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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내가 아니고 우리인가? ...소설 연재. 초고 16

통융 2025. 6. 2. 19:18

<용담(龍潭)의 신비>

 

다음 날 점심 때가 되어 아침을 먹었던 법계로 올라갔다. 집 안은 조용했다. 아침처럼 탁자 위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방 위쪽 작은 문이 열리면서 노장이 나왔다. 그 뒤를 따라 어젯밤 나를 안내했던 젊은이가 허리를 숙이며 따라 나왔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노장은 젊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구면이지요? 앞으로 그대가 여기서 생활하는 데 도움을 줄 겁니다.”

젊은이는 어젯밤과는 달리 공손하게 목례를 하며 오탁이라고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나도 미소를 띠며 목례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성진입니다만, 통융으로 불러 주세요. 잘 부탁합니다.”

노장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성진은 뭐고, 통영은 뭡니까?”

성진은 비구계를 받을 때 받은 계명이고, 통영이 아닌 통융은 법명입니다.”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제가 워낙 융통성이 없어서 융통을 거꾸로 하면 통융이 되거든요.”

, 그래요? 융통이 없으면 여기서도 공부가 쉽지 않겠네요. 허허.”

오탁도 따라 피식 웃었다.

나는 통융이라는 법명을 말할 때마다 사람들이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흔히 쓰는 단어가 아니다 보니 익숙한 통영으로 잘못 듣곤 했다. 그래서 늘 추가 해석이 필요했다. 사실 이 법명은 한때 풍류도에 관심이 있어 국선당(國仙堂)에서 공부할 때 얻은 이름이다. 그때 일명 삼각산 도사라 불리던 정갑 선생에게 솔계(率癸)’라는 호를 받고 명리학, 주역, 육효, 구성학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함께 공부했던 도반 명보당이 지어준 이름이 바로 통융이다.

나는 겸연쩍었지만, 자연스럽게 이어진 대화 덕분에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점심 공양을 마친 후, 노장은 돌아갔다.

나는 오탁이 설거지를 마치길 기다렸다. 어젯밤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특히 유성장터에서 만났던 어른이 어디 계시는지가 가장 알고 싶었다. 이곳은 언제부터, 누가 만들었는지, 수행자는 몇 명인지, 생활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식량과 물은 어떻게 조달하는지, 출입로는 따로 있는지 등 궁금한 것이 많았다.

마침내 설거지를 마친 오탁이 나를 보며 말했다.

통님, 저를 따라오시겠어요?”

나는 엉겁결에 일어나 오탁을 따라갔다. 좀 전 노장과 함께 나왔던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조그마한 방이 있었다. 벽에는 책들이 꽂혀 있었고, 바닥에는 작은 탁자와 방석이 몇 개 놓여 있었다. 방 한쪽에는 작은 쪽문이 또 하나 있었다. 오탁은 나를 힐끔 보더니 앞장서서 그 문을 열었다.

그 너머는 깊은 동굴처럼 어둑했다. 문이 작아서 허리를 굽히고 나왔지만, 동굴 내부는 서서 걸을 만큼 높고 폭도 넓었다. 나는 앞서가는 오탁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가 보시면 압니다. 여기 있는 동안 꼭 알아둬야 할 곳입니다. 여기에 계신 수행자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보게 될 겁니다. 그리고 당장 오늘 밤부터 필요할 곳이기도 하고요.”

어젯밤에는 말도 없이 무뚝뚝하던 오탁이 예상외로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여기서 수행하게 되시면 몇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이 수행하는 곳을 벗어나지 않을 것. 누구를 만나도 사적인 질문을 삼갈 것. 그리고 낮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돌아다니지 않는 것. 이곳은 공동 생활터이므로, 자신이 사용한 공간의 뒤처리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그는 마치 내가 질문할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리는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있는 물가에 멈췄다.

동굴로 들어오면서 느낀 것이지만, 안으로 갈수록 점점 밝아졌다. 인공조명이 아니라 자연 채광이 스며드는 듯했다. 다양한 수생식물과 꽃들이 피어 있어 마치 식물원 같은 분위기였다. 잔잔한 물웅덩이를 따라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우리 생활의 중심지인 용담(龍潭)’입니다. 웅덩이에 손을 담가 보세요.”

나는 시키는 대로 손을 물에 담갔다. 따뜻했다.

저기 위쪽에서 온천이 나옵니다.”

나는 오탁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제법 큰 웅덩이에서 용암수가 솟아 넘치고 있었다. 용담은 용이 사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날씨가 따뜻해서 온도가 높지 않지만, 겨울에는 온천욕을 할 정도로 따뜻하지요. 덕분에 동굴 내부 온도는 항상 20도 전후를 유지합니다. 이곳의 수행자들에게는 몸을 관리할 수 있는 일급 요새지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돌 반석과 자연석 의자들이 있었고, 일부 웅덩이는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치 전설 속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하고 갔을 법한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이곳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동굴 안은 미로처럼 곳곳에 길이 나 있는 듯했다. 아마 각자의 수행처에서 이곳으로 이어지는 통로일 것이다. 길 옆 바닥에는 관이 연결되어 있어 온천수를 각자의 거처로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여기서 호칭은 모두가 으로 서로를 부릅니다. 그리고 님께서 사용하실 웅덩이는 저쪽입니다.”

오탁이 맨 아래쪽, 숲에 가려진 웅덩이를 가리켰다.

사용 시간은 일출 전과 일몰 후입니다.”

새벽과 밤에만 사용할 수 있다니, 낮에는 왜 사용이 금지될까?

사용 중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목례만 하고 말을 삼가 주세요.”

오탁은 다시 나를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곳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동굴 내부는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여기저기에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어쩌면 각 수행자의 거처에서 이 동굴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 옆 바닥으로는 길게 연결된 관들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온천수를 각 집으로 끌어들이는 장치일 것이다.

***************

잠시 후, 우리는 한층 넓은 공간에 도착했다.

여기는 음식을 만드는 곳입니다. 하지만 낮에는 불을 피우지 않습니다.”

그가 조용히 설명을 이어갔다.

연기가 나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낮에는 오직 숯불로 찻물을 끓이는 정도만 허용됩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쪽에는 주방시설과 각종 음식 재료들이 정돈되어 있었고, 맞은편 귀퉁이에는 커다란 항아리에서 물이 끊임없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계곡 위쪽 바위에서 솟아 나오는 용수(龍水)’라고 설명했다. 빗물이 모여 흐르는 계곡수가 아니라, 땅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자연 용천수라니, 이곳이 얼마나 신비한 장소인지 새삼 실감이 났다.

나는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좀 전에 본 온천수는 뜨거웠는데, 여기에서는 차가운 물이 솟아 나오네요.”

그렇습니다. 바로 그 점이 이곳의 특별한 점이지요.”

오탁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온천이 솟아나는 곳과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서 차가운 물이 솟는다는 것은 이곳이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는 걸 의미하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런 곳을 발견한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 깊은 산속에서, 수행자들이 모여 정진하고 있다니, 이들은 대체 어떤 인연으로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일까?

사람들이 정착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이 바로 물이다. 아무리 높은 산속이라 해도 물만 있다면 삶은 지속할 수 있다. 이곳, 계룡산(鷄龍山). ‘()’는 닭을 뜻하고, ‘()’은 용을 의미한다. 오행으로 보면 닭은 금(), 용은 목()의 기운을 지닌다. 우리 몸에서도 혈맥이 흐르듯, 이 산 역시 생명의 기운이 흘러가며, 이곳이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 아닐까. 심장 앞에는 여의주를 품은 형국인 계룡포주지형(鷄龍抱珠地形)’이 펼쳐져 있으니, 그야말로 명당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곳에서 수행한다면, 아마도 크나큰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여기에 모인 수행자들도 분명 보통 인연이 아닐 것이다. 아마 그들 역시 이곳과 깊은 전생의 인연이 있으리라. 문득 나도 분명 이곳과 어떤 연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린 시절 내 이름이 용갑(龍甲)’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언제나 용()과 관련된 인연이 많았던 것 같다. 내가 다닌 인하대학교 동물상징이 비룡(飛龍)’이었고, 대학원을 다닌 금강대학교 역시 용()을 상징으로 삼고 있었다. 출가한 사찰도 다름 아닌 황룡사(黃龍寺). 이렇게까지 용과 인연이 깊다면, 어쩌면 이곳과도 어떤 필연적인 연결고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오래전 청년 시절 꿨던 용꿈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