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경어(參禪警語)
제1장 - 처음 발심한 납자가 알아야 할 공부
1. 생사심을 해결할 발심을 하라
참선할 때에는 가장 먼저 생사심(生死心)을 해결하겠다는 굳은 마음을 내야 한다. 그리고는 바깥 세계와 나의 심신이 모두 인연으로 이룩된 거짓 존재일 뿐 그것을 주재하는 실체는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아야 한다. 만약 누구에게나 본래 갖추어져 있는 큰 이치를 깨치지 못하면 생사에 집착하는 마음을 깨뜨릴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죽음을 재촉하는 귀신이 순간순간 멈추지 않고 따라다니게 되니, 문득 이것을 어떻게 쫓아버릴 수 있겠는가?
오직 이 한 생각만을 가지고 수단 방편으로 삼아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살아날 길을 찾듯해야 한다. 비틀거리며 걸어 나가려 해도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고, 가만히 있자니 그럴 수도 없으며,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한 생각도 일으킬 수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으니,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겠는가. 모름지기 타오르는 불도 돌아보지 말고 목숨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또한 남이 도와주기를 바라거나 다른 생각을 하지도 말고 잠시 머물러 있을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는 곧장 앞으로 달아나 우선 불길 밖으로 뛰어나오는 길만이 묘수이다.
2. 의정을 일으켜라
참선하는 데에는 의정을 일으키는 일이 중요하다. 무엇을 의정이라 하는가? 예컨대 우리가 어디로부터 태어나는지 모르니 그 온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 가는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생사문제라는 관문을 뚫지 못했을 때 문득 의정이 생기게 된다. 그것이 맺혀서 눈꺼풀 위에 머물고 있어, 내치려 해도 떨어져 나가지 않고 두고 달아나려 해도 갈 수가 없다. 그러다가 홀연히 하루 아침에 의정의 뭉치를 때려 깨고 나면,
“이 생사 라는 두 글자가 어느 집구석에 한가하게 놓인 가구란 말이냐! ”라고 외치게 된다.
아! 옛날 어느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달으며, 의심하지 않으면 아예 깨닫지 못한다.’
3. 일념으로 정진하라
참선할 때 죽음 이라는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늘 염두에 두면서 자기의 몸과 마음을 죽은 상태와 똑같이 하는 방법이 있다. 그렇게 되면 오직 이 문제를 밝혀야겠다는 그 한 생각만이 눈앞에 남아있게 된다. 이 때의 한 생각이란 하늘을 찌를 정도의 긴 칼과 같아서 무엇이든 갖다 대는 족족 베어지므로,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막힌 것을 걸러내고 둔한 것을 갈다 보면 칼은 사라진 지 오랜 뒤가 될 것이다.(주: 초나라 때 한 사람이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다가 실수하여 칼을 물 속에 빠뜨렸는데, 그 자리에서 뱃전에 표를 해두었다가 배가 나루에 닿은 뒤 표를 해 둔 뱃전 밑의 물 속에 들어가서 칼을 찾고 있더라는 각주구검의 고사. 여기서는 점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쓴다.)
4. 고요한 경계를 조심하라
참선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은 고요한 경계에 빠져들어 사람을 말라 죽은 듯한 적막 속에 갇히게 하는 태도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은 번거로운 곳을 싫어하고 고요한 곳에서는 대부분 염증을 느끼지 않는다. 도를 닦는 수행인의 경우도 그러하다. 시끄러운 바닥에서만 내내 살던 이가 일단 조용한 경계를 맛보고 나면 그것이 꿀이나 되는 양 달갑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사람은 권태가 오래되면 잠자기를 좋아할 것이니, 자기가 이런 병통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어떤 외도는 자기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없애어 딱딱한 돌처럼 되게 하였다 하니 이것도 고요한 경계를 통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마를 대로 마르고 적막할 대로 적막해져서 아예 인식작용이 없는 상태까지 가버렸으니 목석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들이 혹 고요한 경계에 처할 때는 오직 법복 속에서 벌어지는 한 가지 큰일, 즉 육신의 생사를 깨치는 데 힘써야 한다. 자기가 고요한 곳에 있는 줄을 몰라야만 비로소 옳다 하겠다. 생사대사에서 고요한 모습을 구하려 해도 정말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면 이야말로 된 것이다.
5. 자기 공부에만 매진하라
참선할 때에는 마음을 똑바르고 곧게 하여 남의 사정을 봐주지 말아야 한다. 남의 인정 사정 다 봐주다가는 자기 공부가 향상되지 못한다. 공부가 향상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세월이 오래 가면 반드시 속세에 물들어 스승에게 아부까지 하게 될 것이다.
6. 의단을 깨라
참선하는 납자는 고개를 쳐들어도 하늘을 못 보고 고개를 숙여도 땅을 보지 못하며, 산을 보아도 산으로 보이지 않고 물을 보아도 물로 보이지 않아야 한다. 또한 길을 걸어가도 걷는 줄을 의식하지 못하며, 앉아 있어도 앉아 있는 줄을 몰라야 한다. 많은 인파 속에서도 한 사람도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몸과 마음이 온통 의심 덩어리 하나뿐이니 세계를 하나로 뒤섞어놓았다 할 만하다. 이 의심 덩어리를 깨뜨리지 않고는 맹세코 마음놓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공부에 있어서 긴요한 것이다.
세계를 하나로 뒤섞는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헤아릴 수 없는 오랜 겁 전부터 본래 갖추어져 있는 큰 이치는 소리도 없이 고요하여 한 번도 움직인 일이 없다.
요는 참선하는 자가 알음알이를 다 떨어버렸을 때, 천지가 뒤바뀌면서 자연히 거꾸로 용솟음쳐오는 한 줄기 파도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을 몸으로 받은 듯한 상태를 말한다.
7. 의정과 하나가 되라
참선하는 납자는 죽어서 살아나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살아만 있고 죽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는 결단코 의정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들떠 움직이는 경계를 굳이 떨어버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떨어지고, 허망한 마음도 억지로 맑히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맑아진다. 그리하여 6근이 자연히 텅 비어 자유로와진다. 이런 경지에서는 움찔했다 하면 벌써 마음먹은 곳에 가 있고 입만 벙긋했다 하면 벌써 반응이 있게 되니,살아나지 못할까 근심할 일이 있겠는가?
8. 세 가지 폐단을 조심하라
공부가 향상되기를 바란다면, 천근되는 짐을 어깨에 걸머진 듯하여 팽개치려 해도 내려놓지 못하는 형편이 되어야 한다. 또한 잃어버린 중요한 물건을 찾듯하여 확실하게 찾아내지 못하면 맹세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아집과 집착 알음알이가 생기는 일이다.
아집은 병이 되고 집착은 마가 되며 알음알이는 외도로 빠지게 한다. 결단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 열심히 공부하면 앞서 말한 세 가지 폐단이 얼음 녹듯 말짱해질 것이다. 이른바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들뜨게 하면 그 자리에서 법체와 어긋난다 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9. 또렷하게 깨어 있는 채로 참구하라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납자는 쥐를 잡으려는 고양이처럼 분명하고 또렷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옛사람도 적군의 목을 베지 않고는 맹세코 쉬지 않겠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망상의 도깨비굴 속에 들어앉게 되어 어둡고 깜깜한 채로 일생을 다 보내고 말 것이니 참선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두 눈을 반짝 뜨고 목표물을 노려보며 네 다리에는 힘을 주고 곧추서서 오는 쥐를 잡아 입에 물어야만 비로소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비록 닭이나 개가 옆에 있다 하더라도 돌아볼 정신이 없다. 참선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오직 열심히 이 도리를 밝히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그렇게 되면 8경(마음을 흔들어 놓는 8가지 경계)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해도 신경 쓸 틈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해도 쥐는커녕 고양이마저도 달아나고 마는 것이다.
10. 하루에 공부를 다 마치듯 하라
참선할 때는 날마다 하루할 공부를 다 마쳐야 한다. 미루고 질질 끌면 백겁천생토록 끝내 공부를 다 마칠 날이 없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향 한 개비를 꽂아놓고 그것이 다 타는 것을 보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공부가 늘 그저 그러하여 나아진 것도 퇴보한 것도 없다. 이런 식으로 가면 하루에 몇 개비의 향이 타겠으며 1년이면 얼마만큼의 향이 타겠는가?
그러고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시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리고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데 생사문제를 아직 밝히지 못했으니 어느 날에나 공부를 마치고 깨닫게 될 것인가?
이런 생각으로 더욱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11. 옛사람의 공안을 천착하지 말라
참선하는 납자는 옛 스님들의 공안을 알음알이로 헤아려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비록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의 뜻을 깨닫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공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런 사람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즉 옛 스님들의 말씀은 마치 큰 불덩어리 같아서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물며 그 가운데 어떻게 앉아보고 누워볼 수 있겠는가. 그러한 말씀에다 다시 이러니저러니 분별을 일으켜 자기 신명을 망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12. 선에서의 바른 믿음
이 공부는 교학과는 다르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대승을 공부해 온 사람도 선(禪)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하물며 성문 연각을 공부하는 소승에 있어서랴!
3현 10성이 어찌 교(敎)에 통달하지 못했을까마는 오직 참선하는 일에 대해 설법할 때만은 그렇지 않아서 3현 보살은 간담이 떨리고 10지 보살도 혼이 빠진다고 하였다. 또한 등각보살도 마찬가지이다. 등각보살은 비오듯 자재한 설법으로 무량한 중생을 구제하시며 무생법인을 얻으신 분이다. 그런데도 아직은 소지장에 막혀 도와는 완전히 어긋난 사람이라고 하셨으니, 하물며 그 나머지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선종에서는 범부에서부터 완전히 부처와 똑같다고 한다. 이 말은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데가 있겠으나, 믿는 사람은 선(禪)을 할 수 있는 그릇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이 근기가 아니다. 모든 수행자가 이 방법을 택하려 한다면 반드시 믿음으로부터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믿음 이란 말에도 그 뜻이 얕고 깊은 차이와 바르고 삿된 구별이 있으므로 가려내지 않으면 안된다. 믿음이 얕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불교에 입문한 이라면 뉘라서 신도가 아니라고 자처할까마는 그런 사람은 단지 불교만을 믿을 뿐 자기 마음을 믿지 않으니 이것을 말한다. 믿음이 깊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대승보살도 아직 믿음을 갖추었다 할 수는 없으니, [화엄경소]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 설법을 하고 대중들은 그 법문을 듣고 있구나. 이렇게 의식하면 그 보살은 아직 믿음의 문턱에도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가령 [화엄경]에 나오는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즉심시불(卽心是佛)] 라고 한 말씀은 누구나가 다 믿노라고 한다. 그런데 네가 부처냐? 라고 묻게 되면 영 어긋나버려서 알아듣지를 못한다.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을 다해서 아무리 재어보아도 부처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가 없다. 무슨 까닭인가? 생각을 다해 재보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이는 벌써 믿음을 갖추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르다 삿되다 한 것은 무슨 차이인가? 마음이 곧 부처라고 믿는 것을 바른 믿음 이라 하고, 마음 밖에서 법을 얻으려는 것을 삿된 믿음 이라 한다. 그대로가 부처임을 철저히 밝혀 자기 마음으로 직접 맛보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바른 믿음 이라 할 수 있다. 얼굴만 번듯하고 속은 어리석은 노름꾼 같은 이는 단지 말로만 마음 그대로가 부처 라고 떠들 뿐이지 사실은 자기 마음도 모르고 있다. 이런 것을 바로 삿된 믿음 이라고 한다.
13. 본체를 보아야 선정에 든다
옛 선사는 복숭아를 따다가도 문득 정(定)에 들고, 호미로 밭을 매다가도 문득 정에 들었으며, 절의 자잘한 일을 하면서도 선정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한 곳에 오래 눌러앉아 외연을 끊고 마음을 일어나지 못하게 한 다음에야 정에 들었다고 하겠는가. 이를 곧 삿된 선정 이라고 하니, 이는 납자가 가져야 할 바른 마음이 아니다.
6조 혜능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부처님은 항상 선정 속에 계셨으며, 선정에 들지 않으실 때가 없었다. 모름지기 본체를 확실하게 보아야 비로소 이러한 선정과 하나가 된다. 석가 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내려와 왕궁에 태어나시고, 설산에 들어가 샛별을 보고 허깨비 같은 중생을 깨우쳐주신 일들이 모두 이 선정을 벗어나지 않으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들뜬 경계에 빠져 죽었을 것이니, 그래서야 어찌 정이라 할 수 있겠는가. 들뜬 경계에 있어서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서 고요하든 들뜨든 간에 전혀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여기서 무엇을 가지고 경계를 삼겠는가? 이 뜻을 깨달을 수 있으면 세상이 온통 정(定)이라는 하나의 몸으로 꽉 차서 다른 것은 없을 것이다.”
14. 세간법에서 자유로와야 한다
참선하는 납자는 세간법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불법에도 오히려 조금이라도 집착해서는 안되거늘 하물며 세간에 매달려서야 되겠는가. 만약 화두공부가 제대로 되면 얼음을 뒤집어써도 차가운 줄을 모르며, 불을 밟고 가도 뜨거운 줄을 모르며, 가시덤불을 지나가도 걸리거나 막히는 일이 없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세간법에서도 자유로와진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바깥 경계에 끄달린다. 여기에서는 조그만큼의 공부를 이루려 해도 당나귀해(12간지에 없는 해로, 실현될 가능성이 없음을 비유함)가 되도록 끝없이 기다려 보았자 꿈속에서도 공부의 진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15. 언어 문구를 배우지 말라
참선하는 납자는 문구를 따져 연구하거나 옛사람의 말씀이나 외우고 다녀서는 안된다. 이러한 일은 무익할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알음알이로 전락해 버린다. 이러고서는 마음의 움직임이 완전히 끊긴 자리 에 이르려 한들 되겠는가.
16.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참선할 때에는 알음알이를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마음을 여러 갈래로 치닫게 하면 도(道)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니, 그런 식으로는 미륵이 하생할 때까지 해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만일 의정이 문득 일어난 납자라면 허공 속에 갇혀 있어도 그것이 허공인 줄 모르고 또한 은산철벽(깨뜨리기 어려운 장애를 비유함) 속에 앉아 있듯 하여 오직 살아나갈 길만을 모색해야 하니, 살길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편안하게 은산철벽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해야 한다.
단지 이렇게 공부해 나가다 보면 때가 올 것이니,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자연히 들어갈(入道) 곳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17. 공부로는 도를 깨칠 수 없다는 사견을 조심하라
요즘 삿된 선사가 납자들을 잘못 가르치는 일이 있다. 그들은 깨치는 길은 공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옛 사람들은 한번도 공부해서 도를 깨친 일은 없다 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런 말은 가장 해로와서 후학을 미혹케 하여 쏜살같이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대의 선사의 [좌선명]에는 이런 글이 있다.
참구할 필요 없다 절대로 큰소리 말지니
옛분이 애써서 모범이 되어주지 않았던가
지금은 낡은 누각 버려진 땅이라 해서
한번에 영영 황폐시켜서야 되겠는가.
만약에 참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문득 나는 도를 깨쳤노라 고 한다면 이는 하늘에서 떨어진 미륵, 땅에서 솟은 석가일 것이다. 이런 무리들을 이름하여 불쌍한 존재라고 한다.
자기 스스로 참구하지는 않고 옛 스님들이 도를 묻고 대답한 것을 보고는 문득 자기가 깨달았다고 착각한다. 드디어 알음알이를 깨달음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으로 사람들을 함부로 속인다. 그러다가 호된 열병에라도 한 번 걸리면 아프다고 하늘에 닿도록 소리치니 평생동안 깨달은 바가 하나도 쓸모없게 된다. 이윽고 죽는 마당에 이르면 마치 끓는 남비 속에 들어간 방게처럼 손을 바삐 움직이고 발버둥을 치게 되니 그제서야 후회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황벽 스님은 이런 노래를 지으셨다.
티끌 세상을 벗어남은 보통 일이 아니니
고삐 끝을 꼭 잡고 한바탕 일을 치루라
매서운 추위가 뼛속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떻게 매화향기 코를 찌르랴
이것은 가장 간절한 말씀이니, 이것으로써 때때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면 공부는 자연히 날로 향상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백리 길을 가는데 한 발자국을 걸어가면 한 발자국만큼 길이 줄어드는 것과 같은 아치이다. 한 발자국도 걸어가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게 되면, 비록 자기 고향일은 훤히 설명할 수가 있지만 진정한 고향인 깨달음에는 끝내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 어느 쪽 일을 택해야 마땅하겠는가?
18. 간절하게 참구하라
참선하는 데 있어서는 간절함 이라는 한마디가 가장 요긴하다. 간절함은 무엇보다도 힘이 있는 말이니 간절하지 않으면 게으름이 생기고, 게으름이 생기게 되면 편한 곳으로 내쳐 마음대로 놀게 되며 못할 짓이 없게 된다. 만일 공부에 마음이 간절하면 방일할 겨를이 있겠는가. 간절하다는 이 한마디만 알면 옛 스님들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고 근심할 필요도 없고, 생사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 이 간절하다는 말을 버리고 따로 불법을 구한다면 모두 어리석고 미친 사람들로서 형편없이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엉터리와 참선하는 사람을 어떻게 동일시할 수 있겠는가.
간절하다는 이 한마디가 어찌 허물만 멀리 할 뿐이겠는가? 당장 선(善)과 악(惡)과 무기(無記)의 3삼성(三性)을 뛰어넘을 수 있다. 무슨 뜻인가? 화두 하나에 온통 간절하게 마음을 쏟으면 선(善)도 생각하지 않게 되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게 되며, 또한 간절한 마음 때문에 무기(無記)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화두를 간절히 참구하면 마음이 들뜨는 상태와 어둡게 가라앉는 상태가 없어지고, 화두가 눈앞에 나타나면 무기(감각이 없는 상태)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간절하다는 이 한마디가 가장 친절한 말이다. 마음씀이 매우 간절하면 마가 들어올 틈이 없다. 또한 있다 없다 를 놓고 분별심을 내지 않아서 외도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19. 참선 중에는 앉아 있음도 잊어라
참선하는 중에는 걸어가도 걷는 줄을 모르고 앉아 있어도 앉은 줄을 모르니, 이것을 화두가 현전한다 고 말한다. 의정이 깨어지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있는 줄도 모르는데 하물며 걷고 앉는 일을 의식하겠는가.
20. 주변사에 마음을 쓰지 말라
참선하는 납자는 시를 짓고 노래 부르며 글쓰기를 생각하는 일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 시나 노래로 대가가 되면 승려시인 아무개라 불리우고, 문장력이 뛰어나면 글 잘하는 아무개 스님이라 불리게 되나 참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다.
마음에 맞거나 거슬리는 바깥 경계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경우를 만나게 되면 그 자리에서 알아차려 깨뜨려야 한다. 그리고는 화두를 들고서 바깥 경계를 따라 굴러가지 말아야 비로소 제대로 되었다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바짝 조여댈 것 없다 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태도가 가장 사람을 그르치게 하는 공부이니, 납자라면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21. 공(空)에 떨어짐을 두려워 말라
참선하는 사람이 흔히 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는데 화두가 현전한다면 어떻게 空에 떨어질 수 있겠는가. 오직 이렇게 空에 떨어질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미 공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하물며 화두가 현전할 수 있겠는가.
참선할 때에 의정을 깨뜨리지 못했으면 마치 깊은 물가에 간 듯 살얼음판을 지나듯 조심해야 하니, 털끝만큼이라도 한 생각 놓쳐버리면 목숨을 잃어버리게 된다.
의정을 깨뜨리지 못하면 이치를 밝혔다고 한 숨을 놓을 수가 없다. 이런 상태에서 숨이 떨어지면 일생 동안 중음신이 끄는 대로 끌려 다니다가 업식(業識)에 매이는 결과를 면치 못한다. 그리하여 계속 다른 몸을 받고 윤회하면서도, 머리를 바꾸고 얼굴을 바꾸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의정에다가 또 하나의 의정을 덧붙이게 되어서 화두를 들어도 결정코 밝혀야 할 곳을 밝히지 못한다. 이 일은 도둑 잡는 일에 비유하자면 물증으로 장물을 찾아내야 비로소 잡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22. 직접 부딪쳐 깨달아라
참선할 때에는 깨닫겠다는 마음만 가지고는 안된다.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집에 도착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은 끝내 집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니 반드시 모름지기 계속 걸어가야만 집에 다다를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만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린다면 끝내 깨닫지 못할 것이니, 오직 직접 부딪쳐서 깨달아야 한다.
크게 깨닫는 순간은 마치 연꽃이 활짝 피어나듯 하고, 또는 깊은 꿈에서 홀연히 깨어나는 듯하다. 이런 이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꿈은 깨어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잠이 깊이 들고나면 자연히 깨어나고, 꽃은 피어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핀다. 마찬가지로 깨닫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인연이 맞으면 저절로 깨닫게 된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연이 맞는다 할 때, 중요한 것은 화두가 간절하여 몸으로 부딪쳐서 깨달음을 얻게 하여야 되는 것이지 깨달을 때를 기다리라는 말은 아니다. 또 깨달았을 때는 마치 구름을 헤치고 하늘을 보듯 훤하게 사방이 탁 틔어서 아무 곳에도 눈을 둘 곳이 없게 된다. 그리하여 하늘땅이 뒤바뀌게 되니 이것이 또한 한바탕 뒤집힌 경계이다.
23. 참선에 필요한 몇 가지 태도
참선에는 긴박함과 바름, 면밀함과 융활함이 요구된다.
무엇을 긴박함 이라고 하는가? 사람의 생명은 호흡에 달려 있는데, 생사대사를 밝히지 못한 채로 숨이 떨어지면 앞길이 깜깜하여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옛날 어떤 큰스님도 삼으로 꼰 새끼를 물에 적시듯하여 한 발짝 한 발짝 갈수록 조여드는 것과 같다 라고 하셨다.
무엇을 바름 이라고 하는가? 납자들은 모름지기 바른 법을 가려낼 수 있는 안목을 갖추어야 하니, 3천 7백 조사들에게도 다 공통된 안목이 있었다. 그러니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곧 잘못된 길로 들어가게 된다. 경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오직 이 일승(一乘)만이 진실이고 나머지 이승은 진실이 아니다.
무엇을 면밀함 이라고 하는가? 눈썹을 허공에다 매어두고 바늘구멍도 들어가지 못하고 물이나 술도 스며들 수 없을 정도로 털끝만한 틈도 용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만일 털끝만한 틈이라도 생기면 그 틈으로 마의 경계가 스며들게 된다. 그러므로 옛날 어떤 큰스님께서는 한때라도 마음이 도(道)를 떠나면 죽은 사람과 같다 라고 하셨다.
무엇을 융활 이라고 하는가? 세계의 넓이가 1장이면 고경(古鏡)도 1장이고, 고경의 넓이가 1장이면 화로의 폭도 1장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이치를 바둑에 비유할 수 있다. 바둑돌을 한 곳에 두어 놓고 거기에 매여서 죽은 바둑돌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된다. 또한 한 곳에 얽매여서 양쪽 축머리에 돌을 놓고 망망하고 탕탕한 곳을 바라보기만 하여서도 안된다. 옛 고승께서도 말씀하시기를, 허공과 같이 원만하여 모자라는 것도 남는 것도 없어야 한다 라고 하셨다.
참으로 융활한 곳에 이르게 되면 안으로는 몸도 마음도 보이지 않고, 밖으로는 세계가 있는 것도 보이지 않으니 그래야 비로소 도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 긴박감만 있고 바른 길을 모른다면 노력을 헛되이 낭비하게 되고, 바른 길만 알고 긴박하지 못하면 도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미 도의 문턱에 들어갔으면 면밀해야만 도를 깨칠 수가 있고, 또한 활달해야만 비로소 대중을 교화할 수 있다.
24. 딴 생각이 일어남을 조심하라
참선할 때에는 한 가닥의 실오라기만큼도 딴 생각을 내서는 안된다. 언제 어디서나 오직 한 길로 본래 참구해 오던 화두만을 들고 의정을 일으켜 하나의 귀결처만을 찾는 데 분발해야 한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딴 생각이 있게 되면 이것은 옛사람이 말씀한 잡독이 심장 속에 들어갔다 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결과가 어찌 목숨만을 상하게 하는 데 그치겠는가. 부처님의 혜명까지도 해치게 되니 납자라면 반드시 삼가야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딴 생각 이란 단지 속세의 일뿐이 아니라 마음을 참구하는 일을 제외한 나머지 불법 중의 모든 좋은 일까지도 포함된다. 또한 어찌 불법에만 국한되겠는가. 갖고 버리고 집착하여 변화시키는 등 마음자리에서 생기는 모든 것도 다 딴 생각이라고 해야 한다.
25. 끊임없이 참구하라
참선하는 사람들이 흔히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공부를 포기하는 일이다. 마치 모르는 길을 물어서 찾는 일과 마찬가지이니, 물어도 길을 모른다고 쉬어서야 되겠는가. 정확하게 길을 찾았거든 걷는 일이 중요하니, 똑바로 그 길을 걸어가서 목적지인 집에 도착해야 한다. 길바닥에 진을 치고 있어서는 안되니, 걸어가지 않으면 끝내 집에 도착할 기약이 없다.
26. 더 이상 마음 쓸 곳 없는 경지
참선할 때 더 이상 마음 쓸 곳이 없는 경지, 즉 만 길 낭떠러지나 물도 다하고 산도 다한 곳, 초승달 그림자가 물소뿔에 새겨지는 경지(무소가 초사흘 달을 보면 뿔에 달의 그림자가 새겨진다고 함. 범부가 깨달음을 얻고 불신으로 전화하려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늙은 쥐가 쇠뿔 속에 덜컥 걸려들어가듯(옛날에는 쇠뿔에다 기름을 먹여 등잔불로 썼는데 쥐가 그리 걸려 들어가면 꼼짝없이 나올 수가 없으니, 공부가 다 되어 저절로 깨치게 되는 순간을 비유함) 어찌할 수 없이 저절로 정(定)에 들게 되리라.
27. 민첩하고 약은 마음을 경계하라
참선할 때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민첩하고 약은 마음이다. 그것은 공부에 있어서는 먹지 못하게 되어 있는 약이니 조금이라도 먹었다 하면 아무리 좋은 약으로도 고칠 수 없게 된다.
진정한 납자라면 소경이나 귀머거리 같아야 한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알음알이가 생기거든 마치 은산철벽에 부딪친 듯하라. 이렇게 해야 비로소 공부가 되어 가는 것이다.
28. 자신과 세계를 하나로 하라
진정하고 절실하게 공부하려면 자기 심신과 바깥 세계를 불에 구운 쇠말뚝처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는 그것이 갑자기 폭발해서 끊어지고 부러지기만을 기다려, 다시 그것을 주워 모아야만 비로소 공부가 되었다 할 것이다.
29. 사견을 알아차리지 못함을 경계하라
공부할 때에는 잘못됨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잘못을 모르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설사 수행을 하다가 잘못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한 생각에 잘못임을 알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이것이야말로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는 기본이자 생사를 벗어나는 요긴한 길이며, 마의 그물을 깰 수 있는 날카로운 무기가 된다.
석가 부처님께서는 외도의 법에 대하여 하나하나 몸소 경험해 나오셨다. 이것은 오직 사견의 소굴 속에 안주하지 않고 잘못인 줄 안 즉시 떠난다 는 태도를 가지고 범부에서부터 부처자리에 이르셨던 것이다. 이 뜻이 어찌 세간을 벗어난 출가자에게만 해당되겠는가. 속인들도 생각을 잘못했을 때가 있거든, 오직 잘못인 줄 알았으면 바로 버린다 는 이 뜻만 소화해 낼 수 있으면 청정한 선남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잘못을 안고 그 속에 정착하여 옳다고 생각하고 잘못을 알려 하지 않는다면 비록 산 부처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구해내지 못할 것이다.
30. 시끄러운 경계를 피하려 하지 말라
참선할 때에는 시끄러운 것을 피하려 해서는 안된다. 고요한 곳을 찾아가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도깨비굴 속에 앉아 살아날 궁리를 하는 셈이다.
옛사람이 이른바 흑산 밑에 앉아 있으면 사수(死水)가 젖어 들어올 때 어느 쪽으로 건너겠는가?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환경과 인연의 굴레 속에 있으면서 공부해 나가야 비로소 힘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문득 한 구절의 화두가 눈썹 위에 붙어 있게 되면, 걸어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옷 입고 밥 먹을 때나 손님을 맞이할 때나 오직 그 화두의 귀결처만을 밝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얼굴을 씻다가 콧구멍을 더듬어 만져보니 원래 그 자리에 붙어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이것이 힘을 얻은 곳이다.
31. 알음알이를 공부로 오인하지 말라
참선할 때에는 알음알이를 공부로 오인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혹 눈썹을 치켜 뜨고 눈을 깜박거리며 머리를 흔들고 생각을 굴리는 것에 무엇인가 있다고 여겨서 알음알이를 붙들고 참선에 임한다면 외도의 노예조차도 되기 힘들 것이다.
32. 마음 갈 곳이 없도록 하라
참선하는 데에는 어디에고 마음 쓸 곳이 없어야 한다. 그런 중에 옛사람들이 도를 묻고 대답한 기연을 생각하는 데 마음을 쏟아서는 절대로 안된다.
동산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갖가지 묘한 경계를 체험하고도 근본 종지를 잃어버려서 본말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근기가 되면 함께 도를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만일 도리를 깨달았으면 하나하나가 모두 삼매여서 자기 마음속에서 흘러나오게 되니 이러한 깨달음은 사유 조작과는 천지차이 정도가 아니다.
33. 공부가 향상되지 않음을 두려워 말라
공부가 향상되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향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 공부이다. 옛 스님께서도 아무 방편도 쓰지 안음이 해탈에 이르는 문이고, 아무 생각도 없음이 깨달은 이의 생각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에 들어가는 모든 방법을 몸소 체득하는 일이니, 공부가 향상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버리면 설사 백천 겁을 태어나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34. 다급한 마음으로 생사문제에 매달려라
외정이 막 일어나서 놓을래야 놓을 수 없게 되면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생사문제를 늘 염두에 두고 마치 호랑이에게 쫓기는 듯 다급해야 한다. 만약 죽어라고 달려서 집에 도착하지 못하면 반드시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래도 어정거릴 것인가?
35. 여러 공안은 천착하지 말라
참선할 때에는 하나의 공안에만 마음을 쏟아야지 여러 공안에다가 알음알이를 지어서는 안된다. 비록 많은 공안을 이해하였다고 생각하더라도 결코 깨달은 것은 아니다.
[법화경]에서는 이 법은 사량분별로는 깨달을 수 없다 라고 하였고, [원각경]에서도 알음알이로 원만하게 깨달은 여래의 경지를 헤아려 보려는 것은 마치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는 것과 같아서 결코 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동산 스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알음알이로 묘한 깨달음을 배우려 함은 서쪽으로 가려 하면서 동쪽으로 발을 내딛는 짓과 마찬가지이다. 공안을 참구하는 모든 납자들은 살아서 피가 흐르는 자라면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36. 경론에서 증거를 드는 알음알이를 조심하라
참선할 때에는 화두를 들고서 오직 이 의정이 깨어지지 않았음을 알았으면 끝까지 딴 생각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결코 경에서 증거를 대어가며 알음알이에 끄달려가서는 안된다.
알음알이가 일단 작동하게 되면 망념이 갈래갈래 치달리게 되니, 그때 가서 말 길이 딱 끊기고 마음 쓸 곳이 없어진 경지를 얻고자 한들 되겠는가?
37. 잠시도 중단하지 말라
도(道)란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니, 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공부는 잠시라도 중단해서는 안되니, 중단해도 된다면 그것은 공부가 아니다. 진정한 납자라면 마치 눈썹이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절실하게 공부를 해야 하니, 어느 겨를에 딴 생각을 내겠는가. 옛 큰스님께서도 마치 한 사람이 적병 만 명과 싸우듯 해야 하니 한눈을 팔 겨를이 있겠는가 라고 하셨다. 이것은 공부에 가장 요긴한 말이니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38. 깨닫지 못하고서 남을 가르치지 말라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깨닫지 못하였으면 오직 자기 공부만을 힘써야지 남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서울에 가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서울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남을 속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속이는 일이다.
39. 방일과 무애를 혼돈하지 말라
참선할 때에는 새벽이나 밤이나 감히 게을러서는 안된다. 자명 스님 같은 분은 밤에 잠이 오면 송곳으로 자기 살을 찌르면서, 옛 사람은 도를 위해서라면 밥도 안 먹고 잠도 자지 않았다고 하는데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 라고 하였다 한다. 옛 사람은 석회로 테두리를 그려놓고 깨치지 못하면 한 발자국도 그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제멋대로 놀아제껴 법도를 따르지 않으면서 그것을 걸림 없는 공부라 하고 있으니 매우 가소로운 일이다.
40. 얻어진 경계에 집착하지 말라
참선하는 중에 몸과 마음이 거뜬해지거나 혹은 화두를 이해했을 때 그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나 참산은 당시 뱃사공 덕성 스님은 종적이 없어졌다 는 화두를 들고 있었는데, 하루는 [전등록]을 읽다가 조주 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부탁한 말씀인 3천리 밖에서 사람을 만나거든... 대목
(조주스님에게 한 스님이 떠나겠다고 인사하니 스님은 이렇게 당부하셨다. 부처님이 계신 곳에도 머무르지 말고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은 얼른 지나가거라. 그렇게 해서 3천리 밖에서 사람을 만나거든 이 소식을 잘못 들먹여서는 안된다...) 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메고 있던 푸대를 끌러 천근 짐을 내려놓은 듯하였다. 그때 나는 확실하게 깨쳤다고 생각하였는데 나중에 보방 스님을 만나게 되자 나의 깨달음이란 것이 마치 네모난 나무를 둥근 구멍에 맞추려는 격으로 터무니없어 비로소 부끄러운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깨달았다고 생각한 다음에 큰 선지식을 만나지 않았다면 비록 경안은 얻었을지 모르나 끝내 깨닫지는 못했을 것이다.
보방스님은 이 노래를 지어 주면서 나를 격려하였다.
공(空)으로 공을 밀쳐내니 그 공(功) 더없이 크고
유(有)로 유를 쫓아내니 덕이 더욱 오묘하다
가섭이(자기 마음에 맞는 대로) 두타행에 안주했다고 하는
비난은
편안함을 얻은 곳에서 편안함을 잃는다는 말이네
이 게송은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내딛게 하는 말씀으로 선을 공부하는 납자들은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나는 납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보방스님에게서 유(有)와 공(空)을 긍정하지 않는 뜻을 터득하고 나서부터는 응용(수용-受用)이 무궁하였다.
41. 도리를 따져 이해하려 들지 말라
참선할 때는 도리를 따져서 이해하려 들어서는 안되니, 오직 딱딱하게 참구해 나아가야 비로소 의정을 일으킬 수 있다. 만약 도리를 따져 이해하려 든다면 이것은 무미건조한 껍데기일 뿐이니, 그 결과는 비단 자기의 생사대사를 확철대오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의정을 일으키는 일조차 못할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릇 속에 담긴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나, 사실 그 속에 담긴 것은 그가 지목하는 물건이 아니다. 그는 아닌 것을 옳다 하고 있으니 의정이 생겨날 수가 없다. 비단 의정이 생겨나지 않을 뿐 아니라 저것을 이것이라 하고 이것을 저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착각하고 있다면 그릇을 열고 한번 몸소 그 속을 보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도 그 속에 담긴 것을 가려
내지 못할 것이다.
42.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도라는 생각에 빠지지 말라
참선할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도(道) 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되고, 오직 이 도리를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뜻을 굳게 세워야 한다.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바로 도라는 생각에 빠지면 일생 동안 그저 아무 일없는 놈 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가사 속의 생사대사는 끝내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는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찾음과 같아서 확실하게 찾았으면 비로소 일이 끝나지만, 확실히 찾지도 못한 채 무사안일에 몸을 맡겨 찾아보려는 의지조차 없다면 설사 잃은 물건이 나타나더라도 빤히 보면서도 잘못 알고 지나쳐 버리게 되니, 이것은 그에게 찾으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43. 단번에 깨치려고 하지 말라
참선할 때에는 번갯불 부싯돌처럼 반짝하는 사이에 깨치겠다는 마음을 먹어서는 안된다. 비록 빛이 문 앞에 번득거릴 때 반짝하고 보이는 것이 있었던 없었던 간에 거기서 무엇을 건져낼 수 있단 말인가? 요는 착실히 실천해 가면서 직접 자기 눈으로 한 번 확인해야만 비로소 제대로 되었다 할 것이다. 만약 진득하게 하여 뜻대로 되어간다면 맑은 하늘 밝은 해 아래 잃었던 부모를 만난 듯하리니, 세상에 이보다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44. 사유와 판단을 주의하라
화두를 들 때에는 의식 속에서 알음알이를 내어서는 안된다. 따져보고 판단하는 등의 일은 공부를 조금도 제대로 되지못하게 하고 의정을 일으킬 수도 없게 한다. 그러므로 알음알이 라는 네 글자는 바른 믿음과 바른 수행을 장애하고 아울러 도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로막는다. 그러므로 납자들은 그것을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의 원수 집안처럼 대해야 한다.
45. 화두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화두를 들 때에는 화두 표면상에 나타난 의미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만약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런 납자를 이른바 얼굴만 멀쩡한 바보 라고 하니, 마음을 참구하는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오직 모름지기 의정을 일으키고 철저하게 아무 곳도 고개 끄덕일 곳이 없게끔 해야 한다. 또 아무데도 고개 끄덕일 곳 없는 사람도 공중누각이 이리 저리로 다 뚫린 것처럼 걸림이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적을 자식으로 알고 하인을 신랑인 줄로 착각하는 꼴이 된다. 옛 큰스님께서도 당나귀 안장자루를 아버지 턱뼈라고 부르지 말아라 하셨으니 바로 이 뜻이다.
46. 남의 설명을 기대하지 말라
참선할 때에는 남이 다 설명해 주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만약 남이 설명해 준다고 해도 그것은 다른 사람의 도이므로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다.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묻는데 오직 길만 가르쳐 달라고 해야지 거기다가 서울 소식을 물어서는 안되는 것과 같다. 그가 낱낱이 서울 소식을 말로 전해준다 해도, 그것은 그 사람이 본 서울이지 길을 물은 사람이 직접 본 서울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기는 힘써 노력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다 설명해 주기를 바란다면 바로 이런 꼴이 되는 것이다.
47. 공안만을 참구하라
참선할 때 오직 한 생각으로 공안만을 참구하지 않고 다른 생각이 오락가락하면 도(道)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런 식으로 미륵이 하생할 때까지 계속해 보았자 역시 도와는 아무 상관도 없을 것이다.
잡념이 일어날 때 왜 아미타불을 염(念)하지 않는가. 염불은 참선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것은 불필요한 생각을 없애줄 뿐만 아니라 하나하나 화두를 드는 데도 무방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개에게서 불성이 없다 는 화두를 들 때라면 그 없다 는 말에 달라붙어 의정을 일으키고, 또 뜰 앞의 잣나무니라 하는 화두를 들 때는 그 잣나무 에 대하여 의정을 일으키고, 만법이 하나로 귀결되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귀결되는가 라는 화두를 들 때는 그 하나는 어디로 귀결되는가 에다가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일단 의심이 일어나면 시방세계 모두가 하나의 의심덩어리가 된다. 그리하여 부모에게서 받은 이 몸과 마음을 잊고 온통 의심덩어리뿐이다. 시방세계가 있는지, 또는 어디까지가 내 자신이고 어디까지가 바깥 세상인지도 모르는 가운데 의심만이 물밀 듯 다가온다. 그러다가 대다무 태를 맨 물동이가 탁 터지듯 의심덩어리가 풀리고 나면 다시 선지식을 만나게 되었을 때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생사대사는 다 마친 뒤라 비로소 박장대소하게 된다. 그리고 난 뒤 그때까지도 공안을 천착하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면 마치 말 배우는 앵무새와 같으니 무엇 때문에 거기에 섞이겠는가?
48. 바른 생각을 지녀 사견에 빠지지 말라
참선할 때에는 잠시도 바른 생각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만약 참구하는 한 생각을 잃어버리면 반드시 딴 길로 빠져들어 망망히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예컨대 어떤 납자가 오직 깨끗한 곳에 앉아 맑고 고요하여 티끌 한 점 없는 것을 좋아하며 이것만이 공부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사람을 바른 생각을 잃어버리고 맑고 고요한 데 빠진 사람 이라고 부른다. 혹 어떤 사람은 말로 도리를 설명해내며 동정(動靜)의 방편을 짓는 것을 공부라고 인정하는데, 이런 사람을 바른 생각을 잃어버리고 알음알이를 인정하는 사람 이라고 부른다.
또 어떤 사람은 망심을 가지고 망심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억지로 내리누르는 일을 공부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이를 가리켜 망심으로 망심을 누르는 납자 라고 한다. 이런 경우는 마치 풀 위에 돌을 올려놓는 것과 같으며 또한 파초껍질을 벗겨내는 일과 같으니 한 겹을 벗겨내면 또 한 겹이 생겨나서 끝날 날이 없을 것이다.
혹 어떤 납자는 자기 몸과 마음이 허공과 같을 것이라고 상상으로 관(觀)하여 담벼락처럼 아무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데, 이런 사람도 바른 생각을 잃은 납자 라고 부른다. 현사 스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음을 단단히 굳혀 단속하고 모든 현상을 공으로 귀착시키려 하면 이런 사람은 단견[공무(空無)]에 떨어져 혼만 흩어지지 않았지 사실 죽은 사람 이 되고 만다.
이상은 모두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오는 병통이다.
49. 바른 생각으로 간절하게 참구하라
참선할 때 의심이 일어났거든 이제는 그것을 깨부숴야 한다. 그 의심이 깨어지지 않았을 때라면 바른 생각을 굳건히 하고 용맹심을 내어 간절, 또 간절하게 참구해야만 비로소 제대로 되어간다 하겠다.
경산 대혜 스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대장부가 일대사인연을 결판내려 한다면 모든 세상일을 돌보지 않고 조급한 마음으로 꼿꼿하게 앉아서 남 생각에 끌려가지 말고 평소부터 품어 오던 자기 의심을 붙들어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치 멀쩡한 사람이 누가 돈이 없어졌다고 자기를 잡으러 쫓아오는 상황에서, 갚아줄 돈 한 푼 없고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할까봐 도망가듯 해야 한다. 그리하여 급할 것도 바쁠 것도 없는 데서 다급해지고, 큰일날 것도 없는 데서 무슨 일이나 난 듯 참구해 나가야만 비로소 이 생사문제를 해결해 나갈 자격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