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가 반야(般若)의 공(空)이다.
메타버스(metaverse)는 '메타'(meta)의 가상, 초월적인 의미와 우주인 '유니버스'(universe)를 합성한 '가상 우주' 혹은 가상 현실로 쓰여지는 신조어이다.
닐 스티븐슨의 소설 '스노 크래시(1992년)'에서 가장 먼저 쓰였다. 이는 3차원에서 실제 생활과 법적으로 인정되는 활동인 직업, 금융, 학습 등이 연결된 가상 세계를 뜻한다. 가상현실, 증강현실의 상위 개념으로서, 현실을 디지털 기반의 가상 세계로 확장시켜 가상의 공간에서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온라인 시스템이다.
메타버스는 가상현실(假想現實)이지만 그 실체(實體)는 실재(實在)한다.
꿈은 잠에서 무의식의 상태에서 일어난 실재(實在)라면 가상현실은 의식(意識)이 있는 상태에서의 실재이다.
불교의 진리인 연기(緣起)의 작용(作用)인 실체인 공(空)과 진공묘유(眞空妙有)의 현상으로 나타난 가상(假想)의 실재가 메타버스다.
이것을 교학적인 이론으로는 심의식(心意識)이라 하며 유식(唯識)사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물론 근대 심리학자들인 프로이드나 융에서도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으로도 이해 할 수 있다.
불교 초기 수행의 단계인 색계 4단계 무색계 4단게 중에서 무색계4선정처에는 공무변,식무변, 무소유처,비상비비상처 중에서 공무변처에 도달하면 가상현실인 실체를 체험하고, 식무변처에 도달하면 진공묘유의 가상의 실재를 체험하게 된다.
공무변처는 색계4선정(제1초선정,제2,제3,제4선정)을 뛰어넘어 이미 현상의 존재가 시공간을 허물고 넘나드는 공함을 이해한다.
공한 가운데 나타난 가상의 유식이 묘유함을 식무변처에서 체험한다.
내 의식이 벽을 둟고 밖의 풍경을 훤히 볼 수 있는 상태이다.
참선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일 수 있다. 공의 묘한 이치를 꿰뚫어 알아차리는 것인데
손을 한 번 들어 올려도 조주의 '無'자 화두를 '無'로 바로 알아차릴 때 ,임제의 할! 덕산의 방망이가 그 진리가 가상현실의 실체를 알아차리는 것이라면
조주의 뜰앞에 잣나무요, 운문스님의 똥막대기를 알차릴 때 가상현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화엄4법계에서는 이무애(理無碍)·사무애(事無碍)·이사무애(理事無碍)·사사무애(事事無碍) 중에 이무애는 공의 실체를 알아차리는 것이라면 사무애는 가상의 현실을 알차라리고 사사무애는 이사무애를 가상으로 나타난 가상현실이다. 눈 없는 돌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말 없는 아이가 울음을 우는 것(有眼石人 齊下淚 , 無言童子 唵嗟虛)을 알아차리고, 동쪽에 바람이 부는데 서쪽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이치를 단밖에 깨닫는다면 이는 공성의 본체와 실상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공과 식의 무변처, 이와 사,사사무애의 단계는 완전한 깨달음이 아닌 과정이다.
사과 나무에 꽃이 피고 사과가 열렸지만 아직 따서 먹는 단계는 아니다.
사과의 본성은 먹히면서 씨를 번식하는 것이다. 사람이, 짐승이, 벌레가 먹든 먹힘으로 자신의 본성을 다하는 것이다.
연기작용의 나타난 결과이며 쓰임인 중도의 진리이다.
연기의 작용을 이론적으로 분석한 용수의 중론에서 연기작용의 실제(實際)을 공가중(空假中)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공은 가상현실의 실체를 알아차리는 것이고 가는 가상현실의 실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중은 중도실용으로 공과 가를 그대로 쓰는 것이다.
공과 가는 현상이고 공가중은 나타난 현실이다.
진리를 체상용(體相用)으로 구분한다면 중도 이전 까지는 그 체와 상으로 나투는 자체와 현상 일 뿐 쓰임의 중도가 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가상의 현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연기작용의 이치를 수행(修行)중심의 행동원리로 체상용(體相用)으로 구분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한 내용은 이미 소승의 여러 수행방법에서 밝히고 있다. >
유식(唯識)의 논리로 살펴보자.
유식은 마음을 심의식으로 나누고 대표적인 것이 8가지의 의식을 구분하고 있다.
물론 9식인 진여 문인 아타나식까지 설명한다.<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속제[俗諦, 심생멸문(心生滅門)]와 진제[眞諦, 심진여문(心眞如門)]를 구분하고, 일심이문(一心二門)임을 밝히고 있다.
8번째 의식이 함장되어 있다는 아뢰야식은 무의식으로 잠재의식이다. 꿈의 상태라 할 수있다.
지금의 가상현실이 8식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전5식은 몸과 생각이 감각적인 의식이라면, 6식은 교만 의심 등 사량분별로 느끼며 분별하기 시작하며, 7식은 말라식으로 나라는 아만, 아해, 아견 등의 존재의식으로 분별하여 나누는 것이다. 유식사상은 업으로 윤회사상을 바탕하고 있으나 불교는 업을 소멸하는 열반의 종교이다.
윤회를 끊는 열반사상으로 모든 수행을 통해 점차적으로 번뇌를 끊는 아라한과 보살, 모든 번뇌를 단번에 끊어 멸진정의 열반에 들며 너와 내가 동시에 성불하는 돈오의 사상으로 그게 나눌 수 있다.
여래장, 화엄, 천태사상 등은 모두 유식불교의 이론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여래장 사상과 불성사상에 기반을 둔 선불교의 돈오사상은 견성성불 직지인심으로 즉심시불 하게 된다.
돈오의 견성성불의 선문답인 화두 혹은 공안을 선불교의 조사들이나 선사들이 했던 법문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깨달음을 말 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실지실견의 선문답은 사실 붓다가 최초로 초전법륜인을 통해 설법하고 있다.
붓다의 화두(話頭)인 초전법륜인(初轉法輪印)으로 수인(手印)이라 한다.
말 없는 손 법문이다.
붓다가 깨닫고 녹야원에서 5명의 수행자에게 최초로 법륜을 굴린 것이 '중도정등각'이다라고 말씀으로 선포한다.
그럴 때 수행자들이 질문을 한다.
중도를 깨달았다고라 그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그 때 붓다가 말없이 '초전법륜인'의 수인을 취한다.
중도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행동으로 연기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나타난 것이라고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그러한 근기가 되지 않던 수행자들은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자 .
붓다가 중도는 연기작용으로 일어난 진리인데 4가지 성스러운 진리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성취하기 이해서는 바른 알아차림이 8가지가 있다.고 설명을 하니
이미 수행을 하고 있던 교진녀를 비롯한 4명의 수행자들은 그 설명은 듣고 모두 깨달아 아라한이 된다.
이렇게 시작된 명상 불교가 수행에서 계율로 교학으로 신앙으로 거듭되게 변하면서 다시 선불교의 교외별전에 언어도단으로 직지인심의 견성성불로 언하대오의 행동중심의 명상수행으로 이어오고 있다.
말이 다른 곳으로 흘렀는데 불교의 교학 위주의 이론불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잇는 다시 유식으로 돌아와서
이러한 유식에 집착하여 끊어 내지 못할 때 가상현실이 나타나며 그 것에 안주하여 괴로움을 겪는다고 한다.
왜냐면 가상현실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가상의 세계에서 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더러는 굳이 가상의 세계에 머물기를 바라는 인셉션, 메트릭스 아바타 같은 영화나 다양한 생각들이 나타나고 있다.
유식은 중관의 공사상을 비판하며서 등장하지만 뒤에는 유식과 공을 함께 연관된 연기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도교의 장자나 불교의 유식사상은 아뢰야식 속에서 인식하는 메타버스다.
장자의 만물제동(萬物齊同)을 설명한 호점몽(胡蝶之夢)처럼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이다.
우리의 삶 모두가 가상현실임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가 사는 삶이라는 연극무대무 위에서 한바탕 엑스트라로 살아가는 것이다.
주인공으로 한바탕 멋지게 세상을 살다 가야 하는데 말이다.
그것은 각자의 취향에 맞긴다.
삶은 각자의 연극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몸과 마음이 동시에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의식은 몸을 기반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원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다르게 생각 할 수 있다. 영혼은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神聖이 존재하 듯 창조와 피조의 상태에서는 메타버스가 가능하다.
하지만 일원론의 불교적 입장에서는 온 우주가 동시에 내가 움직이고 있는 현실이고 내가 창조주이기 때문에
몸 따로 마음 따로일 수 없다.
어디까지나 가상현실은 시공간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 현실과 가상을 따로 구분하지만
불교의 연기사상은 가상과 현실은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머물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가상현실은
일어나지만 그것에 현혹되지 않고 그것 또한 알아차릴 뿐이다.
불교의 모든 현상은 즉심즉시(卽心卽是)주의로 연기작용으로 나타난 실용적 행동주의다.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모든 불성과 깨달음과 열반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불처시(不處時)로 시공간에 머물지 않는 진공묘유의 상태를 깨닫는 중도의 상태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바라보는 가상현실은 짦은 시공간에서 행복은 있을 수 있으나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괴로움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영원한 니르바나의 열반은 오직 연기작용성을 알아차리는 매 순간의 삶을 권장하고 있은 것이다.
그렇게 붓다는 우리의 세상이 가상현실임을 이미 밝혀 주었다.
인간의 심의식 구조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지적하며 가상현실에서 벗어나 온전한 지금을 깨어사는 삶을 표방한 것이다.
우리가 느끼며 살고 있는 현실(現實)은 연기(緣起)작용에 의한 찰나 찰나의 생사(生死)가 반복되며 불처시(不處時)의 가상현실(假想現實)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확연히 알아차리고 가상이 아닌 지금을 100% 완벽하게 살아가는 것이 불교이다.
연기작용성인 그 본성이 머물지 않고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상이라는 현실은 인식으로 관념적인 생각이지 그 실체가 아니다.
그 실체적 존재는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순간 지나가 버린 생각일 뿐이다.
우리가 인식한 현실은 모두가 가상현실인 것이다. (無相)
그런데 우리는 진짜라고 믿는 착각 속에서 속고 있는 것이다. (苦)
이러한 진리의 본질이 반야의 공한 진리이다.
空은 실제하면서도 실제하지 않는 것,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다. (無我)
이러한 가상현실을 벗어나 오직 지금을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 참 살이다(中道)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면 가상현실이고
달을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 참 앎인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