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기의 성격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이(理리)란 사물들에 각각 내재해있으면서 사물들의 존재와 생성, 변화의 근본이 되는, 무형의 형이상자인 태극이다. 즉 천지만물의 운동과 변화를 이끄는 이법이다. 이에 대한 표현은 무수히 많다. 이는 음양의 동정운동의 까닭(원인)이고 운동법칙이다. 운동 그 자체는 기의 속성이지만, 기가 일음일양 一陰一陽하는 법칙성을 지니는 까닭이 바로 이다. 이것을 ‘자연히 그러한 이치’ 라는 의미의 소이연지리所以然之理라고 표현한다. 일음일양의 질서(=리)란 우주의 그 자체의 생명유지 방식으로, 리로 인해 굴러가며, 리가 그 생명 원리이다.
간단하게 표현해서 이는 일종의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자연법칙이다. 또한 천지만물이 따라야 할 도道이자 표준이다. 그러므로 리는 완전무결하고 순수지선하며, 모든 선의 근원이다.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리는 자연히 그러한 이유이자 마땅히 따라야 할 법칙이다. 리理는 인간에게 윤리적 당위로서 작용하며, 인간의 윤리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다. 이러한 리는 모든 사물에 내재되어있기 때문에 우주 만물은 각자의 소당연의 법칙을 지니고 있다. 이理는 인간 사회의 최고 법칙이다.
[태극의 극이란 지극至極(극에 달하다)의 뜻이며, 표준의 이름이다. 태극은 항상 사물의 중앙에 있어서 사방에서 바라보고 바름正을 취하는 것이다.]
반면 기는 시공간 안에서 물질적인 형체를 가지고 운동하고 변화하는,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형이상자이다. 기는 만물의 운동 변화의 주체이자, 리를 담고 리를 구체화하는 작용을 하는 주체이다. 그래서 기를 리의 안둔처, 의착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기는 만물이 각자 다르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청탁수박의 품질을 소유한다. 리는 완전무결하고 순수지선하지만 그러한 리를 담는 그릇인 기는 모두 다르기 때문에, 리가 기를 통해서 현실세계에 드러날 때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청수한 기는 리를 완전하게 구현하지만, 불완전한 기는 리를 불완전하게 구현한다. 이러한 기질의 품질은 세계에 존재하는 악과 불선, 불완전성의 근원이 된다.
[천지간에는 이도 있고 기도 있다. 이는 형이상의 도로서 사물을 낳는 근본이며, 기는 형이하의 기器(그릇)로서 사물을 낳는 도구이다.
기는 이에 따라 작용하는 듯 하다. 기가 응집되면 이도 거기에 존재한다. 기는 응결하고 조작할 수 있는 반면에 이는 의지도 없고 계획도 없으며 조작도 없다.
태극은 단지 천지만믈의 이理일 따름이다. 천지에서 보면 천지 안에 태극이 있고, 만물에서 보면 만물 가운데 각기 태극이 있다.]
이와 기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이기불상잡理氣不相離의 관계에 있다.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동시에 섞일 수 없다는 말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먼저 리와 기는 현실세계에서 동시에 공존하며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실제로 리와 기는 항상 결합하여 존재자들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형한(형태가 있는) 기가 운동하는 가운데에는 리가 내재되어있기 때문에, 리와 기는 사실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다시말해 리는 기의 운동법칙이고 기는 리의 의착처이기 때문이다. 리가 없으면 기의 운동이 일어날 수 없고, 기가 없으면 리는 현실에서 드러날 수 없다.
리기불상리인 동시에 리기불상잡이라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이와 기는 본질에 있어서 완전히 상이하다. 리와 기는 본질이 달라 결코 섞일 수 없고 하나라고 볼 수 없다. 리는 기의 품질과는 무관하게 언제나 완전하고 순선하다.
이를 바탕으로 보아 리와 기에는 선후관계가 성립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적인 관점에서는 리와 기가 동시에 공존하기 때문에 선후가 있을 수 없지만, 논리적인 관점에서는 항상 리가 기에 앞서있다. 이 관계를 리선기후理先氣後라 한다. 주희는 시간적 출발점으로서 태초의 존재를 부정한다. 우주는 음양과 동정의 영원한 수양이기 때문에 창조의 기점이란 존재할 수 없다. 다만 기가 움직임에 있어서, 그 운동의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가 이미 존재하기에 기의 운동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처럼 주희는 기에 앞서서 일음일양의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이치가 선행해있다고 주장한다.
[묻기를 “리가 먼저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기가 먼저 있는 것입니까?” 답하기를 “리는 일찍이 기와 분리된 적이 없다. 그러나 리는 형이상자고 기는 형이하자이니, 형이상과 형이하의 관점에서 말하면 어찌 선후가 없겠는가?”
묻기를 “반드시 먼저 리가 있고 난 다음에 기가 있는 것입니까?” 답하기를, “이것은 본래 선후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 소종래所從來를 추론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리가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른바 리와 기는 결단코 이물이다. 다만 사실적 관점에서 보면 리와 기가 섞여있어, 각각 한 곳에 있는 것을 분개할 수 없다. 그러나 리기가 각각 일물이 됨을 방해하지 않는다. 만약 논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비록 사물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사물의 리는 이미 존재한다.]
[태극은 형이상의 도이며, 음양은 형이하의 기이다 그러므로 그 드러나는 것에서 보면 동과 정은 서로 때를 같이하지 않고 음과 양은 서로 자리를 같이하지 않지만, 태극은 존재하지 않음이 없다.]
동정하는 것은 기이고, 기가 동정하는 끼닭은 리이다. 그러므로 리(태극) 자체는 동정하지 못하지만, 리에는 동정이 있다. 왜냐하면 형이상자인 리가 작위를 한다면 리와 기 사이의 구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역에는 태극이 있다는 말은 태극이 역의 원리임을 밝힌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태극이 동정하는 것이라면 오류가 되기 때문이다.
리는 기의 운동 원리이기에 ‘동정하는 까닭은 리’이고, 리는 스스로 발현하 수 없고 반드시 기의 운동을 통해서만 발현될 수 있으므로 ‘동정하는 것은 기’이다. 이를 기유위氣有爲 리무위理無爲 라고 표현한다.
[천지 사이에는 다만 동정의 양단(음양)이 끊임없이 순환할 뿐, 그 밖의 다른 일은 없으니 이것을 역易이라 한다. 그런데 동정에는 반드시 동정하는 까닭으로서의 리가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태극이다. ‘태극이 동정을 품고 있다’ 태극함동정太極含 고 말하는 것은 옳다. 태극에는 동정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옳다. 그러나 만약 ‘태극이 문득 동정한다(태극편시便是동정)’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형이상자와 형이하자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이요, ‘역에는 태극이 있다’는 말도 군더더기가 되는 것이다.]
[이치 자체는 움직이지 않지만 깨끗하고 널따란 이치 속에는 움직임의 이치와 조용함의 이치가 있다. ... 움직이는 기운을 양이라 하고, 정지해있는 기운을 음이라 부른다. ... 음양의 상호작용으로 오행이 생겼으며 ... 이 물리적 세계가 생겨났다.]
리일분수理一分殊
지금까지 이와 기의 성격과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러한 이와 기가 어떻게 만물에 품수되어있다고 주장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일분수理一分殊(다를 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주희의 본체론의 핵심개념은 세계의 보편적인 운동 법칙이자 원리인 이일理一과 만물의 리理 사이의 관계를 밝혀, 세계의 동일성과 다양성, 보편성, 특수성을 해명하는 것이다. 만물을 형제처럼 받아들이기 위한 토대로서, 만물의 보편성의 근거로 이일분수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기오행은 하늘이 만물에 품부하여 생긴 것이다. 그 말단으로부터 근본을 좇으면 오행의 다름은 이기의 실實(열매)을 근본으로 하고, 이기의 실은 一理의 극을 근본으로 한다. 이것은 바로 ‘만물을 합해 말하면 하나의 태극’으로서 동일한 것이다(만물통체일태극). 그 근본으로부터 말단으로 가면 일리의 실이 만물로 나뉘어 그 체가 된다. 그러므로 만물 가운데 각각 하나의 태극이 있는 것이다.(일물각구일태극) 크고 작은 물건들이 모두 그 일정한 分을 가지고 있다.]
태극이란 모든 사물의 잡다한 이치를 포괄하는 천지 만물의 이치의 총화이다. 달리 말하면 전체로서의 우주, 궁극적 표준, 최고의 것,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무극이 곧 태극 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그 지극한 이치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일理一(하나의 리)은 곧 태극이자 천리이다. 만물을 합해 말하면 하나의 태극이다(만물통체일태극). 그리고 동시에 만물 가운데 각각 하나의 태극이 있다(일물각구일태극). 만물이 각자의 일정한 分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의 태극이 갈기갈기 찢겨 나눠 분수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모두 온전한 태극을 품부받는다는 의미이다.
위의 두 태극은 동일한 태극으로, 개체들의 태극(리)와 우주의 본체인 태극은 동일하고 차별이 없다. 만물이 각각 완전한 태극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이일을 품수받음) 만물은 동일하고 그로부터 만물의 보편성과 통일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 각각의 태극이 존재자들의 본성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본성은 본연지성이라고 볼 수 있다. 본연지성의 특면에서 개별사물들은 모두 동일한 본연지성을 가진다. “마른 나뭇가지에도 오상의 덕이 있다”는 말은 각각의 개별 사물에 모두 천리(태극)을 품부받기 때문이다.
이처럼 만물은 품수받은 이일을 자신의 체 또는 본연지성으로 이룬다. 그런데 세계가 다양성, 상이한 이치를 가지는 이유는 서로 다른 기를 품수했기 때문이다. 이일은 모두 동일한 이일을 품수받았으나, 개체의 다름으로 인해 상이하게 드러나고 다양한 이치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이일은 하나의 보편적 이치로 다양한 개체들의 이치를 관통한다. 만물에는 동일한 보편적 이치인 이일이 품수되지만, 개체의 다름으로 인해서 만물의 개별적 이치는 서로 다르다. 즉 이일분수는 만물에 유행하는 보편적 이치(이일)가 만물의 다름으로 인해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을 설명하는 표현이다.
[본래 다만 하나의 태극인데 만물이 각각 품수한 것이요, 또 각자 하나의 태극을 온전히 갖추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하늘에 있는 달은 하나일 뿐이나, 강과 호수에 산재하게 되면 곳에 따라 드러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달이 이미 나누어졌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태극은 전체로서의 우주의 총화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개개의 각 사물 가운데 내재해있다. 하나하나의 사물마다 이 사물의 그러한 까닭이 되는 이치를 구비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가운데 태극의 전체도 구비하고 있다.]
[천하의 리가 만 가지로 다르지만 그 귀결은 하나일 뿐이며 둘도 셋도 아니다.
리는 단지 하나일 뿐이니, 도리는 같으며 그 分은 다르다. 군신에게는 군신의 리가 있고, 부자간에는 부자의 리가 있다. ... 처한 지위가 다르면 그 리의 쓰임도 한결같지 않다. 예를 들어 임금이 되어서는 어질어야 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공경해야 하며,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해야 하고, 아비가 되어서는 자애로워야 한다. 사물마다 각각 이를 갖추고 있고, 사물마다 각각 그 쓰임이 다르지만 일리의 유행이 아님이 없다.]
심성론
공부론의 이론적 토대
성즉리性卽理
이기이원론을 통해서, 우리가 공부(수양)해야 하는 이론적 토대에는 인간의 본성인 이와 기에 대한 이해가 있음을 배웠다. 이와 기가 인간의 본성을 이룬다는 것은 알겠으나 구체적으로 본성이 어떻고 어떻게 수양하는 방법이 필요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본성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주자가 제시한 공부론의 두 번째 이론적 토대는 심성론心性 이다.
먼저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에 천지의 기를 받은 것이 사람과 사물의 형체이고, 천지의 리를 받은 것이 각각의 본성이 된다. 즉 천지의 리가 인물의 형기에 들어와 성을 형성한다. 위의 이일분수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람의 본성과 세계의 보편적 원리 및 도덕원칙은 완전히 일치한다. “본성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미 성이 아니다”는 말은 보편적 이치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형기에 들어와 무언가의 본성이라고 말할 때는 이미 기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보편적 이치라고 볼 수 없고 자신의 기에 적절한, 개별화된 이치라고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늘로부터 품수받은 이일인 인간의 선한 본성은 그 어떤 경우에도 훼손되지 않으며, 모든 인간은 성인이 될 수 있다. 성은 곧 리이다. 성즉리性卽理
[성은 단지 이 理이니, 만리를 통틀어 이름한 것이다. 이 리 역시 천지 사이의 공공한 리이며, 품수하여 얻어온 후에 곧 나에게 있는 것이 된다. ... 이 리가 하늘에 있으면 命이라 하고, 사람에 있으면 性이라 하는 것이다.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화생함에 있어,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 리 또한 부여하였으니, 하늘이 명령한 것과 같다. 이에 인간과 만물이 태어남에 따라 각각 부여받은 리에 따라 건순과 오상의 덕을 삼으니, 이른바 성이다.
하늘이 만물을 낳음에 각각 하나의 본성을 부여했다. 성은 사물이 아니요, 다만 내 안에 있는 하나의 도리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성의 본체는 다만 인의예지신 다섯글자 뿐이니, 천하의 도리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주자는 본성을 본체론적 입장에서(이기불상잡 이기불상리)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는 본성에 본연지성이라는 성이 있고 또 기질지성이라는 성이 따로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본성 중 하늘로부터 품수받은 순수한 본연의 성을 콕 집어서 본연지성이라고 명명하며, 그것이 기질의 영향을 받는 것을 가리켜 기질지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성은 다만 리일 뿐이다. 그러나 저 천지의 기질이 없다면, 이 리는 안둔처가 없게 된다. 청명한 기질을 얻으면 리를 가리거나 가두지 않아 리가 순조롭게 발현된다. 가리고 가둠이 적은 경우에는 발출할 때에 천리가 이기고, 가리고 가둠이 많으면 사욕이 이긴다. 이로써 본원의 성은 순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맹자가 말한 성선이나 주자가 말한 순수지선, 정자가 말한 성의 본연, 반본궁원의 성 등이 그것이다. 다만 기질의 혼탁으로 인해 본연지성이 가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질지성은 군자의 성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학문을 통해 본원으로 돌아간다면 천지지성이 보존된다. 그러므로 성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기질을 함께 논해야 바야흐로 갖추어지는 것이다.]
본연지성本然之性은 천리가 인간의 형기에 들어와 이루어진 성으로, 인간에 내재해있는 천리를 말한다. 그 내용은 순수지선한 건순오상의 덕이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기질지성은 리인 성의 의착처로 인간의 본성을 ‘기질에 의착된 성’, ‘기질 중에 있는 성’ 이라고 표현한다. 즉 주자의 性 개념은 리와 기의 영향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형성된 성이다. 또한 주자는 기질지성 밖에 별도로 본연지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병립을 주장한다. 그래서 본연지성의 실재를 거부하고 기질지성의 존재만 인정하는 입장에 반대한다.
리와 기는 현실적으로 항상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질을 배제하고 성을 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의미하다. 단 기질과 본연의 성을 분명히 구별하되, 현실적으로 인물의 성은 기질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질의 청탁에 따라 본연지성의 천리가 잘 드러날지 결정되기 때문에, 수양의 목표는 천리가 그대로 드러날 수 있도록 교기질矯氣質(기의 바탕을 바로잡다)하는 것이다. 기질지성은 만물이 서로 다르고 선악이 혼재되어 있는데, 이는 기질의 차이 때문이다. 기품은 사람마다 이치로 품수받은 것 이외에 기운에서 품수받은 것을 말하는데, 이 기품은 악의 기원이다.
[대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결코 두 사물이 아니다.
기질은 음양오행의 소산이며, 성은 태극의 온전한 체이다. 다만 기질지성은 이 온전한 체가 기질 가운데 떨어져있는 것일 뿐이니, 별도로 하나의 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마른 나무는 기질지성만 있고 본연지성이 없다고 하니 이 말은 더욱 가소롭다. 만약 이와 같다면 사물에는 하나의 성만 있고 사람에게는 두 성이 있는 것이 된다. 그 말이 이처럼 어그러지게 된 것은, 대게 기질지성이란 것이 리가 기질 중에 떨어져서 기질을 따라 스스로 하나의 성이 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주자가 말한 바 각기 하나의 성이 그것이다. 만약 본연지성이 없다면 이 기질지성은 또 어디에서 왔겠는가?]
[성을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으면 완비된 것이 아니고, 기를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밝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대게 본연지성은 다만 지극한 선일 뿐이어서, 기질을 가지고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어두움과 밝음, 통함과 막힘, 단단함과 부드러움, 강함과 약함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완비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기질의 차이를 모르게 된다). 단지 기질지성만을 논하고 그것을 본원의 측면에서부터 말하지 않으면, 비록 어두움과 밝음, 통함과 막힘, 단단함과 부드러움, 강함과 약함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지극히 선한 근원에는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므로 밝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선한 본연지성이 존재함을 모르게 된다).]
성性과 정情
-성발위정, 성정체용, 감응설
성性은 마음의 체體이다. 즉 마음의 몸통이자 본체이다. 이 성은 하늘로부터 품수받은 리로, 정의 내재적 근거이다. 이러한 성의 본체는 사덕이다. 정은 마음의 용用이다. 즉 마음의 쓰임이다. 정은 성이 발하여(발동하여) 나타난 것으로(성발위정性發爲情) 성의 외재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정으로 드러나는 각종 정감을 통해서 직접 볼 수 없는 내부의 성을 파악할 수 있다. 성의 본체인 사덕이 발하여 나타난 정이 사단이다. 그래서 사덕의 실마리를 사단이라고 보는 단서설을 주장한다. 이처럼 주자는 성과 정의 관계를 성정체용, 성발위정, 감응설으로 바라본다.
[측은 수오 사양 시비(사단)는 정情이다. 인의예지(사덕)는 성性이다. 마음心은 성과 정을 거느리는 것이다. 단端은 실마리緖(서)이다. 정의 드러남으로 인하여 성의 본연을 볼 수 있는 것은 물건이 가운데 있어서 그 실머리가 밖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무릇 인의예지는 사람 마음에 갖추어져 있으니 성의 본체이다. 바야흐로 그 미발의 때에는 막연하여 형상을 볼 수 없으나, 발하여 작용이 됨에 이르러서는 인은 측은, 의는 수오, 예는 공경, 지는 시비가 되어 일을 따라 발현된다. (인의예지에 각각) 각기 싹터나오는 맥이 있고, 섞여 혼란하지 않으니, 이것이 이른바 정이라는 것이다. ... 대개 사단의 미발은 비록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않으나 그 가운데 스스로 조리와 짜임새가 있으니, 멍하니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이것이) 밖에서 감하자마자(느끼자마자) 그 안에서 곧 응하는 근거가 되니,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일에 감하면 인의 리가 곧 응하여 측은지심이 여기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 대개 그 안에 중리가 혼연히 갖추어져 있음이 각각 분명하므로, 바깥에서 만나는 것이 있으면 감한 것을 따라 응하는 것이다.]
마음心과 이기의 관계
마음은 성이 의착하여 자신을 전개하는 장소이다. ‘뭇 리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은 기의 가장 순수하고 영명한 부분과 리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만사 만물에 응하는 개인의 주재자이다. 그래서 마음을 이기묘합체理氣妙合體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이기묘합체인 마음은 기질적 요소의 상태에 따라서 리와 일체가 되어 작용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리의 발현 여부는 마음을 구성하는 기질의 품질에 따라 결정된다.
리는 마음의 본체이고, 기는 마음의 지각작용의 주체이다. 리는 마음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체로써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기는 사려를 포함한 마음의 모든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데, 사람마다 타고난 기에 따라서 도덕적 인식과 도덕적 행위 능력의 차이가 발생한다. 이러한 성과 마음은 서로 떼어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기를 바로잡아 본연지성을 발휘하는 것은 곧 ‘마음의 기질’을 바로 잡는 것이다. 이것이 공부의 핵심 과제이다.
마음의 기질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마음의 사욕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공부의 대원칙으로 기질을 바로잡아 사욕을 제거함으로써 리가 완전히 발현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인 존천리存天理 거인욕去人慾을 제시한다.
[마음과 성은 어느 하나를 말하면 다른 하나가 따라오니, 원래 서로 떨어질 수도 없으며, 역시 본디 구별하기도 어렵다. 마음을 버리면 성을 볼 수 없고, 성을 버리면 또한 마음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맹자는 마음과 성을 말할 때 언제나 연결지어 말했다. ... 마음과 성 그리고 리는 한 가지만 집어 들면 나머지가 모두 꿰어지니, 오직 그것이 가리키는 바의 문제가 어떠한지를 살필 따름이다.]
본심의 모습
本心, 마음의 본연의 모습은 허명(虛明)하고 허령(虛靈)하고 신령(神靈)하다. 마음이 허명하다는 것은 마음이 어떤 선입견이나 정서적 간섭도 없는, 마치 완전히 깨끗한 거울과 같은 상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마음의 본연의 모습은 지각이나 행위에 있어서 오류가 없는 이상적 상태이다. 허령하고 신령하다는 것은, 마음의 지각능력의 무제한성과 무한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마음은 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고, 이러한 마음의 능력이 마음과 리와 일체가 되어 작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즉 마음은 인식, 지각, 사유 작용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의 본연의 모습은 언제나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본연성을 훼손하는 것은 형기에서 비롯되는 사욕과 물욕이다. 사욕과 물욕으로 인해서 리가 온전하게 발현되지 않는다.
마음의 인심도심人心道心
마음은 이와 기를 관통하는 것으로, 인식 지각 사유작용의 주재자이다. 이러한 마음의 지각작용이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지, 어떤 내용을 지각하는지에 따라서 인심과 도심을 구분할 수 있다.
지각한다는 것은 선악의 구분이 없는 모든 마음의 심리작용과, 그 작용의 결과물인 지각 내용(선악 구분)을 아울러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란 사람의 지각이나 신체를 주관하며 사물에 응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은 모든 구체적 의식 활동의 주체인데, 그러한 지각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지각 능력과 지각 대상이 필요하다. 지각이 작용하는 대상에는 마음의 체인 리, 그리고 형기의 욕구 이 두 가지가 있다.
인간에게 두 종류의 마음이 생겨나는 이유는 이처럼 인간이 이와 기로 구성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개인적 욕구의 근원인 형기와 도덕의식의 근원인 성리 때문에 두 종류의 마음(인심과 도심)이 생겨난다. 인간은 누구나 형기와 성리를 갖추기에 누구나 인심과 도심을 가진다. 인심과 도심은 모든 인간에 편재되어있다.
마음의 지각 작용이 형기의 욕구를 대상으로 하여 촉발되고 작용하여 나타난 마음을 일컬어 인심이라고 한다. 인심은 형기에서 기인하는 개인적 욕구를 지각하는 마음이다. 반면 마음이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며 리에 의해 지각 작용이 촉발되고 리를 대상으로 지각 작용을 하여, 리를 온전하게 드러내는 순수지선한 도덕심을 일컬어 도심이라고 한다. 도심은 천리와 도의를 지각하는 마음이자 의리의 공평무사함에서 발하는 마음, 지각이 의리를 좇아가는 마음이다.
[이 마음의 신령함에 있어서 그 지각이 리에 있는 것이 도심이요, 그 지각이 욕에 있는 것이 인심이다. ... 단지 하나의 마음이지만, 지각이 귀와 눈의 욕구를 따라가면 인심이 되고, 지각이 의리를 따라가면 곧 도심이 된다.
사람에게는 단지 하나의 마음이 있을 뿐이다. 다만 지각이 도리를 얻으면 도심이 되고, 지각이 소리, 색, 냄새, 맛 같은 것을 얻으면 인심이 된다.
마음의 허령한 지각은 하나일 뿐이다. 인심과 도심의 다름이 있다고 한 것은, 혹은 그것이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나오고 혹은 성명의 바름에서 생겨서 지각한 것이 서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은 위태하고 불안하고(인심) 혹은 미묘하고 보기가 어렵다(도심). 그러나 사람은 형기를 가지고 있지 않음이 없으므로 비록 상지(上智)라 하더라도 인심이 없지 않고, 또한 이 성을 가지고 있지 않음이 없으므로 비록 하우(下愚)라도 도심이 없지 않다.]
인심과 인욕은 구분된다. 도심이 리가 그대로 발현한 순수지선한 도덕심이고 인심은 도심에 상대되는 것으로 불선해보이지만, 그 자체로 불선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형기의 욕구와 관련하는 인심은 인간의 자연적인 생존과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욕구와 관련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불선하지도 않다. 그러나 인심이 도심에 의해 규제되지 않으면 사욕으로 흐르게 되므로, 반드시 도심의 규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인욕은 천리와 대립하는,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사악한 욕망이다.
[인심을 인욕이라 한다면 이 말에는 잘못이 있다. 비록 상지라도 이것이 없을 수 없으니, 어찌 전적으로 옳지 않다고만 하겠는가? ... 인심은 완전히 좋지 않은 인욕인 것이 아니라, 단지 배고플 때 먹고자 하고 추울 때 옷을 입고자 하는 마음일 뿐이다.]
도심에 의한 인심의 규제는 인심의 위태로움 때문이다. 인심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사사로운 욕구이기 때문에 사유능력이나 반성능력이 없다. 그래서 인심만 따르게 되면 도덕의식을 잃어버린 소인이 되고, 사회적으로는 필연적으로 사회질서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도심에 의해 규제된 인심은 도심으로 변화한다. 이는 인간의 모든 욕망이나 욕구를 제거한다는 것이 아니라, 도심이 인심을 주재하여 천리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인심이 올바르고 정당하며 공정하게 개인의 욕구를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
[“배고플 때 먹고 목마를 때 마시는 것, 이것은 인심이 아닙니까?”
“그렇다. 그런데 반드시 그 마땅히 먹어야 할 것을 먹고 마땅히 마셔야 할 것을 마시면 이른바 도심을 잃지 않게 된다. 만일 훔친 샘물을 먹거나 욕하며 주는 음식을 먹으면, 인심이 이기고 도심은 없어지게 된다.”
“인심은 없을 수 있습니까?”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다만 도심으로써 주재를 삼으면 인심은 늘 명령을 듣게 된다.”]
[기욕(嗜慾)을 지각함이 있으면서도 주재하는 바가 없으면, 흘러서 되돌아감을 잊고 근거하여 편안할 수가 없으니 위태롭다고 이른다(기욕이 선을 모르고 날뛴다). 도심은 의리의 마음이니, 인심의 주재가 되고 인심이 근거하여 표준으로 삼는 것이다.]
마음의 미발이발未發已發
마음의 상태는 사물에의 감응과 사려의 발동 여부에 따라 미발이나 이발으로 구분된다. 미발(未發)은 아직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지 않아 사려가 싹트지 않은 상태이다. 미발시는 적연부동(寂然不動아주 조용하여 움직이지 않음)한 바탕에 성이 온전히 갖추어진 중(中)을 이룬 마음 상태로, 적연부동, 체, 성, 중, 만리를 갖추고 있는 마음이다. 반면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여 사려가 발동한 때를 이발(已發)시라고 한다. 이발시는 감이수통(感而遂通마음에 느껴 통함)하여 ‘성이 절도에 맞게 마음이 작용하여 정이 발하는’ 중절의 화를 이룬 마음이다. 즉 감이수통, 용, 정, 화, 온갖 일에 ‘반응’ 하는 것이다.
미발이발설은 미발과 이발시에 마음의 이상적인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지, 모든 현실적인 실제적 마음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사람에 따라 미발 이발시 중화의 마음을 지닌 사람도 있고, 부중부화(不中不和)의 상태에 빠진 사람도 있다. 그리고 부중부화에 빠지는 이유는 역시 기질에서 기인하는 사욕 때문이다. 미발시에 마음이 사욕에 가려지면 마음은 마치 흙덩이나 돌덩이처럼 어둡고 흐리멍텅한 상태가 될 뿐이며, 이 상태에서는 사물에 감응하여 정이 발하여 중절의 화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공부의 방향은 사욕을 제거하여 마음을 맑게 하여 미발이발시 중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심통성정(心統性情)
주희 심성론의 핵심
이처럼 마음은 그 본체인 성과 그 움직임인 정을 주재하여 통괄한다. 이를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 한다. 주희의 심성론의 핵심이 심통성정이다. 심통성정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심겸성정이다. 마음은 미발의 체인 성, 이발의 용인 정을 포괄(겸)한다. 둘째로 심주성정이다. 마음은 성정을 주재한다. 주재한다는 것은 마음이 지각작용을 통해 자신에 내재한 성을 온전히 발현하여 실현한다는 것이다. 리에 합당한 마음의 운용을 마음의 주재성으로 본다는 점에서 협소한 의미의 주재임을 알 수 있다. 미발시에는 성을 적연부동하게 드러내고, 이발시에는 성을 근거로 성을 중절의 정으로 드러내도록 주재한다는 의미에서 마음은 성정을 주재한다.
[성은 심의 이이고, 정은 심의 활동이다. 재(才재능)는 그 정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정과 재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 다만 정은 사물을 만나 발현되어 물결처럼 진행하는 것이라면, 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이다. 요컨대 천 갈래 만 갈래의 복잡한 실마리들이 다 심에서 나온다. (사단으로부터 사덕의 실마리를 볼 수 있는 데에는 그 사단을 드러내는 마음의 주재 능력이 있어야 한다)
임은 성이고 측은은 정이니, 심에서 생기는 것일 수 밖에 없다. 즉 심은 성과 정을 통하는(통괄하는) 것이다. 성은 단지 응당 그와 같아야 하는 것으로서 다만 이일 뿐, 하나의 일(事)이 아니다.]
[인의예지는 성이고, 측은수오사양시비는 정이다. 인으로 사랑하고 의로 미워하며 예로 사양하고 지로 아는 것이 마음이다. ... 마음은 성과 정을 주재(主宰)한다.]
이처럼 마음의 주재성이 유지되면 선을 실현하지만 주재성이 유지되지 못하고 상실되면 불선이 발생된다. 왜냐하면 마음이 주재성을 잃게 되면 기질에서 비롯되는 욕구들을 무분별하게 따르게 되어 인욕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이 상태를 마음이 외물에 끌려 다닌다거나 마음이 사심물욕을 대상으로 한다고 표현한다.
[성은 선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마음이 드러나서 정이 되면 선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선하지 않은 것은 마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마음의 본래 모습은 선하지 않음이 없으나, 그것이 흘러서 선하지 않게 되는 것은 정이 외물에 옮겨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사물에 감응하게 되면서 형기의 욕구가 발함. 이때 마음의 주재성이 중요) 성은 리의 총체적인 이름이며, 인의예지는 성 가운데 하나의 리의 명칭이다. 측은, 수오, 사양, 시비는 정이 발한 바의 명칭이니, 이 정이 성에서 나와 선한 것이다. 그 단서의 발한 것이 매우 미세하지만, 모두 이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따라서 심통성정자라고 말했으니, 성이 따로 마음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마음은 성과 정을 갖추고 있다. 마음이 그 주재성을 잃으면 오히려 선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인仁
사덕은 인간의 성에 있는 리 중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인은 공자의 인 사상을 계승해온 유가적 전통에 따라서 최상의 덕이다. 인의 세 가지 성격을 다음과 같다.
첫째, 인은 사랑의 이치이고 마음의 덕이고 공심(公心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 만인과 만물을 사랑하여 천하와 하나 되는 것)이고 선한 마음의 근원이다. 공자는 인이 곧 사랑이라고 본 것과는 달리 주자는 인이 사랑의 덕이자 이치이고, 그것이 발한 감정이 사랑이라고 본다. 인은 사랑이라는 정을 낳는 이치인 것이다.
둘째, 인의 본질을 생하게 하는 것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다. 만물의 낳고 기르는 마음의 본바탕이 바로 인이다. 그래서 인을 생의, 생명에 대한 사랑이라고 표현하며, 모든 도덕적 덕목(사덕)은 인이 발현된 것이다.
셋째, 인은 모든 하위의 덕을 포함하는 최상의 덕이다. 사덕 또한 인이 유행하여 드러난 덕이다. 인의 존재는 천도와 일치가 일치하는 근거이다. 천지의 덕인 원형이정과 인성의 덕인 인의예지(사덕)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원형이정이 각각 다른 덕들이면서 또한 원이라는 하나의 덕으로 통합되듯이, 인의예지도 각각 다른덕이면서 동시에 인이라는 하나의 덕으로 통합된다는 것이다.
즉 생의로서의 인은 유행하다가 의, 예, 지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의, 예, 지로 드러난다. 그래서 인의예지는 생의로서의 인의 인, 인의 의, 인의 예, 인의 지이다. 마찬가지로 인의예지가 발하여 드러난 사단 또한 측은이라는 한 가지 실마리가 수오, 사양, 시비의 실마리를 모두 관통하여 총괄한다. 그래서 인은 모든 선한 행위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이 발현되는 순간 사단이 나타나며, 오직 측은한 마음만이(인에서 발한 정 만이) 사단을 관통한다.(즉 인이 도덕적마음=사단의 본질이다.)
인은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으로서 만물에 부여되어, 그 속에 보전되어있다.]
[천지지심은 그 덕이 넷이니 원형이정(元亨利貞)이고, 사람의 마음에 네 가지 덕이 있으니 인의예지이다.]
원형이정은 자연법칙으로서의 천리로, 원은 모든 덕의 근본이자 생의, 인(仁). 형은 만물의 장(長), 하(夏), 예(禮). 이는 만물의 수(遂), 추(秋), 의(義). 정은 만물의 성(成), 동(冬), 지(知)이다. 인은 인간의 형기에 담긴 사덕으로서 생의,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예는 공경과 질서의 이치. 의는 마땅함의 이치. 지는 분별과 시비의 이치이다.
공부론
[ 경 공부, 지 공부, 행 공부 ]
지금까지 정리한 바와 같이, 인간의 본성에는 이가 품수되어있고 그 그릇으로서의 기가 있다. 각각 다른 기질에 따라서 형기의 욕구가 생기고 이를 마음이 잘 주재했을 때는 선한 마음이 유지된다. 그러나 성과 정이 마음의 주재를 벗어나게 되면 욕구가 기질을 탁하게 하여 순수지선한 성의 발현을 가로막아 불선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공부의 목적은 마음의 리를 온전하게 드러내어, 마음과 리가 일체를 이루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마음이 사사물물에 응접할 때마다 리에 맞게 처리해갈 수 있는 도덕적 인격자(주체)가 되는 것이다. 공부를 할 때의 대원칙은 리의 실현을 방해하는 마음의 기질적 제약을 극복하는 것인 존천리(存天理)거인욕(去人慾)이다.
구체적인 공부의 방법으로 주자는 세 가지 공부를 제시한다. 경 공부, 지 공부, 행 공부가 그것이다. 경 공부는 거경(居敬)의 본령공부로서 공부를 전체적으로 관통하며, 성의(誠意) 이하 공부(행 공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기초이다. 지 공부는 궁리(窮理)하는 것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사물을 탐구하여 앎을 지극히 함)를 내용으로 한다. 행 공부는 이발시의 공부로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를 내용으로 하는 구체적 실천 방법이다.
경敬 공부 : 본령공부
먼저 경(敬) 공부의 의의(가치)는 미발이발의 삶의 모든 상황에서 마음의 주재성과 마음의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노력이자, 인욕에 물들지 않고 천리를 밝히는 마음을 가지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래서 경의 태도는 마음의 미발에서의 존양, 함양 공부와 이발에서의 성찰 공부를 포함하여 중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주일무적(主一無適), 정제엄숙(整齊嚴肅), 상성성(常惺惺)을 제시한다.
주일무적은 마음이 처하는 모든 상황에서 한결같이 집중하고 다른 잡념이나 감정으로 마음이 혼란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즉 일이(사물에 감응) 없을 때에는 고요함 속에서 마음의 리를 체인하고, 일이 있을 때는 그 일에 집중하며 마음의 리를 발현하는 것인데, 이때 최우선적 조건은 마음의 수렴(收斂)이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아 안정되고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이 물(物)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정제엄숙은 몸가짐을 단정하고 엄숙하고 흐트러짐이 없게 하여 편벽됨이 마음에 스며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상성성은 항상 마음이 맑고 영명하도록 유지하는 것으로, 마음 속의 쓸데없는 생각을 제거하여 본연의 맑은 상태를 유지하고 항상 깨어있도록 하는 것이다.
마음이 주재성을 유지하여 성과 정이 중화상태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경 공부가 필요하다. 중화는 이상적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개념이다. 즉 마음이 성정을 주재하여 미발시 성을 온전히 보전하고 이발시 정을 절도에 맞게 이끌 때의 이상적인 마음상태를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면 중은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도 받지 않아 사려가 생겨나지 않은 시기에, 본성이 사욕 등에 은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중은 본성의 상태를 의미하고 모든 일의 기준이 되는 근본이다. 화는 마음이 성에 따라 정을 발동한 상태로, 정이 절도에 맞게 발한 상태이다.
미발시의 이상적 상태는 중이고 이발시의 이상적 상태는 화이다. 그런데 기질에서 기인하는 사욕으로 인해 부중부화의 상태가 되면 불선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경 공부를 통해 사욕을 제거하여 미발이발시 중화상태가 되도록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중으로 가기 위해 미발함양공부, 즉 마음의 지각력을 통해 성의 체단을 갖춘 ‘중’의 기강을 느끼고 간직하는 공부=존양공부가 필요하다. 화로 가기 위해서는 이발성찰공부, 즉 이발시 드러나는 성(性)의 단예(처음과 끝)를 살피고, 나아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공부이다.
지 공부
주자는 지知 공부로 궁리(窮理)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제시한다. 격물치지를 지 공부로 제시한 것은, 모든 사물의 이치를 철저히 궁구하여 리에 대한 앎을 지극히 하고, 이를 통해 내 마음의 리를 완전하게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격물과 치지가 구체적으로 무엇이기에 마음의 리를 밝힐 수 있다는 것인가?
격물(格物)이란 사사물물의 실질에 즉하여(의거하여), 그것에 내재해있는 리로서의 소당연지칙(마땅히 따라야 할 법칙) 소이연지고(그러한 까닭. 원리)를 궁구하되 극진하게 하는 공부를 말한다. 즉 사사물물의 리의 관점에서 리를 궁구하는 현상에 주목하는 궁리의 공부이다. 또한 ‘오늘 한 사물을 격하고(바로잡고) 내일 한 사물을 격해 나가는 일’으로 반복과 누적의 개념이다.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여 점차적으로 모든 사물의 공통적인 보편규율을 인식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외부 사물을 반복적으로 궁구해가는 정신적 수양 과정을 수행하다 보면 어느 단계에서 비약 = 활연관통(豁然貫通) 하게 된다.
[사람이 태어남에 진실로 능히 이 물(物)이 없을 수 없는데, 그 물의 리를 밝히지 못하면 성명(性命)의 올바름에 순응하지 못하고 사물의 마땅함에 처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물에 나아가서 그것을 구해야 한다. 그 리를 구할 줄 알아도 물의 극진함에 이르지 못하면 물의 리를 다 궁구하지 못하게 되어, 나의 지식 또한 다하지 못함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극진함에 이르고 난 이후에야 그치는 것이다. 이것이 격물이라 이르는 것이니, 물에 나아가서 물의 리를 다하는 것이다.]
[이치는 추상적이요, 사물은 구체적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것을 통하여 추상적인 것을 탐구해야 한다. 그 결과 무엇이 영원한 세계에 있으며, 또 무엇이 우리의 본성에 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이치에 관하여 알면 알수록, 보통은 형체에 가려진 그 본성이 더욱 더 잘 보이게 된다.]
치지(致知)는 이미 아는 것에 근거하여 그것을 미루어가되 극진히 하고, 알지 못하는 바가 없는 상태에 이르는 공부이다. 이미 아는 것이란 마음의 본래 상태가 이미 리를 온전히 갖추고 있으며 앎의 내용과 기능이 부족함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마음의 온전한 지(知)가 기질과 사심물욕에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앎의 단서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치지는 마음의 앎이 확대되어가는 일에 초점을 둔 개념이다. 마음과 리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사사물물에 따라 즉각적이고 적절하게 응할 수 있는 앎인 진지를 얻도록 치지 공부를 해야 한다.
[치지는 지극한 곳까지 미루어 나아가되, 투철하게 궁구하여 단연코 이러하다는 것을 참으로 아는 것이다. ... 치지는 진지를 구하는 바탕이다. 진지는 뼈에 사무치도록 투철하게 알아내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여 볼 때, 격물치지란 이미 아는 것을 단서로 하여 사물의 이치를 철저하게 궁구하여 알고, 그 앎을 통해 마음의 지를 온전히 회복함으로써 마음의 리를 온전히 밝히는 공부이다. 격물치지의 결과 앎의 지극함에 도달한 상태를 활연관통이라 한다. 즉 활연관통은 내 마음속의 천리가 완전히 밝혀진 상태로, 확 트여 관통하는 것이다.
치지는 반드시 격물에 의존하고 격물을 통해 치지해야 한다. 사물의 실질을 떠나서 주관적 깨달음을 앎의 극치라고 공허하게 주장하는 것을 공부의 병폐로서 강력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치지만 강조하게 되면 내면의 수양만을 강조하게 되므로 실제적인 삶에서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안에서 치지 해야 한다.
[격물은 사물을 따라서 궁구해가는 것이고, 치지는 미루어 점차 넓혀가는 것이다. ... 격물은 물물 마다의 리를 궁구하는 것이고, 치지는 내 마음이 알지 못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치지는 나로부터 말하는 것이고, 격물은 물에 나아가 말하는 것이다. 만약 물에 나아가지 아니하면 무엇으로써 앎을 얻겠는가?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 중에 그 아는 것을 미루어 극진히 하는 이는 있으나, 다만 평범하게 그 심사를 다할 뿐 모두 사물에 나아가 궁구하지 않으니, 그렇게 해서는 끝내 머무를 곳이 없을 것이다. 만약 그 아는 것을 극진히 하여 저 사물에서 미루어 궁구해가면 나에게 바야흐로 아는 것이 있게 될 것이다.]
[대학의 첫 가르침은 학자들로 하여 반드시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리에 근거하여 더욱 궁구함으로써 그 지극한 데 까지 이르도록 하려 한 것이다. 오랫동안 힘써 나아가면 어느 순간 확 트여 통하게 된다. 그러면 모든 사물의 표리와 정조에 이르지 못함이 없게 될 것이고, 내 마음의 체와 용은 밝혀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사물의 리의 지극한 곳에 이르렀다고 말하며, 앎이 극진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거경-궁리, 격물-치지의 관계
흔히 주자의 수양방법으로 거경궁리(居敬窮理), 지행병진(知行竝進)을 대표적으로 말한다. 거경은 경 공부고 궁리는 지 공부인데, 거경과 궁리의 관계는 무엇일까? 경 공부는 마음의 주재성과 본심을 유지하는 공부로, 궁리가 효과적으로 이뤄지게 하는 기초이다. 마음의 본래 고요하고 밝은 상태가 유지되면 자연히 마음의 온갖 리를 비추어낼 준비가 되는 것이다. 궁리는 만사만물의 리를 궁구하여 마음의 리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경 공부는 궁리 공부를 위한 준비이자 궁리 공부를 보존하는 공부이다.
그리고 동시에 궁리 공부가 없다면 경 공부를 통해 보존하고자하는 마음의 리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마음의 주재성과 본심을 유지하여 발현하는 경 공부를 위해서는 마음의 리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궁리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경 공부와 지 공부(궁리)는 상보적 관계에 놓여있으며, 두 공부는 함께 해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병진)
[사람의 양지는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궁리하지 못하면 알지 못하고 통달하지 못한 것을(알지 못한 것을 =마음의 리의 밝음) 궁구할 수는 없다. 궁리란 아는 바로써 모르는 것에 이르며 통달한 바로써 통달하지 못한 것에 이르는 것이다.]
잘못된 공부법
주희는 잘못된 공부법들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다. 먼저 경 공부를 별개의 특수한 공부로 간주하여 다른 공부와 철저히 구분하는 공부법을 비판한다.(불교-교종,선종) 경 공부는 불교의 선(禪)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경은 정좌하여 만사를 잃어버리는 선이 아니라, 계신공구(戒愼恐懼)와 신독(愼獨)의 실천을 통해 마음의 주재성과 본래성을 유지한 채 모든 일을 처리해가는 태도이다.
또 경은 일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일에 따라 전일(專一마음을 한 곳에 씀)하고, 삼가 두려워 하고, 방일(放逸멋대로 함)하지 않는 태도로서,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행해야 할 근본 태도이다. 그러므로 경 공부는 본령(가장 본질적인) 공부이다. 격물치지 또한 경의 태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경은 무엇인가? 오직 삼가 조심한다는 말과 같을 뿐이다. 귀에 들리는 것도 없고 눈에 보이는 것도 없이, 나무토막처럼 가만히 앉아 아무 일도 살피지 않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 경은 오직 일에 따라 전일하게 삼가 조심하면서 마음을 풀어놓지 않는 것일 따름이다.]
[진실로 경을 위주로 하여 그 근본을 세우고, 리를 궁구해서 그 지를 이루어 갈 수 있다. 근본을 세우도록 하면 지는 더욱 밝아지고, 지가 정밀하면 근본이 더욱 견고해진다.
학문하는 자의 공부는 거경과 궁리 두 가지 일에 있다. 이 두 가지 일은 서로 발현한다. 능히 궁리할 수 있으면 거경공부는 날로 더욱 진전하고, 능히 경에 머물 수 있으면 궁리 공부는 더욱 정밀해진다.]
[경을 지키는 것은 궁리의 근본이다. 궁구해서 리가 밝아지면 이는 마음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
배우는 자가 궁리하지 않으면 도리를 볼 수 없다. 그런데 궁리를 하면서 경을 지키지 않으면 역시 안 된다. 경을 지키지 않으면 도리를 본 것이 모두 흩어져 버리고, 여기에 모이지 않는다.
마음은 만 가지 리를 포함하고 만 가지 리는 하나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 마음을 보존할 수 없으면 리를 궁구할 수 없고, 리를 궁구할 수 없으면 마음을 지극히 할 수 없다.]
행 공부 : 성의, 정심, 제가, 치국, 평천하
공부에는 경 공부 지 공부 뿐만 아니라 행 공부도 있다. 행 공부가 필요한 이유는 리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여, 리를 자신의 삶에 구현하기 위해서이다. 즉 리를 실천하여 리와 자신을 하나로 만드는 공부가 행 공부이다. 비록 지극한 앎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여 체화하지 않으면 그 지극한 앎은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체화된 앎(진지眞知)이야 말로 진정한 앎이다.
진지는 행을 포섭하는 공부로, 참된 앎이다. 우리는 약지가 아닌 진지를 쌓는 공부를 해야 한다. 치지만으로는 공부가 완성되지 않는다. 약지(대략적 지식)의 부족한 부분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등 보완하여 진지로 나아가야 한다. 이처럼 진지는 지와 행이 상호 순환하며 서로를 보완하는 과정을 통해 획득된다.
행 공부의 방법으로 주희가 제시한 것은 성의, 정심, 제가 치국 평천하 이다. 이 중에서 성의를 주로 다루고, 성의와 그 외의 방법들은 성의 이하 방법이라고 칭하도록 한다. 성의(誠意참되고 정성스러운 뜻)는 행해야 할 선과 제거해야 할 악에 대한 명확한 분별을 인식하는 것을 기초로, 선을 지향하는 마음의 발현에 참되지 않음이 없도록 하는 실천 공부이다(선지후행). 그래서 성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을 체화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려는 뜻을 한치의 거짓됨 없이 진실되도록 다듬는 공부인 것이다.
성의가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자기(毋自欺 스스로 속임이 없음)와 신독(愼獨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 없도록 언행을 삼감)을 실천해야 한다. 즉 선을 알면서도 자신을 속여서 악을 행하지 않게 하고, 마음의 은밀한 부분까지 살펴 도리에 어긋남 없이 선을 지향하는 뜻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심(正心마음을 올바르게 가짐)은 감정에 의해 마음에 치우짐이 없도록 하여 본래의 마음을 흐트러짐없이 보존하는 공부이다.
[무릇 정심, 성의, 치지, 격물은 모두 몸을 닦는 길이고, 그 가운데 격물은 그런 공부의 실제 내용이다. 그러므로 격물은 그 심의 물을 바로잡는 것이고, 그 의(義)의 물을 바로 잡는 것이며, 그 지(知)의 물을 바로잡는 것이다. 정심은 그 물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성의는 그 물의 의를 성실하게 하는 것이며, 치지는 그 물의 지를 다하는 것이다. 여기에 어찌 안팎과 이것 저것의 구분이 있겠습니까?
- 하학의 실천을 통해 덕성을 생성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는 공자가 남긴 이니 처음 배우는 이가 덕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배우는 자가 반드시 이에 의지하여 배운다면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 이른바 그 ‘뜻을 참되게 한다(성의)’ 함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악취를 싫어하듯,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 하는 것인데, 이를 일러 스스로 만족한다(자겸自謙)고 한다. 따라서 군자는 반드시 신독 해야 한다. 하지만 소인은 한가하여 나쁜 일을 행함에 못하는 짓이 없으면서, 군자를 만나면 나쁜일을 은폐하고 선한 척 하지만(신독하지 않음), 남들이 그 속을 훤히 들여다 보고 있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치지란 모름지기 끝까지 추구하여 알되, 가장 친숙하고 절실해야 한다. 나는 평소에 앎이 지극해진다고 할 때의 지(至지극히 하다)를 진(盡정성을 다하다)으로 해석하였는데, 근래에 ’절실하게 도달함(절지切至)의 지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는 것에 절실함이 있어야 비로소 ‘성의(誠意)’의 의미가 관철될 수 있다.
- 성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신독과 같은 수양이 필요하다. (주자-양명의 공통점) ]
지-행, 경-행의 관계
경 공부와 행 공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경 공부는 넓은 의미에서의 행 공부라고 볼 수 있다. 성의 이하의 공부(행공부)의 기초가 되는 것이 미발과 이발을 관통하는 활연관통의 경 공부이다. 리의 실천과 경 공부는 상보적 관계에 놓여있다.
주희는 지와 행의 관계로 지행을 구분하고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고 본다. 먼저 지와 행은 상호의존하는 지행호발, 지행병진의 관계에 있다. 둘째, 올바른 실천을 위해서는 행의 근거로 지가 앞서 작용해야 한다는 선지후행의 관계에 있다. 셋째, 지보다 행을 더 강조하는 중행경지의 관계에 있다.
모든 공부는 궁극적으로 실천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행 공부는 리에 대한 앎을 삶에서 실천하여, 인간됨의 바탕을 직접 보존하고 길러내는 공부이다. 공부의 목적이 본성을 밝히고 실현하는 것이라면, 리에 대한 앎은 실천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그리고 행 공부는 인간됨의 바탕을 직접 보존하고 길러내는 일이기 때문에 지 공부도 중요하지만 행 공부가 무척 중요하다.
흔히 주자에 대해서 후대에서 하는 오해인 선지후행의 오해는, ‘진지에 이르러야만 행동할 수 있다’고 보는 점이다. 지행병진은 약지를 얻으면 행을 통해 체험해보고, 부족함이 있으면 끊임없이 지식을 다시 쌓아 진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정확히 안 후에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단 알고 행하고 다시 앎을 확충하고 행하는 과정인 지와 행의 순환과정을 반복하여 진지에 이르는 치지의 과정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선지후행과 지행병진은 동시에 옳다.
[지는 행의 시작이고, 행은 지의 완성이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으면 지만 말해도 이미 행이 거기에 들어있고, 행만 말해도 이미 거기에 지가 담겨있다. ... 성인의 학문은 하나의 공부일 뿐이니, 지와 행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없다.]
[지와 행은 항상 서로에게 필수적이니, 마치 눈이 있어도 발이 없으면 갈 수 없고, 발이 있어도 눈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선후를 말하자면 지가 앞서고, 경중을 말하자면 행이 무겁다.]
[주희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양명이 지행합일을 얘기하는데 반해 주희는 선지후행을 주장함으로써 실천을 등한시 한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객관적 궁리의 대상이 되는 영역을 언급할 때는 주로 선지후행을 강조하고, 치지를 언급할 때는 주로 지행병진을 강조했는데, 후대인들이 이를 고려하지 않아 이런 오해가 생긴 듯 하네.]
[약지가 얻어진 곳에서 실질적인 체험을 하여 자연히 믿고 얻는 것에 있어야 바로 진지이다.
앎의 지극함을 기다려 행동한다고, (그 행동을) 안 할 수 있는가?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며, 위를 이어 받아 아래를 대하는 일은, 사람이 하루라도 폐할 수 없는 일인데, 어찌 나의 지식이 철저하게 이르지 않았다고 해서 앎이 지극해지기를 기다린 후에야 행동하겠는가!]
『대학』 삼강령에 대한 주희의 해석
‘대학’의 삼강령(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선止於至善)에 대한 주희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먼저 명명덕에 대한 해석이다. 명덕은 마음이 얻은 밝은 덕으로 인(仁), 사덕(四德)을 말한다. 명명덕이란 이 명덕을 밝힌다는 의미이다. 간단히 사덕을 밝히는 것이 명명덕이라 볼 수 있는데, 사덕을 밝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마음 작용을 통해서 인(사덕)을 현실화 한 것 또는 본연지성을 온전히 발현한 것을 이른다.
그러므로 명명덕은 마음(心)과 리(理)가 하나가 된(일체화된) 상태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보면 심과 리가 하나가 됐다는 것은 사욕을 극복하고 본연의 리를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것으로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慾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표현으로는 사욕을 극복하여 공심(公心사사로움이 없는 공평한 마음)을 실현하는 극기복례의 상태이다. 그래서 주자는 명명덕의 주요 방편으로 공(公)과 무사(無私)를 제시한다.
[그 리로 말하면 만물은 하나의 근원을 지니니, 진실로 사람과 만물, 귀한 것과 천한 것의 차이가 없다. 그 기로 말하면 바르고 통명함을(정통正通)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힘을(편새偏塞) 얻은 것은 만물이 된다. ... 그러나 그 기의 통명함도 간혹 맑고 흐림의 차이가 없을 수 없고, 그 기운의 밝음도 간혹 좋고 나쁨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 그러나 본디 밝음이 있는 본체는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영원히 어두워질 수 없다. 이 때문에 비록 그 어둠에 가리워진 것이 극에 달할지라도, 잠깐 사이에 한 번의 깨우침이라도 있으면, 그 빈틈 사이에서 그 본체는 이미 밝게 빛난다. 이 때문에 성인은 가르침을 베풂에 있어서 이미 소학(小學)을 함양하도록 했고, 후에 대학(大學)의 도로써 공부를 전개하도록 했다. ... 대저 먼저 밝음의 실마리를 열어주고 거기에 그 밝음의 실질을 지극히 할 수 있으면, 내가 하늘에서 얻어서 밝지 않음이 없는 것이(본연지성) 어찌 초연하게 기질과 물욕의 가리움을 제거해서 그 본체의 온전함을 회복할 수 없겠는가! 이것이 곧 명덕을 밝힘인데, 성분(性分이-기)의 밖에서 자위하는(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존천리거인욕은 마음 안에서 가능한 것)]
둘째로 신민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신민은 ‘대학’의 친민(親民)을 주자가 신민(新民)으로 해석한 것이다. 주희 백성과 친함 이라는 의미의 친민은 ‘대학’의 흐름 상 잘못 서술된 것이고, 친(親)은 신(新)의 오타라고 본다. 대학의 제 1강령인 명명덕을 통해서 존천리거인욕의 필요성을 이야기 한 후, 2강령에서는 자연히 백성들도 스스로 자신의 명덕을 밝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야 하고, 그것은 백성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친민 보다는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신민이 적절하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신민이란 자신의 명덕을 밝힌 후, 그것을 남에게 미루어 기품과 인욕에 가리워진 백성들로 하여금 나쁜 풍습에 물든 때를 버리게 하고 그들 스스로 자신의 명덕을 밝힐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백성을 새롭게 한다’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신민은 일종의 교민(敎民) 사상으로, 백성을 가르쳐 도덕적 인격자로 변모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명명덕은 자신을 닦는(수기修己) 것으로, 신민에 앞서 반드시 필요한, 신민의 토대가 된다.
[내가 스스로 밝힌 바를 미루어서 그들에게 미치되, 처음에는 제가를, 중간에는 치국을, 마지막에는 평천하에 이르러, 자신의 명덕을 가지고도 스스로 밝히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스스로 밝힐 수 있도록 해서 옛날의 해묵고 더러운 때를 없애는 것이 이른바 신민(新民)이다. 이것은 역시 그들에게 나의 것을 보태주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지어지선이다. 지어지선(止於至善)이란 지극히 선한 경지에 이른다는 것으로, 사리(만물의 이치)의 당연함의 극치에 이르러 (인욕에 시선을) 옮기지 않는 것이다. 즉 사람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천리가, 나와 백성 모두 따라야 할 표준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지어지선을 명명덕과 신민의 표준이라고 한다. 명명덕을 하고 신민을 할 때, 지선(선에 머물러)하여 옮기지 않는 것이 표준이라고 보는 것이다.
[지(止)는 반드시 거기에 이르러 다시는 옮겨갈 수 없다는 뜻이다. 지선(至善)은 사리의 당연함의 극치이다. 이는 밝은 덕을 밝히는 것(명명덕)과 백성을 새롭게 함(신민)을 모두 지극한 선이 있는 곳에 그쳐, 다시는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없도록 함을 말하니, 반드시 그 천리의 지극함을 다하며 털끝만큼도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다.]
[덕이란 자신에게 있어서 마땅히 밝혀야 하며, 또한 그것이 백성에게 있어 밝혀야 하는 것이니, ... 이것은 하늘에서 얻어서 일상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니 만큼 여기에는 본연의 일정한 준칙이 있다. 이는 정자의 말처럼 그 의리 (義理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옳은 이치)의 정미함의 극치로서 무어라 형용할 수 없기에, 따라서 이를 굳이 지선(至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를 가리켜서 말하여 명덕과 신민의 표준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