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진리는 연기법이지만
불교의 대의는 본성사를 다하는 것이다.
본성사란 연기작용이며 중도를 말한다.
연기작용은 나타나 있는 그대로 일 뿐!이다.
중도는 참일이며 꼴값을 떠는 것이다.
본성사의 실제를 보면
나타나 있는 그대로 늘 지금을 100% 로 잘 사는 것으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것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것
있다거나 없다는 것도 아닌 것
연기의 진리가 제행무상을 알아 무아이며,
법계는 인드라의 그물로 되어 있어 우리(하나)가 되나니
모든 존재가 또 다른 나임에 자비와 사랑이 함께 한다.
즉 우주 속에서 연기작용하는 것은 모든 것을 창조이기에
불교가 아닌 것이 없다.
불교만 불교라 하면 참 불교가 아니듯
불교는 법당에만 있고 부처는 불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당에 교회에 천국과 지옥에 예수님 알아의 하나님 모두가 불교이고 부처이다.
그래서 늘 계(戒=참일)을 지키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을 한부로 대하거나 죽이지 말고
남의 것을 훔치지 말며
삿된 음욕을 내지는 않는지 염려하고
거짓말과 악담과 남을 흉보지 말며
미혹함에 물들어 화내고 어리석음에서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참 불교의 목적인 '문열변 밝은 세상'이라 한다.
그래서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출요경> 과거칠불(過去七佛)의 공통된 가르침. 칠불통게(七佛通偈)라 한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다.
운문선사가 "보름 이전에 대해서는 너희에게 묻지 않겠다.
하지만 보름 이후에 대해서 한 마디 일러 보아라.”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스승의 질문에 선 듯 나서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스님은 스스로 답했습니다.
“날마다 좋은날(日日是好日)이니라.”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이다.
조주 선사가 스승인 남전보원(南泉普願) 선사에게 "도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니,
남전이 "평상심이 도다."라고 했다.
"평상심이 도라고 말씀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그 도를 붙잡을 수 있습니까?"
"잡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 잡을 수 없다."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도'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도는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도 없다. 생각으로 아는 것이라 하면 그건 망상이 된다.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하면 자각이 없는 것이다. 안다든가 알지 못한다든가 하는 분별을 없애면 바로 거기서 도가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맑게 개인 하늘같아서 분별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 진리는 체, 상, 용의 3문으로 설명한다.
참 진리를 체상용의 3문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면
체는 연기작용의 실체인 공함을 진공묘유라 하며
상은 연기작용으로 나타난 법계의 원융함을 제법실상
용은 체와 상이 나투어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 중도실용이다.
* 진리의 실제는 앎, 꼴, 씀으로 설명한다.
연기작용의 이치를 아는 것을 앎이라 하고
연기작용하여 나타난 현상, 실상은 꼴이라하며
앎과 꼴을 바로 깨달아 쓰는 것을 중도라 하며 씀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