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란? 언어로 된 자연이다.
시(詩)란?
'나를 버리고 그러함(自然)이 되는 소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는 언어로 된 자연이다.
가장 완벽하게 자연을 닮은 글의 씨앗들이 문장 속에 심겨서 새 생명을 잉태해 내는 것이다.
즉 자연의 질서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의 본성을 깨달지 못하고 쓴 시는 개인의 식견을 나열하는 넋두리일 뿐이다. 그래서 시는 지식(識見)의 산물(學文)이 아니라 인간 지식의 경계를 허무는 깨달음(禪,道)의 결정체(本性)이다.
시는 나의 시가, 누구의 시가 아니라 객관화된 독립된 개체로 존재 되어야 한다.
일반적인 시란 언어의 능력을 잘 갖춘 자들 간의 사유(思惟)적 유희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
시가 객관화된 독립성이 없이 한 개인의 생각이나 넋두리를 나타내는 것은 주관적인 생각으로 포장된 언어의 유희일 뿐 시라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엘리어트도 "시는 개인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감추는 것이다"라고 했듯이 자신의 시를 객관화시키기 우해서는 나를 객관화 시켜야 한다.
즉 나의 알음아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식견을 내려놓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주관자가 아니라 대상이나 사물이 주관자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나아가 서로 교통하는 하나가 되는 깨달음에 이르면 그 때 시는 스스로 독립된 존재로 깨어 있게 된다.
나는 17음절로 절제된 표현과 날카롭고 절제된 표현으로 자연을 읽어 내고 있는 일본 하이쿠를 좋아한다.
특히 뱌쇼의 ‘오래된 연못에 개구리 한 마리 뛰어드는 물소리’이라는 하이쿠를 좋아한다.
오뉴월 한 낮의 고요한 적막 속에서 느닷없이 개구리가 연못에 풍덩! 뛰어드는 그 소리는 시공간을 한꺼번에 삼키는 우주의 블랙홀이다.
선사들이 ‘할!’을 하는 소리와도 같고 조주의 ‘無’ 몽둥이가 날아와 몸에 부딪치는 순간의 성성함처럼 깨어서 살아 있는 관음(觀音)이며 원음이다.
나도 이러한 말과 글을 좋아하다보니 언어가 갖는 설명이나 해석적인 문장에서 벗어난 시의 세계를 여행하게 되었다.
앞에서 설명 했듯 시는 자연의 소리 즉 법(法)의 본성을 선명하게 느끼고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가장 자연어(自然語)을 건축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시가 짧아지고 단순해 졌다.
나는 언어가 갖는 최소한의 표현, 단순한 의사 전달의 수단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진리를 느끼게 하고 싶은 것이
나의 시작(詩作)이다.
언어의 뿌리만 심는 것, 화려한 장식이나 옷으로 치장하지 않고 단순하며 순순한 언어의 씨앗을 심으려고 노력을 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자!
즉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야 한다는 말이다.
달을 보라고 손가락을 가리키는데 우리는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본다는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언어라면 달은 손가락을 벗어난 본질인데 우리는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에 집착하고 온갖 분별심을 낸다는 것이다.
언어가 그렇다.
언어로써 대상의 본질을 완벽하게 전달하려 하지만 할 수가 없다.
融대사(융)는" 눈먼 개가 우거진 띠 잎이 바람에 스치는 것을 보고 짓자 눈먼 소경은 도둑이라 외쳤으니 이는 소리 따라 헛갈리게 되었으니 진실로 눈으로 見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는 말처럼 지나친 언어를 자신의 알음알이로 판단하고 분별하여 언어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즉 언어는 언어 자체에는 모순이 없지만 그 언어를 자신의 알음알
리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이다.
언어는 전달하고자하는 대상이나 목적을 직접 만나게 하거나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2차적인 수단이지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입으로 불을 말하고 뜨겁다고 해서 입술이 뜨겁지 않고 말로 배가 부르다고 해서 실지 배가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것이 언어의 특성이면서 모순인 것이다.
부처님도 “언어의 본질은 욕구이다." 라고 경전에서 쓰고 있듯 언어라는 도구를 빌려서 지신의 생각인 욕망이나 탐욕을 나타내는 산물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러한 언어의 모순성을 극복하고 최대한의 살아있는 언어가 무엇일까?
언어가 갖는 시 공간적 계념을 벗어난 살아 있는 지금의 언어, 그것이 선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간화(看話) 즉 말을 본다는 화두(話頭)이며 말후구(末後句) 혹은 선문답(禪問答)이다.
선이란 우리 본성의 성품자리에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그 자리는 어떤 관념적인 생각이나 욕망(탐貪.진嗔.치痴)의 분별이나 설명을 떠난 자리를 말한다.
그래서 화두 참구란 말과 글 이전의 본래면목을 알아차리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의 가장 순수한 상태인 언어가 옷을 벗고 알몸으로 나투는 때, 혹은 언어가 어린아이같이 순진한 말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불성(佛性)이 있다고 알고 있는 어떤 스님이 조주라는 스님을 찾아가서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질문을 하니 ‘무(無)’라고 대답을 했다.
질문하는 사람이 없을 ‘無’라는 순수 말을 듣는 사람이 그대로 ‘無’라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뜻을 생각하면 그 때부터 분별망상이 시작된다. 왜 없을 無라고 하지, 분명히 개도 불성이 있다는데, 無.에는 또 다른 뜻이 있는가... 등등, 이것이 언어가 갖는 특성이다.
도가 무엇입니까? 주먹을 들어 보이고 .할! 고함을 치고 몽둥이로 때린다.
뜻을 알아차리면 환희로 눈물이 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웬 시끄럽게 고함을 치고 폭력을 하고 난리 부루스를 친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선어(禪語)에서는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을 쓴다.
즉 말과 글 이전의 뜻을 알아차리게 하는 1차적인 본질을 꿰뚫는 말이 선어(禪語)이며 그 다음이 시어(詩語)들이라고 본다.
나는 그러한 언어가 참 시이고 늘 성성하게 깨어 있는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시가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시(詩)라는 글자를 보면 말씀言자에 절寺자로 절에서 쓰는 말이라는 뜻이다.
즉 절에서 쓰는 말이 선시(禪詩)이듯 시가 그런 언어이전의 함축적인 진면목(眞面目)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수묵화에서 먹과 화선지가 갖는 여백의 미가 있듯 언어의 여백을 잘 살리는 것이 선시이다.
참 진리를 전달하는데 언어로서의 한계성을 앞에서 언급했지만
의사전달 수단이 말과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가 갖는 최소한의 기능을 빌려 쓰는 것이 시이며 화두이며 선문답이라 하겠다.
여러 선인들도 시는 왜 짧고 선명해야하느냐에 대해서 설명한 것을 잠시 들어다 보면,
첫째, 말이 많으면 중심이 흩어지기 쉽다. 노자는 "言者不知 知者不言" 이라 했다 즉 이야기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고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둘째, 말이란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자신의 편견이나 주관이 개입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논어에는 ‘교언영색은 인이 드물다.’ 라고 했다.
공자는 불학시무이언(不學詩無以言) 불학례무이입(不學禮無以立)이라 했다.
시(詩)를 배우지 않으면 남과 말을 할 수가 없고 예를 배우지 않으면 사람이 설 수가 없다.’고 했다.
셋째, 시는 최상의 하늘의 울림(자연의 소리)이기에 최소한의 인간의 영적 소리로 전달되어야 자연에 가깝다. 이(李)규(圭)보(報)<고려문호>가 쓴 (詩論中徵旨略言: 시의 깊은 뜻을 간추려 논함)에서 “대저 시는 뜻(意)이 중심이 된다. 뜻을 펼치는 것이 더 어렵고 말을 엮는 것은 그 다음이다. 즉 어떻게 쓸까보다 무엇을 쓸까가 먼저다. 뜻(意)은 기(氣)가 중심이며 기(氣)의 우열에 따라 시가 깊어지기도 하고 얕아 지기도 한다. 기(氣)는 하늘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배워서 얻을 수 없다”고 했다.
넷째, 시에는 아홉 가지의 마땅치 않는 체가 있다. 한유는 “사(詞)필(必)기(己)출(出): 반드시 자기목소리를 내며, 진(陳)언(言)지(之)무(務)거(去): 남이쓴 말을 쓰는 것을 꺼리라”했고,
두보는 4언절구인 율(律)로서 시를 완성했다. 또한 어(語)불(不)경(驚)인(人)사(死)불(不)휴(休): 말이 사람을 놀래 키지 못하면 죽어서도 그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다섯째, 시는 설명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나타냄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시인이며 찰학자인 CD루이스는“자연 그대로의 뜻을 풀어보고 받아들일 때 스스로 자생되어 울어 나오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상에서 보듯이 가장 훌륭한 시는 가장 자연스러운 언어(自然語)로 쓰여 진 시라고 본다.
자연스러움이란 조작이 없이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바람소리, 문살에 기대선 햇살 같은 것이다.
그러한 소리의 언어를 법음(法音) 혹은 원음(圓音)이라고 한다.
그 소리는 시시각각 모든 사람, 식물, 동물들 각각의 언어로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원융(圓融)하다고 한다.
시는 함축된 언어로 조탁(彫琢)한 인간 최고의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