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 스님의 진심직설(眞心直說)
<大正藏第 48 冊 No. 2019A 真心直說>
真心直說
真心正信
[0999b13] 華嚴云。信為道源功德母。長養一切諸善根。又唯識云。信如水清珠。能清濁水故。是知萬善發生信為前導。故佛經首立如是我聞。生信之所謂也。或曰。祖門之信與教門信有何異耶。曰多種不同。教門令人天信於因果。有愛福樂者。信十善為妙因。人天為樂果。有樂空寂者。信生滅因緣為正因。苦集滅道為聖果。有樂佛果者。信三劫六度為大因。菩提涅槃為正果。祖門正信非同前也。不信一切有為因果。只要信自己本來是佛。天真自性人人具足。涅槃妙體箇箇圓成。不假他求從來自備。三祖云。圓同太虛無欠無餘。良由取舍所以不如。志公云。有相身中無相身。無明路上無生路。永嘉云。無明實性即佛性。幻化空身即法身。故知眾生本來是佛。既生正信須要解滋。永明云。信而不解增長無明。解而不信增長邪見故。知信解相兼得入道疾。或曰。初發信心未能入道有利益不。曰起信論云。若人聞是法已不生怯弱。當知是人定紹佛種。必為諸佛之所授記。假使有人能化三千大千世界滿中眾生令行十善。不如有人於一念頃正思惟此法。過前功德不可為喻。又般若經云。乃至一念生淨信者。如來悉知悉見。是諸眾生得如是無量福德。是知欲行千里初步要正。初步若錯千里俱錯。入無為國初信要正。初信既失萬善俱退。故祖師云。毫釐有差天地懸隔。是此理也。
真心異名
[0999c12] 或曰。已生正信。未知何名真心。曰離妄名真。靈鑑曰心。楞嚴經中發明此心。或曰。但名真心別有異號耶。曰佛教祖教立名不同。且佛教者菩薩戒呼為心地。發生萬善故。般若經喚作菩提。與覺為體故。華嚴經立為法界。交徹融攝故。金剛經號為如來。無所從來故。般若經呼為涅槃。眾聖所歸故。金光明號曰如如。真常不變故。淨名經號曰法身。報化依止故。起信論名曰真如。不生不滅故。涅槃經呼為佛性。三身本體故。圓覺中名曰總持。流出功德故。勝鬘經號曰如來藏。隱覆含攝故。了義經名為圓覺。破暗獨照故。由是壽禪師唯心訣云。一法千名應緣立號。備在眾經不能具引。或曰。佛教已知。祖教何如。曰祖師門下杜絕名言。名不立何更多名。應感隨機其名亦眾。有時呼為自己。眾生本性故。有時名為正眼。鑑諸有相故。有時號曰妙心。虛靈寂照故。有時名曰主人翁。從來荷負故。有時呼為無底鉢。隨處生涯故。有時喚作沒絃琴。韻出今時故。有時號曰無盡燈。照破迷情故。有時名曰無根樹。根蒂堅牢故。有時呼為吹毛劍。截斷塵根故。有時喚作無為國。海晏河清故。有時號曰牟尼珠。濟益貧窮故。有時名曰無鑐鎖。關閉六情故。乃至名泥牛木馬心源心印心鏡心月心珠。種種異名不可具錄。若達真心諸名盡曉。昧此真心諸名皆滯。故於真心切宜子細。
真心妙體
[1000a11] 或曰。真心已知名字。其體如何耶。曰放光般若經云。般若無所有相無生滅相。起信論云。真如自體者。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諸佛。無有增減。非前際生非後際滅。畢竟常恒。從本已來性自滿足一切功德。據此經論真心本體。超出因果通貫古今。不立凡聖無諸對待。如太虛空遍一切處。妙體凝寂絕諸戲論。不生不滅非有非無。不動不搖湛然常住。喚作舊日主人翁。名曰威音那畔人。又名空劫前自己。一種平懷無纖毫瑕翳。一切山河大地草木叢林萬象森羅。染淨諸法皆從中出。故圓覺經云。善男子。無上法王有大陀羅尼門。名為圓覺。流出一切清淨真如菩提涅槃及波羅蜜。教授菩薩。圭峯云。心也者。沖虛妙粹。炳煥靈明。無去無來冥通三際。非中非外洞徹十方。不滅不生。豈四山之可害。離性離相。奚五色之能盲。故永明唯心訣云。夫此心者。眾妙群靈而普會。為萬法之王。三乘五性而冥歸。作千聖之母。獨尊獨貴無比無儔。實大道源是真法要。信之則三世菩薩同學。蓋學此心也。三世諸佛同證。蓋證此心也。一大藏教詮顯。蓋顯此心也。一切眾生迷妄。蓋迷此心也。一切行人發悟。蓋悟此心也。一切諸祖相傳。蓋傳此心也。天下衲僧參訪。蓋參此心也。達此心則頭頭皆是物物全彰。迷此心則處處顛倒念念痴狂。此體是一切眾生本有之佛性。乃一切世界生發之根源。故世尊鷲峯良久。善現巖下忘言。達磨少室壁觀。居士毘耶杜口。悉皆發明此心妙體。故初入祖門庭者。要先識此心體也。
真心妙用
[1000b13] 或曰。妙體已知。何名妙用耶。曰古人云。風動心搖樹。雲生性起塵。若明今日事。昧却本來人。乃妙體起用也。真心妙體本來不動。安靜真常。真體上妙用現前。不妨隨流得妙。故祖師頌云。心隨萬境轉。轉處寔能幽。隨流認得性。無喜亦無憂。故一切時中動用施為。東行西往喫飯著衣。拈匙弄筯左顧右盻。皆是真心妙用現前。凡夫迷倒於著衣時只作著衣會。喫飯時只作喫飯會。一切事業但隨相轉。所以在日用而不覺。在目前而不知。若是識性底人。動用施為不曾昧却。故祖師云。在胎名神。處世名人。在眼觀照。在耳聽聞。在鼻嗅香。在口談論。在手執捉。在足運奔。遍現俱該法界。收攝在一微塵。知之者為是佛性。不識者喚作精魂。所以道吾舞笏。石鞏拈弓。祕魔擎杈。俱胝竪指。忻州打地。雲巖師子。莫不發明這著大用。若於日用不迷。自然縱橫無礙也。
真心體用一異
[1000c02] 或曰。真心體用未審是一是異耶。曰約相則非一。約性則非異。故此體用非一非異。何以知然。試為論之。妙體不動絕諸對待離一切相。非達性契證者。莫測其理也。妙用隨緣應諸萬類。妄立虛相似有形狀。約此有相無相故非一也。又用從體發用不離體。體能發用體不離用。約此不相離理故非異也。如水以濕為體。體無動故。波以動為相。因風起故。水性波相動與不動故非一也。然波外無水水外無波。濕性是一故非異也。類上體用一異可知矣。
真心在迷
[1000c14] 或曰。真心體用人人具有。何為聖凡不同耶。曰真心聖凡本同。凡夫妄心認物。失自淨性為此所隔。所以真心不得現前。但如暗中樹影地下流泉。有而不識耳。故經云。善男子。譬如清淨摩尼寶珠映於五色隨方各現。諸愚痴者見彼摩尼實有五色。善男子。圓覺淨性現於身心隨類各應。彼愚痴者說淨圓覺實有如是身心。自性亦復如是。肇論云。乾坤之內宇宙之間。中有一寶祕在形山。此乃真心在纏也。又慈恩云。法身本有諸佛共同。凡夫由妄覆有而不覺。煩惱纏裹得如來藏名。裴公云。終日圓覺而未嘗圓覺者凡夫也。故知真心雖在塵勞不為塵勞所染。如白玉投泥其色不改也。
真心息妄
[1000c29] 或曰。真心在妄則是凡夫。如何得出妄成聖耶。曰古云。妄心無處即菩提。生死涅槃本平等。經云。彼之眾生幻身滅故幻心亦滅。幻心滅故幻塵亦滅。幻塵滅故幻滅亦滅。幻滅滅故非幻不滅。譬如磨鏡垢盡明現。永嘉亦云。心是根法是塵。兩種猶如鏡上痕。痕垢盡時光始現。心法雙忘性即真。此乃出妄而成真也或曰。莊生云。心者其熱燋火。其寒凝氷。其疾俛仰之間。再撫四海之外。其居也淵而靜。其動也懸而天者。其惟人心乎。此莊生先說凡夫心不可治伏如此也。未審宗門以何法治妄心也。曰以無心法治妄心也。或曰。人若無心便同草木。無心之說請施方便。曰今云無心。非無心體名無心也。但心中無物名曰無心。如言空瓶。瓶中無物名曰空瓶。非瓶體無名空瓶也。故祖師云。汝但於心無事於事無心。自然虛而靈寂而妙。是此心旨也。據此則以無妄心非無真心妙用也。從來諸師說。做無心功夫類各不同。今總大義略明十種。一曰覺察。謂做功夫時。平常絕念隄防念起。一念纔生便與覺破。妄念破覺後念不生。此之覺智亦不須用。妄覺俱忘名曰無心。故祖師云。不怕念起只恐覺遲。又偈云。不用求真唯須息見。此是息妄功夫也。二曰休歇。謂做功夫時。不思善不思惡。心起便休遇緣便歇。古人云。一條白練去。冷湫湫地去。古廟裏香爐去。直得絕廉纖離分別。如痴似兀方有少分相應。此休歇妄心功夫也。三泯心存境。謂做功夫時。於一切妄念俱息。不顧外境但自息心。妄心已息何害有境。即古人奪人不奪境法門也。故有語云。是處有芳草滿城無故人。又龐公云。但自無心於萬物。何妨萬物常圍繞。此是泯心存境息妄功夫也。四泯境存心。謂做功夫時。將一切內外諸境悉觀為空寂。只存一心孤標獨立。所以古人云。不與萬法為侶。不與諸塵作對。心若著境心即是妄。今既無境何妄之有。乃真心獨照不礙於道。即古人奪境不奪人也。故有語云。上園花已謝車馬尚駢闐。又云。三千劍客今何在。獨計莊周定太平。此是泯境存心息妄功夫也。五泯心泯境。謂做功夫時。先空寂外境。次滅內心。既內外心境俱寂。畢竟妄從何有。故灌溪云。十方無壁落四面亦無門。淨裸裸赤洒洒。即祖師人境兩俱奪法門也。故有語云。雲散水流去寂然天地空。又云。人牛俱不見正是月明時。此泯心泯境息妄功夫也。六存境存心。謂做功夫時。心住心位境住境位。有時心境相對。則心不取境。境不臨心各不相到。自然妄念不生。於道無礙故。經云。是法住法位世間相常住。即祖師人境俱不奪法門也。故有語云。一片月生海幾家人上樓。又云。山花千萬朵遊子不知歸。此是存境存心滅妄功夫也。七內外全體。謂做功夫時。於山河大地日月星辰內身外器。一切諸法同真心體。湛然虛明。無一毫異。大千沙界打成一片。更於何處得妄心來。所以肇法師云。天地與我同根。萬物與我同體。此是內外全體滅妄功夫也。八內外全用。謂做功夫時。將一切內外身心器界諸法。及一切動用施為。悉觀作真心妙用。一切心念纔生便是妙用現前。既一切皆是妙用。妄心向甚麼處安著。故永嘉云。無明實性即佛性。幻化空身即法身。志公十二時歌云。平旦寅。狂機內隱道人身。坐臥不知元是道。只麼忙忙受苦辛。此是內外全用息妄功夫也。九即體即用。謂做功夫時。雖冥合真體一味空寂。而於中內隱靈明乃體即用也。靈明中內隱空寂用即體也。故永嘉云。惺惺寂寂是惺惺妄想非。寂寂惺惺是無記寂寂非。既寂寂中不容無記。惺惺中不用亂想。所有妄心如何得生。此是即體即用滅妄功夫也。十透出體用。謂做功夫時。不分內外。亦不辨東西南北。將四方八面。只作一箇大解脫門圓陀陀地。體用不分無分毫滲漏。通身打成一片。其妄何處得起。古人云。通身無縫罅上下忒團欒。是乃透出體用滅妄功夫也。已上十種做功夫法不須全用。但得一門功夫成就。其妄自滅真心即現。隨根宿習曾與何法有緣即便習之。此之功夫乃無功之功。非有心功力也。此箇休歇妄心法門最緊要故。偏多說無文繁也。
真心四儀
[1001c23] 或曰。前說息妄未審但只坐習。亦通行住等耶。曰經論多說坐習。所以易成故。亦通行住等。久漸成純熟故。起信論云。若修止者。住於靜處端坐正意。不依氣息。不依形色。不依於空。不依地水火風。乃至不依見聞覺知。一切諸想隨念皆除。亦遣除想。以一切法本來無想。念念不生念念不滅。亦不得隨心外念境界後以心除心。心若馳散即當收來住於正念。是正念者。當知唯心無外境界。即復此心亦無自相。念念不可得。若從坐起去來進止有所施作。於一切時常念方便隨順觀察。久習純熟其心得住。以心住故漸漸猛利。隨順得入真如三昧。深伏煩惱信心增長。速成不退。唯除疑惑不信誹謗重罪業障我慢懈怠。如是等人所不能入。據此則通四儀也。圓覺經云。先依如來奢摩他行。堅持禁戒。安處徒眾。宴坐靜室。此初習也。永嘉云。行亦禪坐亦禪。語默動靜體安然。據此亦通四儀耳。總論功力坐尚不能息心。況行住等豈能入道耶。若是用得純熟底人。千聖興來驚不起。萬般魔妖不迴顧。豈況行住坐中不能做功夫也。如人欲讎恨於人。乃至行住坐臥飲食動用。一切時中不能忘了。欲愛樂於人亦復如是。且憎愛有心中事。尚於有心中容得。今做功夫是無心事。又何疑四儀中不常現前耶。只恐不信不為。若為若信則威儀中道必不失也。
真心所在
[1002a21] 或曰。息妄心而真心現矣。然則真心體用今在何處。曰真心妙體遍一切處。永嘉云。不離當處常湛然。覓即知君不可見。經云。虛空性故。常不動故。如來藏中無起滅故。大法眼云。處處菩提路頭頭功德林。此即是體所在也。真心妙用隨感隨現。如谷應聲。法燈云。今古應無墜。分明在目前。片雲生晚谷。孤鶴下遙天。所以魏府元華嚴云。佛法在日用處。在行住坐臥處。喫茶喫飯處。語言相問處。所作所為舉心動念。又却不是也。故知體則遍一切處。悉能起用。但因緣有無不定故。妙用不定耳。非無妙用也。修心之人欲入無為海度諸生死。莫迷真心體用所在也。
真心出死
[1002b06] 或曰。嘗聞見性之人出離生死。然往昔諸祖是見性人。皆有生有死。今現見世間修道之人有生死事。如何云出生死耶。曰生死本無妄計為有。如人病眼見空中華。或無病人說無空花。病者不信。目病若無空花自滅。方信花無。只花未滅其花亦空。但病者妄執為花。非體實有也。如人妄認生死為有。或無生死人告云。本無生死。彼人一朝妄息生死自除。方知生死本來是無。只生死未息時亦非實有。以妄認生死有故。經云。善男子。一切眾生從無始來種種顛倒。猶如迷人四方易處。妄認四大為自身相。六塵緣影為自心相。譬彼病目見空中花。乃至如眾空花滅於虛空。不可說言有定滅處。何以故。無生處故。一切眾生於無生中妄見生滅。是故說名輪轉生死據此經文。信知達悟圓覺真心本無生死。今知無生死。而不能脫生死者。功夫不到故也。故教中說。菴婆女問文殊云。明知生是不生之法。為甚麼被生死之所流。文殊云。其力未充故。後有進山主。問修山主云。明知生是不生之法。為甚麼却被生死之所流。修云。笋畢竟成竹去。如今作篾使得麼。所以知無生死不如體無生死。體無生死不如契無生死。契無生死不如用無生死。今人尚不知無生死。況體無生死契無生死用無生死耶。故認生死者不信無生死法。不亦宜乎。
真心正助
[1002c04] 或曰。如前息妄真心現前。且如妄未息時。但只歇妄做無心功夫。更有別法可對治諸妄耶。曰正助不同也。以無心息妄為正。以習眾善為助。譬如明鏡為塵所覆。雖以手力揩拭。要須妙藥磨瑩光始現也。塵垢煩惱也。手力無心功也。磨藥眾善也。鏡光真心也。起信論云。復次信成就發心者。發何等心。略有三種。云何為三。一者直心。正念真如法故。二者深心。集一切善行故。三者大悲心。欲拔一切眾生苦故。問曰。上說法界一相佛體無二。何故不唯念真如。復假求學諸善也。答曰。譬如大摩尼寶體性明淨而有鑛穢之垢。若人雖念寶性。不以方便種種磨治終無得淨。以垢無量遍一切法故。修一切善行。如是真如之法體性空淨。而有無量煩惱染垢。若人雖念真如。不以方便種種熏習亦無得淨。以垢無量遍一切法故。修一切善行以為對治。若人修行一切善法。自然歸順真如法故。據此所論。以休歇妄心為正。修諸善法為助。若修善時與無心相應不取著因果。若取因果便落凡夫人天報中。難證真如不脫生死。若與無心相應乃是證真如方便脫生死之要術。兼得廣大福德。金剛般若經云。須菩提。菩薩無住相布施其福德不可思量。今見世人有參學者。纔知有箇本來佛性。乃便自恃天真不習眾善豈只於真心不達。亦乃翻成懈怠。惡道尚不能免。況脫生死。此見大錯也。
真心功德
[1003a03] 或曰。有心修因不疑功德矣。無心修因功德何來。曰有心修因得有為果。無心為因顯性功德。此諸功德本來自具。妄覆不顯。今既妄除功德現前。故永嘉云。三身四智體中圓。八解六通心地印。乃是體中自具性功德也。古頌。若人靜坐一須臾勝造恒沙七寶塔。寶塔畢竟化為塵。一念淨心成正覺。故知無心功大於有心也。洪州水潦和尚參馬祖問。如何是西來的的意。被馬祖一踏踏到。忽然發悟起來撫掌。大笑云。也大奇也大奇。百千三昧無量妙義。只向一毛頭上便一時識得根源去。乃作禮而退。據此則功德不從外來。本自具足也。四祖謂懶融禪師曰。夫百千法門同歸方寸。河沙功德總在心源。一切戒門定門慧門神通變化。悉自具足不離汝心據祖師語。無心功德甚多。但好事相功德者。於無心功德自不生信耳。
真心驗功
[1003a21] 或曰。真心現前如何知是真心成熟無礙也。曰學道之人已得真心現前時。但習氣未除。若遇熟境有時失念。如牧牛雖調到牽拽隨順處。猶不敢放了鞭繩。直待心調步穩赶趁入苗稼中不傷苗稼。方敢撒手也。到此地步便不用牧童鞭繩。自然無傷苗稼。如道人得真心後。先且用功保養。有大力用方可利生。若驗此真心時。先將平生所愛底境。時時想在面前。如依前起憎愛心。則道心未熟。若不生憎愛心。是道心熟也。雖然如此成熟。猶未是自然不起憎愛。又再驗心。若遇憎愛境時。特然起憎愛心令取憎愛境界。若心不起是心無礙。如露地白牛不傷苗稼也。古有呵佛罵祖者。是與此心相應今見纔入宗門。未知道之遠近。便學呵佛罵祖者。太早計也。
真心無知
[1003b08] 或曰。真心與妄心對境時。如何辨別真妄耶。曰妄心對境有知。而知於順違境起貪瞋心。又於中容境起癡心也。既於境上起貪瞋癡三毒。足見是妄心也。祖師云。逆順相爭是為心病。故知對於可不可者是妄心也。若真心者無知而知。平懷圓照故異於草木。不生憎愛故異於妄心。即對境虛明不憎不愛。無知而知者真心故。肇論云。夫聖心者。微妙無相不可為有。用之彌勤不可為無。乃至非有故知而無知。非無故無知而知。是以無知即知。無以言異於聖人心也。又妄心在有著有在無著無。常在二邊不知中道。永嘉云。捨妄心取真理。取捨之心成巧偽。學人不了用修行。深成認賊將為子。若是真心居有無而不落有無。常處中道故。祖師云。不逐有緣勿住空忍。一種平懷泯然自盡。肇論云。是以聖人處有不有。居無不無。雖不取於有無。然不捨於有無。所以和光塵勞周旋五趣。寂然而往怕爾而來。恬淡無為而無不為。此說聖人垂手為人。周旋五趣接化眾生。雖往來而無往來相。妄心不爾。故真心妄心不同也。又真心乃平常心也。妄心乃不平常心也。或曰。何名平常心也。曰人人具有一點靈明。湛若虛空遍一切處。對俗事假名理性。對妄識權號真心。無分毫分別。遇緣不昧。無一念取捨。觸物皆周。不逐萬境遷移。設使隨流得妙。不離當處湛然。覓即知君不見。乃真心也。或曰。何名不平常心耶。曰境有聖與凡。境有染與淨。境有斷與常。境有理與事。境有生與滅。境有動與靜。境有去與來。境有好與醜。境有善與惡。境有因與果。細論則萬別千差。今乃且舉十對皆名不平常境也。心隨此不平常境而生。不平常境而滅。不平常境心對前平常真心。所以名不平常妄心也。真心本具。不隨不平常境生起種種差別。所以名平常真心也。或曰。真心平常無諸異因。奈何佛說因果善惡報應乎。曰妄心逐種種境。不了種種境。遂起種種心。佛說種種因果法。治伏種種妄心須立因果也。若此真心不逐種種境。由是不起種種心。佛即不說種種法。何有因果也。或曰。真心平常不生耶。曰真心有時施用非逐境生。但妙用遊戲不昧因果耳。
真心所往
[1003c22] 或曰。未達真心人。由迷真心故作善惡因。由作善因故生善道中。由作惡因故入惡道中。逐業受生其理不疑。若達真心人妄情歇盡契證真心無善惡因。一靈身後何所依託耶。曰莫謂有依託者勝無依託耶。又莫將無依託者。同人間飄零之蕩子。似鬼趣無主之孤魂。特為此問求有依託耳。或曰然。曰達性則不然也。一切眾生迷覺性故。忘情愛念結業為因。生六趣中受善惡報。假如天業為因只得天果。除合生處餘並不得受用。諸趣皆爾。既從其業故。合生處為樂。不生處為非樂。以合生處為自己依託。不生處為他人依託。所以有妄情則有妄因。有妄因則有妄果。有妄果則有依託。有依託則分彼此。分彼此則有可不可也。今達真心契無生滅之覺性。起無生滅之妙用。妙體真常本無生滅。妙用隨緣似有生滅。然從體生用用即是體。何生滅之可有。達人即證真體。其生滅何干涉耶。如水以濕性為體波浪為用。濕性元無生滅故。波中濕性何生滅耶。然波離濕性別無故。波亦無生滅。所以古人云。盡大地是沙門一雙正眼。盡大地是箇伽藍。盡是悟理人安身立命處。既達真心。四生六道一時消殞。山河大地悉是真心。不可離此真心之外別有依託處也。既無三界妄因。必無六趣妄果。妄果既無說甚依託。必無彼此。既無彼此則何可不可也。即十方世界唯一真心。全身受用無別依託。又於示現門中隨意往生而無障礙。故傳燈云。溫操尚書問圭峯曰。悟理之人一期壽終何所依託。圭峯曰。一切眾生無不具有靈明覺性與佛無殊。若能悟此性即是法身。本自無生何有依託。靈明不昧了了常知。無所從來亦無所去。但以空寂為自體。勿認色身。以靈知為自心。勿認妄念。妄念若起都不隨之。則臨命終時自然業不能繫。雖有中陰所向自由。天上人間隨意寄託。此即前真心身後所往者也。
용성(龍城) 스님 역
머리말(自序)
[질문] 조사들의 오묘한 도(道)를 알 수 있습니까?
[대답] 옛 사람이 이르지 않았던가. 도는 알고 모르는데 있지 않다고. 안다고 하는 것은 망상이고 모르는 것은 무기(無記)다. 참으로 의심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탁 트인 허공과 같은데 어찌 굳이 옳다(是) 그르다(非)하는 생각을 하겠는가.
[질문] 그렇다면 조사들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은 중생들에게 아무 이익도 없단 말입니까?
[대답] 부처님이나 조사들이 세상에 출현하여 사람들에게 다로 법을 준 일은 없고 중생들에게 스스로 자기 본성을 보게 했을 뿐이다. 『화엄경』에 말하였다. 모든 법이 곧 마음의 자성(自性)임을 알면 지혜의 몸(慧身)을 성취한다. 결코 타인에 의해 깨닫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나 조사들은 사람들에게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푹 쉬어 자기 본심을 보게 하였다. 그래서 덕산(德山) 스님은 입문(入門)하는 이에게 방망이로 대했고, 임제(臨濟) 스님은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 밖에 무슨 말이 더 필요했겠는가.
[질문] 예전에 마명(馬鳴) 보살은 『기신론(起信論)』을 짓고, 육조(六祖) 스님은 『단경(壇經)』을 설하고 오조(五祖) 황매(黃梅) 스님은 『반야경(般若經)』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다 점차로 사람들을 위한 것인데, 어찌 법에 방편이 없겠습니까?
[대답] 가장 높은 묘고봉(妙高峰) 위에서는 원래 헤아림을 허락하지 않지만, 둘째 봉우리에서는 조사들이 간략하게 말로 아는 것을 용납하였다.
[질문] 감히 비노니, 둘째 봉우리에서 대강 방편을 베풀어 주십시오?
[대답] 그 말이 옳다. 큰 도는 아득하고 비어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참 마음(眞心)은 그윽하고 오묘해서 생각 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그 문을 알고 들어가지 못하면, 설사 5천부의 대장경을 살펴볼지라도 많은 것이 아니고, 진심을 크게 깨달으면 단 한마디의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벌써 군더더기이다. 이제 눈썹을 아끼지 않고 삼가 몇 장(章)의 글로써 진심을 밝혀 도에 들어가는 기초와 절차를 삼고자 한다. 이에 서문을 쓴다.
1. 참마음과 바른 믿음
『화엄경』에 말하기를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라 모든 선근(善根)을 자라게 한다’하였다. 유식(唯識)에 말하기를 ‘믿음은 물을 맑히는 구슬과 같나니 흐린 물을 맑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것으로써 온갖 선(善)이 발생하는 데에는 믿음이 그 길잡이가 된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불경의 첫머리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고 쓴 것도 믿음을 내게 하기 위해서이다.
[질문] 조사문(祖師門 = 禪門)의 믿음과 교문(敎門)의 믿음이 어떻게 다릅니까?
[대답] 그것은 여러 가지로 동일하지 않다. 교문에서는 사람과 하늘들로 하여금 인과(因果)의 법을 믿게 한다. 즉 복락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십선(十善)이 묘한 인연이 되고 인간과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즐거운 결과가 된다고 하며, 비고 고요함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생멸의 인연이 바른 인(因)이 되고 고집멸도(苦集滅道)가 성인의 결과라 믿게 하며, 불과(佛果)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삼겁(三劫)과 육도(六度)가 큰 인(因)이 되고 보리와 열반이 바른 결과가 됨을 말한다. 그러나 조사문의 바른 믿음은 앞의 것과 다르다 모든 유위(有爲)의 인과를 믿지 않고 오직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것만을 믿게 하니, 천진한 자기 성품이 사람마다 갖추어져 있고 열반의 묘한 본체가 낱낱이 원만히 이루어졌으므로 다른데 구하려 하지 않고 원래 저절로 갖추었음을 믿는 것이다.
승찬 대사가 말하기를 ‘원만하기는 허공과 같아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지마는 다만 취하고 버리는 생각 때문에 그렇지 못하다’고 하였다 또 지공(誌公)스님께서 말하기를 ‘형상 있는 몸 속에 성품이 곧 부처님 몸이요, 무명의 길 위에 생멸 없는 길이다. 또 영가스님은 무명의 실다운 성품이 곧 부처님 몸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法身)이다’고 하였다. 이것으로써 중생이 본래 부처인줄을 알 것이다. 이미 바른 믿음을 내었더라도 반드시 잘 알아야 한다. 영명스님은 ‘믿기만 하고 알지 못 하면 무명이 더욱 자라고, 알기만 하고 믿지 않으면 삿된 견해가 더욱 자란다.’고 하였다. 이것으로써 믿음과 견해가 겸비하여야 도에 들어감이 빠른 줄 알 수 있다.
[질문] 처음으로 발심해서 아직 도에 들어가지 못했더라도 이익이 있습니까?
[대답] 기신론에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듣고 겁내는 생각을 내지 않으면 이 사람은 결정코 부처 종자를 이어받아 반드시 모든 부처의 수기(授記)를 받을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 안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하여 십선(十善)을 행한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잠깐이나마 이 법을 바로 생각하면 이 공덕은 앞의 공덕보다 많이 비교 할 수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 또 반야경에서는 ‘한 생각 동안만이라도 깨끗한 믿음을 내면 부처는 그를 다 알고 본다. 그러므로 그 중생은 그런 한량없는 복덕을 얻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천리를 가려면 첫걸음이 빨라야 하나니 첫 걸음이 어긋나면 천리가 다 어긋남을 알아야 한다. 무위(無爲)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첫 믿음이 바라야 한다. 첫 믿음을 잃으면 모든 선(善)이 다 무너진다. 그러므로 조사께서는 말하기를 ‘털끝만치의 차이만 있어도 하늘과 땅처럼 멀어진다.’고 한 것이 바로 이 이치이다.
2, 참마음의 다른 이름
[질문] 이미 바른 믿음이 내었거니와 무엇을 참마음이라 합니까 ?
[대답]허망하지 않으므로 참(眞)이라 하고, 신령하게 밝은 것이며 마음이니 <능엄경>에서 이 마음을 밝혔다.
[질문] 다만 진심이라고만 합니까? 아니면 따로 다른 이름이 있습니까?
[대답] 부처의 가르침과 조사의 가르침에서 지은 이름이 같지 않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살계에서는 마음바탕(心地)이라 하였으니 온갖 선을 내기 때문이요, <반야경>에서는 ‘보리’라 하였으니 부처님의 본체가 되기 때문이며, <화엄경>에서는 법계(法界)라 하였으니 서로 사무치고 융통하여 포함하기 때문이요, <금강경>에서는 ‘여래(如來)’라 하였으니 온 곳이 없기 때문이며, 또 <반야경>에서 ‘열반’이라 하였으니 모든 성인들이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이요,<금강명경>에서는 ‘여여(如如)’라 하였으니 진실하고 항상되어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정광명>에서는 ‘법신(法身)’이라 하였으니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이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기신론>에서는 진여(眞如)라 하였으니 생명이 없기 때문이며,<열반경>에서는 ‘불성(佛性)’이라 하였으니 삼신(三身)의 본체이기 때문이요,<원각경>에서는 ‘총지(摠持)’라 하였으니 공덕을 흘려내기 때문이다. <승마경>에서는 ‘여래장’이라 하였으니 숨겨 덮고 포용하였기 때문이요, <요의경>에서는 ‘원각(圓覺)’이라 하였으니 어두움을 부수고 홀로 비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壽)선사의 유심결(唯心訣)에’ 하나의 법이 천 가지 이름을 가진 것은 인연을 따라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고 한 것이며, 여러 경에 두루 있으므로 다 인용 할 수 없다.
[질문] 불교의 가르침으로는 알았거니와 조사의 가르침에서는 어떤 것입니까?
[대답] 조사의 문에는 이름과 말이 끊어져서 하나의 이름도 짓지 않거늘 무슨 많은 이름이 있겠는가? 그러나 근기에 따라 그 이름도 또한 많다. 어떤 때엔 ‘자기’라 하였으니 중생의 근본 성품이기 때문이요, 어떤 땐 ‘정안(正眼:바른 안목)’이라 하니 유위(有威)의 모습을 비추어 밝히기 때문이요, 어떤 때엔 ‘묘심(妙心)’이라 하니, 비고 신령스럽고 고요히 비추기 때문이요, 어떤 땐 ‘주인옹(主人翁)’이라 하니 원래부터 짐을 졌기 때문이다. 어떤 때엔 무저발(無底鉢)’이라 하니 간 곳마다 생활이 풍족하기 때문이요, 어떤 때엔 ‘줄 없는 거문고(沒絃琴)’라 하니 오늘의 경지를 연주해 내기 때문이요, 어떤 때에는 무진등(無盡燈)’이라 하니 미혹한 유정을 비추어 깨뜨리기 때문이요, 어떤 때엔 무근수(無根樹)’라 하니 뿌리와 꼭지가 견고하기 때문이요, 어떤 때엔 ‘취모검*吹毛劒)’이라 하니 번뇌의 뿌리를 끊어버리기 때문이요, 어떤 때엔 무위국(無爲國)’이라 하니 바다같이 평온하고 강같이 맑기 때문이요, 어떤 때엔 ‘모니주(牟尼珠)’라 하니 가난함을 구제하기 때문이요, 어떤 때엔 열쇠 없는 자물쇠라 하니 여섯 가지 감정을 막아버리기 때문이요, 나아가서는 진흙소(泥牛), 나무말(木馬), 마음의 근원(心源), 마음도장(心印), 마음의 거울(心鏡), 마음의 달(心月), 마음의 구슬(心珠)이라 하여 갖가지 딴이름이 잇지만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만일 참마음을 깨달으면 모든 이름을 다 알 수 있고, 이 참마음에 어두우면 모든 이름에 다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참마음에 대하여 반드시 자세히 알아야 하느니라.”
3. 참마음의 본체
[질문] 참마음의 이름들은 알았거니와 그 본체는 어떠합니까?
[대답] 『방광반야경』에 말하기를 ‘반야는 아무현상이 없으므로 생멸하는 모양이 없다.’고 하였으며, 또『기신론』에서는 ‘진여 자체는 모든 범부, 성문, 연각, 보살, 부처에 있어서 차별이 없으므로 과거에 난 것도 아니고 미래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항상 있어 본래부터 성품 스스로가 모든 공덕을 갖추었다’하였다. 이상의 경론에 의하면 참마음의 본체는 인과를 뛰어넘었으며 고금에 통하였으며 범부와 성현을 구별하지 않고 아무 상대할 것이 없다. 마치 허공이 어디나 두루한 것처럼, 그 묘한 본체는 고요하여 모든 실없는 말들이 끊어져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아 고요히 항상 머무른다. 그러므로 옛날의 주인옹이라 부르며, 위음나반인(威音那畔人)이라고 부르며, 또 공겁(空劫:천지창조이전)이전의 자기라고도 부른다. 한결같이 마음이 공평하고 비어서 털끝만큼의 티의 가리움도 없어, 모든 산과 강, 땅덩어리와 초목의 우거진 숲과 온갖 물건이나 모든 현상과 깨끗하고 더러운 모든 법이 다 여기서 나온다. 그러므로 『원각경』에 ‘선남자여, 위없는 법왕(法王)에게 큰 다라니 문이 있으니 그것을 원각(圓覺)이라 이름 한다. 그것은 일체의 청정한 진여와 보리와 열반과 바라밀을 흘려내어 보살들을 가르친다.’하였다.
또 규봉 스님은 말하기를 ‘마음이란 텅 비어 순수하며 빛나고, 신령스럽게 밝아 가고 옴이 없는지라 가만히 과거· 현재· 미래에 통하고, 가운데도 아니요 밖도 아니면서 시방에 두루 사무친다. 없어지지도 않고 나지도 않는데 어떻게 4산(生.老,病.死)이 해칠 수 있으며, 성품도 형상도 멸했거니 어찌 5색이 눈멀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영명(永明)스님의 유심결에 이르기를 ‘대저 이 마음은 묘함과 신령함이 모두 모였는지라. 만겁의 왕이 되고, 삼승(三乘)과 5성(性)이 가만히 의지하는지라. 모든 성현의 어머니가 된다. 혼자 놓고 홀로 귀하여 견줄 데가 없으니, 실로 큰 도의 근원이며 참 법의 골수다.’고 하였다. 믿으면 삼세의 보살이 다 같이 공부한 것이 대개 이 마음을 배운 것이요, 삼세의 부처가 같이 증득한 것이 이 마음을 증득한 것이요, 대장경이 설명한 것이 이 마음을 설명한 것이요, 모든 중생의 미혹함이 이 마음을 미혹 것이요, 모든 수행인의 깨달음이 이 마음을 깨달은 것이요, 모든 조사들의 서로 전함이 이 마음을 전한 것이요, 천하의 납자들이 참문하는 것이 이 마음을 참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밝게 알면 일마다 다 이것이요, 물건마다 다 온전히 드러날 것이요, 이 마음을 미혹하면 가는 곳마다 뒤바뀌고 생각마다 어리석은 것이다. 이 본체는 모든 중생이 본래 지니고 있는 불성(佛性)이며, 모든 세계가 생겨난 근본이다. 세존께서는 영취산에 침묵하시고, 선현존자는 바위 밑에서 말을 잊었으며, 달마대사는 소림사에서 벽을 향해 앉았었고, 유마거사는 비야리성에서 입을 다물었던 것이니, 그것은 다 이 마음의 묘한 본체를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본체를 알아야 할 것이다.
4. 참마음의 묘한 작용
[질문] 묘한 본체는 이미 알았거니와 묘한 작용이란 것은 어떤 것입니까?
[대답] 옛사람이 말하기를 ‘바람이 움직이매 마음이 나무를 흔들고, 구름이 생기며 성품이 티끌을 일으킨다. 만일 오늘의 일을 밝히려 하매 본래의 사람을 모르고 만다’고 하니, 이것이 묘한 본체가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진심의 묘한 본체는 원래 움직이지 않아 편안하고 고요하며 진실하고 항상 한데, 진실하고 항상한 본체에서 묘한 작용이 나타나서 흐름을 따라 묘함을 얻는 데에는 거리끼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의 게송에도 이렇게 송(頌)하였다.
마음이 온갖 경계를 따라 구르니
구르는 곳마다 진실로 신비롭다.
흐름을 따라 성품을 바로 알면
기쁨도 근심도 모두 없으리.
그러므로 일상생활의 행동하고 베푸는 것이나, 동쪽과 서쪽으로 다니는 것이나, 밥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이나, 숟가락을 들고 젓가락을 놀리는 것이나, 왼쪽을 돌아보고 오른쪽을 엿보는 것 등이 다 진심의 묘한 작용의 나타남이다. 그런데 범부들은 미혹하여 옷을 입을 때에는 다만 옷을 입는다고만 알고, 밥들 먹을 때에는 다만 밥을 먹는다고만 알아, 모든 일에 있어 형상만을 따라 구른다. 그러므로 일상생활 속에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하고 눈앞에 있건만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성품을 아는 사람이라면 움직이고 분별할 때에 전혀 어둡지 않다.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하기를 ‘태 안에 있어서는 선(禪)이라 하고 세상에 있어서는 사람이라고 하며, 눈에 있어서는 빛깔을 보고 귀에 있어서는 소리를 들으며, 코에 있어서는 냄새를 맡고 입에 있어서는 말하며, 손에 있어서는 물건을 잡고 발에 있어서는 걸어 다니며, 두루 나타나서는 법계를 두루 싸고 거두어 들어서는 한 티끌 속에 있다. 그것을 아는 이는 그것을 부처의 성품이라하고 모르는 이는 영혼이라 한다.’고 하셨다. 도오(道悟)스님이 홀(笏)을 들고 춤을 춘 것이나. 석공(石鞏)스님이 활을 당김이나, 비마(秘魔)스님이 작대기를 휘두르거나, 구지(俱脂)스님이 손가락을 세운 것이나, 흔주(炘州)스님이 땅을 두드린 것이나, 운암(雲岩)스님이 사자를 놀리는 등 이 모두가 다 하나의 큰 작용을 밝힌 것으로서, 일상생활에서 미혹하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자유자재하여 걸림이 없었던 것이다.”
5. 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은 같은가 다른가.
[질문] 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은 하나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대답] 형상으로 보면 하나가 아니요, 성품으로 보면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그 본체와 작용과는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다. 어떻게 그럴 줄을 아는가? 시험해 설명하리라. 묘한 본체는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서 모든 상대를 뛰어넘어 모든 형상을 떠났으므로, 성품을 밝게 알아 증득한 이가 아니면 그 이치를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또 묘한 작용은 인연을 따르는 것으로서, 온갖 사물에 응하여 허망하게 형상을 세워 형상이 있는 듯 하므로 형상이 있기도 하고(用) 없기도 한(體)면으로 볼 때는 하나가 아니다. 또 작용은 본체로부터 일어났는지라 작용이 본체를 여의지 않았고 본체가 능히 작용을 일으키는지라 본체가 작용을 떠나지 않는다. 이 서로 떠나지 않는 이치의 면으로 볼 때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마치 물은 젖음으로 본체를 삼으니 본체(젖음)에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요, 파도는 움직임으로써 형상을 삼나니 바람으로 인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물의 성품과 파도의 성품은 하나는 움직이고 하나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물결밖에 물이 없고 물 밖에 물결이 없어 그 젖는 성품은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이상으로 생각해보면 본체와 작용이 하나인지 다른지를 가히 알 수 있다.
6. 참마음이 미혹 속에 있음
[질문] 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사람마다 다 갖추어져 있는데 왜 성인과 범부가 같지 않습니까?
[대답] 참마음은 범부와 성인이 같건만 범부는 망령된 마음으로 물건을 참이라고 잘못 인정함으로써 깨끗한 성품을 잃어버린다. 이것이 장애가 되기 때문에 참마음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 마치 어두움 속의 나무그림자와 같고, 땅속의 샘줄기 같아서 있으되 알지 못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경에 말하기를 ‘선남자여, 비유하건데 깨끗한 마니구슬에 다섯 가지 빛깔이 비치어 방향마다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거늘 어리석은 무리는 그 마니구슬에 실제로 그러한 빛깔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처럼, 선남자여 원각의 깨끗한 성품이 몸과 마음에 나타나 사물을 따라 각각 응해 주면 저 우매한 사람은 깨끗한 원각에 진실로 그런 몸과 마음의 자기 성품이 있다고 말한 것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하였다. 조론(肇論)에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와 우주 안에 한 보배가 몸뚱이의 산 속에 감춰져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참마음이 얽매임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또 자은(慈恩)스님은 말하기를 ‘법신이 본래부터 있어서 모든 부처가 공통으로 가졌는데 범부는 망념에 덮이어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번뇌에 싸여 있기 때문에 여래장(如來藏)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하였다. 또 배공(裵公)은 말하기를 ‘종일토록 원각(圓覺)하면서 원각하지 못하는 자는 범부다’하였다. 그러므로 진심은 비록 번뇌 속에 있으나 그 번뇌에 물들지 않는 것은, 마치 백옥이 진흙 속에 던져져 있어도 그 빛이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은 줄을 알 것이다.
7. 참마음을 가리는 망연을 쉼
[질문] 참마음이 미망 속에 있는 것이 범부일진데, 어찌하면 미망에서 나와 성인을 이룰 수 있겠는가?
[대답] 옛사람이 말하기를 ‘허망한 마음이 없어지는 그곳이 보리요, 생사와 열반이 본래 평등하다’하였다. 또 경에 이르기를 ‘중생들의 허깨비의 몸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의 마음도 사라지고, 허깨비의 마음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의 대상도 사라지며 허깨비의 대상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의 사라짐까지도 사라지고, 허깨비의 사라짐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가 아닌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갈 때에 때가 없어지면 밝은 빛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영가스님도 말하기를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두 가지는 마치 거울 위의 먼지 같다. 먼지와 때가 다할 때에 광명은 비로소 나타나고 마음과 법을 모두 잊을 때에 성품은 곧 참되어진다.’하였으니 이것이 곧 허망에서 벗어나서 참을 이루는 모습이다.
[질문] 장자가 말하기를 ‘마음이란 뜨겁기는 타는 불이요 차갑기는 언 얼음이며, 빠르기는 내려보고 올려보는 사이에 사해(四海) 밖을 두 번 어루만진다. 가만히 있을 때는 깊고 고요하며 움직일 때는 하늘까지 멀리 가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뿐이로다’하였습니다. 이것은 장자가 범부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음을 이와 같다고 이미 설파한 것이거늘 선문(禪門)에서는 어떤 법으로 허망한 마음을 다스립니까?
[대답] 무심(無心)의 법으로 망심(妄心)을 다스린다.
[질문]사람이 무심이 되면 초목과 같게 될 것이니, 무심이란 말씀에 대하여 방편을 베풀어 주십시오.
[대답] 무심이라 한 것은 마음의 본체가 없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무심이라 할뿐이다. 마치 빈 병을 말할 때 병속에 물건이 없는 것을 빈 병이라 하고, 병 자체가 없는 것을 빈 병이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하기를 ‘그대가 다만 마음에 일이 없고, 일에 마음이 없으면 자연히 텅 비어 신령스럽고 고요하여 묘하리라’ 하니, 이것이 마음을 말 한 참뜻이다. 이에 의하건대 허망한 마음이 없을지언정 참마음의 묘한 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옛 부터 여러 스님 네가 무심의 공부를 한 것이 여러 가지가 각각 다르니, 지금 그 대의를 한데 뭉쳐 대략 열 가지로 밝히리라.
첫째는 깨달아 살핌이니 공부를 할 때에는 항상 잡념을 끊어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즉 한 생각이 겨우 일어나거든 곧 그것을 깨달아 부수는 것이니 망념이 깨달음에 부서지면 다음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므로 깨달은 지혜마저도 버려야 한다. 망념과 깨달음을 함께 잊어버리면 그것을 무심이라 한다. 그래서 조사께서는 ‘망념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며 오직 깨달음이 더딤을 두려워하라’고 하였다. 또 게송으로 말하기를 ‘진심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다만 소견을 쉬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깨달아 살피어 망념을 쉬는 공부다.
둘째는 쉬고 쉬는 것이니, 이른바 공부할 때에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으며 마음이 일어나거든 곧 쉬고, 인연을 만나거든 곧 쉰다는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가닥 흰 비단인 듯, 싸늘하여 가을비 내리듯, 옛날 사당 안의 향로 같이 하라’하였다. 즉 망상을 끊고 분별을 떠나 바다와 같고 말뚝과 같게 되어야 비로소 참마음과 합친다 하였으니, 이것이 망심을 쉬는 공부다.
셋째는 마음을 없애고 경계를 남기는 공부니, 공부할 때에 모든 망념을 다 쉬어 바깥 경계로 돌아보지 않고 다만 스스로 마음을 쉬는 것이니, 망심만 쉬면 경계가 있다고 무엇이 방해가 되리요? 즉 옛사람의 말에 ‘사람만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다.’는 법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말하기를 ‘다만 스스로 만물에 무심하면 만물이 항상 나를 둘러싸고 있다 하더라도 무엇이 방해가 되리요’하였으니 이것이 곧 마음을 없애고 대상을 두어 망심을 쉬는 공부다.
넷째는 경계를 없애고 마음을 두는 것이다. 공부할 때에 안팍의 모든 대상을 다 비워 고요하다고 관찰하고 오직 한 마음만을 남겨서 외로이 우뚝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이 말하기를 ‘모든 법과 짝하지 않고 모든 대상과 상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일 그 마음이 대상에 집착하면 그것이 곧 망심이라. 지금에 이미 대상이 없어졌는데 무슨 망심이 있겠는가? 즉 참마음이 홀로 비추어 도에 걸리지 않는 것이니. 옛사람의 이른바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동산에 꽃은 이미 다 떨어졌는데 수레와 말은 아직도 붐빈다.’하였고 또 ‘삼천 명의 검객은 지금 어디에 있는고? 홀로 장주(蔣周)가 태평이 이룩했네’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대상을 없애고 마음을 남기는 마음 쉬는 공부이다.
다섯째는 마음과 대상을 모두 잊는 공부다. 공부할 때에 먼저 바깥 대상을 비우고 다음에 안으로 마음을 멸하는 것이다. 이미 안팎으로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고요해졌는데 망심이 무엇을 좇아 일어나겠는가? 관계(灌溪)스님이 말하기를 ‘방에 벽이 없고 사방에 문도 없어 발가벗은 듯 맑디맑다’ 하였으니 이는, 조사들이 말한 사람과 대상을 함께 빼앗는 법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말하기를 ‘구름이 흩어지고 물이 흘러가니 고요하여 천지가 이었다.’하고, 또 말하기를 ‘사람과 소를 모두 볼 수 없으니 바야흐로 달이 밝은 때라’하니, 이는 마음도 없애고 대상도 없애 망심을 쉬는 공부다.
여섯째는 마음과 대상을 모두 남기는 공부이니, 공부할 때에 마음이 마음의 지위에 머무르고 대상이 대상의 자리에 머물러서, 때로는 마음과 대상이 마주쳐도 마음이 경계를 취하지 않으며, 경계가 마음을 따르지 않아 제각기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자연히 망념이 생기지 않고 도에 걸림이 없으리라. 경에 말하기를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 세간의 모습이 항상 머문다’하시니 이는 곧 조사께서 말한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한 법문이다.그 러므로 어떤 이가 말하기를 ‘한 조각의 달이 바다 위에 떠오르니 몇 사람이나 누대 위로 오르는고?’하였으며, 또 어떤 이는 ‘산의 꽃 천만송이에 노는 사람 돌아갈 줄 모른다.’하니, 이것이 마음과 대상을 모두 남기고 망심을 없애는 공부다.
일곱째는 안팎이 모두 본체인 공부다. 즉 공부는 할 때에 산, 강, 땅, 해, 달, 별, 몸, 세계등 모든 법이 다같이 참마음의 본체가 되는 것이므로 고요히 비고 밝아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어 대천세계의 모래처럼 수많은 세계를 한덩이로 두드려 만드는 것이니. 또 어디서 망심이 오겠는가? 그러므로 승조(僧肇)법사도 ‘천지가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이 나와 한 몸이다’하였으니, 이것이 안팎이 완전히 본체가 되어 망심을 멸하는 공부이다.
여덟째는 안팎이 모두 작용(用)인 공부이니, 공부할 때에 일체 안팎의 몸과 마음과 세계의 모든 법과, 또 일체의 행동과 베품을 모든 진실의 묘한 작용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온갖 생각이 겨우 일어나자 곧 묘한 작용이 앞에 나타나니 모두가 그 묘한 작용인데, 망심이 어느 곳에 발 붙이겠는가? 영가스님이 말하기를’무명의 진실한 성품이 곧 부처성품이요, 허깨비같이 빈 몸이 곧 법신이다’하시며, 지공(誌公)의 12시가(十二時歌)에 말하기를 ‘첫새벽 인시(寅時)여, 미친 탈춤 속에 도인의 몸이 숨었도다. 앉고 누움이 원래 도인줄 모르고 공연히 바쁘게 고통만 부르도다.’하시니, 이것이 안팎이 완전히 작용하여 망을 쉬는 공부이다.
아홉째는 본체가 그대로가 작용인 공부이니, 즉 공부할 때에 비록 본체에 가만히 합하여 한결같이 비어 공적하나, 그 가운데에 안으로 신령한 밝음이 숨어있으니 그것의 본체가 곧 작용이다. 그러므로 영가스님은 말하기를 ‘또렷또렷(惺惺)하고 고요함(寂寂)은 옳고, 고요하고 무기(無記: 감각이 없음)인 것은 그르다.’하였으니, 고요함 가운데에 무기를 용납치 않고 또렷또렷한 가운데 망상을 용납치 않으면 온갖 망상이 어찌 생길 수 있는가? 이것이 본체 그대로가 작용이어서 망심을 없애는 공부이다.
열 번째는 본체와 작용을 뛰어넘는 공부니, 즉 공부할 때에 안팎을 나누지 않으며 동서남북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사방과 팔면을 몽땅 하나의 큰 해탈문으로 삼아 원만한 자리에서 본체와 작용을 나누지 않는다. 그리하여 털끝만큼도 빈틈이 없이 온몸을 한덩이로 두드려 만드는데 그 망심이 더 이상 일어나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온몸에 꿰맨 자리가 없어 위아래가 온통 둥글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본체와 작용을 뛰어넘어 망심을 멸하는 공부이다.
이상의 열 가지 공부하는 방법을 다 쓸 필요는 없으니, 다만 한 부분만을 찾아서 공부가 익어지면 망심은 저절로 사라지고 참마음이 곧 나타날 것이다. 그 근기와 전생 습성에 따르되 어느 법에 인연이 맞는지를 살펴서 닦아 익혀라. 그러면 이 공부는 공부가 없는 공부이므로 애를 쓰는 공력이 아니다. 이 망심이 쉬는 법문이 가장 긴요하므로 가장 말이 많아진 것이니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8. 참마음을 닦는 네 가지 위의
[질문] 앞에서 망심 쉬는 법을 말씀하셨는데. 다만 앉아서만 익힙니까? 아니면 다니거나 섰거나 할 때도 통하는 것입니까?
[대답] 여러 경과 논에서 앉아서 익히는 법을 많이 말씀하셨으니 그것을 이루기 쉽기 때문이며, 다니거나 섰을 때에도 통한다 하였으니 오래오래 익혀야 차츰 익혀지지 때문이다. <기신론>에 말하기를 ‘만일 선정(止)을 닦는 사람이 고요한 곳에서 단정히 앉아 뜻을 바로 할 때에는 호흡에도 의지하지 않고 몸에도 의지하지 않고 공(空)에도 의지하지 않고 땅, 물, 불, 바람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나아가서는 보고 듣고 깨닫는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망심이 일어나면 일어나자 곧 버리며, 버린다는 생각까지 버려야 한다. 그것은 모든 법은 본래 생각이 없어 생각 생각에 나지도 않고 생각 생각에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기 대문이다. 또 마음을 따라 밖으로 대상을 생각한 뒤에 마음으로 마음을 버리지 못 할 것이요, 만일 마음이 흩어지거든 곧 거두어 들여 바른 생각에 머무르게 할 것이니, 그, 바른 생각이란 오직 마음 뿐으로서 바깥대상이 없으며, 또 그 마음도 자기모양이 없어 생각 생각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자리에서 일어나 가고 오고 나아가고 물러가며, 온갖 분별동작을 하더라도 언제나 항상 방편을 생각해서 분수에 따라 관찰해서 오래 익히어 순일하게 익어지면 그 마음이 머물게 될 것이다.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에 차츰 용맹해져서, 그것을 따라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들어가서 번뇌를 깊이 굴복시키며 신심이 늘어나서 물러나지 않는 지위를 빨리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의혹하고 믿지 않으며, 비방하고 죄가 중하고, 업장이 두텁고 교만하여 게으른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 한다.’하였느니 여기에 의하면 네 가지 자세를 통하는 것이다.
<원각경>에 말하기를 ‘다니는 것도 선정이요, 앉아 있는 것도 선정이며,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고 고요할 때에도 본체는 언제나 태연하다’하니 이 말에 의하여도 역시 네 가지 자세에 통하는 것이다. 총괄해서 그 공부를 말한다면 앉아서도 마음을 쉬기 어렵거늘 하물며 다니고 멈추는 등에서 어찌 능히 도에 들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부의 작용이 완전히 익숙한 사람이라면 천성인이 나타나더라고 꼼짝도 하지 않고, 만 가지 요망한 마귀가 있더라도 돌아보지도 않거늘 어찌 다니고 멈추고 앉는 가운데서 공부하지 못 하겠는가 ?
마치 어떤 사람이 원수를 갚으려 하여도 다니거나 섰거나, 앉거나 눕거나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항상 잊지 못하며, 또 누구를 사랑하는 데도 그와 같다. 그런데 더구나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일은 유심(有心)의 일로서 그 유심의 가운데서도 오히려 이룰 수 있거늘 지금 이 공부는 무심의 일이니, 어찌 사의(四儀) 가운데서 항상 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의심하겠는가? 다만 믿지 않고 행하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요, 만일 행하고 믿으면 네 가지 위의 가운데서 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9. 참마음이 있는 곳
[질문] 망심을 쉬면 참마음이 나타난다 하니, 그러면 그 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대답] 참마음의 묘한 본체는 온갖 곳에 두루하였다. 영가스님이 말하기를 ‘제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湛然)하지만, 찾으면 그대는 보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또 경에 말씀하기를 ‘허공의 성품이기 때문이며, 언제나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며, 여래장 안에서 일거나 사라짐이 없기 때문이다’하였다. 또 대법안(大法眼)스님은 말씀하기를 ‘곳곳마다 보리의 길이요 일마다 공덕의 숲이라’하시니, 이것이 곧 마음이 있는 곳이다. 참마음의 묘한 작용은 느낌에 따라 나타남이 마치 빈 골짜기에 메아리와 같다. 법등(法燈)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예나 지금이나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분명히 눈앞에 있다. 조각구름은 서녘 골짜기에서 생기고 외로운 학은 먼 하늘에서 내린다’하였다. 그러므로 위부(魏府)의 노화엄(老華嚴)이 말하기를 ‘불법은 일상생활 가운데 있다. 걸어다니고 서며 앉고 누우며, 차를 마시고 밥을 먹으며 말로 서로 묻는 데와 모든 일하는 곳에 있지만,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이면 또 그렇지 않다’ 하였다. 본체는 모든 곳에 두루하여 모든 작용을 일으키지만 다만 인연의 있고 없음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묘한 작용이 일정하지 않을 뿐이요, 그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을 닦는 사람으로 무위의 바다에 들어가 생사를 건너려 하거든, 진심의 본체와 묘한 작용이 있는 곳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10. 참마음은 생사를 벗어남
[질문] 견성(見性)을 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이지만 모두가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은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 합니까?
[대답] 생사가 본래 없는 것인데 망령되어 있다고 헤아린다. 마치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에 어른거리는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에 꽃이 없다 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도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원래 없는 빈 것이건마는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할 때에 생사가 없는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 하여도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는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마는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선남자여, 일체중생이 끝없는 옛 부터 갖가지 뒤바뀜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바꾸어 선 것 같이 망령되이 사대(四大)를 허망하게 오인해서 자기의 몸이라 여기고 육진(六塵)의 그림자로 자기의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건대 병들은 눈이 허공 속의 꽃을 보는 것과 같으며, 나아가서는 뭇 허공 꽃이 허공에서 멸할 때에도, 결코 사라진 곳에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생기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이 생김이 없는 가운데서 허망하게 생멸을 보기 때문에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고하였다.
이 경문에 의하면 원각(圓覺)의 참마음을 통달하여 깨달으면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제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투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 암바(庵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묻기를 ‘생사가 바로 생사가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사온데 무엇 때문에 생사가 흘러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사가 곧 생사가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가 흘러 다닙니까?” 수산주는 ‘죽순이 필경에는 대가 되겠지마는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면 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즉 생사의 없음을 아는 것이 생사 없음을 체득하는 것만 못하고, 생사 없음을 체득하는 것이 생사 없음에 계합하는 것만 못하고, 생사 없음에 계합함이 생사 없음을 활용하는 것만 못 한 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생사 없음조차 모르거늘 하물며 생사 없음을 체득하거나 계합하거나 활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오인하는 이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11. 참마음을 드러내는 수행
[질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망심을 쉬면 참마음이 나타나건만 망심을 쉬기 전에는 다만 망심만을 쉬어서 무심(無心)의 공부를 닦아야 합니까? 아니면 따로 망심을 다스릴 다른 법이 있습니까?
[대답] 바른 행[正]과 도움의 행[助]이 다르다. 무심으로 망심을 쉬는 것으로써 바른 행을 삼고, 온갖 선을 행함으로써 도움의 행을 삼는다. 비유하면 거울이 티끌에 덮었을 때에 손으로 닦아야 하겠지마는 다시 묘한 약으로 문질러야 비로소 광명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티끌은 번뇌요 손은 무심의 공부며, 문지르는 약은 온갖 선행이요 거울의 광명은 진심이다. <기신론>에 이르기를 ‘다시 믿음을 성취한 발심이란 것은 어떤 마음을 발하는 것인가. 대략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곧은 마음이니 진여의 법을 바로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깊은 마음이니 일체의 선행을 모으기 때문이며, 셋째는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니 모든 중생을 고뇌에서 구제하려 하기 때문이다’하였다.
[질문] 위에서 법계는 한 모양이므로 부처의 체(體)는 둘이 없다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진여만 생각하지 않고 다시 온갖 선행을 구해 배워야 한다 합니까?
[대답] 마치 큰 마니보주가 그 본체의 성품이 밝고 맑으나 광물찌꺼기의 티가 있나니, 어떤 사람이 비록 보배의 성품을 잘 알았으나 방편을 써서 갖가지 방법으로 갈고 닦지 않으면 끝내 맑아질 수 없는 것 같다. 중생들의 진여의 법도 그 본체와 성품이 비고 맑으나 한량없는 번뇌의 때가 있으니, 비록 진여를 생각하나 방편 없어서 온갖 법에 두루 덮었기 때문에 모든 선법을 수행하면 저절로 진여의 법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신론>론에 의하면 ‘망심을 쉬는 것으로 바른 행[正]을 삼고 모든 선법을 닦는 것으로 도움의 행[助]을 삼는다. 그러므로 선행을 닦을 때엔 무심과 서로 맞아 인과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인과에 집착하면 범부들의 인간과 천상의 과보에 떨어져 진여를 증득하기 어려우므로 생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만일 무심과 서로 맞으면 그것은 진여를 증득 하는 방편이요, 생사를 벗어나는 중요한 방법이라, 광대한 복덕을 아울러 얻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금강반야경>에 ‘수보리여,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를 하면 그 복덕은 한량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그러나 요즘 세상 사람들의 공부하는 것을 보면, 겨우 한낱 본래의 불성을 알고는 곧 스스로의 천진(天眞)을 믿고 많은 선행을 닦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진심에 통달하지 못 할 뿐 아니라 도리어 게을러져 악도에 떨어짐을 면하지 못 하거늘 어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런 소견을 아주 그릇된 것이다.
12. 참 마음의 공덕
[질문] 마음이 있으므로 인(因)행을 닦으면 공덕됨을 의심치 않겠지만, 무심으로 인행을 닦으면 공덕이 어디서 오는가?
[대답] 마음이 있으므로 인행을 닦음은 유위의 과보를 얻고 무심으로 인행을 닦으면 성품의 공덕을 나타낸다. 그 온갖 공덕은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었으나 망심에 덮여 나타나지 못하였다가 이제 이미 망심이 없어졌으므로 그 공덕이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가스님은 말하기를 ‘삼신(三身:法身.報身.應身)과 네 지혜(四智:大圓鏡智.平等性智.妙觀祭智.成所作智)는 몸 가운데 원만하고, 여덟 가지 해탈과 여섯 가지 신통이 마음바탕에 새겼다’하시니 이것은 본체 가운데 갖추어진 본성의 공덕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만일 누구나 잠깐 동안이나마 조용히 앉으면 항하의 모래 수 같은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훌륭하다. 보탑은 필경에 티끌이 되겠지마는 한 생각의 깨끗한 마음은 부처를 이룬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심의 공덕이 유심(有心)의 공덕보다 큰 줄 알 것이다. 홍주(洪州)의 수료스님은 마조스님에게 나아가 절하고 묻기를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 분명한 뜻입니까’ 하다가 마조스님에게 발길로 차여 거꾸러져지고는 갑자기 깨치고 일어나 손뻑을 치면서 크게 웃고 ‘매우 기이하고 매우 기이하여라. 백천삼매와 한량없는 묘한 이치의 근원을 다만 한 털끝에서 단박 근원을 알아내었다.’하고 예배하고 물러갔다. 이로써 보면, 공덕이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사조(四組)스님이 나융 선사에게 ‘대개 백천의 법문도 모두 마음으로 돌아가고 항하의 모래 수 같은 공덕도 다 마음의 근원에 있으므로, 일체의 계율, 선정, 지혜, 신통, 변화가 모두 본래 구족해서 그대의 마음을 여의지 않았다.’하였다 조사의 말에 의하면 무심의 공덕이 한없이 많건만는 다만 겉모양의 공덕에만 집착하는 이는 무심공덕에 대하여 자연히 믿음을 내지 못한다.”
13. 참마음 공부의 시험
[질문] 참마음이 앞에 나타날 때 어떻게 그 참마음이 성숙하여 걸림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까?
[대답] 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마음이 앞에 나타남을 보았을 때 아직 습기를 버리지 못 하고 전에 익히던 망(妄)의 경지를 만나면 때로는 생각을 잃는 수가 있다. 마치 소를 먹이는 사람이 비록 잘 다루어 끌면 순응하는 경지까지 길들였더라도, 채찍과 고삐를 놓지 않고 마음을 부드럽게 걸음이 평온하여 곡식밭에 몰고 들어가더라도, 곡식을 해치지 않게 되기를 기다려야 비로서 손을 놓는 것과 같다. 그런 경지에 이르러서는 목동의 채찍과 고삐를 쓰지 않더라도, 자연히 곡식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이 도인이 참마음을 얻은 뒤에는 먼저 공을 들여 보호하고 지켜, 큰 힘의 작용이 있어야 비로소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참마음을 시험하려면 먼저 평상시 미워했거나 사랑했던 대상을 가져다 때때로 면전에 있다고 생각해 보아 만일 여전히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도의 마음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이요, 만일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나지 않으면 그것은 도의 마음이 성숙한 것이다. 비록 이런 경지에 이르렀더라도 아직은 미움과 사랑이 자연히 일어나지 않는 경지는 아니다. 또 다시 마음을 시험하되,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대상을 취하게 하여도 그래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마음은 걸림이 없어 마치 한데 놓아 둔 흰소가 곡식을 해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옛날에 부처를 꾸짖고 조사들이 꾸짖는 사람들은 이 마음과 상응(相應)하였는데, 요즘은 겨우 종문(宗門)에 들어와서 도의 멀고 가까움도 알지 못하고 곧 부처를 꾸짖고 조사들을 꾸짖기만을 배우는 것은 너무 이른 것이다.
14. 참 마음은 아는 바 없이 안다.
[질문] 참마음과 허망한 마음이 대상을 대할 때에 어떻게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대답] 허망한 마음으로 경계를 대하는 것은 앎이 있으므로써 아는지라 거슬리고 순하는 경계에 탐욕. 성냄. 어리석음등의 마음을 일으키나니 이미 경계에 대하여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 삼독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망상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조사는 말씀하시기를 ‘거슬림과 순경이 서로 다투는 것은 마음의 병 때문이다’하였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을 대립시키는 것은 바로 망상임을 알 것이다. 또 만일 그것이 참 마음이라면 앎이 없이 알아서 공평하고 원만히 비추므로 초목과 다르고,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망심과 다르다. 대상을 대하여도 마음이 비고 밝아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고, 앎이 없이 아는 것이 참마음이다.
그러므로 <조론(肇論)>에 ‘대개 성스러운 마음은 미묘하여 현상이 없으므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쓸수록 더욱 부지런하므로 없다고도 할 수 없으며, 나아가서는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아도 앎이 없고,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앎이 없이 안다’하였다. 그러므로 앎이 없이 아는 것은 성인의 마음과 다르다고 말 할 수 없다. 또 허망한 마음은 있음[有]에 있어서는 있음에 집착하고 무(無)에 있어서는 무에 집착하여 항상 양쪽에 치우치므로 중도(中道)를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영가스님은 ‘허망한 마음을 버리고 참마음을 취하면.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룬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수행할 줄 알지 못하여 도적을 자식으로 아는 것이 된다.’하였다. 만일 그것이 진심이라면 유무(有無)에 있으면서 유무에 떨어지지 않고 항상 중도에 있다.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있음의 반연을 쫓지도 말고 공(空)이라는 생각도 머무르지 않아 한결같이 생각을 공평히 하면 모두가 저절로 없어진다.’하였다 또 <조론>에 ‘그러므로 성인이 있음에 처하되 유(有)에 집착하지 않고 무(無)에 있어도 무에 집착하지 않는다. 비록 유무를 취하지 않으나 또 유무를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번뇌에 빛을 혼동하여 다섯세계[五趣]에 두루 돌아다니되 고요히 갔다가 갑자기 와서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하였다. 이것이 성인이 사람을 위해 손을 내밀어 다섯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중생을 교화할 때에 비록 갔다 왔다 하더라도 갔다 왔다하는 상(相)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허망한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진심과 망심은 다른 것이다. 또 진심은 평상(平常)의 마음이요 망심은 평상의 마음이 아니다.
[질문] 평상의 마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대답] 사람은 누구나 한 점의 신령한 밝음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맑고 고요하기 허공과 같아 어디나 두루 있다. 세속 일에 대해서는 방편으로 이성(理性)이라 이름하고, 행식(行識)에 대해서는 방편으로 진심이라 부른다. 털끝만큼의 분별이 없지마는 인연을 만나서는 어둡지 않고, 한 생각의 취하고 버림이 없지마는 만나는 물건마다 부딪히면 모두 포섭하여 모든 대상을 따라서 옮기지 않으며, 비록 흐름을 따라 묘한 작용을 얻더라도 제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고요하다. 그러므로 ‘찾으려면 그대는 보지 못한다.’하는 것이 곧 참마음이다.
[질문] 평상이 아닌 마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대답] 경계에는 성인과 범부가 있고 경계에는 더러움과 깨끗함이 있으며, 경계에는 단(斷)과 상(常)이 있고 경계에는 이론과 현실이 있으며, 태어남과 사라짐, 움직임과 고요함, 감과 옴, 예쁨과 미움, 선과 악, 원인과 결과 등이 있나니 자세히 논한다면 천만가지 차별이 있거니와 모두가 평상치 못한 경계이다. 마음은 이 평상이 아닌 경계를 따라 생기고 또 그것을 따라 사라진다. 평상이 아닌 경계의 마음이란 앞의 평상의 참마음에 대립시키기 때문에 평상이 아닌 망심이라 하고, 진심은 본래 갖추어져 평상이 아닌 경계를 따라 갖가지 차별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평상의 진심이라 하는 것이다.
[질문] 진심은 평상하여 모든 인과가 없거늘 어찌하여 부처님은 인과와 선악의 응보를 말했습니까?
[대답] 허망한 마음이 갖가지 경계를 좇으면서 그 경계들을 알지 못하고 갖가지 마음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갖가지 인과의 법을 설명하여 그 갖가지 망심을 다스리려 하였기 때문에 인과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진심이라면 온갖 경계를 따르지 않으므로 온갖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도 갖가지 법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니, 거기에 무슨 인과가 있겠는가?
[질문] 진심은 평상하여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대답] 참마음은 작용할 때가 있지마는 경계를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요, 다만 묘한 작용으로 유희하여 인과에 어둡지 않을 뿐이다.
15. 참 마음이 가는 곳
[질문] 참 마음을 통달치 못한 사람은 참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선악을 짓습니다. 선의 인을 짓기 때문에 좋은 세계에 나고 악의 인을 짓기 때문에 나쁜 세계에 들어가는데, 업에 따라 상을 받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심을 아는 사람은 망상이 모두 없어지고 진심에 계합하여 선악의 인이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죽은 뒤에 그 영은 어느 곳에 의탁합니까?
[대답] 의탁할 곳이 있는 것이 의탁할 곳이 없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여기지도 말고, 또 의탁할 곳이 없다는 말로써 인간이 갈 곳 없는 방랑자와 같다고 여기지도 말고, 귀신 무리에서 의지할 데 없는 무주고혼 같이도 여기지 말라. 특별히 이렇게 물어서 의탁할 곳이 있기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성품을 통달하면 그렇지 않나니, 일체중생들은 깨닫는 성품을 모르기 때문에 허망한 정과 사랑하는 생각으로 업을 짓고 인을 삼아 여섯 갈래[六趣]에 태어나서 선과 악의 과보를 받는다. 가령 천상의 업을 지어서는 천상의 과보를 받아도 제가 마땅히 날 곳을 제하고는 수용하지 못한다. 다른 세계도 그와 같아서 그 업을 따르기 때문에 자기가 난 곳을 즐겁다 하고 나지 않은 곳을 즐겁지 않다 하며, 제가 난 곳을 자기가 의탁할 곳이라 하고 남이 난 곳을 남이 의탁할 곳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허망한 정이 있으면 허망한 인이 있고, 허망한 인이 있으면 허망한 과가 있으며, 허망한 과가 있으면 허멍한 의탁할 곳이 있고, 허망한 의탁할 곳이 있으면 피차가 갈라지며, 피차가 갈라지면 옳고 옳지 못함이 있다.
지금 진심을 알아서 생멸이 없는 깨닫는 성(性)에 계합하여 생멸이 없는 묘한 작용을 일으킨다. 묘한 본체는 진실하고 항상하여 본래 생멸이 없다. 묘한 작용은 인연을 따르므로 생멸이 있는 듯 하지만 본체에서 생긴 작용이라 작용이 곧 본체인데 거기서 무슨 생멸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달인(達人)은 본체를 증득 하였는데 생멸이 무슨 상관인가. 그것은 물과 같다. 즉 물은 젖는 성이 그 본체요 물결이 그 작용이니, 원래 생멸이 없는데 물결 속의 젖는 성품에 무슨 생멸이 있겠는가. 그러나 물결이 젖는 성품을 떠나서는 따로 없기 때문에 물결에도 생멸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말하기를 ‘온 대지가 승려의 한짝 바른 눈이면 온 대지기 하나의 절이라. 이것이 이치를 깨친 사람의 안신입명 할 곳이다’하였다. 이미 참 마음을 알았으므로 사생과 육도가 모두 사라지고, 산하대지가 모두 참 마음이라, 이 참 마음을 떠나 따로 의탁할 곳이 없다. 이미 삼계의 허망한 인이 없어졌으므로 반드시 육도의 허망한 과보도 없을 것이니, 허망한 과보가 없어졌는데 무슨 의탁할 곳을 말하겠는가. 또 따로 피차가 없으니 피차가 없다면 무슨 옳고 옳지 않음이 있겠는가.
즉 시방세계는 오직 하나의 참마음이라 온몸으로 수용하므로 따로 의탁할 곳이 없고, 또 시현문(示現門-방편으로 나타내 보임) 가운데서 마음대로 가서 태어나더라도 아무 장애가 없다. 그러므로 전등록에서 온조 상서가 규봉 스님에게 묻기를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수명이 다하면 어디에 의탁하는가?’ 하니 규봉은 ‘일체중생이 모두 신령스러운 밝은 깨달음의 성을 갖추어 부처와 다름이 없으므로 만 일 그 성이 곧 법신임을 깨치면 본래 태어남이 없거늘 무슨 의탁할 곳이 있겠는가. 신령스러이 밝아 어둡지 않고 항상 분명히 알며 어디서 온 곳도 없고 어디로 갈 곳도 없다. 다만 비고 고요함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삼고 허망한 생각을 진심으로 인정하지 말아라. 허망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저절로 그 없이 얽매지 못할 것이요, 혹 중음이 있더라도 향하는 곳마다 자유로 와서 하늘과 인간에 마음대로 의탁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죽은 뒤에 참 마음이 가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