아집법집의 집착이 표면적으로 강열한 것은 의식이지만, 그 이면에는 보다 근원적인 말나식의 집착이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아집과 법집의 두 가지 집착을 단절하여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진리를 실증하면 바로 진여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유루(有漏)의 번뇌심에 덮여있는 아뢰야식 등의 네 식[四識]이 전환하여 네 가지 보리, 즉 네 가지 지혜를 이루게 됩니다. 곧 아뢰야식은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보는 지혜인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되고, 말나식은 나와 남을 평등하게 보는 평등성지(平等性智), 의식은 제법의 모습을 잘 분별하는 묘관찰지(妙觀察智), 그리고 전5식은 본원력에 의하여 견도위(見道位) 이전의 보살과 성문범부를 이롭게 하기 위해 시방국토에서 갖가지 일을 성취하는 방편지인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됩니다. 예로부터 이 사분설과 삼류경설은 법상 유식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할 만큼 비중있는 교의로 취급되었습니다. 사분설이란 심()심소(心所)의 작용을 상분(相分)견분(見分)자증분(自證分)증자증분(證自證分)의 네 부분으로 구분한 것입니다. 상분(相分)은 심심소 자체가 생길 때 나타나는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의 경계를 말하며, 견분(見分)은 심심소 자체가 생길 때 소연의 경계인 상분을 식별하는 인식작용으로, 단지 보는 것만이 아니라 경계를 잘 비추어 보는[見照] 작용을 뜻합니다. 자증분(自證分)은 자()는 견분이고 증()은 증지의 뜻으로 자체상 견분의 작용을 인지하는 것이고, 증자증분(證自證分)의 증은 증지이고 자증은 자증분이므로 자증분의 작용을 거듭 인지하는 것입니다. 이 사분 가운데 상분은 객관적이나 바깥 경계의 모습이므로 소연(所緣)이며, 나머지는 모두 주관적인 심식의 작용이므로 능연(能緣)입니다. 즉 견분은 오직 바깥 경계의 상분을 반연하고 자증분을 반연합니다. 또 증자증분을 다시 자증분이 되고 소연이 됩니다.

이 사분설은 인도 유식논사들이 주장한 것이지만 이미 그들 사이에도 여러 가지 이견이 있었습니다. 안혜(安慧)는 자증분은 의타(依他)의 체로 보고 견분과 상분은 변계(遍計)의 체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자증분만의 일분설(一分說)을 주장하고, 난타(難陀)와 친승(親勝) 등은 의타(依他)의 상분과 견분의 이분설(二分說)을 내세워 견분을 실()로 보고 상분을 가()로 보았습니다. 진나(陳那)와 호월(護月) 등은 식체(識體)인 자증분에서 변출된 능연과 소연의 작용인 견분과 상분 외에 이를 증지하는 작용이고 자증분을 더하여 삼분설(三分說)을 주장하고, 호법(護法)은 진나가 세운 삼분에 다시 자증분을 증지하는 작용이 있는 증자증분을 더하여 사분설(四分說)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견분은 상분을, 자증분은 견분을, 증자증분은 자증분을, 자증분은 다시 증자증분을 반연하여 인식에 관한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고 보았습니다. 이와같이 사분설은 인식 작용을 상세히 분류하여 사분으로 하였으나, 각자의 견지에 따라 사분 내지 일분이 모두 타당성을 얻는다고 하겠습니다.

사분설이 심식 작용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마음과 경계가 필경 유식을 벗어나지 않음을 주장한 것에 대하여, 삼류경설(三類境說)은 사분설(四分說) 가운데 상분을 성경(性境)독영경(獨影境)대질경(帶質境)의 세 종류로 분류하여, 경계는 어느 것도 심식을 떠나지 않아 유심(唯心)이고 유식(唯識)임을 역설한 것입니다. 성경은 실제 종자에서 생겨난 참된 작용이 있어서, 능연의 마음이 소연의 법을 오류없이 인식할 때의 상분입니다. 예를 들면 전5식과 제6의식이 함께 바깥 경계를 취할 경우입니다. 독영경(獨影境)은 능연인 견분의 분별에 의하여 나타난 영상으로 환각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실제 종자가 아닌 순전히 견분의 분별력에 의한 것이므로 참된 작용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제6의식이 거북이 털토끼뿔 등 실체가 없는 법을 반연할 경우입니다. 대질경(帶質境)은 상분이 본질을 지니면서 능연의 마음이 그 본질을 그대로 반연하지 못하고 견분의 분별력에 의하여 본질과 계합되지 않는 비슷한 상분을 반연하는 것입니다. 즉 상분이 능연인 식의 분별력에 의하여 변현된 것이지만 본질의 힘도 가세되어 있으므로 성경과 독영경의 중간에 위치하는 착각의 대상이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제6의식이 길에서 삼으로 만든 끈을 보고 뱀이라고 오인하는 경우입니다.

삼류경설은 본래 인도에서 논의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현장스님에 의해 비로소 주창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선구적 사상은 이미 인도의 논사들에게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식학의 교의에 따르면 식체(識體)가 변하여 견분과 상분을 현현하는데, 그 견분과 상분(相分)이 같은 종자에서 생기는가, 다른 종자에서 생기는가. 이에 대하여 인도 논사들간에 그 둘이 같은 종자에서 생긴다는 상견동종설(相見同種說)과 다른 종자에서 생긴다는 상견별종설(相見別種說), 그리고 상분견분이 어떤 때는 같은 종자에서 생기고 어떤 때는 다른 종자에서 생긴다는 상견혹동혹이설(相見或同或異說)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세 번째의 학설을 옳은 것으로 간주하는데, 그 주창자는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호법논사일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그리하여 다른 종자에서 생기는 상분은 성경이고, 같은 종자에서 생기는 상분은 독영경이며, 같은 종자와 다른 종자에서 생기는 상분은 대질경입니다. 그러므로 인도 논사들에게 삼류경 각각에 대한 명칭은 없었어도 그 사상에 깊이 잠겨있었던 것은 명확히 인식됩니다.

이 밖에 법상교학의 독자적인 특색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성각별설(五姓各別說)이 있습니다. 오성각별이란 일체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종성(種姓)에 다섯 가지가 있는데, 결코 고쳐지지 않아 각각 완연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성은 보살종성(菩薩種姓)독각종성(獨覺種姓)성문종성(聲聞種姓)부정종성(不定種姓)무성유정종성(無性有情種姓)입니다.

보살종성은 생법(生法)의 이공(二空)을 조견하고 사지(四智)를 얻어 불과를 증득한 무루지(無漏智)의 종자를 지녀서 결정코 보살승에 의해 불과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독각종성은 독각의 과보를 증득할 생공(生空)의 무루지 종자를 구비하고, 성문종성은 성문의 과보를 증득할 생공(生空)의 무루지의 종자를 구비하여 회신멸지(灰身滅智)의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드는 것입니다. 부정종성은 보살독각성문 각각의 종자를 구비하여 성문독각의 과보를 거쳐 끝내는 보살승으로 전향하여 불과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무성유정(無性有情)은 이승인 성문연각이나 불과를 증득할 수 있는 무루지 종자를 결여하여 영원히 불과나 이승의 과보를 증득하지 못하고 생사에 유전하며, 겨우 5계나 10선의 선인으로 인하여 인간이나 천상의 과보를 얻음을 종국으로 삼는 것입니다.

중생의 근기에 따른 분류는 여러 경론에서 네 종류 혹은 다섯 종류로 설하였는데, 법상종은 이에 근거하여 오성각별을 주장하였습니다. 법상종 이외의 다른 종파에서는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 하여 아무리 극악무도한 자라도 마침내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에 비하면, 이 종파의 오성각별은 대단히 파격적이라 할 만합니다. 이같이 법상종에서 오성각별을 내세우게 된 까닭은 교학적으로 얼마간 해명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현실적인 문제와 차별을 간과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여집니다.

 

1. 심식설(心識說)의 근원

 

유식학(唯識學)을 구성하는 주요 사항 가운데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있습니다. 실로 유식학은 이 아뢰야식을 구심점으로 하여 집약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이 아뢰야라는 말이 불교에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에 대해 일부에서는 대승불교에 들어와서 창안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사용된 말입니다. 곧 부처님이 법을 설하던 근본불교시대에 이미 이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 의미가 대승의 유식파에서 사용한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지는 문제가 없지 않으나, 어쨌든 아뢰야라는 말이 부처님 후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을 윤회하는 주체가 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부파불교(部派佛敎)와 유식파에서 특히 강한데, 이와 같은 모습도 역시 근본불교의 경전에 간결하게나마 설해져 있습니다. 그 밖에도 유식학에서는 인식의 주체인 심()()()을 각각 제8, 7, 6식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그 심의식이라는 말은 이미 부파불교에서 논의되었고, 그보다 앞서 근본불교에서도 설해진 것입니다. 근본불교의 경전인 아함경(阿含經)에 이러한 말이 나오지만, 여기서는 유식파가 말하듯이, 그 심의식이 세 가지로 구별되지 않고 동일한 의미를 여러 가지로 부여하여 설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와같이 원시경전에는 아뢰야식 및 심의식 등 후대의 대승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개념들이 원초적인 모습으로 설해져 있습니다. 이하에서 이러한 몇 가지 주요 사항에 대하여 원시경전의 설명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때에 세존은 조용히 앉아 묵묵한 채로 사념하였다. 내가 증득한 이 법은 매우 깊어서 보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적정하고 미묘하여 생각의 경계를 초월하고 지극히 미세하여 지혜로운 사람만이 능히 알 바이다. 그런데 이 중생은 아뢰야를 즐거워하고 아뢰야를 기뻐하고 아뢰야를 좋아한다. 그러나 아뢰야를 즐거워하고 아뢰야를 기뻐하고 아뢰야를 좋아하는 중생으로서는 이 연의성(緣依性), 연기(緣起)인 도리는 보기 어려우며, 또 일체 제행(諸行)의 고요히 그침, 일체 의거(依據)의 내버림, 갈애(渴愛)의 모든 소멸, 떠남()소멸()열반(涅槃)의 도리도 심히 보기 어렵다. 만약 내가 법을 설하여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피로하고 곤궁할 뿐이다. [律藏三 南傳大藏經 第三卷, p.8 相應部經典 一卷, p.234]

 

부처님께서 우루빈나 마을 니련선나(尼連禪那) 강변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7일간 해탈의 기쁨을 누리시면서 초저녁에 연기(緣起)를 순역(順逆)으로 살펴보시고 한밤중과 새벽에도 연기를 순역(順逆)으로 살펴보셨습니다. 그리고 칠일이 네 번 지난 후 자신이 깨친 법을 일체 중생에게 전하려고 생각하니 위에 인용한 말씀과 같이 중생들이 아뢰야에 장애되어 이 연기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아뢰야는 범어로 ālaya로서 a없다, 아니다의 부정사(否定詞)이고, laya없어진다는 뜻이므로 아뢰야는 영원히 존재하며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역으로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인 무몰(無沒)’이라고도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아뢰야가 ālaya의 음을 표기한 경우에는 저장한다는 뜻인 장()이라고 번역하는데, 오늘날은 대개 이 후자를 사용합니다. 일시적으로 현재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 전생에도 있었고 미래 내생에도 있을 이 아뢰야는,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으로서 중생의 근본 생명입니다. 여기에 의지해서 중생세계가 벌어지는데, 이것을 근본무명이라고도 합니다. 이 근본무명이 아주 뿌리 뽑아져야만 연기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지로 연기법을 알아서 부처님 같은 정각을 이룰려면 반드시 근본 장애물인 이 아뢰야를 뿌리 뽑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 원시경전에 나오는 아뢰야라는 말은, 후대 대승불교의 유식파에서 주장하는 아뢰야식과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이 경전의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중생들이 이에 집착하여 단절하기 어렵고, 진리를 장애하여 무명의 원인을 이루는 점에서, 원초적인 형태로 아뢰야식의 연원을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어느 때 세존은 사위성에 계셨다.

비구여, 다섯가지의 종자가 있느니라. 무엇을 다섯이라 하는가. 뿌리 종자, 줄기 종자, 가지 종자, 마디 종자, 종자(種子)의 종자이니라. 비구여, 이 다섯 가지 종자로서 썩지 않고 부패하지 않고 바람과 열에 침해받지 않고 견고한 핵()이 있어 잘 저장되어져도 만약 땅이 없고 물이 없다면, 비구여, 이 다섯 가지 종자는 생장하고 증광하겠느냐.”

대덕이시여, 못합니다.”

비구여, 이 다섯 가지의 종자로서 썩고 부패하고 바람과 열에 침해받아 견고한 핵이 없고 잘 저장되지 않아도 만약 땅이 있고 물이 있다면, 비구여, 이 다섯 가지 종자는 생장하고 증광하겠느냐.”

대덕이시여, 못합니다.”

비구여, 이 다섯 가지의 종자로서 썩지 않고 내지 잘 저장되어 만약 땅이 있고 물이 있다면, 모든 비구여, 이 다섯 가지 종자는 생장하고 증광하겠느냐.”

대덕이시여, 그럴 것입니다.”

비구여, 지계(地界)란 네 가지 식이 머물러 있음에 비유하여 볼 것이다. 비구여, 수계(水界)란 기쁨과 탐욕에 비유하여 볼 것이다. 비구여, 다섯 가지의 종자란 식()과 식()의 비유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비구여, ()에 붙어 식()이 머문다면, 색을 소연(所緣)으로 하여 색에 머무르고 기쁨[]에 가까이 의지하여 머물러 생장하고 증광할 것이다.

비구여, ()에 붙어()에 붙어()에 붙어 식()이 머문다면, ()을 소연(所緣)으로 하여 행에 머무르고 기쁨에 가까이 의지하여 머물러 생장하고 증광할 것이다.

비구여, (누군가)말하되 나는 색을 떠나고 수를 떠나고 상을 떠나고 행을 떠나서 식()의 내왕(來往), 사생(死生), 장익(長益), 광대(廣大)를 시설할 것이다라고 함은 옳지 않다.

비구여, 비구가 만약 색계(色界)에서 탐욕을 끊는다면 탐욕을 끊는 까닭에 분단이 있고, ()의 소연과 의지가 있지 않느니라.

비구여, 비구가 만약 수계(受界)에서, 상계(想界)에서, 행계(行界)에서, 식계(識界)에서 탐욕을 끊는다면 탐욕을 끊는 까닭에 분단이 있고, ()의 소연과 의지가 있지 않느니라.

()에 의지하지 않고 더 자라지 않고 현행(現行)이 없어서 해탈하고, 해탈한 까닭에 머물며, 머무는 까닭에 족한 줄 알며, 족한 줄 아는 까닭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반열반(槃涅槃)하여, ()이 이미 다하고 범행(梵行)이 이미 서고 짓는 바를 이미 다해 마치니 다시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南傳大藏經 第十四卷, 相應部經典三 pp.8587]

다섯 가지 종자란 식물종자를 자세하게 분류하여 다섯 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종자가 어떤 조건을 갖추어 생장하거나 생장하지 못함을 설명한 것은, 중생이 자발적인 노력과 수행의 여하에 따라 해탈하거나 삶과 죽음에 얽매임을 비유합니다. 만약 땅이 있고 물이 있으면 다섯 가지의 종자가 생장하고 증광하는 것과 같이, 중생에게도 식()이 있어서 거기에 탐욕, 애착이라는 물을 주게 되면 그 종자 즉 식은 생장하고 증광하여 해탈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계(地界)’는 네 가지 식 즉 색()()()()의 사온(四蘊)을 말하며, ‘수계(水界)’는 기쁨과 탐욕, 즉 애착심집착심을 말합니다. ‘네 가지 식이 머문다함은 생사(生死)의 업()을 짓는 근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란 주관인 주체를 말하며, ()이란 반연되는 객관을 말하는데, 남전장경의 원주(原註)에는 식()을 연()이라 하였으니 객관인 소연(所緣)입니다. 다섯 가지 종자를 식()과 식()으로 비유한다 함은 종자를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이란 현상세계의 물질을 말하는데, 이 색을 객관 즉 소연으로 하여 식()이 거기에 머물러버리면 애착심이 생겨 생장하고 증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생멸의 근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도 같은 뜻으로 말합니다.

()()()()을 반연하여 식()이 생멸하거나 오고 간다는 뜻입니다. 만약 색계(色界)에서 탐욕을 끊으면 식()의 소연(所緣)과 의지(依止) 즉 식이 반연하는 상대가 없어져버립니다. ()에서 모든 집착이 없어져서 증광하고 현행하지 않으면 자연히 해탈한다는 것입니다. 해탈한 까닭에 스스로 반열반에 들어갑니다. 반열반이란 근본무명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무여열반(無餘涅槃)이지 유여열반(有餘涅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반(涅槃)이란 삶을 마감하는 죽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번뇌에서 해탈하여 대자재(大自在)를 얻음을 말합니다. 중생은 식()에 얽매여 모든 것이 부자유하여 생사윤회를 하고 있으며, 식의 탐욕과 속박을 근본적으로 끊어버리면 대자재한 반열반의 해탈경계에 들어갑니다. 반열반하면 생()이 다하고 범행(梵行)이 서서 다시는 후유(後有), 즉 삼계(三界)에 윤회하지 아니합니다. 결국 중생이 삼계에 윤회하고 연기를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근본무명인 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원시경전에는 생사에 윤회하거나 삼계를 해탈하는 주체를 바로 식()이라고 하였는바, 후대에 생사 윤회의 주체인 아뢰야식이나 이숙식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어떠한 것을 사량하고 도모하고 생각하여도 이는 식()이 정한 소연(所緣)이니라. 소연인 까닭에 식의 머무름이 있느니라. 식의 머무름이 증장할 때 미래에 재유(再有)가 생하기에 이르고, 미래에 재유(再有)가 생할 때 미래에 늙고 죽음근심슬픔괴로움걱정번뇌가 생기느니라.비구들이여, 만약 사량하지 않고 도모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식이 정한 소연이 되지 않으며 소연이 없는 까닭에 식의 머무름이 없느니라. ()의 머무름이 없고 증장하지 않을 때에는 미래에 재유(再有)가 생하지 않느니라. 미래에 재유가 생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태어남늙고 죽음근심슬픔괴로움걱정번뇌가 멸하느니라. 이와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소멸이니라. [南傳大藏經 第十三卷 相應部 經典 二卷 p.9697]

 

식의 소연인 사량과 분별이 있는 까닭에 식의 머무름이 있게 되고, 식의 머무름이 증장할 때는 이에 따라서 생사에 윤회한다는 것이며, 사량분별이 완전히 끊어져버리면 영원토록 생사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사윤회와 해탈을 일신의 주체인 식으로써 해명하는 원초적인 모습을 간결하고 소박하게 설한 점이 확인됩니다.

 

어느 때 세존은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 머물러 계셨다.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들은 이 사대(四大)로 만들어진 몸에서 싫어하는 뜻을 내고 싫어하여 떠나고 해탈하려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 심() 혹은 의() 혹은 식()이라고 부르는 것에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싫어하는 뜻을 내지 못하고 싫어하여 떠나지 못하며 해탈하지 못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긴 밤에 이것은 내 것[我所]이라는 집착이 있어서, 이는 내 것이고, 이는 나[]이며, 이는 나의 자아(自我)라고 취착(取着)하느니라. 그러므로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싫어하는 뜻을 내지 못하고 싫어하여 떠나지 못하며 해탈하지 못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이 사대(四大)로 만들어진 몸을 나[]라고 생각함이, ()을 나[]라고 생각하기보다도 더하다.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사대로 만들어진 몸은 나타나서 1년을 머물고 2년을 머물고 3년을 머물고 4년을 머물고 5년을 머물고 10년을 머물고 20년을 머물고 30년을 머물고 40년을 머물고 50년을 머물고 백년을 머물고 다시 오래 머물 수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그렇지만 이 심() 혹은 의() 혹은 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낮과 밤에 전변(轉變)하여 다른 것으로 생기고 다른 것으로 없어지느니라. 비구들이여, 비유하면 원숭이가 수풀 속을 배회하면서 한 가지를 잡았다가 그것을 버리고 다른 한 가지를 잡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와같이 이 심() 혹은 의() 혹은 식()이라고 불리는 것도 또한 낮과 밤에 전변하여 다른 것으로 생기고 다른 것으로 없어지느니라.

비구들이여, 그렇지만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연기(緣起)를 잘 사유하느니라.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으며 저것이 생함으로 이것이 생하며, 저것이 없으므로 이것이 없으며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하느니라. 곧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으며 행에 의하여 식이 있고. 이와 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이니라. 무명의 남음이 없고, 탐욕을 떠나고 소멸에 의해서 행의 멸이 있으며, 행의 멸에 의해서 식의 멸이 있고. 이와 같은 것은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이니라. 비구들이여,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색()에서 싫어하는 뜻을 내고 수()에서도 싫어하는 뜻을 내고 상()에서도 싫어하는 뜻을 내고 행()에서도 싫어하는 뜻을 내고 식()에서도 싫어하는 뜻을 내느니라. 싫어하는 뜻을 내는 까닭에 싫어하여 떠나느니라. 탐욕을 떠나는 까닭에 해탈하느니라.” [南傳大藏經 第十三卷 相應部經典二]

 

중생은 속박된 생활을 하고 있어 해탈 대자재한 생활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중생은 긴 밤에 나[]와 나의 것[我所]이라는 집착이 강하여 일체법과 일체 사물에 있어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自我)라고 집착하고 매달립니다. 이렇게 집착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므로 번뇌에서 떠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긴 밤[長夜]’이란 캄캄한 기나긴 밤중이라는 뜻인데 해가 지고 캄캄한 그때만 밤이 아닙니다. 자기의 진여자성을 보지 못할 때는 누구에게나 억천만겁이 다 캄캄한 밤중입니다. 중생이 실제로 무명의 근본을 뿌리째 뽑아 없애버리고 참으로 진여자성을 보아서 청천백일 같은 정각을 이루기 전에는 언제든지 캄캄한 밤중입니다.

이와같이 일체 사물에 집착이 강한 중생은 심, 또는 의, 또는 식이라고 불리는 정신적인 면보다, ()()()()의 네 가지로 구성된 이 육신을 보다 더 강하게 자기 자신[自我]의 당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은 수시로 변하여 이리 분별 저리 분별하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 등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요동칩니다. 그것은 마치 수풀 속에서 원숭이가 이 나뭇가지를 잡았다가 다시 저 나뭇가지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비하여 육신은 태어나서 1, 2년 혹은 10, 20, 또는 백년, 때로는 그보다 더 오래 존속하여, 정신적인 것보다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마음보다도 몸을 더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운 거룩한 제자들은 연기의 진리를 깊이 배우고 사유하여 무명을 깨뜨리고 모든 괴로움을 걷어버립니다. 그리하여 육신을 이루는 요소인 색()과 정신적인 면을 이루는 수()()()()의 다섯 가지 요소에 집착하지 않고 싫어하는 뜻을 내어 그로부터 멀리 떠납니다. 집착과 탐욕을 떠나기 때문에 마침내 해탈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역설하는 바는, 중생이 탐욕을 끊지 못하여 해탈하지 못하는 보다 중요한 원인은 육신보다도 심의식(心意識)에 더 미혹하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사대로 구성된 육신에 대해서는 더러 혐오하여 떠나려고 하고 해탈하려고 하지만, 정신적인 심의식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심의식은 수풀 속에서 원숭이가 이리저리 옮겨다니듯이 아침에 변하고 저녁에 바뀌어 잠시도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이 경전과 상응하는 한역 아함경에서 다시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식에서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는 싫증을 내어 떠나거나 해탈하고자 하지 못한다.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는 차라리 사대로 된 몸은 나와 나의 것으로서 얽매일지언정 식에는 나와 나의 것으로서 얽매이지 않느니라. 식은 밤낮으로 때를 다투어 잠깐 사이에 변하여 다른 것으로 생기고 다른 것으로 멸하는 것이, 마치 원숭이가 수풀 속에서 놀면서 잠깐 사이에 여러 곳에서 나뭇가지를 잡아 한 가지를 놓고 한 가지를 잡는 것과 같느니라. 그 심식도 또한 이와같이 다른 것으로 생기고 다른 것으로 멸하느니라. 많이 들은 거룩한 제자는 연기에 대해서 잘 생각하고 관찰하느니라.

而於心意識愚疾無聞凡夫不能生厭離欲解脫하니라 愚癡無聞凡夫寧於四大身繫我我所이라도 不可於識繫我我所니라心意識日夜時就하여 須臾轉變하여 異生異滅하느니라 猶如獼猴遊林樹間할새 須臾處處攀捉枝條하여 放一取一하니라 彼心意識亦復如是하여 異生異滅하느니라 多聞聖弟子於諸緣起善思惟觀察하느니라.[雜阿含經第十二卷;大正藏 第二卷 p.81 ]

 

어리석고 무지하여 불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중생들은 심식을 떠나서 해탈하고자 아니하지만, 불법을 바로 아는 거룩한 제자는 연기를 잘 사유하고 관찰하여 정등각을 이루고 반열반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설명에서 밝혀지듯이 심의식(心意識)이라는 말은 오늘날 주로 유식학적으로 사용하지만, 본래는 이와같이 근본불교에서부터 설해진 것입니다. 근본불교에서는 중생의 정신적인 면을 심 또는 의 또는 식이라고 하여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였지만, 유식학에서는 심()을 제8, ()를 제7, ()을 제6식이라고 규정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된 것입니다.

 

 

2. 아뢰야식설(阿賴耶識說)

 

한편으로는 공이나 연기, 중도 등을 말하며 또 한편으로는 유식의 심의식(心意識) 문제를 늘 제기하는데, 그 이유는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중도, 연기, 진여법계 등을 우리가 모르는 것은 심의식의 근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눈을 가려서 못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도와 진여 이것을 바로 깨치려면 심의식의 근본무명인 아뢰야식을 해결해야지 그 이전에는 참으로 중도나 연기불성을 깨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식학파에서는 생사 윤회하는 주체로서 아뢰야식을 이숙식(異熟識)이라고 합니다. 즉 개개인의 선악 업으로 인하여 그 과보를 받는 주체를 이숙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이 근본무명의 주체이자 심의식의 가장 깊은 근원인 아뢰야식에 대하여 해설하고자 합니다. 이 부문의 맨 나중에 인용한 것은 유식부의 경론이 아닌 선어록(禪語錄)에서 발췌한 것인데 즉 유식종에서 수립된 심식설은 선수행(禪修行)에 있어서도 매우 귀중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를 옛적부터 중시한 큰 스님들의 어록에서 얼마간 인용한 것입니다.

 

1)해심밀경(解深密經)

 

내가 마땅히 너를 위하여 심의식의 비밀한 뜻을 설하리라. 광혜야, 너는 마땅히 알아라. 육도의 생사에 있는 저 유정(有情)들이 저 유정들의 무리 가운데 떨어질 때, 혹은 알로 나고 혹은 태로 나고 혹은 습기로 나고 혹은 화해서 나고 혹은 분신해서 난다. 그 가운데 최초 일체 종자의 심식이 성숙하고 반복하여 화합하고 더욱 자라나 커지니 두 가지 집수(執受)에 의지하느니라. 첫째는 유색(有色)의 모든 근과 (그것이)의지하는 것에 대한 집수요, 둘째는 상명(相名)분별의 언설과 희론의 습기에 대한 집수이다. 유색계 중에서는 두 가지 집수를 구비하며, 무색계 중에서는 두 가지 집수를 구비하지 않느니라. 광혜야, 이 식을 또한 아다나식(阿陀那識)이라고 하니 왜냐하면 이 식이 몸에 따라다니며 집지하기 때문이니라. 또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하니 왜냐하면 이 식이 몸 가운데서 섭수하고 간직하여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같이 하기 때문이니라. 또한 심()이라고 하니 왜냐하면 이 식이 물질소리향기감촉 등을 쌓이고 늘어나게 하기 때문이니라. 이때 세존께서 거듭하여 이 뜻을 밝히고자 게송을 설하셨다.

 

아다나식은 지극히 깊고 미세하여

내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설명하지 않노라.

일체 종자가 폭포수 흐르듯 하니

저들이 분별하고 집착하여 나로 삼을까 두려워하노라.

吾當爲汝說心意識秘密之義하리니 廣慧當知하라. 於六趣生死彼彼有情墮彼彼有情衆中할새 或在卵生或在胎生하며 或在濕生或在化生하며 或在身分生起하니 於中最初一切種子心識成熟하고 展轉和合하여 增長廣大하니 依二執受니라. 一者有色諸根及所依執受二者相名分別言說戱論習氣執受. 有色界中에는 具二執受하고 無色界中에는 不具二種이니라. 廣慧此識 亦名阿陀那識이니 何以故. 由此識於身隨逐執持故니라. 亦名阿賴耶識이니 何以故. 由此識於身攝受藏隱하여 同安危義故니라 亦名爲心이니 何以故. 由此識色聲香味觸等積集滋長故니라.爾時世尊欲重宣此義而說頌曰 阿陀那識甚深細하여 我於凡愚不開演하노라. 一切種子如瀑流하여 恐彼分別執爲我하노라. [解深密經;大正藏 16, p.692 ]

 

심의식에서 심()이란 제8아뢰야식이고, ()란 제7말나식이고, ()이란 제6의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심의식이란 8식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곡식 같은 것이 다 자라서 시들면 종자만 남아 그로부터 다시 싹이 돋아나듯이, 유정(有情)이 생멸할 때에 사람의 심식도 그러해서 사람이 죽은 뒤에 일체의 종자식이 남아 윤회를 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늘 말씀하시기를, “곡식의 종자가 남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정의 근본식이 종자식이 되어서 그로부터 모든 생사가 벌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즉 종자식이 주위의 환경과 여러가지로 화합하여 증가하고 자라므로 생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일체 종자식은 두 가지 집수에 의지하여 자라납니다. 하나는 유색(有色)으로 된 육근(六根)과 그 의지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고, 다른 하나는 모습과 이름으로 인한 언설과 희론의 습기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 두 가지가 근본이 되어 우리의 종자식을 훈습하게 되며 육도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3(三界) 가운데 유색계 중에는 생사가 있으므로 두 가지 집수를 다 구비하고, 무색계 중에는 본래 주관과 객관이 떨어진 곳이므로 두 가지 집수를 모두 구비하지 않습니다.

아다나(阿陀那: adana)’란 번역하면 집지(執持)’인데, 아뢰야의 다른 이름입니다. 집지란 가진다는 말인데 선업이나 악업의 세력 등 모든 종자를 온전히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아다나식은 유정의 몸에 언제든지 따라다니는데, 이것이 없어지면 종자의 근본이 없어지므로 모든 식의 뿌리가 다 빠져버립니다. ‘아뢰야(阿賴耶: ārya)’무몰(無沒)’이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 아뢰야식이 유정의 몸 가운데서 모든 것을 섭수하고 창고처럼 저장하여 편하든지 고생하든지간에 늘 이것이 근본이 되어 활동이 야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성을 바로 깨치려면 아뢰야식을 두드려 부수지 않고는 절대로 대자유한 대열반을 증득할 수 없습니다. 일체의 종자를 또한 심(: citta)이라고 하는데 이 식으로 말미암아 색성향미촉 등이 쌓이고 생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아다나식이 곧 아뢰야식이고, 아뢰야식이 곧 종자식이며, 종자식이 곧 심입니다. 이처럼 제8식은 여러가지 성질에 입각하여 각각 다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뢰야식이 지극히 깊고 미세하여 내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설명하지 않노라고 한 까닭은 말해도 못 알아듣고 도리어 반대를 하고 비방만 하기 때문입니다. 근대 학자들도 아뢰야식이 있다는 증거를 댈 수 없으니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에 이르러서 윤회가 어느 정도 확증이 된만큼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윤회하는 근본종자가 없어지게 되므로 여기에서 아뢰야식이 결국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그것이 객관적인 증명의 일종이 될 수 있습니다.

일체 종자가 폭포수 흐르듯 하여 중생이 그것을 분별하고 집착하여 나로 삼을까 두려워하노라고 한 까닭은 중생들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영원불멸하는 자신의 실체로 삼기 때문입니다. 의식을 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일체 중생은 이 아뢰야식을 의지하여 생사를 윤회하게 됩니다. 여기에 전생을 포함시켜도 상관없고, 설사 포함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생사계를 윤회하고 있으므로 시간적으로만 다를 뿐 윤회라는 면에서는 다름이 없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유식에서 논의하는 아뢰야식사상은 후세에 발달된 사상으로서 근본불교인 원시불교에는 이런 사상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불교의 원시경전 중에는 심의식설도 있고 종자식설도 있었으며 아뢰야식이란 말도 있습니다. 아다나라는 용어는 없지만 아뢰야라고 하면 아뢰야 속에 집장(執藏)능장(能藏)소장(所藏)의 뜻이 내재되어 있는만큼 그 뜻이 서로 통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다나라는 이름이 없다고 해서 아뢰야연기설이라는 것이 후세에 새로이 나온 사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원시경전에 거의 다 원초적으로 설해져 있는 것을 그 뒤에 보다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불타의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능가경(楞伽經)

 

선지식과 불자 등의 권속에 의지하여 능히 심()()의식(意識)의 자기 마음의 자체경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니라.

依善知識佛子眷屬하여 而能得見心意意識 自心自體境界故니라. [入楞伽經;大正藏 16, p.523 ]

 

심의 의식(意識)의 자체경계는 자기 마음의 진여본성으로 심의식의 피상적인 활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식의 지도에 의지하여 불성, 진여 본성을 깨치면 심의식의 근본 자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환상같이 공허한 육신이 곧 법신이며, 번뇌에 덮인 심의식의 본성이 바로 진여자성이라는 말을 자연히 알게 됩니다.

 

비유하면 바닷물이 움직이면 여러 가지 물결이 일어나듯 아뢰야식도 그와 마찬가지로 갖가지 여러 식을 생하니 심의식의 여러가지 모습 때문에 설하느니라.

譬如海水動하면 種種波浪轉하듯 梨耶識亦爾하여 種種諸識生하니 心意及意識爲諸相故說하니라.[入磅伽經;大正藏 16, p.523 ]

 

아뢰야식은 바닷물과 같고 기타의 여러 식은 바닷물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물결과 같이 아뢰야식의 바다 위에서 7, 6식의 모든 식이 그로부터 생하므로 심식을 여러 가지 모습에 따라서 설한다는 것입니다.

 

()은 교묘한 기술자와 같고 의()는 교활한 자와 같으며 의식(意識)과 전5식은 헛되고 망령되어 경계를 취하느니라.

心如巧伎兒하고 意如狡猾者하며 意識及五識虛妄取境界하니라.[入楞伽經;大正藏 16, p.557 ]

 

이것은 심의식의 작용[行相]에 대하여 말한 것으로, 그 중에서 교묘한 기술자와 같다는 것에는 악의가 별로 없으나 교활한 사람과 같다는 것에는 무지와 번뇌에 가득 찬 악의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의식 중에서 아뢰야는 그 행상이 미세하고 제7식은 아상(我相)이 깊다는 것을 비유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의식과 전5식은 허망하게 모든 경계를 취해서 망령되이 분별만 하여, 그 행상이 거칠게 겉으로 드러난 상태입니다.

 

3)구사론(俱舍論)

 

미혹하여 지은 업이 과()를 받을 때에는 변해서 능히 익으므로 이숙이라 하니라. 과가 그를 따라 생기므로 이숙생이라 하며, 그 얻는 과가 원인과는 다른 종류로 익게 되므로 이숙이라 하니라.

惑所造業至得果時變而能熟故名異熟이니라 果從彼生일새 名異熟生이요 彼所得果與因別類而是所熟故名異熟이니라.[俱舍論;大正藏 29, p.9 ]

 

이숙(異熟)이라는 것은 변해서 익는다[變而熟]’라는 뜻입니다. 즉 원인은 선이나 악인데 과보는 선이나 악이 아닌 무기(無記)를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선이나 악을 지었는데 그 과보는 부귀나 빈천으로 나타나 인과가 서로 달리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사론은 소승불교의 논서로서 대승불교 유식계통의 논서는 아니지만, 이숙에 대한 설명을 유식학보다 먼저 하였으므로 그 사상의 근원을 보이기 위해 여기에 인용한 것입니다.

 

4)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이 중에서 여러 식을 모두 심()과 의()와 식()이라고 한다. 만약 가장 수승한 아뢰야식에 의하면 심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 식이 능히 일체법의 종자를 모으기 때문이며 언제나 집수의 경계를 반연하고 알 수 없는 한 무리 기세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니라. 말나식을 의()라 하니 언제나 아(), 아소(我所), 아만(我慢)등을 집착하고, 사량을 성품으로 삼는다. 나머지 식을 식()이라고 하는데 경계에서 요별함을 특징으로 삼는다.

이와 같이 세 가지가 있는데, 유심위(有心位)중에서는 심의식이 언제나 함께 있으며 유전하느니라.

此中諸識皆名心意識이요 若就最勝阿賴耶識하면 名心이니 何以故. 由此識能集聚一切法種子故於一切時緣執受境하고 緣不可知一類器境하니라. 末那名意於一切時執我我所及我慢等하여 思量爲性이요 餘識名識이니 謂於境界了別爲相이니 如是三種이라. 有心爲中心意意識於一體時俱有而轉하니라.[瑜伽論;大正藏 30, p.651 ]

 

아뢰야식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대단히 미세하고 난해하여 보통의 심식으로는 도저히 사량할 수 없고 분별할 수 없으며 지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알 수 없다[不可知]’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나식이 아()와 아소(我所)를 집착하고 사량함은 잠재적으로 사량하는 것을 말하며, 만약 드러나게 사량한다면 제6식의 작용에 의한 것이지 말나식의 성질이 아닙니다. 이와같이 말나식은 뿌리깊은 번뇌인 아(), 아소(我所)와 아만(我慢) 등을 집착하며 끊임없는 생각과 헤아림을 그 성품으로 삼는 것입니다. “유심위 가운데는 심의식이 언제나 함께 있으며 유전하느니라는 말은, 마음의 경계를 열지 못한 우리가 쉽사리 이해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아뢰야식이 근본이 되고 말나와 의식이 함께 뭉쳐서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의식뿐이지만 그것을 내면적으로 운전하는 말나와 아뢰야도 언제든지 의식과 함께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때는 이와 같지만 발심수행하여 제8지 보살의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면 의식이 완전히 떨어지고 말나도 거의 떨어져서 제8아뢰야만 혼자 남게 됩니다.

 

5)섭대승론(攝大乘論)

 

이 화합식이 일체 종자식이며 곧 아뢰야식이니라. 그러므로 이 화합식의 성취는 의식이 아니고 다만 이숙식이니 이것이 일체종자식이니라.

若此和合識是一切種子識이며 卽是阿賴耶識이니라 是故成就此和合識非是意識이요 但是異熟識이니 是一切種子識이니라. [攝大乘論;大正藏 31, p.126 ]

 

여기에서 말하는 화합이란 일체종자의 화합을 의미합니다.

 

6)성유식론(成有識論)

 

()가 원인과 다른 까닭으로 이 가운데 또 설하되 아애집장(我愛執藏)이 잡염 종자를 가져 능히 과보 식[果識]으로 변하는 것을 이숙이라 한다. 처음은 아뢰야식이니 이숙이며 일체종자이니라.

異因故此中且說호대 我愛執藏持雜染種하여 能變果識名爲異熟이라阿賴耶識이니 異熟이며 一切種이니라.[成唯識論;大正藏 31, p.7 ]

 

아애집장(我愛執藏)’이란 무시 이래로 중생들이 어떤 불멸하는 실아(實我)가 있다고 애착하는 것이 마치 귀한 것을 넣어둔 창고를 견고히 지키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잡염의 종자란 여러 가지 선이나 악의 원인을 말하며, 이것이 선이나 악과는 다른 부귀 빈천 등의 과보로 나타나므로 이숙이라고 합니다.

 

혹은 이숙식이라 이름하니 능히 생사의 선한 업과 선하지 않은 업을 이끌어서 과보를 다르게 익히기 때문이니라.

或名異熟識이니 能引生死善不善業하여 異熟果故니라.[成唯識論;大正藏 31, p.13 ]

 

이것은 이숙식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점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숙식은 어째서 행위의 원인[]은 선이나 악인데 그 과보는 선이나 악이지 않고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인가, 즉 다르게 익는 것[異熟]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 까닭은 과거현재미래에 삼계에서 항상 생사유전하는 과보의 주체가 만약 선하다면 항상 즐거움만을 초래하고 만약 악하다면 항상 괴로움만을 수반하여 영원토록 반복되어 마침내 수도하여 향상하고 증오(證悟)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숙식은 그 업의 원인은 선이나 악이지만 과보는 무기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숙식의 성질이 무기라는 것은 총체적인 면에서 하는 말이며, 선업이나 악업에 따른 과보는 개별적으로 나타나므로 선인(善因)-선과(善果), 악인(惡因)-악과(惡果)라는 불법의 진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박가범이 곳곳의 경 가운데서 심()()()세 가지 다른 뜻을 설명하셨다. 모아 일으키는 것을 심이라 하고 사량을 의라 하며 요별을 식이라 이름한다. 이 세 가지 다른 식의 이러한 세 가지 뜻은 비록 8식 전체에 통하나 수승함을 따라서 밝히면, 8식을 심이라 하니 모든 법의 종자를 모아서 모든 법을 일으키는 까닭이요, 7식을 의라 이름하니 장식(藏識)등을 반연하여 항상 살피고 사량하여 자아[]등으로 삼는 까닭이요, 남은 여섯은 식이라 이름하니 여섯 가지 다른 경계에 거칠게 움직여 간격이 끊어져 분별하며 유전하기 때문이다. 능가경 게송 중에 말하였다. “장식은 심이라 이름하고, 사량성은 의라 이름하며 능히 모든 경계 상을 요별함은 식이라고 이름하느니라.”

薄伽梵處處經中說心意識三種別義하시니 集起名心이요 思量名意이요 了別名識이니라. 是三別識如是三義雖通八識이나 而隨勝顯하면 第八名心이니 集諸法種하여 起諸法故第七名意緣藏識等하여 恒審思量하여 爲我等故. 餘六名識이니 於六別境麤動間斷하여 了別轉故니라. 如瑜伽中호대 藏識說名心이요 思量性名意能了別諸境相是說名爲識이라하니라.[成唯識論;大正藏 31, p.24 ]

 

박가범(薄伽梵)이란 범어 bhagavat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세존(世尊)을 의미합니다. 그 중에서 특기할 것은 제7식이 제8식인 장식(藏識)을 반연하여 나[]라고 삼는다하고 있는데 이것은 호법(護法) 논사의 주장입니다.

 

7)유식술기(唯識述記)의 설

 

이숙식은 즉 제8식을 말함이니 이름에 여러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다르게 변해서 익는 것[變異而熟]이니 원인이 변할 때에 과보가 바야흐로 성숙되기 때문이다. 이 뜻은 다른 것에도 다 통하니 과보가 생길 때는 변하여 달라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때를 달리해서 익는 것[異時而熟]이니 원인과 시기를 달리하여 과보가 바야흐로 성숙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종류를 달리해서 익는 것[異類而熟]이니 원인과 성질을 달리하여 과보가 원인에 보답하기 때문이다.

謂異熟識卽第八識이니 名有多義變異而熟이니 要因變異之時果方熟故니라 此意通餘種하니 種生果時皆變異故니라 異時而熟이니 與因異時하여 果方熟故니라 異類而熟이니 與因異性하여 果酬因故니라.[唯識述記;大正藏 43, p.238 ]

 

이숙식에는 세 종류가 있지만, 이 중에서 선악 업보의 과체로서의 제8식은 이류이숙뿐이고, 나머지는 생성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자의 경우는 생사 윤회의 주체로서의 이숙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8)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또 생멸인연이라는 것은 이른바 중생이 심과 의와 의식에 의지하여 유전하는 것이니라.

復次生滅因緣者所謂衆生依心意意識轉故니라.[起信論;大正藏 32, p.577 ]

 

기신론은 원래 순수한 유식 논서는 아니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유식학설을 받아들여서 제8[], 7[], 6[意識]의 세 가지가 합하여 생멸인연(生滅因緣)이 된다고 하면서 그 근본은 역시 제8식에 있다고 합니다.

 

9)선가(禪家)의 설

 

항상함[]과 사량[]은 식 가운데 네 가지의 분별이 있느니라. 8식은 항상하면서 사량이 없으니 나[]에 집착하지 않아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요, 6식은 사량하면서 항상하지 않으니 나에 집착하여 끊어짐이 있기 때문이요, 5식은 항상하지도 않고 사량하지도 않으니 나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요, 7식은 항상하면서 또 사량하니 나를 집착하여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니라.

恒之與審識中有四句分別하니라. 第八識恒而非審이니 不執我하여 無間斷故. 第六識審而非恒이니 以執我有間斷故. 前五非恒非審이니 不執我故. 第七識亦恒亦審이니 以執我無間斷故니라.[山性相通說, p.26 ]

 

()이란 식이 항상 상속하는 것을 말하고 심()은 사량분별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잠재적으로 사량분별하는 것과 드러나게 사량분별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8식 가운데 네 가지의 구별이 있습니다. 8식은 항상하면서 사량이 없습니다[恒而非審]. 나를 집착하지 않으나 그 작용하는 활동이 상속하여 끊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몸을 바꾸어서 다른 생사를 받게 될 때까지도 간단이 없습니다. 동시에 사량분별을 하지 않는데 그것은 순전히 무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6식은 제8식과 반대로 언제나 사량분별을 하지만 항상 계속되지는 않습니다[審而非恒]. 붉은 것을 보면 붉은 데에 머물고, 검은 것을 보면 검은 데 머무르며, 어떤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일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연속되는 정신활동은 제8식이며, 6식은 시시각각으로 경계를 따라 간단이 있어 사량분별을 근본으로 삼으며 상속을 하지 않습니다. 5식은 곧 눈몸의 다섯 가지 식을 말하는데, 이 전5식은 항상하지도 않고 사량하지도 않습니다[非恒非審]. 예를 들면 거울에 물건이 비치듯이 눈의 수정체에 어떤 사물이 비치는 그 순간을 전5식의 작용이라 하고, 거기서 푸른 것이라든지 붉은 것이라든지 그 무엇을 인식하게 될 때는 전5식의 영역이 아니며 의식의 영역에 속합니다. 즉 전5식의 활동은 순전히 무의식적인 것으로 사량분별이 없습니다. 7식이나 6식같이 연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물이 눈에 비칠 때는 있고, 비치지 않을 때는 없어서 완전히 끊어져버립니다. 7식은 항상 상속하면서 또한 항상 사량하는데[亦恒亦審] 이것은 잠재적으로 제8식을 의지해서 항상 연속하며, 항상 연속한 가운데 잠재적으로 나[]와 나의 것[我所] 등을 사량하고 있습니다.

현수스님 같은 분은 항상한다[亦恒]’ 하는 것은 제8식에다 붙여버리고 사량한다[亦審]’ 하는 것은 제6식에 갖다 붙이면 제7은 따로 세울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우리의 정신상태를 분석해 보면 제7식을 따로 두는 것이 논리상 더 적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이 심의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마음을 물리치고 단박에 생김이 없는 지견의 힘에 들어가도다.

損法財滅功德莫不由斯心識이라 是以禪門了却心하고 頓入無生知見力이니라.[證道歌]

 

불법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제일 큰 방해물은 심의식입니다. 선문에서는 공부하여 자성을 깨치는데 제일 방해되는 것이 제8아뢰야이니 이 아뢰야부터 제거해야 된다고 합니다. 선종에서는 지극히 미세한 제8아뢰야를 제8마계(第八魔界)라 규정합니다. 누구든지 공부를 아무리 잘하여 완전히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었다 해도 거기서 살아나지 못하면 제8마계에 떨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예전의 조사가 입을 모아 똑같이 말하는 소리입니다. 오매일여가 되고 완전한 무심경계에 들어갔다고 해도 선문에서는 이것을 제8마계라 부르며 견성이라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不疑言句 是爲大病]’이라 하여 근본적으로 배격했습니다. 그러한데, 8식은 그만두고 제6의식의 사량분별 속에서 경계가 조금 바뀌고 어떠한 지견이 생겼다고 이것을 견성이라 알면 자기만 망할 뿐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남에게 가르치게 되어 자타가 모두 망하게 됩니다. 옛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은 언제나 구경각을 견성이라 하고 육식은 물론 제8아뢰야의 경계까지도 견성이 아니라 했는데, 의식분별이나 객진번뇌를 가지고 견성이라 주장하면 부처님 말씀이나 조사님 말씀과는 근본적으로 틀리는 비법(非法)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심식설(心識說)

 

법상종에서 설하는 심식설은 성유식론(成唯識論)과 이것을 주해한 규기(窺基)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혜소(惠沼)성유식론요의등(成唯識論了義燈)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들 논소에 의하여 설명하기보다는 현장스님이 찬술한 팔식규거(八識規)에 의거하여 법상종의 심식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팔식규거가 이루어진 경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유식론등이 비록 법상종의 소의론이지만 그 내용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그대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에 규기가 현장스님에게 유식 법상종의 종취를 전반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간략하게 지어달라고 청했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현장스님이 인도 호법논사의 견해에 의지하여 유식사상의 요지를 총망라하여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것이 유명한 저 팔식규거입니다. 팔식규거는 전5678식의 네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문은 12()의 게송으로 되어 있어 모두 48구절밖에 안되지만, 이 짧은 분량 안에는 성유식론등의 주요 교리들이 골고루 응축되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식의 이론은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여, 이것을 알기 쉽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 팔식규거이기는 하지만 팔식규거도 역시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옛 주석서 중에 규기가 주해한 것이 있지만 그 또한 까다로운 점이 많아 이해하기가 곤란합니다. 그 뒤에 명()나라에 와서 선종(禪宗)의 감산 덕청(憨山德淸)스님과 지욱(智旭)스님 등이 이 팔식규거에 대한 주해를 했는데, 이는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어서 널리 전해졌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해설하는 팔식규거는 바로 감산스님과 지욱스님 등의 주해를 주로 한 것입니다. 또 이해를 돕기 위하여 8(八識) 중에서 각 식()에 대한 설명이 끝날 때마다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나오는 해당 게송을 다시 그 뒤에 대응하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육조 혜능(六祖惠能)스님이 8식에 대해 간략히 찬술한 사지송(四智頌)을 첨부하였습니다. 비록 법상종은 아니지만 심식설에 대한 선종 조사의 견해이므로 적지않아 귀감이 되리라 싶어 여기에 실었습니다. 이 육조스님의 말씀은 원래 육조단경(六祖檀經)가운데 있으나 여기서는 감산스님의 팔식규거에 대한 설명[八識規矩通說]의 끝에 실려있는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1)5식송(五識頌)

 

오식(五識)은 전5(前五識)을 말합니다.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우리의 심리상태를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8식으로 나누는데, 이 중에서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다섯 가지를 전5식이라 하고 의식을 제6, 말나식을 제7, 아뢰야식을 제8식이라고 합니다. 5식은 우리의 심리상태에 있어서 정신활동의 전위부대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해설한 것입니다.

 

성경이고 현량이며, 세 가지 성품에 통하니

性境現量이요 通三性이니

 

전오식, 즉 감각작용은 경계로 볼 때는 성경(性境)이며, 실제 작용하는 면으로 볼 때는 현량(現量)입니다. ‘성경(性境)’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인식하는 경계를 성경(性境)독영경(獨影經)대질경(帶質經)의 세 가지로 나눈 것 중의 하나로, 이 성경에는 마치 거울에 물건이 비치는 것과 같이 어떠한 분별이 조금도 없습니다. 예를 들면 눈에 무엇인가가 비칠 때, 즉 수정체 안구에 무엇인가가 비치는 그 찰나를 말하는 것으로, 이 비춰진 대상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검다, 푸르다, 좋다, 나쁘다 등의 분별을 하지만 이 분별은 이미 제6식인 의식이 작용하는 것이지 전5식이 작용하는 바는 아닙니다. 5식은 분별작용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량(現量)’이란 사물을 지각하는 방법의 하나로, 비판이나 분별을 떠나서 외계의 대상을 그대로 지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거울에 어떤 사물이 비칠 때 그 사물이 그냥 비치기만 할 뿐 거기에는 사량과 분별이 없듯이, 5식은 외계의 사물을 직접 지각할 뿐이므로 당연히 현량의 성질을 갖는 것입니다.

세 가지 성품에 통함이란 전5식의 활동영역이 선()()무기(無記)의 삼성에 두루 통함을 말합니다. 5식으로 선()을 볼 때는 선이 비치고 악()을 볼 때는 악이 비치며 선도 악도 아닌 중간 상태인 무기(無記)를 볼 때는 무기가 비칩니다. 이렇게 전5식은 선이나 악 또는 무기에 구애됨이 없이 모두에 통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을 선이나 혹은 악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전5식의 작용이 아니라 분별의식인 제6식의 작용입니다.

이와같이 전5식의 근본작용은 예컨대 수정체에 무엇이 비치는 그 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코 분별의식의 영역이 아니며, 성경과 현량이며 선무기의 삼성에 통하는 것입니다.

 

안식과 이식과 신식의 셋은 두 지[二地]에 머무느니라.

眼耳身三二地居.

 

5식 중에서 안식이식신식의 세 식은 두 지[二地]에 한하여 작용한다는 것인데, 두 지는 삼계(三界) 중의 욕계(欲界) 오취(五趣)를 뜻하는 잡거지(雜居地)와 색계(色界)의 초선(初禪)인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를 말합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여기가 바로 욕계인데, 욕계의 중생류를 분류할 때 흔히 오취(五趣) 즉 지옥아귀축생인간()으로 합니다. 그리고 욕계 안에 있는 오취를 합하여 하나의 지[一地], 즉 잡거지(雜居地)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안신의 5식이 전부 다 적용되지만, 신의 세 식만을 든 것은 색계의 초선(初禪)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색계에는 사선(四禪)의 구분이 있는데, 초선(初禪)은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이선(二禪)은 정생묘락지(定生妙樂地), 삼선(三禪)은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 사선(四禪)은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 여기에서 말하는 이생희락지, 즉 색계의 초선천(初禪天)에서는 무엇을 먹을 때 선열(禪悅)을 음식으로 삼기 때문에 안식과 이식과 신식만이 작용할 뿐 설식과 비식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색계의 초선천 위인 이선(二禪) 이상에서는 선정에 들어가기 때문에 안식이식신식도 필요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전5식은 욕계 5취의 잡거지에서만 해당하고 색계 초선에서는 안식이식신식만이 적용되므로, 안식이식신식은 두 지에 머문다고 한 것입니다.

 

(상응하는 마음의 작용은)변행과 별경과 선의 열 하나와 중수혹 둘과 대수혹 여덟과 탐치이다.

徧行別境善十一中二大八貪嗔痴.

 

유식에서는 심리작용을 모두 51가지로 나눕니다. 여기에서는 바로 이 전5식과 상응하는 34가지 마음작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변행(徧行)이란, 모든 심식에서 발생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하는데, 이에는 촉()작의(作意)()()()5가지가 있습니다. 별경(別境)이란, 변행처럼 모든 경우에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대상을 대할 때 발생하는 마음의 작용을 뜻하며, 이것에도 욕()승해(勝解)()()()5가지가 있습니다. ()이란, 과거와 현재 또는 현재와 미래의 두 세상에 걸쳐서 자기와 타인을 이익하게 하는 마음작용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신()()()무탐(無貪)무진(無嗔)무애(無癡)()경안(輕安)불방일(不放逸)행사(行捨)불해(不害)11가지가 있습니다. 대수혹(大隨惑)이란, ()()() 등의 근본번뇌를 따라서 생기는 20가지 수번뇌(隨煩惱) 가운데, 일체의 오염심에 널리 상응하여 발생하는 방일(放逸)실염(失念)부정지(不正知)도거(掉擧)혼침(混沈)불실(不信)해태(懈怠)산란(散亂)8가지를 말합니다. 중수혹(中隨惑)이란, 많은 수번뇌 가운데 다만 불선(不善)의 마음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번뇌인 무참(無慚)무괴(無愧)2가지를 말합니다. 여기에 탐()()()를 합하면 모두 34가지가 됩니다.

 

5식은 동일하게 정색근(淨色根)에 의지하니,

五識同依淨色根하니

 

5(五識)은 대응하는 5(五根)에 의지하여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눈이라는 안근(眼根)이 없으면 안식(眼識)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근()은 지()()()()4가지 속성으로 되어 있으므로 파괴될 수 있는 것이어서 부진근(浮塵根)이라고 합니다. 이에 반하여 정색근(淨色根)이란 우리가 볼 수는 없고 단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인데 감각작용을 일으키는 물질적인 속성을 말합니다. 무명(無明)의 껍질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홉 가지 연()과 여덟 가지와 일곱 가지 연이 잘 서로 인접하느니라.

九緣八七好相隣이라.

 

아홉 가지 연()과 여덟 가지, 일곱 가지 연이 서로 의지해 있다는 말은 전5식 각각이 그러한 조건하에서 작용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홉 가지 연(九緣)이란 공()()()()작의(作意)분별(分別)염정(染淨)종자(種子)근본(根本)을 말하는데 이러한 조건이 전5식의 작용에 두루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5식 가운데 안식(眼識)은 이 아홉 가지 연이 전부 갖추어져야만 활동이 가능합니다. 반면에 이식(耳識)은 여덟 가지 연만 갖추면 됩니다. 왜냐하면 청각이 작용하는 데는 밝고 어두운 명의 연[明緣]이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밝은 곳이나 어두운 곳일지라도 귀는 들을 수가 있으나 눈은 밝지 않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아홉 가지 연이 모두 필요하지만 이식은 여덟 가지 연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또 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은 일곱 가지 연만 갖추면 됩니다. 왜냐하면 코와 혀와 몸이 활동하는데는 장소인 허공()이나 명암인 명()이 없이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 제6식과 제7식과 제8식은 각각 다섯 가지 연과 세 가지 연과 네 가지 연만 구비되면 활동이 가능합니다. 6식인 의식(意識)은 분별공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가지 연인 경작의염정종자근본만 있으면 활동할 수 있으며, 7식인 말나식은 작의근본종자만 있으면 활동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근본(根本)이란 심식의 깊은 곳에 자리잡은 아뢰야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제8식인 아뢰야식은 작의종자근본에 경()을 하나 더 추가하면 활동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전5식 중에서 안식은 아홉 가지 연으로 생하고 이식은 여덟 가지 연으로 생하여 나머지 비식설식신식은 모두 일곱 가지 연으로 생하는 것입니다.

 

셋은 합하고 둘은 떨어져서 세상을 관하니

合三離二하여 觀塵世하니

 

셋은 합한다함은 비식설식신식이 활동함에 있어서는 무엇이든간에 대상과 직접 접촉해야 비로소 가능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은 떨어진다함은 안식과 이식이 활동함에 있어서는 대상과 떨어져 있어도 가능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비식설식신식이 활동할 때는 코는 냄새와 접촉해야 하고 혀는 맛을 볼 수 있도록 물체가 닿아야 하고 몸은 촉각이 일어나도록 물건과 접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각작용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안식과 이식은 어떤 사물과 직접 접촉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볼 수 있고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간결하게 표현하여 비식설식신식의 세 가지는 합하고 나머지 둘은 떨어져서 세상을 관한다고 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식과 근을 분별하기 어려우니라.

愚者難分識與根이라.

 

()이란 분별작용하는 인식 주체를 뜻하는 것이고, ()이란 인식을 발생하는 구조적인 감각기관 자체를 뜻하는 것인데, 이들의 차이는 매우 미묘하여 그 참모습을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감각작용이 일어나는 상태 또는 작용은 무명에 가리워져 진실을 보는 지혜를 갖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쉽사리 이해될 수 없는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식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은 제8식의 상분에 해당되고, ()은 제8식의 견분에 해당하므로 양자는 같지 않습니다. 또 그 작용도 엄밀히 따지면 둘 다 무분별이긴 하지만 식에서는 욕락(欲樂)의 마음이 일어나므로 다른 것입니다.

 

()이 변하고 공()을 관하나 오직 후득지로 얻는 것이며,

變相觀空이라 唯後得이요.

 

이것은 전5식이 전환하여 성소작지(成所作智)를 이룸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전5식은 제8식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므로, 8식이 전환하면 전오식도 따라서 전환됩니다. ‘상이 변함이란 심식이 생길 때 세속 경계인 상분(相分)이 변한다는 말인데, 그 관찰()한 바가 곧 공()해집니다. 이렇게 그 상()은 공하지만 그러나 공상(空相)을 떠나지 못했으므로 이것은 오직 후득지(後得智)로 얻어지는 것이며 근본지(根本智)의 작용이 아닙니다. 불지(佛智)에는 근본지와 후득지가 있는데, 근본지는 능히 진여(眞如)를 반연하고, 후득지는 다만 세속의 차별상을 요해할 뿐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상분의 관찰이 공()함에 머무르는 차별상이므로 다만 후득지인 것입니다.

 

불과 중에서도 오히려 스스로 진여를 계회(契會)하지 않느니라.

果中猶自不詮眞이라.

 

()는 불과(佛果)를 이루는 것을 말하고, ()이란 진여(眞如)를 말합니다. 불과를 이루는 것도 후득지에 해당하여 진여의 무분별을 연려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후득지 중에서 진여를 반연한다고 주장한 안혜(安慧)논사의 견해를 반박한 것이라고 합니다.

 

대원경지가 먼저 발생하니 무루(無漏)를 이루어

圓明初發成無漏하여

 

이것은 제8식이 전환하여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발생함을 의미합니다. 대원경지는 제8식인 아뢰야식이 청정하게 전환하여 불과(佛果)의 지혜가 열리는 경지를 뜻합니다. 이때에는 전오식도 따라서 전환하여 무루(無漏)의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됩니다. 즉 전오식은 본래 제8식인 아뢰야식의 상분(相分)에 의지하는 것으로 그 본체가 같은 것이므로 제8식이 전환하여 대원경지가 되어야만 전오식도 함께 성소작지가 되는 것입니다.

 

세 종류로 몸을 나투어 괴로운 윤회를 그치느니라.

三類分身하여 息苦輪이로다.

 

세 종류의 몸이란 대화신(大化身)소화신(小化身)수류화신(隨類化身)을 말하는 것인데, 대화신이란 크게 몸을 나투는 것이고, 소화신은 조금 몸을 나투는 것이며, 수류화신은 중생의 종류를 따라 몸을 나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 종류의 몸을 나툰다는 것은 축생을 위할 때에는 축생의 몸을 나투고 남자를 위할 때에는 남자의 몸을 나투듯이, 각각의 종류에 따라 몸을 나투어 고해에 빠져 윤회하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식은 인연을 따라 나타나는데 혹은 갖추기도 하고 혹은 갖추지 않기도 하니 파도가 물을 의지함과 같으니라.

五識隨緣現한대 或俱或不俱하니 如壽波依水니라.[大正藏 31, p.60 , 15]

 

이 글은 유식삼십송에서 전5식을 설한 것입니다. 아홉 가지 연[九緣]을 갖추어 발생하는데, 아홉 가지 연을 다 갖추어야 일어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연()을 갖추고 전5식이 제8식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것은 마치 파도가 물에 의지하여 일어나듯이, 8식과 불가분리의 관계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2)6식송(六識頌)

 

삼성(三性)과 삼량(三量)이며 삼경(三境)에 통하니,

三性三量으로 通三境하니

 

6식은 의식(意識)을 말하는데, 거기에는 삼성(三性)과 삼량(三量)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삼량은 현량(現量)과 비량(比量)과 비량(非量)을 말합니다. 현량은 직관적으로 대상을 아는 것이요, 비량(比量)은 유추와 추리로써 사물을 아는 것이며 비량(非量)은 잘못된 현량(現量)과 비량(比量)을 말합니다. 그리고 삼성은 선()과 악()과 무기(無記)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제6식은 삼경(三境)에 통하는데, 삼경이란 성경(性鏡)과 독영경(獨影境)과 대질경(帶質境)으로 인식의 대상을 세 종류로 분류한 것입니다. 성경이란 주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객관세계며, 독영경은 주관의 영향하에 나타나는 망상적 경계이고, 대질경은 본질은 있으나 본질 그대로는 나타나지 않는 경계입니다. 6식은 바로 이 세 경계에 모두 통하는 것입니다.

 

삼계에 윤회할 때에 쉽게 알 수 있느니라.

三界輪時易可知.

 

중생이 삼계(三界)에 윤회할 때에 삼계에서 받는 생사(生死)와 선과 악의 인과(因果)는 바로 이 제6식의 작용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그 행상이 8식 중에서 가장 뚜렷하여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상응하는 심소는 51가지이니, 선과 악에 임할 때 각각 그것을 배정하느니라.

相應心所五十一이니 善惡臨時別配之.

 

유식학에서는 마음의 작용을 총괄하여 여섯 가지[六位:변행(徧行) 5, 별경(別境) 5, () 11, 근본번뇌(根本煩惱) 6, 수번뇌(隨煩惱) 20, 부정법(不定法) 4]로 분류하는데, 그 여섯 가지에 포함되는 마음작용 전체는 51가지입니다.

6식인 의식에서는 육위의 마음작용이 모두 활동하고 있으므로 선이나 악을 대할 때 그 마음작용의 종류를 각각 다르게 하여 상응하는 것입니다.

 

삼성과 삼계와 삼수가 항상 전변하여 근본번뇌와 수번뇌와 신()등이 총체적으로 서로 연관하니

몸을 움직이고 말을 하는데 홀로 가장 뛰어나서 (업을)이끌고 (과보를)만족하여 능히 업력을 부르고 (8식을)이끄느니라.

性界受三恒轉易하여 根隨信等總相連하니 動身發語獨爲最하여 引滿能招業力牽이라.

 

삼성(三性)은 선무기를 뜻하고, 삼계(三界)는 욕계색계무색계를 말하며, 삼수(三受)는 세 가지 감수작용인 고()()()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항상 서로 그 위치와 상태를 바꾸어서, 어떤 때는 선할 때 악이 홀연히 일어나고 어떤 때는 기쁠 때 슬픔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악한 일을 할 때는 근본번뇌라든가 수번뇌의 번뇌가 따르고, 선한 일을 할 때는 신() 등의 마음작용이 일어나 그 전체가 한데 뭉쳐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말을 하고 몸을 움직이는 등의 일상생활에 있어 제6식의 작용이 가장 두드러진 것입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업을 짓는데, 선업을 짓든 악업을 짓든 업을 지음에는 제6식인 의식이 전적으로 그 역할을 주도합니다. 중생이 여러가지 업을 지어 그 과보를 자초하여 이리저리 끄달리면서 삼계와 육도를 윤회하는데, 그 윤회의 주체인 제8식을 이끄는 힘은 제6식이 제일 큰 것입니다.

 

초심(初心)의 환희지에서 [()]발생하나 구생혹(俱生惑)은 오히려 스스로 전()과 면()을 나타내느니라.

發起初心歡喜地이나 俱生猶自現眠하며.

 

6식은 무루지(無漏智)가 발생하는 초지 환희지에서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전환하여 아()와 법()에 대한 분별혹(分別惑)은 그치게 됩니다. 그러나 구생혹(俱生惑)은 거기에서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구생혹이란 선천적으로 익혀 온 번뇌입니다. 그러므로 환희지에서는 의식작용 중 분별혹은 멈추지만 구생혹인 전()과 면()은 아직 남아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은 현행(現行)을 말하고 면()은 종자(種子)를 말하므로 초지에서는 구생혹의 현행과 종자는 활동하는 것입니다.

 

원행지 후에는 순수한 무루가 되어 묘관찰지로 둥글게 밝아 대천세계를 비추느니라.

遠行地後純無漏하여 觀察圓明照大千하니라.

 

원행지(遠行地)는 제7지입니다. 7지에 이르르면 구생혹(俱生惑)도 없어져서 번뇌가 완전히 없어집니다. , 원행지인 7지에서 보살이 무상정(無想定)에 들어가면 의식의 여러작용이 완전히 그쳐서 분별혹은 물론 구생혹까지 없어져서 의식작용이 순수한 묘관찰지로 바뀌어 대천세계를 밝게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식학에서 제6의식을 여러 가지로 분류한 것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의식은 그 발생하는 경우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누는데 오구의식(五俱意識)과 불구의식(不俱意識)이 그것입니다. 오구의식에는 전5식과 동시에 일어나며 또한 전5식과 동일한 경계를 반연하는 오동연의식(五同緣意識), 5식과 동시에 같이 일어나지만 전5식과는 다른 경계를 반연하는 부동연의식(不同緣意識)이 있습니다. 불구의식은 전5식과 함께 일어나지 않고 의식만이 홀로 발생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오후의식(五後意識)과 독두의식(獨頭意識)의 구별이 있습니다. 오후의식은 전5식이 경계를 반연한 후에 그 뒤에 계속하여 일어나는 의식을 말하며, 독두의식은 전5식과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전5식이 생한 후에 계속하여 일어나지도 않는 전혀 홀로 일어나는 의식입니다. 이 독두의식에는 정중독두의식(定中獨頭意識)과 몽중독두의식(夢中獨頭意識)과 산란독두의식(散亂獨頭意識)이 있습니다. 정중독두의식은 정()에 들어서도 무엇인가의 물건을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어떤 사물이 나타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정 속에서 분명히 대상이 나타나지만 이것은 꿈속에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의 대상없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몽중독두의식은 꿈속에서 산을 보거나 물을 보는 정신작용입니다. 산란독두의식은 병이 있거나 미쳤을 때의 의식을 말합니다. 병이 있어 의식이 혼란되어 있을 때에는 사람이 없는데 보이기도 하고 있는데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사람이 미치면 눈에 이상한 것이 보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혼자서만 보고 헛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 산란독두의식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3능변은 차별하여 여섯 종류가 있으니, 경계를 요별하므로 성()과 상()으로 삼으며 선()과 불선(不善)과 무기(無記)가 된다. 이 마음의 작용은 변행과 별경과 선과 번뇌와 수번뇌와 부정으로 모두 삼수(三受)와 상응한다. 의식은 항상 일어나지만 무상천에 태어나는 것과 무심의 두 선정과 수면과 민절은 제외하느니라.

次第三能變差別有六種하니 了境으로 爲性相하고 善不善俱非니라 此心所遍行別境煩惱隨煩惱不定이니 皆三受相應이라意識常現起호대 除生無想天及無心二定睡眠與悶絶이니라.[816]

 

이 글은 유식 삼십송에서 제6의식에 대한 설명입니다. 유식학에서 마음의 주체를 파악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심식을 8(八識)으로 분류하여 마음이 표층에서 심층을 향하여 중첩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한 것이고, 또 하나는 삼능변(三能變)으로 파악하여 마음이 심층에서 표층을 향하여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면을 보인 것입니다. 삼능변의 초능변은 제8아뢰야식이고, 2능변은 제7말나식이며, 3능변은 전5식과 제6식입니다. 팔식규거는 전5식부터 시작하여 최후로 제8식을 설명하여 올라가며 해설하지만, 유식삼십송은 초능변인 제8아뢰야식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제6식과 전5식으로 내려가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제3능변은 제6식을 말하며 차별하면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바로 앞에서 해설한 전5식과 제6식을 통칭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제6식은 경계를 분별하는 것을 그 성품으로 삼으며 삼성(三性)인 선과 악과 무기에 모두 통합니다. 또한 그 작용은 51가지가 있는데, 그를 분류하면 변행(徧行)별경(別境)()번뇌(煩惱)수번뇌(隨煩惱)부정(不定)6가지가 됩니다. 이들은 모두 고(), (), ()의 삼수(三受)와 상응합니다.

그런데 의식은 항상 일어나는 것이지만 여기에도 예외가 있습니다. 일체의 의식이 사라진 무상천(無想天)과 제7지의 무상정(無想定)과 제8지 이후의 멸진정(滅盡定), 그리고 수면과 민절에서는 의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7지의 무상정까지는 무심(無心)이기는 하지만 계속적인 정진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8지 이후인 색자재(色自在)의 멸진정에 들면 색에 자재해서 노력이 필요치 않는 무공용(無功用)이 됩니다. 그러므로 보통은 제7지를 모두 성인(聖人)이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제7지 무상정까지는 의식적으로 수행한다는 노력[功力]이 필요하며, 8지 멸진정 이상은 이런 노력이 필요없는 성위(聖位)에 든다고 합니다. 또 의식은 잠잘 때나 기절했을 때에도 활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3) 7식송(七識頌)

 

대질경을 반연하며, 유부무기이고 정()과 본()에 통하니,

帶質有覆이며 通情本이니,

 

대질경(帶質境)이란 주관과 객관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적 대상으로 비량(比量) 즉 유추하여 분별하는 것인데 이것은 진대질(眞帶質)과 사대질(似帶質)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진대질은 제7말나식이 제8식의 견분(見分)을 자아로서 반연하는 것으로, 이것은 마음으로써 마음을 반연하는[以心緣心] 것이지 객관적인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대질은 제7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사대질은 마음으로 경계를 반연하는[以心緣境] 것입니다. 따라서 진대질은 전적으로 주관에 그치지만 사대질은 주관에서 객관을 반연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거나 나무를 볼 때 비량으로 분별하여 아는 것을 사대질이라고 하기 때문에 여기 7식송에서 말하는 대질은 곧 진대질인 것이며, 사대질은 외경을 반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에 속하는 것이 됩니다.

무기의 삼성(三性) 중 무기는 선악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으로, 이것은 유부무기(有覆無記)와 무부무기(無覆無記)로 구분됩니다. 유부무기는 제7식의 18가지 마음작용이 먼지가 덮여 있듯이 덮여서 수행을 방해하기 때문에 유부라고 이름하며, 무부무기는 무엇이 덮여 있기는 하지만 제8식에서 다만 5변행(徧行)만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에 무부라고 이름합니다. 실제로는 진여자성을 깨친 대원경지에서 볼 때는 제8식도 무부무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중생의 차원에서 볼 때는 제7식은 18심소에 덮인 것이 심하기 때문에 쉽게 그 덮인 것을 알 수 있어서 유부무기라 하고, 8식은 5변행만이 작용하여 미세하므로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무부무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 정은 제8식의 견분을 말하고 본은 본질을 뜻하는 것으로, 7식은 바로 이 정과 본에 모두 통하여 작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과 본에 통함이란 제7식이 제8식의 견분을 반연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연을 따라 자아를 집착하며 비량(非量)이라.

隨緣執我하며 量爲非.

 

7식은 인연을 따라 자아를 집착하는데 이것은 비량에 속합니다. 비량은 안개를 연기로 잘못 보듯이 제7식이 제8아뢰야식을 자아로 잘못 보고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덟 가지 큰 번뇌와 변행과 별경 중의 혜()

탐욕과 어리석음과 아견과 아만이 서로 따르느니라.

八大徧行別境慧貪痴我見慢相隨니라.

 

7식에는 51가지 마음작용 중에 18가지가 작용하는데, 대수혹(大隨惑) 여덟 가지와 변행(徧行) 다섯 가지, 다섯 가지 별경(別境) 중에서 혜()와 탐욕[]과 어리석음[]과 아견(我見)과 아만[我慢]18가지가 서로 상승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항상 심사하고 사량하여 아상(我相)이 따라서

중생이 밤낮으로 혼미에 빠지며,

恒番思量我相隨하여 有情日夜鎭昏迷.

 

7식은 제8식의 견분(見分)을 자아[]라고 항상 심사하고 헤아립니다. 항상함과 심사[恒審]4가지 구별이 있습니다. 8식은 항상하지만 심사는 없고[恒而非審], 6식은 심사하지만 항상하지 않고[審而非常], 5식은 심사도 항상도 않고[非恒非審], 7식은 항상하고 심사합니다[亦恒亦審], 이처럼 제7식이 항상 자아를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의해서 중생은 늘 혼미하여 생사를 유전하는 것입니다.

 

네 가지 미혹과 여덟 가지 큰 번뇌가 상응하여 일어나며 6전식은 (7식이)오염과 청정의 근거가 된다고 하느니라.

四惑八大相應起하니 六轉呼爲染淨依니라.

 

네 가지 미혹[四惑]은 탐욕[]어리석음[]아견(我見)아만(我慢)의 네 가지 번뇌를 말하고, 여덟 가지 큰 번뇌[八大]는 도거(棹擧)혼침(昏沈)불신(不信)해태(懈怠)방일(放逸)실념(失念)산란(散亂)부정지(不正知)의 여덟 가지 대수혹을 말하는데, 7식에서는 이 4혹과 8대가 항상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六轉)이란 안의의 6(六識) 전체를 말하는데, 이 전6(前六識)은 제7말나식을 의지하여 오염과 청정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7식은 전적으로 전6식의 오염과 청정의 근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환희지의 초심에서는 평등성이고, 무공용행에서는 아집(我執)을 항구히 부수느니라. 여래가 타수용신을 나투니 십지 보살이 가피를 받느니라.

歡喜初心平等性이요 無功用行我恒摧如來現起他受用하니 十地菩薩所被機로다.

 

초심은 초지(初地)를 말하고 무공용행(無功用行)은 인위적인 공용(功用)이 필요없는 제8지를 말합니다. 환희지인 초지에서는 제7식이 전환하여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이루지만, 8지의 멸진정에 가서야 자아[]라는 분별집착이 완전히 없어집니다. 거기에서는 자아라는 것이 완전히 떨쳐버려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과위(佛果位) 중에서는 여래가 타수용신(他受用身)을 나타내어 일체중생을 제도하게 되는데 십지 보살도 여기에서 그 가피를 받아 전체가 다 이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타수용신은 초지(初地) 이상의 성인을 교화하기 위하여 나타내는 불신(佛身)입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8지에서는 말나식이 없어지고 제7지에서는 6식이 없게 되는데 6식이 무루가 되면 중간의 제7식의 존재 여부가 필요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원효(元曉)스님은 그의 기신론소에서 말나식을 배당하여 7지보살은 말나식에 머물러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현수 법장(賢首法藏)스님은 의견을 달리하여 말나식을 위로는 제8식에 합하고[上合第八] 아래로는 제6식에 합하여[下合第六] 본래 그 자체가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제7식을 빼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유식의 본의에 입각하면 원효의 주장이 옳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다음은 제2능변이니 이 식을 말나식이라 이름한다. (아뢰야식)를 의지하여 전변하며 저(아뢰야식)를 반연하며 사량으로 성()과 상()을 삼느니라. 네 가지 번뇌와 항상 함께 하니 아치와 아견과 아만과 아애이며 더불어 나머지 촉 등과 함께 하며 유부무기에 포섭되느니라. 생하는 곳에 따라 계박되니 아라한과 멸진정과 출세도에는 존재하지 않느니라.

次第二能變이니 是識名末那. 依彼轉緣彼하여 思量으로 爲性相이라 四煩惱常俱하니 謂我痴我見 幷我慢 我愛이요 及餘觸等俱하며 有覆無記攝이라 隨所生所繫하니 阿羅漢滅定出世道無有니라.[57]

 

이 글은 유식삼십송에서 제7식을 설한 것입니다. 2능변, 즉 제7말나식은 아뢰야식을 의지하고 그것을 인연으로 하며 사량으로써 성()과 상()을 삼는 것입니다. 원문에서 []’는 아뢰야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7식은 바로 이 아뢰야식의 근본종자를 의지하여 활동하며 제8식의 견분을 반연하는 것입니다. 즉 그것이 의지하는 근본도 제8식이며 활동하는 상대도 제8식의 견분을 반연하는 것입니다. 또 여기에서 말하는 사량(思量)은 제6식의 사량과 구별되는 사량입니다. 6식의 사량은 완전히 드러나게 이것 저것을 의식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며, 7식의 사량은 잠재적으로 분별하는 사량입니다. 7식에는 네 가지의 근본번뇌, 즉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와 촉() 등이 수반되어 덮여 있기 때문에 제7식은 유부무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질을 가진 제7식은 삼계(三界)의 아홉지위[九地:지옥아귀축생아라한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에 따라서 생하며 거기에 계박되지만 즉 아라한과 멸진정과 출세도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면, 그것이 바로 멸진정입니다. 7지 이상의 성인을 출세도(出世道)라고 합니다.

6식은 제7지에 와서 완전히 무루가 되며 8지 이상에서는 말나식이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중간의 제7지는 말나식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7식의 존립 여부에 대한 견해는 원효스님의 말씀이 유식사상에서 보다 더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4) 8식송(八識頌)

 

()은 오직 무부무기이며 다섯 가지 변행이니

()와 지()에서 다른 업력을 따라서 생하느니라.

性唯無覆五徧行이니 界地隨他業力生이라.

 

8식에는 5변행인 촉()작의(作意)()()()가 작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행상 즉 작용이 미세하여 알기 어려우며, 수행에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에 무부(無覆)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원경지에서 진여본성을 증득하고서 보면 무부가 아니라 유부(有覆)가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무부라고 한 것은 작용이 너무나 미세하고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8식은 삼계구지(三界九地)에서 각기 다른 업력에 따라서 생하는 것입니다. 삼계구지는 미혹에 빠진 유정들이 윤회하는 세계를 말하는데, 크게 나누면 삼계가 되고 자세히 나누면 구지가 됩니다. 삼계(三界)는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말하며, 구지(九地), 욕계의 지옥아귀축생인간천상의 욕계오취(欲界五趣)를 합한 하나의 지[一地], 선정의 차이에 따라 구분한 색계의 네 지[四地]와 무색계의 네 지[四地]를 합한 것입니다. 모든 생류들은 각자의 업력을 따라서 이 삼계구지의 어느 곳엔가 생하며, 그때의 주체가 바로 제8식입니다.

 

이승은 요해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미혹하여 집착하니

이로 말미암아 능히 논주들의 쟁논을 흥기하였느니라.

二乘不了因迷執하니 由此能興論主諍이라.

 

8아뢰야식의 행상(行相)이 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이승(二乘)인 성문과 연각은 잘 모르므로 미혹하여 제8아뢰야식을 근본진여로 집착합니다. 그러므로 후대에 와서 유식파의 여러 논사들은 이 아뢰야식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논쟁을 했던 것입니다.

해심밀경에서 부처님이 이승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아뢰야를 이승에게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아뢰야의 행상이 너무나 미묘하기 때문에 이승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여로 집착하므로 그것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인도에서도 이승들은 아뢰야의 존재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없다고 주장했지만 대승논사들은 분명히 있다고 주장하면서 갖가지 증거를 보이고 있으며, 유식론(唯識論) 등을 보면 상세하게 열거되어 있습니다. 일부 일본학자들은 이러한 논쟁을 취급함에 있어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기도 합니다. 즉 대승논사들이 논쟁을 하기는 했지만 아뢰야가 꼭 있다고는 입증하지 못했으며, 그들의 이론으로는 아뢰야의 존재 증명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아뢰야의 주장과 전생 또는 윤회에 대한 교설은 전적으로 방편에 불과하다고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실험심리학에서의 전생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논란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듯합니다. 만약에 전생이 입증된다면 제8아뢰야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연히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실험심리학에서는 전생의 존재가 증명되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에 아뢰야식의 존재는 부정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전에 이미 여러 큰스님들께서 아뢰야가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많이 증명했습니다만 그 증명하는 방식이 다소 철저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것만으로는 후세학자가 그에 의거하여 아뢰야를 입증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던 것인데, 사실 그 난점은 아뢰야식 그 자체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고 미묘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광대한 세 가지 장()은 끝을 다할 수가 없으며,

活活三藏不可窮이며,

 

아뢰야는 장()이라고 번역하는데, 이 장에는 능장(能藏)소장(所藏)아애집장(我愛執藏)의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물론 아뢰야식은 이렇게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뢰야식이 너무나 넓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성격에 따라 편의상 나누어 설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능장(能藏)이란 제8아뢰야식과 종자와의 관계에서 아뢰야식이 일체만법을 낳는 종자를 간직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소장(所藏)은 만법의 종자가 아뢰야식에 갖추어져 있다는 측면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아애집장(我愛執藏)은 아뢰야식이 끊임없이 계속 이어져서 중생의 주체가 되므로 제7말나식이 이것을 잘못 알고 나[]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의미를 포괄하는 아뢰야식은 그 뜻이 깊고 넓기 때문에 그 궁극을 범부로서는 가히 측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근원이 깊어서 전7식은 물결이며 경계는 바람이 되고.

淵深하여 七浪境爲風하고

 

8식의 근원은 매우 깊어서 전7(前七識)인 제7식과 전6식은 제8식의 바다에서 파도와 같고 그 경계는 바람과 같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훈습을 받아 종자와 근신과 기계를 지니며,

受熏하여 持種根身器하며,

 

훈습을 받는다함은 아뢰야식이 전7식의 모든 훈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6식이 죄를 지으면 자연히 제8식에 훈습되어 제8아뢰야식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에 상응하는 종자와 신체[根身]와 자연계[器界]가 나타나게 됩니다.

 

갈 때는 나중에 가고 올 때는 먼저 와서 주인공이 되느니라.

去後來先하여 作主公이라.

 

갈 때란 죽을 때를 말하는 것이고 올 때란 새로 몸을 받아서 태어날 때를 말하므로 이것은 곧 생사윤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는 의식이 전부 그치고 제7식은 작용을 못하지만 제8아뢰야식만은 생명을 마칠 때까지 남아 있다가 생명이 끊어질 때, 즉 윤회할 때 최후까지 남아서 따라갑니다. 또 사람이 다시 몸을 바꾸어 환생할 때에 제6의식이나 제7식은 작용하지 않지만 제8아뢰야식은 제일 먼저 와서 그 중생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부동지 이전에 이미 장식(藏識)을 버리고

不動地前纔捨藏하고

 

8지인 부동지 전인 7지가 되면 훈습된 번뇌종자를 함장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장식(藏識)이란 명칭을 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부동지에서부터는 장식 대신 이숙식(異熟識)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금강도 후에 이숙식이 공()해지며

金剛道後異熟空하며

 

금강도(金剛道)는 등각보살이 금강대정(金剛大定)에 들어간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숙식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금강도 후, 즉 대원경지가 현발할 때에 비로소 이숙식이 완전히 공해지는 것입니다.

이숙식이란 선악의 업()으로 인하여 받게 되는 과보로서 이 이숙식이란 명칭은 범부로부터 금강도의 보살에 이르기까지 적용되며, 오직 불과(佛果)인 묘각(妙覺)에서만 그 명칭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대원경지에 이르러서야 제8아뢰야식의 근본이 완전히 공해진다는 말이 됩니다. 그만큼 제8아뢰야식은 행상이 미묘하고 깊어서 알기 어렵고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등각 후인 묘각(妙覺)에 가서야 이숙식이 공함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원경지와 무구식이 동시에 발생하여

大圓無垢同時發하여

 

대원(大圓)이란 대원경지(大圓鏡智)를 말하는데, 유루(有漏)의 아뢰야식이 전환될 때 나타나는 청정하고 원만한 지혜입니다. 그리고 무구(無垢)란 유루의 아뢰야식이 무구식(無垢識) 또는 백정식(白淨識)이 되는 것, 즉 진여를 뜻합니다. 이 둘은 동시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8아뢰야식이 무구식 즉 백정식이 될 때 대원경지가 나타나며, 대원경지가 나타날 때 바로 무구 백정식이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발생한다고 하여 대원경지와 무구식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이 둘은 말만 다를 뿐 그 자체는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발생할 때 부처님의 경지인 묘각의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널리 시방의 모든 세계를 비춘다.

普照十方塵刹中이로다.

 

아뢰야식이 전환하여 대원경지를 이루고 그 광명이 널리 시방의 모든 세계를 두루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자고로 고불고조(古佛古祖) 중에서 옳게 공부하여 참 조사 노릇을 한 이들은 모두가 미망(迷妄)의 뿌리가 완전히 빠진 자리에서 견성했다고 말했지, 어느 한 사람도 아뢰야식의 뿌리가 빠지기 전에 견성했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감산스님도 팔식규거통설(八識規矩通說)마지막 부분에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식이 그대로 있을 때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의식이 완전히 끊어져 제7지 보살의 경지인 무상정(無想定)이 될 때에도 제7말나식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완전한 색자재(色自在)의 멸진정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몽중일여(夢中一如)로 꿈속에서는 일여(一如)하지만 오매일여(寤寐一如)는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7말나식의 근본이 완전히 빠져버리게 되면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에는 숙면에서도 일여가 되어 오매일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경록이나 유식술기등에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공부를 완전히 성취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제8마계(第八魔界)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 무심(無心)의 경지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무심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재보살로서 색자재(色自在)하고 심자재(心自在)하고 법자재(法自在)하지만 제8910등각보살들도 공에 빠지고 적멸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沈空滯寂] 아직 아뢰야 마계에 있는 것이 되므로 자성을 바로 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장식(藏識)이라는 이름은 버렸지만 아직도 이숙식(異熟識)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색자재 이상에 가서 이숙식이 완전히 공한 대원경지를 증득해야만 공부를 바로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은 아뢰야식이니 이숙식이며 일체종자이다. 가히 알 수 없는 집수(執受)와 처()와 요()이니 항상 촉작의사와 상응하느니라. 오직 사수(捨受)이며 무부무기이니 촉()등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항상 전변함이 폭포수가 흐르는 것과 같아 아라한의 지위에서 버리느니라.

阿賴耶識이니 異熟이며 一切種이라. 不可知執受處常與觸作意受想思相應하니라. 唯捨受是無覆無記觸等亦如是恒轉如瀑流하여 阿羅漢位하니라. [大正藏 31, p.60 , 24]

 

이 글은 유식삼십송에서 아뢰야식을 설한 것인데 마음을 심층에서 표층을 향하여 능동적인 입장에서 고찰하면 제일 처음이 초능변(初能變)이라고도 불리는 아뢰야식입니다. 이 아뢰야식을 인과 상속의 관계에서 보았을 경우 이숙식이라고 부르며 일체제법과의 관계에서 보았을 경우 종자식이라고 부릅니다. 또 여기에는 일체의 훈습된 종자가 함장되는 곳이기도 하고 무몰식(無沒識)이라고 하듯이 없어지지도 아니하며, 일체의 원인과 결과를 갖추고 있는 근본적 장소 또는 중심체로서 우리가 알기 어려운 미세한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뢰야식은 51가지 마음작용 중에서 촉()작의(作意)()()()5가지와 상응하여 작용할 뿐이며, 그 감수하는 성질은 선무기 중에서 무기이며 특히 번뇌가 없는 무부무기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무부라고 하는 것은 번뇌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게는 너무나 그 존재형태가 미세하여 그렇게 말할 뿐입니다. 이처럼 미세하여 알기는 어렵지만 그 작용은 마치 폭포수가 간단없이 흘러내리듯이 끊임없이 작용하며 존재하는 것으로 아라한(阿羅漢)의 위치에 가서야 비로소 없어지는 것입니다.

능엄경에 그러한 비유가 있듯이, 물이 아주 깨끗하면 그 물이 폭포수같이 흘러내려도 그 행상을 모르는 것처럼, 아뢰야식도 이와같이 그 행상이 극히 미세하여 중생들은 이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라한의 자리에서 없어진다고 하기는 했지만, 그 의미를 좀더 세분하면 아라한의 자리에서는 장식 즉, 아뢰야식이라는 이름만 버릴 뿐 이숙식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제8식 자체가 다 없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뢰야식이라는 명칭을 버리는 아라한의 자리는 삼승(三乘)의 무학위(無學位)인 아라한을 뜻하지만, 여기에는 제8지 이상의 대승보살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집을 영구히 끊어서 아뢰야식의 명칭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삼승의 아라한과 제8지 이상의 보살만이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5) 4지송(四智頌)

 

흔히 교가(敎家)에서는 식을 전환하여 지를 이룬다[轉識成智]’고 말하는데, 여덟 개의 모든 식[諸八識]을 전환하여 네 가지 지혜[四智]를 성취한다는 뜻으로, 이는 유식학이 표방하는 기본도리입니다. 8식이라는 것은 중생생활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중생이 성불하여 구경각을 성취하면 네 가지 보리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유식학에서는 네 가지 지혜를 취급함에 있어서 8식이 반드시 전환해야만 네 가지 지혜가 성취될 수 있다는 입장이 통설입니다. 그러나 육조스님은 그러한 통설에 따르지 않으면서도 독특하고, 오히려 타당할 수도 있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즉 육조스님은 여덟 식을 전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여덟 식의 자성이 본래 청정한 것을 바로 깨달으면 여덟 식 그대로가 네 지혜[四智]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육조스님의 4지송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대원경지는 자성이 청정한 것이며,

大圓鏡智性淸淨이요.

 

대원경지는 제8(第八識)의 자성이 청정한 것을 말합니다. 8식을 끊고 제8식을 전환하여 대원경지를 증득하는 것이 아니라 제8식의 자성이 청정한 그대로가 대원경지인 것입니다. 자성을 청정하게 한다고 하면 이것은 육조스님의 뜻과는 정반대가 되어버립니다. 육조스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대원경지의 성품은 본래 청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청정하게 한다고 다시 반복하여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평등성지는 마음에 병이 없음이며,

平等性智心無病이요.

 

이것도 대원경지와 마찬가지입니다. 평등성지는 바로 제7말나식에 병이 없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7식에 미혹과 집착의 병이 없는 상태가 바로 평등성지인 것입니다.

 

묘관찰지는 공용이 없음이며,

妙觀察智見非功이요.

 

묘관찰지는 무루(無漏)의 제6식을 말합니다. 6의식이 경계를 대하여 힘쓰는 것[功用]이 있으면 곧 집착을 일으킵니다. 이런 공용이 없는 것을 비공(非功)이라 하고 곧 무심(無心)을 의미합니다. 무공용이 되면 제6식 그대로가 묘관찰지가 되는 것입니다.

 

성소작지는 대원경지와 같으니라.

成所作智同圓鏡이로다.

 

성소작지는 청정한 전5식을 뜻하는데 이것은 대원경지와 같습니다. 5식은 제8식을 의지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제8식이 청정하여 대원경지가 될 때 그것도 더불어 성소작지가 됩니다. 5(五根)으로 행하는 일체가 대원경지의 작용이 됩니다.

 

5식과 제8식은 과상(果相)에서 전환하고 제6식과 제7식은 인중(因中)에서 전환하나,

五八六七果因轉이나

 

5867은 각각 전5867식을 말합니다. 6식은 무상정인 제7지에 들어갈 때 완전히 없어지므로 인중에서 전환하고[因中轉], 7식도 멸진정에 들어갈 때 없어지므로 역시 인중에서 전환합니다. 그러나 제8식은 금강도(金剛道) 후에 이숙식(異熟識)이 공하게 되므로 등각의 최후심이 모두 다 끊어진 묘각을 성취하는 완전한 과위(果位)에서 전환되기 때문에 과상()에서 전환한다고 합니다. 5식은 제8아뢰야식이 대원경지가 될 때 비로소 더불어 성소작지가 되는 것이므로 또한 과상()에서 전환한다고 합니다.

 

단지 전환이라고 말할 뿐 참성품은 없느니라.

但轉名言이요 無實性이라.

 

과상에서 전환하고 인중에서 전환한다는 것은 단지 말로서만 전환이라고 할뿐으로 실성(實性)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실지로 전환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가에서도 이름을 바꾸었을 뿐 그 체를 바꾼 것은 아니다[改名不改體]’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제8식을 전환해서 대원경지가 되었다고 하는 것도 실은 이름만을 바꾼 것이지 제8식 자체를 바꾸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8식이 청정한 그대로가 곧 대원경지로, 8식의 자성이 청정한 것 외에 따로 대원경지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환한다는 것은 단지 이름만을 바꾼 것에 불과한 것으로 그 체는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만약 전환하는 곳에서 정념을 두지 않으면,

若於轉處不留情이면

 

이는 제8식이 대원경지로 전환하고 제7식이 평등성지로 전환하는 등 전환하는 곳에서 일체의 분별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분별이 없다는 것은 심층의 무분별까지 없음을 뜻하는 것으로, 전체적으로 제8아라야의 미세한 분별까지 없다는 것입니다.

 

흥성하게 영원히 나가정(那伽定)에 머무느니라.

繁興永處那伽定이로다.

 

나가(那伽)라는 말은 용()을 뜻하는데 부처님이 선정에 들어 자유자재하심이 마치 용이 허공이나 바다에서 자유자재하게 노니는 것과 같음을 비유하여 나가정(那伽定)이라고 한 것입니다. 누구나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자성이 청정함을 바로 자각하면 그대로 나가정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는 식을 끊고 전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4. 삼시교판(三時敎判)

 

법상종은 교판(敎判)할 때에 삼시(三時) 즉 세 시기로 나누어 했는데, 이 삼시교판은 해심밀경(解深蜜經)의 무자성상품(無自性相品)의 설에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제1(第一時)에서는 자아[]는 없으나 법()은 존재한다는 아공법유(我空法有)를 설했고, 2(第二時)에서는 제1시와 달리 자아뿐만 아니라 법까지도 모두 공() 하다고 설했으며, 3시에서는 앞에서처럼 유나 공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中道)를 말했다고 합니다. 이 삼시설에 기준하여 법상종은 바로 제3시의 중도교(中道敎)에 속하므로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유식법상종이 계승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삼시교판에 이와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삼시설을 통하여 범상종이 주장하는 중도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필 수 있습니다. 이제 규기스님의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내용을 중심하여 고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1시 유교(有敎)

 

부처님이 가르침을 시설할 때에 근기에 따라서 베푸셨으니 근기에 세 종류가 있어서 같지 않으므로 가르침도 세 시기를 따라 또한 다르니라. 모든 중생의 무리가 무명에 눈이 멀어 혹()과 업()을 지어서 일으키고 미혹하여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여 생사의 바다에 빠져 의지할 곳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대비하신 부처님이 처음에 정각을 이루어 선인녹원(仙人鹿苑)에서 사제(四諦)의 법륜을 굴려 아급마(아함경)를 설하고 아집을 제거해서 하근기들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성인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사제(법문)를 듣고 비록 아집의 어리석음은 끊었으나, 모든 법에 미혹하여 (법이)실제로 있다고 집착하였느니라.

如來說敎隨機所宜이러니 機有三品不同할새 敎遂三時亦異니라. 諸異生類無明所盲하여 起造惑業하고 迷執有我하여 於生死海淪沒無依니라. 大悲尊初成佛己하여 仙人鹿苑轉四諦輪하여 說阿笈摩하고 除我有執하여 令小根等으로 漸登聖位하니라 彼聞四諦하고 雖斷我愚而於諸法迷執實有니라. [成唯識論述記, 大正藏 43, p.229 ]

 

부처님이 가르침을 시설할 때에,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설하셨는데 그 근기를 크게 세 등급으로 나누고 가르침도 여기에 맞추어 세 시기로 나누어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설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든 중생들은 무명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미혹한 업을 짓고, 하근기의 중생들은 나[]의 실체가 있다는 아집(我執)을 지어 생사에 윤회하여 해탈의 길을 밟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 정각을 이루어 선인녹원에서 사제의 법륜을 굴려 아함경(阿含經)을 설해서 최하근기의 중생들로 하여금 아집을 버리고 점차적으로 성위(聖位)에 들도록 하여 마침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제의 법문을 듣고 아집을 버렸지만 모든 법에 대해서는 법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법집(法執)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즉 아공(我空)은 됐지만 법공(法空)은 되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공법유(我空法有)로서 이들은 유견(有見)에 속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참고로 알아둘 것은 선인녹원에서 사제의 법륜을 굴렸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다섯 비구를 위해서 설법한 것을 말하는데, 그러면 부처님은 녹원에서 사제를 설하실 때 아공만 설하고 법공은 설하시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교판입니다. 녹원에서 부처님이 사제를 설하든 팔정도(八正道)를 설하든 혹은 무엇을 설하든지간에 그것은 분명히 중도를 근본으로 삼아 설법하셨지, 어느 것 하나 중도를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즉 중도 이것이 팔정도라고 선언해 놓고 사제법문도 설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이라는 것을 말할 때도 아()나 아소(我所)의 공인 아공(我空)만이 아니라 법공(法空)도 또한 설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부파불교(部派佛敎) 이후로 소승불교라는 것이 흥기하여 아()가 공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법에 집착하여 유견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승의 부파가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사제법문을 순전히 유견에 의지해서 해석하면서 이 견해가 널리 퍼져서 마침내 아공법유(我空法有)를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부파불교 이후 소승불교에서 주장하는 아집(我執)과 유견(有見)의 사제, 즉 생멸사제(生滅四諦)를 전제로 하여 주장하는 것이지 실제로 부처님이 설하신 중도정견(中道正見)에 입각하여 설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즉 부처님이 녹원에서 설하신 것은 중도이지 소승불교에서 주장하는 생멸사제는 아닙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녹원설법을 순전히 생멸사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부처님의 녹원설법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녹원에서 사제의 법륜을 굴린 것은 순전히 아공법유이지 실제 중도는 아니다라는 것은 잘못된 견해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위의 견해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부파불교 이후에 생겨난 소승불교의 유견(有見)을 상대로 한 말일 뿐으로 엄밀히 말하면 녹야원에서 초전법륜한 것을 대상으로 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녹야원의 초전법륜에서는 중도를 가지고 설한 것이지 아집과 유견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2) 2시 공교(空敎)

 

세존이 법이 있다는 집착을 제거하기 위하여 다음에 영축산에서 모든 법이 다 공하다는 것을 설하시니 이른바 마하반야경 등이다. 중근기의 중생으로 하여금 소승을 버리고 대승으로 들어가게 하니, 그들은 세존이 비밀한 뜻으로 무()를 설하여 유()를 파하는 것을 듣고 문득 이제(二諦)의 성()과 상()이 모두 공한 것이라고 떨쳐버려서 위 없는 도리로 삼았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두 성인이 서로 유와 공을 집착하여 그릇됨이 다투어 일어나 중도에 계합되지 않았느니라.

世尊爲除彼法有執하여 次於鷲嶺說諸法空하시니 所謂摩訶般若經等이라 令中根品으로 捨小趣大하니 彼聞世尊密義意趣說無破有하고 便撥二諦性相皆空하여 爲無上理하니 由斯하여 二聖互執有空하여 迷謬競興하여 未契中道니라.

 

세존이 소승의 법집(法執)에 대한 유견(有見)을 타파하기 위하여 영축산에서 모든 법이 다 공하다는 것을 설하니 그것이 소위 마하반야경(摩訶般若經) 등입니다. 여기서 중근기의 중생들로 하여금 소승의 유견을 버리고 대승의 공견(空見)으로 들어가게 했는데, 그들은 세존이 비밀한 뜻으로 무를 설하여 유를 파하는 것을 듣고서는 일체만법이 다 공한 줄을 알아 유무이제(有無二諦), 진속이제(眞俗二諦), 이사이제(理事二諦) 등의 상대적인 이제는 모두 다 떨쳐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두 성인, 다시 말하면 대승보살이라 해도 아직 공견(空見)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과 소승의 아라한과를 증득한 사람들을 포함한 이 성인들이 소승쪽에서는 유를 집하고 대승보살 쪽에서는 공을 집하여 그릇됨이 계속해서 자꾸 일어나니 중도에 계합하지 못하여 중도를 모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교판은 초전법륜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성립된 교판이므로 정당한 교판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직 공과 유가 원융무애한 것만이 정견이 되며 공과 유 어느 한 쪽이라도 집착하게 되면 불교의 정견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충분히 소개되었고 또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3시 중도교(中道敎)

 

여래가 이 공과 유의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세 번째 시기에 요의교(了義敎)를 말씀하시니 해심밀경등의 모임에서 모든 것이 오직 식뿐이라는 등 마음 밖에 법이 없다고 설하여 처음의 유집을 부수고, 안으로 식이 없지 않으므로 모든 것이 다 공하다는 집착을 버려 유견과 무견을 떠나 바르게 중도에 머무르게 하였다. 진제의 도리에 깨쳐 증득함이 분명히 있고 속제 중에 묘하게 능히 머물면서 버리느니라.

如來爲除此空有執하여 於第三時演了義敎하시니 解深密經等會說一切法唯有識等하여 心外法無破初有執하고 非無內識으로 遺執皆空하여 離有無邊하고 正處中道하니 於眞諦理悟證有方하고 於俗諦中妙能留捨니라.

 

바로 앞에서 해설한대로 한 쪽은 유를 집착하고 또 한 쪽은 공을 집착해서 서로 옳다고 다투기에 여래께서 공과 유의 집착을 제거하기 위하여 세 번째 시기에 비밀히 말하지 않고 요의교, 즉 중도사상을 제대로 다 표현한 해심밀경을 설하여 일체 모든 것이 오직 식만 있지 객관적인 경계는 없다고 하여 유식(唯識)을 주장합니다. 이와같이 유식종에서는 모든 경계는 오직 식뿐이며 경계라는 것은 모두 식의 소산이라 하여 마음밖에 법이 없음[心外法無]을 주장하여 객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모든 법이 실유한다는 유집(有執)을 부수어버립니다. 즉 유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경계를 대하여 법에 집착하지만 그것은 오직 식만이 있고 경계는 없다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며, 이 심외법무의 도리로 유집을 타파합니다. 또 유집을 부수어서 일체가 공하게 되므로 전체가 다 공하니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즉 안으로 식이 분명히 있다[非無內識]고 주장하여 일체가 다 공하다는 집착을 또한 타파합니다.

따라서 먼저 오직 식만 있고 경계는 없다고 하여 경계를 부수어버리고 그 다음에 공한 가운데 활동하는 식이 있으므로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니 전체가 다 공이라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유집도 부수어버리고 무집도 부수어버려 유견과 무견을 다 떠나게 됩니다. 소승에서 주장하는 유견도 떠나고 대승에서 주장하는 무견공견도 다 떠나 바로 중도에 들어가 진제의 도리에 대한 깨침이 분명히 있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공하다고 하여 아주 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다고 하면 이것은 단공(斷空)에 떨어져 공견외도(空見外道)가 되고 불교가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진제의 도리에 분명히 깨침이 있어 일체가 공한 가운데 유가 있고, 또한 속제(俗諦) 중에 묘하게 능히 머물러 있으면서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속제라는 것은 유()를 말하고 버림[]은 공으로 보아 결국 유가 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맨 마지막 구절인 진제의 도리에서 깨쳐 증득함이 있다함은 공이 즉 유이고, ‘속제 중에 묘하게 능히 머물면서 버린다함은 유가 즉 공으로서 공즉시색 색즉시공과 아주 비슷한 뜻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중도가 안될래야 안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 번째 시기(第一時)와 두 번째 시기(第二時)에서는 유와 공을 각각 집착하여 공과 유가 완전히 상통하지 못했지만, 공견과 유견을 다 버려놓고 보니 진제 중에 속제가 있고 속제 중에 진제가 있으며, 공 중에 유가 있고 유 중에 공이 있어 서로 상즉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쌍차쌍조와 비슷한 설명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상()에 집착한 것으로 천태나 화엄과 같이 사사무애하고 원융무애한 완전한 이론전개는 되지 못한 것이라고 나중에 현수스님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또 지금 이 논은, 이치는 유식의 삼성십지인과와 행위의 상()을 밝힌 대승이다. 그러므로 세 번째 시기 중도의 가르침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又今此論理明唯識三性十地因果行位了相大乘이라 故知第三時中道之敎也니라. [唯識述記;大正藏 43, p.230 ]

 

유식을 근본으로 하는 이 성유식론은 유식에서 설하는 삼성(三性)과 십지(十地)와 인과(因果)와 행위(行位)의 상()을 밝힌 대승[了相大乘]입니다. 모든 상을 밝힌 유식법상종이라 하는 것은 불교의 근본인 중도종(中道宗)이지 유견이나 무견에 속한 변견(邊見)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전에도 여러 번 말했지만 법상종에서 주장하는 것은 상세히 검토해 보면 화엄이나 천태에서 말하는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원융무애한 교리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하여 실질적인 중도가 아니고 일종의 중간입장이 되어버려 실제로 중도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법상종에서 주장하는 제3시 즉 소승의 유와 반야의 공이 상즉한 것을 설할 때, 자기네는 공()중에 유()가 있고, 유중에 공이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화엄이나 천태에서 말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5. 유식중도설(唯識中道說)

 

법상종에서 주장하는 중도설을 찾아보면 먼저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 거론하는 바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성유식론에서는 ()와 법()은 있는 것이 아니며 공()과 식()은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유식설이 중도교(中道敎)이지 공견(空見)이나 유견(有見)에 집착한 변견(邊見)이 아님을 밝혔습니다. 이 뜻을 이어받아서 성유식론술기에서는 그 의미를 상세히 논하여 유식종의 중도설을 선양하고자 하였습니다. 이하에서 먼저 유가사지론의 중도설을 소개한 후 성유식론의 주장과 그에 대한 술기의 해석을 참조하여 법상종에서 말하는 중도설을 해명하겠습니다.

 

있음과 있지 않음의 두 가지를 함께 멀리 떠나는 것은 법상(法相)이 포섭하는 진실한 성품의 일이니 이것을 둘이 아니라고 이름한다. 둘 아니므로 중도라 이름하며 양변을 멀리 떠남을 또한 위없음이라고 이름하느니라.

有及非有二俱遠離法相所攝眞實性事是名無二니라 由無二故設名中道遠離二邊亦名無上이니라. [瑜伽論;大正藏 31, p.487 ]

 

유식학의 소의경전인 유가론(唯伽論)에서 무엇을 최고 원리로 삼았느냐 하면 있음[]과 없음[]의 두 변을 떠난 둘이 아닌 중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수승하고 위없는 이치라고 하였으니 유식학에서 주장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두 변을 여읜 중도에 있는 것입니다. 그 중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를 뒷날 유식학의 큰 비중을 차지한 성유식론에 의거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증감 양변을 여의어서 유식의 뜻을 성취하고 중도를 깨닫느니라.

由斯遠離增減二邊하여 唯識義成하고 契會中道니라. [成唯識論;大正藏 31, p.39 ]

 

감의 양변이란 양변이 늘거나 줄어드는 등 생멸(生滅)이나 유무(有無)의 양 극단에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양변에 집착하면 이는 유식을 모르는 사람이며, 이 양변을 여의어야 유식의 근본뜻인 중도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식의 궁극적인 목표가 중도를 성취하는 것이라는 성유식론의 주장은 유가론의 사상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식에 대하여 응당 깊이 믿어 받아들이라. ()와 법은 있는 것이 아니며, ()과 식()은 없는 것이 아니다. 있음을 떠나고 없음을 떠나므로 중도에 계합하느니라.

故於唯識應深信受하라 我法非有空識非無니라 離有離無일새 故契中道니라. [成唯識論;大正藏 31, p.39 ]

 

유식에 대하여 마땅히 깊은 신심을 내어 유식의 도리를 바로 알아야 됩니다. 자아와 법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非有], 또 자아와 법이 공하다고 해서 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니[非無], 있음도 떠나고 없음도 떠나서 비로소 중도에 계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식에서 주장하는 중도의 내용입니다. 성유식론의 이 구절에 대한 유식술기의 해석은 아래와 같습니다.

 

술기에서 말하였다. 마음 밖에 실재하는 것으로 헤아리는 자아와 법은 있는 것이 아니요, 진여(眞如)의 공리(空理)와 능연(能緣)의 진식(眞識)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니, 혹 공은 그 이치며 식은 세속의 일이다. 처음에는 있음을 떠나고 나중에는 없음을 떠나므로 중도에 계합하느니라.

述曰謂心外所計實我法非有眞如理空及能緣眞識非無라 하니 或空卽其理識卽俗事初離有後離無하여 故契中道니라.[唯識述記;大正藏 43, p.489 p.490 ]

 

()’이라는 것은 유식술기를 말합니다. 마음 밖에 실재하는 것으로 계량(計量)되는 자아니 법이니 하는 것은 다 공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非有], 진여공리와 능연진식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非無]. 아집이나 법집의 경계 전체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아와 법이 다한 진여공(眞如空)도 아주 없는 것이 아니며 이를 반연하는 능연의 진식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있고 없음을 떠난 이것이 유식법상종에서 말하는 중도의 근본원리입니다.

 

자존(慈尊)이 이것에 의지하여 두 게송을 말하셨다. ‘허망한 분별이 있으나 여기에는 둘이 모두 없으며, 이 가운데는 오직 공만이 있으며 저 것에도 또한 이것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일체법은 공도 아니고 공 아님도 아니며, 있고 없음과 함께 있음으로 이것이 곧 중도에 계합하는 것이라 하였느니라.

慈尊依此說二頌言호대 虛妄分別有이나 於此二都無此中唯有空하며 於彼亦有此하니 故說一切法非空非不空이며 有無及有故是則契中道니라.[成唯識論;大正藏 31, p.39 ]

 

이 구절은 성유식론의 앞 부분 본문에 계속해서 설해지는 것인데 편의상 이렇게 나눈 것입니다.

자존(慈尊)’은 미륵보살을 말합니다. ‘이것에 의지하여에서 이것은 앞에서 해설한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를 말합니다. 허망분별이 있는데 여기에는 능()과 소(), 즉 주체와 객체 두 가지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허망분별이란 객진번뇌, 망상 등을 말하는데, 허망한 분별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그 자체에 있어서는 공하기 때문에 능(能所)가 다 공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이 가운데에는 공만이 있고, 저것에도 또한 이것이 있다고 하는 데에서 이 가운데에서는 허망분별이고 저것은 공을 말합니다. 즉 허망분별이 있는 이 가운데 오로지 공()이 있으며 그 공 속에 또한 분별의 유()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공이 즉 유이고 유가 즉 공이다 라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만법이 공도 아니고 공 아님도 아니며,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무이면서 유이므로 중도에 계합되는 것입니다. 이 게송은 중요하기 때문에 이하에서 이 게송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한 술기의 해석을 계속 덧붙여 설명하겠습니다.

 

술기에 말하기를, 허망분별이 있다는 것은, 곧 삼계에 허망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요.

述曰虛妄分別有者卽有三界虛妄心也. [大正藏 43, p.490 ]

 

허망분별은 삼계에서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윤회할 때에 허망하게 분별하는 망상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둘이 모두 없다는 것은, 능취와 소취의 둘이나, 혹은 아와 법의 둘이 허망한 마음 위에는 없음을 말함이다.

於此二都無者謂能取所取二或我法二於妄心之上都無.

 

능취나 소취, 또는 자아나 법 할 것 없이 모두가 허망한 마음 가운데서 실제로 그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허망한 마음 가운데에 능취와 소취가 없게 되면, 이 마음은 생멸망견(生滅妄見)이 아니고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됩니다. 진공묘유라는 것은 유는 유인데 진공의 유이고, 공은 공인데 묘유의 공을 말합니다.

 

이 가운데 오직 공만 있다는 것은, 이 허망한 마음 가운데 오직 진여가 있다고 하는 것이니, 진여는 공성이다. 공에 의지하여 나타나므로 앞의 긴 행에서 공과 식이 있다고 말한 것도 또한 이를 가지고 알 것이다. 오직[]이란 결정하는 뜻이니, 의타기성 중에 결정코 오직 공이 있기 때문이니라.

此中唯有空者謂此妄心中唯有眞如이니 眞如是空性이라 依空所顯故前長行言空識是有亦惟此知니라()是定義以依他中決定唯有空故이니라.

 

허망한 마음 가운데 진여가 있다고 하는 것은 무명의 실성이 곧 불성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무명 즉 분별하는 망심(妄心) 자체가 근본적으로 공하기 때문에, 무명 이대로가 불성이고, 허망한 분별망심 이대로가 진여입니다. 그러므로 진여 밖에 망심없고 망심 밖에 진여가 없는 것입니다.

 

저것에도 이것이 있다는 것에서, 저것이란 저 공성(空性)중이요, 또한 이것이 있다함은 허망한 분별이 있다는 것을 말함이니 곧 허망분별은 속제니라. 허망한 분별에 공이 있다는 것은 곧 속제 가운데 진제공이 있다는 것이고, 곧 진제공 가운데 또한 허망한 분별이 있다는 것이니, 바로 진제 중에 또한 속제가 있는 것이니라. 이제(二諦)는 반드시 서로 있고 없어서 하나가 없을 때는 또한 둘도 없으므로 서로 형태가 있느니라.

於彼亦有此者彼者彼空性中이요 亦有此者謂有妄分別이라 卽虛妄分別是俗諦니라 妄分別有空者卽俗諦中有眞諦空하고 卽眞諦空中亦有妄分別이니 卽眞中亦有俗諦. 二諦必相有無하여 一無時亦無二故相形有也니라.

 

저것에도 이것이 있다는 것은 공성(空性) 가운데에 허망한 분별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허망한 분별심은 속제(俗諦)이고 공성은 진제(眞諦)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제 가운데 진제가 있는 것은 색즉시공이요, 진제 가운데 속제가 있는 것은 공즉시색이니 이것은 진공묘유의 내용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법을 설한다는 것은, 유위와 무위를 말함이다. 이 둘이 없음에 의지하여 이를 공이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일체법을 다 포섭한다. 유위는 곧 허망한 분별이요 무위는 곧 공성이니, 반야경 중에서 일체법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다만 삼계의 마음마음 법을 밝혔기 때문에 오직 망심만을 말하니 이는 속제요, 망심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은 아니니라.

故說一切法者謂有爲無爲依此二無하여 名之爲空이라 故此二攝法盡이라. 有爲卽妄分別이요 無爲卽空性이니 謂般若經中說一切法이라 此中但明三界心心法故唯言妄心이니 是俗諦非無不妄心이니라.

 

둘이 없다라는 것은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이 없다는 뜻이고, 이 유위와 무위의 둘이 없음을 의지한다는 것은 공을 가지고 근본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유위법과 무위법 이 둘은 일체만법을 다 거두어 들이는데, 유위라는 것은 허망한 분별을 말하는 것으로 속제(俗諦)이고, 무위는 공성(空性)으로서 진제(眞諦)인데, 이것을 반야경에서는 일체법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는 다만 삼계(三界)의 마음 마음법[心心法]을 밝혔기 때문에 망심은 속제로서, 망심 아닌 것[不妄心] 즉 무루법(無漏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도 아니고 공 아님도 아니라는 것은, 공성에 말미암은 까닭이며 허망한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공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제(二諦)가 있기 때문이요, 공 아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능취와 소취의 둘, 혹은 아와 법의 둘이니 둘이 모두 없으므로 공 아님이 아니니라.

非空非不空者謂由空性故及妄分別故. 言非空以二諦有故非不空者謂所取能取二或我法二二皆無故非不空也.

 

분명히 공하면서 허망한 분별이 있고 허망한 분별이 있으면서 분명히 공하므로 공도 아니고 공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이 아님[非空]은 진속 이제(二諦)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니, 즉 유무든지 진속이든지 이사(理事)라든지 이런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공 아님도 아님[非不空]이라는 것은 능취와 소취 또는 아와 법, 이 두 가지가 전부 다 공한 것이므로 공 아님도 아닌 것입니다.

 

있고 없음과 함께 있음이란, 있음은 허망한 분별이 있기 때문이요, 없음은 이취(二取)나 자아와 법이 없기 때문이며, 함께 있음[及有]은 허망한 분별 가운데에 진공이 있기 때문이며, 진공 가운데에도 허망한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땅히 세 번이나 때문[]이란 글자를 말하니, 있기 때문이란 곧 허망한 분별이요, 없기 때문이란 곧 능취와 소취요, 함께 있기 때문이란 곧 세속과 공이 서로 있는 것이니라.

有無及有故者謂妄分別有故謂二取我法無故及有者謂於妄分別中有眞空故於眞空中亦有妄分別故此中應言三故字하니 謂有故卽妄分別이요 無故卽能所取及有故로는 卽俗空互有니라.

 

여기서는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 전체를 총합하여 결론짓고 있습니다. 있음[]은 허망한 분별심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요, 없음[]은 능취와 소취, 자아와 법이 없다는 것이며, 그 가운데 함께 있음[及有]은 허망한 분별심 가운데 진공(眞空)이 있고, 진공 가운데 또한 허망한 분별심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비유비무(非有非無)이면서 역유역무(亦有亦無)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 중에 속()이 있고 속 중에 진이 있어서 진과 속이 서로 무애(無碍)가 안될래야 안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속과 공이 서로 존재하여 색즉시공공즉시색과 같이 허망한 분별 자체가 진공이요, 진공 이대로가 허망한 분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공이 묘유이고 묘유가 진공으로 묘유 밖에 진공이 따로 없고, 허망분별 밖에 진여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식에서 주장하는 것은 생멸변견(生滅邊見)이 아니고, 유와 무를 떠나고 그러면서 유와 무가 서로 통하는 중도에 입각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중도에 계합이 된다 함은 이제(二諦)가 있다는 것은 청변(淸辯)의 주장과 같지 않고 이취(二取)가 없다는 것은 소승부파와 같지 않다. 그러므로 중도에 머무른다고 하느니라.

是則契中道者謂二諦有不同淸辯이요 二取無不同小部故處中道니라.

 

청변(淸辯)은 공을 주장하는 중관파(中觀派)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진제와 속제의 이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공을 주장하는 청변의 견해와 다르다는 말이고, 능취와 소취의 이취가 없다는 것은 법유(法有)를 주장하는 소승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므로 중도에 계합된다는 점을 다시 부연한 것입니다.

 

6. 삼성중도설(三性中道說)

 

법상종의 교리가 불교의 근본원리인 중도사상에 계합됨을 주장하는 또 하나의 이론으로 삼성설(三性說)이 있습니다. 삼성이란 일체 제법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타기성(依他起性)원성실성(圓成實性)의 세 가지로 구분한 것으로, 이것에 바탕하여 법상종에서는 삼성각성중도(三性各性中道)나 삼성대망중도(三性待望中道) 등을 제창하였습니다. 이 삼성설에는 유식파에서 설하는 것과 화엄종에서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삼성설은 원래 해심밀경이나 섭대승론 등 유식계통의 경론에서 설해진 것이지만, 중국의 화엄종에서는 이를 수용한 뒤 약간 보완 발전하여 화엄일승 교리의 기본 이론으로 수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삼성설을 설함에 있어 여기에서는 편의상 화엄종의 현수 법장(賢首法藏)스님이 지은 화엄일승교의분제장(華嚴一乘敎義分齊章)에 기록되어 있는 삼성설을 인용하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 까닭은 유식계통의 논서에 있는 삼성설은 화엄종의 저술에서 말하는 삼성설만큼 원융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수스님이 설하는 삼성설은 유식종의 삼성설을 보다 융통하게 발전시킨 것으로 본래 유식종의 삼성설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원융한 중도의 사상을 밝히는 데 있어서는 이 설이 보다 더 적합하므로 이것을 채택한 것입니다.

 

삼성에 각각 두 가지 뜻이 있다. 진여 가운데 두 가지 뜻은 첫째는 불변의요, 둘째는 수연의며, 의타의 두 가지 뜻은 첫째는 사유의요, 둘째는 무성의며, 소집 가운데 두 가지 뜻은 첫째는 정유의요, 둘째는 이무의니라.

三性各有二義하니 眞中二義者一不變義二隨緣義依他二義者一似有義二無性義所執中二義者一情有義二理無義니라. [大正藏 45, p.499 ]

 

삼성이란 원성실성(圓成實性)의타기성(依他起性)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일체 제법의 성질을 세 가지로 분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삼성의 각각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원성실성은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내는 말로 진여(眞如)라고도 합니다. 여기에서 원문에 ()’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이 원성실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원성실성은 현장스님의 번역이며, 진제스님은 진실성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원성실성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변하지 않는다는 뜻인 불변의(不變義)와 연에 따라 변한다는 뜻인 수연의(隨緣義)가 그것입니다. 또 원성실성은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도 표현하는데 진공은 불변의에 해당하고 묘유는 수연의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불변수연이나 진공묘유는 결과적으로 같은 의미가 됩니다. 의타기성은 만법이 연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임시로 존재한다는 뜻인 사유의(似有義)와 실성이 없다는 뜻인 무성의(無性義)가 그것입니다. 일체만법은 연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성이 없는 것입니다. 변계소집성은 집착과 미망의 세계를 가리키며 여기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망정이 있다는 뜻인 정유의(情有義)와 참된 도리가 없다는 뜻인 이무의(理無義)가 그것입니다. 미혹의 망정은 있지만 진실한 이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삼성의 이치를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는 뱀[]과 새끼줄[]과 삼[]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삼으로 새끼줄을 만들어 길바닥에 놓아 두었는데 어둠침침할 때에 어떤 사람이 이것을 보고 뱀으로 잘못 알아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새끼줄을 착각하여 뱀으로 분별하는 망견을 변계소집성이라고 합니다. 깜짝 놀란 후 자세히 보니 뱀이 아니고 새끼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새끼줄이라는 것도 본래 삼으로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새끼줄을 풀어 보면 새끼줄이 아닙니다. 이 새끼줄은 풀어서 옷도 만들 수 있고 여러가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실성(實性)이 없는 것입니다. 즉 새끼줄은 임시로 삼을 꼬아서 만든 것이므로 새끼줄이 있는 듯하지만 분해해서 보면 새끼줄은 없고 삼뿐입니다. 이것을 유식에서는 환()처럼 거짓으로 있는 것이다. , 환각상태에서 보는 꽃[幻花]과 같이 거짓으로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새끼줄은 바로 의타기성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삼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그대로 있습니다. 그것으로 새끼줄을 만들든 다른 무엇을 만들든간에 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원성실성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성실성은 진공묘유로서 그 자성이 공하면서 또한 묘유이기도 합니다. 삼을 진공으로 비유하면 그 삼으로 새끼줄이나 베를 짜는 용()은 곧 묘유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원성실성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삼성의 각각에 대한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진여의 불변과 의타의 무성과 소집의 이무, 이 세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삼성이 한결같이 동일하여 다름이 없다. 이것은 곧 지말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항상 근본이 되는 것이니 경에 이르기를 중생이 곧 열반이므로 다시 멸할 것이 없다고 하느니라.

由眞中不變依他無性所執理無 由此三義故三性一際하여 同無異也此則不壞末而常本也經云衆生卽涅槃일새 不復更滅也라 하니라.

 

원성실성 가운데 자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불변(不變), 의타기성의 참된 성품이 없다는 무성(無性), 변계소집성의 이치가 없다는 이무(理無)는 모두 다 무변(無邊)으로서 서로 통해 있습니다. 즉 불변도 공이고 무성(無性)도 공이며 이무(理無)도 공이기 때문에 삼성의 성질이 한 가지로 통해 있어 결국은 그 의미가 서로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지말을 파괴하지 않고도 항상 근본을 이루므로 아무리 자성이 인연을 따르더라도 불변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경전에서 중생 그대로가 열반이라고 하였으니 그 뜻은 중생 외에 별도로 열반이나 부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을 부수어서 열반을 만들고 부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본성을 바로 알면 그것이 바로 부처이고 열반인 것입니다. 이것은 삼성에서 불변과 무성과 이무의 뜻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또 진여의 수연과 의타의 사유와 소집의 정유, 이 세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또한(삼성이)다름이 없다. 이것은 곧 근본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항상 지말이 되는 것이니, 경에 이르기를 법신이 오도(五道)에 유전함을 중생이라고 하기 때문이니라.

又約眞如隨緣依他似有所執情有一由此三義亦無異也此則不動本而常末也經云法身流轉五道名衆生故也라 하니라.

 

진여 즉 원성실성의 연에 따른다는 수연(隨緣), 의타기성의 임시로 존재한다는 사유(似有), 변계소집성의 망정이 있다는 정유(情有)는 모두 다 유변(有邊)으로서 서로 통해 있어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근본을 움직이지 않고도 항상 지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과는 반대로 앞에서는 지말을 파괴하지 않고 근본이 된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근본을 움직이지 않고 지말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법신(法身)5(五道), 즉 지옥아귀축생인간천상에 유전하는 것이 중생이라고 하였으니 법신을 떠나서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는 지말을 허물지 않으면서 항상 근본이 된다 하여 중생 이대로가 열반이고 부처라 하였고 여기서는 그와 반대로 근본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항상 지말이 된다 하여 부처 이대로가 중생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그 표현에 역순의 차이는 있을 뿐 그 의미는 동일한 것입니다.

 

곧 이 세 가지 뜻과 앞의 세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하나이지 않는 부문이다. 그러므로 진여는 망정의 지말을 갖추고 망정은 진여의 근원을 꿰뚫어 성()과 상()이 융통하여 장애와 막힘이 없느니라.

卽由此三義與前三義하여 是不一門也是故眞該妄末하고 妄徹眞源하여 性相融通하여 無障無碍하니라.

 

이와같이 앞의 세 가지 뜻, 즉 불변무성이무와 나중의 세 가지 뜻, 즉 수연사유정유는 표현을 달리하기 때문에 하나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 두 갈래의 세 가지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진원(眞源)인 본질과 망말(妄末)인 현상이 서로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서로 갖추고 철저하게 상통해 있다고 하는 것이며 실상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원과 망말이 서로 갖추고 성()과 상()은 융통하여 장애가 없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묻기를, 삼성에 각각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어떻게 서로 다르지 아니한가? 답하기를, 이 두 가지 뜻이 다른 성품이 없는 까닭이니라. 어째서 다름이 없는가? , 또한 원성과 같은 것은 비록 다시 인연을 따라 더러움[]과 깨끗함[]을 이루지만 항상 자성의 청정함을 잃지 않으니, 다만 자성의 청정함을 잃지 않으므로 능히 인연을 따라 더러움과 깨끗함을 이루느니라.

問 如何三性各有二義하니 不相違耶答 以此二義無異性故何者無異且如圓成雖復隨緣하여 成於染淨이나 而恒不失自性淸淨하니 祇由不失自性淸淨故能隨緣成染淨也니라.

 

또한 진여인 원성실성은 인연에 따라서 염법(染法)이나 정법(淨法)을 이루지만 항상 그 자성의 청정함을 잃지 않으며, 진여의 그러한 성질 때문에 사실은 인연을 따라 염법이나 정법이 되는 것도 가능한 것입니다. 자성이 청정함을 잃는다면 인연을 따라서 염법이나 정법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 금과 가락지의 비유가 있습니다. 즉 금으로 가락지를 만들지만 가락지를 제외하고 금이 없고 금을 제외하고 가락지가 없으니 가락지 그대로가 금이고 금 그대로가 가락지입니다. 금으로 가락지 외에 숫가락이나 젓가락 등을 만들 수 있지만 어떤 것을 만들든지간에 금의 자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작용하는 상태는 달라도 그 밑바탕을 이루는 본성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불변과 수연의 관계도 이와 같아 불변이 곧 수연이고 수연이 곧 불변입니다.

 

마치 밝은 거울에 더러움과 깨끗함이 나타나듯이 비록 더러움과 깨끗함을 나타내나 항상 거울의 밝고 깨끗함을 잃지 않으며, 다만 거울의 밝고 깨끗함을 잃지 않으므로 바야흐로 능히 더러움과 깨끗함의 상을 나타내느니라. 더러움과 깨끗함을 나타냄으로써 거울의 밝고 깨끗함을 알며, 거울의 밝고 깨끗함으로써 더러움과 깨끗함을 드러냄을 아니 그런 까닭에 두 가지 뜻이 오직 하나의 성품이니라. 비록 깨끗한 법을 나타내어도 거울의 밝음은 증장하지 않으며 비록 더러운 법을 나타내어도 거울의 밝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니, 바로 염오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로 말미암아 도리어 거울의 밝고 깨끗함이 드러나는 것이니라. 마땅히 알라. 진여 도리도 이러하여 바로 자성청정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더러움과 깨끗함을 이룰 뿐만 아니라 또한 이에 더러움과 깨끗함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자성청정을 나타낸다. 바로 더러움과 깨끗함을 무너뜨리지 않고서 자성청정을 드러낼 뿐 아니라 또한 이에 자성청정으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더러움과 깨끗함을 이루느니라. 그러므로 두 가지 뜻이 전부 서로 거두어서 하나의 성품이며 둘이 아니니 어찌 서로 다르겠는가.

猶如明鏡現於染淨하니 雖現染淨而恒不失鏡之明淨이요 衹由不失鏡明淨故方能現染淨之相이라. 以現染淨일새 知鏡明淨이요 以鏡明淨일새 知現染淨이니 是故二義唯是一性이니라. 雖現淨法이라도 不增鏡明이요 雖現染法이라도 不汚鏡明이니 非直不汚亦乃由此하여 反顯鏡之明淨이라 當知하라 眞如道理亦爾하여 非直不動性淨하고 成於染淨이요 亦乃由成染淨하여 方顯性淨하며 非直不壞染淨하고 明於性淨이요 亦乃由性淨故方成染淨하니라 是故二義全體相收하여 一性無二豈相違耶.

 

이것은 원성실성의 성질을 비유하여 밝은 거울에 여러가지 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즉 밝은 거울은 불변의 진공에 비유한 것이고 더러움과 깨끗함의 갖가지 상은 수연의 묘유에 비유한 것입니다. 밝은 거울이 비록 더러움과 깨끗함을 나타낸다고 해도 거울은 항상 자신의 밝고 깨끗함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깨끗한 것을 비춘다고 해서 거울이 더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을 비춘다고 해서 거울이 더 더럽게 되는 것도 아니라서 더러움과 깨끗함에 상관없이 거울은 자신의 성질을 변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비출 뿐입니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만약에 거울이 탁하다면 어떤 물건도 비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곧 거울에 사물이 비춰질 수 있는 까닭은 거울이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불변진공과 수연묘유에 비유할 경우에는 불변진공이기 때문에 수연묘유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연을 하더라도 불변이 파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불변진공이기 때문에 수연이 되고 묘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거울에 흑백(黑白)과 염정(染淨) 등이 분명히 나타나기 때문에 거울이 깨끗하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수연하기 때문에 진여가 불변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성실성의 수연과 불변은 둘이 아니고 진공과 묘유는 둘이 아닙니다. 거울이 밝지 않으면 더러움과 깨끗함의 상들은 나타나지 않듯이 자성이 청정하지 않으면 수연은 성립할 수가 없으므로 그 둘은 서로 불이(不二)의 관계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울이 비록 더러움과 깨끗함의 상을 나타내어도 그 거울의 밝음을 덜하고 더할 수 없듯이 본래의 자성청정은 중생이라고 해도 손상이 없고 부처라 해도 더 증가하지 않습니다. 즉 중생이라고 하여 본래 청정한 자성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며 부처가 되었다고 해서 본래 청정한 자성이 더 깨끗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청정한 자성은 더렵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서 오히려 선과 악 또는 아름다움과 추함 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원성실성의 도리도 이와 같아서 자성청정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더럽고 깨끗한 법을 이루는 것이며, 또한 더럽고 깨끗한 법을 이루므로 말미암아 자성청정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변이 수연하고 또 수연이 불변하여 이 두 가지 뜻이 서로 거두어들여서 한 성품이며 둘이 아니니 서로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의타기성 중에 비록 다시 인연의 사유(似有)가 나타나나 그러나 이 사유는 반드시 자성이 없으니, 모든 인연따라 생기는 것은 모두 자성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약 자성이 없지 않으면 연()을 빌지 않으며, 연을 빌지 않으므로 곧 사유(似有)가 아니다. 사유(似有)가 만약에 성립한다면 반드시 뭇 연을 따르기 때문이며 반드시 자성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자성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사유(似有)를 이룰 수 있으며 사유(似有)를 이룸으로 말미암아 자성이 없느니라.

依他中雖復因緣似有顯現이나 이나 此似有必無自性이니 以諸緣生皆無自性故若非無性이면 卽不藉緣故이요 不籍緣故卽非似有似有若成이면 必從衆緣이니 必無自性이니라 是故由無自性하여 得成似有由成似有하여 是故無性이니라.

 

의타기성이란 일체 연기법을 말합니다. 의타기성은 비록 인연을 따라서 성립된 사유(似有)가 나타나지만 그 사유에는 자성이 없으며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인연따라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자성이 있어서 실제 있는 것[實有]이 된다면 이는 완전히 고정적인 존재가 되어버려서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새끼줄의 비유에서 보듯이 만약에 새끼줄이 새끼줄 그대로 영원히 분해할 수 없는 고정된 것이라면 거기에는 어떠한 연기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새끼줄을 분해하여 다른 물건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새끼줄에 자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자성이 없는 무성이 아니면 연기가 성립하지 못하며, 연기가 성립하지 못한다면 사유(似有)가 아닌 실유(實有)입니다. 그러므로 사유가 성립한다면 이는 반드시 여러 인연을 따라 생기는 것이며 그 때문에 또한 자성이 없는 무성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했다. ‘일체법이 인연을 따라서 생기는 것을 보니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은 곧 자성이 없음이요, 곧 자성이 없으므로 곧 필경공(畢竟空)이며, 필경공이란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곧 인연으로 생김으로 말미암아 곧 자성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니라.

智論, 觀一切法從緣生하니 從緣生卽無自性이요 卽無自性故卽畢竟空이요 畢竟空者是名般若波羅蜜이라 하니 此卽由緣生故 卽顯無性也니라.

 

일체법은 인연을 따라서 생겨나고 소멸합니다. 이렇게 인연 따라 생겼다가 없어졌다 하는 것은 자성이 없다는 뜻이며, 자성이 없기 때문에 필경에 공인 것이며, 이 필경공을 반야바라밀이라고 부릅니다. 만약에 자성이 없는 것이 아니고 공이 아니라면 절대로 연기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곧 연기가 무자성(無自性)이고 공이며 무자성이 바로 연기라는 뜻입니다. 즉 사유(似有)가 무성이며 무성이 사유이므로 사유와 무성이 두 뜻이 아닌 것입니다.

 

중론(中論)에서 말하기를 공의 뜻이 있음으로써 일체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니, 이것은 곧 자성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곧 연기하여 생김을 밝히는 것이니라.

中論云 以有空義一切法得成이라하니 此卽由無性故卽明緣生也니라.

 

중론에서 공의 뜻이 있기 때문에 일체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자성이 없으므로 연기하여 생김을 밝히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연기하므로 무성이라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그 반대로 무성이기 때문에 연기한다는 것이니 실로 연기와 무성이 동일한 것임을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하기를 인연이기 때문에 유()이며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하니, 이는 곧 자성 없음이 인연이요 인연이 곧 자성 없음이니 이것은 둘이 아닌 법문이기 때문이다. 두 뜻의 성품이 서로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부 서로 거두어서 마침내 둘이 아니니라.

涅槃經云 因緣故有無性故空이라하니 此卽無性卽因緣이요 因緣卽無性이니 是不二法門故也非直二義性不相違亦乃全体相收하야 畢境無二也니라.

 

열반경에서 인연이기 때문에 유()며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성(無性)이 인연이며 인연이 무성이라서 둘이 아니라는 불이법문(不二法門)입니다. 이와같이 의타기성에 두 가지 뜻, 즉 사유와 무성이 있다고 했는데, 이 두 가지 뜻은 이상의 여러 경론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같은 것이며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전체가 서로 거두어들여서 인연이 곧 무성이고 무성이 곧 인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성실성의 불변과 수연이 둘이 아니듯이, 의타기성의 사유와 무성도 둘이 아닙니다.

 

변계소집성 가운데에 비록 다시 망정을 당하여 집착하여 있음[]을 나타낸다고 하지만, 도리에 있어서는 필경 이는 없는 것이니 없는 곳에서 공연히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니라. 마치 나무등걸에 공연히 귀신이 있다고 헤아리는 것과 같으나 필경 귀신은 나무에는 없느니라. 그 나무에 귀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면 공연히 귀신이 있다고 헤아린다고 할 수 없으니, 나무에 귀신이 있음은 헤아림에 말미암지 않기 때문이니라. 이제 이미 공연한 헤아림이므로 분명히 이치가 없음을 알고, 이치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공연히 헤아림을 이루며, 공연히 헤아림을 이루기 때문에 바야흐로 이치가 없음을 아느니라. 그러므로 성품이 둘이 아니며 오직 하나의 성품이다. 마땅히 알라. 변계소집의 도리도 또한 이러하니라.

所執性中雖復當情하여 稱執現有然於道理畢境是無以於無處橫計有故如於木杭橫計有鬼然鬼於木畢境是無如於其木鬼不無者卽不得名橫計有鬼以於木有非有計故今旣橫計일새 明知理無由理無故得成橫計得成橫計故方知理無是故無二性一性也當知所執道理亦爾니라.

 

변계소집성의 망정 중에서 정에 집착하여 무엇인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여 놀랐을 때 실은 뱀이 없는데 저 혼자 착각하여 놀란 것과 같습니다. 뱀이라고 생각한 그것은 뱀이 아니라 필경에는 없는 것을 공연히 있다고 생각한 것이기 때문에 착각으로 헤아린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마치 본래부터 귀신이 없는데 나무등걸이 길가에 서 있는 것을 잘못 보고 거기에 귀신이 있다고 공연히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원래는 귀신이 붙어있지 않은 나무에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귀신이 본래 거기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착각에 불과합니다. 만약에 거기에 정말로 귀신이 있다면 그것은 잘못 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착각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착각이라고 하는 것이며, 잘못된 착각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치에 있어 본래 없는 것[理無]이므로 이무(理無)와 착각이라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체만법을 착각하여 자아[]나 법(), 또는 유()나 무()라고 헤아림을 비유한 것으로서, 결국 참다운 도리가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치에서 볼 때는 귀신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망정(妄情) 즉 함부로 헤아린 것에서 볼 때는 있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은 없음이 있음이요 있음이 없음이 되어 유무가 둘이 아닌 것입니다.

 

삼성이 한결같아 하나를 들면 전체가 거두어지며 진여와 망정이 서로 원융하여 성품에 장애가 없느니라.

三性一際하여 擧一全收하며 眞妄互融하여 性無障碍니라.[大正藏 45, p.501 ]

 

원성실성의 불변과 수연, 의타기성의 사유와 무성, 변계소집성의 정유와 이무인 삼성은 가지런하여 하나로 통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를 들면 전체가 다 따라와서 진여와 망정이 서로 무애하여 장애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결국에는 유()가 무()이고 무()가 유()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유가 유가 아니고 무가 무가 아닌, 다시 말하면 비유비무(非有非無)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중도의 뜻이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원성실성의 두 성질인 불변과 수연에서, 불변이란 유가 아니며[非有] 수연이란 현실적으로 있으므로 무가 아니기[非無] 때문에, 원성실성은 비유비무로서 중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진공묘유라고 표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진공은 비유고 묘유는 비무이므로 비유비무의 중도가 성립합니다. 그러므로 원성실성에서 불변수연이라고 하든 진공묘유라고 하든 이것은 결국 비유비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성실성 하나만으로도 중도가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타기성의 사유(似有)와 무성(無性)에서, 사유는 비무가 되고 무성은 비유가 되는데 이를 이유정무(理有情無)라고 표현합니다. 이유(理有)란 비무(非無)가 되고 정무란 비유(非有)가 되기 때문에 비유비무가 되어 의타기성에 있어서도 중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변계소집성의 정유(情有)와 이무(理無)에서, 정유는 비무가 되고 이무는 비유가 되므로 비유비무로서 중도가 성립됩니다. 이와같이 하여 삼성이 각각 중도를 이루는데, 이러한 중도를 삼성각성중도(三性各性中道)라고 합니다.

또 유식학에서는 변계소집성은 망정뿐이므로 유가 아니고, 의타기성은 임시로 있는 것이고 원성실성은 실로 있는 것이므로 이 둘은 무가 아니라서 결국 삼성이 전체적으로 비유비무로서 중도가 된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삼성이 서로 합하여 바라보면서 중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삼성대망중도(三性對望中道)라고 이름합니다. 이렇게 삼성이 각각 중도를 이루든 또는 대망중도를 이루든간에, 삼성설은 전체적인 입장에서 보면 중도를 벗어나서는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불교의 최고원리가 중도인데 유식법상종의 중요한 원리인 삼성대망중도나 삼성각성중도가 불교의 중도사상에 계합하므로 유식법상종이 곧 중도종(中道宗)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주장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서로가 상즉(相卽)하여 유가 곧 무이고 무가 곧 유라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화엄종에서 말하는 사사무애(事事無碍)와 같은 일즉일체 일체즉일의 융통적 차원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인용하여 해설한 삼성설은 화엄종의 현수스님이 설한 것으로 유식종의 삼성설과는 얼마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기할 것은 이제까지 해설한 원성실성의 불변과 수연에 대한 것으로 유식종의 주장에 의하면, 그 가운데 불변성이 강하게 대변되어 현수설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삼성 자체의 융통성도 그만큼 미약합니다. 그리하여 현수스님은 유식을 격하하여, 별교일승(別敎一乘)은 물론 돈교일승(頓敎一乘)에도 들지 못한다고 평하였습니다. 그 뒤로는 화엄경의 원융무애한 사사무애의 도리에 유식사상이 빛을 잃으면서 법상종은 쇠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5장 열반경 등의 사상

1. 열반경(涅槃經)

 

수 많은 대승경전 중에서도 열반경(涅槃經)에는 중도에 대한 설법이 상세히 그리고 자주 설명되고 있습니다. 열반경의 사상중에서 가장 뚜렷한 특징을 지적한다면 그것은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성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추구해보면 그 내용이 몇 가지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선 중생들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한 것[]도 아니기에 중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도의 내용을 보다 깊이 파헤치면 그것은 곧 부처님이 정등각(正等覺)12연기(十二緣起)의 진리임을 알 것이며, 이것이 곧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떠난 중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용하는 경문은 원래 열반경의 서로 다른 세 곳에서 설해진 것이지만, 이들은 모두 중도인 불성(佛性)에 대한 설법이기 때문에 서로 연관시켜 이렇게 한 곳에서 해설하는 바입니다.

 

일체 중생을 위하여 감로문을 여니 곧 바라나국에서 정법의 바퀴를 굴리어 중도를 설하느니라.

爲一切衆生하여 開甘露門하니 卽於波羅奈國에서 轉正法輪하여 宣說中道하니라. [大正藏 2, p.773 ]

 

그러므로 여래는 이 양변을 막아서 설하되, 불성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또한 안이고 또한 밖이므로 이것을 중도라 하느니라. 중생의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非有]없는 것도 아니며[非無], 또한 있고[亦有] 또한 없는 것[亦無]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한 까닭[有無合故]에 곧 중도이니라.

是故如來遮此二邊하여 說言호대 佛性非內非外亦內亦外일세 是名中道니라. 衆生佛性非有非無亦有亦無有無合故卽是中道니라. [大正藏 12, p.819 ]

 

불성이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함에서 먼저 불성이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라는 여러 가지 이유중의 하나를 들어보면, 불성이란 그릇에 물건이 담기듯이 중생의 육신중에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는 마치 허공처럼 육신을 여윈 것이라고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란 뜻은 일체가 이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있는 것이지만, 현재 일체가 진실한 불성의 본성인 상()을 겸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불성이란 안과 밖, 있음과 없음의 어느 한 쪽에 머무름이 없으므로 중도라 이름한 것입니다.

 

중생이 견해를 일으킴에 무릇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상견(常見)이요 다른 하나는 단견(斷見)이니라. 이와 같은 두 견해는 중도라 하지 않으며 상견도 없고 단견도 없음을 중도라 한다. 상견과 단견 없음이 곧 십이인연(十二因緣)을 보는 지혜이며 이와같이 보는 지혜가 불성이니라. 성문과 연각이 비록 인연을 보나 아직 불성이라 이름할 수 없느니라. 불성은 비록 항상 있으나 모든 중생이 무명에 덮여 있으므로 능히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요, 또 능히 십이인연의 강을 건너지 못하는 것이 마치 토끼나 말이 강을 건너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불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衆生起見凡有二種하니 一者常見이요 二者斷見이니라. 如是二見不名中道無常無斷乃名中道니라 無常無斷卽是觀十二因緣智如是觀智是名佛性이니라. 二乘之人蝮觀因緣이나 猶不得名爲佛性이니라. 佛性雖常이나 以諸衆生無明覆故不能得見이요 又未能渡十二因緣河猶如兎馬何以故不見佛性故.[大正藏 12, p.768 ]

 

중생이 일으키는 견해에는 무릇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상견이고 다른 하나는 단견입니다. 이 상견과 단견을 여윈 것이 중도입니다. 그리고 중도 이것이 십이인연(十二因緣), 곧 십이연기(十二緣起)를 바로 보는 지혜입니다. 십이인연을 바로 보는 지혜란 곧 십이인연의 근본 내용인 불성을 말함이고, 불성이 곧 중도입니다. 불성은 원래 일체중생이 다 갖추고 있지만 모든 중생이 근본무명인 제8아뢰야에 덮여 있기 때문에 능히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부터 연기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뢰야때문에 그렇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와같이 모든 중생이 무명에 덮여서 십이인연의 깊은 강을 건너지 못함은 마치 토끼나 말이 강을 건너지 못함과 같으며, 십이인연의 깊은 이치를 모르는 까닭은 불성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문연각의 이승(二乘)들조차도 비록 인연을 보긴 보지마는 아직 불성을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십이인연을 바로 보는 사람이 불성을 바로 보는 사람이고, 불성을 바로 보는 사람이 십이인연을 바로 보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곧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입니다.

 

십이인연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하지도 않고 단절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니라.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닌 것을 불성이라 하니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므로 항상 무변하니라.이런 뜻으로 내가 경()가운데에 설하되 십이인연은 그 뜻이 깊고 깊어서 알 수 없고 볼 수 없으며 가히 사유할 수 없으니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경계요 성문과 연각의 미칠 바가 아니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십이인연을 보는 자는 곧 법을 보는 것이고, 법을 보는 자는 곧 부처를 보는 것이며, 부처는 곧 불성이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부처님이 이것을 성품으로 삼기 때문이니라.

十二因緣不出不滅하며 不常不斷하며 非一非二不來不去非因非果니라.非因非果名爲佛性이니 非因非果故常恒無邊하니라. 以是義故我經中호대 十二因緣其義甚深하여 無知無見이며 不可思惟하니 乃是諸佛境界非聲聞緣覺所及이니라.若有人見十二因緣者卽是見法이요 見法者卽是佛性이요 佛者卽是佛性이라. 何以故一切諸佛以此爲性이니라.

 

십이인연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하지[]도 않고 단절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십이인연은 일체의 양변(兩邊)을 모두 떠난 중도이지 시간적으로 생기하는 법이 아닙니다.

원인과 결과, 양변을 여윈 것을 중도라 하며 이 중도가 바로 불성이라는 것입니다.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닌 이것은 이미 양변을 완전히 떠났기 때문에 항상 상대성인 대대(對對)가 끊어진 곳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상주불멸(常住不滅)하고, 상주법계(常住法界)하며 상항불변(常恒不變)하여 변하지 않으니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경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를 바르게 깨달았다고[正等覺] 하셨지 그외에 달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십이인연을 바르게 깨치려면 성문과 연각의 경지로도 부족하며, 오직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 즉, 확철대오해야만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십이인연을 바로 보고 바로 안 사람은 실로 법을 본 것이요. 법을 본 자는 곧 부처를 바로 본 것입니다. 부처는 곧 부처님 성품이니 삼세 일체제불이 모두 이것으로써 부처님의 성품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십이인연을 보는 지혜에 무릇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지(下智), 둘째는 중지(中智), 셋째는 상지(上智), 넷째는 상상지(上上智)이니라. 하지(下智)로 보는 자는 불성을 보지 못하니 보지 못하는 까닭에 성문도(聲聞道)를 얻으며, 중지(中智)로 보는 자는 불성을 보지 못하니 보지 못하는 까닭에 연각도(緣覺道)를 얻으며, 상지(上智)로 보는 자는 밝게 보지 못하니 밝게 보지 못하는 까닭에 십주지(十住地)에 머물고, 상상지(上上智)로 보는 자는 밝게 보는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를 얻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십이인연을 불성이라 하니 불성은 곧 제일의공(第一義空)이요, 제일의공은 중도라 하고 중도는 부처라 하며 부처는 열반이라 하느니라.

觀十二緣智凡有四種하니 一者二者이요. 三者이요 四者上上이니라. 下智觀者不見佛性이니 以不見故得聲聞道하며 中智觀者不見佛性이니 不見故得緣覺道하며 上智觀者見不了了하니 不了了故住十住地하고 上上智觀者見了了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道하니라. 以是義故十二因緣名爲佛性이니 佛性者卽第一義空이요 第一義空名爲中道中道者卽名爲佛이요 佛者名爲涅槃이니라. [大正藏 12, p.768 ]

 

십이인연을 보는 지혜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성문이 보는 하지와 연각이 보는 중지와 십주(十住) 즉 십지(十地)에 머무르는 상지와 그리고 무상정등각을 얻는 상상지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상상지는 부처님의 자리이므로 진실한 십이연기를 알 수 있고, 십이인연은 오직 부처님 경계에 들어 가야만 알 수 있고 성문이나 연각 혹은 보살지에 있어서는 이 십이인연을 결코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뜻에서 십이인연을 불성(佛性)이라 하며, 또는 제일의공, 또는 중도, 또는 부처, 또는 열반이라고 합니다. , 제일의 공중도부처열반십이인연 등은 완전히 동체이명(同體異名)으로 이름만 다르다 뿐이지 뜻은 다 같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날 동안 내가 똑같은 뜻으로 이런 설명을 해왔는데 이것은 내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모두 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르게 알려면 오직 깨쳐서 불지(佛地)에 들어 가야만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뢰야 근본무명의 뿌리를 뽑아야 알 수 있지, 이 근본무명의 뿌리를 뽑지 못하면 십이인연을 바로 알 수 없습니다.

 

2.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

 

이 경전의 본래 명칭은 인왕반야바라밀경(仁王般若波羅蜜經)으로 반야경 계통의 경전이지만 여타의 반야경과는 다소 상이하며 많은 반야경 중 최후에 설해진 경이라고 여겨집니다. 신라나 고려에서 나라와 국민의 안녕을 위하여 자주 개최되던 인왕백고좌회(仁王百高座會)의 사상적 근거가 된 경전입니다.

여기에 인용한 것은 이제(二諦)에 관한 일부분으로, 그 내용은 제일의제(第一義諦)와 세제(世諦)의 관계가 둘인가 하나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제는 하나며 둘이 아니라는 것[一而不二]임을 답변한 것입니다.

 

보살이 제일의(第一義)가운데서 항상 이제(二諦)를 비추어 중생을 교화하니 부처와 중생이 하나며 둘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중생이 공()한 까닭에 보리(菩提)를 공한 데 둘 수 있고, 보리가 공한 까닭에 중생을 공한 데 둘 수 있으며, 일체법이 공한 까닭에 공공(空空)이니라. 왜냐하면 반야는 모습이 없고 이제(二諦)는 허공이니 반야가 공하여 무명으로부터 살바야해(薩婆若海)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모습이 없고 다른 것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눈[五眼]을 성취할 때는 보아도 보는 것이 없으며 내지 일체법도 또한 감수하지 않느니라.

菩薩於第一義中常照二諦하여 化衆生하니 佛及衆生一而無二니라. 何以故以衆生空故得置菩提空이요 以菩提空故得置衆生空이요 以一切法空故空空이니라 何以故般若無相하고 二諦虛空이니 般若空하여 從無明乃至薩婆若海無自相無他相故. 五眼成就時見無所見이요乃至一切法亦不受니라. [大正藏 8, p.829 ]

 

보살이 제일의 가운데서 항상 이제를 비추어 중생을 교화한다는 것은 쌍차(雙遮)를 내버리고 쌍조(雙照)에 입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제(二諦)란 제일의제(第一義諦)와 세제(世諦) 두 가지 진리를 말합니다. 제일의제는 진제(眞諦)승의제(勝義諦)라고도 하는데, 이는 진공이나 중도, 실상 등 성인이 보는 깊고 묘한 진리를 뜻합니다. 세제는 속제(俗諦)세속제(世俗諦)라고도 하는데, 이는 일반 세간에 드러난 상식으로 범부가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둘을 모두 버리는 것을 쌍차라 하고, 그 둘을 모두 관조하는 것을 쌍조라고 합니다.

부처와 중생이 하나며 둘이 아니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 한편으로 의심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는 오직 부처님의 경계에서만 십이인연을 알고 중도를 알며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 가기 전에는 모른다고 했고, 여기서는 보살이 항상 이제를 비춘다고 하니 그러면 보살도 이제를 쌍조하여 중도를 아는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부처와 중생이 하나이고 둘이 아니라는 데에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십이인연과 중도를 바로 깨쳐서 실제로 쌍차쌍조된 사람은, 그 사람을 보살이라 하든지 중생이라 하든지 부처라 하든지 마구니라 하든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중도를 바로 깨쳐 이제를 쌍조하는 데에 중점이 놓여 있지 그 명칭은 무어라 해도 관계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보살이 본다는 것과 앞에서 불지(佛地)에 들어 가야만 십이인연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원시경전의 초전법륜에서는 아라한이 여섯이 있다고 설하여 법을 바로 깨친 사람을 아라한(阿羅漢)이라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아라한이란 말은 중도를 깨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깨친 내용이 동일하기 때문에 표현에 있어서는 아라한이라 하든지 보살이라 하든지 부처라 하든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 다음 이제(二諦)가 허공이라는 것은 쌍차(雙遮)에 입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쌍차해서 이제가 완전히 떨어지면 이제(二諦)를 쌍조(雙照)하는 것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일체가 공함을 깨쳐서 쌍차가 되면 그곳이 곧 쌍조이니, 이것은 진공(眞空)이면 묘유(妙有)요 묘유이면 진공이라는 말과 상통합니다. 쌍차라 하든지 쌍조라 하든지 그 내용은 결국 똑같은 것이며, 쌍차쌍조하여 중도를 정등각(正等覺)하면 거기서 여래의 5(五眼) 즉 육안(肉眼)천안(天眼)혜안(慧眼)법안(法眼)불안(佛眼)의 다섯 가지 눈[五眼]을 원만하게 구족하여 일체법에 걸림이 없이 자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보살이라 해도 좋고 아라한이라 해도 좋고 중생이라 해도 좋고 무어라 해도 좋습니다. 실제로 중도를 깨쳐서 그 경계가 쌍차쌍조가 됐나 못 됐나 이것이 문제지 말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3.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중도의 근본내용이 쌍차(雙遮)와 쌍조(雙照)임을 자주 주장하게 되는데 대승경전 중에서 그 쌍차와 쌍조의 개념을 구사하여 중도를 설명하는 경전으로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쌍차 쌍조라는 개념외에도 이제관(二諦觀), 평등관(平等觀)중도제일의제관(中道第一義諦觀)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세 가지 관법(三觀)을 설하여 일체 수행상의 경지를 망라하였는데, 이 삼관은 바로 중도 사상을 잘 대변한 것입니다. 이 경전은 일찍이 중국에서 제작된 경전이라는 시비도 없지 않지만 천태종의 교리 성립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경입니다.

 

세 가지 관법이란, ()에서 공()으로 들어가는 것을 이제관(二諦觀)이라 하고, 공에서 가로 들어가는 것을 평등관(平等觀)이라 하니 이 두 가지 관법은 방편도이다. 이 두 공관으로 인하여 중도제일의제관을 얻어 이제를 쌍조하여 마음 마음이 적멸하니라. 일체중생과 내지 무구지가, 다 정토가 아니니 과보에 머물러 있는 까닭이라. 오직 부처님만이 중도제일법성의 정토에 머무느니라.

三觀者從假入空名二諦觀이요 從空入假名平等觀이니 是二觀方便道니라. 因是二空觀하여 得入中道第一義諦觀하고 雙照二諦하여 心心寂滅하니라. 一切衆生乃至無垢地盡非淨土住果報故唯佛居中道第一法性之土니라.[大正藏, p.1014 , 1016 ]

 

가에서 공으로 들어가는 것[從假入空]’에서 가()라 함은 거짓으로 있다고 하는 쪽[有邊]에서 하는 말이며 이 있다는 일체가 공하다고 보는 것을 이제관이라 합니다. ‘공에서 가로 들어가는 것[從空入假]’는 위의 종가입공(從假入空)과는 반대로 일체가 없다는 쪽[空邊]에서 하는 말이며 공에서 거짓있는 데로 들어가는 것을 평등관이라 합니다. 이제관이라 한 것은 가()에서 공()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제를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며, 평등관이라고 한 것은 공에서 가로 들어가는 것은 이제의 차별을 말하지 않고 공이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관법인 이제관과 평등관은 방편도(方便道)인데 이것을 인하여 중도제일의제관(中道第一義諦觀)에 들어갑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제를 쌍으로 비추는 것[雙照二諦]이 되어 쌍차쌍조(雙遮雙照)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완전한 쌍차는 자연히 쌍조가 되는데 쌍차에 집착하면 완전한 쌍차가 되지 못하는 동시에 또한 완전한 쌍조가 되지 못합니다. 이 병폐를 지적하여 방편도라 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완전한 쌍차를 이루고 또 쌍조가 되면 그것이 곧 이제관 안의 중도인 중도이제관(中道二諦觀)이며 쌍조이제(雙照二諦)로서 마음 마음이 적멸(心心寂滅)하게 됩니다. 그러나 쌍조이제라 하여 마치 주먹이 하나 둘 솟듯이 솟아 있는 줄 알면 큰일 납니다. 실지(實地)에서는 적()하면서 쌍조하고 조()하면서 쌍적해서 쌍조쌍적(雙照雙寂)이 됩니다. 그 의미는 항상 적적한 가운데 광명이 있고 광명이 있는 가운데 적적하다는 뜻입니다. 쌍조이제가 심심적멸이고 심심적멸이 쌍조이제로서 차()와 조()가 동시입니다. 이 적멸가운데 항상 쌍조하는 광명이 비치고 쌍조하는 가운데 마음마음이 적멸하다는 것입니다.

임제스님이 하신 말씀에도 이와 동일한 내용의 법문이 있습니다. 먼저 심청정(心淸淨)이라 하여 마음이 청정해서 일체가 다 끊어진 것을 부처[]라 하고, 또 심광명(心光明)이라 하여 일체 광명이 시방세계, 법계를 다 비추는 것을 법()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청정하고 밝아 거리낌 없는 것[淨光無碍]을 승()이라 하였는데 그 의미는 광명과 청정이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청정한 가운데 광명이 있고 광명이 있는 가운데 적적하다는 것으로 이것도 역시 차와 조가 동시임은 물론입니다.

이와같이 이제를 쌍조하여 중도 제일의제관에 들어가게 되면 마음이 적멸하고 마음이 적멸하면서 이제를 쌍조하게 됩니다. 이 경계는 중생으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으로 오직 투철하게 깨쳐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일체중생과 내지 무구지가 다 정토가 아니다라고 설하였는데 이 중에서 무구지란 보살의 수행도인 십지(十地)를 가르킵니다. 십지는 물론이고 설사 등각(等覺)이라도 이것은 실지의 정토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지와 등각도 제8아뢰야(第八阿賴耶) ()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자성을 깨치고 중도를 깨친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생멸이 없는 것 같지마는 부처님이 볼 때에는 아뢰야식의 생멸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한 분만이 중도 제일법성(中道第一法性)의 땅, 즉 정토에 머무른다는 말이 되는데, 그러면 이것은 석가의 특권이 아닌가 이렇게도 생각할지 모르나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누구든지 중도만 바로 깨치면 남자고 여자고 할것없이 누구나 다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석가 한 분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중도를 바로 깨치면 누구든지 법성 정토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전에는 십지등각이라도 절대로 정토에 온전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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