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는 동체재비(同體大悲)를 말한다.
이 세상은 나와 같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법구경의 말씀에서 보듯이 우주는 연기의 실상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나와 인연되어 있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로 자비심을 일으키는 단계에 따라 중생연자비·법연자비·무연자비의 3연자비로 구분된다.
인간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와 무생명체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인 자비를 베푸는 것을 가르친다.
일반적인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의 정신은 자·비·희·사의 4가지 무량한 마음을 일으키는 사무량심으로도 표현되는데, '무량'은 무량한 중생을 대상으로 하며 무량한 복을 가져온다는 의미가 있다.
대상에 대한 차별이나 조건 없이 행하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자비정신에 입각한 사섭법(四攝法)이 있다. 보시(布施)·애어(愛語)·이행(利行)·동사섭(同事攝)이다.
내가 상대를 동정심이 일어나서 사랑 혹은 연민으로 보살핀다는 것은 자비로 알고 있으나
연기법의 중도실상을 바로 알면 주객이 없는 상태 나와 너를 구분하지 또다른 나라는 상태가 자비의 본래 성품이다.
산스크리트어에서도 慈는 벗이고 우정을 悲는 공감 동정을 나타 내듯이 나와 같은 생각이나 마음을 말한다.
아래의 참고 자료를 보면
자비
자(慈)는 사랑의 마음으로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말하는데, 산스크리트 마이트리(maitrῑ)는 벗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 미트라(mitra)에서 유래한 말로서 진실한 우정을 뜻한다. 비(悲)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으로, 산스크리트 카루나(karunā)는 공감, 동정, 연민, 함께 슬퍼함 등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세계를 대하는 태도로서 지혜를 바탕으로 하는 자비의 정신을 강조하여 인간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와 무생명체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인 자비를 베푸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자비심을 일으키는 단계에 따라 중생연자비(衆生緣慈悲)·법연자비(法緣慈悲)·무연자비(無緣慈悲)의 3연자비(三緣慈悲)로 구분된다.
① 중생연자비 : 중생의 개별적인 모습을 보고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고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생각하여 베푸는 자비로서 범부나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한 이가 행하는 자비이다. ② 법연자비 : 일체제법(一切諸法)이 5온(五蘊)의 화합하여 생겨난 공(空)한 것임을 깨닫고 베푸는 자비로 번뇌가 끊어진 성자(聖者)가 일으키는 자비이다. ③ 무연자비 : 온갖 차별된 견해를 여읜 절대평등의 경지에서 제법의 진여실상(眞如實相)을 깨달은 큰 보살과 부처가 행하는 자비이므로 대자대비라고 한다.
자비의 정신은 자(慈)·비(悲)·희(喜)·사(捨)의 4가지 무량한 마음을 일으키는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도 표현되는데, '무량'은 무량한 중생을 대상으로 하며 무량한 복을 가져온다는 의미가 있다. ① 자무량심 : 선한 중생을 대상으로 하는 마음가짐으로 번뇌에 얽매여 괴로워하는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② 비무량심 : 악한 중생을 보고 슬퍼하여 그들의 괴로움을 없애주려는 마음이다.
③ 희무량심 : 청정한 수행을 닦는 중생을 보고 기뻐하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처음에는 친근한 사람에 대해 희무량심을 불러일으키고 점차로 다른 사람에게 널리 미치도록 한다. ④ 사무량심 :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아 자타(自他)·애증(愛憎)·원친(怨親) 등의 모든 차별을 없앤 마음으로 처음에는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로 친한 사람과 미운 사람에 대해 이 마음을 일으키도록 한다. 사무량심은 보살도를 행할 때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마음가짐으로 자비심(慈悲心)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대시킨 것이다.
<다음백과사전 >
자(慈)와 비(悲) 두 낱말의 합성어이다.
자는 애념(愛念: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중생에게 낙(樂)을 주는 것이요, 비는 민념(愍念: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중생의 고(苦)를 없애주는 사랑이다. 이 자비는 사랑과 연민의 뜻을 함께 포함한 것으로, 이기적인 탐욕을 벗어나고 넓은 마음으로 질투심과 분노의 마음을 극복할 때에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자비는 철저한 무아사상(無我思想)을 바탕으로 하여 중생에게 실제로 즐거움을 주고 중생의 고통을 제거하여 주며, 근본적으로 그 근심 걱정과 슬픔의 뿌리를 뽑아내어 주는 지극한 사랑이다.
이 자비에는 중생연(衆生緣)·법연(法緣)·무연(無緣)의 삼연자비(三緣慈悲)가 있다. 중생연자비는 친한 사람이나 친분이 없는 사람 모두를 친한 사람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베푸는 자비이다. 이것은 범부 또는 도(道)에 뜻을 두면서도 아직 번뇌를 끊어버리지 못한 이가 일으키는 자비이다.
법연자비는 일체의 법(法)이 5온(蘊)의 거짓된 화합임을 알고, 대상과 마음의 본체가 공(空)한 줄을 깨달은 성자(聖者)들이 일으키는 자비이다.
무연자비는 온갖 차별된 견해를 여의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아는 부처에게만 있는 자비이다. 이미 대상과 마음 등 모든 현상의 헛된 모습을 알 뿐만 아니라, 인연에 따라 동요됨이 없는 부처가 저절로 일체 중생에 대하여 고통을 없애고 낙을 주려는 힘이 있음을 말한다.
또한, 한없는 중생을 한없는 사랑으로 제도하겠다는 자(慈)·비(悲)·희(喜)·사(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도 자비의 극치로서 표현된다. 자무량심은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베풀어주는 마음가짐으로, 처음은 자기가 받는 낙을 남도 받게 하기로 뜻을 두고 먼저 친한 이부터 시작하여 일체 중생에게까지 미치게 한다.
비무량심은 무진(無瞋)을 바탕으로 하여 남의 고통을 벗겨주려는 마음으로, 처음은 친한 이의 고통을 벗겨주고 점차로 확대하여 다른 이에게도 미치게 하는 사랑이다. 희무량심은 희수(喜受)를 근본으로 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을 여의고 낙을 얻어 희열을 안겨주려는 마음으로, 처음은 친한 이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다른 이에게로 미치게 한다.
사무량심은 무탐(無貪)을 바탕으로 하여 중생을 평등하게 보아 원(怨)·친(親)의 구별을 두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처음은 자기에게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에 대하여 일으키고, 점차로 친한 이와 미운 사람에게 평등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수행의 근본을 자비에 두고 있다. 고려의 고승 지눌(知訥)은 ≪권수정혜결사문 勸修定慧結社文≫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수행자는 먼저 남을 구제할 서원(誓願)을 세워 선정과 지혜를 닦고, 도의 힘이 모이면 자비를 구름처럼 펴서 영원토록 고뇌하는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 조선 중기의 고승 휴정(休靜)은 “닦아 가는 길이 한량없지만 자비와 인욕이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비는 수행의 완성을 위하여 닦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중요시되었고, 그것은 고뇌하는 중생을 구제하고 성불의 길로 인도하는 섭행(攝行)의 실천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고 섭수(攝受)하기 위하여 행하는 기본행위로는 사섭법(四攝法)이 있다. 이 네 가지 기본적인 자비행은 보시(布施)·애어(愛語)·이행(利行)·동사(同事)이다.
‘보시’는 중생이 재물을 구하거나 진리를 구할 때 힘 닿는 데까지 베풀어주어서 친애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시를 할 때 그 상대방에 대하여 어떤 조건을 붙이게 된다면 그것은 참다운 자비가 될 수 없다고 한다. 대상에 대한 차별이나 조건 없이 행하는 보시가 될 때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자비정신에 입각한 보시가 된다는 것이다.
‘애어’는 중생을 불교의 진리 속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여 친애하는 정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이는 자비를 실천하는 보살이라면 마땅히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로 중생을 대하여야 함을 밝힌 것이다.
‘이행’은 몸과 말과 생각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이익되고 보람된 선행을 베풀어서 그들로 하여금 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동사’는 보살이 중생과 일심동체가 되어 고락을 함께 하고 화복을 같이하면서 그들을 깨우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적극적인 실천행이다.
이 동사섭(同事攝)은 보살의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에 근거를 둔 것으로, 함께 일하고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 동사섭은 불교의 자비행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고 가치 있는 실천방법이다. 보시·애어·이행은 처해진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만 동사섭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 동사의 자비행을 실천한 대표적인 고승으로는, 혜숙(惠宿)·혜공(惠空)·대안(大安)·원효(元曉)·언기(彦機) 등을 꼽을 수 있다. 혜숙은 국선(國仙) 구참(瞿旵)의 그릇된 사냥을 막기 위하여 허벅지의 살을 베기도 하였고, 여자의 침상에 누워 자기도 하였다. 혜공은 천진공(天眞空)의 병을 고치는 한편, 언제나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에게 불교를 전파하였다.
대안은 거리를 다니면서 모든 사람에게 크게 편안하라고 축원하였으므로 ‘대안’이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모든 중생이 편안한 것이 대안이요, 한 중생이라도 편안하지 않으면 자신도 편안할 수 없다는 대자비의 정신에 입각하여 ‘대안’을 외쳤던 것이다.
특히, 원효는 거지·땅꾼 등 소외받는 계층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교화함은 물론, 무애가(無㝵歌)를 부르고 무애무(無㝵舞)를 추면서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참된 가르침을 심어주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 조선 중기의 고승 언기는 도를 깨달은 뒤 양치기 생활을 하면서 동물들과 하나가 되는 수행을 닦았고, 대동강가에서 거지와 고아들을 모아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교화하여, 당시 평양에서는 거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자비는 중생과 하나가 되는 마음에서 출발하여 나와 중생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자타불이의 진리를 체득하고 중생과 한 몸이 되어 생활함으로써 모든 중생을 부처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