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전

선림보전...퇴옹성철

통융 2017. 5. 30. 11:32

禪林寶典

1 선림고경(禪林古鏡)에 씀 설봉스님이 하루는 원숭이들을 보고 말하기를 "원숭이가 각각 한 개의 옛거울[古鏡]을 짊어지고 있구나!" 하니 삼성스님이 "숱한 세월 동안 이름이 없거늘 어찌하여 옛거울[古鏡]이라고 합 니까?" 하고 물었다. 설봉스님이 "흠이 생겼구나!" 하자 삼성스님이 말하기를 "천오백명을 거느리는 대선지식이 말귀도 못 알아들으십니까?" 하니 설봉스님이 말하였다. "노승이 주지하기가 번거로와서..." 알겠는가. 비가 연잎을 적시니 향기가 집에 떠돌고 바람은 갈대잎을 흔드는데 눈은 배에 가득하네. 雪峰一日見 乃云, 者 各各背一面古鏡. 三聖便問, 歷劫無名何以彰爲古鏡. 峰云, 瑕生也. 聖云, 一千五百人善知識話頭也不識. 峰云, 老僧住持事煩. 會��

雨蒸荷葉香浮屋 風攪蘆花雪滿船

佛紀 2532年 端午節 伽倻山에서 退翁 性徹 씀


선림고경총서(禪林古鏡叢書)

간행사

귀의삼보(歸依三寶)하옵니다.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이 이 땅에 전해져 겨레의 문화창달에 이바 지하고 나라의 동량을 배출하여 온 지도 천육백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지나고 연륜이 멀어짐에 따라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는 선종의 정법은 감추어지고, 고불고조(古佛古祖)들의 바른 뜻은 매몰되어 잘못된 주장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이런 선문(禪門)의 병폐를 일찍부터 지적하시고, 그 시정을 위해 몇 해 전에는 「선문정로(禪門正路)」라는 저서를 출간 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禪)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무엇이 가장 요긴한 일인가를 심려해 오시던 차에, 우리들 주면에는 선을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필요한 선서(禪書)들이 너무나 빈곤 하다는 사실을 통감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는 고불고조들의 말씀이 한문 (漢文)으로 되어 있어서 언어생활이 다른 요즘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는 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옛 조사 스님들의 말씀 가운데 참선(參禪)을 위해 가장 요긴하다고 생각되는 삼 십여 종의 저서들을 가려내어 번역토록 하시고, 그 전집(全集)의 이름을 「선림고경총서(禪林古鏡叢書)」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한문으로 된 말씀들을 한글로 번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때로는 큰스님의 구술(口述)을 옮기 고, 때로는 선(禪)의 이치를 여쭈면서 글 밝은 이들에게 번역을 부탁하 였습니다. 따라서 선림고경총서 간행불사(刊行佛事)가 겨레 공동의 문화 재산이 되고 후손들에게 부처님의 크고 밝은 가르침을 전하는 이 시대 의 훌륭한 유산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종사에서 처음 시도하는 번역인만큼 큰스님께서 연로하시 어 일일이 감수하실 수 없어 번역에 허물이 많으리라 믿습니다. 이 점 널리 이해하시고 잘못된 번역이 있으면 독자들께서 동참하시어 더 완벽 한 글이 되도록 이끌어 주신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이러한 선림고경총서의 원만한 간행이 조계(曹溪)의 개울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되어, 선림(禪林)에 백화(百花)가 난만하고 모든 이들은 자성 을 깨쳐 성불(成佛)하길 발원합니다. 佛紀 2532年 端午節 해인사 백련암(海印寺 白蓮庵) 백련선서간행회(白蓮禪書刊行會) 圓澤 和南


차례


제1권 돈황본단경(敦煌本壇經)………………………………11


    1 단경 지침(指針)……………………………………… 17

    2 돈황본단경 편역(編譯)……………………………… 55

    3 선교결(禪敎訣)……………………………………… 149

제2권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59

제3권 전심법요(傳心法要)………………………………… 227

    1 전심법요(傳心法要)………………………………… 235

    2 완릉록(宛陵錄)……………………………………… 279

제4권 신심명(信心銘)……………………………………… 347

제5권 증도가(證道歌)……………………………………… 359



제1권 돈황본단경(敦煌本壇經) 머리말 조계육조(曺溪六祖) 이후 선(禪)은 천하를 풍미(風靡)하여 당·송·원·명 시대에 불교가 꽃을 피우게 한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림에 따라 육조 본연의 종지가 많이 변하여 육조의 정통 사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대저 육조의 종지는 육조가 항상 주창한 "오직 돈법만을 전한다[唯傳頓 法]"고 하는 것으로서, 점문(漸門)은 일체 용납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 에 교가(敎家)의 점수사상(漸修思想)이 혼입되어 선문(禪門)이 교가화됨으로 써, 순수선(純粹禪)은 없는 실정이다. 「단경」은 육조의 법문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나, 그 유통 과정에서 첨 삭(添削)이 많아 학자들을 곤혹케 하였다. 다행히도 최고본(最古本)인 「돈황 본단경」은 천여 년 동안 석굴에 비장되어 뒷사람들의 첨삭을 면할 수 있었 으므로, 육조의 성의(聖意)를 잘 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가운데서 오락(誤落)된 부분은 각 유통본을 참조하여 엄정교정(嚴正校訂)하고 사의(私 意)는 개입시키지 않았으며, 토를 달고 번역을 하였다. 그리고 약해(略解)를 붙여 거룩한 뜻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생각하니, 권두(卷頭)의 지침 과 함께 읽기 바란다. 「선교결」은 서산(西山) 만년(晩年)의 명저(名著)로서 「단경」이해에 도 움이 되겠기에 더불어 실으니, 참학고류(參學高流)는 「단경」을 근본삼아 육조정법을 선양하기 바란다. 불기 이천오백삼십일년 가을 가야산 해인사 퇴설당에서 퇴옹 성철 씀 일러두기 *○는 제I편에서는 엮은이의 평석(評釋)을, 제II편과 제III편에서는 약해(略解)를 말 한다. *제I편과 제II편에서, 보기를 들어 性(姓)은 원문의 姓자를 性자로 바로잡은 것이고, [心]은 원문에는 心자가 빠진 것을 보충해 넣은 것이며, '頓漸'은 원문의 頓漸을 삭제해야 할 것으로 부호를 일치시켰다. *제I편에서 원문 끝의 敦·大·興·德·宗은 각각 돈황본·대승사본·흥성사본·덕 이본·종보본을, 그리고 끝에 표시된 숫자는 「혜능연구(고마자와대학 선종사연 구회 1978년 간행)의 면(面) 수를 말한다. *제II편에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임의로 제목을 붙이고 단락을 나누었다.


돈황본단경 차례 머리말………………………………………………………………………………13 일러두기……………………………………………………………………………14 제1편 단경 지침(指針)…………………………………………………………17 서언(序言)…………………………………………………………………………19 1.식심견성(識心見性)……………………………………………………………21 2.내외명철(內外明徹)……………………………………………………………25 3.유전돈법(唯傳頓法)……………………………………………………………29 4.무념위종(無念爲宗)……………………………………………………………37 5.정혜체일(定慧體一)……………………………………………………………43 6.무생서방(無生西方)……………………………………………………………47 7.불오염수(不汚染修)……………………………………………………………50 8.불보리인(佛菩提因)……………………………………………………………51 제2편 돈황본단경 편역(編譯)…………………………………………………55 1.서언(序言)………………………………………………………………………57 2.심사(尋師)………………………………………………………………………57 3.명게(命偈)………………………………………………………………………60 4.신수(神秀)………………………………………………………………………61 5.정게(呈偈)………………………………………………………………………65 6.수법(受法)………………………………………………………………………68 7.정혜(定慧)………………………………………………………………………70 8.무념(無念)………………………………………………………………………74 9.좌선(坐禪)………………………………………………………………………77 10.삼신(三身)…………………………………………………………………… 79 11.사원(四願)…………………………………………………………………… 83 12.참회(懺悔)…………………………………………………………………… 85 13.삼귀(三歸)…………………………………………………………………… 86 14.성공(性空)…………………………………………………………………… 88 15.반야(般若)…………………………………………………………………… 90 16.근기(根機)…………………………………………………………………… 92 17.견성(見性)…………………………………………………………………… 95 18.돈오(頓悟)…………………………………………………………………… 96 19.멸죄(滅罪)…………………………………………………………………… 99 20.공덕(功德)……………………………………………………………………102 21.서방(西方)……………………………………………………………………104 22.수행(修行)……………………………………………………………………108 23.행화(行化)……………………………………………………………………113 24.돈수(頓修)……………………………………………………………………114 25.불행(佛行)……………………………………………………………………119 26.참청(參請)……………………………………………………………………123 27.대법(對法)……………………………………………………………………126 28.진가(眞假)……………………………………………………………………131 29.전게(傳偈)……………………………………………………………………134 30.전통(傳統)……………………………………………………………………138 31.진불(眞佛)……………………………………………………………………140 32.멸도(滅度)……………………………………………………………………144 33.후기(後記)……………………………………………………………………146

제3편 선교결(禪敎訣)……………………………………………………… 149


제1편 단경 지침(指針) 서언 「단경(壇經)」은 육조(六祖)의 법손인 동토(東土) 선종의 근본이 되는 성전(聖典)이다. 「단경」은 전래되는 과정에서 다른 본(本)이 많이 나와 학자들을 곤혹케 하였으나, 돈황고본(敦煌古本)이 발견되 어 천고의 의심이 해결되었다고들 말한다. 그리하여 근래 일본의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 선종사연구회(禪宗 史硏究會)에서는 그 중 기본이 되는 다섯 본을 서로 대조하여 「혜 능연구(慧能硏究)」라는 책을 발간함으로써 단경연구에 공헌하였다. 다섯 본은 돈황본(敦煌本), 대승사본(大乘寺本), 흥성사본(興聖寺 本), 덕이본(德異本), 종보본(宗寶本)이다. 또한 열두 종류의 다른판 (版)들을 영인 수록한 「육조단경제본집성(六祖壇經諸本集成)」도 좋은 자료이다. 이에 가장 오래된 돈황본을 중심으로 네 본을 서로 대조하고 다른 여러 본을 참고하여 「단경지침(壇經指針)」을 작성 하여 보았다. 돈황본을 베껴 쓸 때 부주의하여 글자를 잘못 쓰거나 빠뜨린 것 이 많으나, 다른 본들을 참조하면 성의(聖意)를 파악하는 데 별로 지 장이 없다. 각 본의 자구(字句) 차이는 대강의 뜻만 취하고 하나하나 지적하지 않았으니 양해하기 바란다. 「단경」의 근본 사상은 식심견성(識心見性 마음을 알아 성품을 봄)이요, 식심견성은 법신불(法身佛)인 내외명철(內外明徹 안팎이 사 무쳐 밝음)이어서 견성(見性 성품을 봄)이 곧 성불(成佛 부처를 이 룸)이므로, 깨달은 뒤[悟後]에는 부처님 행을 수행한다[修行佛行]고 분명히 하였다. 뒷날 교가(敎家)의 점수사상(漸修思想)이 섞여 들어 와 오후점수론(悟後漸修論 깨친 뒤 점차로 닦는다는 이론)이 성행하 나, 이는 「단경」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니, 육조대사의 법손인 선가 (禪家)는 「단경」으로 되돌아와 육조대사 본연의 종풍을 떨치기 바 란다. 1. 식심견성(識心見性) 모든 법이 모두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거늘, 어찌 자기의 마음을 따라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서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맑고 깨끗하다'고 하였으니, 식심견성 (識心見性 마음을 알아 성품을 봄)하면 스스로 부처님 도를 성취하 는 것이니 곧 활연히 깨쳐서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一切萬法이 盡在自身心中이어늘 何不從於自心하야 頓現眞如本性 (姓)고 菩薩戒經에 云我本源(願)自性이 淸淨이라하니 識心見性하면 自成佛道라 卽時豁然하야 還得本心이로다-敦 316 만법이 모두 자기의 마음 가운데 있거늘 어찌 자기의 마음 가운 데에서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서 말하기를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맑고 깨끗하다'고 하였으니, 식심견성하면 다 부처님 도를 성취하는 것이니 곧 활연히 깨쳐서 본 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萬法이 盡在自心이어늘 何不從自心中하야 頓見眞如本性고 菩薩戒 經에 云 我本源自性이 淸淨이라하니 識心見性하면 皆成佛道라 卽時 豁然하야 還得本心이로다-大.興.德.宗 316 ○앞의 인용문은 돈황본이요, 뒤의 인용문은 대승사본·흥선사 본·덕이본·종보본이니,돈황본을 중심으로하여 네 본을 참조하 였다. 네 본이 더러 자구의 차이는 있으나 그 근본 뜻은 같다. '자성청정(自性淸淨 자성이 맑고 깨끗함)'은 「보살계경」의 말씀이요. '식심견성'은 육조의 말씀이요, '즉시활연(卽時豁然 즉 시에 탁 트이어 깨침)'은 「유마경」의 말씀이다. 두 경의 글을 인용하여 육조 자신의 법문인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 스스로 부처님 도를 성취한다[識心見性 自成佛道]' 함을 강조한 것이 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십이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 있 어서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고 말하니, 자기의 성품을 깨치지 못하 였다면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성품을 볼지니라. 三世諸佛과 十二部經이 云在人性中하야 本自具有어늘 不能自性悟 어든 須得善知識示導(道)하야 見性이니라 -敦 317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십이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에 있어서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으므로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였다면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바아흐로 성품을 볼지니라. 三世諸佛과 十二部經이 在人性中하야 本自具有ㅓ늘 不能自悟어든 求善知識示導하야 方見이니라 -大.興.德.宗 317 ○스스로 오달(悟達 깨쳐 통달 함)하지 못하면 선지식의 지도자 가 필요하다. 저마다 스스로 마음을 관찰하여 자기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깨닫 게 하되,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큰 선지식 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성품을 볼지니라. 各自觀心하야 令自本性을 頓悟하되 若[不]能自悟者는 須覓大善知 識示導(道)하야 見性이니라 -敦 317 보리 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 스스로 가졌거늘 다만 마음이 미혹하므로 스스로 깨칠 수 없으니, 반드시 큰 선지식의 지 도를 받아 성품을 볼지니라. 菩提般若之智는 世人이 本自(白)有之어늘 卽緣心迷하야 不能自(白) 悟하니 須求大善知識示導(道)하야 見性이니라 -敦 292 보리 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 스스로 가졌거늘 다만 마음이 미혹하므로 스스로 깨칠 수 없으니, 반드시 큰 선지식의 지 도를 받아 성품을 볼지니라. 菩提般若之智는 世人이 本自有之어늘 只緣心迷하야 不能自悟하나니 須求大善知識示導하야 見性이니라 -大.興.德.宗 292 사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되 망념이 있어서 진여를 덮고 있으니 망념이 없어지면 본래의 성품이 깨끗하니라. 人性(姓)은 本淨이로되 爲妄念故로 盖覆眞如하니 離妄念하면 本性(姓)이 淨하니라 -敦 298 사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되 망념이 있어서 진여를 덮고 있으니, 다만 망념이 없으면 본래 성품은 스스로 청정하니라. 人性은 本淨이로되 由妄念故로 盖覆眞如하니 但無妄想하면 性自淸淨 이니라 -大.興.德.宗 298 ○망상이 소멸하면 본래로 청정한 자성이 스스로 드러나니, 이 것이 식심(識心 마음을 앎)이며 견성이다.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니라. 識自(白)本[心]이 是見本性이니라 -敦 295 스스로 본래 마음을 알고 스스로 본래 성품을 보느니라. 自識本心하고 自見本性이니라 -大.興.德.宗 295 본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불법을 배워도 이로움이 없으니,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 곧 큰 뜻을 깨치느니라. 不識本心하면 學法無益이니 識心見性(姓)하면 卽悟(吾)大意니라 -敦 284 ○'큰 뜻[大意]'이란 돈황본 윗글에서 '큰 뜻을 알면 곧 의발을 부촉하리라[識大意하면 卽付衣鉢하리라]'고 한 그 '큰 뜻'이다. 앞 생각이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 생각이 깨치면 곧 부처니라. 前念이 迷卽凡이요 後念이 悟卽佛이니라 -敦312 앞 생각이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 생각이 깨치면 곧 부처니라. 前念이 迷卽凡이요 後念이 悟卽佛이니라 -大.德.宗 313 ○흥성사본에는 이 구절이 빠지고 없으나 상관은 없다. 이는 돈 오견성(頓悟見性 단박에 깨쳐서 성품을 봄)이 곧 성불임을 말한 것이다. 자성(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성이 깨치 면 중생이 곧 부처니라. 自性을 迷하면 佛卽衆生이요 自性을 悟하면 衆生이 卽佛이니라 -敦 315 자성이 미혹하면 곧 중생이요, 미혹을 떠나면 곧 깨달음이니 깨달 으면 곧 부처니라. 自性을 迷하면 卽是衆生이요 離迷卽覺이니 覺卽是佛이니라 -大 315 자성이 미혹하면 곧 중생이요, 자성을 깨치면 곧 부처니라. 自性을 迷하면 卽是衆生이요 自性을 悟하면 卽是佛이니라 -大.德.宗 325 ○불(佛)은 구경묘각(究竟妙覺)이며, 십지(十地)·등각(等覺)도 미혹중생이니, 정오정각(正悟正覺 바르게 깨치고 바르게 깨달 음)이 아니다. 식심견성은 정오정각을 말함이니, 그것은 구경묘 각이라야 한다. 2 . 내외명철(內外明徹) 무엇을 청정법신불이라 하는가? 세상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만법이 다 자기의 성품 가운데 있으니, 모든 법이 다 자기 의 성품에 있어서 자기의 성품은 항상 청정하니라. 해와 달이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여서 위는 밝고 아래는 어 두워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뚜렷하게 보지 못하다가, 문득 지혜의 바 람이 불어와서 구름과 안개를 말끔히 거두어 버리면 온갖 것이 일시 에 모두 나타나느니라. 세상 사람들의 성품이 청정함도 마치 깨끗한 하늘과 같으며 혜(惠)는 해와 같고 지(智)는 달과 같아 지혜가 항상 밝거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서 자기의 성 품이 밝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참다운 법을 열어 주시는 선지식 을 만나 미망(迷妄)을 없애 버리면 내외 명철하여 자기의 성품 가운 데 만법이 다 나타나 일체법에 자재하나니, 청정법신이라고 이름하 느니라. 何名淸淨<法>身佛 世人 性本自淨 萬法 在自性(姓) 一切 法 盡在自性 自性 常淸淨 日月 常明(名) 只爲雲盖覆 上明 (名)下暗 不能了見日月星(西)辰 忽遇慧風 吹散 卷盡雲霧 萬 象森羅 一時皆現 世人性淨 猶如淸天 惠如日智如月 智惠常明 (名) 於外 着境(看敬) 妄念浮雲 盖覆 自性(姓) 不能明(名) 故 遇善知識 開眞法 吹却迷妄 內外明(名)徹 於自性(姓)中 萬法 皆現 一切法 自在性(姓) 名淸淨法身-敦 三百二(29) 무엇을 청정법신이라 하는가? 세상 사람의 자성이 본래 청정하여 모든 법이 모두 자기의 성품으로부터 나느니라. 모든 법이 자기의 성품 가운데 갖추어 있으니 하늘이 항상 맑음과 같으며, 해와 달이 항상 밝되 뜬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둡다가 문득 바람이 불어 모든 구름이 흩어지면 위 아래가 함께 밝아서 모든 모양이 다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라. 세상 사람의 성품이 항상 떠돌아다님도 저 구름 낀 하늘 같아서 또한 그와같으니라. 지(智)는 해와 같고 혜(慧) 는 달과 같아 지혜(智慧)가 항상 밝거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 념의 뜬구름이 덮여서 자성이 밝고 맑지 못하다가, 만약 선지식을 만나 참된 법을 듣고 미망을 스스로 없앤다면 내외명철하여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모두 나타나나니, 성품을 본 사람도 또한 이와 같으므로 이를 청정법신불이라고 이름하느니라. 何名淸淨法身 世人 性本淸淨 萬法 皆從自性生 諸(30)法 在 自性中 如天常淸 如日月 常明 爲浮雲 盖覆 上明下暗 忽遇風 吹 衆雲 散盡 上下俱明 萬象 皆現 世人性 常浮遊 如彼雲天 亦復如是 智如日慧如月 智慧常明 於外 著境 被妄念浮雲 盖 覆 白性 不得明朗 若遇善知識 聞眞法 自除迷妄 內外明徹 於 自性中 萬法 皆現 見性之人 亦復如是 此名淸淨法身佛-大.興. 德.宗 三百二(31) * 만법의 근원인 청정자성(淸淨自性)을 덮은 망념의 뜬구름을 다 흩어버리면 우주의 위 아래와 몸과 마음의 안팎이 확연명철(廓然明 徹 툭 트이어 사무쳐 밝음)하여, 깨끗한 유리병 속에 밝은 달을 담 은 것과 같다. 내외명철을 <영락경(瓔珞經)>, <능엄경(楞嚴經)>에서 는 구경묘각(究竟妙覺)이라고 하였으며, 육조는 법신불(法身佛)이라 고 하였다. <천태사교의 원교장(天台四敎儀圓敎章)>에서는 아래와 같이 자세히 설명하였다. "미세한 무명(無明)을 나아가 부수고 묘각의 지위에 들어가서 무 명의 부모를 영원히 이별하고 구경의 열반산정에 오르니 대열반이라 이름하는지라, 청정법신을 이루어 상적광토(常寂光土 언제나 고요한 광명 세계)에 사니, 곧 원교불상(圓敎佛相 원교의 부처님 모습)이니 라[進破微細無明하고 入妙覺位하야 永別無明父母하고 究竟登涅槃山 頂하니라 名大涅槃이라 成淸淨法身하야 居常寂光土하니 卽圓敎佛相 也니라]." 자재보살(自在菩薩)들이 오매일여(寤寐一如 자나깨나 한결 같음) 는 되어도 구경묘각을 실증(實證)하지 못하면 '내외명철'의 경지는 되지 못하니, 이는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극심심처(極甚深處 지극히 깊은 곳)이다. 동황본에는 '견성한 사람도 또한 이와 같다[見性之人도赤復如是라]' 는 구절이 빠졌으나, 망념이 없어져 만법이 모두 나타난 청정법신불 이 곧 견성이므로 상관이 없다. 이로써 육조는 견성이 곧 성불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자기 성품의 심지(心地 마음자리)를 지혜로써 관조(觀照 비추어 봄)하여 내외명철하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나니, 만약 본래 마음 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요 이미 해탈을 얻으면 곧 반야삼매요, 반야 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곧 무념이니라. `自性心地 以智慧觀照 內外明(名)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是 解脫 旣得解脫 卽是般若三昧 悟般若三昧 卽是無念-敦 三一 八(34) 지혜로 관조하여 내외명철하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나니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요, 만약 해탈을 얻으면 곧 반야삼 매며 무념이니라. 智慧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本解脫 若得解脫 卽是般若三昧 卽是無念-大.興.德.宗 三一八 *앞 항(項)에서는 내외명철이 청정법신불이라 하였고, 이 항에서 는 내외명철이 곧 식심(識心 마음을 앎), 해탈, 반야삼매(般若三昧), 무념(無念 생각 없음)이라고 하였다. 식심은 곧 견성이므로, 견성은 법신불(法身佛)이며 반야삼매며 무념임을 말하여 주고 있다. 곧 견성을 하여서 반야삼매에 들어가느니라. 卽得見性 入若三昧-敦 三一四(35) *견성은 곧 반야삼매임을 말한다. 육진(六塵) 속에서 여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서 오고 감에 자 유로움이 곧 반야삼매며 자재해탈이니, 무념행이라고 이름하느니라. 於六塵中 不離不染 來去自由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 行-敦 三一八 육진 속에서 물들지도 않고 섞이지도 않아서, 가고 옴에 자유로우 며 널리 사용하여도 걸림 없음이 곧 반야삼매며 자재해탈이니, 무념 행이라고 이름하느니라. 於六塵中 無染無雜 來去自由 通用無滯 卽是般若三昧 自在解 脫 名無念行-大.德.興.宗 三一八(36) *식심, 견성, 해탈, 무념, 반야삼매 등은 모두 법신불이며, 묘각인 내외명철임을 강조하여 말하였다. 이는 견성이 곧 성불이라고 말함 이니, <기신론(起信論)의 '구경각 즉 견성(究竟覺卽見性)'과 같은 말 이다. 육조는 '견성이 곧 성불'임을 이렇게 소상하고 정확하게 말씀 하였으므로, 견성하여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한 뒤에 성불한다는 것 은 육조의 정통 사상이 아니니, 이러한 주장은 육조의 정전(正傳)에 서 배제되어야 한다. 3. 유전돈법(唯傳頓法) 오조(五祖)가 <금강경>을 강설하심에 혜능이 한 번 듣고 말 끝에 문득 깨치니라. 그 밤에 법을 받으니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문득 돈 법(頓法)과 가사를 전하며 '너를 육대조(六代祖)로 삼는다'고 하였다. 五祖說金剛經 惠能 一聞 言下 便悟(伍) 其夜 受法 人盡不 知 便傳頓法 衣 汝爲六代(伐)祖-敦 二八五 *이는 오도전법(悟道傳法 도를 깨치고 법을 전함)을 대강 서술한 것으로 돈법은 돈오법(頓悟法)이라는 말이다. 말 끝에 모든 법이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음을 문득 깨닫고 내 가 말씀드렸다. "어찌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 없 음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음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움직임이 없이 능히 만법을 냄을 알았으리오!" 오조스님은 내가 본래의 성품을 깨쳤음을 아시고 내게 말씀하셨 다. "본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느니라. 만약 말 끝에 스스로 본래 마음을 알아 스스로 본래 성품을 보면 곧 '인천의 스승, 부처[人天師佛]'니라." 삼경(三更)에 법을 받으니, 사람들이 다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곧 심인(心印)의 돈법과 의발(衣鉢)을 전하고, '너를 육대조사로 삼는 다'고 하였느니라. 言下 便悟一切萬法 不離自性 某甲 啓言 何期自性 本自淸淨 何期自性 本不生滅 何期自性 本自具足 何期自性 無動無搖 能生萬法 五祖知悟本性 乃報某甲(38) 言 不識本心 學法無益 若言下 自識本心 自見本性 卽名人天師佛 三更 受法 人盡不 知 便傳心印頓法 及衣鉢 汝爲六代祖-大.興.德.宗 二八五(39) *이는 돈황본보다 상세하다. 대승사본의 '모갑(某甲)'과 돈법(頓法)]을 다른 본에서는 각각 '혜 능(慧能)'과 '돈교(頓敎)'라고 하였다. 돈법은 돈오법문(頓悟法門)이요, 돈교는 돈오교시(頓悟敎示)이므로, 내용은 동일하다. '하기(何期)'이하는 깨친 법[悟法]의 내용인데, 오조가 인가(印可) 하며 말씀하시기를 식심견성하면 곧 이름이 '인천의 스승, 부처'라고 단언하였다. 그리하여 식심견성하면 불지(佛地 부처님의 지위)임을 선언하였으며, 지위(地位)와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 번 뛰어넘 어 여래지(여래의 지위)에 들어가는[一超直入如來地] 돈오법임을 분 명히 하였다. 이는 견성하면 내외 명철인 묘각불지(妙覺佛地)임을 말한 것이니, 불지가 아닌 삼현(三賢), 십성(十聖)은 모두 견성이 아 니라고 한 것이다. 오직 돈교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종을 부수는도다. 唯傳頓敎法 出世破邪宗-敦 三二七 오직 견성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종을 부수는도다. 唯傳見性法 出世破邪宗-大.興.德.宗 三二七(41) *돈황본에는 돈교법(頓敎法)이라 하고 다른 본에는 견성법(見性 法)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교가(敎家)의 돈교가 아니요 선무느이 '견 성돈오교법'을 지칭하는 것이어서, 견성법이 곧 돈교이며 돈교법이 곧 견성법이다. <단경>에서 많이 언급한 돈교는 견성하는 돈오교시 (頓悟敎示)이다. 대사가 이 돈오교법을 전하니 배우는 사람들은 같은 한 몸이기를 바라노라. 大師令傳此頓敎 願學之人同一體-敦 三二十 우리 조사가 오직 이 돈법을 전하니 배우는 사람들이 같은 한 몸 이기를 바라노라. 吾祖唯傳此頓法 願學之人同一體-大.德.興.宗 三二十 *조조상전(祖祖相傳 조사와 조사가 서로 전함)은 견성하는 돈오교 법뿐이다. 이는 다만 돈교라, 또한 대승(大乘)이라 이름하나니, 미혹할 때는 수많은 세월을 지나지만 깨치면 잠깐 사이로다. 此但是頓敎 亦名爲大乘 迷來經累劫 悟卽刹那間-敦 三二九 (42) 이 게송은 돈오 법문이요 또한 큰 법의 배[大法船]이니, 미혹하여 들으면 수많은 세월을 지나지만 깨치면 잠깐 사이로다. 此頌 是頓敎 亦名大法船 迷聞經累劫 悟則刹那間-興.德.宗 三 二九(43) *여러 겁을 잘못 헤매다가도 찰나 사이에 오달하므로 '돈(頓)'이라 고 한다. 육조의 법문은 유돈무점(唯頓無漸 오직 '돈'만 있고 '점'은 없는 것)이어서 돈오하면 곧 바로 불지에 들어가[直入佛地] 지위, 점 차를 없애는 것이 <단경>의 근본 방침이니, 육조는 이를 '직료성불 (直了成佛 당장 성불해 마침)'이라고 표현하였다. 나는 오조인(五祖忍)화상의 회하에서 한 번 듣고 말 끝에 크게 깨 쳐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다. 그러므로 이 돈법을 뒷날에 널리 퍼지게 하여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돈오케 하여 저 마다 스스로 마음을 관찰하여 자기의 본성을 단박에 깨치도록 하는 것이니라. 我於忍和尙處 一聞 言下 大悟(伍) 頓見眞如本性 是故 將此 (汝)頓法 流行後代 令(今)學道者 頓悟菩提 各自觀心 令自本 性 頓悟-敦 三一七 *돈견본성(頓見本性 본성을 단박에 봄)과 돈오보리(頓悟菩提 보리 를 단박에 깨달음)는 같은 뜻이니, 이것이 육조의 돈교법문이다. 내가 오조스님 밑에서 한 번 듣고 말 끝에 문득 깨쳐 진여의 본 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으니, 이러므로 이 교법이 널리 퍼져 도를 배 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돈오하여 저마다 스스로 마음을 살펴 자기 의 본래 성품을 보게 하느니라. 我於忍和尙處 一聞 言下 便悟 頓見眞如本性 是以 將此敎法 流行 令學道者 頓悟菩提 各自觀心 自見本性(44)-大.興.德.宗 三二七 *다섯 본이 표현에 있어 자구의 차이는 조금 있으나, 근본 뜻은 같으므로 상관이 없다. 법에는 '돈'과 '점'의 구별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 이 있으니, 미혹하면 차츰차츰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바로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니, 깨치 면 원래로 차별이 없느니라. 法無頓漸 人有利鈍 迷(明)漸契(勸) 悟人 頓修 識自(白)本 <心> 是見本性 頓卽元無差別-敦 二九五(45) *'明'은 각 본에 '迷'로, '勸'은 '契'로, '本'은 '本心'으로 되어 있으므 로, 잘못되고 빠진 것이 분명하여 바로잡는다. 오인돈수(悟人頓修 깨 친 사람은 단박에 닦음)는 분명하게 있으므로 식심견성이 곧 돈수임 을 말한다. 그리고, 깨달은 뒤에는 영리함과 어리석음[利鈍]의 차별 도 있을 수 없다. 미혹한 사람은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으니, 스스로 본래 마음을 알고 스스로 본래 성품을 보면 곧 차별이 없느니라. 迷人 漸契 悟者 頓修 自識本心 自見本性 卽無差別-大.興.德 二九五(46) *종보본에는 <미혹한 사람은 점차로 닦고 깨친 이는 단박에 계합 한다[迷人漸修悟人頓契]>로 되어 있으나, 근본 뜻은 앞의 항목과 같 다. "청하오니 대사의 세우지 않는다[不立]하심은 어떤 것입니까?" 대사는 말씀하였다. "자성은 잘못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어서 생각 생각이 반야 지혜로 관조하여 항상 법의 모양을 떠났으니 무엇을 가 히 세우리오. 자성은 단박에 닦는 것이니 세우면 점차가 있으므로 세우지 않느니라." 請大師 不立 如何 大師言 自性(姓) 無非無亂無痴 念念般若 觀照 常(當)離法相 有何可立 自性頓修 立有漸 此所(契)以不 立-敦 三三八(47) "어떤 것이 세우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자성은 잘못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으며 어지러움도 없어서 생각 마다 지혜가 밝게 비춰 항상 법의 모양을 떠나서 자유자재하여 거침 이 없으니 무엇을 세운단 말인가? 자기의 성품을 스스로 깨쳐서 돈 오돈수(頓悟頓修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음)하여 점차가 없느니라." 如何是不立義 師曰自性 無非無痴無亂 念念般若觀照 常離法 相 自由自在 縱橫盡得 有何可立 自性自悟 頓悟頓修 亦無漸 次-大.興.德.宗 339 *식심, 견성, 대오(大悟), 돈오는 원해 묘각인 내외명철을 내용으 로 한다. 그리하여 삼현(三賢), 십성(十聖)을 뛰어넘었으므로 돈오돈 수라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선(六祖禪)의 근본 사상이다. 그러므로 돈법, 돈교로써 일체의 점문(漸門)을 배제한 것이다. 마땅히 반야로 관조하면 찰나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져 이것이 곧 나의 진정한 선지식이라, 한 번 깨침에 곧 부처님을 아느니라. 자 기의 성품의 마음자리에 지혜로 관조하여 내외명철하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요 곧 해탈이니라. 이미 해탈을 얻으면 곧 반야삼 매니,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무념이니라. 當起般若觀照 刹那間 妄念 俱滅 卽是自眞正善知識 一悟 卽 知佛也 自性心地 以智慧觀照 內外明(名)徹 識自本心 卽是解 脫 旣得解脫 卽是般若三昧 悟班若三昧 卽是無念-敦 三一八 (49) 반야지혜가 일어나 비추면 한 찰나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지나니, 만약 자기의 성품을 알면 한 번 깨침에 곧 부처님 지위에 이르느니 라. 지혜로 비춰서 내외명철하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나니, 본래 마음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요, 만약 해탈을 얻으면 곧 반야삼매니, 이것이 무념이니라. 起般若觀照 一刹那間 妄念 俱滅 若識自性 一悟 卽至佛地 智 慧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本解脫 若得解脫 卽 是般若三昧 卽是無念-大.興.德.宗 三一八(50) *돈황본에는 '한 번 깨침에 부처님을 안다[一悟知佛]'고 하였고, 각 본에서는 '한 번 깨침에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一悟佛地]'고 하여 표현이 서로 다른 것 같으나, 반야로 관조하여 망념이 다 없어지면 내외명철하여 불지[佛地 부처님의 지위]가 아닐 수 없으므로, '부처 님을 안다[知佛]'함은 곧 '부처님 지위[佛地]'인 것이다. 또한 네 본에 서 '만약 자기의 성품을 알면 곧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若識自性하면 卽至佛地]'고 한 것은 '식심견성'이 곧 부처님 지위임을 육조가 친히 말씀한 중요한 법문이니, 식심 견성하면 묘각(妙覺)인 내외명철임을 더욱 더 뚜렷이 하였다. 법달이 말 끝에 크게 깨치고 말하기를 "이후로 생각생각 부처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하니,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부처님 행이 곧 부처님이니라"하였다. 法達 言下 大悟 自言 已後 念念修行不行 大師言 卽佛行 是 佛-敦 三四五(51) *대승사본에는 '부처님 행 닦기를 원한다[願修佛行]', 흥성사본에 는 '바야흐로 부처님 행을 닦는다[方修佛行]'고 하였으나 뜻은 같다. 덕이본과 종보본에는 이 구절이 빠졌으나, 다른 세 본에는 수록되어 있으므로 상관이 없다.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니 기억과 집착이 없는지라, 광망(�x 妄)을 일으키지 말라. 곧 스스로 진여의 성품이니라. 지혜로써 관조 하여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성품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이니라. 돈오견성(頓悟見性)하면 불지(佛地)이므로 오후점수(悟後漸修 깨 친 뒤에 점차로 닦음)는 필요없고 부처님 행을 수행하는 것이니, 이 는 교가의 점수사상으로 어지럽게 된 종문(宗門)에 일대 활로(活路) 가 되는 것이다. 자성이 삼신(三身 법신, 보신, 화신의 세 몸)을 갖추어 밝음을 빛 내어 사지(四智 부처가 갖추는 세 가지 지혜)를 이루나니, 보고 듣는 인연을 여의지 않고 초연히 부처님 지위에 오르느니라. 自性 具三身 發明成四智 不離見聞緣 超然登佛地-德.宗 三五 十(52) *이 항(項)은 뒷 날 덧붙인 '참청기연편(參請機緣編)'에 들어 있는 것으로 돈황본에는 없으나 <전등록> 등에 육조의 법문으로서 많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육조의 법문임을 의심할 수 없는 유명한 구절이 다. 돈오견성하면 삼신, 사지를 이루어 초연히 부처님 지위에 오르니 [超然登佛地] 오인돈수, 유전돈법(唯傳頓法 오직 돈법만을 전함)을 항상 주장한 육조의 면목이 뚜렷하다. 4. 무념위종(無念爲宗) 나의 법문은 옛부터 모두 무념을 세워 종(宗)을 삼나니, 모양 없 음[無相]으로 몸[體]을 삼고 머뭄 없음[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我自法門 從上已來 [頓漸] 皆立無念爲(無)宗 無相爲(無)體 無住[無]爲本-敦 二九五 *돈점(頓漸) 두 자는 군더더기임이 밝혀졌으며, 무념무종(無念無 宗), 무상무체(無相無體), 무주무위본(無住無爲本)은 무념위종(無念爲 宗), 무상위체(無相爲體), 무주위본(無住爲本)을 잘못 베낀 것이다.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먼저 무념을 세워 종을 삼고, 모양 없음으 로 몸을 삼고 머뭄 없음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我此法門 從上已來 先立無念爲宗 無相 爲體 無住 爲本-大. 興.德.宗 二九五(54) *육조의 무념은 망상이 다 없어진 불지무념(佛地無念 부처님 지 위의 무념)이다.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是以 立無念爲宗-敦 二九六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所以 立無念爲宗-大.興.德.宗 二九六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此敎門 立無念爲宗-敦 二九七 이 법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此法門 立無念爲宗-大.興.德.宗 二九七(55) *육조가 무념위종(無念爲宗 무념으로 종을 삼음)을 거듭 말씀하신 것은 육조의 근본 입장이 내외명철한 묘각무념(妙覺無念)에 있기 때 문이다. 세상 사람이 견해를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 만약 유념(有念 생각 있음)이 없으면 무념도 또한 서지 못하느니라. 없다[無]함은 무 슨 일이 없다 함이며, 생각함이란 무슨 물건을 생각함인가? 없다 함 은 상대되는 두 모양의 모든 진로(塵勞 번뇌)를 버림이요, 진여는 생 각[念]의 몸[體]이며 생각은 진여의 씀[用]이니라. 자성이 생각을 일 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見聞覺知],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아니 하고 항상 자재하나니, <유마경>에 이르기를 '밖으로 능히 모 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第一義]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느니라. 世人 離見 不起於念 若無有念 無念 亦不立 無者 無何事 念 者 念何物 無者 離二相諸塵勞 眞如 念之體 念是眞如之用 性 (姓)起念 雖卽見聞覺知(之) 不染萬境(鏡)而常自(白)在 維摩經 云 外能善分別諸相 內於第一義而不動-敦 二九七(56) *무념은 유무(有無)나 선악(善惡)처럼 상대되는 두 모양의 진로를 영원히 여읜 진여정념(眞如正念)을 말한다. 없다 함은 상대되는 두 모양의 진로의 마음이 없음이요, 생각함이 라 함은 진여본성을 생각함이니, 진여는 생각의 몸이요 생각은 진여 의 씀이니라, (삭제 부분) 진여의 자성이 생각을 일으켜 여섯 모양을 생각하여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ㅇ아 참된 성품이 항상 자재하며 밖으로는 비록 모든 물질과 모양[色相] 을 분별하나 안으로는 첫째 뜻에서 움직이지 않느니라. 無者 無二相諸塵勞之心 念者 念眞如本性 眞如 卽是念之體 念 卽是眞如之用 (削除部分)眞如自性 起念 念六相 雖有見聞 覺知 不染萬境而眞性 常自在 外能分別諸色相 內於第一義而 不動-大.興.德.宗 二九七(57) *이 항은 돈황본과 약간 표현이 다르기는 하나, 진로를 영원히 떠 난 진여정념(眞如正念)의 근본 사상은 같다. 중간에 보조(普照)가 발 문(跋文)에서 지적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는 부분(眞如自性起念 非眼 耳鼻舌能念 眞如有性 所以起念 眞如若無 眼耳色 聲當時卽壞-삭제부 분) 은 삭제하였는데, 돈황 고본에는 이 부분이 처음부터 없으므로 돈황본의 뛰어남을 알 수 있으며, 삭제 부분은 이 항의 본 뜻인 '진 여정념(眞如正念)'을 설명해 보이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니 기억과 집착이 없는지라, 광망(�x 妄)을 일으키지 말라. 곧 스스로 진여의 성품이니라. 지혜로써 관조 하여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성품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이니라. 悟此法者 卽是無念 無憶無着 莫起(去)�x妄 卽自是眞如性(姓)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是見性成佛道-敦 三一三 (59) *법을 깨달으면 곧 무념이요, 성품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 이다.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라, 기억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망념 도 없어서 광망(�x妄)을 일으키지 않고 자기의 진여의 성품을 써서 지혜로써 관조하여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이것 이 곧 성품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이니라. 悟此法者 卽是無念 無憶無著無妄 莫起�x妄 用自眞如性 以智 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是見性成佛道-大.興.德.宗 三一 三 *이 항 또한 돈황본과 표현이 약간 다르기는 하나 큰 뜻은 같다. 법을 깨달으면[悟法] 무념이요 견성성불임을 말하여 준다. 무념이란 모든 법을 보되 모든 법에 물들거나 매달리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되 모든 곳에 끄달리지 않느니라. 無念法者 見一切法 不著一切法 遍一切處 不著一切處-敦 三 一八(60) 만약 모든 법을 보되 마음이 물들어 끄달리지 않으면 이것이 무 념이니라. 若見一切法 心不染着 是名無念-大.興.德.宗 三一八 모든 경계 위에서 물들지 않음을 무념이라 이름하느니라. 於一切境(鏡)上 不染 名爲無念-敦 二九六 모든 경계 위에서 일만 가지 경계를 만나서도 마음이 늘 고요하 여 생각 위에 모든 경계를 떠나고 경계 위에 마음이 나지 않나니,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於諸境上 心若能萬境 常寂 念上 常離諸境 不於境上 生心 所 以 立無念爲宗-大 二九六(61) 모든 경계 위에서 마음이 물들지 않음이 무념이라, 자기의 생각 위에 항상 모든 경계를 떠나 경계 위에 마음이 나지 않느니라. 於諸境上 心不染曰無念 於自念上 常離諸境 不於境上 生心- 興.德.宗 二九六 *모든 경계 위에 마음이 나지 않고 마음이 물들지 않음을 무념이 라고 하는 바, 식심견성한 불지무념이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이니, 불 오염(不汚染 물듦이 없음)은 곧 구경무념(究竟無念)을 말한다.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법에 두루 통달하며, 무념법을 깨친 이 는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면, 무념법을 깨친 이는 부처님의 지위 에 이르느니라. 悟無念法者 萬法 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法者 至佛地位-敦.大.興.德.宗 三一八(62) *이는 옛 조사들이 특히 많이 인용하는 구절로, 육조는 무념이 곧 만법진통(萬法盡通 만법이 다 통함), 제불경계(諸佛境界 모든 부처님 의 경계), 불지위(佛地位)이므로, 식심견성하면 내외명철, 불지무념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 법문은 언제나 한결같아 터럭만큼도 어김이 없 으니, 이 법을 잇는 법손들은 이 철칙(鐵則)을 저버려서는 안 되며, 만약 어긋난다면 육조의 법손이 아니다. 이로써 <단경>의 대강을 알았다. <단경>의 목표는 식심견성이며 식심견성은 묘각인 내외명철이므로, 이를 반야삼매, 해탈, 무념이라 고 한다. 이는 점차(漸次)를 밟아 닦아가지 아니하고 당장 성불해 마친다 [直了成佛]고 하는 돈수이므로, 육조는 늘 유전돈법을 고창(高唱)한 것이다. 돈법이므로 무념으로 종을 삼아서 모든 망념이 사라졌으니, 제불의 경계인 불지라고 단언하였다. 그리하여 견성이 곧 성불임을 청천백일과 같이 선설(宣設)하였으며, 깨달은 뒤에는 부처님 행을 수 행[修行佛行]하였으니, 이 법을 잇는 법손들은 육조의 성의(聖意)를 바르게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돈오견성하고 차제점수(次第漸修 차 례로 차츰차츰 닦음)하여 구경성불(究竟成佛)한다'는 하택(荷澤), 규 봉(圭峯)의 점수사상은 교가(敎家)의 전통이요 육조의 사상을 바로 전한 것이 아닌 지해(知解)라고 옛 조사들이 극력 배제한 것이니, 육 조의 후손인 우리는 <단경>을 숙독(熟讀)하고 실천하여 삿된 길에 빠지지 않도록 힘써 노력하여야 한다. 5. 정혜체일(定慧滯一)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나니, 먼저 혜와 정 이 서로 다르다고 그릇 말하지 말라. 정과 혜가 한 몸이어서 둘이 아니니, 곧 정은 혜의 몸[體]이요 혜는 정의 작용[用]이니라. 곧 혜의 때에 정이 혜 속에 있고 정의 때에 혜가 정 속에 있나니, 이 뜻은 곧 정과 혜가 함께 함이니라. 我此法門 以定慧爲本 第一勿迷言定慧別 定慧體一不二 卽定 是慧體 卽惠是定用 卽惠之是 定在惠卽定之時 惠在定 此義 卽是<定>慧等-敦 二九三 나의 이 법문은 정, 혜로써 근본을 삼나니, 정, 혜가 서로 다르다 고 그릇 말하지 말라. 정과 혜가 한 몸이요 둘이 아니니, 정은 혜의 몸이요 혜는 정의 작용이니라. 곧 혜의 때에 정이 혜에 있고 정의 때에 혜가 정에 있나니, 만약 이 뜻을 알면 정과 혜가 함께 배움이 니라. 我此法門 以定慧爲本 勿迷言定慧別 定慧一切不二 定是慧體 慧是定用 卽慧之時 定在慧 卽定之是 慧在(65)定 若識此義 定慧等學-大.興.德.宗 二九三(99) *함께 배운다[等學]함은 정혜등지(定慧等持 정과 혜를 함께 가짐) 곧 자성삼매(自性三昧)를 말함이요 수도방편(修道方便)이 아니니, <열반경> 28에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정과 혜를 함께 하기 때문 에 부처의 성품을 밝게 본다[諸佛世尊은 定惠等故로 明見佛性이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제불의 자성삼매인 정과 혜를 수행점차(修行漸次 수행해 가는 차례)의 방법으로 삼는 것은 큰 착각이며 육조가 말씀하신 정, 혜의 본 뜻이 아니다.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빛 같아서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느니라.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 은 등불의 작용이니 곧 두 몸이 있으나 두 갈래가 아니니, 이 정과 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定慧 猶如何等 如燈光 有燈卽有光 無燈卽無光 燈是光之(知) 體 光是燈之用 卽有二體 無兩般 此定慧 亦復如是-敦 二九五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빛 같아서 등불이 있으면 빛이 있으나 등불이 없으면 빛이 없나니,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 의 작용이라. 이름은 비록 둘이 있으나 몸은 본래 같은 하나이니, 이 정과 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定慧 猶如何等 猶如燈光 有燈卽光 無燈卽不光 燈是光之體 光是燈之用 名雖有二 體本同一 此定慧 亦復如是-大.興.德.宗 二九五(67) *정, 혜를 등불과 빛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대저 정, 혜 는 적조(寂照 고요함과 비침)를 말함이니, 일체 미망(迷妄)이 없어지 면 자연히 진여혜광(眞如慧光)이 드러나 적조가 쌍류(雙流)하여 정 혜등지가 되어 제불의 대적광삼매(大寂光三昧)에 들게 된다. 그러므 로 정혜등등(定慧等等 정과 혜가 함께 하고 함께 함)의 구경불지(究 竟佛智)가 아니면 정, 혜가 아니요 미망이다. 점문(漸門)에서 '정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以定治平亂 想] 혜로써 무기를 다스린다[以慧治平無記]'고 하여 이것을 '정혜쌍 수(定慧雙修 정, 혜를 쌍으로 닦음)'라고 하나, 이는 정혜등지인 육조 의 정, 혜는 아니다. 최상승법을 닦으면 경정코 성불하여 감도 없고 머물음도 없고 옴 도 없나니, 정, 혜가 함께 하여 일체법에 물들지 아니하므로 삼세제 불이 여기서 삼독(三毒)을 바꾸어 계정혜(戒定慧)로 삼느니라. 最上乘法 修行 定成佛 無去無住無來 是 定慧等 不染一切法 三世諸佛 從中 變三毒爲戒定慧-敦 三一三 *정혜등등하면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나니, 이는 삼세제불의 자성삼매(自性三昧)이다. 정, 혜가 서로 다르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은 법에 두 모양이 있느 니라. 定慧各別 作此見者 法有二相-敦 二九三(69) *정혜각별(定慧各別 정과혜가 서로 다툼)하면 법에 두 가지 모양 을 둔 것으로서 정혜등등한 육조의 정혜는 아니니, 종문(宗門)에서 금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으로서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 린다[以定治平亂想]'하고, '혜로써 무기를 다스린다[以慧治平無記]'고 하여 정과 혜를 각각 따로 하여 점수(漸修)의 방편으로 삼으니, 이는 실로 육조의 사상을 거스른 것이다. 그러므로 교가(敎家)의 점수사상을 버리고, 오매일여가 되어도 언 구(言句)를 참구(參究)하는 바른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곧 대혜(大 慧)선사가 오매일여에 이르렀으나 원오( 悟)선사는 '언구를 의심치 않음이 큰 병이다[不疑言句是爲大病]'고 꾸짖으므로, 마침내 대혜선 사가 대오(大悟 크게 깨침)하여 양기정전(楊岐正傳)을 계승한 것이 다. '오매일여한 때에 점점 이르렀어도 다만 화두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음이 중요하다[漸到寤寐一如時에도 只要話頭心不離라]'고 한 태고(太 古)선사의 유훈(遺訓)과 같이, 극히 어려운 오매일여의 깊은 경계에 서도 화두를 힘써 참구해야 한다. 만약에 오매일여는 고사하고 몽중일여(夢中一如 꿈속에서 한결같 음), 동정일여(動靜一如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으나 한결같음)도 안 된 미망에서 화두를 버리고 정혜쌍수를 말한다면 참으로 한심스런 노릇이며 불조의 혜명(慧命)을 끊어 버리는 잘못된 법이니, 오직 <단경>을 스승으로 하여 가르침을 바로 계승하는 본분납승(本分衲 僧)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육조가 천명한 내외명철의 단경사상이다. 곧 마음을 혜라 하고 곧 부처가 이에 정이니, 정과 혜가 함께 하 여 마음 속이 청정하니라. 이 법문을 깨침은 너의 익힌 성품으로 말 미암은 것이니, 인(因)은 본래로 남[生]이 없음이라, 쌍수(雙修 쌍으 로 닦음)가 바르도다. 卽心名慧 卽佛乃定 定慧等等 意中 淸淨 悟此法門 由汝習性 因本無生 雙修是正-德.宗 三三七(72) *이는 나중에 추가된 <참청기연편(參請機緣編)>에 들어있다. 이 쌍수를 점수문으로 오해하는 바 있으나, 이는 본 송(頌)과 같이 마음 속[意中]이 청정하여 정혜등등한 자성무생(自性無生 자성은 남이 없 음)에서 하는 말이다. 무생(無生 남이 없음)에서 쌍수(雙修 쌍으로 닦음)라 함은 적조쌍류(寂照雙流 고요함과 비침이 쌍으로 흐름)라 함과 같으니, 무생을 깨달아 마음 속이 청정하면 자연히 고요하면서 항상 비추고[寂而常照], 비추면서 항상 고요하여[照而常寂] 적조쌍류 라고 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혜등등이며 등지(等持 함께 지님, 삼매)라고 하는 바, 정 가운데 혜가 있고 혜 가운데 정이 있어서 정, 혜가 쌍등(雙等 쌍으로 함께 함)하므로 쌍수라고도 한다. 6. 무생서방(無生西方) 우매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기에 가서 나려 하고 깨친 사람은 스 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나니, 그러므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그 마음 깨끗함을 따라서 불국토도 깨끗하다'하시니라. 迷人 念佛 往生彼 悟者 自淨其心 所以佛言 隨其心淨 則佛土 淨-敦.大.德.宗 三二三 마음에 다만 깨끗치 않음[不淨]이 없으면 서쪽 나라가 여기서 멀 지 않고, 마음에 깨끗치 못한 생각이 일어나면 염불을 해도 왕생하 여 이르기 어렵느니라. 心但無不淨 西方 去此不遠 心起不淨之心 念佛 往生難到-敦 三二四(74) 마음 자리[心地]에 다만 착하지 않음[不善]이 없으면 서쪽 나라가 여기서 멀지 않고, 만약 착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면 염불하여도 왕 생하여 이르기 어렵느니라. 心地 但無不善 西方 去此不遙 若懷不善之心 念佛 往生難到- 大.興.德.宗 三二四(75) *정토가(淨土家)에서는 대업왕생(大業往生 업을 지닌 채로 극락 세계에 가서 남)을 주장하여 착하지 못한 사람도 미타(彌陀)의 원력 으로 극락에 가서 난다고 말하지만, 설혹 가서 난다 하여도 이는 자 기의 업력(業力)에 따르는 환주장엄(幻住莊嚴)이요, 모든 부처님의 실지정토(實地淨土)는 아니다. 내외명철하면 서쪽 나라와 다름 없나니, 이 법을 닦지 않고 어떻 게 서쪽 나라에 이르리오. 內外明徹 不異西方 不作此修 如何到彼-敦.大.興.德.宗 三二五 *내외명철은 묘각정토(妙覺淨土)니, 이것이 육조의 정토이다. 십지 (十地)와 등각(等覺)도 내외명철한 제불정토(諸佛淨土)와 법신불(法 身佛)인 아미타불은 보지 못한다. 만약 무생인 돈법(頓法)을 깨치면 서쪽 나라를 봄이 찰나 사이에 있느니라. 若悟無生頓法 見西方 只在刹那間-敦.大.興.德.宗 二九五(76) *<단경>의 사상은 철두철미한 자성자오(自性自悟 자기의 성품을 스스로 깨침)에 있으므로, 그 이외의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한 생각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곳곳마다 연꽃 피나니, 한 꽃에 한 정토요 한 국토에 한 여래로다[一念心請淨하면處處에蓮花開니一華一 淨土요一土一如來라]'고 한 방거사(龐居士)의 송구(頌句)가 단경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설사 대업왕생을 한다 하여도 제불정토와 미타면목(彌陀面目)은 꿈에도 보지 못하나니, 자성자오하여 남이 없음[無生]을 단박에 깨달 아(頓證], 참으로 미망으로부터 해탈하여야 한다. 미타(彌陀)의 진면 목(眞面目)을 보지 못하는 왕생은 꿈 속의 꼭두각시 놀음[夢中幻戱] 이니, 선가(禪家)에서 선정겸수(禪淨兼修 선과 정토를 함께 닦음) 운 운하는 것은 본분납자(本分衲子)가 아니며 육조의 법손이 될 수 없 다. 7. 불오염수(不汚染修) 대사가 말씀하셨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오는고?" "한 물건이라고 말씀드린다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대사가 말씀하셨다. "그러면 닦아 증득[修證]하는가?"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않으나 오염(汚染)될 수는 없습니다." 대사가 말씀하셨다. "다만 이 오염되지 않음[不汚染]은 모든 부처님께선 호념(護念)하 시는 바라, 네가 벌써 이러하고 나 또한 이러하니라." 師曰 什�쒃� 恁�쑽� 曰說似一物 卽不中 師曰 還可修證否 曰 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師曰 只此不汚染 諸佛之所護念 汝旣 如是 吾亦如是-德.宗 三五 九(78) *불오염(不汚染)을 육조는 무념이라고 하였으며, 무념은 내외명철 인 불지(佛地)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불지무념이 아니면 불오염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오염은 제불의 호념하는 바이며, 너도 이러하고 나 또한 이러하도다>라고 한 것은 부처님행을 수행 [修行佛行]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 수증(修證 닦아 증득함)이란 무슨 말인가? 옛 조사들은 이 불오염의 수증을 점차수증(漸次修證 점차로 닦아 증득함)이 아니요, 불지인 원증(圓證) 후의 원수(圓修)라고 하여, 착 의끽반(着衣喫飯 옷 입고 밥 먹음), 소지분향(掃地焚香 땅을 쓸고 향 을 사룸) 등을 지칭하는 바, <털끝만큼도 닦고 배우는 마음이 없고, 모양 없는 빛 속에서 항상 자재하다[不起纖毫修學心하고無相光中常自 在라]>고 한 것이다. 이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이 수증을 점수사상에 배합하여 망상을 닦아 다스리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이 불오염을 모르는 큰 잘못으 로서, 육조의 법문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점수문에서도 불오염을 주장하기는 하나, 점수문의 돈오는 '육진 의 번뇌가 전과 다름 없어서[客塵煩惱 如前無殊]' 무념이 아니므로 생각 생각 오염되어 불오염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념을 돈증 (頓證 단박에 깨침)하기 전의 수행은 모두 오염수(汚染修)인 것이다. 비록 망념이 본래 공(空)한 것은 안다 하여도, 망념이 계속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므로 경계를 따라 생각이 일어나[遇境生念] 전전(轉轉)히 오염되기 때문이다. 8. 불보리인(佛菩提因) 만약 수행하여 부처님을 찾는다고 할진댄 어느 곳에서 참됨[眞]을 찾으려 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만약 몸 가운데 스스로 참됨이 있으 면 참됨 있음이 곧 성불하는 씨앗[因]이로다. 若欲修行云覓佛 不知何處欲求眞 若能身中 自有眞 有眞 卽是 成佛因-敦 三八六 *몸 가운데 진여(眞如)가 있는 줄 알면, 이것이 수도하여 성불할 수 있는 씨앗이 된다는 말이다. 만약 수행하여 부처가 되고자 할진댄 어느 곳에서 참됨을 찾으려 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만약 마음 가운데 스스로 참됨을 보면 참됨 있음이 곧 성불하는 씨앗이로다. 若欲修行覓作佛 不知何處擬求眞 若能心中 自見眞 有眞 卽是 成佛因-興.德.宗 三八六(81) *돈황본에는 '몸 가운데 스스로 참됨이 있다[身中自有眞]'고 되어 있고, 다른 각 본에는 '마음 가운데에서 스스로 참됨을 본다[心中에自 見眞]'고 하여 서로 차이가 있다. '몸 가운데 참됨이 있음'은 몸 속에 진여가 있음이 되고, '마음 가 운데에서 스스로 참됨을 본다'함은 진여를 스스로 보는 것인지라 곧 견성이 된다. '몸 가운데 참됨이 있음[身中有眞]'은 성불하는 씨앗[成 佛因]이지만, '마음 가운에서 참됨을 봄[心中見眞]'은 견성인 불과(佛 果)로서 인지(因地)가 될 수 없으므로 <단경>의 '견성즉불(見性卽佛 견성이 곧 부처)'이라는 원칙에 어긋난다. 물론 다른 본들도 '참됨을 보는 것이 곧 성불하는 씨앗[見眞卽成 佛因]'이라고 하지 않고 돈황본처럼 '참됨 있음이 곧 성불하는 씨앗 [有眞卽成佛因]'이라고 하였으므로 원칙상 모순은 없다. 그러나 '마음 가운데에서 참됨을 본다[心中見眞]'고 해 놓고 바로 뒤에 '참됨 있음 이 곧 성불하는 씨앗[有眞卽是成佛因]'이라고 하였으니, 돈황본이 아 닌 다른 본들은 자체의 모순을 면치 못하므로 앞뒤의 글이 맞지 않 는다. 화신 보신 및 정신이여! 세 몸이 원래 한 몸이니, 만약 몸 가운데 서 스스로 보는 걸 찾으면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루는 씨앗이로다. 化身報身及淨身 三身 元本是一身 若向身中 覓自見 卽是成佛 菩提因-敦 三八五(83) *'멱자견(覓自見)'을 '찾아서 스스로 본다'고 하면 이는 견성한다는 말로서 성불하는 씨앗이 아니므로 '견성즉불'이라는 원칙에 어긋난 다. '스스로 보는 걸 찾는다'고 하면 '견성하는 길을 닦는다'는 말이 므로 성불하는 씨앗이라 하여도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화신 보신 및 정신이여! 세 몸이 원래 한 몸이라, 만약 자성 가운 데로 향하여 능히 스스로 보면 곧 성불하는 깨달음의 씨앗이로다. 法身報身及化身 三身 本來是一身 若向性中 能自見 卽是成佛 菩提因-興.德.宗 三八五(84)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품 가운데서 스스로 본다[性中自見]'함 은 견성이 된다. 그런데 견성은 불과(佛果)요 인지(因地)가 아니니 '성품 가운데서 스스로 본다[性中自見]'고 하면서 '성불하는 씨앗[成 佛因]'이라 하면, <단경>의 '견성즉불'이라는 원칙에 어긋난다. 본디 각 본에서는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면 곧 부처라 한다[識心 見性 卽名爲佛]'고 하였고, 또 '만약 자성을 알면 곧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若識自性 卽至佛地]'고 하여 '견성즉불'을 더욱 강조하였으니, 이 대원칙(大原則)에 이긋나는 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는 뒷 사람들이 베껴 쓸 때 잘못하였거나 아니면 일부러 고쳐 바꾼 것 일 터이므로, 일본 조동종의 개조(開祖)인 도원(道元)의 필사본(筆寫 本)이라는 대승사본에는 논란이 된 앞의 두 구절이 들어 있는 '자성 진불송(自性眞佛頌)'을 모두 삭제해 버렸다. 모름지기 돈황본 및 다른 본에 일관된 근본 사상은 내외명철, 법 신불, 묘각견성(妙覺見性), 오인돈수, 자성돈수의 돈법돈교, 불지무념 을 전제로 한 무념위종, 식심견성, 오후수행불행(悟後修行佛行) 등이 니, 이에 어긋나는 사상은 모두 없애고, 오직 <단경>의 근본으로 돌 아와 육조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어야 한다. 특히 각본 가운데서 '마 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 곧 부처라 한다[識心見性 卽名爲佛]', '만약 자성을 알면 곧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若識自性 卽至佛地]'와 같은 법문은 육조의 가르침을 바로 잇고 드날리는 데 한층 도움이 되는 것이다. 제2편 돈황본단경 편역(編譯) 1.서언(序言) 혜능대사가 대범사 강당의 높은 법좌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를 주시니, 그때 법좌 아래에는 스님, 비구니, 도교인, 속인등, 일만여 명이 있었다. 소주 자사 위거와 여러 관료 삼십여 명과 유가의 선비 몇몇 사람 들이 대사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해주기를 함께 청하였고, 자사 는 이윽고 문인 법해로 하여금 모아서 기록하게 하였으며, 후대에 널리 행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함께 이 종지를 이어받아서 서 로서로 전수케 한지라, 의지하여 믿는 바가 있어서 이에 받들어 이 어받게 하기 위하여 이 <단경>을 설하였다. 惠能大師 於大梵寺講堂中 昇高座 說摩訶般若波羅密法 授 (受)無相戒 其時座下 僧尼道俗 一萬餘人 韶州刺史韋 (등據) 及諸官僚(寮)三十餘人 儒士餘人 同請大師說摩訶般若波羅蜜 法 刺史遂令門人僧法海集記 流行後代(伐)與學道者 承此宗旨 遞相傳授 有所依(於)約 以爲 承 說此壇經 2. 심사(尋師) 혜능대사는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마음을 깨끗이 하여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 대사께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고 한 참 묵묵하신 다음 이윽고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조용히 들어라. 혜능의 아버지의 본관은 법양인데 좌 천되어 영남의 신주 백성으로 옮겨 살았고 혜능은 어려서 일찍 아버 지를 여의었다. 늙은 어머니와 외로운 아들은 남해로 옮겨와서 가는 에 시달리며 장터에서 땔나무를 팔았더니라. 어느 날 한 손님이 땔나무를 샀다. 혜능을 데리고 관숙사(官宿舍) 에 이르러 손님은 나무를 가져갔고, 혜능은 값을 받고저 문을 나서 려 하는데 문득 한 손님이 <금강경>을 읽는 것을 보았다. 혜능은 한번 들음에 마음이 밝아져 문득 깨치고, 이내 손님에게 묻기를 "어느 곳에서 오셨기에 이 경전을 가지고 읽습니까.?" 하였다. 손님이 대답하기를 "나는 기주 황매현 동빙무산에서 오조 홍인화상을 예배하였는데, 지금 그 곳에는 문인이 천여 명이 넘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오조대 사가 승려와 속인들에게 다만 <금강경> 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바로 부처를 이루게 된다고 권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혜능은 숙세의 업연이 있어서, 곧 어머니를 하직하 고 황매의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 홍인화상을 예배하였다. 能大師言 善知識 心 念摩訶般若波羅蜜法 大師不語 自 心 神 良久乃言 善知識 靜( )聽 惠能慈父 本官 范陽 左降遷流 (嶺)南新州百姓 惠能幼小 父小早亡 老母 孤遺 移來(南)海 艱 辛貧乏(之) 於市賣(90)(買)柴 忽有一客 買柴 遂領惠能 至於 官店 客將柴去 惠能 得錢 却向門前 忽見一客 讀金剛經 惠能 一聞 心明(名)便悟 乃問(聞)客曰 從何處來 指此經典 客 答曰 我於 州黃梅縣(懸)東憑茂(墓)山 禮拜五祖弘忍和尙 見今(令) 在彼 門人 有千餘衆 我於彼聽見大師勸道俗 但持(特)金剛經 一卷 卽得見性 直了成佛 惠能 聞說 宿業有緣 便卽辭親 往黃 梅憑茂(墓)山 禮拜五祖弘忍和尙(91) 홍인화상께서 혜능에게 묻기를 "너는 어느 곳 사람인데 이 산에까지 와서 나를 예배하며, 이제 나에게서 새삼스레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셨다. 혜능이 대답하기를 "제자는 영남 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지금 짐짓 멀리서 와 서 큰스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을 구함이 아니옵고 오직 부처되 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 하였다. 오조대사께서는 혜능을 꾸짖으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영남 사람이요 또한 오랑캐거니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하셨다. 혜능이 대답하기를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 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사오니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 니까?" 하였다. 오조스님은 함께 더 이야기하시고 싶었으나, 좌우에 사람들이 둘 러 서 있는 것을 보시고 다시 더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혜능을 내보내어 대중을 따라 일하게 하시니, 그 때 혜능은 한 행자가 이끄 는 대로 방앗간으로 가서 여덟 달 남짓 방아를 찧었다. 弘忍和尙 問惠能曰 汝 何方人 來此山 禮拜吾 汝今向吾邊 復 求何物 惠能 答曰 弟子 是嶺(領)南人 新州百姓 今故遠來 禮 拜和尙 不求餘物 唯求<作>佛法 [作] 大師遂責惠能曰 汝是 嶺(領)南人 又是 若爲堪作佛 惠能 答曰 人 卽有南北 佛 性(姓) 卽無南北 (93) 身 與和尙 不同 佛性(姓) 有何差別 大師欲更共議 見左右在傍邊 大師更不言 遂發遣惠能 令隨衆 作務 時有一行者 遂差惠能於 房 踏 八箇餘月(94) *금강경(金剛經)... '이 한 권의 경이 중생의 자성 속에 본래 있 으니, 스스로 보지 못하는 이는 다만 문자만 독송할 것이요, 만 약 본래 마음을 깨치면 이 경이 문자 속에 있지 않음을 비로소 알비니라[此一卷經 衆生性中 本有 不自見者 但讀誦文字 若悟本 心 始知此經 不在文字 -金剛經序-六祖]' *직료성불(直了成佛 곧바로 요달하여 부처를 이룸)... 지위와 점 차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성불함이니 <영가증도가(永嘉證道 歌)>의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 번 뛰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간다)와 같은 뜻이다. 3. 명게(命偈) 오조 ㅎ인대사께서 하루는 문인들을 다 불러오게 하셨다. 문인들 이 다 모이자 말씀하혔다. "내 저희들에게 말하나니, 세상 사람들의 나고 죽는 일이 크거늘 너희들 문인들은 종일토록 공양을 하며 다만 복밭만을 구할 뿐 나고 죽는 괴로운 바다를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모두 자성이 미 혹하다면 복의 문이 어찌 너희들을 구제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모두 방으로 돌아가 스스로 잘 살펴보라. 지혜가 있는 자는 본래의 성품인 반야의 지혜를 스스로 써서 각기 게송 한 수를 지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너희들의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친 자가 있 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여 육대의 조사가 되게 하리니, 어 서 빨리 서둘도록 하라." 五祖弘忍於一日 喚門人盡來 門人 集訖(記) 五祖曰 吾向汝 (與)說 世人 生死事大 汝等門人 終日供養 只求福田 不求出 離生死苦海 汝等自性(姓) 迷 福門 何可救汝 汝 且歸房自看 有智(知)惠者 自(白)取本性(姓)般若之知(知之) 各作一偈呈吾 吾看汝偈 若悟(吾)大意者 付汝衣法 爲六代 火急急(97) 문인들이 처분을 받고 각기 자기 방으로 돌아와 서로 번갈아 말 하기를 "우리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뜻을 써서 게송을 지어 큰스님께 모 름지기 바칠 필요가 없다. 신수상좌는 우리의 교수사이므로 신수상 좌가 법을 얻은 후에는 저절로 의지하게 된 터이니 굳이 지을 필요 가 없다."하고, 모든 사람들은 생각을 쉬고 다들 감히 게송을 바치지 않았다. 그때 화공 노진이 홍인대사의 방 앞에 있는 삼칸의 복도에 '능가 변상'과 오조 대사가 가사와 법을 전수하는 그림을 그려 공양하고, 후대에 전하여 기념하고 자 벽을 살펴보고서 다음날 착수하려고 하 였다. 門人 得處分 却來各至自房 遞相謂言 我等 不須呈心用意作偈 將呈和尙 神秀上座 是敎授師 秀上座得法後 自可依(於)止 請 不用作 諸人 息心 盡不敢呈偈 時大師堂前 有三間房廊 於此 廊下 供養 欲畵楞伽變 幷畵五祖大師 傳授衣法 流行後代 爲 記 畵人盧珍(玲)看壁了 明日 下手(98) 4. 신수(神秀) 상좌인 신수는 생각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는 것은 내가 교수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으면 오조스님께서 나 의 마음 속의 견해가 얕고 깊음을 어찌 아시리오. 내가 마음의 게송 을 오조스님께 올려 뜻을 밝혀서 법을 구함은 옳거니와, 조사의 지 위를 넘봄은 옳지 않다. 도리어 범인의 마음으로 성인의 지위를 빼앗음과 같다. 그러나 만 약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으면 마침내 법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한 참을 아무리 생각하여도 참으로 어렵고 어려우며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로다. 밤이 삼경에 이르면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남쪽 복도의 중간 벽 위에 마음의 게송을 지어서 써 놓고 법을 구해 야겠다. 만약 오조스님께서 게송을 보시고 이 게송이 당치 않다고 나를 찾으시면 나의 전생 업장이 두터워서 합당히 법을 얻지 못함이 니, 성인의 뜻은 알기 어려우므로 내 마음을 스스로 쉬리라.' 上座神秀思惟 諸人 不呈心偈 緣我爲敎授師 我若不呈心偈 五 祖如何得見我心中 見解深淺 我將心偈 上五(99)祖呈意 求法 卽善(卽善求法) 覓祖 不善 却同凡心 奪其聖位 若不呈心 終 (修)不得法 良久思惟 甚難甚難 甚難甚難 夜至三更 不令人見 遂向南廊下中間(問)壁上 題作呈心偈 欲求於法 若五祖見偈 言此偈語<不堪> 若訪覓我 我宿業障重 不合得法 聖意難則 我心自息(100) 신수상좌가 밤중에 촛불을 들고 남쪽 복도의 중간 벽 위에 게송 을 지어 써놓았으나 사람들이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게송으로 말하 였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秀上座 三更 於南廊下中間壁上 秉燭題作偈 人盡不知(和) 偈 曰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101) 時時勸拂(佛)拭 莫使有塵埃 신수상좌가 이 게송을 다 써 놓고 방에 돌아와 누웠으나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오조스님께서 아침에 노공봉을 불러 남쪽 복도에 '능가변상'을 그리게 하려 하시다가, 문득 이 게송을 보셨다. 다 읽 고 나서 공봉에게 말씀하셨다. "홍인이 공봉에게 돈 삼만냥을 주어 멀리서 온 것을 깊이 위로하니, 변상을 그리지 않으리라. <금강경> 에 말씀하기를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 하셨으니, 이 게송을 그대로 두어서 미혹한 사람들로 하여금 외우게 하여, 이 를 의지하여 행을 닦아서 삼악도에 떨어지니 않게 하는것만 못할 것 이다. 법을 의지하여 행을 닦으면 사람들 에게 큰 이익이 있을 것이니라." 이윽고 홍인대사께서 문인들을 다 불러오게 하여 게송 앞에 향을 사르게 하시니, 사람들이 들어와 보고 모두 공경하는 마음을 내므로 오조스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모두 이 게송을 외우라. 외우는 자는 바야흐로 자성을 볼 것이며, 이를 의지하여 수행하면 곧 타락하지 않으리라." 문인들이 다들 외우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 '훌륭하다!'고 말씀 하였다. 神秀上座題此偈畢 歸房臥 無人見 五祖平旦 遂喚(換)盧供 奉來 南廊下 畵楞伽變 五祖忽見此偈 讀訖(請記) 乃謂供奉曰 弘忍 與供奉錢三十千 深勞遠來(102) 不畵變相也 金剛經 云 凡所有相 皆是虛妄 不如留(流)此偈 令迷人誦 依此修行 不墮 三惡 依法修行 人有大利益 大師遂喚門人盡來 焚香偈前 人衆 入(人)見 皆生敬心 <五祖曰> 如等 盡誦此偈者 方得見性(姓) 依(於)此修行 卽不墮落 門人盡誦 皆生敬心 喚言善哉(103) 오조스님이 신수상좌를 거처로 불러서 물으시되, "네가 이 게송을 지은 것이냐? 만약 네가 지은 것이라면 마땅히 나의 법을 얻으리라." 하셨다. 신수상좌가 말하기를, "부끄럽습니다. 실은 제가 지었습니다만 감히 조사의 자리를 구함 이 아니오니, 원하옵건대 스님께서는 자비로써 보아 주옵소서. 제자 가 작은 지혜라도 있어서 큰 뜻을 알았습니까?" 하였다. 오조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지은 이 게송은 소견이 당도하였으나 다만 문 앞에 이르렀 을 뿐 아직 문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였다. 범부들이 이 게송을 의 지하여 수행하면 곧 타락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견해를 가지고 위 없 는 보리를 찾는다면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문 안으로 들 어와야만 자기의본성을 보느니라. 너는 우선 돌아가 며칠 동안 더 자성을 보았다면 마땅히 가사와 법을 너에게 부촉 하리라."하셨다. 신수상좌는 돌아가 며칠을 지냈으나 게송을 짓지 못하였다. 五祖(褐)遂喚秀上座於堂內 問(門)是汝作偈否 若是汝作 應得 我法 秀上座言 罪過 實是神秀作 不敢求祖 願和尙 慈悲 看 弟子有小智惠 識大意否 五祖(褐)曰 汝作此偈 見卽來到 只到 門前 尙未得入 凡夫依(於)此偈修行 卽不墮落 作此見解 若覓 無上菩提 卽未可得 須入得門 見自本性(姓) 汝且去 一兩日來 思惟 更作一偈 來呈吾 若入得門 見自本性(姓) 當付汝衣法 秀上座去 數日作不得(105) *'이 게송을 외는 이는 바야흐로 자성을 본다.[誦此偈者 方 得見性]'고 함은 오조(오조)가 대중을 유인하기 위하여 방편 으로 하신 말씀이다. 5. 정게(呈偈) 한 동자가 방앗간 옆을 지나면서 이 게송을 외고 있었다. 혜능은 한번 듣고, 이 게송이 견성하지도 못하였고 큰 뜻을 알지도 못한 것 임을 알았다. 혜능이 동자에게 묻기를, "지금 외우는 것은 무슨 게송인가?"하였다. 동자가 혜능에게 대답 하여 말하였다. "너는 모르는가?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고 죽는 일이 크니 가사와 법을 전하고저 한다 하시고, 문인들로 하여금 각기 게송 한 수씩을 지어와서 보이라 하시고, 큰 뜻을 깨쳤으면 가사와 법을 전 하여 육대의 조사로 삼으리라 하셨는데, 신수라고 하는 상좌가 문득 남쪽 복도 벽에 모양 없는 게송(無相偈) 한 수를 써 놓았더니, 오조 스님께서 모든 문인들로 하여금 다 외우게 하시고, 이 게송을 깨친 이는 곧 자기의 성품을 볼 것이니,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나 고 죽음을 벗어나게 되리라고 하셨다." 有一童子 於 房邊過 唱誦此偈 惠能 一聞 知未見性(姓) 未 (卽)識大意 能 問童子 適來誦者 是何言偈 童子答能曰 不 知 大師言 生死事(是)大 欲傳衣(於)(107)法 令門人等 各作一 偈 來呈看 悟大意 卽付衣法 爲六代祖(褐) 有一上座名神秀 忽於南廊下 書無相偈一首 五祖(褐)令諸門人 盡誦 悟此偈者 卽見自性(姓) 依此修行 卽得出離(108) 혜능이 대답하기를 "나는 여기서 방아찧기를 여덟 달 남짓 하였으나 아직 조사당 앞 에 가 보질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그대는 나를 남쪽 복도로 인도하 여 이 게송을 보고 예배하게 하여 주게. 또한 바라건대 이 게송을 외워 내생의 인연을 맺어 부처님 나라에 나기를 바라네"하였다. 동자가 혜능을 인도하여 남쪽복도에 이르렀다. 혜능은 곧 이 게송 에 예배 하였고, 글자를 알자 못하므로 어느 사람에게 읽어 주기를 청하였다. 혜능은 듣고서 곧 대강의 뜻을 알았다. 혜능은 한 게송을 지어, 다시 글을 쓸 줄 아는 이에게 청하여 서쪽 벽 위에 쓰게 하여 자신의 본래 마음을 나타내 보였다. 본래 마음을 모르면 법을 배워 도 이익이 없으니,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아야만 곧 큰 뜻을 깨닫느 니라. 혜능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또 게송에서 말하였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절 안의 대중들이 혜능이 지은 게송을 보고 다들 괴이하게 여기 므로, 혜능은 방앗간으로 돌아갔다. 오조스님이 문득 혜능의 게송을 보시고, 곧 큰뜻을 잘 알았으나, 여러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하시어 대중에게 말씀하기를 "이도 또한 아니로다!"하셨느니라. 惠能 答曰 我此踏 八箇餘月 未至堂前 望上人 引惠能至南廊 下 見此偈禮拜 亦願誦取 結來生緣 願生佛地 童子引能至南廊 下 能 卽禮拜此偈 爲不識字 請一人讀 惠<能>聞(問)已 卽識 大意 惠能 亦作一偈 又請得一解書人 於西間壁上 題(提)著 呈自本心 不識本(109) 心 學法無益 識心見性(姓) 卽悟(吾)大 意 惠能偈 曰 菩提 本無樹 明鏡 亦無臺 佛性(姓) 常淸(靑)淨 何處有塵埃 又偈曰 心是菩提樹 身爲明鏡臺 明鏡本淸淨 何處染塵埃 院內徒(從)衆 見能作此偈 盡怪 惠能 却入 房 五祖(褐)忽見 惠能偈(但) 卽善[知]識大意 恐衆人知 五祖乃謂衆人曰 此亦 未得了(110)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佛性常淸淨 何處有塵埃]'... 각 유통 본에는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일어나리오[本來 無一物 何處惹塵埃]'로 되어 있다. 6. 수법(受法) 오조스님께서 밤중 삼경에 혜능을 조사당 안으로 불러 <금강경> 을 설해 주셨다. 혜능이 한번 듣고 말끝에 깨쳐서 그날 밤으로 법을 전해 받으니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이내 오조스님은 단박 깨치는 법과 가사를 전하시며 말씀하셨다. "네가 육대조사가 되었으니 가사로써 신표로 삼을 것이며, 대대로 이어받아 서로 전하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여 마땅히 스스 로 깨치도록 하라." 오조스님은 또 말씀하셨다. "혜능아, 예부터 법을 전함에 있어서 목숨은 실날에 매달린 것과 같다. 만약 이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니, 너는 모름지 기 속히 떠나라." 五祖夜至(知)三更 喚惠能堂內 說金剛經 惠能 一聞 言下 便 悟(伍) 其夜受法 人盡不知 便傳頓法及衣 汝爲六代祖 衣將爲 信 代代相傳 法以心傳心 當令自悟 五祖言 惠能 自古傳法 命(氣)如懸絲 若住此(113)間 有人害汝 汝卽須速去(114) 혜능이 가사와 법은 받고 밤중에 떠나려 하니 오조스님께서 몸소 구강역까지 혜능을 전송해 주시었으며, 떠날 때 문득 오조스님께서 처분을 내리시되, "너는 가서 노력하라. 법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되, 삼 년 동안은 이 법을 펴려하지 말라. 환란이 일어나리라. 뒤에 널리 펴서 미혹한 사람들을 잘 지도하여, 만약 마음이 열리면 너의 깨침과 다름이 없 으리라." 하셨다. 이에 혜능은 오조스님을 하직하고 곧 떠나서 남쪽으로 갔다. 能 得衣法 三更 發去 五祖自送能於九江驛 登時 便五(悟)祖 處分 汝居努力 將法向南 三年 忽弘此法 難起(去) 在後弘化 善誘迷人 若得心開 汝悟 無別 辭違已了 便發向南(115) 두 달 가량 되어서 대유령에 이르렀는데, 뒤에서 수백명의 사람들 이 쫓아 와서 혜능을 해치고 가사와 법을 빼앗고자 하다가 반쯤 와 서 다들 돌아간 것을 몰랐었다. 오직 한 스님만이 돌아가지 않았는 데 성은 진이요 이름은 혜명이며, 선조는 삼품장군으로, 성품과 행동 이 거칠고 포악하여 바로 고갯마루까지 쫓아 올라와서 덮치려 하였 다. 혜능이 곧 가사를 돌려 주었으나 또한 받으려 하지 않고 "제가 짐짓 멀리 온 것은 법을 구함이요 그 가사는 필요치 않습니다" 하였 다. 혜능이 고갯마루에서 문득 법을 전하니 혜명이 법문을 듣고 말끝 에 마음이 열리었으므로, 혜능은 혜명으로 하여금 "곧 북쪽으로 돌 아가서 사람들을 교화하라."고 하셨다. 兩月中間 至大庾(庚)嶺 不知向後 有數百人來 欲擬害(頭)惠能 奪衣(於)法 來至半路 盡 却廻 唯有一僧 姓陳 名惠明(順) 先 是三品將軍 性行 序惡 直至嶺上 來 犯著 惠能 卽還法衣 又 不肯取 我故遠來 求法 不要其衣 能 於嶺上 便傳法惠明(順) 惠明(順) 得聞 言下心聞開 能 使惠明(順) 卽却向北化人來 (116) *박학다문한 대선배인 신수(神秀)를 물리치고 일자무식인 초동 목수(樵童牧竪)에게 대법을 전하였으니, 불법은 문자에 있지않 고 견성에 있는 것임을 알겠다. *변전돈법(便傳頓法 곧 돈법을 전수함)... <단경>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돈법뿐이오 점법(漸法)은 없으니, 점수(漸修)를 말 함은 단경의 법이 아니다. 7. 정혜(定慧) 혜능이 이곳에 와서 머무른 것은 모든 관료, 도교인, 속인들과 더 불어 오랜 전생부터 많은 인연이 있어서이다. 가르침은 옛 성인이 전하신 바요 혜능 스스로 안 것이 아니니, 옛 성인의 가르침 듣기를 원하는 이는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 하여, 듣고 나서 스스로 미혹함을 없애어 옛 사람들의 깨침과 같기를 바랄지니라.[아래로부 터는 법(法)이니라.]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보리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능히 스스로 깨 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구하여 자기의 성품을 보아라. 선지식들아, 깨치게 되면 곧 지혜를 이루느니라. 惠能 來依(衣)此地 與諸官僚(奪)道俗 亦有累劫之因 敎是先聖 (性)所傳 不是惠能自知 願聞先聖(性)敎者 各須淨心 聞了願自 除(餘)迷 如(於)先代悟 惠能大師喚言 善智識 菩提般若之智 (知) 世人 本自有之 卽緣心迷 不能自悟 須求大善知識 示導 (道) 見性 善知識 遇悟卽成智(118)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정과 혜로써 근본을 삼나니, 첫째로 미혹하여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 서 둘이 아니니라. 곧 정은 이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씀이니, 곧 혜가 작용할때 정이 혜에 있고 곧 정이 작용할 때 혜가 정에 있느니라. 선지식들아, 이 뜻은 곧 정,혜를 함께 함이니라. 도를 배우는 사람 은 짐짓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법에 두 모양이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 하지 않으면 혜와 정을 함께 함이 아니요, 마음과 입이 함께 착하여 안팎이 한가지면 정,혜가 곧 함께 함이니라. 스스로 깨쳐 수행함은 입으로는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앞 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 한 사람으로서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의 아집 이 생겨 네 모양(四相)을 버리지 못함이니라. 善知識 我此法門 以定慧爲本 第一勿迷言惠定 別 定惠 體一 不二 卽定是惠體 卽惠是定用 卽惠之時 定在惠 卽定之時 惠 在定 善知識 此義 卽是<定>惠等 學道之人 作意 莫言先定發 惠 先惠發定 定惠各別 作此見者 法有二相 口說善 心不善 惠 定不等 心口俱善 內外一[衆]種 定惠卽等 自悟修行 不在口諍 若諍先後 卽是<迷>人 不斷勝負 却生法我 不離四相(120) 일행삼매란 일상시에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곧은 마음을 행하는 것이다. <정명경>에 말씀하기를 '곧은 마음이 도량 이요 곧은 마음이 정토다'라고 하였느니라. 마음에 아첨하고 굽은 생각을 가지고 입르로만 법의 곧음을 말하 지 말라.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부처님 제자가 아니니라. 오직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여 모든 법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국집하여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곧은 마 음이라고 하며, 망심을 제거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행삼 매라고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법은 무정과 같은 것이므로 도리 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니라.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 어찌 도리어 정체할 것인가?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요, 머물러 있으 면 곧 속박된 것이니라.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음이 옳다고 한다면 사리불이 숲속에 편 안히 앉아있는 것을 유마힐이 꾸짖었음이 합당하지 않느니라. 선지식들아, 또한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앉아서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보되,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치고 이것 으로써 공부를 삼게하는 것을 본다.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거기에 집착하여 전도됨이 곧 수백 가지이니, 이렇게 도를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짐짓 알아야 한다. 一行三昧者 於一切時中 行住坐(座)臥 常行直(眞眞)心(121) 是 淨名經 云 直(眞)心 是道場 直(眞)心 是淨土 莫心行 曲 (典) 口說法直 口說一行三昧 不行直(眞)心 非佛弟子 但行直 (眞)心 於一切法 無[上]有執著 名一行三昧 迷人 著法相 執 一行三昧 直(眞)心 坐不動 除妄不起心 卽是一行三昧 若如是 此法 同無情(淸) 却是障道因緣 道須(順)通流 何以却滯 心 <不>住在 卽通流 住卽被(彼)縛 若坐不動 是 維摩詰 不合呵 舍利弗 宴坐(座)林中 善知識 又見有人 敎人坐(座) 看心看淨 不動不起 從此置功 迷人 不悟 便執成顚 卽有數百般(盤) 如 此敎道者 故知(之)大錯(122) 선지식들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 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善知識 定惠 猶如何等 如燈光 有燈卽有光 無燈卽無光 燈是 光之(知)體 光是燈之用 <名>卽有二 體無兩(124)般 此定惠法 亦復如是(125) *정혜위본(定慧爲本 정.혜를 근본으로 삼음)...'모든 부처님은 정. 혜가 함께 하므로 불성을 밝게 본다.[諸佛世尊은 定慧等故로 明 見佛性하니라-涅槃經二十八]'고 함과 같이 정혜등지(定慧等持) 가 된 부처라야 견성(見性)이므로 정혜로써 근본을 삼는다고 한 것이다. *일행삼매(一行三昧)는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정.해가 등등(等 等)한 삼매이다. 8.무념(無念) 선지식들아, 법에는 단박 깨침과 점차로 깨침이 없다. 그러나 사 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 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의 성 품을 보는 것이다. 깨달으면 원래로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윤회하느니라. 善知識 法無頓漸 人有利鈍 迷(明)卽漸契(勸) 悟人 頓修 識自 本<心> 是見本性 悟卽元無差別 不悟 卽長劫輪廻善知識 我 自法門 從上已來 [頓漸]皆立無念爲(無)宗(126)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예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 워 종(宗)을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를 삼고 머무름 없음 (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어떤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가?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다.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새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머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 다. 그러나 지나간 생각과 지금의 생각과 다음의 생각이 생각생각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나,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이 곧 육신 을 떠나느니라.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생 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 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 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武相爲(無)體 無住[無]爲本 何名(明)無(爲)相 無相者 於相而 離相 無念者 於念而不念 無住者 爲人本性 念念不住 前念今 (念)念後念 念念相續(讀) 無有斷絶 若一念斷絶 法身 卽是離 色身 念念時中 於一切法上無住 一念若住 念念卽住 名繫縛 於一切法上 念念不住 卽無縛也 <是>以無住 爲本(127) 선지식들아, 밖으로 모든 모양을 여의는 것이 모양이 없는 것이 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한 것이다. 그 러므로 모양이 없는 것으로 본체를 삼느니라.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는 것이라고 하나니, 자 기의 생각 위에서 경계를 떠나고 법에 대하여 생각이 나지 않는 것 이니라. 일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서 생각을 모두 제거하지 말라.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남(生)을 받게 되느니라. 도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써서 법의 뜻을 쉬도록 하라. 자기의 잘 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권하겠는가. 미혹하여 스 스로 알지 못하고 또한 경전의 법을 비방하나니, 그러므로 생각 없 음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미혹한 사름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善知識 外離一切相 是無相 但能離相 性體淸淨 [是] 是以無 相爲體 於一切境(鏡)上 不染 名爲無念 於自念(128)上離境 (鏡) [不]不於法上念生 莫百物思 念盡除却 一念 斷 卽[無] 別處受生 學道者 用心 莫不息法意 自錯 尙可 更勸他人 迷不 自見 [迷] 又謗經法 是以立無念爲宗 卽緣迷(名)人 於境(鏡) 上 有念 念上 便起邪(去耶)見 一切塵勞妄念 從此而生(129)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無念)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세상 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만약 생각함 이 없으면 생각 없음도 또한 서지 않느니라. 없다 함은 두 모양의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의 본성 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 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 고 아나,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뜻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하였느니라. 然此敎門 立無念爲宗 世人 離見 不起於念 若無有念 無念 亦 不立 無者 無何事 念者 [念]何物 無者 離二相諸塵勞 [念者 念眞如本性] 眞如 是念之體 念(130)是眞如之用 [自]性(姓)起 念 雖卽見聞覺知(之) 不染萬境(鏡)而常自在 維摩經 云 外能 善分別諸法相 內於第一義而不動(131) *오인돈수(悟人頓修 깨친 이는 단박에 닦음)... 육조는 불지(佛 地)만을 돈오견성(頓悟見性 단박에 깨쳐서 성품을 봄)으로 인정 하였으며, 불지에는 오후점수(悟後漸修 깨친 뒤 점차로 닦음)가 없으므로 오인돈수라고 한 것이다. *무념위종(無念爲宗 생각 없음로 종을 삼음)... 등각(等覺) 이하 의 모든 중생은 모두 망념이 있으므로[金剛已還의 一切衆生은 皆是有念일새]중생이라 하고, 모든 부처는 다 무념을 얻었으므 로 부처라고 이름하느니라. *십지(十地).등각(等覺)도 유념(有念 생각이 있음)이요 불지만이 무념(無念 생각이 없음)이니, 견성은 불지무념(佛地無念)이므로 무념위종이라고 한 것이다. 9.좌선(坐禪) 선지식들아, 이 법문 중의 좌선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또 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 나니,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이며 허 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느니라. 만약 깨끗함을 본 다고 말한다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함에도 허망한 생각으로 진 여가 덮인 것이므로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일으켜 깨끗하느니라. 자기의 성품이 본래 깨끗함은 보지 아니하고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을 보면 도리어 깨끗하다고 하는 망상이 생기느니라. 망상은 처소가 없다. 그러므로 본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허망된 것임을 알라. 깨끗함은 모양이 없거늘, 도리어 깨끗한 모양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고 말하면 이러한 소견을 내는 이는 자기의 본래 성품 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 되니라. 만약 움직이지 않는 이가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면 이 는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몸은 움직 이지 아니하나 입만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나니, 도와 는 어긋나 등지는 것이니라.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고 하는 것 은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니라. 善知(諸)識 此法門中 坐(座)禪 元不著心 亦不著淨 亦不言 [不]動 若言看心 心元是妄 妄如幻(幼)故 無所看也 若言看淨 人性(姓) 本淨 爲妄念故 蓋覆眞如 離妄念 本性(姓)淨 不見自 性(姓)本淨 心起看淨 却生淨妄 妄無處所 故知看者 [看] 却 是妄也 淨無形相 却立淨相 言是功夫 作此見者 障(章)自本性 (姓) 却被淨縛 若不動者 [不]見一切人過患 是 性不動 迷 (133)人 自身 不動 開口卽說人是非 與道違背 看心看淨 却是 障道因緣(134)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나니, 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는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 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 지럽지 않는 것이 선(禪)이니라. 어떤 것을 선정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다. 설 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이니라. 그러나 다만 경계에 부딪침 으로 말미암아 부딪쳐 곧 어지럽게 되나니, 모양을 떠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니라. 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이 곧 선이요 안으 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니,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 (定)하므로 선정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즉시에 활연히 깨쳐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는다'하였고, <보살계>에 말씀하시기를 '본래 근원인 자성이 깨끗 하다'고 하였느니라. 선지식들아, 자기의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보아라. 스스로 닦아 스스로 지음이 자기 성품인 법신이며, 스스로 행함이 부처님의 행위 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이니라. 今記汝 是此法門中 何名坐(座)禪 此法門中 一切無碍 外於一 切境界上 念不起(去)爲坐 [內]見本性(姓)不亂 爲禪 何名爲禪 定 外離(雜)相曰禪 內不亂曰定 外(135)若有相 內性(姓)不亂 本自淨自定 只緣境觸 觸卽亂 離相不亂 卽定 外離相 卽禪 內 [外]不亂 卽定 外禪內定 故名禪定 維摩經 云 卽時(是)豁然 還得本心 菩薩戒 云 本源(須)自性(姓) 淸淨 善知識 見自性 (姓)自淨 自修自作 自性(姓)法身 自行 佛行 自作自成 佛道 (136) *정.혜를 함께 한 부처의 무념(無念)만이 선정이요 그밖의 것은 모두 번뇌.진로이다. 10.삼신(三身) 선지식들아, 모두 모름지기 자기의 몸으로 모양 없는 계(無相戒) 를 받되, 다 함께 혜능의 입을 따라 말하라.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기 의 삼신불을 보게 하리라. "나의 색신의 청정법신불에 귀의하오며, 나의 색신의 천백억화신 불에 귀의 하오며, 나의 색신의 당래원만보신불에 귀의합니다". [이 상 세번 부름] 색신은 집이므로 귀의한다고 말할 수 없다. 앞의 세 몸은 자기의 법성 속에 있고 세상 사람이 다 가진 것이다. 그러나 미혹하여 보지 못하고 밖으로 세 몸의 부처를 찾고 자기 색신 속의 세 성품의 부처 는 보지 못하느니라. 선지식들은 들으라. 선지식들에게 말하여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기 의 색신에 있는 자기의 법성이 세 몸의 부처를 가졌음을 보게 하리 라. 善知識 須自體 以(與)受無相戒 一時 逐惠能口道 令善知識 見自三身佛 於自色身 歸依(衣)淸淨法身佛 於自色身 歸依(衣) 千百億化身佛 於自色身 歸依(衣)當來圓滿報身佛 已上三唱 色身 是舍宅 不可言歸 向者三(138)身 在自法性 世人盡有 爲 迷(名)不見 外覓三[身]如來 不見自色身中三性佛 善知識 聽 與(汝)善知識說 令善知識 於(衣)自色身 見自法性 有三身(世) 佛(139) 이 세 몸의 부처는 자성으로부터 생긴다. 어떤 것을 깨끗한 법신 의 부처라고 하는가? 선지식들아, 세상 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깨끗하여 만 가지 법이 자기의 성품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악 을 행하고 모든 착한 일을 생각하면 문득 착한 행동을 닦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다 자성 속에 있어서 자성은 항상 깨끗함을 알 라.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 두워서 일월성신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지헤의 바람이 불어 구름 과 안개를 다 걷어 버리면 삼라만성이 일시에 모두 나타나느니라. 세상 사람의 자성이 깨끗함도 맑은 하늘과 같아서, 혜(惠)는 해와 같고 지(智)는 달과 같다. 지혜는 항상 밝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참법문을 열어 주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사무쳐 밝아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나니, 모든 법에 자재한 성품 을 청정법신이라 이름하느니라.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이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 것을 이름하여 돌아가 의지함이라 하느니라. 此三身佛 從性上生 何名淸淨[法]身佛 善知識 世人 性 本自 淨 萬法 在自性(姓) 思量一切[惡]事 卽行於(衣)惡 思量一切 善事 便修於善行 知如是一切法 盡在自性(姓) 自性(姓) 常淸 淨 日月常明(名) 只爲雲覆蓋 上明(名)下暗 不能了見日月星 (西)辰 忽遇慧(惠)風 吹散 卷盡雲霧 萬像森(參)羅 一時皆現 世人性淨 猶如淸天 惠如日 智如月 智惠常明(名) 於外著境(看 敬) 妄念浮雲 蓋覆 自性(姓) 不能明 故遇善知識 開(140)眞法 吹却迷(名)妄 內外明(名)徹 於自性(姓)中 萬法 皆見 一切法 自在性(姓) 名爲淸淨法身 自歸依(衣)者除不善行 是名歸依 (衣)(141) 어떤 것을 천백억화신불이라고 하는가? 생각하지 않으면 자성은 곧 비어 고요하지만 생각하면 이는 곧 스스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악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지옥이 되 고 착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천당이 되고 독과 해침은 변화하여 축생이 되고 자비는 변화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화하여 윗세계 가 되고 우치함은 변화하여 아랫나라가 된다. 이같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거늘,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를 못한다. 한 생각이 착하면 지혜가 곧 생기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자성의 화신이라하니라. 何名爲千百億化身佛 不思量 性卽空寂 思量 卽是自化 思量惡 法 化爲地獄 思量善法 化爲天堂 毒害(142) 化爲畜生 慈悲 化爲菩薩 智惠 化爲上界 愚癡 化爲下方 自性 (姓)變化甚多(名) 迷人 自不知見 一念善 知惠卽生 <此名自 性化身>(143) 어떤 것을 원만한 보신불이라고 하는가?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가 능히 만년의 어 리석음을 없애나니,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라. 항상 미래의 생각이 착한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리고 하는니라.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년의 착함을 물리쳐 그치게 하고 한 생 각의 착한 과보는 천년의 악을 물리쳐 없애나니, 비롯함이 없는 때 로부터 미래의 생각이 착함을 보신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법신을 좇아 생각함이 곧 화신이요, 순간순간의 생각마다 착한 것 이 곧 보신이요, 스스로 깨쳐 스스로 닦음이 곧 돌아가 의지하는 것 이다. 가죽과 살은 색신이며 집으로 귀의할 곳이 아니다. 다만 세 몸 을 깨치면 큰 뜻을 아느니라. <何名圓滿報身佛> 一燈 能除千年闇 一智能滅萬年愚 莫思向 前 常思於後 常後念善 名爲報身 一念惡報 却千年善止(心) 一念善報 却千年惡滅 無始(常)已來 後念善 名爲報身 從法身 思量 卽是化身 念念善 卽是報身 自悟自修 卽名歸依(衣)也 皮肉 是色身 是舍宅 不在歸依(衣)也 但悟三身 卽識大意 (億)(144) *내외명철(內外明徹 안팎이 사무쳐 밝음)은 묘각(妙覺)이니 불 교의 구경(究竟)이다. '시방세계 및 몸과 마음이 깨끗한 유리처 럼, 내외명철은 식음(識陰)이 다하였다고 이름하나니, 부처님의 묘장엄해에 들어가 보리를 원만케 하니라[十方世界와 及身心이 如吠瑠璃하야 內外明徹을 名識陰盡이니 入於如來妙莊嚴海하야 圓滿菩提니라 - 楞嚴經 十].' '깨끗한 유리 속에 밝은 달을 담은 것 같으면 문득 지위를 초월 하여 괴해(果海)에 들어가 무소득에 돌아가나니, 바야흐로 구경 극칙이라고 이름하느니라[如淨瑠璃內含寶月하면 便超越地位하 야 入於果海하야 歸無所得이니 方名究竟極則이니라 - 山楞巖 通議 十]' '만약에 식음이 다하면 바아흐로 지위를 넘어 얻는 바가 없이 구경을 원만성취하여 깨끗한 유리에 보배달을 담음과 같으니라 [若得識陰盡하면 方超地位하야 了無所得하야 究竟圓成하야 如 淨瑠璃內含寶月하니라 - 宗鏡錄 八十八].' '수정영락은 안팎이 사무쳐 밝아서 묘각에 항상 머무나니, 일체 지혜의 지위라고 이름하느니라[水晶瓔珞은 內外明徹하야 妙覺 에 常住하니 名一切智地니라 - 瓔珞經 上].' *육조스님은 내외명철을 청정법신이라고 하였다. 이는 불교의 구경인 원교불상(圓敎佛相 원교의 부처님 모습)이다. "묘각의 지위에 들어가서 청정법신을 성취하니, 원교불상이니라 [入妙覺位하야 成淸淨法身하니 圓敎佛相也니라 - 天台四敎議 圓敎章 一].' *조사스님의 말씀을 구차하게 교리에 배합할 필요가 없다고 생 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육조스님이 강조하신 내외명철은 불 교의 구경극칙인 원교묘각(圓敎妙覺)이다. 육조스님은 내외명철 이라야 식심견성(識心見性 마음을 알아 성품을 봄)이라고 하였 으니, 종문의 표방(標榜)인 견성(見性)은 불교의 구경묘각 즉 성 불(究竟妙覺卽成佛)임이 분명하다. 11.사원(四願) 이제 이미 스스로 삼신불에 귀의하여 마쳤으니, 선지식들과 더불 어 네 가지 넓고 큰 원을 발하리라. 선지식들아, 다 함께 혜능을 따 라 말하라. 무량한 중생 다 제도하기를 서원합니다. 무량한 번뇌 다 끊기를 서원합니다. 무량한 법문 다 배우기를 서원합니다. 위 없는 불도를 이루기를 서원합니다. [이상 세번 부름] 선지식들아, 무량한 중생을 맹세코 다 제도한다 함은 혜능이 전지식들을 제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의 중생을 각기 자기의 몸에 있는 자기의 성품으로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자기의 성품으로 스 스로 제도한다고 하는가? 자기 육신 속의 삿된 견해와 번뇌와 어리석음과 미망에 본래의 깨달음의 성품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므로 바른 생각으로 제도하는 것이니라. 이미 바른 생각인 반야의 지혜를 깨쳐서 어리석음과 미망을 없애 버리면 중생을 저마다 스스로 제도한 것이니라, 삿됨이 오면 바름으 로 제도하고 미혹함이 오면 깨침으로 제도하고, 어리석음이 오면 지 혜로 제도하고 악함이 오면 착함으로 제도하며 번뇌가 오면 보리로 제도하나니, 이렇게 제도함을 진실한 제도라고 하느니라. 무량한 번뇌를 맹세코 다 끊는다 함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허망 함을 제거하는 것이다. 무량한 법문을 맹세코 다 배운다 함은 위 없 는 바른 법을 배우는 것이다. 위 없는 불도(佛道)를 맹세코 이룬다 함은 항상 마음을 낮추는 행동으로 일체를 공격하며 미혹한 집착을 멀리 여의고, 깨달아 반야가 생겨 미망함을 없애는 것이다. 곧 스스 로 깨쳐 불도를 이루어 맹세코 바라는 힘(誓願力)을 행하는 것이니 라. 今旣自歸依三身佛已 與善知識 發四弘大願 善知識 一時 逐惠 能道 衆生無邊誓願度 煩惱無邊誓願斷 法門無邊誓願學 無 上佛道誓願成 善知識 衆生無邊誓願道 不是惠能 度善知識 心 中衆生 各於自身 自性(姓)自度 何名自性(姓)自度 自色身中 邪見煩惱 愚癡迷(名)妄 自有本覺性 將正見度 旣悟正見 般若 之智 除却愚癡迷妄 衆生 各各自度 邪來(見) 正度 迷來 悟度 愚來智度 惡來善度 煩惱來菩提(薩)度 如是度者 是名眞度 煩 惱無邊誓願斷 自心 除虛妄 法門無邊誓願學 學無上正法 無上 佛道誓願成 常下心行 恭敬一切 遠離迷執 覺知生般若 除却迷 妄 卽自悟佛道成 行誓願(148)力 12. 참회(懺悔) 지금 이미 사홍서원 세우기를 마쳤으니 선지식들에게 '무상참회 (無相懺悔:모양 없는 참회)'를 주어서 삼세의 조장을 없애게 하리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 다 우치와 미혹에 물들지 않고, 지난 날의 나쁜 행동을 일시에 영원 히 끊어서 자기의 성품에서 없애버리면 이것이 곧 참회니라.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지난 날의 거짓과 속이는 마음을 없애도록 하라. 영원히 끊음을 이름하여 자성의 참회라고 한다. 과거의 생각, 미 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질투에 물들지 않아서 지난 날 의 질투하는 마음도 없애도록 하라. 자기의 성품에서 만약 없애버리 면 이것이 곧 참회이니라." [이상 세번 부름] 선지식들아, 무엇을 이름하여 참회라고 하는가? 참(懺)이라고 하는 것은 종신토록 잘못을 짓지 않는 것이요, 회 (悔)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아는 것이다. 나쁜 죄업을 항상 마음에서 버리지 않으면 모든 부처님 앞에서 입으로 말하여도 이익 이 없느니라. 나의 이 법문 가운데는 영원히 끊어서 짓지 않음을 이 름하여 참회라 하느니라. 今旣發四弘誓願訖 與善知識 無相懺悔 <滅>三世罪障 大師言 善知識 前念後念及今念 念<念>不被愚迷染 從前惡行 一時 <永斷> 自性(姓) 若除 卽是懺悔 前念後念今念 念念<不>被 愚癡染 除却從前矯�x心 永斷名爲自性懺 前念後念及<今念> 念念不被疸妬(疸疾)染(151) 除却從前疾妬(垢)心 自性 若除 卽是懺 已上三唱 善知識 何 名懺悔 <懺>者 終身不作 悔者 知於前非 惡業 恒不離心 諸 佛前 口說無益 我此法門中 永斷不作 名爲懺悔(152) *견성을하여 업식종자(業識種子)가 전부 소멸하여야만 참다 운 참회이다. 13. 삼귀(三歸) 지금 이미 참회하기를 마쳤으니 선지식들을 위하여 '무상삼귀의계 (無相三歸依戒:무양이 없는 삼귀의계)'를 주리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깨달음의 양족존께 귀의하오며, 바름의 이욕존께 귀 의하오며, 깨끗함의 중중존께 귀의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다시는 삿되고 미혹한 외 도에게 귀의하지 않겠사오니,바라건대 자성의 삼보께서는 자비로써 증명하소서'하라. 선지식들아, 혜능이 선지식들에게 권하여 자성의삽보에게 귀의하 게 하나니, 부처란 깨달음이요 법이란 바름이며 승이란 깨끗함이니 라." 今旣懺悔已 與善知識 授(受)無相三歸依戒 大師言 善知(智)識 歸依(衣)覺兩足尊 歸依(衣)正離欲<尊> 歸依(衣)淨衆中尊 從 今已後 稱佛爲師 更不歸依(衣)餘邪迷(名)外道 願自<性>三寶 慈悲證(燈)明(名) 善知識 惠能 勸[善]善知識 歸依(衣)<自 性>三寶 佛者 覺也 法者 正也 僧者 淨也(154) 자기의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되고 미혹이 나지 않고 적은 욕심으로 넉넉한 줄을 알아, 재물을 떠나고 색을 떠나는 것을 양족 존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바름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으므로 곧 애 착이 없나니,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을 중중존이라고 하느니라. 범부는 이것을 알 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삼귀의계를 받는다. 그러나 만약 부처님에 게 귀의한다고 할진대는 부처가 어느 곳에 있으며, 만약 부처를 보 지 못한다면 곧 귀의할 바가 없느니라. 이미 귀의할 바가 없으면 그 말이란 도리어 허망될 뿐이니라. 선지식들아, 각각 스스로 관찰하여 그릇되게 마음을 쓰지 말라. 경의 말씀 가운데 '오직 스스로의 부처님께 귀의한다'하였고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자기의 성품에 귀의하지 아 니하면 돌아갈 바가 없느니라. 自心 歸依覺 邪迷(名)不生 少欲知足 離財離色 名兩足尊 自 心 歸正 念念無邪故 卽無愛著 以無愛著 名離欲尊 自心 歸淨 一切塵勞妄念 雖在自性(姓) 自性(姓) 不染著 名衆中尊 凡夫 <不>解 從日至日 受(155)三歸依(衣)戒 若言歸佛 佛在何處 若不見佛 卽無所歸 旣無所歸 言却是妄 善知識 各自觀察 莫 錯用意 經中 只卽言自歸依佛 自性(姓) 不歸 無所歸處(156) 14. 성공(性空) 지금 이미 삼보에게 스스로 귀의하여 모두를 지극한 마음들일 것 이니 선지식들을 위하여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리라. 선지식들아, 비록 마하반야바리밀법을 생각은 하나 알지 못하므로 혜능이 설명하여 주리니, 각각 잘 들으라. 마하반야바라밀이란 서쪽 나라의 범어이다. 당나라 말로는 '큰 지 혜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니라. 이 법은 모름지기 실행할 것이 요 입으로 외우는데 있지 않다. 입으로 외우고 실행하지 않으면 꼭 두각시와 같고 허깨비와 같으나, 닥고 행하는 이는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어떤 것을 마하라고 하는가? 마하란 큰 것이다. 마음의 한량이 넓고 커서 허공과 같으나 빈 마 음으로 앉아 있지 말라. 곧 무기공에 떨어지느니라. 허공은 능히 일월성신과 대지산하와 모든 초목과 악한 사람과 착 한 사람과 악한 법과 착한 법과 천당과 지옥을 그 안에 다 포함하고 있다. 세상 사람의 자성이 빈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今旣自歸依(衣)三寶 各各至心 與善知識 說摩訶般若波羅蜜 法 善知識 雖念 不解 惠能與說 各各聽(157) 摩訶般若波羅蜜 者 西國梵語 唐言 大智惠彼岸到 此法 須行 不在口<念> 口 念不行 如<幻>如化 修行者 法身 與佛 等也 何名摩訶 摩訶 者 是大 心量 廣大 猶如虛空 莫空(定)心坐(座) 卽落無記(旣) 空 <虛空> 能含日月星辰 大地山河(何) 一切草木 惡人善人 惡法善法 天堂地獄 盡在空中 世人性空 亦復如是(158) 자성이 만법을 포함하는 것이 곧 큰 것이며 만법 모두가 다 자성 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과 악함과 착함과 악한 법과 착한 법을 보되,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그에 물들지도 아니하여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크다고 하나니, 이것이 곧 큰 실행이니라.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고 지혜 있는 이는 마음으로 행하느니 라. 또한 미혹한 사람은 마음을 비워 생각하지 않은 것을 크다고 하 나, 이도 또한 옳지 않느니라. 마음의 한량이 넓고 크다고 하여도 행하지 않으면 곧 작은 것이 다. 입으로만 공연히 말하면서 이 행을 닦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性含萬法 是大 萬法 盡是自性(姓) 見一切人及非人 惡之(知) 與善 惡法善法 盡皆不捨 不可染著 猶(由)(159)如虛空 名之爲 大 此是摩訶行 迷人 口念 智者 心<行> 又有迷(名)人 空心 不思 名之爲大 此亦不是 心量 <廣>大 不行 是小(少) 莫口 空說 不修此行 非我弟子(160) 15. 반야(般若) 어떤 것을 반야라고 하는가.? 반야는 지혜이다. 모든 때에 있어서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곧 반야행이라고 하느니라. 한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기고 한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나거늘, 마음 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 '나는 닦는다'고 스스로 말하느니 라. 반야는 형상이 없나니, 지혜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니라. 어떤 것을 바라밀이라고 하는가? 이는 서쪽 나라의 범음으로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니라. 뜻을 알면 생멸을 떠난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서 물에 파랑이 있음과 같나니, 이는 곧 이 언덕이요,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흐름과 같나니, 곧 저 언덕에 이른다 고 이름하며, 그러므로 바라밀이라고 이름하느니라. 何名般若 般若 是智惠 一<切>時中 念念不愚 常行智惠 卽名 般若行 一念愚 卽般若絶 一念智 卽般若生 心中常愚 <自言> 我修 般若 無形相 智惠性 卽是 何名波羅蜜 此是西國梵音 言 彼岸到 解義 離生滅 著境(竟) 生滅起(去) 如水有波浪 卽是於 此岸 離境 無生滅 如水承長流 故卽名到彼岸 故名波羅蜜 (161)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고 지혜로운 이는 마음으로 행한다. 생각할때 망상이 있으면 그 망상이 있는 것은 곧 진실로 있는 것 이 아니다. 생각 생각마다 행한다면 이것을 진실이 있다고 하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반야의 법을 깨친 것이며 반야의 행을 닦는 것이다. 닦지 않으면 곧 범부요 한생각 수행하면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선지식들아, 번뇌가 곧 보리니, 앞생각을 붙잡아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 생각에 깨달으면 곧 부 처니라. 선지식들아,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 라. 머무름도 없고 가고 옴도 없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다 이 가 운데로부터 나와 큰 지혜로써 저 언덕에 이르러 번뇌와 진로를 쳐부 수나니,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니라. 가장 으뜸임을 찬탕하여 최상승법을 수행하면 결정코 성불하여, 감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내왕 또한 없나니, 이는 정과 혜가 함께 하여 일체법에 물들지 않음이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서 삼독을 변하게 하여 계.정.혜로 삼느니라. 迷人 口念 智者 心行 當念時有妄 有妄 卽非眞有 念念若行 是名眞有 悟此法者 悟般若法 修般若行 不修卽凡 一念修行 法身 等佛 善知識 卽煩惱是菩提 捉前念 迷卽凡 後念 悟卽佛 善知識 摩訶般若波羅蜜 最尊最上第一 無住無去無來 三世諸 佛 從中出 將大智(知)惠)到彼岸 打破五陰煩惱塵勞 最尊最上 第一 讚最上 最上乘法 修行 定成佛 無去無住無來住 是 定惠 等 不染一切法 三世諸佛 從中變三毒 爲戒定惠(163)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팔만 사천의 지혜를 좇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 팔만 사천의 질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로가 없으면 반야가 항상 있어서 자성을 떠나지 않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니라. 기억과 집착이 없어서 거짓되고 허망함을 일으키지 않 나니 이것이 곧 진여의 성품이다.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니도 않나니, 곧 자성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느니라. 善知識 我此法門 從八萬四千智惠 何以故 爲世有八萬四千塵 勞 若無塵勞 般若常在 不離自性(姓) 悟此法者 卽是無念 無 憶(億)無著 莫起(去)�x妄 卽自是眞如性(姓) 用智(知)惠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姓)成佛道(165) *오즉불(悟卽佛 깨치면 곧 부처)... 육조는 불지(佛地) 이외는 깨달음[悟]으로 인정치 않는다.

*최상최존(最上最尊 가장 으뜸이고 가장 높음)... 육조가 설하신 법문의 전체를 두고 말함이다. 16. 근기(根機) 선지식들아, 만약 매우 깊은 법의 세계에 들고자 하고 반야삼매에 들고자하는 사람은 바르게 반야바라밀의 행을 닦을 것이며 오로지 <금강반야바라밀경>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반야삼 매에 들어가느니라. 이 사람의 공덕이 한량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경에서 분명히 찬탄하였으니, 능히 다 갖추어 설명하지 못하느니라. 이것은 최상승 법으로서 큰 지혜와 높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이다. 만약 근기와 지혜가 작은 사람이 이 법을 들으면 마음에 믿음이 나지 않 나니, 무엇 때문인가? 비유하면 마치 큰 용이 큰 비를 내리는 것과 같다. 염부제에 비가 내리면 풀잎이 떠다니듯 하고, 만약 큰비가 큰 바다에 내리면 불지 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과 같으니라. 대승의 사람은 <금강경> 설하 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열려 깨치고 안다. 그러므로 본래 성품이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지니고 있어서 스스 로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서 문자를 빌리지 않음을 알라. 비유컨데, 그 빗물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님과 같다. 원래 용왕이 강과 바다 가운데서 이 물을 몸으로 이끌어 모든 중생과 모든 초목 과 모든 유정. 무정을 다 윤택하게 하고, 그 모든 물의 여러 흐름이 다시 큰 바다에 들어가고 바다는 모든 물을 받아들여 한 몸으로 합 쳐지는 것과 같나니, 중생의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善知識 若欲入甚深法界 入般若三昧者 直修般若波羅蜜行 但 持金剛般若波羅蜜經一卷 卽得見性 入般若三昧 當知此人功德 無量 經中 分明(名)讚嘆 不能具說 此是最上乘法 爲大智上根 人說 小(少)根智人 若聞<此>法 心不生信 何以故 譬如大龍 若下大雨 雨於(衣)閻浮提 如漂草葉 若下大雨 雨於(放)大海 不增不減 若大乘者 聞說金剛經 心開悟解 故知本性 自有般若 之智 自用智(知)惠觀照 不假文字 譬如其雨水不從天(無)有 元 是龍王 於江海中 將身引此水 令一切衆生 一切草木 一切有情 無情 悉皆蒙(像)潤 諸水衆流 却入大海 海納衆水 合爲一體 衆生本性 般若之智 亦復(167)


如是 근기가 작은 사람은 단박에 깨치는 이 가르침을 들으면, 마치 근 성이 작은 대지의 초목이 큰 비를 맞고 모두 다 저절로 거꾸러져서 자라지 못함과 같나니, 작은 근기의 사람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반야의 지혜가 있는 점은 큰 지혜를 가진 사람과 또한 차별이 없 거늘, 무슨 까닭으로 법을 듣고도 곧 깨치지 못하는가? 삿된 소견의 장애가 무겁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해가 능히 나타나지 못하 는 것과 같다. 반야의 지혜도 또한 크고 작음이 없으나 모든 중생이 스스로 미 혹한 마음이 있어서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으므로 자기의 성품을 깨 닫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이같이 근기가 작은 사람일지라도 단박에 깨치는 가르침 을 듣고 밖으로 닦는 것을 믿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마음에서 자 기의 본성으로 하여금 항상 바른 견해를 일으키면 번뇌, 진로의 중 생이 모두 다 당장에 깨치느니라. 마치 큰 바다가 모든 물의 흐름을 받아들여서 작은 물과 큰 물이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으니라. 곧 자성을 보면 안팎에 머물지 아니하며 오고감에 자유로워 집착 하는 마음을 능히 없애어 통달하여 거리낌이 없나니, 마음으로 이 행을 닦으면 곧 <반야바라밀경>과 더불어 본래 차별이 없느니라. 小(少)根之人 聞說此頓敎 猶如大地草木根性自小(少)

(169)者 若被大雨一沃 悉皆自倒(到) 不能增長 小(少)根之人 亦復如是 有般若之智 [之] 與大智之人 亦無差別 因何聞法卽不悟 緣邪 見障重 煩惱根深 猶如大雲 蓋覆於日 不得風吹 日無能現 般 若之智 亦無大小 爲一切衆生 自有迷心 外修覓佛 未(來)悟自 性 卽是小根人 聞其頓敎 不信外修 但於自心 令自本性 常起 正見 煩惱塵勞衆生 當時盡悟 猶如大海納於衆流 小水大水合 爲一體 卽是見性 內外不住 來去自由 能除執心 通達無碍 心 修此行 卽與般若波羅蜜經 本無差別(170)


*반야삼매(般若三昧)... 식심견성하면 반야삼매라고 육조는 말했다. 17. 견성(見性) 모든 경서 및 문자와 소승의 대승과 십이부의 경전이 다 사람으 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나니, 지혜의 성품에 연유한 까닭으로 능히 세운 것이니라. 만약 내가 없다면 지헤있는 사람과 모든 만법이 본 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요, 일체 경서가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음'을 말한 것임을 알아 야 하느니라. 사람 가운데는 어리석은 이도 있고 지혜로운 이도 있기 때문에, 어리석으면 작은 사람이 되고 지혜로우면 큰 사람이 되느니라. 미혹 한 사람은 지혜있는 이에게 묻고 지혜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성하여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깨쳐서 알아 마음이 열리 게 한다. 미혹한 사람이 만약 깨쳐서 마음이 열리면 큰 지혜를 가진 사람 과 더불어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깨치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한생각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니라. 그러므로 알라,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 음 가운데 있느니라. 그럼에도 어찌 자기의 마음을 좇아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 말씀하기를 "나의 본래 근원이 자성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성취하나니, 당장 활연히 깨쳐서 본래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一切經書及文字 小大二乘 十二部經 皆因<人>置 因智惠性故 故[然]能建立 我若無 智人 一切萬法 本無不(172)有 故知萬 法 本因(從)人興 一切經書因人說有 緣在人中有[有]愚有智 愚爲小(少)故 智爲大人 迷人問(問迷人)於智者 智人與愚人說 法 令使愚者 悟解心(深)開 迷人 若悟心開 與大智人無別 故 知不悟 卽[是]佛是衆生 一念若悟 卽衆生[不]是佛 故知一切 萬法 盡在自身心中 何不從於自心 頓現眞如本性(姓) 菩薩戒 經 云 我本源(願)自性(姓) 淸淨 識心見性 自成佛道 卽時豁然 還得本心(173)


*오즉시불(悟卽是佛 깨치면 곧 부처)... 거듭 말하건대, 육조 의 깨달음은 불지(佛地)뿐이요 십지.등각은 깨달은 경지가 아니다.

18. 돈오(頓悟) 선지식들아, 나는 오조 홍인화상의 회하에서 한 번 듣자 그 말끝 에 크게 깨쳐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으니라.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단박 깨쳐서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 깨쳐게 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큰 지식들을 찾 아서 지도를 받아 자성을 받아 자성을 볼 것이니라. 어떤 것을 큰 선지식이라고 하는가? 최상법이 바른 길을 곧게 가리키는 것임을 아는 것이 큰 선지식 이며 큰 인연이다. 이는 이른바 교화하고 지도하여 부처를 보게 하 는 것이니, 모든 착한 법이 다 선지식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느니라,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자성을 볼지니라. 만약 자기의 마음의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으로 전도되면 밖의 선 지식이 가르쳐 준다 하여도 스스로 깨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반 야의 관조를 일으키라. 잠깐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질 것이니 이것 이 곧 자기의 참 선지식이라, 한번 깨침에 곧 부처를 아느니라. 善知識 我於忍和尙處 一聞 言下 大悟(伍) 頓見眞如本性 是 故將此(汝)敎法 流行後代 令(今)學道者 頓(175)悟(伍)菩提 各 自觀心 令自本性 頓悟 若<不>能自悟者 須覓大善知識示導 (亦道) 見性(姓) 何名大善知<識> 解最上乘法 直示正路 是大 善知識 是大因緣 所謂(爲)化導(道)令得見佛 一切善法 皆因大 善知識能發起 故三世諸佛 十二部經 云在人性中 本自具有 不 能自性(姓)悟 須得善知識示導(道) 見性 若自悟者 不假外善知 識 若取外求善知識 望得解脫(說) 無有是處 識自心內善知識 卽得解<脫> 若自心 邪迷 妄念顚倒 外善知識 卽有敎授 [汝 若]不得自悟 當起般若觀照 刹那間 妄念 俱滅 卽是自眞正善 知識 一悟卽知佛也(176)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자 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며,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며,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 이 곧 무념이니라. 어떤 것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무념법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면, 모든 곳에 두루하되 그 모든 곳에 집착치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 이 하여 여섯 도적들로 하여 오고감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이니 무념행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도록 하지 말라. 이는 곧 법에 묶임이니 곧 변견이라고 하느니라. 무념법을 깨친 이는 만법에 다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 이는 이 는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돈법을 깨친 이는 부처의 지위 에 이르느니라. 自性心地 以智惠觀照 內外明(名)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是 解脫 旣得解脫 卽是般若三昧 悟般若三(178)昧卽是無念 何名 無念 無念法者 見一切法 不著一切法 遍一切處 不著一切處 常淨自性 使六賊 從六門走出 於六塵中 不離不染 來去自由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行 莫百物不思 常(當)令念絶 卽是法縛(傳) 卽名邊見 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 諸佛境界 悟無念頓法者 至佛位地(179) *돈견본성(頓見本性 본래 성품을 단박에 봄)... 내외명철하면 이것이 곧 식심(識心 마음을 앎).해탈.무념이고, 무념은 곧 불지라 하였다. 내외명철은 묘각이며, 식심은 견성(見性 성 품을 봄)이므로, 견성하면 묘각해탈이요 불지무념이다. 그러 므로 견성하면 곧 성불인 것이다. '곧 불성을 보아서 아뇩다라삼보리를 얻느니라[卽見佛性하야 得阿 多羅三 三菩提니라 - 涅槃經 二]'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불성을 보느니라[必得 阿 多羅三 三菩提하야 得見佛性이니라 - 涅槃經 二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각 곧 성불이니, 위의 글들은 성불과 견성이 동일한 내용임을 말한다. '지위가 십지인 보상이라 하여도 오히려 불성을 ㅂ게 보지 못하느니라[菩薩이 位階十地하여도 尙未明了知見佛性이니라 - 涅槃經 八]' '모든 부처님은 정.혜를 함께 함으로써 불성을 밝게 보느니 라[諸佛世尊은 定慧等故로 明見佛性이니라 - 涅槃經 二十 八].' '보살의 지위가 다하여 미세한 망념을 멀리 떠남으로써 심 성을 보나니, 구경각이라고 이름하느니라[菩薩地盡하야 以遠 離微細念故로 得見心性이니 名究竟覺이니라 - 起信論].' '십지의 성인들이 법문을 설하기를 구름 이는 듯하고 비오 듯 하여도, 견성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운 것과 같으니라[十 地聖人이 說法은 如雲如雨하야도 見性은 如隔羅穀이니라 - 雲門 傳燈錄 十九].' '견성하면 곧 부처가 되느니라[見性하면 卽成如來니라 - 宗 鏡錄 四十四].] *이상과 같이 부처님과 조사들이 한결같이 견성이 곧 성불 이라고 하였으니, 육조스님 말씀과 같다. 그리고 교가(敎家) 의 권위인 현수(賢首)도 그의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에 서 구경불지(究竟佛地)만이 견성이라고 하였으니, '견성이 곧 성불'임은 선(禪).교(敎)를 통한 근본 철칙이다. 19.멸죄(滅罪) 선지식들아, 뒷 세상에 나의 법을 얻는 이는 항상 법신이 너희의 좌우를 떠나지 않음을 보리라. 선지식들아, 이 돈교의 법문을 가지고 같이 보고 같이 행하여 소 원을 세워받아 지니되 부처님 섬기듯이 함으로써, 종신토록 받아 지 녀 물러나지 않는 사람은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고자 하느니라. 그러나 전하고 받을 때에는 모름지기 예부터 말없이 부촉하여 큰 서원을 세워서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곧 모름지기 분부한 것이 니라. 만약 견해가 같지 않거나 뜻과 원이 없다면 곳곳마다 망령되어 선전하여 저 앞사람을 손상케 하지 말라. 마침내 이익이 없느니라. 만약 만나는 사람이 알지 못하여 이 법문을 업신여기면 백겁 만겁 천생토록 부처의 종자를 끊게 되리라. 善知識 後代 得吾(悟)法者 常見吾法身 不離汝左右 善知識 將此頓敎法門 同見同行 發願受持 如事(是)佛故 終身受持而 不退者 欲入聖位 然須傳(縛)受時 從上已來 然而付於法 發 大誓願 不退菩提 卽須分付 若不同見解 無有志願 在在處處 勿妄宣傳 損彼前人 究( )竟無益 若愚人不解 此法門 百 劫萬劫千生 斷佛種性(183)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나의 '모양 없는 게송'을 들어라. 너희 미혹한 사람 들의 죄를 없일 것이니 또한 '죄를 없애는 게송(滅罪頌)'이라고 하 느니라." 게송에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은 복은 닦고 도는 닦지 않으면서 복을 닦음이 곧 도라고 말한다. 보시 공양하는 복이 끈이 없으나 마음 속 삼업은 원래대로 남아 있도다. 만약 복을 닦아 죄를 없애고자 하여도 뒷 세상에 복은 얻으나 죄가 따르지 않으리오 만약 마음 속에서 죄의 반연 없앨 줄 안다면 저마다 자기 성품 속의 참된 참회니라. 만약 대승의 참된 참회를 깨치면 삿됨을 없애고 바름을 행하여 죄 없어지리. 도를 배우는 사람이 능히 스스로 보면 곧 깨친 사람과 더불어 같도다. 오조께서 이 단박 깨치는 가르침을 전하심은 배우는 사람이 같은 한 몸 되기를 바라서이다. 만약 장차 본래의 몸을 찾고자 한다면 삼독의 나쁜 인연을 마음 속에서 씻어 버려라. 힘써 도를 닦아 유유히 지내지 말라. 어느덧 헛되이 지나 한세상 끝나리니 만약 대승의 단박 깨치는 법을 만났거든 정성들여 합장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구하라. 대사께서 법을 설하여 마치시니, 위사군과 관료와 스님들과 도교 인과 속인들의 찬탄하는 말이 끊이지 않고 '예전에 듣지 못한 것이 다'라고 하였다. 大師言 善知識 聽吾(悟)說無相頌(訟) 令汝迷(名)者罪滅 亦名 滅罪頌 頌曰 愚人修福不修道 謂言修福而是<道>. 布施供養福無邊 心中三業元來在. 若將修福欲滅罪 後世得福罪無造. 若解向心除罪緣 各自性(世)中眞懺悔(海). 若悟大乘眞懺悔(海) 除邪行正造無罪. 學道之人能自觀 卽與悟人同一例. 大師令傳此頓敎 願學之人同一體. 若欲當來覓本身 三毒惡緣心中洗.(185) 努力修道莫悠悠 忽然虛度一世休. 若遇大乘頓敎法 虔誠合掌志心求. 大師說法了 韋使君官僚僧衆道俗 讚言無盡 昔所未聞 (186) *동견동행(同見同行 같이 보고 같이 행함)...같은 아래 글에서 '만약 견해가 같지 않으면[若不同見解]'이라고 함과 같이 '견 해가 같음'을 말한다. *대승돈교(大乘頓敎)...삼승(三乘) 가운데의 대승이 아니요 최 상최존(最上崔尊)의 표현이며, 최상최존의 돈오교법(頓悟敎法) 을 말한 것이다. 19.공덕(功德) 위사군이 예배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께서 법을 설하심은 실로 부사의합니다. 제자가 일찍이 조 그마한 의심이 있어서 큰스님께서 여쭙고자 하오니, 바라건대 큰스 님께서는 대자대비로 제자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의심이 있거든 물으라. 어찌 두 번 세 번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위사군이 물었다. "대사께서 설하신 법은 서쪽 나라에서 오신 제일조 달마조사의 종지가 아닙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제자가 듣자오니 달마대사께서 양무제를 교화하실 때, 양무제가 달마대사께 묻기를, '짐이 한평생 동안 절을 짓고 보시를 하며 공양 을 올렸는데 공덕이 있습니까?'라고 사자 달마대사께서 '전혀 공덕 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시니, 무제는 불쾌하게 여겨 마침내 달마를 나라 받으로 내보내었다고 하는데 이 말을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큰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실로 공덕이 없으니, 사군은 달마대사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 무제가 삿된 길에 집착하여 바른 법을 모른 것이니라." 使君 禮拜 自言 和尙說法 實不思議 弟子嘗(當)有少疑 欲問 (聞)和尙 望[意]和尙 大慈大悲 爲弟子說 大師言 有疑(議)卽 問(聞) 何須再三 使君問(聞) 法 可不[不]是西國第一祖達磨祖 師宗旨 大師言是 弟子見說 達磨大師化(伐)梁武帝(諦) 問達磨 朕 一生已(未)來 造寺布施供養 有[有]功德否 達磨答言 無 功(189)德 武帝 遂遣達磨 出境 未審此言 請和尙說 六 祖言 實無功德 使君 [朕] 勿疑達磨大師言 武帝著邪道 不識 正法(190) 위사군이 물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육조도사께서 말씀하셨다.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만 복을 닦는 것이다. 복을 공덕이라고 하지는 말라. 공덕은 법신에 있고 복밭에 있지 않 느니라. 자기의 법성에 공덕이 있나니, 견성이 곧 공(功)이요, 평등하 고 곧음이 곧 덕(德)이니라. 안으로 불성을 보고 밖으로 공경하라. 만약 모든 사람을 경멸하고 아상(我相)을 끊지 못하면 곧 스스로 공 덕이 없고 자성은 허망하여 법신에 공덕이 없느니라. 생각마다 덕을 행하고 마음이 평등하여 곧으면 곧 가볍지 않느니 라. 그러므로 항상 공격하고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곧 공이요, 스스 로 마음을 닦는 것이 곧 덕이니라. 공덕은 자기의 마음으로 짓는 것 이다. <이같이> 복과 공덕이 다르거늘 무제가 바른 이치를 알지 못 한 것이요, 달마대사께서 허물 있는 것이 아니니라." 使君 問 何以無功德 和尙 言 造寺布施供養 只是修福 不可將 福 以爲功德 <功德> 在法身 非在於福田 自法性 有功德 <見性 是功> 平直是德 <內見>佛性 外行恭敬 若輕一切人 吾(悟)我不斷 卽自無功德 自性虛妄 法身 無功德 念念德行 平等直(眞)心 德卽不輕 常行於敬 自修身 卽功 自修[身]心 卽德 功德 自心作 福與功德別 武帝不識正理 非祖大師有過 (192) *견성시공(見性是空 견성이 공임)...참다운 공덕은 오직 견 성 뿐이다. 21.서방(西方) 위사군이 예배하고 또 물었다. "제자가 보오니 스님과 도교인과 속인들이 항상 아미타불을 생각 하면서 서쪽 나라에 가서 자기를 바랍니다. 청컨대 큰스님께서는 말 씀해 주십시오.저기에 날 수가 있습니까? 바라건대 의심을 풀어 주 소서."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사군은 들으라. 혜능이 말하여 주리라. 세존께서 사위국에 계시 면서 서방정토에로 인도하여 교화해 말씀하셨느니라. 경에 분명히 말씀하기를 '여기서 멀지 않다'고 하였다. 다만 낮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멀다 하고, 가깝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지혜가 높은 사람 때 문이다. 사람에는 자연히 두 가지가 있으나 법은 그렇지 않다. 미혹함과 깨달음이 달라서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을 뿐이다.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곳에 나려고 하지만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 이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서 부처의 땅도 깨끗하다'고 말씀하셨느니라. 사군아, 동쪽 사람일지라도 다만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고, 서 쪽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허물이 있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가서 나기를 원하나 동방과 서방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는 다 한 가지니라. 다만 마음에 깨끗치 않음이 없으면 서방정토가 여기서 멀지 않고, 마음에 깨끗치 아니한 생각이 일어나면 염불하여 왕생하고자 하여도 이르기 어렵느니라. 십악(十惡)을 제거하면 곧 십만 리를 가고, 팔사 (八邪)가 없으면 곧 팔천 리를 지난 것이다. 다만 곧은 마음을 행하 면 도달하는 것은 손가락 퉁기는 것과 같느니라. 사군아, 다만 십선(十善)을 행하라. 어찌 새삼스럽게 왕생하기를 바랄 것인가. 십악의 마음을 끊지 못하면 어느 부처가 와서 맞이하 겠는가. 만약 남(生)이 없는 돈법(頓法)을 깨치면 서방정토를 찰나에 볼 것이요, 만약 돈교의 가르침을 깨치지 못하면 염불을 하여도 왕생할 길이 멀거니, 어떻게 도달하겠는가?" 使君 禮拜 又問 弟子見僧道俗 常念阿彌陀(大)佛 願往生西方 請和尙 說 得(德)生彼否 望爲破疑 大師言 使君 聽 惠能 與 說 世尊 在舍衛國 說西方引化 經文 分明 去此不遠 只爲下根 說遠(近) 說近(遠) 只緣上智 人自兩(雨)種(重) 法無不<同> 迷(名)悟有殊 見有遲疾 迷人 念佛生彼 悟者 自淨其心(194) 所以佛言 隨其心淨 則佛土淨 使君 東方 但淨心 無罪 西方 心不淨 有愆 迷人 願生 東方西方(者) 所在處 皆一種 心但 無不淨 西方 去此不遠 心起不淨之心 念佛往生難到 除十惡 卽行十萬 無八邪 卽過八千 但行直(眞)心 到如彈(禪)指 使君 但行十善 何須更願往生 不斷十惡之心 何佛 卽來迎請 若悟無 生頓法 見西方 只在刹那 不悟]頓敎大乘 念佛 往生路遙 如何 得達(195) 육조께서 말씀하셨다. "혜능이 사군을 위하여 서쪽 나라를 찰나 사이에 옮겨 눈앞에 바 로 보게 하리니 보기를 바라는가?" 위사군이 예배하며 말하였다. "만약 여기서 볼 수 있다면 하필 가서 나겠습니까. 원컨대 스님께 서 자비로써 서쪽 나라를 보여 주시면 매우 좋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문득 서쪽 나라를 보아 의심이 없을 터이니 당장 흩어져라." 대중들이 놀라 무슨 일인지 모르자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대중은 정신 차리고 들으라. 세상 사람의 자기 색신은 성(城)이 요 눈.귀.코.혀.몸은 곧 성의 문이니 밖으로 다섯 문이 있고 안으로 뜻의 문이 있다. 마음은 곧 땅이요 성품은 곧 왕(王)이니 성품이 있 으면 왕이 잇고 성품이 가매 왕은 없느니라. 성품이 있으매 몸과 마 음이 있고 성품이 가매 몸과 마음이 무너지느니라. 부처는 자기의 성품이 지은 것이니,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 자기 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 생이 곧 부처니라. 자비는 곧 관음이요 희사는 세지라고 부르며, 능희 깨끗함은 석가 요 평등하고 곧음은 미륵이니라. 인아상은 수미요 삿된 마음은 큰 바다이며 번뇌는 파랑이요 독한 마음은 악한 용이면 진로는 고기와 자라요 허망함은 곧 귀신이며 삼독은 곧 지옥이요 어리석음은 곧 짐 승이며 십선은 천당이니라. 인아상이 없으면 수미산이 저절로 거꾸러지고 삿된 마음을 없애 면 바닷물이 마르며 번뇌가 없으면 파랑이 없어지고 독해(毒害)를 제거하면 고기와 용이 없어지느니라." 六祖言 惠能 與使君 移西方刹那間(問) 目(日)前便見 使君 願 見否 使君 禮拜 若此得見 何]須往生 願和尙 慈悲 爲現西方 大善 大師言 唐見西方無疑 卽散 大衆 愕然 莫知何]事(是) 大 師曰 大衆 大衆 作意聽 世人 自色身 是城 眼耳鼻舌身 卽是 城門 外有五(六)門 內有意門 心卽是地 性卽是王 性在王在 性去王無 性在身心存 性去身<心>壞 佛是自性作 莫(198)向 身<外>求 自性 迷 佛卽衆生 自性 悟 衆生 卽是佛 慈悲 卽 是觀音 喜捨 名爲勢至 能淨 是釋迦 平直(眞) 是彌勒 人我 是須彌 邪心 是大海 煩惱 是波浪 毒心 是惡龍 塵勞 是魚鱉 虛妄 卽是神鬼 三毒 卽是地獄 愚癡 卽是畜生 十善 是天堂 無人我(我無人) 須彌自倒 除邪心 海水竭 煩惱無 波浪滅 毒 害除 魚龍絶(199) 자기 마음의 땅위에 깨달은 성품(覺性)의 부처가 큰 지혜를 놓아 서 그 광명이 비추어 여섯 문이 청정하게 되고 욕계의 모든 여섯 하 늘들을 비추어 부수고, 아래로 비추어 삼독을 제거하면 지옥이 일시 에 사라지고 안팎으로 사무쳐 밝으면 서쪽 나라와 다르지 않다. 그 러므로 이 수행을 닦지 아니하고 어찌 피안(彼岸)에 이르겠는가. 법문을 들은 법좌(法座) 아래서는 찬탄하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 으니, 응당 미혹한 사람도 문득 밝게 볼 수 있었다. 위사군이 예배하 며 찬탄하여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널리 원하옵나니, 법계의 중생으로 이 법을 듣는 이는 모두 일시에 깨쳐지이다." 自心地上 覺性如來 放(施)大智慧 光明 照耀 六門(201) 淸淨 照破(波)六欲諸天 下照 三毒 若除 地獄 一時消滅 內外明徹 不異西方 不作此修 如何到彼 座下聞(問)說 讚聲 徹天 應是 迷人 了(人)然便見 使君 禮拜 讚言善哉善哉 普願法界衆生 聞者一時悟解(202)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서방정토와 다르지 않다[內外明徹不 異西方]...내외명철한 제불의 정토 이외에는 모두 꿈 속의 장엄인 것이다. 22.수행(修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만약 수행하기를 바람다면 세속에서도 가능한 것이 니, 절에 있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다. 절에 있으면서 닦지 않으면 서 쪽 나라 사람의 마음이 악함과 같고, 세속에 있으면서 수행하면 동 쪽 나라 사람이 착함을 닦는 것과 같다. 오직 바라건대, 자기 스스로 깨끗함을 닦으라. 그러면 이것이 곧 서쪽 나라이니라." 위사군이 물었다. "화상(和尙)이시여,세속에 있으면서는 어떻게 닦습니까? 원하오니 가르쳐 주소서."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혜능이 도속(道俗)을 위하여 '모양없는 게송'을 지어 주리니 다들 외워 가지라.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항상 혜능과 더불어 한 곳에 있음과 다름이 없느니라."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설법도 통달하고 마음도 통달함이여! 해가 허공에 떠오름과 같나니 오직 돈교의 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종취를 부수는도다. 가르침에는 돈(頓)과 점(漸)이 없으나 미혹함과 깨침에 더디고 빠름이 있나니 만약 돈교의 법을 배우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하지 않느니라. 설명하자면 비록 일만 가지이나 그 낱낱을 합하면 다시 하늘로 돌아오나니 번뇌의 어두운 집속에서 항상 지혜의 해가 떠오르게 하라. 삿됨은 번뇌를 인연하여 오고 바름(正)이 오면 번뇌가 없어지나니 삿됨과 바름을 다 버리면 깨끗하여 남을 없음에 이르는도다. 보리는 본래 깨끗하나 마음 일으키는 것이 곧 망상이라 깨끗한 성품이 망념 가운데 있나니 오직 바르기만 하면 세 가지 장애를 없애는도다. 만약 세간에서 도를 닦을진대는 일체가 다 방해롭지 않나니 항상 허물을 드러내어 자기에게 있게 하라. 도와 더불어 서로 합하는도다. 형상이 있는 것에는 스스로 도가 있거늘 도를 떠나 따로 도를 찾는지라 도를 찾아도 도를 보지 못하나니 필경은 도리어 스스로 고뇌하는도다. 만약 애써 도를 찾고자 할진대는 행동의 바름이 곧 도이니 스스로에게 만약 바른 마음이 없으면 어둠 속을 감이라 도를 보지 못하느니라. 만약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나니 만약 세간의 잘못을 보면 자기의 잘못이라 도리어 허물이로다. 남의 잘못은 나의 죄과요 나의 잘못은 스스로 죄 있음이니 오직 스스로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번뇌를 쳐부수어 버리는도다. 만약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고자 할진대는 모름지기 방편이 있어야 하나니 저로 하여금 의심을 깨뜨리게 하지 말라. 이는 곧 보리가 나타남이로다. 법은 원래 세간에 있어서 세간에서 세간을 벗어나나니 세간을 떠나지 말며 밖에서 출세간(出世間)의 법을 구하지 말라. 삿된 견해가 세간이요 바른 견해는 세간을 벗어남이니 삿됨과 바름을 다 쳐 물리치면 보리의 성품이 완연하리로다. 이는 다만 단박 깨치는 가르침이며 또한 대승이라 이름하나니 미혹하면 수많은 세월을 지나나 깨치면 잠깐 사이로다. 大師言 善知識 若欲修行 在家 亦得 不由在寺 在寺不修 如西 方心惡之人 在家若修行 如東方人修善 但願自家修淸淨 卽是 西(惡)方 使君 問 和(尙) 在(203)家如何修 願爲指授 大師言 善知識 惠能 與道俗作無相頌 盡誦取 依(衣)此修行 常與惠能 [說]一處無別 頌曰 說通及心通 如日至虛空. 惟傳頓敎法 出世破邪宗. 敎卽無頓漸 迷悟有遲疾. 若學頓敎法 愚人不可迷. 說卽雖(須)萬般 合離還歸一. 煩惱暗宅中 常須生慧(惠)日. 邪來因煩惱 正來煩惱除. 邪正俱(疾)不用 淸淨至無餘.(204) 菩提本淸淨 起心卽是妄. 淨性在(於)妄中 但正除三障. 世間若修道 一切盡不妨. 常現在己過 與道卽相當 色類自有道 離道別覓道. 覓道不見道 到頭還自懊. 若欲貪覓道 行正卽是道. 自若無正心 暗行不見道. 若眞修道人 不見世間愚. 若見世間非 自非却是左. 他非我有罪 我非自有罪.(205) 但自去非心 打破煩惱碎. 若欲化愚人 是須有方便. 勿令破彼疑 卽是菩提見. 法元在世間 於世出世間. 邪見是(出)世間 正見出世間. 邪正悉打却 <菩提性宛然> 此但是頓敎 亦名爲大乘. 迷來經累劫 悟則刹那間.(206) *'오직 돈교의 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종취를 부 순다[唯傳頓敎法하야出世破邪宗이로다]'...육조스님은 <단경> 전체를 통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하는 돈교법만을 설하였 으므로, 돈법(頓法)이외는 모두 사종(邪宗)이라고 배척하였 으니 이는 최사현정( 邪顯正)의 대자비인지라, 육조의 법 손(法孫)으로서 점수(漸修) 운운하는 것은 육고를 반역(反 逆)하는 것이다. 23.행화(行化)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너희들은 다들 이 게송을 외워 가지라. 이 게송을 의 지하여 수행을 하면 천리를 혜능과 떨어져 있더라도 항상 혜능의 곁 에 있는 것이요, 이를 수행하지 않으면 얼굴을 마주하여도 천리를 떨어져 있는 것 이다. 각각 스스로 수행하면 법을 서로 지님이 아니겠느냐. 여러 사람들은 그만 흩어지거라. 혜능은 조계산으로 돌아가리라. 만약 대중 가운데 큰 의심이 있거든 저 산으로 오너라. 너희를 위하 여 의심을 부수어 같이 부처의 성품을 보게 하리라." 함께 앉아 있던 관료.스님.속인들이 육조대사께 예배하며 찬탄하 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들을 '훌륭하십니다. 크게 깨치심이여! 옛적 에는 미처 듣지 못한 말씀이로다. 영남에 복이 있어 산 부처가 여기 계심을 누가 능히 알았으리오' 한 다음 한꺼번에 다 흩어졌다. 大師言 善知(智)識 汝等 盡誦取此偈 依偈修行 去惠能千里 常在能邊 此不修 對面千里 各各自修 法(213)不相持 衆人 且 (旦)散 惠能 歸曹(漕)溪山 衆人(生) 若有大疑 來彼山間 爲汝 破疑 同見佛性(世) 合座官僚(奪)道俗 禮拜和尙 無不嗟嘆 善 哉 大悟 昔所未聞(問) 嶺南 有福 生佛在此 誰能得知(智) 一 時盡散(214) 대사께서 조계산으로 가시어 소주.광주 두 고을에서 교화하기를 사십여년이었다. 만약 문인을 말한다면 스님과 속인 삼오천(三五千)명이라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만약 종지를 말한다면 <단경>을 전수하여 이로써 의지하여 믿음을 삼게 하셨다. 만약 <단경>을 얻지 못하면 곧 법을 이어받지 못한 것이다. 모름지기 간 곳과 년 월 일과 성명을 알아서 서로서로 부촉하되 <단경>을 이어 받지 못하였으면 남종(南宗)의 제자가 아니다. <단경>을 이어받지 못한 사람은 비록 돈교법을 말 하나 아직 근본을 알지 못함이라. 마침내 다툼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법을 얻은 사람에게만 [돈교법의] 수행함을 권하라. 다툼은 이기고 지는 마음이니 도와는 어긋나는 것이다. 大師往曹溪山 韶廣二州 行化四十餘年 若論門人 僧之與俗 三 五千人 說不盡 若論宗旨(指) 傳授壇經 以此爲依(衣)約 若不 得壇經 卽無稟受 須知去(法)處年月日姓(性)名 遞(遍)相付囑 無壇經稟承 非南宗弟(定)子也 未得稟承者 雖說頓敎法 未知 根本 終(修)不免諍 但得法者 只勸修行 諍是勝負之心 與道違 背(215) 24.돈수(頓修) 세상 사람이 다 전하기를 '남쪽은 혜능이요 북쪽은 신수'라고 하 나, 아직 근본 사유를 모르는 말이다. 또 신수선사는 형남부 당양현 옥천사에 주지하며 수행하고, 혜능 대사는 소주성 동쪽 삼십오 리 떨어진 조계산에 머무시니, 법은 한 종(宗)이나 사람에게 남쪽과 북쪽이 있어 이로 말미암아 남쪽과 북 쪽이 서게 되었다. 어떤 것을 '점(漸)과 '돈(頓)'이라고 하는가? 법은 하가지로되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기 때문이다. 견해가 더 딘즉 '점'이요 견해가 빠른즉 '돈'이다. 법에는 '점'과 '돈'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는 까닭으로 '점'과 '돈'이라고 이 름한 것이다. 일찍이 신수스님은 사람들이 혜능스님의 법이 빠르고 곧게 길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신수스님은 드디어 문인 지성스님 을 불러 말하였다. "너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으니, 나를 위하여 조계산으로 가라. 가 서 혜능 스님의 처소에 이르러 예배하고 듣기만 하되, 내가 보내서 왔다 하지 말라. 들은대로 그 뜻을 기억하여 돌아와서 나에게 말하 여라. 그래서 혜능스님의 견해와 나와, 누가 빠르고 더딘지를 보게 하여라. 너는 첫째로 빨리 오너라. 그래서 나로 하여금 괴이하게 여 기지 않도록 하라." 지성은 기쁘게 분부를 받들어 반달쯤 걸려서 조계산에 도달하였 다. 그는 혜능스님을 뵙고 예배하여 법문을 들었으나 온 곳을 말하 지 않았다. 지성은 법문을 듣고 그 말끝에 문득 깨달아 곧 본래의 마음에 계 합하였다. 그는 일어나서 예배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제자는 옥천사에서 왔습니다. 신수스님 밑에서는 깨치지 못하였으나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본래의 마음에 계합하였습 니다. 큰스님께서는 자비로써 가르쳐 주시기 바라옵니다."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거기에서 왔다면 마땅히 염탐꾼이렸다!" 지성이 말하였다. "말을 하기 이전에는 그렇습니다만, 말씀을 드렸으니 이미 아니옵 니다."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번뇌가 곧 보리임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世人 盡傳 南[宗]能北(比)秀 未知根本事由 且秀禪師 於荊南 府當(南荊 堂)陽縣玉泉寺 住持(時)修行 惠能大師 於韶州城 東三十五里曹溪山 住 法卽一宗 人有南北(比) 因此便立南北 何名(以)漸頓 法卽一種 見有遲疾 見遲卽漸 見疾卽頓 法無漸 頓 人有利鈍故 名漸頓(217) 神秀師嘗(常)見人 說惠能法 疾直 指(旨)路 秀師遂喚(換)門人僧志誠曰 汝聰明多智 汝與吾至曹 溪山 到惠能所 禮拜但聽 莫言吾使汝來 所聽得(德)意旨 記取 (218) 却來與吾說 看惠能見解與吾誰疾遲 汝第一早來 勿令吾 怪 志誠 奉使歎喜 遂半月中間 卽至曹溪山 見惠能和尙(當) 禮拜卽聽 不言來處 志誠(城) 聞法 言下便悟 卽契本心 起立 卽]禮拜 自言 和尙 弟子從玉泉寺來 秀師處 不得(德)契悟 聞 和尙說 便契本心 和尙 慈悲 願當敎(散)示 惠能大師曰 汝從 彼(被)來 應是細作 志誠曰 未說時卽是 說[及]了不(卽)是 六 祖言 煩惱卽是菩提 亦復如是(219) 대사께서 지성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들으니 너의 스님이 사라을 가르치기를 오직 계.정.혜를 전 한다고 하는데, 너의 스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계.정.혜는 어떤 것인가? 마땅히 나를 위해 말해 보라." 지성이 말하였다. "신수스님은 계.정.혜를 말하기를 '모든 악을 짓지 않는 것을 계라 고 하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라고 하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 이 하는것을 정이라고 한다. 어것이 곧 계.정.혜이다'고 합니다. 신수스님의 말씀은 그렇거니와, 큰스님의 의견은 어떠신지 알지 못합니다." 혜능대사께서 대답하셨다. "그 법문은 불가사의하나 혜능의 소견은 또 다르니라." 지성이 여쭈었다. "어떻게 다릅니까?" 혜능스님께서 대답하셨다.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느니라." 지성이 계.정.혜에 대한 스님의 소견을 청하였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말을 듣고서 나의 소견을 보라. 마음의 땅에 그릇됨이 없는 것이 자성의 계요, 마음의 땅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자성의 정이요, 마음의 땅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혜이니라."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계.정.혜는 작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요, 나의 계.정.혜는 높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다. 자기의 성품을 깨치면 또한 계.정.혜도 세우지 않느니라." 지성이 여쭈었다. "큰스님께서 세우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뜻은 어떤 것입니까.?" 지성은 단박 닦으라. 세우면 점차가 있으니 그러므로 세우지 않느 니라." 지성은 예배하고서 바로 조계산을 떠나지 아니하고 곧 문인이 되 어 대사의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大師謂志誠曰 吾聞汝(與)禪師敎人 唯傳戒定慧 汝(與)(221)和 尙 敎人戒定慧 如何 當爲吾說 志誠(城)曰 秀和尙 言戒定慧 諸惡不作 名爲戒 諸善奉行 名爲惠 自淨其意 名爲定 此卽名 爲戒定惠 彼作如是說 不知和尙所見 如何 惠能和尙答曰 此說 不可思議 惠能所見 又別 志誠(城) 問 何以別 惠能答曰 見有 遲疾 志誠(城) 請和尙說所見戒定惠 大師言 [如]汝聽吾(悟)說 看吾(悟)所見處 心地無[疑]非自性(姓)戒 心地無亂 是自性 (姓)定 心地無癡 自性(姓)[是]惠 能大師言 汝戒定惠 勸小根 諸人 吾戒定惠 勸上[根]人 得悟(吾)自[性] 亦不立戒定惠 志 誠(城) 言 請大師說不立 如何 大師言 自性(姓) 無非無亂無癡 念念般若觀照 常(當)離法相 有(222)何可立 自性(姓)頓修 立 有漸 此所(契)以不立 志誠 禮拜 便不離曹溪山 卽爲門人 不 離大師左右(223) *자성돈수(自性頓修 자성으로 단박 닦음)...육고는 <제 8무 념편>에서 '미혹한 사람은 점점 계합하고[迷人漸契] 깨친 사람은 단박에 닦는다[悟人頓修]'고 말함과 같이, 깨침[悟] 은 모두 돈수(頓修)임을 말하였다. 돈황본에서는 '자성으로 단박에 닦는다[自性頓修]'고 간명하게 말하였으나, 각 본 (本)에서는 '자성이 스스로 깨쳐서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아서 또한 점차도 없다[自性이 自悟하여赤無漸次라]'고 소상 히 말씀하심으로써, <단경>에는 돈오돈수(頓悟頓修)뿐이요 점수(漸修)는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25.불행(佛行)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법달이라 하였다. 항상 <법화경>을 외워 칠년이 되었으나 마음이 미혹하여 바른 법의 당처(堂處)를 알지 못 하더니 와서 물었다. "경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큰스님의 지혜가 넓고 크시오니 의 심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은 제법 통달하였으나 너의 마음은 통달하지 못하였구 나. 경 자체에는 의심이 없거늘 너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고 있다. 네 마음이 스스로 삿되면서 바른 법을 구하는구나. 나의 마음 바른 정(定)이 곧 경전을 지니고 읽는 것이다. 나는 한평생 동안 문자를 모른다. 너는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나를 마주하여 한편(一遍)을 읽으라. 내가 들으면 곧 알 것이니라." 又有一僧 名法達 常誦法華經七年 心迷不知正法之處 <來問 曰>經上 有疑 大師 智慧廣大 願爲決(時)處 大師言 法達 法 卽甚達 <汝心不達> 經上無疑(癡) <汝時自疑> 汝心自邪(耶) 而求正法 吾心正定 卽是持經 吾一生已來 不識文字 汝將法華 經來 對吾讀一遍 吾聞(問)卽知(之)(227) 법달이 경을 가지고 와서 대사를 마주하여 한편을 읽었다. 육조스 님께서 듣고 곧 부처님의 뜻을 아셨고 이내 법달을 위하여 <법화 경>을 설명하시었다.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화경>에는 많은 말이 없다. 일곱 권이 모두 비유와 인연이니라. 부처님께서 널리 삼승을 말씀하심은 다만 세상의 근기가 둔한 사 람을 위함이다. 경 가운데 분명히 '다른 승(乘)이 있지 아니하고 오로지 한불승 (佛乘) 뿐이라'고 하셨느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너는 일불승을 듣고서 이불승을 구하여 너의 자성을 미 혹하게 하자 말라. 경 가운데서 어느 곳이 일불승인지를 너에게 말 하리라. 경에 말씀하기를 '모든 부처님.세존께서는 오직 일대사인연(一大 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셨다.'고 하셨다. [이상의 열여섯 자는 바른 법이다.] 이 법을 어떻게 알며 이 법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너는 나의 말 을 들으라. 사람의 마음이 생각을 하지 않느면 본래의 근원이 비고 고요하여 삿된 견해를 떠난다. 밖으로 미혹하면 모양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 하면 공(空)에 집착한다.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나 는 것이 곧 미혹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을 깨달아 한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 는 것이니라. 마음에 무엇을 여는가?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이니라. 네 문으로 나뉘나니,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과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과 깨달음의 지견을 깨침과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열고 (開) 보이고(示) 깨닫고(悟) 들어감(入)은 한 곳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다. 곧 깨달음의 지견으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곧 세 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法達 取經到 對大師讀一遍 六祖聞(問)已 卽識佛意 便與(汝) 法達說法華經 六祖言法達 法華經 無多語(228) 七卷 盡是譬 喩因(內)緣 如來廣說三乘 只爲世人根鈍 經文(聞)分(公)明 無 有餘乘 唯一佛乘 大師<言> 法達 汝聽一佛乘 莫求二佛乘 迷 却汝性(聖) 經中 何處是一佛乘 與汝(汝與)說 經云 諸佛世尊 唯以(汝)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已上十六字(家)是正法) <此>法 如何解 此法 如何修 汝聽吾說 人心 不思 本源 空寂 離却邪見 卽一大事(是)因緣 內外不迷 卽離兩邊 外迷著(看)相 內迷著空 於相離相 於空離空 卽是不[空]迷 悟(吾)此法 一念 心開 出現於世 心開何物 開佛知見 佛 猶如覺也 分爲四門 開 覺知見 示覺知見 悟覺知見 入覺知見 開示悟入 從(上)一處入 卽覺知見 見自本性 卽(229)得出世(230)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언제나 마음 자리로 부 처님의 지견을 열고 중생의 지견을 열지 않기를 항상 바라노라. 세 상사람의 마음이 삿되면 어리석고 미혹하여 악을 지어 스스로 중생 의 지견을 열나니,중생람의 마음이발라서 지혜를 일으켜 관조하면 스스로 부처님의 지견을 여나니, 중생의 지견을 열지 말고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곧 세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이것이 [법화경의 일승법이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삼승을 나눈 것은 미혹한 사람을 위한 까닭이니, 너는 오직 일승불만을 의 지하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마음으로 행하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나니,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 리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리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힘써 법대로 수행하면 이것이 곧 경을 굴리는 것이니라." 법달은 한번 듣고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아 눈물을 흘리고 슬피울 면서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실로 지금까지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였습니다. 칠 년을 <법화경>에 굴리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법화경>을 굴 려서 생각생각마다 부처님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 행이 곧 부처이니라." 그 때 듣는 사람으로서 깨치지 않은 이가 없었다. 大師言 法達 吾(悟)常願一切世人 心地 常自開佛知見 莫開衆 生知見 世人 心<邪> 愚迷造惡 自開衆生知見世人心正 起智 惠觀照 自開佛知(智)見 莫開衆生知(智)見 開佛知(智)見 卽出 世 大師言 法達 此是法華(232)(達)經一乘法 向下分三 爲迷 (名)人故 汝但依(於)一佛乘 大師言 法達 心行 轉法華 不行 法華轉 心正 轉法華 心邪(耶) 法華轉 開佛知(智)見 轉法華 開衆生知(智)見 被法華轉 大師言 努力依法修行 卽是轉經 法 達 一聞 言下大悟 涕淚悲泣 自言 和尙 實未曾(僧)轉法華 七 年 被法華轉 已後 轉法華 念念修行佛行 大師言 卽佛行 是佛 其時聽人(入) 無不悟者(233) *수행불행(修行佛行 부처님 행을 수행한다)...깨친 뒤에는 부처님 행을 수행한다고 하였다. 돈오견성(頓悟見性)이 성 불이어서 <금강경 제 8분 육조해의(六祖解義)>에 '행동불행 천리불행(行同佛行踐履佛行)'이라고 하였고, 또한 <제12분> 에는 '상수불행(常修佛行)'이라고 말씀하셨다. '수행불행'을 대승사본에는 '원수불행(願修佛行)', 흥성사 본에는 '방수불행(方修佛行)'이라 하였고, 유통본(流通本) 에는 모두 누락되었으나, 돈황, 대승, 흥성의 세 고본(古 本)에 실려 있으므로 상관이 없다. 26.참청(參請) 그 무렵 지상이라고 하는 한 스님이 조계산에 와서 큰스님께 예 배하고 사승법(四乘法)의 뜻을 물었다. 지상이 큰스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은 삼승을 말씀하시고 또 최상승을 말씀하시었습니다. 제 자는 알지 못하겠사오니 가르쳐 주시기 마랍니다."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너는 자신의 마음으로 보고 바깥 법의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윈 래 사승법이란 없느니라.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네 가지로 나누어 법에 사승이 있을 뿐이다. 보고 듣고 읽고 욈은 소승이요, 법을 깨쳐 뜻을 앎은 중승이며, 법을 의지하여 수행함은 대승이요 일만 가지 법을 다 통달하고 일만가지 행을 갖추어 일체를 떠남이 없으되 오직 법의 모양을 떠나고 짓되, 얻는 바가 없는 것이 최상승이니라. 승 (乘)은 행한다는 뜻이요 입으로 다투는 것에 있지 않다. 너는 모름지 기 스스로 닦고 나에게 묻지 말라." 時有一僧名智常 來曹溪山 禮拜和尙 問(聞)四乘法義 智常 問 (聞)和尙曰 佛說三乘 又言最上乘 弟子不解 望爲敎(敬)示 惠 能大師曰 汝自身心見 莫著外法相 元無四乘法 人心自有(不 量)四等 法有四乘 見聞讀誦 是小乘 悟<法>解義是中乘 依 (衣)法修行 是大乘 萬法 盡通 萬行(幸)俱備 一切無離 但離法 相 作無所得(德) 是最上乘 乘是[最上]行義 不在口諍 汝須自 修 莫問吾(悟)也(237)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을 신회라고 하였으며 남양사람이다. 조계산에 와서 예배하고 물었다. "큰스님은 좌선하시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으십니까?" 대사께서 일어나서 신회를 세 차례 때리시고 다시 신회에게 물었 다. "내가 너를 때렸다. 아프냐, 아프지 않으냐?" 신회가 대답하였다.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신회가 또 여쭈었다. "큰스님은 어째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십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다고 말한다.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 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 까닭에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네가 아프기도 하 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 했는데 어떤 것이냐?" 신회가 대답하였다. "만약 아프지 않다고 하면 곧 무정인 나무와 둘과 같고, 아프다 하면 곧 범부와 같아서 이내 원한을 일으킬 것입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신회야, 앞에서 본다고 한 것과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양변(兩 邊)이요, 아프고 아프지 않음은 생멸이니라. 너는 자성을 보지도 못 하면서 감히 와서 사람을 희롱하려 드는가?" 신회가 예배하고 다시 더 말하지 않으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네 마음이 미혹하여 보지 못하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 라. 마음을 깨쳐서 스스로 보게 되면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라. 네가 스스로 미혹하여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면서 도리어 와서 혜능의 보 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내가 보는 것은 내 스스로 아는 것이라 너 의 미혹함을 대신할 수 없느니라. 만약 네가 스스로 본다면 나의 미 혹함을 대신하겠느냐? 어찌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신회가 절하고 바고 문인이 되어 조계산중을 떠나지 않고 항상 좌우에서 모시었다. 又有一僧名神會 南陽人也 至曹溪山 禮拜問言 和尙坐(座)禪 見 亦不見 大師起打神會三下 却問神會 吾打汝 痛 不痛 神會 答言 亦痛亦不痛 六祖言曰 吾亦見亦不見 神會又問 大師 何 以亦見亦不見 大師言 吾亦見 常見自過患 故云亦見 亦不見者 不見天地人過罪 所以亦見亦 不見(也) 汝 亦痛亦不痛 如何 神會答曰 若不痛 卽同無情木 石 若痛 卽同凡(夫) 卽起於恨 大師言 神會 向前 見不見 是 兩邊 痛<不痛> 是生滅 汝自性 且不見 敢來弄人 神會(禮拜) 禮拜 更不言 大師言 汝心迷不見 問善知識覓路 以心悟自見 依法修行(239) 汝自迷(名) 不見自心 却來問惠能見否 吾見(不)自知 代汝迷不 得 汝若自見 代得吾迷 何不自修 問吾見否 神會作禮 便爲門 人 不離曹溪山中 常在左右(240) *최상승(最上乘)...삼승(三乘)을 초월한 최존최상제일(最 尊最上第一)의 선문(禪門)이다. 27. 대법(對法) 대사께서 드디어 문인 법해.지성.법달.지상.지통.지철.지도.법진.법 여.신회 등을 불렀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 열명의 제자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니,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너희들은 각각 한곳 의 어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들에게 법 설하는 것을 가 르쳐서 근본 종취를 잃지 않게 하리라. 삼과의 법문(三科法門)을 들고 동용삼십육대(動用三十六對)를 들 어서 나오고 들어감에 곧 양변을 여의도록 하여라. 모든 법을 설하되 성품과 모양을 떠나지 말라. 만약 사람들이 법 을 묻거든 말을 다 쌍(雙)으로 해서 모두 대법(對法)을 취하여라. 가 고 오는 것이 서로 인연하여 구경에는 두 가지 법을 다 없애고 다시 가는 곳마저 없게하라. 삼과법문이란 음(蔭).계(界).입(入)이다. 음은 오음(五蔭)이요 계는 십팔계(十八界)요 입은 십이입(十二入)이니라. 어떤 것을 오음이라고 하는가? 색음.수음.상음.행음.식음이니 라. 어떤 것을 십팔계라고 하는가? 육진(六塵).육문(六門).육식(六 識)이니라. 어떤 것을 십이입(十二入)이라고 하는가? 바깥의 육진과 안의 육문이니라. 어떤 것을 육진이라고 하는가? 색.성.향.미.촉.법이니라. 어떤 것을 육문이라고 하는가? 눈.귀.코.혀.몸.뜻이니라. 법의 성품이 육신인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의 육식과 육문 과 육진을 일으키고 자성은 만법을 포함하나니, 함장식(含藏識)이라 고 이름하느니라. 생각을 하면 곧 식(識)이 작용하여 육식이 생겨 육문으로 나와 육 진을 본다. 이것이 삼(三).육(六)은 십팔(十八)이니라. 자성이 삿되기 때문에 열여덟 가지 삿됨이 일어나고, 자성이 바름 (正)을 포함하면 열여덟 가지 바름이 일어나느니라. 악의 작용을 지니면 곧 중생이요, 선이 작용하면 곧 부처이니라. 작용은 무엇들로 말미암는가? 자성의 대법으로 말미암느니라. 大師遂喚門人法海,志誠,法達,智常,志徹,志道,法珍,法如,神會 大 師言 汝等拾弟子 近前 汝等 不同餘人 吾滅度後 汝各爲一方 頭 吾敎汝說法 不失本宗 擧<三>科法門 動<用>三十六對 出 沒 卽離兩邊 說一切法 莫(243)離於性相 若有人 問法 出語盡 雙 皆取法對 來去相因 究( )竟 二法 盡除 更無去處 三科法 門者 蔭界入 蔭是五蔭 界<是>十八界 <入>是十二入 何名五 蔭 色蔭,受蔭,想(相)蔭,行蔭.識蔭 是 何名十八界 六塵,六門,六 識 何名十二入 外六塵 中六門 何名六塵 色聲香味觸(未獨)法 是 何名六門 眼耳鼻舌身意 是 法性 起六識 眼識耳識鼻識舌 識身識意識 六門六塵 自性 含萬法 名爲含藏識 思量卽轉識 生六識 出六門<見>六塵 是三六十八 由自性邪 起十八邪 含 自性<正起>十八正 含惡用卽衆生 善用卽佛 用由(油)何等 由 (油)自性對(244) 바깥 경계인 무정(無情)에 다섯 대법이 있으니, 하늘과 땅이 상대 요 해와 달이 상대이며, 어둠과 밝음이 상대이며, 음과 양이 상대이 며, 물과 불이 상대이니라. 논란하는 말(語)과 직언하는 말(言)의 대법과, 법과 형상의 대법에 열두가지가 있다. 유위가 무위.유색과 무색이 상대이며, 유상과 무상 ㅇ이 상대이며, 유루와 무루가 상대이며, 현상(色)과 공이 상대이며, 움직임과 고요함이 상대이며, 맑음과 흐림이 상대이며, 범(凡)과 성 (聖)이 상대이며, 승(僧)과 속(俗)이 상대이며, 늙음과 젊음이 상대이 며, 큼과 작용이 상대이며, 김(長)과 짧음(短)이 상대이며, 높음과 낮 음이 상대이니라. 자성이 일으켜 작용하는 대법에 열아홉 가지가 있다. 삿됨과 바름 이 상대요, 어리석음과 지혜가 상대이며, 미련함과 슬기로움이 상대 요, 어지러움과 선정이 상대이며, 계율과 잘못됨이 상대이며, 곧음과 굽음이 상대이며, 실(實)과 허(虛)가 상대이며, 험함과 평탄함이 상대 이며, 번뇌와 보리가 상대이며, 사랑과 해침이 상대이며, 기쁨과 성 냄이 상대이며, 버림과 아낌이 상대이며, 나아감과 물러남이 상대이 며, 남(生)과 없어짐(滅)이 상대이며, 항상함과 엇없음이 상대이며, 법신과 색신이 상대이며, 화신과 보신이 상대이며, 본체와 작용이 상 대이며, 성품과 모양이 상대이니라. 유정.무정의 대법인 어(語).언(言)과 법(法).상(相)에 열두 가지 대 법이 있고, 바깥 경게인 무정에 다섯 가지 대법이 있으며, 자성이 일 으켜 작용하는데 열아홉 가지의 대법이 있어서 모두 서른여섯 가지 대법을 이루니라. 이 삼십육 대법을 알아서 쓰면 일체의 경전에 통하고 출입에 곧 양변을 떠난다. 어떻게 자성이 기용(起用)하는가? 삼십육 대법이 사람의 언어와 더불어 함께 하나 밖으로 나와서는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공(空)에서 공얼 떠나나 니, 공에 집착하면 오직 무명만 기르고 모양에 집착하면 오직 사견 만 기르느니라. 법을 비방하면서 곧 말하기를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말할진대는 사람이 말하지도 않아야만 옳을 것이다. 언어가 곧 문자이기 때문이다. 자성에 대해서 공(空)을 말하나 바른 말로 말하면 본래의 성품은 공하지 않으니 미혹하여 스스로 현혹됨은 말들이 삿된 까닭이니라.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 때문에 어두운 것이다. 어둠 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으로써 변화하여 어둡고, 어둠으로 써 밝음이 나타나나니, 오고감이 서로 인연한 것이다. 삼십육 대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外境無情 對有五 天與地對 日與月對 暗與明對 陰與陽對 水 與火對 語與言對 法與相對 有十二對 有爲無爲有色無色對 有 相無相對 有漏無漏對 色與空對,動與靜(淨)對,淸與濯對,凡與 聖(性)對,僧與俗對,老與少對,大大與少少對,長與短對,高與下對 自性[居]起用對 有十九對 邪與正對,癡與惠對,愚與智對,亂與 定對,戒與非對,直與曲(典)對,實與虛對, 與平對,煩惱與菩提對, 慈與害(空)對,喜與嗔對,捨與�h對,進與退對,生與滅對,常與無常 對,法身與色身對,化身與報身對,體與用對,性與相<對> 有情 (淸)無情(248)(親)對 言語 與法相 有十二對 [內]外境有無 <情>五對 自性起有十九對(三身有三對) 都合成三十六對法也 此三十六對法 解用 通一切經 出入 卽離兩邊 如何自性起用 三十六對共人言語 出外 於<相>離相 入內 於空離空 著空卽 惟長無明(名) 著相惟<長>邪見 謗法 直言不用文字 旣云不用 文字 人不合言語 言語卽是文字 自性上說空 正語言 本性 不 空 迷自惑 語言邪(除)故 暗不自暗 以明(名)變暗 以暗不自暗 以暗現明 來去相因 三十六對 亦復如是(249) 대사께서 열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후에 법을 전하되 서로가 이 한 권의 <단경>을 가르쳐 주어 본래의 종취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라. <단경>을 이어받지 않는다면 나의 종지가 아니니라. 이제 얻었으니 대대로 유포하여 행하게 하라. <단경>을 만나 얻은 이는 내가 친히 주는 것을 만남과 같으니 라." 열명의 스님들이 가르침을 받아 마치고 <단경>을 베껴서 대대로 널리 퍼지게 하니, 얻은 이는 반드시 자성을 볼 것이다. 大師言 十弟子 已後傳法 遞相敎授一卷壇經 不失本宗 不稟受 (授)壇經 非我宗旨 如今得了 遞代流行 得遇壇經者 如見吾親 授 拾僧 得敎授已 寫爲壇經 遞代流行 得者必當見性(253) *열명의 제자들이란 당시에 가까이에서 육조스님을 모시고 있던 제자들을 말한다. *즉리양변(卽離兩邊 양변을 떠남)...양변을 떠남은 중도(中 道)를 말한 것이니, 불교의 근본 원리이다. 석존은 초전법 륜(初轉法輪)에서 녹야원 다섯 비구들에게 '여래는 양변을 떠난 중도를 정등각(正等覺)하였다'고 유명한 '중도선언'을 하였다. 용수(龍樹)도 그의 <대지도론(大智度論)四十三>에 서 양변을 떠난 중도는 반야바라밀이라고 상세히 말하였으 니, 육조가 항상 고창(高唱)한 반야는 곧 중도를 말한다. 28. 진가(眞假) 대사께서는 선천 이년 팔월 삼일에 돌아가셨다. 칠월 팔일에 문인 들을 불러 고별하시고, 선천 원년에 신주 국은사에 탑을 만들고 선 천 이년 칠월에 이르러 작별을 고하셨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나는 팔월이 되면 세상을 떠나 고자 하니 너희들은 위하여 의심이 있거든 빨리 물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의심을 부수어 마땅히 미혹을 다 없애어 너희들 로 하여금 안락하게 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는 너희들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리라." 법해를 비롯한 여러 스님들이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으나, 오직 신회만이 꼼짝하지 아니하고 울지도 않으니 육조스님께서 말씀 하셨다. "어린 신회는 도리어 좋고 나쁜 것에 대하여 평등함을 얻어 헐뜯 고 칭찬함에 움직이지 않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구나. 그 렇다면 여러 해동안 산중에서 무슨 도를 닦았는가? 너희 지금 슬피 우는 것은 또 누구를 위함인가? 나의 가는 곳을 너희가 몰라서 근심 하는 것인가? 만약 내가 가는 곳을 모른들 마침내 너희에게 고별하지 않겠느 냐? 너희들이 슬피 우는 것은 곧 나의 가는 곳을 몰라서이다. 만약 가 는 곳을 안다면 곧 슬피 울지 않으리라. 자성의 본체는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느 니라. 너희들은 다 앉거라. 내 너희들에게 한 게송을 주노니, '진가동정 게(眞假動靜偈)'이다. 너희들이 다 외워 이 게송의 뜻을 알면 너희는 나와 더불어 같을 것이다.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해서 종지를 잃지 말라." 스님들이 예배하고 대사께 게송 남기시기를 청하고 공경하는 마 음으로 받아 가졌다. 게송에 말씀하셨다. 모든 것에 진실이 없나니 진실을 보려고 하지 말라. 만약 진실을 본다 해도 그 보는 것은 다 진실이 아니다. 만약 능히 자기에게 진실이 있다면 거짓을 떠나는 것이 곧 마음 의 진실이다. 자기의 마음이 거짓을 여의지 않아 진실이 없거니, 어느 곳에 진 실이 있겠는가? 유정은 곧 움직일 줄을 알고 무정은 움직이지 않나니 만약 움직이지 않은 행을 닦는다면 무정의 움직이지 않음과 같다. 만약 참으로 움직이지 않음을 본다면 움직임 위에 움직이지 않음이 있나니. 움직이지 않음이 움직이지 않음이면 뜻도 없고 부처의 씨앗도 없 도다. 능히 모양을 잘 분별하되 첫째 뜻은 움직잊 않는다. 만약 깨쳐서 이 견해를 지으면 이것이 곧 진여의 씀이니라. 모든 도를 배우면 이에게 말하노니 모름지기 힘써 뜻을 써서 대승의 문에서 도리어 생사의 지혜에 집착하지 말라. 앞의 사람이 서로 응하면 곧 함께 부처님 말씀을 의논하려니와 만약 실제로 서로 응하지 않으면 합장하여 환희케 하라. 이 가르침은 본래 다툼이 없음이라 다투지 않으면 도의 뜻을 잃 으리오, 미혹함에 집착하여 법문을 다투면 자성이 생사에 들어가느니라. 大師先天二年八月三日 滅度 七月八日 喚門人告別 大師<先> 天元年 於新州國恩寺造塔 至先天二年七月告別 大師言 汝衆 近前 吾(五)至八月欲離世間 汝等 有疑早問 爲汝(外)破疑 當 令迷者盡 使汝(與)安樂 吾若去後 無人(入)敎汝(與) 法海等衆 僧 聞已 涕淚悲泣 唯有神會 不動亦不悲泣 六祖言 神會小僧 却得善<不善>等 毁譽不動 餘(除)者 不得 數年 山中 更修何 道 汝今悲泣 更有阿誰 憂吾不知去處在 若不知去處 終不別汝 汝等悲泣 卽不知吾<去>處 若知去(255)處 卽不悲泣 性體(聽) 無生無滅 無去無來 汝等 盡坐(座) 吾與汝 (如)一偈 眞假動靜(淨)偈 汝(與)等 盡誦取 見此偈意 汝<與> 吾同 依(於)此修行 不失宗旨 僧衆禮拜 請大師留偈 敬心受持 (特) 偈曰 一切無有眞 不以見於眞. 若見於(衣)眞者 是見盡非眞. 若能姿有眞 離假卽心眞. 自心不離假 無眞何處眞. 有情(性)卽解動 無情(性)卽不動. 若修不動行 同無情不動. 若見眞不動 動上有不動.(256) 不動是不動 無情無佛種(衆). 能善分別相 第一義不動. 若悟作此見 則是眞如用. 菩提學道者 努力須用意. 莫於大乘門 却執生死智. 前頭人相應 卽共論佛語. 若實不相應 合掌令歡喜(勸善). 此敎本無諍 無諍失道意. 執迷諍法門 自性入生死.(257) 29.전게(傳偈) 대중스님들은 다 듣고 대사의 뜻을 알았으며, 다시는 감히 다투지 아니하고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였다. [대중이] 일시에 예배하니, 곧 대사께서 세상에 오래 머무시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상좌인 법해가 앞으로 나와 여쭈었다. "큰스님이시여, 큰스님께서 가신 뒤에 가사와 법을 마땅히 누구에 게 부촉 하시겠습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은 전하여 마쳤으니 너희는 모름지기 묻지 말라. 내가 떠난 뒤 이십여년에 삿된 법이 요란하여 나의 종지를 혹란케 할 것이다. 그 러나 어떤 사람이 나와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교의 옳고 그 름을 결정하여 종지를 세우리니, 이것이 곧 나의 바른 법이다. 그러 므로 가사를 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너희가 믿지 않을진대는 내가 선대의 다섯 분 조사께서 가사를 전하고 법을 부촉하신 게송들을 외 워 주리라. 만약 제일조 달마조사의 게송의 뜻에 의거하면 곧 가사를 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잘 들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외우리라." 게송에 말씀하셨다. 제일조 달마화상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내 본시 당나라에 와서 부처님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을 구하노 니 한 꽃에 다섯 잎이 열리어 그 결과가 자연히 이루리로다. 제이조 혜가스님 게송에 말씀하셨다. 본래 땅이 있는 까닭에 땅으로부터 씨앗 꽃 피나니 만약 본래로 땅이 없다면 꽃이 어느 곳으로부터 피어나리오 제삼조 승찬스님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꽃씨가 비록 땅을 인연하여 땅 위에 씨앗 꽃을 피우나 꽃씨는 나는 성품이 없나니 땅에도 또한 남이 없도다. 제사조 도신스님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꽃씨에 나는 성품있어 땅을 인연하여 씨앗 꽃이 피나 앞의 인연이 화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자니 않는도다. 제오조 홍인스님의 게송에 말씀하셨다. 유정이 와서 씨 뿌리니 무정이 꽃을 피우고 정도 없고 씨앗도 없나니 마음 땅에 또한 남이 없도다. 제육조 혜능의 게송에 말한다. 제마음의 땅이 뜻의 씨앗을 머금으니 법의 비가 꽃을 피운다. 스스로 꽃 뜻의 씨앗을 깨달으니, 보리의 열매가 스스로 이루는 도다.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내가 지은 두 게송을 들어라. 달마스님의 게송의 뜻을 취하였으니 너희 미혹한 사람들은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라. 그 러면 반드시 자성을 보리라. 첫째 게송에 말씀하셨다. 마음 땅에 삿된 꽃이 피니 다섯 잎이 뿌리를 좇아 따르고 함께 무명의 업을 지어 업의 바람에 나부낌을 보는도다. 둘째 게송에 말씀하셨다. 마음 땅에 바른 꽃이 피니 다섯 잎이 뿌리를 좇아 따르고 함께 반야의 지혜를 닦으니 장차 오실 부처님의 깨달음이로다. 육조스님께서 게송을 말씀하여 마치시고 대중을 해산시켰다. 밖으 로 나온 문인들은 생각하였으니 대사께서 세상에 오래 머물지 않으 실 것임을 알았다. 衆僧 旣聞 識大師意 更不敢諍 依法修行 一時禮拜 卽知(之) 大師不永住世 上座法海向前言 大師 大師去後 衣法 當付何人 大師言 法卽付了 汝不須問 吾滅後二十餘年 邪法 (遼)亂 惑 我宗旨 有人出來 不惜身命 定(第)佛敎是非 竪立宗旨 卽是吾 正法 衣不合傳(轉) 汝不信 吾與誦先代五祖傳衣付法頌(誦) 若 據第一祖達磨頌]意 卽不合傳衣 聽 吾(五)與汝誦(頌) 頌曰 第一祖達磨和尙 頌曰(262) 吾本(大)來唐國 傳敎救迷情(名淸). 一花開五葉 結果(菓)自然成. 第二祖惠可和尙 頌曰 本來緣有地 從地種花生. 當本元(願)無地 花從何處生. 第三祖僧璨和尙 頌曰 花種雖因地 地上種花(化)生. 花種無生性 於地亦無生. 第四祖道信和尙 頌曰 花種有生性 因地種花生. 先緣不和合 一切盡無生. (263) 第五祖弘忍和尙 頌曰 有情來下種 無情花卽生. 無情又無種 心地亦無生. 第六祖惠能和尙 頌曰 心地含情種 法雨卽花生. 自悟(吾)花情種 菩提果(菓)自成. 能大師言 汝等 聽吾作二頌 取達磨和尙頌曰 汝迷人 依此頌修 行 必當見性 第一頌曰 心地邪花放 五葉逐根隨. 共造無明業(葉) 見被業(葉)風吹. 第二頌曰 心地正花放 五葉逐根(恨)隨. 共修般若惠 當來佛菩提. 六祖說偈已了 放衆生散 門人 出外思惟 卽知大師 不久住世 (265) *'내가 떠난 뒤 이십여 년[滅後二十餘年]'운운한 것은 신회 (神會)에서 해당된 것으로서, 이 말은 신회 계통에서 조작 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고 있다. 30.전통(傳統) 그 뒤, 육조스님께서는 팔월 초삼일에 이르러 공양 끝에 말씀하셨 다. "너희들은 차례를 따라 앉아라. 내 이제 저희들과 작별하리라." 법해가 여쭈었다. "이 돈교법의 전수는 예부터 지금까지 몇 대입니까?"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처음은 일곱 부처님으로부터 전수되었으니, 석가모니불은 그 일 곱째이시다. 대가섭은 제팔, 아난은 제구, 말전지는 제십, 상나화수는 제십일, 우바굽다는 제십이, 제다가는 제십삼, 불타난제는 제십사, 불타밀 다는 제십오, 협비구는 제십육, 부나사는 제십칠, 마명은 제십팔, 바라장자는 제 십구, 용수는 제이십, 가나제바는 제이십일, 라후라는 제이십이, 승가나 제는 제이십삼, 승가야사는 제이십사, 구마라타는 제이십오, 사야나는 제이십육, 바수반다는 제이십칠, 마나라는 제이십팔, 학륵나는 제이십구, 사자비구는 제삼십, 사나바사는 제삼십일, 우바굴은 제삼십이, 승 가라는 제삼십삼, 수바밀다는 제삼십이, 남천축국 왕자 셋째 아들 보리달마는 제삼 십오, 당나라 스님 혜가는 제삼십육, 승찬은 제삼십칠, 도신은 제삼십 팔, 홍인은 제삼십구, 나 혜능이 지금 법을 받은 것은 제사십대이니 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이후로는 서로서로 전수하여 모름지기 의지하고 믿어서 종 지를 잃지말라." 六祖後至八月三日 食後 大師言 汝等著(善)位坐(座) 吾(五)今 共汝(與)等別 法海問(聞)言 此頓敎法傳授(受) 從上已來 至今 幾代 六祖言初傳授(受)七佛 釋迦牟尼佛 第七 大迦葉第八, 阿難第九, 末(未)田地第十, 商那和修第十一, 優婆�}多第十二, 提多迦第十三, 佛陀(抒)難提十四, 佛陀(抒)蜜多第十五, 脇比丘第十六, 富那奢第十七, 馬鳴第十八, 毗羅長者第十九,(270) 龍樹第二十, 迦那提婆第卄一, 羅 羅第卄二, 僧迦耶提第卄三, 僧迦耶(那)舍第卄四, 鳩摩羅 第卄五, 耶多第卄六, 婆修盤多第卄七, 摩拏羅第卄八, 鶴勒那第卄九, 師子比丘第 , 舍那婆斯第 一, 優婆堀第 二, 僧迦羅第三十三, 須婆蜜多第三十四, 南天竺(竹)國王子第三子菩提達磨第三十五, 唐國僧惠可第三十六, 僧璨第三十七, 道信第三十八, 弘忍第三十九, 惠能自身 當今受法第四十(十四) 大師言 今日已後 遞(271)相 傳授(受) 須有依約 莫失宗旨(272) *옛 역사는 증빙의 불충분으로 고증(考證)이 어렵다. 종문 법통(宗門法統)에 대하여 이설(異說)이 있긴 하나, 가섭으 로부터 달마까지 이십팔대설(二十八代說)은 육조스님과 같 은 해에 입적한 영가의 <증도가>에서도 '이십팔대는 서천의 기록이로다[二十八代는西天記로다]'라고 하였다. 31. 진불(眞佛) 법해가 또 여쭈었다. "큰스님께서 이제 가시면 무슨 법을 부촉하여 남기시어, 뒷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부처님을 보게 하시렵니까?"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들으라. 뒷 세상의 미혹한 사람이 중생을 알면 곧 능히 부처를 볼 것이다. 만약 중생을 알지 못하면 만겁토록 부처를 찾아 도 보지 못하리라. 내가 지금 너희로 하여금 중생을 알아 부처를 보 게 하려고 다시 '참 부처를 보는 해탈의 노래(見眞佛解脫頌)'를 남 기리니, 미혹하면 부처를 보지 못하고 깨친 이는 곧 보느니라." "법해는 듣기를 바라오며 대대로 유전하여 세세생생에 끊어지지 않게 하리이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들으라. 내 너희들을 위하여 말하여 주리라. 만약 뒷 세 상 사람들이 부처를 찾고자 할진대는 오직 자기 마음의 중생을 알 라. 그러면 곧 능히 부처를 알게 되는 것이니, 곧 중생이 있음을 인 연하기 때문이며,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의 마음이 없느니라. 미혹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깨치면 중생이 부처이며 우치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지혜로우면 중생이 부처니라.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마음이 평등하면 중생이 부처 이니 한평생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 속에 있도다. 만약 한생각 깨쳐 평등하면 곧 중생이 스스로 부처이니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음이라 자기 부처가 참 부처이니 만약 자기에게 부처의 마음이 없다면 어느 곳을 향하여 부처를 구하리요." 法海又白 大師今去 留付何法 令(今)後代人 如何見佛 六祖言 汝聽 後代迷人 但識衆生 卽能見佛 若不識衆生 覓佛萬劫 不 得見也 吾(五)今敎汝 識衆生 見佛 更留見眞佛解脫頌 迷卽不 見佛 悟者卽見 法海願聞 代代流傳 世世不絶 六祖言 汝聽 吾 與汝(汝與)說 後代世人 若欲覓佛 但識自(佛)心衆生 卽能識佛 卽緣有衆<生> 離衆生無佛心 迷卽佛衆生 悟卽衆生佛 愚癡佛衆生 智慧衆生佛 心險(劒)佛衆生 平等衆生佛(275) 一生心若險(劒) 佛在衆生中 一念悟(吾)若平 卽衆生自佛 我心自有佛 自佛是眞佛 自若無佛心 向何處求佛(276)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문인들은 잘 있거라. 내가 게송 하나를 남기리니 '자성진불 해탈송' 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뒷 세상에 미혹한 사람이 이 게송의 뜻을 들여면 곧 자기의 마음, 자기 성품의 참 부처를 보리라. 저희에 게 이 게송을 주면서 내 너희와 작별하리라." 게송을 말씀하셨다. 진여의 깨끗한 성품이 참 부처요 삿된 견해의 삼독이 곧 참 마군(魔軍)이니라. 삿된 생각 가진 사람은 마군이 집에 있고, 바른 생각 가진 사람은 부처가 곧 찾아오는도다. 성품 가운데서 삿된 생각인 삼독이 나나니, 곧 마왕이 와서 집에 살고 바른 생각이 삼독의 마음을 스스로 없애면 마군이 변하여 부처되나니, 참되어 거짓이 없도다. 화신과 보신과 정신(靜身)이여, 세 몸이 원래로 한 몸이니 만약 자신(自身)에게서 스스로 보는 것을 찾는다면 본래 화신으로부터 깨끗한 씨앗이니라. 깨끗한 성품은 항상 화신 속에 있고 성품이 화신으로 하여금 바른 길을 행하게 하면 장차 원만하여 참됨이 다함 없도다. 음욕을 없애고는 깨끗한 성품의 몸이 없다. 다만 성품 가운데 있는 다섯 가지 욕심을 스스로 여의면 찰나에 성품을 보나니, 그것이 곧 참[眞]이로다. 만약 금생에 돈교의 법문을 깨치면 곧 눈앞에 세존을 보려니와 만약 수행하여 부처를 찾는다고 할진대는 어느 곳에서 참됨을 구해야 할지 모르는도다. 만약 몸 가운데 스스로 참됨 있다면 그 참됨 있음이 곧 성불하는 씨앗이니라. 스스로 참됨을 구하지 않고 밖으로 부처를 찾으면, 가서 찾음이 모두가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로다. 돈교의 법문을 이제 남겼나니 세상 사람을 구제하고 모름지기 스스로 닦으라. 이제 세간의 도를 배우는 이에게 알리노니, 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크게 부질없으리로다. 大師言 汝等門人 好住 吾留一頌 名自性眞佛解脫頌 後代迷 <人> 聞(門)此頌意 [意]卽見自心自性眞佛 與汝此頌 吾共汝 別 頌曰 眞如淨性是眞佛 邪見三獨是眞魔(摩) 邪見之人魔(摩)在舍 正見之(知)人佛則過(278) 性中(衆)邪見三獨生 卽是魔王來住舍 正見自除(忽則)三獨心(生) 魔(摩)變成佛眞無假. 化身報身及淨身 三身元本是一身 若向身衆覓自見 卽是<成>佛菩提因 本從化(花)身生淨性 淨性常在化(花)身中 性使化(花)身行正道 當來圓(員)滿眞無窮 狀性本身靑淨因 除狀卽無淨性身 性中但自離五(吾)欲 見性刹那卽是眞 今生若悟(吾)頓敎門 悟卽眼前見世(性)尊 若欲修行云覓佛 不知何處欲求眞 若能身中自有眞 有眞卽是成佛因(279) 自不求眞外覓佛 去覓 是大癡人 頓敎法門今已留(者是西流) 救(求)度世人須自修 今報(保)世間學道者 不依(於)此是大悠悠(280) *게송 가운데서 '멱자견(覓自見)'을, '찾아서 스스로 본다' 고 하면 견성(見性)으로 해석될 염려가 있으므로 '스스로 보는 것을 찾는다'고 번역하였다. 유통본에는 '약향성중능 자견 즉시성불보리인(若向性中能自見 卽是成佛菩提因)'이라 고 하였는 바, '성중자견(性中自見)'은 견성이며 '견성이 곧 성불'임을 <단경>의 근본사상으로서 성불하는 씨앗[成佛 因]이 될 수 없으므로,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며 <지침(指 針)> 가운데서 이미 지적하였다. 32.멸도(滅度) 대사께서 게송을 말씀해 마치시고 드디어 문인들에게 알리셨다. "너희들은 잘 있거라. 이제 너희들과 작별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 세상의 인정으로 슬피 울거나, 사람들의 조문과 돈과 비단을 받지 말며, 상복을 입지 말라. 성인의 법이 아니면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내가 살아 있던 날과 한가지로 일시에 단정히 앉아서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으며, 머무름도 없고 감도 없어서 탄 연히 적정하면 이것이 큰 도이니라, 내가 떠난 뒤에 오직 법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내가 있던 날과 한 가지일 것이나, 내가 만약 세상에 있더라도 너희가 가르치는 법을 어기면 내가 있은들 이익이 없느니라." 대사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밤 삼경에 이르러 문득 돌아가시니, 대사의 춘추는 일흔여섯이었다. 大師說偈已了 遂告門人曰 汝等 好住 今共汝別 吾去已後 莫 作世情悲泣 而受人弔問(門)錢帛 著孝衣 卽非聖法 非我弟子 如吾在日一種 一時端坐 但無動無靜(淨) 無生無滅 無去無來 無是無非 無主<無往> 坦(但)然寂靜(淨) 卽是大道 吾去已後 但依(衣)法修行(284) 共吾在日一種 吾若在世 汝違敎法 吾住 無益 大師云此語已 夜至三更 奄然遷化(花) 大師春秋七十有 六(285) 대사께서 돌아가신 날, 절 안은 기이한 향내가 가득하여 여러 날 이 지나도 흩어지지 않았고, 산이 무너지고 땅이 진동하여 숲의 나 무가 희게 변하고 해와 달은 광채가 없고 바람과 구름이 빛을 잃었 다. 팔월 삼일에 돌아가시고 동짓달에 이르러 큰스님의 영구를 모시 어 조계산에 장사지내니, 용감(龍감) 속에서 흰 빛이 나타나 곧장 하 늘 위로 솟구치다가 이틀 만에 비로소 흩어졌으며, 소주 자사 위거 는 비(碑)를 세우고지금까지 공양하니라. 大師滅度之(諸)日 寺內異香 經數日不散 山崩(朋)地動 林 木變白 日月無光 風雲失色 八月三日 滅度 至十一月 迎和尙 神座於曹溪山葬 在龍龕之內 白光 出現 直上衝天 二日始散 韶州刺使韋 (處)立碑 至供養(286) 33. 후기(後記) 이 <단경>은 상좌인 법해스님이 모은 것이다. 법해스님이 돌아가 니 같이 배운 도제스님에게 부촉하였고, 도제스님이 돌아가니 문인 오진스님에게 부촉하였는데, 오진스님은 영남 조계산 법흥사에서 지 금 이 법을 전수하니라. 此壇經 法海上座集 上座無常 付同學道 道 無常 付門人悟 眞 悟眞 在嶺南曹溪山法興寺 見今傳授(受)此法(287) 만약 이 법을 부촉할진대는 모름지기 상근기의 지혜라야 하며, 마 음으로 불법을 믿어 큰 자비를 세우고 이 경을 지니고 읽어 의지를 삼아 이어받아서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다. 如付此(山)法 須得(德)上根(恨)智(知) 心身佛法 立大悲持此經 以爲依(衣)承 於今不絶. [법해]스님은 본래 소주 곡강현 사람이다. 여래께서 열반하시고 법의 가르침이 동쪽 땅으로 흘러서 머무름이 없음을 함께 전하니, 곧 나의 마음이 머무름이 없음이로다. 이 진정한 보살이 참된 종취를 설하고 진실한 비유를 행하여 오직 큰 지혜의 사람만을 가르치나니, 이것이 뜻의 의지하는 바이다. 무릇 제도하기를 서원하고, 수행하고 수행하되, 어려움을 만나서는 물러서지 않고, 괴로움을 만나서도 능히 참아 복과 덕이 깊고 두터 워야만 바야흐로 이 법을 전할 것이다. 만약 근성이 감내하지 못하 고 재량이 좋지 못하면 모름지기 이 법을 구하더라도 법을 어긴 덕 없는 이에게는 망령되이 <단경>을 부촉하지 말 것이니, 도를 같이 하는 모든 이에게 알려 비밀한 뜻을 알게 하노라. 和尙 本是韶州曲江縣(懸)人也 如來入涅槃(盤) 法敎流東土 共 傳無住 卽我心無住 此眞菩薩 說眞宗(示)(288) 行實喩 唯敎大 智人 是旨依(衣) 凡度誓修修行行 遭難不退 遇苦能忍 福德深 厚 方授此法 如根性 不堪 材(林)量 不得 須求此法 違律(立) 不德者 不得妄付壇經 告諸同道者 令知密(諸蜜)意(289) *도제(道 ), 오진(悟眞)...도제는 법해(法海)의 동학(同學)이 니 육조의 문인이요, 오진은 도제의 문인이니 육조의 손제자이 다. 이는 단경 전수의 계맥(系脈)이니, 돈황원본은 오진 이전 의 최고본(最古本)임이 분명하며, 일천여년간 돈황석굴(敦煌石 窟)에 비장(秘藏)되어 유통본처럼 뒷 사람들의 첨삭(添削)이 없으므로 육조의 성의(聖意)를 전한 진본(眞本)으로 평가된다. 제3편 선교결(禪敎訣) 유정대사에게 보임(示 惟政大師) 서산대사(西山大師) 요즈음 선(禪)을 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 스승의 법이 다'하고 교(敎)를 하는 사람도 '이것이 우리 스승의 법이다'라고 말하 면서 한 법을 가지고 서로 같다느니 다르다느니 하여 손가락과 말로 서로 다투고 있으니[손가락과 말[指馬]... <장자>제물편에서 쓸데없 는 논쟁을 비유한 말] 슬프도다, 그 누가 능히 결단하겠는가! 그러나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교는 말 이 있는 곳으로부터 말 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요, 선은 말 없는 곳 으로부터 말 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다. 말 없는 곳으로부터 말 없는 곳에 이르면 그것은 누구도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 없어 억지로 이름 하여 마음이라고 한다. 세상 사람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배워서 알고 생각하여 얻는다고 하니, 이는 실로 가엾은 일이다. 교를 하는 사람으로서 '교 가운데도 또한 선이 있다'고 말하는 자 가 있으니 이는 성문승도 아니며 연각승도 아니고 보살승도 아니며 불승도 아니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선가(禪家) 입문 의 첫 구절이요 선의 뜻은 아니며, 세존께서 한평생 말슴하신 가르 침[敎]인 것이다. 비유컨대 세 종류의 자비의 그물을 가지고 과거, 현재, 미래의 나고 죽음의 바다에 펴서 작은 그물로는 새우와 조개 를 건지고[인천소승교와 같음] 중간 그물로는 방어와 송어를 건지고 [연각의 중승교와 같음], 큰 그물로는 고래와 큰 자라를 건져서[대승 원돈교와 같음] 함께 열반의 언덕에 두는 것과 같으니, 이는 가르침 의 순서이다. 그 가운데 한 물건이 있어서, 갈기는 시뻘건 불과 같고 발톱은 무쇠 창날과 같으며, 눈은 햇빛을 쏘고 입으로는 바람과 우 뢰를 내뿜는다. 몸을 뒤쳐 한 번 구르면 흰 물결이 하늘에 닿고 산 과 강이 진동하며, 해와 달이 어두워진다. 세 가지 그물을 뛰어넘어 바로 구름 위로 올라가서 감로수를 퍼부어 뭇 생명들에게 이로움을 주니[바로 조사문 중의 교외별전의 기틀임], 이는 선이 교와 다른 점 이다. 今禪者曰 此吾師之法也 今敎者曰 此吾師之法也 一法上 同於 同異於異 而指馬交諍 嗚呼 其孰能訣之 然 禪是佛心 敎是佛 語也 敎也者 自有言至於無言者也 禪也者 自無言至於無言者 也 自無言至於無言 則人莫得而名焉 强名曰心 世人 不知其由 謂學而知思而得 是可 愍也 敎者曰 敎中 亦有禪也云者 出於 非聲聞乘 非緣覺乘 非菩薩乘 亦非佛乘之語也 然 此 禪家入 門之初句 非禪旨也 世尊一代所說之敎也 譬如將三種慈悲之網 張三界生死之海 以小網 蝦 (如人天小乘敎) 以中網 (如緣覺中乘敎) 以大網 鯨鱉(如大乘圓頓敎) 俱置於涅槃 之岸焉 此敎之序也 其中 有一物 如朱火 瓜如鐵戟 眼射 (293)日光 口吐風雷者 蒜身一轉 白浪 滔天 山河震動 日月 晦瞑 超出乎三網之外 直上乎靑雲之端 注甘露而益群生焉(正 如祖門敎外別傳之機) 此 禪之別於敎者也(294) *믿기 어려운 비유 같기는 하지만, 선의 뛰어남을 이 말로써 능히 짐작할 것이다. 이 비유는 서산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선, 교의 우열을 가리는 데 쓰인 말이다. 그리고 화엄사상에 철저한 보조(普照)도 '교외별전은 교승보다 한 층 더 뛰어나다[敎外別傳은 逈出敎乘이라一看話決疑論]'고 하였고 또한 '교외별전이란 교학자만이 믿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 아니 라, 선종에서도 근기가 낮은 이도 또 얕게 아는 이도 망연하여 알지 못한다[敎外別傳은 非但敎學者難信難入이요赤乃富宗下根淺識도茫然不知 矣니다一看話決疑論]'고 하였으며, 또한 서산은 그의 <선교석(禪敎 釋)>에서 말하기를 "화엄소[청량 지음]에 이르기를 '원돈 위에 따로 한 종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선문을 일컫는 것이다(華嚴疏一淸凉 一에 云, 圓頓之上에別有一種이라하니此는禪門之謂也라]"고 하였다. 이로서 선과 교의 차이가 이같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선과 교의 차 이가 이같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이 선의 법은 우리 부처님 세존도 또한 진귀조사에게서 따로이 전해받은 것이며, 옛부처의 케케묵은 말이 아니다. 요즈음 선의 뜻을 그릇 이어받은 자는 더러는 돈, 점의 문으로써 정맥을 삼으며, 더러 는 원돈의 교로써 종승을 삼고, 더러는 외도의 글을 인용하여 비밀 한 뜻을 설하며, 더러는 업식을 희롱함으로써 본분을 삼고, 또 더러 는 그림자를 인정하여 자신으로 삼는다. 심지어는 눈멀고 귀먹은 방 할(棒喝)을 함부로 행하여 부끄러움도 없으니 이는 참으로 무슨 마 음들인가? 법을 비방하는 그 허물을 내가 어찌 감히 말하겠는가? 此禪之法 吾佛世尊 亦別傳乎眞歸祖師者也 非古佛之陳言也 今錯承禪旨者 或以頓漸之門 爲正脈 或以圓(297)頓之敎 作宗 乘 或引外道書 說密旨 或以弄業識 爲本分 或以認光影 爲自 己者 至於恣行盲聾棒喝 無 無愧者 是誠何心哉 其謗法之愆 余何敢言(298) *돈오점수를 <수심결>에서 '돈, 점의 양문[頓漸兩門)', '돈, 점의 두 뜻[頓漸二義]'이라고 하였으니, 돈, 점의 문은 돈오점수를 말한 것 이다. 돈오점수는 하택(荷澤)과 규봉(圭峰)이 먼저 주장하고 보조가 힘 써 퍼뜨린 것으로서, 보조는 처음에는 돈오점수를 '달마의 법을 바로 이은 것[達磨正傳]'이라고 하다가 입적하기 한해 전의 겨울에 출판된 <절요(節要)>의 첫머리에서 '하택은 지해종사라, 조계의 적자가 아 니다[荷澤은是知解宗師니非曹溪嫡子라]'고 하여 종전의 주장과는 달리 돈오점수는 지해(知解)이며 조계의 정통이 아니요 교가의 행상[敎家 行相]이라고 하였다. 이는 사상의 큰 변환이며 진전(進展)이라고 볼 수 있다. 원교의 극치(圓敎極致]는 화엄연기(華嚴緣起)로서, <간화결의론> 에서 보조는 원돈신해(圓頓信解)인 여실언교(如實言敎)는 사구(死句) 라고 단정하고 무애연기(無碍緣起)를 불법 지해의 병[知解之病]이라 고 지적하여 평생 받들던 화엄사상을 원돈사구(圓頓死句)이며 지해 지병(知解之病)이라는 대담한 발언을 하였으니, 그의 사상에 커다란 진전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돈오점수와 원돈신해는 같은 내용이지 만 서산(西山)은, 선의 뜻을 잘못 알고 돈, 점의 문을 정맥으로 삼거 나 원돈의 교를 종승(宗乘)으로 삼는 것은 큰 법을 비방하는 것이라 고 확실히 말함으로써, 돈오점수와 원돈신해가 선의 정통이 아님을 잘 밝혀 주었다. 그러나 요즘의 선계(禪界)에는 아직도 돈오점수와 원돈신해를 선(禪)으로 오해하는 이가 많으니, 참으로 통탄하고도 남 을 일이다. *교외별전은 팔만장경과는 달리 가섭, 아난으로 이심전심(以心傳 心)하여 내려온 것이니, 선의 특색이다. 진귀조사설(眞歸祖師設)은 한국에만 있는 전설로서, 서산이 이를 인용하였으나 <선교결>의 본 지(本旨)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교외별전이란 배워서 알며 생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마음 길이 다하여 끊긴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며, 스스로 알아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세존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 시니 가섭이 얼굴 가득히 미소한 뒤로부터, 나아가서는 후세에 전한, 이른바 달마의 '툭 트이어 성(聖)이랄 것도 없다'한 것과 육조대사의 '선, 악을 생각하지 말라'한 것과, 회양의 '수레가 멈추니 소를 채찍 질한다'고 한 것과 행사의 '여능의 쌀값'과 마조의 '서쪽 강물을 다 마심'과 석두의 '불법을 모른다'함과 운문의 '호떡'과 조주의 '차 마 심'과 투자의 '기름 팜'과 현사의 '흰 종이'와 설봉의 '공굴림'과 화산 의 '북 두드림'과 신산의 '바라 두드림'과 도오의 '춤을 춤'에 이르기 까지, 이들은 모두 옛 부처와 옛 조사들이 같이 교외별전의 곡조를 노래한 것이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머뭇거릴 수 있겠는 가? 이는 모기가 무쇠 소를 물어뜯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이제 말세에 이르러 낮은 근기는 많으나 이들이 교외별전의 근기 가 아니므로 다만 원돈문의 이치의 길, 뜻의 길, 마음의 길, 말의 길 로써 보고 듣고 믿고 아는 것[見聞信解]을 귀하게 여길 뿐으로 이치 와 뜻과 마음과 말의 길이 끊어져 자미(滋味)가 없고 만지지 못하는 곳에서 칠통을 두드려 부수는 경절문(徑截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제 그대가 팔방의 납자 무리 들을 접대할 때 칼을 쓰되 긴밀히 하여(사량복탁으로) 억지로 이치 에 닿지 않는 말을 하지 말 것이요, 바로 본분인 경절문의 활구로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쳐 스스로 얻게 하여야만 할 것이니 그것이 바야흐로 종사의 사람을 위하는 됨됨이니라. 만일에 배우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함을 보고 문득 뻘밭으로 이끌 어 교리를 말하면 사람의 눈을 멀게 함이 적지 않을 것이다. 만일에 종사가 이 법을 어기면, 비록 설법하매 하늘에서 꽃비가 어지러이 쏟아져 내릴지라도 이는 모두 어리석고 미쳐서 밖으로 내닫는 것이 될 뿐이다. 吾所謂敎外別傳者 非學而知思而得者也 須窮心路絶然後 始可 知也 須經自肯點頭然後 始可得也 始不聞乎 自釋尊 拈花示衆 迦葉 破顔微笑 乃至出於口而傳之於後一 達磨廓然無聖 六祖 善惡不思 讓師車滯鞭牛 思師廬陵米價 馬祖吸盡西江 石頭不 會佛法 至於雲門胡餠 趙州喫茶 投子沽油 玄沙白紙 雪峰 毬 禾山打鼓 神山敲羅 道吾作舞 斯等 皆先佛先祖 同唱敎會別傳 之曲也 思量得�� 擬議得�� 可謂蚊子之上鐵牛也 今當末世 多 (301)是劣機 非別傳之機也 故 只貴圓頓門 以理路義路 心路 語路 生見聞信解者也 不貴徑截門 沒理路沒義路 沒心路沒語 路 沒滋味無摸索底上 打破漆桶者也 然則如之何而可也 今師 對八方衲子之輩 下刃要緊 不得穿鑿 直以分分徑截門活句 敎 伊自吾自得 方是宗師 爲人體裁也 若見學人 不薦 便與拖泥說 敎 人眼不少 若宗師違此法 則雖說法 天花亂墜 總是癡狂外 邊走也(302) *설교(說敎)의 교(敎)는 <선가귀감>에서 '교라 함은 돈오점수이다 [敎也者는頓悟漸修라]'고 한 그것이다. 근기가 낮다고 하여 사구(死句) 인 원돈신해, 돈오점수로써 사람을 가르치면 배우는 사람의 눈을 다 멀게 하며, 아무리 설법을 잘 하여도 '어리석고 미쳐서 밖으로 내닫 는다[痴狂外邊走]'고 하였으니, 무서운 경책이다. 서산도 <선가귀감>을 지은 시절 -44세 때- 에는, 돈오점수의 교 의(敎義)를 먼저 배워 익힌 뒤에 교의 뜻을 놓아 버리고[放下敎義] 참선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묘향산 금선대(金仙臺) 시절에 이르러서는 공부가 익어가면서 사상도 바뀌어, 원돈, 점수는 사구이며 지해의 병[知解之病]이니 '사람의 눈을 멀게 함이 적지 않 다[ 人眼不少]'고 하여 가르치지 못하게 하였고, 만일에 그를 따르 지 않으면 '어리석고 미쳐서 밖으로 내닫는다'고 심히 나무랬으며, 또 한편으로 그의 <선교석(禪敎釋)> 끝부분에서 '교를 중히 여기고 마음[선]을 가벼이 여기면 비록 많은 겁을 거쳐 닦더라도 모두 천마, 외도가 된다[重敎輕心[禪]하면雖歷多劫하여도盡作天魔外道라]'고까지 극단 적으로 말하였다. 보조는 서산과는 달리 원돈신해는 사구이며 불법 지해의 병이라 고 배척하여 놓고도, <간화결의론> 끝부분에서는 '증지가 현전(現 前)한 사람은 오늘날 보기도 드물고 듣기도 드물기 때문에, 다만 화 두참의문[사구]에 의지하여 바른 지견을 밝히는 것이 귀할 따름이다 [證智現前者는 今時에 罕見罕聞故로 今時에 但貴依話頭參意門[死句]하야 發明正知見耳라]'고 하였으니, 보조는 이만큼 선종의 안목에 혼란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아무리 낮고 열등한 근기라 하여도 활구(活句)만으로 지도하여야 하거늘, 자기가 지적한 사구인 지해의 병을 거듭 권장하였으니, 결국 <간화결의론>도 용두사미가 되어 버렸다. 끝부분에서 '활구를 잘 참 구하라[參詳活句]'고 말하였지만 활구를 잘 참구하는 것이 그의 진의 일진대 '참의사구(參意死句)'를 어째서 거론했는지 모르겠다. 만일에 선종의 바른 법안을 가진 스승[正眼宗師]이라면 오직 활구로써 나아 갈 뿐 '참의사구'는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 다행히도 서산은 보조와 는 달리 경절활구(徑截活句)로써 일관하였으니 후세의 명훈(明訓)이 되었다. 만일에 배우는 사람이 이 법을 믿으면 비록 금생에 철저한 깨침 을 얻지 못하여도 목숨을 마칠 때에 악한 업에 끌리지 않고 바로 깨 달음의 바른 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옛날 마조가 한 번 소리치자 백장이 귀먹었고 황벽이 혀를 내둘렀으니, 이는 임제종의 연원이다. 그대는 반드시 정맥을 가려서 종안이 분명할 것이므로 이렇게 누누 히 말하는 것이니, 뒷날 이 노승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 만일에 노승 의 말을 저버리면 반드시 부처님과 조사의 깊은 은혜를 저버리는 것 이 될 것이니, 자세히 살피고 자세히 살펴야 한다. 若學人信此法則 雖今生 未得鐵悟 臨命終時 不被惡(307)業所 牽 直入菩提正路也 昔馬祖一喝也 百丈 耳聾 黃檗 吐舌 此 臨濟宗之淵源也 師必擇正脈 宗眼分明故 如許縷縷 後日 莫辜 負老僧也 若辜負老僧 則必辜負佛祖深恩也 詳悉詳悉(308) *


이 <선교결>은 서산 만년의 명저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위의 글 과 같이 선(禪), 교(敎)가 엄연히 구별되어 있으므로, 선교일치(禪敎 一致) 운운하면서 혼동하지 말 것이며, 말세의 낮은 근기라고 하여 원돈사구, 지해의 병으로 그릇 들어가게 하지 말고 오직 종문정전 (宗門正傳 선종의 법을 바로 전함)의 활구를 내세워야 한다. 선문의 가장 큰 병은 원돈지해에서 오는 점수사상이니, 오직 육조 의 '유전돈법(唯傳頓法 오직 돈법만을 전함)'의 유법(遺法)을 지켜서 참구하는 화두[所參話頭]에 마음과 힘을 다할 것이며, 공부하는 가운 데 나타나는 경계와 지해(知解)에 병들지 말고 오매일여(寤寐一如 자나 깨나 한결같음)와 내외명철(內外明徹 안팎이 사무쳐 밝음)을 참으로 깨달음으로서 불성을 밝게 보아 본분납승(本分衲僧)으로서 불조(佛祖 부처님과 조사)의 정법을 계승하기 바란다. 제2권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머리말 이 논을 지은이는 마조 도일(馬祖道一) 스님의 제자인 대주 혜해(大 株慧海)스님입니다. 스님의 전기는 명확하게 기록된 것이 없고 다만 [조당집(祖堂集)]권 14,[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6 등에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이를 종합해 보면 마조스님을 6년간 모시고 살았다는 사실만이 스님의 생존 연대를 추정할수 있는 유일한 단서 입니다. 혜해스님은 건주(福建省) 사람으로 성은 주[朱]씨이며 월주(浙江省)의 대운사 도지(道智)스님에게 출가 득도 하였습니다. 그후 스님은 강서(江西)에 있는 마조스님을 찾아가 뵈오니, 마조스님 이 물었습니다. "어디서 오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와서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의 보배창고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떠나 사방으로 돌아다니 면서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떤 불법(佛 法)을 구하려 하는가??" 그러자 혜해스님이 절을 하고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혜해 자신의 보배창고 입니까?"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 것이 너의 보배창고이다. 일체가 구족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고 사용[使用]이 자제한데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이 말 끝에 혜해스님은 크게 깨쳐서 자신의 본래 마음을 알았는데, 그것은 지적인 이해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님은 뛸듯이 기뻐서 절을 올려 감사를 드리고 6년 동안 마조스님을 시봉하였습니다. 그 후 도지스님이 연로 하시므로 대운사로 다시 돌아와서 도지스님을 봉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취와 활동을 감춘채 겉으로는 어리석게 살면 서 [돈오입도요문론 (頓悟入道要門論)] 한 권을 저술 하였습니다. 이책 을 조카 상좌인 현안(玄晏)스님이 훔쳐서 마조스님에게 보이니 스님이 이것을 보시고 대중들에게 "월주(越州)에 큰 구슬이 있으니 둥글고 밝은 광명이 비추어 자유자 재로와 걸림이 없구나" 하고 감탄하시었습니다. 대중가운데 혜해스님이 주씨임을 알고 있던 자가 있어서 큰 구슬(大珠)은 바로 혜해스님을 크게 칭찬하는 말임을 알 아차리고, "옛날 같이 살았을때는 그렇게 훌륭한 스님인줄 몰랐는데 이제보니 큰 도인임에 틀림 없구나." 하고 다시 스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도반을 이루어 앞을 다투어 월주의 스님 문하에 들어와서 공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혜해스님을 대주(大珠)스 님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마조스님 문하에서 대주스님의 위치를 본다면 마조스님 비문에서나 [경덕전등록],[조당집]에서나 모두 스님을 마조 스님 수제자(首第子)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덕전등록]에 1700여명의 큰 스님 법문이 실려 있지만, 그 중에서도 대주 스님의 법문이 가장 많이 실려있고 제 28권에 도 다시 스님의 긴 법어가 따로 실려 있습니다. 마조스님의 정맥은 백장(百丈)스님에게로 내려갔다고 하는 것이 선가 의 정설로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백장(百丈)스님, 남전(南泉)스님, 법 상(法常)스님들보다 대주스님이 더 유명하였으며 천하에 이름을 더 날렸 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돈오입도요문론]은 당대에 명성을 떨친 대주 스님의 저술이고 또 선가의 대조사이신 마조스님이 극찬한 책이므 로 선종(禪宗)의 정통사상을 아는데 있어서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자료라 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한가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육조단경(六祖壇 經)] 이라든가, [전심법요(傳心法要)]라든가, [백장광록(百丈廣錄)]이라 든가 하는 선종의 어록들이 많이 있지만 이러한 어록들은 당시 사람들 이나 후세 사람들이 그 스님이 입적 하신뒤에 그 법문을 기록하거나 수 집한 것이지 본인들이 직접 편찬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돈오입도요 문론]은 대주스님이 직접 저술하였으므로 거기에 가필이나 착오가 없다 고 보며 다른 어떠한 어록보다도 완전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마조스님이 인가하신 논이니 만큼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정확하게 기술한 것으로서, 선종 초기의 근본사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증도가(證道歌)와 함께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돈오(頓悟)란 구경각(究竟覺)을 말합니다. 즉 제8 아뢰야 근본 무명이 완전히 끊어져서 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하여 진여본성(眞如本性) 을 깨친 증오(證悟)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도를 정등각한 구경각을 돈오 라고 하는 만큼, 입도(入道)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성불과 같은 뜻으로 서 증도라는 말과 뜻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돈오입도요문론]은 영가 스님의 [증도가]와 그 사상과 내용이 같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돈오입도요문론 차례 머리말 …………………………………………………………………………161 1. 불보살(佛菩薩)께 헌사(獻辭) ………………………………………… 167

2. 돈오(頓悟)………………………………………………………………… 167

3. 선정(禪定)………………………………………………………………… 169

4. 무주처(無住處)와 무주심(無住心) …………………………………… 170

5. 자성견(自性見)…………………………………………………………… 171

6. 열반경(涅槃經)의 이구(二句) ………………………………………… 172

7. 불견유무(不見有無)가 진해탈(眞解脫) ……………………………… 173

8. 무소견(無所見) ………………………………………………………… 174

9. 돈오문(頓悟門)의 종지(宗旨)와 체용(體用)………………………… 176

10.돈오(頓悟)는 단바라밀(檀波羅蜜)로부터 …………………………… 180

11.삼학(三學)을 힘쓰다.…………………………………………………… 183

12.무생심(無生心) ………………………………………………………… 184

13.상주(常住)………………………………………………………………… 187

14.오종법신(五種法身)……………………………………………………… 187

15.등각(等覺)과 묘각(妙覺) ……………………………………………… 188

16.설법(說法)………………………………………………………………… 189

17.금강경(金剛經)의 경전(輕賤) ………………………………………… 190

18.여래(如來)의 오안(五眼) ……………………………………………… 191

19.대승(大乘)과 최상승(最上乘) ………………………………………… 191

20.정혜(定慧)를 함께 씀…………………………………………………… 192

21.경상(鏡像)과 정혜(定慧) ……………………………………………… 192

22.언어도단심행처멸(言語道斷心行處滅)………………………………… 194

23.여여(如如)………………………………………………………………… 195

24.즉색즉공(卽色卽空)……………………………………………………… 196

25.진(盡)과 무진(無盡)………………………………………………………196

26.불생불멸(不生不滅)……………………………………………………… 198

27.불계(佛戒)는 청정심(淸淨心) ………………………………………… 198

28.불(佛)과 법(法)의 선후(先後) ………………………………………… 199

29.설통(說通)과 종통(宗通) ……………………………………………… 200

30.도(度)와 부도(不度) …………………………………………………… 201

31.부진유위(不盡有爲)며 부주무위(不住無爲) ………………………… 201

32.지옥유무(地獄有無)……………………………………………………… 202

33.중생(衆生)과 불성(佛性) ……………………………………………… 203

34.삼신사지(三身四智)……………………………………………………… 204

35.불진신(佛眞身)…………………………………………………………… 206

36.항상 부처님을 떠나지 아니함………………………………………… 207

37.무위법(無爲法)…………………………………………………………… 207

38.중도(中道)………………………………………………………………… 208

39.오음(五陰)………………………………………………………………… 209

40.이십오유(二十五有) …………………………………………………… 210

41.무념(無念)과 돈오(頓悟) ……………………………………………… 211

42.중생자도(衆生自度)……………………………………………………… 215

43.동처부동주(同處不同住)………………………………………………… 216

44.일체처(一切處)에 무심(無心) ………………………………………… 217

45.필경정(畢竟淨)…………………………………………………………… 219

46.필경증(畢竟證)…………………………………………………………… 220

47.진해탈(眞解脫)…………………………………………………………… 221

48.필경득(畢竟得)…………………………………………………………… 221

49.필경공(畢竟空)…………………………………………………………… 222

50.진여정(眞如定)…………………………………………………………… 222

51.중도(中道)는 일체처무심(一切處無心) …………………………… 223

52.일체처무심(一切處無心)이 해탈(解脫) ……………………………… 225


 1.불보살[佛菩薩]께 헌사[獻辭]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대보살님들께 머리 숙여 예배를 올 립니다. 부처님의 제자인 제가 이 논을 지었으나 부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을까 두려우니 부디 참회를 받아 주십시오. 만약 부처님의 이치를 알았거든 일체 유정의 중생에게 모두 회향 하여 내세(來世)에 다 함께 성불하기를 바라옵니다. 稽首和南十方諸佛 諸大菩薩衆 弟子今作此論 恐不會聖心 願 賜懺悔 若會聖理 盡將廻施一切有情 願於來世 盡得成佛 2.돈오(頓悟) "어떤 법을 닦아야 곧 해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돈오의 한 문[一門]만이 곧 해탈을 얻을 수 있느니 라." "어떤 것을 돈오(頓悟)라고 합니까?" "돈(頓)이란 단박에 망념(妄念)을 없앰이요, 오(悟)란 얻은 바 없음[無所得]을 깨치는 것이니라." "무엇부터 닦아야 합니까?" "근본(根本)부터 닦아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것이 근본부터 닦는 것입니까?" "마음이 근본이니라." "마음이 근본임을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능가경]에 이르기를 '마음이 나면 갖가지 법이나고 마음 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진다'고 하였고, [유마경]에 이 르기를 '정토(淨土)를 얻고저 하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하나니 그 마음 깨끗함을 따라 불국토가 깨끗해진다' 하였고, [유교경]에 이르기를 '마음을 한곳으로 통일하여 제 어하면 성취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고 하였고, 어떤 경에서 는 '성인은 마음을 구하나 부처를 구하지 아니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를 구하면서 마음을 구하지 아니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다스리나 몸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몸은 다스리나 마음을 다스리지 아니한다'고 하였고, [불명경]에 이르기를 '죄는 마음에서 났다가 다시 마음을 좇 아서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악과 일체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알지니, 그런 까닭에 마음이 근본이니라. 만약 해탈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모 름지기 근본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런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 고 쓸데없이 노력을 허비하여 바깥 모양에서 구한다면 옳지 않느니라. [선문경]에 이르기를 '바깥 모양에서 구한다면 비 록 몇 겁을 지난다 해도 마침내 이루지 못할 것이요, 안으로 마음을 관조하여 깨치면 한 생각 사이에 보리를 증득한다'고 하였느니라." 問 欲修何法 卽得解脫 答 唯有頓悟一門 卽得解脫 云何爲頓悟 答 頓者 頓除妄念 悟者 悟無所得 問 從何而修 答 從根本修 云何從根本修 答 心爲根本 云何知心爲根本 答 楞伽經云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 維摩經云 欲得 淨土 當淨其心 隨其心淨 卽佛土淨 遺敎經云 但制心一處 無 事不辨 經云 聖人 求心不求佛 愚人 求佛不求心 智人 調心不 調身 愚人 調身不調心 佛名經云 罪從心生 還從心滅 故知善 惡一切 皆由自心 所以 心爲根本也 若求解脫者 先須識根本 若不達此理 虛費功勞 於外相 求 無有是處 禪門經云 於外相 求 雖經劫數 終不能成 於內覺觀 如一念頃 卽證菩提 3.선정(禪定) "근본을 닦으려면 무슨 법으로써 닦아야 합니까?" "오직 좌선하여 선정을 하면 얻을 수 있느니라. [선문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의 성스러운 지혜인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구할진댄 곧 선정(禪定)이 요긴한 것이니, 만약 선정이 없으 면 망상이 시끄럽게 일어나서 그 선근(禪根)을 무너뜨린다' 고 하였느니라." "어떤 것을 선(禪)이라 하며 어떤 것을 정(定)이라 합니 까?" "망념(妄念)이 일어나지 아니함이 선(禪)이요, 앉아서 본성 (本性)을 보는 것이 정(定)이니라. 본성이란 너의 무생심(無生 心)이요, 정이란 경계를 대(對)함에 무심하여 팔풍(八風)에 움 직이지 아니함이니라. 팔풍이란, 이로움과 손실(利.衰), 헐뜯음 과 높이 기림(毁.譽), 칭찬함과 비웃음(稱.譏), 괴로움과 즐거 움(苦.樂)을 말하느니라. 만약 이와 같이 정(定)을 얻은 사람 은 비록 범부(凡夫)라고 하더라도 부처님 지위(佛位)에 들어 가느니라. 왜냐하면 [보살계경(菩薩戒經)]에 이르기를 '중생이 부처님 계(佛戒)를 받으면 곧 모든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 고 하였 으니 이와 같이 얻은 것을 '해탈' 이라고 하며 또 '피안에 이 르렀다'고 하느니라. 이는 육도(六度)를 뛰어넘고 삼계(三界) 를 벗어난 대력보살(大力菩薩)이며 무량력존(無量力尊)이니 대장부(大丈夫)인 것이니라." 問 夫修根本 以何法修 答 惟坐禪禪定 卽得 禪門經云 求佛聖智 卽要禪定 若無禪定 念想 喧動 壞其善根 問 云何爲禪 云何爲定 答 妄念不生 爲禪 坐見本性 爲定 本性者 是汝無生心 定者 對境無心 八風不能動 八風者 利衰毁譽稱譏苦樂 是名八風 若 得如是定者 雖是凡夫 卽入佛位 何以故 菩薩戒經云 衆生 受 佛戒 卽入諸佛位 得如是者 卽名解脫 亦名達彼岸 超六度越三 界 大力菩薩 無量力尊 是大丈夫 4.무주처(無住處)와 무주심(無住心) "마음이 어느 곳에 머물러야 곧 머무는 것 입니까? "머무는 곳이 없는데 머무는 것이 곧 머무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머무는 곳이 없는 것입니까?" "일체처(一切處)에 머물지 아니함이 곧 머무는 곳 없는데 머무는 것 이니라." "어떤 것이 일체처(一切處)에 머물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한다 함은 선악(善惡).유무(有無).내 외(內外).중간(中間)에 머물지 아니하며,공(空)에도 머물지 아 니하며, 공(空) 아님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선정(禪定)에도 머 물지 아니하며, 선정 아님에도 머물지 아니함이 일체처에 머 물지 아니함이니, 다만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하는 것이 곧 머 무는 곳이니라. 이와 같이 얻은 것을 머물음이 없는 마음(無 住心) 이라 하는 것이니 머물음이 없는 마음이란 부처님의 마음이니라." "그 마음은 어떤 물건과 같습니까?" "그 마음은 푸르지도 않고 누르지도 않으며, 붉지도 않고 희지도 않으며,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고 오 지도 아니하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아니하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아니하여, 담연(湛然)하고 항상 고요한 이것 이 본래 마음의 형상이며 또 본래 몸이니 본래의 몸이란 곧 부처님의 몸이니라." 問 心住何處卽住 答 住無住處卽住 問 云何是無住處 答 不住一切處 卽是住無住處 問 云何是不住一切處 答 不住一切處者 不住善惡有無內外中間 不住空 亦不住不空 不住定亦不住不定 卽是不住一切處 只箇不住一切處卽是住處 也 得如是者 卽名無住心也 無住心者 是佛心 問 其心似何物 答 其心 不靑不黃不赤不白 不長不短不法不來 非垢非淨 不生 不滅 湛然常寂 此是本心形相也 亦是本身 本身者 卽佛身也 5.자성견(自性見) "몸과 마음은 무엇으로써 보는 것입니까, 눈으로 봅니까, 귀로 봅니까, 몸과 마음 등으로 봅니까?" "보는 것은 여러 가지로 보는 것이 없느니라." "이미 여러 가지로 보는 것이 없을진댄 다시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이것은 자성(自性)으로 보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자성이 본래 청정하여 담연히 비고 고요하므로, 비고 고요한 본체 (體) 가운데서 이 보는 것[見]이 능히 나느니라." "다만 청정의 본체조차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이 보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 것 입니까?" "비유하면 밝은 거울 가운데 비록 모양이 없으나 일체 모 양을 볼수 있는 것과 같으니, 왜냐하면 밝은 거울이 무심이기 때문이니라. 배우는 사람이 만약 마음에 물든 바 없어 망심이 나지 아니하고 주관과 객관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자 연히 청정한 것이니, 청정한 까닭에 능히 이 보는 것이 생겨 나느니라. [법구경]에 이르기를 '필경의 공 가운데서 불꽃 일 듯 건립함이 선지식이다' 고 하였느니라. 問 身心 以何爲見 是眼見 耳見 鼻見 及 身心等見 答 見無如許種見 云 旣無如許種見 復何見 答 是自性見 何以故 爲自性 本來淸淨 湛然空寂 卽於空寂體 中 能生此見 問 只如淸淨體 尙不可得 此見 從何而有 答 喩如明鑑中 雖無像 能見一切像 何以故 爲明鑑無心故 學 人 若心無所染 妄心 不生 我所心 滅 自然淸淨 以淸淨故 能 生此見 法句經云 於 畢竟空中 熾然建立 是善知識也 6. 열반경(涅槃經)의 이구(二句) "[열반경] 금강신품(金剛身品)에 이르기를 '볼 수 없되 분 명하고 밝게 볼 수 있어 아는 것도 없고 알지 못하는 것도 없다' 하니 무슨 뜻 입니까?" " '볼수 없다'는 것은 자성의 본체가 모양이 없어서 얻을 수 없는 까닭에 볼 수 없다고 하느니라. 그러나 '얻을 수 없 는 것을 보는 것'은 자성의 본체가 공적하고 담연하여 가고 옴이 없으나 세간의 흐름을 여의지 않으니 세간의 흐름이 능 히 흐르지도 아니하여 탄연히 자재[自在]함이 곧 '분명하고 밝게 보는 것' 이니라.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자성의 모양이 없어서 본래 분별 (分別)이 없음을 이름하여 아는 것이 없다고 하느니라. '알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은 분별이 없는 본체 가운데 항 사묘용을 갖추어서 능히 일체를 분별하여 알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이를 이름하여 알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하느니라. [반야(般若)의 게송]에 이르기를 '반야(般若)는 아는 것이 없으나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반야는 보지 못하나 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 고 하였느니라." 問 涅槃經 金剛身品 不可見 了了見 無有知者 無不知者 云何 答 不可見者 爲自性體 無形 不可得故 是名不可見也 然 見不 可得者 體寂湛然 無有去來 不離世流 世流不能流 坦然自在卽 是了了見也 無有知者 爲自性 無形 本無分別 是名無有知者 無不知者 於無分別體中 具有恒沙之用 能分別一切 卽無事不 知 是名無不知者 般若偈云 般若 無知 無事不知 般若 無見 無事不見 7.불견유무[不見有無]가 진해탈[眞解脫] "경에서 이르기를 '있음(有)과 없음(無)을 보지 않는 것이 참다운 해탈이다'고 하시니 어떤 것이 있음과 없음을 보지 않 는 것 입니까?" "깨끗한 마음을 증득하였을 때를 곧 '있음'이라 하고, 그 가 운데서 깨끗한 마음을 얻었다는 생각이 나지 않음이 곧 '있 음'을 보지 못한다고 하느니라. 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는 생각을 얻고서, 나지도 않 고 머물지도 않는다는 생각을 짓지 않는 것이 곧 '없음'을 보 지 못함이니, 그런 까닭에 `있음과 없음'을 보지 못한다고 하 는 것 이니라. [능엄경]에 이르기를 '지견(知見)에 앎(知)을 세우면 무명 (無明)의 근본이 되고 지견에 보는 것이 없으면 이것이 곧 열 반이며 또한 해탈이라 한다'고 하였느니라." 問 經云 不見有無卽眞解脫 何者是不見有無 答 證得淨心時 卽名有 於中 不生得淨心想 卽名不見有也 得 想無生無住 不得作無生無住想 卽是不見無也 故 云不見有無 也 楞嚴經云 知見 立知 卽無明本 知見 無見 斯卽涅槃 亦名 解脫 8.무소견(無所見) "어떤 것이 보는 바가 없는 것입니까?" "만약 남자나 여자 및 일체 색상을 보되 그 가운데에 사 랑함과 미워함[愛憎]을 일으키지 아니하여 보지 못함과 더불 어 같은 것이 곧 보는 바가 없는 것이니라." "일체 색상을 대할 때는 곧 본다고 하거니와 색상을 대하 지 않을 때도 또한 본다고 할 수 있읍니까?" "보느니라." "물건을 대할 때는 설령 보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물건 을 대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서 보는 것이 있읍니까?" "지금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물건을 대하거나 물건을 대 하지 않거나를 논(論)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다고 하는 그 성품은 영원한 까닭에 물건이 있을 때도 보고 물건이 없을 때도 또한 보는 것 이니라. 그런 까닭에 물건에는 본래 스스 로 가고 옴(去來)이 있으나 본다는 성품에는 가고 옴이 없음 을 알지니, 다른 모든 감각 기관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바로 물건을 볼 때에 보는 가운데 물건이 있읍니까?" "보는 가운데 물건이 서지 못 하느니라." "바로 물건이 없음을 볼 때 보는 가운데 물건이 없읍니 까?" "보는 가운데는 물건 없는 것도 서지 못하느니라." "소리가 있을 때는 곧 들을 수 있거니와 소리가 없을 때에 도 들을 수 있읍니까?" "역시 듣느니라." "소리가 있을 때엔 설령 들을 수 있다고 하지만 소리가 없 을 때는 어떻게 듣습니까?" "지금 '듣는다'고 하는 것은 소리가 있거나 없거나를 논하 지 않는다. 왜냐하면 '듣는다'는 자성은 영원한 까닭에 소리가 있을 때도 듣고 소리가 없을 때도 또한 듣느니라." "이렇게 듣는 자는 누구 입니까?" "이는 자기의 성품이 듣는 것이며 또한 아는 이가 듣는다 고 하느니라." 問 云何是無所見 答 若見男子女人及一切色像 於中 不起愛憎 與不見 等 卽是 無所見也 問 對一切色像時 卽名爲見 不對色像時 亦名見否 答 見 問 對物時 從有見 不對物時 云何有見 答 今言見者 不論對物與不對物 何以故 爲見性 常故 有物之 時 卽見 無物之時 亦見也 故知物 自有去來 見性 無來去也 諸根 亦爾 問 正見物時 見中 有物否 答 見中 不立物 問 正見無物時 見中 有無物否 答 見中 不立無物 問 有聲時卽有聞 無聲時 還得聞否 答 亦聞 問 有聲時 從有聞 無聲時 云何得聞 答 今言聞者 不論有聲無聲 何以故 爲聞性 常故 有聲時卽聞 無聲時亦聞 問 如是聞者是誰 答 是自性聞 亦名知者聞 9.돈오문(頓悟門)의 종지(宗旨)와 체용(體用). 1. 종지와 체용 "이 돈오문은 무엇으로써 종취(宗趣)를 삼고 무엇으로써 참 뜻(旨)을 삼고 무엇으로써 본체로 삼으며 무엇으로써 작용 (用)으로 삼는 것 입니까?" "무념을 종취로 삼고 망심이 일어나지 않음을 참 뜻으로 삼으며 청정을 본체로 삼고 지혜로써 작용을 삼느니라." "이미 무념으로 종취를 삼는다고 말씀할진댄 무념이란 어 떤 생각이 없는 것 입니까?" "무념이란 삿된 생각이 없음이요 바른 생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니라." "어떤 것이 삿된 생각이며 어떤 것이 바른 생각 입니까?" "있음(有)을 생각하고 없음(無)을 생각하는 것이 삿된 생각 이요 있음과 없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른 생각이니라. 괴 로움[苦]과 즐거움[樂], 나는 것[生]과 없어짐[滅], 취함[取]과 버림[捨], 원망(怨)과 친함(親), 미워함(憎)과 사랑함(愛)을 생 각하는 것이 모두 삿된 생각이요, 괴로움과 즐거움등을 생각 하지 않는 것이 바른 생각이니라." "어떤 것이 바른 생각 입니까?" "바른 생각이란 오직 보리(菩提)만을 생각하는 것이니라." "보리는 얻을 수 있습니까?" "보리는 얻을 수 없느니라." "이미 얻을 수 없을진댄 어떻게 오직 보리만 생각 합니 까?" "보리는 다만 거짓으로 이름을 세운 것이라 실지로 얻을 수 없으며 또한 과거에도 미래에도 얻을 수 없으니 얻을 수 없는 까닭에 곧 생각 있음이 없느니라. 오직 이 무념을 진실한 생각이라 하는 것이니 보리는 생각 할 바가 없는 것이니라. 생각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곧 일체처에 무심함이 생각 하는 바가 없음이니, 다만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무념이란 모두가 일에 따라 방편으로 거짓 이름을 세운 것인지라 모두 가 하나의 본체로서 같음이요 둘도 없고 다름도 없는 것이니 라. 다만 일체처에 무심함을 알면 곧 이것이 무념이니 무념을 얻을 때에 자연해탈이니라." "어떻게 하여야 부처님의 행을 하는 것입니까?" "일체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부처님 행동이라 하며 또 바 른 행동이라 하며 또 성스러운 행동이라 함이니,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있음과 없음 미워함과 사랑함등을 행하지 않는 것 이니라. [대율]5권 보살품에서 이르기를 '일체 성인들은 중생의 행 동을 행하지 않고 중생들은 이와같은 성인의 행동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느니라." "어떤 것이 바로 보는 것입니까?" "보는 바 없음을 보는 것을 곧 바로 보는 것이라 하느니 라." "어떤 것이 보는 바 없음을 보는 것이라 합니까?" "일체 색을 볼 때에 물들거나 집착함을 일으키지 아니함이 니, 물들거나 집착하지 아니한다 함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 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므로 곧 보는 바 없음을 본다고 하 는 것이니라. 만약 보는 바 없음을 보는 것을 얻었을 때 곧 부처님의 눈 이라 하나니 다시 별다른 눈이란 없느니라. 만약 일체 색을 볼 때에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 게 되면 보는 바가 있다고 하는 것이니 보는 바가 있음이 곧 중생의 눈이니라. 다시 별다른 눈을 가지고 중생의 눈이라 할 것이 없으니, 내지 다른 오근(五根)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問 此頓悟門 以何爲宗 以何爲旨 以何爲體 以何爲用 答 無念 爲宗 妄心不起 爲旨 以淸淨爲體 以智爲用 問 旣言無念爲宗 未審 無念者 無何念 答 無念者 無邪念 非無正念 問 云何爲邪念 云何爲正念 答 念有念無 卽名邪念 不念有無 卽名正念 念善念惡 名爲 邪念 不念善惡 名爲正念 乃至苦樂生滅取捨怨親憎愛 竝名 邪念 不念苦樂等 卽名正念 問 云何是正念 答 正念者 唯念菩提 問 菩提 可得否 答 菩提 不可得 問 旣不可得 云何唯念菩提 答 只如菩提 假立名字 實不可得 亦無前後得者 爲不可得 故 卽無有念 只箇無念 是名眞念 菩提 無所念 無所念者 卽一切處無心 是無所念 只如上說 如許種無念者 皆是隨事 方便 假立名字 皆同一體 無二無別 但知一切處 無心 卽是 無念也 得無念時 自然解脫 問 云何行佛行 答 不行一切行 卽名佛行 亦名正行 亦名聖行 如前所說不 行有無憎愛等 是也 大律卷五 菩薩品云一切聖人 不行於衆 生行 衆生 不行如是聖行 問 云何是正見 答 見無所見 卽名正見 問 云何名見無所見 答 見一切色時 不起染著 不染著者 不起愛憎心 卽名見無 所見也 若得見無所見時 卽名佛眼 更無別眼 若見一切色時 起愛憎者 卽名有所見 有所見者 卽是衆生眼 更無別眼作衆 生眼 乃至 諸根 亦復如是 2. 이성공(二性空) "이미 지혜로써 작용을 삼는다고 말씀 하셨는데 어떤 것이 지혜입니까? "두 가지 성품이 공(空)한 줄 아는 것이 곧 해탈이며 두가 지 성품이 공하지 않은 줄 알면 해탈을 얻지 못하나니 이것 을 지혜라 하며 또 삿됨과 바름을 요달하였다고 하며 또 본 체와 작용을 안다고 하느니라. 두 가지 성품이 공했다고 하는 것은 있음과 없음, 선과 악, 사랑함과 미워함이 나지 아니한 것을 이름하여 두 가지 성품 이 공하다고 하느니라." 問 旣言以智爲用者 云何爲智 答 知二性空 卽是解脫 知二性不空 不得解脫 是名爲智 亦 名了邪正 亦名識體用 二性空 卽是體 知二性空 卽是解脫 更不生疑 卽名爲用 言二性空者 不生有無 善惡愛憎 名二 性空 10.돈오(頓悟)는 단바라밀(檀波蘿蜜)로 부터 "이 돈오의 문은 어디로부터 들어갑니까?" "단바라밀(檀波羅蜜)로부터 들어가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육바라밀이 보살의 행(行)이라고 말씀하셨는 데 무슨 까닭으로 단바라밀 하나만을 말씀하시며 어떻게 구 족하여야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미혹한 사람은 다섯바라밀이 모두 단바라밀로 말미암아 나는 것인줄 알지 못한 것이니 오직 단바라밀만을 수행하면 곧 육바라밀을 모두 구족하는 것이니라." "어떤 인연으로 단바라밀이라고 합니까?" "단(檀)이란 보시(布施)를 말하느니라." "어떤 물건을 보시하는 것입니까?" "두 가지 성품을 보시해 버리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두가지 성품입니까?" "선과 악의 성품을 보시해 버리는 것이며, 있음과 없음의 성품, 사랑함과 미워함의 성품,공과 공 아님의 성품,정과 정 아님의 성품과 깨끗함과 깨끗하지 아니함의 성품을 보시해 버려서 일체 모든 것을 전부 보시해 버리면 두가지 성품이 공함을 얻느니라. 만약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얻을 때에 또한 두 가지 성품 이 공하다는 생각을 짓지 아니하며 또 보시한다는 생각을 짓 지 아니함이 곧 진실로 보시바라밀을 실행하는 것이니 만 가 지 인연이 함께 끊어진다고 하느니라. 만 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진다 함은 곧 일체 법의 성품이 공한 것이니, 법의 성품 이 공하다 함은 곧 일체처에 무심함이니라. 만약 일체처에 무심함을 얻었을 때에는 한 모양(一相)도 얻 을 수 없으니, 왜냐하면 자성이 공한 까닭에 한 모양도 얻을 수 없느니라. 한 모양도 얻을 수 없다 함은 곧 실상이니 실상이란 여래 의 묘한 색신의 모양이니라. [금강경]에 이르기를 '일체의 모든 모양을 여의는 것이 곧 모든 부처님이라 한다' 고 하였느니라." "부처님은 육바라밀을 말씀하셨는데 지금 어떻게 하나를 말하며 능히 구족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바라건대 하나 가 여섯 가지 법을 구족하는 까닭을 말씀해 주십시요." [사익경]에 이르기를 '망명존이 범천에게 말하되 [만약 보살이 일체의 번뇌를 버리면 단바라밀이라고 하나 니 곧 보시요, 모든 법에 대해서 일어나는 바가 없음이 시라바라밀이라고 하나니 곧 지계요, 모든 법에 대하여 손상하는 바가 없음이 찬제바라밀이라 하나니 곧 인욕이요, 모든 법에 대해서 모양을 떠남이 비리야바라밀이라 하나니 곧 정진이요, 모든 법에 대해서 머무는 바가 없음이 선바라밀이라 하나 니 곧 선정이요, 모든 법에 대해서 희론이 없음이 반야바라밀이라 하니니 곧 지혜이니라. 이것을 이름하여 여섯 가지 법이라 한다]'고 하였느니라. 지금 다시 여섯가지 법에 이름을 붙이면 첫째는 버림과 둘 째는 일어나지 아니함과 세째는 손상하지 않음과 네째는 모 양을 떠남과 다섯째는 머물지 않음과 여섯째는 희론이 없음 과 다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여섯가지 법은 일에 따라 방 편으로 거짓 이름을 세움이요, 묘한 이치에 이르러서는 둘도 없고 다름도 없느니라. 다만 하나를 버릴줄 알면 일체를 버림이요, 하나가 일어나 지 않으면 곧 일체가 일어나지 않거늘 미혹한 사람은 알지 못하고 차이가 있다고 모두 말 하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여 섯가지 법의 숫자에 머물러서 오래도록 생사에 윤회하는 것 이니라. 너희들 도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말하나니, 다만 보시의 법 만을 닦으면 만법이 두루 원만해지거늘 하물며 다섯가지 법 이 어찌 구족하지 않겠는가." 問 此門 從何而入 答 從檀波羅密入 問 佛說六波羅密 是菩薩行 何故 獨說檀波羅密 云何具足 而得入也 答 迷人 不解五度皆因檀度生 但修檀度 卽六度悉皆具足 問 何因緣故 名爲檀度 答 檀者 名爲布施 問 布施何物 答 布施却二性 問 云何是二性 答 布施却善惡性 布施却有無性 愛憎性 空不空性 定不定 性 淨不淨性 一切 悉皆施却 卽得二性空 若得二性空時 亦 不得作二性空想 亦不得作念有施想 卽是眞行檀波羅密 名 萬緣 俱絶 萬緣 俱絶者 卽一切法性空 是也 法性空者 卽 一切處無心 是 若得一切處無心時 卽無有一相可得 何以故 爲自性 空故 無一相可得 無一相可得者 卽是實相 實相者 卽是如來妙色身相也 金剛經云 離一切諸相 則名諸佛 問 佛說六波羅密 今云何說一 卽能具足 願說一具六法之因 答 思益經 云 網明尊 謂梵天言 若菩薩 捨一切煩惱 名檀 波羅密 卽是布施 於諸法 無所起 名尸羅波羅密 卽是持戒 於諸法 無所傷 名□提波羅密 卽是忍辱 於諸法離相 名毘 離耶波羅密 卽是精進 於諸法無所住 名禪波羅密 卽是禪定 於諸法無戱論 名般若波羅密 卽是智慧 是名六法 今更名六 法 不異一捨 二無起 三無傷 四離相 五無住 六無戱論 如 是六法 隨事方便 假立名字 至於妙理 無二無別 但知一捨 卽一切捨 無起卽一切無起 迷途不契 悉謂有差 愚者 滯其 法數之中 卽長輪生死 告汝學人 但修檀之法 卽萬法 周圓 況於五法豈不具耶 11.삼학(三學)을 함께 쓰다. "삼학을 함께 쓴다 하니 어떤 것이 삼학이며 어떤 것이 함 께 쓰는 것입니까?" "삼학이란 계.정.혜니라." "어떤 것을 계.정.혜라 합니까?" "청정하여 물들지 아니함이 계요,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함 을 알아 경계를 대하여 고요함이 정이요, 마음이 움직이지 아 니함을 알 때에 움직이지 아니한다는 생각도 나지 아니하며 마음이 청정함을 알 때에 청정하다는 생각도 나지 아니하여 내지 선.악을 모두 능히 분별하되 그 가운데에 물들지 아니하 여 자재를 얻음을 혜라고 하느니라. 만약 계.정.혜의 본체가 모두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알 때에 곧 분별함이 없어서 곧 동일의 본체이니 이것이 삼학을 함께 쓴다고 하는 것이니라." 問 三學等用 何者是三學 云何是等用 答 三學者 戒定慧是也 問 云何是戒定慧 答 淸淨無染 是戒 知心不動 對境寂然 是定 知心不動時 不生不動想 知心淸淨時 不生淸淨想 乃至善惡 皆能分別 於中 無染 得自在者是名爲慧也 若知戒定慧體俱不可得時 卽無分別者 卽同一體 是名三學等用 12.무생심(無生心) "만약 마음이 청정함에 머물 때에는 청정함에 집착하는 것 이 아닙니까?" "청정함에 머뭄을 얻었을 때에 청정함에 머물러 있다는 생 각을 짓지 않는 것이 청정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라." "마음이 공에 머물 때에는 공에 집착한 것이 아닙니까?" "만약 공하다는 생각을 짓는다면 곧 공에 집착한 것이니 라." "만약 마음이 머뭄이 없는 곳에 머물 때에 머뭄이 없는 곳 에 집착한 것이 아닙니까?" "다만 공한 생각을 지으면 곧 집착할 곳이 없으니 네가 만 약 머물 바 없는 마음을 분명하고 밝게 알고저 할진댄 바로 좌선할 때에 다만 마음만 알고, 모든 사물을 생각하여 헤아리 지 말며 모든 선악을 생각하여 헤아리지 말라.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생각하여 헤아리지 아 니하면 과거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지니 곧 과거의 일이 없다 고 함이요, 미래의 일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으니 원하지도 아 니하고 구하지도 아니하면 미래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지니 곧 미래의 일이 없다고 함이요, 현재의 일은 이미 현재라 일 체의 일에 집착함이 없음을 알뿐이니, 집착함이 없다 함은 사 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이 곧 집착함이 없음 인지라 현재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서 곧 현재의 일이 없다 고 하느니라. 삼세를 거두어 모을 수 없음이 또한 삼세가 없 다고 말하느니라. 마음이 만약 일어날 때에 따라가지 아니하면 가는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 없어짐이요, 만약 마음이 머물 때에 또한 머뭄 에 따르지 아니하면 머무는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서 머무는 마음이 없음이니, 이것이 머무는 곳 없는 곳에 머문다고 하느 니라. 만약 밝고 밝게 스스로 알아 머뭄이 머뭄에 있을 때에는 다만 사물이 머물 뿐이요 또한 머무는 곳이 없으면 머무는 곳 없음도 없느니라. 만약 밝고 밝게 스스로 알아 마음이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 하면 곧 본래 마음[本心]을 밝고 밝게 본다고 하는 것이며, 또한 성품을 밝고 밝게 본다고 하느니라. 만약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하는 마음이란 곧 부처님 마음 [佛心]이며, 또한 해탈심이며, 또한 보리심이며, 또한 무생심 이며, 또한 색의 성품이 공함이라 이름하나니, 경에 이르기를 '무생법인을 증득했다'고 함이 이것이니라. 너희들이 만약 이와 같이 아직 체득하지 못하였을 때는 노 력하고 노력하여 부지런히 공력을 더하여 공부를 성취하면 스스로 알 수 있으니, 그러므로 안다고 하는 것은 일체처에 무심함이 곧 아는 것 이니라. 무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되어 참되지 않음이 없으니, 거짓됨이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인 것이며 참됨이란 사랑 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라.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 는 마음이 없으면 곧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니, 두 가지 성품 이 공함이란 자연해탈이니라." 問 若心住淨時 不是着淨否 答 得住淨時 不作住淨想 是不着淨 問 心住空時 不是着空否 答 若作空想 卽名着空 問 若心得住無住處時 不是着無住處否 答 但作空想 卽無有着處 汝若欲了了識無所住心時 正坐之 時 但知心 莫思量一切物 一切善惡 都莫思量 過去事 已過 去而莫思量 過去心 自絶 卽名無過去事 未來事未至 莫願 莫求 未來心 自絶 卽名無未來事 現在事 已現在 於一切事 但知無著 無著者 不起憎愛心 卽是無著 現在心 自絶 卽名 無現在事 三世不攝 亦名無三世也 心若起去時 卽莫隨去 去心 自絶 若住時 亦莫隨住 住心 自絶 卽無住心 卽是住 無住處也 若了了自知 住在住時 只物住 亦無住處 亦無無 住處也 若自了了知 心不住一切處 卽名了了見本心也 亦名 了了見性也 只箇不住一切處心者 卽是佛心 亦名解脫心 亦 名菩提心 亦名無生心 亦名色性空 經云證無生法忍是也 汝 若未得如是之時 努力努力 勤加用功 功成自會 所以會者 一切處無心 卽是會 言無心者 無假不眞也 假者 愛憎心 是 也 眞者 無愛憎心 是也 但無愛憎心 卽是二性空 二性空者 自然解脫也 13.상주(常住) "앉아서만 쓸 수 있는 것입니까, 다닐 때도 또한 쓸 수 있 는 것입니까?" "지금 공(功)을 쓴다고 말함은 단지 앉아 있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하는 짓는 바 움직이는 모든 때 가운데 항상 써서 사이가 끊어짐이 없음이 항상 머문다고 하느니라." 問 只坐爲用 行時 亦得爲用否 答 今言用功者 不獨言坐 乃至 行住坐臥所造運爲 一切時 中 常用無間 卽名常住也 14.오종법신(五種法身) [방광경(方廣經)]에 이르기를 '다섯가지 법신은 첫째는 실 상 법신이요, 둘째는 공덕법신이요, 셋째는 법성법신이요, 네 째는 응화법신이요, 다섯째는 허공법신이다'고 하였는데, 자기 의 몸에는 어떤 것이 이것입니까? "마음이 무너지지 아니함을 아는 것이 실상 법신이며, 마음 이 만상을 포함하는 것을 아는 것이 공덕법신이며, 마음이 무 심임을 아는 것이 법성법신이며, 근기따라 응하여 설법함이 응화법신이며, 마음이 형상이 없어 얻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 허공법신이니, 만약 이 뜻을 확실히 아는 이는 곧 증득할 것 이 없음을 아느니라. 얻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음이 곧 불법법신을 증득한 것이 요, 만약 증득함이 있고 얻음이 있음을 증득으로 삼는 이는 곧 삿된견해의 증상만인이며 외도라고 하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유마경]에 이르기를 '사리불이 천녀에게 묻되 그대는 얻은 바가 무엇이며 증한 바가 무엇이기에 말재주가 이와 같 으냐' 하고 물으니, 천녀가 대답하기를 '나는 얻음도 없고 증 함도 없어서 이와 같음을 얻었오. 만약 얻음이 있고 증함이 있으면 불법 가운데에 증상만인이 되는 것이오' 라고 하였느 니라. 問 方廣經云 五種法身 一實相法身 二功德法身 三法性法 身 四應化法身 五虛空法身 於自己身 何者是 答 知心不壞 是實相法身 知心含萬像 是功德法身 知心無 心 是法性法身 隨根應說 是應化法身 知心無形 不可得 是 虛空法身 若了此義者 卽知無證也 無得無證者 卽是證佛法 法身 若有證有得 以爲證者 卽邪見增上慢人也 名爲外道 何以故 維摩經云 舍利佛 問天女曰 汝何所得 何所證 辯乃 得如是 天女答曰 我無得無證 乃得如是 若有得有證 卽於 佛法中 爲增上慢人也 15.등각(等覺)과 묘각(妙覺) "경에 이르기를 '등각,묘각'이라하니, 무엇이 등각이며 무엇 이 묘각입니까? "색(色)에 즉하고 공(空)에 즉함이 등각이요, 두 가지 성품 이 공한(二性空) 까닭에 묘각이라 하며,또한 깨달음이 없음과 깨달음이 없음도 없음을 일컬어 묘각이라 하느니라." "등각과 묘각이 다릅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일에 따라 방편으로 거짓 두 이름을 세운 것으로서, 본체 는 하나요,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내지 일체법이 모두 그러하니라." 問 經云 等覺妙覺 云何是等覺 云何是妙覺 答 卽色卽空 名爲等覺 二性空故 名爲妙覺 又云 無覺無無 覺 名爲妙覺 問 等覺與妙覺 爲別 爲不別 答 爲隨事方便 假立二名 本體是一 無二無別 乃至一切法 皆然也 16.설법(說法) "[금강경]에 이르기를 '설할 법이 없음이 법을 설함이다'하 니 그 뜻이 무엇 입니까? "반야의 체는 필경 청정하여 한 물건도 얻을 수 없음이 설 할 법이 없다고 함이요, 반야의 공적한 본체 가운데에 항사의 묘용을 갖추어서 알지 못할 일이 없음이 법을 설한다고 함이 니, 그러므로 설할 법이 없음이 법을 설함이라고 하느니라." 問 金剛云 無法可說 是名說法 其意云何 答 般若體畢竟淸淨 無有一物可得 是名無法可說 卽於般若 空寂體中 具恒沙之用 卽無事不知是名說法 故云無法可說 是名說法 17.금강경의 경천(輕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경을 수지독송하여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게 되면 이 사람은 전세의 죄업으로 마땅히 악도에 떨어질 것이지만 금세의 사람들의 경멸과 천대를 받 음으로 해서 전세의 죄업이 곧 소멸하여 마침내 아뇩다라삼 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데, 그 뜻이 무엇 입니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대선지식을 아직 만나지 못하여 오직 악업만 짓고 청정한 본래 마음이 삼독의 무명에 덮여서 능히 나타나지 못하므로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는다고 말한 것이니라. 금세의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는 것은, 곧 오늘 발심하여 불도를 구함으로 무명이 다 없어지고 삼독 이 나지를 아니해서 곧 본래 마음이 명랑하고 다시 어지러운 생각이 없으며, 모든 악이 영원이 없어져 버리므로써 금세 사 람의 경멸과 천대를 받는다고 하느니라. 무명이 모두 없어져 서 어지러운 생각이 나지 아니하면 자연히 해탈한 것이므로 마땅히 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니, 곧 발심한 때를 금세라 하는 것이요, 격생이 아니니라." 問 若有善男子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 先 世罪業 應墮惡道 以今世人輕賤故 先世罪業 卽爲消滅 當 得何뇩多羅三 三菩提 其義云何 答 只如有人 未遇大善知識 唯造惡業 淸淨本心 被三毒無 明所覆 不能顯了故 云爲人輕賤也 以今世人輕賤者 卽是今 日 發心求佛道 爲無明 滅盡 三毒 不生 卽本心 明朗 更無 亂念 諸惡 永滅故 以今世人輕賤也 無明 滅盡 亂念 不生 自然解脫故 云當得菩提 卽發心時名爲今世 非隔生也 18. 여래(如來)의 오안(五眼) "또 여래의 다섯가지 눈이란 어떤 것입니까?" "색의 청정함을 보는 것이 육안이요, 색의 본체가 청정함을 보는 것이 천안이요, 모든 색의 경계와 내지 선악에 대해서 모두 미세하게 분별하여 물듦이 없고 그 가운데 자제함이 혜 안이요, 보아도 보는 바가 없음이 법안이요, 보는 것이 없고 보는 것이 없음도 없는 것이 불안이라고 하느니라." 又云 如來五眼者 何 答 見色淸淨 名爲肉眼 見體淸淨 名爲天眼 於諸色境乃至 善惡 悉能微細分別 無所染著 於中 自在名爲慧眼 見無所 見 名爲法眼 無見無無見 名爲佛眼 19. 대승(大乘)과 최상승(最上乘) "또 대승과 최상승의 뜻은 어떠합니까?" "대승이란 보살승이요, 최상승이란 불승이니라." "어떻게 닦아야 이 승을 얻습니까?" "보살승을 닦음이 대승이니 보살승을 증득하여 다시 관(觀) 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닦을 곳이 없음에 이르러 담연히 항상 고요하여 늘지도 아니하고 줄지도 아니함이 최상승이니 곧 이것이 불승이니라." 又云 大乘最上乘 其義云何 答 大乘者 是菩薩乘 最上乘者 是佛乘 又問 云何修而得此乘 答 修菩薩乘者 卽是大乘 證菩薩乘 更不起觀 至無修處 湛 然常寂 不增不減 名最上乘 卽是佛乘也 20. 정혜(定慧)를 함께 씀 "[열반경]에 이르기를 '선정은 많고 지혜가 적으면 무명을 떠나지 못하며 선정은 적고 지혜가 많으면 삿된 견해를 증장 하며 선정과 지혜를 함께 하는 까닭에 해탈이다'고 하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일체 선악에 대하여 모든 것을 분별함이 지혜요, 분별하는 곳에 애증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물드는 바에 따라가지 아니 함이 선정이니, 곧 선정과 지혜를 함께 쓰는 것이니라." 問 涅槃經云 定多慧少 不離無明 定少慧多 增長邪見 定慧 等故 卽名解脫 其義云何 答 對一切善惡 悉能分別 是慧 於所分別之處 不起愛憎 不 隨所染 是定 卽是定慧等用也 21. 경상(鏡像)과 정혜(定慧) "말이 없고 설함이 없음이 곧 선정이라 하니, 바로 말하고 설할 때도 선정이라 할 수 있습니까?" "지금 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말함과 말하지 않음을 논하지 않고 항상 선정인 것이니라. 왜냐하면 선정의 본성을 쓰기 때 문에 말하거나 분별할 때에 곧 말하거나 분별함도 선정이기 때문이니라. 만약 공(空)한 마음으로 색(色)을 볼 때에는 색을 볼 때도 또한 공이며, 만약 색을 보지 아니하고 말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을 때도 또한 공이며, 내지 보고 듣고 깨닫고 알 때에도 역시 이와 같느니라. 왜냐하면 자성이 공하기 때문에 곧 일체처에 있어서 모두 공한 것이니, 공이란 곧 집착이 없 음이며 집착이 없음이 곧 선정과 지혜를 함께 쓰는 것이니라. 보살이 항상 이와 같이 공 그대로[等空]의 법을 써서 구경에 이르는 까닭에 선정과 지혜가 함께 함을 곧 해탈이라고 하느 니라." "지금 다시 그대들을 위하여 비유로써 나타내 보여 그대들 로 하여금 분명하게 알아서 의심을 끊게 하리라. '비유컨대 밝은 거울이 모습을 비출 때에 그 밝음이 움직이 느냐?' '움직이지 않습니다.' '비추지 아니할 때도 또한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밝은 거울의 작용에는 밝게 비친다는 정(情)이 없 으므로 비출 때도 움직이지 않고 비추지 아니할 때도 움직 이지 않는 것이니라. 어째서 그러냐 하면 분별의 정(情)이 없 는 가운데에는 움직이는 것도 없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또, '햇빛이 세상을 비출 때 그 빛이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습니다.' '만약 비추지 않을 때도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빛이 분별의 정(情)이 없기 때문이니 정이 없음으 로써 빛이 비추므로 움직이지 아니하며 비추지 않을 때도 또 한 움직이지 아니 하느니라. 비춘다 함은 지혜요, 움직이지 아니한다 함은 선정이니 보살이 선정과 지혜를 함께한 법을 써서 삼먁삼보리를 얻는 까닭에 선정과 지혜를 함께 씀이 곧 해탈이라고 하느니라. 지금 정(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범 부의 정이 없음이요, 성인의 정이 없는 것이 아니니라" "어떤 것이 범부의 정이며 어떤 것이 성인의 정입니까?" "만약 두 가지 성품을 일으키면 곧 범부의 정이요, 두가지 성품이 공(空)하기 때문에 곧 성인의 정이니라." 又問 無言無說 卽名爲定 正言說之時 得名定否 答 今言定者 不論說與不說常定 何以故 爲用定性 言說分 別時 卽言說分別 亦定 若以空心 觀色時 卽觀色時 亦空 若不觀色不說不分別時 亦空 乃至見聞覺知 亦復如時 何以 故 爲自性空 卽於一切處悉空 空卽無著 無著 卽是等用 爲 菩薩 常用如是等空之法 得至究竟故 云定慧等者 卽名解脫 也 今更爲汝譬喩顯示 令汝惺惺得解斷疑 譬如明鑑照像之時 其明 動否 否也 不照時 亦動否 不也 何以故 爲明鑑用 無 情明照 所以照時 不動 不照 亦不動 何以故 爲無情之中 無有動者 亦無不動者 又如日光 照世之時 其光 動否 不也 若不照時 動否 不也 何以故 爲光無情故 用無情光照 所以 不動 不照亦不動 照者 是慧 不動者 是定 菩薩 用是定慧 等法 得三菩提故 云定慧等用 卽是解脫也 今言無情者 無 凡情 非無聖情也 問 云何是凡情 云何是聖情 答 若起二性 卽是凡情 二性空故 卽是聖情 22. 언어도단심행처멸(言語道斷心行處滅) "경에 이르기를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없 어진다'고 하니 그 뜻이 어떠합니까?" "말로써 뜻을 나타냄에 뜻을 얻으면 말이 끊어지니 뜻이 곧 공함이요, 공함이 곧 도인지라, 도는 곧 말이 끊어진 까닭 에 언어의 길이 끊어졌다고 하느니라. 마음 가는 곳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중도실제의 뜻을 얻 어서 다시 관(觀)을 일으키지 아니함을 말함이니, 관(觀)을 일 으키지 않으므로 곧 나는 것이 없음(無生)이니라. 나는 것이 없는 까닭에 곧 모든 색의 성품이 공한 것이니 색의 성품이 공한 까닭에 곧 만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짐이요, 만가지 인연 이 함께 끊어짐이 곧 마음가는 곳이 없어진 것이니라." 問 經云 言語道斷心行處滅 其義如何 答 以言顯義 得義言絶 義卽是空 空卽是道 道卽是絶言故 云言語道斷 心行處滅 謂得義實際更不起觀 不起觀故 卽是 無生 以無生故 卽一切色性空 色性空故 卽萬緣 俱絶 萬緣 具絶者 卽是心行處滅 23. 여여(如如) "여여란 어떤 것입니까?" "여여(如如)란 움직이지 아니한다는 뜻이니 마음이 진여인 까닭에 여여라고 하느니라. 과거 모든 부처님들도 이 여여행 을 행해서 성도하셧고 현재의 부처님도 이 여여행을 행해서 성도하시고 미래의 부처님도 이 여여행을 행해서 또한 성도 하실 것이니, 삼세에 닦아 증한 바의 도가 다름이 없으므로 여여라 함을 알지니라. [유마경]에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들 도 또한 같으며 미륵에 이르러도 또한 같으며 내지 일체 중 생에 이르러도 모두 같다. 왜냐하면 불성이란 끊어지지 아니 하고 있는 성품이기 때문이니라'고 하였느니라." 問 如如者 云何 答 如如 是不動義 心眞如故名如如也 是知過去諸佛 行此 行 亦得成道 現在佛 行此行 亦得成道 未來佛 行此行 亦 得成道 三世所修證道 無異故 名如如也 維摩經云 諸佛 亦 如也 至於彌勒 亦如也 乃至一切衆生 悉皆如也 何以故 爲 佛性 不斷有性故也 24. 즉색즉공(卽色卽空)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하며 범에 즉하고 성에 즉함이 돈오 입니까?" "그러니라." "어떤 것이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함이며 어떤 것이 범부에 즉하고 성인에 즉한 것입니까?" "마음에 물듦이 있음이 곧 색이요, 마음에 물듦이 없음이 곧 공이며, 마음에 물듦이 있음이 곧 범부요 마음에 물듦이 없음이 곧 성인이니라. 또한 진공묘유이므로 곧 색이요, 색을 얻을 수 없으므로 곧 공이니, 지금 공이라고 말한 것은 이 색 의 성품이 스스로 공함이요 색이 없어져서 공한 것은 아니니 라. 지금 색이라고 하는 것은 이 공의 성품이 스스로 색이요, 색이 능히 색인 것은 아니니라." 問 卽色卽空 卽凡卽聖 是頓悟否 答 是 問 云何是卽色卽空 云何是卽凡卽聖 答 心有染 卽色 心無染 卽空 心有染 卽凡 心無染 卽聖 又云 眞空妙有故 卽色 色不可得故 卽空 今言空者 是色性 自空 非色滅空 今言色者 是空性自色 非色能色也 25. 진(盡)과 무진(無盡) "경에 이르기를 '다함과 다함 없음의 법문'이란 무슨 뜻입 니까?"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까닭에 보고 들음이 나지 않음이 다 함[盡]이니 다함이란 모든 망루(妄漏)가 다함이며, 다함이 없 음은 남이 없는 본체 가운데 항하사의 묘용을 갖추고 있어서 일을 따라 응하여 나타나서 모두 다 구족하여, 본체 가운데에 손감이 없음을 다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다함과 다함 없음의 법문인 것이니라." "다함과 다함 없음이 하나입니까, 다릅니까?" "본체는 하나이나 말하면 다름이 있느니라." "본체가 이미 하나일진댄 어째서 다름을 말씀하십니까?" "하나라 함은 말의 본체[體]요, 말함은 본체의 작용이니 일 을 따라서 응용하는 까닭에 본체는 같으나 말함은 다르다고 하는 것이니라. 비유하면 천상의 한 해[日] 아래 여러가지 그릇들을 놓아 두고 물을 채우면 하나하나의 그릇 가운데 모두 해가 있어서, 모든 그릇 가운데의 해가 다 원만하여 하늘 위의 해와 아무 런 차별이 없는 까닭에 본체는 같다고 말하는 것이요, 그릇에 따라 이름을 세워서 곧 차별이 있으므로 다른 것이니라. 그러 므로 본체는 같으나 말하면 곧 다름이 있다고 하느니라. 그릇에 나타난 모든 해가 모두 원만하여 하늘의 본래 해와 또한 손감이 없는 까닭으로 다함이 없다고 하느니라." 問 經云 盡無盡法門如何 答 爲二性空故 見聞無生 是盡 盡者 諸漏盡 無盡者 於無 生體中 具恒沙妙用 隨事應現 悉皆具足 於本體中 亦無損 滅 是名無盡 卽是盡無盡法門也 問 盡與無盡 爲一 爲別 答 體是一 說卽有別 問 體旣是一 云何說別 答 一者 是說之體 說是體之用 爲隨事應用故 云體同說別 喩如天上一日下 置種種盆器盛水 一一器中 皆有於日 諸器 中日 悉皆圓滿 與天上日 亦無差別故 云體同 爲隨器立名 卽有差別 所以有別 故云體同 說卽有別 所現諸日 悉皆圓 滿 於上本日 亦無損滅故 云無盡也 26. 불생불멸(不生不滅) "경에 이르기를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하니 어떤 법이 나지 아니하며 어떤 법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입 니까?" "착하지 않음이 나지 않음이요, 착한 법은 없어지지 아니 하느니라." "어떤 것이 착함이며, 어떤 것이 착하지 않음입니까?" "착하지 않음이란 염루심(染漏心)이요, 착한 법이란 염루심 이 없음이니 다만 염루가 없으면 곧 착하지 않음이 나지 않 음이며, 염루가 없음을 얻었을 때에 곧 청정하고 둥글고 밝아 담연히 항상 고요해서 마침내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착한 법 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나지도 아니하 고 없어지지도 아니한 것이니라." 問 經云 不生不滅 何法不生 何法不滅 答 不善 不生 善法 不滅 問 何者善 何者不善 答 不善者 是染漏心 善法者 是無染漏心 但無染無漏 卽是 不善不生 得無染無漏時 卽淸淨圓明 湛然常寂 畢竟不遷 是名善法不滅也 此卽是不生不滅 27. 불계(佛戒)는 청정심(淸淨心) "[보살계]에 이르기를 '중생이 부처님 계를 받으면 곧 모든 부처님의 지위에 들어가는지라 지위가 대각과 같아서 참으로 모든 부처님의 아들이다'고 하시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부처님의 계란 청정한 마음이니 만약 어떤 사람이 발심하 여 청정행을 수행하여 받는 바가 없는 마음을 얻은 사람은 부처님의 계를 받았다고 하느니라.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다 청정하여 받음이 없는 행을 닦아 서 불도를 이룬 것이니, 지금 어떤 사람이 발심하여 받음이 없는 청정행을 닦는 사람은 곧 부처님과 더불어 공덕을 균등 하게 써서 다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 지위에 들 어간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렇게 깨달은 사람은 부처님과 더 불어 깨달음이 같으므로 지위가 대각과 같아서 참으로 모든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니라. 청정한 마음으로부터 지혜가 나는지라 지혜가 청정함을 이름하여 모든 부처님의 아들이라 고 하며 또한 이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니라." 問 菩薩戒云 衆生 受佛戒 卽入諸佛位 爲同大覺已 眞是諸 佛子 其義云何 答 佛戒者 淸淨心 是也 若有人 發心 修行淸淨行 得無所 受心者 名受佛戒也 過去諸佛 皆修淸淨無受行 得成佛道 今時 有人 發心修無受淸淨行者 卽與佛功德等用 無有異也 故云入諸佛位也 如是悟者 與佛悟同故 云位同大覺已 眞是 諸佛子 從淸淨心生智 智淸淨 名爲諸佛子 亦名此佛子 28. 불(佛)과 법(法)의 선후(先後) "부처님과 법에 있어서 부처님이 앞입니까, 법이 앞입니까? 만약 법이 앞이라고 하면 법은 어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이며, 만약 부처님이 앞이라고 하면 어떤 가르침을 이어 받아 서 도를 이룬 것입니까?" "부처님은 법보다 앞에 있기도 하고 법의 뒤에 있기도 하 느니라." "어찌하여 부처와 법에 앞뒤가 있읍니까?" "만약 적멸법에 의거하면 법이 앞이요 부처님이 뒤이며, 문 자법에 의거하면 부처님이 앞이요 법은 뒤이니라. 왜냐하면 일체 모든 부처님이 모두 적멸법에 의해서 성불을 했으므로 곧 법이 앞이요 부처님은 뒤이니, 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부 처님의 스승됨은 이른바 법이다'고 하였느니라. 성도하고 나 서 비로소 십이부경을 널리 설하여 중생을 인도하여 교화하 시니 중생이 부처님 법의 가르침을 받아서 수행하여 성불하 므로 곧 부처님이 앞이요 법은 뒤인 것이니라." 問 只是佛之與法 爲是佛在先 爲是法在先 若法在先 法是 何佛所說 若佛在先 承何敎而成道 答 佛 亦在法先 亦在法後 問 因何佛法先後 答 若據寂滅法 是法先佛後 若據文字法 是佛先法後 何以 故 一切諸佛 皆因寂滅法而得成佛 卽是法先佛後 經云 諸 佛所師 所謂法也 得成道已 然始廣說十二部經 引化衆生 衆生 承佛法敎 修行得成佛 卽是佛先法後也 29. 설통(說通)과 종통(宗通) "어떤 것이 설법은 통하고 종취는 통하지 못한 것입니까?" "말과 행동이 서로 틀림이 곧 설법은 통하고 종취는 통하 지 못한 것이니라." "어떤 것이 종취도 통하고 설법도 통한 것입니까?" "말과 행동이 차이가 없음이 곧 설법도 통하고 종취도 통 한 것이니라." 問 云何是說通宗不通 答 言行相違卽是說通宗不通 問 云何是宗通說亦通 答 言行無差 卽是說通宗亦通 30. 도(到)와 부도(不到) "경에 이르기를 '이르되 이르지 아니하고 이르지 않되 이른 법'이란 무엇입니까?" "말은 이르러도 행은 이르지 못함이 이르렀으나 이르지 못 함이요, 행은 이르러도 말은 이르지 못함이 이르지 않되 이르른 것이며, 행과 말이 함께 이르름이 이르고 이름이라 하느니라." 問 經云 到不到不到到之法云何 答 說到行不到 名爲到不到 行到說不到 名爲不到到 行說 俱到 名爲到到 31. 부진유위(不盡有爲)며 부주무위(不住無爲) "불법은 유위(有爲)에도 다하지 아니하고 무위(無爲)에도 머물지 아니한다 하니 어떤 것이 유위에도 다하지 아니하고 무위에도 머물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유위에도 다하지 아니한다 함은 처음 발심으로부터 드디 어 보리수 아래에서 등정각을 이루시고 마침내 쌍림에 이르 러 열반에 드실 때까지 그 가운데 일체법을 모두 다 버리지 않음이 곧 유위(有爲)에도 다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무위(無 爲)에도 머물지 아니한다 함은 비록 무념을 닦는다 할지라도 무념으로써 증함을 삼지 않으며, 비록 공을 닦으나 공으로써 증함을 삼지 않으며, 비록 보리.열반.무상.무작을 닦으나 무상. 무작으로써 증함을 삼지 않음이 곧 무위에도 머물지 아니하 는 것이니라." 問 佛法 不盡有爲 不住無爲 何者是不盡有爲 何者是不住 無爲 答 不盡有爲者 從初發心 至菩提樹下成等正覺 後至雙林入 般涅槃 於中 一切法 悉皆不捨卽是不盡有爲也 不住無爲者 雖修無念 不以無念 爲證 雖修空 不以空爲證 雖修菩提涅 槃無相無作 不以無相無作 爲證 卽是不住無爲也 32. 지옥유무(地獄有無) "지옥이 있습니까, 지옥이 없습니까?"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하느니라." "어째서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합니까?" "마음을 따라 짓는 바 일체 악업이 곧 지옥이 있음이요, 만약 마음이 물들지 아니하면 자성이 공한 까닭에 곧 지 옥이 없느니라." 問 爲有地獄 爲無地獄 答 亦有亦無 問 云何亦有亦無 答 爲隨心所造一切惡業 卽有地獄 若心無染 自性 空故 卽 無地獄 33. 중생(衆生)과 불성(佛性) "죄를 지은 중생도 불성이 있읍니까?" "또한 불성이 있느니라." "이미 불성이 있을진댄 바로 지옥에 들어갈 때에 불성도 함께 들어갑니까?" "함께 들어가지 않느니라." "바로 지옥에 들어갈 때에 불성은 다시 어느 곳에 있읍니 까?" "또한 함께 들어가느니라." "이미 함께 들어갈진댄 지옥에 들어갈 때 중생이 죄를 받 음에 불성도 또한 함께 죄를 받습니까?" "불성이 비록 중생을 따라 함께 지옥에 들어가지만 중생이 스스로 죄의 고통을 받는 것이요 불성은 원래 고통을 받지 않느니라." "이미 함께 지옥에 들어갔을진댄 무엇 때문에 지옥고를 받 지 아니합니까?" "중생이란 모양[相]이 있음이니 모양이 있는 것은 이루어 지고 무너짐이 있음이요, 불성이란 모양이 없음이니 모양이 없는 것은 곧 공한 성품이니라. 그러므로 진공의 성품은 무너 짐이 없는 것이니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허공에 땔 나무를 쌓으면 땔 나무는 스스로 무너지나 허공은 무너지지 않음과 같으니 허공은 불성에 비유하고 땔 나무는 중생에 비유한 것 이니, 그러므로 함께 들어가나 함께 받지 않는다고 하느니 라." 問 受罪衆生 有佛性否 答 亦有佛性 問 旣有佛性 正入地獄時 佛性 同入否 答 不同入 問 正入之時 佛性 復在何處 答 亦同入 問 旣同入 正入時衆生 受罪 佛性 亦同受罪否 答 佛性 雖隨中生同入 是衆生 自受罪苦 佛性 元來不受 問 旣同入 因何不受 答 衆生者 是有相 有相者 卽有成壞 佛性者 是無相 無相 者 卽是空性也 是故 眞空之性 無有壞者 喩如有人 於空 積薪 薪自受壞 空不受壞也 空喩佛性 薪喩衆生 故 云同入 而不同受也 34. 삼신사지(三身四智) "팔식을 굴려서 네 가지 지혜를 이루며 네 가지 지혜를 묶 어서 삼신(三身)을 이룬다 하니, 몇 개의 식이 한 지혜를 함 께 이루며, 몇 개의 식이 한 지혜를 홀로 이루는 것입니까?" "눈.귀.코.혀.몸의 이 다섯 식이 함께 성소작지를 이루고, 제 육식은 의식이니 홀로 묘관찰지를 이루고, 제칠심식은 홀로 평등성지를 이루며, 제팔함장식은 홀로 대원경지를 이루느니 라." "이 네 가지 지혜는 각각 다른 것입니까, 같은 것입니까?" "본체는 같으나 이름이 다르니라." "본체가 이미 같을진댄 어째서 이름이 다르며, 이미 일을 따라 이름을 세울진댄 바로 하나의 본체일 때 어떤 것이 대 원경지입니까?" "담연히 공적하여 둥글고 밝아 움직이지 아니함이 곧 대원 경지요, 능히 모든 육진에 대하여 사랑함과 미움을 일으키지 않음이 곧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니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 곧 평등성지요, 능히 모든 육근의 경계에 들어가 잘 분별하되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자재를 얻음이 곧 묘관 찰지요, 능히 모든 육근으로 하여금 일을 따라서 응용하여 모 두 정수(正受)에 들어가서 두 가지 모양이 없음이 곧 성소작 지니라." "네 가지 지혜[四智]를 묶어서 세 가지 몸[三身]을 이룬다 함은 몇 개의 지혜가 함께 한 몸을 이루며 몇 개의 지혜가 홀로 한 몸을 이룹니까?" "대원경지는 홀로 법신을 이루고, 평등성지는 홀로 보신을 이루며 묘관찰지와 성소작지는 함께 화신을 이루니, 이 세 가 지 몸도 또한 거짓으로 이름을 세워 분별하여 다만 알지 못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한 것이니라. 만약 이 이치를 확실 히 알면 또한 삼신의 응용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본체의 성품 은 모양이 없어서 머물음이 없는 근본을 좇아서 서니 또한 머물음이 없는 근본도 없느니라." 問 轉八識成四智 束四智成三身 幾箇識 共成一智 幾箇識 獨成一智 答 眼耳鼻舌身 此五識 共成成所作智 第六 是意 獨成妙觀 察智 第七心識 獨成平等性智 第八含藏識 獨成大圓鏡智 問 此四智爲別 爲同 答 體同名別 問 體旣同 云何名別 旣隨事立名 正一體之時 何者是大圓 鏡智 答 湛然空寂 圓明不動 卽大圓鏡智 能對諸塵 不起愛憎 卽 是二性空 二性空 卽平等性智 能入諸根境界 善能分別 不 起亂想而得自在 卽是妙觀察智 能令諸根 隨事應用 悉入正 受 無二相者卽是成所作智 問 束四智成三身者 幾箇智共成一身 幾箇智獨成一身 答 大圓鏡智 獨成法身 平等成智 獨成報身 妙觀察智與成 所作智 共成化身 此三身 亦假立名字分別 只令未解者看 若了此理 亦無三身應用 何以故 爲體性 無相 從無住本而 立 亦無無住本 35. 불진신(佛眞身) "어떤 것이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보는 것입니까?" "있음과 없음을 보지 아니하는 것이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보는 것이니라." "어째서 있음[有]과 없음[無]을 보지 않음이 부처님의 참 된 몸[眞身]을 보는 것입니까?" "있음[有]은 없음[無]으로 인해서 서고, 없음은 있음으로 인해서 나타나느니라. 본래 있음을 세우지 아니하면 없음도 또한 존재하지 아니하니 이미 없음이 존재하지 않는데 있음 을 어디서 얻을 수 있으리오. 있음과 없음이 서로 인해서 비 로소 있으니 이미 서로 인해서 있으니 모두가 생멸이니라. 다 만 이 두 견해를 떠나면 곧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보는 것이니 라." "다만 있음[有]과 없음[無]도 오히려 서로 건립하지 못하 거늘 부처님의 진신[眞身]이 다시 무엇을 좇아서 설 수 있읍 니까?" "물음이 있기 때문이니, 만약 묻지 않을 때엔 진신의 이름 도 서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비유컨대 밝은 거울이 만약 물 건의 모양을 대할 때는 모양이 나타나나 만약 모양을 대하지 않을 때는 마침내 모양을 볼 수 없음과 같으니라." 問 云何是見佛眞身 答 不見有無卽是見佛眞身 問 云何不見有無卽是見佛眞身 答 有因無立 無因有顯 本不立有 無亦不存 旣不存無 有從 何得 有之與無 相因始有 旣相因而有 悉是生滅也 但離此 二見 卽是見佛眞身 問 只如有無 尙不可交建立 眞身 復從何而立 答 爲有問故 若無問時 眞身之名 亦不可立 何以故 譬如明 鏡 若對物像時 卽現像 若不對像時 終不見像 36. 항상 부처님을 떠나지 아니함(常不離佛) "어떤 것이 항상 부처님을 떠나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마음에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고 경계를 대하여는 고요하 여 어느 때나 필경 공적하면 이것이 곧 항상 부처님을 떠나 지 아니함이니라." 問 云何是常不離佛 答 心無起滅 對境寂然 一切時中 畢竟空寂 卽是常不離佛 37. 무위법(無爲法) "어떤 것이 무위법(無爲法)입니까?" "유위법(有爲法)이니라." "지금 무위법을 물었거늘 어째서 유위라고 대답하십니까?" "있음[有]은 없음[無]으로 인해서 서고 없음은 있음으로 인해서 나타나느니라. 본래 있음을 세우지 아니하면 없음은 어디서 날 것인가? 만약 참된 무위(無爲)를 논할진댄 곧 유위 (有爲)도 취하지 아니하고 또한 무위도 취하지 아니함이 참된 무위법이니라. 왜냐하면 경에 이르기를 '만약 법의 모양을 취 하면 곧 아상과 인상에 집착하고 만약 법의 모양 아닌 것을 취하여도 곧 아상과 인상에 집착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마땅 히 법도 취하지 말고 법 아님도 취하지 말라'고 하시니 이것 이 곧 참된 법을 취함이니라. 만약 이 이치를 밝게 알면 곧 참된 해탈이며 둘 아닌 법문을 아는 것이니라." 問 何者是無爲法 答 有爲是 問 今問無爲法 因何答有爲是 答 有因無立 無因有顯 本不立有 無從何生 若論眞無爲者 卽不取有爲 亦不取無爲 是眞無爲法也 何以故 經云 若取 法相 卽著我人 若取非法相 卽著我人 是故不應取法 不應 取非法 卽是取眞法也 若了此理 卽眞解脫 卽會不以法問 38. 중도(中道) "어떤 것이 중도의 뜻입니까." "가[邊]의 뜻이니라." "지금 중도를 물었거늘 무엇 때문에 가[邊]의 뜻이라고 대 답하십니까?" "가[邊]는 가운데[中]로 말미암아 서고 가운데[中]는 가 [邊]로 말미암아 나느니라. 만약 본래 가[邊]가 없으면 가운 데는 무엇을 따라 있으리오. 지금 가운데라고 하는 것은 가로 말미암아 비로소 있는 것이므로 가운데와 가가 서로 인하여 서 있어서 모두가 항상함이 없음[無常]을 알지니 색.수.상.행. 식도 이와 같으니라." 問 何者是中道義 答 邊義是 問 今問中道 因何答邊義是 答 邊因中立 中因邊生 本若無邊 中從何有 今言中者 因邊 始有故 知中之與邊 相因以立 悉是無相 色受想行識 亦復 如是 39. 오음(五陰) "어떤 것을 오음(五陰)이라 합니까?" "색을 대하여 색에 물들어 색을 따라 남[生]을 받는 것을 색음(色陰)이라 하며, 팔풍(八風)을 받아들인 까닭으로 삿된 믿음을 즐겨 모아서 받아들임에 따라 남[生]을 받는 것을 수 음(受陰)이라 하며, 미혹한 마음이 생각을 취하여 생각을 따 라 남[生]을 받는 것을 상음(相陰)이라 하며, 모든 행을 결집 하여 행을 따라 남[生]을 받는 것을 행음(行陰)이라 하며, 평 등한 본체에 망령되이 분별을 일으키고 얽매어 붙어서 허망 한 의식이 남[生]을 받는 것을 식음(識陰)이라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오음이라고 일컫느니라." 問 何名五陰等 答 對色染色 隨色受生 名爲色陰 爲領納八風 好集邪信 卽 隨領受中生 名爲受陰 迷心取相 隨想受生 名爲想陰 結集 諸行 隨行受生 名爲行陰 於平等體 妄起分別繫著 虛識受 生 名爲識陰 故云五陰 40. 이십오유(二十五有) "경에 이르기를 '이십오유(二十五有)'라고 하니 어떤 것입니 까?" "뒤의 몸을 받는 것이 이십오유이니, 뒤의 몸[後有身]이란 곧 육도에 생을 받는 것이니라. 중생이 현세에 마음이 미혹하 여 기꺼이 모든 업을 맺어 뒤에 업을 따라 생(生)을 받는 까 닭에 뒤가 있다[後有]고 하느니라. 세상에 만약 어떤 사람이 구경해탈을 닦을 뜻을 품고 무생법인을 증득한 사람은 곧 삼 계를 영원히 떠나서 후유(後有)를 받지 않나니,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 사람은 곧 법신(法身)을 증득함이요 법신이란 곧 불신(佛身)이니라." "이십오유의 이름을 어떻게 분별합니까?" "본체는 하나이지만 씀에 따라 이름을 세워서 이십오유를 나타내기 때문이니, 이십오유는 십악과 십선과 오음이니라." "어떤 것이 십악.십선입니까?" "십악은 죽이는 것, 훔치는 것, 음행하는 것, 거짓말, 아첨 하는 말, 이간하는 말, 나쁜말 내지 탐냄, 성냄, 삿된 견해이 니 이것이 십악이요, 십선이란 다만 십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니라." 問 經云 二十五有 何者是 答 受後有身 是也 後有身者 卽六道受生也 爲衆生 現世心 迷 好結諸業 後卽隨業受生故 云後有也 世若有人 志修究 竟解脫 證無生法忍者 卽永離三界 不受後有 不受後有者 卽證法身 法身者 卽是佛身 問 二十五有名 云何分別 答 本體是一 爲隨用立名 顯二十五有 二十五有 十惡十善 五陰 是 問 云何是十惡十善 答 十惡 殺盜狀 妄言綺言兩舌惡口 乃至貪瞋邪見 此名十 惡 十善者 但不行十惡 卽是也 41. 무념(無念)과 돈오(頓悟) 1. 무념(無念) "위에서 무념을 말씀하셨는데 아직도 다 이해할 수 없읍니 다." "무념이란 일체처에 무심함이니 일체 경계가 없어서 나머 지 생각으로 구함이 없음이며, 모든 경계와 사물에 대하여 영 영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이 곧 무념이니라. 무념이란 참된 생각[眞念]을 이름함이니 만약 생각으로 생각을 삼는다면 곧 삿된 생각[邪念]이요 바른 생각[正念]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경에 이르기를 '만약 사람에게 육념(六念)을 가르치면 생각이 아님[非念]이다'고 하나니, 육념이 있으면 삿된 생각[邪念]이 요 육념이 없으면 곧 참된 생각[眞念]이라 하느니라. 경에 이르기를 '선남자야, 우리가 무념법(無念法) 가운데 머 물러서 이와 같은 금색의 삼십이상을 얻어 큰 광명을 놓아서 세계를 남김없이 비추나니, 이 불가사의한 공덕은 부처님이 설명하여도 오히려 다할 수 없는데 하물며 나머지 승(乘)들이 능히 알 수 있으리오' 하였느니라. 무념을 얻은 사람은 육근 (六根)이 물들지 아니하는 까닭으로 자연히 모든 부처님 지견 에 들어가나니, 이러한 법을 얻은 사람은 부처님 곳집이며 또 법의 곳집이라 하나니, 곧 능히 일체가 부처이며 일체가 법이니라. 왜냐하면 무념인 까닭이니, 경에 이르기를 '일체 모 든 부처님들이 모두 이 경으로부터 나오신다'고 하였느니라." "이미 무념이라고 하면서 부처님 지견에 들어간다고 하니 다시 무엇을 좇아서 세웁니까?" "무념을 좇아서 세우니 무슨 까닭인가? 경에 이르기를 '머 뭄이 없는 근본을 좇아서 일체법을 세운다'고 하였고 또 이르 기를 '비유컨대 밝은 거울과 같다'고 하였으니 거울 가운데 비록 모양이 없으나 능히 만 가지 모양이 나타남이니, 왜냐하 면 거울이 밝은 까닭에 능히 만 가지 모양이 나타나느니라. 배우는 사람의 마음이 물들지 아니하는 까닭에 망념이 나지 아니하고 아인심(我人心)이 없어져서 필경 청정하니 청정한 까닭으로 능히 한량없는 지견이 나느니라. 돈오란 금생을 떠 나지 않고 곧 해탈을 얻나니 무엇으로써 그것을 아는가? 비 유컨대 사자새끼가 처음 태어날 때도 사자인 것과 같으니 돈 오를 닦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돈오를 닦을 때에 곧 부 처님 지위에 들어가느니라. 마치 대나무가 봄에 순이 나서 그 봄을 여의지 않고 곧 어미 대나무와 같게 되어 함께 다름이 없는 것과 같음이니, 왜냐하면 마음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問 上說無念 猶未盡決 答 無念者 一切處 無心 是 無一切境界 無餘思求是 對諸 境色 永無起動 是卽無念 無念者 是名眞念也 若以念爲念 者 卽是邪念 非爲正念 何以故 經云 若敎人六念 名爲非念 有六念 名爲邪念 無六念者 卽眞念 經云 善男子 我等 住 於無念法中 得如是金色三十二相 放大光明 照無餘世界 不 可思議功德 佛說之 猶不盡 何況餘乘能知也 得無念者 六 根 無染故 自然得入諸佛知見 得如是者 卽名佛藏 亦名法 藏 卽能一切佛 一切法 何以故 爲無念故 經云 一切諸佛等 皆從此經出 問 旣稱無念 入佛知見 復從何立 答 從無念立 何以故 經云 從無住本 立一切法 又云喩如明 鑑 鑑中 雖無像而能現萬像 何以故 爲鑑明故 能現萬像 學 人 爲心無染故 妄念 不生 我人心 滅 畢竟淸淨 以淸淨故 能生無量知見 頓悟者 不離此生 卽得解脫 何以知之 譬如 師子兒 初生之時 卽眞獅子 修頓悟者 亦復如是 卽修之時 卽入佛位 如竹春生筍 不離於春 卽與母齊 等無有異 何以 故 爲心空故 2. 돈오(頓悟) "돈오를 닦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순식간에 망념을 없애버리고 영원히 아인심(我人心)을 끊어서 필경 공적하여 곧 부처님과 같게 되어 다름이 없는 까닭에 범부가 성인이라 고 하느니라. 돈오를 닦는 사람은 이 몸을 떠나지 아니하고 곧 삼계를 뛰어나나니, 경에 이르기를 '세간을 무너뜨리지 아 니하고 세간을 뛰어나며 번뇌를 버리지 아니하고 열반에 들 어간다'고 하였느니라. 돈오를 닦지 않는 사람은 마치 여우가 사자를 따라 좇아 다녀서 백천겁을 지나더라도 마침내 사자가 되지 못하는 것 과 같느니라." 修頓悟者 亦復如是 爲頓除妄念 永絶我人 畢竟空寂 卽與 佛齊 等無有異故 云卽凡卽聖也 修頓悟者 不離此身 卽超 三界 經云 不壞世間而超世間 不捨煩惱而入涅槃 不修頓悟 者 猶如野干 隨逐師子 經百千劫 終不得成師子 3. 진여(眞如)와 무심(無心) "진여의 성품은 실로 공한 것입니까, 실로 공하지 않는 것 입니까? 만약 공하지 않다고 말하면 곧 모양이 있는 것이요 만약 공하다고 말하면 곧 단멸이니, 일체 중생이 마땅히 무엇 을 의지해서 닦아야 해탈을 얻을 수 있읍니까?" "진여의 성품은 공하면서 또한 공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진여의 묘한 본체는 형상이 없어서 얻을 수 없으므로 또한 공하다고 하느니라. 그러나 공하여 모양이 없는 본체 가운데 에 항사묘용이 구족하여 곧 사물에 응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또한 공하지 않다고 하느니라. 경에 이르기를 '하나를 알면 천가지가 따라오고 하나를 미혹하면 만가지를 미혹한다'하니, 만약 사람이 하나를 지키면 만가지 일을 마치는 것이니 이것 이 오도(悟道)의 묘함이니라. 경에 이르기를 '삼라만상이 한 법의 도장 찍힌 바라' 하니 어떻게 해서 한 법 가운데에서 갖 가지 견해가 나오는 것인가? 이러한 공업(功業)은 행함으로 말미암아 근본이 되니 만약 마음을 항복받지 아니하고 문자를 의지해서 증득하려 하면 옳지 못함이라.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여서 피차가 함께 떨어 질 것이니 노력하고 노력하여 자세히 살필지니라. 다만 일이 닥쳐옴에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일체처에 무심함 이니, 이렇게 얻은 사람은 곧 열반에 들어 무생법인을 증득 하느니라. 이것을 불이법문이라 하며 또 다툼이 없다고 하며 일행삼매라고 하나니, 왜냐하면 필경 청정하여 아상과 인상이 없는 까닭이니라. 애증을 일으키지 않음이 두 가지 성품이 공 함이며 보는 바가 없음이니, 곧 이것이 진여의 얻음이 없는 변론이니라." 又問 眞如之性 爲實空 爲實不空 若言不空 卽是有相 若言 空者 卽是斷滅 一切衆生 當依何修而得解脫 答 眞如之性 亦空亦不空 何以故 眞如妙體 無形無相 不可 得也 是名亦空 然 於空無相體中 具足恒沙之用 卽無事不 應 是名亦不空 經云 解一卽千從 迷一卽萬惑 若人 守一 萬事畢 是悟道之妙也 經云 森羅及萬像 一法之所印 云何 一法中而生種種見 如此功業 由行爲本 若不降心 依文取證 無有是處 自�x�x他 彼此俱墜 努力努力 細細審之 只是事 來 不受 一切處 無心 得如是者 卽入涅槃 證無生法忍 亦 名不二法門 亦名無諍 亦名一行三昧 何以故 畢竟淸淨 無 我人故 不起愛憎 是二性空 是無所見 卽是眞如無得之辯 42. 중생자도(衆生自度) "이 논은 믿음이 없는 이에게는 전하지 말며 오직 견해가 같고 행함이 같은 이에게 전할 것이요, 마땅히 앞 사람이 참 으로 신심이 있어 감당하여 물러가지 않는 사람인가를 관찰 할 것이니, 이러한 사람을 위해 설명하고 보이어서 깨닫도록 해야 하느니라. 내가 이 논을 지은 것은 인연 있는 사람을 위 함이요 명리를 구하고자 함이 아니니라. 다만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 천가지 경 만가지 논은 중생이 미혹하기 때문에 마음과 행동이 한결같지 아니하여 삿됨을 따라 대응하여 설 명한 것이므로 곧 여러 차별이 있으나, 구경해탈의 이치를 논 하는 경우 일진댄 다만 일이 다가와도 받지 아니하고 일체처 에 무심하여 영영 고요함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필경에 청정 하여 자연해탈이니라. 너희들은 헛된 이름을 구하여 입으로는 진여를 말하되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서는 안되느니라. 곧 말 과 행동이 서로 어긋나서 스스로 속임이라 하나니, 마땅히 악 도에 떨어지느니라. 한 세상의 헛된 이름과 쾌락을 구하지 말 라. 모르는 사이에 억겁의 재앙을 받게 되는 것이니 힘쓰고 힘쓸지니라. 중생이 스스로 제도함이요 부처님이 능히 제도하 지 못하나니, 만약 부처님이 능히 중생을 제도할 때엔 과거 모든 부처님이 티끌 수와 같아서 일체 중생을 모두 제도하여 마쳤을 것이어늘, 무엇 때문에 우리들은 지금까지 생사에 유 랑하며 성불하지 못하였는가? 중생이 스스로 제도함이요 부 처님이 능히 제도하지 못함을 마땅히 알라. 노력하고 노력하 여 스스로 닦아서 다른 부처님의 힘을 의지하지 말지니, 경에 이르기를 '무릇 법을 구하는 자는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 라'고 하였느니라." 此論 不傳無信 唯傳同見同行 當觀前人 有誠信心 堪任不 退者 如是之人 乃可爲說 示之令悟 吾作此論 爲有緣人 非 求名利 只如諸佛所說千經萬論 只爲衆生 迷故 心行不同 隨邪應說 卽有差別 如論究竟解脫理者 只是事來不受 一切 處無心 永寂如空 畢竟淸淨 自然解脫 汝莫求虛名 口說眞 如 心似猿 卽言行 相違 名爲自�x 當墜惡道 莫求一世虛 名快樂 不覺長劫受殃 努力努力 衆生 自度 佛不能度 若佛 能度衆生時 過去諸佛 如微塵數 一切衆生 總應度盡 何故 我等 至今流浪生死 不得成佛 當知衆生 自度 佛不能度 努 力努力自修 莫倚他佛力 經云 夫求法者 不著佛求 43. 동처부동주(同處不同住) "내세에 있어서는 잡된 배움의 무리가 많을 것인데 어떻게 함께 살겠읍니까?" "다만 그 빛을 온화하게 할 뿐이요, 그 업은 같이하지 말지 니 장소는 같이하나 같이 살지는 아니 하느니라. 경에 이르기 를 '흐름을 따르나 성품은 항상하다'고 하였느니라. 다만 도를 배우는 사람은 스스로 일대사인연인 해탈의 일을 위할지니, 아울러 처음 배우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부처님 같이 공 경하고 배우며, 자기의 덕을 높이고 남의 능력을 질투하지 말 며, 자기의 행동을 살피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춰내지 아니 하면, 일체처에 있어서 방해되고 장애됨이 전혀 없어 자연히 쾌락한 것이니라. 거듭 게송을 설하여 말하리라. 인욕이 첫째 가는 도라 먼저 아인심을 없앨지니 일이 옴에 받는 바 없으면 참다운 보리의 몸이니라. 問 於來世中 多有雜學之徒 云何共住 答 但和其光 不同其業 同處不同住 經云 隨流而性常也 只 如學道者 自爲大事因緣解脫之事 具勿輕末學 敬學如佛 不 高己德 不疾彼能 自察於行 不擧他過 於一切處 悉無妨 自然快樂也 重說偈云 忍辱 第一道 先須除我人 事來 無所 受 卽眞菩提身 44. 일체처(一切處)에 무심(無心) "[금강경]에 이르기를 '보살이 아법(我法)이 없는 사람은 여래가 참다운 보살이라'고 말씀하시며, 또 '취하지도 아니하 고 버리지도 아니하여 영원히 생사를 끊어서 일체처에 무심 하면 곧 모든 부처님의 아들이다'고 하였느니라. [열반경]에 이르기를 '여래가 열반을 증득하여 영원히 생사를 끊었다'고 하였느니라. 게송으로 말하노라. 나는 지금 뜻이 매우 좋아서 남이 욕할 때도 괴로움이 없고 말없이 시비를 말하지 않나니 열반과 생사가 같은 길이로다. 내 집의 근본 종지를 사무쳐 알아 본래로 푸르고 검은 분별이 없나니 일체 망상의 분별은 세상 사람이 밝게 알지 못함임을 알지니라. 말세의 범부에게 이르노니 마음 가운데 우거진 풀을 없애 버려라. 내 지금 뜻이 크게 넓어서 말하지 않고 일 없어 마음이 편안하나니 종용하여 자재해탈이라 동서 어디를 가나 쉬워 어렵지 않도다. 종일토록 말 없이 적막하여 생각 생각에 이치를 향해 생각하노니 자연히 소요하여 도를 보아 생사와 결정코 상관치 않는도다. 내 지금 뜻이 몹시 기특하여 세상의 침해와 속임에 향하지 않음이라 영화는 모두 헛된 속임수이니 헤진 옷 거친 음식으로 굶주림을 채우는도다. 길에서 세상 사람을 만나 말하기를 게을리하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를 바보라 하네. 겉으로는 질린 듯 암둔해 보이나 마음 가운데는 밝기가 유리같아서 라후라의 밀행에 묵묵히 계합하나니 너희 범부들이 알 바 아니로다. 내 너희들이 참 해탈의 이치를 알지 못할까 두려워서 거듭 너희들에게 말해 보이노라. 金剛經云 菩薩 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又云 不取卽 不捨 永斷於生死 一切處 無心 卽名諸佛子 涅槃經云 如來 證涅槃 永斷於生死 偈曰 我今意況大好 他人罵時無惱 無 言不說是非 涅槃生死同道 識達自家本宗 猶來無有靑 一 切妄想分別 將知世人不了 寄言凡夫末代 除却心中藁草 我 今意況大寬 不語無事心安 從容自在解脫 東西去易不難 終 日無言寂寞 念念向理思看 自然逍遙見道 生死定不相干 我 今意況大奇 不向世上侵欺 榮華總是虛�x 弊衣序食充飢 道 逢世人懶語 世人咸說我癡 外現 暗鈍 心中明若瑠璃 默 契羅 密行 非汝凡夫所知 吾恐汝等 不會了眞解脫理 再示 汝等 45. 필경정(畢竟淨) "[유마경]에 이르기를 '정토를 얻고져 할진댄 마땅히 그 마 음을 깨끗이 하라'고 하시니 무엇이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 니까?" "필경 청정으로 깨끗함(淨)을 삼느니라." "어떤 것이 필경 청정으로 깨끗함을 삼는 것입니까?" "깨끗함도 없고 깨끗함이 없음도 없음이 곧 필경 깨끗함이 니라." "어떤 것이 깨끗함도 없고 깨끗함이 없음도 없는 것입니 까?" "일체처에 무심함이 깨끗함이니 깨끗함을 얻었을 때에 깨 끗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음이 곧 깨끗함이 없음이며, 깨끗함 이 없음을 얻었을 때에 또한 깨끗함이 없다는 생각도 하지 않음이 곧 깨끗함이 없음도 없는 것이니라." 問 維摩經云 欲得淨土 當淨其心 云何是淨心 答 以畢竟淨 爲淨 問 云何是畢竟淨 爲淨 答 無淨無無淨 卽是畢竟淨 問 云何是無淨無無淨 答 一切處無心 是淨 得淨之時 不得作淨想 卽名無淨也 得 無淨時 亦不得作無淨想 卽是無無淨也 46. 필경증(畢竟證) "도를 닦는 사람은 무엇으로 증함을 삼습니까?" "필경 증함으로 증함을 삼느니라." "어떤 것이 필경 증함입니까?" "증함이 없음과 증함이 없음도 없음이 필경 증함이라 하느 니라." "어떤 것이 증함이 없음이며 어떤 것이 증함이 없음도 없 는 것입니까?" "밖으로 색과 소리 등에 물들지 아니하고 안으로 망념의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하여 이렇게 얻은 것을 곧 증함이라고 함이니, 증함을 얻었을 때에 증득했다는 생각도 하지 않음이 곧 증함이 없음이며 증함이 없음을 얻었을 때에 또한 증함이 없다는 생각도 하지 아니함이 곧 증함이 없음도 없다고 하는 것이니라." 問 修道者 以何爲證 答 畢竟證 爲證 問 云何是畢竟證 答 無證無無證 是名畢竟證 問 云何是無證 云何是無無證 答 於外 不染色聲等 於內 不起妄念心 得如是者 卽名爲證 得證之時 不得作證想 卽名無證也 得此無證之時 亦不得作 無證想 卽名無無證也 47. 진해탈(眞解脫) "어떤 것이 해탈한 마음입니까?" "해탈한 마음도 없고 또한 해탈한 마음이 없음도 없음이 곧 참 해탈이니라. 경에 이르기를 '오히려 법도 마땅히 버려 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리오' 하였으니 법이란 있음 [有]이요 법 아님이란 없음[無]이니, 다만 있음과 없음[有無] 을 취하지 아니하면 곧 참 해탈이니라." 問 云何解脫心 答 無解脫心 亦無無解脫心 卽名眞解脫也 經云 法尙應捨 何況非法也 法者 是有 非法 是無也 但不取有無 卽眞解脫 48. 필경득(畢竟得) "어떻게 도를 얻습니까?" "필경에 얻음으로써 얻음을 삼느니라." "어떤 것이 필경의 얻음입니까?" "얻음도 없고 얻음이 없음도 없음을 필경의 얻음이라 하느 니라." 問 云何得道 答 以畢竟得 爲得 問 云何是畢竟得 答 無得無無得 是名畢竟得 49. 필경공(畢竟空) "어떤 것이 필경의 공함입니까?" "공함도 없고 공함이 없음도 없음을 곧 필경 공함이라고 하느니라." 問 云何是畢竟空 答 無空無無空 卽名畢竟空 50. 진여정(眞如定) "어떤 것이 진여의 선정입니까?" "선정도 없고 선정이 없음도 없음이 곧 진여의 선정이니, 경에 이르기를 '정한 법(定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 름할 것이 없으며 또한 여래가 설명할 정한 법이 없다.'고 하 였느니라. 또 경에 이르기를 '비록 공을 닦으나 공으로써 증 함을 삼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공한 생각을 짓지 않음이 곧 이것이며, 비록 선정을 닦으나 선정으로써 증함을 삼지 아니 하여 선정이라는 생각을 짓지 않음이 곧 이것이며, 비록 깨끗 함을 얻었으나 깨끗함으로써 증함을 삼지 아니하여 깨끗하다 는 생각도 짓지 않음이 곧 이것이니라. 만약 선정을 얻고 깨 끗함을 얻어서 일체처에 무심함을 얻었을 때에 이와 같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망상이니 곧 얽매이게 되어 해 탈이라고 할 수 없느니라. 만약 이와 같이 얻었을 때에 밝고 밝게 스스로 알아 자재를 얻되 이것을 가져 증함을 삼지 않 으며 또한 이와 같다는 생각도 하지 아니할 때에 해탈을 얻 느니라. 경에 이르기를 '정진심을 일으키면 이는 망념으로서 정진이 아니니라. 만약 능히 마음이 망령되지 않으면 정진이 끝이 없다'고 하였느니라." 問 云何是眞如定 答 無定無無定 卽名眞如定 經云 無有定法名阿뇩多羅三 三菩提 亦無定法如來可說 經云 雖修空 不以空爲證 不得 作空想 卽是也 雖修定 不以定爲證 不得作定想 卽是也 雖 得淨 不以淨爲證 不得作淨想 卽是也 若得定得淨 得一切 處無心之時 卽作得如是想者 皆是妄想 卽被繫縛 不名解脫 若得如是之時 了了自知 得自在 卽不得將此爲證 亦不得作 如是想時 得解脫 經云 若起精進心 是妄非精進也 若能心 不妄 精進無有涯 51. 중도(中道)는 일체처무심(一切處無心) "어떤 것이 중도입니까?" "중간도 없고 또한 이변(二邊)도 없음이 곧 중도니라." "어떤 것이 이변입니까?" "저 마음이 있고 이 마음이 있음이 이변이니라." "어떤 것을 저 마음, 이 마음이라고 합니까?" "밖으로 색과 소리에 얽매임을 저 마음이라 하며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이 마음이라 하느니라. 만약 밖으로 색 에 물들지 아니하면 곧 저 마음이 없음이요, 안으로 망념이 나지 아니하면 곧 이 마음이 없음이니 이것은 두변이 없는 것이니라. 마음이 이미 두변이 없으니 중간이 또한 어찌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음을 얻는 것을 곧 중도라 하는 것이니 참된 여래의 도이니라. 여래의 도란 곧 일체 깨친 사람의 해탈이 니, 경에 이르기를 '허공에 가운데와 가장자리가 없으니 모든 여래의 몸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하였느니라. 그리하여 일체 색이 공한 것은 곧 일체처에 무심함이요 일체처에 무심함은 곧 일체색의 성품이 공함이니, 두가지 뜻이 다르지 아니하여 이것을 또한 색이 공함이라 하며 또 색이 법이 없음이라 하 느니라. 너희가 만약 일체처에 무심함을 떠나서 보리.해탈과 열반.적멸과 선정.견성을 얻는다는 것은 옳지 않느니라. 일체 처에 무심이란 곧 보리.해탈과 열반.정멸과 선정 내지 육바라 밀을 닦음이니 모두 성품을 보는 곳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금강경]에 이르기를 '조그마한 법도 얻을 수 없음을 아뇩다 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느니라." 問 云何是中道 答 無中間亦無二邊 卽中道也 問 云何是二邊 答 爲有彼心 有此心 卽是二邊 問 云何名彼心此心 答 外縛色聲 名爲彼心 內起妄念 名爲此心 若於外 不染色 卽名無彼心 內不生妄念 卽名無此心 此非二邊也 心旣無二 邊 中亦何有哉 得如是者 卽名中道 眞如來道 如來道者 卽 一切覺人解脫也 經云 虛空 無中邊 諸佛身亦然 然 一切色 空者 卽一切處無心也 一切處無心者 卽一切色性空 二義無 別 亦名色空 亦名色無法也 汝若離一切處無心 得菩提解脫 涅槃寂滅 禪定見性者 非也 一切處無心者 卽修菩提解脫涅 槃寂滅 禪定乃至六度皆見性處 何以故 金剛經云 無有少法 可得 是名阿뇩多羅三 三菩提也 52. 일체처무심(一切處無心)이 해탈(解脫) "만약 일체 모든 행을 닦아서 구족하여 성취하면 수기를 얻을 수 있읍니까?" "얻을 수 없느니라." "만약 일체의 법을 닦지 아니하고서 성취하면 수기를 얻을 수 있읍니까?" "얻을 수 없느니라." "만약 이럴 때는 마땅히 무슨 법으로써 수기를 얻을 수 있 읍니까?" "행 있음을 쓰지도 않고 행 없음도 쓰지 않으면 곧 수기를 얻느니라. 왜냐하면 [유마경]에 이르기를 '모든 행의 성품과 모양이 모두 다 무상하다'고 하였으며 [열반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가섭에게 말씀하시되 <모든 행이 항상한지라 옳은 곳이 없다>'고 하셨느니라. 너희는 다만 일체처에 무심하면 곧 모든 행이 없으며 또한 행이 없음도 없어서 곧 이것을 수 기라 하느니라. 이른바 일체처에 무심이란 증애심이 없음이니 증애라고 말함은, 좋은 일을 보고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 지 아니함을 곧 사랑하는 마음이 없음이라 하고, 나쁜 일을 보고도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느니라. 사랑함이 없음이란 곧 물든 마음이 없음을 이름하나니 곧 색의 성품이 공함이요, 색의 성품이 공함이란 곧 만가지 인연이 다 끊어짐이요 만가지 인연이 다 끊어짐은 자연 해탈이니라. 너희들이 이것을 자세히 보아서 만약 뚜렷 이 밝게 알지 못할 때엔 모름지기 빨리 물을 것이요 헛되이 보내지 말지어다. 너희들이 만약 이 가르침을 의지해 닦아서 해탈하지 못한다면 내가 곧 종신토록 너희들을 위해 대지옥 고를 받을 것이며, 내가 만약 너희들을 속인 사람이면 내가 마땅히 나는 곳마다 사자나 호랑이나 이리의 밥이 될 것이다. 너희가 만약 이 가르침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부지런 히 닦지 아니하면 내 알 바 아니니라.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 면 만겁에 다시 돌이킬 수 없나니 노력하고 노력해서 합당히 알아야 할지니라." 問 若有修一切諸行 具足成就 得受記否 答 不得 問 若以一切法無修 得成就 得受記否 答 不得 問 若恁�쒌� 當以何法而得受記 答 不以有行 亦不以無行 卽得受記 何以故 維摩經云 諸行 性相 悉皆無常 涅槃經云 佛告迦葉 諸行 是常 無有是處 汝但一切處無心 卽無諸行 亦無無行 卽名受記 所言一切處 無心者 無憎愛心 是 言憎愛者 見好事 不起愛心 卽名無愛 心也 見惡事 亦不起憎心 卽名無憎心也 無愛者 卽名無染 心 卽是色性空也 色性空者 卽是萬緣俱絶 萬緣俱絶者 自 然解脫 汝細看之 若未惺惺了時 卽須早問 勿使空度 汝等 若依此敎修 不解脫者 吾卽終身爲汝受大地獄 吾若�x汝者 吾當所生處 爲師子虎狼所食 汝若不依敎 自不勤修 卽不知 也 一失人身 萬劫不復 努力努力 須合知爾 제3권 전심법요(傳心法要) 머리말 서천 28대로 계계상승(繼繼相承)한 법등(法燈)은 달마스님을 효시 (嚆矢)로하여 동토(東土)에서 그 빛을 밝히고, 장차 한 꼿이 다섯 잎 이 피어날[一花開五葉] 씨앗을 비로소 뿌리시니, 이것이 달마정전(達 磨正傳)의 원류(源流)입니다. 이 법은 6대로 면면히 전하여 6조 혜능 대사에 이르러 그 큰 꽃을 피우니, 아래로 남악(南嶽)스님과 청원(靑 原)스님의 양대맥을 이루고, 다시 오가칠종(五家七宗)이 벌어져서 천 하에 울창한 대선림(大禪林)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남악스님 아래 서 천하 사람을 답살(踏殺)한 한 망아지가 나왔으니 그 분이 마조 (馬祖)대사로서 백장(百丈)스님이 그 법을 잇고 다음으로 이 <전심 법요>의 설법자인 황벽(黃檗)선사가 나왔으며, 그 아래로는 조석(祖 席)의 영웅으로 칭송되는 임제(臨濟)선사가 출현하여 임제종의 종조 (宗祖)가 된 것입니다. 달마선종(達磨禪宗)이라고 하면 한 마음의 법[一心法]을 말한 것 이니, 이른바 '문자를 세우지 않고 교 밖에 따로이 전한 것[不立文字 敎外別傳]'이며,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 룬다[直指人心見性成佛]'고 하는 것입니다. <전심법요>는 그 내용에서 달마선종의 정통사상과 육조스님께서 말씀한 식심견성(識心見性)의 돈교법문(頓敎法門)을 가장 투철하고 명료하게 설파한, 종문(宗門)의 대표서라고 예로부터 일컬어온 어록 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심법요>라고 하면 <완릉록>을 포함하여 일컫는 데, 그 상부를 <황벽단제선사 전심법요> 하부를 <황벽단제선사 완 릉록>으로 나누어 부릅니다. 대사의 재속(在俗) 제자인 배휴(裴休 797-870)가 그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그가 강서(江西)의 종릉(鍾 陵)에 관찰사로 재임할 때인 회창(會昌) 2년(842)에 용흥사(龍興寺) 에서 대사께 문법하던 것을 필록(筆錄)하여 두었다가, 대사께서 입적 하고 난 다음 그 대강을 대사의 문인들에게 보내어 청법(聽法) 당시 의 장노(長老)들과 대중의 증명을 얻어서 세상에 유포시킨 것입니 다. 배휴가 서문을 쓴 해가 대중(大中) 11년(857)이므로, 대사께서 입적한 지 2-3년 뒤로 추정됩니다. <전심법요>는 배류 자신이 종릉과 완릉 두 곳에서 문법하던 것 을 직접 기술한 것이며, <완릉록>은 배류가 완릉의 개원사에서 문 법하던 기록을 기저(基底)로하여 뒤에 시자들 측에서 엮은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그것은 <전심법요>에서는 배휴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쓰고 있으나, <완릉록>에서는 "배상공이 운운..." 하면서 시종일관 제3인칭으로 기술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완릉록> 에서는 <전심법요>의 내용과 더러 중복된 부분이 있음을 보게 되는 데, 그 후반부 "대사는 본시 민현의 사람이다[師本是 中人]"로부터 는 옛 유통본에는 본래 없던 부분으로서 전반부보다 분량이 더 많으 며, 당 대중년간(848-859)에 또 다른 사람에 의하여 추가로 기술된 것으로 사료됩니다. 여기에서는 대사의 출생 및 출가 인연에 관해서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대사께서 초기에 천태(天台)에서 노니시 던 일과 귀종(歸宗) 염관(鹽官) 남전(南泉) 등의 선사들을 찾아 제방 을 역방(歷訪)하면서 문답하고 거량(擧揚)하던 대사의 기봉(機鋒)과 기연(機緣)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배휴가 홍주 개원사에서 벽화를 보고 거량하다가 개오(開悟)한 사유를 함께 기록하고 있습니 다. 이 후반부는 송나라 원풍(元 ) 8년(1085)에 편찬되었다가 명나라 만력(萬曆) 17년(1589)에 재편된 <사가어록(四家語錄)]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여기 번역에 사용한 원본은 명본(明本) <4가어록> 가운데 제4권<황벽단제선사전심법요> 및 제5권<황벽단제선사완릉록>을 모 본으로 삼아 번역하였습니다. 원풍 8년판의 <4가어록>에는 <완릉 록>의 전반부밖에 실려있지 않았으나, 명나라 때 재편하면서 <천성 광등록(天聖廣燈錄)] 제8권에서 그 후반부를 옮겨 증보(增補)한 것으 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4가어록>은 일명 <마조4가록>이라고도 일컫는 바, 곧 마조, 백 장, 황벽, 임제 등 조계정전(曹溪正傳)의 4대(代) 조사 스님의 어록을 함께 엮은 어록으로서 임제종황룡파(黃龍派)에서 자가(自家)의 종 지종통(宗旨宗統)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편찬-유포시킨 것이며 종문 으 가장 핵심적인 어록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광서(光緖) 9년(1883) 감로사(甘露社)에서 <법해 보벌(法海寶筏)> 가운데 <전심법요>와 <완릉록>을 포함시켜 간행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 유통본은 융희(隆熙) 원년(1907) 운문 사(雲門寺)에서, 그리고 융희 2년(1908) 범어사(梵魚寺)에서 간행된 <선문촬요(禪門撮要)> 상권에 <전심법요>와 <완릉록>이 실려 있 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완릉록>의 후반부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황벽스님의 법문들은 <조당집(祖堂集)> 권16, <경덕전등록(景德 傳燈錄)> 권9, <송고승전(宋高僧傳)> 권20, <천성광등록(天聖廣燈 錄)> 권8,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 권2,3, <4가어록(四家語錄)> 권4,5, <오등회원(五燈會元)> 권4, <지월록(指月錄)> 권9 등에 단편 적이고 부분적이면서 내용이 서로 다르게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명나라 때 증보 재편된 <4가어록>은 <전심법요>와 <완릉록>의 교 재로서는 가장 완벽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심법요>의 유 통본은 지금까지 체제와 내용에서 크게 변질됨이 없이 유행되어 왔 으나, 다만 결미(結尾)의 "어떻게 하여야 계급에 떨어지지 않겠습니 까?[如何得不落階級]" 이후의 한 단이 <4가어록>에서는 <완릉록> 의 결미로 옮겨 싣고 있는 점이 다릅니다. 다음으로 황벽스님과 배휴와의 관계 및 대중황제와의 인연에 대 해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황벽스님 말년의 교화 시기는 당 무종의 회창법란(會昌法難)이 자행되던 때(842-845)로서, 당시 장안 과 낙양에는 각각 4개 사찰만을, 각 주에는 1주에 1개 사찰만을 남 기고 모조리 폐사시켰으므로 모든 승니들은 자연히 산곡에 은거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런 관계 때문에 사실상 대사의 말년 의 행리(行履)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배휴는 다시 지방장관으로 재직하다가 선종(대중황제)이 즉위하고 나서 조정의 상공(相公) 벼슬에 올라 중앙행정을 담당하게 되었습니 다. 그는 <완릉록>에서 보인 바처럼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서 벽화를 보고 황벽스님에게 거량하던 중, 황벽스님이 "배휴야!"하고 부르자 배휴가 "예!"하고 대답하니 대사가 "어느 곳에 있는고?" 하 는 말 끝에 깨치고 이 기연으로 대사의 재속제자(在俗弟子)가 된 것 입니다. 그는 대사뿐만 아니라 위산 영우( 山靈祐)선사에도 귀의 하였으며, 화림 선각(華林善覺)과도 교분이 있었고, 규봉 종밀(圭峰 宗密)과는 도연(道緣)이 깊었습니다. 배휴가 종릉, 완릉 두 곳에서 대사를 모시고 조석으로 문법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그 문답 내용을 필록하여 둔 것을 대사의 입멸 후 광당사(廣唐寺)의 옛 법중 (法衆)의 증명을 얻어 세상에 유포시킨 것이 <점심법요>인 것입니 다. 이처럼 배휴라는 훌륭한 필록자를 얻음으로서 황벽스님의 법문 이 세상에 크게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중황제는 본시 당 헌종(憲宗)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영특하였 는데, 열 세 살 때 형 목종(穆宗)의 용상에 올라가 장난삼아 좌하의 신하들을 읍(揖)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뒷 날 동생의 아들인 무종(武宗)으로부터 빈척( 斥)을 당하여 사지(死地)에서 구 출되어 입산하고, 향엄지한(香嚴智閑) 선사 밑에서 사미가 되었다가 나중에 염관 제안(鹽官齊安)선사 회하에서 서기(書記)를 보았습니다. 당시 황벽스님은 수좌(首座)로 있었는데, 하루는 불전(佛殿)에 예배 하는 대사께 대중사미가 뒤에서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아니하 고..."하는 물음으로 거량하다가 대사로부터 뺨을 두 차례 얻어맞았 습니다. 뒷날 대중사미는 당나라 황제가 되었는데 그가 제 16대 선 종(宣宗)입니다. 선종은 앞날의 일을 생각하고 대사께 '추행사문(추 行沙門)'이란 호(號)를 내렸는데, 당시 상공으로 있던 배휴의 주청(奏 請)에 의하여 '단제선사(斷際禪師)'로 개호(改號)하였던 것입니다. 대 중황제는 전제(前帝)인 무종이 폐불(廢佛)을 한 탓으로 조정의 위신 이 실추된 것을 다시 일으키는 데 지력하였으며, 불교를 중흥시킨 공로가 컸습니다. <점심법요>는 구사하고 있는 언어들이 간명하고도 평이하며 격 외언구(格外言句)의 고준(高峻)한 말들을 사용치 않으면서도 선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선(禪)의 개론서로서의 성 격뿐만 아니라 조계정전의 정통 선사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긴요한 어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계의 원류에 다다 르기 위해서는 이 <전심법요>를 통한 황벽스님의 문정(門庭)을 통 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전심법요

차례 머리말229

제1편 전심법요(傳心法要)235

서문(序文)………………………………………………………………… 236

1.한 마음 깨치면 부처……………………………………………………239

2.무심(無心)이 도(道)이다 ………………………………………………241

3.근원이 청정한 마음 ……………………………………………………244

4.일체를 여읠 줄 아는 사람이 곧 부처 ………………………………248

5.허공이 곧 법신 …………………………………………………………249

6.마음을 잊어버림…………………………………………………………253

7.법(法)은 무생(無生) ……………………………………………………255

8.도(道)를 닦는다는 것……………………………………………………261

9.말에 떨어지다……………………………………………………………263

10.사문이란 무심을 얻은 사람 …………………………………………263 1

1.마음이 곧 부처…………………………………………………………266

12.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다[以心傳心]………………………………269

13.마음과 경계 ……………………………………………………………270

14.구함이 없음 ……………………………………………………………271 15.머문 바 없이 마음이 나면 곧 부처님의 행 ………………………271 16.육조(六祖)는 어째서 조사가 되었는가?……………………………275 제2편 완릉록(宛陵錄) ……………………………………………………279 1.도는 마음 깨치는 데 있다 ……………………………………………280 2.자기의 마음을 알자 ……………………………………………………280 3.기틀을 쉬고 견해를 잊음………………………………………………281 4.마음과 성품이 다르지 않다……………………………………………282 5.모양이 있는 것은 허망하다……………………………………………283 6.한 마음의 법 ……………………………………………………………286 7.모든 견해를 여읨이 무변신보살………………………………………287 8.한 법도 얻을 수 없다 …………………………………………………290 9.한 물건도 없다[無一物]…………………………………………………291 10.마음 밖에 다른 부처가 없다…………………………………………291 11.보리의 마음 ……………………………………………………………295 12.수은의 비유 ……………………………………………………………296 13.무연자비…………………………………………………………………297 14.정진이란? ………………………………………………………………298 15.무심한 행 ………………………………………………………………298 16.삼계(三界)를 벗어남……………………………………………………299 17.마음이 부처 ……………………………………………………………300 18.유행(遊行) 및 기연(機緣) ……………………………………………306 19.술찌꺼기 먹는 놈………………………………………………………312 20.배휴의 헌시 ……………………………………………………………314 21.여래의 청정선 …………………………………………………………315 22.양의 뿔 …………………………………………………………………324 23.여래의 심부름꾼 ………………………………………………………326 24.무분별지는 얻을 수 없다 ……………………………………………326 25.견성이란? ………………………………………………………………328 26.한 생각 일지 않으면 곧 보리 ………………………………………331 27.둘 아닌 법문[不二法門]………………………………………………333 28.한 마음의 법 가운데서 방편으로 장엄하다 ………………………334 29.인욕선인…………………………………………………………………335 30.한 법도 얻을 수 없음이 곧 수기……………………………………337 31.법신은 얻을 수 없다 …………………………………………………338 32.물을 마셔보아야 물맛을 안다 ………………………………………338 33.참된 사리(舍利)는 볼 수 없다………………………………………339 34.일체처에 마음이 나지 않음 …………………………………………340 35.조계문하생(曹溪門下生) ………………………………………………341 36.계급에 떨어지지 않으려면……………………………………………344 서문(序文) 당나라 하동 배휴는 모으고 아울러 서문을 쓰노라. 대선사가 계셨으니 법휘는 희운이시다. 홍주 고안현 황벽산 축봉 아래 머무시니, 조계 육조의 적손이요 백장의 사법 제자이며 서당의 법질이다. 홀로 최상승의 패를 차고 문자의 인장을 여의셨으며 오로지 한 마음만을 전하고 다시 다른 법이 없으셨으니, 마음의 바탕이 또한 비었는지라 만 가지 인연이 함께 고요하여 마치 큰 해바퀴가 허공 가운데 떠올라서 광명이 밝게 비추어 깨끗하기가 가느다란 먼지 하 나도 없느 것과 같으셨다. 이를 증득한 이는 새롭고 오램이 없고 얕고 깊음이 없으며, 이를 설하는 이는 뜻으로 앎을 세우지 않고 종주(宗主)를 내세우지 않으 며 문호를 열어젖히지 않은 채, 당장에 바로 이것이라 생각을 움직 이면 곧 어긋아는 것이다. 이러한 다음에라야 본래의 부처가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그 말씀 이 간명하고 그 이치가 곧으시며 그 도는 준엄하고 그 행이 고곡하 시어, 사방의 학자들이 산을 바라보고 달려와 모이고 그 모습을 쳐 다보고 깨치니, 왕래하는 대중의 무리가 항상 일천명이 넘었다. 내가 회창 2년 종릉에 관찰사로재임하면서 산중으로부터 스님 을 고을로 모셔 용흥사에 계시도록 하고 아침 저녁으로 도를 물었으 며, 대중 2년 완릉에 관찰사로 재임할 때에 다시 가서 예로써 맞 이하여 관사에 모시고 개원사에 안거하도록하여 아침 저녁으로 법 을 받아 물러나와서 기록하였는데, 열 가운데 한둘밖에는 얻지 못 하엿다. 이를 마음의 인장[心印]으로 삼아 차고 다니면서 감히 드러내어 발표하지 못하다가, 이제 신령스런 경지에 드신 그 정묘한 뜻이 미 래에 전하여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내오놓으니, 문하생인 태주.법건 스님들에게 주어서 옛산의 광당사로 돌아가 장로들과 청법 대중에게 지난 날 몸소 듣던 바와 같은지 다른지를 묻게 하였 다. 때는 당나라 대중 11년 시월 초여드렛날에 쓰노라. 唐河東裵休集幷序 有大禪師 法諱 希運 住洪州高安縣黃檗山鷲峰下 乃曹溪六祖 之嫡孫 百丈之子西堂之姪 獨佩最上乘離文字之印 唯傳一心 更無別法 心體亦空 萬緣 俱寂 如大日輪 昇虛空中 光明 照耀 淨無纖埃 證之者 無新舊無淺深 說之者 不立義解 不立宗主 不開戶유 直下便是 動念卽乖 然後 爲本佛故 其言 簡 其理直 其道峻 其行 孤 四方學徒 望山而趨 覩相而悟 住來海衆 常千 餘人 予會昌二年 廉于鍾陵 自山迎至州 게龍興寺 旦夕問道 大中二年 廉于宛陵 復去禮迎至所部 安居開元寺 旦夕受法 退 而紀之 十得一二 佩爲心印 不敢發揚 今恐入神精義 不聞於未 來 遂出之 授門下僧太舟法建 歸舊山之廣唐寺 問長老法衆 與 往日常所親聞 同異何如也 時唐大中十一年十月初八日序 1. 한마음 깨치면 부처 황벽(黃檗: ?-850) 스님이 배휴(裵休:797-870)에게 말씀하셨 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새은 한마음일 뿐 거기에 다른 어 떤 법도 없다. 이마음은 본래로부터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 으며, 푸르거나 누렇지도 않다. 정해진 틀이나 모양도 없으며,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고, 새롭거나 낡음을 따질 수도 없 다. 또한 길거나 짧지도 않고, 크거나 작자도 않다. 그것은 모 든 한계와 분량, 개념과 언어, 자취와 상대성을 뛰어 넘어 바 로 그몸 그대로 일 뿐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곧 어긋나 버린다. 이것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으며 재어볼 수도 없다. 이 한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다. 중생은 다만 모양에 집착하 여 밖에서 구하므로, 구하면 구할수록 점점 더 잃는 것이다. 부처에게 부처를 찾게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붙잡는다면, 겁 (劫)이 지나고 몸이 다하더라도 바라는 것은 얻을 수 없는 것 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마음을 쉬고 생각을 잊어 버리면 부 처가 저절로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다. 그러므로중생이라 해서 마음이 줄지 않고, 부처라 해서 더 늘지도 않는다. 또한 6도만행과 항하사 같은 공덕이 본래 그자체에 갖추어져 있어 서, 닦아서 보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연을 만나면 곧 베 풀고, 인연이 그치면 그대로 고요하나니, 만일 이것이 부처임 을 결정코 믿질 않고 겉모습에 집착하여 수행하려 하고, 그것 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면 그 모두가 망상일 뿐 도와는 서로 어긋나게 된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다시 다른 부처가 없으며, 또한 다른 어떤 마음도 없다. 이 마음은 허공같이 밝고 깨끗하여 어떤 모습도 하고 있지않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 이면 법의 몸[法體]과 어긋나는 동시에 모양에 집착하게 된 다. 비롯없는 옛날로부터 모양에 집착한 부처란 없다. 또한 육도만행을 닦아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곧 차제(次第)* 를 두는 것이니, 차제있는 부처란 본래로 없다. 한마음 깨치면 다시 더 작은 법도 얻을것이 없으니, 이것이 야말로 참된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은 한 마음으로 다름없음 이 허공과 같아서, 그것에는 잡됨도 무너짐도 없고, 온누리를 비추는 햇살과도 같다. 해가 떠올라 온 천하가 두루 밝아질 때라도 허공은 한번도 밝은 적이 없으며, 해가 져서 어둠이 온천하를 덮을지라도 허공은 어두웠던 적이없다. 이렇게 밝고 어두운 경계가 서로 번갈아 바뀐다 해도 허공의 성품은 툭 트이어 변하지 않는 것이니,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꼭 이와같 다. 만약 부처를 관(觀)하면서 깨끗하고 밝으며 속박을 벗어 났으리라는 생각을 떠올린다든가, 중생은 때묻고 어두우며 생 사의 고통이 있으리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한다고 해보자. 이 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수많은 세월이 지나더라도 깨닫지 못 할 것인데, 이는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것이다. 오직 이 한 마음일 뿐, 거기에 티끌만큼의 어떤 법도 있을 수 없으 니, 이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다. 그런데 지금 도를 배우는 이들은 이 마음 바탕을 깨닫지 모하고 문득 마음에서 마음을 내고 밖에서 부처를 구하면 모양에 집착하여 수행을 하고 있 으니, 모두가 악법이지 깨닫는 도가 아니다." 師謂休曰 諸佛與一切衆生 唯是一心 更無別法 此心 無始 已來 不曾生不曾滅 不靑不黃 無形無相 不屬有無 不計新 舊 非長非短 非大非小 超過一切限量名言 跡對待 當體便 是 動念卽乖 猶如虛空 無有邊際 不可測度 唯此一心 卽是 佛 佛與衆生 更無別異 但是衆生 着相外求 求之轉失 使佛覓佛 將心捉心 窮劫盡形 終不能得 不知息念忘慮 佛 自現前 此心 卽是佛 佛卽是衆生 爲衆生時 此心 不減 爲 諸佛時 此心 不添 乃至六度萬行 河沙功德 本自具足 不假 修添 遇緣卽施 緣息 卽寂 若不決定信此是佛 而欲着相修 行 以求功用 皆是妄想 與道相乖 此心 卽是佛 更無別佛 亦無別心 此心明淨 猶如虛空 無一點相貌 擧心動念 卽乖 法體 卽爲着相 無始已來 無着相佛 修六度萬行 欲求成佛 卽是次第 無始已來 無次第佛 但悟一心 更無少法可得 此 卽眞佛 佛與衆生 一心無異 猶如虛空 無雜無壞 如大日輪 照四天下 日昇之時 明 天下 虛空 不曾明 日沒之時 暗 天下 虛空 不曾暗 明暗之境 自相준奪 虛空之性 廓然不變 佛及衆生 心亦如此 若觀佛 作淸淨光明解脫之相 觀衆生 作垢濁暗昧生死之相 作此解者 歷河沙劫 終不得菩提 爲着相故 唯此一心 更無 微塵許法可得 卽心是佛 如今學道人 不悟此心體 便於心上 生心 向外求佛 着相修行 皆是惡法 非菩提道 2. 무심(無心)이 도(道)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 무심도인 한 살에 게 공양 올리 것만 못하다. 그것은 무심한 사람에게는 일체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진여 그대로인(如如) 몸이 안으로는 목석같아서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 같아 서 어디에도 막히거나 걸리지 않으며, 주관 객관의 나뉨은 물 론 일정한 방위와 처소도 없다. 후학들이 감히 법에 들어오지 못하는 까닭은 공에 떨어져 닿아 쉴곳이 없을까 두려워해서 인데, 이런 태도는 막상 벼랑을 보고는 물러나서 거기다가 널 리 지견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견을 구하는 자는 쇠털 처럼 많아도 정작 도를 깨친 이는 뿔과 같이 드물 것이다. 문수보살은 이치(理)에, 보현보살은(行)에 해당한다. 이치란 진공(眞空)으로서 걸림없는 도리이고, 행실이란 형식을 벗어 난 끝없는 실천을 말한다.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세지보살은 지혜를 상징한다. 유마(유마)는 깨끗한 이름[정명]이란 뜻인 데, 깨꿋하다는 것은 성품을[성]을 두고하는 말이고, 이름은 모습의 측면에서 한 말이다.성품이 모양과 다르지 않으므로, 그를 정명거사(淨名居士)라 한것이다. 대 보살들로 상징된 위 의 곳들은 누구나가 가진 성품으로, 한마음을 여의지 않으니 깨치면 곧 그대로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도를 배우는 사람들 은 자기 마음에서 깨달으려 하지 않고 마음 밖의 경계인 모 양에 집착하여 오히려 도를 등지고 있다. 간지스강의 모래란 것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 모래는 모든 불보살과 제 석, 범천 및 하늘 무리들이 자기를 밟고 지나간다 해도 기뻐 하지 않고, 소나 양.벌레.개미 등이 자기를 밟고 지난다 해도 성내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간지스강의 모래는 보 배나 향기를 탐하지도 않으며, 똥.오줌 냄새나는 더러운 것도 싫어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이 곧 무심한 마음으로서. 모든 모양을 떠난 것이다. 중생과 부처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이렇 게 무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그 당장 무심한 상태가 될 수 없다면, 그 사람 은 여러 겁 동안 수행해도 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것은 성문.연각.보살의 단계적인 공부에 얽매여 해탈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증득하는 데는 더디고 빠른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법문을 듣는 즉시 한 생각에 무심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10신(十信).10주(十住).10행(十行).10회향(十 廻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심을 얻기도 한다. 그러므로 더 디거나 빠르거나 무심을 얻으면 그만이지 거기에 더 닦고 증 득할 것이 없으며, 참으로 얻었다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진실 하여 허망하지 않는 것이니 당장 한 생각에 깨친 것과 10지 를 거쳐 깨친 것이 효용에 있어서는 꼭 마찬가지여서 다시 더 깊고 얕음의 차이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긴 세월 동 안 헛되이 괴로움을 받을 뿐이다. 선악(善惡)을 짓는 것은 모두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인데 모 양에 집착하여 선악을 짓게 되면. 허망하게 윤회의 수고로움 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한마디 말에 본래의 법을 문득 스스로 깨닫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 법 그대로가 마음 이어서 마음 밖에는 아무 법도 없으며, 이 마음 그대로가 법 이어서 법 밖에는 어떠한 마음도 없다. 그런데 마음 그 자체 는 또한 마음이라 할 것도, 무심이라 할 것도 없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없앤다면 마음이 도리어 있게 된다. 다만 묵묵 히 계합(契合)할 따름이다. 모든 사유와 이론이 끊어졌으므로 말하기를 '언어의길이 끊기고 마음 가는 곳이 없어졌다'고 하 였다. 이 마음이 본래 청정한 부처인데 사람마다 모두 그것을 지녔으며 꿈틀거리는 벌레까지도 불보살과 한 몸으로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망상 분별 때문에 갖가지 업과를 지을 뿐이 다. 供養十方諸佛 不如供養一箇無心道人 何故 無心者 無一切 心也 如如之體 內如木石 不動不搖 外如虛空 不塞不碍 無 能所無方所 無相貌無得失 趨者 不敢入此法 恐落空無棲泊 處 故 望崖而退 例皆廣求知見 所以 求知見者 如毛 悟道 者 如角 文殊 當理 普賢 當行 理者 眞空無 之理 行者 離相無盡 之行 觀音 當大慈 勢至 當大智 維摩者 淨名也 淨者 性也 名者 相也 性相不異故 號淨名 諸大菩薩所表者 人皆有之 不離一心 悟之卽是 今學道人 不向自心中悟 乃於心外 着 相取境 皆與道 背 恒河沙者 佛說是沙 諸佛菩薩 釋梵諸天 步履而過 沙亦不喜 牛羊筮蟻 踐踏而行 沙亦不怒 珍寶馨 香 沙亦不貪 糞尿臭穢 沙亦不惡 此心 卽無心之心 離一切 相 衆生諸佛 更無差別 但能無心 便是究竟 學道人 若不直下無心 累劫修行 終不成道 被三乘功行拘繫 不得解脫 然 證此心 有遲疾 有聞法 一念 便得無心者 有 至十信十住十行十廻向 乃得無心者 有至十地 乃得無心者 長短得無心 乃住 更無可修可證 實無所得 眞實不虛 一念 而得 與十地而得者 功用恰齊 更無深淺 祈是歷劫 枉受辛 勤耳 造惡造善 皆是着相 着相造惡 枉受輪廻 着相造善 枉 受勞苦 摠不如言下 便自認取本法 此法 卽心 心外無法 此 心 卽法 法外無心 心自無心 亦無無心者 將心無心 心劫成 有 默契而已 絶諸思議故 曰 言語道斷 心行處滅 此心 是 本源淸淨佛 人皆有之 蠢動含靈 與諸佛菩薩 一體不異 祈 爲妄想分別 造種種業果 3. 근원이 청정한 마음 본래 부처 자리에는 실로 그 어떤 것도 없다. 툭 트이고 고 요하여 밝고 오묘하며 안락할 따름이다. 스스로 깊이 깨달으 면 당장 그 자리이므로 원만구족하여 다시 모자람이 없다. 설 사 3아승기겁을 정진 수행하여 모든 지위를 거치더라도 한 생각 증득하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원래 자기 부처를 깨달을 뿐, 궁극의 경지에 있어서는 어떠한 것도 거기에 더 보탤 것 이 없다. 깨닫고 난 다음 지난 세월의 오랜 수행을 돌이켜 보 면 모두 꿈속의 허망한 짓일 뿐이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내 가 아뇩다라삼막삼보리에 있어서 실로 얻었다 할 것이 없느 니라. 만약 얻은 바가 있었다면, 연등부처님께서는 나에게 수 기하시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셨다. 도 말씀하시기를, '이 법 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것을 깨달음이라 한다'고 하셨다. 본래 청정한 이 마음은 중생의 세계와 부처님의 세 계, 산과 물, 모양있는 것과 없는 것 및 온 시방법계가 다 함 께 평등하여 너다 나다 하는 생각이 없다. 이 본래 근원이 청 정한 마음은 항상 두렷이 밝아 두루 비추고 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見 聞覺知]으로 마음을 삼고, 그것에 덮이어서 끝내는 정교하고 밝은 본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장에라도 무심하기 만 하면, 본 마음자리가 스스로 나타나서 밝은 햇살이 공중에 떠오르듯 시방법계를 두루 비추어 장애가 없게 된다. 그러므 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일거일동을 마음이라고 오인하는 것이다. 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텅 비워 버리면 마음 길이 끊기어서 어느 곳에라도 들어갈 틈이 없느니라.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곳에서 본래 마 음을 인식할지라도, 본래 마음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데에 도 속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떠나 있지도 않느니 라. 그러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가운데 다만 견해를 일 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이지 말아야 하며, 그렇다고 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떠나 마음이나 법을 찾아서도 안되며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버리고 법을 취해서도 안된다. 그리하면 즉(卽)하지도 않고 여의지도[離] 않으며, 머물지도 집착하지도 않으며, 종횡으로 자재하여 어느 곳이든지 도량 (道場)아님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 법을 전한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 밖에 따로 깨닫고 취할 만한 법이 있다고 여긴 다. 그리하여 마음을 가지고 법을 찾으면서, 마음이 곧 법이 고 법이 곧 마음인 줄 알지 못한다.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 을 찾지 말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는 천만 겁을 지나더라도 마침내 깨칠 날은 없을 것이다. 당장 무심함만 같지 못할 것 이니, 그 자리가 본래 법이다. 마치 힘센 장사가 자기 이마에 보배 구슬이 있는 줄을 모르고 밖으로 찾아 온 시방세계를 두루 다니며 찾아도 마침내 얻지 못하다가 지혜로운 이가 그 것을 가르쳐 주면 본래 구슬은 예와 다름이 없음을 보는 것 과 같은 일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도 자기 본심을 미혹하여 그것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 찾아다니면서 의식적으 로 수행을 하며 차례를 밝아서 깨달으려고 하지만 억겁 동안 애써 구한다고 해도 영원히 도를 이루지 못할터인즉 당장 무 심함만 못하다. 일체의 법이 있다 할 것도 얻었다 할 것도 없고, 의지할 것 도 머무를 것도 없으며, 주관이니 객관이니 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아야 한다.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그 자리 가 바로 깨치는 자리다. 그때 가서는 다만 본래 마음인 부처 를 깨달을 뿐 많은 세월을 거친 노력은 모두 헛된 수행이다. 마치 힘센 장사가 구슬을 얻은 것은 자기가 본래 갖고 있던 구슬을 얻은 것일 뿐, 밖으로 찾아다녔던 노력과는 상관이 없 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내가 아뇩다라 삼막삼보리를 실제로는 얻었다 할 것이 없으나 사람들이 믿 지 않을까 염려스럽기 때문에 다섯 가지 눈[五眼]과 다섯 가 지 말[五語]로써 끌어다 보였노라. 이것은 진실되이 허망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맨 으뜸되는 뜻의 이치[弟一義諦]이니라' 고 하셨다. 本佛上 實無一物 虛通寂靜 明妙安樂而已 深自悟入 直下 便是 圓滿具足 更無所欠 縱使三祈精進修行 歷諸地位 及 一念證時 祈證元來自不 向上 更不添得一物 却觀歷劫功用 摠是夢中妄爲 故 如來云 <我於阿뇩菩提 實無所得 若有所 得 燃燈佛 卽不與我授記> 又云 <是法 平等 無有高下 是 名菩提> 卽此本願淸淨心 與衆生諸佛世界 山河有相無相 十方界 一切平等 無彼我相 此本願淸淨心 堂自圓明 照 世人 不悟 祈認見聞覺知爲心 爲見聞覺知所覆 所以不覩精 明本體 但直下無心 本體自現 如大日輪 昇於虛空 照十 方 更無障 故 學道人 唯認見聞覺知施爲動作 空却見聞 覺知 卽心路絶 無入處 但於見聞覺知處 認本心 然 本心 不屬見聞覺知 亦不離見聞覺知 但莫於見聞覺知上 起見解 亦莫於見聞覺知上 動念 亦莫離見聞覺知覓心 亦莫捨見聞 覺知取法 不卽不離 不住不着 縱橫自在 無非道場 世人 聞道諸佛 皆傳心法 將謂心上 別有一法可證可取 遂 將心覓法 不知心卽是法 法卽是心 不可將心更求於心 歷千 萬劫 終無得日 不如當下無心 便是本法 如力士 迷額內珠 向外求覓 周行十方 終不能得 智者指之 當時 自見本珠如 故 故 學道人 迷自本心 不認爲佛 遂向外求覓 起功用行 依次第證 歷劫勤求 永不成道 不如當下無心 決定知一切法 本無所有 亦無所得 無依無住 無能無所 不動妄念 便證菩 提 及證道時 祈證本心佛 歷劫功用 是虛修 如力士得珠 時 祈得本額珠 不關向外求覓之力故 佛言 <我於阿뇩菩提 實無所得 恐人不信故 引五眼所見 五語所言 眞實不虛 是 第一義諦> 4. 일체를 여윌 줄 아는 사람이 곧 부처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의심치 말아야 한다. 4대(四 大)로 몸을 삼으나, 4대에는 '나(我)'가 없고, 그 '나'에도 또 한 주재(主宰)가 없다. 그러므로 이 몸에는 '나'도 없고 '주재 '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오음(五陰)으로 마음을 삼지만, 이 5음 역시 '나'도 '주재'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 또한 '나' 도 '주재'도 없을을 알아야 한다. 6근.6진.6식이 화합하여 생 멸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18계(十八界)가 이미 공(空)하여 일체가 모두 공하고, 오직 본래의 마음이 있을 뿐, 맑아서 호 호탕탕 걸림이 없다. 분별의 양식[識食]과 지혜의 양식[智食] 이 있다. 즉 4대로 된 몸은 주림과 질병이 근심거리인데, 알 맞게 영양을 공급하여 탐착을 내지 않는 것이 '지혜의 양식' 이고, 제멋대로 허망한 분별심을 내어, 입에 맞는 것만 구하 면서 싫어하여 버릴 줄을 모르는 것을 '분별의 양식'이라 한 다. 성문(聲聞)이란 소리를 듣고 깨닫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다. 그들은 자기 마음 자리를 깨닫지 못하고 설법을 듣고 거 기에 알음알이를 일으킨다. 혹은 신통(神通)이나 상서로운 모 양.언어.동작. 등에 의지하여 보리.열반이 있다는 설법을 듣고 3아승기겁을 수행하여 불도를 이루려 한다. 이것은 모두 성문 의 도(道)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을 성문불(聲聞佛)이라 한다. 다만 당장에 자기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단박 깨달으면 될 뿐이다.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며, 행도 닦을 것이 없으면, 이것이 가장 으뜸가는 도이며 참으로 여여한 부처이니라. 도 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 생기는 것만을 두려워하여곧 도와 는 멀어지는 것이니, 생각마다 모양이 없고 생각마다 하염 없 음이 곧 부처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부처가 되려고 한다 면, 불법을 모조리 배울 것이 아니라 오직 구함이 없고 집착 이 없음을 배워야 한다. 구함이 없음면 마음이 나지 않고, 집 착이 없으면 마음이 없어지지 않나니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 도 않는 것이 곧 부처이니라. 學道人 莫疑 四大 爲身 四大無我 我亦無主 故知此身 無 我亦無主 五陰 爲心 五陰 無我亦無主 故知此心 無我亦無 主 六根六塵六識 和合生滅 亦復如是 十八界旣空 一切皆 空 唯有本心 蕩然淸淨 有識食有智食 四大之身 飢瘡 爲患 隨順給養 不生貪着 謂之智食 恣情取味 妄生分別 唯求適 口 不生厭離 謂之識食 聲聞者 因聲得悟故 謂之聲聞 但不 了自心 於聲敎上 起解 或因神通 或因瑞相言語運動 聞有 菩提涅槃 三僧祈劫修成佛道 皆屬聲聞道 謂之聲聞佛 唯直 下 頓了自心 本來是佛 無一法可得 無一行可修 此是無上 道 此是眞如佛 學道人 祈 一念有 卽與道 隔矣 念念無相 念念無爲 卽是佛 學道人 若欲得成佛 一切佛法 摠不用學 唯學無求無着 無求 卽心不生 無着 卽心不滅 不生不滅 卽 是佛 5. 허공이 곧 법신 팔만 사천 법문은 팔만사천 번뇌를 치료하는 것으로서, 다 만 대중을 교화 인도하는 방편일 뿐 일체 법이란 본래 없다. 그러므로 여의는 것이 곧 법이요, 여의줄 아는 이가 곧 부처 이다. 일체 법을 여의기만 하면 얻을 만한 법이 없으니, 도를 배우는 사람이 깨닫는 비결을 터득하고자 한다면, 마음에 어 느 것이라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의 참된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한 비유가 바로 이것이다. 법신이 곧 허 공이며 허공이 곧 법신인데도 '법신이 허공계에 두루하고 있 다'고 하면, 사람들은허공 가운데에 법신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법신 그대로가 허공이며 허공 그대로가 법신임을 모른다. 만약 결정코 허공이 있다고 한다면 법신은 허공이 아 니다. 그렇다고 결정코 법신이 있다고 한다면 법신이 허공이 아니다. 다만 허공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허공이 곧 법신 이니라. 법신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법신이 곧 허공이니라. 허공과 법신은 전혀 다른 모양이 없으며, 번뇌와 보리도 다른 모양이 없는 것이니, 일체의 모양을 여윔이 곧 부처이니라.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마음을 취하나니, 마음과 경계를 함께 잊어야만 참된 법이다. 경계를 잊기는 오 히려 쉬우나 마음을 잊기는 매우 어렵다. 사람들이 마음을 감 히 잊어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져 부여 잡을 바 가 없을까 두려워해서인데, 이는 공이 본래 공이랄 것도 없 고, 오로지 한결 같은 참된 법계[一眞法界]임을 몰라서 그런 갈 견해이니, 밖으로 경계를 좇으면서 그것을 마음이라고 잘 못 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도둑을 제자식으로 잘 못 아는 격이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계.정.혜를 세워 말씀하 신 것인데, 애초부터 번뇌가 없다면 깨달음인들 어디 있겠느 냐?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일체법을 말씀하신 것은 일체의 마음을 없애기 위함이로다. 나에게 일 체의 마음이 없거니 일체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셨 다. 본래 근원이 청정한 부처에다가는 다시 어떤 것도 덧붙이 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허공이 수많은 보배구슬로 장엄 할지라도 마침내 머무를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성(佛性)도 허 공과 같아서 비록 무량한 공덕과 지혜로써 장엄한다 하더라 도 마침내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본래 성품이 미혹되 어 더더욱 보지 못할 뿐이다. 이른바 심지법문(心地法門)이란 만법이 이 마음을 의지하 여 건립되었으므로, 경계를 만나면 마음이 있고 경계가 없으 면 마음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깨끗한 성품 위에다가 경계에 대한 알음알이를 굳이 짓지 말라. 또 '정혜(定慧)의 비추는 작용이 역력히 밝고 고요하면서도 또렷하다[寂寂惺惺]'든가, '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見聞覺知]'는 것은 모든 경계 위에서 알음알이를 짓는 것이니, 이 말은 임시로 중하근기의 사람들 을 위하여 설법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몸소 깨닫고자 하는 사 람은 이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이것은 모두 경계의 법이므로 유견(有見)이라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일체 법에 대해서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를 짓지만 않으면, 곧 법을 보는 것이다. 八萬四千法門 對八萬四千煩惱 祈是敎化接引門 本無一切 法 離卽是法 知離者是佛 但離一切煩惱 是無法可得 學道 人 若欲得知要訣 但莫於心上 着一物 言佛眞法身 猶若虛 空 此是喩 法身 卽虛空 虛空 卽法身 常人 謂法身 虛空 處 虛空中 含容法身 不知法身 卽虛空 虛空 卽法身也 若 定言有虛空 虛空 不是法身 若定言有法身 法身 不是虛空 但莫作虛空解 虛空 卽法身 莫作法身解 法身 卽虛空 虛空 與法身 無異相 佛與衆生 無異相 生死與涅槃 無異相 煩惱 與菩提 無異相 離一切相 卽是佛 凡夫 取境 道人 取心 心 境雙忘 乃是眞法 忘境 猶易 忘心 至難 人不敢忘心 恐落 空無撈摸處 不知空本無空 唯一眞法界耳 此靈覺性 無是已來 與虛空同壽 未曾生未曾滅 未曾有未曾 無 未曾穢未曾淨 未曾喧未曾寂 未曾少未曾老 無方所無內 外 無數量無形相 無色象無音聲 不可覓不可求 不可以智慧 識 不可以言語取 不可以境物會 不可以功用到 諸佛菩薩 與一切蠢動含靈 同此大涅槃性 性卽是心 心卽是佛 佛卽是 法 一念離眞 皆爲妄想 不可以心 更求於心 不可以佛 更求 於佛 不可以法 更求於法 故 學道人 直下無心 默契而已 擬心卽此 以心傳心 此爲正見 愼勿向外逐境 認境爲心 是 認賊爲子 爲有貪瞋癡 卽立戒定慧 本無煩惱 焉有菩提 故 祖師云 <佛說一切法 爲除一切心 我無一切心 何用一切 法> 本源淸淨佛上 更不着一物 譬如虛空 雖以無量珍寶莊 嚴 終不能住 佛性 同虛空 雖以無量功德智慧 莊嚴 終不能 住 但迷本性 轉不見耳 所謂心地法門 萬法 皆依此心建立 遇境卽有 無境卽無 不可於淨性上 轉作境解 所言定慧 鑑 用 歷歷 寂寂惺惺 見聞覺知 皆是境上作解 暫爲中下根人 說 卽得 若欲親證 皆不可作如此見解 盡是境法 有沒處 沒 於有地 但於一切法 不作有無見 卽見法也 6. 마음을 잊어버림 9월 1일 대사께서는 배휴에게 말씀하셨다. "달마스님께서는 중국에 오신 이후로 오로지 한 마음만을 말씀하셨고 한 법만을 전하셨다. 도한 부처로써 부처에게 전 하실 뿐 다른 부처는 말씀하지 않으셨고, 법으로써 법을 전하 시고 다른 법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법이란 설명될 수 없는 법이며, 부처란 취할 수 없는 부처로서 본래 근원이 청정한 마음이다. 오직 이 일승(一乘)만이 사실이고, 나머지 이승(二 乘)은 참됨이 아니다. 반야는 지혜라는 뜻으로서, 모양이 없는 본래 마음이다. 범 부는 도(道)에 나아가지 않고 단지 육정(六情)만을 함부로 하 여 육도(六道)에 빠져 방황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 모든 견해를 일으키면 곧바로 외도에 떨어진다. 또한 남(生) 이 있음을 보고 없어짐으로 나아가면 성문도(聲聞道)에 떨어 지고, 남(生)이 있음을 보지 않고 오로지 없어짐만을 보면 연 각도(緣覺道)에 떨어진다. 법은 본시 남(生)이 없으므로 이제 또한 없어짐도 없으니, 이 두 견해를 일으키지 않아서 싫어 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으며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한 마음이 어야만 그런 다음에 불승(佛乘)이 된다. 범부는 모두가 경계 를 좇아 마음을 내서 좋고 싫음이 있다. 만일 경계가 없기를 바란다면 그 마음을 잊어야 하고, 마음을 잊으면 경계가 텅 비며, 경계가 공적하면 곧 마음이 없어지느리라. 만약 마음을 잊지 못하고 경계만을 없애려 한다면, 경계는 없어지지 않으 면서 오히려 분잡히 시끄러움만 더할 뿐이다. 그러므로 만법 은 오직 마음일 뿐이며, 그 마음 조차도 얻을 수 없는데 다시 무엇을 구하겠느냐? 반야를 배우는 사람이 얻을 만한 어떤 법도 없는 줄 알게 되면, 삼승(三乘)에는 뜻이 끊어져 오직 하나의 진실뿐이다. 증득하여 깨달았다고 할 것이 없는 자리 인데도 '나는 깨달았노라'고 한다면, 모두가 증상만(增上慢)을 내는 사람이다. <법화경>회상에서 옷을 떨치고 나가버린 사 람들이 모두가 이러한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있어서 실로 얻었다 할 것이 없 다'고 하셨으니, 그저 묵묵히 계합할 따름이다. 범부 중생들은 다만 죽는 순간에 오온(五蘊)이 모조리 비고 사대(四大)는 '나(我)'가 없음을 본다. 그러나 참된 마음은 모 양이 없어서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다. 태어 났다고 해서 성품이 오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고 해서 성품이 가는 것이 아니다. 담연히 둥글고 고요하여 마음과 경계가 한결같다. 이 렇게 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단박 깨쳐 삼세에 얽매이 지 않는 것이니, 곧 세간을 뛰어넘은 사람이다. 털끝만큼이라 도 나아가는 향방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만일 모든 부처 님께서 맞이해 주시는 것 같은 가지가지 신기한 모습을 보게 될지라도 역시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다만 스스로 마 음을 잊고서 법계와 같아지면, 바로 자재(自在)를 얻은 것이 니, 이것이 곧 요긴한 대목이다." 九月一日 師謂休曰 「自達磨大師到中國 唯說一心 唯傳一 法 以佛傳佛 不說餘佛 以法傳法 不說餘法 法卽不可說之 法 佛卽不可取之佛 乃是本源淸淨心也 唯此一事實 餘二則 非眞 般若 爲慧 此慧 卽無相本心也 凡夫 不趣道 有恣六 情 乃行六道 學道人 一念計生死 卽落魔道 一念起諸見 卽 落外道 見有生趣其滅 卽落聲聞道 不見有生 唯見有滅 卽 落緣覺道 法本不生 今亦無滅 不起二見 不厭不 一切諸 法 唯是一心 然後 乃爲佛乘也 凡夫 皆逐境生心 心遂 厭 若欲無境 當忘其心 心忘 卽境空 境空 卽心滅 若不忘心而 但除境 境不可除 祈益紛擾 故 萬法 唯心 心亦不可得 復 何求哉 學般若人 不見有一法可得 絶意三乘 唯一眞實 不 可證得 謂我能證能得 皆增上慢人 法華會上 拂衣而去者 皆斯徒也 故 佛言 <我於菩提 實無所得> 默契而已 凡人 臨欲終時 但觀五蘊皆空 四大無我 眞心無相 不去不來 生 時 性亦不來 死時 性亦不去 湛然圓寂 心境一如 但能如是 直下頓了 不爲三世所拘繫 便是出世人也 切不得有分毫趣 向 若見善相 諸佛來迎 及種種現前 亦無心隨去 若見惡相 種種現前 亦無心怖畏 但自忘心 同於法界 便得自在 此卽 是要節也」 7. 법(法)은 무생(無生) 10월 8일 대사께서 배휴에게 말씀하셨다. "화성(化城)이란 이승(二乘) 및 10지.등각.묘각을 말한 것이 다. 이것은 모든 중생을 이끌어 주기 위한 방편으로 세운 가 르침이므로, 글자 그대로 모두 변화하여 보인 성곽이다. 또한 보배가 있는 곳이란 다름 아닌 참된 마음으로서의 본래 부처 이며, 자기 성품의 보배를 말한다. 이 보배는 사량분별에 속 하지도 않으니, 그 자리에는 아무 것도 세울 수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주관도 객관도 없는데 어는 곳에 성(城) 이 있겠느냐? 만약 '이곳을 이미 화성이라 한다면 어느 곳이 보배 잇는 곳인가?' 하고 묻는다면, 보배 있는 곳이란 가리킬 수 없는 것인데, 가리킨다면 곧 방위와 처소가 있게 되므로, 참으로 보배가 있는 곳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경에서도 말씀 하시기를 '가까이 있다' 고만 했을 뿐이다. 그것을 얼마라고 한정 할 수 없는 것이니, 오로지 그 자체에 계합하여 알면 되 는 것이다. 천제(闡提)란 믿음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6도의 모든 중생들과 이승(二乘)들은 부처님의 과<佛果>가 있음을 믿지 않으니, 그들을 모두 선근(善根)이 끊긴 천제라 한다.보 살이란 불법이 있음을 굳게 믿고 대승.소승을 차별하지 않으 며, 부처와 중생을 같은 법성(法性)으로 본다. 이들을 가리켜 선근이 있는 천제라고 한다. 대개 부처님의 설법<聲敎>을 듣 고 깨닫는 사람을 성문(聲聞)이라 하고, 인연을 관찰하여 깨 닫는 사람을 연각(緣覺)이라 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속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비록 부처가 된다 하더라도 역시 성문불이 라 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교법(敎法)에 있어서는 깨닫 는 것이 많으나, 마음 법<心法>에 있어서는 깨닫지 못하는 데, 이렇게 하면 비록 겁을 지나도록 수행을한다 해도 마침내 본래의 부처는 아니다. 만약 마음에서 깨닫지 못하고서 교법 에서 깨닫는다면, 마음은 가벼이 여기고 가르침만 중히 여겨 흙덩이나 쫓는 개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본 마음을 잊었기 때문이다. 본래 마음에 계합하면 될 뿐, 법을 구할 필 요가 없으니, 마음이 곧 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계가 마음을 가로막고 현상<事>이 본체<理>를 흐리게 하여, 의례껏 경계로부터 도망쳐 마음을 편히 하려 하고, 현상을 물리쳐서 본체를 보존하려 한다. 그 러나 이들은 오히려 마음이 경계를 가로막고, 본체가 현상을 흐리게 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마음을 비우기만 하면 경 계는 저절로 비고, 본체를 고요하게만 하면 현상은 저절로 고 요해지므로 거꾸로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보통 마음을 비우려 들지 않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해 서인데,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비었음을 모르는 것이다. 어리 석은 사람의 경우는 경계는 없애려고 하면서 마음은 없애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마음을 없애지 경계를 없애지 않고, 나아가 보살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모든 것을 다 버 리고 자기가 지은 복덕마저도 탐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버 림에는 세 등급이 있다. 즉 안팎의 몸과 마음을 다 버림이 허 공과 같으며, 어디에고 집착하지 않은 다음에 곳에 따라 중생 에게 응하되, 제도하는 주체도 제도될 대상도 모두 잊는 것이 '크게 버림<大捨>'이다. 만약 한편으로 도를 행하고 덕을 펴 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이바지하여 놓아 버리고 바라는 마 음이 전혀 없으면 '중간의 버림<中捨>'이다. 또한 착한 일을 널리 행하면서도 바라는 바가 있다가 법을 듣고서 빈<空> 줄을 알고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은 '작은 버림<小捨>'이다. 큰 버림은 마치 촛불이 바로 정면에 있는 것과 같아서 더 미혹될 것도 깨달을 것도 없으며, 중간 버림은 촛불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며, 작은 버림은 마 치 촛불이 등 뒤에 있는 것 같아서 눈앞의 구덩이나 함정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살의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일체를 다 버린다. 과거의 마음을 버릴 수 없음이 미래를 버린 것이 니, 이른바 3세를 함께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께서 가섭에게 법을 부촉하실 때로부터 마음으로써 마 음에 전하였으니, 마음과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 허공에다 도장을 찍으면 아무 문체가 찍히지 않고, 그렇다고 물건에다 가 도장을 찍으면 법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써 마음에 새기는 것이니,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 새김 <能>과 새겨짐<所>이 함께 계합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어 서, 그것을 얻은 사람은 매우 적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없음 <無心>을 말하는 것이고, 얻음도 얻었다 할 것이 없는 것이 다. 부처님께서는 세 몸<三身>이 있는데, 법신은 자성의 허통 (虛通)한 법을, 보신(報身)은 일체 청정한 법을, 화신(化身)은 6도만행법을 말한다. 번신의 설법은 언어.형상.문자로써 구할 수 없으며, 설할 바도 없고 증득할 바도 없이 자성이 허통(虛 通) 할 뿐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한 법도 설할 만한 법이 없음을 설법이라 이름한다'고 하셨다. 보신이나 화신은 근기에 따라 감응하여 나타나고, 설하는 법 또한 현상에 따르 고 근기에 알맞게 섭수하여 교화하는 것이므로, 이 모두는 참 다운 법이 아니다. 그래서 '보신.화신은 참된 부처가 아니며, 법을 설하는 자가 아니다'고 하신 것이다. 이른바 밝고 정밀한 성품인 일정명(一精明)이 나뉘어 6화합 (六和合)이 된다고 하였다. 일정명이란 바로 한 마음<一心> 이요, 6화합이란 6근(根)이다. 이 6근은 각기 6진(塵)과 합하 는데, 눈은 색과, 귀는 소리와, 코는 냄새와, 혀는 맛과, 몸은 촉감과, 뜻은 법과 제각기 합한다. 그런 가운데 6식(識)을 내 어 18계(十八界)가 된다. 만약 이 18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 6화합이 하나로 묶이어 일정명이 된다. 일정명 이란 곧 마음이다. 그런데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모두 알면서도, 일정명과 6화합에 대해 알음알이 만을 지어서 드디 어는 교설에 묶이어 본래 마음에 계합치 못한다. 여래께서는 세간에 나타나시어 일승(一乘)의 참된 법을 말씀하시려 하나, 중생들은 부처님을 믿지 않고 비방하여 고통의 바다에 빠지 게 될 것이며,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전혀 말씀하시지 않는다 면 설법에 인색한 간탐(간貪)에 떨어져 중생을 위하는 것이 못된다고 하시사, 현묘한 도를 널리 베푸시고 방편을 세워 삼 승(三乘)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대승과 소승의 방편이 생겼고, 깨달음에도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게 되었으나, 이것 은 모두 근본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오직 일 승의 도가 있을 뿐, 나머지 둘은 참된 것이 아니다'고 하셨 다. 그러나 마침내는 한 마음의 법<一心法>을 나타내시지 못 했기 때문에 가섭을 불러 법좌를 함께 하시사, 따로이 그 '한 마음'을 부촉하셨으니, 이는 언설을 떠난 법이다. 이 한 가닥 의 법령은 따로이 행해지는데, 만약 계합하여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즉시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 十月八日 師謂休曰 言化城者 二乘及十地等覺妙覺 皆是權 立接引之敎 爲化城 言寶所者 及眞心本佛 自性之寶 此 寶 不屬情量 不可建立 無佛無衆生 無能無所 何處有城 若 問此旣是化城 何處 爲寶所 寶所 不可指 指卽有方所 非眞 寶所也 故 云 <在近而已> 不可定量言之 但當體 會契之 卽是 言闡提者 信不具也 一切六道衆生 乃至二乘 不信有 佛果 皆謂之斷善根闡提 菩薩者 深信有佛法 不見有大乘小 乘 佛與衆生 同一法性 乃謂之善根闡提 大抵因聲敎而悟者 謂之聲聞 觀因緣而悟者 謂之緣覺 若不向自心中悟 雖至成 佛 亦謂之聲聞佛 學道人 多於敎法上 悟 不於心法上 悟 雖歷劫修行 終不是本佛 若不於心 悟 乃至於敎法上 悟 卽 輕心重敎 遂成逐塊 忘於本心故 但契本心 不用求法 心卽 法也 凡人 多爲境 心事 理 常欲逃境以安心 屛事以存理 不知乃是心 境理 事 但令心空 境自空 但令理寂 事自寂 勿到用心也 凡人 多不肯空心 恐落於空 不知自心本空 愚 人 除事不除心 智者 除心不除事 菩薩 心如虛空 一切俱捨 所作福德 皆不貪着 然 捨有三等 內外身心 一切俱捨 猶如 虛空 無所取着然後 隨方應物 能所皆忘 是爲大捨 若一切 行道布德 一邊旋捨 無希望心 是爲中捨 若廣修衆善 有所 希望 聞法知空 遂乃不着 是爲小捨 大捨 如火燭在前 更無 迷悟 中捨 如火燭在傍 或明或暗 小捨 如火燭在後 不見坑 穽 故 菩薩 心如虛空 一切俱捨 過去心不可得 是過去捨 現在心不可得 是現在捨 未來心不可得 是未來捨 所謂三世 俱捨 自如來付法迦葉已來 以心印心 心心不異 印着空 卽 印不成文 印着物 卽印不成法故 以心印心 心心不異 能印 所印 俱難契會故 得者少 然 心卽無心 得卽無得 佛有三身 法身 說自性虛通法 報身 說一切淸淨法 化身 說 六度萬行法 法身說法 不可以言語音聲 形相文字而求 無所 說無所證 自性虛通而已 故 曰 <無法可說 是名說法> 報 身化身 皆隨機感現 所說法 亦隨事應根 以爲攝化 皆非眞 法 故 曰 <報身 非眞佛 亦非說法者> 所言同是一精明 分爲六和合 一精明者 一心也 六和合者 六根也 此六根 各與塵合 眼與色合 耳與聲合 鼻與香合 舌 與味合 身與觸合 意與法合 中間 生六識 爲十八界 若了十 八界無所有 束六和合 爲一精明 一精明者 卽心也 學道人 皆知此 但不能免作一精明六和合解 遂被法 不契本心 如 來現世 欲說一乘眞法則衆生 不信興謗 沒於苦海 若都不說 則墮�h貪 不爲衆生 溥捨妙道 遂說方便 說有三乘 乘有大 小 得有淺深 皆非本法 故 云 <唯有一乘道 餘二則非眞> 然 終未能顯一心法故 召迦葉同法座 別付一心 離言說法 此一枝法 別行 若能契悟者 更至佛地矣 8. 도(道)를 닦는 다는 것 배휴가 물었다. "도란 무엇이며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무슨 물건이길래 수행하려 하느냐?" "그렇다면 제방의 종사가 서로 이어받아 참선하여 도를 배 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둔근기(鈍根機)를 이끌어 주는 말이니 의지할 것이 못되느 니라." "그것이 둔근기를 위한 말이라고 하신다면, 상근기(上根機) 를 위해서는 무슨 법을 설하시는지요?" "상근기라면 어디 남에게서 찾으려 하겠느냐? 저 자신마져 도 얻지 못하거늘, 더구나 따로 뜻에 합당한 법이 어디 있겠 느냐? '법이란 법이 모슨 모양이더냐?'고 한 경(經)의 말씀을 보지 못했느냐?" "그렇다면 도무지 구하여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 까?" "그렇게만 된다면 마음의 힘이 덜리는 것이니라." "그렇다면 온통 끊어져 버려서 '없다는 것'도 가당치 않겠 습니다." "누가 그것을 없다 하였으며, 또 그것이 대관절 무엇이길래 너는 찾으려 하느냐?" "스님께서는 이미 찾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서는, 어찌 하여 그것을 끊지도 말라 하십니까?" "찾지 않으면 그 자리는 바로 '쉼'인데, 누가 너더러 끊으 라 하였느냐? 눈앞의 허공을보아라. 어떻게 저것을 끊겠느냐? 여기에 알음알이를 내는구나." "사람들로 더불어 알음알이를 내지 않음이 마땅한 것입니 까?" "내 너를 방해한 적은 한번도 없거니와, 요컨대 알음알이란 뜻[情]에 속한 것으로서 뜻이 생기면 지혜가 막히게 되느니 라." "여기에 있어서 뜻을 내지 않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뜻을 내지 않는다면 누가 옳다고 말하겠느냐?" 問 如何是道 如何修行 師云 道是何物 汝欲修行 問 諸方宗師相承 參禪學道 如何 師云 引接鈍根人語 未可依憑 云 此皆是引接鈍根人語 未審 接上根人 復說何法 師云 若是上根人 何處 更就人覓 他自己 尙不可得 何 更 別有法當情 不見 敎中 云 <法法何狀> 云 若如此則 道不要求覓也 師云 若與�쒡僑欽凶� 云 如是則 渾成斷絶 不可是無也 師云 阿誰敎他無 他是阿誰 擬覓也 云 旣不許覓 何故 又言莫斷他 師云 若不覓 便休 卽誰敎 斷 見目前虛空 作�쒈烟½� 云 此法 可得便同虛空否 師云 虛空 早晩 向 道有同有異 我暫如此說 便向者裸 生解 云 應是不與人生解耶 師云 我不曾障 要且解屬於情 情生則智隔 云 向者裸 莫生情 是否 師云 若不生情 阿誰道是 9. 말에 떨어지다 "스님께서는 제가 한 말씀이라도 드리기만 하면, 어찌해서 바로 말에 떨어진다[話墮]고 하십니까?" "네 스스로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이거늘 무슨 잘못에 떨어짐이 있겠느냐?" 問 裳向和尙處發言 爲什�쒣둣뇔χ� 師云 汝自是不解語人 有什�쒡禦� 10. 사문이란 무심을 얻은 사람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허다한 언설들이 모두 방편으로 대 꾸한 것들이어서, 사람들에게 가리켜 보이신 실다운 법이란 아주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실다운 법이란 전도됨이 없거늘, 네 지금 묻는 곳에서 스 스로 전도되고 있느니라. 그러면서 무슨 실다운 법을 찾는다 는 말이냐?" "묻는 곳에서 이미 스스로 전도된 것이라면, 스님께서 대답 하신 곳은 어떠하십니까?" "사물을 통해서 자신을 비춰볼지언정 남의 일에는 상관할 것이 없다." 그리고는 다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개와도 같아서 움직이는 물건을 보기만 하면 문 득 짖어대니, 바람에 흔들리는 초목과 눠 별다를 게 있겠느 냐." 이어서 말씀하셨다. "우리의 이 선종은 위로부터 이제껏 이어 내려 오면서 알 음알이[知解]를 구하게 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도를 닦으라 고만 했을 뿐인데, 사실 이것도 교화하는 방편설이니라. 그러 니 도 또한 배울 수없는 것으로서, 뜻을 두고 알음알이를 배 우게 되면 도에는 도리어 어둡게 된다. 도에는 일정한 방위와 처소가 없는 것을 이름하여 대승의 마음[大乘心]이라고 하느 니라. 이 마음은 안팍.중간 어디에도 있지 않으며, 실로 방위 와 처소가 없는 것이니, 첫째로 알음알이를 짓지 말아야 한 다. 지금까지 너에게 말한 것은 뜻으로 헤아림이 다해 버린 바로 그자리가 도라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뜻으로 헤아림이 다하면 마음에는 방위도 처소도 없느니라. 이 도라는 것은 천진하여 본래 이름이 없다. 다만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뜻으로 헤아리는데 미혹되었으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나오시어 이 일을 자상히 말씀하신 것이니라. 그 러나 너희 모든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까 걱정하셔서 방편으 로 '도'라는 이름을 세우셨으니, 이름에 얽매여서 알음알이를 내서는 안되느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고기를 잡았으면 통 발을 잊으버려라!'고 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자연히 도에 통하고 마음을 알아 본래의 근원에 통달한 이를 사문(沙門)이 라 부른다. 사문이라는 자리는 생각을 쉬어서 이루어 지는 것 이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니라. 그런데도 너희들은 남의 집에 세살이 하듯,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구하면서 배워서 얻 으려하니, 될 까닭이 있겠느냐? 옛 사람들은 영민하여 한 말씀 들으면 당장에 배움을 끊었 다. 그래서 그들을 '배울 것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 이라고 했다. 반면 지금 사람들은 하많은 알음알이를 구하고, 널리 글의 뜻의 캐면서 그것을 수행이라고 하지만, 넓은 지식 과 견해 때문에 도리어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이는 매 것이므로 각각 말씀이 다르다. 다만 요 달하여 알기만 하면 미혹되지 않느니라. 무엇보다도 주의할 것은 한 근기를 대상으로 말씀에 있어서 글자에 얽매여 알음 알이를 내지 말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실로 여래 께서 말씀하실 만한 정해진 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종 은 이런 일을 따지지 않는 것이니, 다만 마음을 그칠 줄 알면 곧 쉬는 것이요, 다시 앞뒤를 생각할 필요가 없느니라." 問 向來如許多言說 皆是抵敵語 都未曾有實法指示於人 師云 實法 無顚倒 汝今問處 自生顚倒 覓什�쒌韓� 云 旣是問處 自生顚倒 和尙答處如何 師云 且將物照面着 莫管他人 又云 祈如箇癡狗相似 見物動處 便吠 風吹草木 也不別 又云 我此禪宗 從上相承已來 不□敎人求知求解 只云學道 早是接引之詞 然 道亦不可學 情存學解 却成迷道 道無方 所 名大乘心 此心 不在內外中間 實無方所 第一不得作知 解 只是說汝 如今情量盡處爲道 情量 若盡 心無方所 此道 天眞 本無名字 只爲世人 不識 迷在情中 所以 諸佛 出來 說破此事 恐汝諸人不了 權立道名 不可守名而生解故 云 <得魚忘筌> 身心 自然達道 識心達本源故 號爲沙門 汝門 果者 息慮而成 不從學得 汝如今將心求心 傍他家舍 祈擬 學取 有甚�쑼造� 古人 心利 裳聞一言 便乃絶學 所以 喚 作絶學無爲閑道人 今時人 只欲得多知多解 廣求文義 喚作 修行 不知多知多解 蒜成壅塞 唯知多與兒 乳喫 消與不消 都摠不知 三乘學道人 皆是此樣 盡名食不消者 所謂知解不 消 皆爲毒藥 盡向生滅中取 眞如之中 都無此事 故 云 <我 王庫內 無如是刀> 從前所有一切解處 盡須倂却令空 更無 分別 卽是空如來藏 如來藏者 更無纖塵可有 卽是破有法王 出現世間 亦云 <我於燃燈佛所 無少法可得> 此語 只爲空 情量 知解但鎖鎔 表裏情盡 都無依執 是無事人 三乘敎 網 祈是應機之藥 隨宜所說 臨時施設 各各不同 但能了知 卽不被惑 第一不得於一機一敎邊 守文作解 何以如此 實無 有定法如來可說 我此宗門 不論此事 但知息心卽休 更不用 思前慮後 11. 마음이 부처 배휴가 물었다. "예로부터 마음이 부처라고들 하는데, 어느 마음이 부처인 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사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몇 개의 마음을 가졌느냐?" "그렇다면 범부에 즉(卽)한 마음이 부처입니까, 아니면 성 인(聖人)에 즉(卽) 마음이 부처입니까?" "어느 곳에 범.성의 마음이 있느냐?" "지금 3승 가운데서 범.성을 말씀하셨는데, 스님께서는 어 찌해서 그것이 없다고 하십니까?" "3승을 말하는 가운데 분명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범.성 의 마음이 허망하다'고 하셨느니라. 그런데도 너희는 지금 알 지 못하고 아직 '있다'고 집착하여 공허한 것을 무언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어찌 허망되지 않겠느냐? 허망하기 때 문에 마음이 미혹되는 것이니, 네 만약 범부의 뜻과 성인의 경계를 없애기만 한다면, 마음 밖에 다른 부처가 없느니라.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시어 모든 사람이 다 부처임을 가 르쳐 주셨다. 그런데도 너희는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범.성을 집착하고 마음을 밖으로 내달리며 도리어 스스로 마음을 미 혹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라고 하였으니, 한 생각 뜻이 생기면 그 즉시 6도의 다른 곳에 떨어지게 된다. 비롯없는 옛날로부터 오늘날과 한 결같이 다르지 않아 어떠한 다른 법이 없었으니, 그러므로 그 것을 일컬어 정등각(正等覺)을 성취했다고 하느니라." "스님께서 말씀하신 '곧 그대로<卽>'라 함은 무슨 도리입 니까?" "너는 무슨 도리를 찾는 것이냐? 어떤 도리라도 있기만 하 면 바로 곧 본래의 마음과는 달라지느니라." "앞서 말씀하신 '시작 없는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결같이 다르지않다'고 하신 이치는 무엇입니까?" "찾기 때문에 네 스스로 그것과 달라지는 것이니라. 네 만 약 찾지 않는다면 어디에 다를 것이 있겠느냐?" "이미 다르지 않다면, 굳이 '곧 그대로'라고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네 만약 범.성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누가 너에게 굳이 '곧 그대로'라는 말을 하겠느냐? '곧 그대로'가 '곧 그대로'가 아니 라면, 마음 또한 마음이 아닌 것이니, 이런 가운데 마음과 '곧 그대로'라는 것을 다 잊으면, 네가 더 이상 무엇을 찾겠느 냐?" 問 從上來 皆云 <卽心是佛> 未審 卽那箇心 是佛 師云 有幾箇心 云 爲復卽凡心 是佛 卽聖心 是佛 師云 何處 有凡聖心耶 云 卽今三乘中 說有凡聖 和尙 何得言無 師云 三乘中 分明向 道 <凡聖心 是妄> 今不解 返執 爲有 將空作實 豈不是妄 妄故 迷心 汝但除却凡情聖境 心 外 更無別佛 祖師西來 直指一切人全體是佛 汝今不識 執 凡執聖 向外馳騁 還自迷心 所以 向汝道 <卽心是佛> 一 念情生 卽墮異趣 無始已來 不異今日 無有異法 故 名成等 正覺 云 和尙所言卽者 是何道理 師云 覓什�쑼네� 裳有道理 便卽心異 云 前言無始已來 不異今日 此理如何 師云 祈爲覓故 汝自異他 汝若不覓 何處有異 云 旣是不異 何更用說卽 師云 汝若不認凡聖 阿誰向汝道卽 卽若不卽 心亦不心 可 中 心卽 俱忘 阿 更擬向何處覓去 12.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다<以心傳心> "망념이 자신의 마음을 가로막는다는데 무엇으로써 망념을 없애야 합니까?" "망념을 일으키고 그것을 없애는 것 또한 망념이 되느니라. 망념은 본래 뿌리가 없지만, 다만 분별 때문에 생긴다. 네 다 만 범.성의 두곳에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다면, 자연 망념은 없어지는 것이니, 다시 그것을 어떻게 떨쳐버리겠느냐? 떨끝 만큼도 의지하여 집착함이 없으면, 이른바 '내가 두 팔을 다 버렸으니 반드시 부처를 이루리라'고 한 것이 되느니라." "이미 의지하여 집착함이 없다면 어떻게 역대 조사들께서 는 서로 이어 받았습니까?"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느니라."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다면 어찌 마음 또한 없다고 하십 니까?" "한 법도 얻을 수 없는 것을 마음에 전한다고 하는 것이니, 만약 이 마음을 깨친면 곧 마음도 없고 법도 없느니라." "마음도 법도 없다면 어찌하여 전한다고 하십니까?" "너는 마음에 전한다는 말을 듣고는 얻을 만한 무엇이 있 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래서 조사께서는, '마음의 성품[心性]을 깨달았을 때에야 불가사의하리라. 요연히 사무쳐 얻을 바가 없나니, 얻었을 때라도 알았다 하지 못하노라'고 하셨느니라. 만약 이것을 너더러 알도록 한다 하여도 어떻게 감당하겠느 냐?" 問 妄能障自心 未審 而今 以何遺妄 師云 起妄遺妄 亦成妄 妄本無根 祈因分別而有 但於凡 聖兩處 情盡 自然無妄 更擬若爲遺他 都不得有纖毫依執 名爲我捨兩臂必當得佛 云 旣無依執 當何相承 師云 以心傳心 云 若心相傳 云何言心亦無 師云 不得一法 名爲傳心 若了此心 卽是無心無法 云 若無心無法 云何名傳 師云 汝聞道傳心 將謂有可得也 所以 祖師云 <認得心性時 可說不思議 了了無所得 得時 不說知> 此事 若敎汝會 何 堪也 13. 마음과 경계 "눈 앞의 허공을 경계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경계 를 가리켜 마음을보는 것이 어찌 없다고 하겠습니까?" "어떤 마음을 너더러 경계 위에서 보게 하느냐? 설혹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경계를 비추는 마음일 뿐이니라. 사람이 거 울로 얼굴을 비출 때처럼 눈썹과 눈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래 그림자일 뿐 너의 일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거울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의지함'에 빠진다면 항상 의지할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야 언제 깨달을 수 있겠느냐? 너는 '손을 털고 그대에게 내보일 아무 것도 없 구나. 수천 가지로 말한들 모 두 헛수고로다.'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느 냐?" "마음을 분명히 알았다면 비출 만한 아무 것도 없는 것입 니까?" "아무 것도 없다면 어찌 더 비출 필요가 있겠느냐? 눈을 뻔히 뜨고 잠꼬대 같은 말을 하지 말라." 問 祈如目前虛空 可不是境 豈無指境見心乎 師云 什�쒌� 敎汝向境上見 設汝見得 只是箇照境底心 如 人 以鏡照面 縱然得見眉目分明 元來祈是影像 何關汝事 云 若不因照 何時得見 師云 若也涉因 常須假物 有什�쒑豫� 汝不見 他向汝道 <撒手似君無一物 徒勞 說數千般> 云 他若識了 照亦無物耶 師云 若是無物 更何用照 莫開眼 語去 14. 구함이 없음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백 가지로 많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음'만 훨 씬 못하니라. 도인이란 일 없는 사람이어서 실로 허다한 마음 도 없고 나아가 말할 만한 도리도 없다. 더이상 일이 없으니, 헤어져들 돌아가거라." 上堂云 百種多知 不如無求最第一也 道人 是無事人 實無 許多般心 亦無道理可說 無事散去 15. 머문 바 없이 마음이 나면 곧 부처님의 행 배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세간의 이치[世諦]입니까?" "언어.문자에 얽매인 이치를 논하여 무엇하겠느냐? 본래 청 정한 것인데, 어찌 언설을 빌려서 문답을 하겠는가? 다만 일 체의 마음이 없기만 하면 번뇌없는 지혜[無漏智]라 부른다. 네가 모든 언행에 있어 하염없는 법[有爲法]에 집착하지만 않 는다면, 말하고 눈 깜짝이는 것 모두가 번뇌없는 지혜와 같으 니라. 지금 말법 시대에 접어들면서 참선의 도를 배우는 사람 들이 대부분 온갖 소리와 빛깔에 집착하고 있다. 이래서야 어 찌 자기 마음을 여의었다고 하겠느냐? 마음이 허공같고 마른 나무와 돌덩이처럼 되어 가며, 또한 타고 남은 재와 꺼진 불 처럼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바야흐로 도에 상응할 분(分)이 조금 있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한다면 뒷날 모두 염라 대왕에게서 엄한 문책을 받을 때가 올 것이다. 네가 다만 '있 다' '없다' 하는 모든 법을 여의기만 하면, 마음이 마치 허공 에 떠있는 햇살같아 태양이 비추지 않아도 자연히 두루 비추 는 것이니, 이 어찌 힘 덜리는 일[省力事]이 아니겠느냐? 이런 때에 이르러서는 쉬어 머물 바가 없어서, 모든 부처님이 행하시는 행을 하게 되고,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는 것이 되느니라. 이것이 바로 자신의 청정한 법신이며 무상정 등정각이니라. 만약 이 뜻을 알지 못한다면 많은 지식을 배워 얻고 부지런히 고행수도하며 풀옷을 입고 나무 먹이를 먹는 다 하더라도 결국 자기 마음을 모르는 것이니라. 이것을 모두 삿된 수행이라 하며, 정작 천마의 권속이 되는 것이니, 이런 식으로 수행을 한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지공(誌公 : 418-514)이 말하기를 '부처란 본래 자기 마음 으로 짓는 것인데 어찌 문자로 인해 구해지겠는가? 설령 그 렇게 해서 삼현(三賢).사과(四果).십지만심(十地滿心)의 지위를 얻는다 해도, 그것은 역시 범부와 성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고 하였다. 너는 보지 못하였느냐? '모든 행위가 무상하나니, 이것이 나고 없어지는 법이니라'고 하였으며, 힘 이 다한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뜻대로 되지 않을 내생을 초래하리로다. 어찌 하염없는 실상의 문[無爲實相門]에 한번 뛰어넘어 여래의 지위에 바로 드는것만 같으리오' 라고 하였 느니라. 그러나 너는 이 정도의 근기가 아니므로 옛사람이 세 우신 방편문에서 알음알이를 널리 배워야 하느니라. 지공이 말하기를 '세간을 뛰어 넘은 명철한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대승의 법약(法藥)을 잘못 먹는 것이다.'고 하였다. 네 지금 일거일동에 항상 무심(無心)을 닦아 오래오래 되면 반드시 얻 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역량이 부족하니 단박에 뛰어넘지는 못한다. 다만 3년이나 5년 혹 10년만 지나면 반드 시 들어갈 곳을 얻어 자연히 알게될 것이니라. 그러나 너는 이렇게 해내지 못하고, 굳이 마음을 가지고 선(禪)을 배우고 도를 배워야 하니, 그것이 불법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시기를, '여래의 설법은 모두 사람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누런 나뭇잎을 돈이라하 여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따 라서 법이란 결코 실다운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무 엇인가 얻을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우리 종문(宗門) 의 사람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너의 본분과는 아무런 상관 이 없느니라. 그래서 경에 말씀하시기를, '실로 얻을 만한 조 그마한 법도 없는 것을 무상정각이라 부른다' 고 하였다. 만 약 이 뜻을 알아낸다면, 부처님의 도와 마구니의 도가 모두 잘못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니라. 본래 깨끗하여 환히 밝아 모남도 둥 섕도 없고, 크고 작음 도 길고 짧은 모양도 없으며, 번뇌(漏)도 작위(作爲)도 없고 미혹됨도 깨달음도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요연히 사무쳐 보아 한 물건도 없나니,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항하사 대천세계(大千世界)는 바다의 물거품이요, 모든 성현들은 스 치는 번개불 같도다 ' 한 것이다. 모든 것이 진실한 마음만 같질 못하니라. 법신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부처님.조사와 더 불어 마찬가지여서 어디 떨끝만큼이라도 모자람이 겠느냐. 이 런 내 말의 뜻을 알았들었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하니, 이 생 을 마칠 즈음에는 내쉬는 숨이 들이쉬는 숨을 보장치 못하느 니라." 問 如何是世諦 師云 說葛藤作什�� 本來淸淨 何假言說問答 但無一切心 卽名無漏智 汝每日行住坐臥 一切言語 但莫着有爲法 出言 瞬目 盡同無漏 如今末法向去 多是學禪道者 皆着一切聲色 何不與我心 心同虛空去 如枯木石頭去 如寒灰死火去 方有 少分相應 若不如是 他日盡被閻老子拷 在 但離却有無 諸法 心如日輪 常在虛空 光明 自然不照而照 不是省力底 事 到此之時 無棲泊處 卽是行諸佛行 便是應無所住 而生 其心 此是 淸淨法身 名爲阿뇩菩提 若不會此意 縱 學得 多知 勤苦修行 草衣木食 不識自心 盡名邪行 定作天魔眷 屬 如此修行 當復何益 誌公 云 <佛 本是自心作 那得向文 字中求 饒 學得三賢四果 十地滿心 也祇是在凡聖內坐> 不見道 諸行無常 是生滅法 勢力盡箭環墜 招得來生不如意 爭似無爲實相門 一超直入如來地 爲 不是與�쒖� 須要向 古人建化門 廣學知解 誌公 云 <不逢出世明師 枉服大乘法 藥> 如今一切時中行住坐臥 但學無心 久久 須實得 爲 力量小 不能頓超 但得三年 五年 或十年 須得箇入頭處 自 然會去 爲汝不能如是 須要將心學禪學道 佛法 有什�쑳嗇� 故 云 <如來所說 皆爲化人 如將黃葉爲金 止小兒啼> 決 定不實 若有實得 非我宗門下客 且與 本體 有甚交涉 故 經 云 <實無少法可得 名爲阿뇩菩提> 若也會得此意 方知 佛道魔道俱錯 本來淸淨 皎皎地 無方圓無大小 無長短等相 無漏無爲 無 迷無悟 了了見無一物 亦無人亦無佛 大千沙界海中 一切 聖賢 如電拂 一切不如心眞實 法身 從古至今 與佛祖一般 何處欠少一毫毛 旣會如是意 大須努力 盡今生去 出息 不 保入息 16. 육조(六祖)는 어째서 조사가 되었는가? 배휴가 물었다. "혜능스님께서는 경전을 모르셨는데 어떻게 법의를 전수받 고 육조가 되셨으며, 반면 신수스님은 500대중의 수좌로서 교 수사(敎授師)의 임무를 받아 32본(本)의 경론을 강의 할 수 있었는데 왜 법의를 전수받지 못하였습니까?" "신수스님에게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니, 이는 유위의 법 으로서 닦고 깨닫는 것을 옳다고 여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조께서는 6조에게 부촉하셨느니라. 한편 6조는 당시에 다만 묵묵히 계합하여 여래께서 은밀히 주신 매우 깊은 뜻을얻으 셨으므로 그에게 법을 부촉하셨느니라. 너는 듣지 못했느냐? '법이란 본래 법은 법이랄 것 없나니 법없는 법을 또한 법이 라 하느니라. 이제 법 없음을 부촉할 때에 법이다 법이다 하 는 것이 일찌기 무슨 법이었던고?' 라고 하셨다. 이 뜻을 알 면 바야흐로 출가자라고 부르게 되느니라. 만약 믿지 못하겠 다면, 어지하여 도명(道明)상조가 대유령 꼭대기까지 달려와 서 6조를 찾았겠느냐. 그때 6조스님이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 옷을 구하는가, 아니면 법인가?' 하니, 도명상 좌가 '옷이 아니라 오로지 법을 위하여 왔습니다'고 하였다. 6조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잠시 마음을 거두고 선도 악도 전 혀 생각하지 말라' 하시자 도명상좌가 말씀을 받드니, 6조께 서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러할 때 부모가 낳기 이전 명상좌의 본래 면목을 나에게 가져와 보아 라' 하셨다. 도명상좌가 이 말을 듣고 곧바로 묵연히 계합하 고 문득 절하며 말하기를 '마치 물을 마셔 보고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사옵니다. 제가 5조 문하에서 30년 동안 잘못 공부하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습 니다'하자, 6조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도다' 고 하셨다. 이제 조사가 서쪽에서 오시어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하심이 언설에 있지 않음을 바야흐로 알 것이로다. 어찌 듣지 못했느냐? 아난이 가섭에게 묻기를 '세 존께서 금란가사를 전하신 외에 따로 무슨 법을 전하셨습니 까?' 하니 가섭이 아난을 불렀다. 아난이 대답하자 가섭이 말 하기를 '문 앞의 깃대<刹竿>를 거꾸려뜨려 버려라' 하였으 니, 이것이 바로 조사의 표방이니라. 몹시 총명한 아난이 30 년도안 시자로 있으면서 많이 들어 얻은 지헤 때문에 부처님 으로부터, '천일 동안 닦은 너의 지혜는 하루 동안 도를 닦느 니만 못하다' 고 하는 꾸지람을 들었다. 만약 도를 배우지 않 는다면 물 한 방울도 소화시키기 어렵다 하리라." 問 六祖 不會經書 何得傳衣爲祖 秀上座 是五百人首座 爲 敎授師 講得三十二本經論 云何不傳衣 師云 爲他有心 是有爲法 所修所證 將爲是也 所以 五祖付 六祖 六祖 當時 祇是默契 得密授如來甚深意 所以 付法與 他 汝不見道 <法本法無法 無法法 亦法 今付無法時 法法 何曾法> 若會此意 方名出家兒 方好修行 若不信 云何明上 座 走來大庾嶺頭 尋六祖 六祖便問 <汝來求何事 爲求衣 爲求法> 明上座云 <不爲衣來 但爲法來> 六祖云 <汝且 暫時斂念 善惡 都莫思量> 明 乃 語 六祖云 <不思善不 思惡 正當與�쒌� 還我明上座父母未生時面目來> 明 於言 下 忽然默契 便禮拜云 <如人飮水 冷暖 自知 某甲 在五祖 會中 枉用三十年功夫 今日 方省前非> 六祖云 <如是> 到 此之時 方知祖師西來 直指人心見性成佛 不在言說 豈不見 阿難 問迦葉云 <世尊 傳金 外 別傳何法> 迦葉 召阿難 阿難 應諾 迦葉 云 <倒却門前刹竿着> 此便是祖師之標榜 也 甚深阿難 三十年爲侍者 祇爲多聞智慧 被佛訶云 <汝千 日學慧 不如一日學道> 若不學道 滴水 難消 제2편 완릉록(宛陵錄) 1. 도는 마음 깨치는 데 있다. 배상공이 황벽스님께 여쭈었다. "산중(山中)의 사오백명 대중 가운데서 몇 명이나 스님의 법을 얻 었습니까?" 대사가 말씀하셨다. "법을 얻은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도는 마음 을 깨치는 데 있는 것이지 어찌 언설에 있겠느냐? 언설이란 다만 어 린아이를 교화할 뿐이니라." 裵相公 問師曰 山中四五百人 幾人 得和尙法 師云 得者 莫測其數 何故 道在心悟 豈在言說 言說 祇是 化童蒙耳 2. 자기의 마음을 알자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음이 곧 부처요 무심(無心)이 도이니라. 다만 마음을 내어서 생각을 움직인다든지, 혹은 있고[有], 길고 짧음, 너와 나, 나아가 주 체니 객체니 하는 마음이 없기만 하면, 마음이 본래로 부처요 부처 가 본래 마음이니라. 마음은 허공과 같기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부처 님의 참된 법신은 허공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처를 따로 구하 려 하지 말 것이니, 구함이 있으면 모두가 고통이니라. 설사 오랜 세 월 동안 6도[六度] 만행을 실천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는다 하더 라도 그것은 결코 완전한 구경(究竟)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 은 인연의 조작에 속하기 때문이다. 인연이 다하면 덧없음으로 돌아 가고 만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보신과 화신은 참된 부처가 아니요 또한 법을 설하는 자가 아니다.'고 하였다. 다만 자기의 마음을 알기 만 하면 나[我]라고 할 것도 없고 또한 남[人]도 없어서 본래 그대로 부처이니라." 問 如何是佛 師云 卽心是佛 無心是道 但無生心動念 有無長短 彼我能 所等心 心本是佛 佛本是心 心如虛空 所以云 佛眞法身 猶 若虛空 不用別求 有求皆苦 設使恒沙劫 行六度萬行 得佛 菩提 亦非究竟 何以故 爲屬因緣造作故 因緣 若盡 還歸無 常 所以 云 報化 非眞佛 亦非說法者 但識自心 無我無人 本來是佛 3. 기틀을 쉬고 견해를 잊음 "성인의 무심은 곧 부처의 경지이지만 범부의 무심은 공적한 상 태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까?" "법에는 범, 성의 구별이 없으며 또한 공적한 상태에 빠지는 것도 없다. 법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없다는 견해도 내지를 말라. 또한 법은 본래 없지 않으나, 있다는 견해도 내지 말라. 법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모두 뜻[情]으로 헤아리는 견해로서, 마치 허깨비 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보고 듣는 것은 마치 허 깨비같고, 사량하고 느끼는 것이 바로 중생이니라'고 하였다. 조사문 중에 있어서는 오로지 마음을 쉬고 알음알이를 잊는 것을 논할 뿐이 다. 그러므로 마음을 쉬어 버리면 부처님의 도가 융성해지고, 분별하 면 마구니의 장난이 치성해지느니라." 問 聖人無心 卽是佛 凡夫無心 莫沈空寂否 師云 法無凡聖 亦無沈寂 法本不有 莫作無見 法本不無 莫 作有見 有之與無 盡是情見 猶如幻峠 所以云 <見聞 如幻 峠 知覺 乃衆生> 祖宗門中 祇論息機忘見 所以 忘機則佛 道降 分別則魔軍熾 4. 마음과 성품이 다르지 않다 "마음이 본래로 부처인데 6도만행을 다시 닦아야 합니까?" "깨달음은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지 6도만행과는 상관이 없느니 라. 6도만행이란 그저 교화의 방편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쪽의 일 일뿐이다. 설사 보리, 진여와 실제의 해탈법신과 나아가 10지 4과 등 의 성인의 지위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교화 제도하는 방편의 문일 뿐이어서, 부처님의 마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느니라. 마음이 곧 그대로 부처이니 교화 제도하는 모든 방편문 가운데서 부처님의 마음이 으뜸이니라. 다만 생사, 번뇌 따위의 마음만 없으면 보리 등 의 법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말씀 하신 모든 법은 나의 모든 마음을 제도하시기 위함이로다. 나에게 일체의 마음이 없거니, 어찌 일체법을 쓰리오'라고 하였다. 부처님으 로부터 역대 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른 것은 말하지 않으셨고, 오직 한 마음만을 말했을 뿐이며, 또한 일불승(一佛乘)만을 말하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시방을 두루 살펴보아도 다시 다른 승(乘)이 없나니, 지금 여기에 남아 있는 대중들은 곁가지와 잎은 없 고 오로지 모두 잘 익은 열매들뿐이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뜻은 쉽게 믿기가 어렵다. 달마스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양(梁), 위(魏) 두 나라에 머물렀는데, 오직 혜가(慧可 : 487-593)스님 한 분만이 자기 의 마음을 가만히 믿고 말 끝에 문득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았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함께 없음을 이름하여 큰 도라고 하느니라. 큰 도 는 본래로 평등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이 하나의 참 성품으로 같 다는 것을 깊이 믿어야 한다. 마음과 성품이 본래 다르지 않으므로 성품이 곧 마음이니라. 마음이 성품과 다르지 않은 사람을 일컬어 조사(祖師)라고 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음의 성품을 알았을 때 비로소 불가사의하다고 말할 수 있도다'고 하였다." 問 心旣本來是佛 還修六度萬行否 師云 悟在於心 非關六度萬行 六度萬行 盡是化門接物度生 邊事 設使菩提眞如 實際解脫法身 直至十地四果聖位 盡是 度門 非關佛心 心卽是佛 所以 一切諸度門中 佛心 第一 但無生死煩惱等心 卽不用菩提等法 所以道 佛說一切法 度 我一切心 我無一切心 何用一切法 從佛至祖 不論別事 唯論一心 亦云一乘 所以 十方諦求 更無餘乘 此衆 無枝葉 唯有諸貞實 所以 此意難信 達磨來此土 至梁魏二國 祇有 可大師一人 密信自心 言下 便會卽心是佛 身心俱無 是名 大道 大道 本來平等 所以 深信含生 同一眞性 心性不異 卽性 卽心 心不異性 名之爲祖 所以云 認得心性時 可說不 思議 5. 모양 있는 것은 허망하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십니까?" "정말로 여래께서 제도할 중생은 없느니라. 나[我]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나 아님이야 어찌 얻을 수 있겠느냐! 부처와 중생을 모두 다 얻을 수 없느니라." "현재 부처님의 32상(相)과 중생 제도가 분명히 있는데 스님께서 는 어찌 없다고 말슴하십니까?"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모양이 있는 존재는 모두가 허망하 니, 만약 모든 모양을 보되 모양이 아닌 줄을 알면 곧 여래를 보게 되느니라'고 하셨다.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것은 모두 네가 허망하게 지어낸 견해로서, 오로지 본래의 마음을 알지 못한 탓으로 그같은 잘못된 견해를 내게 된 것이니라. 부처의 견해를 내는 순간 바로 부 처에 끄달리고, 중생의 견해를 내는 순간 중생에 끄달린다.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견해를 내고, 더럽느니 깨끗하다느니 하는 견해를 내 는 등이 모두 그 장애를 받느니라. 그것들이 너의 마음을 가로 막기 때문에 결국 윤회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원숭이가 무언가를 들엇다 놨다 하느라고 쉴 때가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진정한 배움이란 모름지기 배울 것이 없어야 한다. 범부도 성인도 없고 깨끗함도 더 러움도 없으며, 큼도 없고 작음도 없으며 번뇌도 없고 인위적 작위 도 없다. 이와 같은 한 마음 가운데서 바야흐로 방편으로 부지런히 장엄하는 것이다. 설혹 네가 3승 12분의 가르침과 모든 이론들을 배 운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가진 것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오직 침상 하나만을 남겨 두고 병들어 누워 있 다'고 한 말은 바로 모든 견해를 일으키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어서 법의 장애를 받지 않고, 삼계의 범, 성 의 경계를 훌쩍 벗어나야만 비로소 세간을 벗어난 부처님이라고 하 느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허공처럼 의지할 바 없음에 머리숙여, 외도의 굴레를 벗어나는도다'고 하였다. 마음이 이미 다르지 않기 때문에 법 또한 다르지 않으며, 마음이 하염 없으므로 법 또한 하염이 없다. 만법이 모두 마음으로 말미암 아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비었기 때문에 모든 법이 공 하며, 천만 가지 중생들도 모두 다 같은 것이다. 온 시방의 허공계가 같은 한마음의 본체이니, 마음이란 본래 서로 다르지 않고 법 또한 다르지 않건만, 다만 너의 견해가 같질 않으므로 차별이 있게 되느 니라. 비유하면 모든 하늘사람들이 다 보배 그릇으로 음식을 받아 먹지만 각자의 복덕에 따라 밥의 빛깔이 다른 것과 같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실로 작은 법도 얻은 것이 없으니, 이 것을 이름하여 무상정각이라 한다. 오로지 한 마음일 뿐, 실로 다른 모양이 없으며, 또한 광채가 빼어날 것도 없고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다. 나을 것이 없기 때문에 부처라는 모양이 없고,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모양이 없다." "마음이야 모양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부처님의 32상 (相) 80종호(種好)와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는 일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32상은 모양에 속한 것이니, '무릇 모양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 다'라고 한 것이요, 80종호는 색깔에 속한 것이니, '만약 겉 모습으로 나를 보려 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問 佛度衆生否 師云 實無衆生如來度者 我尙不可得 非我 何可得 佛與衆 生 皆不可得 云 現有三十二相及度衆生 何得言無 師云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佛與衆 生 盡是汝作妄見 只爲不識本心 作見解 裳作佛見 便被 佛障 作衆生見 被衆生障 作凡作聖 作淨作穢等見 盡成其 障 障汝心故 摠成輪轉 猶如 放一捉一 無有歇期 一等 是學 直須無學 無凡無聖 無淨無垢 無大無小 無漏無爲 如 是一心中 方便勤莊嚴 聽汝學得三乘十二分敎 一切見解 摠 須捨却 所以 除去所有 唯置一牀 寢疾而臥 祇是不起諸見 無一法可得 不被法障 透脫三界凡聖境域 始得名爲出世佛 所以云 <稽首如空無所依 出過外道> 心旣不異 法亦不異 心旣無爲 法亦無爲 萬法 盡由心變 所以 我心空故 諸法空 千品萬類 悉皆同 盡十方空界 同一心體 心本不異 法亦不 異 祇爲汝見解不同 所以差別 譬如諸天 共寶器食 隨其福 德 飯色 有異 十方諸佛 實無少法可得 名爲阿뇩菩提 祇是 一心 實無異相 亦無光彩 亦無勝負 無勝故 無佛相 無負故 無衆生相 云 心旣無相 豈得全無三十二相八十種好 化度衆生耶 師云 三十二相 屬相 凡所有相 皆是虛妄 八十種好 屬色 若以色見我 是人 行邪道 不能見如來 6. 한 마음의 법 "부처의 성품과 중생의 성품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성품 자체는 같고 다름이 없으나 만약 3승의 가르침에 의거해 말한다면 부처의 성품과 중생의 성품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3승의 인과가 있어서 같고 다름이 있느니라. 그러나 만약 불승(佛 乘)과 조사가 서로 전한 것에 의거해 보면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 고 오로지 한마음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마음은 같지도 않고 다르 지도 않으며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오직 이 일승(一乘)의 도뿐이요, 2승도 없고 3승도 없느니라. 그러나 부처님의 방편설만은 제외하노라'고 하셨다. 問 佛性與衆生性 爲同 爲別 師云 性無同異 若約三乘敎 卽說有佛性有衆生性 遂有三乘 因果 卽有同異 若約佛乘及祖師相傳 卽不說如是事 唯指一 心 非同非異 非因非果 所以云 <唯此一乘道 無二亦無三> 除佛方便說 7. 모든 견해를 여읨이 무변신보살 "무변신보살(無邊身菩薩)은 왜 여래의 정수리를 보지 못합니 까?" "실로 볼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무변신보살이란 곧 여래이기 때문에 응당 보지 못한다. 다만 너희에게 부처라는 견해를 짓지 않 아서 부처라는 변견(邊見)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중생이라는 견해 를 짓지 않아서 중생이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있다[有]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있다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없다[無]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없다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범부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범부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나아가 성 인이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성인이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 는 것이다. 다만 모든 견해만 없으면 그대로가 곧 가이 없는 몸[無 邊身]이니라. 그러나 무엇인가 보는 곳이 있으면 곧 외도라고 부른 다. 외도란 모든 견해를 즐기고 보살은 모든 견해에 있어서도 흔들 리지 않으며, 여래란 곧 모든 법에 여여(如如)한 뜻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미륵도 또한 그러하고 모든 성현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 다. 여여하기 때문에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볼 것도 들을 것도 없다. 여래의 정수리는 두렷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두렷 이 보는 것도 없으므로, 두렷하다는 변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 므로 부처님 몸은 하염 없으신 것이다. 숫자로써 헤아리는 범주에 속하지도 않지만, 다만 방편으로 허공에 비유할 뿐이니라. '원만하기 가 태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으며' 한가로이 일삼을 것이 없다. 다른 경계를 억지로 끌어들여 설명하려 하지 말 것이니, 설명하려 들면 벌써 식[識]이 이뤄지고 만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원 성실성(圓成實性)은 의식의 바다에 잠겨서 나부끼는 쑥대처럼 흘러 도네'라고 하였다. 그저 말하기를 '나는 알았으며 배워서 얻었으며, 깨달았으며, 해탈하였으며, 도의 이치를 얻었노라'고 한다. 그러나 자 기가 강한 곳에서는 뜻대로 되지만 약한 곳에서는 뜻대로 되질 않는 다면 이런 견해가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내 너에게 말하노니, 한가 하여 스스로 일 없도록 하여 쓸데없이 마음을 쓰지 말라. '참됨을 구 할 필요가 없나니, 오직 모든 견해를 쉴지니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 로 안으로 봄[內見]과 밖으로 봄[外見]이 모두 잘못이며 부처의 도와 마구니의 도가 모두 나쁜 것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문수보살이 잠깐 두 견해를 일으켰다가 그만 두 철위산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다. 문수보살은 참된 지혜의 상징이고 보현보살은 방편적인 지혜의 상징이다. 방편과 참됨이 서로서로 작용을 하여 끝내는 방편과 참됨 그것마저도 사라지고 오로지 한 마음뿐인 것이다. 마음은 결코 부처 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서로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이 아닌데, 부처 의 견해를 갖기만 하면 바로 중생의 견해를 내게 되느니라. 있다는 견해[有見], 없다는 견해[無見], 영원불변하다는 견해[常見], 단멸한다 는 견해[斷見]가 바로 두 철위산 지옥을 이룬다. 이처럼 견해와 장애 를 받기 때문에 역대의 조사들께서 일체 중생의 본래 몸과 마음이 그대로 부처임을 바로 가리키신 것이다. 이것은 닦아서 되는것도 아 니고 점차적인 단계를 밟아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밝음이나 어두움에 속하지도 않아서, 밝음이 아니기 때문에 밝음도 없으며 어 둠이 아니기 때문에 어두움도 없다. 그러므로 밝음 없음[無明]도 없 으며 또한 밝음 없음이 다함[無明盡]도 없다. 우리이 선가의 종문에 들어와서는 누구든지 뜻을 간절하게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는 것을 이름하여 법이라 하고 법을 보기 때문에 부처라고 하며, 부처와 법이 모두 함께 없는 것을 승(僧)이라 부르며, 하릴없는 중이 라 부르며, 또한 한몸의 삼보[一 三 ]라 하느니라. 대저 법을 구하 는 이는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아서 마땅히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하느니라.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랄 것도 없으며,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법이랄 것도 없으며, 대중에 집 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승(僧)이랄 것도 없느니라." 問 無邊身菩薩 爲什�쒆螂멨凶蕎㈜� 師云 實無可見 何以故 無邊身菩薩 便是如來 不應更見 祇 敎 不作佛見 不落佛邊 不作衆生見 不落衆生邊 不作有 見 不落有邊 不作無見 不落無邊 不作凡見 不落凡邊 不作 聖見 不落聖邊 但無諸見 卽是無邊身 若有見處 卽名外道 外道者 樂於諸見 菩薩 於諸見而不動 如來者 卽諸法如義 所以云 <彌勒 亦如也 衆聖賢 亦如也> 如卽無生 如卽無 滅 如卽無見 如卽無聞 如來頂 卽是圓見 亦無圓見故 不落 圓邊 所以 佛身 無爲 不墮諸數 權以虛空 爲喩 圓同太虛 無欠無餘 等閑無事 莫强辯他境 辯着 便成識 所以云 <圓 成沈識海 流轉若飄蓬> 祇道 <我知也 學得也 契悟也 解 脫也 有道理也> 强處 卽如意 弱處 卽不如意 似者箇見解 有什�쒒쿵� 我向汝道 等閑無事 莫 用心 不用求眞 唯須 息見 所以 內見外見 俱錯 佛道魔道俱惡 所以 文殊 暫起 二見 貶向二鐵圍山 文殊 卽實智 普賢 卽權智 權實 相對 治 究竟 亦無權實 唯是一心 心且不佛不衆生 無有異見 裳 有佛見 便作衆生見 有見無見常見斷見 便成二鐵圍山 被見 障故 祖師 直指一切衆生 本心本體 本來是佛 不假修成 不 屬漸次 不是明暗 不是明故 無明 不是暗故 無暗 所以 無 無明 亦無無明盡 入我此宗門 切須在意 如此見得 名之爲 法 見法故 名之爲佛 佛法俱無 名之爲僧 喚作無爲僧 亦名 一體三寶 夫求法者 不着佛求 不着法求 不着衆求 應無所 求 不着佛求故 無佛 不着法求故 無法 不着衆求故 無僧 8. 한 법도 얻을 수 없다 "스님께서는 지금 법을 말씀하고 계시거늘 어찌하여 승(僧)이랄 것도 없고 법(法0이랄 것도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네 만약 가히 설명할 만한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음성으로서 부처님을 찾는 것'이 된다. 나[我]란 것이 있다고 견해를 내면 곧 처 소(處所)인 것이다. 법 또한 법이라 할 만한 것이 없으니 법이란 바 로 마음이니라.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이 마음의 법을 부촉할 때에 법이라 하는 법이 일찍이 무슨 법이던가. 법도 없고 본래 마음도 없으면 마음, 마음하는 법을 비로소 알리라. 실로 한 법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도량에 앉음이라고 한 다. 도량이란 오직 일체의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법이 본래 공(空)한 줄을 깨닫는 것을 공여래장(空如來藏)이라 하 는데,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엔들 티끌과 먼지가 있겠느냐. 만약 이 소식을 안다면 유유자적하게 소요함인들 논할 바 있겠느냐. 問 和尙 見今說法 何得言無僧亦無法 師云 汝若見有法可說 卽是以吟聲求我 若見有我 卽是處所 法亦無法 法卽是心 所以 祖師云 <付此心法時 法法 何曾 法 無法無本心 始解心心法> 實無一法可得 名坐道場 道場 者 祇是不起諸見 悟法本空 喚作空如來藏 本來無一物 何 處 有塵埃 若得此中意 逍遙 何所論 9. 한 물건도 없음[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하신다면 한 물건도 없음이 과연 옳은 것입니까?" "없다고 해도 맞지 않다. 깨달음이란 옳은 곳도 없으며 그렇다고 앎이 없는 것도 없다." 問 本來無一物 無物 便是否 師云 無亦不是 菩提 無是處 亦無無知解 10. 마음 밖에 다른 부처가 없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너의 마음이 부처이니라. 부처는 곧 마음이니, 마음과 부처가 서 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을 떠나서는 따로 부처가 없느니라." "만약 자신의 마음이 부처라 한다면,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오시어 어떻게 그것을 전수하셨습니까?"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오셔서 전한 것은 오직 마음의 부처이니라. 즉 너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바로 가르쳐 주신 것이며, 마음과 마 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조사라 부르느니라. 만약 곧바로 이 뜻을 깨닫는다면, 곧 3승의 모든 지위를 단박에 뛰어넘어서 본래의 부처 인 것이니, 결코 점차로 닦음에 의지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니라." "만약 그러다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무슨 법을 말씀하십니까?"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시사 오로지 한 마음의 법 만을 말씀하시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마하대가섭에게 그것을 은 밀히 부촉하셨느니라. 이 마음법[心法]의 본체는 허공계를 다하여 온 법계를 두루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이치라고 부른다. 이러한 법 을 논하건대 너는 어찌 언어, 문자로써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또한 한 기틀, 한 경계 위에서 결코 심법([心法)을 볼 수 없는 것이니, 오로지 묵묵히 계합할 따름이니라. 이 하나의 문을 얻는 것을 이름 하여 하염없는 법의 문[無爲法門]이라 한다. 만약 깨쳐 알고자 한다 면 다만 무심을 알아야 한다. 홀연히 깨치면 곧 되는 것이요, 만약 마음을 써서 배워 깨달으려 하면 그럴수록 더욱더 멀어지느니라. 갈 라진 마음과 모든 취사(取捨)하는 마음이 없어서, 나무와 돌 같은 마 음이 되어야만 비로소 도를 배울 분(分)이 있느니라." "지금 갖가지 망념이 있는데, 스님께서 어찌하여 없다고 하십니 까?" "망념은 본시 본체가 없는 것인데, 너의 마음이 허망하게 일으킨 것이다. 만약 네가 마음이 부처임을 안다면, 마음은 본래 허망함이 없는 것이어늘, 어찌 마음을 일으켜 다시 망념을 알려 하느냐? 네 만약 마음을 내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자연히 망념은 없을 것 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나고, 마음 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지금 바로 망념이 일어날 때 부처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네 지금 망념이 일어난 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 깨달음이 바로 부처님이다. 그런 가운데 망념이 없다면, 부처 또한 없느니라.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네가 마음을 일으켜 부처의 견해를 지어서 문득 이룰만한 부처가 있다고 하며, 중생의 견해를 지어서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하는데,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 모조리 너의 견해가 작용하는 곳이기 때문이니라. 만약 일체의 견해가 없다면 부 처는 어느 곳에 있겠느냐? 마치 문수가 부처라는 견해를 일으키자마 자 바로 두 철위산 지옥에 떨어진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이제 바로 깨달았을 때 부처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물음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깨달음은 무엇으로부터 일어났 느냐? 일상의 어묵동정간에 모든 소리와 빛깔이 모두 불사(佛事) 아 님이 없거늘 어느 곳에서 부처를 찾겠느냐? 머리 위에 머리를 얹지 말며, 부리 위에 부리를 더하지 말라. 그저 다른 견해만 내지 않으면 산은 산, 물은 물, 승(僧)은 승, 속(俗)은 속일 뿐이니라. 산하대지와 일월성신이 모두 너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며, 삼천대천 세계가 모 두 너의 본래 면목인 것이다. 그런데 어느 곳에 허다한 일들이 있겠 느냐?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눈 가득히 푸른 산이니라. 허공세계가 밝고 깨끗하여 한 터럭만큼도 너에게 견해를 짓게 하지 않는다. 그 러므로 모든 소리와 빛깔들이 그대로 부처님 지혜의 눈이니라. 법은 홀로 일어나지 않고 경계를 의지해야만 비로소 생긴 것이니, 경계 때문에 그 많은 지혜가 있는 것이다. 종일 말하나 일찍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종일 들으나 일찍이 무엇을 들었느냐? 그러므로 석 가세존께서 49년 설법하셨어도 일찍이 한 글자도 결코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니라." 問 何諸是佛 師云 汝心 是佛 佛卽是心 心佛不異故 云 <卽心卽佛> 若 離於心 別更無佛 云 若自心是佛 祖師西來 如何傳授 師云 祖師西來 唯傳心佛 直指汝等心 本來是佛 心心不異 故 名爲祖 若直下 見此意 卽頓超三乘一切諸位 本來是佛 不假修成 云 若如此 十方諸佛 出世 說於何法 師云 十方諸佛 出世 祇共說一心法 所以 佛 密付與摩詞大 迦葉 此一心法體 盡虛空 法界 名爲諸佛理 論這箇法 豈 是汝於言句上 解得他 亦不是於一機一境上見得他 此意 唯 是默契 得這一門 名爲無爲法門 若欲會得 但知無心 忽悟 卽得 若用心擬學取 卽轉遠去 若無岐路心 一切取捨心 心 如木石 始有學道分 云 如今 現有種種妄念 何以言無 師云 妄本無體 卽是汝心所起 汝若識心是佛 心本無妄 那 得起心 更認於妄 汝 若不生心動念 自然無妄 所以云 <心 生則種種法 生 心滅則種種法 滅> 云 今正妄念起時 佛在何處 師云 汝今覺妄起時 覺 正是佛 可中 若無妄念 佛亦無 何 故 如此 爲汝起心作佛見 便謂有佛可成 作衆生見 便謂有 衆生可度 起心動念 摠是汝見處 若無一切見 佛 有何處所 如文殊 裳起佛見 便貶向二鐵圍山 云 今正悟時 佛在何處 師云 問從何來 覺從何起 語默動靜一切聲色 盡是佛事 何 處覓佛 不可更頭上安頭 上加 但莫生異見 山是山水是 水 僧是僧俗是俗 山河大地日月星辰 摠不出汝心 三千世界 都來是箇汝自己 何處 有許多般 心外無法 滿目靑山 虛空 世界 地 無絲髮許 與汝 作見解 所以 一切聲色 是佛之 慧目 法不孤起 仗境方生 爲物之故 有其多智 終日說 何曾 說 終日聞 何曾聞 所以 釋迦四十九年說 未曾說着一字 11. 보리의 마음 "만약 그렇다면 어느 곳이 깨달음입니까?" "깨달음은 일정한 처소가 없느니라. 부처라 해서 역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며, 중생이라 해서 깨달음을 잃는 것도 아니다. 깨달 음은 몸으로 얻지 못하며, 마음으로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니, 일체중 생이 그대로 깨달음의 모양이니라." "그러면 어떻게 보리심을 냅니까?" "보리는 얻는 것이 아니다. 네 지금 얻음이 없는 마음을 내기만 하면, 결정코 한 법도 얻을 수 없는 것 그대로가 보리의 마음이니라. 보리는 머물 자리가 없기 때문에 얻을 그 무엇도 없다. 그러므로 말 씀하시기를 '내가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작은 법도 얻을 수 없었으 므로,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하셨느니라'고 하셨다. 일체 중생 이 본래 보리이므로, 디시 보리를 얻으려 할 필요가 없음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 네 이제 보리심을 낸다는 말을 듣고 한 마음을 가지고 배워서 부 처를 얻는다고 말하여, 오로지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네가 3대아승 기겁을 닦는다 해도 다만 보신, 화신의 부처만을 얻을 뿐, 너의 근본 연원인 참된 성품의 부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 로 말하기를 '밖으로 구하는 모양있는 부처는 그대와는 닮지 않았도 다'고 하였다." 云 若如此 何處是菩提 師云 菩提無是處 佛亦不得菩提 衆生 亦不失菩提 不可以 身得 不可以心求 一切衆生 卽菩提相 云 如何發菩提心 師云 菩提 無所得 今但發無所得心 決定不得一法 卽菩 提心 菩提 無住處 是故 無有得者 故 云 <我於燃燈佛所 無有少法可得 佛 卽與我授記> 明知一切衆生 本是菩提 不 應更得菩提 今聞發菩提心 謂將一箇心 學取佛去 唯擬作 佛 任 三祇劫修 亦祇得箇報化佛 與 本源眞性佛 有何交 涉 故 云 <外求有相佛 與汝不相似> 12. 수은의 비유 "본래로 이미 부처일진대 어찌하여 4생과 6도가 있어 갖가지로 형상과 모양이 같지 않습니까?" "모든 부처님께서는 본체가 두렷하여 거기에 더 불어나고 줄어들 것이 없다. 또한 6도에 흘러들어도 곳곳마다 모두 원만하고, 여러 만 물이 모두 낱낱이 부처이니라. 이것은 마치 한 덩어리의 수은이 여 러 곳으로 나뉘어 흩어졌어도 방울방울이 모두 둥근 것과 같다. 나 뉘지 않았을 때에도 한 덩이였을 뿐이니, 이는 하나가 곧 일체요 일 체가 곧 하나이니라. 온갖 형상과 모습은 마치 집과 같다. 나귀의 집 을 버리고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사람의 몸을 버리고 하 늘의 몸이 되기도 하며, 성문, 연각, 보살, 부처의 집은 모두 네 자신 이 취하고 버리는 곳이니라. 그래서 모든 구별이 있는 것이지만, 본 래 근원의 성품에는 무슨 차별이 있겠느냐?" 問 本旣是佛 那得更有四生六道 種種形貌不同 師云 諸佛 體圓 更無增減 流入六道 處處皆圓 萬類之中 箇箇是佛 譬如一團水銀 分散諸處 顆顆皆圓 若不分時 祇 是一塊 此一卽一切 一切卽一 種種形貌 喩如屋舍 捨驢屋 入人屋 捨人身至天身 乃至聲聞緣覺菩薩佛屋 皆是汝取捨 處 所以有別 本源之性 何得有別 13. 무연자비 "모든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자비를 베풀어 중생을 위해 법을 설 하십니까?" "부처님의 자비란 인연이 없기 때문에 큰 자비라고 한다. 사랑함 [慈]이란 이룰 만한 부처가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고, 슬퍼함 [悲]이란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다. 설하시는 법은 설함도 없고 보임도 없으며, 그 법을 듣는 자는 들음도 얻음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마술사가 마술로 만들어 놓은 인간을 위 하여 설법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법을 어떻게 '내가 선지식으로부터 말끝에서 알아차리고 이해하여 깨달았다'고 말하겠으며, 이러한 자비 를 어떻게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가지고 배워서 얻겠느냐? 스스로 본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면 마침내 아무런 이익도 없느니라." 問 諸佛 如何行大慈悲 爲衆生說法 師云 佛慈悲者 無緣故 名大慈悲 慈者 不見有佛可成 悲者 不見有衆生可度 其所說法 無說無示 其聽法者 無聞無得 譬如幻士爲幻人說法 者箇法 若爲道我從善知識言下領得 會也悟也 者箇慈悲 若爲汝起心動念 學得他 見解 不是自 悟本心 究竟無益 14. 정진이란? "어떤 것이 정진(精進)입니까?" "몸과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가장 굳건한 정진이니라. 마음 을 일으켜서 밖으로 구하기만 하면 '가리왕이 사냥놀이를 좋아함' 이라고 부른다. 마음이 밖으로 나다니지 않는 것이 곧 인욕선인이며, 몸과 마음이 함께 없음이 곧 부처님의 도이니라." 問 何者是精進 師云 身心不起 是名第一牢强精進 裳起心 向外求者 名爲 歌利王 愛遊獵去 心不外遊 卽是忍辱仙人 身心俱無 卽是 佛道 15. 무심한 행 "만약 마음이 없으면 이 도를 행하여 얻을 수 있습니까?" "마음없음[無心]이 바로 도를 행함이거늘 거기에 다시 더 얻고 말 고 할 것이 있겠느냐? 만약 잠깐이라도 한 생각 일으키면 곧 경계이 고, 한 생각 없다 하여도 경계이니라. 망령된 마음이 스스로 없어지 면 더 이상 쫓아가 찾을 것이 없느니라." 問 若無心 行此道得否 師云 無心 便是行此道 更說什�쑼阻ⓠ略� 且如瞥起一念 便是境 若無一念 便是境 妄心 自滅 無復可追尋 16. 삼계(三界)를 벗어남 "어떤 것이 3계를 벗어나는 것입니까?" "선과 악을 전혀 생각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곧 3계를 벗어나 느니라.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신 것은 3계를 부수기 위해서이다. 만약 모든 마음이 없다면 3계 또한 없느니라. 가령 작은 티끌 하나 를 100등분 부수어 그 중 99등분을 없애고 한 등분만 남았더라도, 대승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것이 못된다. 100등분이 모두 다 없어야만 대승에 있어서 비로소 잘 벗어났다고 하느니라." 問 如何是出三界 師云 善惡 都莫思量 當處便出三界 如來出世 爲破三有 若 無一切心 三界 亦非有 如一微塵 破爲百分 九十九分 是無 一分 是有 摩訶衍 不能勝出 百分 俱無 摩訶衍 始能勝出 17. 마음이 부처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라.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꿈 틀거리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두다 불성이 있어서, 동일한 마음의 본체를 지녔느니라. 그러므로 달마스님이 인도로부터 오셔서 오직 한마음의 법만을 전하셨으니,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곧 바르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깨달음이란 수행을 빌려서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의 자기 마음을 알아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요, 결코 달리 구하지 말라. 어떻게 자기의 마음을 아는 것인가? 지금 말하는 것이 바로 너의 마음이니라. 만약 말하지 않고 작용 도 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본체는 허공과 같아서 모양도 없고, 또한 방위와 처소도 없다. 그렇다고 그저 한결같이 없는 것만도 아니다. 있으면서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조사스님께서는 '참된 성품의 마음 자리[眞性心地藏]는 머리도 꼬리도 없는지라. 인연에 호응하여 중생 을 교화하나니, 방편으로 그것을 지혜라 부른다'고 하셨다. 만약 인 연에 호응하지 않을 때라도 있고 없음을 말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바로 호응할 때라도 또한 종적이 없느니라. 이미 이런 줄 알았을진 댄 '없음' 가운데 쉬어 깃든다면 곧 모든 부처님의 길을 가는 것이니 라.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머문 바가 없이 그 마음이 난다'고 하셨으니, 모든 중생이 생사에 윤회하는 것은 뜻으로 반연하고 분주 시 조작하는 마음이 6도에서 멈추지 못하여, 마침내 갖가지 고통을 받게 되느니라. 유마거사가 이르기를, '교화하기 힘든 사람은 원숭이 처럼 의심이 많기 때문에 여러 가지 법으로 제어한 다음에 비로소 조복시킨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마음이 나면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지느니라. 그러므로 일체 법이 마 음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며, 인간, 천상, 지옥, 6도, 아수라가 모두 마음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당장이라 도 무심하기만 하면 모든 반연은 단박에 쉬게 되며 망상 분별을 내 지 않으면 남도 없고 나도 없으며, 욕심과 성냄도 없고, 밉고 고움도 없으며, 이김도 짐도 없느니라. 허다한 여러 가지 망상을 없애 버리기만 하면 자성(自性)은 본래 부터 청정한 것이니, 곧 깨달음의 법을 수행하여 부처님과 나란히 되는 것이니라. 만약 이 뜻을 알지 못한다면, 설사 널리 배우고 부지 런히 수행하며, 나무먹이를 먹고 풀옷을 입는 고행을 한다 하더라도 자기의 마음은 알지 못한 것이니라. 그것을 모두 삿된 수행이라고 하며 모두 다 천마(天魔), 외도, 물과 뭍의 여러 귀신 노름을 하는 것이니, 이같이 수행한들 무슨 이로움이 있느냐? 지공이 말하기를 '본래 몸은 자기의 마음이 짓는 것이어늘, 어찌 문자 속에서 구하리 오?' 하였다. 지금 자기 마음을 알아서 사량분별하는 망상을 쉬기만 하면 6진의 번뇌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유마경>에 이르기를 '오직 침상 하나만 두고 병들어 누워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니라. 지금 앓아 누워서 반연을 모두 쉬어 망상 이 그쳐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보리이니라. 지금 만약 마음 속이 분분히 시끄러워 안정되지 않았다면, 너의 배움이 비록 3승, 4과, 10지의 모든 지위에 이르렀다 해도 아직 범, 성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함이 옳다. 모든 행위는 끝내 덧 없음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은 힘이 다할 때가 있기 마련이니, 마치 화살을 공중에 쏘면 얼마 안 가 힘이 다해 땅에 도록 떨어지는 것처 럼, 생사의 윤회에 다시 돌아가고 만다. 이와 같은 수행은 부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요, 헛되이 쓰라린 고초를 받을 뿐이니, 어찌 크게 잘못됨이 아니겠느냐, 지공이 말하기를 '세간에 뛰어난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대승의 법약을 잘못 먹은 것이다'고 하였다. 단지 다 니고 머물고 앉아 눕는 모든 시간 가운데서 오로지 무심함을 배우기 만 하면, 분별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으며, 또한 머물러 집착할 바도 없다. 종일토록 둥둥 떠오르는 기운데로 내맡겨 둔 것이, 마치 바보 와도 같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를 모른다 하여도, 일부러 알리거나 모르게 할 필요가 없다. 마음이 마치 큰 바위덩이와 같아 서 도무지 갈라진 틈이 없고, 일체 법이 너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여 올연히 어디에도 잡착함이 없어야 한다. 이와 같아야만 비로 소 조금은 상응할 분(分)이 있다 하리라. 3계의 경계를 툭 뚫고 지나기만 하면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셨 다고 하는 것이며, 번뇌 없는 마음의 모습을 바로 샘이 없는 지혜 [無漏智]라고 부른다. 인간과 천상업을 짓지 않으며, 그렇다고 지옥 업을 짓지도 않으며, 나아가 일체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모든 반 연이 전혀 생기지 않으면 곧 이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사람인 것이 다. 그렇게 되면 한결같이 나지 않음[不生]만은 아니어서, 뜻 따라 날[生] 따름이니라. 경에 이르시기를 '보살은 자기 뜻대로 나는 몸을 가졌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만약 마음이 없음을 모르고 모 양에 집착하여 갖가지 견해를 짓는 것은 모두 마구니의 업에 속하는 것이다. 나아가 정토의 수행[淨土佛事]을 한다 하더라도 모두 업을 짓는 것으로써, 이것을 부처의 장애[佛障]라고 하느니라. 그것이 그 대의 마음을 가로막기 때문에 인과에 얽매여, 가고 머무름에 조금도 자유로움이 없다. 왜냐하면 보리 등의 법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사람을 교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마 치 누런 잎사귀를 돈이라하여 우는 어린아이의 울음을 억지로 그치 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실로 법이 있지 않음을 무상정각이라 하나니, 지금 이미 이 뜻을 알았다면 어찌 구구한 설명이 더 필요하 겠느냐? 다만 인연따라 묵은 업을 녹일 뿐이요, 다시 새로운 재앙을 짓지 말라. 마음 속은 밝고 또 밝기 때문에 옛 시절의 견해를 모두 버려야 한다. 그래서 <유마경>에 이르기를 '가진 것을 없애 버린다' 고 하였으며, <법화경>에서는 '20년 동안 항상 똥을 치게 하셨다'고 하였느니라. 이것은 오로지 마음 속에 지은 바 견해를 없애게 하는 것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희론(戱論)의 똥을 쳐서 없앤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래장은 본래 스스로 공적(空寂)하여 결코 한 법에라도 멈춰 머무르지 않으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부처님의 나라도 또한 다 비었다'고 하셨느니라. 만약 부처님의 도를 닦아 배워서 얻는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견 해는 전혀 맞지가 않는 것이다. 혹은 한 기연이나 한 경계를 보이기 도 하며, 눈썹을 치켜뜨기도 하고 눈을 부라리기도 하여 어쩌다 서 로 통하기라도 하면 곧 말하기를, '계합하여 알았다'고 하며 혹은 '선 의 이치를 깨쳐서 증득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사람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도무지 아는 게 없 다가 그 사람을 대하여 무슨 도리라도 얻게 되면 마음 속이 문득 환 희하여 기뻐한다. 그러나 만약 상대에게 절복당하여 상대보다 못하 게 되면 속으로 섭한 생각을 품게 된다. 이처럼 마음과 뜻으로 배운 선(禪)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비록 그대가 자그마한 도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한낱 마음으로 헤아리는 법일 뿐이요, 우리 종문의 선도(禪道)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달마스님께서 면벽하신 것은 모든 사람들로 하 여금 전혀 견처(見處)가 없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마음 의 작용을 잊는 것은 부처님의 도이나, 분별망상은 마구니의 경계이 다'고 하였다. 이 성품은 네가 미혹했을 때라도 결코 잃지 않으며, 그렇다고 깨쳤을 때에도 역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니라. 천진스런 자 성은 본래 미혹할 것도 깨칠 것도 없으며, 온 시방의 허공계가 바로 나의 한마음의 본체이니라. 그러니 네 아무리 몸부림친다 해도 어찌 허공을 벗어날 수 있겠느냐? 허공이란 본래부터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번뇌라 할 것도 인위적 인 작위도 없으며, 미혹할 것도 깨칠 것도 없다. 그래서 '요연히 사 무쳐 보아 한 물건도 없나니,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고 하였으 며, 털끝만큼이라도 사량분별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니, 의지하여 기 댈 만한 것도 없으며, 달라붙을 것도 없다. 한 줄기 맑은 흐름이 자 성의 남이 없는 진리[無生法忍]이니, 어찌 머뭇거려 헤아리고 따질 수 있겠느냐! 참 부처는 입이 없기 때문에 설법할 줄 모르고, 진정 으로 들음은 귀가 없으니, 뉘라서 들을 수 있겠느냐! 수고하였다. 편 히들 하여라." 上堂云 卽心是佛 上至諸佛 下至蠢動含靈 皆有佛性 同一 心體 所以 達磨 從西天來 唯傳一心法 直指一切衆生 本來 是佛 不假修行 但如今 識取自心 見自本性 更莫別求 云何 識自心 卽如今言語者 正是汝心 若不言語 又不作用 心體如虛空相 似 無有相貌 亦無方所 亦不一向是無 有而不可見故 祖師 云 <眞性心地藏 無頭亦無尾 應緣而化物 方便呼爲智> 若 不應緣之時 不可言其有無 正應之時 亦無 跡 旣知如此 如今 但向無中 泊 卽是行諸佛路 經云 <應無所住 而生其 心> 一切衆生 輪廻生死者 意緣走作心 於六道 不停 致使 受種種苦 淨名 云 <難化之人 心如猿 故 以若干種法 制 禦其心然後 調伏> 所以 心生 種種法 生 心滅 種種法 滅 故知一切諸法 皆由心造 乃至人天地獄 六道 修羅 盡由心 造 如今 但學無心 頓息諸緣 莫生妄想分別 無人無我 無貪 瞋 無憎愛無勝負 但除却如許多種妄想 性自本來淸淨 卽是 修行菩提法 佛等 若不會此意 縱 廣學勤苦修行 木食草衣 不識自心 皆名邪行 盡作天魔 外道 水陸諸神 如此修行 當 復何益 誌公 云 <本體是自心作 那得文字中求> 如今 但 識自心 息却思惟妄想 塵勞自然不生 淨名 云 <唯置一牀 寢疾而臥> 心不起也 如今臥疾 攀緣 都息 妄想 歇滅 卽是 菩提 如今 若心裸紛紛不定 任 學到三乘四果十地諸位 合 殺祇向凡聖中坐 諸行 盡歸無常 勢力 皆有盡期 猶如箭射 於空 力盡還墜 却歸生死輪廻 如斯修行 不解佛意 虛受辛 苦 豈非大錯 誌公 云 <未逢出世明師 枉服大乘法藥> 如 今 但一切時中行住坐臥 但學無心 亦無分別 亦無依倚 亦 無住着 終日任運騰騰 如癡人相似 世人 盡不識 亦不 用敎人識不識 心如頑石頭 都無縫 一切法 透汝心不入 兀然無着 如此 始有少分相應 透得三界境過 名爲佛出世 不漏心相 名爲無漏智 不作人天業 不作地獄業 不起一切心 諸緣 盡不生 卽此身心 是自由人 不是一向不生 祇是隨意 而生 經 云 <菩薩 有意生身> 是也 忽若未會無心 着相而 作者 皆屬魔業 乃至作淨土佛事 皆成業 乃名佛障 障汝 心故 被因果管束 去住無自由分 所以 菩提等法 本不是有 如來所說 皆是化人 猶如黃葉 爲金 權止小兒啼故 實無有 法 名阿뇩菩提 如今 旣會此意 何用區區 但隨緣消舊業 更 莫造新殃 心裸明明 所以 舊時見解 摠須捨却 淨名 云 <除 去所有> 法華 云 <二十年中 常令除糞> 祇是除去心中作 見解處 又云 < 除戱論之糞> 所以 如來藏 本自空寂 不停留一法故 經云 <諸佛國土 亦復皆空> 若言佛道 是修 學而得 如此見解 全無交涉 或作一機一境 揚眉動目 祇對 相當 便道 <契會也> <得證悟禪理也> 忽逢一人 不解便 道 都無所知 對他若得道理 心中 便歡喜 若被他折伏 不如 他 便卽心懷 □ 如此心意學禪 有何交涉 任汝會得少許道 理 祇得箇心所法 禪道 摠沒交涉 所以 達磨面壁 者不令人 有見處 故 云 <忘機 是佛道 分別 是魔境> 此性 縱汝迷 時 亦不失 悟時 亦不得 天眞自性 本無迷悟 盡十方虛空界 元來是我一心體 縱汝動用造作 豈離虛空 虛空 本來無大無 小 無漏無爲 無迷無悟 了了見無一物 亦無人亦無佛 絶纖 毫的量 是無依倚 無粘綴 一道淸流 是自性無生法忍 何有 擬議 眞佛 無口 不解說法 眞聽 無耳 其誰聞乎 珍重 18. 유행(遊行) 및 기연(機緣) 대사는 본시 민현( 縣) 땅의 어른이시다. 어려서 본주(本州) 땅 황벽산으로 출가하셨다. 스님의 이마 사이에 솟아 오른 점은 구슬과 도 같았고, 음성과 말씨는 낭랑하고 부드러웠으며, 뜻을 깊고도 담박 하셨다. 뒷날 천태산(天台山)에 노니시다가 한 스님을 만났는데, 처 음인데도 오래 사귄 사람 같았다. 이윽고 함께 길을 가다가 개울물 이 갑자기 불어난 곳에 이르렀다. 그때 대사께서는 석장을 짚고 멈 추시니, 그 스님이 대사를 모시고 건너려고 하자, 대사께서 말씀하셨 다. "형씨가 먼저 건너시오." 그러자 그 스님은 곧 삿갓을 물 위에 띄우고 곧장 건너가 버렷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 어쩌다 저 나한 좀놈하고 짝을 했을까? 한 몽둥이로 때려죽 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어떤 스님이 귀종(歸宗)을 하직하는데 귀종이 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려는가?" "제방에 다섯 맛의 선[五味禪]을 배우러 갑니다." "제방은 다섯 맛의 선이지만 나의 이곳은 오직 한 맛의 선이라 네." "어떤 것이 한 맛의 선입니까?" 그러자 귀종이 문득 후려쳤다. 그 스님이 소리쳤다.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 귀종이 다르쳤다. "말해 봐라, 말해봐라." 그 스님이 입을 열려고 하자 귀종은 또 몽둥이를 내리쳤다. 그 스 님이 뒤에 대사의 회하에 이르자 대사께서 물었다. "어느 곳에서 오는가?" "귀종에서 옵니다." "귀종이 무슨 말을 하던가?" 그 스님이 앞날의 이야기를 그대로 말씀드리니, 대사께서는 곧 바 로 법좌에 올라가 그 인연을 들어서 말씀하셨다. "마조스님께서 84명의 선지식을 배출하긴 했으나, 질문을 당하면 모두가 똥이나 뻘뻘 싸는 형편들인데, 그래도 귀종이 조금 나은 편 이다." 대사께서 염관(鹽官 ?-842)의 회하에 있을 때에 대중(大中) 황제 는 사미승으로 있었다. 대사께서 법당에서 예불을 드리는데 그 사미 승이 말하였다.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으며, 대 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는 것이어늘, 장로께서는 예배하시어 무엇 을 구하십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아니하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아니하 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아니하면서, 늘 이같이 예배하느니라." "예배는 해서 무얼 하시렵니까?" 그러자 대사께서 갑자기 사미승의 뺨을 올려치니 그 사미승은 "몹시 거친 사람이군"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에 무슨 도리가 있길래 네가 감히 거칠다느니 섬세하다느니 뇌 까리느냐!"하고 뒤따라 또 뺨을 붙이니, 사미는 도망가 버렸다. 대사께서 제방을 행각하실 적에 남전(南泉 734-843)에 이르렀다. 하루는 점심 공양을 할 때 발우를 들고 남전의 자리에 가서 앉으셨 다. 남전이 내려와 보고는 대사께 물었다. "장로께서는 어느 시절에 도를 행하였오?" "위음왕 부처님 이전부터입니다." "그렇다면 내 손자뻘이 되는구먼." 그러자 대사는 곧바로 내려와 버렸다. 또 어느 날 대사께서 외출하려고 할 때에 남전이 말하였다. "이만큼 커다란 몸집에 조금 큰 삿갓을 쓰셨군!" "삼천대천 세계가 모두 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남전의 대답이로다." 그러자 대사는 삿갓을 쓰고 곧 가버렸다. 또 하루는 대사가 차당(茶堂)에 앉아 있는데 남전이 내려와 물었 다. "정과 혜를 함께 배워서 부처님의 성품을 밝게 본다 하는데, 이 뜻이 무엇이오?" "하루 종일 한 물건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레 바로 장로 견해인가요?" "부끄럽습니다." "장물[奬水] 값은 그만두어도 짚신 값은 어디서 받으란 말이오?" 그러자 대사는 문득 쉬어 버렸다. 뒷날 위산(瀉山 771-853)이 이 대화를 가지고 앙산(仰山 803-887) 에게 물었다. "황벽이 남전을 당해내지 못한 게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황벽에게는 범을 사로잡는 기틀이 있었음을 아 셔야 합니다." "그대의 보는 바가 그만큼 장하구나!" 하루는 대중이 운력을 하는데 남전이 대사께 물었다. "어디로 가는가?" "채소 다듬으러 갑니다." "무엇으로 다듬는가?" 대사가 칼을 일으켜 세우자 남전이 말하였다. "그저 손님 노릇만 할 줄 알지 주인 노릇은 할 줄 모르는군." 그러자 대사는 세 번을 내리 두드렸다. 하루는 새로 온 스님 다섯 명이 동시에 서로 보게 되었다. 그 중 에서 한 스님만은 예배를 올리지 않고 그저 손으로 원상(圓相)을 그 리면서 서 있었다. 이것을 본 대사가 그에게 말씀하셨다. "한 마리의 훌륭한 사냥개라고 말하는 줄 아느냐?" "영양(羚羊)의 기운을 찾아왔습니다." "영양이란 기운이 없거늘 너는 어디서 찾겠느냐?" "영양의 발자욱을 찾아 왔습니다." "영양은 발자욱이 없거늘 너는 어디서 찾겠느냐?" "그렇다면 그것은 죽은 영양입니다." 이 말을 듣자 대사는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튿날 법좌에 올라 설법을 끝내고 물러나면서 물었다. "어제 영양을 찾던 스님은 앞으로 나오너라." 그 스님이 바로 나오자 대사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어제 너와 대화를 하다가 끝에 가서 미처 다하지 못한 말 이 있는데, 어떤가?" 그 스님이 말이 없자 대사께서 말을 이었다. "본분 납승(本分衲僧)인가 했더니, 그저 뜻이나 따지는 사문이로 구나." 대사께서는 일찍이 대중을 흩으시고, 홍주(洪州) 당의 개원사(開 元寺)에 머물고 계셨다. 이 때에 상공 배휴거사가 어느 날 절로 들어오다가 벽화를 보고 그 절 주지스님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슨 그림입니까?" "고승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고승들의 겉모습은 여기에 있지만, 고승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 절 주지스님이 아무런 대답을 못하자 배휴가 "이 곳에 선승은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 "한 분이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상공은 마침내 대사를 청하여 뵙고, 전에 주지스님에게 물었던 일을 스님게 여쭈었다. 그러자 대사가 불렀다. "배휴!" "예!" "어디에 있는고?" 상공은 이 말 끝에 깨치고 대사를 다시 청하여 개당설법을 하시 게 하였다. 師 本是 中人 幼於本州黃蘗山 出家 額間降起如珠 音辭 朗潤 志意沖澹 後遊天台 逢一僧如舊識 乃同行 屬□水暴 漲 師倚杖而止 其僧 率師同過 師云 請兄先過 其僧 卽浮 笠於水上便過 師云 我却共箇稍子作隊 悔不一棒打殺 有僧辭歸宗 宗云 往甚處去 云 諸方 學五味禪去 宗云 諸 方 有五味禪 我這裏 祇是一味禪 云 如何是一味禪 宗便打 僧云 會也會也 宗云 道道 僧 擬開口 宗又打 其僧 後到師 處 師問 甚�쒟Φ� 云歸宗來 師云 歸宗 有何言句 僧遂거 前話 師乃上堂거此因緣云 馬大師 出八十四人善知識 問著 箇箇 地 祇有歸宗 較些子 師在鹽官會裏 大中帝爲沙彌 師於佛殿上禮佛 沙彌云 不著 佛求 不著法求 不著衆求 長老禮拜 當何所求 師云 不著佛求 不著法求 不著衆求 常禮如是事 沙彌云 用 禮何爲 師便掌 沙彌云 太序生 師云 這裏是什�쒊띨� 說序 說細 隨後又掌 沙彌便走 師行脚時到南泉 一日齋時 捧鉢向南泉位上坐 南泉 下來見 便問 長老什�쑺댓澐솎� 師云 威音王巳前 南泉云 猶是王 老師孫在 師便下去 師一日出次 南泉 云 如許大身材 戴箇些子大笠 師云 三千 大千世界總在裏許 南泉云 王老師 師戴笠便行 師一日 在茶堂內坐 南泉 下來 定慧等學 明見佛性 此理如 何 師云 十二時中 不依倚一物 泉云 莫便是長老見處�� 師 云 不敢 泉云 漿水錢 且置 草鞋錢 敎什�쒖藍� 師便休 後 山거此因緣 問仰山 莫是黃蘗 他南泉不得�� 仰山云 不然 須知黃蘗 有陷虎之機 山云 子見處得與�쒗� 一日 普請 泉問 什�쒟Λ� 師云 擇菜去 泉云 將什�쒢� 師 揷起刀子 泉云 只解作賓 不解作主 師 三下 一日 五人新到 同時相看 一人 不禮拜 以手 一圓相而立 師云 還知道好隻獵犬�� 云 尋羚羊氣來 師云 羚羊 無氣 汝向什�쒟γ� 云 尋羚羊 來 師云 羚羊 無 汝向什�쒟� 尋 云 尋羚羊跡來 師云 羚羊 無跡 汝向什�쒟γ� 云 與�� 則死羚羊也 師便休 來日陞座退 問 昨日尋羚羊僧出來 其 僧便出 師云 老僧 昨日 後頭未有語在 作�쒈� 其僧無語 師云 將謂是本色衲僧 元來祇是義學沙門 師曾散衆在洪州開元寺 裴相公 一日入寺行次 見壁 乃問 寺主 這 是什�� 寺主云 高僧 相公云 形影 在這裏 高 僧 在什�쒟� 寺主無對 相公云 此間 莫有禪僧�� 寺主云 有一人 相公遂請師相見 乃거前話問師 師召云 裴休 休應 諾 師云 在什�쒟� 相公於言下有省 乃再請師開堂 19. 술찌꺼기 먹는 놈 대사는 이에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모조리 술찌꺼기나 먹는 놈들이다. 이처럼 행각을 한답 시고 남들의 비웃음이나 사면서 모두 이렇게 안이하게 세월을 보내 고 있구나! 세월이 한 번 가면 언제 오늘이 또 오겠느냐? 이 큰 당 나라 땅 안에 선사(禪師)가 없음을 너희는 아느냐?" 이 때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제방에서 지금 선사들이 세상에 나와 여러 대중들을 바로 이끌 어 지도하시거늘, 어찌하여 스님께서는 선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 까?" "내 말은 선(禪)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선사(禪師)가 없다는 말 이니라." 뒷날 위산이 이 인연에 대해 앙산에게 물었다. "그래 네 생각은 어떠냐?" "거위왕이 젖을 고르는 솜씨는 본디 집오리 무리와는 다릅니 다." 그러자 위산이 말하기를, "이것은 참으로 가려내기 어렵느니라"고 했다. 上堂云 汝等諸人 盡是 酒糟漢 與�쒥셥� 笑殺他人 總似 與�쒒살� 何處更有今日 汝還知大唐國裏 無禪師�� 時有僧 問 祇如 諸方 見今出世 匡徒領衆 爲什�� 却道無禪師 師 云 不道無禪 祇道無師 後 山거此因緣問仰山 云 意作�� 生 仰山云 鵝王擇乳 素非鴨類 山云 此實難辨 20. 배휴의 헌시 어느 날 배상공이 불상 한 구를 대사 앞에 내밀면서 호궤(胡 )합 장하며 말씀드렸다. "청하옵건대 스님께서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배휴!" "예!" "내 너에게 이름을 다 지어 주었노라." 그러자 배상공은 곧 바로 절을 올렸다. 하루는 상공이 시(詩) 한 수를 대사께 지어올리자 대사께서 받으 시더니 그대로 깔고 앉아 버리면서 물었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몰라야만 조금은 낫다 하겠지만, 만약 종이와 먹으로써 형용하려 한다면 우리 선문(禪門)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상공의 시가 이러하였다. 대사께서 심인을 전하신 이후로 이마에는 둥근 구슬 몸은 칠척 장신이로다. 석장을 걸어 두신 지 십년 촉나라 물가에서 쉬시고 부배(浮杯)에서 오늘날 장( )의 물가를 건너왔네. 일천 무리의 용상대덕들은 높은 걸음걸이 뒤따르고 만리에 뻗친 향그런 꽃은 수승한 인연을 맺었도다. 스승으로 섬겨 제자 되고저 하오니 장차 법을 누구에게 부촉하시렵니까? 대사께서 대답하여 읊으셨다. 마음은 큰 바다와 같아 가이 없고 입으론 붉은 연꽃을 토하여 병든 몸 기르네. 비록 한 쌍의 일 없는 손이 있으나 한가한 사람에게 일찍이 공경히 읍(揖)한 적이 없었노라. 裴相 一日 托一尊佛於師前胡 云 請師安名 師召云 裴休 休應諾 師云 與汝安名竟 相公便禮拜 相公 一日 上詩一章 師接得便坐却 乃問 會�� 相公云 不會 師云 與�쒆戀� 猶 較些子 若形祇墨 何有吾宗 時曰 自從大士傳心印 額有圓 珠七尺身 掛錫十年棲蜀水 浮杯今日渡 濱 千徒龍象 隨高 步 萬里香花 結勝因 願欲事師爲弟子 不知將法付何人 師 答曰 心如大海無邊際 口吐紅蓮養病身 雖有一雙無事手 不 曾祇揖等閑人 21. 여래의 청정선 "도를 배우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잡된 학문과 모든 반연을 물리 쳐야 한다. 그리하여 결정코 구하지도 말고 집착하지도 않아서, 아주 깊고 깊은 법을 듣더라도 맑은 바람이 귓가에 잠깐 스쳐지나간 듯이 여기어, 그것을 쫓아가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로 여래선(如來禪)에 매우 깊숙히 들어가 참선을 한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 것이다. 위로부터 역대의 조사들께서 오로지 한마음[一心]만을 전하셨다. 결 코 두 법이 있을 수 없으니 마음이 그대로 부처임을 바르게 가르치 신 것이다. 등각이니 묘각이니 하는 지위와 차례를 단박에 뛰어 넘 어서 절대로 또 다른 생각으로 흘러들어가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우리 선종의 가문에 비슷하게나마 들어오는 것이다. 나희 경 망한[取次] 사람들이야 이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는가? 그러므 로 말하기를 '마음으로 헤아릴 때에는 그 헤아리는 마음의 마구니에 묶여 버리고, 한편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을 때에는 또 헤아리지 않 는 마음의 마구니에 묶인다. 그렇다고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는 것도 아닐 때에는 또 역시 헤아리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의 마구니에 묶 인다. 그러므로 마구니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마음에서 저절로 나온다'고 한 것이니라. 이것은 오직 신통없는 보살은 그 발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니라. 만약 언제든지 마음에 항상하다는 견해[常見]가 있으면 그것이 바로 상견외도(常見外道)이며, 만약 일체의 법은 공(空)하다고 관 (觀)하고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견해에 빠지면 그것이 바로 단견외도 (斷見外道)이다. 그러므로 '3계는 오직 마음이고 만법은 오직 식(識) 이다[三界唯心 萬法唯識]'고 하는 것은 외도와 삿된 견해를 가진 사 람들을 제도하기 위한 말일 뿐이다. 만약 최고의 법신자리에서 본다 면 그것은 3현(三賢), 10성(十聖)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말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의 어리석음을 끊으셨 는데, 하나는 미세하게 아는 어리석음이며 또 하나는 극히 미세하게 아는 어리석음이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이미 이와 같으셨거늘, 다 시 무슨 등각이니 묘각이니 하는 차례를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저 밝음만을 추종하고 어둠을 싫어하며, 그저 깨우침만 을 얻으려 하고 번뇌와 무명은 받으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부 처님은 깨달은 분이고 중생들은 망념이 남아 있는 존재이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생각하면 백천 겁이 지나도록 다만 6도에 계속 윤회하여 쉴 날이 없으리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본래 근원의 자성을 비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너희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부처 또한 밝음도 아니요 중생 또한 어둠도 아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밝음도 어둠도 없기 때문이다. 부처라고 해서 또한 강하지도 않고 중생이라고 해서 약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법에는 강함도 약함도 없기 때문이다. 또 부처라고 해서 지혜로운 것도 아니고, 중생이라 해서 어리석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지혜로움도 어리석음도 없기 때문이다.' 너 희들이 나타나서는 모두들 선을 안다고 말들 하지만 입을 벌리기만 하면 그대로 병통이 생기고 만다. 그리하여 근본은 말하지 않고 지 말만을 말하며, 미혹함은 말하지 않고 그저 깨달음만 말하며, 본체는 말하지 않고 작용만을 말하는데 제대로 말한 것이라고는 도무지 없 다. 저 일체 법은 본래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금 또한 없는 것도 아니어서 반연이 생겼다고 해서 있는 것도 아니며 반연이 사라졌다 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다. 근본이라 할 만한 것이 있지 않으니, 근 본은 근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마음 또한 마음이 아니니, 마음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모양 또한 모양이 아니니, 모양은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법도 없고 본래 마음도 없어야만 비로소 마음이라 하는 마음법을 알게 된다'고 했다. 법은 곧 법이 아니요 법 아님이 곧 법이며, 법도 없고 법 아님도 없다. 그 러므로 이것이 바로 마음이라 하는 마음법이니라.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허깨비인 줄 분명히 알면 곧 과거의 부처님에게로 흘러들어 간다. 과거의 부처님은 또한 있지 도 않고 미래의 부처님 또한 없지도 않다. 그렇다고 또한 미래의 부 처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한다. 반면에 현재의 생각 생각이 일정하게 머물지 않으니 현재의 부처님이라고도 부르지 못한다. 부처님이라는 생각이 만약 일어날 때에, 그것을 두고 깨달은 것이라거나 혹은 미 혹한 것이라든가, 또 이것은 좋은 것이거나 혹은 나쁜 것이라고 사 량분별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문득 그것에 집착하여 끊어 버리려 하 지도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한 생각 갑자기 일어나면 수천 겹으로 자물쇠를 채우더라도 가둘 수가 없고, 수만발의 오랏줄로도 그것을 묶어 두지 못한다. 이미 이와 같은데 어찌 그것을 없애려고 하고 그치게 하겠는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의 이 아지 랑이같은 의식이 어떻게 저 생각을 끊어 버려서, 아지랑이 같은 데 다 비유하겠느냐. 너희가 가깝다고 말하면 시방세계를 두루 찾아도 구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멀다고 말하면, 볼 때에 단지 눈 앞에 있어 서 쫓아가면 더더욱 멀리 가 버리며, 피하려 하면 또 쫓아와서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다. 그러므로 알라. 모든 법의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여 그것을 근심하 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앞 생각이 범부이여, 뒷 생각이 성인이라 는 말처럼 손을 뒤집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3승교(三乘敎)의 종극 (終極)이다. 그러나 우리 선종의 가르침에 의거하면 앞 생각 또한 범 부가 아니고 뒷 생각 또한 성인이 아니며, 앞 생각이 부처가 아니고 뒷 생각이 중생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모든 빛깔이 부처님의 빛깔이 며 모든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소리이다. 한 이치[理]를 들면 모든 이치가 다 그러하므로, 한 현상[事]을 보아 모든 현상을 보며, 한 마 음을 보아 모든 마음을 보며, 한 도를 보아 모든 도를 보아서 모든 것이 도 아님이 없다. 또 한 티끌을 보아 시방세계의 산하대지를 보 며, 한 방울의 물을 보아 시방세계에 있는 모든 성품의 물을 보며, 또한 일체의 법을 보아 일체의 마음을 본다. 모든 법이 본래 공(空) 해서 마음은 없지도 않다. 없지 않음이 바로 묘하게 있는 것[妙有]이 고, 있음[有] 또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있지 않음이 바로 있는 것이 니, 이것이 바로 참으로 공하면서 오묘하게 있음[眞空妙有]이니라. 그렇다면 시방세계가 나의 '한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며, 티끌처럼 많은 모든 국토들이 나의 '한생각'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안과 밖을 구별하여 말하겠는가? 마치 벌꿀의 성질이 달콤해서 모든 꿀은 다 그러하므로, 이 꿀은 달고 저 꿀은 쓰다고 말할 수 없 는 것과 같다. 이런 일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 를, '허공이 안팎이 없으니 법의 성품도 또한 그러하며, 허공이 중간 이 없으니 법의 성품도 그와 같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그대로 중생이니라. 중생과 부처가 원래로 한 본 체이며, 생사열반과 유위(有爲), 무위(無爲)가 원래 동일한 본체이며, 세간, 출세간과 나아가 6도, 4생과 산하대지와 유정, 무정이 또한 같 은 한 본체이다. 이렇게 같다고 말하는 것은 이름과 모양이 역시 공 (空)하여 있음도 공하고 없음도 공하여, 간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온 세계가 원래 똑같이 공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중생 을 제도할 부처가 어디 있으며, 부처의 제도를 받을 중생이 어디에 있겠느냐? 무엇 때문에 이러한가? 만법의 자성이 본래 그렇기 때문 이다. 그러나 만약 저절로 그렇다는 견해를 내면 곧 자연외도(自然 外道)에 떨어지고, 만약 나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다는 견해를 내면 3현, 10성의 지위에 떨어진다. 너희들이 지금 어찌 한 자, 한 치를 가지고 끝없는 허공을 재려 하겠는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하기 를 '법과 법이 서로 다닫지 못하나니, 법은 스스로 공적함으로써 그 자리에 본래부터 머물러 있으며, 그 자리에서 스스로 참되다'고 하였 느니라. 몸이 공하므로 법이 공하다고 하며, 마음이 공하므로 성품이 공하 다고 하며, 몸과 마음이 모두 공하므로 법의 성품이 공하다고 하며, 나아가 천 갈래로 다른 갖가지의 말들이 모두 다 너희의 본래 마음 을 여의지 않은 것이다. 지금 보리와 열반, 진여와 불성, 이승과 보 살 등을 말하는 것은 모두 누런 나뭇잎을 가리켜 돈이라 하는 주먹 과 손바닥의 비유에 불과하다. 주먹을 펴면 천상세계와 인간세계의 모든 대중들이 모두 그 속에 아무 것도 없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본래 한 물건도 없어서 3세(三世) 역시 있는 바 없다. 그러 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단도직입으로 이러한 뜻을 알아야만 된다. 그러므로 달마스님께서 인도로부터 이 땅에 오시어 여러 나라를 거 치셨지만, 오직 찾아 얻으신 것은 혜가스님 한 분뿐이었다. 혜가스님 에게 마음의 도장[心印]을 은밀히 전하였으니, 이는 너희의 본래 마 음에 새기신 것이다. 마음으로써 법에 새기며 법으로써 마음에 새겨 서, 마음이 이미 이 같으며 법 또한 이 같아서 진제(眞際)와 같고 법 의 성품과 평등하다. 법의 성품이 공한 가운데 누가 수기(授記)하는 사람이며, 누가 부처가 되는 사람이여, 누가 법을 얻는 사람이겠는 가? 부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보리란 몸으로 얻을 수 없으 니, 몸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또 마음으로도 얻을 수 없는데, 마 음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그허다고 성품으로도 얻을 수 없으니, 성품은 곧 바로 근본원류의 자성이 청정한 부처[本源自性淸淨佛]이 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부처로써 다시 부처를 얻을 수 없으며, 모양 이 없는 것으로 다시 모양이 없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또한 공함으 로써 공함을 얻을 수 없고, 도로써 도를 얻을 수 없다. 본래 얻은 것 이 없어서 얻은 것이 없음도 얻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말씀하시 기를 '얻을 만한 한 법도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는 다만 너희로 하 여금 본 마음을 분명히 찾게 하고자 한 것이다. 당장 요달했을 때라도 요달한 모양을 얻을 수 없어서, 요달함이 없는 모양도, 요달하지 않음이 없는 모양도 또한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법을 얻은 사람은 곧 얻으나, 얻은 사람이라도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 얻지 못한 사람이라도 또한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한 다. 이와 같이 법을 예로부터 몇 사람이나 알 수 있었겠느냐? 그러 므로 말하기를 '천하에 자기를 잊은 사람이 몇이더냐?'고 하였다. 지 금 한 기틀, 한 경계, 한 경전, 한 가르침, 한 세대, 한 시기, 한 이 름, 한 글자를 6근의 문 앞에서 알 수 있다면, 꼭두각시와 무엇이 다 르겠느냐. 한 이름, 한 모양 위에서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 사람이 갑 자기 나타난다면 온 시방세계를 다 찾는다 해도 이런 사람은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노라. 그와 버금갈 만한 사람이 둘 도 없으므로 조사의 자리를 이으며, 또한 부처님의 종자라고 일컫나 니, 순수하여 전혀 잡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왕이 부처를 이룰 때 에 왕자도 역시 따라서 출가한다'고 했는데, 이 뜻을 알기가 매우 어 렵느니라. 다만 너희에게 아무 것도 찾지 말도록 할 뿐이니, 찾으면 곧 잃어버린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산 위에서 한 번 소리를 질러 메아리가 울리면 곧장 산 아래로 달려 가지만 끝내는 아무 것도 찾 지 못하고, 거기서 또 한 번 소리를 지르자 산 위에서 메아리가 울 리며, 그는 다시 산 위로 달려 가는 것과 같다. 이렇게 천생만겁을 소리를 찾고 메아리를 좇는 사람일 뿐이어서 허망하게 생사에 유랑 하는 자이니라. 만약 소리가 없으면 메아리도 생기지 않는다. 열반이 란 들음도 앎도 없고 소리도 없어서 자취도 발자욱도 모두 끊긴 것 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겨우 조사의 방 근처에 인접한 것이라 하겠 다." 夫學道者 先須屛却雜學諸緣 決定不著 聞甚深法 恰似淸風 屆耳 瞥然而過 更不追尋 是爲甚深入如來禪 離生禪想 從 上祖師 唯傳一心 更無二法 指心是佛 頓超等妙二覺之表 決定不流至第二念 始似入我宗門 如斯之法 汝取次人 到這 裏 擬作魔生學 所以道 擬心時 被擬心魔縛 非擬心時 又被 非擬心魔縛 非非擬心時 又被非非擬心魔縛 魔非外來 出自 心 唯有無神通菩薩 足跡 不可尋 若以一切時中 心有常 見 卽是常見外道 若觀一切法空 作空見者 卽是斷見外道 所以 三界唯心 萬法唯識 此猶是對外道邪見人說 若說法身 以爲極果 此對三賢十聖人言 故 佛斷二愚 一者 微細所知 愚 二者 極微細所知愚 佛旣如是 更說什�쑼趨氓J팹� 所 以 一切人 但欲向明 不欲向闇 但欲求悟 不受煩惱無明 便 道 佛是覺 衆生是妄 若作如是見解 百劫千生 輪廻六道 更 無斷絶 何以故 爲謗諸佛本源自性故 他分明向 道 佛且不 明 衆生且不闇 法無明闇故 佛且不彊 衆生且不弱 法無彊 弱故 佛且不智 衆生且不愚 法無愚智故 是 出頭 總道解 禪 開著口 便病發 不說本 祇說末 不說迷 祇說悟 不說體 祇說用 總無 話論處 他一切法 且本不有 今亦不無 緣起 不有 緣滅不無 本亦不有 本非本故 心亦不心 心非心故 相 亦非相 相非相故 所以道無法無本心 始解心心法 法卽非法 非法卽法 無法無非法 故是心心法 忽然瞥起一念 了知如幻 如化 卽流入過去佛 過去佛 且不有 未來佛 且不無 又且不 喚作未來佛 現在念念不住 不喚作現在佛 佛若起時 卽不擬 他是覺是迷 是善是惡 輒不得執滯他斷絶他 如一念瞥起 千 重關鎖鎖不得 萬丈繩索索他不住 旣若如是 爭合便擬滅他 止他 分明向 道 爾焰識 作�쒈劣尖½� 喩如陽焰 道 近 十方世界求不可得 始道遠 看時 祇在目前 擬 他 他 又轉遠去 始避他 他又來逐 取又不得 捨又不得 旣若 如此 故知一切法性 自爾 卽不用愁他慮他 如言前念是凡 後念是聖 如手蒜覆一般 此是三乘敎之極也 據我禪宗中 前 念且不是凡 後念且不是聖 前念不是佛 後念不是衆生 所以 一切色 是佛色 一切聲 是佛聲 거著一理 一切理皆然 見一 事 見一切事 見一心 見一切心 見一道 見一切道 一切處無 不是道 見一塵 十方世界山河大地皆然 見一適水 卽見十方 世界一切性水 又見一切法 卽見一切心 一切法本空 心卽不 無 不無卽妙有 有亦不有 不有卽有 卽眞空妙有 旣若如是 十方世界不出我之一心 一切微塵國土不出我之一念 若然 說什�쑺?恰②� 如蜜性첨 一切蜜皆然 不可道這箇蜜첨 餘 低苦也 何處有與�쒇� 所以道허空 無內外 法性 自爾 虛空 無中間 法性 自爾 故衆生卽佛 佛卽衆生 衆生與佛 元同一 體 生死涅槃 有爲無爲 元同一體 世間出世間 乃至六道四 生 山河大地 有性無性 亦同一體 言同者 名相 亦空 有亦 空無亦空 盡恒沙世界 元是一空 旣若如此 何處有佛度衆生 何處有衆生受佛度 何故如此 萬法之性 自爾故 若作自然見 卽落自然外道 若作無我無我所見 墮在三賢十聖位中 如 今 云何將一尺一寸 便擬量度虛空 他分明向汝道 法法 不 相到 法自寂故 當處自住 當處自眞 以身空故 名法空 以心 空故 名性空 身心 總空故 名法性空 乃至千途異說 皆不離 之本心 如今 說菩提涅槃 眞如佛性 二乘菩薩者 皆指葉 爲黃金 拳掌之說 若也展手之時 一切大衆 若天若人 皆見 掌中 都無一物 所以道 <本來無一物 何處有塵埃> 本旣無 物 三際 本無所有 故學道人 單刀直入 須見這箇意 始得 故達摩大師從西天來至此土 經多少國土 祇覓得可大師一人 密傳心印 印 本心 以心印法 以法印心 心旣如此 法亦如 此 同眞際等法性 法性空中 誰是授記人 誰是成佛人 誰是 得法人 他分明向 道 菩提者 不可以身得 身無相故 不可 以心得 心無相故 不可以性得 性卽便是本源自性天眞佛故 不可以佛更得佛 不可以無相更得無相 不可以空更得空 不 可以道更得道 本無所得 無得亦不可得 所以道 無一法可得 祇敎 了取本心 當下了時 不得了相 無了無不了相 亦不可 得 如此之法 得者卽得 得者 不自覺知 不得者 亦不自覺知 如此之法 從上巳來 有幾人 得知 所以道 <天下 忘己者有 幾人> 如今 於一機一境 一經一敎 一世一時 一名一字 六 根門前 領得 與機關木人 何別 忽有一人出來 不於一名一 相上 作解者 我說此人 盡十方世界覓這箇人 不可得 以無 第二人故 繼於祖位 亦云釋種 無雜純一 故言 <王若成佛時 王子亦隨出家> 此意大難知 祇敎 莫覓 覓便失却 知癡人 山上叫一聲 響從谷出 便走下山 及尋覓不得 又叫一聲 出上響又應 亦走上山上 如是千生萬劫 祇是尋聲逐響人 虛生浪死漢 汝若無聲卽無響 涅槃者 無聞無知無聲 絶迹絶 踪 若得如是 稍與祖師隣房也 22. 양의 뿔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임금님의 창고 안에 이런 칼이 전혀 없다'고 하셨는데, 바라옵건 대 그 뜻을 가르쳐 주십시오." "임금님의 창고란 바로 허공의 성품[虛空性]이니라. 그것은 시방의 허공세계를 받아들여 모두가 다 너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또 다른 말로는 임금님의 창고를 허공장보살이라고도 일컫는다. 네 만 약 그것에 대해 있고 없음과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을 말한다면, 모두가 양의 뿔이 되느니라. 양의 뿔이란 바로 네가 구하여 찾는 것이니라." 배상공이 물었다. "임금님의 창고 속에는 진짜 칼이 있습니까?" "그것도 역시 양의 뿔이니라." "임금님의 창고 속에 애초부터 진짜 칼이 없다면, 왕자가 그 창고 에서 진짜 칼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나간 것이어늘, 어찌하여 스님 께서는 그저 없다고만 말씀하십니까?" "칼을 가지고 나갔다는 것은 여래의 심부름꾼에 비유한 것이다. 네 만약 임금님의 창고 속에서 왕자가 진짜 칼을 가지고 나갔다고 말한다면, 창고 안에 있는 허공도 함께 따라 갔을 것이니라. 그러나 본원의 허공성(虛空性)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인데, 그 것이 무슨 말이겠느냐? 설령 네가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양 의 뿔이니라." 問 如王庫藏內 都無如是刀 伏願誨示 師云 王庫藏者 卽虛 空性也 能攝十方虛空世界 皆總不出 心 亦謂之虛空藏菩 薩 若道是有是無 非有非無 總成羊角 羊角者 卽 求覓 者也 問 王庫藏中有眞刀否 師云 此亦是羊角 云 若王庫藏中 本 無眞刀 何故云王子持王庫中眞刀 出至異國 何獨言無 師云 持刀出者 此喩如來使者 若言王子持王庫中眞刀出去者 庫中應空去也 本源虛空性 不可被異人將去 是什�쒎� 設 有者 皆名羊角 23. 여래의 심부름꾼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가섭존자는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받았으니, 말을 전하는 사람 이 아닙니까?" "그렇다." "만약 말 전한 사람이라면 양의 뿔을 여의지 못한 사람이겠군요." "가섭존자는 스스로 본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양의 뿔이 아 니니라. 만약 여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곧 여래의 뜻을 알게 되며, 여 래의 겉모습을 보는 사람은 곧 여래의 심부름꾼에 속하는 자로서 말 전하는 사람이 되느니라. 아난존자가 20여년 동안 부처님의 시자로 있었으면서도 다만 여래의 겉모양만 보았기 때문에 부처님으로부터 '세간을 구제하는 것을 보는 자는 양의 뿔을 벗어나지 못하니라'는 꾸지람을 들었다." 問 迦葉受佛心印 得爲傳語人否 師云 是 云 若是傳語人 應不離得羊角 師云 迦葉 自領得本心 所以不是羊角 若以 領得如來心 見如來意 見如來色相者 卽屬如來使 爲傳語人 所以阿難 爲侍者二十年 但見如來色相 所以被佛訶云 <唯 觀救世者 不能離得羊角> 24. 무분별지는 얻을 수 없다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문수보살이 부처님 앞에서 칼을 든 것은 어찌 된 까닭입니까?" "500명의 보살들이 전생을 아는 지혜를 얻어서 지난 과거 생의 업장을 볼 수 있었다. 500이란 너의 오음으로 된 몸이니라. 이 숙명 을 보는 장애 때문에 부처가 되기를 구하고 보살, 열반을 구하게 되 었느니라. 그러므로 문수보살이 지혜로써 헤아리는 칼을 가지고 부 처를 봄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베어 버렸다. 그래서 '아주 잘 베 어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칼입니까?" "헤아리는 마음이 칼이다." "헤아리는 마음이 이미 칼이라고 한다면 부처를 봄이 있다고 생 각하는 마음을 베어 버린 것인데, 그렇다면 능히 베는 그 마음은 어 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너의 분별이 없는 지혜로써 보는 것이 있다고 분별하는 마음을 베느니라." "부처를 봄이 있다느니 혹은 부처를 구함이 있다느니 하는 마음 을 내는 경우에는 분별이 없는 지혜의 칼로써 베는 것이지만, 그 지 혜의 칼이 있는 것은 어찌 해야 합니까?" "분별 없는 지혜로써 있다는 견해[有見]와 없다는 견해[無見]를 베 어 버리면, 분별 없는 지혜도 또한 얻을 수 없느니라." "지혜로써 지혜를 자르지 말며, 칼로써 칼을 자르지 마소서." "칼이 스스로 칼을 베어서 칼과 칼이 서로 베어지면, 칼 또한 얻 을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혜가 스스로 지혜를 베어서, 지혜와 지혜가 서로 베어지면 지혜 또한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어미와 자식 이 함께 죽는 것도 역시 이와 같느니라." 問 文殊執劍於瞿曇前者 如何 師云 五百菩薩 得宿命智 見 過去生業障 五百者 卽 五陰身 是 以見此夙命障故 求佛 求菩薩涅槃 所以文殊將智解劍 害此有見佛心故 故言 善 害 云 何者是劍 師云 解心 是劍 云 解心旣是劍 斷此有見 佛心 祇如能斷見心 何能除得 師云 還將 無分別智 斷此 有見分別心 云 如作有見有求佛心 將無分別智劍斷 爭奈有 智劍在何 師云 若無分別智 害有見無見 無分別智 亦不可 得 云 不可以智更斷智 不可以劍更斷劍 師云 劍自害劍 劍 劍相害 卽劍亦不可得 智自害智 智智相害 卽智亦不可得 母子俱喪 亦復如是 25. 견성이란?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자성을 보는 것[見性]이란 무엇입니까?" "성품이 곧 보는 것이요, 보는 것이 곧 성품이니, 성품으로써 다 시 성품을 보지 말라. 또 들음이 그대로 성품이니 성품으로서 다시 성품을 들으려 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성품이라는 견해 를 내며, 능히 성품을 듣고 능히 성품을 보아서 문득 같다거나 다르 다는 견해를 일으킨다. 저 경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볼 수 있는 바 는 다시 보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너는 어찌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얹겠느냐? 경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마치 소반 위에 구슬을 흩어 놓 는 것과 같아서, 큰 구슬은 크게 둥글며, 작은 구슬은 작게 둥글어서 각각의 구슬끼리 알지 못하며, 각각 서로를 방해 하지 않아서, 일어 날 때에 <내가 일어난다> 말하지 않으며, 없어질 때에 <내가 없어 진다>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4생과 6도가 이렇지 않은 경우가 없느니라. 또 중생이 부처를 보지 못하고 부처가 중생을 보지 못하며, 4과 (四果)가 4향(四向)을 보지 못하고 4향이 4과를 보지 못하며, 3현(三 賢), 10성(十聖)이 등각과 묘각을 보지 못하고 등각과 묘각이 3현, 10성을 보지 못하며, 나아가 물이 불을 보지 못하고 불이 물을 보지 못하며, 땅이 바람을 보지 못하고 바람이 땅을 보지 못하며, 중생이 법계에 들지 못하고 부처가 법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법의 성품은 가고 옴이 없으며 능히 보는 것도 보여지는 대상도 없다. 능 히 이와 같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본다느니 혹은 나는 듣 는다느니 말하겠느냐? 무엇보다도 선지식의 회하에서 깨닫도록 하여라. 선지식이 나에게 법을 설하시며,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셔서 중생들에게 법을 설해 주신다. 그러나 가전연은 다만 생멸하는 마음을 가지고 실상 (實相)의 법을 전하였기 때문에 유마거사에게 꾸중을 들었느니라. 분명히 말하건대, 어떤 법이라도 본래로 속박하지 않는데 어찌 풀어 제칠 필요가 있겠으며, 또 본래 물들지도 않는데 굳이 맑게 할 필요 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말하기를, '모든 법의 참다운 모양이 이와 같 거늘 어찌 말로써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네가 지금 다만 시 비하는 마음, 염정(染淨)을 따지는 마음을 내고 하나하나마다 알음알 이를 배워 얻어서, 온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결정코 취하려고 하는 것을 곧 보게 되는데, 도대체 누가 마음의 눈을 갖추 었으며,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 말해 보아라. 만약 이렇게 한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현격하게 다른 것이니, 다시 무슨 견성(見性) 을 논하겠느냐?"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이미 성품이 그대로 보는 것이며 보는 것이 그대로 성품이라고 스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성품이 본래 장애가 없어야 하며 제한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물건이 가로막히면 곧 보지 못하고, 또 허공이 가운데서 가까우면 보고 멀어지면 보지 못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은 네가 망령되게 다르다는 견해를 낸 것이니라. 만약 물건 이 앞에 가로막히면 보지 못하고 그것이 없어지면 본다고 생각하여, 성품을 가로막는 장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잘못이니라. 성품 이란 보는 것도 보지 않는 것도 아니며, 법 또한 보는 것도 보지 않 는 것도 아니다. 만약 견성한 사람이라면 어느 곳인들 나의 본래 성 품이 아님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6도, 4생과 산하 대지가 모두 내 성품의 맑고 본체 그대로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물질[色]을 보 는 것이 곧 마음[心]을 보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물질과 마음이 다 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모양에 집착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 서 눈 앞의 물건을 없애고 나서야 비로소 보려고 하는 자들은 2승 (二乘)의 무리 가운데 떨어진, 의지하여 통하려는 견해이니라. 허공 가운데서 가까우면 보고 멀면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외도에 떨어지고 만다. 분명히 말하노니,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며, 가깝 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것이니, 가까우면서도 볼 수 없는 것이 중생 들의 성품이니라. 가까이 있어도 오히려 그렇거늘, 멀어서 볼 수 없 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이겠느냐?" 問 如何是見性 師云 性卽是見 見卽是性 不可以性更見性 聞卽是性 不可以性更聞性 祇 作性見 能聞能見性 便有一 異法生 他分明道 所可見者 不可更見 云何頭上更著頭 他分明道 如盤中散珠 大者大圓 小者小圓 各各不相知 各 各不相 起時 不言我起 滅時 不言我滅 所以 四生六道 未有不如時 且衆生 不見佛 佛不見衆生 四果不見四向 四 向不見四果 三賢十聖 不見等妙二覺 等妙二覺 不見三賢十 聖 乃至水不見火 火不見水 地不見風 風不見地 衆生 不入 法界 佛不出法界 所以法性 無去來 無能所見 能如此 因什 �� 道我見我聞 於善知識處 得契悟 善知識 與我說法 諸佛 出世 與衆生說法 迦 延 祇爲以生滅心 傳實相法 被淨名 呵責 分明道 一切法 本來無縛 何用解他 本來不染 何用淨 他 故云實相 如是 豈可說乎 汝今祇成是非心染淨心 學得 一知一解 天下行 見人便擬定當取 誰有心眼 誰彊誰弱 若也如此 天地懸殊 更說什�쑱멘� 問 旣言性卽見見卽性 祇如性自無障 無劑限 云何隔物卽 不見 又於虛空中 近卽見遠卽不見者 如何 師云 此是 妄 生異見 若言隔物不見 無物言見 便謂性有隔 者 全無交涉 性且非見非不見 法亦非見非不見 若見性人 何處不是我之 本性 所以 六道四生 山河大地 總是我之性淨明體 故云見 色便見心 色心 不異故 祇爲取相作見聞覺知 去却前物 始 擬得見者 卽墮二乘人中依通見解也 虛空中 近則見遠則不 見 此是外道中收 分明道非內亦非外 非近亦非遠 近而不可 見者 萬物之性也 近尙不可見 更道遠而不可見 有什�쒕窒� 26. 한 생각 일지 않으면 곧 보리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소생(小生)이 알지 못하겠사오니, 큰스님께서는 가르쳐주십시오." "내게는 한 물건도 없어서, 이제까지 남들에게 한 물건도 전혀 가 르켜 준 바가 없다. 너는 한량없는 세월 전부터 그저 남에게 가르침 을 받아서 이해하려고만 하니, 이야말로 스승과 제자가 함께 왕의 난[王難]에 빠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너는 다만 이 사실을 알아야 한 다. 한 생각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받음이 없는 몸이며, 한 생각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생각 없는 몸이니라. 절대로 인 위적인 조작에 휩쓸리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행함이 없는 몸이며, 요리조리 따지고 분별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식(識)이 없는 몸이 니라. 그러므로 네가 달리 한 생각 일으키기만 하면 그대로 12인연 에 빠져들어서, 무명이 행을 연하여 서로 인(因)이 되기도 하고 또 과(果)가 되기도 하며, 나아가서는 늙음과 죽음이 서로서로 인이 되 기도 하고 과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선재동자가 110곳에서 선지 식을 구했지만, 다만 12인연 속에서만 구하다가 최후에 미륵보살을 만났었다. 그러자 미륵보살이 문수보살을 찾아뵈라고 다시 가르켜 주었다. 문수보살이란 다름 아닌 바로 너의 근본 무명이니라. 만약 마음과 마음이 각기 달라서 그저 밖으로만 선지식을 구하는 자는, 한 생각이 갓 일어났다가는 꺼지고 꺼졌다가는 또 생긴다. 그 러므로 너희 비구들도 생, 노, 병, 사 하기도 하여 인과의 값을 치뤄 오면서 마침내는 다섯 갈래[五聚)의 생멸을 당한다. 다섯 갈래란 5음 (五陰)이니 한 생각 일어나지 않으면 곧 18계(界)가 공하여 이 몸 그대로가 보리의 꽃 열매이며, 또한 이 마음이 그대로 신령스런 지 혜이며 신령스런 보리좌이니라. 그러나 만약 집착하는 바가 있으면 이 몸은 곧 송장이 되고, 마음은 송장 지키는 귀신이 되고 만다." 問 學人 不會 和尙 如何指示 師云 我無一物 從來 不曾將 一物與人 無始已來 祇爲被人指示 覓契覓會 此可不是弟 子與師 俱陷王難 但知一念不受 卽是無受身 一念不想 卽是無想身 決定不遷流造作 卽是無行身 莫思量卜度分別 卽是無識身 如今 裳別起一念 卽入十二因緣 無明緣行 亦因亦果 乃至老死亦因亦果 故 善財童子一百一十處求善 知識 祇向十二因緣中求 最後 見彌勒 彌勒 却指見文殊 文 殊者 卽汝本地無明 若心心別異 向外求善知識者 一念裳生 卽滅 裳滅又生 所以 汝等比丘 亦生亦老 亦病亦死 酬因答 果已來 卽五聚之生滅 五聚者 五陰也 一念 不起 卽十八界 空 卽是便是菩提華果 卽心便是靈智 亦云靈臺 若有所住著 卽身爲死屍 亦云守死屍鬼 27. 둘 아닌 법문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유마거사가 잠자코 있으니 문수보살이 찬탄하기를 '이것이야말로 둘 아닌 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것이로다'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 니까?" "둘 아닌 법문이란 바로 너의 본 마음이니라. 그러니 법을 설했느 니 혹은 설하지 않았느니 하는 것은 기멸(起滅)이 있는 것이다. 말 없을 때에는 나타내 보인 것이 없으므로 문수보살이 찬탄한 것이니 라." "유마거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소리가 단멸된 것이 아닙 니까?" "말이 곧 침묵이고 침묵이 그대로 말이다. 말과 침묵이 둘이 아니 기 때문에 소리의 실제 성품도 역시 단멸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라. 문수보살이 본래 들음[本聞]도 역시 단멸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일찌기 말하지 않은 때가 없다'고 하 신 것은 여래의 말씀이 곧 법이요 법이 곧 말씀이니, 법과 말씀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나아가 보신, 화신, 보살, 성문과 산하대지 와 물, 새, 수풀이 일시에 법을 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도 설법 이고 침묵도 설법이어서, 종일 설법하나 일찍이 설한 바가 없다. 이 미 이와 같다면 말없음으로서 근본을 삼느니라." 問 淨名 默然 文殊讚歎云是眞入不二法門 如何 師云 不二 法門 卽 本心也 說與不說 卽有起滅 無言說時 無所顯示 故 文殊讚歎 云 淨名 不說 聲有斷滅否 師云 語卽默默卽 語 語默不二故 云聲之實性 亦無斷滅 文殊本聞 亦無斷滅 所以如來常說 未曾有不說時 如來說卽是法 法卽是說 法說 不二故 乃至報化二身菩薩聲聞 山河大地 水鳥樹林 一時說 法 所以語亦說默亦說 終日說而未嘗說 旣若如是 但以默爲 本 28. 한 마음의 법 가운데서 방편으로 장엄하다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성문이 3계에서는 모습을 감추지만, 보리에 있어 감추지 못하는 까닭은 어찌된 것입니까?" "여기서 말한 모습이란 바탕이니라. 성문들이 다만 3계의 견도혹 (見道惑)과 수도혹(修道惑)을 끊을 수 있어 이미 번뇌를 여의긴 하 였으나, 보리에 있어서는 모습을 감추지 못한 까닭이니라. 그래서 보 리 가운데서 마왕에게 붙들리어 숲 속에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보 리를 미세하게 본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그런데 보살들은 3계 와 보리에 있어서 결정코 버리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느니라. 취하지 않으므로 7대(七大)가운데서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하고, 버리지않으므 로 외도, 마구니가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한다. 네 다만 한 법에라도 집착하려 하면 흔적[印子]이 벌써 생기게 된다. 있음[有]에다 도장을 찍으면 곧 6도, 4생의 무늬가 나오고, 공(空)에다 도장을 찍으면 곧 모양 없는 무늬가 나타나느니라. 만약 모든 사물에 도장을 찍지 않 으면, 이 도장은 허공과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어서, 공(空)이 본 래 공이 아니고 도장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닌 줄을 다만 알지니라. 시방 허공 세계의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심은 번갯불을 보 는 것과 같으며, 꿈틀거리는 모든 벌레를 보는 것은 메아리와 마찬 가지이며, 시방의 셀 수 없는 많은 국토를 보는 것은 흡사 바다 가 운데 한 방울 물과 같은 것이다. 매우 기폭 깊은 법문을 듣더라도 허깨비와 같아서,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으며, 법과 법이 서로 다 르지 않고, 나아가 천만 가지의 경론(經論)이 오로지 너의 한 마음 때문이니라. 모든 모양을 결코 취하지 않으므로, 말하기를 '이와 같 은 한 마음 속에서 방편으로 부지런히 장엄한다'고 하였느니라." 問 聲聞人 藏形於三界 不能藏於菩提者 如何 師云 形者 質也 聲聞人 但能斷三界見修 已離煩惱 不能藏於菩提 故 還被�쒑妃舶鏡ヱ稶둣� 於林中宴坐 還成微細見菩提心也 菩薩人 已於三界菩提 決定不捨不取 不取故 七大中覓他不 得 不捨故 外魔亦覓他不得 汝但擬著一法 印子早成也 印 著有 卽六道四生文出 印著空 卽無相文現 如今 但知決定 不印一切物 此印 爲虛空不一不二 空本不空 印本不有 十 方허空世界諸佛出世 如見電光一般 觀一切蠢動含靈 如響 一般 見十方微塵國土 恰似海中一滴水相似 聞一切甚深法 如幻如化 心心不異 法法不異乃至千經萬論 祇爲 之一心 若能不取一切相故 言 <如是一心中 方便勤莊嚴> 29. 인욕선인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뚱이가 토막토막 잘리었다'는 경우는 어떤 것입니까?" "선인(仙人)이란 곧 너의 마음이며, 가리왕이란 구하기를 좋아하 는 마음이니라. 그리고 왕위를 지키지 않는다고 함은 이로움을 탐하 는 마음이니라. 그런데 요사이 공부하는 이들이 덕과 공을 쌓지는 않고, 보는 것마다 배워서 알려고 하니 가리왕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물질을 볼 때는 선인의 눈을 멀게 하고, 소리를 들을 때는 선인의 귀를 먹게 한다. 나아가 무엇을 느껴 알 때에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마디마디 갈기갈기 찢겨진다고 한 것이니라." "선인이 참을 때는 마디마디 갈기갈기 찢김이 없어서, 한 마음으 로 참았느니 혹은 참지 않앗느니 하는 말은 가당치 않겠습니다." "네가 남이 없는 견해[無生見]을 내어서, 인욕을 닦는 견해거나 구 할 것이 없다는 견해를 내는 것은 모두 손상을 주는 것이니라." "선인도 몸을 잘리울 때 아품을 느낍니까? 만약 이런 가운데 고 통을 받는 사람이 없다면 누가 고ㅌ을 받습니까?" "네가 이미 고통받을 것이 없다면 나타나서 도대체 무엇을 찾는 것이냐?" 問 如我昔爲歌利王割截身體如何 師云 仙人者 卽是 心 歌利王 好求也 不守王位 謂之貪利 如今學人 不積功累德 見者便擬學 與歌利王何別 如見色時 壞却仙人眼 聞聲時 壞却仙人耳 乃至覺知時 亦復如是 喚作節節支解 云 祇如 仙人 忍時 不合更有節節支解 不可一心忍一心不忍也 師云 作無生見 忍辱解無求解 總是傷損 云 仙人 被割時 還知 痛否 又云此中無受者 是誰受痛 師云 旣不痛 出頭來 覓 箇甚�� 30. 한 법도 얻을 수 없음이 곧 수기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연등부처님이 수기하신 때는 오백세(五百歲) 이내입니까, 오백세 밖입니까?" "오백세 이내에 수기를 받을 수 없느니라. 이른바 수기라 하는것 은 너의 근본을 결정코 잊어 버리지 않아서, 하염있는 법도 잃지 않 고 보리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세간과 세간 아님을 모두 요달 했기 때문에 오백세 밖을 벗어나서 따로 수기를 얻을 수 없고, 또한 오백세 이내에도 수기를 얻지 못한다." "세간 3제(三際)의 모양을 요달할 수 없습니까?" "한 법도 얻을 수 없느니라." "그런데 무엇 때문에 경(經)에서 오백세(五百歲)를 지난다고 자주 말씀하시어, 앞뒤로 시간을 길게 말씀하셨습니까?" "오백세(五百歲)가 길로 멀어서 오히려 아직은 선인(仙人)임을 알 아야 한다. 그러므로 연등부처님께서 수기하실 때는 실로 얻었다할 작은 법도 없느니라." 問 然燈佛授記 爲在五百歲中 五百歲外 師云 五百歲中 不 得授記 所言授記者 本決定不忘 不失有爲 不取菩提 但 以了世非世 亦不出五百歲外別得授記 亦不於五百歲中得授 記 云 了世三際相 不可得已否 師云 無一法可得 云 何故 言頻經五百世 前後極時長 師云 五百世長遠 當知猶是仙人 故 然燈授記時 實無少法可得 31. 법신은 얻을 수 없다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교(敎)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억겁 동안 전도된 생각을 녹이어서, 3대 아승기 겁을 거치지 않고 법신을 얻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만약 3대 아승기의 헤아릴 수 없는 겁을 통하여 수행을 함으로 서 증득한 바가 있는 자는, 간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겁이 지난 다 하더라도 깨닫지 못한다. 만약 한 찰나 사이에 법신을 획득하여 곧바로 분명하게 깨달아 성품을 보는 것은 오히려 3승교(三乘敎)의 극치를 이룬 말씀이다. 왜냐하면 가히 얻을 수 있는 법신을 보기 때 문에 모두가 불요의교(不了義敎)에 속하는 것이니라." 問 敎中 云鎖我億劫顚倒想 不歷僧祇獲法身者 如何 師云 若以三無數劫修行 有所證得者 盡恒沙劫不得 若於一 刹那中獲得法身 直了見性者 猶是三乘敎之極談也 何以故 以見法身可獲故 皆屬不了義敎中收 32. 마셔보아야 물맛을 안다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법을 보고 단박에 깨달은 사람은 조사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조사의 뜻은 허공 밖을 벗어났느니라." "그러면 한계가 있습니까?" "한계가 없느니라. 이는 모두 일정한 숫자로 헤아리는 대대(對待) 하는 법이니라.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한량이 있지도 않고 한량이 없음도 아니며 한량이 있고 없음이 아님도 아니어서, 대대가 끊어졌 기 때문이다'하였다. 너희 요즘 배우는 사람들이 3승교 밖을 아직 벗 어나지 못했는데, 어찌 선사라 부를 수 있겠느냐?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겠다. 으뜸으로 선을 수행하는 사람일진댄, 함부로 망령되이 다 른 견해를 내지 말라. 마치 어떤 사람이 물을 마셔보면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 움직이거나 머물러 있거나 한 찰나 사이에 생각생각이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하다면 윤회를 면치 못하느니라." 問 見法頓了者 見祖師意否 師云 <祖師心出虛空外> 云 有限劑否 師云 有無限劑 此皆數量對待之法 祖師云 <且非 有限量 非無限量 非非有無限量 以絶待故> 如今學者 未 能出得三乘敎外 爭喚作禪師 分明向汝道 一等學禪 莫取次 妄生異見 如人飮水 冷煖 自知 一行一住 一刹那間 念念不 異 若不如是 不免輪回 33. 참된 사리(舍利)는 볼 수 없다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부처님의 몸은 하염이 없기 때문에 모든 숫자적인 개념으로 한 정할 수가 없거늘, 어찌하여 부처님 몸의 사리가 여덟섬 너말이 됩 니까?" "네가 이런 견해를 낸다면, 그저 껍데기 사리만 볼 뿐 참된 사리 는 보질 못하느니라." "사리가 본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노력하여 얻은 결과입니까?" "본래 있는 것도 아니며 노력하여 수행의 결과로 얻으신 것도 아 니니라." "그렇다면 어찌하여 부처님 사리는 그토록 잘 다듬어졌고 그토록 정교로와서, 금빛 사리가 항상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사께서 꾸짖어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견해를 가지고서 어찌 참선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너는 허공에 사리가 있는 것을 일찍이 보았느냐? 모든 부처님의 마음은 큰 허공과 같은데 무슨 사리를 찾는 것이냐?" "지금에도 분명히 눈으로 사리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도대체 무 슨 법입니까?" "그것은 너의 망상심이 일어나서 사리라고 보는 것이니라." "그렇다면 화상께서는 사리가 있습니까? 청컨대 내보여 주십시 오." "참 사리는 보기 어렵느니라. 네가 다만 열 손가락으로 수미산의 높은 봉우리를 한꺼번에 움켜쥐어 그것을 부수어 가루로 만든다면 비로소 참 사리를 보게 되리라." 問 佛身無爲 不墮諸數 何故 佛身舍利八斛四斗 師云 作 如是見 祇見假舍利 不見眞舍利 云 舍利爲是本有 爲復功 勳 師云 非是本有 亦非功勳 云 若非本有 又非功勳 何故 如來舍利 唯鍊唯精 金骨 常存 師乃呵云 作如此見解 爭 喚作學禪人 見虛空曾有骨否 諸佛心同太虛 覓什�쑲� 云 如今見有舍利 此是何法 師云 此從 妄想心生 卽見舍利 云 和尙 還有舍利否 請將出來看 師云 眞舍利難見 但以 十指 撮盡妙高峯爲微塵 卽見眞舍利 34. 일체처에 마음이 나지 않음 "대저 참선해서 도를 닦는 이는 모름지기 어디에서나 마음을 내 지 않아야 한다. 다만 '마음의 작용을 잊으면 곧 부처님의 도가 융성 하고, 사량분별하면 곧 마구니의 도가 치성해진다'하는 것만은 논할 뿐이니, 끝내는 털끝만큼한 작은 법도 얻지 못하니라."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조사께서 어떤 사람에게 법을 전하여 부촉하셨습니까?" "사람에게 줄 법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어찌하여 2조(二祖) 혜가스님이 달마스님께 마음을 편 안하게 해달라고 청했습니까?" "네가 만약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2조께서는 분명히 마음을 찾아 서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찾으려 해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달마스 님께서, '너의 마음을 이미 편하게 해주었노라'고 하신 것이니라. 만 일 얻은 바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생멸법으로 돌아가고 만다." 夫參禪學道 須得一切處不生心 祇論忘機卽佛道륭 分別卽 魔軍盛 畢竟無毛頭許 少法可得 問 祖傳法付與何人 師云 無法與人 云 云何二祖請師安心 師云 若道有 二祖卽合覓得心 覓心不可得故 所以道與 安心竟 若有所得 全歸生滅 35. 조계문하생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구경에 무명을 얻으십니까?" "무명이란 바로 모든 부처님들께서 도를 얻으신 자리이니라. 그러 므로 연기법이 바로 도량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한 티끌 한 빛깔 이 그대로가 가이 없는 진리의 성품이니라. 발을 들었다 놓는 것이 모두 도량을 여의지 않나니, 도량이란 얻은 바가 없는 것이니라. 내 너에게 말하노니, 다만 이 얻은 바 없는 자리를 도량에 앉아 있음이 라고 하느니라." "무명이란 밝음입니까, 어두움입니까?" "밝음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두움도 아니다. 밝음과 어두움이란 서 로 바뀌어서 갈아드는 법이니라. 그렇다고 무명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것이다. 밝지 않음이 곧 본래의 밝음이어서, 밝지도 않고 어둡 지도 않느니라. 이 한마디 말이 온천하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비록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사 리불과 같아서, 모두 함께 헤아려 사량할지라도 부처님의 지혜는 측 량할 수 없도다'라고 했다. 부처님의 걸림 없는 지혜를 허공을 벗어 나 너희들이 언어 문자로는 따져볼 수가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한량과 같은 삼천대천 세계에 갑자기 어떤 보살이 출현하여, 한 번 걸터앉으매 모든 삼천대천 세계를 걸터앉아버린다 해도, 보현보살의 한 털구멍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네가 지금 무슨 본래의 이치 를 가지고서 그것을 배우려고 하겠느냐?" "말씀대로 배워서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둘이 없 는 본원의 성품으로 돌아가지만, 방편에는 여러 문들이 있다'고 말씀 하십니까?" "둘이 없는 본원의 성품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무명의 참 성 품이니, 이것은 바로 모든 부처님의 성품이니라. 또 방편에 여러 문 이 있다는 뜻은, 성문들은 무명이 생겼다 없어진다고 보며, 연각들은 다만 무명이 없어지는 것만을 보고 무명이 생기는 것은 보지 못하여 생각마다 적멸을 증득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들이 종 일 생겨나나 그 남이 없음을 보시고, 또 그것이 종일 없어지지만 그 없어짐이 없는 것임을 보아서,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음이 곧 대승 의 최고 과(果)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과(果)가 가득 차면 깨달 음이 원만하고, 꽃이 피면 세계가 일어나서, 한발짝 드니 그대로가 부처요, 한발짝 내리니 그대로가 중생이도다'고 하는 것이니라. 모든 부처님을 양족존(兩足尊)이라 부르는 것은 이(理)의 측면에 도 구족하시고, 사(事)의 측면에도 구족하시며, 나아가 중생에도 구 족하시고 나고 죽음에도 구족하시며, 모든 것에 다 구족하시니 구족 하시므로 구할 것이 없느니라. 그대들이 지금 생각생각에 부처는 배 우려 하면서 중생을 싫어하니, 만약 중생을 싫어하면 이것이야말로 저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어, 똥치는 그릇을 들고 희 론의 똥을 제거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다만 너희들에게 옛부터 알음알이로 배워서 알려는 마음과 도를 보려는 마음을 없애 려고 그러신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마음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나 면 희론에 떨어지지 않은 것이며, 또한 똥을 내다버린다고 하느니라. 이는 다만 너희로 하여금 마음을 내지않게 하시는 것이다. 또 마음 이 일어나지 않으면 저절로 큰 지혜가 완성된다는 것은, 부처니 중 생이니 하는 분별을 결코 내지 않아서 일체를 모두 분별치 않아야만 비로소 우리 조계의 문하에 들어오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옛부터 성인들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법을 조금은 행 하였다'고 하신 것이다. 때문에 행함 없음[無行]이 나의 법문(法門)이 니라. 오로지 한 마음의 문일 따름이니, 모든 사람이 이 문에 이르러 서는, 모두 감히 들어오지는 못하나 전혀 없었다고 말하지는 말라. 다만 얻은 사람이 적을 뿐이니, 얻은 자는 곧 부처이니라. 편히 하여라." 問 佛窮得無明否 師云 無明 卽是一切諸佛得道之處 所以 緣起是道場 所見一塵一色 便合無邊理性 擧足下足 不離道 場 道場者 無所得也 我向 道 祇無所得 名爲坐道場 云無 明者 爲明 爲暗 師云非明非暗 明暗是代謝之法 無明 且不 明 亦不暗 不明 祇是本明 不明不暗 祇這一句子 亂却天下 人眼 所以道 <假使滿世間 皆如舍利佛 盡思共度量 不能測 佛智> 其無 慧 出過虛空 無 語論處 釋迦量等三千大千 世界 忽有一菩薩出來一跨 跨却三千大千世界 不出普賢一 毛孔 如今 把什�쒅宿통剿甘� 云 旣是學不得 爲什�� 道 歸源性無二 方便有多門 如之何 師云 歸源性無二者 無明 實性 卽諸佛性 方便有多門者 聲聞人 見無明生見無明滅 緣覺人 但見無明滅 不見無明生 念念證寂滅 諸佛 見衆生 終日生而無生 終日滅而無滅 無生無滅 卽大乘果 所以道 <果滿菩提圓 華開世界起 擧足卽佛 下足卽衆生> 諸佛兩 足尊者 卽理足事足 衆生足生死足 一切等足 足故不求 是 如今 念念學佛 卽嫌著衆生 若嫌著衆生 卽是謗他十方諸 佛 所以佛出世來 執除糞器 除 論之糞 祇敎 除却從來 學心見心 除得盡 卽不隨 論 亦云搬糞出 祇敎 不生心 心若不生 自然成大智者 決定不分別佛與衆生 一切盡不分 別 始得入我曹溪門下 故自古先聖云 <少行我法門> 所以 無行爲我法門 祇是一心門 一切人到這裏 盡不敢入 不道全 無 祇是少人得 得者 卽是佛 珍重 36. 계급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어떻게 해야 수행의 등급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종일토록 밥을 먹되 일찍이 한 톨의 쌀알도 씹은 바가 없으며, 종일토록 걸어다니지만 일찍이 한 조각의 땅도 밟은 바가 없다. 이 러할 때에 나와 남 등의 구별이 사라져, 종일토록 갖가지 일을 하면 서도 그 경계에 현혹되지 않아야만 비로소 자유자재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생각생각 모든 모양을 보지 않아서 앞뒤의 3제(三際)를 헤 아리지 말라. 과거는 감이 없으며 현재는 머무름이 없고 미래는 옴 이 없으니, 편안하고 단엄하게 앉아 움직이는 대로 내맡겨 얽매이지 않아야만 비로소 해탈했다고 할 수 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이 문중의 천 사람 만 사람 가운데서도 오로지 서너명만이 얻었을 뿐이 니라. 만약 도 닦기를 일삼지 않는다면 재앙을 받을 날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힘을 다하여 모름지기 금생에 도업을 마칠 것이 요, 뉘라서 누겁토록 나머지 재앙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느니라." 스님께서는 당(唐) 대중(大中 ; 847-859)년간에 본주(本州) 황벽산 에서 세연을 마치셨다. 선종(宣宗) 황제가 단제선사(斷際禪師)라고 시호를 내리고 탑호는 광업(廣業)이라 하였다. 問 如何得不落階級 師云 終日喫飯 未曾咬著一粒米 終日 行 未曾踏著一片地 與�쒌� 無人我等相 終日不離一切事 不被諸境惑 方名自在人 念念不見一切相 莫認前後三際 前 際無去 今際無住 後際無來 安然端坐 任運不拘 方名解脫 努力努力 此門中 千人萬人 祇得三箇五箇 若不將爲事 受 殃有日在 故云 <著力今生須了却 誰能累劫受餘殃> 師於唐大中年中終於本山 宣宗 謚斷際禪師 塔曰廣業 제4권 신심명(信心銘) 머리말 <신심명(信心銘)>은 삼조(三祖) 승찬대사(僧璨大師)가 지은 글입 니다. 명(銘)이란 일반적으로 금석(金石), 그릇, 비석 따위에 자계(自 戒)의 뜻으로나, 남의 공적 또는 사물의 내력을 찬양하는 것을 내용 으로 하여 새긴 한문 글귀를 말하는데, 이 <신심명)>은 삼조(三祖) 스님께서 우리가 처음 발심할 때로부터 마지막 구역성불할 때까지 가져야 하는 신심에 대해서 남겨 놓으신 사언절구(四言絶句)의 시문 (詩文)입니다. 이 <신심명>은 글 자체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심이란 도(道)의 본원(本源)이며 진여법계(眞如法界)에 사무쳐야 하는 것이 기 때문에, 이 글은 우리 수도인의 좌우명(左右銘)인 것입니다. 승찬 대사는 수(隋)나라의 양제(煬帝) 대업(大業) 2년 10월 5일(서기 606 년)에 입적하셨으며, 그의 세수는 알 수 없습니다. 승찬대사가 돌아 가신 지 150여 년 뒤 당(唐)나라 현종(玄宗) 황제가 감지선사(鑑智禪 師)라 시호(諡號)를 올리고 탑호(塔號)를 각적(覺寂)이라 하였으며 그 당시 유명한 재상인 방관(房琯)이 탑비문을 지었습니다. 승찬대사는 본래 대풍질(大風疾)이라는 큰 병에 걸려 있었는데 오 늘날의 문등병입니다. 스님은 문둥병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다 이조 (二祖) 혜가 대사(慧可大師)를 찾아가 자기의 성명도 밝히지 않고 불쑥 물었습니다. "제자는 문둥병을 앓고 있사옵니다. 화상께서는 저의 죄를 참회케 하여주십시오." "그대는 죄를 가져 오노라. 죄를 참회시켜 주리라." "죄를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죄는 모두 참회되었느니라. 그대는 그저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에 의지하여 안주해라." "지금 화상(和尙)을 뵈옵고 승보(僧寶)는 알았으나 어떤 것을 불 보(佛寶), 법보(法寶)라 합니까?" "마음이 부처며 마음이 법이니라.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요, 승보 도 또한 그러하니 그대는 알겠는가?"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은 마음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 지 않음을 알았으며 마음이 그러하듯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이에 혜가대사께서 그가 법기(法器)인 줄 아시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바로 머리를 깎아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의 보배이다. 구슬 찬(璨)자를 서서 승찬(僧璨)이라 하 라." 그해 3월 18일 복광사(福光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그로부 터 병이 차츰 나아져서 2년 동안 혜가스님을 시봉하였습니다. 승찬대사는 평생을 은거하여 지내다가 나중에 어린 나이의 도신 선사(道信禪師)를 만나 법을 깨우쳐 주고 뒤에 구족계를 받게 한 후 법을 전하면서 "나에게서 법을 받았다고 절대로 말하지 말아라." 고 당부 하셨다고 합니다. 돌아가실 때에는 법회하던 큰 나무 밑에서 합장한 채 서서 돌아 가셨다고 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묘를 써서 스님을 모셨는데, 뒤에 이상(李常)이라는 사람이 신회선사(神會禪師)에게 물어서 산곡사(山 谷寺)에 승찬대사의 묘가 있음을 알고는 가서 화장하여 사리(舍利) 삼백 알을 얻었다고 합니다. 승찬스님은 본래 문둥병을 앓았기 때문에 문둥병이 나은 후에도 머리카락이 하나도 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스님을 적두찬(赤頭 璨)이란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대머리의 붉은 살뿐이라는 뜻입 니다. 그 승찬대사가 남겨 놓은 저술이 바로 이 <신심명>입니다. 요즈 음 일본 학자들 가운데는 그 분이 숨어 다니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 의 행적에 모순된 점이 많다고 하여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ㄱ사적인 여러 가지 점들을 상고 해 보면 삼조 승찬스님이 실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고 나는 봅니다. 그런데 이 <신심명>에 있어서 그 신(信), 곧 믿음이 보통의 신 (信), 믿음이 아니라 신, 해, 오, 증(信解悟證) 전체를 통하는 신(信), 믿음입니다. 글 전체는 4언절구(四言絶句)로 해서 146구 584자로 되 어 있는 간단한 글이지만, 팔만대장경의 심오한 불법도리와 천칠백 공안의 격외도리(格外道理)전체가 이 글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모두 들 평(評)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의리적(義理的)으로 법문한 것 같 지만 간단한 이 글 전체 속에 격외도리가 다 갖추어져 있으며, 교리 의 현묘한 뜻도 빠짐없이 있습니다. 중국에 불법이 전해진 이후로 '문자로서는 최고의 문자'라고 학자들이 격찬할 뿐만 아니라 삼조 승 찬대사의 <신심명>같은 문자는 하나일 뿐, 둘은 없다고들 평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이 불교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 다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사상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 지하고 있는 신심명의 근본 골자가 무엇인가 하면 글 전체가 모두 양별을 여읜 중도(中道)에 입각해 있다는 것입니다. 글 전체를 자세 히 살펴보면 대대(對對)를 40대(四十對)로 갖추어 설명하고 있습니 다. 여기서 대대(對對)란 곧 미워함과 사랑함[憎愛]. 거슬림과 다름[逆 順], 옳고 그름[是非] 등등 일상생활에서 나타나고 있는 중생의 상대 개념 즉 변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심명>은 간단한 법문이지만 대대(對對)를 떠난 중도법을 간명하게 보여준 드문 저술입니다. <신 심명>은 일관된 논리로서 선(禪)이나 교(敎)를 막론하고 불교 전체 를 통하여 양변을 여읜 중도(中道)가 불교의 근본 사상임을 표현한 총괄적인 중도총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심명信心銘 1 至道無難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唯嫌揀擇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2 但莫憎愛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洞然明白 통연히 명백하리라. 3 毫釐有差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天地懸隔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4 欲得現前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莫存順逆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 5 違順相爭 어긋남과 따름이 서로 다툼은 是爲心病 이는 마음의 병이 됨이니 6 不識玄旨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徒勞念靜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7 圓同太虛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無欠無餘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8 良由取捨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所以不如 그 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도다. 9 莫逐有緣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勿住空忍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10 一種平懷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泯然自盡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11 止動歸止 움직임을 그쳐 그침으로 돌아가면 止更彌動 그침이 다시 큰 움직임이 되나니 12 唯滯兩邊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寧知一種 어찌 한가지임을 알건가. 13 一種 不通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兩處失功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14 遺有沒有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從空背空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15 多言多慮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轉不相應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16 絶言絶慮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無處不通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17 歸根得旨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隨照失宗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18 須臾返照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보면 勝脚前空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19 前空轉變 앞의 공함이 轉變함은 皆由妄見 모두 妄見 때문이니 20 不用求眞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唯須息見 오직 망녕된 견해만 쉴지니라. 21 二見不住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愼莫追尋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22 裳有是非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紛然失心 어지로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23 二由一有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一亦莫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24 一心不生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萬法無咎 만 법이 허물 없느니라. 25 無咎無法 허물이 없으면 법이 없고 不生不心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26 能隨境滅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境逐能沈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27 境由能境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能由境能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28 欲知兩段 양단을 알고저 할진대 元是一空 원래 하나의 空이니라. 29 一空同兩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齊含萬象 삼라만상을 함께 다 포함하여 30 不見精추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寧有偏黨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31 大道體寬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無易無難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32 小見狐疑 좁은 견해로 여우같은 의심을 내어 轉急轉遲 서둘수록 더디어지도다. 33 執之失度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必入邪路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34 放之自然 놓아 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體無去住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35 任性合道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여 逍遙絶惱 소요하여 번뇌가 끊기고 36 繫念乖眞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에 어긋나서 昏沈不好 혼침함이 좋지 않느니라. 37 不好勞神 좋지 않으면 신기를 괴롭히거늘 何用疎親 어찌 성기고 친함을 쓸건가. 38 欲趣一乘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勿惡六塵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 39 六塵不惡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還同正覺 도리어 정각(正覺)과 동일함이라. 40 智者無爲 지혜로운 이는 함이 없거늘 愚人自縛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얽매이도다. 41 法無異法 법은 다른 법이 없거늘 妄自愛着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하여 42 將心用心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豈非大錯 어찌 크게 그릇됨이 아니랴. 43 迷生寂亂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悟無好惡 깨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거니 44 一切二邊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良由斟酌 자못 짐작하기 때문이로다. 45 夢幻空華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何勞把捉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46 得失是非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一時放却 일시에 놓아 버려라. 47 眼若不睡 눈에 만약 졸음이 없으면 諸夢自除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고 48 心若不異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萬法一如 만법이 한결 같느니라. 49 一如體玄 한결 같음은 본체가 현묘하여 兀爾忘緣 올연히 인연을 잊어서 50 萬法齊觀 만법이 다 현전함에 歸復自然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 51 泯其所以 그 까닭을 없이하면 不可方比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이라 52 止動無動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動止無止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53 兩旣不成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니 一何有爾 하나인들 어찌 있을건가. 54 究竟窮極 구경하고 궁극하여 不存軌則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 55 契心平等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케 되어 所作俱息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쉬도다. 56 狐疑淨盡 여우 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正信調直 바른 믿음이 고루 발라지며 57 一切不留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無可記憶 기억할 아무것도 없도다. 58 虛明自照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不勞心力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로다. 59 非思量處 생각으로 헤아릴 곳 아님이라 識情難測 의식과 망정으론 측량키 어렵도다. 60 眞如法界 바로 깨친 진여의 법계에는 無他無自 남도 없고 나도 없음이라 61 要急相應 재빨리 상응코저 하거든 唯言不二 둘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62 不二皆同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無不砲容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63 十方智者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皆入此宗 모두 이 종취로 들어옴이라. 64 宗非促廷 종취란 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一念萬年 한 생각이 만년이요 65 無在不在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十方目前 시방이 바로 눈 앞이로다. 66 極小同大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忘絶境界 상대적인 경계 모두 끊어지고 67 極大同小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아서 不見邊表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음이라. 68 有卽是無 있음이 곧 없음이요 無卽是有 없음이 곧 있음이니 69 若不如此 만약 이 같지 않다면 不心須守 반드시 지켜서는 안되느니라. 70 一卽一切 하나가 곧 일체요 一切卽一 일체가 곧 하나이니 71 但能如是 다만 능히 이렇게만 된다면 何慮不畢 마치지 못할까 뭘 걱정하랴. 72 信心不二 믿는 마음은 둘 아니요 不二信心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 73 言語道斷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非去來今 과거.미래.현재가 아니로다. 제5권 증도가(證道歌) 머리말 <증도가(證道歌)>는 영가(永嘉)스님이 지었습니다. 영가(永嘉)스님의 휘(諱)는 현각(玄覺)이요, 자(字)는 도명(道明)이 며, 성은 대(戴)씨이며, 절강성 온주부 영가현[浙江省溫州府永嘉縣] 사람입니다. 어릴 때 출가하여 안으로는 삼장(三臟)을 두루 섭렵하고 밖으로는 외전에도 널리 통달하였다고 합니다. 영가스님은 본래 천태종 계통으로 천태지관(天台止觀)을 많이 익 혀서 그 묘를 얻고 항상 선관(禪觀)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천태종 팔 조(八祖)인 좌계 현랑(左溪玄朗) 법사와는 동문(同門)이며, 나중에 도를 성취하고 난 뒤에도 서로 서신 왕래를 하였다고 합니다. 일찍이 온주의 개원사(開元寺)에 있으면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지 내며 효순하기로 소문이 났으나, 누님까지 함께 지내니 두 사람을 보살피고 있다하여 온 사중(寺中)과 동구(洞口)에서 비방을 하였습 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별세하여 상복을 입고서도 누님을 떠나 보 내지 못하니 사람들의 비방이 더욱 심했으나 영가스님은 전혀 그러 한 데 개으치 않았습니다. 영가스님이 천태종에 있으면서 선관을 닦고 선종과 비슷한 길을 밟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면 왜 천태종에서 선종으로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개원사 복도로 현책(玄策)이라는 선사가 지나가고 있었는 데 나이는 60여세였습니다. 이때 그의 누님이 발 밖으로 그 노숙(老 宿)을 보고, "저 노스님을 방으로 청해서 대접했으면 좋겠다." 고 하였습니다. 영가스님이 얼른 나가서 노스님을 청했더니, 노숙 은 들어오지 않으려 하다가 스님의 간절한 청에 못이겨 방에 들어왔 습니다. 그 노숙과 법에 대해 여러 가지로 토론해 보니 자신의 견처 나 노스님의 견처가 같은 점도 많이 있고 독특한 점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책스님은 영가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대의 법사는 누구인가?" "제가 <방등경론>을 배울 때는 각각 스승이 계셨으나, 뒤에 <유 마경>에서 불심종(佛心宗)을 깨치고는 아직 증명하실 분이 없습니 다."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노스님은 영가스님의 기상이 다 른 사람들과 다르고 또 그 누님에게도 협기(俠氣)가 있음을 느끼고 다음과 같이 권했습니다. "부모와 형제에게 효순하는 일도 한 가지 길이지만, 당신은 불법 의 이치를 밝히기는 했으나 스승의 인가를 얻지 못하고 있소. 과거 의 부처님들도 성인과 성인이 서로 전하시고 부처와 부처가 서로 인 가하였습니다. 석가여래께서도 연등불의 수기를 받으셨소. 그렇게 하 지 않으면 천연외도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오. 남방에 큰 스승으로 혜능선사가 계십니다. 그곳으로 가서 발 아래 예배하고 스승으로 섬 기시오." 그러자, 영가스님이 "다른 분을 증명법사로 모실 것이 아니라 스님께서 법이 수승하 신 듯 하니 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시면 좋겠습니다. 저를 위해서 허 락해 주십시오." 하자, 현책스님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로서는 그대의 증명법사가 되기는 곤란하오. 지금 조계에는 육 조대사가 계셔서 사방에서 학자가 운집하여 법을 받는 터이니 만약 그대가 가겠다면 함께 가리다." 그러나 영가스님은 누님을 홀로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어 망설였 습니다. 그러자 누님이 하는 말이 "나는 다른 데 의지해서 지낼 수 있으니 나를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시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현책스님과 함께 떠났는데, 그 때에 영가스님의 나이는 31세였습니다. 그럭저럭 시흥현(始興縣) 조계산(曹溪山)에 이르니 때 마침 육조대사(六祖大師)께서 상당(上堂)하여 법문을 하고 계셨습니 다. 이에 영가스님은 절도 하지 않고 선상을 세 번 돌고 나서 육환 장을 짚고 앞에 우뚝 서있자니 육조대사께서 물으셨습니다. "대저 사문(沙門)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추어서 행동이 어긋남이 없어야 하거늘, 대덕(대덕)은 어디서 왔기 에 도도하게 아만을 부리는가?" 육조스님의 이러한 말씀은 건방기제 와서 인사도 하지 않고 선상 만 세 번 돌고 턱 버티고 서 있기만 하니 그것은 아만심이 탱천하기 때문이 아니냐하는 힐난입니다. 그러나 육조스님이 영가스님 하는 짓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한 번 슬쩍 법을 걸어보는 것입니다. 그러자 영가스님께서 "나고 죽는 일이 크고, 무상(無常)은 빠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저 피상적으로 관찰하는 것과는 뜻 이 다르므로 그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육조스님이 말씀하 셨습니다. "어찌하여 남[生]이 없음을 체험해 얻어서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 달하지 못하는가" 이렇게 육조스님께서 반문하시니 이것은 '네가 지금 무상이 빠르 다고 하니 그 무상(無常)의 근본을 바로 체험하여 깨치고, 남이 없음 [無生]을 요달하면 빠르고 빠르지 않음이 떨어져 버린 구경을 성취 하게 되는데 왜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느냐'라는 말 씀입니다. 이에 영가스님이 답하였습니다. "본체는 곧 남이 없고 본래 빠름이 없음을 요달하였습니다." 본체는 원래 남이 없으니 그걸 우리가 체득할 필요가 뭐 있느냐 는 것입니다. 이대로가 남이 없고 그대로가 빠름이 없는데, 다시 남 이 없고 빠름이 없음을 요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영가스님이 반 박하자, 육조스님이 "네 말과 같다. 네 말과 같다." 고 인가하시니, 천여명의 대중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때에야 이로소 영가스님은 다시 동랑(東廊)으로 가서 육환장을 걸어 놓고 위의를 갖추어 육조스님께 정중히 예배하였습니다. 위의 를 갖춘다는 것은 큰 가사를 입고 향을 피우고 스님에게 예배를 드 리는 것을 말합니다. 영가스님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서 바로 하직 인사를 드리자 육조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리 빨리 돌아가려고 하느냐?" "본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거니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 "누가 움직이지 않는 줄 아느냐?" "스님께서 스스로 분별을 내십니다." "네가 참으로 남이 없는 도리를 알았구나!" "남이 없음이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 이는 남이 없음에 뜻이 있다면 남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 니다. "뜻이 없다면 누가 분별하느냐?" 뜻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있는 그것부터가 분별하는 것이 아니냐 는 욱조스님의 질책입니다. "분별하는 것도 뜻이 아닙니다." 분별을 하여도 심(心), 의(意), 식(識)의 사량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대용의 나타남이라는 영가스님의 말씀입니다. 그러자 육 조스님께서 선상에서 내려오시더니 영가스님의 등을 어루먼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장하다 옳은 말이다. 손에 방패와 창을 들었구나. 하룻밤만 쉬어 가거라." 그리하여 그 때 사람들이 영가스님이 조계산에서 하룻밤만 자고 갔다 하여 일숙각(一宿覺)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튿날 육조스님께 하직을 고하니 몸소 대중을 거느리시고 영가 스님을 전송하셨는데, 영가스님이 열 걸음쯤 걸어 가다가 석장을 세 번 내려치고 말했습니다. "조계를 한 차례 만난 뒤로는 나고 죽음과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 았노라!" 선사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그의 소문은 먼저 퍼져서 모두들 그를 '부사의(不思議) 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그의 가(歌), 항(行), 게(偈), 송(頌)은 모두가 그의 누나 가 수집한 것입니다. 영가스님은 선천(先天) 2년(서기 713년) 10월 17일에 입적하시니 세수 39세였으며, 시호(諡號)는 무상대사(無相大師), 탑호(塔號)는 정 광(淨光)이라 하였습니다. 그해에 육조스님께서도 돌아가시니 세수 76세였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흔히 어떤 사람들은 이 법담(法談)을 평하기를, 영가스님이 육조스님보다 나은 듯하고 육조스님이 말에 몰리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가스님이 육조스님보다 수승한 사람이 아니냐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평을 하면 영가스님을 잘못 본 사람입니다. 영가스님 자신이 <증도가(證 道歌)>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조계의 길을 깨친 뒤로 나고 죽음과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다."고 하여, 조계산에 있는 육조스님을 찾아와서 근본을 확철히 깨쳤다고 자기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인(古人)들은 영가스님이 깨친 대목을 두고 말하기를 앞의 법담 에서, "어찌하여 남이 없음을 체험해 얻어서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달 하지 못하는가?" 하는 말 끝에서 깨쳤다고 봅니다. 영가스님이 자기 스스로 조계의 길을 확실히 깨치고 난 뒤에는 나고 죽음에 자재하다고 말씀하셨으며, 자기가 평생동안 연구했던 천태종을 버리고 육조스님의 조계 선종의 입장에서 법문하였고 저술 도 하였습니다. 그런 만큼 육조스님께 와서 깨친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영가스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고 선종에서 깨친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영가스님의 행장(行 狀)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살펴보고 <증도가(證道歌)>에 대해서 조 금 이야기 하겠습니다. 영가스님이 육조스님을 찾아가서 확철히 깨치고, 깨친 경지에 의 지해서 <증도가>를 지었는데, 천태종이나 다른 교가의 사상과는 많 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천태종에서는 교리적으로 볼 때 맞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 하여 이것이 일종의 미친 견해이지 바른 견해는 아 니라고까지 혹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종에서 볼 때는 <증도 가>가 선종사상을 대표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그러헥 비난하 는 사람들은 선종을 모르는 데서 하는 말이지 바른 길을 아는 사람 이면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벌대로 생각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禪)과 교(敎)의 관계가 <증도가>에서 더욱 더 완연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禪)에서는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간다[一超直入 如來地]'고 많이 주장하는데 대해서, 교[敎]에서는 '점차고 닦아 성불 하는 것[漸修]'만을 근본으로 표방하므로 서로가 정반대의 입장에 서 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당시 영가스님의 <증도가>에 대해서 천태종 에서 가장 많이 공격했지만, 그 공격도 일시적인 것이 되고 말았으 며, 영가스님의 <증도가>는 실제로 도 닦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만고의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증도가(證道歌)>라 하였는데 '증(證)'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살펴 봅시다. '증(證)'이란 구경(究竟)을 바로 체득함을 말합니다. 깨달음[悟]에도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해오(解悟)란 견해(見解), 지해(知解)를 말하는 것으로, 알ㄴ기는 분 명히 알지만 실제 마음으로 체득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 면 얼음이 본래 물인 줄은 알았지만 아직 녹지 않고 얼음 그대로 있 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얼음을 녹여 물로 쓰고 있지는 못하듯 이 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은 분명히 알았지만 번뇌망상이 아직 그대 로 남아 있어서 중생 그대로인 것, 그것을 해오(解悟)라고 말합니다. '증오(證悟)'란 얼음을 완전히 녹여서 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 라 물 자체도 볼 수 없는 경계, 따라서 중생의 번뇌망상이 다 끊어 져서 제팔 아뢰야 근본무명까지 끊어진 구경각을 말하니 곧 실지로 성불한 것, 견성한 것을 증오(證悟)라 하고 간단히 줄여서 증(證)이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가(敎家)에서든지 선가(禪家)에서든지 증(證)이라 하면 근본적으로 체달한 구경각(究竟覺)을 말하는 것이지 그 중간에서 뭘 좀 아는 걸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통된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이 노래에 '증(證)'자를 붙였냐 하면, 선종에서 깨 쳤다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증오(證悟)'를 근본적으로 삼앗지 '해오 (解悟)'로서는 근본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다 시 말하면 선가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다는 것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조(普照)스님도 처음에는 선가에서 전한 법을 '해오(解悟)'라고 잘못 보았다가 나중에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이라든가 <원돈성 불론(圓頓成佛論)>같은 데서는 선이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 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선가에서의 근본 표본은 '해오(解悟)'가 아닌 구경각이며, 선가에서의 깨달음[悟] 이란 구경적으로 체달한 것임을 표현하기 위해서 노래 이름부터도 '증(證)'이라 하였지 '해(解)'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종에서는 언제든지 깨친 것을 '돈오(頓悟)'라 하는데, "돈(頓)이란 망념을 순식간에 없애는 것이요 오(悟)란 얻는 바가 없 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대주(大珠)선사는 설파하고 있습니다. 근본 무명인 제팔 아뢰야는 무기무심(無記無心)의 마계(魔界)까지 완전히 벗어나서 대원경지(大圓鏡智)에 들어가 진여본성을 확철히 깨친 것이 곧 '증(證)'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가에서는 그 중간 적인 것을 '깨달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앞으로 설명하는 <증도가>를 이해할 수 있지 '증 오(證悟)'와 해오(解悟)'를 혼동해서는 영원히 <증도가>를 모르고 마 는 것입니다. 이 <증도가>는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해서 부처님으로부터 달마 스님까지 달마스님에서 육조스님까지, 그리하여 오가칠종(五家七宗) 으로 내려온 정안종사(正眼宗師)의 증오처(證悟處)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증(證)'이라 한다는 것을 한 번 더 강조합니다. 그러면 어째서 도(道)라 하는가? 도(道)를 보리(菩提)라 각(覺)이라 하는데 <증(證)>을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이 도(道)라 하는 것은 증(證)한 도(道)를, 구경각을 성 취한 그 구경처(究竟處)를 말합니다. 즉 도(道)란 구경을 깨친 '증 (證)'한 도(道)이지 중각적인 도(道), 해(解)한 도(道)가 아니라는 것 입니다. 그러면 구경각인 도란 무엇인가? "무심이 도라고 일컬어 말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 두터운 관문이 막혀 있느니라. [莫道無心云是道하라 無心猶隔一重關이니라]" 도는 무심과 통합니다. 우리가 실지로 공부해서 대무심지(大無心 地)에 들어가서 구경각을 바로 성취하면 그만인데,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지 못하고 제팔 아뢰야 무기무심에 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그 폐단을 막기 위해서 제팔 아뢰야의 무심 즉 멸진정(滅盡定)의 무심 은 도(道)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멸진정의 무심도 아주 벗어나서 제 팔 아뢰야의 근본 무명까지 끊어진곳에서 구경각을 성취하여 대원경 지가 현발한 이것이 도(道)인 것이며, 진연본성을 바로 보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증(證)'이 곧 '도(道)'이며 '도(道)'가 곧 '증(證)'이 라 하는 것입니다. 달마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 心如墻壁하사와 可以入道니라]" 그러면 마음이 담과 벽 같아야 한다고 하니 목석과 같고 장승과 같은 무심지에 들어가 버리면 그것이 도(道)냐 하면, 그것이 도가 아 니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제팔 아뢰야 무기무심이 장애가 되어 근본적인 구경무심에는 아직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참으로 구경의 대무심지에 들려면 멸진정의 가무심(假無心), 거기서 한 관문을 더 뚫어서 구경무심을 성취해야 바로 도(道)를 깨 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인용한 달마스님의 말씀도 구경적인 도를 말씀함이지 중간적인 도가 아니며 증오(證悟)의 '도(道)'이지, 해오(解悟)의 '도(道)'는 아닙니다. 달마스님 이래로 선종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 구경각을 '증(證)'이라 하고, '도(道)'라 하는 것도 '증 (證)'을 근본 내용으로 삼기 때문에 구경각이 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도는 달마스님이 말씀하신 무심을 한층 넘어간 도가 되어야지 그 중간적인 것은 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가(歌)'란 무엇인가? 영가스님 자신이 확철히 깨친 경계를 노래로써 표현한 것입니다. 영가스님이 육조스님을 찾아가 확철히 깨쳐 구경각을 성취하고 나서 그 경지를 시가(詩歌) 형식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증도가證道歌 1 君不見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2 絶學無爲閑道人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 은 不除妄想不求眞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히지 않 으니 3 無明實性 卽佛性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요 幻化空身 卽法身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 4 法身 覺了無一物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本源自性 天眞佛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5 五陰浮雲 空去來 오음의 뜬구름이 부질없이 가고 오며 三毒水泡虛出沒 삼독의 물거품은 헛되이 출몰하도다. 6 證實相無人法 실상을 증득하여 人. 法이 없으니 刹那 滅却阿鼻業 찰나에 아비지옥의 업을 없애버림이라 7 若將妄語�x衆生 거짓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自招拔舌塵沙劫 진사겁토록 발설지옥 보를 스스로 부르 리로다. 8 頓覺了如來禪 여래선을 단박에 깨치니 六度萬行 體中圓 육도만행이 본체 속에 원만함이라 9 夢裏 明明有六趣 꿈속에선 밝고 밝게 육취가 있더니 覺後 空空無大千 깨친 후엔 비고 비어 대천 세계가 없 도다. 10 無罪福無損益 죄와 복이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나니 寂滅性中 莫問멱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고 찾지 말 라. 11 比來 塵鏡 未曾磨 예전엔 때 낀 거울 미처 갈지 못했 더니 今日 分明須剖析 오늘에야 분명히 닦아 내었도다. 12 誰無念誰無生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남이 없는가. 若實無生無不生 진실로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도 없나 니 13 喚取機關木人問 기관목인을 불러 붙들고 물어 보라. 求佛施功早晩成 부처 구하고 공 베풂을 조만간 이루리 로다. 14 放四大莫把捉 사대를 놓아 버려 붙잡지 말고 寂滅性中 隨飮 적멸한 성품 따라 먹고 마실지어다. 15 諸行 無常一切空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니 卽是如來大圓覺 이는 곧 여래의 대원각이로다. 16 決定說表眞乘 결정된 말씀과 참됨을 나타낸 법을 有人 不肯任情徵 어떤 사람은 긍정치 않고 정에 따라 헤아림이라 17 直截根源佛所印 근원을 바로 끊음은 부처님 인가하신 바요 摘葉尋枝 我不能 잎 따고 가지 찾음은 내 할 일 아니 로다. 18 摩尼珠 人不識 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如來藏裏 親收得 여래장 속에 몸소 거두어 들임이라 19 六般神用空不空 여섯 가지 신통묘용은 공하면서 공하 지 않음이요 一顆圓光色非色 한 덩이 두렷한 빛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로다. 20 淨五眼得五力 오안을 깨끗이 하여 오력을 얻음은 唯證乃知難可測 증득해야만 알 뿐 헤아리긴 어렵도다. 21 鏡裏 看形見不難 거울속의 형상 보기는 어렵지 않으나 水中捉月爭拈得 물속의 달을 붙들려 하나 어떻게 잡을 수 있으랴. 22 常獨行常獨步 항상 홀로 다니고 항상 홀로 걷나니 達者同遊涅槃路 통달한 이 함께 열반의 길에 노닐도다. 23 調古神淸風自高 옛스러운 곡조 신기 맑으며 풍채 스스 로 드높음이여 貌悴骨剛人不顧 초췌한 모습 앙상한 뼈 사람들 돌아보 지 않는도다. 24 窮釋子口稱貧 궁색한 부처님 제자 입으로는 가난타 말 하나 實是身貧道不貧 실로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치 않음 이라. 25 貧則身常披縷褐 가난한 즉 몸에 항상 누더기를 걸치고 道則心藏無價珍 도를 얻은 즉 마음에 무가보(無價寶)를 감추었도다. 26 無價珍用無盡 무가보는 써도 다함이 없나니 利物應時終不 중생 이익하며 때를 따라 끝내 아낌이 없음이라 27 三身四智 體中圓 삼신. 사지는 본체 가운데 원만하고 八解六通 心地印 팔해탈 육신통은 마음땅의 인(印)이로 다. 28 上士 一決一切了 상근기는 한번 결단하여 일체를 깨치 고 中下 多聞多不信 중. 하근기는 많이 들을수록 더욱 믿 지 않는도다. 29 但自懷中解垢衣 스스로 마음의 때 묻은 옷을 벗을 뿐 誰能向外誇精進 뉘라서 밖으로 정진을 사랑할건가. 30 從他謗任他非 남의 비방에 따르고 남의 비난에 맡겨두 라. 把火燒天徒自疲 불로 하늘을 태우려 하나 공연히 자신 만 피로하리로다. 31 我聞恰似飮甘露 내 듣기엔 마치 감로수를 마심과 같아 서 鎖融頓入不思議 녹아서 단박에 부사의 행탈경에 들어 가리로다. 32 觀惡言 是功德 나쁜 말을 관찰함이 바로 공덕이니 此則成吾善知識 이것이 나에게는 선지식이 됨이라 33 不因 謗起怨親 비방 따라 원망과 친한 마음 일지 않 으면 何表無生慈忍力 하필이면 남이 없는 자비인욕의 힘 나 타내 무엇할건가. 34 宗亦通說亦通 종취도 통하고 설법도 통함이여 定慧圓明不滯空 선정과 지혜가 두렷이 밝아 공에 응체 하지 않는도다. 35 非但我今獨達了 나만 이제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河沙諸佛體皆同 수 많은 모든 부처님 본체는 모두 같 도다. 36 獅子吼無畏說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百獸聞之皆腦裂 뭇 짐승들 들으면 모두 뇌가 찢어짐 이라 37 香象 奔波失却威 향상은 분주하게 달아나 위엄을 잃 고 天龍 寂聽生欣悅 천룡은 조용히 듣고서 희열을 내는 도다 38 遊江海涉山川 강과 바다에 노닐고 산과 개울을 건너 서 尋師訪道爲參禪 스승 찾아 도를 물음은 참선 때문이 라 39 自從認得曹溪路 조계의 길을 인식하고 부터는 了知生死不相干 생사와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40 行亦禪坐亦禪 다녀도 참선이요 앉아도 참선이니 語默動靜體安然 語默動靜에 본체가 편안함이라 41 縱遇鋒刀常坦坦 창. 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假饒毒藥也閑閑 독약을 마셔도 한가롭고 한가롭도다. 42 我師得見燃燈佛 우리 스승 부처님께서 연등불을 뵈옵 고 多劫 曾爲忍辱僊 다겁토록 인욕선인이 되셨도다. 43 幾廻生幾廻死 몇번을 태어나고 몇 번인나 죽었던가. 生死悠悠無定止 생사가 아득하여 그침이 없었도다. 44 自從頓悟了無生 단박에 깨쳐 남이 없음을 요달하고부 터는 於諸榮辱何憂喜 모든 영욕에 어찌 근심하고 기뻐하랴. 45 入深山住蘭若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곳에 머무니 岑 幽邃長松下 높은 산 그윽하여 낙락장송 아래로다. 46 優遊靜坐野僧家 한가히 노닐며 절 집에서 조용히 앉 았으니 격寂安居實蕭灑 고요한 안거 참으로 蕭灑하도다. 47 覺卽了不施功 깨친즉 그만이요 공 베풀지 않나니 一切有爲法不同 모든 유위법과 같지 않도다. 48 住相布施 生天福 모양과 머무는 보시는 하늘에 나는 복이나 猶如仰箭射虛空 마치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도 다. 49 勢力盡箭還墜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招得來生不如意 내생에 뜻과 같지 않는 과보를 부르 리로다. 50 爭似無爲實相門 어찌 함이 없는 실상문에 一超直入如來地 한번 뛰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감과 같으리오. 51 但得本草愁末 근본만 얻을 뿐 끝은 근심치 말지니 如淨瑠璃含寶月 마치 깨끗한 유리가 보배달을 머금음 과 같도다. 52 旣能解此如意珠 이미 이 여의주를 알았으니 自利利他終不竭 나와 남을 이롭게 하여 다함이 없도 다. 53 江月照松風吹 강엔 달 비치고 소나무엔 바람 부니 永夜淸 何所爲 긴긴 밤 맑은 하늘 무슨 하릴 있을건 가. 54 佛性戒珠 心地印 불성계의 구슬은 마음의 印이요 霧露雲霞 體上衣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은 몸 위의 옷 이로다. 55 降龍鉢解虎錫 용을 항복받은 발우와 범싸움 말린 석 장이여 兩 金環鳴歷歷 양쪽 쇠고리는 역력히 울리는도다. 56 不是標形虛事持 이는 모양을 내려 허투루 지님이 아 니요 如來寶杖 親 跡 부처님 보배 지팡이를 몸소 본받음 이로다. 57 不求眞不斷妄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령됨도 끊지 않 나니 了知二法 空無相 두 법이 공하여 모양 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58 無相無空無不空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 음이여 卽是如來眞實相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59 心鏡明鑑無碍 마음의 거울 밝아서 비침이 걸림 없으 니 廓然瑩徹周沙界 확연히 비치어 항사세계에 두루 사무 치도다. 60 萬象森羅影現中 만상삼라의 그림자 그 가운데 나타나 고 一顆圓明非內外 한 덩이 두렷이 밝음은 안과 밖이 아 니로다. 61 豁達空撥因果 활달히 공하다고 인과를 없다하면 茫茫蕩蕩招殃禍 아득하고 끝없이 앙화를 부르리로다. 62 棄有著空病亦然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면 병이기 는 같으니 還如避溺而投火 마치 물을 피하다가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도다. 63 捨妄心取眞理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取捨之心成巧僞 취사하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 도다. 64 學人 不了用修行 배우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하고 수행 하나니 眞成認賊將爲子 참으로 도적을 아들로 삼는 짓이로다. 65 損法財滅功德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莫不由斯心意識 心. 意. 識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 이라 66 是以 禪門 了却心 그러므로 선문에선 마음을 물리치 고 頓入無生知見力 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단박에 들어 가도다. 67 大丈夫秉慧劒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般若鋒兮金剛 반야의 칼날이요 금강의 불꽃이로다. 68 非但能 外道心 외도의 마음만 꺾을 뿐 아니요 早曾落却天魔膽 일찍이 천마의 간담을 떨어뜨렸도다. 69 震法雷擊法고 법의 우레 진동하고 법고를 두드림이여 布慈雲兮灑甘露 자비의 구름을 펴고 감로수를 뿌리는 도다. 70 龍象 蹴踏潤無邊 용상이 차고 밟음에 윤택이 그지 없 으니 三乘五性 皆惺悟 三乘과 五性이 모두 깨치는도다. 71 雪山肥 更無雜 설산의 비니초는 다시 잡됨이 없어 純出醍 我常納 순수한 제호를 내니 나 항상 받는도 다. 72 一性 圓通一切性 한 성품이 두렷하게 모든 성품에 통 하고 一法 含一切法 한 법이 두루하여 모든 법을 포함하 나니 73 一月 普現一切水 한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고 一切水月 一月攝 모든 물의 달을 한 달이 포섭하도다. 74 諸佛法身 入我性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고 我性 還共如來合 나의 성품이 다시 함께 여래와 합치 하도다. 75 一地 具足一切地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니 非色非心非行業 색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행업도 아니로다. 76 彈指圓成八萬門 손가락 퉁기는 사이에 팔만법문 원만 히 이루고 刹那 滅却三祇劫 찰나에 삼아승지겁을 없애버리는도 다. 77 一切數句非數句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與吾靈覺何交涉 나의 신령한 깨침과 무슨 상관 있을 건가. 78 不可毁不可찬 훼방도 할 수 없고 칭찬도 할 수 없음 이여 體若虛空勿涯岸 본체는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도다. 79 不離當處常湛然 당처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니 멱則知君不可見 찾은 즉 그대를 아나, 볼 수는 없도 다. 80 取不得捨不得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나니 不可得中 只�쑼�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로다. 81 默時說說時默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 여 大施門開無壅塞 크게 베푸는 문을 여니 옹색함이 없 도다. 82 有人 問我解何宗 누가 나에게 무슨 종취를 아느냐고 물으면 報道摩訶般若力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대답해 주어라. 83 或是或非人不識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이 알 지 못하고 逆行順行天莫測 역행. 순행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하도 다. 84 吾早曾經多劫修 나는 일찍이 많은 劫 지나며 수행하 였으니 不是等閑相�x惑 부질없이 서로 속여 미혹케 함이 아 니로다. 85 建法幢立宗旨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일으킴이여 明明佛勅曹溪是 밝고 밝은 부처님 법 조계에서 이었 도다. 86 第一迦葉 首傳燈 첫번째로 가섭이 맨 먼저 등불을 전 하니 二十八代 西天記 이십팔대는 서천의 기록이로다. 87 法東流入此土 법이 동쪽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와서 는 菩提達磨爲初祖 보리달마가 첫 조사 되었도다. 88 六代傳衣 天下聞 六代로 옷 전한 일 천하에 소문났고 後人得道何窮數 뒷 사람이 도 얻음을 어찌 다 헤아리 랴. 89 眞不立妄本空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 공함이 여 有無俱遣不空空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니 공하지 않 고 공하도다. 90 二十空門 元不著 二十空門에 원래 집착하지 않으니 一性如來體自同 한 성품 여래의 본체와 저절로 같도 다. 91 心是根法是塵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兩種 猶如鏡上痕 둘은 거울 위의 흔적과 같음이라. 92 痕垢盡除光始現 흔적인 때 다하면 빛이 비로소 나타 나고 心法雙亡性卽眞 마음과 법 둘 다 없어지면 성품이 곧 참되도다. 93 嗟末法惡時世 말법을 슬퍼하고 시세를 미워하노니 衆生 薄福難調制 중생의 복 얇아 조복받기 어렵도다. 94 去聖遠兮邪見深 성인 가신 지 오래고 사견이 깊어짐 이여 魔强法弱多怨害 마구니는 강하고 법은 약하여 怨害가 많도다. 95 聞說如來頓敎門 여래의 돈교문 설교를 듣고서는 恨不滅除令瓦碎 부숴 없애버리지 못함을 한탄하는도 다. 96 作在心殃在身 지음은 마음에 있으나 재앙은 몸으로 받나니 不須怨訴更尤人 모름지기 사람을 원망하고 허물치 말 지어다. 97 欲得不招無間業 무간지옥의 업보를 부르지 않으려거 든 莫謗如來正法輪 여래의 바른 법륜을 비방하지 말아라. 98 檀林無雜樹 전단향 나무 숲에는 잡나무가 없으니 울密深沈師子住 울창하고 깊숙하여 사자가 머무는도 다. 99 境靜林閒獨自遊 경계 고요하고 숲 한적하여 홀로 노 니니 走獸飛禽 皆遠去 길짐승과 나는 새가 모두 멀리 달아 나도다. 100 師子兒衆隨後 사자 새끼를 사자 무리가 뒤따름이여 三歲 卽能大哮吼 세 살에 곧 크게 소리치는도다. 101 若是野干 逐法王 여우가 법왕을 쫓으려 한다면 百年妖怪虛開口 백년 묵은 요괴가 헛되이 입만 엶이 로다. 102 圓頓敎勿人情 원돈교는 인정이 없나니 有疑不決直須爭 의심있어 결정치 못하거든 바로 다툴 지어다. 103 不是山僧 逞人我 산승이 인아상을 들어냄이 아니요 修行 恐落斷常坑 수행타가 斷. 常의 구덩이에 떨어질 까 염려함이로다. 104 非不非是不是 그름과 그르지 않음과 옳음과 옳지 않 음이여 差之毫釐失千里 털끝만큼 어긋나도 천리길로 잃으리 도다. 105 是卽龍女頓成佛 옳은 즉 용녀가 단박에 성불함이요 非卽善星 生陷墜 그른 즉 善星이 산 채로 지옥에 떨 어짐이로다. 106 吾早年來積學問 나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쌓아서 亦曾討疏尋經論 일찍 주소를 더듬고 경론을 살폈도다. 107 分別名相 不知休 이름과 모양 분별함을 쉴 줄 모르고 入海算沙徒自困 바다 속 모래 헤아리듯 헛되이 스스 로 피곤하였도다. 108 却被如來苦呵責 문득 여래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으니 數他珍寶有何益 남의 보배 세어서 무슨 이익 있을건 가. 109 從來 學虛行 예전엔 비칠거리며 헛된 꾸지람을 들었으니 多年 枉作風塵客 여러 해를 잘못 풍진객(風塵客) 노릇 하였도다. 110 種性邪錯知解 성품에 삿됨을 심고 알음알이 그릇됨이 여 不達如來圓頓制 여래의 圓頓制를 통달치 못함이로다. 111 二乘 精進勿道心 이승은 정진하나 도의 마음이 없고 外道 총明無智慧 외도는 총명해도 지혜가 없도다. 112 亦愚癡亦小駭 우치하고도 겁이 많으니 空拳指上 生實解 빈 주먹 손가락 위에 실다운 견해를 내는도다. 113 執指爲月枉施功 손가락을 달로 집착하여 잘못 공부하 니 根境塵中 虛날怪 육근. 육경. 육진 가운데서 헛되이 괴이한 짓 하는도다. 114 不見一法 卽如來 한 법도 볼 수 없음이 곧 여래니 方得名爲觀自在 바야흐로 이름하여 관자재라 하는도 다. 115 了卽業障 本來空 마치면 업장이 곧 공함이요 未了還須償宿債 마치지 못하면 도리어 묵은 빛 갚으 리로다. 116 飢逢王膳不能飡 굶다가 임금 수라 만나도 먹을 수 없 으니 病遇醫王爭得差 병들어 의왕 만난들 어찌 나을 수 있 으랴. 117 在欲行禪知見力 욕망 속에서 참선하는 지견의 힘이여 火中生蓮終不壞 불 속에서 연꽃 피니 끝내 시들지 않 는도다. 118 勇施犯重悟無生 용시비구는 중죄 짓고도 남이 없는 법을 깨달으니 早是成佛于今在 벌써 성불하여 지금에 있음이로다. 119 師子吼無畏說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深嗟 頑皮�� 어리석은 완피달을 몸시 슬퍼하는도 다. 120 只知犯重障菩提 중죄 범하면 보리를 막는 줄만 알 뿐 不見如來開秘訣 여래께서 비결 열어 두심은 보지 못 하도다. 121 有二比丘犯狀殺 어떤 두 비구 음행과 살생 저지르니 波離螢光 增罪結 우바리의 반딧불은 죄의 매듭 더하 였고 122 維摩大士頓除疑 유마대사 단박에 의심을 없애줌이여 還同赫日消霜雪 빛나는 해가 서리. 눈 녹임과 같도다. 123 不思議解脫力 不思議한 해탈의 힘이여 妙用恒沙也無極 묘한 작용 항하사같아 다함 없도다. 124 四事供養 敢辭勞 네 가지 공양을 감히 수고롭다 사 양하랴. 萬兩黃金 亦銷得 萬兩 황금이라도 녹일 수 있도다. 125 粉骨碎身未足酬 뼈가 가루되고 몸이 부숴져도 다 갚 을 수 없나니 一句了然超百億 한 마디에 요연히 백억 법문을 뛰어 넘도다. 126 法中王最高勝 법 가운데 왕 가장 높고 수승함이여 河沙如來同共證 강 모래같이 많은 여래가 함께 증득 하였도다. 127 我今解此如意珠 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하오니 信受之者皆相應 믿고 받는 이 모두 상응하리도다. 128 了了見無一物 밝고 밝게 보면 한 물건도 없음이여 亦無人兮亦無佛 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129 大千世界 海中 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이요 一切聖賢 如電拂 모든 성현은 번갯불 스쳐감과 같도 다. 130 假使鐵輪 頂上旋 무쇠바퀴를 머리 위에서 돌릴지라도 定慧圓明終不失 선정과 지혜가 두렷이 밝아 끝내 잃 지 않는도다. 131 日可冷月可熱 해는 차게 하고 달은 뜨겁게 할지언정 衆魔不能壞眞說 뭇 마구니가 참된 말씀 부술 수 없도 다. 132 象駕觴嶸漫進途 코끼리 수레 끌고 위풍당당히 길을 가거니 誰見螳螂 能拒轍 버마재비 수레길을 막는 걸 누가 보 겠는가. 133 大象 不遊於兎徑 큰 코끼리는 토끼 길에 노닐지 않고 大悟 不拘於小節 큰 깨달음은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나니 134 莫將管見謗蒼蒼 대통같은 소견으로 창창히 비방하지 말라. 未了吾今爲君決 알지 못하기에 내 이제 그대 위해 결 단해 주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