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교9산

5교9산

통융 2016. 6. 29. 20:51

59(五敎 九山)

 

삼국시대 때 들어온 불교(고구려, 백제, 신라 순)는 통일신라에 들어서 본격적인 비상(飛翔)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경전(經典)을 중심으로 한 교종(敎宗)은 물론 선종(禪宗)의 계파들도 활발하게 종파를 건설하고 포교를 시작했다.

이때의 교선(敎禪) 양대 종파들은 5()9()이란 이름아래 교세를 넓혀 나갔다. 이른바 오교구산(五敎九山)의 시대인 것이다.

여기서 5교는 교학(敎學)을 바탕으로 한 교종의 5대 종파이고 구산은 선학(禪學)을 바탕으로 한 선종(禪宗)9대종파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불교의 교세로 볼 때 종파라기보다는 학종(學宗)에 가깝다고 보는 게 옳다. 특히 오교는 삼국시대 말부터 태동(胎動)을 시작한 반면 구산은 나말여초(羅末麗初)에 이르러서야 뼈대를 갖추기 시작했다.

선교후선(先敎後禪)인 셈이다.

 

5(五敎)

 

열반종(涅槃宗) : 무열왕 때 보덕(普德)이 경복사를 중심으로 창종

남산종(계율종) : 선덕왕 때 자장(慈藏)이 통도사를 중심으로 창종

화엄종(華嚴宗) : 문무왕 때 원효(元曉), 신문왕 때 의상(義湘)이 당나라에 가서 화엄교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부석사를 중심으로 창종

법상종(法相宗) : 경덕왕 때 진표율사가 김제 금산사를 중심으로 창종

법성종(法性宗) : 원효(元曉)가 분황사를 중심으로 창종

 

9산 선문(九山禪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부터 승려들이 중국에 건너가 달마의 선법(達磨禪法)을 받아와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킨 9개의 산문을 일컫는 말로서 이것이 선종의 9산문이며 총칭 : 선종(禪宗)

도의(道義)의 가지산파(迦智山派) : 전남 장흥 보림사

원적선사(元寂禪師) 도의는 선덕왕 5(784)에 입당하여 강서 홍주 개원사의 서당지장(西當智藏)에게서 심인(心印)을 받고 다음에 그와 아울러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하 중 삼대사(三大士)의 한사람인 백장회해(百丈懷海)를 찾고 헌덕왕 13(821)에 귀국했다.

도의의 귀국은 당시 신라불교계에 대단한 파문을 일으켰는데, 그는 무념무수를 그 필요로 하고 권두를 들며 문답을 전개하는 가운데 심인을 전하려는 남종(南宗)의 선풍을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재래의 교학불교를 기반부터 뒤흔든 이런 새로운 선풍은 경론에 젖어왔던 당시 불교계는 용인되지 못하여, 허탄하다는 비난을 받고 결국 북산북(北山北), 즉 강원 양양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할 수밖에 없었다. 도의는 그의 심인을 염거(廉居)에게 전해주고, 이는 다시 체징(體澄, 804~880)에게로 이어졌다. 체징은 헌안왕 3(859)에 왕의 소청으로 전남 장흥 가지산 보림사에 주석하고 있다가 경문왕 원년(861)에 더욱 확장하여 가지산파를 이룩했다.

현존(現存)하며 태고 보우국사,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一然)도 이 산문이며 현 조계종(曹溪宗)은 바로 이 가지산문을 일으킨 도의국사를 종조(宗祖)로 모시고 있다.

 

홍척(洪陟)의 실상산파(實相山派) : 전북 남원 실상사

홍척은 흥덕왕 3(827) 전라북도 남원 지리산에 실상사를 개창하고 이곳에서 선풍을 선향하고 실상산파를 형성했다. 그의 문하에는 편운(片雲), 수철(秀澈) 등 수백 인이 있었다. 그가 왕실의 귀의를 받고 개산하게 된 이후에는 입당하여 선종을 받아와 각처에서 개산(開山)하는 자가 속출하게 되었으니, 홍척 이후 계속하여 입당한 선사들 중에는 귀국하지 않은 사람과 귀국한 사람이 있었다 한다.

귀국하지 않고 당에서 활약한 사람으로는 정중무상(靜衆無相) 상산혜각(常山慧覺) 등이며 귀국한 사람으로는 도의와 홍척에 이어 태안철(太安澈), 혜목육(慧目育), 지력문(智力聞) 등을 들고 있다.

골품제도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정치개혁을 모색하고 있던 흥덕왕과 선강태자(宣康太子)에게 홍척이 최초로 귀의를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이것은 선종의 혁명적인 성격에 공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며 가지산문의 종조인 도의와 같은 스승에게서 법을 받았으나 그보다 늦게 귀국하였다. 그러나 도의보다 먼저 산문의 터전을 닦았기 때문에 9산문 중 제일 먼저 개산한 선맥(禪脈)이다.

 

혜철(惠哲)의 동리산파(桐裏山派) : 전남 곡성 태안사

전라남도 곡성 태안사의 혜철(785-861)은 동리산파의 개산조이다.

그는 일찍이 화엄의 본찰(本刹)인 부석사에서 화엄을 수학하고 헌덕왕 6(814)에 입당하여 서당지장으로부터 그 심인을 얻고, 문성왕 원년(839)에 귀국하여 문성왕의 귀의를 받았다.

그의 문하에는 고려 숙종 때의 왕사이며 풍수지리설의 시조로 불리는 도선(道詵, 827-898)과 여 화상(如 和尙) 등이 있었으며, 동리산문의 3조로 일컬어진다. 다시 도선의 문하에는 경보(慶甫, 869-947), 여 화상의 문하에는 윤다(允多, 864-945) 등이 있었다.

고려 초에는 송광사, 화엄사가 모두 이 절의 말사였다.

현존하며 1925년에 육당 최남선이 찾아와 신라 이래의 이름 있는 절이요, 또 해동에 있어 선종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古初)의 신역(神域) 같다고 평했다.

 

현욱(玄昱)의 봉림산파(鳳林山派) : 경남 창원 봉림사

봉림사는 통일신라시대 진경대사 심희(眞鏡大師 審希, 854~923) 스님이 진례성 제군사 김율희의 협력으로 894년께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구산선문 중 하나인 봉림산파를 형성하였으며, 심희스님과 제자인 찬유(璨幽)스님 등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쳤다.

봉림사는 신라 민애왕에서 고려 광종 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들의 귀의를 받은 대찰로 번성하였다고 한다.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스님은 868년에 혜목산 고달사에 주석하고 있던 원감국사(圓鑑國師) 현욱(玄昱, 787~869) 스님에게 계를 받았다. 19세 이후로 명산과 절경을 탐방하였으며 3444세 때에는 송계(松溪)와 설악산 등지에서 참선하였다. 그 뒤 난리를 피하여 명주(溟州)의 산사에서 머물다 김해의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내려왔다. 이렇게 김해 진례(進禮)에 온 심희스님은 이곳 호족인 김율희의 도움으로 옛터를 보수하고 봉림사를 일으켰다. 혜목육(慧目育)은 혜목산(慧目山) 고달사(高達寺)의 원감국사(圓鑑國師) 현욱(787-868)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입당하여 마조하(馬祖下) 장경회혼(章敬懷渾)의 선을 전하여 경기도 여주 혜목산 고달사에서 도화(道化)를 폈으므로, 혜목산화상(慧目山和尙)이라 일컬었다.

심희의 문하에는 찬유(璨幽), 경질(景質) 등 오백여인이 있었으며, 특히 그의 제자 중 자적선사(慈寂禪師) 홍준(洪俊)이 있어 봉림산파는 더욱 융성해졌다.

 

봉림사터는 풍수지리적으로 말할 때 봉황이 둥지에서 알을 품는 형국(鳳巢抱卵形)이라고 한다. 183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에 따르면 봉림사는 고려 광종 이후 쇠퇴해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봉림사 터는 임진왜란 이후 내내 버려진 절터로 있다가 1919년 일제에 의해 이곳에 있던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보물 제362)과 부도비(보물 제363)가 경복궁으로 옮겨졌으며, 그나마 이곳에 남아있던 삼층석탑도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창원시 상북초등학교 운동장 옆 뜰에 있다. 봉림사의 폐사에 대해 입으로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는 183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의 기록과는 사뭇 다르다. 조선시대에 밀양에 사는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인 여주 이씨들이 봉림사터가 명당임을 알고 묘를 쓰려 하였으나 이곳 승려들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시신이 들어 있지 않은 상여 3개를 만들어서 가로막는 승려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고, 그 틈에 시신이 들어 있는 상여를 몰래 운반하여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그 뒤 절은 폐허가 되었고, 여기에 묘를 썼던 여주 이씨의 가문도 역시 망했다고 하니, 그때가 약 200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풍수지리학자인 최원석 선생은 그의 글에서 천시(天時)에는 어쩔 수 없듯 조선시대에 들어서 봉림사는 폐찰되고 말았다. 그 연유는 임란 때 왜적의 침입과 조선왕조의 억불(抑佛)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경내에 버젓이 있는 사묘(私墓)는 어인 영문인가? 명당으로 알려진 폐사지에 묘가 들어서지 않은 사례가 별로 없지만, 봉림사터의 경우 의도적으로 봉황의 혈이 맺는 통로인 부리 부분에 묘를 들여놓았다. 그 주인공은 전라좌수사를 지낸 이모(李謀)라고 한다. 그러나 기대했던 부귀영달(富貴榮達)은 커녕 그들은 파문되고 말았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도윤(道允)의 사자산파(獅子山派) : 강원 영월 흥녕사(현 법흥사)

사자산파는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 798-868)이 남천보원(南泉普願)의 선을 전하여 문성왕 9(847)에 귀국한 것을 그의 제자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 826-900)이 계승하여 개창한 것이다.

절중은 헌강왕 8(882) 강원도 원주 사자산에 주지하자 헌강왕이 사자산 흥령선원(師子山興寧禪院)이라고 선찰 이름을 붙여주고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키도록 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여종(如宗), 홍가(弘可) 1천여 명이 있었다.

사자산 흥녕사는 현재의 사자산 법흥사로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5대 적멸보궁의 한 곳으로 존중되고 있다.

 

범일(梵日)의 사굴산파(闍崛山派) : 강원 강릉 굴산사

통효대사(通曉大師) 범일(810-889)은 역시 마조문하(馬祖門下)인 항주(抗州) 염관제안(鹽官齊安)의 심인을 받아 와서 강원도 강릉 굴산사에 주지하여 선풍을 진작하고 있었으니 고산일(孤山日)이 곧 그다.

그의 문하에는 낭원대사(朗圓大師) 개청(開淸, 835-930)과 또한 뒤에 입당하여 석상경제(石霜慶諸)의 심인을 받아 온 낭공대사(郎空大師) 행적(行寂, 832-916)이 있어서 사굴산파의 문풍을 크게 날렸다.

 

다시 개청의 문하에는 신경(神鏡), 청정(聽靜) 등이 있었으며, 행적의 문하에는 행겸(行謙), 수안(邃安) 5백여 명이 있었다.

 

강릉 굴산사지는 우리나라 9산선문의 중심사찰로서,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한 수해로 긴급발굴조사를 통해 법당지·승방지·회랑지 등의 유구가 확인된 역사상·학술상 귀중한 유적이다. 강릉 굴산사지는 행정구역상 학산2리 윗골마을의 마을회관 일대로 추정되는 지역으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학산천을 사이에 두고 좌, 우의 평탄한 대지에 사찰관계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굴산사는 신라 문성왕 13(851)에 범일국사(梵日國師)에 의해 개산(開山)된 사굴산문의 본산으로 우리나라 9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였으며, 법맥(法脈)이 가장 융성했던 산문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지방호족들의 지원 하에 번성한 후 조선 초 이후의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 이후에는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강릉 굴산사지는 동-140m, -250m의 크기로 면적 45,638이며 총 3개의 문화층 중에서 태풍 루사로 인한 수해로 1·2문화층이 일부 유실되었지만, 초기의 것인 하부의 3문화층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었으며, 법당지, 승방지, 회랑지, 탑지 등도 확인되었다. 굴산사는 범일국사가 당나라 유학 시 왼쪽 귀가 떨어진 승려가 고향에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는 청으로 지은 사찰이라고 한다.

 

무염(無染)의 성주산파(聖住山派) : 충남 보령 성주사

호서지방에서는 낭혜선사(郎慧禪師) 무염(無染, 800-888)이 충청남도 웅천에 성주산파를 개창했다. 그는 마조문하인 마곡보철(麻谷寶徹)의 심인을 받아 가지고 당 무종(武宗)의 폐불(廢佛)사건을 계기로 귀국하여 문성왕 9(847)에 충청남도 보령 숭암산 성주사에 주석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성주산파의 선풍을 떨쳤다. 당시의 구산파 중에서 제일 번창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무염의 문하에는 당시에 사선(四禪)이라고 불리어지던 순부(詢父), 원장(圓藏), 영원(靈源), 현영(玄影)이 있었으며, 그 외에 승량(僧亮), 보신(普愼) 등 근 2천여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 중 특히 원랑선사(圓朗禪師) 대통(大通, 816-883),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 862-930)도 그의 제자였으며, 후일 입당하여 운거 도응(雲居 道膺)으로부터 조동종(曹洞宗)을 받아와 선종구산파 중의 하나인 수미산파를 개창한 진철대사(眞徹大師) 이엄(利嚴, 866-932)도 그와 관계가 깊은 사람이었다.

충남 보령시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의 문화재 및 보호구역 면적은 42필지 67295.

성주사는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부르다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했다. 산골에 자리 잡고 있는 절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했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석등, 5층석탑(보물 제19), 금당건물과 그 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동삼층석탑,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 3층석탑(보물 제47)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정리하면 11금당식 가람으로 창건되었지만, 몇 백 년 후 금당 뒤에 동서 쌍탑을 세웠고, 다시 몇 백 년 후에 중앙탑을 더 세워 1-3탑식 가람이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건축적·교리적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반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가람이다.

 

도헌(道憲)의 희양산파(曦陽山派) : 경북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 824-882)은 혜소(慧昭)에게서 남종선(南宗禪)을 이어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조(四祖) 도신(道信)의 법통과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을 아울러 이은 혜은(慧隱)에게서도 그 선풍을 이어받고 있었다. 또한 도헌은 다른 선사들과는 달리 입당하지 않고 선종구산파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개산조(開山祖)가 되었던 점에서도 주목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중국의 선종을 직수입하여 들이던 단계를 벗어나 이제는 중국에서 들어온 선종의 각 종파를 종합. 절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도헌의 문하에는 양부(楊孚), 민휴(敏休) 등이 있었으며, 특히 양부의 문하에 정진대사(靜眞大師) 극양(棘讓, 878-956)이 있어 극양은 경순왕 9(935)에 희양산에 가서 적화로 폐허가 된 봉암사를 재건하였다.

지금은 참선 승방으로, 사찰을 초파일에만 개방하고 있다.

 

이엄(利嚴)의 수미산파(須彌山派) : 황해 해주 광조사

구산선문 중 가장 늦게 개창되었다. 김해부 지군부사 소율희(蘇律熙)의 후원 아래 지내던 이엄은, 성주산파의 심광이 머문 충북 영동시 영각산사(靈覺山寺)에 잠시 머문다. 고려가 건국된 918년 왕건의 요청으로 태흥사에 초청되고, 이듬해 사나내원(舍那內院)으로 가며, 932년부터 광조사로 옮겨 후삼국 통일 원년인 936년에 죽었다.

광조사는 이엄을 아끼던 태조에 의해 932년에 창건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가 63세에 이르렀으나 선풍을 사모해 모여든 구도자들의 수가 꾸준히 늘어나며 선풍을 진작시켜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수미산파의 전통이 확립되었으며, 이 전통은 고려 왕정을 비치는 등대로 발전했다.

이엄의 제자로는 황보제공(皇甫悌恭)과 왕유 등 전직 고관이 있었으며, 이들의 사상경향은 대체로 왕정을 보익(補益)하는 성격을 띠었다고 한다. 이렇듯 신라 말에 형성된 칠산 선문과 고려 초에 형성된 이산 선문은 고려 중기 보조 지눌(1158~1210)에 의해 조계종(曹溪宗)으로 통합되고 이렇게 조계선종으로 통합된 구산선문은 한국선의 원류이자 한국 불교의 정체성으로 평가받게 된다. 종래 중국불교의 13종의 하나였던 선법은 신라 하대로부터 고려 중기를 거쳐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상위개념으로 전환하여 나머지 1종 내지 12종을 통합한 선법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신라 중대 이래 교학의 축에 의해서만 이해해오던 불교의 지평이 이제 선의 새로운 지평과 어우러지면서 불교 이해의 지평이 훨씬 넓어지고 보다 유연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 산문의 개조나 개산조들은 저마다 독자적인 가풍을 만들어 갔다. 그러한 독자적인 가풍은 이후 한국불교의 새로운 기반으로 자리하게 된다.

무염(無染)의 말 없는 국토(無舌土)와 말 있는 국토(有舌土), 도선(道詵)의 말 없는 말(無說之說)과 법 없는 법(無法之法), 순지(順之)의 표상현법(表相現法), 삼편성불편(三遍成佛篇), 점증실제편(漸證實際篇) 등의 담론이 독자성을 머금은 대표적인 가풍(家風)이라 할 것이다.

 

[출처] 59(五敎 九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