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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절문(徑截門)과 염불문(念佛門), 원돈문(圓頓門)...펌

통융 2023. 2. 5. 07:28

 4대 수행법이란 고려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선사가 지은 <염불요문(念佛要門)>을 바탕으로 조선 중기 이후 정립된 경절문(徑截門)과 염불문(念佛門), 원돈문(圓頓門)의 삼문수행(三門修行)에 포섭되는 것으로, 참선은 경절문에, 염불은 염불문에, 간경과 주력은 원돈문에 해당한다고 했다. 

, 자성을 깨닫는 실천 방법은 공안을 통한 경절문, 자성의 관조를 통한 원돈문(圓頓門), 염불을 통한 염불문이 있다. 

이러한 삼문(三門)이란 부처님의 진리에 들어가는 세 가지 방법을 말한다. 

그 중에서 경절문(徑截門)은 활구(活句)의 화두 참구를 통해, 마음길이 끊어지고 말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 없는 문이고, 원돈문(圓頓門)은 사구(死句)이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돈문보다는 경절문을 채택할 일이다. 

그러면 경절문, 염불문, 원돈문의 삼문수행을 좀 더 살펴보자. 

 

• 경절문(徑截門)에서 경절(徑截)’이란 바로 질러간다는 뜻으로, 소위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의 단도직입적인 길을 말한다. , 일체의 어로(語路), 의리(義理), 사량분별(思量分別)의 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마음의 본체에 계합함을 일컫는다.

※위에 나오는 의리(義理)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생활하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서로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道理), 그런 의미가 아니다. 불교에서는 의리의 의미가 다르다. 불교에서 의리(義理)라는 말은 의로(/意路)와 이로(理路) 두 단어가 합해진 말로서, 의로(/意路) , 의미의 추구, 이로(理路) 이치의 추구, 그런 뜻인데, 언어문자로 탐구하고 사량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교에서 의리란 불교이론, 불교교리, 타당한 이치, 언어문자로 탐구하는 것 등의 의미라고 하겠다. 그리고 어로(語路)는 말로 따지는 것(말의 길)을 말한다. 

 

일초직입(一超直入)이란 여러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번에 미혹의 세계를 뛰어넘어 깨달음에 들어감을 말한다. 그리고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란 한번 뛰어 부처님의 지위에 다다른다는 뜻으로 한번 훌쩍 뛰면 진리의 눈을 확 떠버린다는 말이다. 이는,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본래 부처임을 스스로 깨달아 절대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수행 시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간화선으로 곧바로 본래면목, 즉 진제(眞諦)를 터득해서,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지름길이 경절(徑截)이고, 그 수행법이 경절문이다. 

경절문이란 질러가는 문(가르침), 지름길로 통하는 문(가르침), 수행의 빠른 방법 등으로 해석하면 된다. 따라서 경절문에서는 참선수행을 통해 곧바로 자성청정을 밝혀 부처가 되는 가장 빠른 길(가르침)을 말하며, 기량이 월등한 상근기의 수행자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지눌(知訥) 선사는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을 지어서 일체의 언어와 문자, 이론과 사유를 초월해서 화두를 잡아 활구로 증입(證入)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최초로 경절의 수행법에 대한 이론을 정립했다. 

그리고 <간화결의론>에서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것이지만, 말의 자취가 남아 있고, 뜻의 길이 분명히 있어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치는 것은 못된다. 여기에는 오직 조사선(祖師禪)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말하고, 

대저학자 수참활구 막참사구(大抵學者 須參活句 莫參死句), 대저 배우는 이들은 활구를 참구할 것이요, 사구를 참구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했다. 

※활구(活句)와 사구(死句)---활구(活句)란 모든 분별과 생각이 끊어진 파격적이고 역설적인 글귀를 말한다. 어떻게 보면, 활구란 오히려 뜻이 통하지 않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론이나 이치로는 통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안목을 열어주는 화두(話頭)를 말한다. 

이에 비해 사구(死句)는 의미가 있고 뜻이 통하는 이치에 맞는 쉬운 말이다. 이와 같이 사구는 의미나 이론으로는 쉽게 해석되지만 사람의 안목을 열어 주기에 부족g나 언구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활구(活句)는 깨닫지 못하고서는 알 수 없으므로 참구해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니 살아 있는 말(언어)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안을 언설로 그 뜻을 밝혀주게 되면 아무리 격외구(格外句-말 밖의 도리)라 할지라도 그것은 죽은 말인 사구(死句)가 돼버린다.

 

<간화결의론>은 간화선의 우수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저술한 책인데, 여기에서 지눌 선사는 화두를 드는 데에 있어서의 참의(參意)와 참구(參句)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다. 

참구는 경절문으로 활구(活句)이니, 마음길이 끊어지고 말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참의는 원돈문의 사구(死句)이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경절문 활구와 원돈문 사구는 구별이 된다. 원돈문 사구는 우리가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 그거.’ ‘~ 그렇지. 그럴 거야.’ ‘, 그럴 것 같아.’ 이러는 게 바로 원돈문 사구이고, 죽은 구절이라는 것이다. 

활구는 마음길이 끊어져 심로절(心路絶)이라, 말길도 끊어지고, 어떻게 모색하려야 모색할 수가 없는, 그 쇠뭉치 같은, 쇠로 된 철벽같은, 그런 화두, 그것이 바로 경절문 활구이다. 

※심로절(心路絶)---사량분별로 이리저리 따지고 헤아리는, 마음[]으로 모색할 길[]이 끊어졌다[]는 말이다. 사량분별로는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이 수행의 최종적인 단계로서 송대(宋代) 임제종(臨濟宗) 승려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의 간화선(看話禪)에 영향을 받았다. 이와 같이 지눌 선사가 궁극적으로 표방한 것은 간화선이었다.

그리하여 말을 여의고 지해(知解:알음알이)를 잊는 경절문의 방편을 인증해 참선하는 자만이 해탈할 수 있다.”는 경절문의 이치를 천명했다. 또한 경절문을 곧바로 체득할 수 있는 방편이 간화선이라는 것이다. , 화두를 통해서 곧바로 본래면목을 깨닫게 하는 방편을 쓴 것이다. 그리하여 지눌 선사 이후 우리나라의 선종에서는 간화선을 방편으로 한 경절문의 공부가 주류를 이루게 됐고, 오히려 불교의 교학을 경시하는 풍조마저 일어나게 됐다.

 

그리고 조선 중기의 고승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休靜, 1520~1604) <선가귀감>에서 경절이란, 큰 코끼리가 강을 건널 때 물결을 곧바로 가로 질러가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간화선에 입각한 경절문을 크게 중시했다. 

서산대사는 하근기 중생들이 많은 시대에는 보고, 듣고, 믿고, 아는 것(見聞信解)만을 귀하게 여기고, 이치와 뜻과 마음과 말의 길이 끊어진 경절문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올바른 정맥을 택해서 수행할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그리하여 서산대사는 또 말했다. “이제 말세에 이르러 낮은 근기의 사람은 많으나 이들은 교외별전의 근기가 아니므로 다만 원돈문의 이치의 길(理路), 마음의 길(心路), 말의 길(語路)로써 보고, 듣고, 믿고, 아는 것(見聞信解)을 귀하게 여길 뿐으로, 이치와 뜻과 마음과 말의 길이 끊어져 재미가 없고 만지지 못하는 곳에서 칠통(漆桶)을 두드려 부수는 경절문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 

※칠통배(漆桶輩)---좌선을 하다가 칠통에 빠진 것은 혼침이요, 참선에서 혼침에 빠진 무리를 칠통배라 한다. 

 

서산대사의 제자인 언기(彦機, 1581~1644) 선사도 <심검설(尋劍說)>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경절문ㆍ원돈문ㆍ염불문으로 나눈 뒤 경절문을 최상의 법문으로 취급했다. 그리하여 현재 한국불교의 선 수행에서도 이 경절문 법문이 중요시되고 있다. 

경절문이라는 것은 빙~ 돌아가는 게 아니라 바로 지름길로 치고 들어가는 그런 문이다. 그래서 경절문은 활구다. 활구라는 것은 살아있는 화두고, 사구는 죽은 화두이다. 

말 그대로 하자면, 과연 무엇이 살아있는 화두고, 무엇이 죽은 화두일까? 

화두에 무슨 살아있는 글귀가 따로 있고, 죽은 글귀가 따로 있겠나, 경절문 활구라는 것이 뭐 따로 있고, 원돈문 사구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도 부처님의 법문을 똑같이 들어도 이 자리에서 즉시 아라한과를 성취를 못한다. 왜 그럴까? 왜 똑같은 법문인데,

네가 어떤 것을 볼 때, 네 마음을 보고 있는 그 자체에 집중하고 그것을 분명히 인식해라. 네가 어떤 소리를 들을 때 마음을 듣는 그 자체에 집중하고 분명히 그것을 인식해라. 그러면서도 거기에 어떤 분별을 일으키지 말고 애착하거나 싫어하지도 말라.”

이 말을 듣자마자 즉시 아라한과를 성취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똑같은 법문을 보고 듣는데, 왜 즉시 아라한과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 활구라든가 사구는 구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화두를 받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간절함에 달려있다. 따라서 수행자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생사의 경계에서 홀로 살아남은, 이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라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라는 그런 분발심, 간절함, 이런 게 먼저 전제돼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선지식을 만나야 한다. 스승에 대한 확신, 믿음, 이게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 활구라는 것은 결론적으로 진정한 선지식이 내린 화두가 활구이다. 

견성도인(見性道人)이 주는 화두가 활구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준 것이 사구다. 활구와 사구는 거기서 결정적으로 판가름이 나는 것이다. 

, 전제 조건은 이 화두를 받는 사람의 마음가짐, 그리고 화두를 주는 사람에 대한 신념, 확신, 이게 중요한 것이고, 결정적인 것은 화두를 내리는 분이, 그분이 과연 정말 견성도인인가 아닌가, 거기서 활구와 사구가 구분된다는 말이다. 

만일 뛰어난 근기와 큰 지혜라면 <아함경>을 듣고도 곧 정각을 이룰 것이요, 작은 근기와 얕은 지혜라면 <화엄경>을 듣고도 하늘 끝으로 달아날 것이다. 

 

• 염불문(念佛門)은 아미타여래를 전념(專念)해 정토[극락]에 왕생하는 수행으로서, 염불을 통해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을 가르친 법문을 말한다. “여래께서 뛰어난 방편으로 신심(信心)을 거두어 보호하시니, 소위 염불인연에 전념해 서원을 따라 타방불토에 왕생해서, 항상 부처님을 뵙고 영원히 악도를 여읜다.’ 함이다.” 

그런데 염불에는 방편염불(方便念佛)과 실상염불(實相念佛)이 있다. 

― 방편염불(方便念佛)이란 부처님을 우리 마음 밖에 두고 염불을 하면 방편염불에 그치고 만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부처님을 저 밖에다 두고, 부처님은 저 멀리 극락세계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부르고 외우면 복을 주고 도움도 준다는 식인데, 이것은 방편염불이다. 이런 것은 참선이 못 된다. 오로지 내 마음이 바로 부처요, 우주에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부처를 내 마음에 담고 염불을 해야 진정한 염불선(念佛禪)이 된다. 

자기 몸 밖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따로 세워놓고, 또 우주 서쪽 어디에 극락정토(極樂淨土)가 따로 있다고 믿고, 거기 왕생하겠다고 해서 염불하는 것은 방편염불이란 말이다. 말하자면 정토신앙을 개념적으로 믿고 자기와 별개로 존재하는 무엇을 희구(希求)하는 식이다. 

 

― 실상염불(實相念佛)이란 불()의 법신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함과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리()를 관조(觀照)함을 말한다. , 실상염불은 부처님 진리 자체를 상상하는 것이다. 부처님 진리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실상염불은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이 우주는 부처님 생명이다. 그래서 <관무량수경>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다.”라고 했다. 모든 부처는 우주를 몸으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부처님 진리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주 자체를 부처님 진리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상을 떠나서, 이름도 떠나서, 부처님 진리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이른바 우주에 두루 해 있는 부처님 참다운 생명의 실상,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하는 염불이다. 따라서 실상염불이 되면 그때는 바로 염불참선(念佛參禪)이 된다. 실상염불은 곧 염불선(念佛禪)을 말한다. 이와 같이 실상염불은 부처님의 법신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고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중도실상의 원리를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염불이란 지금의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입으로 염불한다는 것과 그 사람이 염불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염불이란 입으로 떠드는 게 아니다. 입으로 표현하는 것은 내 몸에 박힌 습()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자신의 생명전체를 오로지 부처로만 꽉 채우고 사는 사람이 염불행자(念佛行者)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마음이 오로지 부처일 때 염불한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염불하고 있는 당사자가 따로 있거나 염불의 대상인 부처를 내 몸 밖에서 구하려하지 않는다. 유불여불(唯佛與佛)이라, 다만 부처가 부처를 염()하는 것이지, 중생이 부처를 염하는 게 아니다. 본래부터 부처인 내가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염불하는 자와 염불 듣는 자에게 동시에 열리는 염불문(念佛門)은 어느 곳 어느 때나 만날 수 있다. 

 

• 신령한 심성을 강조하는 원돈문(圓頓門)은 교문(敎門)에 있어서 가장 심오하고 구경의 가르침인 원교와 돈교를 말한다. 원돈(圓頓)이란, 원돈교의 준말로 화엄의 도리를 뜻한다. 그리고 원()이 곧 돈()이라는 <화엄경> 교리에 의거, 해설한 성불론이다. , 원돈문은 화엄을 중심으로 한 교학문이다. 

원돈문은 부처님께서 평생 설법한 가르침 중에서 가장 수승한 구경의 법문, 원만하고 완전한 교법을 이른다. , 대승불교의 최종진리를 가리키는 말인데, 부처님이 45년간 설법한 교학을 수행함을 말하며, 원돈문에서는 원교(圓敎)와 돈교(頓敎)의 가르침을 전하는 화엄교법(華嚴敎法)의 바탕 위에 해오(解悟) 등 건혜(乾慧-알음알이)로부터 십신(十信)ㆍ십주(十住)ㆍ십행(十行)ㆍ십회향(十回向) 등의 점차적 수행을 통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자성(自性)을 깨닫는 실천방법으로는 경절문(徑截門)과 원돈문(圓頓門)과 염불문(念佛門)이 있는데, 경절문은 공안(公案)을 통해서, 원돈문은 자성의 관조(觀照)를 통해서, 그리고 염불문은 염불을 통해서 공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기(彦機) 선사는 이 셋은 비록 방법의 차이는 있으나 자성을 온전히 밝히려는 목적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으며, 그 어느 문을 통해 자성을 밝히더라도 결과적인 경지는 차별이 없다고 봤다. 

그러나 교종의 돈교(頓敎)와 원교(圓敎)보다 선종의 가르침인 경절문이 더 위에 위치한다고 선종에서는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 돈교의 가르침과 선종의 가르침이 무엇이 다른가를 지눌은 밝히고 있다. 

지눌은 돈교의 가르침에 의지해 깨달음을 얻는다 해도 모든 덕을 갖추기 위해서는 다시 수행을 해야 하는데 반해, 선종의 경절문은 활구에 의지해 홀연히 한 마음의 법계를 증득하면 모든 덕을 갖추게 되는 것이 다르다고 했다. 따라서 원돈문보다는 경절문을 채택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간화선이 위기라고 진단하는 스님이 있다. 문경 한산사(閑山寺) 용성선원 선원장 월암(月庵) 스님은 최근 저술한 <간화정로(看話正路)>에서 한국 선불교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그 위기의 구체적 내용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 이론과 실천의 양극화 

•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승풍 

• 동중수행(動中修行)의 약화 

• 승가의 허약한 체질과 생산성의 약화 

• 수행과 인격의 차이 등 스님은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이러한 진단에 대해 스님은, “간화선을 진작하는데 조그마한 디딤돌로 삼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책은 간화선풍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지만, ‘간화선 개론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내용이 풍부하다. 책은 간화선 성립의 역사와 사상 그리고 수행을 포괄적으로 담아냈다.

또한 간화선이 성립된 직접적인 사상배경과 그 연원도 살폈다. , 문자선(文字禪), 무사선(無事禪), 묵조선(黙照禪)의 병폐와 이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간화선 성립을 선사상사를 통해 고찰했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