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문 보기/시란?

詩 作 공부

통융 2016. 5. 30. 22:16



이별

 

헌 옷가지들 트럭에 담긴다.

 

작은 것에서 큰 것,

얇고 보드라운 것,

두껍고 투박한 것들

인연을 맺은 날만큼 후줄근하다

 

살아온 날들로

젖비린내부터.... 장미와 국화 향까지

새새틈틈 묻히고

어디서 어느 인연 만나려나

 

산다는 게

헤지고 사라져 가는 게 일

불평 없이 살다 갈

인연이 어디 있으랴

 

땅거미 내려 앉는 들판으로

지팡이에 의지해 걸음 옮기는

꼿꼿이 꺾인 할머니 허리에

무심코 나비 한 마리 앉았다 난다.

 

 

바닷가 풍경

 

 

바닷속에서

슬픈 욕망에 주린자의

현란한 혀놀림에

덥석 한 표를 던진 포로들

한 놈씩 잡아칠성판에다 뉜다

 

칼날 목덜미 깊숙이찔러 넣고

힘 가하는 손놀림

몇 번의 꿈틀거림

뼈와 살이 발라지고 껍질이 벗겨진다

 

허연 속살 동강나는

석둑거리는 소리

산자는 산자를 해체함으로써 살아가는 것

스스로 위로하며

 

또 다른 순박한 자들을 향한 눈빛이

허공으로 치솟는 파도 속에 튀어든다

포로들의 자유를 씹으며

 

언젠가 저들도

산자에 의해 해체될 날 오리니

폐선의 이물에서 고물까지 내려 앉는

갈매기 깃 아래

연민의 바람이 침묵한다.

 

 

반갑습니다.

열심히 시 창작에 골똘하시는 모습에 찬사를 보냅니다.

저도 시 공부를 하는 한 사람으로 도반을 만나다는 것 참 행복한 일입니다.

저도 한때는 통도사 아래 차밭고을 이라고 전통찻집을 운영했었지요.

시에 대한 식견이 아직 미흡합니다만

김선생님의 시를 읽어보면서 먼저 시 공부를 한 사람으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詩作하실 때

1,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선명한가. 사람들이 읽고 보는 것이니 삶에 깃든

진실이어야 한다.

2,시어 선택에서 관념적이거나 설명적인 것이 많지는 않는가.

3,남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객관성이 있는가.

4,선명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가 (한편의 시를 보면 한편의 그림을 봐야하듯이)

5,자기만의 목소리가 있는가( 남들이 쓰지 않는 구절이나 시어 등)

6,, 맛 있는 리듬이 있는가. 시가 짧게 되었는가.

7,새로운 감각의 세계인가.

8, 실험적인 것, 함축성, 도전의식 등

9, 어느 하나로 정의 할 수 없는 무엇? 이 있을 때

 

이상은 보편적인 시()를 작문할 때 생각해 보는 것들이겠지요.

본인의 시를 써 놓고 위에 것들을 하나씩 스스로 질문을 해 보시면

자신의 시를 검증할 수 있겠지요.

 

이별

 

헌 옷가지들 트럭에 담긴다.

 

작은 것에서 큰 것,

얇고 보드라운 것,

두껍고 투박한 것들

인연을 맺은 날만큼 후줄근하다

 

살아온 날들로

젖비린내부터.... 장미와 국화 향까지

새새틈틈 묻히고

어디서 어느 인연 만나려나

 

산다는 게

헤지고 사라져 가는 게 일

불평 없이 살다 갈

인연이 어디 있으랴

 

땅거미 내려 앉는 들판으로

지팡이에 의지해 걸음 옮기는

꼿꼿이 꺾인 할머니 허리에

무심코 나비 한 마리 앉았다 난다.

 

 

이별의 시를 보면서 생각해 봅시다.

제목부터 색다른 면이 없지요.

만약 이별 대신에 나비 한 마리 앉았다 난다든가 因緣내용이 어쨌든 색다른

면이겠지요.

그리고 제목은 시를 읽게 하는 첫 번째 관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다음에 내용을 보면

첫 연은 그럴 듯하게 도입이 되지요.

재목하고 전혀 다른 문장이 색다르게 튀어나오는데 독자들은 호기심을

유발 하겠지요. 벌써 나비가 옷들이구나 생각을 낳게 하기도 하구요.

두 번 째 연은 설명이지요.

보편적이 문장은 매력이 없겠지요.

첫연은 묘사라면 두 번째 연은 묘사보다 설명이 되어 싱겁게 되었네요.

옷가지들의 모양과 시간 속에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 하고자 했는데

세월을 나비의 꿈이나 추억, 모양을 단풍든 나뭇잎 등으로 은유적 묘사는 어떨까요.

시는 은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샛째 연은 진술인데 역시 남들이 써 먹은 이야기를 빌려놓은 것 밖에는

색다른 맛이 없겠지요. 설명을 빼내고

젖비린내부터.... 장미와 국화 향까지

새새틈틈 날아 날아이렇게 바꾸면 훤씬 맛이 좋을 것 같은데요.

인연 이란 단어도 관념어로 시어로써 반가운 단어는 아니지요.

차라리 인연 대신에 바람결이 걸어 떠나는 ...” 이런 식의 은유가 좋다고 봅니다.

 

내째 연도 진술인데 보편적인 문장들이지요.

인연이 두 번씩이나 나오고 설명이 되어서 흥미가 덜하지요.

진술이라도 색다른 경험의 진술 일 때 시맛이 나겠지요.

 

마지막 연은 시적 여운이 감도네요. 낮설기 표현인데

그러면서도 문장이 길고 설명적인 묘사로 흐르다 보니

숨이 가쁘지요.

지팡이에 의지해 걸음 옮기는을 시적 문장으로 바꾼다면

지팡이 걸음 으로 바꿀 수 있겠지요.

꼿꼿이 꺾인 할머니 허리에등 굽은 할머니로 바꿀 수 있구요.

꼿꼿이와 꺾인은 의미가 맞지 않지요.

무심코 라는 말도 시적 언어로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데요.

부사나 형용사는 관념적 설명이 많기 때문에 시어로서 적합하지 않는 것이 많지요.

 

지팡이 걸음에 기댄 저녁노을

등 굽은 할머니 머리위에 나비 한 마리이렇게 마지막 연을 고친다면....

 

전체적인 시의 묘사는 주제를 헌 옷 가지들이 그동안의 삶을 떠나 또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인연과 만남의 관계성을 마지막 연에서 저녁노을에 기대어 길을 걷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 속에서 재생 혹은 부활의 나비로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함축시키고 있는데 시적 모티브나 발상은 좋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시적 경향성을 가지고 하나씩 접근해 가시면 좋은 시를 쓰실 수 있다고 봅니다.

시인은 남의 시를 많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를 써놓고 오래도록 곰삭혀야 하고 수없이 고쳐야합니다.

좋다고 생각되는 남의 시를 배껴 보기도 해야 합니다.

늘 시상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안녕하세요. 통도사 인근에 사는 김진환입니다.

김동삼 선생님을 주변인의 시 창간호를 보고서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가까이 두고 보다 보니 낯선 분이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동안 혼자서 시 공부를 하며 갑갑했는데,

지난번 '시의 의견'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염치없지만 제 습작시 두 편을 보냅니다.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무례라면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요.

 


부족한 글에 대해 지도편달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 제 작을 함에 있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 주심에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7-8년 전인가 차밭고을에 두어번 들린적이 있습니다.

직접 뵙지는 않았지만 스친 인연은 있은 셈이군요.

저는 통도사와 삼성SDI 중간쯤에 삼성주유소라는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기회 닿으시면 차에 주유도 하시고 커피 한 잔 하고 가십시요.

 

나름대로 '이별'이란 습작시를 주정해 보았습니다.

 

머문 것은 나비처럼

 

 

헌 옷가지들 트럭을 탄다

 

젖비린내부터.장미스커트와 국화정장까지

서로들 어깨기대며 살아왔던 이야기에

덜커덩 덜커덩 웃다가

 

스쳐 지나는 바람 잡고 갈 곳 어디냐고

뉘를 만나 길을 나설지

 

지팡이 걸음에 기댄 땅거미

등 굽은 할머니 머리 위에 나비 한 마리.

 

 

 

이별

 

헌 옷가지들 트럭을 탄다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기고

할아버지 삼촌 이웃들이 만나

바람같은 지난날들 농담에

 

서로들 어깨기대며 덜커덩 덜커덩 웃을 때 마다

 

 

 

살아온 날들로

젖비린내부터.... 장미와 국화 향까지

새새틈틈 묻히고

어디서 어느 인연 만나려나

 

산다는 게

헤지고 사라져 가는 게 일

불평 없이 살다 갈

인연이 어디 있으랴

 

땅거미 내려 앉는 들판으로

지팡이에 의지해 걸음 옮기는

꼿꼿이 꺾인 할머니 허리에

무심코 나비 한 마리 앉았다 난다.

 

4월의 묵정밭은

 

한때 아버지의 해방구

 

거친 산구릉을 온 몸으로 펴 놓은 작업실

 

 

 

나무들 가지마다

 

무소유의 우표를 붙이고

 

벌과 나비들을 불러 모우는

 

지금,

 

 

 

아버지는 산 그림자 뒷편에서

 

굽은 허리를 굴려오며 경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