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입도요문

돈오입도요문

통융 2016. 12. 16. 17:17

 

 

대사의 휘는 혜해(慧海)이며, 건주(建州)땅 사람이다. 도지화상(道智和尙)에게서 득도하였다.

마조스님의 정맥은 백장(百丈)스님에게로 내려갔다고 하는 것이 선가의 정설(定說)로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백장(百丈)스님, 남전(南泉)스님, 법상(法常)스님들 보다 대주스님이 더 유명하였으며 천하에 이름을 더 날렸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돈오입도요문론?은 당대에 명성을 떨친 대주스님의 저술이고, 또 선가(禪家)의 대조사이신 마조스님이 극찬한 책이므로 선종(禪宗)의 정통사상을 아는 데 있어서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한가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육조단경(六祖壇脛)?이라든가, ?전심법요(傳心法要)?라든가, ?백장광록(百丈廣錄)?이라든가 하는 선종의 어록들이 많이 있지만, 이러한 어록들은 당시 사람들이나 후세 사람들이 그 스님이 입적하신 뒤에 그 법문을 기록하거나 수집한 것이지 본인들이 직접 편찬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돈오입도요문론?은 대주스님이 직접 저술하였으므로 거기에 가필이나 착오가 없다고 보며 다른 어떠한 어록보다도 완전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마조스님이 인가하신 논()이니 만큼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정확하게 기술한 것으로서 선종 초기의 근본사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증도가(證道歌)?와 함께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돈오(頓悟)란 구경각(究竟覺)을 말합니다. 즉 제8 아뢰야 근본무명이 완전히 끊어져서 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하여 진여본성(眞如本性)을 깨친 증오(證悟)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도(中道)를 정등각한 구경각을 돈오라고 하는 만큼 입도(入道)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성불(成佛)과 같은 뜻으로서 증도(證道)라는 말과 뜻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돈오입도요문론?은 영가스님의 ?증도가?와 그 사상과 내용이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법을 닦아야 곧 해탈(解脫)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돈오(頓悟)의 한 문[一門]만이 곧 해탈을 얻을 수 있느니라.”

 

어떤 것을 돈오(頓悟)라고 합니까?”(돈오의 근본내용)

()이란 단박에 망념(妄念)을 없앰이요. ()란 얻은 바 얻음[無所得]을 깨치는 것이니라.”

 

실질적인 해탈을 얻는다는 것은 돈오(頓悟) 즉 증오(證悟)가 되어야지 해오(解悟)가 되어서는 해탈을 얻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십지보살(十地菩薩)이 설법을 구름 일 듯하고 비오듯이 잘 하더라도 근본무명을 완전히 끊은 해탈이 아니니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진정한 해탈이 되는 것입니다.

또 돈오하면 해탈한다고 했으므로 돈오의 내용과 해탈의 내용은 똑같아서 돈오가 증오이며 바로 구경각(究竟覺)인 것입니다.

 

무엇부터 닦아야 합니까?”

근본(根本)부터 닦아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근본부터 닦는 것입니까?”

마음이 근본이니라.”

 

마음이 근본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능가경?에 이르기를 마음이 생()하면 일체만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면 일체만법이 멸()한다고 하였고,

?유마경?에 이르기를 정토(淨土)를 얻으려고 하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하나니 그 마음의 깨끗함을 따라 불국토가 깨끗해진다하였고,

?유교경?에 이르기를 마음을 한 곳으로 통일하여 제어하면 성취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고, 어떤 경에서는 성인은 마음을 구하나 부처를 구하지 아니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를 구하면서 마음을 구하지 아니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다스리나 몸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몸은 다스리나 마음을 다스리지 아니한다고 하였고,

?불명경?에 이르기를 죄는 마음에서 났다가 다시 마음을 좇아서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악과 일체의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그런 까닭에 마음이 근본이다. 만약 해탈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모름지기 근본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런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노력을 허비하여 밖으로 나타난 모양에서 구한다면 옳지 않느니라.

?선문경?에 이르기를 바깥 모양에서 구한다면 비록 몇 겁을 지난다 해도 마침내 이루지 못할 것이요, 안으로 마음을 관조하여 깨치면 한 생각 사이에 보리를 증()한다고 하였느니라.”

어떤 것을 선()이라 하며 어떤 것을 정()이라 합니까?”

망념(妄念)이 일어나지 아니함이 선()이요, 앉아서 본성(本性)을 보는 것이 정()이니라. 본성이란 너의 무생심(無生心)이요, 정이란 경계를 대()함에 무심(無心)하여 팔풍(八風)에 움직이지 아니함이다.

 

마음이 어느 곳에 머물러야 바로 머무는 것입니까?”

머무는 곳이 없는 데 머무는 것이 바로 머무는 것이니라.”

 

담연상적(湛然常寂)이란 일체 명상(名相)을 다 떠나고 생멸을 벗어나서 제8 아뢰야식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몸과 마음은 무엇으로써 보는 것입니까, 눈으로 봅니까, 귀로 봅니까, 코로 봅니까, 몸과 마음 등으로 봅니까?”

보는 것은 여러 가지로 보는 것이 없느니라.”

 

원융무애한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를 나타냅니다.

()에서 볼 때는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이며 용()에서 볼 때는 분명하고 밝게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니, 전자는 정()을 말하며 쌍차(雙遮)를 가리킨 것이고 후자는 혜()를 말하며 쌍조(雙照)를 가리킨 것입니다.

 

?능엄경?에 이르기를 지견(知見)에 앎[]을 세우면 무명(無明)의 근본이 되고, 지견에 보는 것이 없으면 이것이 곧 열반이며 또한 해탈이라 한다고 하였느니라.”

 

이 돈오문(頓悟門)은 무엇으로써 종취(宗趣)를 삼고 무엇으로써 참 뜻[]를 삼고 무엇으로써 본체로 삼으며 무엇으로써 활용[]으로 삼는 것입니까?”

무념을 종취로 삼고 망심이 일어나지 않음을 참 뜻으로 삼으며 청정을 본체로 삼고 지혜로써 활용을 삼느니라.”

청정은 정()으로서 쌍차(雙遮)를 말하고 지혜는 혜()로서 쌍조(雙照)를 말함이니, 본체와 활용이 원융무애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하니 이것을 중도라 하고 돈오라 하고 무념이라 하고 망심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종 정통에서 주장하는 돈오라는 것은 철두철미하게 제8 아뢰야 근본 무명까지 완전히 끊어진 무념무심을 말하는 것이지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여전무수(如前無殊)한 해오(解悟)를 돈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바른 생각입니까?”

바른 생각이란 오직 보리(菩提)만을 생각하는 것이니라.”問 云何是正念答 正念者唯念菩提니라.

* 보리(菩提)란 자성청정심을 말하며 망념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대용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인연으로 단바라밀이라고 합니까?”

()이란 보시(布施)를 말하느니라.”問 何因緣故名爲檀度

答 檀者名爲布施니라. “어떤 물건을 보시하는 것입니까?”

보시는 두 가지 성품을 버리는 것이니라.”

 

마음이 공에 머물 때에는 공에 집착한 것이 아닙니까?”

만약 공하다는 생각을 짓는다면 곧 공에 집착한 것이니라.”

?방광경(方廣脛)?에서 이르기를 다섯 가지의 법신은 첫째는 실상법신이요, 둘째는 공덕법신이요, 세째는 법성법신이요 네째는 응화법신이요 다섯째는 허공법신이다라고 하였는데 자기의 몸에는 어떤 것이 이것입니까?”

마음이 무너지지 아니함을 아는 것이 실상법신이며, 마음이 만상을 포함함을 아는 것이 공덕법신이며, 마음이 무심임을 아는 것이 법성법신이며, 근기따라 응하여 설법함이 응화법신이며, 마음이 형상이 없어 얻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 허공법신이니, 만약 이 뜻을 확실히 아는 이는 곧 증득할 것이 없음을 아느니라.

 

경에 이르되 등각묘각이라 하니 무엇이 등각이며 무엇이 묘각입니까?”

()에 즉하고 공()에 즉함이 등각이요 두 가지 성품이 공한[二性空] 까닭에 묘각이라 하며, 또 이르되 깨달음이 없음과 깨달음이 없음도 없음을 일컬어 묘각이라 하느니라.”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하며 범에 즉하고 성에 즉함이 돈오

중도정견을 불이법문(不二法門)

염루심(染庄心)이란 차별심분별심입니다. 염루심이란 8(八識) 전체를 말하는 것

 

*보통 사람들은 흔히 선가에서는 궤변설--부처님이 앞입니까, 법이 앞입니까?

지옥이 있습니까, 지옥이 없습니까?”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하느니라.”

 

어떤 것이 무위법(無爲法)입니까?”

유위법(有爲法)이니라.”

지금 무위법을 물었거늘 어째서 유위라고 답하십니까?”

있음[]은 없음[]으로 인해서 서고, 없음[]은 있음[]으로 인해서 나타나느니라. ---마땅히 법도 취하지 말고 법 아님도 취하지 말라

경전에 분명한 글이 있다. ‘내가 말한 것은 이치의 말이고 글이 아니요, 중생이 말한 것은 글의 말이고 이치의 말이 아니다하였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가 없다.”

어떤 것이 법신입니까?”

마음이 법신이니, 능히 만 가지 법을 내기 때문에 법계의 몸이라고도 한다. 기신론(起信論)에 말씀하시기를, ‘법이라는 것은 중생심(衆生心)을 이르는 말이니, 이 마음에 의하여 마하연(摩訶衍)의 이치를 나타낸다하셨다.”

 

 

어떤 것이 중도의 뜻입니까?”

[]의 뜻이니라.”

지금 중도를 물었거늘 무엇 때문에 가[]의 뜻이라고 답하십니까?”

[]는 가운데[]로 말미암아 서고, 가운데[]는 가[]로 말미암아 나느니라. 만약 본래 가[]가 없으면 가운데[]는 무엇을 따라 있으리오.

 

?유마경?에 이르되 정토를 얻고자 할진댄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하시니 무엇이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까?”

필경 청정으로 깨끗함[]을 삼느니라.”

어떤 것이 필경 청정으로 깨끗함을 삼는 것입니까?”

깨끗함도 없고 깨끗함이 없음도 없음이 곧 필경 깨끗함이니라.”

어떤 것이 깨끗함도 없고 깨끗함이 없음도 없는 것입니까?”

일체처에 무심함이 깨끗함이니 깨끗함을 얻었을 때에 깨끗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음이 곧 깨끗함이 없음이며, 깨끗함이 없음을 얻었을 때에 또한 깨끗함이 없다는 생각도 하지 않음이 곧 깨끗함이 없음도 없는 것이니라.”

 

어떻게 도를 얻습니까?”

필경에 얻음으로써 얻음을 삼느니라.”

어떤 것이 필경의 얻음입니까?”

얻음도 없고 얻음이 없음도 없음이 필경의 얻음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필경의 공합입니까?”

공함이 없고 공함이 없음도 필경 공함이라고 하느니라.”

 

어떤 것이 중도입니까?”

중간도 없고 또한 이변(二邊)도 없음이 곧 중도이니라.”

어떤 것이 이변입니까?”

저 마음이 있고 이 마음이 있음이 이변이니라.”

 

*********

명나라 초엽(1374) 묘협(妙叶)스님은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제방문인참문어록(諸方門人參問語錄)을 상하로 합하여 대주선사어록(大珠禪師語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중 제방문인참문어록은 묘협스님이 새로 모은 것이 아니라 전등록(傳燈錄) 6권 대주 혜해(大珠慧海)스님의 부분을 그대로 옮겨 실은 것입니다.

 

대사가*처음에 강서(江西)로 가서 마조(馬祖)스님을 뵈니,

마조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려는가?”

불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의 보배 창고는 돌보지 않고 집을 버리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무엇을 하려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무슨 불법을 구하는가?”

대사가 드디어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혜해 자신의 보배 창고입니까?”

마조스님이 대답했다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이 구족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고,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거늘 어찌 밖으로 구하려 하는가?”

 

대사가 학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선객(禪客)들이여, 나는 선()을 모릅니다. 따라서 한 법도 남에게 보일 만한 것이 없으니, 그대들 너무 오래 서서 헛수고를 마시오. , 쉬어가기나 하시오.”

이때에 학자들이 점점 늘어서 밤낮으로 법을 물으니, 마지 못하여 물음에 따라 대답을 하는데 그 변재가 걸림이 없었다.

 

이때에 법사(法師) 몇 사람이 와서 뵙고 말했다.

한 가지 묻겠는데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깊은 못의 달 그림자를 마음대로 건지시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맑은 못에 얼굴을 대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부처가 아니고 무엇이랴.”

무리가 모두 얼떨떨하였다. 조금 있다가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스님은 어떤 법으로 사람들을 제도하십니까?”

나는 어떤 법으로 사람을 제도할 일이 없다.”

선사들은 모두가 이 모양이군.”

대사가 반대로 물었다.

대덕(大德)은 어떤 법으로 사람을 제도하는가?”

그 스님이 대답했다.

금강반야경을 강의하였습니다..”

몇 번이나 강의했는가?”

“20번을 강의했습니다..”

그 경은 누가 말한것인가?”

그 스님이 소리를 높여 말했다.

선사는 사람을 조롱하십니까? 어찌 부처님의 말씀인줄 모르신단 말이요.”

대사가 말했다.

“‘만일 여래가 설법한 바가 있다고 하면 이는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니,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경을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면 이는 경을 비방하는 것이다. 대덕은 말을 해보라.”

그 스님이 대답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대사가 물었다.

경에 말씀하시길, ‘만일 색()으로써 나를 찾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나니 이 사람은 여래를 보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대덕은 말해보라. 어느 것이 여래인가?”

그 스님이 대답했다.

제가 그 문제에 있어서 도리어 미혹하였습니다.”

본래 깨닫지 못했거늘 무엇을 미혹했다 하는가?”

그 스님이 다시 청했다.

스님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대사가 말했다.

대덕은 금경경을 20번이나 강의했다면서 아직도 여래를 모르다니.”

그 스님이 절을 하면서 설명해 주기를 청하니 대사가 말했다.

여래라는 것은 모든 법의 여실(如實)한 이치라 했는데 어찌 잊었는가?”

그렇습니다. 그것이 모든 법의 여실한 이치입니다.”

대덕이 그렇다는 것은 그렇지가 않다.”

경문이 분명히 그렇거늘 어찌 그렇지 않습니까?”

대덕은 여실한가?”

, 그렇습니다.”

목석(木石)도 여실한가?”

그렇습니다.”

대덕이 목석의 여실함과 동일한가?”

다름이 없습니다.”

대덕은 목석과 무엇이 다른가?”

그 스님이 대답이 없다가 찬탄하여 말하였다.

이 스님은 상대하여 문답하기 어려운 분이다.”

조금 있다가 다시 물었다.

어찌 하여야 큰 열반을 증득합니까?”

생사의 업을 짓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것이 생사의 업입니까?”

큰 열반을 구하는 것이 생사의 업이며, 더러운 것을 버리고 깨끗함을 취하는 것이 생사의 업이며, 얻음과 증득함이 있는 것이 생사의 업이며, 대치문(對治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생사의 업이니라.”

어찌 하여야 해탈할 수 있겠습니까?”

본래 속박된 일이 없으니, 해탈을 구할 필요가 없다. 바로 사용하고, 바로 행함이, 곧 일의 무등등(無等等)한 경지이다.”

 

 

어떤 행자가 물었다.

마음이 곧 부처라 하였는데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그대는 어느 것이 부처가 아니라고 의심하는가? 지적해 보아라.”

그가 대답이 없으니, 대사가 말했다.

통달하면 온 세계가 다 부처요,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어긋난다.

 

()과 논()은 종이와 먹이로 된 문자이다. 지묵과 문자는 모두가 공하나니 소리 위에다 이름[]과 구절[] 따위를 건설한 것으로서 이 아닌 것이 없다. 좌주들은 그러한 교체(交替; 글자와 문구)에 집착되었으니, 어찌 에 떨어지지 않았겠는가?”

미친 개는 흙덩이를 좇지만 사자는 사람을 무는 것과 같나니, 논은 자성(自性)의 작용이요, 읽고 외우는 것은 자성의 법칙일 뿐이다.”

 

원율사(源律師)라는 이가 와서 물었다.

화상께서도 도를 닦을 때에 공력을 들을십니까?”

그렇다. 공력을 들인다.”

어떻게 공력을 들이십니까?”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잔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스님과 같이 공력을 들인다 하겠습니까?”

같지 못하다.”

왜 다릅니까?”

그들은 밥을 먹을 때에 밥을 먹지 않고 백천 가지 분별을 따지며, 잠을 잘 때에는 잠을 자지 않고 백천 가지 계교를 일으키다. 그것이 다른 까닭이다.”

율사는 입을 다물었다.

 

마명조사(馬鳴祖師)께서 말씀하시기를, ‘법이라 함은 중생심(衆生心)을 말함이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나지 않으면 온작 법도 나지 않아 이름조차도 없다고 했다.

 

이 때에 법연(法淵)이라는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이며, 무엇이 법이며, 무엇이 승()이며, 무엇이 일체삼보(一體參寶)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대사가 대답했다.

마음이 부처이니 부처로써 부처를 구하지 말라. 마음이 법이니, 법으로써 법을 구하지 말라. 부처님 법이 둘이 아니어서 화합함이 승이니 이것이 일체삼보이다. 경에 말씀하시를 '마음과 부처와 중생, 세 가지는 차별이 없나니, 뜻이 청정하면 부처님이 세상에 나신 것이요, 뜻이 더러우면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다하였다.

마치 성이 났을 때엔 기쁨이 없고 기쁠 때엔 성냄이 없듯이 오직 한마음뿐이어서 두 본체가 없나니 근본 지혜의 법이 그런것이어서 무루(無漏)가 나타난다.

 

 

유고도교불교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도량이 큰 사람이 활용하면 같고, 기틀이 작은 이가 집착하면 다르다.

 

[]과 말씀[]이 같습니까, 다름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한가지니라. 말이 구절을 이루는 것을 말씀이라 한다

 

한 마음으로 세 가지를 관찰하는 법[一心三觀]의 뜻은 또 무엇입니까?”

과거의 마음은 지나갔고, 미래의 마음은 이르지 않았고, 현재의 마음은 머무는 바 없거늘, 그 사이에서 어떤 마음을 일으키어 무엇을 관찰하겠는가?”

 

 

성품이 있다면 내어 보여 주십시오.”

그대는 내일 아침이 있으리라는 것을 믿는가?”

믿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을 갖다 보여다오.”

내일 아침은 분명 있는 것이나 지금은 얻을 수 없습니다.”

내일 아침을 얻을 수 없다 해서 내일 아침이 없지는 않으리라. 그대 스스로가 성품을 보지 못했을지언정 성품이 없다고는 못한다.

 

 

부처의 몸은 법신이니, 혜에서 생기고, 삼명(三明)과 육통(六通)에서 생기고, 온갖 착한 법에서 생긴다하셨는데,

 

반야경을 지니고 읽으면 가장 공덕이 많다는 말을 스님께서 믿으십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험전(靈驗傳)10여 권이 모두 믿을 수 없겠습니다.”

산 사람이 효성을 다하면 저절로 감응이 있는 것이요, 백골(白骨)이 감응을 주는 것은 아니다. 경은 문자니, 종이와 먹의 성품이 공()하거늘 어디에 영험이 있으랴. 영험이란 것은 경을 지니는 사람의 마음 쓰기에 있다. 그러므로 신통과 감응이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시험 삼아 경 한 권을 책상 위에 올려놓아 보아라. 아무리 지니는 이가 없다면 그래도 영험이 저절로 있겠는가?”

 

 

율사는 왜 선()을 믿지 않습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이치는 깊어서 나타내기 어렵지만 이름과 형상은 지니기가 쉽다. 성품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러므로 믿지 않는다. 성품을 본 이를 일컬어 부처라 하는데, 부처를 아는 사람이라야 믿어 들어간다. 부처님이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부처님을 멀리한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일심으로 수도하면 과거의 업장이 소멸됩니까?”

대삭 대답했다.

성품을 보지 못한 이는 소멸되지 않거니와 성품을 본 이는 해가 서리를 비친 것 같다. 또 성품을 본 사람은 수미산같이 쌓인 풀더미를 별미만 불덩이 하나로 태울 수 있는 것과 같나니, 업장은 마른 풀 같고 지혜는 불 같다.”

어떻게 해야 업장이 다한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당장에 마음을 통하기만 하면 전생과 후생 일을 마주보듯이 아나니,

 

 

어떤 행자가 물었다.

어찌하여야 바른 법에 머무를 수 있습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바른 법에 머무르려는 것이 삿된 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법에는 삿됨도 바름도 없기 때문이다.”

어찌하여야 부처가 되겠습니까?”

중생의 마음을 버릴 필요가 없이, 오직 제 성품을 더럽히지만 말라. 경에 말씀하시기를,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하셨다.”

그렇게 알면 해탈을 얻겠습니까?”

본래부터 속박한 일이 없으니, 해탈을 구할 것 없다

 

어떤 것이 반야입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그대는 아니라고 의심하는 것을 말해 보라.”

어찌하여야 성품을 봅니까?”

보는 것 그대로가 성품이다. 성품이 없으면 볼 수 없다.”

어떤 것이 수행입니까?”

제 성품을 더럽히지만 말라. 이것이 수행이다. 스스로 속이지만 말라. 이것이 수행이다. 큰 활용[大用]이 나타나면 그것이 무등등한 법신이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탔을 때에 배 밑바닥에 달팽이가 깔려 죽으면 사람이 죄를 받습니까. 배가 죄를 받습니가?”

배도 사람도 모두 마음이 없었으니, 죄는 바로 그대에게 있다.

 

 

 

언어가 마음입니까?”

대사가 대답했다.

언어는 인연일지언정 마음은 아니다.”

인연을 떠나선 무엇이 마음입니까?”

언어를 떠나서는 마음이 없다.”

언어를 떠나서 마음이 없다면 무엇이 마음입니까?”

마음은 형상이 없다. 언어를 여의지도 않았고, 언어를 여의지 않지도 않았다. 마음은 항상 담연(湛然)하여서 자유자재하게 응용한다. 조사께서 말슴하시기를 마음이 마음 가인 줄 알면 비로소 마음, 마음하는 법을 안다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