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반야심경

금강경해석2(정재걸교수)

통융 2016. 11. 27. 21:37

◆ 금강경의 내용  -- 정재걸 교수의 해석

 

이 경의 전편에 흐르는 사상은 다른 반야부 계통의 경전과 같이 공사상(空思想)이다. 철저한 공사상에 의해 번뇌와 분별심을 끊음으로써 반야지혜를 얻어 대각을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경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공사상에 가장 밝은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 존자라는 점은 이 경의 내용을 대변하고 있다. 즉 수보리는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최고의 진리를 배우고 닦으려는 마음을 낸 선남선녀는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하며(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였다. 부처님은 이에 답하시게 되니 이 경의 주요 내용은 수보리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엮어지게 되는 것이다. 삼마사마디, 즉 바른 삼매(正昧)는 전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경지이다. 홀로(alone)라는 말은 모두가 하나(all one)라는 의미이다. 홀로 있음 안에서 우리는 우주 만물과 하나가 된다. 바른 삼매는 삼매하는 자가 사라짐으로서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금강경은 벼락처럼 단번에 자르는 지혜의 완성이라는 뜻이다. 붓다는 그대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 이 설법을 했다.

 

 

1. 법회의 말미암음(法會因由分)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천이백오십명의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공양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사위대성에 들어가셨다. 성안에 있는 집들을 차례로 다니시며 밥 받기를 마치고 다시 본래 계신 곳으로 돌아와 공양을 끝내신 다음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爾時 世尊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乞食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해석> ‘내가 이렇게 들었다’는 ‘붓다가 이렇게 말했다’와는 다르다. 제자가 스승의 말을 기록할 때는 반드시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고 적어야 한다. 사위성은 스라바스티, 즉 영광의 도시라는 뜻이다. 붓다는 45년간 가르침을 폈는데 그 중 25년을 이 도시에 머물렀다. "붓다가 탁발에서 돌아와 공양을 마친 다음 의발을 치우시고 발을 씻으시고" 등과 같은 자질구레한 내용이 기록된 이유는 붓다의 모든 행동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붓다는 매 순간 각성된 의식으로 산다. 어떤 몸짓을 할 때 붓다는 그 몸짓 자체가 된다. 미소지을 때 붓다는 미소가 된다. 붓다의 걸음, 앉음, 몸짓 하나 하나를 지켜보는 것은 커다란 은총이다.

  

2. 선현이 일어나 법을 청함(善現起請分)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속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에 옷을 걷어올리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하여 공경을 표시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호념(護念)하시고 모든 보살들에게 불법을 잘 부촉하십니까? 세존이시여, 어진 남자(善男子)와 어진 여인(善女人)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향한 마음을 일으킨 이는 어떻게 행동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실천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좋도다.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것처럼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호염하고 부촉한다. 내가 그대를 위해서 말하노니 잘 들으라. 어진 남자와 여인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향해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행동하며 이렇게 그 마음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즐거이 듣고자 원합니다."

 

長老須菩提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合 掌恭敬而白佛言 希有世尊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世尊善男子善女人 發阿?多羅三?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佛言 善哉 善哉 須菩提 如汝所說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請 當爲汝說 善男子善女人 發阿?多羅三?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唯然世尊 願樂欲聞

 

<해석> 수보리의 질문은 한가지이다. 보살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보살은 99% 깨달은 사람이다. 그는 이미 저쪽 기슭에 거의 도달하였다. 그렇지만 보살은 이쪽 기슭에 남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여래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산스크리트 원어 tathagata를 tath-agata로 읽을 때는 그와 같이 왔다 라는 뜻이고, tatha-gata로 읽을 때는 그와 같이 갔다 라는 뜻이다. 그렇게 왔다 라는 의미는 자기의 의지로 오지 않은 사람, 이 세상에 올 동기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붓다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고 존재계가 그의 몸을 빌어 온 것이다. 그렇게 갔다 라는 의미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진 자라는 뜻이다. 그의 몸은 이 세상에 남아 있지만 그는 더 이상 육체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비어 있는 공간이 되었다. 타타가타는 그런 맥락에서 그렇게 오고 그렇게 가는 자라는 뜻이다. 바람처럼 오고 바람처럼 가는 자, 아무런 목적도 없이 아무런 집착도 없이 오고 가는 자라는 뜻이다.

 

체청이라는 말은 자세히 들으라는 뜻이다. 잘 듣는다는 것은 수용성 안에서 듣는다는 뜻이다. 올바르게 듣는다는 것은 복종하는 자세로 듣는 것을 의미한다. 복종(obedience)이라는 말은 철저하게 듣는다는 “obedire"에서 온 말이다. 수보리에게는 보시하는 보살에게는 큰 공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있었을 것이다. 붓다는 수보리의 무의식에서 그와같은 상념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정재걸교수의 해설

 

3. 대승의 바른 종지(大乘正宗分)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실천해야 한다. 있는 바 모든 중생의 종류, 즉 알(卵)에서 생겨나는 것이나, 태(胎)에서 생겨나는 것이거나, 습기(濕氣)로 태어나는 것이거나, 화(化)하여 태어나는 것이거나, 형태가 있는 것이거나 형태가 없는 것이거나, 생각이 있는 것이거나, 없는 것이거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모두 남김 없는 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였으나 실제로는 그 어느 중생도 멸도(滅度)를 얻은 바가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若胎生 若濕生若化生 若有色若無色 若有想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槃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則非菩薩

 

<해석>수보리는 두가지 질문을 했다. 마음을 어디에 머물러야 하며, 그 마음을 어떻게 항복시킬 것인가? 그러나 붓다는 한가지만 대답했다. "마음을 어디에 머물 것인지는 생각하지 말아라. 너는 오직 네 마음을 무릎 꿇릴 길만 찾아라“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치도파드이다. 치토파드는 위대한 결정을 말한다. 즉 다음과 같은 위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라는 뜻이다.

이 부분이 금강경의 핵심이라고 한다. 왜 핵심인가? 보살은 모든 중생을 무여열반의 세계로 인도하되, 자신이 인도했다는 생각을 내서는 안된다는 것이 붓다의 말이다.

 

四相이라고 하는 아, 인, 중생, 수자는 산스크리트어로 anatman, pudgala, sattva, jiva이다. 아트만은 진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너와 다른 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다. 푸드갈라는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이다. 짐승이나 식물, 벌레 따위와 다른 사람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다. 사트바는 내가 살아있다는 생각이다. 무생물과 다른 생물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다. 지바는 내가 시간의 존속을 가지는 존재라는 생각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명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다. 이 네 가지는 분별심의 열매이다. 모두는 나라는 외연의 확대이다. 백승욱 박사는 사상을 나라는 생각(아상), 남이라는 생각(인상), 무식한 마음(중생상), 경험이 많아 잘 안다는 마음(수자상)이라고 해석했다.

 

4. 아름다운 행동은 집착함이 없다(妙行無住分)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법(法)에 집착하는 바 없이 보시(布施)를 행할지니라. 그것은 형태에 머물지 않는 보시이며 소리?냄새?맛?느낌, 마음의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이니라.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형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동방의 허공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헤아릴 수 없습니다." "수보리여, 남서북방과 상하(上下), 사방(四方)과 그 중간의 방향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헤아릴 수 없습니다." "수보리여, 그와 같이 보살이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행하는 보시의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오직 가르침대로 실천해야 하느니라."

 

復次須菩提 菩薩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主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 須菩提於意云何 東方虛空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菩薩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不可思量 須菩提 菩薩但應如所敎住

 

<해석> 집착은 동기를 의미한다. 집착한다는 것은 내가 보시함으로써 무엇인가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래이지 보시가 아니다. 보시는 흘러 넘치는 것이다. 깨달음은 샘물과 같다. 그것은 끊임없이 솟아난다. 그 때 주는 사람도 없고 받은 사람도 없다. 왼손이 오른 손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리고 주는 것도 없다. 그래서 無着은 보시란 보시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리고 물건이라는 대립적인 관계로부터 마음을 차단하는 일이라고 했다.

허공은 法身을 말한다.

 

5. 진리대로 참모습을 보라(如理實見分)

 

"수보리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가히 육신의 형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육신의 형상만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육신의 형상은 곧 육신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凡所有相) 모두 허망하느니라.(皆是虛妄) 모든 형상이 실체가 없다고 보면(若見諸相非相) 곧 여래를 보느니라(卽見如來)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佛告須菩提 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해석> 붓다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깨달음조차 소유하지 않는 것이 붓다의 특징이다. 그래서 붓다는 전적으로 평범할 수밖에 없다. 붓다는 외부적인 특징이 아니다. 그래서 法身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히브리서 11:2). 만일 누가 어떤 사물에서 그것을 있게 한 ‘사물 아닌 것’을 본다면 그는 바로 하느님을 보고 있는 것이다.

 

6. 바른 믿음은 드물다(正信希有分)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말하여서는 안된다. 여래가 입멸한 후 오백 년이 지난 뒤에도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이 글귀를 보고 능히 신심을 내고 진실로 깨닫게 될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한 분의 부처님, 두 분의 부처님, 세 분, 네 분의 부처님에게만 귀의하여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귀의하여 여러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글귀를 듣고 일념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는 다함없는 지견으로써 모든 중생이 이와 같은 무량 복덕을 얻은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에게는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없으며 마음의 대상에 집착하지도 않고, 마음의 대상 없음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 모든 중생이 형상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다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며 만약 마음의 대상에 집착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마음의 대상 없음에도 집착하게 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항상 '여러 제자들이여, 나의 설법은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라고 설한 것이다.

 

須菩提白佛言 世尊 頗有衆生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佛告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能生信心 以此爲實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種諸善根 聞是章句乃至一念生淨信者 須菩提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得如是無量福德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亦無非法相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則爲着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則着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不應取法 不應取非法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해석> 믿음은 사드하(shaddha)이다. 사드하는 산스크리트어 쉬라드하이다. 이 말은 믿음이라기보다는 자기 확신, 자신에 대한 신뢰를 뜻한다.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내맡김을 가능하게 한다. 두려움에 떠는 사람은 결코 자신을 내맡기지 못한다.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이야말로 마치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듯이 붓다에게 내맡길 수 있다. 그래서 깨끗한 믿음(정신)이란 믿는 나도 없고, 믿는 대상도 없고, 믿는 일도 없는, 믿음만 있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말한다.

여래의 다함 없는 지견이란 이원성을 벗어난 바라봄을 말한다. 사랑과 증오는 한 단어이다. 사랑증오, 낮밤, 삶죽음, 불행행복, 고통쾌락, 물질마음이 모두 한 단어이다. 우리는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두 개로 분리해서 본다.

 

7. 얻음도 설함도 없다(無得無說分)

 

"수보리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는가? 또한 여래가 설한 진리가 있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일정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여래께서는 일정한 법을 설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모두 들어서 취(取)할 수 없으며, 또 말해질 수 없고 법이 아니며 법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현인과 성인은 하염없는 진리(無爲法)로써 차별을 두기 때문입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多羅三?三菩提 亦無有定法如來可說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不可說 非法非非法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8. 법에 의해 다시 태어나라(依法出生分)

 

"수보리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 세계에 가득 찬 칠보(七寶)로써 보시를 행한다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은 얼마나 많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福德性)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사구게(四句偈)를 항상 외우고 배워서 남을 위해 설한다면 이 복덕은 앞의 복덕보다 더욱 훌륭할 것이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과 또한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이 경전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이미 불법이라고 말한다면 곧 불법이 아닌 것이다."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所得福德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卽非福德性 是故如來說福德多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爲他人說 其福勝彼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及諸佛阿?多羅三약三菩提法 皆從此經出 須菩提 所謂 佛法者 卽非佛法

 

<해석> 여기서 사구게는 특별한 구절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圭峰스님은 凡所有相이 皆是虛妄이니 若見諸相非相이면 則見如來가 가장 묘한 구절이라고 하였다.

복덕성과 복덕의 차이는 마음에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있으면 곧 복덕이요, 없으면 복덕성이다. 내 이마의 땀을 내 손이 닦는다면 누가 누구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며, 누가 누구에게 감사할 것인가?

경은 손가락과 같고 법은 달과 같다. 다만 경에 의지해서 법을 알 수 있거니와 경문은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법은 慧眼으로만 볼 수 있다.

법이란 하나의 말에 불과하다. 삶도 말이고 죽음도 말이다. 행복도 말이고, 진리도 말이다. 그러나 바람과 나무, 참새와 어린아이, 태양은 실재이다. 태양에 관한 말에는 그림자라는 실체가 빠져 있다. 그리고 태양에 관한 말은 실제의 태양보다 훨씬 차갑다. 소리 높여 요구하는 마음, 찾아 헤메는 가슴은 태양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태양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의 편이기 때문이다. 고요한 대지는 태양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대지는 아무런 노력 없이도 태양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9. 어느 한 상은 상이 아니다(一相無相分)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다원은 자신이 능히 수다원의 과위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다원은 영원한 평화의 흐름에 들었지만 영원한 평화의 흐름에 들었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형태(色)를 얻은 것도 아니며, 소리(聲), 냄새(香), 맛(味), 느낌(觸), 마음의 대상(法)에 이르기까지 얻었다고 생각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불리웁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다함은 자신이 능히 사다함의 과위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다함은 다시 한번만 태어나면 깨달음을 얻을 사람이지만 사실은 가고 옴이 없는 까닭에 사다함이라고 불리웁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나함은 자신이 능히 아나함의 과위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나함은 결코 다시 태어나지 않는 사람이지만 사실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일이 없기 때문에 아나함이라고 불리웁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라한은 자신이 능히 아라한의 과위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로 법이 없기 때문에 아라한이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고 생각하면 그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가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며 욕심을 여윈 아라한 가운데 으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는 생각까지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제가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阿蘭那行)을 즐기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보리는 실로 행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아란나행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須菩提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 名 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須菩提 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 名爲不來 而實無不來 是故名阿那含 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 名 阿羅漢 世尊 若阿羅漢 作是念 我得阿羅漢道 卽爲着我人衆生壽者 世尊 佛說我得無諍三昧 人中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世尊 我若 作是念 我得阿羅漢道 世尊 則不說須菩提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提 實無所行 而名須菩提是樂阿蘭那行

 

<해석> 수다원은 스로타 아파나(srota-apanna)라고 해서 인간세의 미혹함을 끊고 성자의 영원한 평안함에 들어간 자라는 뜻으로 入流라고 한다. 사다함은 사크르다가민(sakrdagamin)으로 한 번 오는 자(一來)라는 뜻이다. 앞 생각이 망을 일으키면 뒷 생각이 곧 그치고 앞 생각이 집착이 있으면 곧 집착을 그쳐 실로 왕래가 없음으로 사다함이라고 한다. 아나함은 아나가민(anagamin)으로 不來 또는 不還이라고 한다. 즉 상념과 그것을 보는 것이 동시이기 때문이다. 아라한(arhat)은 無諍 또는 應供이라고 한다. 무쟁은 끊어야 할 번뇌가 없고 여의어야할 탐진이 없으며, 어기거나 좆을 정이 없어 마음과 경계가 공하고 안팎이 언제나 고요한 사람을 말한다.(六祖) 아라한은 오직 지켜보는 자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어떻게 지켜보는 자만이 존재할 수 있을까? 다툼은 여기 내가 있고 저기 네가 있어 생겨나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 때 어찌 다툼이 생기겠는가? 내 손과 내 발이 다툴 수 있겠는가?

 

이 네 가지 단계는 같은 것을 4번 반복한 것이다. 구태여 아나함과 아라한을 구별한다면 아나함은 색계나 무색계로 돌아올 수 있어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면, 아라한은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는 無學位에 이른 사람이다.

 

10. 정토를 장엄케 하라(莊嚴淨土分)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옛날에 여래가 연등부처님 계신 곳에서 얻은 바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연등부처님 계신 곳에서 실로 얻은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살이 불토(佛土)를 장엄하겠는가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일으켜야 할 것이니 형태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며, 소리와 냄새, 맛과 느낌, 마음의 대상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 수보리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만 하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은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고 설하시기 때문입니다."

 

佛告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昔在燃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不也 世尊 如來在燃燈佛所 於法 實無所得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而 生其心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須菩提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해석> 장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世間불토를 장엄하게 하는 것으로 절을 짓고 경을 베끼고 보시공양을 베푸는 것이요, 둘째는 身불토를 장엄하게 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요, 셋째는 心불토를 장엄하게 하는 것으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세 번째의 장엄이 가장 중요하다. 유마경에는 “마음을 깨끗이 하면 곧 부처님 땅을 깨끗하게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거죽을 꾸미랴”고 하였다.

 

불토는 깨달음의 땅이다. 깨달음의 땅은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부처를 깨울 수 있는 장소를 뜻한다. 이 곳에서는 세상사로 인해 산만해지고 미혹되는 일이 없으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으며, 일상적인 일이나 금기 사항이 면제되고 깨달음을 위한 모든 시도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 곳에서는 오직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되는가’하는 문제만이 유일한 문제가 된다. 이러한 깨달음의 땅이 필요하다. 인류는 지금 문턱에 서 있다. 멸망하여 사라지거나 아니면 크게 도약하여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문턱에 서 있다. 수백만년전 원숭이들이 나무에서 내려오면서 인간이라는 새로운 존재의 역사가 시작되었듯이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육조 스님이 한 번 듣고 깨달음을 냈다는 아무데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낸다(應無所住 而生其心)는 말은 아무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마음을 낸다는 말이다. 눈으로 보면서 그 모양에 잡히지 않고, 귀로 들으면서 그 소리에 잡히지 않고, 몸으로 느끼면서 그 느낌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눈은 보이는 사물의 상을 망막에 비치는 순간 지워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한 번 비친 상을 망막에 붙잡아 둔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귀의 고막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11. 무위의 복은 위대하다(無爲福勝分)

 

"수보리여, 항하(恒河)의 모래알 수같이 많은 항하가 있다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모든 항하의 모래가 얼마나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단지 모든 항하만 하더라도 이미 헤아릴 수 없거늘 하물며 그 모래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수보리야, 지금 내가 그대에게 진실로 이르노니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저 항하의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한다면 그 얻는 바 복덕이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하셨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속의 사구게 등을 배우고 외워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준다면 이 복덕이 앞의 복덕보다도 나으니라."

 

須菩提 如恒河中 所有沙數如是沙等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但諸恒河 尙多無數 何況其沙 須菩提 我今 實言 告汝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以用布施 得福 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해석> 경을 읽어주는 것은 法布施에 해당된다. 財布施는 欲界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법보시는 능히 三界를 벗어난다고 한다. 법보시가 중요하다고 해서 재보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向善背惡, 즉 선을 향하고 악을 등지지 않고 선악을 함께 버리는 길로 곧장 가는 중생은 없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웃과 나주지 못하면서 어떻게 경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12. 바른 가르침의 존중 (尊重正敎分)

 

또한 마땅히 알라. 수보리여, 이 경과 사구게를 설하면 모든 세간의 천(天)?인(人)?아수라(阿修羅)가 모두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하거늘 사람에게 이 경을 받아 지니게(受持) 하고 독송하게 함에 있어서랴! 수보리여,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가장 높고 으뜸가는 희유한 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 경전이 있는 곳이라면 곧 부처님이나 혹은 존경받는 제자가 있는 곳이라고 할 것이다.

 

復次須菩提 隨說是經 乃至四句偈 等當知此處 一切世間天人阿修羅皆應供養 如佛塔廟 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須菩提 當知是人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若是經典所在之處 則爲有佛 若尊重弟子

 

<해석> 육조 스님은 이 구절을 해석하여 “자기 마음(自心)으로 이 경을 誦得하고 자기 마음으로 경의 뜻을 해득하고 자기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고 모양을 짓지 않는 이치(無着無相之理)를 체득한다. 있는 자리에서 언제나 부처님의 행을 닦으니 곧 자기 마음이 부처인 것이다(自心是佛). 그래서 그 있는 자리가 곧 부처님이 있는 자리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두워서 중생이요 깨달으면 곧 부처(迷卽衆生 悟卽是佛)라고 하였다. 이는 곧 주먹으로 손바닥을 만들고 손바닥으로 주먹을 만드는 것과 같다. 무엇이 부처냐? 하는 질문에 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騎牛討牛)라고 하거나 무엇이 부처가 아니냐(如何不是佛)고 하거나 지금 그대가 곧 부처다(只汝便是)라고 대답하는 것은 다 같은 말이다.

 

13. 법에 따라 받아 지님 (如法受持分)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이 경전은 무엇이라고 이름하며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전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密)'이니 그대들은 이 명칭대로 받들어 지녀야 할 것이다. 수보리여,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한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한 바 진리가 없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작은 먼지(微塵)가 많다고 하겠는가? 적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모든 먼지를 여래는 작은 먼지가 아니라 그 이름을 작은 먼지라고 설하시며 여래는 세계가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라고 설한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가히 삼십이상(三十二相)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삼십이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삼십이상은 곧 형상이 아니며 그 이름이 삼십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서 항하의 모래알 수 같은 목숨을 바쳐 보시하고 또한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사구게 등을 배우고 외워서 남을 위해 설해주면 그 복이 매우 많으니라."

 

爾時 須菩提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何奉持 佛告須菩提 是經 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所說法不 須菩提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 是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須菩提 諸微塵 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 布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해석> 慈受禪師는 말에도 침묵에도 빠지지 않으면 곧 자성의 청정함을 본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비록 종일 말을 해도 아무 말 하지 않은 것 같고, 종일 설해도 설하지 않은 것 같다. 보살은 사람과 법이 모두 공임을 깨달아 설하는 바가 없음을 안다.

 

부처님께서 문수보살에게 대답하기를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을 떠나고 티끌에 있으면서 티끌을 떠나는 것이 구경법(在世離世 在塵離塵 卽究竟法)이라고 하셨다.

성경에 이르기를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고 하더라고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다”(고린도전서, 13:3)고 하였다. 사구게는 사랑과 같다. 목숨은 보이고 사랑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4. 형상을 초월한 적멸 (離相寂滅分)

 

그때 수보리가 이 경전의 가르침을 듣고 그 의미를 깊이 깨달아 슬픈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참으로 드문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깊은 경전을 설하심은 참으로 드문 일입니다. 제가 과거에 얻은 바 혜안(慧眼)으로서도 일찍이 이와 같은 경전의 가르침을 듣고 믿음이 청정하면 곧 실상(實相)의 지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실상(實相)은 곧 상(相)이 아니므로 실상이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와 같은 경전을 듣고 믿어서 받아 지니기에는 어렵지 않습니다만 만약 후 오백 세 뒤의 중생들이 이 경전을 듣고 믿어서 수지한다면 이 사람들이야말로 제일 보기 드문 사람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상(我相)은 곧 상(相)이 아니요,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일체의 모든 형상을 초월한 그 이름이 부처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을 듣고서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매우 희유한 사람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여, 여래가 설하는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니라. 수보리여, 여래는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설한다.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인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내가 옛적에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끊기었으나 나에게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마디마디 사지를 찢길 때 만약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다면 마땅히 성내고 원망하는 생각을 일으켰을 것이다. 수보리여, 또 생각하니 내가 인욕선인(忍辱仙人)이었던 오백 세 전에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相)을 여의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해야 한다. 마땅히 형상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며 소리와 냄새, 맛과 느낌, 마음의 대상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지니라. 만약 마음에 머뭄이 있으면 그 머뭄이 머뭄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부처는 '보살의 마음이란 마땅히 형상에 집착하여 하는 보시가 아니어야 한다'라고 하였느니라. 수보리여,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해서 마땅히 이와같이 보시할지니라. 여래는 '일체의 모든 형상은 곧 형상이 아니며 일체 중생은 곧 중생이 아니다'라고 설한다. 수보리여, 여래는 참답게 말하는 자이며, 진실을 말하는 자이며, 진여(眞如)를 말하는 자이며, 속이지 않는 말을 하는 자이며, 사실과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바 이 법은 실(實)도 없고 허(虛)도 없느니라. 만약 보살이 마음의 대상에 집착하여 보시를 행하면 마치 어둠 속에 들어간 사람이 아무 것도 못보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이 마음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마치 눈 열린 사람이 햇빛에 밝게 비치는 여러 가지 색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여, 먼 미래세에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능히 수지 독송하면 곧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보아 모두 무량무변한 공덕을 성취하게 하느니라."

 

爾時 須菩提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慧眼 未曾得聞如是之經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 淸淨 則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希有功德 世尊 是實相者則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世尊 我今 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 則爲第一希有 何以故 此人 無我相無人相無衆生相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衆生相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則名諸佛 佛告須菩提 如是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人 甚爲希有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蜜 卽非波羅蜜 是名波羅蜜 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說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無人相無衆生相無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應生嗔恨 須菩提 又念 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無人相無衆生相無壽者相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多羅三?三菩提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若心有住 則爲非住 是故 佛說菩薩 心不應住色布施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須菩提 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思狂語者 不異語者 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 無實無虛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 入闇 則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 有目 日光 明照 見種種色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則爲如來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

 

<해석> 수보리가 드디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닫는다. 그 결과 슬픈 눈물이 흐른다. 그의 머리(知)가 아니라 가슴(感)이 법에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울의 고백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슬픈 눈물(悲泣)일까?

 

눈물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소위 문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문명은 우리에게 일종의 죄책감을 심어 놓았다. 그러나 눈물은 우리가 가진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다. 눈물이 반드시 슬픔의 표현인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우리의 가슴을 걷잡을 수 없이 휘저어 놓을 때, 무엇인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담고 있어서 마구 흘러 넘치기 시작할 때 바로 그 때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눈물로 가득 찬 눈은 진리를 볼 수 있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은 이 삶의 아름다움과 축복을 볼 수 있다.

 

물결이 물이듯이 나는 사람이다. 내가 물결로서 나를 인식하면(역사적 차원) 나는 나다. 그러나 내가 사람 속에 흡수되면, 다시 말해 내가 나로서 행세하지 않고 사람으로서 행세한다면 나의 참 實相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렇게 드러난 참 실상도 실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노자는 나에게 몸이 없다면 어떻게 병을 앓겠는가하고 말하였다. 암이나 결핵이 병이 아니다. 독립된 나(個我)가 따로 있다는 미숙한 의식이 병이다.

 

15. 경을 배우고 외우는 공덕(持經功德分)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아침에도 항하의 모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도 다시 항하의 모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저녁에도 또한 항하의 모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여 헤아릴 수 없는 백천만억겁 동안 몸으로 보시하였다고 하자.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의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믿어 거역하거나 비방하지 않으면 이 사람의 복덕은 앞의 사람보다 훨씬 크다. 그러므로 하물며 이 경전을 붓으로 쓰거나 수지, 독송하고 사람들을 위해 해설함에 있어서이랴! 수보리여, 간추려 말하건대 이 경은 가히 생각할 수 없으며,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지니고 있다. 이 경은 여래가 대승심(大乘心)을 발한 사람을 위해서 설한 것이요, 최상승심(最上乘心)을 발한 자를 위해서 설한 것이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능히 수지하고 독송하며 사람들을 위해 널리 설하면 여래가 이 사람이 하는 일을 다 알고, 다 보고 있어서 모두 헤아릴 수 없고 일컬을 수도 없으며 끝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니, 이와 같은 사람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과 같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소법(小法)을 즐기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여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해설하여 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여, 이 경이 있는 어느 곳이라도 일체 세간의 천(天)과 인(人), 아수라(阿修羅)가 마땅히 공양할 것이니 마땅히 알라. 이곳은 즉 탑이 되어 모두 공경하여 예배드리며 모든 꽃과 향을 그 속에 뿌리게 되리라.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初日分 以恒河沙等身 布施 中日分 復以恒河沙等身 布施 後日分 亦以恒河沙等身 布施 如是無量百千萬億劫 以身布施 若復有人 聞此經典 信心不逆 其福 勝彼 何況書寫受持讀誦 爲人解說 須菩提 以要言之 是經 有不可思議不可稱量無邊功德 如來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 若有人 能受持讀誦 廣爲人說 如來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無有邊不可思議功德 如是人等 則爲荷擔如來阿?多羅三?三菩提 何以故 須菩提 若樂小法者 着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則於此經 不能聽受讀誦 爲人解說 須菩提 在在處處 若有此經 一切世間天人阿修羅所應供養 當知此處 則爲是塔皆應恭敬作禮圍繞 以諸華香 而散其處

 

<해석>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음으로 향해 찾을 것이니, 만약 부처를 보고자 하면 오직 모름지기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 육조 스님은 自心經이라 했다. 여러 부처를 받들어 모시는 것은 밖을 향해 어지럽게 구함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소법을 지키는 자는 法相을 가진 자이다. 그는 법에 대한 하나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을 뿐 실은 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행복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 아무 조건없이 무조건적으로 행복한 사람, 이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의 정의이다.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이 포도주가 될 정도로 즐겁게 마셔라. 장미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취할 수 없다면 그 때에는 아무것도 우리를 취하게 할 수 없다. 만족을 연기하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만족해야 한다. 지금 여기가 아니면 어디에도 만족은 없다.

 

16. 업장의 정화(能淨業障分)

 

수보리여,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하여 남에게 박해를 받게 된다면 이 사람은 전생의 죄업으로 악도에 떨어질 것이지만, 금세(今世)에 사람들의 박해를 받은 까닭에 전세(前世)의 죄업이 소멸되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니라. 수보리여, 내가 과거의 한량없는 아승지겁을 생각해보니 연등불 앞에서 팔백사천만억 나유타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 다 공양하고 받들어서 헛되이 지남이 없었으나, 만약 훗날의 말세에 다른 사람이 있어 능히 이 경을 수지하고 독송하여 얻은 공덕은 내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서도 백분의 일에도 못 미치며 천만억분 내지 숫자의 비유로써는 결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됫날의 말세에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하여 얻는 공덕을 내가 다 설하게 되면 어떤 사람은 이를 듣고 마음이 광란하여 의혹을 품고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여, 마땅히 알라. 이 경전의 진리는 불가사의하며 과보 또한 불가사의한 것이다

 

復次須菩提 善男子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先世罪業 應墮惡道 以今世人 輕賤故 先世罪業 則爲消滅 當得阿?多羅三?三菩提 須菩提 我念 過去無量阿僧祗劫 於燃燈佛前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 悉皆供養承事 無空過者 若復有人 於後末世 能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於我所供養諸佛功德 百分 不及一 千萬億分乃至算數譬喩 所不能及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後末世 有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我若具說者 或有人 聞 心則狂亂 狐疑不信 須菩提 當知是經義 不可思議 果報 亦不可思議

 

<해석>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와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를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가복음 10:29-30)

 

17. 무아의 가르침(究竟無我分)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생활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다면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제도하리라. 일체 중생을 제도했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도 제도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가지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진실로 유법(有法)에 집착함이 없어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이니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연등 부처님 계신 곳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을 얻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을 이해한 바에 의하면 부처님이 연등 부처님 계신 곳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법을 얻은 일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와 같다. 수보리여, 그와 같으니라. 참으로 여래는 법(法)이 있으므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다. 수보리여, 만약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을 얻었다면 연등 부처님께서 나에게 '그대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가 되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고 하리라'는 수기(授記)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실로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연등 부처님께서 내게 '그대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가 되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고 하리라'는 수기를 주셨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는 곧 제법(諸法)이 여여(如如)하다는 뜻이니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실로 유법(有法)이 없으므로 부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니라. 여래가 증득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實)함도 허(虛)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모두 불법(佛法)'이라고 설한 것이다. 수보리여, 일체법(一切法)이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 이름만이 일체법이다. 비유컨대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는 것과 같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는 것은 곧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임을 설하신 것입니다." "수보리여, 실로 유법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이름하여 보살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은 무아(無我)이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다'라고 설했느니라.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토(佛土)를 장엄하리라'라고 한다면 보살이라고 이름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불토를 장엄한다고 설한 말은 곧 장엄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이름을 장엄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무아법(無我法)에 통달한 사람이 있다면 여래는 그를 '참다운 보살'이라고 이름하리라."

 

爾時 須菩提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多羅三?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佛告須菩提若 善男子善女人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我應滅度一切衆生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實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則非菩薩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於燃燈佛所 有法 得阿?多羅三?三菩提不 不也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 於燃燈佛所 無有法 得阿?多羅三?三菩提 佛言 如是如是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 須菩提 若有法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者 燃燈佛 則不與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以實無有法 得阿?多羅三?三菩提 是故 燃燈佛 與我授記 作是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 釋迦牟尼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 如義 若有人 言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佛得阿?多羅三?三菩提 須菩提 如來所得阿?多羅三?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是故 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名一切法 須菩提 譬如人身 長大 須菩提言 世尊 如來說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須菩提 菩薩 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則不名菩薩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 名爲菩薩 是故 佛說一切法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해석>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지금 여기서 다른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다른 때 다른 곳에 있다가 유일한 현실인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깨달았다고 하면 아직 온전한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은 자가 없어야 온전한 깨달음이다. 여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바탕이다. 바탕이니 그게 다 그것이고 그래서 如如라고 한다.

 

사람이 존재계를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가? 아무리 횃불을 밝게 해도 그 빛으로 태양을 더욱 밝게 할 수는 없다.

 

연등불과 석가모니 부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있다. 연등불은 석가모니 부처에게 등불을 전했다(傳燈). 깨달음의 등불을 전했다. 그러나 사실은 연등불은 석가모니 부처에게 아무 것도 전달한 것이 없다. 다만 스승의 현존에 힘입어 제자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일어난다. 그것은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스승의 현존, 그 자체로 인해 제자의 깊은 곳에 있는 무엇인가를 표면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스승의 현존이 제자의 존재를 앞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진정한 스승은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이란 제자 앞에 현존하는 것이다. 제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바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스승이 하는 일이 전부이다. 해바라기는 제자의 상징이다. 태양이 어디로 움직이건 해바라기는 그 방향을 따라 움직인다. 해바라기는 제자도의 상징이며 은유이다.

 

18. 평등한 체관(一切同觀分)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는 육안(肉眼)을 가졌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을 가졌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는 천안(天眼)을 가졌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을 가졌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는 혜안(慧眼)을 가졌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을 가졌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는 법안(法眼)을 가졌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을 가졌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는 불안(佛眼)을 가졌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을 가졌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처는 '항하의 모래와 같이'라고 말한 일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이 모래를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수의 항하가 있고 이 모든 항하의 모래 수만큼 부처님의 세계가 있다면 참으로 많다고 하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저 모든 국토에 살고 있는 여러 중생들의 가지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알고 있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는 모든 마음을 다 마음이 아니라고 설하기 때문이니 이를 일컬어 마음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肉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天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天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慧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法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法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有如是沙等恒河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如是 寧爲多不 甚多 世尊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所有衆 生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해석> 부처에게 다섯 가지 눈이 있다는 것은 중생에게도 다섯 가지 눈이 있다는 것이다. 먼저 눈으로 무엇을 본다는 것은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사이에 아무 것도 없어 “하나”를 이룬다는 것이다. 눈이 맑다는 것은 눈에 다른 것이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야타 부탐(있는 그대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천안은 하늘의 눈이다. 육안은 한 쪽으로만 볼 수 있지만 천안은 앞뒤 위아래를 동시에 본다. 혜안은 지혜의 눈이다. 대상과 하나가 되어 꿰뚫어 보는 눈이다. 법안은 진리의 눈이다. 개구리를 보면 개구리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불안은 부처의 눈이다. 성을 밝게 꿰뚫어 보아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을 영원히 없애는 것(見性明徹 能所永除)이다. 내가 꽃을 볼 때 나도 없고 꽃도 없고 다만 봄(seeing)이라는 의식만 있는 것이다.

 

깨달은 자에게는 죄가 없다. 그것을 지은 자가 없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 자에게도 죄가 없다. 다만 그 흔적과 죄책감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의 의미이다. 야보(冶父) 스님은 마음을 찾는 것은 刻舟求劍과 같다고 했다. 공간이나 시간이나 하나이거니와 무슨 과거 현재 미래를 분별할 수 있다는 말인가?

 

19. 법계를 다 교화하다(法界通化分)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를 한다면 그 사람은 이 인연으로 얻을 수 있는 복이 많다고 하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그 인연으로 얻을 복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참된 복덕이라면 여래는 얻을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니라. 복덕이 없는 까닭에 여래는 복덕이 많다고 설한 것이니라. "

 

須菩提 於意云何 若有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以是因緣 得福 多不 如是 世尊 此人 以是因緣 得福 甚多 須菩提 若福德 有實 如來不說得福德多 以福德 無故 如來說得福德多

 

<해석> 참된 복덕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복덕은 발견하는 것이다.

 

20. 색과 상의 초월(離色離相分)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처는 모든 상(相)을 다 갖춘 색신(色身)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색신을 구족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한 구족색신은 곧 구족색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름만이 구족색신인 것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를 모든 상을 다 갖춘 제상(諸相)이 구족하다고 볼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구족제상(具足諸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한 제상구족은 제상구족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름만이 제상구족인 것입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佛 可以具足色身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色身 見 何以故 如來說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可以具足諸相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諸相見 何以故 如來說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해석> 에고는 세상의 씨앗이다. 하나의 작은 씨앗이 세상 전체를 담고 있다. 단지 ‘나는 존재한다’는 생각 하나만 일어나도 즉시 온 세상이 뒤따라 일어난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앉아 보라. 그냥 방안에 나무 곁에, 풀밭에 누워 있어 보라.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하라. 그러면 순간적으로 어떤 느낌이 우리에게 밀려오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음과 동시에 난생 처음으로 존재한다. 깨달음은 죽음인 동시에 부활이다.

 

21. 설한 바도 없고 설해지는 것도 없다(非說所說分)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나는 응당히 법을 설한다'라고 생각한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설하는 바 법이 있다'라고 한다면 이는 곧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니 이는 내가 설하는 바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수보리여, 법을 설하지만 가히 설할 만한 법이 없기 때문에 일컬어 설법이라고 한다." 그때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미래세에 자못 많은 중생들이 설하신 이 법을 듣고 신심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들은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님도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여래는 중생이라는 것은 중생이 아니라고 설하나니 오직 이름만이 중생인 것이다."

 

須菩提 汝勿謂 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何以故 若人 言如來有所說法 則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須菩提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 爾時 慧命須菩提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於未來世 聞說是法 生信心不 佛言 須菩提 彼非衆生 非不衆生 何以故 須菩提 衆生衆生者 如來說非衆生 是名衆生

 

<해석> 나는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나는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삶은 권태로와진다. 아이들은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아이들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의 초보적인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에고는 아직 발달되지 않았다. 우리들이 에고가 권태를 만드는 요인이다. 동물들은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나무들도 그렇다. 장미 덩쿨은 해마다 같은 장미꽃을 피우고 새들은 매일 똑같은 노래를 부르지만 싫증을 느끼는 존재는 하나도 없다. 자연은 아직 에고가 없기 때문이다.

 

22. 얻을 법이 없음(無法可得分)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것은 얻은 바가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와 같다. 수보리여, 그와 같나니라.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그 어떤 법도 얻은 바가 없기 때문에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한다.

 

須菩提白佛言 世尊 佛 得阿?多羅三?三菩提 爲無所得耶 佛言 如是如是 須菩提 我於阿?多羅三?三菩提 乃至無有少法可得 是名阿?多羅三?三菩提

 

<해석> 미운 오리새끼가 자신을 오리라고 생각하는 한 그는 백조이면서 백조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백조가 아니라고 생각하든 말든 이미 백조이다.

 

23. 선을 행하는 청정한 마음(淨心行善分)

 

"수보리여, 이 법(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를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 아상(我相)도 없고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없이 모든 선법(善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수보리여, 여래는 선법이란 선법이 아니기 때문에 선법이라고 부른다고 설하느니라."

 

復次須菩提 是法 平等 無有高下 是名阿?多羅三?三菩提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則得阿?多羅三?三菩提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卽非善法 是名善法

 

<해석> 길을 떠나서는 길을 갈 수 없다. 그러나 길에 달라붙으면 또한 길을 갈 수 없다. 길을 간다는 것은 길에서 길을 떠남이다.

 

24. 비할 데 없는 복덕과 지혜(福智無比分)

 

"수보리여,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수미산왕과 같은 칠보의 무더기를 가지고 보시를 행한다고 할지라도 이 반야바라밀경의 사구게만이라도 수지 독송하며 사람들을 위해 설한다면 앞의 복덕은 이에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만억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내지는 숫자로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라."

 

須菩提 若三千大千世界中所有諸須彌山王如是等七寶聚 有人 持用布施 若人以此般若波羅蜜經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他人說 於前福德 百分 不及一 百千萬億分乃至算數譬喩 所不能及

 

<해석> 복덕은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평화스럽고 사랑에 충만해 있다면 그것이 최상의 복덕이다.

 

25. 교화하는 바가 없는 교화(化無所化分)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은 여래가 '마땅히 중생들을 제도하리라'고 생각한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실로 여래가 제도한 중생은 없으니 만약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있다면 여래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음이니라. 수보리여, 여래께서 '나'라고 함은 곧 '나'가 아니지만 범부들은 그것을 '내가 있다'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범부라는 것에 대해서도 여래는 곧 범부가 아니라고 설하는 것이다."

 

須菩提 於意云何 汝等 勿謂 如來作是念 我當度衆生 須菩提 莫作是念 何以故 實無有衆生 如來度者 若有衆生 如來度者 如來 則有我人衆生壽者 須菩提 如來說有我者 卽非有我 而凡夫之人 以爲有我 須菩提 凡夫者 如來說卽非凡夫 是名凡夫

 

<해석> 범부와 부처의 차이는 범부는 부처의 씨앗이요, 부처는 범부의 열매라는 것이다.(凡是佛因 佛是凡果) 부처가 범부라고 하고 다시 범부가 있는 것이 아니고 허명으로 범부라 부른 것이라고 하는 것은 “금방 들어 보이고 금방 지워 버리는” 隨擧隨掃의 설법이다. 무엇을 지우려면 들어 올려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내면에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우리는 오직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만 자신을 안다. 우리는 직접 우리 자신의 존재에 다가설 수 있는 길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자신에게 간다.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가? 바로 사랑이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일 때 우리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주의를 쏟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깊이 사랑할 때 그들은 온 세상을 잊는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에 완전히 몰입해 있다. 서로의 눈을 들여다 볼 때에는 그 밖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 마치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 몰입의 순간 그들은 이 세상에 있지 않다. 이러한 사랑의 빈자리를 손쉽게 메꾸는 방법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26. 형상이 없는 법신(法身非相分)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가히 삼십이상(三十二相)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만약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을 아는 바로는 마땅히 삼심이상을 여래라고 볼 수 없나이다." 이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형태에 의해서 나를 보고(若以色見我) 소리에 의해서 나를 찾는 자는(以音聲求我) 잘못된 노력에 빠져 있나니(是人行邪道) 마침내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不能見如來)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須菩提言 如是如是 以三十二相 觀如來 佛言 須菩提 若以三十二相 觀如來者 轉輪聖王 則是如來 須菩提白佛言 世尊 汝我解佛所說義 不應以三十二相 觀如來 爾時 世尊 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해석> 그렇지만 우리 중생들이 삼십이상이 아니면 어떻게 여래를 알아보겠는가? 도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데 속하지 않지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떠나 있지도 않다.(道不屬見聞覺知 亦不離見聞覺知)

 

27. 단멸상을 버려라(無斷無滅分)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는 상(相)을 구족한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리라. 수보리여, 이와 같이 생각해서는 안된다. 여래는 상을 구족한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다.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자에게는 모든 법의 단멸(斷滅)이라는 상이 있다고 설하셨다'라고 생각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자는 법의 단별이라는 상이 있다고 설하지 않은 까닭이니라."

 

須菩提 汝若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多羅三?三菩提 須菩提 莫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多羅三?三菩提 須菩提 汝若作是念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 說諸法 斷滅 莫作是念 何以故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 於法 不說斷滅相

 

<해석> 그러나 얻기 전에는 얻어야 할 것이 있다. 그러니 없다고 하지 마라. 얻은 뒤에는 얻은 것이 없다. 그러니 있다고 말하지 마라. 깨달은 뒤에는 불법을 닦을 필요가 없지만 깨닫기 전에는 불법이 없을 수 없다. 무상정등각을 얻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불법을 좇아 수행해야 하므로 불법이 없다느니 그런 것은 쓸 곳이 없다느니 그 따위 소리를 해서는 안된다. 무상정등각을 구하는 자는 법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28. 받을 것도 없고 탐할 것도 없다(不受不貪分)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항하의 모래알과 같은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하더라도 일체의 법이 무아(無我)임을 깨닫고 인(忍)을 성취한 보살의 복덕이 더욱 나으리라. 왜냐하면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니라."

 

須菩提 若菩薩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 持用布施 若復有人 知一切法無我 得成於忍 此菩薩 勝前菩薩 所得功德 何以故 須菩提 以諸菩薩 不受福德故 須菩提白佛言 世尊 云何菩薩 不受福德 須菩提 菩薩 所作福德 不應貪着 是故 說不受福德

 

<해석> 忍을 이룬다는 말은 도리에 평안히 머물러 이리저리 헤매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주와 객을 나누는 마음(能所心)이 없어지면 인을 이룬다고 한다.

 

29. 고요한 위의(威儀寂靜分)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되 '여래가 온다거나, 간다거나, 앉는다거나, 눕는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설한 뜻을 알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는 어디로부터 오고 어느 곳으로 가는 바도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여래라고 하느니라"

 

須菩提 若有人 言如來若來若去若坐若臥 是人 不解我所說義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해석> 눈 앞의 바위를 본다. 저 바위를 쪼개고 쪼개면 빛의 속도로 회전하는 전자를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저 바위는 움직이고 있는가? 진여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아무 의견도 갖지 않고 보는 것, 판단이나 비난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뜻한다. 즉 무심의 상태를 진여라고 한다.

 

30. 하나에 대한 집착(一合離相分)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 세계를 부수어 먼지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 먼지들은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먼지들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곧 먼지라고 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먼지들이란 곧 먼지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먼지인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대천 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세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실로 있는 것이라면 곧 하나로 합하는 상(一合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래께서는 '일합상(一合相)은 곧 일합상이 아니다'라고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일합상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일합상이란 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다만 범부들이 그 일에 탐착할 뿐이다."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以三千大千世界 碎爲微塵 於意云何 是微塵衆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若是微塵衆 實有者 佛 則不說是微塵衆 所以者何 佛說微塵衆 卽非微塵衆 是名微塵衆 世尊 如來所說三千大千世界 卽非世界 是名世界 何以故 若世界 實有者 則是一合相 如來說 一合相 卽非一合相 是名一合相 須菩提 一合相者 則是不可說 但凡夫之人 貪着其事

 

<해석> 내가 깨달음을 얻겠다는 것은 부분이 전체를 얻겠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보겠다는 것은 열매가 나무를 보겠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에 나의 눈과 귀가 붙들려 있는 한 나는 전체를 볼 수 없다.

 

31. 지견을 일으키지 말라(知見不生分)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되 '부처님께서는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을 말씀하셨다'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사람은 내가 설한 뜻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여래가 말씀하신 뜻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 곧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 아니다'라고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일체법을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깨달아야 한다. 또한 이와 같이 믿고 깨달아서 법(法)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수보리여, 법상(法相)이란 곧 법상이 아니라고 여래는 설한 것이니 곧 법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須菩提 若人 言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須菩提 於意云何 是人 解我所說義不 不也 世尊 是人 不解如來所說義 何以故 世尊 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須菩提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 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不生法相 須菩提 所言法相者 如來說卽非法相 是名法相

 

<해석> 법상이란 ‘이것이 법이다’라고 정해 놓은 것이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조건이 충족되면 행복이라고 규정한다. 천국은 이러저러한 곳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행복과 천국은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행복과 천국은 자기 자신이 그것이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 안에 천국을 갖고 있지 않다면 어디서도 천국을 발견할 수 없다.

 

32. 진정한 공덕(應化非眞分)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무량아승지 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한다고 하더라도, 만약 보살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서 이 경전을 수지 독송하고 남을 위해서 설한다면 그 복덕이 저 복보다 나으리라.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연설할 것인가? 형상에 집착하지 아니하며 여여(如如)하여 동요함이 없느니라.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一切有爲法)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와 같고 (如夢幻泡影) 이슬, 번개와 같다. (如露亦如電)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應作如是觀)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해 마치셨다. 장로 수보리와 여러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와 일체 세간의 천(天), 인(人), 아수라(阿修羅)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을 듣고 크게 환희하여 모두 믿고 닦으며 받들어 행하였다.

 

須菩提 若有人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 持用布施 若有善男子善女人 發菩薩心者 持於此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人演說 其福 勝彼 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 何以故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佛說是經已 長老須菩提 及諸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尼一切世間天人阿修羅聞佛所說 皆大歡喜 信受奉行

 

<해석> 부처는 우리 마음을 별처럼 여기라고 한다. 별은 캄캄할 때만 존재한다. 의식의 태양이 떠오르면 마음은 자취를 감춘다. 마음은 가물거리는 눈이다. 가물거리는 눈으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마음은 등불이다. 등불은 욕망이라는 연료가 있어야만 타오른다. 마음은 환영이다. 마술이라는 말은 마야에서 왔다. 마음은 이슬방울이다. 우리는 마음을 진주나 다이아몬드와 같이 아름답게 여기지만 아침 해가 떠오르면 없어지는 순간적인 현상이다. 마음은 물거품과 같다. 마음이 가진 모든 경험은 물거품처럼 터져서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마음은 꿈이다. 마음은 우리 자신이 감독이며 배우며 관객인 주관적인 상상이다. 마음은 번갯불과 같다. 한 순간 번쩍했다 사라진다. 마음은 구름과 같다. 마음은 하늘인 의식 주위에 일어나는 구름과 같다.

 

마음이 없는 상태를 자유라고 한다. 자유라는 말은 자아로부터 자유로와진다는 뜻이다. 모든 자아는 형상이다. 바위도 자아가 있고 영혼이 있다. 나무도 자아가 있고 동물들도 자아가 있다. 그러나 부처는 자아가 없다. 그는 완전한 자유이다. 자유는 모든 사람의 본성이다. 자유는 이미 주어져 있다. 새삼 자유를 가져와야 할 이유가 없다. 자유가 거기 있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