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빈손의 무소유다 이것이 공사리다
어떻게 우리의 몸과 마음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됩니까?
어떻게 해야 자유롭게 되느냐??
혹은 어떻게 깨달아야합니까?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
중요한 것은 설명으로 이해하고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수행이 되어야 한다.
실천은 내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아는 것은 지식이고 실천은 수행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을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것인가를 확실히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이렇게 몸과 마음으로 직접 체득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가는 진리가
이것이 반야의 지혜이다.
이렇게 사는 삶이 공사리라 한다.
무소유의 삶이라고도 한다.
왜 부처님 사리를 귀하게 여길까?
부처님의 진실한 뼈라고 유골이라고
참 뜻은 위대한 부처님도 결국에는
공수래 공수거로 돌아간다는 것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세상은 모두가 사리아닌 것이 없다.
인연되어 나타난 것은 모두가 연기사리다.
빈 손을 무소유로 설명할 수도 있다.
물론 무소유는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소유한다는 마음을 무소유하는 것이다.
소유와 무소유가 마음의 분별이듯
가난과 부자도 마음의 분별이다.
빈손이라고 해서 늘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다.
정당하게 재산을 모으고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내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소유한 것이 아니다.
거지가 늘 구걸하는 마음을 낸다면 그것이 소유지만
빌게이츠가 많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좋은 무소유의 예이다.
빈손은 언제든지 집착에서 벗어나고 무관심 할 수 있기 떄문이다.
행하되 행함이 없이 하는 이치다.
왜 그런가하면
빈손은 내것이 없다는 것이고
빈손은 늘 마음을 하심하는 것이고
빈손은 움켜쥐는 욕심이 없기 때문에 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빈손은 무엇을 잡아 취하기도 하지만 버리기도 한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부처님도 직접적을 빈손의 법문을 하신 것이 있다.
시무여원인의 수인으로 가장 많이 하신 법문이다.
오른 손바닥을 펴서 가슴까지 올려 펼쳐 앞을 향하게 보이고
왼손은 허리 옆에서 위로 펴서 하늘을 향하게 한다.
나는 너희들에게 무기를 들지도 않고
그 어떤것도 다 내려 놓았다.
힘들고 괴로움에 지친 자들이여 나에게 오라
너희를 평안하게 하여 주겠다는 법문이다.
예수님도 양팔을 펼쳐 이런 엑션을 취한 것도 있다.
이 수인을 보이신 뜻은 무엇인가?
선문답의 질문이다.
설명하지 말고 직접 알아차려 보라.
이 답을 알아차리면 부처님의 참 뜻은 물론
연기작용의참 진리를 깨우친 것이다.
재주를 부리는 손오공에게
부처님이 손 바닦 안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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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가 죽을 때가 되어 제자들이 스승님에게
깨달은 진리를 한 소식 해 줄 것을 부탁하자.
빈 손을 펼쳐 보여 주었다.
이것 말고 할 말이 없습니까? 하니
입을 벌리고 제자에게 입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라고 했다.
입안에는 말이 없고 허공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