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자상
금불상으로 보면 불상만 보이고 금이 없다.
그런데 자세히 금을 보면 불상은 없다.
손과 작용 중에 감춰진 것이 쌍차(雙遮)인데 쌍쌍(雙),
감출 차(遮)이 없다가 아니라 보지 못할 뿐이고,
쌍조(雙照)는 쌍쌍(雙), 비출 조(照))인 드러남인데
드러남 또한 드러난 것만 볼 뿐 감춰진 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이 둘은 동시에 있다고 해서
쌍차쌍조(雙遮雙照) 차조동시(遮照同時)라 한다.
둥근 달이 지구에 가려져 반달이 되어도 원래 달은 변함이 없다.
다만 감춰져 보이지 않을 뿐이다.
드러남은 상즉(相卽)이요 감춰짐은 상입(相入)이다.
감춰짐은 지(止)이고 드러남은 관(觀)이다.
감춰짐은 지혜(智慧)와 문수(文殊)요
드러남은 자비(慈悲)의 보현(普賢)이다.
감춰짐은 관세음(觀世音)이요
드러남은 대세지(大勢至)이다.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음(陰)과 양(陽), 세(世)와 상(上)이며
둘은 각각으로 드러나지만 둘은 동시에 존재한다.
즉 색과 공은 각각의 하나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
손의 예를 들면 손은 손바닥과 손등으로 되어 있다.
손바닥과 손등은 손바닥이 없이 손등은 있을 수 없고
손등이 없이는 손바닥이 있을 수 없다.
온 우주의 진리가 이처럼 드러남과 감춰짐은 각각으로
나타나지만 이 둘은 동시에 작용하는 중도인 것이다.
금과 불상을 불상으로 금으로 보지 않으면 둘을 동시에 본다.
공불이색 색불이공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설명하는 최고의 비유가 된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이해는 했지만
또 실체를 경험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면 실제로 깨어있는 중도 법의 진리를 체험해 보자.
불상을 가리키며
이것은 금입니까, 불상입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금이라고 하면 불상으로 볼 때는 맞지 않고 금으로 볼 때는 맞다.
불상이라고 하면 불상으로 볼 때는 맞지만 금으로 볼 때는 맞지 않는다.
불상이라 해도 맞고, 금이라 해도 맞다.
금이라 하면 틀리고 사자라 해도 틀린다.
금은 금이고 사자는 사자이다.
법계연기인 화엄의 사상을 이해하는 설명으로는 대부분 여기까지다.
하지만 완전한 답은 아직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라 해야 진짜 똑 떨어지는 답이 될까요?
엿장수가 가위질을 몇 번 할까요.
‘엿장수 맘대로 한다.’
엿은 달다는 것을 아는데 엿 맛을 모르는 소리다.
엿이 '맛있다. 맛없다 이거다 저거다' 분별하지 말고
일단 엿 먹어보면 안다고…….
엿장수 가위를 직접 들고 가위질을 해 봐라
그러면 답이 턱 나온다.
이것 저것 분별하지 말고 즉견여래로
직지인심 하여 바로 들이대야 한다.
금불상이 고정된 장식이라면 직접 가서 만지거나
작은 불상이라면 직접 들어 보이면 된다.
이것이 실제의 공불이색 색불이공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동시에 밝히는 참 진리이다.
오직 지금 여기서 나타나 있는 그대로의 전부가
불법의 진리인 연기작용의 중도 보리심이다.
우리가 보도 듣는 모든 것이 이처럼
전체를 보는 것이 깨어있는 알아차림이라고 한다.
손가락을 보면 달을 볼 수 없고 달을 보면 손가락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달도 손도 생각하지 않으면 둘 다 본다.
법계 연기작용을 설명한 내용
법장 스님과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와
금으로 만든 사자상을 가지고 대화한 내용을 살펴본다.
측천무후가 법장스님에게 화엄경 법문을 청해 들었다.
그런데 측천무후가 내용이 너무 어렵다고 하자,
법장스님이 궁 앞에 놓여있는 금사자상을 비유하여 설명을 한 내용이다.
“금(體)이란 본래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기술자가 교묘하게 가공하면
이것을 연(緣)으로 하여 금사자(用)의 모습을 띠게 됩니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법장 스님은 금이 본체이고 금사자의 형상은 현상이므로
금이 없으면 금사자도 없고 사자가 없다는 것은 금이 없다는 것과 같다.
금은 순도가 거의 환전하여 변하지 않는 불교의 진리인 연기법(法)에 비유한 것이며
연기작용(起)은 금을 가공한 기술자에 비유하고 금사자는 나타난 실상(色)에 비유한 것이다.
금은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광물질로 끊임없는 연기적 작용으로 오직 금이라는 성분은 변하지 않으나
금도 외형상으로는 한 순간도 변함없이 변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광물질 보다 순수한 성질로 여러가지 모양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금이라는 것을 비유와 방편으로 예를 드는 것이지 금 자체가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으로 인식하면 안된다.
즉 금이라는 것을 불성이라고 이해 한다면
불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연기 작용성에 나타난 결과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런데 불성도 금처럼 영원하게 있는 자성으로 착각한다면
이것은 자아(아트만)라는 생각과 다르지 않아서 참된 연기법의 진리가 되지 못한다.
연기사상 중에 업사상이나 유식사상 여래장 사상 등이 한계를 드러낸 것이
여기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