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선(參禪) 수행
숨 한 번에 모든 불국정토(佛國淨土)가 거기 있다.
숨이 천지창조이며 생명이며 삶이다. 오직 지금 그대가 살고 있음을 의식하라 ! 그 의식의 챙김이 깨어 있으면 그대는 행복할 것이다.
불법은 “darista dharma sukka vihara“ 지금 행복하게 머무는 것‘이며 ‘Madithaion is art’ 명상은 예술이다‘라는 틴낫한 스님은 ‘마음챙김의 에너지가 진여(眞如)이며 일심(一心)’이라 했다
오직모를 뿐! only don't know
현대적인 참선은 ‘불법을 바로 알고 지금 여기서 스스로 그러한 생명작용 이며 삶’이다.
1) 참선수행의 목적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찾는 열반의 삶이며 나아가 가족과 이웃 모든 것들과 평등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불교의 핵심 정신인 이고득락(離苦得樂)이며 생사해탈(生死解脫)과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본질이다.
또한 부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라 불법의 이치를 전하러 온 것이며 그 이치를 바르게 알고 수행하여 스스로 구원됨을 자각(自覺)하게 하는 종교인 것이다.
우리는 불법의 대의를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너무 어렵게 가르치고 있다.
왜 그럴까하며 법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법의 참된 이치를 적확하게 안다면 불법은 너무나 쉽다. 혹자는 세수하다 코만지는 만큼 쉽다고 한다. 하지만 바르게 알지 못하면 수 십 년을 앉아서 참선을 한다 해도 헛일이다.
또한 불법은 지식이나 뜻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진리가 아니라 불법의 대의를 수행을 통해 바로 깨달음으로 불법과 하나로 계합되는 진리인 것이다.
8만4천의 방대한 경전이나 삼세제불과 수많은 역대 선지식들도 글과 말을 통해서는 오직 교학(敎學)적인 방편으로 불법의 진리를 설명할 뿐이다.
그래서 불법은 불립문자(不立文字)이며 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으로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고 스스로 수행(修行)을 통해 그 대의를 몰록 깨달아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법의 교학(敎學)과 수행(修行)의 이치를 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늘 꿈속에서 살고 있다. 꿈속에서 살면서도 꿈속임을 모르고 사는 것이 중생이다. 우리는 이러한 꿈에서 깨야 한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꿈 깬 것인가?
직접 꿈을 깨보지 않고는 절대 설명이 되지 않는다.
흔히들 경험 혹은 체험으로 말하는데 사과의 맛을 아무리 잘 설명해도 직접 먹어보지 않고는 맛을 느낄 수가 없듯이 불법의 대의도 그와 같다.
깨달음을 아무리 구구절절이 설명해도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불법의 대의를 알 수가 없다. 그렇듯 참선(參禪)수행이란 직접 몸으로 체득하여 스스로 체험을 통할 때 진정한 깨달음이라 한다. 물론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마음공부를 하고 선(禪)공부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생사해탈의 일대사 인연에 귀의 하는 일이다.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꿈속에서 살다보니 꿈같이 모르고 잊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시작이 반이라고 지금 초발심을 내고 깨달음을 증득하여 대 자유인이 되자.
2) 선(禪)의 유래
⓵ 인도 선(禪)의 발생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신집중의 수행(修行)방법. 인도의《우파니샤드》에 이르러서는 초자연적 신통력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요가가 실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요가는 심사(深思)·묵상(默想)에 의해 마음의 통일을 구하는 방법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의 자유를 얻으려는 고행(苦行)사상과 결부되어 특이하게 발전하였다.
석가모니가 출가한 후 처음에는 두 선인에게서 당시의 최고의 사마타 선정을 배웠지만, 선정은 육체에 고통을 주어 사후의 해탈(解脫)을 구할 뿐, 현세에서의 해탈을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이를 버리고 홀로 명상에 잠겨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상황을 입증해준다. 즉 선정(禪定)은 신심일여(身心一如)의 입장에서 일상생활 속에 해탈의 생활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설은 원시불교 이래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되어 왔다.
불교인이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삼학(三學: 戒·定·慧, 法身‘普身’化身, 佛‘法’僧 )
사무량심(四無量心: 慈·悲·喜·捨)
사념처(四念處: 身·受·心·法)
사성제(四諦: 苦·集·滅.道)
팔정도(八正道: 正見·正思·正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 등이 모두 선(禪)수행 방법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선정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원시불교는
사선(四禪:초선·제2선·제3선·제4선), 팔등지[八等至:사선+四無色定(空無邊處·識無邊處·無所有處·非想非非想處)], 구차제정(九次第定:사선+사무색정+滅盡定)을 들고 있다.
부파(部派)불교에서는 선정을 학문적으로 조직·해설하고 있는데, 또한 현실생활로부터 격리된 승원(僧院) 중심의 선정이 행해지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고, 이타(利他)의 정신에 입각한 행위로서의 선바라밀(禪波羅蜜)이 강조되어 선정이 능동적인 것으로 되었다. 이러한 점은 지(止)와 관(觀)이 동시에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잘 나타나 있다.
원래 '지'는 선정을, '관'은 지혜, 즉 반야(般若)를 의미한다. 그러나 특히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진여연기(眞如緣起)에 근거한 자리(自利)·이타(利他)를 삼매(三昧)의 체험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는 자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며, '관'은 이타·교화의 활동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전자에서는 소승적 선관을 답습하면서도, 후자에서 생사의 고해에 빠진 중생을 관조하여 대비관(大悲觀)을 갖고, 그들을 구제하려는 서원(誓願)을 세운다. 한편, 대승불교에서는 선정의 단계를 여러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외도선(外道禪)·성문선(聲聞禪)·보살선(菩薩禪),
《능가경(楞伽經)》의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외도·성문·연각의 선)·관찰의선(觀察義禪:法無我, 반야경의 空, 즉 객체는 모두 실체가 없다는 의미를 관찰하는 선)·반연여선(攀緣如禪:모든 분별을 떠남)·여래선(如來禪:일체중생의 구제에 전념하는 선정)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의 외도선·범부선(凡夫禪)·소승선·대승선·최상승선(最上乘禪) 등으로의 구분이 그것이다.
⓶ 중국의 선(禪)의 전래
이와 같은 대승불교의 선사상이 중국에 전래되어 새로운 중국사상으로서의 선사상이 형성되어, 현재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사상이 완성되었다. 명상하는 수행방법으로서의 선이 인도에서 중국에 전해진 것은 후한시대(後漢時代:25∼220)로 보이지만, 북위시대(北魏時代:386∼534)의 달마(達磨)에 의해 전해진 선은《능가경》에 의한 이타적·능동적 선이었다.
달마의 사상은 그의 저서인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나타난 바와 같이 벽관(壁觀)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객진(客塵:번뇌)과 작위적 망념(作爲的妄念)이 침입하지 않는 것을 벽에 비유한 것으로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직관(直觀)한다는 것이다.
석가의 계통은 불타의 제자 마하가섭(摩訶迦葉) 이래 28조가 상승되어 달마에 이르렀는데, 중국에 전래되어 달마 → 혜가(慧可) → 승찬(僧璨) → 도신(道信) → 홍인(弘忍) → 혜능(慧能)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선은 중국인의 강한 현실중심주의 위에 지관·여래선 등의 영향으로 일상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하는, 이른바 행(行)·주(住)·좌(坐)·와(臥)의 생활선(生活禪)으로 전개되었다.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은 이러한 입장에서 생겨난 것이다. 또한 선체험을 설명하기 어려운 점, 개별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중국 선종에서는 사제(師弟)의 관계가 매우 중시되었다.
그리하여 조사(祖師)의 권위는 어떤 경우 여래(如來) 이상으로 중시되어 조사선(祖師禪)으로 불리기까지 하였으며, 조사의 언어·행동을 금과옥조로 하고,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좌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이것이 정형화(定型化)되어 많은 공안(公案, 또는 話頭)을 낳았는데, 이를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선은 이와 같이 그 원류는 인도이고 인도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꽃은 중국에서 피웠다.
선사상은 중국사상과 접촉하여 송학(宋學)과 같은 철학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었으며, 예술·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⓷ 한국의 선(禪)의 전래
한국에 불교의 큰 선맥을 보면 신라의 원효대사에서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에 이어 조선의 사명대사와 근세의 경허스님에서 오늘의 한국 선불교를 꽃 피우고 있다. 선불교는 처음 들어온 것은 신라 말과 고려 초기로 당시 당나라에서 유학한 구법승들이 중국에서 대부분 혜능 선사의 제자들에게 선법을 받아왔고 이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 바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그들 중에는 가지산문의 개조인 도의(道義)가 혜능 선사의 4세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선사에게 선법을 받았고, 또 도윤(道允)이 남전보원(748~834)을 찾아가 예를 올리자 남전이 탄복하면서 ‘선종의 법인(法印)이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고 탄식했다. 이것은 중국선의 법맥이 우리나라에 선종의 중심지가 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고려시대에 이르자 이 구산선문을 통칭하여 ‘조계종曹溪宗’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도의(道義)선사가 조계종의 종조이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수행법 중에서 참선수행은 그 핵심을 이룬다. 더구나 불교의 핵심 사상은 원래 이론이나 사상이 아닌 수행법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선의 사상이나 역사에 대한 책은 많은데 정작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드물고, 선법문을 하는 분은 많으나 구체적으로 방법을 제시하며 체계적으로 지도하고 있는 곳은 많지 않는것 같다. 그래서 불법의 교학적인 기본 지식을 습득하면서 참선의 이론과 실제적인 참선을 통해 구체적이고 다양한 방법들을 체험해 본다.
3) 선(禪)이란
선은 존재의 근원을 통찰하고 나와 우주의 참모습(眞面目)을 자각하여 참된 주체을 확립하는 수행이다.
참선(參禪)이란 참구한다. 참여한다는 의미의 참과 선이라는 말의 합성어가 참선이다.
선(禪)은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참선(參禪) 또는 선정(禪定)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선(禪)은 인도(印度) 말인 범어(梵語)로 하면 디야나(Dhyana)라고 ‘고요함‘을 의미 한다. 한문으로 음역(音譯)하면 선나(禪那)라 하고, 일본사람들은 '젠나'의 '나'를 생략하여 그냥 '젠(zen)' 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선(禪)으로 ’깊이 사유함‘으로 참선으로 통용된다. 일반적으로 참선(參禪)은
화두를 일념으로 참구하는 것으로 불교의 대표하는 수행법이다. 마음은 정심(定心)이므로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정은 범어 삼마디(samadhi)의 음역 삼매, 삼마지, 삼마야, 삼마제 등을 의역한 말로 마음이 고요하여 산란하지 않음을 말한다. 삼매는 다른 말로 등지(等地)라고도 하는데 평등한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을 말한다.선(禪)을 뜻으로 풀이하면,
1,기악(棄惡)- 선(禪)을 행하면 악을 버리고 나쁜 짓을 자연적으로 안한다는 말이다. 선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몸도 마음도 정화되어서 나쁜 짓을 못하게 된다.
2,공덕총림(功德叢林)-총(叢)은 떨기 총으로, 무더기로 많이 있다는 뜻으로 공덕이 하나 둘이 아니라 마치 숲 모양으로 한도 끝도 없이 많은 것이 공덕총림이다.
곧, 선을 닦으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이 된다는 말이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다 아는 것이고, 자기 번뇌를 다 알고 끊어 버리는 신통(神通)도 얻고, 천지우주를 두루 통관하는 안목도 얻고, 우주만유의 모든 음성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청각도 얻고, 또는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통도 얻고, 그와 같이 모두를 알 수 있고 모두를 할 수 있는 그런 자재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 공덕총림 이다.
지금 수행자들이 그런 신통을 못하는 것은 선을 바르게 닦지 못 해서 그런 것이며 바른 선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우리 생리(生理)나 심리(心理)가 정화(淨化) 되어서 악을 범(犯)할 수 없게 된다. 참선을 많이 했다고 하는 분들이 음식도 함부로 먹고 계행을 함부로 파계(破戒)하는 것은 참선을 많이 못한 탓이며, 참선을 많이 하면 모든 계행은 저절로 지켜지며 지혜와 덕성(德性)이 두루 조화롭게 성취하여 우리 인격완성의 가장 최고도의 수행방법이다.
2, 참선 수행 종류와 요건
1) 수행의 종류
⓵ 사마타(samatha)-지(止)수행
⓶ 위빠사나(vipassanā)-관(觀)수행
⓷ 조사선(祖師禪)-직지인심(直指人心)
⓸ 간화선(看話禪),공안선(公案禪) 화두선(話頭禪) … 참구적(參究的)
⓹ 묵조선(默照禪) … 의지적(意志的)
⓺ 염불선(念佛禪) … 지, 정, 의(知, 情, 意)의 조화적(調和的) 간화선 수행
⓵ 사마타(samatha)-지(止)수행
사마타 수행은 멈춤(止. 선정) 수행으로 무엇을 멈추는가하면, 감각적 쾌락, 악의, 혼침과 게으름, 들뜸과 회한, 회의적 의심이라는 다섯 장애에 휩쓸리는 것을 멈추고 마음에 번뇌가 없는 심청정을 얻는 수행이다.
일상생활이나 수행 중에 현재를 놓치게 하고 마음이 과거 미래로 달리면서 우리를 번뇌에 휩쓸리게 하는 것이 이 다섯 가지 장애이다. 이들이 일어나면 우리는 번뇌에 휘둘리게 된다. 이 다섯 장애는 매 순간 여섯 감각기관이 촉하는 대상에 대하여 일어나는 내 자신 속의 탐진치의 마음의 작용이며 사마타 수행은 이 다섯 장애를 우선 멈추게 해서 마음에 번뇌가 없게 한다.
사마타 수행은 불, 법, 승, 자비희사, 죽음에 대한 명상, 10가지 까씨나(원판), 몸의 부정(不淨)함 등등으로 40가지 사마타 수행의 대상이 있다.
이 중에서 수행자가 한 가지 수행 주제를 스승으로부터 선택받아 오직 그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면 어떤 원리로 다섯 장애가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청정해질까?
그 기전은 한 순간에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만 아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수행자가 선정수행의 주제인 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는 동안 번뇌가 일어날 틈이 없다. 그래서 수행자의 마음이 고요함, 안정, 평온, 집중 등의 상태에 도달하여 번뇌가 없는 행복을 느낀다. 이것을 색계 1선정이라고 한다. 색계 선정으로 마음에 번뇌가 없는 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고 한다. 결론은 사마타 수행은 마음의 안정, 고요함, 집중을 얻는 수행이다.
우리가 염불을 할 때 염불삼매에 빠지면, 지금 관하는 부처님의 상(想. 관념. 빤냐띠)이라는 대상에 오직 마음을 모아 깊은 집중(근본 삼매)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염불수행으로 얻는 것은 마음의 집중, 고요함, 평온이다. 그러나 이 선정력은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깨진다. 그럼 다시 번뇌가 일어난다.
⓶ 위빠사나(vipassanā)-관(觀)수행
* 위빠사나 수행은 관(觀. 통찰. 지혜)수행이다. 무엇을 관하는가 하면 현재의 몸과 마음(오온)이다. 그래서 오온의 고유한 특성과 조건적 특성과 일반적 특성(무상, 고, 무아)을 통찰하는 수행이다. 즉, 수행자가 현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에 대하여 어떤 번뇌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을 하여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법으로 얻는 해탈은 모든 번뇌(탐진치)를 지혜로 해탈한다 해서 혜해탈(慧解脫)이라고 한다.
위빠사나는 붓다가 찾아내시고 수행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하신 수행법이다. 붓다가 출현하기 전에는 세간의 모든 수행법은 다 사마타 수행이다.
부처님께서도 처음 출가하셔서 그 시대에 있는 모든 수행법을 다 해보셨다. 그것은 모두 사마타 수행이었다.
처음에는 색계 선정 수행을 하시고, 6년간 고행을 하시고도, 번뇌를 해결하지 못해 수자타의 유미죽 공양을 받으시고,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세세생생 동안 쌓으신 바라밀 공덕이 완전하게 무르익어서 스스로 스승없이 위빠사나라는 위없는 수행법을 찾아내셨다.
그리고 일체를 통찰하신 위빠사나의 지혜로 모든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는 누진통을 얻으시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셨다. 이 순간 부처님은 아라한과 동시에 붓다가 되신 것이다.
이렇게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처음에는 오온의 고유한 특성과 조건적 특성을 알고, 더욱 발전하여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체험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열반을 얻는 데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1) 먼저 사마타를 닦고 색계 선정상태에서 위빠사나로 넘어와서 열반에 이르는 방법
2) 먼저 위빠사나 수행을 하다가 마지막에 깊은 집중으로 사마타 수행을 해서 열반에 이르는 방법
3) 먼저 사마타를 닦고, 위빠사나를 닦고, 다시 그 다음 단계의 사마타를 닦고, 그 다음 단계의 위빠사나를 닦는 방법으로, 두 수행법을 병행하여 열반에 이르는 방법.
4) 처음부터 사마타 수행 없이 위빠사나 수행으로 열반에 이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순수 위빠사나라고 한다.
1)과 3)의 경우는 사마타 수행으로 마음에 다섯 장애가 없는 사마디(집중. 선정) 상태에서는 현재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가 쉽고 그래서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할 수 있다.
이것은 사마타 수행을 먼저 닦고 위빠사나 수행으로 넘어와 수행대상과 집중방법을 달리하여 그 결과로 정(定)에서 혜(慧)를 얻는 것이다. 이런 수행방법으로 해탈에 이르신 분은 심해탈과 혜해탈을 다 구족하신 분으로 양면 해탈이라고 한다.
4)의 수행법은 순수 위빠사나 수행으로, 사마타 수행단계가 없으므로 처음 수행을 할 때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다섯 장애들과 부딪친다. 그러면 이 다섯 장애를 다 알아차릴 대상인 법으로 받아들여 반응하지 않고 그들의 성품을 본다. 그들은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가 알아차림이라는 조건에 의해 소멸한다는 법의 성질을 본다.
이렇게 다섯 장애를 친구삼아 스승삼아 알아차려가다 보면 알아차리는 힘이 쌓이고, 그래서 매사에 탐진치를 덜 일으키고, 그 결과로 마음의 안정과 오온의 생멸을 볼 수 있는 힘을 기른다.
위빠사나는 오직 현재의 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 쌍으로 생멸하면서 이어지는 찰나 삼매(찰나집중)를 유지하여 다섯 장애를 극복한다. 그런 뒤 오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12처를 알아차리고, 7각지를 알아차리고 8정도 사성제를 알아차려 열반에 이른다. 이렇게 4)의 방법으로 열반에 이른 경우에는 혜해탈자라고 부른다.
사마타 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이나 처음에는 모두 다섯 장애가 일어나므로 그들을 극복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일단 극복을 하면 선정을 얻거나, 지혜를 얻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마하시 방법은 사마타 수행 없이 처음부터 위빠사나 수행으로 시작하는 순수 위빠사나 방법으로 지도한다.
이 방법이 현대 생활에 잘 접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모두 알아차릴 대상이고, 법
이며, 생활 속에서 번뇌에 휘둘리지 않는 힘을 키우는 수행법이 4)번의 순수 위빠사나라고 생각한다.
사마타 수행으로 일정 수준의 선정력을 얻으려면 오직 자신의 수행 주제에 집중만 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데 이것은 출가 수행자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염불, 간경, 절, 100일 기도 등등은 모두 삼매를 얻을 수 있는 사마타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대상에 깊이 몰입하는 집중을 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물론 염불참선을 통해 선정을 얻고 깨달음을 얻는 공덕도 있다.
이미 기도나 염불로 집중력이 있는 분들이 마음을 열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시면 쉽게 자신의 탐진치가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고, 그래서 탐진치를 놓는 법을 알게 되며, 또 알아차림으로 몸과 마음의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어 위빠사나의 지혜가 더 빨리 나타날 수 있다.
또 한가지 사마타 수행으로 얻은 마음의 고요는 일상에서 잘 깨지지만,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얻은 지혜는 일상에서도 그 힘을 발휘하여 번뇌로부터 막아준다.
위빠사나의 지혜는 자기가 닦은 만큼의 항상 자기를 따라다니며 수행자를 번뇌로부터 보호한다. 그래서 위빠사나의 통찰 지혜만이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는 부처님의 대념처경 말씀을 이해하게 된다.
a,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의 차이점
첫째 수행대상이 다르다.
두째 대상에 집중하는 방법이 다르다.
세째 수행으로 얻는 결과가 다르다.
사마타 수행의 대상은 관념(想)이다. 그리고 대상과 하나가 되는 깊은 집중을 한다. 그래서 얻는 것이 마음의 안정. 심청정(心淸淨)이다. 그리고 수행의 과보는 색계(色界)천상이나 무색계(無色界) 천상으로 윤회(輪廻)한다.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현재의 오온(五蘊)이다. 그리고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보는 찰나 집중(集中)을 한다. 그래서 얻는 것이 통찰(通察) 지혜(知慧)이다. 그리고 수행의 과보는 윤회를 벗어나는 완전한 열반(涅槃)이다.
⓷ 조사선(祖師禪)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을 표방하는 육조(六祖) 혜능(慧能) 하의 남종계의 선, 즉 남종선(南宗禪)을 말한다. 마조(馬祖)의 즉심시불(卽心是佛)과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는 조사선의 기본 사상이 되며, 임제(臨濟)에 이르러 조사선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이 조사선은 일반적으로 중국선(中國禪)을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이고 있는데, 조사(祖師)란 선종에서 불(佛)에 대신하는 이상적인 인격자이다.
⓸ 간화선(看話禪),공안선(公案禪) 화두선(話頭禪) … 참구적(參究的)
간화선(看話禪) 또는 공안선(公案禪)은 공안(公案)을 공부하고 이를 화두(話頭)로 하여 본성을 구명하려 하는 선(禪)이다. 간(看)이란 본다는 뜻이며, 화(話)는 화두를 말한다. 화두란 '말 보다 앞서 있는 것' 또는 '언어 이전의 소식'이란 뜻이며, 공안이란 '누구든지 성불할 수 있는 방법'이란 뜻이다.《제행무행경》에 이르기를, "부처는 보리도 보지 않고 또한 불법도 보지 않나니,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불도를 이룬다" 하였다. 초조(初祖)인 보리달마(菩提達摩) 이래 중국의 선종은 인도의 선정(禪定)과는 매우 다른 독특한 양식의 수행법을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곧바로 자기의 마음으로 향하여 그 본성을 보아 불타를 이룬다"(直指人心見性成佛)는 것이다. 보리달마 이후 오조(五祖) 홍인(弘忍)에 이르기까지는 단일한 계보로 이어왔으나, 이후 점수(漸修)를 주장하는 신수(神秀)의 북종선과 돈오를 주장하는 혜능(慧能)의 남종선으로 분파되었다.
간화선은 남돈선에서 파생한 것이며 남송(南宋) 초기, 임제종(臨濟宗)의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는 묵조선(默照禪:화두를 갖지 않은 채 모든 생각을 끊고 행하는 참선법)과 이전의 선행(禪行)에 대한 비판 위에서 간화선을 주창하였다.
대혜는 그러한 간화선을 조주(趙州)의 ‘무(無)’ 자 화두를 통해 가르쳤고, 우리나라는 고려의 지눌(知訥)이 대혜의 간화선을 받아들였다.
지눌의 사상은 선(禪)과 교(敎)가 복합된 다양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그는 ≪간화결의론 看話決疑論≫을 통하여 간화선사상을 천명하였다. ≪간화결의론≫에서 선과 교의 대비를 통해 간화선의 우수함을 말하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 라 선의 사상적 맥락이 되고 있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원류를 제시하였다. 지눌은 활구 화두로서, 특히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중요시하였고, 이 무자 화두는 불덩어리 같아 불법의 알음알이와 나쁜 지식을 파하는 연장이라고 하였다.
오직 활구를 참구할 때만 깨달음은 보장되어 있다고 본 것이며, 말 가운데 말이 없으면 활구이고, 말 가운데 말이 있으면 사구(死句)라고 규정지었다. 즉, 지눌은 ‘무’자를 들어 공부하되 간절한 의정(疑情:의심)을 끌고 나갈 뿐, 어떤 정식(情識:알음알이)에 빠져서도 안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활구를 참구할 것이며 사구를 참구하지 말라. 활구에서 깨달으면 영겁토록 잊지 않고 사구에 빠지면 자신조차 구하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간화선을 들어 공부하는 길에는 참의문(參意門)과 참구문(參句門)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참다운 공부를 하는 사람은 마땅히 참구문에 의지해야 할 것이나 근기가 하열한 관행자(觀行者)에게는 참의를 거쳐 참구에 들어가라고 가르쳤다. 참의는 화두를 참구함에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이며, 참구는 생각을 초월하여 철저히 사무침을 말한다.
지눌의 간화선은 그의 제자 혜심(慧諶)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혜심은 <구자무불성화간병론 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지어 간화선을 더욱 깊이 있게 펴나갔다. 지눌이 삼문(三門)을 열어 선·교를 융섭하려 한 데 대해 혜심은 오로지 간화선법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간화선은 혜심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혜심은 간화선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십종병(十種病)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여 공부하는 사람을 가르치고 있으며, 조선 초기의 지엄(智儼)은 간화선을 확립시켰다.
그 뒤 휴정(休靜)은 ≪선가귀감≫에서 간화선을 경절문사상(徑截門思想)과 일치시켰으며, 그러한 맥은 근대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경허(鏡虛)와 만공(滿空), 그리고 현재의 선원(禪院)에서도 그 전통을 잇고 있다.
우리 나라의 선 수행자들은 간화선을 삶과 지혜의 으뜸가는 목표로 삼고 있으며, 간화선을 통한 활구참선이야말로 최상의 근기(根機:깨달을 수 있는 능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위없는 대도(大道)로 보고 있다.
선(禪)수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깨달음은 수단이며 목적이 될 수 없다. 한마디로 행복 추구이고 생사해탈이다.
⓹ 묵조선(默照禪) … 의지적(意志的)
'묵'은 침묵한 채 마음을 오롯하게 하여 좌선(坐禪)하는 것을 뜻하며, '조'는 지혜로써 본래 깨끗한 마음의 성품을 비추어보는 것을 뜻한다. 실상(實相)은 무상의 상(相)이고, 진심(眞心)은 무심(無心)의 심(心)이며, 진득(眞得)은 무득(無得)의 득(得)이고, 진용(眞用)은 무용의 용(用)이라고 하여, 굳건하게 자리를 정하고 앉아 모든 잡생각을 비워버리는 태도로 침묵한 채 고요히 비추어볼 뿐이며, 반드시 큰 깨달음을 얻는 것을 기약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다만 무소득·무소오(無所悟)의 태도로 좌선할 것을 주장했다.
이 선풍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임제종의 대혜 종고 선사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으며, 묵조사선(默照邪禪)·무사선(無事禪)·고목사회선이라고 폄칭되었다. 이것은 화두가 없이 그냥 앉아서 자기 마음을 비춰보는 것이다. 어떤 문제도 설정하지 않는다. 묵조선을 하는 분들은 대체로 단전주(丹田住)라, 아랫배에 힘을 두고서 공부를 한다.
⓺ 염불선(念佛禪) … 지, 정, 의(知, 情, 意)의 조화적(調和的) 수행
우리는 염불선과 그냥 염불과의 구분을 해야 한다. 구분 잘못 하면 이것도 혼동되어 버린다. 지금, 어느 큰스님들 말씀도 '염불은 그저 하근기(下根機) 중생이 한다. 염불은 근기 낮은 분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는 분도 있다. 따라서 그런 말씀을 들은 분들은 '염불이 무슨 선(禪)이랴' 이렇게 또 말한다.
그런데서 그냥 일반 염불과 염불선의 한계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러나, 자기 자성(自性), 자기 마음의 본질이 부처고 또는 우주가 바로 부처요. 우주가 바 부처를 자기 마음 밖에서 구하고, 극락을 자기 마음 밖의 저만치 십만억 국토 밖에서 구하는 염불은 방편염불(方便念佛)이다.
참다운 염불이 '자기 마음의 본바탕이,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다 또한 동시에 우주가 바로 부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염불이 바로 염불선이다.
따라서 방편적으로 하는 즉, 자기 마음 밖에서 부처와 극락을 구하는 식이 아니고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 내 마음의 본바탕이 부처다'고 확실히 느끼고서 '극락 또한 내 마음 속에 있다' 이렇게 느끼고서 하는 염불은 염불선(念佛禪)이다. 청화선산의 염불선 사상연구에서 고영섭 교수는 “원효와 청화는 시대를 달리 살았지만 발보리심과 십념염불 및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통하여 일심 즉 유심의 정토와 안심 즉 순선의 정토를 이 땅에 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상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2) 참선수행의 기본요건
천태지관의 25방편을 근간으로 다섯가지를 갖춤(具五緣)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①지계청정(持戒淸淨)- 계를 지켜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계율은 모든 수행의 바탕으로 참선수행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②의식구족(衣食具足) - 옷과 음식을 갖추는 것이다. 수행자는 오직 굶주림과 추위만을 면할 뿐 사치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불편할 정도로 아예 갖추지 않는 것도 선수행을 방해한다. 따라서 최소한의 옷가지와 음식물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③한거정처(閑居靜處) -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한적함이라 하고, 산란하고 시끄러움을 멀리 피하는 것을 조용함이라 한다. 또한 마음속에 일이 없는 것을 한적함이라 하고, 마음속에 시끄러움이 없는 것을 조용함이라 한다. 몸과 마음이 한적하고 조용해야 곧 선을 닦을 수 있다.
④식제연무(息諸緣務) - 모든 인연 있는 일을 쉬는 것이다. 수행인은 세속의 일을 줄여 주변을 정리하고 생활을 단조롭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일을 할 때는 일에만 집중하고, 쉴 때는 몸과 마음을 확실히 쉬며, 사교모임은 줄이이는 것이다. 또한 외도의 경전이나 외전을 멀리하는 것은 물론 불전이라도 지식을 쫓아 거기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⑤근선지식(近善知識) - 참선수행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조건이다. 선지식에는 세가지가 있다.
첫째는 밖에서 보호하는 선지식으로서, 살림을 꾸리고 공양하여 수행인을 잘 보호하며 어지럽지 않게 하는 분이다.
둘째는 함께 행하는 선지식으로서 함께 같은 길을 가면서 서로 채찍질해주고 북돋아주며 서로 어지럽게 하지 않는 분이다.
셋째는 가르쳐 주는 선지식이니 내외방편과 선정의 법문으로 가르쳐 이익되게 하는 분이다. 모든 수행에 선지식이 필수적이지만 특히 참선수행에서는 선지식이 더욱 중요하다. 만공스님은 그 이유를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멸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으로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다." 라고 말씀하셨다
3, 간화선(看話禪)의 수행
1) 좌선(坐禪)
어떤 것을 좌선(坐禪)이라 하는가?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 니라.
어떤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다. 설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이니라. 그러나 다만 경계에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부딪쳐 곧 어지럽게 되나니, 모양을 떠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定)이니라. 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이 곧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定)이니,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하므로 선정(禪定)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정(定)과 혜(慧)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體)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用)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육조혜능
정과 혜는 통나무의 양 끝과 같이 나누기 어렵다고 했다. 특히 참선은 정과 혜를 함께 닦는 수행법이다. 이를 정혜쌍수(定慧雙修)라고 한다.
정(定)과 혜(慧)는 수행의 증득의 측면을, 지(止)와 관(觀)은 닦는 방법의 측면을 이르는 말로 이해되어 지관쌍수(止觀雙修)라고도 한다.
*정혜쌍수(定慧雙修)-선정과 지혜는 서로 따로 닦을 것이 아니라 병행되어 닦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정혜는 본디 계·정·혜의 3학으로서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인데, 후세에 선을 닦는 자가 선정에만 치우치고, 교를 공부하는 자는 혜학(慧學)에만 치우치는 폐단을 낳았다.
원래 교는 지식문과 이론문이고, 선은 실천문이다. 지식과 이론을 마음 닦는 방법에 대한 안내라고 보면, 선은 그것을 실천, 체험하는 방편이다.
고려의 보조국사(普照國師)는 선교상자(禪敎相資)의 정혜쌍수를 그 지도이념으로 하여 그릇된 폐단을 없애 올바른 깨달음을 얻도록 하였으며, 이것을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이라 표현하였다. 이 정혜쌍수는 보조국사 이후 우리나라 선종의 중요한 수행법이 되었다.
*지관쌍수(止觀雙修)-‘사마타(samatha)’와 ‘위빳사나(vipassanā)’는 불교 수행을 대표하는 술어이며 특히 상좌부 불교(초기불교)의 수행 체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핵심 술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두 술어는 일찍이 중국에서 각각 지(止)와 관(觀)으로 정착되었다.
그래서 지와 관을 고르게 닦을 것을 강조하여 지관겸수(止觀兼修,지관쌍수)로 정착되었고, 이것은 다시 선종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로 계승되었다.사마타는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고정시키고 고요하게 하는 삼매를 개발하는 수행(삼매, 定, samādhi)이며, 위빳사나는 유위제법[行]을 명상하고 관찰하여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수행(통찰지, 慧, pannā)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계신다.
고행고주고와고기 개응지관구행(若行若住若臥若起。皆應止觀俱行)。수행자는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 속의 모든 생활에서 모두 지(止)와 관(觀)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대승기신론소>
⓵ 좌선의(坐禪儀)
좌선을 할 때는 그 기초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뿌리가 깊을수록 나무가 잘 자라듯이 기본적인 좌선의를 갖추는 것은 꼭 필요한 기초를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제방선원에서는 남종(南宋) 휘종(徽宗)때 자각(慈覺)선사가 지은 좌선의를 규범으로 하여 좌선하고 있다. 아함경 말씀과 천태지관과 백장청규를 토대로 하여 좌선의 전통적인 격식을 집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자각선사의 좌선의를 참고로 하며, 호흡법에 대하여 부연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자각선사의 좌선의를 분석해 보면 좌선의 기본법식으로 열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큰 원을 발하는 것이고(서원誓願), 둘째는 모든 인연을 놓는 것이며(사연捨緣), 세째는 음식을 조절하는 것이고(조식調食), 네째는 잠을 조절하는 것이며(조면調眠), 다섯째는 처소를 선택하는 것이고(택처擇處), 여섯째는 몸을 조정하는 것이며(조신調身), 일곱째는 호흡을 고르는 것이고(조식調息), 여덟째는 마음을 고르는 것이며 조심(調心), 아홉째는 마장을 판단하는 것이고 변마(辨魔), 열재는 두호하여 지켜나가는 것이다 호지(護持).
a, 서원(誓願)-도를 배우려는 대장부는 무엇보다도 그 뜻이 커야 한다. 불보살의 서원을 자기 서원으로 삼아 수행하는 것이 보살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하는 자는 일체중생을 맹세코 건지겠다는 대비심과 대서원을 일으켜야 하니 ,만약 자기 일신만의 해탈을 생각한다면 이는 보살일 수 없고 따라서 바른 도는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b, 사연(捨緣)-좌선하는 데는 마음에서 모든 생각과 인연을 다 놓아버려야 한다. 마음속의 세간 잡사나 세간적 욕망이나 원한이나 구하는 생각이나 잡념을 가지고 있고서는 그 마음에 밝은 달이 드러날 수 없는 것이다.
c, 조식(調食)-음식을 조정할 일이다. 힘을 낸다고 과식해서는 안 된다. 수도인의 식기(食器)를 응량기라 하듯이 자기 양에 맞추어서 적당히 먹어야 한다. 먹고 싶은 양의 七부를 먹는 것이 선가식의 적량(適量)이다. 좋다고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 거칠다고 덜 먹어서도 안된다. 음식은 이것이 몸을 부지해 가는 약이다. 이 약은 도업(道業)을 이루기 위하여 먹는 것이다 .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중히 대하여야 한다. 오래 씹어 천천히 먹어야 한다. 먹으면서 잡념을 해서도 안된다. 생식(生食)을 하거나 담식(淡食)을 하는 것은 권할 바가 못 된다. 비시식(非時食)은 하지 말아야 한다. 단식은 병을 고치기 위한 이유 외는 마땅하지 않다. 참선에서 그 양(量)을 알아서 먹는다고 한 것은 수행하는 정신자세와 환경을 꾸며 가는데 중요한 것이므로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 일즙(一汁) 일채(一菜)가 선가의 식사지만 이 식사에 무성의하면 안된다. 식사를 고루하지 않으면 필경 마음이 고르지 아니하여 공부가 한결같지 못하게 된다.
d, 조면(調眠)-잠을 고르게 자야 한다. 수면을 즐기는 자는 도에 들 수 없다. 그렇다고 수면을 너무 절제하여도 공부에 지장이 된다. 수면부족은 의식부족과 함께 퇴타 인연이 된다. 대개 처음 선에 드는 사람들이 잠을 줄인다고 애쓰는 것을 본다. 우선 일정한 시간을 자는 것이다. 그리고 좌선의(坐禪儀)에 따라 정성스레 공부해야 한다. 좌선의에 따라 좌선을 계속하면 절로 수면시간이 단축되는 법이다. 특히 좌선의 호흡법은 중요하다. 되도록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일이다 . 저녁 참선을 오래하고 늦게 일어날 생각하면 안된다. 저녁 공부시간을 줄이더라도 아침 공부시간을 지키는 것이 좋다. 혹 피곤하다고 저녁공부를 궐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피곤 할 수 록 정성들여 좌선하여야 한다. 피곤한 밤의 30분 참선은 다음날 심신을 가볍게 하고 2시간의 수면을 절약시켜 준다. 수면은 망념에서 온다.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수행에 따라 점점 그 시간이 줄어든다. 수면시간을 지키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좌선을 성실히 하면 저절로 수면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힘찬 정진을 할 수 있다. 대개 선원에서는 연중 한두 차례는 수면을 전폐하는 용맹정진을 갖는다. 그런 때에 평소부터 좌선자세를 엄격히 한 사람이라면 일주간의 용맹정진은 무난히 넘어갈 수 있게 된다. 수면시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을 기억할 일이다. 선객 중에서 눕지 아니하고 마냥 앉아 있는 용맹지사를 흔히 본다. 그리고 좌선 중에는 조는 것도 흔히 본다. 졸면 좌선이 아니다. 졸면서도 좌선코자 하는 정신은 장하나 그것은 좌면이다. 그러므로 장좌불와(長坐不臥) 한다 하여 좌면하는 것을 권할 수는 없다. 공부는 마땅히 진실 하여야 한다. 잘 만큼 잤거든 오뚜기 처럼 일어나 공부를 잡두리 하는 것이 구도자의 자세인 것이다.
e, 택처(擇處)-장소를 가려야 한다. 자각 선사는 한적하고 고요한 곳을 말하였다. 古來로 좌선은 깊은 산중이나 세간을 떠난 한적한 곳이나 세속과 경계를 달리한 사찰을 적당한 곳으로 일러왔다. 처음 좌선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소란스런 환경은 좋지 않다. 되도록 조용한 환경이 좋다. 그러나 조금만 좌선에 힘써 본 사람이면 무리하여 고요한 곳을 찾을 것이 없는 것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간절한 발심과 착실한 좌선기초의 수업이다. 스스로 좌선의가 바로 서고 뜻이 간절하면 웬만한 장소면 다 상관이 없게 된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라고 했다. 걷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할 때나 침묵할 때나 어디에서 어디든지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수행도량이요 수행하는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집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거리에서, 버스나 전철 안에서, 산행하면서, 운전하면서, 설거지 하면서, 산이나 바다에서, 들에서나 등등 어디에서건 할 수 있다.
f, 조신(調身)-몸을 바르게 해야 한다. 좌선할 때에는 우선 두꺼운 방석을 준비하고 허리띠를 늦추어 몸과 호흡을 자유스럽게 한다. 그 다음에 방석위에 가부좌(跏趺坐)를 한다. 가부좌는 반가부좌도 무방하다. 반가부좌는 다만 왼발을 오른쪽발 위에 놓는 것이다. 그 다음에 바른 손을 왼발 위에 놓고 왼손을 바른 손바닥 위에 겹치며 양쪽 엄지손가락 끝을 서로 둥굴게 맞댄다. 이것이 대삼마야인( 大三摩耶印) 또는 법계정인(法界定印)이다. 그 다음에 몸을 서서히 바로 일으키며 허리를 반듯이 편다. 이때에 몸을 전후로 약간 움직여서 허리를 단정히 세우고 또한 좌우로도 반복 흔들어 몸을 자연스럽게 단정하게 한다. 몸이 기울어지면 안된다. 앞으로 굽거나 뒤로 제쳐도 안된다. 어깨에 힘을 주어도 안된다. 턱은 당기고 눈은 반쯤 떠서 코끝을 보는 상태로 한다. 귀와 어깨가 서로 대하고 코와 배꼽이 서로 대하도록 반듯이 한다. 혀는 입천정에 대고 입을 가볍게 다문다. 가부좌나 반가부좌일 때 익숙할 때 까지는 다리가 쉬 아프다. 그럴 때는 너무 참지 말고 다리를 바꿔가며 앉도록 한다. 혹 다리가 저릴 때가 있다. 이런 때는 몸을 좌우로 약간 흔들면 가벼워 진다. 또한 허리에 힘을 주었을 때는 잠시 힘을 늦춘다. 공부가 순숙하여지면 어느덧 몸이 있는 줄을 모르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혹 다리나 어깨가 아파오더라도 이것은 좌선이 익을 동안 잠시 지나가는 것으로 알면 된다. 정법계인은 등한히 하기 쉬운데 마음을 안정시켜 정신을 집중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니 등한히 여겨서는 안 된다. 손에 힘을 주지 말고 자연스럽게 인을 맺어야 한다. 참선 초학자는 눈을 감기 쉽다. 그러나 반드시 떠야 한다. 옛조사는 눈감고 참선 하는 자를 흑산귀굴(黑山鬼窟)이라 하였다. 눈을 감으면 마음이 고요하고 정신이 집중되는 듯하지만 어느덧 혼침에 떨어지기 쉽다. 특히 오후나 새벽 좌선시에 눈을 감는다는 것은 잠을 청하는 거와 같다.
좌선 중 수면에 시달릴 때는 눈을 크게 뜨도록 하는 것이 좋다. 특히 심하게 수마가 밀어닥쳐 오거든 어금니를 굳게 물고 두 눈을 부릅뜨며 심호흡을 깊고 느리게 십 여차례 반복한다. 그리고 들이쉰 호흡을 한참동안 단전부위에 가두고 견디다가 아주 천천히 토해낸다. 이렇게 하면 대개 졸음은 사라진다. 좌선 중에 결코 졸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앉아서 졸음이 쫓아지지 않거든 일어서서 온 몸에 힘껏 힘을 주고 나서 앞서와 같이 호흡하여 보라. 사라지지 않는 잠은 없을 것이다. 좌선은 수시 포행과 겸하는 것이 좋다.
오늘날 우리 한국선원에서는 50분 좌선하고 5-10분간 선방내를 포행하는 것이 관례지만 포행시간을 좀더 늘려도 좋다. 포행 할 때는 금강권을 하고 두 손을 곧게 내려 서서히 걸음을 옮긴다. 이때도 앉았을 때와 같이 호흡을 한다. 걸을 때 발끝과 온 몸에 힘을 반복해 주면서 서서히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때에 좌우를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오직 뚫어지게 앞만 보고 앉을 때와 같은 자세로 걷는 것이다.
포행은 바로 행선이다. 앉았을 때와 같은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포행은 피로가 풀리고 맑은 정신이 돌며 몸에 활기를 준다. 따라서 용맹정진 때나 야간좌선시는 더욱 활기있게 포행 할 필요가 있다. (금강권은 엄지손가락으로 무명지의 아래 마디를 누르고 주먹을 쥔 것.)
그리고 특히 재가불자나 일반 수행자들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비용 등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방법을 바로 알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 좋겠다.
g, 조기(調氣)-호흡을 고르게 하여야 한다. 선에는 원래로 좌법도 호흡법도 필요 없지만 좌선하는 데는 반드시 좌선의 기법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아니할 때는 상기(上氣), 기타 신체상의 장애가 생겨 공부에 지장을 받을 때가 많다. 먼저 몸을 3,4회 전후 좌우로 흔들어 자세를 바르게 한다. 처음에 호흡을 한번 크게 내쉰다.(깊게), 다시 서서히 호흡을 들이쉰다.
h, 조식(調心)-마음을 고른다. 이미 몸이 안정되고 호흡이 고르게 되면 저절로 번뇌가 끊어져 맑은 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이때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일체 생각을 하면 안된다. 도 깨치기를 바란다거나, 성인이 감응하기를 기다린다거나, 또는 이것이 좋은 공부다 하는 분별심을 내어서는 안된다.
I, 변마(辨魔)-공부하는 데는 마군의 장난이나 공부가 바로 되고 잘못됨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도가 높아지면 마(魔)가 성한다. 마음이 밝아지고 삼매를 이루게 되면 스스로 여러가지 경계가 나타난다. 경계는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공부를 방해하고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마군의 장난이나 삼매력에 상응하는 기이한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음에 구하는 것이 있거나 망념이 잠복되어 있을 때, 혹은 경계를 대하여 마음에서 희한한 생각을 갖거나 그 경계를 인정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의 나타남이다. 어떠한 마장이 와도 그냥 지나쳐 버리고 화두를 참구하라.
j 호지(護持)-좌선 할 때의 마음 상태를 어느 때나 끊임이 없도록 잘 지켜야 한다. 좌선에서 일어서 포행 할 때와 같이 선실에서 나와 밖을 거닐더라도 항상 좌선하는 마음 상태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좌선에서 일어서 나올 때는 조용히 몸을 움직이도록 하고 갑작스레 일어서면 안 된다.
행 자세는 수행하는 사람이 편한 자세면 된다. 행주좌와(行住坐臥)로 그냥 평상시 걷거나 바닥에 앉는 자세도 좋고 누워 있는 자세도 좋고 의자에 편히 앉아 있는 자세도 좋다.
좌선을 할 때는 결가부좌나 반가부좌가 편한 사람은 그대로 하면 된다. 수행하는 데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만큼의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수행하느냐가 중요하다. 수행 자세를 강조하다 보면 수행하는 그 시간에만 열심히 하게 되고 그 시간이 지나면 수행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수행은 하루 24시간 하는 일이다.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절차나 방법 그리고 형식에 너무 취우침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 재가불자나 일반 수행자들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비용 등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방법을 바로 알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 좋다.
2) 화두(話頭)란
화두는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이나 행동으로 스승이 제자에게 의문의 말을 주어서 대오(大悟)의 묘경(妙境)으로 유도하는 일종의 교육적 과제를 말한다. 이러한 화두를 모아놓은 것을 공안(公案)이라하고 조사공안이 전등록(傳燈錄)에 1701개나 되는데 그 예를 몇 개 들어본다.
최초의 화두라면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고 가섭존자가 웃음으로 답하는 것에서 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혜능대사가 하루는 대중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이름도 없고 앞도 없고 뒤도 없다. 밝기로는 태양보다 밝고 어둡기로는 칠흑보다 더하니 대중은 이것을 알겠는가"하였다. "이것이 무엇인가." 시심마(是心磨)로 불리 우는 화두다.
또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선사에게 묻기를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없느니라[無]"하였다. 이것이 바로 무자(無字)화두이다.
그러나 이런 공안들이 자신의 문제로 와 닿지 않을 때는 결코 화두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화두참구에는 사구와 활구가 있다.
죽은 말이 아닌 살아있는 말, 즉, 물러설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절대 절명의 자기 문제로 다가 왔을 때 화두가 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다가 무언가에 콱 막힌 듯하고 더 뚫고 나가지 못할 때 스승이 제자에게 격외도리(格外道理)를 거량하여 의심을 돈발(頓發)시켜 주어 미망을 한 순간에 벗어버리게 하는 것이 바로 화두(話頭)이다. 그러한 의심이 골똘하여 더 이상 물러 설 수 없는 때에 스승의 점검이나 사물 대상 등이 졸탁동기(卒琢同機)의 효과를 낸다. 병아리가 부화될 때 어미가 껍질을 한번 쪼아 주어 병아리가 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에 비유하여 졸탁동기(卒琢同機)라고 한다.
화두(話頭)의 원래 의미는 말머리라는 뜻 이지만, 말과 뜻 이전의 모습이며 온전히 그의 뜻에서 벗어난 자리이다. 즉 화두의 목적은 달에 있는 것이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수단에 있지 않다. 그런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화두이다 보니 그 손가락을 의심하는 것이 화두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 화두는 지식이나 생각으로 문제의 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각 없는 의심 하나가 의정이 되고 의단이 될 대 화두가 제대로 들렸다고 한다.
이렇듯 화두는 불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이끌어내는 질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받는 것은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하면서도 알 수 없는 의문을 선지식에게 물어 그 해결책을 마음으로 받는 것이다.
a, 화두(話頭)참구의 세가지 마음
화두참구는 억지로 되지 않는다. 스스로 일어나는 분발심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다음의 세 가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첫째 큰 믿음(大信心)이다.
큰 믿음이란 일체의 모든 법은 연기(緣起)의 이치로 독립된 하나가 없다는 것을 알면 일체중생이 제불보살과 조금도 차이가 없이 똑같으며 자신이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형상에 차별이 있고 나타난 능력에 차이가 있고, 그가 쓰는 덕행에 차이가 있고 수명에 차이가 있어 보이더라도 본성은 본래 그러한 차이에 상관없이 지혜와 온갖 공덕이 똑같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성품이 자신의 본성임을 자각하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본성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에서 참선자의 기본자세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일체중생과 원래 자신과 더불어 하나임을 알기에 중생을 위하여 바친 몸이며 불국토 실현을 맹세하는 것도 이 큰 믿음에 유래하는 것이다.
선자가 만약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큰 원이 없게 되고 큰 원이 없으면 정진력이 약해진다.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다.
크게 분한 마음은 무엇인가. 화두는 자기 자신의 면목을 눈앞에 드러내 보인 것이다. 과거의 조사들도 거기에서 자기 본분을 회복하여 대각자(大覺者)가 되었고 제불보살도 이 도리를 깨달아 불국토를 장엄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과거 조사들에 비해 무엇이 부족하여 그 뜻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면서도 스스로 자만하고 어리석기가 끝이 없어 부끄러움도 모르고 범부생활에 안착하고 있으니 이 어찌 딱하고 슬픈 노릇이 아닌가. 이러고서 어느 때에 자신의 본분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생사 반복하고 고뇌가 물결치는 슬픔에 빠져서 영겁을 이대로 살아갈 것인가. 내 가슴의 광명은 어찌하여 덮어두고 사방에 구걸하여 쉴 날이 없단 말인가. 이것을 이대로 존속시킬 것인가. 이제 다행히 불법을 만났다. 미혹을 깨뜨리고 어리석음을 돌려 대해탈지로 뛰어나올 인연을 만나지 않았는가. 이 화두야말로 나의 어두웠던 과거생의 무지와 종말 짖는 결정적 계기가 아닌가. 기나 긴 고생의 늪에서 벗어나 해탈의 언덕에 이를 수 있는 계기가 아닌가. 기나 긴 생사의 윤회를 끊고 제불보살 모든 조사들과 손을 함께 잡고 불국토를 이룰 계기가 아닌가. 참선인은 화두를 당하여 이렇게 자책감이 치밀어오는 것이며 대분심이 솟아나는 것이다. 이 분심에서 억겁의 무명(無明)을 뚫고 온갖 분별의 함정에서 단번에 벗어나 대자유의 평원으로 뛰쳐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 분심은 선자의 동력이다. 그리고 이 분심은 큰 믿음에서 우러난다. 그리고 큰 분심은 화두에 대한 의정을 일으킨다.
셋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이것은 부처님을 의심하라거나 참선법을 의심하라는 말이 아니다. 화두에 대한 철두철미한 마음을 가리킨 말이다. 거듭 말한 바와 같이 화두는 법성(法性)의 전면제시이므로 망상 망념과 무명에 갇혀 살고 있는 범부로서는 알 수 없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가히 잡아 볼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왜 그렇게 말씀하셨나, 왜 그렇게 하셨나, 왜? 왜? 라는 의심이 가슴을 져미고 답답한 것이 우주를 뒤 덥는다. 말을 해도 틀리고 말 하지 않아도 틀린다. 오직 모를 뿐인데 무엇을 찾으란 말인가?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는 것이니 화두는 여기 이르러서 전심전력을 기울여 맞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런 때의 마음 상태를 의심한다고 하고 큰 의정이어야 큰 깨침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의심이 되면 큰 의정[大疑情]이 생긴다.
온 몸, 온 생각이 오직 화두덩어리가 되어서 화두로 눕고 화두로 잠들게 된다. 필경 이것이 무슨 도리이냐 하는 일념이 끊이지 않는다.
맑고 고요하고 또렷한 의정이 눈앞에 드러난다. 이렇게 지어가는 데서 화두는 순숙하게 되며 호시절이 오는 것이다. 요컨대 의정 없는 화두공부란 있을 수 없다. 마치 죽은 물과 같아서 산 고기가 튀어나올 수 없는 것이다. 생생하고 명료한 의정이 의단이 되면 몰록 본분사를 타파한다.
3) 심우(尋牛)도와 선(禪)
‘심우도’는 동자와 소를 등장시켜 참선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을 묘사한 그림으로 이때 소는 인간의 진면목인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수행단계를 10단계로 나누어 표현하기 때문에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1) 심우(尋牛) 2) 견적(見蹟) 3) 견우(見牛) 4) 득우(得牛) 5) 목우(牧牛) 6) 기우귀가(騎牛歸家) 7) 망우존인(忘牛存人) 8) 인우 구망(人牛俱忘) 9) 반본환원(返本還源) 10) 입전수수(入廛垂手)를 말한다.
심우도(尋牛圖)’의 의미
● 사찰에 가면 법당 벽화로 심우도를 볼 수 있다.
소는 도가에서는 유유자적, 유가에서는 의(義)를 상징했지만 불가에서는 ‘인간의 본래 자리’를 의미했다.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비유한 ‘심우도’가 이같은 의미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그만큼 소는 다른 그 어떤 동물보다 불자와 친숙하다. 대부분의 법당 벽화에 ‘심우도’가 그려져 있고, 불경 곳곳에 소를 비유한 상징들이 들어 있다.
선사들도 이러한 소를 수행의 채찍으로 삼아왔다. 고려 때의 보조국사 지눌은 호를 목우자(牧牛子)라 했다. ‘소를 기르는 사람’ 즉 참다운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만해 한용운 선사도 만년에 서울의 자택을 심우장(尋牛莊)이라 했다. ‘불성을 찾기에 전념하는 곳’이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심우도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 심우(尋牛) 처음에 사람이 들에서 소를 찾는 모습으로 처음 발심한 수행자가 사람에게 본래부터 갖춰진 원성(圓成)인 심우(心牛)를 잃어버린 뒤 그것을 찾는 것.
● 견적(見跡) 소 발자국을 발견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서 순수한 열의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를 하다 보면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는 것.
● 견우(見牛) 수행자가 멀리서 소의 모습을 어렴풋이 본 것을 묘사한 그림으로 문법수학(聞法修學)의 공(空)에 의해 마음의 소를 발견한 것을 상징화하는 불화.
● 득우(得牛) 동자가 소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낀 모습으로 아직 번뇌와 망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므로 더욱더 열심히 수행전진해야 함을 표현한 것.
● 목우(牧牛) 소에 고삐를 물리고 돌아오는 모습으로 삼독의 때를 지우는 보임(保任)의 단계, 즉 깨딸음 뒤에 오는 방심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경책한 것.
● 기우귀가(騎牛歸家) 동자가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돌아오는 모습으로 드디어 망상에서 벗어나 본성의 자리에 들었음으로 피안의 세계에 나아가게 된다는 것.
● 망우존인(忘牛存人) 집에 돌아왔지만 소는 간데없고 오직 자기 혼자만 남아있음을 묘사, 즉 본각무위(本覺無爲)로 들어왔으나 쉬지 않고 수련해야한다는 뜻.
● 인우구망(人牛俱忘)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상태를 묘사한 텅 빈 원만상. 주객분리 이전 상태로 정(情)을 잊고 세상의 물(物)을 버려 공(空)의 세계에 이르렀음을 나타낸 것.
● 반본환원(返本還源) 티끌 하나도 없는 수록산청(水綠山靑)의 광경으로 사람의 본심은 본래 청정하여 아무 번뇌가 없어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보게 된 것.
● 입전수수(入前垂手)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는 모습. 중생들에게 복과 덕을 베풀어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의 제도에 있음을 상징.
4) 호흡하는데 주의할 몇 가지
부처님도 말씀하셨듯이 숨이 모든 수행의 기본 챙김을 알아야 한다. 법 자체를 직접 보고 자신의 원래의 참모습을 찾는 참선을 하면서 의식하지 못하는 호흡을 잘 관찰하여 챙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호흡을 하면서 끊임없는 번뇌 망상을 잠재우고 의식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맑고 청정한 깨달음의 성품을 발견해나가는 것이 참선수행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호흡방법은 깨달음의 성품을 보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좌선 입정 중의 호흡에 대해서는 풍(風), 천(喘), 기(氣), 식(息)의 네 가지 방법이 있다. 풍상(風相)은 앉았을 때 콧속의 숨이 들고나면서 소리가 나는 것, 천상(喘相)은 소리는 나지 않지만 들고나며 맺히고 막혀서 통하지 않는 것, 기상(氣相)은 소리가 나지도 않고 맺히거나 막히지도 않았지만 들고 나는 것이 세밀하지 않은 것, 식상(息相)은 몸을 안온하게 돌보며 기분에 기쁨과 즐거움이 품어지는 것이다. 식상의 호흡은 숨소리도 없고 거칠지도 않고 숨 쉰다는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하는 호흡이다. 이렇게 하려면 먼저 정신을 아랫배에 집중시켜야 한다. 그리고 호흡을 한두 번 토해낸 다음에 이어 서서히 들이쉰다. 고르고 깊은 호흡이 되도록 힘쓰며 다 들이쉰 다음에는 잠시 멈추었다 서서히 코로 토해내지만 실지 의념은 명문혈로 숨이 들고 남을 관찰하면 훨씬 편하다. 특히 호흡할 때는 무리해서는 안 되며 생각과 힘이 호흡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①호흡하는 속도: 호흡속도를 처음부터 느리게 하려고 힘쓸 것 없다. 처음에는 다만 자연스러운 호흡에서 의식적 호흡을 하면서 평상시 보다 약간 깊고 느리고 미세하게 하면 된다. 호흡이 익어감에 따라 더욱 미세하여지고 깊어짐에 따라서 속도도 느려지게 마련이다. 들이쉴 때는 가볍게 내쉴 때는 비교적 느리게 한다. 참선 이외의 호흡에서는 느리고 미세한 호흡을 강조하나 참선에서는 그보다 자연스러운 호흡에서 서서히 의식적 호흡으로 향하도록 하고 성급하게 느린 호흡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속도는 사람따라 다르게 된다.
②호흡을 들이쉬고 머무는 정도 : 호흡을 가볍게 들이쉬고 잠시 머무는데 이 머무는 시간을 오래하려고 힘쓰는 사람이 흔히 있다. 또한 그런 호흡법도 있는 것이다. 이것도 무리하지 않도록 짧은 시간에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서서히 시간이 늘어나게 하는 것이 좋다. 무리하게 긴 시간 머무르면 호흡이 도리어 거칠어지기 쉽다. 오래 머무는 것을 주장하는 호흡법은 좌선에서는 취하지 않는다.
③무리하게 배에 힘주지 마라.: 호흡을 하복부 단전으로 하려고 하면 저절로 호흡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아랫배에 힘이 들어 가게 마련이다. 생각이 호흡을 추적하면서 단전으로 진행함을 따라 배에 힘도 서서히 더해 간다. 호흡이 단전에 이르러서 호흡을 잠시동안 멈추게 되면 배에 힘이 가중된다. 이와같이 자연스러운 호흡에서 배에 모아지는 힘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호흡을 무리하게 오래 머물게 하고자 하여 배에 힘을 주거나 또는 단전의 힘을 기른다 하여 의식적으로 과하게 힘을 주면 여러가지 위험이 따르다. 참선에서는 무리하게 배에 힘주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
④호흡은 앉아서만 하는가?: 호흡은 앉아서 시작된다. 앉아서 하여야 힘을 얻기 쉽다. 그러나 차차 익어감에 따라 서서 하기 도 하고 좀 더 익숙해지면 걸어 다니면서도 하고 누워서도 할 수있게 된다. 호흡은 앉아서 시작하여 걷고 눕고 하는 어느 동작에 서도 한결 같이 되도록 확충하여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⑤삼매가 현전하기를 기다리지 마라.: 좌선에 있어 호흡법은 이것이 선을 하는데 조도로서 하는 것 뿐 이다. 그런데 개중에는 호흡으로 어떤 삼매의 힘이나 신기한 현상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 삼매에 들고 망념이 끊어져 의식차원이 높아지는 것은 공부에 따른 자연적 결과이다. 그런데 호흡하면서 이러한 현상을 기다린다는 것은 도리어 공부의 근본을 망각한 것이 되고 망념을 일으키거나 속효심을 내고 치구심을 내어 참선하는 기본자세와 어긋나게 된다. 주의할 일이다. 참선에 있어 호흡은 언제까지나 조도 방편이다. 호흡을 목적으로 삼고 다시 구하는 것이 있다면 외도의 소견이다.
⑥호흡하는 마음 상태: 앞서 말하여 온 바에 따라 여법하게 자세를 바로하고 호흡을 바로하여 나아가면 저절로 마음이 고루어 진다. 번뇌가 쉬고, 마음이 밝고, 경쾌하게 된다. 수식관을 하는 중 호흡하는 수효를 세는 것을 멈추고 오직 생각으로 호흡을 함께 하여가는 경우에 이르러서는 그 마음은 사뭇 맑고 담담해 간다. 이런 때 담담하다는 생각이나, 맑다 하는 생각이나, 고요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바로 망념이다. 오직 호흡을 정밀히 관하여 망념이 쉬게 하여야 한다. 고요하고 말끔한 정신이 있는 마음 상태 이것이 좌선하는 마음상태다. 좌선규식이 자리가 잡히면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화두를 들어 마음을 잡두리해 나아가면 자성을 깨치게 될 것이며, 설사 화두가 아니더라도 선지식의 바른 지도를 받아 말끔한 정신 성성(惺惺)와 고요 적적(寂寂)를 함께 닦아가면(등지=等持) 대도의 문이 열리게 된다.
⑦좌선에서 일어날 때: 자각선사의 좌선의에 이르기를 [만약 좌선하다가 일어나고자 하면 몸을, 천천히 움직여서 평온하게 일어나라. 결코 갑작스레 움직이지 마라.] 정에서 나온 뒤에는 항상 방편을 지어서 정력을 호지하기를 어린 아기를 다루듯이 하라 . 그러면 정력을 쉽게 이룰 것이다.]하였는데 이것을 올바로 행하자면 무엇보다 호흡을 정밀히 하는 기본적 좌법이 몸에 배어야 하는 것이다. 좌선에서 일어날 때는 먼저 수인(手印)을 풀어 무릅 위에 놓고 호흡을 크게 3,4회 토한 다음 몸을 좌우로 서서히 움직인다. 그리고 가부좌한 다리를 일으켜 세워 몸 자세를 편하게 하고 조용히 일어선다.
5) 점검과 보임
참선은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법으로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바른 견해를 가지지 못하면 손가락을 달로 보는 착각에 빠지고 아무리 오래 수행을 한다 해도 깨달음이 멀다.
정법을 가르치는 선지식을 만나야 하고 반드시 점검을 하여 옳은 길로 수행을 하는지 점검과 인정을 받아야 한다. 완전히 깨친 도인들은 어떤 화두나 선문답은 하나의 비밀열쇠가 있기에 그 열쇠로서 모두 열 수가 있고 풀 수가 있다. 그 열쇠를 찾는 것이 깨달음의 목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견성(見性)했다고 공부를 다 해 마쳤다고 볼 수는 없다. 개개인의 가지고 있는 과거생의 업(業)과 금생의 업(業)이 있고 개개인의 개성이 모두 다르므로 늘 깨어 있어서 자기 자신을 점검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병에 걸렸을 때 병에 대하여 너무 두려움이나 공포심을 느끼고 있는가를 점검한다. 그리고 높은 절벽에 올라 절벽 밑을 바라볼 때의 그 마음이 어떤지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역경에 처했을 때의 마음의 자세나 화가 치밀어 있을 때의 그 마음은 어떤지 점검을 해야 한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 특히 부인이나 남편에게서 욕하는 소리, 큰소리치는 소리, 신경질적인 소리, 등을 들었을 때의 그 마음도 보아야 한다. 그들 모두는 자기 자신의 수행을 돕는 선지식으로 생각하고 수행을 하여야 한다. 이러한 경험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자기의 깨침의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계속 수행정진에 돌입하여야 한다.
공부를 마치신 도인들은 모든 세상일에 만족하며 감사히 여기면서 걸림 없는 행복한 생활을 한다. 그리고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보시하며 자기 자신이 공부한 바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 한다. 그것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이며 그것이 깨달음의 목적이기도 하다.
6) 좌선에 들어갈 때의 방법
1, 좌복을 펴고 반좌(盤坐)로 편안히 앉은 후에 머리와 허리를 곧게 하여 앉은 자세를 바르게 하라. 어깨와 전신의 힘을 뺀다.
2, 가급적이면 단전에 모든 의념을 집중하며 숨을 쉬면서 배(단전)가 들고 남을 집중하라.
3, 입은 지긋이 다물며 혀끝이 천장에 닫게 한다. (이빨을 너무 세게 깨물면 이빨이 운동하는 상태가 되므로 주의하고, 혀를 입천장(은교혈)에 붙이는 것은 임맥과 독맥이 회통하게 하는 것이다.) 원활한 기혈 순환과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잘 되면 맑고 윤활한 침(玉水)이 입에 가득 하다.
4, 숨은 편하게 들숨과 날숨을 쉬되 들이쉬면서 배가 부풀어짐을 의식하고 내 쉬면서도 배가 들어감을 의식하라.(처음에는 집중을 유도하기 위하여 숫자를 세면 좋다.) 숨이 고르게 되면 숨을 옴 몸으로 들이쉬고 내쉰다는 생각을 갖고 호흡을 하게 되면 내 몸이 살아짐을 챙기게 되고 그럴 때 화두를 들숨과 날숨에 실어 놓으면 저절로 화두가 들려지는데 온전히 화두만 남게 된다. 그렇다고 화두를 의식으로 상념하면 안 된다. 그냥 일뿐, 알려 해서도 안 되고 오직 모를 뿐이다.
5, 눈은 자연스럽게 뜨며 가급적이면 눈은 5분 이상 감지 말며 (눈은 항상 뜨는 것이 수마(睡魔)를 제거하는 데 필요하다.) 정신 기운이 상쾌하여 눈을 감아도 수마의 침노를 받을 염려가 없는 때에는 혹 감고도 하여 보라. 만일 혼침이 오면 화두를 가볍게 소리 내어 보고 그래도 잠을 참기 어려우면 가볍게 일어나 주위사람에게 방해되지 않게 행선을 한다.
6, 정신은 항상 적적(寂寂)한 가운데 성성(惺惺)함을 가지고 오직 화두에만 집중하는데 머리로 의심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모든 생각은 단전으로 모으고,
내 주위에 벽이 막혀 있어서 밖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내 몸이 없다는 생각과 얼굴과 머리도 목 아래로 내려와 없다는 생각으로 오직 들숨과 날숨을 관조하면 화두가 달아나지 않는다.
7, 처음으로 좌선을 하는 사람은 흔히 다리가 아프면 잠깐 바꾸어 놓는 것도 좋으나 가급적이면 아픔을 참아보라, 그러면 어느 한계를 지나면 몸의 살아짐을 경험하게 되며 집중이 빨라진다. 또한 망념이 생기면 다만 망념인 줄만 알고 그냥 내버려 두면 스스로 없어지니 의도적으로 없애려고 하지마라.
9, 좌선을 하다보면 얼굴과 몸에 개미 기어 다니는 것과 같이 가려움이 생기고 몸 떨림 현상이 나타는데 이것은 혈맥이 관통되는 증거이며 몸의 마구니에게 조복을 받는 것이니 긁고 만지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둬라.
10, 의념이 집중되고 참선이 잘 된다고 이상한 기틀과 신기한 자취를 구하지 말며, 혹 그러한 경계가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생의 업연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마음에 두지 말고 오직 화두에 집중하라.
이상과 같이, 바른 좌선으로 참구하게 되면 의심과 의정과 의단의 경계에서 오래오래 계속하면 몰록 한 경계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다만 경험한 각자의 느낌이니 달리 무엇이라 할 수 없다. 그 때는 선험자나 선지식을 찾아서 정검을 받고 스스로 그러함에 행복하라.
4, 참선의 공덕(功德)
일반적으로 참선수행은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 우수성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조사선은 점차로 닦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박에 깨닫는 돈오의 길을 제시하여 많은 대중들에게 참 삶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에 대해 홍인(弘忍)조사가 말하기를 『본래의 참마음을 지키는 것(守本眞心)이 일체 번뇌가 끊긴 대해탈에 이르는 근본이며 도에 들어가는 요긴한 문이고 보살과 부처를 이루는 길이다.』하였다. 참마음 닦는 선수행 속에 일체 공덕이 원만구족하다는 말씀이다. 성불한다는 것은 자성불의 완전한 회복이다. 이것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모든 경전이 필경 본성을 밝히는 가르침이니 본성을 보면 일체 경전은 빈 껍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는 "원만 청정한 자성(自性)이 본사(本師)이며 이를 깨닫는 것이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고 했다.
한편, <대념처경>에서는 사념처관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하시고 끝에 그 공덕으로 열반을 증득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동안 소승의 관법이라 하여 외면했던 관법이지만 부처님께서 직접 행하신 수행법이고, 조사선과 상보적인 효과가 있으므로 참선수행법으로 새롭게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수행자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7년 동안 내지는 7일 동안만이라도 이와 같이 닦는 자는 두 가지 결과 중 어느 것이나 한 가지를 얻게 된다. 즉 현상(現法)에서 구경의 지혜, 또는 나머지 생애에서 아나함(不還:윤회에서 벗어남)의 경지가 기약된다.
"수행자들이여, 이것은 중생의 정화를 위하고, 슬픔을 건너기 위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위하고, 진리의 길을 위하고, 열반의 증득을 위한 단 하나의 길, 즉 사념처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에 설해진 것이다. <대념처경> 참선수행이 궁극적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으나 그 뿐만 아니라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공덕총림이라고도 하니 무루복(공덕)과 유루복(복덕)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효용 면에서 몇 가지 부언해 보고자 한다.
1) 수행과정에서 나타난 효용(效用)
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이란?
행복하게 살다가 행복하게 죽는다는 뜻이다.
참선(參禪)의 목적이 지금 내가 행복(幸福)하게 사는 것이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초월하여 열반적정(涅槃寂靜)에 드는 것이다.
부처님이 수 천 년 전에 우리에게 이러한 웰빙과 웰다잉을 가르쳐 주셨다. 권력이나 빈부에 차별 없이 공평하게 인연되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그 공덕을 얻을 수 있다.
그러한 가르침인 불법이 그동안은 불교라는 종교적 차원에서 국한되어 오다가 현대사회에 와서 새로운 변화로 종교를 초월하여 현대인들에게 명상 참선 등으로 보급되고 있다. 선의 효용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근원적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미혹중생의 바탕이 되고 있는 무명(無明)과 번뇌가 점차 소멸 되므로 번뇌로 인하여 은폐되고 억압되었던 진리의 공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단번에 흘연히 나타날 때도 있다.
특히 서구사회에 알려지면서 명상의 효과와 효능을 밝히고자 하는 과학적 연구도 뒤따르기 시작했다. 1931년 요가명상 호흡이 일상적인 호흡과 비교해서 24.5% 정도의 신체 산소 소비량의 증가를 가져온다고 보고한 것을 시작으로, 1950~1960년대에는 인도 요가 수행자의 자율신경 조절능력 등을 뇌파나 근전도 등의 생체 신호를 통해 살펴보는 사례 위주의 연구가 많았다. 이후 1970~1980년대에는 의학적 연구 방법론을 사용하여 참선의 신체적 효과를 입증하려는 연구경향을 보이다가 자기공명 뇌영상 연구 방법이 크게 발전하면서 1990년대 들어서는 참선명상 연구에 뇌영상 기법을 도입해 신경과학적 측면에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 후 참선할 때 나타나는 뇌기능과 구조의 변화를 보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참선과 관련된 신경과학적 연구는 1987년 티베트 불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와 뇌과학자들의 모임이 생겨난 후부터 더욱 활발해졌다고 볼 수 있다.
2005년 뉴로사이언스학회(Society for Neuroscience, SfN) 정기 총회에 달라이 라마가 초대되었을 때는 달라이 라마는 마음을 연구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참선수행을 이야기하며,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줄이고 긍정적인 감정을 강화함으로써 나타나는 인간의 행복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참선은 의학적으로 많은 효과를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즉 참선을 하면 혈압, 맥박 등 심혈관계기능과 혈당, 혈중지질이 안정되며,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혈중 농도가 감소된다는 사실이고 또 신체의 일주기성 리듬과 관련된 혈장 멜라토닌이 참선 중에 수치가 급격하게 상승한 연구 결과가 보고 된 바 있다.
임상적인 측면에서도 참선이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낸다는 연구 결과들이 보고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참선이 우울, 불안, 분노, 피로감, 스트레스 증상 등을 감소시키고, 활력 감이나 긍정적인 정서를 증가시키며, 잠재력이나 창의력 개발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고되었다.
최근에는 이런 뇌의 기능적인 변화와 더불어, 구조적 자기공명 영상촬영(structural MRI)을 통해 명상을 통한 뇌의 구조적 변화를 시사하는 연구 결과들이 보고되고 있다. 2005년 라자르Lazar 등이 시행한 연구에서 주의력, 감각 정보 처리와 관련된 뇌 부위인 오른쪽 전전두엽과 오른쪽 앞섬이랑의 회색질 두께가 명상 수련군에서 증가했고, 그 효과는 나이가 많고 참선 수련 기간이 길수록 더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⓵ 생활상의 효능
가)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하므로 매사에 긍정적이 된다.
나) 두뇌가 밝아지므로 암기력이 발달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한다.
다)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하며 사교적이 된다.
라) 정신집중이 잘되어 독서를 오래해도 피곤하지 않는다.
마) 눈이 맑아진다.
바) 수면시간이 단축되며 심신이 경쾌하다.
사) 마음이 안정되고 맑으니 자동차 운전시 사고가 적다.
아) 매사에 감사를 느끼며 만족한 생활을 한다.
자)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변하고 가정의 불화음이 사라진다.
차) 음식물을 가리지 않는다.
카) 술과 담배등 건강에 해치는 물질에 집착을 끓게된다.
타)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해소에 아주좋다.
파) 삶을 살아가면서 행복감을 느낀다.
하) 자기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⓶ 건강상의 효능
가) 관념적인 병의 뿌리를 제거 하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
나)참선을 하면 신체내의 적,백혈구가 증가되고 혈색소가 증가하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따라서 생활의 활력이 현저히 증대한다.
다) 참선수행은 아래와 같은 질병에 유효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신경쇠약,고혈압,불면증,만성피로,변비,위장병,히스테리,공포증,특히 만성질환에 좋다.
라) 좌선은 정신상태를 전반적으로 급속히 안정시킨다는 사실이 뇌파 측정결과 나타났다.
마)종래 동양에서는 기(氣)를 중요시하여 호연(浩然)의 기를 기르라 하였다. 그것은 천지에 가득찬 지극히 크고 강한 정신적 생명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을 길러야 정신적으로나도덕적으로 원만하다고 보았다. 이 기의 순환이 잘못되면 또한 병이 난다. 이런데서 병은 기의 부조화라고 보았다. 병에는 좌정을 하여 모든 생각을 놓아버리고 기를 기르기를 권하였다. 이것이 양생법의 하나이다. 좌선은 이러한 무심정좌보다 사뭇 뛰어난 양생적 효과를 나타낸다
⓷ 성격상의 효능
가) 마음이 커지며 대범해지고 협동적으로 변한다.
나) 쾌활한 성격으로 변하며 화를 내지 않는다.
다) 조급한 성격을 여유있는 마음으로 개선 시켜준다.
라) 소극적 성격이 적극적 성격으로 변한다.
마) 경계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며 부동심이 햠양된다.
바) 염세적인 생각이 사라지고 더욱 더 활기찬 생활을 하게된다.
사) 겸손하며 자기를 낮출줄 안다.
아) 자연을 사랑하고 살생을 싫어한다.
자) 지나간 일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다.
차) 자기마음을 통제할 수있는 능력이 함양된다.
카) 걸림이 없는 생활을 한다.
⓸ 정신상의 효능
가)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을 해소시키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게 한다.
나) 생사에서 살되 생사에서 초월한 자기를 발견케 하며 자유로운 삶 을 살게 한다.
다)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준다.
라) 마음이 맑아져 번뇌에서 해탈하여 세계의 실상을 바로 보는 지혜가 생긴다.
마) 자기자신과 우주의 실상을 알게 되어 열반락을 얻게 된다.
⓹참선(參禪)하면 좋아지는 16가지
a, 위의(威儀)가 정숙해지고 몸이 고요해지며 밝은 마음이 현저 하게 나타난다.
b, 마음이 경계를 대하면 자비심이 생기고 남을 해롭게 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c,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는 동시에 욕심과 성내는 마음과 일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d, 몸과 마음이 모든 경계에 부딪쳐도 동하지 않고 물들지도 않는다.
e, 참선에 힘을 얻으면 그 도덕의 힘으로 음식에 애착이 떨어진다.
f, 마음이 일념으로 나아가 적묵해지면 모든 산란심이 쉬어지고 일체 애욕의 경계에 물들지 않는다.
g, 참선의 공덕을 얻고 진공의 진리를 얻어서 영원히 없다는 공에 떨어지지 않는다.
h, 일체 마구니들의 생사 그물을 여의고 모든 번뇌 망상의 얽매인 것에서 해탈(解脫)이 된다.
i, 무량한 지혜를 계발하고 깊은 법의(法義)를 통달하여 자연히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밝게 알고 마음과 마음이 적멸하여 부처님 경계에 머물게 된다.
j, 해탈이 성숙하여져서 일체 악업이 요란할 수 없게 되고 걸림 없는 해탈을 원만히 얻게 된다.
k, 인생의 처세를 하는데 모든 기억이 좋아지고 경거망동하는 일이 점점 없어진다.
l, 무리한 애착이 없어지고 사람의 몸에 병고가 차차 감소된다.
m, 삿된 마음이 바른 마음으로 변하고 모든 일에 인내력이 생긴다.
n, 사대육신의 동작이 순서를 얻고 얼굴이 윤활하여진다.
o, 잡된 생각이 없어지고 마음이 항상 안락하여진다.
p, 마음에 생멸심(生滅心)과 몸이 나고 죽는 데에 자유를 얻는다.
<경봉스님의 참선하는데 좋아지는 16가지 공덕>
※<위의 내용 중에 일부는 스님들과 불교학자들의 책과 법문 등 자료를 참고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