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명리학회/주역

주역64괘 차서가

통융 2011. 2. 18. 22:42

주역 64괘 次序歌

주역의 전체 괘상은 64괘입니다.

상경이 30, 하경이 34입니다.

상경은 흔히 천지 자연의 이치에 관한 괘상이라고 말하고

하경은 그와 같은 상경의 이치에 입각하여 인간이 본받아야 할 바의 인간사에 관한 내용으로 엮어져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여기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그 부분에 대한 성격의 논란은 그다지 의미가 크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상경과 하경의 괘명을 외우기 쉽도록 노래로서 엮어 놓은 것이 바로 주역 64괘의 아래 차서가입니다.

  역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경우 이를 하나의 자기 노래로 받아들어 암송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상경

건곤둔몽소송사乾坤屯蒙需訟師

비소축혜이태비比小畜兮履泰否

동인대유겸예수同人大有謙豫隨

고림관혜서합비蠱臨觀兮噬嗑賁

박복무망대축이剝復无妄大畜頤

대과감리삼십비大過坎離三十備

하경

함항돈혜급대장咸恒遯兮及大壯

진여명이가인규晉與明夷家人睽

건해손익쾌구췌蹇解損益夬姤萃

승곤정혁정진계升困井革鼎震繼

간점귀매풍여손艮漸歸妹豊旅巽

태환절혜중부지兌渙節兮中孚至

소과기제겸미제小過旣濟兼未濟

시위하경삼십사是爲下經三十四

一陰一陽之謂道.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도라고 말하니

★쉽게 말해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질과 현상의 측면입니다.(절집안의 종성에서 살필 수 있는 의식형태의 예)

두 번째는 대소 명암 남녀 기질상의 적극적인 요소와 소극적인 면들과 같은 상대적인 의미의 현실적인 개념으로서입니다.(

  먼저 첫 번째 입장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는 봄이 되면 만물이 자라나 뻗어가고 가을이 되면 만물이 소멸되는 생멸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는 것입니다.

봄의 기운은 양이고 가을의 기운은 음입니다.

  두 번째는 다분히 심리적입니다. 이타적이면 양이고 이기적이면 음입니다.

  첫 번째의

 

  도란 무엇인가? 무를 일컫는 말이다. 세상 만물의 모든 것에 통하지 않음이 없고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하물며 도이겠는가. 고요하여 이렇다할 본체를 찾아볼 수 없지만 모든 만물이 태극으로 무의 작용을 힘입지 않는 게 없다. 그러므로 신에는 방소가 없고 역에는 본체가 없지만 도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미루어 신을 알 수 있고 신을 말미암아 도를 밝힐 수가 있다. 음양이 비록 다르지만 하나로써 대립하는 일은 없다. 음에 있으면서도 음으로서 자취가 없되 음으로써 만물을 낳고 양에 있으면서도 양으로서 자취가 없으나 양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일음 일양이라고 말한다. 

★이는 음양의 실체가 없음을 강조하는 의미다

 

 

 

【疏】一陰으로부터 道까지의 해석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하나는 없다는 무를 뜻한다. 음이 없고 양이 없음이니 이에 도라고 일컫는다.  

  하나가 무가 됨을 얻은 것이니 무는 비어 없다는 허무다. 곧 허무는 태허다. 어떤 분별로서 미칠 바가 아니니 오직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는 무다. 만약 그 경계가 있다면 피차가 서로 나누어져 둘도 되고 셋도 된다. 하나가 됨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음에 있을 때에는 음의 공이 됨을 찾을 수 없고 양에 있어서는 양의 힘이 됨을 찾지 못한다. 스스로 그러하여 음과 양이 있고, 스스로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니 이것은 곧 도를 일컫는다. 따라서 말로써 하자면 도가 되지만 수로써 헤아려 표현하면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본체의 입장에서 말하면 무고 사물이 열어 통하는 측면에서 보면 도다. 미묘하여 그 자취를 헤아리기 어려운 점에서 보면 神이 되고 기틀에 응하여 변화하는 점에서 보면 역이다. 이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허무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성인은 사람의 도리를 따져 하는 말이니 그 이치의 마땅함을 따라 모두가 붙여진 명칭이다.  

  ○도란하고 묻는 구절로부터 하나의 양이라고 한다는 구절까지의 주석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도란 무엇인가? 무를 일컫는다고 함은 한씨가 스스로 도에 대해서 묻고 스스로 해석하는 말이다. 즉 도는 허무를 일컫는 말이다. 텅비어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만물을 열어 통하게 하므로 일컫기를 도라고 한다. 말하자면 통하지 않음이 없고 말미암지 않음이 없는 것은 만약 유에 처하여 유라고 한다면 만물의 장애로 인해 서로 마땅히 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도가 이미 허무하여 본체가 없어 어떤 장애도 입지 않으므로 통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은 만물이 열어 통함에 한결같이 이를 힘입지 않음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있게 된다고 말하였다.  

  하물며 도이겠느냐는 뜻은 그 허무의 작용을 도로에 견주어서 일컫는 말이다.  

  고요하여 본체가 없음이 상이 되지 못한다고 함은 고요함이 그윽하고 정밀함이 본체가 없어서 형상으로서 그 자취를 구하거나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하늘이 덮고 땅이 실으며 해가 비추고 달이 뜨는 것과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우며, 봄에는 만물이 소생하고 가을에는 낙엽이 지는 만물의 움직임이 모두 도를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이니 어찌 그 하는 바를 볼 수가 있을 것이며, 그 하는 바를 알 수가 있겠는가? 고요하여 실체가 없으니 결코 형상으로 본떠 말하지 못한다.  

  반드시 작용함이 있어서 모든 만물이 태극으로 무의 작용을 힘입지 않음이 없다고 함은 마치 비바람이 불어옴에 무심하게 뿌려지는 것과 같아서 모든 만물이 이 비바람이 뿌려짐을 힘입어서 싹이 터 자라나게 됨과 같으니 이는 만물을 생육하는 비 바람의 공이 무심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과 같다. 이는 만물이 태극으로 무의 공이 드러나는 이치이고 神이 작용하며 펼쳐져 만물이 생겨나 그 공이 형체를 갖춘 만물로 전개되는 바로 그것이다.  

  기틀에 감응하여 변화를 이룸에 비록 공은 있으나 본래 그 작용하는 바는 자취가 없는 무에 있을 따름이니 이를 달리 말하면 ‘神无方’이요 易无體로 자연 자취를 찾을 수 없는 무의 도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작용하는 때를 당해서 도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변화를 미루어 신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신이라면 자취가 묘연하여 헤아리지 못하는 千變萬化다. 성인이 곧 이와 같은 천태만상의 변화를 미루어서 신의 묘한 이치를 미루어 알므로 변화를 미루어 신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신을 말미암아 도를 밝힐 수가 있다는 뜻은 신의 이치를 자세히 살피면 오직 비어서 자취가 없는 허무에 있으니 이는 허무한 신령스러움을 인하여 도의 소재를 밝힘이니 도 또한 허무다. 그러므로 신을 인하여 도를 밝힌다고 말하는 것이다.  

  음양이 비록 다르지만 하나로써 대립하는 일이 없다는 뜻은 음이 양과 더불어 비록 두 갈래로 기운이 나뉘어져 있으나 결국은 허무한 하나의 기운이다. 다만 서로 나누어서 헤아렸을 뿐이다. 즉 양의 때에 있더라도 그 자취가 비어 허무해서 여기에는 양이 없다. 음의 때에

★실체가 없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허무하면서도 만물이 전개되므로 신이고 신은 작용은 자취가 없으므로 허무다.

있더라도 또한 허무하여 여기에는 음이 없다.

  음에 있으면서도 음이 없으나 음으로써 만물을 낳는다는 뜻은 도가 비록 음에 있으나 음으로서의 자취가 없고 도의 일어남에 모두 음이 없음을 말한다. 비록 음에 있으나 음은 마침내 도를 말미암아 일어난다. 그러므로 음으로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양에 있으면서도 양의 자취는 없으나 양으로써 이루어진다는 뜻도 도가 비록 양에 있으나 양 가운데는 기필코 도가 없다. 비록 양에 있어서는 없으나 양은 반드시 도를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양으로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도가 비록 음양이 없으나 또한 음양을 떠나 있지도 않다. 음양은 비록 도를 말미암아 이루어지나 그렇다고 음양이 도도 아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일음 일양이 도라고 말한다.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仁者見之謂之仁, 知者見之謂之知,

이어서 하는 것은 선이요. 이루어져 있는 것은 성이다. 어진 자는 이를 보고 어질다 말하며 지혜로운 자는 이를 보고 지혜롭다 말하나

  어진 자는 도를 힘입어서 그 도를 보고 지혜로운 자는 도를 힘입어서 그 지혜로움을 본다. 이처럼 각기 그 분수에 맞추어 살핀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이어서 하는 것이 선이라는 뜻은 도가 만물을 낳아 통하게 열어주는 선 이것이 이치에 순응하여 만물을 기르는 것이므로 도의 공을 잇는 자는 오직 선행이 된다.

  이루어져 있는 것이 성이라는 뜻은 만약 이와 같은 도를 성취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다. 만약 성품이 어진 자는 이와 같은 도의 어진 성품을 성취하고 지혜로운 자는 이와 같은 도가 지혜가 됨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진 자는 이를 보고 어질다 하고 지혜로운 자는 이를 보고 지혜롭다 말하는 것이다. 으는 어짐과 지혜로움이 모두 도를 힘입어서 어짐과 지혜로움을 이루는 이치이다.

  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

  백성은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가 드문 것이다.

  군자는 도를 몸에 지녀서 이를 활용한다. 그러나 어질고 지혜롭더라도 보는 바에 막히거늘 백성들은 날로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 이 도를 몸에 지녀 본받는 자는 따라서 드물기 마련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도덕경에서도 항상 욕심이 없는 것으로써 그 묘함을 보고자 한다(항상 무로써 그 지극히 미묘한 것을 보고자 한다고 해석하기도 함)고 했으니 비로소 그와 같아야 그 지극함을 모두 말할 수가 있다.

【疏】백성에서 드물다는 구절까지의 해석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백성은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는 뜻은 전체 백성이 일상적으로 이 도를 힘입어 살아가면서도 도의 공덕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도는 아득하여 공을 공으로써 드러내지도 않으므로 백성은 날로 쓰면서도 이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가 드물다는 뜻은 여기서 말하는 군자가 곧 성인이다. 어질고 지혜로운 자도 오히려 보는 바에 각기 막히거늘 백성이라면 날로 쓰면서도 알지 못하니 도를 밝게 몸에 지녀 쓰는 군자가 또한 드물지 않겠는가?

  ○注군자가 도를 몸에 지닌다고 하는 구절로부터 지극함을 모두 말할 수 있다는 구절까지의 해석이다.

  ○정의에 말하였다. 군자가 도를 몸에 지녀서 이를 활용한다는 뜻은 먼저 성인이 곧 군자다. 성인이 지극한 도를 몸에 지녀 밟아 나가고 도를 법받아 정사를 펼치면 노자가 말하는 행동함이 없이 일을 처리하고 공을 이루고도 자기의 공로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과 바로 일치한다.

  어질고 지혜롭더라도 보는 바에 막힌다는 뜻은 어질고 지혜로우나 그와 같은 현명한 안목으로도 오히려 치우짐이 있어서 어진 눈으로 보는 자는 어질다고 말하고 지혜로운 자가 도를 보면 도가 지혜롭다고 말하여 능히 온전하게 살피지 못한다는 뜻이니 이는 보는 바에 따라서 막힌 결과다. 도가 이미 자취가 없이 허무하면서도 작용하고 있으니 만약 어짊으로서 하고 지혜로움으로서 안다면 이는 보는 바에 막힌 것이다. 하물며 백성에 이르러서는 다만 날로 생활 속에서 통해 쓰면서도 또한 통해서 씀이 도를 말미암아 오는 것임을 알지 못하므로 백성은 날로 쓰면서도 이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도를 밝게 몸에 지녀 쓰는 군자가 또한 드물지 않겠느냐는 뜻은 성인 군자라야만이 오직 도를 깨우쳐 아는 까닭에 또한 드물다고 하였다.

  항상 욕심이 없는 것으로써 그 묘함을 보고자 한다(항상 무로써 그 지극히 미묘한 것을 보고자 한다고 해석하기도 함)는 뜻은 노자 도덕경을 인용한 문구다. 이 구절을 여기서는 이끌어와서 마지막 문장의 결론으로 삼았다. 욕심이 없다는 無慾이란 無心을 말한다. 만약 고요하여 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욕심도 없는 無心 無慾으로 그 도의 묘한 이치를 본다면 하지 않으나 하는 바가 되어 도의 묘한 이치를 얻게 되는 것이다.

  비로소 그와 같아야 그 지극함을 모두 말할 수가 있다는 뜻은 만약 능히 하고자 함이 없는 채로 그 도의 묘리를 보게 된다면 일삼음도 없고 함이 없는 게 이와 같으면서도 그 지극한 도의 이치를 말로 설명할 수가 있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그 지극함을 말로 설명하지 못한다.

故神无方而易无體.

★수행상의 분별 문제

하나님의 역량에 제약이 있나요.

불성의 작용에도 차별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차별화가 끊임없이 진행되는 것은 우리의 편견이 거기에 쉴새없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신입니까. 여호수아입니까. 비로자나불입니까.

하나의 분별을 위한 호칭일 뿐입니다. 주역에서는 음과 양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절대적인 개념은 아닙니다.

그래서 선에서는 직지인심 견성성불 불립문자를 내 세웁니다.

왜 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으라는 왕필의 명제가 그토록 사람들에게 널리 애용됩니까. 신은 어떤 고정된 본체도 없고 정해진 방소가 없는데도 굳이 하나의 변하지 않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혹 본체가 비어 없다고 하면 모든 가치관을 깡그리 부정하는 허무주의를 떠올립니다.

  제가 수행을 하면서 고민하던 이야기 하나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최근 입적한 청화스님의 손주 시봉이었습니다.

  그분의 수행방법은 금타스님께서 제시한 보리방편문이었습니다.

  보리방편문의 행법체계는 기본적으로 아미타불 염불선에 해당하는데 내용에 있어서는 칭명염불이 아닌 실상관법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리방편문의 의리체계가 사실은 아미타불의 구체적인 실상을 관하는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갈래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광명관이고 둘째는 허공관이며 셋째는 구상관(물거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관법을 간화선의 측면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입니다.

  아미타불이라는 칭명과 함께 하나의 구체적인 관이 마음 속에 유지되어야 한다면 이것은 마음의 분산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점에 있어서 간화선의 가풍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외도 행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염불이 있고 관이 있다. 의심하나로 마음을 붙들어 나가는 화두선의 입장에서 보면 수용하기 어려운 형태의 수행관입니다.

여러분의 시각은 어떻나요. 마음이 둘로 갈라진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아미타불 염불과 광명으로서의 경계가 일치되어질 수 있다고 여기시겠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체험에 맡기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신무방 역무체의 의미를 그 기억과 결부시켜 언급해보려는 것입니다.

본질이 빛이건 아니면 허무한 어떤 것이건 그것이 현상으로 드러났다면 양의 작용이 강조되어진 것입니다. 다시 현상에서 본질로 회귀했다면 그것은 음의 작용입니다. 음과 양의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가 도이고 그 변화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故神无方而易无體입니다. 우선 행법 문제에 대해서는 여기까지만 언급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일정한 방소가 없고 역은 일정한 본체가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모두 신의 하는 바를 말한다. 방소와 본체는 모두 형기에 매여 있는 것이다. 신이면 음과 양을 헤아리지 못하고 역이면 변해서 가는 바이므로 한쪽의 어떤 방위나 형체에 매어 있지 않음을 밝히는 말이다.

【疏】故神에서 无體까지의 해석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신은 고요함이 비어 형체가 없으며 음양의 깊고 먼 것을 추구하여 밝히기 어렵다. 이는 일정한 방소가 없음을 밝히는 말이다. 역은 사물을 따라 바뀌고 변하니 변화에 응하여 감에 하나의 고정된 형체가 없다는 뜻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여기까지는 모두 신의 하는 바라는 말은 위의 精氣爲物로부터 神无方까지를 말하니 경에서 말하는 신의 베풀어 하는 바라는 뜻이다. 신이란 미묘하고 그윽하게 통하여 측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귀신의 정상을 능히 알 수 있으니 천지와 더불어 흡사하다.

  지혜가 만물에 두루하므로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고 하늘의 명을 알아 자리에 편안하여 어짐에 돈독하고, 천지를 두루 에워싸서 만물을 자세히 이루되 낮과 밤에 통함이 모두 신의 하는 바 작용인 것이다. 역을 지은 자는 스스로 그러한 신의 작용에 따라 가르침을 드리웠으니 성인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신령스러운 도로써 천하에 덕화를 입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비록 이는 하는 바가 신의 작용이나 또한 성인의 하는 바이다.

  방위와 형체는 모두 형기에 매여 있음을 의미한다고 함은 방위는 곧 처소를 뜻하는 명칭이고 형체는 사물의 구체적인 모양을 일컫는다. 무릇 처소와 형체는 허무하지 않아서 모두 기물로 나타나 있으므로 형기에 매여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신이라면 음양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함은 이미 그윽하고 미묘한 이치를 측량해 헤아리지 못하니 어찌 일정한 처소가 있겠는가. 이는 신에는 방소가 없다는 뜻이다. 역은 오직 변해 가는 바라는 것은 이미 변하여 바뀜이 오직 변해 가는 것이니 이 세상의 만물은 일정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 어찌 일정하게 정해진 형체가 있겠는가. 이는 역에 체가 없다는 구절의 뜻이다.

  어떤 일정한 방위나 하나의 형체로서 밝히지 못한다고 함은 고정된 방위가 없고 일정한 형체가 없음에 대한 해석이다.

  무릇 방위가 없고 본체가 없다는 말에는 각기 두가지의 뜻이 있다.  그 하나는 그 처소와 하는 바를 보지 못하는 것이는 이는 방소가 없는 것이다. 둘째는 신의 운동이 사방으로 두루 미쳐 있어서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말하니 이 또한 방소가 없다는 뜻이다.

  본체가 없다는 데 말의 첫째는 스스로 그러하여 변하되 변하는 것의 말미암는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니 이는 형체가 없음을 말한다. 둘째는 변화를 따라 가되 어떤 정해진 형체가 있지 않음으로 또한 본체가 없는 것이다.

☆지욱-

  상을 보고 말을 음미하며 변화를 보고 점을 음미하는 것은 바로 말로써 능히 사람이 나아갈 바의 이치를 가리켜 보이는 것이다. 역의 말이 천지 자연의 지극한 이치를 가르켜 보이는 것은 성인이 역을 지으심에 천지에 그대로 근거하고 있으므로 천지의 도를 얽어 짜서 맞추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인이 역을 지음은 위를 우러러 천문을 살피고 아래를 굽어보아 지리를 살핀 것이니 천문 지리의 드러난 것이 역임을 알게 한다. 이는 모두 형상으로 드러난 기물이니 그 일이 매우 밝다. 그러나 천문 지리의 이치가 그와 같은 것은 모두 우리 마음의 일녕이 망녕되게 움직이고 고요해지는 것을 벗어나지 않으니 움직이고 고요함이 본래 체가 없어서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도이니 그 이치는 매우 그윽하다.

  이것은 은미하고 밝은 이치와 현상으로 둘이 아니면서 둘이고 둘이면서도 둘도 아니다. 이는 오직 깊이 음미하고 세밀하게 살펴야 이에 알게 된다.

  그 비롯하는 바를 더듬어보면 64괘가 8괘로부터 비롯되고 8괘는 사상으로부터 비롯하며 사상은 양의로부터 양의는 하나의 태극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렇다면 하나는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하나가 이미 비롯함이 없으면 둘 내지 64괘도 비롯함이 없다. 비롯함이 없으면서 비롯하는 이치 이것을 억지로 이름하자면 생겨난다고 하는 生이 된다.

  그 마치는 바로 돌이키면 64괘는 8괘가 된다. 8괘는 사상이다. 사상은 양의요, 양의는 하나의 태극이다. 그러나 그 하나는 无가 되니 무는 어디에서 마치는가? 무가 이미 마침이 없다면 하나 내지 64괘 또한 마침이 없다. 마침이 없이 마치는 것 이를 굳이 명칭을 붙인다면 죽는다는 死다.

  반면 이와같은 시작과 끝, 죽음과 삶에 있어서 본성이 없는 이치에 어두움을 말미암아서 천지간에 망녕되이 정기로써 물이 되고, 노니는 혼령으로써 육도에 윤회하며 변화를 거듭하니, 이는 귀신의 정상을 아는 것이다.

  성인이 이미 이와 같이 우러러보고 굽어 살피며, 내지 귀신의 정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샅샅이 알아 역을 지으셨으니 소이로 역은 곧 천지와 더불어 서로 일치해서 어기지 않는 것이다. 역에 의지하여 세상의 이치를 알고자 하면 지혜가 만물에 두루하게 되고 도가 천하를 건질 수 있게 되어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역에 의지하여 행을 일으킨다면 행위 또한 두루하여 잘못 흘러가지 않으니 하늘을 즐거워하고 명을 알므로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함께 갖추어져 자리에 편안하고 어진 마음을 돈독히 하여 널리 세상을 제도하고 덕을 갖춰 쌓으니 능히 사랑하는 것이다.

  이로써 횡적으로는 천지의 변화를 두루하여 지나치지 않으며 만물을 극진히 이루어 남김이 없고, 종적으로는 주야의 도에 통하여 주장이 되고 종횡으로 두루하고 다함이 없으니 어찌 그 방소가 있겠는가. 이미 방소가 없다면 본체와 형상이 있겠는가. 신은 성인을 가르키고 역은 이치와 본성을 가리킨다. 본체가 없는 역의 이치가 아니면 족히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无方의 신령스러운 지혜를 펼쳐보이지 못한다. 无方의 신령스러운 지혜가 아니면 족히 본체가 없는 역의 이치를 증명하지 못한다.

  곁으로 행한다는 것은 두루 그 모습을 나타내는 색신삼매의 개념이니 육도에 그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육도를 따라 돌되 업의 끌리는 바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늘을 즐긴다는 것은 항상 으뜸이 되는 세상의 하늘을 보는 것이다.

  명을 안다는 것은 십계연기에 두루 통달해 있음을 말한다.

  자리에 편안하다는 것은 삼계의 윤회와 여덟가지의 어려움이 모두 항상하여 고요한 광명임을 뜻한다. 어짊을 돈독히 함은 일체의 곳에서 대자 대비 삼매를 닦는 것이다.

  낮은 열반이고, 밤은 생사다.

  열반과 생사의 문제는 두 가지의 이치가 없으므로 삼세를 한결같이 비추어봄이 이름하여 낮과 밤의 도에 통하여 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역의 도와 성인의 정신-정의 및 선해 중심

【疏】정의에 말하였다.

아래의 精氣爲物로부터 鮮矣까지는 제 4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위에서는 괘와 효의 뜻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괘와 효의 말이 지극해도 귀신의 뜻과 작용까지 결부시켜 밝히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사물의 바뀌어 변화하면서 귀신이 되는 작용을 설명하고 역의 이치가 능히 귀신의 변화에 통하는 것임을 이 장에서 밝히고 있다. 

  精氣爲物, 遊魂爲變,

정과 기가 물건이 되고, 혼이 돌아다녀 변이 된다.

  精氣는 기운이 성해지면 모여서 사물을 이룬다. 모임이 지극하여 다하면 흩어져 혼으로 노니는 것이니 이것은 變의 뜻이다. 혼에 노닌다는 것은 흩어져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精氣爲物이란 음양 정기의 기운을 말하는 것이니 모여서 쌓이면 만물을 이룬다.

  遊魂爲變이란 사물이 이미 모여서 쌓였다가 지극해지면 다시 나뉘어 흩어지므로 장차 흩어지는 때에 떠나 움직이는 정혼은 형체를 잃고 모양이 바뀐다. 곧 살아 있는 것이 변해 죽는 것이니 변하면 사라진다. 혹 죽지는 않더라도 변하여 종류가 달라진다.

★정-본체-빛, 기-현상-열, 신-작용-에너지의 힘

전단향의 예로 생각해보자

향의 모습은 피우고 나면 연기로 사라져 간다.

그렇다면 향은 어떻게 생겨났나요

또 향은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물론 연기입니다.

여기서 향의 형체가 갖추어지는 것은 精氣爲物입니다. 다시 향이 연기로 자취를 감추는 것은 遊魂爲變입니다.

是故知鬼神之情狀.

이 때문에 귀신의 정상을 아는 것이다.

  모이고 흩어지는 이치가 능히 변화하는 도임을 알 것이니 그윽하여 통하지 못함이 없다.

【疏】是故에서 情狀까지의 의미 해설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역의 이치를 궁리해보면 죽고 사는 변화에 통하게 되므로 능히 귀신의 안과 밖에 대한 정상을 아는 것이다. 만물이 이미 모여서 태어나는 것과 흩어져서 죽는 것이 모두 귀신의 하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모이고 흩어지느 이치를 끝까지 궁리하면 귀신의 정상을 아는 것이다. 성인이 역의 이치가 곧 그와 같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注 이는 변화의 도를 아는 것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살피건대 아래에서도 신은 방소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여기서부터는 신의 하는 바를 설명하고 있다는 한강백의 해석 그대로다. 다시 말하면 귀신의 정상이란 곧 비어서 형체가 없는 신령스러움이다. 성인이 비어서 형체가 없는 신령스러움이 변화의 도임을 단적으로 설하셨으니 이는 그윽하여 깊은 곳에도 통하는 귀신의 정상이다.

與天地相似, 故不違,

천지와 더불어 서로 같으므로 어기지 않으니,

덕이 천지와 합하므로 서로 흡사하다고 하였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천지는 능히 귀신을 알아 그 변화에 맡긴다. 성인이 또한 신을 궁리하여 성을 온전하게 함이 귀신을 알기때문이니 천지와 더불어 서로 비슷하다. 하는 바와 짓는 바가 천지의 이치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아서 능히 천지와 더불어 합한다.

知周乎萬物而道濟天下, 故不過,

  지혜가 만물에 두루하고 도가 천하를 구제하기 때문에 지나치지 않으며,

지혜가 만물에 두루하면 도로서 천하를 구제할 수가 있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지혜가 만물에 두루하여 도로서 천하를 구제할 수 있다고 함은 성인이 사물의 이치마다 알지 못하는 바가 없음이니 이는 지혜가 만물에 두루한 것이다. 천하가 모두 양육됨은 도로써 천하를 구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치지 않음은 하는 바가 모두 마땅하여서 지나친 허물이 없고 만물로 하여금 분수를 잃게 함이 없는 것이다.

旁行而不流,

  사방으로 행하되 흐르지 아니하여

변화에 응하여 곁으로 통하지만 사특하게 흐르지 않는 것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성인의 덕이 변화에 응해서 곁으로 행하지만 만물이 그 덕택을 입지 않음이 없게 된다. 또 흘러 사특하거나 허물을 짓지 않는다. 만약 변화에 응하지 못하고 이치 아닌 것으로 움직이면 흘러 사특해지고 만다.

樂天知命, 故不憂,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고 하늘의 명을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으며,

  하늘의 변화에 순응하는 까닭에 즐겁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하늘의 베푸는 변화에 순응함은 하늘의 뜻을 기뻐하고 즐기는 것이다. 만물의 처음과 끝을 아는 것이 스스로 성명을 아는 것이다. 하늘의 떳떳한 법도에 순응하는 것은 성명의 처음과 끝을 아는 것이니 자연의 이치에 자신을 맡기고 근심하지 않는다.

安土敦乎仁, 故能愛.

자리에 편안하여 어짐을 돈독히 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자리에 편안하여 어짐을 돈독히 하는 것은 만물의 정이다. 만물이 그 뜻에 순응하면 어진 성품의 공이 넉넉해진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만물의 성품은 모두 자기 자리에 편안히 안정되어 어짐이 돈독하기를 기대한다. 성인은 대체로 그점에 있어서 기릴만하다. 그러므로 능히 만물을 사랑하여 양육하는 공이 있는 것이다.

範圍天地之化而不過,

천지의 조화를 에워싸 틀을 지어서 지나치지 않으며

  에워싸 틀을 짓는다고 함은 천지를 본떠 두루 그 이치를 갖추어 보인다는 뜻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笵은 모범이 되는 틀을 뜻한다. 圍는 둘레를 남김없이 둘러싸는 것을 말한다. 성인이 행하고 짓는 바가 천지를 감화시켜 양육하는 데 있어서, 모범이 되는 틀로서 남김없이 망라한다는 뜻이니 천지를 법칙으로 하여 그 덕화를 베푸심에 지나치거나 혹 잘못됨이 없는 것을 말한다.

曲成萬物而不遺,

만물을 곡진히 이루어 빠뜨리지 않으며

  곡진하게 이룬다고 함은 변화의 법칙에 편승하여 사물을 이룸에 어느 일방에 매이지 않는 것이 곧 사물의 마땅한 이치를 얻는 것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성인이 변화에 맞추어 호응하되 굽히고 맡겨 자세히 사물을 성취해 이룸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까지도 빠뜨려 이루지 못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

通乎晝夜之道而知,

낮과 밤의 도에 통해서 안다.

  그윽하고 밝은 연고에 통한다면 알지 못함이 없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성인이 주야의 도에 통하여 밝은 것을 말하니 낮은 밝고 밤은 그윽하다. 그윽하고 밝은 도에 통해 밝다면 일마다 알지 못함이 없게 된다. 여기까지는 모두 神의 하는 바를 언급한 구절이니 성인도 곧 그 덕을 지극하게 갖추신 분이다

공자의 역전과 노자의 사상

○역전의 개념

역전의 전은 본래 경전에 대하여 기술한 저작물을 두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역에 관한 저술은 공자 이외에도 숱하게 많아서 이들 저작물과 공자의 역 해설서를 구분하기 위하여 생겨난 호칭이 易緯 및 乾鑿度 상의 십익이라는 개념이다.

십익의 십은 공자의 역에 관한 저술이 7종 10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우선 그 구성에 대해 알아보면 단(彖) 상하(上下), 상(象) 상하(上下), 문언(文言), 계사(繫辭) 상하(上下), 설괘(說卦), 서괘(序卦), 잡괘(雜卦)이다.  이들 7종 10편은 이미 선진시대 이전부터 사실은 역의 경전내용과 동일시하는 입장에서 경전으로 사람들에 의해 취급받아왔다.

반면 십익의 익(翼)은 새의 날개를 뜻하는 글자다. 날개를 달아 역의 구체적인 의미를 도와 알게 해준다는 의의에서 붙여진 개념이다.

○역전의 성립시기와 작자에 관한 논란

1.역전 10편이 모두 공자의 저작이라고 보는 시각

  동한의 班固, 鄭玄, 唐代의 陸德明, 顔師古, 孔潁達 등

2.단전과 상전만 공자가 지었고 나머지는 제자나 후학들이 지었다는 주장.

송나라의 歐陽脩

3.역전이 결코 공자의 저작이 아니며 전국시대 중기나 말기 혹은 서한의 소제나 선제때가 아니면 그 후에 출현했다는 주장.

송나라의 趙汝談, 청나라의 崔述 廖平, 姜有爲 등

4.역전은 기본적으로 공자의 작이지만 그 가운데 앞 사람의 전해져오는 견해를 수용한 부분도 있고 문인 제자들이 평소 공자의 강술본을 기록한 부분도 있어서 논어의 상황과 비슷하며, 그 사상은 응당 공자에 귀속되지만 , 뒷사람들이 공자를 사칭하여 자기의 견해를 끼워넣은 것들도 있다고 보는 주장.

근래의 김경방, 이학근 등

(이상은 주역철학사102쪽)

○노자의 사상과 공자 십익전의 상관관계

주역의 계사상전(11장)에 보면 역에는 태극이 있어 이것이 양의를 낳고 양의가 다시 사상을 낳는다고 하여 만물이 성립하는 근본을 역의 태극으로 설정하고 있다.

반면 노자는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으며,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고 하여 하나에 해당하는 태극 이전에 이미 도라는 개념을 설정하고 있다. 또 노자가 말하는 둘은 태극으로부터 갈라져 나오는 하늘과 땅인 음과 양의 양의다. 다음의 셋은 천지인 삼재를 말한다고도 볼 수 있는 음과 양 및 음양이 서로 맞물려 작용하는 충기의 개념이다. (도덕경 42장) 대신 이구절에서 노자는 태극에 해당하는 하나의 개념 앞에 도라는 개념을 하나 더 언급한다. 이는 눈 앞에 전개되는 유의 개념인 만물 앞에 무의 개념을 사용하는 입장과 자연스럽게 일치한다. 이는 계사전에서 말하는 태극의 설을 부정하는 논리의 비약이다. 따라서 노자의 도덕경은 그 성립연대가 결코 역의 계사전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게 역 철학사의 관점이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음과 양의 작용 및 공덕에 대한 지욱의 계사전 해설

지욱이 말하는 陰陽의 도 그리고 음양의 功德

  한번 음이 작용하고 한번 양으로 작용함을 도라고 일컫는다는 계사전 본문 구절로부터 현상으로 작용함에는 음양의 공덕이 감추어져 있고 드러남에는 어짊(仁)으로 나타난다는 음양의 해설로부터 시작된다. 아울러 이와같은 음과 양의 끝없는 작용이 만물을 낳고 낳으면서 大業을 보여주고 대업으로 만물이 건립하되 乾이 만물을 건립하는 시작이 된다는 점에서 그 공덕이 무한한 德業이라고 하며, 坤은 하늘의 이와 같은 덕을 본받는다는 취지에서 본받는다는 爻라고 한다는 구절에 대한 해석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음양의 작용은 1에서 10까지 이어지는 수로서 단순화시켜 앞으로 아직 오지 않은 일까지도 알 수가 있으니 이를 占이라고 한다고 말했음을 지욱은 여기에서 상기시킨다.

  반면 이와같은 음과 양의 작용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느 곳에서나 어떤 능력의 제한 없이 펼쳐지므로 그 신령스러움이 방소도 없고 고정된 의미의 어떤 형체도 찾아볼수 없다는 개념의 神无方而易无體에 대해 해설하고 있다.

☆지욱

  무릇 역은  본체가 없으나 본체가 없다고 말하지도 못한다. 이는 음양의 형체를 떠나서 달리 도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음 일양은 이것이 곧 전체의 대도다. 그럴진대 이치에 맞춰 수행하는 자가 아니면 능히 음양을 계승하여 그 지극함을 다하지 못한다. 즉 그 가운데 지위를 이루는 것도 오로지 이것은 본성의 공덕이다.

  반면 세상에서 힘써 수행을 닦는자가 왕왕 그 본성에 어둡게 되니 어진자는 이를 보되 어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지혜를 소중하게 여겨 이것만 쫓는 자는 왕왕 수행을 숭상하지 않으니  이는 지혜로운 자가 이를 보고 지혜롭다고만 말하는 것이다. 백성은 또 날로 쓰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므로 군자가 성을 온전히 하여 도를 닦되, 온전한 수행으로 근본이 되는 성품을 드러냄이 드물다.

  그렇지만 어진자가 비록 어진 면만 보나 어짐이 어찌 지혜로부터 나타나지 않겠는가. 지혜로운 자가 비록 지혜로움만을 보나 작용하는 지혜가 어찌 어짊을 따라서 감추어져 있지 않겠는가. 어진 본체는 지극히 은미하나 항상 드러나고 지혜로운 작용은 온전하게 드러나 있으나 항상 감춰져 있다. 이것은 곧 일음일양의 도이니 천지 자연의 이법은 그대로 만물과 함께 하고 있으니 이것이 만물에 있어서 성인과 더불어 함께 근심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뜻이다.

  성인과 더불어 함께 근심하지 않는다는 말은 또 역의 본질적인 이치를 가리켜 하는 말이니 성인의 근심이 또한 본질적인 이치를 떠나 있는 게 아니다. 또한 성인께서 역의 이치를 온전히 몸에 지녀 본떴다면 성인의 근심도 사실은 근심이 아니다.

  천지 만물의 사리를 역이 포괄하고 있으므로 부유함이 된다. 변화가 무궁하여 끝이 없으므로 날로 새롭다. 사업의 가운데 성한 덕이 갖추어져 있으며 성한 덕 가운데 대업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낳고 낳는다는 生生이다.

  무릇 법상에서 덕업의 이루어지는 것을 이름하여 乾이라 하니 여섯 양으로 된 하나의 괘에만 그치지 않는다. 효를 본받아서 그 덕업을 이루는 것을 坤이라고 하니 여섯 음으로 된 하나의 괘만이 곤도 아니다.

  음양으로 갈리는 수가 무수하나 본래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수가 없는 가운데 여러 수가 건립되니 문득 옴을 아는 것이 점이라고 하고 시초풀을 벌려 점을 치지 않고서도 점이 된다.

  이미 오는 것을 아는 자는 수(數)에 반드시 끝이 있으니 끝이 있으면 세상의 일은 반드시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곧 이는 역의 일을 배움에 이미 어지러워진 뒤에 다스리고 이미 위태롭고 나서 편안함을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일(事)이라고 말한다.

  종일토록 음양의 수 가운데 있으면서 능히 음양을 제조하니 음양의 헤아리는 바를 입지 않음으로 일컬어서 곤(坤)이라고 한다.

  부유함을 일러 대업이라고 한다는 구절로부터 신이라고 일컫는다는 구절까지는 역의 이치가 본체가 없으면서도 수를 다한다는 세구의 뜻을 극찬하고 성스러운 신의 치우친 방소가 없음을 극찬한 것이다.

음과 양의 작용은 신령스러워 예측하기 어렵다.

陰陽不測之謂神.

음하고 양함을 측량할 수 없음을 신이라 일컬으니

  神이라고 하는 것은 변화의 지극함이다. 만물을 묘하게 이루는 점에서 말하면 형체로써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음과 양의 작용을 측량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굳이 이를 언급하자면 음과 양, 양의의 작용과 만물의 움직임이 어찌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되겠는가. 홀로 태허로부터 문득 스스로 전개되는 것이니 조작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이치가 스스로 감응하는 결과다. 감화되어 나타남에 주인이 없다. 스스로 신령스럽게 움직여 드러날 뿐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하물며 신령스러움에 대해서겠는가. 이로써 양의가 태극에서 비롯되어짐을 밝히는 변화의 이치는 신령스럽다는 한 마디로 더 이상 좋은 표현은 찾아볼 수가 없다.

  대체로 하늘의 신령스러운 변화 작용을 아는데는 이치를 궁리하여 변화를 몸소 깨달아야 할 것이니 앉아서 일체를 잊고 비추어 보는 것조차 잊을 수 있어야 한다.

  텅비어 지극하면서도 만사에 신령스럽게 응하니 이는 道로써 일컫기에 족하다.

  헤아려 생각하지 않아도 그윽하게 임함을 볼 수 있다면 神으로 이름할 수 있다. 대개 도를 힘입어 도와 같게 되고 신을 말미암아 신령스러움에 합한다.

【疏】 陰陽으로부터 神까지의 해석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천하 만물이 모두 음양을 말미암는다. 혹 생겨나고 혹 이루어짐이 그 말미암는 바의 이치에 근본하면서도 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곧 神이다. 그러므로 음과 양의 작용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神이라고 하였다. ○注 ‘신이라고 하는 것은’의 구절에서부터 신까지의 해석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神이라는 말이 변화의 지극함이라는 뜻은 곧 신(神)의 베풀어 나타나는 현상이 스스로 변화의 지극함을 가지고 하는 말이다.

  만물이 묘하게 드러나는 점에서 살핀다는 뜻은 만물의 드러나는 작용이 미묘함을 말하고자 하는 데 있다. 만물의 본체는 변화하는 상이 있으나 이를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러나 신의 작용은 만물에 나타남이 미묘한 까닭에 말로써 표현은 하여도 더듬어 알 수가 없다.(이것이 다음에 해석하는 형체로써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구절의 뜻이다.)

  형체로써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구절의 뜻은 곧 자취가 묘연하여 헤아려지지 않으며 그 작용의 신비스러운 자취가 형체도 없고 본성도 없어 어떤 형태의 적절한 형용으로도 더듬어 살필 수가 없다는 뜻이다.

   ‘조작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이치가 스스로 감응하는 결과’라는 뜻은 신령스럽게 작용하는 힘을 말한다. 나는 쉽게 말해 주재하는 자의 손과 같은 형태의 대명사다. 현상으로 나타나는 만물의 조작이 나라고 하는 어떤 주재자의 소행을 말미암는 게 아니고 그 만물의 조작되는 이치가 스스로 텅비어 있으면서도 신령스럽게 호응하는 결과이니 스스로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다.

  이로써 양의가 태극에서 비롯되어짐을 밝힌다는 뜻은 천지의 본체인 양의가 반드시 태극의 허무함에서 처음 비롯됨을 밝히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 전말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니 장차 어떻게 시작하는지 하는 점에 있어서겠는가.

  ‘변화의 이치는 신령스럽다는 한 마디로 더 이상 좋은 표현은 찾아볼 수가 없다’는 뜻은 변화를 이치를 말하고 함에 그 끝을 헤아려 알 수가 없고 오직 신령스럽다는 표현이라야 적당하다고 보는 것이니 신령스럽다고 하면 이를 결코 알기는 어렵다. 

  대체로 하늘의 신령스러운 변화 작용을 아는데는 이치를 궁리하여 변화를 몸소 깨달아야 할 것이니 앉아서 일체를 잊고 비추어보는 것조차 잊을 수 있어야 한다.

  대체로 하늘의 신령스러운 변화 작용을 아는데는 이치를 궁리하여 변화를 몸소 깨달아야 할 것이니 앉아서 일체를 잊고 비추어보는 것조차 잊어야 한다는 뜻은, 만약 하늘의 하는 바를 아는 것이 그 사물의 이치를 헤아려 살피고 변화를 몸소 깨달아 고요하게 앉아서 그 일을 잊고 비추어 보는 바의 물건의 이치는 물론, 그 스스로도 그와 같은 이치에 맡겨 다른 어디에도 마음이 매이지 않고 단연코 그윽해야 함을 말한다. 이와 같아야 능히 하늘의 하는 바를 아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하늘의 법도가 또한 이와 같다는 뜻이다.

  본문의 해석에서 앉아서 일체를 잊고 비추어보는 것조차 잊어야 한다는 구절은 그 말이 장자의 대종사 편에 나온다.

  ‘텅비어 지극하면서도 만사에 신령스럽게 응하기에 道로써 일컫기에 족하다’는 구절의 해석은 도의 개념에 입각한 항목이다. 말하자면 그 본질이 텅비어 있으면서도 만물에 호응해 나타난다면 이는 그 조목의 뜻이 그대로 도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도로써 일컫기에 족하다고 하였다.

  헤아려 생각하지 않아도 그윽하게 임함을 볼 수 있으니 신령스럽다는 神으로 이름할 수 있다고 함은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가 없고 그 자취가 그윽하니 보는 자가 이에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곧 신령스러움으로 이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대개 도를 힘입어 도와 같게 됨은 성인이 가르침을 베푸심에 도를 힘입어 자취가 없는 감화를 행하니 쌓임이 오래되면 드디어 도와 같아짐을 이루니 안과 밖이 모두 무가 되기 때문이다.

  신을 말미암아 신령스러움에 합함은 성인이 가르침을 베푸심에 이와 같이 신령스러워 예측하기 어려운 이치를 법도로 삼아 자취도 없고 방소도 없는 가르침을 세상에 펼치는 것이니 이것이 오래되어 점점 쌓이면 신령스러움에 합하여 그 덕을 예측하기 어려움을 말한다.

  이는 모두 성인이 처음에는 도를 본받고 신을 법칙으로 삼지만 그 자취를 헤아리면 전혀 텅비어 무가 된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애쓰기를 그치지 않으면 드디어 헤아리기 어려운 신과 도의 경지를 마땅히 이루게 되는 까닭에 도를 힘입어 도와 같아지고 신을 의뢰하여 신과 합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역의 기본 범주-象과 數 및 理

●역경을 말할 때 자주 상수(象數), 혹은 의리(義理)를 말한다.

○의리란 세상의 모든 현상에 깃들인 일정한 법칙을 의미한다. 주역은 그와 같은 세상의 일정한 법칙을 반영하고 있으며 주역을 배우는 사람은 그 법칙에 입각하여 세상의 눈을 정리하고자 노력해야 함을 전제로 주역의 해석을 시도한다. 이것이 의리적인 입장의 역해석 방법이다.

                이와 같은 방법의 본격적인 시작은 두말할 바없이 공자의 십익전이다. 그러나 의리를 말함에 있어서도 그 흐름은 황제를 첫머리에 내세우고 노자의 관점에서 역을 해석한 엄군평, 양웅, 위백양 등이 있고 비직의 고문역에 입각 공자의 입장에 충실하려는  마융, 정현, 순상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상(象)은 사물의 이치를 형상으로 본떴다고 보는 본받을 像의 뜻이고 수(數)는 역으로 점을 치는 데 있어서 만물의 이치 속에 깃들어 있는 수리적인 측면의 법칙성이 강조된 결과다. 설괘전에 보면 “신명을 그윽히 도와서 시초풀을 이용하여 점치는 법을 만들고 하늘을 1,3,5의 세 수로 하고 땅을 2,4의 양 수로 하여 하늘의 수와 땅의 수를 세웠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단순화시키면 음과 양의 부호가 조합된 기본 8괘 및 여섯획의 대성괘를 상이라고 할 수 있고 그때의 괘상은 일정한 형태의 수리적인 원칙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점을 치는 1에서부터 10까지의 수로 대체하여 생각할 수가 있다.

  따라서 상수는 자연의 원리를 역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그 원리를 나타내는 일정한 부호와 수리적인 법칙으로 이해하면 된다.

  상수학 혹은 상수학파의 형성은 한나라 시대에 맹희 초공 등에 의하여 괘기설의 이론틀이 갖추어지고 경방과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발전해나가 괘기론으로 완성을 본다. 특히 경방은 역학의 내용을 괘기설에 의존 8궁 오행 납갑 등의 설로 역을 해석 한역 상수파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천지 자연의 변화 법칙을 주역 괘상의 상하 음양의 수와 기본 괘상으로 천지 만물의 길흉을 해석할 수 있다고 여겨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역이란 상이고 효란 (만물의 이치를) 본받음이다. 성인이 우러러 살피고 굽어 보아서 천지 일월 등의 만물을 괘로서 본받으니 그것에 순종하면 화평하고 거스르면 어지럽게 된다. 무릇 만물의 이치는 미세하여 이루 다 궁리할 수가 없고 깊고 아득하여 이루 다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시초를 통하여 효를 긋고 천지 만물의 실상을 64괘 384효로 정하면 6효를 따르는 세상의 길흉과 9,6,7,8의 수와 안팎 및 승(承) 승(乘)의 상을 살필 수가 있게 된다.

  한편 이들 흐름은 당대의 이정조에 의해서 주역집해로 그 저술들이 편집되고 송나라에 들어 진단 유목 이지재 및 주진 채원정 등의 역학에 영향을 미치면서 의리파 역학과 대립하는 하나의 역학 사조를 형성한다.

의리학의 갈래에 대해서는 따로 살피기로 함.

역도의 체와 용(1)-음양의 본체와 현상

【疏】정의에 말하였다.

아래의 顯諸仁에서 道義之門이라는 곳까지가 제 5장이다. 윗장에서는 신의 하는 바를 진술하고 여기서는 역의 도가 크다는 것과 신의 공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두루 밝혔다.

顯諸仁, 藏諸用,

어짐으로 나타나고 작용으로 감추어져

옷은 만물에게 입힌다. 그러므로 어짐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날로 쓰면서도 알지 못하므로 작용으로 감추어졌다고 말한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어짐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도의 체가 됨을 말하는 것이니 어진 공을 나타난다. 옷은 만물에게 입히니 이는 어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작용으로 감추어져 있음은 그 작용하는 공덕이 숨겨져 있음을 말한다. 사물로 하여금 이를 알 수 있게 하지 않으니 작용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鼓萬物而不與聖人同憂.

만물을 고무진작시키되 성인과 함께 근심하지 않으니

  만물이 이를 말미암아서 화생한다. 그러므로 만물을 고무진작시킨다고 하였다. 성인도 오직 이도를 법받아서 쓰되 허무를 온전하게 하지 못하면서도 본체가 되어서 천하에 순종하여 통하니 이는 곧 만물을 경영하는 자취이다.

【疏】 鼓萬物에서 憂까지의 해석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도의 작용하는 공은 능히 만물을 일깨워 움직이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생육하게 하니 그것이 말하자면  鼓萬物이다. 성인이 물을 화생시킴에 능히 무를 온전하게 하지는 못하나 반드시 그를 체로 삼아서 나아가니 이는 마치 경영하는 근심이 있는 것과 같다. 도인즉 허무가 작용하여 나타남이 일삼음도 없고 함도 없으니 이는 성인과 더불어 그 작용에 있어서 서로 다른 점이 되고 성인에게 있어서는 세상을 경영함에 있어서 근심이 있는 것이다.

○성인이 비록 도를 몸에 지녀 작용으로 삼는데 대한 주석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성인이 비록 도를 몸에 지녀 작용으로 삼으신다는 것은 성인이 능히 세상을 경영함에 근심이 없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도라면 마음으로 애쓰는 자취가 없지만 성인은 도를 본받아 마음에 붙이고 그 자취에 애쓰는 흔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자취는 천지 자연의 도와 작용이 다르다.

  능히 무로써 온전한 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도라면 마음의 자취가 전혀 없다. 이는 비어서 아무런 자취도 없는 무가 본체가 되는 것이니 성인이면 무심하면서도 무심의 자취가 남는다. 이는 무심으로 하면서도 자취는 남는 것이니 오로지 온전한 무로써 본체를 삼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천하에 유순하게 통하면 경영하는 자취가 있다는 것은 성인이 천하의 이치에 유순하게 통함을 말함이니 내적으로는 비록 무심하나 외적으로 경영하는 자취에 있어서는 근심이 있는 것이다. 도는 마음에 자취가 온전히 없으니 근심하고 염려함도 없다. 따라서 성인과 더불어 근심을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盛德大業至矣哉.

성대한 덕과 큰 업이 지극하다.

  무릇 사물의 통하는 바는 일의 이치로서 말하는 것이니 도를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성인이 세상에 공덕을 드러내는 어머니와 같으니 본체에 있어서 도와 같다. 성대한 덕과 큰 업은 능히 지극한 바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성인은 세상에 공덕을 드러내는 어머니와 같으니 본체가 도와 같아서 만물이 이를 말미암아 통한다. 그리고 갖가지 사업이 이로써 다스려진다. 이는 성인의 지극히 성대하고 큰 사업이니 지극하지 아니한가. 행동으로 말하면 덕이 되고 일로 말하면 업이 된다.

富有之謂大業,

부유한 것을 일러 대업이라고 말하고

  성대하고 큰 것이 모두 갖추어진 것을 부유하다고 말한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이로부터 아래는 거듭 대업과 성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성대한 덕은 역과 건곤 및 그 점이 세상사와 더불어 일치함을 두루 밝히고 아울러 신령스러운 본체가 두루 갖추어져서 만사가 부유한 것임을 말하고 있음이니 그 까닭에 큰 업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日新之謂盛德.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성대한 덕이라고 한다.

본체에 변화가 합치함으로 날로 새롭다고 한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성인이 능히 드러난 현상이 본질에 통함을 말하고 있으니 일체의 변화를 그 덕에 합당하게 하여 날로 새롭고 날로 새로워 이 덕의 지극히 성대함이 된다. 그러므로 성대한 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生生之謂易,

낳고 낳음을 역이라고 이르고

  음양이 굴러 변하하면서 일체 현상을 이루는 것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낳고 낳는다는 뜻은 그치지 않음을 말한다. 음양의 변화가 앞 생을 이어서 뒷 생으로 나타나니 이는 만물의 생명이 항구하게 지속되는 역의 뜻이다. 앞과 뒤의 생은 변화하여 바뀌어 나간다. 태어남엔 반드시 죽음이 있다. 매사에 경계하는 마음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가기를 역에서는 권하므로 생에 대해서는 말하나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成象之謂乾,

상을 이루는 것을 건이라고 일컬으며

  건의 象을 헤아려 본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괘를 그음에 乾의 상이 생겨남은 건의 굳센 성질을 헤아려 본떴으므로 괘가 乾이 되었다는 뜻이다.

效法之謂坤,

법을 본받는 것을 곤이라고 이르고

  坤의 법을 본떴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괘를 그음에 곤의 법을 본떴다 함은 곤의 유순함을 헤아려 본뜬 것이 곤이라는 괘상의 뜻이라는 해설이다.

極數知來之謂占, 通變之謂事,

수를 지극하게 하여 미래를 아는 것을 점이라고 하고 변화에 통하는 것을 일이라고 하며

  사물이 지극해지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는 것이 일의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이치다. 

【疏】정의에 말하였다.

  수를 지극하게 하여 미래를 아는 것을 점이라고 한다는 뜻은 점치는 시초의 막대수를 조작하여 미리 오는 일을 알아서 그 점으로 길흉을 물을 수 있으므로 점이라고 한다는 해설이다.

  변화에 통하는 것을 일이라고 한다는 뜻은 사물이 끝에 이르면 열어 통하게 하고자 하여 모름지기 그 변화를 알아야 할 것이니 이에 통함을 얻게 된다는 해설이다. 무릇 천하의 일이 끝까지 가면 반드시 변한다. 그러므로 변화에 통하는 것을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과 이름을 얻다.(陸羽)

육우는 다경을 저술하여 다도(茶道)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버려져 출생지나 성씨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육우는 자신이 어른이 되고 나서 출생에 관한 문제를 염두에 두고 점을 쳐 보았다.

  본괘가 수산 건괘 지괘가 풍산점괘로 나왔다. 즉 수산건의 상육 음효가 상구 양으로 변하는 변괘를 점의 결과로 얻은 것이다. 물론 그는 이것으로 자신의 출생지나 조상을 알아낼 수 있는 어떤 단서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점괘를 바탕으로 자신의 성씨를 결정하고 이름도 풍산점괘의 상구 효사에 근거하여 깃우(羽)로 정했다. 이른바 주역 하경의 풍산점괘 상구 효사인 上九 鴻漸于陸 其羽可用爲儀 吉이라는 문구를 성과 이름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큰 기러기가 땅으로 나아간다는 문구의 육(陸)과 그 날개를 사용해서 위엄스런 모습을 얻을 수 있어 길하다고 하는 깃우(羽)로서 성과 이름을 정하고 자는 홍점(鴻漸)으로 했다는 기록이다. (新唐書 隱逸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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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이야기  (0) 2011.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