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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Anapana sati)
1. 근본원리
붓다는 다시 90일을 앉아서 온 세상의 모든 인간들과 날고 꿈틀대는 새와 동물들까지도 모두 구제하고자 하였다. 원문의 도탈(度脫)은 깨닫게 하여 구제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붓다는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는 안반수의를 닦고서 이를 전하여 모든 인간들과 동물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붓다가 6년 고생 끝에 고행을 포기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행의 괴로움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고행이 깨달음을 얻는 데에는 전혀 이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붓다는 고행을 하면서 단식, 숨을 참는 호흡 훈련 등 몸을 괴롭히는 온갖 수행을 참고 견뎌냈다. 그러나 그 고행이 특수한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가치가 있으나, 모든 일반 생활인이나 나아가서는 새나 동물들과 같은 일체 중생까지도 행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올바른 수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붓다는 먼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인 호흡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당시의 고행자들은 숨을 오래 참는 호흡법을 닦았다. 이 호흡법은 우주의 생명력인 '프라나prana' 라는 기운을 될 수 있는 한 체내에 많이 흡수하여 저장해 두는 것이 주목적으로, 불로장생 하려거나 특수한 능력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수련이다.
붓다의 목적은 이런 능력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 붓다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인생고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행을 버리고 삶 속에서 호흡으로 인간적인 고뇌를 해결하는 길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또한 생리적인 욕구를 거역하는 극기나 고행이 아닌 즐거운 수행을 창안하였다. 삶 속에서 삶과 죽음의 모순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보인 것이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식물들도 호흡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렇듯 가장 자연스럽고 합리적으로 호흡하는 것은 육체나 정신을 위해서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고 붓다의 호흡법이 생리현상으로서의 들숨, 날숨을 그대로 자연에 맡겨 두고 방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 호흡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여기에 안반수의법의 특징이 있으며, 그것을 통해 고행을 떠나서 즐겁게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90일 동안인가? 90일은 석달로 붓다는 여름에 비가 계속 오는 기간인 하안거(夏安居)엔 마을로 나가지 않고 한 곳에 앉아 수행과 설법을 하였다. 이때 안반수의법을 행한 것이다.
안반수의법을 흔히 수식법(數息法)이라고 하나, 수식법은 안반수의의 본래 뜻을 다 포함하고 있는 용어는 아니다. 따라서 예부터 수식법이라고 부르던 방법과 내용상 다를 바는 없을 지라도 안반수의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안반수의법은 수를 세면서 호흡을 고르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욱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자재(自在)란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어 서로 대립하지 않으므로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로움이다. 주관이 객관에 끌리면 객관적인 어떤 대상의 노예가 되어 자재를 잃게 된다.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면 대립이 없어지므로 객관이 주관의 세계로 들어와 나의 것이 된다. 이러한 세계가 자재의 세계이다. 주와 객이 없는 이 세계에서는 너와 내가 대립하지 않기 때문에 자비심이 솟아난다.
심리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에 이르면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없어지고 자비심이 솟아난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무의식의 세계가 심화된 심층의식의 상태에서는 생명의 절대적 가치와 만족, 환희를 느끼며, 일체의 존재에 대한 관념이 바뀌고 따라서 애정을 갖게 되어 세계가 광명으로 바뀐다고 한다.
여기서의 자비심이란 일체 중생이 나와 한 몸인 그런 사랑이며, 우주 생명에 대한 공감이다. 이렇게 되면 그 환희 속에 잠겨 삶의 존엄성을 공감하면서 숨의 들어오고 나감에 따라 삶의 가치가 새롭게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일상적 가치의 세계인 현실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가치가 현실과 함께 공존하는 세계이다. 또한 대립을 떠난 궁극의 세계이기도 하다. 주와 객의 대립이 끊어진 이러한 자재의 세계에서는 우리의 깊은 마음속에 일체감이 생겨나므로 자비심이 솟게 된다는 것이다. 안반수의는 이처럼 주객통일을 이루게 하여 해탈로 나아가게 하는 방편도(方便道)이다. 안반수의를 통해 얻은 자비심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근본 마음이며, 나 이외의 모든 것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이타심(利他心)이다. 붓다는 이와 같은 궁극의 세계가 호흡이라는 현상 속에 있음을 가르쳐 준다.
인간은 항상 대상에 이끌려 거기에 매여 살기 때문에 자재를 잃는다. 우리의 삶은 감각기관에 의한 속박만이 아니라 관념의 노예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생명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욕구 또한 존재한다.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자유로은 생명 현상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충족되었을 때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욕구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스럽게 호흡하면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다. 붓다의 가르침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진리 그대로의 모습, 곧 자연 그대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바로 참된 진리이다.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이 지니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l법이 나타나는 것이다. 붓다의 명상은 호흡과 하나가 되게 한다. 인간이 있어야 할 자연 그대로의 상태란 자재의 세계이다. 붓다가 90일 동안 이러한 호흡법을 행해 처음으로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돌아갔을 때의 걸림 없는 자재, 즉 생로병사의 인간적인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맛본 것이 자비심이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간 붓다의 마음에 비춰진 일체의 존재는 모두 자기 자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숲속에서 뛰노는 동물, 꽃을 찾아 날아드는 나비와 벌, 하늘을 나는 새의 무리들이 모두 자신과 다름없었다. 붓다에게는 암수 짝을 지어 무리 짓고 새끼를 거느린 채 만족스럽게 잠든 동물들과, 나비나 벌에게 꿀을 베푸는 곱게 핀 꽃, 생물들을 키우는 따사로운 태양빛, 어둠으로부터 악한 것을 멀리 쫓아 생명을 지켜 주는 달빛 등 모든 자연의 섭리가 마치 어머니가 사랑스러운 자식을 안아주듯이 느껴졌다.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자비심을 주고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붓다는 법 그대로인 일체 중생의 참모습을 본 것이다. 한마디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단순한 사실' 속에서 우주의 참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숨이 들어올 때 산소를 흡사하여 세포 속에 산소를 공급하는 것은, 생명을 창조하는 자재의 현상이며 자비 그 자체이다. 우리의 생명은 숨을 들이마심으로써 우주의 생명력을 활기차게 발동시키고, 숨을 내뿜어서 세포의 생명력을 유지한다. 즉 이는 생과 사의 되풀이인 동시에 생사를 떠나며, 생명을 키우는 자비이다.
호흡을 살펴보더라도 숨이 들어와서 극치에 이르면 자연히 나가게 마련이다.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즉 입출일여(入出一如)이다. 그런데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들숨과 날숨에 혼란이 오기 쉽다. 무의식 상태에서 호흡을 하게 되면 들어오도록 되어 있는 숨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어떤 일 때문에 놀랐을 때에는 숨이 들어오지 못하고 나가는 숨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크게 놀랐을 때는 신경이 마비되어 얼굴이 창백해지거나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들숨과 날숨에 정신을 집중하면 호흡은 있는 그대로,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정상적인 호흡은 자연의 도리요,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의식이 한 곳에 집중되어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면 우리는 의식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본래의 마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된다. 심층의식이 우리의 본래 마음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이끌려 구속받을 때는 의식이 집중되지 못하고 밖으로 달리며 쉴 줄을 모른다. 의식이 밖으로 달려나가지 않고 자신의 심층 속에서 쉬고 있을 때에 비로소 본래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처럼 정신집중을 통해 의식이 자기 자신 그대로 안정되어 쉬고 있는 상태에서는 주관은 주관대로, 객관은 객관대로 제모습을 갖추게 되고, 또한 제각각 움직이지 않게 된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정신을 집중하면 그 숨은 길고 충분하게 들어오고 또한 길고 충분하게 나간다. 생명의 창조와 휴식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자연의 도리를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들숨과 날숨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 곧 안반수의는 우주의 진리 자체이며 살아있는 모습이다.
들숨과 날숨은 무의식 속에서 행해지며, 그 무의식은 우리의 깊은 마음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숨의 들어오고 나감도 있을 수 없다. 숨을 쉬는 것은 끊임없이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곧 마음이 인연이 되어 들숨과 날숨이 있게 된다. 이러한 마음을 잘 지키는 것이 곧 자연의 도리이다. 자연의 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코앞에서 이루어지는 호흡에 있다.
깨달음이란 들숨과 날숨이 생명의 탄생과 소멸이라는 엄숙한 사실과 나의 본성이 생과 사 속에 있고, 호흡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의 참모습은 나의 참된 삶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고, 나의 참된 삶은 올바른 호흡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호흡은 육체적인 생리현상인 동시에 정신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올바른 호흡은 올바른 생리현상과 정신 상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호흡도 바르게 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숨의 들어오고 나감이 하나가 되면 무의식중에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게된다. 이런 호흡이 가장 바람직하다. 들숨과 날숨에 정신을 집중하여 그것이 한결같이 지속되면 드디어 호흡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나아가서는 무의식중에도 올바른 호흡이 이루어진다.
붓다는 호흡을 통해 우주의 진리를 알았고, 우주의 뜻이 바로 나의 뜻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의 삶은 일체 중생의 삶 그대로이다. 하늘을 나는 새, 물 속에서 노니는 고기, 땅 위를 기어다니는 미물에 이르기까지 숨을 쉬지 않는 것은 없다. 모든 생명은 호흡을 통해서 탄생하고 소멸한다.
정신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생명이 탄생하고 유지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정신과 육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삶은 육체적인 들숨과 날숨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반드시 정신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정신이 근본이 되어 육체적인 생리현상인 들숨과 날숨이 있게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존재가 인연에 의해 생기고 사라진다는 진리를 깨달은 붓다는, 우리의 마음이 인연이 되어 삶의 생과 멸인 들숨과 날숨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나가면 반드시 들어온다 만나면 헤어지고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지극히 평범한 이사실 속에 진리가 있다. 이는 우주의 뜻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며, 그 뜻을 지키는 것이 곧 밤이 되고 낮이 되는 것이요, 가면 오게 하고 만나면 헤어지게 하는 것이다. 들숨과 날숨은 나의 마음이 인연이 되어 그 도리를 지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올바른 호흡이야말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인 동시에 곧 도道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바로 내 속에 있다. 내 마음속에 있으며 들어오고 나가는 숨 속에 있다.
《잡아함경(雜阿含經)》 제29권 10에서 붓다는 이렇게 설법하고 있다.
"제자들이여, 들숨과 날숨을 생각하는 것을 잘 익혀야 한다. 그러면 몸이 피로하지 않게 되고, 눈이 아프지 않으며, 법을 관(觀)하여 즐거움에 머물 수 있고, 애착에 물들지 않게 되리다. 이와 같이 들숨과 날숨을 닦으면 좋은 결실과 큰 복리를 얻으리라. 그리하여 깊은 선정(禪定)에 들면 드디어 자비심을 얻고 미혹을 떠나 깨달음에 들어갈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으로 나누어 설명한 다. 사람이 다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색은 물질적 요소이고, 수, 상, 행, 식은 정신적인 요소이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다섯 가지가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하며, 그 상태가 곧 공空의 세계이다. 우리의 삶은 호흡이라는 물질적인 육체의 움직임과 정신적인 의식의 조화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불안하거나 공포에 싸여 있을 때는 육체의 작용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호흡이 거칠어지고 행동이 자재(自在)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정신이 안정되고 평온한 상태에 있으면 호흡이 고르게 되고 행동도 뜻대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들숨에 의해 활력을 얻고 날숨에 의한 신진대사로 노폐물이 몸밖으로 배출된다. 숨이 들어오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요, 숨이 나가는 것은 삶의 극치에서 다른 차원인 죽음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과 멸의 연속이 우주의 모습이고 우리의 삶이며, 곧 공(空)이다. 공이란 생하고 멸하면서 생이나 멸에 떨어지지 않는 세계이므로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닌 생과 멸 그 자체이다. 숨이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 않거나, 나가지 않고 들어오기만 한다면 생명은 유지될 수 없다. 생명이 잘 유지되지 못하면 공을 떠나 있는 것이요, 진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공의 진리를 잘 실천하려면 숨을 올바르게 들어오게 하고 나가게 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붓다는 그 도리대로 호흡을 행하였으므로 호흡이 바로 삶 자체이고 공의 실천인 상태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숨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수를 세는 것은 정신을 숨에 집중하여 조화를 이루기 위한 방편이다. 숨이 들어올 때 그 숨의 수를 세면서 정신을 집중하고, 나갈 때 나가는 숨의 수를 세면서 정신을 집중하여 서로 따르게 하면 숨은 올바르게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면 숨의 들어오고 나감이 그친 듯한 상태가 되어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자연스럽게 숨이 들어왔다 나가는 경지에 도달한다.
요가 수행자들이 우주의 생명력인 프라나를 많이 들어오게 하여 그것을 될 수 있는 한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 데에 반해, 붓다는 될 수 있는 한 숨을 길게 내보내는 것이 좋다고 보았다. 또한 숨을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하고 길게 내뿜을 때에도 마음을 집중하지 않으면 호흡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덧붙여 강조했다. 수의, 곧 정신집중은 호흡이 잘못되지 않게 하는 고삐인 셈이다. 실제로 의식을 집중했을 때의 호흡과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호흡의 효과는 큰 차이가 있다. 붓다가 창안한 호흡법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정신이 집중된 호흡이므로 이런 호흡법을 익히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무의식 상태에서도 호흡이 길고 깊으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 같은 호흡법은 인간이 생명의 도리를 올바르게 깨닫고 생명을 잘 유지하기 위해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다. 이를 거스르고 숨이 제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거나 나가는 숨을 제대로 못 나가게 하면 몸에 질병이 생기고 정신 착란이 발생하게 된다. 붓다는 이런 점을 통찰했기 때문에 마음의 불안이나 어떤 걸림을 풀기 위해서 숨을 길게 내뿜는 호흡을 하라고 권한 것이다. 마음에 맺힌 응어리는 마음으로 풀 수 있다. 붓다는 마음이 몸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특히 호흡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실제로 이런 일은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흔한 일이다. 화가 났을 때 후우! 하고 숨을 길게 내뿜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초조할 때도 숨을 길게 내뿜으면 괜찮아진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화가 나거나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곤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므로 평소에 숨을 길게 내뿜는 호흡법을 익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하면 언제 어디서나 고요한 마음가짐과 올바른 몸가짐을 유지하 수 있게 된다.
붓다가 창안한 안반수의법은 생리학적 측면에서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학적인 면에서 볼 때에도, 인간을 최고의 정신 상태로 인도하는 호흡법이다.
《잡아함경》 제26권 <오법경五法經>에서 붓다는 안반념법(安般念法)을 통해 죄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설법하고 있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머무셨다. 이때 부처님이 여러 비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 법이 있어 이로움이 많으리니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안반수의)으로 닦으라. 다섯 가지 법은 무엇인가. 깨끗한 계(戒)인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Pratimoksa의 율의(律儀)에 머물러서 잘 갖추어 행하고, 작은 죄라도 능히 두려워하여 계행을 잘 간직한다. 이것이 첫 번째 법이다. 이로움이 많으리니 안나반나념으로써 수습하라. 또한 다음으로 비구가 행해야 할 도는 욕심과 일을 적게 하고 애쓰는 것이 적절하다. 이를 두 번째 법이라 한다. 이로움이 많으리니 안나반나념으로써 수습하라. 또한 다음으로 비구는 먹고 마심에 있어서 양을 알고, 많고 적음의 중간을 취하나니 먹고 마시는 데 있어서 욕심을 일으키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음을 한결같이 가진다. 이를 세 번째 법이라고 한다. 이로움이 많으리니 안나반나념으로써 수습하라. 또한 다음에 비구는 초저녁이나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사유를 골똘히 하나니 이를 네 번째 법이라 한다. 이로움이 많으리니 안나반나념으로써 닦으라. 또한 다음에 비구는 한가하고 안온한 숲 속에서 모든 시끄러움과 어지러움을 떠난다. 이를 다섯째 법이라 한다. 이로움이 많으리니 안나반나념으로써 수습하라.'
이렇게 설법하시니 모든 비구가 부처님의 말씀을 기쁘게 여겨 받들어 행하였다."
이처럼 붓다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여 계를 지키라고 가르치고 있다. 도덕적인 계율을 지키고, 욕심을 적게 가지고, 음식에 지나침과 부족함이 없게 하고, 잠자는 것을 탐내지 말며, 한가한 곳에서 숨의 들어오고 나감을 생각하여 한결같이 수행하는 다섯 가지 법은 비구와 같은 수행자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일반인에게도 이로운 가르침이다. 특히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지나친 욕심 때문인데, 호흡과 정신통일로 지나친 욕심까지도 조절할 수 있다고 했다.
정에 들면 어떤 사물을 대하더라도 그 사물의 진상을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대상으로부터 받아들여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진실 그대로 분명하게 인식되어 적정함과 순일함을 잃지 않게 된다. 이러한 경지는 들숨에서 비롯된다. 만일 숨이 들어오지 못한다면 마음이 착란을 일으켜 사물의 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광란을 일으켜 고통을 가져온다.
숨을 내보낼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앞에서도 말했듯이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서는 숨을 길게 내보내거나 짧게 내보내면서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고행자들의 호흡수련이 건강이나 불사를 성취하기 위한 특수한 방법으로써 개척된 반면에, 붓다의 호흡법은 자연 그대로의 호흡을 명상함으로써 해탈에 이른다. 주어진 모든 법을 버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잡아함경》 제26권 <안나반나념경>에서 붓다는 이렇게 설법하고 있다.
"마땅히 안나반나(안반)의 염(念)(수의)를 닦으라. 비구가 안나반나의 염을 많이 닦으면 몸과 마음이 평안해진다. 그리하여 깨달음에 있어서나 보고 느낌에 있어서 고요하고 순일한 가운데 분명한 생각이 일어나 닦고 익힘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호흡이 고르면 몸과 마음이 안정된다. 호흡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는 호흡과 생각을 같이 맞추어야 한다. 우리는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여 의식적으로 그것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의식을 통해서 잘못된 호흡을 올바르게 바꾸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대게 따로 떨어져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호흡하는 동안 마음이 제멋대로 달려나가기도 하고, 다른 생각에 잠기기도 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호흡이 올바르게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예컨대 마음이 어떤 일에 집착하여 골몰해 있을 때에는 들숨이 주가 된다. 따라서 나가는 숨이 줄어들게 되어 체내의 나쁜 독소가 그만큼 덜 배출된다. 탐욕에 끌려 있다든지, 마음속에 진도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든지, 슬픔이나 후회, 의심, 자포자기 등에 빠져 있으면 호흡도 고르지 않게 된다.
나가는 숨을 의식적으로 길게 내뿜는 것을 되풀이하는 동안에 호흡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고, 이에 따라 마음도 순일한 적멸(寂滅) 상태로 가게된다. 이처럼 의식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중에 올바른 호흡이 이루어지면 마음은 절대 안정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이제가지의 산란한 마음은 진정되고 고요한 마음이 찾아온다. 현대인들은 복잡한 사회생활 때문에 정신적인 안정을 찾기가 어렵고 불안이나 근심 속에서 살아가기 쉽다. 이런 생활을 바로잡기는 쉽지 않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 진정제나 수면제에 의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몸이 좀 불편하면 우리는 흔히 약에 의존하려고 하나 이는 매우 잘못된 습관이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질병에 대한 저항력도 가지고 있으며 생명을 재생시키는 힘도 갖추고 있다. 이런 힘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력하므로 잘 활용해야 한다. 혼탁하거나 산란한 마음, 불안과 초조, 비통함이나 분노 등은 모두 우리의 마음속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마음도 좌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내 마음은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누구나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을 수는 있지만 실상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데에 인간의 한계가 있다. 붓다는 평범하지만 깨닫기 어려운 것을 만인이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친다.
붓다가 가르친 안반수의법 역시 습관이 된 나쁜 호흡을 의식적으로 바로잡으려는 훈련이다. 숨이 나갈 때 충분히 나가고 들어올 때 충분히 들어오면 그 호흡은 와전하다. 그러나 습관을 잘못 들이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잘못된 호흡을 바로잡기 위한 호흡 훈련이 필요하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뿜는 것은 자율신경의 작용으로, 자율신경은 정신의 지배를 받으므로 정신집중을 통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되어 호흡도 자연히 조절된다.
마음을 제어한다는 말은 우리의 마음이 제멋대로 달리지 않게 하고 한 곳으로 몰아간다는 의미이다. 마치 말을 타는 이가 고삐를 늦추거나 조이면서 말을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과 같다. 마음의 제어야말로 마음 수행의 요체이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은 심조복(心調伏)이다. 마음을 잘 다스려서 내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하는 수행이라는 뜻이다. 불교는 마음 공부에서 그친다. 자신의 마음을 임의로 조절할 수만 있다면 생사의 초월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또한 열반의 세계도 거기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은 항상 '있다'거나 '없다'는 상대적 가치관에 끌려 어느 한쪽에 치우쳐 집착하기 쉽다. 그러나 어느 한 극단에 끌리면 도리에 어긋나며 진리에 역행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어느 한쪽 극단에 끌리지 않는 삶의 길인 중도(中道)를 가르친다. 이것이 공(空)이요 정(定)이다. 일상적인 호흡에서 들숨을 통해 산소를 들이마신다고 생각하면 '있다'는 고정관념에 끌리고, 날숨을 통해 탄산가스 등의 나쁜 요소를 배출한다고 생각하면 '없다'는 고정관념에 끌리게 되므로, 그것은 중도나 공이 아니다. 올바른 호흡을 하기 위해서는 공이나 정에서 떠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산소를 흡입한다거나 탄산가스를 뱉는다는 생각도 하지말고 무심(無心) 속에서 오직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만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한다는 개념이지만 사실상 이 세상에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실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집착일 뿐이다. 이 집착 때문에 대상이 없어졌을 때 고민이 생기는 것이다.
'있다'는 것도 없고 '없다'는 것도 없다. 따라서 만물도 만물이 아니므로 없어졌다고 해서 의혹에 빠질 필요도 없다. 만물이 있다는 고정 관념이나 없어진 데 대한 의혹의 고정관념은 수의, 즉 정신집중을 통해서 없앨 수 있다 정신집중은 긍정인 유(有)나 부정인 무(無)에 대한 고정관념과,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대한 집착을 없애 준다. 만물에 대한 긍정은 집착을 일으키며 부정은 자포자기와 허무에 빠지게 한다. '있다'는 데에도, '없다'는 데어도 치우치지 않고 공과 정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다. 호흡 역시 삶이라는 생명 현상의 하나이니, 올바르게 이루어지려면 공과 정의 상태에 있어야 함이 당연하다.
들숨은 공기가 저절로 들어오는 것도, 어떤 절대자의 의도에 의해 피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폐 속으로 공기가 들어오도록 신체구조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의 늑골을 치켜올리고 횡경막이 수축하여 아래로 처지면 가슴이 넓게 펴져 숨이 들어온다. 그러나 이런 신체구조를 갖추었더라도 공기가 없으면 호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기와 폐, 횡경막, 늑골 등이 서로 어울려 자율신경의 반사작용에 의해 숨이 폐 속으로 들어온다. 자율신경의 작용은 호르몬 분비에 의해 이루어지고, 호르몬 분비는 숨을 들어오게 하겠다는 의식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의식이 근본적인 인(因)이라면 다른 것은 연(緣)이 되어, 두 가지가 화합함으로써 비로소 숨이 폐로 들어오게 된다. 공기와 폐가 있기 때문에 정신이 있다고 한다면 유물론이요, 정신이 있기 때문에 공기와 폐, 횡경막이 있다고 한다면 유심론이다. 어느 쪽이 더 근본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종교는 정신이 더 근본적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인과 연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이며, 어느 것이 더 근본적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인과 연이 어울려서 호흡이 이루어지는지가 더 중요하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현상을 볼 때, 들어오는 숨이 근본이 되어 나가는 숨이 있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들어오는 것이 없으면 나가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가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호흡도 예외는 아니어서 들어온 공기는 내보내야 한다. 그래서 붓다는 들숨이 근본 인연이요, 날숨은 있을 바가 없다고 했다. 즉 들어오는 숨은 근본 인연이므로 들어오게 해야 하고 머물 곳이 없는 숨은 나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살아가려면 공기가 충분히 들어오게 했다가 다사 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들어온 숨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주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
진리를 아는 도인은 모든 것이 본래 어디에서 오며 또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 공기가 충분히 들어와 생명에 활력을 주고 또 충분히 나가서 더러움을 없애 생명의 발전을 기한다. 이렇게 생과 멸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생과 멸이 지속되면 생과 멸을 초월하게 된다. 우리의 인생은 생과 멸 속에 있으면서도 그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포는 찰나에 생하고 찰나에 멸한다. 어디까지가 생이고 어디까지가 멸인지를 알 수가 없다. 우리의 생명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호흡도 어디까지가 들어오는 숨이고 어디까지가 나가는 숨인지 알 수 업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공의 도리요 연기의 도리이다.
찰나의생, 찰나의멸이 무한히 되풀이되는 삶이 정신을 위주로 하여 영위된다고 한다면, 그 삶은 정신이 집중되어 그것과 하나가 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잇다. 이것이 수의로 호흡이 올바르게 행해질 수 있다고 한 말의 뜻이다.
《잡아함경》 제26권의<단각상경(斷覺想經)>은 붓다의 가르침을 이렇게 전한다.
"마땅히 안나반나의 염(念)을 닦으라. 안나반나의 염을 닦아서 많이 수습하면 여러 느낌이나 생각들을 끊게 된다. 안나반나의 염으로 많이 수습하여 여러 가지 느낌이나 생각을 끊는다 함은, 비구가 마을이나 도성에 머물러 있을 때라도 위에서 설법한 바와 같이 나가는 숨이 끊어지는 것을 잘 배운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가는 숨이 끊어지는 것을 잘 배운다,'는 숨을 충분히 길게 내뿜어서 멸의 극치에 이르러 자연히 들어오게 하라는 의미이다. 멸의 극치에 생이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호흡은 폐의 피를 뇌로 돌리고 다시 심장으로 돌려보낸다. 탐욕이나 분노가 일어날 때 숨을 길게 내보내면 마음이 가라앉으므로 열 번 이상 되풀이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 감정에서 벗어나게 된다. 화가 났을 때는 얼굴에 핏대가 올랐다가 마음이 진정되면 괜찮아진다. 그 핏대가 바로 뇌로 통하는 정맥의 울혈이다. 뇌나 심장의 울혈이 사라지면 산소를 많이 내포한 동맥혈이 뇌를 향하여 순조롭게 흘러 들어간다. 따라서 뇌세포가 활기를 띠고 정신활동이 건전해져 생명에 활기를 주게 된다. '수(守)는 없음'이라고 한 것은 정신집중이 잘 되어 호흡에 의식이 함께 따르면 주객 대립이나 객관에 대한 집착이 없어져서 걸림 없이 텅 빈 상태에 있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의 마음을 의식적으로 호흡에 집중시키려면 올바른 호흡을 닦겠다는 마음이 앞서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이 완전하게 살아난다. 이를 '의(意)는 하고자 함이다.' 라고 했다. 그러므로 안반수의의 내용을 '청정무위(淸淨無爲)'라고 할 수 있다. 청정무위란 몸과 마음이 걸림 없이 건강하고 평온한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무위'라는 말은 노자(老子)나 장자(莊子)가 즐겨 쓴 말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 외에 '자연 그대로의 움직임'이라는 뜻도 있다. 무위란 곧 올바른 삶이다. 올바른 삶에는 괴로움 없는 즐거운 삶을 누리려면 먼저 정신을 집중하고 올바른 호흡을 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가르쳤다.
병중인 사람의 호흡은 고르지가 않다. 즉, 호흡이 얕고 짧으며 들어오고 나감이 리듬 없이 무질서하다. 체내에 흐르고 있는 혈액, 호르몬, 임파액 등이 정체된 곳에서 암세포가 발생한다고 한다. 혈액순환이 잘되고 임파선이나 호르몬선 등이 건강하여 그로부터 유출되는 것들이 잘 통하게 하려면 횡경막의 상하운동이나 흉곽의 확장·축소 운동이 잘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른 호흡 상태를 유지해야만 한다. 현대인들은 부자연스러운 생활 양식으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입고 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가장 손쉬운 호흡 훈련부터 시작해야 한다.
호흡을 중시하는 것은 명상의 산실인 인도의 뿌리깊은 전통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기식(氣息)인 프라나prana를 생명의 기운, 생명 그 자체, 우주의 근본원리라고 보았다. 인류 최고의 종교 성가집인《리그베다 Rig-veda》의 '푸루샤 수크타purusa sukuta라는 찬가에는, 우주의 시원인 '푸루샤'라는 원인(原人)에게 공희를 바치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푸루샤의 숨으로부터 바람이 생겼다고 한다. 또한 인도 최대의 철학서인 《우파니샤드 Upanisad》(Kausitaki-Upanisad, Tait-tiriya-Upanisad)에서는 숨을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Brabman과 아트만Atman이라고 했다. 또《아타르바 베다 Atbarva-veda》에는 다음과 같이 호흡을 찬양한 노래가 있다(제14권, 4).
숨에게 경배하라.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은
그의 지배를 받는다.
그는 모든 것의 지배자이니.
모든 것은 그에 의해 확립된다.
숨은 지배자이다. 숨은 여신이다.
모든 것은 숨을 받든다.
숨은 태양이요 달이요 창조신이다.
기러기가 날아오를 땐
한 발을 물에서 빼지 않는다.
발을 빼면 오늘도 없고 내일도 없다.
밤도 없고 낮도 없으리라.
결코 밝게 빛나는 아침도 없다.
숨이여, 나를 피하지 말라.
나 이외의 것이 되지 말라.
물의 태아와 같이 너를 속박하리니.
나의 생명력을 위해서 내 속에.
숨이여!
이처럼 숨은 우주의 근본원리이다. 숨은 개인의 본체이면서 창조신과 같은 능력이 있다. 숨은 모든 생명체의 본체라는 생각은 기원전 10세기경부터 있다가 기원전 6세기경 우파니샤드 시대에 이르러 들숨과 날숨에 각각 뜻이 부여되어 생리현상이나 장수법, 그리고 윤회설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즉 들숨과 날숨으로만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음식을 삼킬 때 아래로 내려가는 숨을 프라나prana, 위쪽으로 올라와서 언어활동을 지배하는 숨을 우다나udana, 음식을 소화시키는데 관여하는 숨을 사마나samana, 배설이나 출산에 관련하여 아래로 내려보내는 숨을 아파나apana, 전신을 돌아다니며 몸의 운동을 관장하는 숨을 비야나viyana라 하여 자세히 구별하게 되었다. 숨을 장수, 질병의 치유, 풍요나 출산과 관련시킨 노래도 있다.
숨은 번개로써 풀과 나무에게 소리쳐
그들이 번식력을 갖게 하고
그때 많은 것을 출산한다.
숨이 넓은 땅에 비를 내릴 때
모든 식물이 태어난다.
이러한 생각들이 발전되어 숨을 쉴 때 들어오는 공기가 곧 우리의 생명력이라고 믿게 되었다. 또한 고행자들은 죽지 않기 위해 숨을 한껏 들이쉰 후 그 숨이 나가지 못하게 하는 호흡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의식 없는 호흡이 있을 수 없으며, 육체적인 운동인 호흡과 호흡하고자 하는 의식이 하나로 융합되고 있다고 본다. 이때 들숨과 날숨이 완전히 행해지려면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만일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 예사롭게 호흡하면 길고 짧은 호흡의 리듬에 혼란이 와서 생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래서 '만약 이미 뜻을 일으키면 곧 수의가 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호흡운동을 조절할 경우 일시적인 조화를 가져올 수는 있으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하여 완전한 호흡이 되지는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방심하면 다시 예사스러운 호흡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호흡을 올바른 호흡으로 바꾸어 그것을 굳히려면,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단계를 지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실제 사람에게 복식호흡을 익히게 하려면,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복식호흡을 하게끔 수련시켜 습관이 되게 해야 한다. 자율신경을 조절하는 힘이 생기면 무의식적으로 복식호흡을 할 수 있게 된다. 언제 어디서나 올바른 호흡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의식이 무의식의 차원에서 집중되어 있으므로 정신과 육체가 안정되며, 따라서 올바른 몸가짐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들숨이 오음(五陰)(오온五蘊)을 받는다면, 날숨은 들숨으로 인해 생긴 번뇌를 없앤다. 호흡은 오음을 받고 다시 이를 제거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오면 가고 가면 오며, 생하면 멸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것이 곧 인연이다. 즉 숨이 들어오면 나가게 되어 있다. 인간은 번뇌를 갖고 사는 동시에 그 번뇌를 없애면서 살기도 한다. 이역시 인연법에 의한다. 생명을 받아서 잘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소망인 동시에 생명이 소멸할 때가 되면 그에 순응하는 것 역시 인간의 소망이다. 다시 말해서 삶이 인간의 소망인 동시에 죽을 때 잘 죽는 것도 인간의 소망이다. 우리는 이 모든 현상이 인연법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인연법을 아는 힘은 바로 호흡에 대한 정신집중에서 비롯된다.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을 의식하여 그 실상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 되기 때문이다. 고오 가는 것, 받고 제거하는 것, 죽고 사는 것 등을 통해서 그 실상을 파악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오온을 떠나서는 공(空)의 깨달음이 있을 수 없다. 오온 자체를 통해서 오온이 공이라는 사실을 하는 것이다. 번뇌를 통해서만 번뇌를 떠날 수 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삶과 죽음을 통해서 그것을 초월한 세계로 갈 수 있다.
정신을 숨에 집중하여 인연법에 따라 들숨과 날숨을 올바르게 행하면 몸과 말과 마음도 이에 따르게 된다. 호흡이 바르지 않으면 몸과 말과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여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곧 인연을 깨닫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지킨다는 것은 어떤 사물에 집착하는 바가 없이 공의도로, 즉 인연의 도리에서 떠나지 않음이다. 사물에 집착하게 되면 정신집중이 잘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마음이 어떤 사물에 집착하는 까닭은 그것을 실체로서 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마음도 실체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집착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은 일어나면 곧 멸하므로 생과 멸은 마음속에서 찰나 동안에 반복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올바른 상태에 있으려면 그것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생과 멸도 있을 수 없다. 생과 멸이 있으면서도 없는 세계를 도(道)라고 한다. 도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생과 멸의 되풀이 속에서 그것을 떠난다는 뜻이다.
수의는 호흡에 정신이 집중되어 호흡과 하나가 된 상태에서, 들어오는 숨이면서도 들어온다는 생각이 없고 나가는 숨이면서도 나간다는 생각이 없다. 정신을 호흡에 집중할 때, 처음에는 숨이 들어오고 나가고 있다고 느낀다. 이때에는 생과 사가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신을 집중하면 드디어는 숨이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느끼지 않게 된다. 이때에는 생과 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은 지로서, 마음을 그친다. 마음을 그친다는 것은 호흡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한 곳에 머물러 있는 상태이다. 넷째는 관으로, 마음이 호흡에서 떠나 외계의 사물을 대할 때 잡된 생각 없이 관조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는 환이니 마음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돌아와서 밖으로 달려나가거나 흩어지는 일 없이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정이니,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청정본심(淸淨本心)이다.
다음은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네 가지 진리다. 청정한 본심에 이르게 되면 비로소 일체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괴로움의 원인과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며, 드디어 올바른 길도 알게 된다. 이처럼 열 가지가 모드 이루어지면 안반수의가 완성되다. 이것은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으로 설법하고 있는 내용과 합일된다,
'삽십칠품경(三十七道品)'이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서른일곱 가지 수행 방법이니 앞에서 말한 삼십칠도품이라고도 한다. 도품은 깨달음의 종류라는 뜻으로, 도는 지혜, 곧 깨달음이며 품은 종류이다. 먼저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이를 사념처(四念處)라고 한다. 부모에게서 받은 육신이 부정하다고 관(觀)하는 신념처(身念處), 우리의 마음이 받아들이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 참된 것이 아니라고 관하는 수념처(受念處), 우리의 마음이 항상 변하고 있다는 무상(無常)을 관하는 심념처(心念處),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고 관하는 법념처(法念處)이다. 붓다는 이 네 가지를 순차적으로 총괄하여 관하라고 설법한다.
다음은 네 가지 올바른 노력을 뜻하는 사정근(四正勤)이 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나쁜 습성이나 마음을 끊기 위해 애쓰는 율의단(律儀斷), 이미 나타난 악행이나 마음을 끊으려고 노력하는 단단(斷斷)아직 나타나지 않은 선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수호단(隨護斷), 이미 나타난 선함을 더욱 증대하기 위해 힘쓰는 수단(수斷)이다. 이 네 가지 노력들은 마음의 태만을 끊음으로써 행할 수 있다.
이런 수행이 이루어져서 보다 높은 단계에 이르면 또 네 가지가 더 있다. 바라는 바가 뜻대로 되는 욕여의족(欲如意足), 노력한 것이 뜻대로 되는 정진여의족(精進如意足), 마음가짐이 뜻대로 되는 심여의족(心如意足), 지혜가 뜻대로 나타나는 혜여의족(慧如意足)이다.
다음으로는 오근(五根)이라는 다섯 가지 훌륭한 힘이 나타난다. 뛰어난 믿음이 생기는 힘〔信根〕, 부지런히 노력하는 힘〔精進根〕, 올바른 것을 생각하는 힘〔念根〕, 한결같이 마음을 고요히 하는 선정의 힘〔定根〕, 지혜로 세상을 바라보는 힘〔慧根〕등이다.
또다른 힘으로는 믿는 힘〔信力〕, 부지런히 노력하는 힘〔勤力〕, 올바른 것을 생각하는 힘〔念力〕, 선정의 힘〔定力〕, 지혜의 힘〔慧力〕을 얻게 된다.
다음으로 깨달음의 지혜를 도와주는 일곱가지를 닦게 되는데, 모든 법을 가려서 선악을 선택하는 택법각지(擇法覺支), 수행의 바른 길로 정진하는 정진각지(精進覺支), 마음에 선함을 얻어서 기뻐하는 희각지(喜覺支), 그릇된 번뇌를 제거하고 능히 선한 것으로 나아가는 제각지(際覺支), 밖의 세계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사각지(捨覺支), 명상에 들어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정각지(定覺支), 생각을 잘 가다듬어 지혜로 가는 생각만을 하는 염각지(念覺支) 등이다. 이를 칠각지(七覺支)라고 한다. 이것이 모두 이루어지면 드디어 팔정도를 닦아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팔정도는 불교적인 수행이 모두 이루어져서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가장 올바르고 거룩한 상태에 도달한 경지이며, 곧 깨달은 자의 삶이다. 팔정도는 인생이나 세계에 대한 견해가 공 그대로 받아들여져 지혜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정견(正見), 어떤 행위를 하기 전에 올바른 생각을 지니고 결의하는 정사유(正思惟), 올바른 생각에 의해서 남을 이롭게 하는 말을 하는 정어(正語), 일상 속에서 스스로 그릇된 행위를 하지 않고 진리만을 행하는 정업(正業), 일상 생활에서 정당하고 남에게 해가 없는 생계수단으로 살아가는 정명(正命), 극단에 떨어지지 않는 중도로써 올바르게 부지런히 애쓰는 정정진(正精進), 항상 무상과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과 실체가 없음을 생각하는 정념(正念), 고요하고 또렷한 마음가짐인 정정(正定)의 여덟이다.
이상을 합하면 37가지의 수행이 된다. 삼십칠도품경의 이 수행들은 안반수의경의 십힐(十 )에 해당한다. 그 상응 관계는 다음과 같다.
수식(數息)- 사념처(四念處)
상수(相隨)- 사정근(四正勤)
지(止) ---- 사여의족(四如意足)
관(觀) ---- 오근(五根)
환(還) ---- 오력(五力)
정(淨) ---- 칠각지(七覺支)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등불은 본래 밝게 하는 힘이 있으나 어두움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또한 밝게 나타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등불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본래의 성질이 파괴되어 어리석은 번뇌와 망상에 빠지는 면이 있고, 그와 반대로 사리를 알아차려 진실을 보는 본성을 보이는 면이 있다. 그러므로 정신집중을 통해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사물의 실상을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인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본성은 밝고 깨끗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둡고 더러운 면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어두움과 더러움을 인연에 의해서 밝고 깨끗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수의는 밝고 깨끗한 면이 드러나게 하는 길이다. 따라서 이러한 본성을 나타내는 수의에 있어서 밝음이나 어두움, 깨끗함과 더러움의 어느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한쪽에 집착하면 그와 다른 면이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의 적정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어두움과 밝음이 없다. 또한 어리석음과 현명함도 없다. 악이나 선 중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밝음에 대한 집착은 어두움을 전제로 해서 성립하며 깨끗함에 대한 집착은 더러움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더러움 혹은 깨끗함이라는 극단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청정본심은 더러움이나 깨끗함, 어두움이나 밝음, 악이나 선을 떠나 있지만, 또한 더러움, 깨끗함, 어두움과 밝음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의 청정본심도 서로 상대되는 가치를 인연으로 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의는 상대되는 두 가치를 인연으로 해서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를 가는 길이다. 마음의 중도란 선과 악, 더러움과 깨끗함, 어두움과 밝음 중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멀리하면서 깨끗함과 밝음으로 가는 길이다. '순신(順信)이 인(因)이요, 의방(疑謗)이 연(椽)이 된다.'는 말이 있다. 나에게 잘 따르는 것도 인연이요, 나를 의심하거나 비방하는 것도 인연이다. 현명한 사람은 어떤 것이든 인연을 살린다.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도 나의 벗이요, 나를 의심하고 비방하는 사람도 나의 벗이라고 생각한다. 수의를 통해 이러한 세계가 이루어진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객관 세계를 대하면서 그에 이끌려 고요한 상태를 간직하지 못한다. 그러나 수행을 하여 마음을 조복(調伏)하는 힘을 얻으면,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머물러 다시는 흔들리지 않고 항상 어디서나 나 자신과 함께 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기까지는 지켜진 마음이 사라지기도 하고 달려서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밖으로 달려나가는 마음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은 마음이 아직 고요한 곳에 머물지 못해 수양의 단계가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사라진 것을 되찾거나 달려나간 마음을 잡기 위해서도 지속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어 떠나지 않음을 수의(守意)라고 했는데, 여기서 수(守)(지킴)와 의(意)(마음)는 서로 다른 점이 있다. 한 곳에 머물러 떠나지 않음은 마음이 객관 세계의 모든 것을 대해서 깨달아 그로부터 떠나지 않음이다. 만일 그로부터 떠난다면 깨달음이 지켜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꽃 한 송이가 있다고 하자. 마음을 고요히 하여 꽃을 대하면 그 꽃의 빛깔이나 향기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리하며 마음과 꽃이 하나가 되면 꽃의 진실과 내가 깊은 곳에서 만나고, 그로 인해 서로 주고받음이 생겨 꽃에 대한 사랑이 솟아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꽃을 본 마음이 꽃으로부터 떠나면 그 꽃의 진실을 감득할 수도 없고 나의 진실 또한 꽃을 향해 다가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꽃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그 꽃을 꺾어 버릴지도 모른다. 이런 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일체의 객관적인 대상을 대할 때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깨달아 그 깨달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잘 유지해야 한다. 깨달음이 한결같이 지켜지면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무위(無爲)이다. 마음이 대상을 만나 잘못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엔 이런 뜻이 있고 그것은 곧 수의를 뜻한다.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여 그 마음이 떠나지 않으면 일체의 그릇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불교 명상은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여 한결같이 머물러 있도록 하는 관법(觀法)이다. 관은 대상에 마음을 집중시켜 그 실상을 깨닫는 것, 곧 수의와 일맥상통한다.
-수의에는 네 가지 즐거움이 있다. 첫째는 원하는 것을 아는 즐거움이요, 둘째는 법을 아는 즐거움이요, 셋째는 그침을 아는 즐거움이요, 넷째는 가능한 것을 아는 즐거움이다. 이것이 네 가지 즐거움이다.
첫째는 하고자 하는 바를 아는 즐거움이 나타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 욕망에 따라서 모든 살이 영위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 하루를 무의식 속에서, 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목적이 없는 사물은 없다. 모든 존재에게는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목적 없는 인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일시적인 충동에 의한 맹목적인 생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모르고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방도를 취한다.
올바른 호흡이나 마음을 가졌을 때에는 몸과 마음이 즐겁기 마련이다. 이 즐거움은 내가 살아 있다는 만족감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 만족이란 바로 삶의 목적이 달성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스스로 만족하고 즐겁게 된다. 이는 자연스러운 생명의 표현이다. 스스로 만족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행위야말로 나의 할 일이자 목표이다.
올바르게 호흡하면서 그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면 내 생명이 바라는 바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올바른 호흡을 통해서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때 생기는 즐거움은 내 생명의 근본 욕구가 채워지고 있다는 데에서 나오는 즐거움이다. 만일 호흡을 중단하여 들숨과 날숨을 들어오고 나가지 못하게 막는다면 괴로움이 따르게 된다. 생명의 근본 욕구를 거역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법을 하는 즐거움이다. 법을 안다는 것은 모든 존재의 진실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알려져 거기에 머물게 되었을 때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 나타나면 그곳에 안주하여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하면 즐거움이 저절로 따른다. 이는 누가 주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난 것이다. 올바른 호흡과 정신집중으로 몸과 마음이 안온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서 진실이 환하게 드러나니 이때의 즐거움은 더없이 크다. 진실이 서로 통하고, 질서가 서고,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 몸에 느껴지는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상태에 있게 되면 즐거움이 있다. 봄이 되면 꽃이 펴야 하고 아름다운 꽃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 마찬가지로 겨울에는 추워야 하고 눈이 와야 한다.
좋은 것을 즐겁게 느끼고 나쁜 것을 괴롭게 느끼는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에 의해 좌우된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때, 즐거움이 오면 즐겁고 괴로움이 오면 괴롭다. 그러나 마음이 격랑 속에 휩쓸려 있을 때는 즐거움도 즐거움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을 맑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처럼 유지하고 있어야 모든 사물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따라서 즐거움도 솟아나는 것이다. 이 즐거움은 절대적이다. 그렇게 머물고 있는 것이 불변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그침을 아는 즐거움이다.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그친 상태에서 느끼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그친 상태에서 느끼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이 세상 만물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서 그것들의 가치가 새롭게 발견되었을 때에 느끼는 즐거움이 법을 아는 즐거움〔法樂〕이지만, 마음에 동요가 생기면 그 즐거움이 사라질 수 도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신집중이 지속되면 사물을 대하는 심안(心眼)의 관찰력이 더욱 심화되어 사물의 진실을 파악하게된다. 이때 다시 새롭고 깊은 것을 알게 되니, 그것은 그 사물에만 있는 진실이 아닌, 일체의 사물과 통하고 우주의 생명과 하나가 되는 보편성에 대한 발견이다. 이 경지에서 마음은, 한 가지 사물을 대할 때마다 그 사물만이 가진 특수성과 아울러 우주적인 보편성도 통찰하게 되는 즐거움을 맛본다.
붓다의 6년 고행은 실로 괴로움을 참는 수행이었으나 보리수 밑에서의 명상 끝에 그것을 버리고 모든 사물에 마음을 집중하여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고행시의 생로병사가 는 모두 서로 모순된 것으로서, 해결되지 않는 갈등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보리수 밑에서의 생로병사는 모순된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값지게 하는 새로운 가치로 각성되었기 때문이다. 생로병사가 없는 인생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존재 가치도 없는 인생이다. 생이 있기에 늙음과 병과 죽음이 있다. 찰나에 생하고 찰나에 멸하는 생명이 생로병사 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해 낸다는 데에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붓다는 생로병사 속에서 절대 생명을 획득하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붓다의 깨달음은 실로 일체 만상에 대한 관심이 새로운 가치의 발견으로 승화된 것이다. 이처럼 안반수의는 호흡에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즐거움의 길이기도 하다.
넷째는 즐길 만한 것을 아는 즐거움이다. 즐거운 상태에 머무르면서 가히 즐길 만한 것을 충분히 맛보는 즐거움이다. 들숨의 상쾌함이 극치에 이르렀을 때의 즐거움도 즐길 만하다. 그러나 날숨 또한 즐거움은 준다. 들숨과 날숨을 통해 그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이 가히 즐길만한 것임을 알면 자재(自在)에 머물게 된다.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나가면 나가는 대로 즐거움에 따를 뿐,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는 절도가 필요한데, 이러한 절도 있는 즐거움이 가히 즐길 만한 즐거움이다. 정신집중은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가치의 한계 내에서 충분히 즐기고 즐거움을 얻는 방편이다.
붓다는 인생을 고(古)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인생이 고라는 사살을 모르는 사람은 인생이 즐겁다는 사실도 알 수가 없다. 고를 통해 즐거움을 얻었을 때 즐거움이 더욱 커지면 그것을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가 있다. 붓다는 인생의 괴로움을 통해서 더 없는 절대적 즐거움에 머물렀고, 인생의 무상함을 실감했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한 절대가치의 삶을 살았다. 불교는 고를 깨달아서 낙(樂)으로 가는 가르침이며 무상을 통해서 영원한 삶을 사는 가르침이다.
법은 근본원리에 의해 도출된 방법이다. 이런 방법은 실천을 통해 구현되고 그 실천이 바로 진리와 부합되므로 '법(방법)은 행(行)(실천)이 되고, 그 행으로부터 얻어지는 득(得)(결과)은 도(道)(진리)가 된다.'고 했다. 따라서 숨의 들어오고 나감에 정신을 집중하는 안반수의는 진리의 실천인 동시에 진리를 터득하고 진리 그것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앞에서 안반수의에는 여섯 단계가 있다고 했다. 이 여섯 단계를 다시 우리의 마음이 밖을 향해 나가는 것을 조절하는 것과, 안을 향해 들어오는 것을 조절하는 것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수를 세는 것, 숨과 생각이 같이 따르면서 떠나지 않게 하는 수(隨), 그것이 한 곳에 머물러 떠나지 않게 하는 지(止)의 세 가지는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다스린다.
이와는 달리 마음이 어떤 사물을 대할 때 생각이 그리로 달려가서 그것과 결합되지 않고 나에게 다시 돌아오게 하는 관(觀), 나에게 돌아와 한결같이 머물러 있는 환(還), 머물러 있는 마음이 안과 밖 어디에도 집착 없이 깨끗하게 집중되고 있는 상태인 정(淨)의 세 가지는 내 속을 향해 움직이는 마음을 다스린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과 마음을 합일 시켜서 마음이 호흡을 따르게 하는 일이다. 숨이 나갈 때는 마음도 따라서 나가고 들어올 때는 마음도 따라서 들어오게 해야 한다. 숨과 마음이 합해져서 나가는 숨과 마음이 함께 움직이지 않게 되고〔止), 마음과 숨이 하나가 되어 있으면서도 마음이 숨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가 되고〔觀〕, 다시 여기에서 마음은 마음대로 어떤 사물에도 한결같이 집중 할 수 있는 상태가 되고〔還〕, 나아가 그 집중이 한 곳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걸림 없이 집중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淨〕, 이런 상태를 잘 익히게 되면 마음은 진리, 곧 마음의 본래 상태에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여섯 가지를 훈련해야 한다. 그리하여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청정한 상태에 있게 되면,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으면서 세상사와 더불어 그것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수련은 이 세상에서 멀리 떨어지고자 하는 수행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을 대하면서도 거기에 미혹됨이 없이 본래의 마음 상태를 한결같이 지니고 즐거운 삶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다음 단계인 환(還)은 범어로 비바르타나vivartana라고 한다. 지나 관의 상태에서의 관찰이 바뀌어 내 몸과 마음이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임을 관찰하게 된다. 모든 대상에 대한 관찰이면서 그 실상에 대한 올바른 관찰이기도 하다. 이대 알고 느낀 것에 의해 실천이 따르게 된다.
정(淨)은 범어로는 파리슛디parisuddbi이며, 곧 깨끗함이다. 모든 번뇌를 없애고 지혜를 닦아, 심지어 온갖 선행(善行)에도 걸리지 않는 무간도(無間道)에 들어감으로써 진리를 깨달아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 여섯 가지 단계를 차례로 밟아야 하는가? 우리의 마음은 다스리지 않으면 제멋대로 움직이므로 억제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수식을 통해 다스려진 마음은 점차 내 뜻에 따라 부릴 수 있게 되어, 드디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무애(無涯)의 도를 얻어 깨달음에 이른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다. 또한 쟁기나 소에게 거는 멍에도 있어야 한다. 때가 되면 땅을 갈아 씨앗도 뿌려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수확을 얻을 수 없다. 비도 알맞게 내려야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조건이 조성되어야만 수확을 얻을 수 있다.
숨을 세는 것을 땅과 같다고 했다. 수식을 농사를 짓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땅에 비유한 것이다. 생명의 근본이 되는 호흡의 요체인 정신을 집중하는 수식이 장차 깨달음이라는 수확을 얻기 위한 기본 토양이 된다는 뜻이다.
상수는 쟁기에 비유한다. 땅의 굳고 무름에 따라 쟁기로 얕거나 깊게 갈아야 한다. 쟁기로 땅을 갈지 않으면 씨를 뿌릴 수 없듯이 호흡과 마음이 조화되지 않으면 호흡 운동은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하게 할 수 없다. 호흡과 마음을 잘 조화시키는 것은 씨를 뿌리기 위해 땅을 쟁기로 고루 갈아 다스리는 것과 같다.
마음을 호흡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지(止)는 마치 소의 목에 거는 멍에와 같다. 멍에가 없으면 소는 쟁기를 끌지 못하니 땅을 갈 수 없다.
숨에 정신을 집중하여 호흡하는 관은 모든 현상에 대한 관찰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일체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은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첫 단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씨앗과 같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모습을 관찰하여 그것을 안다는 것처럼 보이고, 또한 즐거워 보이고, 마치 어떤 실체가 있어서 만상(萬像)이 존재하는 듯하다. 모든 것이 깨끗하고 바람직하며 소망하던 것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런 모든 것들은 무상하고, 고통이 따르며,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연에 따라서 이루어졌다는 것과, 절대적으로 청정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물의 내면 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 지혜는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므?/span>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 들숨-날숨 속에 ‘열반적정’ 있다
안반수의경은 이른바 수식관(數息觀)이라고 하는 관법을 가르친 경전이다. 이 수식관을 설한 안반수의경에는 37종의 관법이 담겨 있어, 이것을 삼십칠도품경(三十七道品經)이라는 경의 이름으로 소개했다. 근본불교나 소승불교에서의 수행은 이 삼십칠도품경에 소개된 37종의 관법으로 수련하여 성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승불교 시대에 오면 여기에 중생구제의 보살정신이 가미되어서 누구나 함께 쉽게 빠르게 일상생활 속에서 성도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대승불교권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먼저 소승 시대의 관법의 내용을 알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그 내용을 보이고, 그 중에서 안반수의 곧 호흡을 관하는 수행이 이들 중 어떤 위치에 있으며, 그 방법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도록 한다.
♠ 수식관은 부처님 재세부터 강조
소승 시대나 대승 시대나 불교도들이 수행을 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되는 길이 수행이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수행을 통해서 성도하셨고, 역대 조사들이 모두 수행의 성취자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중아함경(中阿含經)의 여러 곳에서 자주 보이는 선정의 관법이 유일한 수행의 길이었다. 아함경에 보이는 관법은 삼삼매(三三昧), 사무량(四無量), 팔해탈(八解脫), 팔승처(八勝處), 십변처(十遍處), 십상(十想), 십념(十念) 등이 보이는데 이와 같이 숫자로 표시해서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에 크게 조직된 것인 듯하다.
팔리어(pali)로 된 부파불교 시대의 논서인 아비담(阿毘曇, abhidamma)에서는 십변(十遍), 십부정(十不淨), 십수념(十隨念), 사범주(四梵住), 사무색(四無色), 식염관(食厭觀), 계차별관(界差別觀) 등 40여개의 대상에 따라서 관하는 수행이 소개되고 있다. 이것을 사십업처(四十業處)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 여러 가지 관법 중에는 실제로 불교도들이 활용하지 않은 것도 있고, 특별히 많이 활용한 것도 있다. 그리하여 그 뒤에 소승불교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다시 정리되면서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내용으로 하여 설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저 유명한 논서인 해탈도론(解脫道論)이라는 논서다.
여기에서 이들 여러 수행법을 자세히 설법하고 있다. 어떻게 선(禪)을 닦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해탈도론은 세간정(世間定)과 출세간정(出世間定)의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세간정을 닦음에 있어서는 삼계(三界)에 있어서 선(善)을 향한 마음이 한결같이 유지되도록 하라고 했고, 출세간정에 있어서는 열반을 증득하고자 하는 마음을 한결같이 가지고 지혜를 얻는 수행법을 보이고 있다.
세간정이란 세간에서 생활하면서 수행하는 관법이다.
이러한 세간 속에서의 수행에서는
첫째로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을 먼저 끊어야 하고,
둘째로는 좋은 벗을 만나야하고,
셋째로는 자기의 성품에 맞게 해야 하고,
넷째로는 40종의 대상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잡아서 그것을 관하고,
다섯째는 적당한 수행처를 정하고,
여섯째는 머리가 길거나 손톱이나 발톱이 길면 그것을 깎아서 장애가 되지 않게 하고,
일곱째는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는 관법을 잘 익혀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 열반 증득하겠다는 마음이 가장 중요
출세간적인 수행법은 세간적인 수행을 거쳐서 보다 높은 곳에 도달되는 것이니, 출세간정이라는 특별한 관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한결같이 세간정을 닦으면서 열반을 증득하고자 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아가면 드디어 지혜를 얻어서 열반에 이른다고 한다. 세간정이나 출세간정의 수행법으로서 널리 행해진 것은 지(止), 곧 정신통일을 통해서 사물을 꿰뚫어보는 관(觀)법이다.
♠ 숫자 헤아리는데 모든 정신 집중하라
관법수행은 근본불교와 소승불교의 불교도들이 기본적으로 널리 활용한 것이다. 이들 수행법들은 주로 정(定)인 지(止)와 혜(慧)인 관(觀)을 고루 닦는 것이다. 지가 이루어져야 관이 따른다. 그래서 지는 삼매(三昧, samadhi)를 얻은 다음에 모든 대상을 관하되 그 삼매의 상태를 떠나지 않게 되면, 그때에 지혜가 얻어져서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면 근본불교나 소승불교의 그 복잡하고 수많은 수행법 중에서 대표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대표가 되는 것은 바로 안반수의(安般守意)라고 하는 6묘문(六妙門)과 16특승법(十六特勝法)과 40업처관(四十業處觀)이니 이것을 소개하겠다.
♠ 수식관은 초기-소승불교 대표 수행법
육묘문(六妙門)이란 여섯 가지 문으로 들어가서 절대 안온한 열반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는 뜻으로 지어진 관법의 문이다. 이 육묘문의 근본이름은 아나파나사티(anapanasati)라고 하여, 이 이름으로 된 경전이 『아나파나사티수타(anapanasatisutta)』다.(정태혁 저, 『붓다의 호흡과 명상Ⅱ』, 정신세계사 참조) 이 경전의 내용이 육묘문이다. 여섯 가지 오묘한 문으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 당나라 때의 천태 지의대사가 가장 소중히 하여 항상 이 관법을 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역경전에는 『안반수의경』으로 나온다. 안(安)은 ‘an’, 반(般)은 ‘pan’ 사티(sati)는 뜻으로 수의(守意)라고 하여 『안반수의경』이라고 했다. 안은 입식(入息)을, 반은 출식(出息)의 뜻이다.
이와 같이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수행법은 열반의 세계로 가게 하는 오묘한 문이다. 호흡을 명상하는 이 오묘한 관법은 여섯 가지 종류로 설해지고 있기 때문에 육묘문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대비바사론』 권26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에 수(數), 2에 수(隨), 3에 지(止), 4에 관(觀), 5에 전(轉), 6에 정(淨)이 있다’고 하였고, 잡아비심론(雜阿毘心論) 권8에서는 수(數), 수(隨), 지(止), 관(觀), 환(還), 정(淨)의 여섯을 들고 있다. 이들 두 문헌으로 보면 다섯 번째의 전(轉)과 환(還)의 명칭을 달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같은 것이다. 한문으로 되어있는 『안반수의경』에서는 환(還)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 이 여섯 가지 오묘한 문은 어떤 내용인가?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권 60의 설명에 의하면,
① 수(數)란 수식문(數息門)으로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헤아려서 하나로부터 열까지 헤아리면서 정신이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②수(隨)란 수식문으로서 수행자의 마음이 숨과 같이 따라서 떠나지 않게 하여 숨이 나갈 때에는 그것이 시방에 이르고 들어올 때에는 큰 몸에 두루 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③지(止)라는 것은 지문이라고 하는 것이니 생각을 콧등에 머물게 하여 고요히 숨을 생각하는 것이다.
④관(觀)이라고 하는 것은 관문이니, 이 몸은 부정하므로 우리의 생각은 이것을 통해서 고(苦)를 받고, 마음은 덧없는 것이며,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고 생각하며, 이에 의해서 내 몸이 깨끗하다고 하거나 지금 나는 즐겁다고 하거나 내 마음은 영원한 것이라고 하거나, 모든 존재는 절대적인 실체가 있다고 하는 그릇된 집착을 가지는 것을 없애고, 올바르게 사물을 관찰하는 것이다.
♠ 생각을 콧등에 머물도록 해야
⑤환(還)이라고 하는 것은, 환문(還門)이니,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관찰하는 것에서 다시 전환하여, 우리의 몸은 부정하여 지나친 애착에서 떠나는 신염처(身念處)와 우리의 몸에 있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고(苦)를 받는다는 진실을 철저히 깨달아 그 감각기관으로부터 받는 고통에서 떠나는 수념처(受念處)와 우리의 마음은 덧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는 심념처(心念處)와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어 인연에 의해서 이것과 저것이 모여서 된 것이라는 법념처(法念處)의 네 가지를 닦아서, 드디어 열반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⑥정(淨)이라고 하는 것은 정문(淨門)이니, 일체의 번뇌를 없애고 마음이 한 곳에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 청정한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다.
♠ 숨 잘 쉬면 자비-무상도리 따라온다
‘아나파나사티’라고 불리는 관법은 불교의 독특한 정신이 들어있고, 그 효과나 방법도 누구나 다같이 할 수 있는 뛰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관법에 대해서 불교도들은 너무도 소중히 간직해오면서 이것을 보다 세밀히 분석하여 열 여섯 가지로 세분하여 철저히 실천했다. 그리하여 그것을 다시 16특승법(十六特勝法)이라고 이름하여 전해오고 있다. 오늘날 남방불교도들이 위빠사나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6종으로 설한 것을 16종으로 보다 자세히 나누어 설하고, 다시 37종으로 설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바가 없고, 실제 수행에 임해서는 16특승법 또는 37도품으로 가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나파나사티’
안반수의경은 이른바 수식관(數息觀)이라고 하는 관법을 가르친 경전이다.
첫째는 사물의 근본을 알게 된다.
우리는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자연히 들어오고 나가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이것은 너무도 신비하고 너무도 오묘하며, 너무도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대생명의 뜻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숨을 쉬지 못하면 살지 못한다. 그래서 숨이 끊어지면 죽고만다. 그렇다면 숨의 출입은 깊은 철학적 종교적 뜻이 있다.
숨이 그저 물리적인 생체현상이라고 과학적으로는 말하겠지만, 과학 이상의 뜻이 있고, 과학이나 학문이나 사고를 넘어선 불가사의하고 위대한 뜻이 담겨있다.
숨이 들어오는 것을 통해서 생명이 유지되니, 입식(入息)은 삶 자체이다. 생명의 시작이요, 생명의 힘이 바로 숨이 들어오는데 있다. 그리고 숨이 나가는 것은 몸 안에 있는 나쁜 요소를 밖으로 내보내는 것 이상으로 큰 뜻이 있다. 모든 생명체의 죽음은 숨이 나가서 들어오지 않고 끊어짐과 동시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숨이 나가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죽음 자체다. 숨을 쉬고 있는 우리는 삶과 죽음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 살고 있다는 이 사실 속에는 삶과 죽음이 같이 하고 있지 않은가?
진실로 삶이란 죽음을 동반한 것이며, 죽음이란 삶을 통해서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숨이 들어올 때 내가 살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숨이 나갈 때 나는 죽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사람은 삶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이라는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생사가 따로 없는 생사일여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정신이 집중되어 숨이 나가면 ‘숨이 나간다’고 느끼고, 숨이 들어오면 ‘숨이 들어온다’고 느끼면서, 그 숨이 또한 덧없고 실체가 없으며, 숨에 따라서 느끼는 감각적인 감수작용 또한 그것이 나를 괴롭히고, 그것은 실체가 없이 인연에 따라 있게 된 것임을 알면, 이 들고나는 숨에 집착함이 없이 고요히 숨이 끊어진 듯이 들고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때에 숨의 들고나는 것에 대한 근본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어찌 숨만에 국한되랴.
둘째는 마음에 집착이 없어진다.
숨이 들어오고 또는 나가는 것에 정신을 집중하여 극치에 이르면 숨의 출입에 대한 느낌까지 없어진다. 이것이 무념무상의 상태다.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모든 감각기능이 밖으로 달려나가지 않고 안에서 고요히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뇌의 활동이나 모든 신체기능이 가장 조화롭고 안정된 상태에 있게 되므로 마음의 움직임도 고요히 정지된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거울에 그림자가 비추듯이 관조하고 있을 뿐이다.
집착이란 우리의 감각기능이 밖의 대상에 끌려서 자기자신을 잃은 상태이므로, 호흡이 있으면서도 없는 상태에서는 모든 감각기능도 밖의 대상에 끌리지 않고, 의식도 없으면서 있는 무의식의 상태에 있을 뿐이다. 이때에는 밖의 어떤 대상에도 집착함이 없이 오직 자기자신에 안주하고 밖의 대상을 관조할 뿐이다.
마음에 집착이 없으니 밖으로부터의 자극이 없고, 마음 안에 고요히 머물고 있으니, 뜻대로 오고감에 걸림이 없다. 이것이 집착 없는 자기다.
이와 같이 자기자신의 근본 상태로 돌아와서 객관세계를 보면 나의 아픔이 남의 아픔이요, 남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며, 남의 고락이 나의 고락이다. 여기에서 진실로 자비심이 있게 된다.
♠ 숨이 편안해지면 몸-마음도 가뿐
나에게서 숨이 나가고 나에게서 숨이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면 마음이 주인이 되었으니 모든 사물은 나의 것이 된 셈이다. 내가 주인이 되었으니, 나 아닌 것이 없다.
실체 없는 이 마음이 나의 주인이 되었으니 나의 주인은 무아(無我)의 아인 것이다. 무아로써 아를 보고 무아로써 본체 대상을 보고 있으니, 나 아닌 것이 없고 나와 남의 일체는 무아 그대로다.
그야말로 공(空) 그대로이니, 공이 곧 색(色, 일체) 아님이 없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을 보았으니, 본체 사물의 인연을 본다. 생사의 인연을 보았으니 법을 본 것이 된다. 법을 보았으니 일체의 생멸을 자재로이 하게 된 것이다. 생사가 마음에서 일어난 그림자의 끝임을 알게 되었으니 다섯 가지 즐거움이나 여섯 가지 괴로움도 모두 끊어진 것이다. 이 어찌 즐겁지 않으랴.
네번째 공덕으로는 그릇됨이 없어지고 청정함을 얻는다.
일체의 심의 작용이 없어졌으므로,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그릇된 것이 자연히 없어지고, 어리석은 짓이나 일체의 악함이 억제된다. 마음이 고요한 곳에 머무르게 되면 모든 사물의 실체를 보게 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사물을 자재로이 쓰게 될 것이니, 이것이 지(止)에서 관(觀)을 거쳐서 환(還)으로 돌아와서 정(淨)에 머문 것이다. 악한 마음을 관찰하여 그것을 끊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깨끗하고 착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길이 열린다. 그 길로 나아가게 되면 도를 이루게 된다. 그것을 자세히 설한 것이 37도품경의 37가지 수행이다. 나쁜 것을 제거하는 것은 깨끗한 본래의 성품으로 돌아오는 것이 된다. 출세간도에서 지혜를 얻는 수행이 바로 이러한 적극적인 방법이다.
다섯 째는 인연법에 따르고 그것을 넘어선다.
숨이 들어오는 것은 숨이 나가기 때문이며, 숨이 나가는 것은 숨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 이러한 인연법 그대로 우리는 호흡을 하고 있으며, 삶도 그렇고 죽음도 그렇다.
그러므로 숨의 출입은 들고 남이 없이 들고 나가는 것이며, 죽음과 삶도 생사가 본래 없는 속에 생사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숨의 출입이나 생과 사는 인연법 그대로요, 그 인연법을 통해서 생사가 없는 세계, 출입이 없는 세계로 가서 자유자재한 청정한 세계에 머문다. 이것은 인연법에 따르면서 인연법을 넘어서는 것이다. 아니파나시티는 이러한 세계의 실천이다.
호흡을 통해서 호흡을 떠나고 인연을 통해서 인연을 떠났으니, 그것이 지극히 고요한 열반의 세계다.
이러한 열반의 세계에도 머물지 않겠다는 것이 대승불교다. 대승불교의 극치에 이른 교설을 보이고 있는 [금강정경(金剛頂經)]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리수 밑에서 붓다가 무식정(無識定, asphanaka-samadhi)에 들어 있을 때 일체제불이 경각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일어나거라,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무식정이란 사선(四禪) 중의 높은 단계로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으로 통하는 경지다. 그때에 붓다는 일체여래의 가르침에 따라서, 진리에서 일어나서 비상비비상처에 그치지 않고 무진정(無盡定)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무진정이 바로 공의 세계요, 청정한 세계요, 중생구제의 지혜방편이 있게 되는 여래의 세계요, 지혜와 자비가 같이하는 보살의 세계다.
이상과 같이 호흡을 관하는 수행의 공덕을 간략히 일부를 소개했으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많은 공덕이 있음을 경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상으로 [안반수의경]에서 설하는 아나파나사티법에 대한 소개를 끝내겠으나, 이들 여섯 가지 문은 첫째 문인 수를 헤아리는 것으로부터 점차로 올라가서 청정한 세계에 이르도록 여섯 단계로 조직되어 있다. 그러나 낮고 높음은 단지 방편에 지나지 않고, 어느 것이나 궁극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수를 헤아리는 수식문(數息門)에 철저하면 그것이 점차로 수(隨)와 지(止)와 관(觀)과 환(還)과 정(淨)으로 이어진다.
여섯 문은 각각 다른 문이면서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제 간략하게 소승불교시대의 대표적인 수행법의 하나인 ‘아나파나사티’법 소개를 마친다.
다음으로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더욱 철저히 체계화한 수행법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 들숨-날숨 편안하면 ‘만사형통’
16특승법(十六特勝法)은 앞에서 말한 육묘문법을 확대하여 보다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16종의 뛰어난 방법이라는 이름이다. 이 법에 대하여는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 권 5, 대안반수의경(大安般守意經), 달마다라선경(達磨多羅禪經), 잡아함경(雜阿含經) 권 29,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권 21 등에 기록되어 있고, 대비바사론(大毘婆娑論) 권 26, 성실론(成實論) 권 16 등에서 해석되고 있다.
곧 입식과 출식에 정신을 집중시켜 한결같이 그것을 생각함으로써 들고 나는 숨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수행법이다.
실제에 있어서 수행자가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세면서 하나로부터 열까지 반복하여 세면 계속 헤아리는 동안에 마음이 집중되어 산란심이 사라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정심관(五停心觀)이라고 하는 관법의 하나인 수식관(數息觀)을 확대하여 16으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이다.
십륙이란 어떤 것인가? 곧 식단(息短), 식장(息長), 식변신(息遍身), 제신행(除身行), 각희(覺喜), 각락(覺樂), 각심행(覺心行), 제심행(除心行), 각심(覺心), 영심희(令心喜), 영심섭(令心攝), 영심탈(令心脫), 무상행(無常行), 단행(斷行), 이행(離行), 멸행(滅行) 등의 16이다. 이들은 점차로 얕은 단계에서부터 깊은 단계로 들어가서 드디어 열반에 드는 수행인 것이다.
이제 이들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겠다.
① 단식(短息)은 짧은 호흡을 관하는 것이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정신을 집중시켜서 그에 따라서 마음이 안정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고 어수선한지를 비추어 보아 이것을 점차 가라앉히는 방법이다.
② 장식(長息)은 호흡을 길고 가늘게 하여 그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면 정신이 안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 길고 가늘게 호흡하면서 정신을 집중시킨다.
③ 식변신(息遍身)이란 숨을 들이마시면 그 숨이 온 몸에 두루 차게 된다고 생각하여 수행자는 몸이 허공과 같이 공허하므로 몸의 모든 털구멍으로부터 숨이 들어오고 또다시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신을 집중시킨다.
④ 제신행(除身行)
몸으로 짓는 업력이 원인이 되는 모든 행위를 없애기 위해서,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정신을 집중하여 그것을 관하면, 들고 나가는 숨이 없는 것 같은 무심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이 때에 마음이 안정되어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된다. 그리하여 이 상태를 되풀이하여 익히면, 드디어 몸으로 짓는 업을 없앨 수 있다. 왜냐하면 몸의 업은 근본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으면 몸도 없게 되지 않는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⑤ 각희(覺喜)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의 활동의 사라지면 마음이 지극히 고요한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이 때에 자연히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마음의 흔들림에서 괴로움이 있는 것이므로 고요히 머문 마음에는 즐거움만이 있다. 그야말로 안온해진다. 온화함에는 편안함이 따르고, 편안함에는 기쁨이 따른다.
⑥ 각락(覺樂)
마음이 안정되고 몸에서 기쁨을 느끼면 다시 쾌락을 맛볼 수 있다. 몸도 마음도 쾌락함을 느끼면 이것이 쾌락을 깨달은 것이다. 마치 피로한 사람이 푹 쉬고 난 뒤에 몸의 상쾌함과 마음의 편안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이 때에는 자연히 숨도 길게 내보내게 된다. 마음과 몸이 쾌적하면 후련한 심정이 되고 몸도 쾌적하여 길게 숨이 나간다. 이 단계가 바로 이 ‘각락’의 단계다.
⑦ 각심행(覺心行)
앞 단계에서 마음에 쾌감을 느껴서 여기에 맛을 알면 그 쾌감에 끌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탐심(貪心)이 발동한 것이다. 탐심이란 어떤 한 가지에 끌려 들어간 마음이다. 기쁨이나 쾌락에 끌려 들어가서 그것을 따르게 되면 그 마음이 또한 업력이 된다. 그래서 그 탐심도 없애야 된다. 그러므로 이 각심행의 단계에서는 마음에 탐심이 발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탐심을 없애려고 하는 이러한 노력이 자연히 일어나게 된다.
♠ 定-慧는 열반적정 이르는 두 축
16특승법(十六特勝法)의 나머지 단계에 대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8. 제심행(除心行)
탐욕심을 없애겠다고 하여 마음의 실체를 살펴보면, 잘못된 마음의 상태를 없애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릇된 마음의 상태가 사라지면, 안온한 본래 마음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9. 각심(覺心)
탐심을 없애면 마음이 안온하고 고요해진다. 그러나 이때의 이 마음의 상태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깨어있는 상태에서 안온함과 고요함에 머물러야 한다. 마음을 보는 것이다. 자기의 깊은 마음을 보는 단계인 것이다. 그러나 그 보는 마음 상태는 어떠한 것인가?
10. 영심희(令心喜)
이때에는그 아무것도 없는 안온함과 고요함에 끌려서 침잠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떨치고 침잠함에서 일어서서 환희심을 일으켜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침잠하기도 하고 떨쳐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나, 침잠하고만 있으면 그것은 잘못된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침잠된 마음은 다시 스스로 떨쳐 일으켜야 한다. 그때에는 오직 환희심만이 일어난다.
11. 영심섭(令心攝)
환희심만이 일어나고 있으면 그것도 다시 걷어들여야 한다. 마음이 너무 환희에 들떠있기 때문이다. 너무 들떠있는 것도 안 된다.
12. 영심탈(令心脫)
마음이 들떠 산란하지도 않고 침잠하지도 않게 잘 조절하여 침잠하거나 들뜨는 두 극단을 떠나서 중도(中道)에 있게 하는 것이다. 탈(脫)이란 두 극단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13. 무상행(無常行)
마음이 두 극단을 떠나서 중도에 머물게 되면 능히 모든 존재에 대한 실상을 알게 된다. 곧 모든 존재의 생멸의 실상을 그대로 알게 되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생과 멸의 실상이 곧 무상함이다. 그래서 이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무상행이란 모든 존재가 무상하다는 진실을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14. 단행(斷行)
모든 존재가 무상함을 알게 되면 모든 번뇌가 끊어지는 단계로 들어간다. ‘행(行)이란 마음의 움직임을 말한다.
15. 이행(離行)
모든 존재가 무상함을 알게 되었으니 이들에게 끌리지 않고 이들과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떠나고자 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16. 멸행(滅行)
모든 것을 떠났으니 마음에 자재(自在)를 얻어서 걸리는 바가 없다. 마음에는 아무것도 없이 멸진된 상태로 돌아간다.
이상과 같은 16단계로 수행하는 관법은 1∼4는 몸의 부정함을 관하는 것이고, 5∼8은 감각의 심의 활동이 모두 고(苦)임을 관하는 관법이고, 9∼12는 마음의 무상함을 관하는 것이고, 13∼16은 모든 존재가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를 관하는 것이다.
곧 깨끗하고(淨), 즐겁고(樂), 영원하며(常), 실체가 있다(我)는 네 가지 그릇된 생각을 없애고, 일체는 모두 고(一切皆苦)요, 모든 정신적·육체적 움직임에서 일어난 것은 무상하며(諸行無常),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이 이것과 저것과의 관계에서 있게 되었다(諸法無我)는 것이니, 이런 것을 모두 떠나서 열반의 고요함에 이르게 된다(涅槃寂靜)는 네 가지 진리를 깨닫게 하는 관법이다. 바로 사념처(四念處)의 관법이다.
열반적정의 세계는 바로 정(定)이라고 하는 세계다. 이 정은 바로 혜(慧)로 이어지는 것이다. 정 없이 혜가 없고, 혜 없이 정이 따로 없다. 정과 혜는 표리의 관계요, 두 다리와 같다. 불교의 수행은 정과 혜를 겸해 닦아서 정과 혜가 서로 떠나지 않게 되는 수행이다. 그래서 정혜쌍수(定慧雙修)에서 정혜쌍운(定慧雙運)이 이루어진다.
『중아함경』 제29 용상경(龍象經)에서 ‘숨이 들고 날 때 잘 머물러 마음이 선(善)함에 이르러 정(定)이다. 용(龍)은 가고 그침에 다 정이요, 앉고 누움에도 정이다. 용은 일체시에 정이니 이것을 용의 상법(常法)이라고 하느니라’라고 했다. 여기에서 보이고 있듯이 걷거나 앉거나 머물거나 항상 정에 머물면 모든 그릇됨에서 벗어나서 있어야할 상태에 있게 되어 드디어는 수행이 완성되는 것이다.
♠ 코끝 숨구멍에 삶의 진실 담겨있다
도는 가까이 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우주의 진실이 모두 그대로 있는 것이다. 가까운 곳이란 어디인가? 바로 코 앞에 있다. 콧구멍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숨 속에 있다. 들고나는 숨 속에 생사가 그대로 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항상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 또 있다. 마음이다. 마음의 움직임은 그대로 우주만유의 움직임이다. 마음의 실체를 보고, 마음의 움직임을 조절하고, 마음을 부릴 수 있으면 우주를 내 것으로 하고 우주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불교의 수행은 가장 확실한 사실을 통해서 가장 확실한 세계를 실증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수행이다. 호흡의 들고남은 가장 확실하지 않은가. 마음의 움직임은 일체만유의 주인이 아닌가.
불교의 수행은 가장 가까이 있는 진실을 통해서 내가 주인이 되는 수행이다. 지난 호에서는 16특승법을 소개했다. 여기에서도 육문법, 곧 호흡의 들고 남에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이 바탕을 이룬다.
이와 같이 호흡은 수행의 가장 기본이 되며, 가장 쉬운 수행법으로서 누구나 다같이 들어갈 수 있는 오묘한 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호흡을 관하는 전형적인 교설의 일부인 칠각지(七覺支)를 소개할까 한다. 이것은 붓다가 호흡을 설하신 원형 그대로를 알 수 있고, 16특승법도 모두 여기에 포함돼 있는 것이다. 이것은 팔리어 원전 속에 있는 경이다. 그 이름은 『아나파나사티숫타(Anapanasatisutta)』이다. (이 경의 전체는 졸저 정신세계사 간 [붓다의 호흡과 명상 Ⅰ]에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사념처(四念處)를 수습하고, 어떻게 널리 익혀서 칠각지(七覺支)를 원만히 할 것인가?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의 몸으로 몸을 따라서 관하면서 전일하게 정진함이 있고,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함이 있고, 세간에 있어서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그때 그의 생각은 세워져서 없어지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의 생각이 세워져서 없어지지 않으면 그때에 비구는 염등각지(念等覺支)를 수습하여 그때에 비구의 염등각지가 원만하게 수습된다. 그는 이와 같이 생각이 있어서 머물면서 저 법을 지혜로써 살펴서 보고, 살펴서 알고 두루 생각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이와 같이 생각이 머물면서 저 법을 지혜로써 자세히 살피고 자세히 알고 두루 생각하면, 그때에 택법등각지(擇法等覺支)가 비구에게서 부지런히 행해져서 그때에 택법등각지가 수습되어 원만해진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저 법을 지혜로써 살펴보고 자세히 알고 두루 사유하기 위해서 집착 없는 정진을 부지런히 닦으면 정진등각지(精進等覺支)가 닦아져서 그때에 비로소 정진등각지를 원만히 수습한 것이 된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정진을 한결같이 애써 노력한 사람에게는 집착이 없는 기쁨이 생한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정진에 애쓴 사람에게 집착 없는 기쁨이 생하면 희등각지(喜等覺支)가 이루어진다. 그때에 비구가 잘 수습하면 원만히 수습된다. 기쁨의 마음에는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또한 고요하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기쁨을 얻어서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고요하면 경안등각지(輕安等覺支)라 한다. 그때에 비구에게서 닦아져서 수습되고 원만하게 되면 몸이 평안하고 마음이 안온하여 안락하게 된 것이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에게서 몸과 마음이 고요하면 그때에 비구에게서 정등각지(定等覺支)가 닦아져서 수습하여 원만하게 된다. 그는 이와 같이 적정에 든 마음을 잘 관찰하여 깨닫는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이와 같이 마음의 고요함을 잘 관찰할 때에 사등각지(捨等覺支)가 비구에게서 닦아져서 사등각지를 익혀 그때에 비로소 사등각지는 비구에게서 원만히 된다.
비구들이여, 사념처를 이와 같이 수습하고, 이와같이 널리 닦으면 칠각지를 원만히 하느니라.”
♠ 초기 29종 수행법 戒-定-慧로 귀결
“비구들이여, 칠각지를 어떻게 닦아 익히고, 어떻게 널리 닦으면 지혜와 해탈을 원만히 할 것인가. 비구들이여, 비구가 있어 고를 떠남에 의하여, 탐심을 떠남에 의하여, 고의 멸에 의하여, 버리고 떠나는 곳을 향해서 가는 염등각지를 닦아서 익히고, 택법각지를 닦아서 익히고, 정진등각지를 닦아서 익히고, 희등각지를 닦아서 익히고, 경안등각지를 닦아서 익히고, 고를 떠남에 의해서, 탐심을 떠남에 의해서, 고의 멸에 의해서, 버리고 떠나는 곳으로 향해서 가는 사등각지를 닦고 익힌다. 비구들이여, 칠각지를 이와 같이 닦고 익히면 지혜와 해탈이 원만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세존이 말씀하셨다고 경에 설해져 있다.
이것을 요약하면 올바르게 제법을 분별하여 깨달아서 선악을 분별하여 아는 것이 택법각지다.
그 다음에는 선으로 나아가게 되고, 선을 알면 그리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있게 되니, 이것이 정진등각지다.
이렇게 하여 한결같이 정진한 사람에게는 집착함이 없는 기쁨이 생길 것이니, 이것이 희등각지다.
이 희등각지에서 얻어지는 집착 없는 기쁨에서 다시 다음 단계인 경안등각지를 수습하게 된다. 마음에 기쁨이 솟아서 더욱 수행정진 하게 되면 마음이 유순해서 마음과 몸이 쉬게 되니 이것이 경안등각지다. 이 단계에서는 몸과 마음이 평안하여 모든 인연을 떠나서 어떤 것도 얻음이 없는 단계로 간다. 이것이 사등각지다. 이렇게 하여 마음과 몸의 안정이 극치에 이르면 삼매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등각지다.
여기까지 와서 비로소 욕심이나 노여움이나 어리석음의 때가 없어진 것을 스스로 알게 되고 깨달음의 세계가 나타나니, 이때에 바로 나 자신을 찾게 된 것이요, 나를 수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경지를 호각지(濩覺支)라고 한다.
이와 같은 칠각지도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여 그것을 통해서 그것을 떠나는 과정에서 모두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은 왜 이같은 법을 설하셨는가? 보살은 모든 것이 공(空)이라고 관한다. 37종의 관법의 세계는 바로 공의 세계인 것이다. 공의 세계를 알고 증득하면 모든 것이 희론(戱論)인 것을 알게 되고, 희론임을 알면 해탈한다. 희론인 공의 세계는 항상 적멸(寂滅)이니, 이것이 참된 법의 모습이다.
붓다는 일체가 다 고요, 제행이 무상이요, 제법이 무아요, 열반이 적정임을 알고, 일체가 희론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37종의 수행을 설하셨다. 그러므로 37도품의 수습은 바로 깨달음의 세계인 인연을 알고 인연법을 따라서 열반의 즐거움에 머물게 하고자 하는 자비심에 의해서 설해진 것이다.
붓다는 자비심으로 사념처(四念處)로부터 사의단(四意斷), 사신족(四神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를 통해서 팔정도(八正道)에 이르는 37도품을 설하신 것이다.
붓다의 최초 설법이 나타나는 『전법륜경(轉法輪經)』에서는 먼저 팔정도(八正道)를 설하셨으나, 열반에 들기 직전에는 37도품경을 설하셨다고 한다.
붓다가 열반에 드실 때에
“비구들이여, 이제까지 너희들에게 말한 법을 너희들은 모두 잘 가지고 행하여 생각하고 널리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법이란 37도품이니라”라고 하셨다.(『장아함의 유행경』)
붓다가 입멸 직전에 29종의 행법을 더 설하신 것이다. 이 29종은 붓다가 때와 장소에 따라서, 근기에 따라서 스스로 실행하고 남에게도 실행하게 할 수 있도록 설하신 것이니, 이들 29종의 수행법은 팔정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팔정도를 나누면 37도품이 되고, 37도품을 성취하면 팔정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계(戒)·정(定)·혜(慧)로 섭수된다.
여기에서 소개한 팔리어 ‘아나파나사티숫타’에서는 팔정도가 설해져 있지 않다. 이것으로 보아서도 ‘아나파나사티숫타’라는 경전은 붓다가 입멸하시기 직전에 비구들에게 수행법으로 요약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호흡이 들어가고 나가는 그 속에서 이들 29종의 수행이 다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 妙樂의 깊은 경지 넘어서야 수행 끝
앞에서 소개한 소승불교 시대의 대표적인 수행은 불교의 선의 관법이다. 그러므로 소승불교 시대에는 여러 가지 관법이 행해졌는데, 그것들은 모두 수행자의 적성에 맞는 것을 택한 것이거나, 문제해결을 위한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십변관(十遍觀), 십부정관(十不淨觀), 십수념관(十隨念觀), 사범주관(四梵住觀), 사무색관(四無色觀), 식염상관(食厭想觀), 사계차별관(四界差別觀) 사십 종류의 관법으로 발전되어 수행했다. 이것을 사십업처관(四十業處觀)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먼저 ‘십변관’이란 마음을 열 가지 어떤 대상에 집중하여 그것으로써 온갖 곳에 두루 원만하게 하여 마음이 모든 대상에 두루 머물러 통일되게 함으로써 산란심을 떠나고, 탐욕이나 노여움이나 어리석음이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음이 한 대상에 집중되면 한결같이 고요함을 유지하여 사선(四禪)이나 오선(五禪)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사선이란 정신의 통일이 이루어져서 점차로 깊어지는 네 단계를 말한다.
첫 단계에서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마음을 쏟아, 오로지 거기에 집중하면 점차로 욕정이나 악한 마음이 없어져서 고요하게 안정된다. 이 단계가 제1선이다.
이 단계에서는 탐욕이나 노여움이나 악함이 사라져서 고요하게 되어 이때에 특별히 스스로 느끼는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된다. 이 기쁨을 맛보지 않으면 그것은 욕정이나 악심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제1선의 단계를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라고 한다.
마치 등산하는 사람이 높은 산을 향해서 올라가지만 처음에는 힘이 들어서 괴로움을 참고 올라가서 한 고비를 넘으면 그때에 괴로웠던 것이 사라지고 상쾌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에서는 아직 떠나지 못했던 것이 모두 없어져서 마음이 깨끗하게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시 더 깊어지면 안정된 마음으로 깊게 들어가게 되니, 이때에는 안정된 즐거움이 있게 된다. 이것은 산을 다시 올라가서 샘물을 마시고 쉬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경지를 제2선이라고 하고,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라고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더 올라가야 한다. 샘물을 마시면서 한숨을 내쉬고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다시 일어나서 더 올라가야 한다. 그 기쁨까지도 없어지고, 특정한 것에서 가졌던 관심을 없애고, 평등한 마음에 머물러서 마음에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느낌이 나타나면, 더 깊은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이때에는 지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등산하는 사람이 샘물의 신선함도 떠나서 더 높이 올라가면 바위, 풀, 나무, 바람 모두가 신비하고 신선하고 새로운 가치로 나타난다. 이때에는 모든 상대적인 가치 세계를 떠난 평등한 즐거움에 젖어든다. 그러한 경지가 묘락(妙樂)이라는 경지다.
이 묘락의 경지를 즐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경지를 제3선의 경지라고 하고,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라고도 한다.
자, 그러면 이 단계에서 만족할 것인가? 아니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
묘락의 즐거움에 젖어서 거기에 빠져 있으면 안 된다. 더 나아가면 앞에서 맛본 즐거움도 버리고, 괴로움도 떠나고,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져서 만물이 순화되어 한결같은 성취감에 젖어든다. 순화된 고요한 마음이 한결같이 유지되면서 깨끗하게 정화된 것이다. 이것은 등산하는 사람이 괴로웠던 것, 즐거웠던 것, 모든 것을 잊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초연한 마음으로 구름 위를 거닐고 있는 것과 같다. 천하의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 보인다.
마치 맑은 물에 사물의 모습이 비치는 것과 같다. 이때에는 마음의 안정과 맑은 심성이 균등하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경지는 묘락의 경지까지도 떠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지를 제4선이라고 하고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라고도 한다.
이 경지에서는 천하가 나의 것이 되었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이 바로 발 아래에 펼쳐진 것이다. 이것을 초월이라고도 하고, 청정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이르러서 수행이 이루어져서 아라한(arhat)과를 얻는다. 이때에는 모든 번뇌가 사라졌으므로 이구지(離垢地)요,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 사념청정지다.
♠ 몸의 부정함 觀해야 모든 집착 끊는다
지난 주 소개한 네 가지 단계에서는 욕망이 없어졌으나, 몸의 안락은 남아 있으므로, 이것을 색계정(色界定)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몸의 안락이 있으면 마음이 육체의 속박을 받게 되므로, 그 속박도 떠나서 자재로워져야 한다.
‘십부정관(十不淨觀)’은 열 가지 몸의 부정함을 관하는 관법으로서, 옛부터 초입문한 수행자가 이 관법으로 세상의 집착을 끊는 관법이다.
죽은 시체가 점차로 썩어가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몸이 무상하고, 깨끗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관법이다. 이 관법은 육체에 대한 집착을 끊고 초선에 들어가는 수행법이다.
왜 이런 관법을 통해서 초선으로 들어가는가?
육체와 마음의 고통은 집착 때문이요, 집착 중에도 몸에 에고(egos) 집착이 가장 강력하므로, 몸의 집착을 끊기 위해서는 몸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한다. 불교는 허구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서 그 사물의 실상을 알고, 그것에 걸리지 않게 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부정관으로 몸의 집착을 끊고, 사무색관으로 마음의 집착을 끊는다.
부정관을 통해서 육체에 대한 집착이 끊어지면 본격적인 수행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바로 이때에 신심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범주관(四梵住觀)을 닦는다.
이것은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네 가지 거룩한 세계에 머무르게 되는 관법이다.
그리고 사무색관(四無色觀)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정무변처(定無遍處), 식무변처(識無遍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관하여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리고 식염상관(食厭想觀)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 배설물 등에 대한 것을 관해서 거기에 집착하지 않게 되는 수행이다.
또한 사계차별관(四界差別觀)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공(空)의 본성을 떠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통찰하여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관법이다.
이상 간단히 40가지의 내용에 대한 수행을 소개했으나, 이들은 모두 우리의 집착을 끊는 수행이므로, 어떤 대상의 진상을 관찰함으로써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어 집착을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들 여러 관법을 통해서 얻어지는 공덕에 대해서 『청정도론(淸淨道論)』이라는 책에서는
첫째로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나타나게 하여 거기에 즐겁게 머물게 된다(現法樂住)고 하고,
둘째로는 위빠사나(vipasana, 毘鉢舍那), 곧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분별하여 실상을 파악하게 되고,
셋째로는 신통력(神通力)을 얻는다고 하고,
넷째로는 모든 존재는 더없이 뛰어난 존재임을 깨닫게 되고,
다섯째는 멸진정(滅盡定)에 든다고 했다.
이 외에 소승론부(小乘論部)에서는 관법으로서 오정심(五停心) 곧 오문선(五門禪)을 들고 있다. 이 오정심관은 부정관, 자비관, 연기관, 계차별관, 수식관 등 다섯 가지 관법이다.
이 중에서 부정관은 탐심이 많은 중생이 몸의 부정함을 관하여 그 탐심(貪心)을 다스리는 것이다.
자비관은 진심이 많은 중생이 남에게 자비심을 일으켜서 진심(嗔心)을 다스리는 것이다.
연기관은 어리석은 중생이 생노병사가 있게 된 열 두가지 인연을 관하여 어리석은 마음(痴心)을 다스리는 것이다.
계차별관은 집착심이 강한 중생이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 거짓 모인 것이라는 것을 관찰하여 제법이 무아임을 알게 되는 관법이다.
수식관은 산란심이 있는 중생이 숨의 들고 나는 것을 헤아려서 산란심을 없애는 관법이다.
이들 다섯 가지 선법은 소승불교의 선법이라고 말해지나 이들이 대승불교의 선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대승불교 시대에는 이들 소승불교의 선법이 너무도 복잡하므로 이것을 정리하게 된다. 그것이 대승불교의 여러 가지 선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승불교도 중에서 독자적인 자기의 입장을 내세워 체계화하게 되었으니, 예를 들면 천태(天台)의 관법이 이것이다.
♠ 계율은 선정으로 이끄는 수행의 근간
천태의 관법은 소승불교의 사념처관(四念處觀), 수식관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나, 독자적인 견해로서 체계화했다. 임제(臨濟)의 간화선(看話禪)도 소승시대의 여러 조사들이 깨달은 세계를 단적으로 파악하려고 한 관법이다.
지금까지 소승불교의 수행에서 몇 가지 대표적인 것을 소개했다. 그러면 불교의 수행이란 어떤 것인가를 정리해야겠다. 수행(修行)이라는 말은 ‘닦아서 행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면 닦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다. 흔들리고 들뜨거나, 침잠하고 어두운 마음이 아니고 밝게 깨어있는 마음이 되려고 하고, 고요히 안정된 마음이 되려고 하는 수행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믿고 실천해야 하는데 부처님 말씀을 믿으려면 부처님의 마음과 같이 되어서 그 마음을 알고 믿게 된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부처님과 같이 마음을 닦아서 부처님 마음과 같이 되려고 노력했다.
부처님은 항상 고요한 마음과 항상 깨어있는 마음으로 사셨다. 그러나 몸이 없이 마음이 따로 있을 수 없으므로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이다.
부처님은 자기의 참된 몸과 마음을 올바르게 보게 되었고, 자기를 찾게 되었고, 자기를 올바르게 살리게 되었다.
부처님이 깨달으셨다는 것은 자기의 올바른 모습을 깨달으신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진실을 여실히 보신 것이고, 여실히 보셨으니 모든 존재를 절대안온한 세계로 인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연기의 도리라고 하는 것이다.
연기의 도리가 공의 도리요, 중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있고 없는 도리다. 연기의 도리 그대로, 공의 도리 그대로 사신 것이 부처님의 삶이었다.
부처님의 일관된 수행과정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자기를 조복하는 수행이었으며, 그 과정은 명상을 통해서 삼매의 세계에 드셨고, 삼매를 떠나지 않고 삼매 속에서 이 세상을 관하고 그것을 살리셨다. 삼매는 지(止)요, 이 세상을 관하는 것은 관(觀)이다. 지와 관이 동시에 운용되는 삶을 사셨다.
부처님의 수행은 한때 수정주의자(修正主義者)의 길을 택하셨으나, 드디어 이로부터 새로운 길을 개척하셨다. 지(止)에서 관(觀)으로 나오신 것이다. 지관쌍수(止觀雙修)는 지관쌍운(止觀雙運)이다. 삼매는 정(定)이라고도 하는 것이니, 계(戒)가 없이 정이 있을 수 없다. 계는 몸과 마음을 올바른 상태로 가게 하는 인간 훈련이다.
우리 인간의 마음과 몸은 습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잘 조련해서 항상 어디서나 올바른 상태를 떠나지 않게 해야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업장의 소멸이라고 말한다. 업이 쌓여서 이루어진 훈습을 잘 조복하는 훈련이 수행이다.
이러한 자기 조복을 통해서 자기자신에 머물게 되니, 이것이 정이다. 이때에 비로소 지혜가 나타난다. 이것이 혜(慧)라고 하는 것이다. 계에서 정으로 가고, 정에서 혜로 가는 명상이 붓다의 명상이요, 붓다의 수행이며, 불교도의 수행이다.
부처님이 닦으신 수행은 삼매를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 정(定)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간 관(觀)을 통해서 지혜를 얻는 것이다. 이 지혜를 얻는 단계를 관이라고 하니 위빠사나라고 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삼매(samadhi)에 의지해서 제법을 여실히 비춰보고 분별하여 두루 살피는 단계이니, 이 단계에서 올바른 판단과 실천이 따른다.
부처님의 마지막 49일간의 명상은 바로 이것이었다.
깨달으신 뒤에 다른 나무 밑으로 가서 49일 동안 숙고하신 것은 바로 세상을 두루 올바르게 관찰하신 것이다.
분별을 통한 무분별의 지혜를 얻으신 것이다.
부처님이 성도하신 직후에 그를 버렸던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최초로 설법하신 일은 종교사상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사건의 하나였다.
이 때의 설법 중에서 부처님은 사성제와 팔정도의 진리를 말씀하셧다고 한다. 이 중에서 첫째는 고(苦)라고 하는 진리다. 이것은 두카(Dukkha)라고 하는 것이니, 부처님은 ‘이 세상은 두카 그대로’라고 하시고, 이 두카의 원인은 탄하(tanha)다. 이 탄하를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
♠ 12연기 실상 바로 보는 게 正見
우리 인간은 욕망이 추구되는 한 이로 인해서 인간의 삶의 법칙, 곧 우주 속의 인간의 질서를 떠나서 잘못된 곳에 머무르게 되며, 그 때문에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두카다.
이어야할 우주적 질서를 벗어나면 그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뻔한 이치다. 그러므로 이 두카를 멸하기 위해서는 순서에 따라서 잘 행해야 할 규범이 있으니, 이것이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 여덟 가지 중에서는 첫째 단계에서부터 점차로 올라가는 순서가 있다.
첫째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그 다음의 단계를 이룰 수 없다. 그 첫 단계는 무엇인가?
이것이 올바른 견해라고 하는 정견(正見)이다. 이로부터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순차로 이루어지게 된다.
팔정도의 마지막 단계인 정정이 이루어졌을 때 두카, 곧 고가 없어져서 해탈을 얻는다고 설하셨다.
이때의 정정은 올바른 삼매요, 위빠사나다. 올바른 삼매란 곧 위빠사나가 따르는 삼매다.
우리의 마음이 고요함에 침잠해서 이 세상의 진실을 살펴보고 분별하지 못하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은 삼매다.
인도에서 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삼매는 마음의 고요함에 빠져들어서 거기에 만족하는 엑스타시(extasi)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얻어지는 기쁨을 맛보고, 그것을 우주로 확대시켜서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경지로까지 가려고 한다.
그러나 불교의 수행은 그런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진실 그대로를 보고 사는 것이 목표다. 이것이 바로 정견이다.
이러한 정견에는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의 순역(順逆)의 관찰이 따른다. 그래서 부처님도 보리수나무 밑에서 십이인연을 순역으로 관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연기관(緣起觀)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십이인연법을 관하실 때에 이 법을 자기의 마음에서 바로 보셨으니, 그것이 관심삼매(觀心三昧)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법이 대승불교로 와서는 『금강정경(金剛頂經)』에 이르러서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으로 반전된다.
대승불교의 수행은 소승불교의 수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대승불교의 수행은 육바라밀(六波羅密)을 닦아서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니, 이것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동시에 이룩하는 길이다. 보시(布施)는 이타이면서 자리가 되고, 지계·인욕·정진·선정은 자리이면서 이타가 되며, 지혜는 그대로 자리이타다.
그러므로 육바라밀을 닦는 것이 대승의 수행이니,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이렇게 설해지고 있다.
옛날 인도에 시비왕(尸毘王)이 보시행을 닦고 있었는데, 비수천(毘首天)이라는 천신이 그를 시험하려고 비둘기로 몸을 바꾸고 제석천(帝釋天)은 보라매로 몸을 바꾸었다. 그런데 보라매가 비둘기를 잡으려고 쫓아가자, 비둘기는 시비왕의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시비왕이 이 비둘기를 품고 있을 때에 보라매가 날아와서 그 비둘기를 내놓으라고 말했다. 이때에 왕이 ‘비둘기가 살기 위해서 내 품으로 온 것을 어찌 내놓을 수 있으랴. 나는 그런 일을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렇다면 당신이 나의 밥을 빼앗은 셈이니 당신은 내가 먹을 밥을 줘야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살이라도 베어주시오’라고 하였다. 이때에 왕이 그리하겠다고 하자, 보라매는 다시 ‘당신의 살을 비둘기만큼 떼어가지고 가겠소이다’하고 왕에게 저울을 가지고 오라고 하여 왕의 살을 떼어 저울에 달았는데, 왕의 온몸의 살을 모두 떼어달아도 저울의 근량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살을 그대로 모두 떼어 보시하였다.
이것을 보고 있던 비둘기와 보라매가 비수천신과 제석천신으로 다시 변신하여 나타나서 ‘대왕의 보시행이 이처럼 거룩하고 철저하시니 그 공덕으로 반드시 성불하겠습니다’하고는 떼어낸 살점을 모두 다시 붙이고 갔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소승불교는 자리(自利)로부터 이타(利他)가 이루어지고, 대승불교는 이타(利他)로부터 자리(自利)가 이루어지는 것이니, 방법은 다르나 모두 같은 것이 아닌가?
<안반수의경>은 중국 후한 시대의 안세고 스님에 의하여 최초로 한역되어 인도 밖으로 소개되었는데, 수많은 불제자들의 저술에 인용되고 있으며 상, 하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경의 내용은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을 통해서 정신의 안정을 가져오고 더 나아가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수행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방법을 원어로는 ‘아나빠나사띠(anapana-sati)’라고 하는데,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안반수의(安般守意)’로 적은 것이다.
‘안반수의’의 수행방법을 살펴보면,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는 수행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아나(ana)’는 들숨이고 ‘아빠나(apana)’는 날숨이며 ‘사띠(sati)’는 의식의 집중이다. 이러한 안반(安般)을 번역하면 수식관(數息觀)이라고 한다.
수식관 이란 남방불교식 수행의 관법중 하나를 말하며
수식관은 좌선을 하면서 호흡의 들이쉬고(입식, 入息) 내쉬는(출식, 出息) 수를 세는 것으로서 산란한 마음을 쉬고 뜻을 지키는 방법을 말한다.
수식관은 옛날부터 불교 수행자의 전용물로만 알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방법 또한 올바르게 전수되지 않았다.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선가(禪家, 참선수행을 주로하여 깨달음을 얻고자하는 불방불교의 유력한 종파)의 가풍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더구나 소승의 수행법이라고 하여 낮추어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호흡법의 올바른 이해와 실천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되어야 할 소중한 가르침인 것이다.
이 수행법을 익힌다면 정신의 피폐와 건강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건강과 안정을 찾을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상권의 구성] 호흡 수련에 임하여 여섯 가지 진전의 단계를 말하고 있다.
(1) 수(數)의 단계-들숨과 날숨의 수를 헤아린다
(2) 상수(相隨)의 단계-호흡에 의식을 같이 하여 하나가 된다
(3) 지(止)의 단계-나아가서 마음이 호흡하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고요히 안정된다
(4) 관(觀)의 단계-모든 사물을 관찰함에도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고 집중된 상태가 된다
(5) 환(還)의 단계-다시 고요한 상태인 자기의 주체로 돌아온다
(6) 정(淨)의 단계-밖의 사물이나 내면의 그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는 청정한 세계가 된다
[하권의 구성] 상권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의 단계를 내용적으로 분류하고 있다.
(1) 수식(數息)의 단계-네 가지 마음의 힘을 얻게 된다(四意止)
(2) 상수(相隨)의 단계-또 다른 네 가지 마음의 힘으로써 악을 없애게 된다(四意斷)
(3) 지(止)의 단계-네 가지 신통력을 얻게 된다(四神通)
(4) 관(觀)의 단계-다섯 가지의 정신력을 얻게 된다(五力)
(5) 환(還)의 단계-일곱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된다(七覺意)
(6) 정(淨)의 단계-여덟 가지 올바른 길을 얻게 된다(八正道)
(7) 수식관의 수련 공덕
해인사 승가대 교수
【승오스님의 경전읽기】- 안반수의경 ①
깨달음 얻는 호흡 수행법
산란한 마음쉬고 건강 찾을 수 있어
선수행에 관한 많은 지침서들이 있으나, 이중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처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경전이나 논서(論書)는 많지 않다. 이 경전의 이름은 모두 갖추어서 부르면 <불설대안반수의경>이고, 줄여서는 <대안반수의경> <안반수의경> <대안반경> <안반경> <수의경> 등으로 불리운다. 상·하 두 권으로 이루어졌다. 이 경전은 후한(後漢) 시대의 안세고(安世高) 스님에 의하여 최초로 한역되어 인도 밖으로 소개되었는데, 수많은 불제자들의 저술에 인용되고 있다. 경의 앞에 적은 강(康)의 승회(僧會)의 서문은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수행법으로 받아들여졌는가를 짐작케 하고 있다.
이 경전은 매우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아주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경전이다. 이 경의 내용은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을 통해서 정신의 안정을 가져오고 더 나아가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수행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방법을 원어로는 ‘아나빠나사띠(anapana-sati)’라고 하는데,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안반수의(安般守意)’로 적은 것이다.
‘안반수의’의 수행방법을 살펴보면,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는 수행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아나(ana)’는 들숨이고 ‘아빠나(apana)’는 날숨이며 ‘사띠(sati)’는 의식의 집중이다. 이러한 안반(安般)을 번역하면 수식관(數息觀, 소승선의 수행의 다섯 가지 관법 ‘오정심관 (五停心觀)인 부정관(不淨觀)·자비관(慈悲觀)·인연관(因緣觀)·계분별관(界分別觀)·수식관(數息觀)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좌선을 하면서 호흡의 들이쉬고(入息) 내쉬는(出息) 수를 세는 것으로서 산란한 마음을 쉬고 뜻을 지키는 방법을 말한다.
수식관은 옛날부터 불교 수행자의 전용물로만 알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방법 또한 올바르게 전수되지 않았다.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선가(禪家)의 가풍(家風)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더구나 소승의 수행법이라고 하여 낮추어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호흡법의 올바른 이해와 실천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되어야 할 소중한 가르침인 것이다. 이 수행법을 익힌다면 정신의 피폐(疲弊)와 건강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건강과 안정을 찾을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상권에는 호흡의 수련에 임하여 여섯 가지 진전의 단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들숨과 날숨의 수를 헤아리는 수(數), 호흡에 의식을 같이 하여 하나가 되는 상수(相隨), 더 나아가서 마음이 호흡하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고요히 안정되는 지(止), 모든 사물을 관찰함에도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고 집중된 상태인 관(觀), 다시 고요한 상태인 자기의 주체로 돌아오는 환(還), 밖의 사물이나 내면의 그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는 청정한 세계인 정(淨)이 그것이다.
하권에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의 단계를 내용적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수(數)를 헤아리는 수식의 단계에서는 네 가지 마음의 힘을 얻게 된다는(四意止)것과, 상수(相隨)의 단계에서는 또 다른 네 가지 마음의 힘으로써 악을 없애게 된다는 (四意斷) 것과, 지(止)의 단계에서는 네 가지 신통력을 얻게 된다는(四神通) 것과, 관(觀)의 단계에서는 다섯 가지의 정신력(五力)을 얻게 되고, 환(還)의 단계에서는 일곱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고(七覺意), 정(淨)의 단계에서는 여덟 가지 올바른 길(八正道)을 얻게 된다는 것과, 이 호흡법의 수련 공덕에 대하여 상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해인사 승가대 교수
계환 스님과 떠나는 경전산책-안반수의경
'호흡'으로 고요함 이르는 방법
모든 고통과 고민은 바로 나 자신을 중심으로 생겨난 것인 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 원인을 바깥에서 찾고자 하고, 외부적인 것에서 그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려 들기 때문에 오히려 일을 더 어렵게 만들거나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나무의 새싹과 열매가 바로 그 나무에서 만들어지듯이, 모든 고통은 자신으로부터 연유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그것을 알고 싶다면 《안반수의경》을 한번 펼쳐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정신을 집중시켜 마음을 가다듬게 하는 실제적인 수행방법이 가장 체계 있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전은 범어로 naap nasati인데 이를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이라 한문으로 번역하였고, 줄여서 《안반경》 혹은 《수의경》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경전 목록인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에 의하면, 중국역경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안세고(安世高) 스님이 148년 낙양에서 번역한 경전이 바로 이 《안반수의경》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경에서 안(安 : na)은 숨을 내쉬는 것(出息)을 의미하고, 반(般:ap na)은숨을 들이쉬는 것(入息)을 뜻하기 때문에 실은 '숨의 출입(出入息)'을 설명한 경전이라고 제목을 붙여야 할 것이나, 원음(原音)을 소리나는 대로 옮겨서(音寫)'안반'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守意(sat)란 정신의 집중을 의미하므로, 이 둘을 합치면 호흡에다 정신을 집중시켜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행법을 설한 경전이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경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체가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은 정신을 집중하는 여섯 가지 수행법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고, 하권에서는 여섯 가지 수행법을 37조도품에 대비시켜서 상호간의 작용을 밝히고 있습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상권의 여섯 가지 수행방법이란,
먼저 수식(數息)은 마음을 단전에 모으고 호흡을 헤아리는 것,
상수(相隨)는 마음과 호흡이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따르게 하는 것,
지(止)는 마음과 호흡이 하나가 되어 한 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
관(觀)은 마음이 호흡과 일치되면서 자유로이 관조하는 것,
환(還)은 마음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와서 밖으로 달려가거나 흩어지는 일이 없이 여여한 상태, 정(淨)은 어디에도 걸리지 않은 청정본심이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특히 숨이 들고 오고 나가는 것을 관(觀)하는 수식법(數息法)은 중국인들이 《안반수의경》을 선호하게 된 이유이자, 동시에 불교가 중국에서 별다른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도교의 태식법(胎息法)과 수식관을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불교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경전과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80%는 "아무 생각없이 쉬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답니다. 이때 '아무 생각 없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의학적 실험에 의하면 우리의 뇌신경은 어떤 신호가 전달될 때에 자연적으로 뇌파(腦波)가 발생하는데, 즉 아주 느린 델타파, 중간정도의 세타파, 아주 빠른 베타파, 그리고 세타파와 베타파 사이에 해당하는 알파파가 있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많이 발생되는 베타파는 사람을 긴장시켜서 고혈압이나, 면역기능저하, 기억력 감퇴를 가져오는 반면에, 알파파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혀서 기분 좋고 건강하게 해준다고 합니다. 따라서 뇌를 인위적으로 알파파의 상태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좌선이나 명상이라고 합니다. 왜 갑자기 뇌파의 이야기를 설명했는지 이제 납득이가시겠지요. 우리 인간들은 하루에 최소한 1시간 정도는 뇌를 알파파 상태로 만들어야만 모든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답니다. 그렇다면 우선 《안반수의경》에서 설명하는 호흡법부터 실천에 옮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들숨-날숨 속에 ‘열반적정’ 있다 /정태혁/동국대 명예교수
안반수의경은 이른바 수식관(數息觀)이라고 하는 관법을 가르친 경전이다. 이 수식관을 설한 안반수의경에는 37종의 관법이 담겨 있어, 이것을 삼십칠도품경(三十七道品經)이라는 경의 이름으로 소개했다. 근본불교나 소승불교에서의 수행은 이 삼십칠도품경에 소개된 37종의 관법으로 수련하여 성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시대에 오면 여기에 중생구제의 보살정신이 가미되어서 누구나 함께 쉽게 빠르게 일상생활 속에서 성도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대승불교권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먼저 소승시대의 관법의 내용을 알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그 내용을 보이고, 그 중에서 안반수의 곧 호흡을 관하는 수행이 이들 중 어떤 위치에 있으며, 그 방법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도록 한다.
수식관은 부처님 재세부터 강조
소승시대나 대승시대나 불교도들이 수행을 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되는 길이 수행이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수행을 통해서 성도 하셨고, 역대 조사들이 모두 수행의 성취자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중아함경(中阿含經)의 여러 곳에서 자주 보이는 선정의 관법이 유일한 수행의 길이었다. 아함경에 보이는 관법은 삼삼매(三三昧), 사무량(四無量), 팔해탈(八解脫), 팔승처(八勝處), 십변처(十遍處), 십상(十想), 십념(十念) 등이 보이는데 이와 같이 숫자로 표시해서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에 크게 조직된 것인 듯 하다.
팔리어(pali)로 된 부파불교시대의 논서인 아비담(阿毘曇, abhidamma)에서는 십편(十遍), 십부정(十不淨), 십수념(十隨念), 사범주(四梵住), 사무색(四無色), 식염관(食厭觀), 계차별관(界差別觀) 등 40여개의 대상에 따라서 관하는 수행이 소개되고 있다. 이것을 사십업처(四十業處)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 여러 가지 관법 중에는 실제로 불교도들이 활용하지 않은 것도 있고, 특별히 많이 활용한 것도 있다. 그리하여 그 뒤에 소승불교시대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다시 정리되면서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내용으로 하여 설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저 유명한 논서인 좬해탈도론좭(解脫道論)이라는 논서다.
여기에서 이들 여러 수행법을 자세히 설법하고 있다. 어떻게 선(禪)을 닦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해탈도론은 세간정(世間定)과 출세간정(出世間定)의 두가지로 나누고 있다. 세간정을 닦음에 있어서는 삼계(三界)에 있어서 선(善)을 향한 마음이 한결같이 유지되도록 하라고 했고, 출세간정에 있어서는 열반을 증득하고자 하는 마음을 한결같이 가지고 지혜를 얻는 수행법을 보이고 있다.
세간정이란 세간에서 생활하면서 수행하는 관법이다. 이러한 세간 속에서의 수행에서는 첫째로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을 먼저 끊어야 하고, 둘째로는 좋은 벗을 만나야하고, 셋째로는 자기의 성품에 맞게 해야 하고, 넷째로는 40종의 대상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잡아서 그것을 관하고, 다섯째는 적당한 수행처를 정하고, 여섯째는 머리가 길거나 손톱이나 발톱이 길면 그것을 깎아서 장애가 되지 않게 하고, 일곱째는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는 관법을 잘 익혀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열반 증득하겠다는 마음이 가장 중요
출세간적인 수행법은 세간적인 수행을 거쳐서 보다 높은 곳에 도달되는 것이니, 출세간정이라는 특별한 관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한결같이 세간정을 닦으면서 열반을 증득하고자 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아가면 드디어 지혜를 얻어서 열반에 이른다고 한다. 세간정이나 출세간정의 수행법으로서 널리 행해진 것은 지(止), 곧 정신통일을 통해서 사물을 꿰뚫어보는 관(觀)법이다.
참고자료/펌
안반수의경을 수행한다면 사념처 위빠사나를 수행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안반수의경은 사념처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설하고 있으니까요.
안반수의경은 안세고님이 번역하신 경전인데요. 사실은 경전에 대한 주석서입니다.
논서의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안반수의경에서 주석하고 있는 경은 두개인데요.
하나는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경(한역명은 출입식념경, 빠알리어는 아나빠나사띠 경)이고
하나는 대념처경(한역명은 중아함 염처경, 빠알리어는 마하사띠빳따나 경)입니다.
그래서 간단히 대념처경에 대한 주석서로 보면 됩니다. 왜냐하면 아나빠나사띠 경의 내용은
대념처경의 제일 첫번째 몸에 대한 마음챙김부분의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오픈사전에 올려진 경들을 참조하시면 금방 아실 것입니다.
안반수의경은 이렇게 주석서라는 것을 알면 내용을 쉽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붓다의 호흡과 명상이라고 정태혁님이 정리한 책이 있는데 바로 안반수의경에 대한 번역과 해설입니다. 책의 말미에 또다른 염처경으로 유명한 입출식념경(아나빠나사띠의 한역경전)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대념처경과 아나빠나사띠경에 대한 번역은 이렇게 한역되었고 안반수의경으로 전해졌습니다.
이제는 대념처경과 아나빠나사띠(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경)은 빠알리어에서 한글로 직접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념처경, 대념처경에 대한 주석서를 담은 [네가지 마음챙기는 공부]란 책이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나와있고,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경에 대한 주석서도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들숨날숨에 마음챙기는 공부)라는 제목으로 나와있습니다.
안반수의경의 목차를 잠깐 훓어보면 바로 사념처를 설하는 대념처경과 아나빠나사띠 경의 주석서임을 바로 알아보실수 있을것입니다.
1. 안반수의의 근본원리
1-1. 안반수의 창안 동기
1-2. 자재와 자비
1-3. 자연의 도리로서의 들숨과 날숨
...
2. 안반수의의 실천원리
2. 몸에 대한 관찰
2-1. 숨에 대한 관찰
2-2. 몸의 동작에 대한 관찰
2-3. 모든 생활에 대한 관찰
2-4. 몸의 안과 밖에 대한 관찰
2-5. 있는 그대로에 대한 관찰
2-6. 죽으면 썩을 몸에 대한 관찰
2-7. 썩으면 버려질 몸에 대한 관찰
2-8. 해골과 뼈에 대한 관찰
2-9. 부서진 뼈를 통한 법의 관찰
3. 안반수의의 방법
3-1. 들숨과 날숨을 다섯씩 열까지 센다
3-2. 마음은 수식의 스승이다
...
4. 수식과 상수
4-1. 수식은 초선이다
4-2. 상수는 제2의 선이다
4-3. 몸과 마음을 통해서 몸과 마음을 떠난다
...
5. 법에 대한 관찰
5-1. 다섯 가지 장애물에 대한 관찰
5-2. 다섯 가지 요소에 대한 관찰
5-3. 열두 가지 대상에 대한 관찰
5-4. 일곱 가지 깨달음에 대한 관찰
5-5. 네 가지 진리에 대한 관찰․
① 뜻대로 안 되는 괴로움․
② 고의 원인인 애욕의 진실․
③ 고가 사라진 상태․
④ 여덟 가지 올바른 길․
⑤ 두 가지 공덕
5. 止와(e)
6. 과 淨
...
6-8. 아라한의 마음이 된다
6-9. 중도를 얻는다
7. 안반수의의 위대한 공덕
8. 안반수의로 얻는 신통력의 세계
9. 안반수의로 얻는 지혜의 세계
9-1. 四聖諦의 진리를 깨닫는다.
...
10. 안반수의로 얻는 깨달음의 세계
...10-14. 無爲의 실천
10-15. 근본으로 돌아가는 일
10-16. 無爲의 참뜻
11. 안반수의와 삼십칠도행
...
11-6. 五根으로 들어가는 길
11-7. 五力으로 들어가는 길
11-8. 七覺意로 들어가는 길
11-9. 八正道로 들어가는 길
...
12. 삼십칠도행의 세계
12-4. 四意止의 구체적인 내용
...
12-10. 밖으로 버리고 안으로 잡는 것
12-11. 나의 몸만을 觀하는 일의 폐해
12-12. 나와 남의 몸을 모두 觀하는 일
12-13. 觀의 안과 밖
12-14. 內觀과 外觀
...
12-22. 안의 七覺意와 밖의 七覺意
12-23. 진리에 따르는 몸과 마음의 자세
12-24. 四聖諦와 삼십칠도행
12-25. 八正道의 안과 밖
12-26. 八正道의 실천
12-27. 道를 얻는 길
13. 열반으로 인도하는 안반수의의 호흡
13-1. 도인과 37종 수행
13-2. 마흔 가지 열반의 세계
13-3. 수행의 순서에 대한 충고
13-4. 隨病說藥의 지혜
13-5. 善意와 道意
13-6. 아는 것에서 되는 것으로
13-7. 주객 조화의 지혜
13-8. 世世生生의 인연법
13-9. 六通智의 세계
[쌍윳타 니카야 날숨들숨 상응]요약
<몸>
길게 들이쉴 때는 길게 들이쉰다고 알아낸다.
길게 내쉴 때는 길게 내쉰다고 알아낸다.
짧게 들이쉴 때는 짧게 들이쉰다고 알아낸다.
짧게 내쉴 때는 짧게 내쉰다고 알아낸다.
몸의 모든 느낌을 다 자각하면서 들이쉬겠다고 배운다.
몸의 모든 느낌을 다 자각하면서 내쉬겠다고 배운다.
몸의 결합, 호흡을 누그러트리면서 들이쉬겠다고 배운다.
몸의 결합, 호흡을 누그러트리면서 내쉬겠다고 배운다.
<느낌>
기쁨을 자각하면서 들이쉬겠다고 배운다.
기쁨을 자각하면서 내쉬겠다고 배운다.
즐거움을 자각하면서 들이쉬겠다고 배운다.
즐거움을 자각하면서 내쉬겠다고 배운다.
<마음>
마음의 결합, 생각 * 느낌을 자각하면서 들이쉬겠다고 배운다.
마음의 결합, 생각 * 느낌을 자각하면서 내쉬겠다고 배운다.
마음의 결합, 생각 * 느낌을 누그러트리면서 들이쉬겠다고 배운다.
마음의 결합, 생각 * 느낌을 누그러트리면서 내쉬겠다고 배운다.
마음자체를 자각하면서 들이쉬겠다고 배운다.
마음자체를 자각하면서 내쉬겠다고 배운다.
마음자체를 기쁘게 만들면서 들이쉬겠다고 배운다.
마음자체를 기쁘게 만들면서 내쉬겠다고 배운다.
마음을 집중하여 들이쉬겠다고 배운다.
마음을 집중하여 내쉬겠다고 배운다.
마음을 해탈하여 들이쉬겠다고 배운다.
마음을 해탈하여 내쉬겠다고 배운다.
<법>
항상 않음을 관조하면서 들이쉬겠다고 배운다.
항상 않음을 관조하면서 내쉬겠다고 배운다.
물듦을 떠남을 관조하면서 들이쉬겠다고 배운다.
물듦을 떠남을 관조하면서 내쉬겠다고 배운다.
소멸을 관조하면서 들이쉬겠다고 배운다.
소멸을 관조하면서 내쉬겠다고 배운다.
버림을 관조하면서 들이쉬겠다고 배운다.
버림을 관조하면서 내쉬겠다고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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