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那伽라는 말은 산스크리드어(梵語)로 Nāgā 용龍을 뜻하는(용수Nāgārjuna.)데 부처님이 선정에 들어 자유자재하심이 용이 허공이나 바다에서 자유자재하게 노니는 것과 같음을 비유하여 나가정那伽定이라고 한 것이다.
누구나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자성이 청정함을 바로 자각하면 그대로 나가정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식을 끊고 전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지통선사(智通禪師)
또, 중 지통(智通)은 수주(壽州) 안풍(安豊)사람으로 처음 능가경(楞伽經)을 보아 천여편 읽기를 기약하였으나 <삼신(三身)>과 <사지(四智)>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므로 사(師)께 찾아와서는 그 뜻 알기를 구하매 사(師)께서 이르시기를,
"삼신(三身)은,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너의 성(性)품이요,
<원만보신(圓滿報身)>이 너의 지(智)혜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이 너의 행도(行道)인 것이라,
만일 본성(本性)을 여의고서 따로이 <삼신(三身)>에 관하여 설(說)하게 된다면 곧 일컬어 신(身),[몸]은 있으나 지(智), 즉 [앎]이 없다고 할 것이니라. 만일 삼신(三身)이 자성(自性)-없는 것인 줄을 깨달으면 곧 일컬어 <사지보리(四智菩提)>라 할 것이로다.
내가 이르는 게(偈)를 듣거라.
1
자성(自性)에 <삼신(三身)>이 구족(具足)되어 있나니
펴서 밝히면 <사지(四智)>를 이룩하느니라:
보고 듣고 반연(緣)을 여의지 않고도
초연(超然)히 부처의 지위(地位)에 오름이로다.
2
내 이제 너를 위하여 설(說)하리니
면밀(綿密)하게 신(信)하므로써 길이 미혹(迷惑)됨이 없게 할지언정
밖으로 치달려 구(求)하는 사람들이 날가는 줄 모르고
떠들어 대는 보리(菩提)를 배우지 말지니라.
하시었느니라.
지통(智通)이 다시 사루되,
"사지(四智)의 뜻을 얻어 들을 수 있겠습니까?" 여쭈니
사(師)께서 이르시되,
"이미 삼신(三身)을 알았다면 곧 사지(四智)도 밝혀질 것이어늘 어찌하여 다시 묻는단 말인가? 만일 삼신(三身)을 여의고 따로이 사지(四智)에 대하여 얘기한다면 이것은 지(智),[앎]은 있지만 신(身),[몸]이 없는 것이라 일컬어야 하리니 곧
"지(智)가 있다." 고 하자마자 이것이 도리어 지(智)가 없게 되는 것이리라."하시고
다시 게(偈)를 이르시되,
1
<대원경지(大圓鏡智)>란 성(性)품이 청정(淸淨)한 것이오
<평등성지(平等性智)>란 마음에 병(病)이 없는 것이며
<묘관찰지(妙觀察智)>란 본것을 공(功)으로 삼지 않는 것이오
<성소작지(成所作智)>란 원경(圓鏡)과 같아지는 것이니라.
2
오(五).팔(八)과 육(六).칠(七)과가 과(果)와 인(因)으로 변전(變轉)하나 다만 이름과 말을 그리 쓸뿐 실성(實性)이랄 것 없나니라;
만일 변전(變轉)하는 곳에 마음[정(情)]만 두지 아니하면
번창하게 일어나나 영구(永久)히 나가정(那伽定)에 들어 있음이라.
-나가용(那伽龍)이 늘 정(定)에 들어 있어 정(定)아닌 적이 없으되 삼천대천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바를 다 알고 있음은 무기(無記)한 정(定)이 아니요 대용(大用)이 있는 정(定)이라 정중(定中)에 뚜렷히 빛나 차라리 다 아느니라. .위에서, 식(識)이 변전(變轉)하여 지(智)로 되는 것과 같다.
교(敎)가운데 이르되, 전(前) 오식(五識)이 변전하여 <성소작지(成所作智)>로 되며, 제육식(第六識)이 변전하여 <묘관찰지(妙觀察智)>로 되며, 제칠식(第七識)이 변전하여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되었다 하니 비록 육식(六識)과 칠식(七識)은 인(因)가운데서 변전(變轉)하며 전오식(前五識)과 팔식(八識)은 과(果)가운데서 변전하였으나 오직 그 이름만이 변전할 뿐 그 체(體)는 결코 변전(變轉)하지 못하느니라. - 하시었다.
지통(智通)이 몰록 <성품자체로 부터의 -지(智)>를 깨우치고 드디어 게(偈)를 지어 바치니 이러하니라.
1
<삼신(三身)>이 본래 나의 몸둥이요
<사지(四智)>가 본래 마음 밝은 것이니
<신(身)>과 <지(智)>가 서로 어울려 걸림만 없으면
일을 겪으매 모습 따라 임의(任意)로와 지리라.
2
일부러 수행(修行)한다는 게 다 망동(妄動)함이요
안주(安住)를 고집한다면 참으로 신령(神靈)스럽지 못해
묘(妙)한 의지(意旨)는 스승을 비롯하여 밝히어졌나니
마침내 더렵혀진 이름이랄 것도 없네.
-마조(馬祖), "도(道)는 닦을 것이 없나니 다만 오염(汚染)시키지만 말지니라.
어찌하여 오염이라 하는가? 다만 생사(生死)의 마음이 있고 조작(造作)하여 의도를 지어내는 것이 오염이니라. 제 성품의 신(身)이 지혜(智慧)인줄만 깨우친다면 오염(汚染)이라는 거짓이름 또한 없어질 것이로다." 하시었다
천목 중봉스님의 <산방야화>중에
나가정(那伽定: 부처님의 선정)나오시지 않고,움직이지도 않으며, 한 법의 모양도 보이시지 않으셨지만, 불이 치솟듯이 항싱 설법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어찌 굳이 49년 동안 삼백여회를 국한하여 말씀하셨겠읍니까.
모든 보살들의 경우는 보통사람이 버리기 어려운 것을 능히 버리는 보시(布施)로써 설법을 삼으셨으며, 또 남들이 지키기 어려운 것을 능히 지키는 인욕(忍辱)으로써 설법을 했읍니다.
나아가 6바라밀과 4무량심을 닦는 것도 모두 설법이었던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 32종류의 모습으로 응신(應身)할 적에, 천(天). 용(龍). 귀신(鬼神). 사람. 사람처럼 생겼으나사람은 아닌 존재〔人非人〕등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을 나투는 것이 모두 설법인 것입니다. 그러니 따로 뭐 설법할 것이 있겠읍니까!
위로부터 여러 조사스님들이 나무집게를 들어보이고〔擎叉〕공을 굴리던 것 〔곤迷〕과, 기름을 팔던 것〔提油〕과, 흘을 흔들었던 것〔舞笏〕과, 강을 사이에 두고 손을 잡으려 했던 것〔隔江招手〕과, 눈 속에서도 마음을 편한히 했던 것〔立雪安心〕과, 초가집에서 빈주먹을 세웠던 것〔竪空拳於草盧〕과, 두 다리를 꼬고 비위굴 속에 앉았던 것〔疊雙趺於巖穴〕과, 어지러운 세상에서 목탁을 울렸던 것〔감木석鐸於紫陌江塵之隙〕과, 누런 갈대 덮힌 물가에서 낚싯줄을 드리우던 것〔於絲綸於白覡黃葦之濱〕과, 땅을 치고 뱃전드렸던 것〔打地叩舷〕과, 화살을 눈앞에 꽂아놓고 참선을 했던 것〔張弓面壁〕과, 외로운 봉우리에서 홀로 잠자던 것〔孤峰獨宿〕과. 외길에서 서로 만났던 것〔狹路相逢〕과, 소를 받아놓고도 말을 돌려주며 평상(平常)이라고 말했던 것〔得牛還馬而道出平常〕과, 옹기를 종(鐘)이라 부르는〔喚甕作鐘〕 등 말밖의 말들이 수만가지가 있었다. 이것이 모두 옥진 금성(玉振金聲)이 어찌 반드시 우화당괴.수미좌에서 한 것이겠읍니까!
도만 깨우친다면 비록 바위굴 속에서 명아주풀을 먹고 살더라도 분명히 여러 대중들에게 바른 가르침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면 호사스럽게 좋은 옷을 입고 매우 존엄하게 큰 법상에 올라가, 질문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그에 대한 대답이 병 속의 물을 쏟듯이 막힘없이 줄줄 나온다 해도 말만 많아지고 뽑내는 마음만 더욱 늘어날 뿐입니다. 세정 (世情)에 아첨하여 세속의 풍속을 좇으면서도 스스로 말하기를, '불법을 설하여 만 중생을 이롭게 하며, 부처님을 대신해서 교화를 한다'라고 하니, 그 잘못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