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생불멸은 유나 무를 얻을 수 없고 생멸을 떠난 것이다.
전도견은 법에 성푸이 있다고 보는 견해다.
불생불멸이 열반이다.
불생불멸도 방편을 닦지 않으면 불선이 된다.
보살 마하살은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이치에 맞게 설법해야 한다.
뜻에 다르고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다. 진실한 법은 문자를 떠났기 때문에 희론이 모두 끊어진다.
문자는 누가누구를 위해 말하겠는가.
법이 끊어진다.
많이 듣는다는 것은 뜻을 잘 안다는 것이지 말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일체의 법 가운데 사물과 사물없음이 무상하다는 것은 만드는 것을 능조(能造), 만들어진 것을 소조(所造), 그 모양이 괴멸(壞滅)하지만 대종(大種)의 자성은 본래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물질이 무상하다는 것은 能造와 所造의 물질의 체는 소멸하지 않고 형상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물질을 부수면 미진하여 길고 짧음으로 소멸한다는 것은 數論에 빠진다.
로카야타의 견해에 빠진다.
세간 출세간, 출세간상상의 모든 법은 오직 자기 마음일뿐 상(常)도 아니고 무상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외도는 스스로 언설을 일으켜 무상의 성품에 집착한다.
*원담스님, 2017년10월16일(월) 무신론 비판)에서
로카야타(Lokayata): 로카Loka는 세상 혹은 우주인데 ‘부서지는 것’이란 뜻이다. 여기에 아야타ayata(포섭되어 들어감)을 붙여서 로카야타Lokayata, 순세외도順世外道라 한다. 로카야타는 유물론자들이다. 짜르바카Carvaka라 하기도 한다.
①세상에는 오직 물질뿐이다. 로카야타들이 보는 세상은 ‘부서질 것, 깨어질 것, 붕괴될 것, 사라질 것’들의 덩어리에 불과하였다. 유물론적이면서 허무주의적이다. 당연히 영혼이나 내생을 부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게 최상의 삶인가? 살아있을 때 최대한 즐겨라. 쾌락을 누리는 것이 최상의 삶이다. 죽으면 끝이니까 가능한 한 많은 빚을 내어 감각적 쾌락을 최대한 만족시켜라.
②이 세상 모든 것은 원자의 안정된 패턴Pattern이다. 물질은 안정화 경향이 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慣性관성의 법칙에 지배받는다. 정지된 물체는 외부에서 충격이 가해지지 않는 한 영원히 정지된 채로 있다. 물질은 가장 안정된 위치나 에너지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안정된 상태stable↔여기勵起상태excited
③의식(마음,정신)은 종種의 진화과정 중 어떤 시점에서 표현형적 특성으로 발생했다. 그 전엔 非存在비존재였다. 의식이란 물질로부터 생긴 것이다. 마치 발효된 누룩으로부터 술의 취醉하는 성질이 생기는 것과 같다.
(물질 → 생명 → 진화 → 표현형 → 의식)
④비물질적 영혼은 없다. 영혼이란 의식이 있는 몸(=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⑤물질 덩어리는 흩어지고, 부서지고, 남는 게 없다. → 죽음은 끝이다.
⑥문제점: 물질은 안정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의식(=생명)은 즐거움 추구의 경향이 있다.
ⓐ안정화 경향과 즐거움 추구의 경향은 상반된 개념이다.
ⓑ생명체는 즐거움을 택한다. 생명체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안정을 포기할 수도 있다. 생명체는 즐거움을 위해서 죽음도 불사한다. 그러므로 생명체의 활동을 물질법칙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생명에게는 물질과는 질적으로 다른 즐거움 추구의 경향이 있다. 생명체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경향은 물질 활동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고, 의식활동의 결과인 것으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로카야타는 물질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는 인간의 의식문제를 물질과정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로카야타를 극복한 새로운 사상이 요구되었다.
*참고: 수행을 하면 심신이 안정되면서도 즐거움이 따라오는 효과가 있기에 안정과 즐거움을 동시에 얻게 해준다. 수행하면 선정에 들어 평안과 喜樂희락을 누리게 되므로 그러하다.
ⓒ에너지가 있는 곳에 한 무리의 원자가 안정된 패턴Pattern이 되면 그것은 그대로 머물려고 한다. 그러나 생명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추구한다. 따라서 생명활동은 유물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