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정토는 왜 서방에 있는가?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불교 수행의 목적이 참진리를 깨닫는 것이라 하고
그 깨달음의 목적은 열반해탈이며 극락왕생하는 것인데.
그 극락세계는 서쪽으로 십만억 국토를 지나 아미타부처님이 계신 서방정토라 하고,
또한 그대 한 마음안에 극락이 있다는 유심정토 사상이 있다.
극락세계의 교주이신 아미타부처님 좌우에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이 함께 계신 그 곳.
아미타부처님이 되려면 내가 주인공이 되어 세상을 대자대비하는 관세음보살의 무량광불의 한마음과
그 보살행을 직접 나투는 대세지보살의 실천행으로 도달하는 무량수불의 그 자리가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부처님은 아미타유스와 아미타바의 합성어이다.
아미타바는 무량한 광명, 꺼지지 않는 영원히 빛나는 마음,
아미타유스는 시작과 끝이 없는 시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무량한 수명을 말한다.
그래서 아미타부처님은 무량광불 무량수여래라 한다.
이러한 서방정토 극락세계는 왜 서쪽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고를
소승이 대학원에서 정토사상을 공부하면서 과제로 ' 極樂淨土는 왜 10萬億 國土를 지나 西方인가?' 극락정토는 왜 10만억국토를 지나 서방에 있는지를 찾아봤다.
그 내용의 일부를 올려 본다. 본문에 쓰여진 인용문의 주는 생략하여 올린다.
<기말 레포트 연구노트>
제목 : 極樂淨土는 왜 10萬億 國土를 지나 西方인가?
* 목차 *
Ⅰ, 들어가는 말
Ⅱ, 極樂 淨土는 왜 西方 10萬億 國土를 지나서 있는가?
1. 生死觀인 빛과 어둠으로 考察
2. 文獻的인 經典에서 西方에 대한 考察
Ⅲ, 나가는 말
<참고문헌>
Ⅰ, 들어가는 말
십만억 국토를 지나서 서방에 극락정토가 있다. 서방은 어떻게 해서 등장하게 되며 그 서방이 극락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극락세계가 서방에 있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도 몇 가지 설이 제시되어 있으나 그 기원을 찾기는 어렵다. 지금까지의 설을 정리해 보면, 서방에 이상적인 낙토를 구하는 것은 원시민족의 일반적 경향으로서, 인도에서도 예로부터 서방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대승경전에 의하면 서방에는 아미타불뿐 아니라 무량상(無量相)·무량당(無量幢)·대광(大光)·보상(寶相)·정광(淨光)등의 부처님도 존재하므로 여러 부처님과 그 위치는 방향의 관계가 반드시 필연적인 근거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아촉불의 묘희세계가 동방에 위치하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극락세계가 기계적으로 혹은 우연히 서방에 위치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주장도 있다. 이와 같이 극락이 서방에 위치한다고 하는 관념에 대해서는 그 기원을 여러 가지로 상정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이유만으로 해결하는 것은 현재 단계에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학계의 입장이다. -중략- 따라서 '지극한 즐거움이 있는 곳'이란 뜻의 극락은 종교적이고 절대적인 깨달음의 즐거움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세계를 쉽게 파악하고 종교적·실천적 대상으로 접근하기 쉽게 하기 위해 현세적·상대적인 세속의 즐거움을 빌어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극락정토가 공간적으로 서방에 실재하는 세계처럼 설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정토불교의 세계 218-20p>장휘옥 著/불교시대사 1997
서방 극락세계에 대한 이해와 견해는 위에서 필자가 밝혔듯이 지금까지도 어느 한 가지 이유만으로 서방에 대한 당위성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아미타불의 극락세계가 어떻게 발원이 되고 왜 극락이 서방에 있어야 하는지가 기계적으로 혹은 우연히 서방에 위치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필자의 말처럼 공간적으로 서방에 실재하는 세계처럼 가상으로 설해진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는다. 그 동안 서방극락에 대한 견해는 本願力에 의지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他力信仰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지리적인 西方과 自性彌陀인 唯心淨土로 서방이 아닌 十方으로 크게 두 부류로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리적인 서방 아미타 극락이 출현하면서 유심정토설이 등장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본 논고는 이 두 분류에 근거해서 어떻게 서방이 아미타극락이 시작 되었으며, 서방에 존재하는 극락과 그 곳에 있어야 하는 아미타부처님의 당위성을 經論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淨土經典들을 중심으로 하고 기타 論書들을 비교 검토하면서 그 배경과 타당성을 살펴 보고자 한다.
Ⅱ, 極樂 淨土는 왜 西方 10萬億 國土를 지나서 있는가?
<아미타경>에 從是西方過十萬億佛土,有世界名曰極樂。其土有佛,號阿彌陁,今現在說法‘ 이 서쪽으로부터 십만억 국토를 지나서 세계가 있으니 極樂이라 이름하며 그 국토에 부처님이 계시니 이름이 아미타라하시고 지금 현재에 법을 설하고 계신다.<범본,한역본,티베트본『아미타경』>에서 구마라집譯 p58 한글역주,이규택, 경서원 2009
<관무량수경> 阿難白佛:法藏菩薩為已成佛而取滅度、為未成佛?為今現在?佛告阿難:法藏菩薩今已成佛,現在西方,去此十萬億剎,其佛世界名曰安樂.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법장보살은 이미 성불하여 ‘서쪽 나라’에 계시는데, 그 부처님의 이름을 아미타불 혹은 무량수불이라하며 그 나라는 十만억의 나라를 지난 먼 나라로서 극락세계라 하느니라.<無量壽經 正宗分 第3권 0270a02> (彌陀成佛과 極樂淨土)>
극락이 서방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아미타경>과 <관무량수경>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아미타 극락은 서방에 있다는 점은 구처적으로 여러 경전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극락은 왜 10만억 국토를 지나서 서방에 있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들을 내어 놓고 있지만 적확한 근거가 부족한 탓으로 학계의 입장이 어느 한 가지 이유만으로 단정 짓기는 곤란하다고 한다.<정토불교의 세계 218-20p>장휘옥 著/불교시대사 1997
그럼 가장 최초에 서방의 방향을 확인하는 <유행경>인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āarinibbana Sutta, D16)을 토대로 극락이 서방에 있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를 밝혀 보고자 한다. 어떻게 보면 정토경전들의 근본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도 하다.
그때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히란냐와띠 강의 저쪽 언덕, 꾸시나라 근처에 있는 말라들의 살라 숲으로 가셨다.가셔는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그대는 한 쌍의 살라 나무사이에 북쪽으로 머리를 둔 침상을 만들어라. 아난다여, 피곤하구나. 누워야겠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한 뒤 두 살라 나무 사이에 ‘북쪽으로 머리를 둔 침상을 만들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발과 발을 포개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正念正知] 오른쪽 옆구리로 사자처럼 누우셨다’.<DN 16 PTS: D ii 72 chapters 1-6 Maha-parinibbana Sutta>
사라쌍수 아래에서 마지막 열반하시는 모습에서 왜 사후의 극락정토는 서쪽을 향하고 있는지를 서방의 방위를 나타내고 암시하는 최초의 설명으로 주목할 수 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직전에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오른팔을 베고 눕게 되면 바라보는 앞은 당연히 서방이 된다. 왜 이러한 장면에서 서쪽이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가시는 곳이라고 유추 할 있느냐면 빛과 어둠인 生死관으로 설명된다.
서방 극락을 암시하는 장면과 서방 안락 국토가 이러하다는 것을 최초로 설명하고 계신다.
1, 生死觀인 빛과 어둠으로 考察
아미타불이 기원은 어디에서 비롯 되었을까를 찾아보면 빛과 어둠이 象徵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빛은 태양이 근원이고 지혜의 상징인 淨土라면 어둠은 밤이 근원이며 穢土인 무명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빛과 어둠이 아미타불의 시원으로 잡을 수 있는지는 여러 경전을 통해 아래의 단락에서 살펴 보겠다.
먼저 극락은 왜 서방에 있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서쪽은 方位이기 전에 태양과의 연관성을 갖는다. 즉 해가 지는 쪽이 서방이기 때문이다. 태양은 모든 생명을 華生시키는 가장 강력한 토템(Totem)이다. 저명한 종교학자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Friedrich Max Muller)는“모든 신화의 유래는 태양에 그 근원이 있다.”고 밝힌 그는 최초의 신은 태양신이며, 최초의 종교형식은 태양숭배라고 했다. 모든 신화의 핵심이 태양신화에서 파생된 것이다. 태양은 단순히 빛을 발산하는 천체가 아니라 세계의 창조자, 보호자, 통치자이자 포상자로 인식됐다. 실제로는 하나의 신이며, 하나의 최고의 권력을 가진 신이다.
그러한 태양은 서쪽이라는 지평선을 넘어 간다. 지금은 태양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구가 돌면서 낮과 어둠을 만든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인식 체계는 땅은 움직이지 않고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우리는 인식 체계를 바꾸지 못하고 태양이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즉 서방으로 넘어간 해는 10만억 국토를 지나 먼 어딘가에 머무는 곳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 또한 서쪽은 태양을 삼켜버리고 어둠을 몰고와 두려움과 괴로움을 만드는 무지의 세계가 된다. 그러한 어둠은 죽음의 상징이 되고, 죽음 또한 해가 지는 서쪽 방향이 될 수 있다. 염부제에서는 이렇게 말하나, 해가뜨는 곳을 태어남이라 하고, 해가 지는 곳을 죽음이라 한다. 죽음의 땅에서부터 신명(神明=다른세계)이 들어가는데 그 모습이 이뤄진다. 그러므로 법장 보살은 성불하여 서족에 머물면서 중생을 바비로 영접하기를 원하였다.그래서 태양이 서쪽 어딘가에 머무는 곳은 영원히 어둠이 없는 땅이 있다고 생각 한다. 그 곳은 밝음의 희망과 평안(Sukhavati)만 존재하는 무량한 광명의 공간인 국토, 지혜의 상징인 성문들이 존재하는 極樂이라 생각한 것이다. 영원히 태양이 지지 않는 곳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壽命 또한 무량할 수 밖에 없다. <칭찬정토불섭수경> 현장譯을 보면 ‘서쪽 방향으로가서 백천구나유다의 불국토를 지나면 부처님의 세계가 있으니 이름을 極樂이요, 그 가운데 세존의 이름을 무량수,무량광,여래,응정등각이라고 하신다.’ 같은 <아미타경>을 번역한 내용이지만 처음에 예시한 구마라집譯과는 조금 다르지만 극락세계인 정토의 위치와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는 분명하게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아미타불의 명호에 대해 살펴보면 아미타불은 언어적으로 아미타바(amitābha)와 아미타아유스(amitāyus)가 있다. amitābha는 無量(amita)한 光明(ābha)의 의미이며, amitāyus는 無量(amita) 壽命(āyus)의 의미다. 즉 阿彌陀는 무량한 광명과 무량한 수명 두 가지 특성을 모두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후지타 고타즈(藤田宏達)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 사용된 프라크릿 (Prakrit)의 'amrta’ 가 아미타의 본래 어원일 수 있다는 설을 소개하고 ‘측량이 불가능한 '(immeasurable)이라는 의미에 '무량‘(無量)으로 번역될 수 있다고도 했다. 또한 '아물타(amrta)는 불사(不死), 또는 영혼불멸(immortal)을 뜻하는 말로서 불멸의 생명을 뜻한다.고 고찰하고 있다.
아미타불은 무한한 생명과 빛으로 상징된 초월적이며 구원의 능력이 있는 불타이다. 그래서 그 국토의 풍경은 모두가 빛에 의해 나타난 七寶樹와 연못, 찬란함 황금과 보석 등의로 표현 된다.
여기서 뜻을 보면 무한한 빛은 시방세계에 걸림이 없는 지혜를 상징하고 무량수는 시방세계의 무한한 시간을 상징한 자비를 상징한다.
아미타불의 서방기원에 대해서도 방위적인 사실적으로 접근해서 볼 것인가 아니면 타방과 심리적 접근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여러 학설이 나눠질 수 있다고 본다. 인도 내의 토속적인 종교들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내적 요인설과 인도 외의 다른 지역에서 파생한 종교적 이념이 이식되는 과정에서 생성했을 것이라고 보는 학설로 외적 요인설을 들 수 있다. 외래기원설에서 대표적인 것이 대승불교의 아미타불(amita-bha), 보살 등의 사상은 <리그베다>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는 주장과 극락의 원어 수카바티(Sukhavati)도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에덴에서 힌트를 얻었을 가능선을 들어 에덴동산 기원설을 들기도 한다. bc6세기 경에 탄생한 조로아스터교는 아리야인들로 서북도에서 들어와 정착인 인도인들로 불과 태양신을 숭배한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하지만 불이나 태양 숭배는 앞에서 막스 뮐러(Friedrich Max Muller)가 “모든 신화의 유래는 태양에 그 근원이 있다.”라고 했듯이 모든 민족사에 토템 始原은 태양숭배에서 시작 됨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황화문명권인 중국은 일출동방(日出東方)에 위치하는 화하민족(華夏民族)이라고 하듯이 일찍부터 태양을 숭배해 왔다. 백호통의(白虎通義)에서 말하길 "염제는 태양이다.”라고 하였고, 이와 마찬가지로 설문(說文)과 좌전(左傳)·소십칠년(昭十七年)에서도 염제를 불을 다스리는 화신(火神)이라 칭하였다. 염제는 기원전 2000년전에 三皇五帝의 역사 속에 인물이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Edward Burnett Tylor)가 “햇빛이 눈부신 지역은 대체로 태양숭배사상이 존재한다.”고 Primitive Culture에서 언급했듯이 태양 숭배사상은 어떤 특정 지역에 한정되어서 나타는 신앙이 아니라 장소와 시대을 초월한 인간들의 최고의 우상이다. 그래서 아미타의 태양숭배사상을 조로아스터교나 에덴동산의 기원설은 근거가 약하다고 본다. 후지타(藤田宏達)는 붓다의 광명,수명으로 내부기원설로 돌리고 불전문학(佛傳文學)과 불탑기원설 등이 있다.
인도 내부에서 기원을 찾는 사람들은 <대선견왕경(大善見王經)>에 등장하는 대선견왕(일명 전륜성왕)신화설과 <대루탄경(大樓炭經)>등 초기불교 경전에 나오는 북쿠루 섬의 전설 및 타화자재천의 묘사와 관련해서 불교신화에서 기원을 찾기도 하고, 불탑을 모델로 했다는 불탑 기원설을 들기도 한다. 또한 범천세계의 서술과 극락정토의 광경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범천 신화 기원설, 혹은 서방의 수호신인 바루나(Varuna)의 수도 수카(Sukha)나 수카바티(Sukhavati)와 관련있다고 보는 바루나신화 기원설 등 인도신화에서 기원을 찾기도 한다.
원시불교에서 부파불교(특히 대중부 계통)로 변천해 가는 관정에서 나타나는 불타관을 검토해 보면, 아미타유스와 아미타바의 원에서 대응하는 설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원시불교 경전 속에 이미 석가모니의 수명의 영원성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 있고, 부처님과 광명의 결합에 대한 자료도 여러 가지 발견되고 있다. 대경(大經)으로 불려지는 무량수경(Larger Sukhavativyuha Sutra)은 무량광아미타(Arnita)로 기술되고 있으며, 소경(小經)으로 불리워지는 아미타경(阿彌陀 經,Smaller Sakhavtivyuha Sutra)에서는 무량수에 초점을 두되 무량광과 분리가 불가 능한 것으로의 아미타(Am1ta)로 진술하고 있다는 점과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서도 대중부 계통의 불타관 가운데 아미타유스와 아미타바의 관념에 상당하는 설을 발견할 수 있다. 더구나 아미타유스와 아미타바가 동일시되는 계기도 나타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아미타불은 원시불교에서 부파불교에 걸쳐 전개된 불타관을 배경으로 성립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메르시아 엘리아데는 ‘신비한 빛의 경험들'이라는 논고에서 정토신앙을 ‘빛의 상징주의'(symbolism)와 교섭된 구원론(soteriology)적 전통으로 보고 있다 인도의 인식론적인 전통 가운데 수식어로서 ‘빛을 본다'는 말이 있다. 빛을 봄은 지식의 근원이며 인식의 핵심이 된다. 이것은 궁극적인 신의 형상을 본다는 직관(直 觀,darsana)일 수도 있 다.
대승 불교의 교리 발전과 인식을 보면 이 빛의 상징체로서의 불타의 법력은 어둠을 깨고 해탈의 경험을 갖게 하는 힘으로 여겨지며, 이는 점차 의식(儀式) 속에서 예배의 대상으로 변전된다. 용수(龍樹,Nagarjuna)를 중심한 중관학에서는 이 빛의 불타를 우주 적인 공상(空想)으로 논리화하게 되며, 이 빛의 실재는 모든 것이 서로 연계되어져 있다는 연기(緣起,prattt1yasamudpada)로서 설명된다. 동시에 이 빛의 전통은 지혜(智慧, praJuna)의 전통과 합류하여 반야(般若) 문헌의 중심 속에 자리하게 된다.
이상에서 빛과 어둠이 관계에서 나타난 서방의 아미타불의 연관성을 살펴봤다.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곳은 서쪽 밖에 없다. 역설적으로 영원히 해가 지는 곳도 서쪽이다. 이러한 서쪽 어딘가에 영원히 어둠이 없는 땅이 장엄한 극락임을 <아미타경>에서 밝히고 있다.
사리불아, 너는 이 부처님을 왜 아미타라 부른다고 생각하는냐? 사리불아, 저 부처님의 광명은 한량이 없어서 시방세계를 다 비추어도 조금도 걸림이 없으므로 아미타라 불리느니라. 또 사리불아, 저 부처님과 그 나라 백성들의 수명은 한량이 없고 끝이 없는 아승지겁이므로 아미타라 이름하느니라. 사리불아, 아미타부처님이 성불하신지는 십겁이 지났느니라. 아미타불의 속성은 빛과 生命 그리고 어둠과 死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阿彌陀經 >구마라집譯 大正12,347上25
그 곳은 밝음의 희망과 평안(Sukhavati)만 존재하는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無量光(Am1tabha)과 無量壽(Am1tayus)의 수명을 갖는 국토가 淨土인 것이다.
이러한 빛과 어둠의 생사관을 서방 임을 다시 한 번 확인 시켜주는 부처님의 열반상의 장면과 서방이 왜 극락이 되어야 하며 아미타불이 서방에 존재할 이유을 설명하고 있는 여러 經論을 통해 고찰 해 보겠다.
2, 文獻的인 經典에서 西方에 대한 考察
경전 속에서 극락정토가 있는 곳을 西方으로 표기된 경전들과 서방의 방위가 없이 극락정토를 설명하고 있는 경전들을 비교해 본다.
먼저 서방이 어떻게 등장하고 왜 서방에 극락정토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경전을 찾아 보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눠지는 것을 발견한다. 초기 경전인 淨土三部經들은 ‘西方’의 위치를 표기하면서 극락을 설명하고 있는 반면 중관학파나 유가학파 이후 정토 경전들을 번역하고 설명한 논서들은 西方이라는 방위 표시가 없고 저‘彼’, 그‘其’ 같은 지시대명사로만 불국정토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극락(極樂,Sukhavati)에 갈 수 있는 방법과 수단도 두 가지로 뚜렷하게 구분해서 설명되고 있다.
초기 정토세계관은 아미타불이나 아촉불의 신앙이 불탑신앙으로부터 생겼다고 설명 하듯이 佛塔이나 佛像과 같은 대상 혹은 일상관, 땅, 나무, 물 등의 표상을 취하는 수행은 사마타 수행의 까시나 관법수행으로 극락정토에 갈 수 있는 구원론의 세계관이고, 둘째는 中觀學과 唯識思想 이후의 自力更生인 깨달음의 형태인 唯心淨土로 구분해서 설명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세친보살이 <정토론>에서 초기 수행은 ‘예배할 때는 서방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원생(願生)의 마음으로(意業), 입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서(口業), 몸으로 예배하는 것(身業)이 보통이다’라고 하고 '일심으로 정토에 왕생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적정삼매(寂淨三昧)로 수행하는 것이 사마타라고 설명하고, 이어서 유가행(瑜伽行)의 수행인 사마타(止)와 비바사나(觀)를 닦아 자력왕생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결국 예배와 구원의 신앙적인 초기경전들과 자력성불을 중심으로하는 정토관의 경전들이 서방의 정토에 대한 의미와 표기가 달라 질 수 있다는 것도 유추 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 극락정토를 西方에 있다고 표기하는 경전들을 살펴 본다.
가, 「大般涅槃經」에서 西方을 직접 표기하지는 않지만 서방을 가장 핵심적으로 암시하는 부처님의 열반상
<유행경>인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āarinibbana Sutta, D16)에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마지막 열반하시는 모습에서 왜 사후의 극락정토는 서쪽을 향하고 있는지를 암시하는 장면으로 서방의 방위를 나타내고 암시하는 최초의 설명으로 주목할 수 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직전에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오른팔을 베고 눕게 되면 바라보는 앞은 당연히 서방이 된다. 왜 이러한 장면에서 서쪽이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가시는 곳이라고 유추 할 있느냐면 빛과 어둠인 生死관으로 설명된다. 구체적인 설명은 파트 2, 生死觀인 빛과 어둠으로 考察에서 살펴본다.
그때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히란냐와띠 강의 저쪽 언덕, 꾸시나라 근처에 있는 말라들의 살라 숲으로 가셨다.가셔서는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그대는 한 쌍의 살라 나무사이에 북쪽으로 머리를 둔 침상을 만들어라. 아난다여, 피곤하구나. 누어야겠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한 뒤 두 살라 나무 사이에 ‘북쪽으로 머리를 둔 침상을 만들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발과 발을 포개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正念正知] 오른쪽 옆구리로 사자처럼 누우셨다’.
나,「無量壽經」에서 나타난 西方의 표현을 살펴보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법장보살은 이미 성불하여 ‘서쪽 나라’에 계시는데, 그 부처님의 이름을 아미타불 혹은 무량수불이라하며 그 나라는 十만억의 나라를 지난 먼 나라로서 극락세계라 하느니라." 무량수경에서는 아미타 부처님이 어떤 부처님이고 어떻게 서방을 관장하게 되는 지를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극락정토가 10만억 국토를 지나서 서방에 있다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다,「般舟三昧境」 에 나타난 西方淨土
「반주삼매경」 第2行品 [現在諸佛悉在前立].
"어떻게 하여야 현재제불실재전립삼매(現在諸佛悉在前立三昧)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면 이와 같느니라. 발타화여!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가 계를 온전히 지키고 홀로 한 곳에 머물러서 마음으로 서방정토 아미타불을 염하되 마땅히 지금 현재 들은 바 대로 염해야 하느니라.
이 곳으로부터 천억만 불국토를 지나면 그 나라의 이름이 서방정토극락세계[須摩提]라고 하느니라. 아미타불은 그 곳의 모든 보살 가운데에서 경을 설하시고 계시며, 대중들은 항상 아미타불을 염하느니라."
라, 「觀無量壽經」에 나타난 西方淨土
부처님께서 위제희부인에게 말씀하셨다. "부인과 중생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한곳에 집중시켜 서쪽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중생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 아니니 눈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해가 지는 것을 볼 것이므로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서 해를 똑똑히 보도록 하시오. 그리고 나서 마음을 굳게 간직하여 생각을 움직이지 말고, 곧 지려는 해가 마치 서쪽 하늘에 매달린 북과 같음을 보도록 하시오. 이것을 해를 관하는 일상관이라하고 최초의 관이라 합니다." 여기서는 서방에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마음 속에 영원히 해가 지지않는 무한한 빛(無量光,Am1tabha)의 세계인 sukhavatī무량한 광불로 는 영원한 아미타유스를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고, 초기 수행방법인 사마타 수행 중에 까시나 수행인 해를 표상으로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는 것이 잇으며 시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왜 10만억 국토를 지나서 서방에 극락정토가 있느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마, 「阿彌陀經」에 나타난 西方淨土
“여기서 서쪽으로 십만억 불국토를 지나 한 세계가 있으니 그 이름을 극락이라 하고 그 곳에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니 지금도 법을 말씀하고 계신다. 사리불아, 저 세계를 왜 극락이라 하는가 하면 그 나라 중생은 온갖 괴로움이 없고 다만 모든 즐거움만 받음으로 극락이라고 이름 한다. 또 사리불아, 극락세계는 일곱 겹의 난간과 일곱 겹의 보배그물과 일곱 겹의 가로수가 모두 네 가지 보배로 두루 둘러싸여있으므로 그 나라를 극락이라 이름 한다.
2)경전에서 극락정토를 방위를 표기하지 않고 설명하는 경전들
가, 「維摩經」에 나타난 淨土
보적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올곧은 마음[直心]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속이지 않는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난다. 깊은 마음[深心]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공덕을 갖춘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난다. 보리심(菩提心)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대승의 가르침[大乘]을 실천하는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난다.
유심정토는 인간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현세를 정토라고 하는 설로서, 『유마경』에서 설한 ‘심청이 불토청’이라고 하는 설과,『유식론』의 생각을 가지고 유식소변의 정토를 말한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마음에 부처님을 생각하면 이 마음이 바로 삼십이상과 팔십수형호를 갖춘 원만덕상이니,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루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니라.
나,세친의 「往生論」에서 나타난 佛國의 淨土
「왕생론(往生論)」에는 극락정토를 ‘西方’이라는 표현은 없다. 모두가 ‘彼’ 저로 나타낸다.
이는 타력에 의한 觀念淨土로 보는 ‘西方’이라는 특정 지역을 쓰지않고 第5節 淨土의 境界에서 ‘次三種成就 願心莊嚴 應知 차례의 세 가지 성취는 원하는 마음의 장엄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처럼 唯心淨土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왕생론(往生論)」第1章,原生偈에서 世尊我一心 歸命盡十方 無碍光如來 願生安樂國 세존이시여! 저는 일심으로 시방에 다하는 무애광 여래께 귀명하여 안락국에 태어나기를 원하옵니다.
是故願生彼 阿彌陀佛國 無量大寶王 微妙淨華臺 이러한 때문에 저 아미타불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네. 무량한 대 보배왕은 미묘하고 청정한 꽃의 자리에 계시네.
第2章, 第2節 佛國土 莊嚴에서 云何觀察彼佛國土 莊嚴功德. 彼佛國土莊嚴功德者成就不可思議力. 어찌하여 저 불국토가 장엄된 공덕을 관찰하는가?저 불국토가 장엄된 공덕은 불가사의한 힘을 성취하였다. 略說彼阿彌陀佛國土 十七種莊嚴功德成就 저 아미타불 국토의 열일곱 가지 장엄공덕성취를 간략히 말하면 세친은『무량수경우파제사』에서 미타정토에의 왕생인으로써 예배[신업]․찬탄[구업]․작원[의업, 사마타]․관찰[지업, 비파사나]․회향[대비]의 오념문을 제시하고 있다.
다,용수 정토사상
용수龍樹(나가르주나, 150?-250?)에 의하면, 정토는 부정잡악이 사라진 중도실천中道實踐의 묘과妙果이며, 무착과 세친에 의하면 불佛의 3신三身 중 수용신受用身(報身)이 머무는 보토(報土)입니다. 예토와 정토를 마음 하나로 보는 선가禪家의 유심정토사상唯心淨土思想은 이러한 정토관을 궁극까지 밀고 간 것입니다. 이러한 정토사상에 의하면 정토와 예토는 공간적으로 동일한 위치를 갖게 되며, 오직 주관적 심식心識의 차이일 뿐입니다.
용수는 대승의 보살도를 육로로 걸어가는 것과 해로로 배를 타고 가는 것에 비유해서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로 구별하였다. 난행도는 육로로 걸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에 걸쳐 뼈를 깎는 힘든 수행을 함으로써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이고, 이행도는 해로로 배를 타고 즐겁게 항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이라는 신방편(信方便)의 쉬운 수행, 곧 제불(諸佛)의 명호를 외워서 그 공덕으로 현생에서 불퇴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용수가 말하는 제불(諸佛)의 명호란 아미타불 한 부처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여러 부처님과 보살들의 명호를 외우는 것이다. 그러나 아미타불에 관해서는 특별히 상세하게 설명해서 아미타불의 덕을 찬탄하고 아미타불의 본원을 들어 "만일 사람들이 나를 생각(念)하고 명호를 칭하며 스스로 귀의하면 곧바로 필정에 들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억념(憶念)해야 한다."고 설하여 아미타불을 억념하고 명호를 외울 것을 권한다. 한편 <대지도론>에서도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아미타불의 임종래영(臨終來迎)과 법장비구의 불국토 장엄에 대해 설하고 있다. 이러한 용수의 정토사상은 후세에 중국·한국·일본의 정토교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난행도와 이생도의 구분은 중국 정토교의 담란과 선도 등이 불교를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으로 나누거나, 성도(聖)와 정토(淨土) 두 가지로 분류하기도 하였다.<정토세계 229-230P>
라,세친의 「往生論」에서 나타난 佛國의 淨土
「왕생론(往生論)」에는 극락정토를 ‘西方’이라는 표현은 없다. 모두가 ‘彼’ 저로 나타낸다.
이는 타력에 의한 觀念淨土로 보는 ‘西方’이라는 특정 지역을 쓰지않고 第5節 淨土의 境界에서 ‘次三種成就 願心莊嚴 應知 차례의 세 가지 성취는 원하는 마음의 장엄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처럼 唯心淨土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왕생론(往生論)」第1章,原生偈에서 世尊我一心 歸命盡十方 無碍光如來 願生安樂國 세존이시여! 저는 일심으로 시방에 다하는 무애광 여래께 귀명하여 안락국에 태어나기를 원하옵니다.
是故願生彼 阿彌陀佛國 無量大寶王 微妙淨華臺 이러한 때문에 저 아미타불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네. 무량한 대 보배왕은 미묘하고 청정한 꽃의 자리에 계시네.
第2章, 第2節 佛國土 莊嚴에서 云何觀察彼佛國土 莊嚴功德. 彼佛國土莊嚴功德者成就不可思議力. 어찌하여 저 불국토가 장엄된 공덕을 관찰하는가?저 불국토가 장엄된 공덕은 불가사의한 힘을 성취하였다. 略說彼阿彌陀佛國土 十七種莊嚴功德成就 저 아미타불 국토의 열일곱 가지 장엄공덕성취를 간략히 말하면 세친은『무량수경우파제사』에서 미타정토에의 왕생인으로써 예배[신업]․찬탄[구업]․작원[의업, 사마타]․관찰[지업, 비파사나]․회향[대비]의 오념문을 제시하고 있다.
세친의 <정토론> -무착에 이어 정토사상을 조직적으로 설한 사람은 그의 동생인 유가유식 철학의 시조 세친(世親, 舊譯은 天親, Vasubandahu, 320~400년경)이다. <정토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엇이 예배인가? 신업(身業)으로써 아미타·여래·응공·정변지를 예배하는 것이니, 저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이다. 예배문에서 '저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이다'라 하므로, 일심으로 모든 시방의 무애광여래께 귀명하여 안락국에 태어나고자 하는 뜻, 다시 말하면 그 서원이 신업으로 나타난 것이 예배다. <235P>
맥이 제3 작원문과 제4 관찰문에서도 나온다.
즉 작원문에서 '여실히 사마타(Samatha)를 수행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의 사마타와 관찰문에서 '여실히 비바사나(vipasyana)를 수행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의 비바사나가 모두 명사로 해석되고 있다. <
<정토론>에서는 다시 "이와 같이 보살이 사마타와 비바사나의 광략(光略)을 수행하면 유연심을 성취한다."고 하였다. <238-9P>
혜원과 담란이 있는데 실질적인 中國 정토교의 초조(初祖) 역할을 했으므로, 후세에 그를 중국 정토종의 제1조라 불렀다. 담란의 정토사상은 유식설(唯識說) 혹은 유심론(唯心論)이라고도 하 그가 정토에 태어난다(왕생)고 하는 의미를 '생즉무생(生卽無生, 無生의 생1)'이라 이해한 것 등에서 잘 나타난다. <255>
담란은 또한 아미타불의 본원과 그 성격을 올바르게 포착해서 타력본원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왕생론주>권하에서 "저 정토에 태어나는 것과 저 정토에서 이루는 보살·천인들의 모든 수행은 아미타여래의 본원에 의한 것이다."라 하였다.
중국고유의 민간신앙도 원용하여 정토사상을 중국에 정착시키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논리, 발표, 증명,발전,
“지금, 현재의 아미타불은 어떤 몸이며 극락의 땅(서방)은 어떤 땅 인가”20)라고 아미타불신과 서방정토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안락집, p. 5 하. “問曰. 今現在阿彌陀佛是何身. 極樂之國是何土.”
도작의 <그래서 서방정토와 아미타불이라는 것도 모두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범부
를 위해 나타낸 저차원의 정토와 부처라고 하였다.58)58) 佐藤健, 「道綽禪師の淨土觀」, 印度學佛敎學硏究26권, (東京: 日本印度學佛敎學會, 1977), 284
보신불도 화신불도 모두 원래는 법신불 안에 있는 것으로, 법신불은 ‘실재
(reality)’이나 다른 두 몸은 ‘잠정적 실존’일 뿐이다.67) 보신불과67) D.T. Suzuki, Outlines of Mahayana Buddhism, (New York: Schoken Books, 1963), 254쪽.
박종천, 「삼위일체론과 삼신론(三身論)」, 神學과 世界19호, (감리교 신학대학, 1989), 183쪽.
마, 원효의 서방정토의 표현
그러므로 큰 성인 자취를 드리움에 멀고 가까움이 있으며 가르침의 말씀을 펴심에 혹 칭찬하고 나무람이 있나니 오고 감을 자제하시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몸을 이 檅土에 나투시어 五濁에 나쁨을 경계하시고 저 淨國으로 갈 것을 권하셨으며 아미타부처님께서 저 淨土에 계시어 세 무리를 이끌어 인도하신다. 所以大聖垂 述有 가有미. 所陳言敎惑상或貶. 至如牟尼善逝現此檅土. 誠五濁而勸往. 彌陀如來御彼淨國. 引三輩而導生. 無量壽經宗要에도 “大意者 然夫衆生心性融通無礙 泰若虛空 深猶巨海 若虛空故其體平等無別相而可得 何有淨檅之處”
“대의를 말하면, 무릇 중생의 심성은 融通無碍하여 크기를 말하면 마치 허공과 같고, 깊이를 말하면 큰 바다와 같다.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그 體는 평등하여 형상을 구별하여 가히 얻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어느 곳에 정토와 사바세계가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바, <육조단경>에 서방의 표현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속에 나려고 하지만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서 부처의 땅도 깨끗하다(隨其心淨 則佛淨土)'고 말씀하셨느니라. 사군아, 동쪽 사람일지라도 다만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고, 서쪽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허물이 있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가서 나기를 원하나(願生) 동방과 서방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는 다 한가지니라.
다만 마음에 깨끗치 않음이 없으면 서방정토가 여기서 멀지 않고, 마음에 깨끗치 아니한 생각이 일어나면 염불하여 왕생하고자 하여도 이르기 어렵느니라. 십악(十惡)을 제거하면 곧 십만 리를 가고, 팔사(八邪)가 없으면 곧 팔천 리를 지난 것이다. 다만 곧은 마음을 행하면 도달하는 것은 손가락 퉁기는 것과 같으니라.사군아, 다만 십선(十善)을 행하라. 어찌 새삼스럽게 왕생하기를 바랄 것인가. 십악(十惡)의 마음을 끊지 못하면 어느 부처가 와서 맞이하겠는가.
3) 서방 극락을 암시하는 장면을 <유행경>인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Mahāarinibbana Sutta, D16)과 <아미타경> 정토경전들과의 내용을 비교해서 검토해 본다.
가, 보배 연못의 비유된 풍경
그러자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오라 아난다여 히란냐와띠 강의 저쪽 언덕, 꾸시나라 근처에 있는 말라들의 살라 숲으로 가자.”“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대답햇다. 그때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히란냐와띠 강의 저쪽 언덕, 꾸시나라 근처에 있는 말라들의 살라 숲으로 가셨다.
또 사리불아, 극락세계는 일곱 보배연못이 있어 여덟 가지 공덕물이 가득 차 있고 연못 바닥은 순금모래로 덮여있으며 둘레 네 계단은 금, 은, 수정, 청옥을 섞어 만들었느니라. 또 연못 위에 누각은 금, 은, 수정, 청옥, 붉은 진주, 호박, 마노로 훌륭하게 꾸며져 있고 연못 중앙에는 큰 수레바퀴 같은 연꽃이 있어 푸른색 꽃은 푸른빛을 내고, 누른 꽃은 누른빛을 내고, 붉은 꽃은 붉은빛을 내고, 하얀꽃은 하얀빛을 내며 미묘하고 맑은 향기를 낸다.
사리불아, 극락세계는 이와 같은 공덕장엄으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나,가로수의 비유된 풍경
그때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히란냐와띠 강의 저쪽 언덕, 꾸시나라 근처에 있는 말라들의 살라 숲으로 가셨다. 그러자 한 쌍의 살라 나무는 때 아닌 꽃들로 만개하여 여래께 예배를 올리기 위해서 여래의 몸 위로 떨어지고 흩날리고 덮었다.
또 사리불아, 극락세계는 일곱 겹의 난간과 일곱 겹의 보배그물과 일곱 겹의 가로수가 모두 네 가지 보배로 두루 둘러싸여있으므로 그 나라를 극락이라 이름 한다.
다, 하늘나라 만다라화와 꽃비의 풍경
하늘나라의 만다라와 꽃들이 허공에서 떨어져서 여래께 예배를 올리기 위해서 여래의 몸 위로 떨어지고 흩날리고 덮었다. 하늘나라의 전단향 가루가 허공에서 떨어져서 여래께 예배를 올리기 위해서 여래의 몸 위로 떨어지고 흩날리고 덮었다. 하늘나라의 음악이 여래께 예배를 올리기 위해서 허공에서 연주되었으며 하늘나라의 노래가 여래께 예배를 올리기 위해서 울려퍼졌다.
또 사리불아, 저 극락세계는 항상 하늘나라의 음악이 연주되고 대지는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고 밤낮으로 여섯때의 하늘나라 만다라꽃비가 내린다.
라, 새들을 비유한 수행과 깨달음의 풍경
아난다여, 그러나 이러한 것으로는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것이아니다. 아난다여, 비구나 비구니나 청신사나 청신녀가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고, 합당하게 도를 닦고, 법을 따라 행하며 머무는 것이 참으로 최고의 예배로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숭상하고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여기서 우리는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고, 합당하게 도를 닦고, 법을 따라 행하며 머물러야 한다.”
또 사리불아, 저 나라는 항상 갖가지 기이하고 묘한 여러 빛깔의 새들이 있는데 흰 학과 공작, 앵무, 사리, 가릉빈가, 공명들의 모든 새가 밤낮으로 여섯때로 화창하고 우아한 맑은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다섯가지의 도의 씨앗(五根), 다섯가지의 도의 힘(五力), 일곱가지의 보리법문(七菩提), 여덟가지의 성인의 도(八聖道) 등의 법을 연설해 내는 것이다. 저 땅의 중생들은 그 소리를 듣고는 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문을 생각하며 승가를 생각하게 되느니라.
사리불아, 너는 이 새들이 죄의 업보로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왜 그러하냐면 저 부처님세계는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가 없기 때문이다.
마, 극락정토는 아라한들의 수행처임을 암시하는 풍경
“아난다여, 믿음을 가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네 가지 장소가 있다. 어떤 것이 넷인가? ‘여기서 여래가 태어나셨다.’ 이곳이 믿음을 가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장소이다. ‘여기서 여래가 위없는 정등각을 깨달으셨다.’ 이곳이 믿음을 가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장소이다.
‘여기서 여래가 위없는 법의 바퀴를 굴리셨다.’ 이곳이 믿음을 가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장소이다. ‘여기서 여래가 무여열반의 요소로 반열반하셨다.’ 이곳이 믿음을 가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장소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믿음을 가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네 가지 장소이다.
아난다여,‘여기서 여래가 태어나셨다.’‘여기서 여래가 위없는 정등각을 깨달으셨다.’‘여기서 여래가 위없는 법의 바퀴를 굴리셨다.’‘여기서 여래가 무여열반의 요소로 반열반하셨다.’라면서 믿음을 가진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이 이곳을 방문할 것이다. 아난다여, 누구든 이러한 성지순례를 떠나는 청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모두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 천상세계에 태어날 것이다.
사리불아, 그 부처님세계는 지옥이란 말조차 없는데 어떻게 그런 업보가 있겠느냐. 이 모든 새들은 모두 아미타부처님께서 법문을 하시고자 변화하여 나타낸 것이다. 사리불아, 저 극락세계에 잔잔한 바람이 불면 보배로 된 가로수와 보배로 된 그물에서 마치 백천가지 음악이 한꺼번에 울리는 것 같은 아름다운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를 듣는 사람은 다 저절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문을 생각하고 승가를 생각하게 되느니라. 사리불아, 극락세계는 이와 같은 공덕장엄으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사리불아, 너는 이 부처님을 왜 아미타라 부른다고 생각하는냐? 사리불아, 저 부처님의 광명은 한량이 없어서 시방세계를 다 비추어도 조금도 걸림이 없으므로 아미타라 불리느니라.
또 사리불아, 저 부처님과 그 나라 백성들의 수명은 한량이 없고 끝이 없는 아승지겁이므로 아미타라 이름하느니라. 사리불아, 아미타부처님이 성불하신지는 십겁이 지났느니라.
또 사리불아 저 부처님에게는 한량없고 끝없이 많은 성문의 제자가 있으니 모두 아라한으로 그 수는 어떤 계산으로도 능히 알 수 없을 만치 많으며 또한 모든 보살의 수도 이와 같으니, 사리불아, 저 극락세계는 이와 같은 공덕장엄으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또 사리불아, 극락세계에 태어난 중생들은 모두 아비발치(보리심에서 물러나지 않는 보살의 지위)이므로 그 가운데 한 생 뒤에 부처가 될 이가 너무 많은데 그 수는 어떤 계산으로도 알 수가 없다. 다만 한량없고 끝이 없어 아승지겁이라 말할 뿐이니라. 사리불아, 이 법문을 들은 중생들은 마땅히 저 나라에 태어나기를 발원해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그 나라는 이와 같이 으뜸가는 사람들이 발원을 얻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바, 불상,불념을 통해 극락왕생한다는 풍경
아난다여, 전륜성왕의 유체에 대처하듯이 여래의 유체도 대처해야 한다.그리고 큰 길 사거리에 여래의 탑을 조성해야 한다.거기에 화환이나 향이나 향가루를 올리거나 절을 하거나 마음으로 청정한 믿음을 가지는 자들에게는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이익이 있기 때문에 여래·아라한·정등각의 탑은 조성할 만한가? 아난다여, ‘이것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의 탑이다.’라고 많은 사람들은 마음으로 청정한 믿음을 가진다. 그들은 거기서 마음으로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 천상세계에 태어난다. 아난다여, 이런 이익이 있기 때문에 여래·아라한·정등각의 탑은 조성할 만하다.
사리불아, 작은 선근 복덕 인연으로는 저 세계에 날 수가 없다.
사리불아, 만일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아미타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그 이름을 지니고 혹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나 나흘이나 닷새, 엿새, 이레 동안 한 마음으로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그 사람이 임종시까지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며 그 사람이 목숨을 마칠 때에 아미타부처님과 여러 성중들이 그 앞에 나타나시므로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즉시 아미타부처님이 계신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되느니라. 사리불아, 나는 이런 이익을 아는 고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니 만일 어떤 중생이 이 말을 들은 자라면 마땅히 저 극락세계 태어날 것을 발원하여야 할 것이니라.
이상에서는 사방 극락세계가 분명히 서방에 있고 그 세계는 아미타경이나 여러 경전에서 밝히고 있듯이 아름다운 곳임을 알아봤다. 아난은 볼 수 없는데 부처님이 보는 극락은 다르다. 아난은 아직 아란한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처럼 극락을 볼 수가 없다. 지금 부처님이 ‘아난다여, 피곤하구나. 누워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피곤하다는 뜻은 사바세계의 속제에서 벗어나 진제의 열반으로 쉬고 싶다는 말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 열반의 세계를 보여주시고 있는 관경이다. 극락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것이 깨달은 자만 보는 것임을 설명하기도 한다.
극락은 깨달은 자의 눈으로 보는 것을 확인시킨다. 앞에서 부체하는 시자를 비켜라고 하는 것도 나는 볼 수 있는 극락을 너희들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적하신 것이라 설명할 수 있다.
4) 다음은 서방 정토가 왜 유심정토(唯心淨土)로 이해되고 설명하려고 하는지를 여러 논서나 경전에서 지리적인 西方이 아닌 他方이나 아니면 한 마음(一心)안에 극락 정토를 피력(披瀝)하고 있는 내용을 알아 본다.
자신과 법을 섬으로 삼고 귀의처로 삼아라.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自燈明],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自歸依]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法燈明], 법을 귀의처로 삼아[法歸依] 머물고, 다른 것을 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문다...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문다...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아난다여, 누구든지 지금이나 내가 죽고 난 후에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면서 공부짓기를 원하는 비구들은 최고 중의 최고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방일하지 말고 [해야할 바를 모두] 성취하라.”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다.
부처님께서 위제희부인에게 말씀하셨다. "부인과 중생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한곳에 집중시켜 서쪽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중생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 아니니 눈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해가 지는 것을 볼 것이므로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서 해를 똑똑히 보도록 하시오. 그리고 나서 마음을 굳게 간직하여 생각을 움직이지 말고, 곧 지려는 해가 마치 서쪽 하늘에 매달린 북과 같음을 보도록 하시오. 이것을 해를 관하는 일상관이라하고 최초의 관이라 합니다."
여기서는 서방에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마음 속에 영원히 해가 지지않는 무한한 빛(無量光,Am1tabha)의 세계인 sukhavatī무량한 광불로 는 영원한 아미타유스를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고, 초기 수행방법인 사마타 수행 중에 까시나 수행인 해를 표상으로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는 것이 잇으며 시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왜 10만억 국토를 지나서 서방에 극락정토가 있느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알아차리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正知] 행한다.앞을 볼 때도 돌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가사․발우․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걸으면서․서면서․앉으면서․잠들면서․잠을 깨면서․말하면서․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비구들이여, 이와같이 비구는 알아차린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이다.
5) 극락정토 속에 나타난 숫자에 대한 고찰
극락정토에는 유독히 7의 숫자와 10의 배수에 관한 숫자가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숫자의 상징성과 의미는 서방 극락과의 어떤 연결성을 갖는지를 찾아 본다.
<참고 논문>
<불교 숫자의 상징성 고찰 `4`와 `7`을 중심으로>2009, 염중섭, 한국종교학회 종교연구 55집
<수의 표현과 의미> 채완. 한국어 의미학 수의 표현과 의미, 동덕여대 2001
<숫자 3을 이용한 한국의 시각적 표현 연구>박선미,이화여자대학교 디자인대학원 2003
<‘동양의십진법’그신비로움 불교의숫자, 서양의숫자> 이은정, 『과학과 기술』 2008년 5월
<‘7’과 ‘七爪龍’의 문화적 함의> 박헌영(세준)ㆍ동한국불교학 65, 2013, pp.125~147.
“여기서 서쪽으로 십만억 불국토를 지나 한 세계가 있으니 그 이름을 극락이라 하고-중략 - 또 사리불아, 극락세계는 일곱 겹의 난간과 일곱 겹의 보배그물과 일곱 겹의 가로수가 모두 네 가지 보배로 두루 둘러싸여있으므로 그 나라를 극락이라 이름 한다.
또 사리불아, 극락세계는 일곱 보배연못이 있어 여덟 가지 공덕물이 가득 차 있고
그 소리는 다섯가지의 도의 씨앗(五根), 다섯가지의 도의 힘(五力), 일곱가지의 보리법문(七菩提), 여덟가지의 성인의 도(八聖道) 등의 법을 연설해 내는 것이다. 저 땅의 중생들은 그 소리를 듣고는 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문을 생각하며 승가를 생각하게 되느니라.
또한 무량수불(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세계에 있는 보리수는 그 높이가 四백만리이고 그 밑둥의 둘레는 五十유순이며 그 가지와 잎은 四방으로 二十만리나 퍼졌는데,
그 때 부처님의 양미간에서 찬란한 금색 광명이 발하여 한량없는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고 그 광명은 다시 돌아와서 부처님의 정수리에 머물러 마치 수미산과 같은 황금의 좌대가 되었다. 그리고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들의 청정미묘한 불국토는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어느 국토는 七보로 이루어지고,
그리고 그 밑에는 금강과 七보로 된 황금의 당(幢)이 유리 같은 대지를 八방으로 받치고 있습니다. 또한 그 황금의 당은 八모로 이루어지고 그 낱낱의 면마다 백 가지 보배로 꾸며져 있으며
보배 나무를 관할 때는 먼저 보배 나무 하나하나를 관하여 그 보배 나무가 일곱 줄로 늘어서 있음을 생각하여라. 그 보배 나무는 나무마다 높이가 八천 유순(由旬)이나 되며, 모든 보배 나무는 七보의 꽃과 잎을 달고 있느니라.
이상의 경전에서 나타나는 숫자 외에도 반복되는 많은 숫자들의 의미가 나타난다. 특정한 수가 아니라 아주 많은 상태를 의미하는 표현들이 많은데 알아본다.
항하사(恒河沙)는 특정한 수가 아니라 아주 많은 상태를 말한다. ‘갠지스강의 무수한 모래’만큼 많다는 의미로 수학의 숫자로 계산하면 10‐56이다.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현상을 말하는 불가사의는10‐80 혹은 10‐120으로 표기 된다. 불가사의는 우리가 볼 수있는 우주 안에 들어있는 입자의 수와 비슷하다. 과학자들의 계산 결과중성자, 양자, 전는10‐80개, 광자는10‐90개가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안에 있다. 마지막의 무량수(無量數)는 서양 수학에서 말하는‘무한대’다. 무량수는 불가사의의 1억배로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무한히 큰 수를 말한다.
이렇게 커다란 숫자뿐 아니라 아주 작은 숫자를 나타내는 말들도 불교에 존재한다. 요즘 유행하는 나노(10‐9)는 동양의 십진법으로는 티끌 진(塵)이다. 양자, 중성자의 크기는 10‐13㎝로 모호(模湖)에 해당 한다.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이라는 뜻의 탄지(彈指)는 현대 과학으로 잴 수 있는 가장 작은 수다.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작은 숫자는‘청정’(淸淨)이다. 청정은 부처님만이 느낄 수 있는 경지라고 한다. 김정욱 원장은“우주의 밀도를 계산하면10‐29g/㎤로 거의 빈 공간 이라고 할 수 있는 수치인데 이를 진공을 재는 단위인 토르로 환산하면 신기하게도 청정에 해당하는 10‐21토르”라고 설명했다.
중국에서는 큰 수에 까지도 이름을 붙였는데 수학적으로 10‐68까지 한자어 이름이 있다. ‘無量大數’가 그것인데, 본래의 억진법으로는 10‐128이다.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없이 긴 시간을 가리키는 ‘겁(劫)’이나, 흔히 일상어에서 아주 짧은 시간을 표현하는 ‘찰나’도 불교 용어에서 유래되었다.
작은 수도 현대에는 십진법이지만 옛날에는 억진법이었다. 예를 들면 현대 수학으로는 ‘瞬息’은 10-16이고 ‘탄지(彈指)’는 그 1/10인 10‐17인데, 억진법으로 하면 ‘순식(瞬息)’은 10‐72이고, ‘彈指’는 그 억분의 1인 10‐80이 된다.
가. 극(極)
‘극’은 일상어로 ‘어떤 정도가 더할 수 없을 만큼 막다른 지경’을 의미한다. ‘극에 달하다, 극과 극을 달리다, 極限 상황; 음극, 양극, 북극, 남극’ 등과 같은 표현들에서 그러한 의미를 볼 수 있다. 글자 뜻으로 보면 ‘극’ 정도만 되어도 더할 수 없이 큰 수라고 할 수 있다. 일 음절 수사로는 ‘극’이 가장 큰 수를 나타낸다.
나. 항하사(恒河沙/砂)
‘항하사’는 ‘恒(강가/갠지스: 음역)+河(강: 의역)+沙(모래: 의역)’와 같이 음역과 의역에 의해 만들어진 말로서, 셀 수 없이 무한히 많은 것을 비유한 표현이다. 불교에서는 모래나 먼지, 티끌 따위로 큰 수를 비유하는 일이 많다. 極大의 수를 ‘미진수(微塵數)’라고 하는데, 이 말은 수사는 아니고 ‘이 세상에 있는 먼지의 수만큼 많은 수’라는 뜻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다. 아승기(阿僧祗)
‘아승기’는 ‘항하사’의 만 배인데, 고대의 억진법으로 하면 항하사의 억 배, 즉 10104이다. 이 정도면 ‘수’가 아니라 ‘관념’이다. 불교에서 ‘아승기’는 ‘수로 표현할 수 없는 가장 많은 수, 또는 그런 시간’ 이라는 의미로서 한자로는 ‘無數’로 번역된다. 일상어로 ‘無數하다’가 ‘수가 없다’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다’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이 바로 ‘無數’의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라. 나유타(那由他)
수학에서는 ‘나유타’가 1060을 가리킨다. 인도에서도 지극히 큰 수를 나타내는 수사이지만 구체적으로 얼마의 수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다고 한다.
마. 불가사의(不可思議)
‘불가사의’는 이름 그대로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큰 수라는 뜻이다. 수사이면서 일상어로도 쓰이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그 뜻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이 이상하고 야릇함’ 으로 풀이되어 있다.
바. 무량대수(無量大數)
현재 수사 가운데 가장 큰 수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예전의 억진법으로 하면 불가사의의 억 배이므로 10의 128배 수가 된다. 이름 그대로 양으로 헤아릴 수 없는 큰 수이다.
극대수뿐 아니라 1보다 작은 극소수의 이름에도 그 뜻이 있다. (1ㄴ)을 보면 극소수사는 글자 자체가 ‘가느다람(毛, 絲, 纖)’, ‘아득하고 어렴풋함(漠, 模糊, 渺)’, ‘작고 가벼움(微, 忽)’, ‘아주 작은 모래, 먼지, 티끌(沙, 埃, 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은 수의 이름에는 ‘분, 찰나, 탄지, 순식’ 등과 같이 특히 일상어에서 시간 개념을 나타내는 표현이 많다. 그러나, 짧은 시간을 가리키기 위한 말이 극소수를 나타내는 말로 의미가 확대된 것인지, 아니면 극소수를 가리키는 말이 시간에 적용되어 일상어화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 수유(須臾)
‘수유’는 짧은 시간이란 뜻으로, 산스크리트 어의 muhurta(牟呼栗多)의 번역어인데, ksana(刹那)의 번역어로 쓰인 일도 있다고 한다. 본래 시간을 가리키는 말로서 ‘모호율다’는 1주야의 30분의 1에 해당하는 시간으로 지금의 48분에 해당된다. 시간으로는 그리 짧지도 않은 셈이다.
아. 순식(瞬息)
‘순식’은 문자 그대로 ‘눈을 한 번 깜짝하거나 숨을 한 번 쉴 만한 아주 짧은 동안’을 가리킨다. 일상어로는 ‘순간, 순식간’으로 쓰인다.
자. 탄지(彈指)
‘탄지’의 뜻은 ‘손톱이나 손가락 따위를 튕기는 짧은 시간’이다. 산스크리트 어인 acchata의 번역어이다. 일상어로는 ‘탄지경(彈指頃), 탄지(彈指)지간(之間)’의 형태로도 쓰인다.
차. 찰나(刹那)
‘찰나’는 산스크리트 어 ksana의 음역어로 시간의 최소 단위이다. 뜻으로는 ‘念頃(한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 一念’ 등으로 번역한다. 일상어로는 ‘어떤 일이나 사물 현상이 일어나는 바로 그때. 매우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허공(虛空)’과 ‘청정(淸淨)’은 불교 용어이기도 하고 일상어로도 쓰이고 있으나, 수 개념과의 연관성을 찾기가 어렵다. 너무 작아서 텅 빈 허공 같다는 비유인가, 또는 너무 작아서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깨끗(청정)하다는 뜻일까 추측해 본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수 개념은 일상 생활에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불교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인 ‘연기(緣起)’를 설명하는 데 필요했던 것이다. 가령 나의 존재를 생각해 보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인연이 얽히고 설켜 있다.
*숫자 10의 의미
오늘날까지 인류의 집법체계에 있어서 현실적인 측면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10진법니다. 그로 인해 10에는 초기에는 만수의 의미가 내포되다가 현상적인 다양성을 보다 잘 나타내기 위해서 10×10인 100이 만수의 의미로 전화되고, 다시금 100×100으로서의 10,000이 만수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10이 만수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論語의 “聞日以知”아니 방위에 있어서 十方의 개념 등을 통해 분명해 지는 측면이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萬事,萬物 그리고 萬世와 萬法 등의 10,000에 내포되는 ‘모든’의 으미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또한 滿數는 ‘모든’이라은 상징성 이외도 종결과 순환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는 3과 5, 그리고 10과 100, 및 64를 통해서 확인 된다. 불교 경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숫자가 10의 배수이다. 10은 1에서 즉 처음에서 시작한 만수이며 다시 1부터 시작하는 순환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간과 공간을 초월한 (모두 포함한) 만수라고 해도 무방 할 것이다.
*숫자 7의 의미
숫자 7은 불교경전에 극락과 관련하여 압도적으로 등장하는 숫자다.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불교의 4와 7의 숫자의 의미는 이 세계가 4大의 질료, 4大洲의 공간, 外法4相의 시간을 가짐으로써만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7 또한 붓다의 생애와 연관하여그 상징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붓다의 가계 7代가 청정하고 붓다 자신이과거 7불째이며, 어머니는 붓다를 낳고 7일째에 죽고 도리천에서 생했다는것 등을 통해 7은 만수의 의미를 지니며, 극락에 왕생하는 수행 기간이7일이라는 점에서는 理想性을 보인다고 하였다.
초기불교에서 숫자 7은 聖數로 여겼다. 석존이 태어나 일곱 걸음을 걷고 ‘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깨달음의 외침을 발한 데서 성스러운 수로 여겨진 것이다. 수도에 있어서 일곱 가지 요건을 七覺10이라 하고, 중생 교화를 위해 일곱 가지로 변화하는 관음을 七觀音이라고 한다. 또 일곱 가지 보물을 七寶, 깨달음의 지혜를 돕는 7行法을 7보리, 과거에 태어난 七佛,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수를 七生이라 하는 등 중요한 法數에 7이라는 숫자가 사용된다.
7 또한 붓다의 생애와 연관하여 그 상징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붓다의 가계 7代가 청정하고 붓다 자신이 과거 7불째이며, 어머니는 붓다를 낳고 7일째에 죽고 도리천에서 생했다는 것 등을 통해 7은 만수의 의미를 지니며, 극락에 왕생하는 수행 기간이 7일이라는 점에서는 理想性을 보인다고 하였다.
석존이 成道 후 49년간 설법한 것을, ‘49년 설법’이라 하는데 이것도 7의 제곱수이다. 그 자체적인 만수의 상징성이 강하기도 하지만, 극락과 연관이 깊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직후 행한 ‘7일씩 7곳의 명상’을 통해 初轉法輪의 양상을 파생하게 되며, 49일은 중유의 존속기간을 상정하는숫자가 되어 중국 불교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극락으로 가기위한 중유의 기간에서 7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듯이 극락경전에는 7이 다수등장하는데 그 빈도수가 4배수 체계를 완전히 압도하며, 이는 우리에게 7진법의 문화적 배경의 관한 한 측면을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無量壽經>과 <大阿彌陀經>에는 1일에서 7일 간의 수행을 통한 임종(臨終)래영(來迎)과 즉득왕생(卽得往生)에 대한 측면이 나타나 있고, 여기서 7일은 극락에 왕생하는 수행기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숫자 7은 동・서양이 공통적으로 선호하는 숫자이다. 서양에서 7은 신화,종교, 문학, 철학 등에서 특정한 의미를 담아 사용되어 왔다. 수메르,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은 우주의 별 7개를 모티브로 하여 설정되었고, 가톨릭을비롯한 다수의 종교에서도 숫자 7은 완벽함과 성스러움의 상징 그 자체였다.아테네의 솔론과 헬레니즘 시대 철학자 필론은 인생의 굴곡을 7년 주기로표현하였다. 조철수는 <수메르 신화>에서 수메르 신화의 숫자 7에 대한 관념적 태도를 서술하였다. 기원전 18세기경 고바빌로니아 시대의 7개 토판으로 고정화된 수메르 신 목록에 담긴 신들의 총 수효는 3,600이고, 신들 중에 제일 큰 일곱 신이 있다고 하였다.문명이 유럽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수메르신화 속 큰 일곱 신들의 별 이름은 로마의 신들(Mercury, Venus, Mars, Jupiter, Moon, Sun, Saturn)과 동일시되었고, 이에 따라 자연히 서양에서도 7에 대한 의미 있는 관념이 생겼을 것이다. 서양에서 7이 ‘행운’, ‘최고’ 구약성경에 나오는 ‘천지창조의 한 주간’을 뜻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수메르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인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도 숫자 7은 일곱 탈렌트, 일곱 마나, 일곱 용사 등에서 나타나며, 단순히 수량적 의미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이상의 연구들을 통해 동양에서 서양에 이르기까지 지역에 따라 특정 숫자들은 사회적으로 수량적 의미 뿐만 아니라 관념적 의미까지 부여받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스어로 헵타드(Heptad)라 불리는 숫자 7은 모든 수들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이다. 특히 서양에서 7은 우주와 인간을 포함하는 대우주를 나타내는 수이며,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수라고 한다. 따라서 7은 가장 완전한 숫자로서 ‘전체성’ 또는 ‘완성’과 ‘완전’을 의미한다.
이는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다. 七의 본래 자형인 ‘十’의 四端은 東․西․南․北의 四方을 나타내고 두 획이 교차하는 중심의 점은 ‘中’이고 그 위가 上, 아래가 下를 나타낸다, 무의한 공간을 상징한다. 7은 北斗七星에도 사용되어 북두칠성에 행운이나 소망을 비는 형태로 나타나 칠성탱화, 칠성각, 칠층탑 등으로 발전하였다. 칠성과관련된 문화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음력 7월 7일이 있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율장에서 7은 실제적 기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비구・비구니가 지켜야 할 廣律에는 7일 간의 기준을 제시하는 측면이 있다. 樂을7일까지 소유하면서 복용할 수 있는 것, 3衣를 떠나서 7일까지 있을 수있다는 것, 안거기간 중 7일까지는 결계를 이탈해도 된다는 것 등이다.
이처럼 7의 의미는 극락에 왕생하기 위한 참회와 수행, 그리고 실제적기간의 기준성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숫자 4의 의미
초기불교에서 가장 두드러진 숫자는 4라고 할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먼저 4는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般泥洹經> 卷2나 <佛般泥洹經> 卷2에는 붓다의 출생, 출가, 성도, 열반이라는 네 가지 사건이 모두 4월 8일에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네 가지 사건은 모두 동일한 날짜라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종교적 상징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붓다는 ‘苦集滅道’를 네 가지 고귀한 진리인 四聖諦로 설파하기도 했으며, <숫파니파타>에서는 붓다가 스스로 “사성제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갖추었기에 나는 붓다로 불린다”고 말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교조인 붓다를 숫자 4의 관념으로 표현하며, 완성적인 만수(滿數)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불교의 상징적 수인 4와 그 배수 8이 들어간 84를 나이에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84세는 단순히 부처의 생애와 관련된 숫자 4, 8을 붙여놓은 것이 아니라고 보인다. 부처가 80세에 열반했고 그의 제자사리불, 목건련, 대가섭 등도 80세 전후로 살고 열반 했다 인물이나 사건의 완전성을 드러내기 위해 숫자 4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4는 불교적 우주관, 불자의 삶을 표현하고 완성적인 만수의 의미를 가진다. 불교에서 이 세계는 질료, 시간, 공간의 3가지 측면으로 구분된다. 질료적 측면에서는 4大(地・水・火・風), 시간적 측면에서는 外法4相(成・住・供・壞)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간적 측면에서 본다면, 세계의 하부는 밑에서부터 風・水・金輪순으로 되어 있고, 金輪위에 9山8海의 수평적 세계 있는데, 8해 중 마지막인 鹽海에 인간의 삶터인 4大州(東勝身・南部・西牛貨・北俱盧)가 있다는 것이다.
숫자 4를 불교의 수행자와 중생의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수행자는 4依支(糞掃衣・乞食・樹下座・陳棄藥)로 살고 4事供養(음식・의복・탕약・방사)을 받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4果(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를중득하여 4樂(常・樂・我・淨)을 선물로 받게 된다. 중생은 4生으로 태어나 4食(단(段),독(讀),사(思),식(識)을 통해 존재하다가 內法4相인 성주괴공(成住壞空을 거쳐 (生,死,中,本)를 유전하게 된다.
4聖諸와 8正道, 12연기설과 8만4천 법장과 같은 측면들도 모두 4배수의 상징성을 여실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 수자 3에 대한 의미
숫자 3은 4, 7에 비해 불교에서 그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숫자가 아니지만,인도 불교에서는 右繞3雜 이나 3排, 3請, 3說 등과 관련하여 주로 형식,의례적 가치에서 나타나거나 3受나 3科說 등의 교리적 측면에서 나타나왔다.
숫자 3도 음양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음양론에서 숫자 1은 陽을 뜻하고 숫자 2는 陰을 뜻한다. 그리고 양과 음 즉, 1과 2가 만나는 지점에서 3이 만들어진다. 양은 천이고 음은 땅이며 양과 음의 조화는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천․지․인 체계가 드러나며 이를 3才라고 한다. 만물의 본원인 하늘, 땅과 그 산물인 사람까지 의미하는 3才의 숫자 3은 완전성을 보여주며, 만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숫자 3이 활용된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교에서 숫자 3이 기간적 측면으로 사용되는 것은 불교 고유의관념이라기보다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3에 대한 다양한 관념이 불교에반영된 현상이 아닌가 한다.
‘3’은 음양(陰陽)을 뜻하는 1과 2의 대립(對立)에 하나를 더 보탬으로써 완성(完成), 안정(安定), 조화(造化), 변화(變化)를 상징한다.
또한 성(聖)스러움, 완전(完全)함, 최상(最上)임, 창조(創造) 등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의 여러 종교(宗敎), 신화(神話), 전설(傳說), 민담(民譚) 심지어는 속담(俗談)에 까지도 3이 자주 쓰이고 있다.
숫자 ‘3’은 생명의 탄생(誕生), 또는 생명의 시작(始作)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이 드러난 셈이다.
숫자 3이 갖는 핵심성(核心性)과 전체성(全體性), 삼(三)의 어의(語義)에서의 인간생명(人間生命)의 근원(根源) ․ 생식(生殖) ․ 생산(生産) ․ 신(神) ․ 신령(神靈)함, 그리고 숫자 ‘3’과 아침․ 개천(開天)은 서로 상통(相通)하는 의미(意味)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6)大乘佛敎와 함께 나타난 時空間 속에 多佛 信仰
정토신앙에서 다불신앙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이유를 살펴보고, 다불신앙을 설명하고 있는 대표적인 <불명경(佛名經)>에서 서방에 아미타 부처님과 여러 부처님들이 등장하는 것을 살펴본다.
정토 경전에서 다불이 발생 된 배경과 지역을 살펴보면
대승불교가 일어나게 된 불교계 내부 배경을 대략 3가지로 주장한다. 첫째 부파불교의 발전과정에서 등장하게된 불교 부흥운동, 둘째 불전문학의 등장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며, 셋째 불탑신앙의 전개와 더불어 성립했다는 주장이다.
<무량수경>의 번역자로서 당나라 현장 이전에 번역(舊譯)한 사람들의 출신지를 보면, 지루가참은 월지국(月支國)이고, 지겸은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원래는 월씨족(月氏族)이며, 강승개는 강거국(康居國), 백연은 구자국, 축법호는 돈황, 불타발타라는 북인도, 담마밀다(曇摩蜜多)는 계빈(?賓)으로 되어있으므로 거의 모두가 중앙아시아(서역)나 북인도 출신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무량수경>은 3세기에서 4세기에 걸쳐 북인도와 중앙아시아에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정토사상의 성립도 대체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정토세계 189~190p>
그 밖의 아축불의 동방묘희세계, 약사불의 동방정유리세계, 석가불의 서방무승정토 등은 특정 방위에 정토가 있다고 하는 설이다.『두사경』과 『수원십방왕생경』에서 설한 정토는 십방에 정토가 있다고 설한다. 이외에 미륵보살의 도솔천은 불의 정토와는 다르며 보살의 수행하는 세계라고 하지만, 이 도솔천에 태어나는 것을 원하는 신앙은 예부터 있어왔다. 이곳을 도솔정토라고도 부르며 서방미타정토의 신앙과 병행하여 널리 사회에 신봉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타방정토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 <불명경>에 나타난 서방의 부처님들과 각 부처님들에 대한 수명과 열반 또 서방에 계신 보살님들의 명호을 살펴 본다.
<불명경>12권 후위(後魏) 북인도(北印度)삼장 보리류지 한역에서 북위시대 보리류지가 번역한 경전으로 12권에 걸쳐 11.093분이나 되는 부처님의 명호를 거명하고 있다
* 서방에 계시는 부처님들 명호
서방엔 안락묘(安樂妙)란 세계 있어 그 국토 더러움 없이 청정하고 현재 보살 제자들에 둘러싸인 자재무량수불(自在無量壽佛) 계시니, 저 서방의 무량수불께 귀명하여라.
서방 무량수불(無量壽佛)ㆍ나무 사자불(師子佛)ㆍ나무 향적왕불(香積王佛)ㆍ나무향수불(香手佛)ㆍ나무 분신불(奮迅佛)ㆍ나무 허공장불(虛空藏佛)ㆍ나무 보당불(寶幢佛)ㆍ나무 청정안불(淸淨眼佛)ㆍ나무 요장엄불(樂莊嚴佛)ㆍ나무 보산불(寶山佛)ㆍ나무 광왕불(光王佛)ㆍ나무 월출광불(月出光佛), 서방의 이러한 한량없고 그지없는 여러 부처님들께 귀명해야 하리라.
현재 시방 세계에서 목숨을 버리지 않고 설법하시는 안락(安樂)세계 중의 우두머리이신 아미타불(阿彌陀佛)께 귀명합니다. 묘락(妙樂)세계 중의 우두머리이신 아촉(阿)여래께 귀명합니다. 가사당(袈裟幢)세계 중의 우두머리이신 쇄금강견(碎金剛堅)여래께 귀명합니다. 불퇴륜후(不退輪吼)세계 중의 우두머리이신 청정광파두마화신(淸淨光波頭摩花身)여래께 귀명합니다.
나무 무구겁무구(無垢劫無垢)세계의 무구광(無垢光)여래와 그 세계에서 처음 성불하여 출세하신 티끌과 모래와 같이 많은 부처님 · 나무 무구광(無垢廣)세계의 성취선겁승호(成就善劫勝護)여래와 그 세계에서 처음 성불하여 출세하신 티끌과 모래와 같이 많은 부처님 -중략- ㆍ나무 서방 아미타불(阿彌陀佛)ㆍ나무 아미당불(阿彌幢佛)ㆍ나무 아미타성불(阿彌陀聲佛)ㆍ나무 아미칭불(阿彌稱佛)ㆍ나무 아미타후불(阿彌陀吼佛)ㆍ나무 아미적불(阿彌積佛)ㆍ나무 아미타승상불(阿彌陀勝上佛)
다시 사리불아, 현재 서방 부처님께 너는 또 마음껏 경례해야 하리라.
나무 초광명화심조불(初光明花心照佛) · 나무 묘성수행후불(妙聲修行吼佛) · 나무 주승지칭불(住勝智稱佛) · 나무 보견불(普見佛) · 나무 작비작심화광불(作非作心花光佛) · 나무 법행연등불(法行然燈佛) · 나무 보승불(普勝佛) · 나무 지후칭왕불(智吼稱王佛) · 나무 범성환희후불(梵聲歡喜吼佛) · 나무 천안불(千眼佛) · 나무 해향염불(海香炎佛) · 나무 천월자재장불(千月自在藏佛) · 나무 법속낙행불(法速樂行佛) · 나무 신현원광불(身賢遠光佛) · 나무 사자광안불(師子廣眼佛) · 나무 십력광명승불(十力光明勝佛) · 나무 지래불(智來佛) · 나무 무변정진승면불(無邊精進勝面佛) · 나무 대승성취법불(大勝成就法佛) · 나무 불공견불(不空見佛) · 나무 불가진색불(不可盡色佛) · 나무 관법지불(觀法智佛) · 나무 무방왕불(無妨王佛) · 나무 무변덕불(無邊德佛) · 나무 지찰법불(智察法佛) · 나무 일체선근보리통불(一切善根菩提通佛) · 나무 무애정진선사유분신왕불(無礙精進善思惟奮迅王佛) · 나무 상지승선주공덕불(上智勝善住功德佛) · 나무 지향승불(智香勝佛) · 나무 지승견시기왕불(智勝見尸棄王佛) · 나무 묘공덕지불(妙功德智佛) · 나무 법청정래불(法淸淨來佛) · 나무 불우법화후왕불(不憂法花吼王佛) · 나무 승상공덕불(勝上功德佛) · 나무 개법문장불(開法門藏佛) · 나무 조법동왕불(照法同王佛) · 나무 역왕선주법불(力王善住法佛) · 나무 선택력득불(善擇力得佛) · 나무 무변문견불(無邊門見佛) · 나무 선화장엄불(善化莊嚴佛) · 나무 불사견불(不似見佛) · 나무 이진공덕왕불(離瞋功德王佛) · 나무 이진억승불(離塵億勝佛) · 나무 대력반야분신왕불(大力般若奮迅王佛) · 나무 법경상불(法鏡像佛) · 나무 견차리성취불(堅叉利成就佛) · 나무 일체지공덕승불(一切智功德勝佛) · 나무 불락출공덕불(不樂出功德佛) · 나무 정진과정진자재산불(精進過精進自在山佛) · 나무 일체세간자재교량승불(一切世間自在橋梁勝佛) · 나무 시현진덕불(示現盡德佛)[거란본에는 현(現) 뒤에 무(無)자가 더 있다.] · 나무 청정계공덕왕불(淸淨戒功德王佛) · 나무 화엄작장엄불(花嚴作莊嚴佛) · 나무 독왕불(獨王佛) · 나무 득대통원력불(得大通願力佛) · 나무 후성속정진불(吼聲速精進佛) · 나무 승신나라연지불(勝身那羅延智佛) · 나무 나라연불(那羅延佛) · 나무 보광아니라승불(寶光阿尼羅勝佛) · 나무 보해염불(寶海炎佛) · 나무 대해미류승왕불(大海彌留勝王佛) · 나무 초불탁천왕불(初不濁天王佛) · 나무 불주생계승공덕왕불(不住生戒勝功德王佛) · 나무 승혜불(勝慧佛) · 나무 허공요설무애칭불(虛空樂說無礙稱佛) · 나무 무비장칭불(無比藏稱佛) · 나무 천자재범증상불(天自在梵增上佛)[거란본에는 천(天)자가 없다.] · 나무 선행견왕불(善行見王佛) · 나무 종종행왕불(種種行王佛) · 나무 노사나승공덕불(盧舍那勝功德佛) · 나무 자재불(自在佛) · 나무 주화불(住華佛) · 나무 지선근성취성불(智善根成就性佛) · 나무 무장애지성취불(無障礙智成就佛) · 나무 선결법불(善決法佛) · 나무 법장엄관요설칭불(法莊嚴觀樂說稱佛)[거란본에는 설(說) 뒤에 법(法)자가 더 있다.] · 나무 삼보연등불(三寶然燈佛) · 나무 마하사유장불(摩訶思惟藏佛) · 나무 불가사의왕불(不可思議王佛) · 나무 자재억불(自在億佛) 나무 사자흉장불(師子胸藏佛) · 나무 지왕장엄불(智王莊嚴佛) · 나무 자재근불(自在根佛) · 나무 이성안불(離聲眼佛) · 나무 선향불(善香佛) · 나무 불염불(不染佛) · 나무 법신불(法身佛) · 나무 파두마불(波頭摩佛) · 나무 광계왕불(廣戒王佛) · 나무 심선행칭불(心善行稱佛) · 나무 법자재불(法自在佛) · 나무 여의통관장불(如意通觀藏佛) · 나무 연탐등왕불(然貪燈王佛) · 나무 세간의성취선법불(世間意成就善法佛)[거란본에는 선(善)이 개(蓋)로 되어 있다.] · 나무 복덕승전불(福德勝田佛) · 나무 선관불법승불(善觀佛法勝佛).
*서방에 계신 보살(菩薩)님들도 수 없이 많다.
사리불아, 너는 또 다음의 보살들에게 귀명하여야 하느니라.
나무 무량수(無量壽) 불국 안락세계의 관세음(觀世音)보살
나무 남방 99억백천만의 동명이신 부린타라(不隣陀羅)보살 -중략- 이러한 한량없고 그지없는 보살들께 귀명해야 하리라. · 이 부처님께도 첫 번에 모인 99억의 성문과 두 번째 모인 90억과 세 번째 모인 93억과 네 번째 모인 99억의 이러한 한량없고 그지없는 보살마하살들이 저 부처님들께 귀의하였느니라.
*시방에 부처님들
그때에 사리불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컨대 과거 일곱 부처님의 성명(姓名)과 그 수명의 길고 짧음을 연설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은 간절히 우러러 듣기를 원합니다.”사리불아, 과거 91겁에는 비바시여래(毘婆尸如來)께서 계셨고, 과거 30겁에는 시기(尸棄)여래와 비사부(毘舍浮)여래께서 계셨으며, 그 뒤로부터 한량없는 겁 동안에는 부처님 없이 지나오다가 이 현겁(賢劫)에 이르러 네 부처님께서 출세하셨으니, 바로 구류손불(拘留孫佛)과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과 가섭불(迦葉佛)과 나 석가모니불이니라.
그리고 비바시불의 수명은 80천 겁, 시기불의 수명은 60천 겁, 비사부불의 수명은 2천 겁이었으며, 구류손불의 수명은 14소겁(小劫), 구나함모니불의 수명은 30소겁, 가섭불의 수명은 20소겁이었고, 나는 현재 가장 적은 100년의 수명이니라.
"세존이시여, 과거에 얼마나 많은 부처님께서 계셨습니까?"
부처님께서 우바마나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항하사(恒河沙) 세계의 아래로는 물 밑에 이르고 위로는 하늘 꼭대기에 닿을 만큼 그 중간에 가득 찬 가는 티끌 같으니라. 비구야, 어떤 사람이 그 중간에 가득 찬 가는 티끌을 가지고서 항하사 같은 세계를 거치는 곳마다 한 세계에 티끌 하나씩을 떨어뜨려 그 가는 티끌을 다하게 한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가는 티끌을 떨어뜨리거나 가는 티끌을 떨어뜨리지 않거나 간에 그 가는 티끌의 수효가 얼마인가를 헤아려 알 수 있겠느냐?"
그리고 저 묘법신(妙法身)부처님과 그 여러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묘법에 귀명하고, 저 32상(相)과 80종호(種好)로 한량없고 그지없는 공덕을 갖추신 부처님께 귀명하고, 저 도량의 보리수 밑에서 갖가지 형상을 나타내는 부처님과 갖가지 묘탑(妙塔)에 오가고 앉고 눕는 부처님께 귀명하며, 또 법바퀴에 물러나지 않는 저 큰 보살들에게 귀명하고, 나아가서는 저 성문ㆍ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와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의 온갖 상모(狀貌)를 조복하면서 여래의 법바퀴를 믿어 여래의 법바퀴를 굴리는 그 헤아릴 수 없는 보살마하살들에게도 다 귀명하며,
저 부처님들의 열 가지 힘[十力]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所畏]과 네 가지 걸림 없는 지혜[四無礙智]와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에까지 귀명해야 하리니, 이 한량없고 그지없는 공덕으로 모든 중생에게 회시(迴施)한다면 그 소원에 따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부처님의 수명에 대한 이해
"세존이시여, 지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모든 부처님의 수명(壽命)은 길고 짧음이 다 동등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자세히 들어라. 내 너희들을 위해 말하리라. 비구야, 이 사바(娑婆)세계 현겁(賢劫)의 석가모니불 국토의 1겁이 안락(安樂)세계에선 하루 낮 하룻밤이 되고, 또 안락세계 아미타불 국토의 1겁은 가사당(袈裟幢)세계의 하루 낮 하룻밤이 되고, 또 가사당세계 쇄금강불(碎金剛佛) 국토의 1겁은 불퇴륜후(不退輪吼)세계 선쾌광명파두마부신여래(善快光明波頭摩敷身如來) 국토의 하루 낮 하룻밤이 되고, 불퇴륜후세계의 1겁은 무구(無垢)세계 법당(法幢)여래 국토의 하루 낮 하룻밤이 되고, 또 무구세계의 1겁은 선연등(善然燈)세계 사자(師子)여래 국토의 하루 낮 하룻밤이 되고, 또 선연등세계의 1겁은 선광명(善光明)세계 노사나장(盧舍那藏)여래 국토의 하루 낮 하룻밤이 되고, 또 선광명세계의 1겁은 난과(難過)세계 법광명파두마부신(法光明波頭摩敷身)여래 국토의 하루 낮 하룻밤이 되고, 또 난과세계의 1겁은 장엄혜(莊嚴慧)세계 일체통광(一切通光)여래 국토의 하루 낮 하룻밤이 되고, 또 장엄혜세계의 1겁은 경륜광(鏡輪光)세계 월지(月智)여래 국토의 하루 낮 하룻밤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수가 10아승기 백천만 세계에 가득 차서 최후로 파두마승(波頭摩勝)세계 현승(賢勝)여래 국토에 가서 하루 낮 하룻밤이 되나니, 비구야, 이러한 세계의 한량없고 그지없는 그 길고 짧음이 동등하지 않으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세계에 머무시는 수명도 그와 같으니라.-7권
* 현재 세에 출현하는 부처님들
합장하여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현재세엔 몇 부처님께서 계십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현재 내 몸을 보았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진실로 부처님의 몸을 보았습니다.”
“사리불아, 네가 이제 내 몸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이 시방의 한량없고 그지없어 말할 수 없는 세계에 나와 동명인 석가모니불을 보며, 이와 같이 또 동명의 연등불(然燈佛)과 동명의 비바시불(毘婆尸佛)과 동명의 시기불(尸棄佛)과 동명의 비사부불(毘舍浮佛)과 동명의 구류손불(拘留孫佛)과 동명의 구나함불(俱那含佛)과 동명의 가섭불(迦葉佛)을 보고 있노라.
사리불아, 요약하여 말하자면, 이 동명의 모든 부처님들을 내가 1겁 동안 말하거나 백천만억 나유타의 겁 동안 말하더라도 이루 다 말할 수 없겠거늘, 하물며 이명(異名)의 부처님들까지 어찌 다 말하겠느냐? 나 문수사리(文殊師利)로 하여금 이러한 모든 부처님들께 귀의하여 처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심하게 하였으니, 사리불아, 너도 마땅히 전일한 마음으로 이러한 부처님들께 귀명해야 하리라.
사리불아, 현재겁(現在劫)에 또 5백의 동명이신 지당불(智幢佛)과 62의동명이신 연등불(然燈佛)과 62의 동명이신 시기불(尸棄佛)과 1천의 동명이신 연화단다자재왕성불(然火單荼自在王聲佛)께서 계시고, 다시 동명이 아닌 2천의 부처님 중에는 지승불(智勝佛)ㆍ거연왕불(炬燈王佛)ㆍ법승불(法勝佛)ㆍ범성불(梵聲佛)께서 계시니, 너는 마땅히 이러한 부처님들께도 일심으로 귀명해야 하리라.
사리불아, 다시 이러한 부처님들께서 계시느니라.
* 미래세의 출현하는 부처님들의
우바마나(憂波摩那) 비구가 또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미래세엔 몇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내가 너를 위해 말하리라.
비구야, 대개 요약하여 말하건대 미래의 그 여러 부처님들은 한량없고 그지없어 이루 다 말할 수 없나니, 너는 전일한 마음으로 이러한 부처님들께 귀명해야 하느니라.”
* 부처님의 열반(涅槃)에 대한 이해
마하남(摩訶男) 비구가 거듭 부처님께 아뢰었다.
“과거에 몇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마하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내 너를 위해 말하리라.
비구야, 어떤 사람이 동방 항하사세계, 남방 항하사세계, 서방 항하사세계, 북방 항하사세계, 상하 사유(四維) 항하사세계의 저 모든 세계의 아래로는 물 밑에 닿고 위로는 하늘 꼭대기에 이르기까지의 그 중간에 가득 찬 가는 티끌이 있다면, 비구야, 너는 저 가는 티끌의 수효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겠느냐?” 비구는 대답하였다.“알 수 없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또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야, 동명(同名)이신 석가모니불로서 과거에 열반(涅槃)에 드신 부처님의 수효는 알 수 없느니라. 비구야, 나는 저 과거의 모든 부처님을 현전(現前)에서 보는 것처럼 알고 있으니, 그 부처님들의 어머니는 동명이신 마하마야(摩訶摩耶)이고, 아버지는 동명이신 수두단왕(輸頭檀王)이고, 성(城)은 동명인 가비라(迦毘羅)요, 그 부처님의 제1성문 제자는 동명인 사리불(舍利弗), 목건련(目犍連)이고, 시자 제자는 동명인 아난(阿難)이다. 동명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갖가지 이명(異名)의 어머니ㆍ아버지와 이명의 성(城)과 이명의 제자ㆍ시자이겠느냐?
그리고서 비구가 네 가지 중죄를 밤낮 49일 동안 참회하되, 범한 죄를 발로(發露)함에 있어서 청정한 여덟 비구를 대하여 7일마다 한 번씩 지심(至心)으로 그 옛날에 저지른 죄를 발로하여 정성껏 참회하고, 또 일심으로 시방 부처님들께 귀명하되, 자신의 힘과 분수에 따라 명호를 일컬어 예배하기를 49일 동안 계속한다면 그 모든 죄가 소멸되며, 마침내 그 사람이 청정하게 될 때엔 어떤 모습이 나타나 잠을 깨거나 꿈속에서라도 시방 부처님을 보고는 그 부처님으로부터 수기(授記)를 받고, 혹은 보살을 보고는 수기를 받아 함께 도량에 나아가서 벗이 되고, 혹은 이마를 어루만져 줌으로써 죄상(罪相)이 소멸됨을 보이고, 또는 자신이 직접 대회(大會) 중에 들어가 그 자리에 있게 됨을 보고, 혹은 자신이 대중 속에 처하여 설법하게 됨을 보고, 혹은 여러 스승과 청정한 계행 지니는 사문과 함께 도량에 나아가서 그 여러 부처님을 뵙게 되리니, 사리불아, 비구로서 참회할 때에 만약 이러한 모습을 본다면, 그 사람의 죄구(罪垢)는 다 소멸된 줄을 알아 두라. 그러나 지금 참회하지 않은 자는 죄가 되느니라.
이와 마찬가지로 비구니가 여덟 가지 중죄를 참회함에 있어서도 위에서 말한 비구의 법처럼 49일 동안 계속한다면 마땅히 청정하게 되며, 식차마나와 사미·사미니가 근본 중죄를 참회함에 있어서도 네 청정한 비구·비구니를 대하여 위의 법과 같이 21일 동안 계속한다면 마땅히 청정하게 되며, 또는 우바새·우바이가 그 중계(重戒) 범한 죄를 참회함에 있어서도 마땅히 지심으로 삼보(三寶)를 공경하는 한편 사문을 볼 때엔 공경히 예배하되, 만나기 어려운 생각을 내어 도량에 모시고서 갖가지로 공양하고 존중 공경해야 할 비구를 청하여 그가 저지른 모든 죄를 발로시켜 지심으로 참회하는 동시에 시방 부처님들께 마음껏 귀명하되, 명호를 일컬어 예배하기를 7일 동안 계속한다면 그도 반드시 청정하게 되리라.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라도 지심으로 참회하지 않은 자는 제외되느니라."
Ⅲ, 결론
지금까지 극락정토는 왜 서방에 있는지 그리고 서방의 극락정토가 방위와 거리와는 어떠한 의미와 연결성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시공간적인 타방불의 극락정토는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봤다.
아미타 부천님은 의례히 서방 십만억국토를 지나 그 곳에 지금도 계시면서 맞이 해 주시는 곳,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달할 정토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십만억 국토를 지난서 서방이 시간적 방위적으로 바라볼 곳인가. 아니면 ‘정토와 예토는 공간적으로 동일한 위치를 갖게 되며, 오직 주관적 심식心識의 차이일 뿐’이라는 용수의 말차럼 시공간을 초월한 이름 뿐이 서방이면 10만억 국토가 내 한 마음안에 있는 장소가 된다는 것을 알아봤다.
1. 부처님의 사라쌍수하 열반상에서 생사의 구분인 사후세계의 방향을 서방임을 암시하고 설정하고 있음.
2. 극락세계의 아미타 부처님은 무량광,무량수로 표기하는 것은 영원성의 시공간인 빛의 세계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쪽이다. 그래서 서쪽이다.
3. 아미타부처님은 당연히 10만억 국토를 지나 서방에 있다고 생각하는 관법 수행에 의한 신앙으로 접근 할 때는 서방이 맞다.
4. 타방불의 극락정토로 이해하는 것은 여래장 사상이나 유심 수행 방법을 보면 '지금'은 관법 수행을 통해 '늘 지금' 임을 암시한다. 그래서 내 마음안에 극락이 있다.
5. 이상의 상황으로 미뤄볼 때 아미타 부처님은 당연히 서방에 계시기도 하고 한 마음안에 있기도 하다.
서원의 힘에 착안하여 타력설(他力說)을 주장한 담란(曇鸞)이 <왕생론주(往生論註)>하권에서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이라 규정하고 제18원을 들어 "부처님의 원력에 의하기 때문에 십념(十念)의 염불로 곧바로 태어날 수 있으며,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미망의 세계인 삼계(三界) 윤회를 면하고, 윤회하지 않기 때문에 재빨리 깨달음을 얻는다." 하였다. 하지만 그 서원의 본질은 스스로의 수행에 있다는 것으로 볼 때는 그 서원하는 극락 장소나 빛의 상징인 서쪽 태양을 관하는 사마타의 까시나 수행의 방편을 써서 부처님이 내 마음 안에서 관하고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 할 수는 없다.
극락정토는 본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 세계이기 때문에 현세라든가 내세라는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세계지만, 정토경전에서 극락왕생은 내세에 실현된다고 한 것처럼 그곳에 도달하는 것은 깨달은 후에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에 극락정토에 '태어난다'는 표현을 쓴다.
따라서 '지극한 즐거움이 있는 곳'이란 뜻의 극락은 종교적이고 절대적인 깨달음의 즐거움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세계를 쉽게 파악하고 종교적·실천적 대상으로 접근하기 쉽게 하기 위해 현세적·상대적인 세속의 즐거움을 빌어 극락정토가 시공간적으로 서방에 실재하는 세계처럼 설해진 것으로 본다.
결론적으로 서방정토 극락세계는 참 진리를 깨달은 자의 한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본다.
<참고자료>
<경전>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āarinibbana Sutta, D16) >
<阿彌陀經>, <無量壽經>, <觀無量壽經>, <般舟三昧經>, <維摩經> <佛名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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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說佛名經>1권-12권三藏菩提流支在胡相國秦太上文宣公第譯이진영번역 012_1115_a_16L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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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가르침> 이철현저 도서출판 아름원 2008
<정토,이야기로 보다> 담엔북스, 목경찬 著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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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무량수경>한보광 역, (여래장, 2000)
<논문>
<『법화경』의 불국토는 관(觀)하는 것인가,건설(建設)하는 것인가>하영수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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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淨土 佛敎信仰의 構造와 本質에 대한 考察> 정희수 강남대학교『인문과학논집』 창간호 1996
<多佛思想의 현대적 수용과 실천방안 연구>변대용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2017
<중국 태양숭배사상에 나타난 태양 상징분석에 관한 연구> 오정 서울과학기술대학교 NID융합기술대학원 2015
<아미타불의 기원과 사회 · 역사적 배경> 「미주현대불교』 , 제24호, 뉴욕, 1992
<미타정토신앙의 교리적 배경에 대한 연구> 손병철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4.
<대승불교 성립에 관한 제학설> 마성 스님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팔리문헌연구소장
<도작의 안락집에 나타난 정토왕생론> 김정송 전남대석사 논문 2008
<빨리 『열반경』 에 나타난 佛陀觀연구>김유미 동국대학교 석사논문 2002
<불교 숫자의 상징성 고찰 `4`와 `7`을 중심으로>2009, 염중섭, 한국종교학회 종교연구 55집
<수의 표현과 의미> 채완. 한국어 의미학 수의 표현과 의미, 동덕여대 2001
<숫자 3을 이용한 한국의 시각적 표현 연구>박선미,이화여자대학교 디자인대학원 2003
<‘동양의십진법’그신비로움 불교의숫자, 서양의숫자> 이은정, 『과학과 기술』 2008년 5월
<‘7’과 ‘七爪龍’의 문화적 함의> 박헌영(세준)ㆍ동한국불교학 65, 2013, pp.125~147.
[부처님 마음 卍 불교의 향기] https://buddha-mind.tistory.com/81?category=503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