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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는

통융 2022. 2. 25. 08:53

화두는 관념을 부수는 것이다.

관념에서 직관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화두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

연기작용의 행동주의다.

모든 진리는 지금 여기서 나타난 그대로 작용하는데 있다.

행하되 행함이 없이 행한다.

화두는 공적영지하며 성성적적한 깨어 있음이다.

직지인심으로 견성성불이다.

불입문자로 돈오돈수의 작용에 있다.

지관의 수행법이며 관심일법이(觀心一法) 총섭제행( 總攝諸行)이라고 달마스님이 말이다.

 

* 조주의 '無'자 화두, 덕산의 방, 임제의 할! 모두를

있는 그대로 듣는 그대로 나타난 작용을 알아차리는 것이 연기작용의 空性을 증득하여 깨닫는 것이다.

모든 화두를 관념인 생각 알음알이에서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 알음아리는 유루의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내가 空我로 寂寂惺惺하여야 한다.

無는 없다는 생각에서 있는 그대로 無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덕산스님이 방망이로 한 대 때리는 것도, 대우스님이 옆구리를 쥐어 박듯이 있는 그대로 하라.

임제의 할이 귀를 먹게하고 모든 분별상이 부숴버리는 천둥같이, 듣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된다.

 

* 법이 뭐냐고 할 때, 허공에 원을 하나 그린다.

법이 왜 허공에 원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관념이다.

법이 허공에 원인 것은 왜인가? 생각으로 분별한다.

생각하지 않는 무 분별로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면 본데로 그대로 나타내 보자. 이것이 실제이다.

허공에 원을 그려보라. 무엇이 그대를 깨닫게 하는가?

보면 본데로 들으면 들은 데로 .....

 

* 법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운문스님의 건시궐인 똥막대기, 조주스님의 뜰앞에 잣나무, 산은 산이라는 그 모든 실제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 들으면 들리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는 것은 진리의 작용으로 보이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모든 연기작용으로 나타난 것은 허상이다. 거짓된 그림자와 같다.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처럼 그대로 비치지만 거울에 비치 모습은 진짜 내가 아닌 허상이다.

이와 같이 실상은 본래 공한데 실체는 찰나 生滅하여 존재치 않는다. 진공의 묘유한 것이다.  

모든 존재의 각각은 유일한 작용이 불성의 진실이며 그러한 모든 진실은 하나로 연결된 부처이다.

 

병 속에 거위도 병과 거위는 관념이다.

어떻게 깨지 않고 거위를 밖으로 나오게 할 수 있을까도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을 내려 놓으면 오리는 살아 나온다.

실제 있는 그대로 꽥꽥 거리며 엉덩이를 뒤뚱 거리며 걷는 거위가 있다.

그 거위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나면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동봉스님이 호랑이처럼 으르렁 거리며 덤벼드는 시늉을 하니 그 때 스님이 무서워하는 시늉을 했다.

그랬더니 스님이 웃으며 그런도리로 어찌 대응하겠는가 했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더러는 으르렁 거린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직 아상이 남아 있다. 불성은 대자대비의 무아이다.

생사를 초월한 것이 무아이며 부처다. 그리고 연기작용은 모두가 나와 같은 부처이고 한 몸이다.

뭘 망설이겠는가? 바라밀행이 부처의 삶인데 <본생경>에서 부처님의 전생을 살펴보라............

남전의 참묘를 기억해 보라.

남전스님이 고양이 목을 잡고 칼로 복을 베어버리기 전에 어떤 한마디 일러라 할 때  어떤 한 소식을  해야  고양이를 살릴 수 있을까?

고양이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중도실용의 깨달음으로 살아가는 보살 이어야만 이 화두를 타파할 수 있다.  

연기작용의 실용을 알아차리고 모든 언행의 삶이 자애로 행하되 행함이 없이 행할 줄 알아야 이 공안을 알아차린다.

이류중생이 너와 내가 둘이 없는 대자대비다.

이러한 화두는 진리(법)의 空과 實相(假)을 깨닫고 中道적 삶이 되어야 한다.

즉 空假中이 원융함을 실제 깨달아야만 타파할 수 있다.

 

* 하되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중도진리이다.

부처님이 사슴동산에서 최초로 법륜을 굴린 중도정득각이 연기작용이다.

최로로 화두를 제시한 것인 초전법륜인이며 중도의 실제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 보여주는 법문이다.

중도는 모든 연기작용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법문이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면 화두 참구가 되지만 그 이치를 단밖에 깨닫는다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화두가 견성이고 불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