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4. 우리말 반야심경 - <본문> 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 5-4

통융 2022. 5. 15. 12:49

24. 우리말 반야심경 <본문>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참된 말씀(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5-4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대상이 있고 온갖 분별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왜 공()하다고 했을까?

 

그리고 이 공한 이치를 깨달으면 도() 일체고액(一切苦厄)'이라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물론 내가 공()하여 무아(無我)라면

내 생각을 기준하여 분별할 내가 없으니 당연히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공한 이치를 알아차릴까?

 

분별하는 마음만 내지 않고

늘 지금 일어나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면 된다고 설명한다.

 

대부분 '말은 쉽지만 실생활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라고 한다.

왜 그럴까요?

 

온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한 마음으로

알아차림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교학 적인 이론에 치우쳐 공부하고

머리로 이해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실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

화두 수행인 참선이다.

 

공한 이치가 무엇입니까? 질문하면

허공에 둥그런 원을 그렸다.

 

또 누가 공한 진리의 법은 무엇입니까?

질문하는 사람 옆구리를  새끼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알아차렸습니까?

이러한 질문이 실제 깨어있게 하고 또 직접 몸으로 알아차리게 한다.

 

만약 답을 알아차리면 공한 진리를

연기작용의 본성을 단밖에 깨달은 것이다. 

 

도대체 잘 모르겠습니다.

좀 더 쉽게 이해가 가게 설명해 주십시요.

 

바른 알아차림은 하기 위해서는

오지 '지금 여기서 일어나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면 된다.

 

그동안 수없이 반복해서 설명했지만

이해로는 절대 진리의 실체를 체험하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쉽게

늘 깨어서 알아차리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왜 허공에 둥그런 원하나가 공한 이치인지를

 

왜 공한 진리의 법이 뭐냐고 하는데

함께 잘 살자면 옆구리를 찔렀을까?

 

골똘히 참구하는 것, 의심하는 것,

이뭐꼬?

 

이것이 바른 알아차림으로

반복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밖에는 장사가 없다.

 

결과는 과정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고

인내하는 노력 없이는 절대 되지 않는다.

 

그 방법과 과정이 어떤 것이고

인욕하는 노력의 차이만 다를 뿐.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양한 수단과 방법이 있듯

법의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도 다양한  방편과 수단이 있다.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각자  다양한 

산행 코스를 택해 오직 스스로 올라야 하듯

 

수행도 스스로 행하는 과정과 

인욕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얻지 누가 대신해 줄 수가 없다.

 

부처님도 강을 건너는데  뗏목을 비유하여 설명하듯

수단과 방법은 한낱 진리에 도달하는 수행의 방편이며 수단이라고 했다.

 

각자 인연된 코스를 택해서 힘들고 어렵게 산행을 하듯

수행도 각 근기에 맞춤형인 교학적이며 점차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

 

혹자는 산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뭐 힘들게 걸어서 산행합니까?

 

헬기 타고 곧바로 정상에 오르면 되지요.

그것도 맞는 말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깨달음도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하면 되는 것이지...

 

선택은 각자의 인연된 몫이다.

이것을 선근(善根)이라고 한다.

 

전생에 닦은 인연법에 의해서 이생에

그런 덕을 얻을 수 있다. 

 

반야심경 핵심인 무아, 공의 세계를

이해하고 깨닫는 공부도 그렇다.

 

앞에서 몇 번 인가 헬기 타고 정상가는 방법과

다양한 산행 코스를 제시하고 설명을 했다.

 

만약 헬기 타고 가는 방법을 알아차렸다면

굳이 어려운 산행을 필요 없다.

 

그것을 이해 못 했다면 어쩔 수 없이

어렵고 힘든 코스를 택해서 계속 산행해야 한다.

 

선불교의 3조 승찬 스님은 신심명(信心銘)에서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오직 분별함을 꺼린다면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라고 했다.

 

오직 지금 일어난 대로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면

참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법화경>에서는 모든 존재는 여시(如是)하여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했다.

 

'모든 법은 지금 여기서 일어난 대로 있는 그대로

이와 같다'라는 뜻이다.

 

임제선사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했다.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그것이 모두 참 진리이다.  

 

꽃을 보면 꽃이 되고

종소리를 들으면 종소리가 된다.

 

보면 볼 뿐, 들으면 들을 뿐,

하면 할 뿐, 늘 이렇게 알아차리면 된다는데

 

이론은 간단하고 쉬운데 왜 잘 안 될까?

내가 알고 있다는 기존의 습관

 

즉 각자 만들어 놓은 마음의 틀이 문제다.

그 마음의 틀(5) 속에는 안다는 온갖 알음아리와

 

나라는 에고가 자존심이라는 경계를 만들고

그 경계(18)를 지키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싸우며

애쓰는 어리석은 마음들이 괴로움이다.

 

그 경계의 틀을 깨트리면 그 속에 갇혀 있던

나라는 에고가 허물어지고 전체가 된다.

 

그럴 때 나는 없다.

모든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나일 뿐이다.

 

부처님이 <대지도론>에서 '수레가 빗장ㆍ축ㆍ바퀴ㆍ바큇살 등이 화합하여

수레라 하지, 달리 수레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람도 그와 같아서 5이 화합하여 있지만

달리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즉 오온 전체가 나이듯 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주 전체가 되는 것이 무아(無我)의 본뜻이다.

 

들길에 핀 꽃 한 송이가 또 다른 나임을 자각하는 것이

오온이 공한 것을 아는 것이다.